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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위선의 신학, 기만의 목회 (2)    
  글쓴이 : 정강길 날 짜 : 07-05-11 03:47 조회(3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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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선의 신학, 기만의 목회 (2)

 
신학대 간의 괴리, 기독교 서적 출판 간의 괴리

감리교나 기장교단 같은 진보 기독진영은 신학현장과 목회현장의 이원화되는 괴리가 있다면 반면에 한국의 보수 기독진영은 신학현장과 목회현장이 대체로 이원화되어 있지 않다. 신학도 보수 근본주의 성향일 띠고 있으니 목회현장은 오죽하랴. 저들은 오히려 유기적인 관계로서의 충실함을 보여줄 따름이다.

보수 진영은 이미 신학교 시절부터 성서의 역사비평학이나 토착화신학, 민중해방신학 혹은 종교다원론 같은 신학사상들이 배움의 코스에서부터 거의 이단시된 채로 온전하게 고찰되지 못하고 배제되어 있는 신학 시스템이기에 그 심각한 병폐는 너무나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해야 하겠다.

보수 진영은 그 신학사상에 대한 고취부터가 제대로 못되어 있기 때문에 결국은 나타나는 행실로도 당연히 그러한 현상을 보이고 있다. 알 만한 사람은 이젠 다 알겠지만 고신/총신대에서 배우는 신학과 감신/한신대에서 배우는 기독교 신학은 서로 천지차이다. 이런 괴리는 기독교출판의 현실에서도 마찬가지다.

같은 기독교 서적이라도 규장 출판사에 나온 책과 한국신학연구소에서 나온 책 내용은 천지차이다. 두란노서원에서 나온 월간 「목회와 신학」과 대한기독교서회에서 나온 월간 「기독교사상」은 그 편집방향이 전혀 다르다. 본래 두란노서원의 월간『목회와 신학』이 대한기독교서회의 월간 『기독교 사상』의 진보적 성격에 대해 반대함으로서 창간된 것이다(『기독교 사상』400호 기념호 참조). 혹시 내 말이 거짓말 같다면 지금 당장 기독교 서점으로 달려가서 직접 확인해보길 바란다.

즉, 보수와 진보는 같은 하나님을 섬기며, 같은 성서를 사용하고, 같은 기독교를 섬긴다고는 얘기하지만, 실상 이 둘은 전혀 다른 하나님과 전혀 다른 성서해석과 전혀 다른 기독교를 믿고 있는 것이다. 물론 완전히 별개는 아니더라도 그 지향성만은 분명 다른 것이다. 대체로 보수교회는 비역사적인 개인 신앙과 현실정치에선 우파적 성격을 강하게 드러내는 반면에 진보적인 교회, 특히 좌파적 색조가 강한 교회일수록 사회투쟁적인 신앙을 지향한다.

어름한 중간, 그 이름 <중도>라는 진영

그렇다면 어름한 중간이 좋다고 보는가? 요즘은 <중도>라는 표현이 절찬리에 채택되고 있는데, 내가 보기엔 일관성 없는 종합은 그저 양자를 붙여놓는 식의 절충에 불과할 뿐이라고 본다. 일관성 있는 통합이 결여된 중도란 입맛에 따라 그저 회색분자로 놀기엔 딱 좋은 영역인 것이다.
 
특히 장신대의 경우를 예로 들어본다면, 자신들의 신학 커리큘럼은 보수와 진보 이것저것 골고루 배운다고 하면서 복음주의 입장을 표방한다고 한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여전히 부족하다고 생각되며, 사실 장신의 경우도 철저히 교리적 전통을 고수하면서 단지 부수적 성격으로서 이것저것 정도 훑고 지나갈 뿐이다. 그것은 온전한 종합도 되지 못할뿐더러 결국은 목회현장에 다시 들어가면 언제 그런 걸 배우기라도 했냐는 듯 보수 근본주의적인 내용들도 꽉꽉 채워지는 현실이 지배적인 것이다.

이러한 정황은 다음과 같이 말해볼 수도 있겠다. 만일 어떤 학교에 빨주노초파남보 다양한 색깔의 공이 있다고 하자. 그런데 그 학교를 조금만 벗어나면 빨간색의 공이 거의 90%를 형성하고 있는 현실도 엄연히 있다. 사람들 모아서 교회 크게 짓기에는 빨간 공이 정말 좋다는 것이다. 혹시라도 누군가가 파란 공을 집어 들고 목회를 할 경우 적어도 학교 안에선 괜찮을 진 몰라도 학교 밖에선 엄연히 왕따 당하는 현실이다.

나 역시 부산장신과 모교회 통합측 교회를 나왔으며, 지금도 나는 주변에 계신 통합측 목사님들로부터 직접 듣는 얘기들이지만, 통합측 교단도 살벌하여 행여 종교다원론 성격의 발언을 설교 강대상에서 했다고 알려지면 여전히 총회 차원에서 검증을 받기위해 소집되는 현실이 있다고 한다. 자칫 목사직 가운을 벗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래도 얼마 전에 누군가의 도움으로 장로회신학대 총장의 신학강연을 들을 수 있었는데, 거기에 매우 좋은 얘기가 나왔었다. 비록 그 신학강연 자체는 보수적이었지만, 그 총장의 얘기인 즉슨, "자기 신학의 입장이 보수적이든 진보적이든 뭐든 간에 일단은 자기가 믿고 배운대로 교회현장에서도 솔직하게 다른 사람에게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나 역시 전적으로 동의하는 얘기이며, 오히려 진보 진영일수록 귀담아 들어야 할 얘기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그래서인지 가난한 진보는 너무나 계산적이기도 하다.  

내가 보기에 한국교회 현실에서 기독교사상사에서도 면면히 이어져 왔던 다양성을 온전히 경험하고자 한다면 오히려 일반 교회 신자들도 잘 모르고 있는 사안들을 더 중점적으로 배우고 익히고 나눠야 더욱 온당하지 않을까 싶다. 어떤 점에서 목회란 신학의 대중화 작업이기도 하다. 바로 그래서 신학보다는 목회야말로 더 어렵다고 본다. 왜냐하면 신학을 제대로 소화해내야 목회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신앙을 두루뭉술한 추상적 표현이 아닌 가능한 구체적이고 명료하게

사실 한국에서 복음주의를 표방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일관성 없는 절충주의자들이 많다. 치밀하게 물어보면 아주 결정적인 지점에서는 애매모호한 추상적인 답변으로 끝맺는다. 전략적으로 취하는 입장이라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고 추상성을 해결책으로서 가지고 있는 사람들 말이다.

이것은 기독교인들 사이에선 어떤 사안이나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 결론이랍시고 강조하거나 제시되는 <하나마나한 표현들>이다. 기독교인이라면 흔히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들을 들어본 적이 많을 것으로 본다(『미래에서 온 기독교』pp.26-27. 부분 발췌).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  “우리는 ‘성경적’으로 살아야 한다.”  /  “성경은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 중심적으로 읽어야 한다.”  /  “성경이 나를 해석해야 한다.”  /  “성령의 이끌림에 의해서만 판단할 수 있다.”  /  “교회는 가장 복음적이어야 한다.”  /  “신본주의 중심이어야 한다.”  /  “하나님의 신비(or 은혜)로 나타난 것이다.”  /  “하나님의 영으로 덧입힘을 받아야 한다.” 등등 우리가 흔히 듣는 여러 추상적 표현들이 있다.

오늘날에도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이런 식으로 대화를 나누며 얘기한다. 물론 나는 이러한 얘기들이 지니고 있는 뜻을 거부하거나 부정하진 않는다. 내가 여기서 지적하고 싶은 바는 이런 추상적인 표현들이 지니고 있는 치명적이고도 비생산적인 무기력함이다. 왜냐하면 이런 얘기들은 결국 “가장 올바른 것을 추구함이 정답이다”라는 말과 하등 다를 바 없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즉, 그냥 하나마나 한 얘기일 뿐이다.

추상적인 언명일수록 많은 것들이 함축적으로 담겨져 있고, 너무 많은 것을 함축할수록 결국은 모호하게만 들릴 따름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우리에게 그러한 두루뭉술한 추상적 표현의 언명들은 가급적 지양하는 것이 좋다고 본다. 어차피 그러한 표현들은 알고 보면 별로 생산적인 게 전혀 못되는 피곤한 동의반복들에 지나지 않는다. 구체성이 결여된 이러한 결론의 도출은 우리 앞에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을 전혀 못풀고 있는 자기 한계만을 노출할 따름이다.

일반적으로 ‘하나님 사랑이시다’ 같은 추상명제들은 보수든 진보든 누구든 간에 많은 이들이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들이다. 이러한 명제만 놓고 볼 경우 서로 갈등을 하진 않는다. 첨예하게 서로 부딪히는 문제들은 이에 대한 더 구체적인 언명들 혹은 더 명료하게 파고드는 해석들 사이에서 자주 일어난다. 구체적으로 나아갈수록 그 의견들이 시끄럽게 분분해질 수 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나아갈수록 명료함을 획득한다.

“동정녀 탄생의 역사적 사실성 여부가 그렇게 중요한가?”

가급적 싸움이나 갈등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서로 무리 없이 동의할 수 있는 두루뭉술한 추상적인 명제들로서 결론짓기도 한다. 분명하게 부딪히는 지점에 대한 구체적이고도 직접적인 확답은 회피하고 대충 얼버무리거나 좀더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얘길 꺼내어서 마무리 지으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식의 태도는 다소 시간을 지연시키는 미봉책일 뿐이지 문제에 대한 직접적 해결은 결코 못된다.

이런 사례들은 보수측 신학교 안에서 좀더 진보적인 신학에 눈떴을 때, 혹은 진보적인 신학자가 보수적인 목회현장에서 자기 입장을 밝힐 때 주로 야기되는 사례에 해당된다. 이른바 자신의 밥통 때문에라도 그다지 명료하지 않게 나오는 것이다.

이를 테면, 예수의 동정녀 탄생을 역사적 사실로서 믿지 않는 신학자가 있더라도 그가 몸 담고 있는 학교가 보수적이기 때문에 결국 분명하고도 명료하게는 표현 못하고 그저 추상적인 두루뭉술한 언명으로서 끝을 맺곤 하는 경우다. 이런 정황에 있는 신학교수나 목사들이 곧잘 내뱉는 얘기는 “동정녀 탄생의 역사적 사실성 여부가 그렇게 중요한가? 그것이 우리에게 주고 있는 신학적 의미가 더 중요한 것이 아닌가?” 라고 말한다.

물론 틀린 얘기는 아니다. 그러나 한국의 대다수 일반 신자들은 전자를 더 중요시하고 있는 실정이다. 역사적 사실성 여부가 핵심이고 이것이 부정되면 신학적 의미고 뭐고 간에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교인들인 것이다. 요나서가 문학서라고 얘기하면 신앙이 깨어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도 이에 대한 대체적인 답변들을 보면, 역사적 사실성 여부의 질문에는 답변 회피나 혹은 모호함으로 맺고, 신학적 의미에 대해서는 줄줄 답변을 해댄다. 따라서 전자의 문제는 여전히 모호하게 남겨져 있기에 그것의 문제들은 언제든지 다시금 터져 나올 수 있다. 하긴 솔직 당당한 신앙이고 뭐고 간에 자기 밥통이 걸려 있다고 하는데 뭐라고 탓할 것인가. 그렇기에 이들은 ‘약간만 비겁하면 인생이 행복해진다’라는 격언을 아주 잘도 실천하는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겠다.
 

자기 밥통만 온전할 수 있다면 종교교육은 대충 좋게좋게 가르치는 게 낫다(?)

내가 아는 분 중에는, 신학대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예수의 믿음>과 <예수에 관한 믿음>을 구분해야 한다고 말해서 큰 홍역을 치룬 교수가 있다고 들었다. 자칫 징계 먹을 뻔 했다는 것이다. 결국 신학적 신념이고 학자적 양심이고 간에 우선은 자기 직장부터 짤리면 안되는 알짤 없는 현실을 받아들여야만 하는지. 아니면 배움의 길에 있는 커가는 영혼들이 더 중요한 것인지. 정말이지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부디 신념대로 했으면 한다.

얼마 전에 선교신학을 함께 배우던 중, 나 자신이 그 교수님에게 “교수님, 불교 같은 이웃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라고 단도직입적으로 여쭤봤다. 바로 직전에 불교를 공부하고 불교영화에 가까운 김기덕 감독의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를 시청했기 때문에 조금 열린 분위기라 생각해서 질문을 했었던 점도 있다.

게다가 그 분도 내가 알기엔 조금은 진보적인 성향으로 알고 있었는데, 그 분 답변은 의외로 “나는 대답할 수 없다”란다. ‘구원’이란 개념부터가 기독교와 불교가 다르기 때문에 그것을 어떻게 얘기할 수 있느냐라는 것이다. 정말 애초부터 답할 수 없는 문제이자 그것이 완전한 별개인 것이라면, 이웃종교에 대한 공부는 그 종교를 기독교로 정복하기 위한 것 외에는 어차피 하나마나 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나는 질문을 조금 달리해서 “그렇다면 ‘예수천당 불신지옥’은 타당하다고 생각하시나요?”라고 여쭈니까 “결코 그렇지 않다”고 답변하셨다. 그런데 재밌게도 그 수업에 보수적인 교회를 다니는 분이 계신대, 그 답변에 대해 마음이 불편하셨는지 이의를 제기하셨다.

“오늘날 한국교회 대부분이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는 신앙적 신념을 가지고 있는데, 단지 그것을 너무 강요하는 행태 때문에 그런 것일 뿐이지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는 내용 자체는 옳은 것 아니냐?”라고 이의를 제기하자, 그 교수는 다시금 “그렇다. ‘예수천당 불신지옥’ 내용 자체는 옳다. 단지 방법적으로는 아니다”라고 다시 애매한 답변을 하였다.

사실 내가 여쭌 것도 애초 내용에 대한 물음이었지, 무슨 방법의 타당성을 물은 게 아니었다. 이런 식의 애매모호한 답변들은 여전히 문제해결이 못된다. 왜 일관성 있는 태도를 깔끔하게 보여주질 않는지 말이다. 그러는 가운데 오히려 일반 교회 신자들만 여전히 더욱 혼란스럽게만 만들 따름이다.

그래서 나는 “그러면 불신지옥이니까 예수를 믿지 않으면 어차피 지옥에 간다고 보는 것 아니냐?”라고 다시 되묻자 매우 곤란해 하는 표정을 지으셨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 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인생이란 게 원래 다 분명치 않은데, 세상에 모든 깔끔한 해답이 어디 있겠어”라고 말이다. 물론 누가 모르나. 하지만 가능한 최선으로선 깔끔하게 나가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지 않다면 아예 처음부터 모르겠다고 시인하는 게 나을 듯.

사실상 차이 혹은 다름을 긍정하라는 말로는 부족하다. 그것은 어차피 기본적 자세다. 서로의 차이에서 나오는 충돌 지점, 바로 그 부분에 대한 진지한 대화와 고찰이 필요한 것이다. 신앙의 성장은 나와 세계가 함께 감에 있어 맞닥뜨리게 되는 그 모순과 충돌들을 내가 어떻게 대할 것인가의 문제에서 형성된다.

그렇기 때문에 만일 보수적인 신학자가 자기가 배운 대로 솔직하게 가르친다면 그것은 그 학문의 한계일 것이다. 따라서 그 사람을 탓할 필요는 전혀 없다. 적어도 그 사람은 위선의 신학을 하는 게 아닐 것이다. 하지만 진보적인 신학자라고 해도 자기 밥통 때문에 학생들에게 교회신자들에게 솔직하게 가르치지 않고 애매모호하게 나온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분명한 잘못이라고 생각된다. 자기 밥통만 온전하다면 종교교육은 대충 해놔도 괜찮다는 것인가?

교회 공동체의 목회자는 필연적으로 자각인이어야

오늘날 기독교계의 목회자들은 대체로 자각인이라기보다 그저 때 묻은 일반인의 모습들을 더 많이 보여주고 있다. 최소한 자각인이 아닌 자가 교회 일을 본다는 것은 타락 중에서도 너무나도 생지저분한 타락이다.

참고로 세상에서 가장 먼저 깨어있어야 할 사람이 바로 대중적 영향을 끼치는 직업종사자들이다. 여기에는 대표적으로 교육 종사자와 정치가 그리고 언론종사자들을 들 수 있다. 그 사회의 타락의 척도는 바로 이들의 타락에 가장 많은 영향을 입고 있다. 하물며 교육 가운데서 종교교육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교육임은 말할 것도 없다.

왜 그런가? 종교는 바로 실천이성이 아닌 사변이성과 관련된, 즉 궁극에 관한 가르침을 신앙으로서 받아들이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종교(宗敎)는 기술 같은 실용적 가르침이 아니다. 인간의 근원적 본성과 한계를 자각하고 이를 초극하려는 자세를 그 어떤 진리나 절대자로 표현되는 상징들을 통해 내 몸에 습득하는 것이 바로 종교인 것이다. 종교(宗敎)는 바로 세계 안에서 삶을 최고로 탁월하게 변화시키는 의미 있는 가르침이다.

그렇기에 종교교육은 모든 교육 중에서도 가장 올바른 교육이어야 하며, 종교는 그 사회가 추구하고자 하는 바의 궁극적 답변을 줄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방만해져만 가는 한국교회는 우리 사회의 답변 노릇을 전혀 못하고 있는 게 지금의 현실이다.

그렇다면 그 목회자가 자각인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어찌보면 이것은 답하기 어려운 질문일 수 있지만, 목회자를 중심한 그 교회가 어떤 신앙적 색깔을 띠고 있는지를 살피면서 우리는 조심스럽게 판단을 내릴 줄도 알아야 한다.

단순히 설교를 잘한다, 교회가 크다, 교인수가 많다 등등 이러한 점에 협소하게 시각을 두지 말고 여러 가지 사회적 정황과 관련하여 그 목회자가 빚어내는 삶의 열매들로써 판단하길 바랄 뿐이다. 참다운 목회자가 참다운 교회를 만들어 갈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목회자감을 요구함에 있어서 좀더 엄격해질 필요가 있다고 본다.

분명히 말하지만 일반인이 목회를 할 경우 이는 참으로 위험천만한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자신의 미성숙함으로 인해 자기 혼자 타락하면 됐지 괜히 다른 사람들까지 끌고 들어와 물들게 하지 말라는 것이다. 제발 그러려면 차라리 혼자 연자 맷돌을 목에 걸고 바다에나 떨어져라!

빵과 진리 사이에서, 기만의 목회는 이제 그만!

내가 이렇게 얘기하는 것은 실질적으로 많은 수의 목회자들이 <교인수> 때문에 결국은 기존의 체제에 안일하게 젖어가는 것을 너무나도 많이 봐왔기 때문이다. 젊었을 때 신학현장에서의 그 순수한 열정과 신학적 고민은 어디론가 다 빠지고 결국은 완고한 보수교회라는 케케묵은 체제 유지에 더 목을 매고 있는 현상을 나는 한두 번 본 것이 아니다.

신학생 시절 목회실습 때부터 체제순응을 익혔다면 그 신학생이 학교를 졸업하여 목회 일을 직접 맡아서 시작할 때쯤에는 자신의 전체 장래를 계산해 본 뒤일 것이며, 그때는 이미 막 결혼한 시점이거나 늦어도 결혼하여 가정을 꾸려나갈 때쯤일 것이다. 그렇기에 전임전도사를 맡을 때쯤에는 이미 목회란 것은 얼반 나의 밥줄이 되어버린 상태다. 그때는 이미 목회를 그만두고 다른 직종으로 다시 시작해보기엔 너무 늦은 나이라고 생각해버린다는 얘기다.

빵과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바꿀 수 없다. 여기서 빵을 더 찾는다는 것은 결국 생존의 안일함에 젖을 수 있는 체제유지를 위한 일련의 노력들을 의미할 것이다. 자기가 지금 넓은 문으로 들어가고 있는 건지,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 있는 건지, 전혀 파악치 못하고 있다면 문제가 있지 않은가.

그렇기 때문에 잘못 습득된 종교교육이라는 게 참으로 무서운 것이며, 질긴 악순환의 고리를 가질 수밖에 없다고 하겠다. <호의호식>하는 목사일수록 경계하라! 모든 것은 너희가 정녕 주님의 삶을 따르려 하느냐 그렇게 살지 않느냐의 기준에서 그 목회자에 대한 조심스러운 판단이 내려져야 할 것이다.

이젠 악순환의 병폐를 끊자!

현재의 한국교회는 고질적인 악순환의 병폐를 지니고 있다. 오늘날의 목회현실은 장님이 장님을 인도하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다.

기성교회 대부분의 목회자들도 처음에는 성장기 때의 신앙체험을 통한 순진한 소명의식의 발로에서 신학교에 들어갔을 것이고, ―여기에는 기독교적 가정환경도 크게 작용했었을 것이다― 그럼으로써 결국 목회현장에 종사한 사람들이 많았을 것으로 본다. 물론 그 체험자체는 순수할 수 있다. 또한 그것은 순수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에 치명적으로 나타나는 물량주의 지향과 경직된 교권주의와 배타주의 현상은 어떻게 볼 것인가?

이것은 순수한 종교적 체험조차도 충분히 퇴행할 수 있을뿐더러 그것은 인간생활의 보편적 범주에 속하는 현상에 불과하다는 얘기이자 그러한 순수함이 놓여지는 자리 또한 결국은 기존 기독교 체제 안에 순응적으로 놓여짐으로 인해, 오히려 적응되지 말아야 할 곳에서 적응되고, 올바로 배워야 할 것을 왜곡되게 배움으로서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점들은 소박한 소명감이라는 것도 그저 <순진함>에 해당할 뿐임을 여실히 증명할 따름이다.

우리는 목회라는 일이 자신의 생각이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사회적 실천으로 드러나는 부분이기 때문에 내면의 각고한 성찰이 없이는 그 모든 게 허사가 됨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새롭고 건강한 기독교를 위하여

살자! 살아야 한다. 우리 모두 공생해야 한다. 21세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바로 이를 위해서 판을 다시 짜야 한다. 썩어서 고름 냄새가 진동하는 케케묵은 기독교 교리들을 우리는 뒤엎어야 한다. 사실여부 문제에만 집착하고 성서문자를 절대시하는 축자영감설에 빠진 성서를 집중 공략해야 한다. 그러한 성서는 우상이요 오히려 사탄의 바이블일 뿐이다.

골빈 목회자들만 재생산하는 신학교의 커리큘럼들을 들춰내고 그것들의 무기력하고도 폐쇄적인 신학적 빈곤들을 낱낱이 폭로해야 한다. 목회가 무슨 동네강아지 밥 주는 일도 아닐진대 순진한 사명감만 가지고 목회에 덤비는 일이 있도록 해선 안 된다. 교회는 다시 세워져야 한다. 자신이 속한 기독교와 세상을 바로 볼 줄 아는 깨어있는 자가 교회를 적극적으로 맡도록 지원해야 한다.

교인수에 열중하고 교권에만 탐닉하는 목사의 지팡이를 보거든 그 즉시 뺏어야 한다. 저 하나 지옥 가는 게 아니라 그 밑의 많은 사람들까지도 끌어들여 미혹케 할 뿐이다. 우리 대장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체제를 향해 격노하며 한 판 뒤엎었듯이 다시 한 번 대대적으로 기존 기독교 판을 뒤엎어야 한다. 주께선 그러다가 결국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 우리도 역시 그렇게 하다가 죽는다면 그게 순교 아니고 뭐겠는가.

힘의 싸움에 있어서도 동요함 없이 진리 안에서 연대하여 가능한 서로 힘을 합쳐야 한다. 이웃종교뿐만 아니라 기독교 진영 밖의 깨어있는 자들과의 연대와 대화도 그럴 때에 더욱 유익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 어떻든 그렇게 해야 사람이 제대로 살 수 있잖은가. 어떻든 그렇게 해야 우리 사회가 제대로 굴러갈 수 있잖은가. 어떻든 그렇게 해야 세계 열방에 제대로 된 희망의 빛을 던져줄 수 있잖은가.

지금도 자행되고 있는 위선의 신학과 기만의 목회가 얼마나 많은 영혼들을 알게 모르게 죽이고 있는가. 그렇기에 21세기 새롭고 건강한 기독교가 왜 필요한가에 대한 대답은 너무나도 자명하고 단순하다. 그것은 바로 참되게 살아남기 위해서다. 그러니 이젠 제발 좀 살자!

예수께서 그들에게 또 비유 하나를 말씀하셨다.
"눈먼 사람이 눈먼 사람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  -누가 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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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 기독교에서 얘기하는 병치유 귀신쫓음을 어떻게 볼 것인가? (1) 미선 451 06-10
177 몸에 모시는 하나님 (탈유무신론의 신앙) 미선 365 06-09
176 초자연주의>에서 <자연주의>로 가야 기독교가 산다! 미선 397 06-07
175 과학의 진화론에 대한 기독교의 창조론 입장들 미선 394 05-30
174 신학이 아닌 몸학에 기반하는 <몸학 기독교>로! 미선 375 02-10
173 신의 영어 표기 God ----> Gio 로 바뀌어야 미선 350 02-07
172 약자에 대한 눈뜸 - 잠자와 깬자의 차이 미선 389 12-08
171 <초자연주의>를 인정하면 나타나는 문제들.. 미선 305 11-04
170 [어떤 진리관] 진리(眞理)와 진리(進步)의 차이 그리고 퇴리(退理) 미선 276 07-05
169 시작이 있는 우주인가? 시작도 끝도 없는 우주인가? 미선 279 06-18
168 <종교 위의 종교>에 대해.. 미선 288 05-04
167 초자연주의와 자연과학 그리고 신비주의 구분 미선 292 04-06
166 지적설계론(창조론)자들과 유물론적 과학자들 간의 공통점 미선 276 12-10
165 종교 신앙의 반지성에 대한 단기적 대안 (1) 미선 283 11-24
164 "몰락이냐 도약이냐" 21세기 종교 진화의 방향 (종교학회 발표) 미선 269 09-10
163 '나(I)는 누구인가?'라는 근원적인 물음에 답하려면.. (1) 미선 303 04-13
162 유신론-무신론을 넘어서 <탈신론>으로 미선 447 05-04
161 <초자연주의>를 버려야 기독교가 산다! 미선 402 02-04
160 몸학 기독교 & 몸학 사회주의 추구 미선 319 12-31
159 <자유>에 대한 짧은 생각.. (2) 미선 383 08-24
158 몸학 기독교에선 기독교 신학이 굳이 필요하지 않은 이유 미선 442 03-24
157 인간 무의식의 두 가지 상태와 보다 상향적인 의식 발달을 위하여 미선 364 03-03
156 (1998년 원글) "화이트헤드 철학에서 본 민중신학 비판과 대안적 모색" (2) 미선 320 02-18
155 종교(宗敎, Religion)에 대한 동서양의 어원적 의미와 전후 혼동 오류 미선 318 02-06
154 기존 기독교와 <몸 기독교>의 분명한 차이들 미선 347 01-21
153 GIO명상 방법 12단계 (몸기독교가 제안하는 수행 방법 중 하나..) (5) 미선 554 01-16
152 2013년 계획.. 몸 기독교 (4) 미선 457 01-02
151 민중신학 40년.. (20년전 안병무 기사를 보며..) 미선 288 12-25
150 진보정치 교육의 사각지대와 민중 역사 주체론에 대한 반성과 재고찰 미선 275 12-22
149 교회에 대한 권력비판? 교리비판? 어느 것이 더 유효할까? (4) 미선 452 12-06
148 왜 예수인가 (필독 원함!) (13) 미선 1538 11-04
147 새로운 기독교의 방향과 몸학의 종교관 (2) 미선 314 10-05
146 새로운 기독교의 방향과 몸학의 종교관 (1) 미선 342 08-17
145 기독교 교리의 문제는 기독교만의 문제가 아니다! (3) 미선 402 06-11
144 초대교회와 바울에 대해... 미선 447 04-28
143 '작은 교회'가 정말 대안인가? 핵심은 교리다! 미선 375 04-22
142 진선미의 기원과 예수사건 (1) 미선이 353 02-24
141 중간 복음주의 신학자 알리스터 맥그리스의 <과학신학> 비판 (13) 미선이 362 12-13
140 끔찍한 <몸의 신학>에 속지 마시길! (유사품 주의) (8) 미선이 422 11-15
139 종교운동과 사회운동을 구분 못하는 오류-기존 진보 기독교 비판 (1) (2) 미선이 525 10-14
138 여전히 예수얼굴에 똥칠하는 개신교 정치세력들 (5) 미선이 410 08-30
137 새로운 기독교 역사의 국내 선구자들 : 유영모, 함석헌, 김재준 미선이 382 06-26
136 조용기 목사의 할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미선이 401 05-14
135 몸학과 새로운 기독교 운동 그리고 30년 후의 기독교 미선이 529 04-11
134 <인간의 자유의지>라는 착각과 환상에 관한 문제 (14) 미선이 692 03-04
133 기존 진보 기독교인들의 <생명평화> 담론에 반대한다! (업그레이드판) (8) 미선이 625 02-17
132 기존 진보 기독교계의 ‘생명평화' 담론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미선이 286 02-10
131 영혼구원의 강조에서 <총체적인 생명구원의 강조>로 (4) 미선이 338 02-05
130 성서문자주의 또는 성서무오설 신앙보다 더 뿌리 깊은 고질병은? (9) 미선이 798 02-02
129 죄의식의 종교에서 <이웃과 함께 성찰하는 종교>로 미선이 337 02-01
128 수직적 구조의 교회에서 <수평적 구조의 교회>로 (2) 미선이 429 01-21
127 서구식 목회문화가 아닌 <우리식 목회문화>로 미선이 375 01-21
126 과정신학에 대한 비판과 민중신학의 신 이해 접맥 미선이 595 01-13
125 ★ 예언 (1) 미선이 675 12-24
124 ♣ 새로운 기독교 신학의 인간론 (4) 미선이 499 12-19
123 ♣ 새로운 기독교 신학의 인간론 (3) (4) 미선이 593 12-12
122 ♣ 새로운 기독교 신학의 인간론 (2) (10) 미선이 793 12-05
121 새로운 기독교의 시간관, 태초와 종말로서의 시간관을 거부한다! (4) 미선이 644 12-01
120 ♣ 새로운 기독교 신학의 인간론 (1) 미선이 788 11-30
119 [예수운동 예배 견본] 새로운 기독교의 <예수운동 예배>를 위하여 미선이 849 11-28
118 숭배하는 예배에서 <닮으려는 예배>로 (1) 미선이 784 11-19
117 거꾸로 흘렀던 감리교 역사, 바로 세우기엔 아직 멀었나 미선이 673 11-10
116 <새로운 기독교>를 소개하는 전체 안내 링크글 (계속 업데이트 예정) 관리자 2200 11-03
115 [논평] 봉은사 땅밟기 추태, 성경 '문자주의' 그 야만의 역사 넘어서야 (1) 관리자 832 10-29
114 기존의 진보 기독교와 새로운 기독교 운동 (1) 미선이 665 10-22
113 1세대 민중신학자 안병무의 미완의 작업과 기존 민중신학의 과제 미선이 646 10-19
112 [새기운 성명] 4대강 사업 관련, 문정현 신부의 정진석 추기경 비판을 지지한다 관리자 620 10-19
111 스퐁, "스티븐 호킹과 유신론/인격신의 죽음" (작은불꽃님 역) 관리자 898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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