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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① '무조건 믿어라'의 기독교에서 <깨달음의 기독교>로 (2)    
  글쓴이 : 정강길 날 짜 : 06-06-14 08:50 조회(2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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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환기의 한국 기독교, 바뀌어야 산다! (4)
① '무조건 믿어라'의 기독교에서 <깨달음의 기독교>로 (2)
 

정강길 minjung21@paran.com


 
 
1. 21세기 기독교와 한국 기독교의 위기
2. 21세기 기독교 변혁을 위한 12가지 패러다임 대전환
   ※ 관념적 이원론에서 <현실적 관계론>으로
   ① '무조건 믿어라'의 기독교에서 <깨달음의 기독교>로
   ② 이웃종교에 배타적인 기독교에서 <열린 기독교>로
   ③ 가부장적 기독교에서 <모성애적 기독교>로
   ④ 초월신론에서 <범재신론>으로
   ⑤ 교리적 예수에서 <역사적 예수>로
   ⑥ 문자적 성서해석에서 <사건적 성서해석>으로
   ⑦ 숭배하는 예배에서 <닮으려는 예배>로
   ⑧ 서구식 목회문화가 아닌 <한국식 목회문화>로
   ⑨ 수직적 구조의 교회에서 <수평적 구조의 교회>로
   ⑩ 죄의식의 종교에서 <이웃과 함께 성찰하는 종교>로
   ⑪ 영혼구원의 강조에서 <총체적인 인간구원의 강조>로
   ⑫ 저 세상이 아닌 <이 땅에서의 하나님 나라 운동>으로
3. 오늘날의 선교 대상은 기독교 그 자신부터
4. 나오며

 
<깨달음의 기독교>는 앞서 말했듯이 세계 안의 건강한 합리적 일반성이 주는 도전을 피해가거나 도외시하지 않는다. 기존 기독교가 무조건 믿으라고 얘기하는 것은 신앙을 빙자한 도피일 뿐이다. 위기는 곧 기회이듯 오히려 정면으로 마주하면서 진지한 성찰을 지향한다. 그렇다면 깨달음의 기독교가 말하는 그 깨달음이란 도대체 어떤 것인지를 알아보자.

깨달음은 그 자신에게 개입되는 가장 미시적 구원사건

물론 그 깨달음이란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뜻에 대한 자각'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여기서 먼저 얘기할 점은 그러한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 할 때, 그것은 저 혼자서 독립적으로 펼쳐지거나 역사하진 않는다는 사실이다. 일찍이 한국의 1세대 민중신학자 안병무는 그 자신의 저서에서 이에 대해 매우 예리한 통찰을 한 바 있다.

"'하나님의 뜻'은 홀로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상황'과 '인간의 결단'과 더불어 이루어진다" (『역사와 해석』대한기독교출판사, 1979, p.79. 참조)

이것이 왜 중요한고 하니 바로 나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깨달음> 곧 자각이라는 사건의 내적 구조를 부지불식간에 암시하고 있는 언명이기 때문이다. 깨달음은 그 자신에게 개입되는 최초의 하나님의 구원사건이자 해방사건이다. 즉 죄로 인해 분열과 부조화에 놓여있고 내적 일그러짐을 가지고 살아가는 보편적 일반인이 하나님나라를 소망하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자각인으로 거듭날 때 발생되는 최초의 사태를 일컫는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깨달음은 세계 안에 참다운 진보가 발현되는 시작의 지점이 되며, 그것은 순간에 발생하는 하나님나라를 위한 영구적 혁명의 가장 미시적 해방사건이 되는 것이다. 그러한 '깨달음'이라는 사건의 내적 구조는 다음과 같다.

신의 주체적 지향(혹은 하나님 나라)+현실 세계(혹은 나의 이웃인 고통 받는 타자)+주체자의 합리적 응답(참여적 결단)='깨달음'이라는 사건

이것은 나의 의식 중추에서 '찰나'와도 같은 순간에 번쩍 일어나는 사건이다. 이 세 가지 요소가 모두 하나로 어우러질 때 '깨달음'이라는 미시적 해방(구원)사건이 생성된다. 깨달음은 이 세 가지 중 어느 하나라도 도외시되지 않는다. 여기서 신의 주체적 지향이란 하나님이 이 세계를 통해 궁극적으로 이루시고자 하는 궁극적 목적을 의미한다. 그것은 곧 2천 년 전 이 땅에 오신 역사적 예수가 설파했던 '하나님나라'에 다름 아니다.

가난한 자가 위로받고, 슬퍼하는 자가 애통하지 않는 그 나라, 사막에 샘이 넘쳐흐르고 사자와 어린 양이 함께 뛰노는 그 나라, 다시 말해 모든 생명과 존재가 하나님의 뜻을 지향함으로서 회복되고 조화롭게 사는 온전한 구원과 해방의 나라가 바로 하나님나라다. 이는 결코 내세적 의미의 천당 개념이 아니며, 그곳이 현세이든 내세이든 간에 하나님 말씀 곧 하나님의 법도가 통치하는 그 나라가 바로 하나님께서 이 세계를 통해 성취하고자 하시는 목적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왕국, 이것이 바로 신의 주체적 지향이다.

그런데 내가 발 딛고 있는 이 땅의 현실 세계는 어떠한가. 당연히 그같은 하나님나라와는 어긋난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세계에 속한다. 그래서 주께선, 하나님나라는 이 나라에 속해 있지 않다고 하신 것이다. 하지만 '그 나라'는 '이 나라'에 있어선 가장 기쁜 소식, 곧 '복음'이 된다. 왜냐하면 '그 나라'는 '이 나라'의 구원이기 때문이다. 세계는 결코 그 자신만으로 구원받을 길이 없으며, 세계의 불완전함을 극복할 수 있는 완전성의 그 근거를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보장받을 뿐이다.

하나님나라의 침투는 사실상 신의 은총에 해당한다. 하지만 하나님나라의 침투 자체가 깨달음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이를 거부할 수 있는 자유 역시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 '악'(evil)이란 의미는 쉽게 말해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을 뜻한다. 따라서 깨달음이란 사태는 그러한 하나님의 뜻이 현실 세계에 속한 나 자신 안에서 자율적으로 수용하겠다는 그 결단의 지점까지 포함한 개념으로서 인지할 때 가장 정확하다고 하겠다.

   
깨달음의 가장 첫 발현은 회개

'나'라는 존재는 내가 살아가는 현실 세계와 동떨어진 그러한 존재가 아닐 것이다. 따라서 '나'라는 존재는 어디까지나 그냥 '나'가 아닌 '현실 세계에서의 나'이며, 이것은 여전히 부조리한 현실 세계와 관계된다. 모든 존재는 기본적으로 분열과 부조화에 놓여 있기에 '죄'라는 사태에서 벗어나진 못한다. 반면 하나님나라에 속한 존재의 자아는 완성된 나라에서의 완성된 인격이기에 그것은 그리스도적 실존의 차원이라 볼 수 있다.

이때 깨달음이란 사건은 바로 저 두 차원이 나의 의식 중추에서 비교(contrast)의 느낌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이 느낌은 과거의 익숙했던 삶과는 또 다른 상향적 차원에 대한 '대비의 느낌'이다. 하나님나라에 속한 존재는 그리스도적 실존을 가지고 살아간다고 한다면, 부조리한 현실 세계의 존재는 분열과 부조화에 놓여 있는 실존에 속한다.

그럴 경우 만일 깨달음의 사건이 발생된다고 할 경우 그 존재에게 가장 먼저 무엇으로서 드러나는가? 그것은 곧 '회개'다. 왜냐하면 '나'라는 존재는 부조리한 현실 세계에 속하고 있기 때문에 모든 존재가 조화롭게 회복되는 하나님의 이상이 내게 침투한다고 할 때 서로 다른 대비적 느낌이 새로운 선택을 추동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물론 이 비교적 느낌은 앞서 말한 '그 나라'와 '이 세계'에 대한 대비다. 요컨대, 하나님나라는 현재의 불완전한 세계에 대해 우리가 안심하고 반추할 수 있는 영속적 거울인 것이다.

이때 나라는 존재가 이 세계에 속해 있다면, 비교의 느낌은 당연히 그러한 자들에게는 이 세계와는 다른, 더욱 차원 높은 고원한 이상으로의 선택을 유도하도록 추동한다는 점이다. 깨달음이란 과거의 구습에 젖어 있는 불완전한 인간성에 대한 새로운 미래를 전망케 하는 완전한 신성(神性)의 침투다. 바로 여기서부터 보편적 '일반인'은 '자각인'으로, 그의 '인간성'은 '영성'으로 돌입된다.

(의식중추에 개입되는) 신적 이상의 침투 → 대비의 느낌 → 새로운 선택 추동 → 회개 → 새로운 삶의 시작 → 하나님 나라의 확장 작업(곧, 나 자신의 변혁을 포함한 현실 세계를 점점 하나님 나라로 확장시키는 삶을 의미한다)
 
이로써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느니라"(마가 1장15절)라는 역사적 예수의 말씀은 더욱 명확해진다.

깨달음은 구원의 시작일 뿐

그렇다면 이를 더욱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이 깨달음(자각)은 이제 겨우 시작이다. 자각은 그 씨앗이며, 그 최종적 종착지는 그리스도다. 그 첫 깨달음의 순간 이후부터 자각인에게는 종착역인 '그리스도'로 향하기 위한 그 자신의 부단한 노력이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그럴 경우 깨달음을 통찰한 자각인의 인간성은 바로 영성의 진폭에 해당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자각인에게는 언제나 영성수련이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다(나 자신이 보는 '영성' 개념에 대한 구체적 이해와 '영성수련'에 대해서는『화이트헤드와 새로운 민중신학』(한국기독교연구소)에서 제11장 영성론 참조).

깨닫지 못한 일반인이 자각인으로 들어서는 순간은 찰나이며, 이는 보편적 민중이 하나님의 영으로 덧입힘을 받는 순간이다. 보편적 일반인이 추구하는 행복은 자신을 중심으로 한 가치이지만, 자각인이 추구하는 행복은 자신을 넘어선 타자를 위한 가치이며 타자를 위한 가치를 곧 자신을 위한 가치로 전환할 줄 아는 이들이다.

깨닫지 못한 자들의 중심에는 '불완전성으로서의 나'(유아기적 에고, 단순 욕구의 추구)라는 자아가 들어서지만, 자각인에게는 '완전성으로서의 나'(그리스도적 에고, 고상한 욕구의 추구)가 깃들어 있다.

이때부터 자각인의 '인간성'은 '영성'으로 탈바꿈한다. 자각인은 '신의 뜻'에 대한 직접적 교통을 지향한다. 자각인의 입장에서 볼 때 신은 언제나 나와 감응하는 그 곳에 계신다. 종교 지도자들에게는 깨닫지 못한 일반인들의 맹목적 충동들을 가장 유익한 삶으로서의 자각으로 이어주는 그 임무가 제일 큰 역할이라고 할 수 있겠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알아야 할 점은, 자각인이라고 해서 곧바로 죄를 짓지 않거나 마냥 의로운 삶을 살거나 하진 않는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예수께서 광야에서 시험받으신 그 세 가지 시험이 주는 의미를 잘 알고 있다. 그것은 바로 이 세계 안의 자각된 이들마저 걸려 넘어지게 만드는 대표적인 시험사례에 해당한다.

그것은 깨달은 자에게도 반드시 찾아오게 되어있는 시험이다. 특히(생존 문제를 포함한) 재화, 명예, 권력 등등 이런 것들이 결국은 자각인의 눈을 가리게 만들고 깨우침의 첫 순간이라고 볼 수 있는 날카롭던 첫 키스의 추억과 아득히 멀어지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각인에게 찾아오는 '퇴행현상'이며, 곧 영성의 쇠락이기도 하다.

우리가 사회적으로 볼 때도, 한때 덕망 있는 종교적 인사라고 해서 한때 험난한 민주화운동을 했다고 해서 그 사람이 퇴락하지 말란 법은 없는 것이다. 바로 그렇기에 자각된 자의 영성이란 매 순간순간을 성실하게 갈고 닦지 않으면 그 자체로서 죄로 이어지기 십상이란 점을 자각인이라면 필히 잊어선 안 될 것이리라. 진리인 도(道)는 한시도 떠나는 법이 없다. 자각인의 타락이란 바로 이 점에 대한 망각의 현실화다.

깨달음의 확장, 내가 속한 현실 세계에서부터 하나님 나라로

모든 존재는 관계적 사태에 놓여 있다. 무(無)속에 떠도는 자족적 사실이란 없다. '나'라는 존재는 여전히 현실 세계의 관계성에 놓여 있기에, 여기서 그리스도인은 '그 나라'와 '이 나라'의 긴장을 가지고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자각인인 나는 깨달았다고 하지만, 세계는 아직 여전히 아니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 '이미'(already)와 '아직 아닌'(not yet)이 하나님나라에 따른 긴장관계가 놓여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전히 불합리한 현실 세계를 하나님나라로 이끌기 위한 가장 최선의 도(道)는 무엇일까? 그것이 바로 기독인에게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삶이다. 그리스도라는 존재는 이러한 불합리한 현실 세계를 하나님나라로 변혁시키는 데 있어 가장 올바른 다리요, 합리적인 가교의 삶을 보여준다. 그리스도란 곧 신과 인간의 화해와 통합의 장(場)이다.

우리가 예수를 나의 주로 고백하고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할 때 그러한 신앙의 삶은 바로 예수의 십자가적 삶을 불합리한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가 임할 때까지 지속적으로 구현하는 삶을 살겠다는 것이다.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다시 말해 현실 세계를 하나님나라로 변혁시킨다는 것은 그러한 깨달음의 우주적 확장인 셈이다.

그리고 이 같은 전체 세계의 구원은 동시에 나 자신의 온전한 구원의 실현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나'라는 존재는 언제나 '전체 세계 안에서의 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인 구원과 사회 구원은 근본적으로 이분되어 있지 않으며, 구원은 항상 전인적일 뿐이다. 온전한 나 자신의 구원실현은 내가 밟고 살아가는 전체 세계를 하나님나라로 이끄는 일과 언제나 관련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총체적인 구원' 개념이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정치, 경제, 사회의 제도가 완성된 나라로 환원되지도 않지만-만일 환원된다고 본다면 이것은 일종의 공산주의적 유토피아 개념과 흡사한 위험이 있다- 그것의 완성을 포함하면서도 동시에 이를 넘어서는 차원이다. 다시 말해, 존재가 가장 완벽하게 구원받는 차원의 세계, 존재의 가장 온전한 해방의 지평이 바로 하나님나라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내가 밟고 있는 이 땅의 현실 세계의 문제 역시 중요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 하나님나라 운동은 깨달음이 임한 지금 여기 now'n here에서 시작되며, 그 분의 뜻은 언제나 이 땅의 현실 세계와 유리되어 있지 않다.

깨달은 자는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계속적으로 알 수 있는가

신앙의 실천이란 내가 겪는 그 하나님나라의 확장 작업이다. 이때 우리는 '나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안다'는 사실과 '현실 세계와 나 자신을 안다는 사실'이 결코 이분화 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인지해 둘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나님의 뜻을 안다는 것은 이 세계와 나를 합리적으로 체득하는 것에 비례한다는 사실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세계 안에서의 나'에게 가장 바람직한 최선의 길로서 임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바는, 그 분의 나라로 이끌기 위해 현재 세계 안의 상황에 있는 우리 자신들의 올바른 결단과 이를 통한 참여적 삶이다. 이것은 곧 하나님나라를 향한 '세계 안에서의 가장 최선의 결단'에서 비롯될 수 있다. 물론 우리는 각자 다양한 삶에 처해 있다. 하나님은 바로 그러한 고려들마저 이미 다하고서 각각에 맞게 최종적인 하나님나라로 이끌기 위한 가장 올바른 방책들을 저마다 주시고 계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능한 하나님의 뜻을 밝히 알고자 한다면, ―즉 가장 올바른 최선의 판단을 내리고자 한다면― 그것은 바로 '나 자신에 대한 깊고도 정직한 인지'와 '나를 둘러싼 세계 안의 정황을 얼마만큼 정확하게 객관적으로 분석하느냐'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현실 세계를 합리적으로 이해하는 것 역시 영성수련에 필요한 것이다. 이는 부조리한 이 세계를 하나님나라로 변혁시키기 위한 그 실천적 효율성마저 위한 것이기도 하다.

성서를 가만히 보더라도 하나님의 뜻은 현실 세계의 역사적 상황과 결코 무관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결코 저 혼자서 활동하신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 언제나 아브라함을 통해서 혹은 모세를 통해서 혹은 예언자들 그리고 예수사건을 통해서 이 세계에 그 분의 뜻을 펼치셨다. 이들의 활동은 바로 무언가를 깨달은 자들의 결단이었고 활동이었다.

모세는 현실 세계의 고통 받는 이스라엘의 부르짖음 속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들었고, 하나님의 부르심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처한 고난과 고통의 부르짖음을 들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이 땅의 현실과 유리되어 있지 않다.

우리는 깨달음이라는 것도 마냥 구름 잡는 종교적 득도만을 의미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진정한 종교적 체험과 득도라고 한다면 이는 세계 안의 건강한 합리적 일반성마저도 꿰뚫을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상기해둘 필요가 있다. 앞서 말했듯, '깨달음'이란 최고의 합리성을 획득한 것으로 그것은 언제나 시대를 치솟아 밝혀주는 통찰이며 시대를 앞서간 통찰이다.

'선함'(Goodness)과 '수학'은 질서를 가진다는 점에서 서로 간에 모종의 동족성이 있는데, 이러한 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진정한 종교적 깨달음은 언제나 합리주의(rationalism)를 지향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것은 언제나 '힘에 대한 설득의 승리'를 지닌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위대한 신앙의 시대는 곧 합리주의 시대이기도 하다. 이 <본질적인 합리성>은 궁극적으로는 인간에게 있지 않으며 그것은 하나님의 속성에 속한다.

종교적 통찰이라는 깨달음-혹은 깨달은 자의 삶-은 그것이 결국은 옳고 타당하기 때문에 설득적으로 전체 인류사에 스며드는 것이다. 아마도 추인된 최고의 학설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통찰 안에는 인류의 삶을 가장 효율적으로 증진시키는 명백한 합리성이 유유히 흐르고 있다.

자 그럴 경우 <깨달음의 기독교>는 무조건 믿으라고 강요할 필요도 없으며, 그것은 오히려 세계 안에서 현실 세계를 올바로 이끌기 위한 삶의 증진으로 드러나는 것이라고 하겠다. 하나님의 속성은 생명을 살리는 것이기에 깨달은 자의 삶 역시 그러한 것으로 나타난다. 즉 깨달음은 결국 현실의 삶 속에 뿌리박은 사랑의 실천에서 그 진위가 예증될 뿐이다.

분명하게 얘기하지만, 깨달음은 구원의 시작일 뿐이며 그러한 깨달음의 열매는 삶과 생명의 온전한 증진으로 드러남으로서 그 종교적 통찰의 존귀한 가치를 확인시킨다. 그럴 경우 깨닫지 못한 주변 사람들은 바로 그러한 깨달은 자의 삶의 향기를 보고서 자연스럽게 전도될 것이다. 기존 보수 기독교처럼 굳이 믿으라고 강요 안 해도 말이다.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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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 중간 복음주의 신학자 알리스터 맥그리스의 <과학신학> 비판 (13) 미선이 224 12-13
140 끔찍한 <몸의 신학>에 속지 마시길! (유사품 주의) (8) 미선이 256 11-15
139 종교운동과 사회운동을 구분 못하는 오류-기존 진보 기독교 비판 (1) (2) 미선이 292 10-14
138 여전히 예수얼굴에 똥칠하는 개신교 정치세력들 (5) 미선이 258 08-30
137 새로운 기독교 역사의 국내 선구자들 : 유영모, 함석헌, 김재준 미선이 247 06-26
136 조용기 목사의 할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미선이 255 05-14
135 몸학과 새로운 기독교 운동 그리고 30년 후의 기독교 미선이 276 04-11
134 <인간의 자유의지>라는 착각과 환상에 관한 문제 (14) 미선이 474 03-04
133 기존 진보 기독교인들의 <생명평화> 담론에 반대한다! (업그레이드판) (8) 미선이 342 02-17
132 기존 진보 기독교계의 ‘생명평화' 담론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미선이 145 02-10
131 영혼구원의 강조에서 <총체적인 생명구원의 강조>로 (4) 미선이 192 02-05
130 성서문자주의 또는 성서무오설 신앙보다 더 뿌리 깊은 고질병은? (9) 미선이 526 02-02
129 죄의식의 종교에서 <이웃과 함께 성찰하는 종교>로 미선이 191 02-01
128 수직적 구조의 교회에서 <수평적 구조의 교회>로 (2) 미선이 250 01-21
127 서구식 목회문화가 아닌 <우리식 목회문화>로 미선이 214 01-21
126 과정신학에 대한 비판과 민중신학의 신 이해 접맥 미선이 344 01-13
125 ★ 예언 (1) 미선이 527 12-24
124 ♣ 새로운 기독교 신학의 인간론 (4) 미선이 338 12-19
123 ♣ 새로운 기독교 신학의 인간론 (3) (4) 미선이 404 12-12
122 ♣ 새로운 기독교 신학의 인간론 (2) (10) 미선이 581 12-05
121 새로운 기독교의 시간관, 태초와 종말로서의 시간관을 거부한다! (4) 미선이 494 12-01
120 ♣ 새로운 기독교 신학의 인간론 (1) 미선이 579 11-30
119 [예수운동 예배 견본] 새로운 기독교의 <예수운동 예배>를 위하여 미선이 568 11-28
118 숭배하는 예배에서 <닮으려는 예배>로 (1) 미선이 601 11-19
117 거꾸로 흘렀던 감리교 역사, 바로 세우기엔 아직 멀었나 미선이 500 11-10
116 <새로운 기독교>를 소개하는 전체 안내 링크글 (계속 업데이트 예정) 관리자 1642 11-03
115 [논평] 봉은사 땅밟기 추태, 성경 '문자주의' 그 야만의 역사 넘어서야 (1) 관리자 672 10-29
114 기존의 진보 기독교와 새로운 기독교 운동 (1) 미선이 518 10-22
113 1세대 민중신학자 안병무의 미완의 작업과 기존 민중신학의 과제 미선이 498 10-19
112 [새기운 성명] 4대강 사업 관련, 문정현 신부의 정진석 추기경 비판을 지지한다 관리자 469 10-19
111 스퐁, "스티븐 호킹과 유신론/인격신의 죽음" (작은불꽃님 역) 관리자 732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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