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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② 이웃종교에 배타적인 기독교에서 <이웃종교와 함께 가는 기독교>로 (1)    
  글쓴이 : 정강길 날 짜 : 06-06-14 08:56 조회(44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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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환기의 한국 기독교, 바뀌어야 산다! (5)
② 이웃종교에 배타적인 기독교에서 <이웃중교와 함께 가는 기독교>로 (1)

 

정강길 minjung21@paran.com


 
1. 21세기 기독교와 한국 기독교의 위기
2. 21세기 기독교 변혁을 위한 12가지 패러다임 대전환
   ※ 관념적 이원론에서 <현실적 관계론>으로
   ① '무조건 믿어라'의 기독교에서 <깨달음의 기독교>로
   ② 이웃종교에 배타적인 기독교에서 <열린 기독교>로
   ③ 가부장적 기독교에서 <모성애적 기독교>로
   ④ 초월신론에서 <범재신론>으로
   ⑤ 교리적 예수에서 <역사적 예수>로
   ⑥ 문자적 성서해석에서 <사건적 성서해석>으로
   ⑦ 숭배하는 예배에서 <닮으려는 예배>로
   ⑧ 서구식 목회문화가 아닌 <한국식 목회문화>로
   ⑨ 수직적 구조의 교회에서 <수평적 구조의 교회>로
   ⑩ 죄의식의 종교에서 <이웃과 함께 성찰하는 종교>로
   ⑪ 영혼구원의 강조에서 <총체적인 인간구원의 강조>로
   ⑫ 저 세상이 아닌 <이 땅에서의 하나님 나라 운동>으로
3. 오늘날의 선교 대상은 기독교 그 자신부터
4. 나오며


② 이웃종교에 배타적인 기독교에서 <열린 기독교>로 (1)

'이웃종교에 배타적인 기독교에서 <열린 기독교>로'는 적어도 오늘날과 같은 복잡하고 다원화된 사회에서 기독교의 열린 자세를 촉구하는 얘기다. 여기서 이웃종교라고 하면 굳이 종교만을 얘기한 것이 아니라, 세계 안의 건강한 합리성에 따른 고등한 사상을 포괄한 언급이다. 특히 테크놀로지의 발달로 인해 우리는 안방에서 지구촌 문화 어디든지 탐색이 가능하며, 가까운 동네 서점에 가면 세계 안의 수많은 사상을 마음만 먹으면 쉽게 접할 수 있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이웃'이라 함은 지구촌 세상 어디든 가릴 수 없는 현실이다.

함께 살아가는 이같은 세상에서 우리가 싸우고 대적하는 문제가 종교 때문에, 그 어떤 사상의 불일치 때문에 죽고 죽이는 피흘림의 싸움을 벌인다면 그야말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을 매우 추하게 만들어 생명이 살 수 없는 죽임과 어둠의 세상으로 전락할 뿐이다. 종교나 사상의 다름은 얼마든지 대화로도 풀 수 있잖은가.

종교다원주의 문제가 나온 배경

아마도 이 부분은 이미 짐작했겠지만, 종교다원주의 문제를 얘기 안하고 넘어갈 수는 없을 것 같다. 사실 종교다원주의 문제가 매우 민감한 문제라는 것도 알지만 어차피 얘기 안할 수도 없는 노릇이잖은가. 물론 앞서 세계 안의 건강한 합리성으로 드러나는 깨달음의 기독교를 지향하는 사람들이라면 종교다원주의가 주는 도전에 대해서 매우 심드렁할 것이기에 별 문제로 여겨지진 않을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현재의 한국 기독교는 여전히 '무조건 믿어라'고 말하는 기독교가 지배적이다.

어떤 면에서 오늘날 같은 종교다원주의 시대에서 이 문제는 지극히 당연한 얘기이기도 하다. 누군가의 말처럼 종교다원주의를 받아들일 것이냐 말 것이냐를 따지고 앉아 있는 것은, 마치 해가 이미 중천에 훤히 떠 있는데도 그것이 언제 뜰 것이냐를 따지는 것과도 같다. 이렇게 볼 때 '무조건 믿으라'의 배타적인 한국 기독교는 아직 잠에서 덜 깬 혼수상태에서 잠꼬대를 하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이 문제는 전적으로 우리 자신들의 전통사상과 문화에 대한 이해와 오늘날의 생활반경이 지구촌 곳곳으로 넓어짐으로써 세계 안의 고등한 일반성 가운데 기독교적 가치와 비슷한 것을 느꼈던 자들과, 동시에 역사상 기독교의 저 끔찍한 배타성을 극복하기 위한 첨예한 문제의식에서 제기되었던 맥락이다. 만일 본래부터 기독교 문화에 토대하여 기독교만 알고 기독교라는 종교적 범주의 영역에서만 생을 사는 자들에게는 이 문제가 별로 중요시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 예컨대 하나님은 1885년 외국 선교사들이 한반도 땅에 복음을 전하려 들어왔을 때 쫄래쫄래 뒤따라서 함께 들어온 분인지, 아니면 오래 전부터 우리 조상들과도 함께 계셨던 분이셨는지 이에 대한 고민을 안 할 수가 없다. 우리는 교회에서 성경도 배우지만, 학교에선 한반도 땅의 반만 년 역사와 문화도 엄연히 배우고 익히고 있다. 그럴 경우 원효나 이황, 이율곡 등등 이러한 고등 사상가들의 종교와 학문들은 기독교가 아니기 때문에 혹은 저급한 것이기 때문에 줄창 배타시 되어야만 하는 것인가?

배타주의 입장을 지지하는 자들의 견해

이에 대한 답변으로 보통 보수주의 신학권에서는 주로 <일반계시>와 <특수계시>라는 이론을 펴고 있다. 예컨대 일반계시에서는 하나님이 자연을 포함한 모든 만물의 역사에 일종의 '선함'(Goodness)으로 역사하긴 하지만 실제적인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만큼은 성경의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기원하는 특수계시에서 비롯한다고 보는 것이다. 즉 여기서 일반계시와 특수계시의 결정적 차이점은 바로 구원기능의 유무에 있다. 일반계시에는 구원의 역사가 있지 않으며, 특수계시는 특별히 택함을 받은 역사로서 나타난 것이라는 얘기다.

이 점 때문에 오늘날 수많은 기독교인들은-특히나 열혈 기독교인들일수록- 기독교 아닌 다른 사람들은 죄다 죽어서 지옥 갈 불쌍한 영혼들로만 보이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예수천당 불신지옥"이 절로 나오지 않으랴. 기독교 외의 모든 다른 사상이나 학문들도 급수가 낮은 것으로 천시될 뿐이다. 성경 하나면 모든 것이 다 들어있고 죄다 통한다고 하는 '성경만능주의'를 표방하는 기독교인들도 알고 보면 꽤 많다.

   
▲ 한국 기독교의 배타주의 입장은 성서문자주의 그리고 지구중심설과 결부되어 있으며, 그 자세는 종교 대화가 아닌 '무조건 믿으라'고 강요하는 전투적ㆍ돌진적 자세다.

이같은 구원에 대한 보수 진영의 기독교인들의 입장은 구약시대에는 인간의 죄사함이 동물들의 피를 통해서 속죄가 가능할 수 있었지만, 신약시대에 와서는 그럴 필요 없이 이제는 예수의 피로써 단 한 번에 대체되었다고 본다. 예수께서 동정녀 탄생으로 오셔서 예수의 그 피가 나의 죄를 사해주심을 믿고, 또한 십자가에 달리셔서 3일 만에 부활하신 것을 믿으면 나는 자동으로 죄가 사해지고 구원받는다는 것이다. 정말 간편하고 단순한 교리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인지 실로 못 배운 민중들에게도 더없이 잘 먹혀들어간다고 하겠다. 이는 어떤 면에서 일종의 주술적 원시신앙에 대한 적절한 대중적 현대화와 흡사한 맥락이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기독교 구원의 유일성과 배타성을 지지하는 자들이 내세우는 성서 구절들은 다름 아닌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라는 구약의 십계명 구절이나 복음서의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느니라"(요한 14:6). 혹은 사도행전 4장 12절의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다"는 성경구절을 종종 그 근거의 레퍼토리로 내세운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보는 자들에게는 당연히 문자 그대로 이것이 수용된다. 아무런 의문 없이 말이다. 이 얼마나 간단한가.

   
▲ '무조건 믿으라'의 배타적인 한국 기독교는 아직 잠에서 덜 깬 혼수상태에서 잠꼬대를 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다면 얼마나 좋으랴만, 사정은 그렇지가 않다. 이 점은 사실상 구약의 이스라엘 역사를 보는 맥락이나 예수에 대한 이해 그리고 성서를 보는 입장의 차이와도 관련한다. 구약의 저 십계명의 맥락은 고대 이스라엘의 야훼신의 성격과 모노야훼즘의 의미와 관련되며, 신약의 저 언급은 본문이 쓰이게 된 배경과 그 역사적 정황까지도 고려해야 하는 작업과도 관련된다. 생각해보라. 오늘날 종교다원주의를 주장하는 자들이 저러한 성서구절이 있는 줄도 몰라서 종교다원주의를 주장하겠는가.

아닌 말로 예수께서 정말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다고 말씀하셨다고 했을 경우, 만일 예수가 인간으로 오셨다면 그는 팔레스틴과는 동떨어진 다른 시공간에 있었던 고타마 싯달타의 가르침에 대해선 알고 있었을까를 생각해본다면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즉 예수나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입장에서 본다면 당연히 다른 시공간에서 파생된 고등종교인 불교사상을 몰랐었을 점도 충분히 짐작해두자는 얘기다(혹시 이 지점에서 예수는 만능 메시아이기 때문에 미적분, 상대성 이론 등등 뭐든지 다 알고 있는 만물박사쯤으로도 보는 맹신적 기독교인이 있다면 나로선 할 말이 없겠다. 이런 분들에게는 가능하면 '역사적 예수' 연구에 대한 풍부한 자료들을 좀 찾아서보길 권하고 싶다. 국내에 역사적 예수 연구 자료들은 '한국기독교연구소'를 통해 많이 소개되고 있다).

혹은 예수의 그 말씀도 그 때의 '나'라는 표현이 겉으로 드러난 '나'가 아니라 '나'(예수)가 지닌 그 존재의 속성을 가리킨 것이라면, 사랑과 자비의 성질이 서로 통하는 것이라고 했을 경우 하등 문제될 것이 없는 성서구절이기도 하다. 즉, 예수가 '나'라고 할 때의 그 '나'의 본성은 싯달타의 가르침인 '자비'를 통해서도 충분히 표현될 수 있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만일 배타주의를 지지할 경우, 기가 막힌 문제꺼리는 또 있다. 지구 밖의 외계 생명체들의 구원은 그럼 어떻게 되는 것인가 하는 점이다. 그럴 경우 독생자 예수는 그 외계 혹성에 가서 또 한 번 피 흘리고 죽어야만 하는 것인가? 그럴 수는 없잖은가. 이 복잡한 문제 때문에 특히 뉴에이지 담론을 말하는 보수주의 기독교인들일수록 외계의 생명체 가능성을 절대 부정한다. 그들에게 대부분의 SF 영화들은 사탄의 영화일 수밖에 없다. 만일 외계인의 존재를 인정할 경우엔 그 문제는 더욱 골치 아프고 복잡해지기 때문이다.

한때 중세시대에는 우주의 중심은 지구이며, 지구를 중심으로 우주가 돌고 있다는 '지구중심설'로서, 그리고 그 지구의 중심에 교황청이 자리하고 있다고 보기도 했었다. 하지만 오늘날에 이러한 얘길 믿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만일 우리의 삶의 반경이 지구를 넘어서 저 광활한 우주 은하계까지 손쉽게 들락날락 하는 ‘우주촌 시대’가 도래한다면 기존의 소박한 보수 신앙과 가치관들은 분명한 혼란을 가져다 줄 것임은 너무나도 자명하다. 그럼에도 오늘날의 배타주의 입장 역시 지구중심설이 여전히 그 근저에 깔려있다 고 하겠다.

존재와 언어 그리고 무한과 유한

자, 여기서 우리는 잠시 생각해 보자. 무릇 존재의 근원이라는 하나님이 계신다면, 그는 정말 본래부터 이름이 있었을까? 하나님은 본래 사람들 언어의 그 너머에 계신 분이 아닐까? 단지 하나님은 이 세계 안에 자신을 드러내실 경우 어쩔 수 없이 이름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지 않은가. 하느님, 하나님, 신, God, 알라 등등 사실상 알고 보면 일반적인 절대자를 지칭할 때 같이 통용되는 개념으로서도 쓰이기도 한다.

여러분의 이름은 여러분 존재 그 자체를 가리키고 있는가? 나의 이름은 정강길이지만 사실상 나는 정강길이 아닌 것이다. '정강길'이라는 이 이름은 시공간적 상황에서 일종의 통용되기 위한 규범화된 약속으로서 붙여진 것일 뿐이지, 정강길은 본시 정강길이라고 이름 붙여지기 이전의 원래의 아득한 '그 무엇'인 것이다. 존재는 언어로 지시될 수 없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본래 자리는 이름 붙여지기 이전의 그 무엇에 있다 는 것이다.

본래 존재의 자리가 영속성의 자리에 있다면, 존재를 지칭하는 이름이라는 언어의 자리는 유동성이라는 시공간에 놓여 있다. 이때 하나님께서 이 땅의 모든 만물의 역사에 자신을 드러내시고자 할 경우 필요적으로 시공간의 제약을 받으면서 자신을 드러낼 수밖에 없잖은가. 곧, 말씀은 육신으로서 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무한은 유한으로 제약된 채로 와서 그 무한을 예증하고, 유한은 유한에 침투된 그 무한을 접함으로서 유한을 극복하는 무한을 경험한다.

그럴 경우 '궁극적 존재 그 자체'에 대한 유한자의 다양한 경험들은 다양한 맥락의 언어들로 이름 지어질 수밖에 없다 고 하겠다. 인류의 문명을 상향적으로 증진시키는 숭고한 이상에 대한 느낌들은 시공간의 제약들로 인해 다양하게 표현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기독교 종파 바깥에 있는 고등한 종교 체험들도 일반계시처럼 하나님의 역사로도 충분히 나타날 수 있다고 보았을 때, 문제는 앞서 말한 이것의 구원기능 유무의 문제가 가장 첨예한 갈등의 지점이 된다고 하겠다. (이때 '구원'이 무엇인지에 대해 보는 시각조차도 보수와 진보는 차이가 있다. 예컨대 보수측에서 말하는 구원은 ‘영혼구원’이지만 진보측에서 보는 구원은 ‘인간구원’에 더 가까이 있다. 이 차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⑨영혼구원에서 총체적인 <인간구원>으로'에서 언급될 것이다.)

구원은 믿음이냐 행함이냐, 믿음은 행함으로 드러나고, 행함은 그 믿음을 예증

대체로 보수적인 기독교는 '믿음'과 '행함'을 구분 지으면서 행함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다고 말한다. 이들은 로마서 1장17절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나 에베소서 2장 8~9절의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요,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는 말씀을 들기도 한다.

하지만 여기서 바울이 거부한 행함은 자랑하기 위한 형식적인 행함 곧 '율법적 행함'을 가리킨 것이지, 참으로 숭고한 신념에서 흘러나오는 선한 행실을 거부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바로 다음 구절(10절)을 보라.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선한 일을 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미리 준비하신 것은, 우리가 선한 일을 하며 살아가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행여 바울서신의 그러한 오독을 보완하기 위해 야고보서 같은 경우는 오히려 '행함'을 더 강조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믿음과 행함을 이분법적으로 나눠서 믿음을 더 강조했던 루터는 행함을 강조한 야고보서를 "그따위 지푸라기 서신"(that straw-epistle)으로까지 평가절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실제적으로 믿음은 신념의 영역이고 행함은 믿음이 드러나고 있는 현상의 영역이라면, 믿음과 행함은 온전하게 구분될 수 없고 그것은 언제나 동전의 양면으로 봐야 옳지 않은가.

진정한 믿음이 있다면, 그것은 결국 '선한 실천'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 물론 때에 따라선 보여주기 위한 위선적인 행함도 가능할 수 있기 때문에 행함 자체는 믿음과 동일시된다고 판단하기는 힘들겠지만, 적어도 예를 들자면, 간디 같은 사람의 삶 자체는 위선적인 행함이라고 보기도 어려우며, 그것은 예수의 삶과 완전히 이질적인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이다.
실제로 복음서의 주의 말씀을 살펴볼 경우 이는 더욱 명확하다. 주께선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했다"(마태 7:21).
또한 말씀하길 "선한 일을 한 사람은 부활하여 생명을 얻고, 악한 일을 한 사람은 부활하여 심판을 받는다"(요한 5:29)고 하셨다.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천국의 심판을 보라. 그 구원의 기준이 무엇인지를. 놀랍게도 이 땅의 낮은 자, 가난한 자, 헐벗은 자, 옥에 갇힌 자, 굶주린 자를 너희가 대접했느냐 아니냐다. 여러분은 진정으로 예수를 대접하고 만나는 체험을 하고 싶은가? 사실상 헐벗은 나사로는 늘 우리 곁에 있어 왔잖은가!

또한 역으로 생각해서, 오늘날 믿음을 강조하는 기독교인들이야말로 많지만 이들은 얼마만큼이나 선한 열매를 맺으며 살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자. 매우 회의적이라는 생각만 든다.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이 땅에 얼마나 빛과 소금으로서 살고 있는가? 온갖 비리와 게이트의 주역은 대부분 기독교인들이라 부끄럽기 짝이 없잖은가. 저들은 분명하게 세례를 받은 교인들이었고, 예수의 피가 내 죄를 사해줌을 고백한 신자들이었는데도 말이다. 실로 여기에는 무언가 기독교 가르침의 본질적 왜곡이 한국교회 대부분의 주일날 설교 가운데서도 작동되고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진정한 믿음은 '깨달음'이지, 예수의 피가 내 죄를 사했다고 시인하면 구원받는다는 그런 차원의 소박한 믿음은 애초부터 기독교가 가고자 했던 신앙의 믿음이 아니었다는 얘기다. 대속의 진정한 의미는 이땅에서부터 하나님 나라를 구현하기 위한 그 피흘림의 '희생'과 '사랑'에 본질적 의미가 있지, 무슨 죄가 사해지는 주술 같은 것에 있지 않다(이는 궁극적인 '죄에서의 해방'을 부정하는 얘기가 결코 아님). 알고 보면 본래 바울신학의 맥락도 그러했다. 바울은 당시 유대교적 잔재인 율법적 행함을 거부했을 뿐이었다.

바울의 의인론의 배경은 초대그리스도교 안에 스며든 유대교 율법의 잔존들을 극복하기 위함에 있었다. 당시 그것이 실제적으로 헬라계(이방인계) 그리스도인을 소외시키는 불합리한 차원으로서 그리스도교 안에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한국교회는 바울신학의 그러한 배경들을 잘 고려하지 못하고서 주일날에 온갖 설교를 해댄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구렁텅이에 빠진다고 하지 않았던가(마태 15:14).

한국교회여, 제발 '배타주의'만큼은 극복하자

나는 이 시점에서 현재의 한국 기독교가 '배타주의' 만큼은 제발 극복되길 간곡히 소원한다. 적어도 다원주의까지는 아니더라도 '포용주의'(혹은 포괄주의) 만큼은 최소한 견지하길 바라는 것이다. 이는 동네 마을의 장승을 베거나, 불상을 훼손하거나 절간에 불을 지르고 하는 한국 기독교의 극렬한 배타적 행태의 현실을 고려해볼 때 적어도 현실적인 발상이라고 하겠다.

   
▲ 나는 한국교회가 최소한 다원주의를 지지하진 못하더라도 제발 기독교 포용주의 관점에서라도 서서 저 끔찍한 배타성만큼은 극복되길 간곡히 소망하는 바이다. ⓒ기사제공 한겨레
   
▲ 배타주의 입장은 결국 '기독교제국주의'라는 종교전쟁을 정당화하기에 딱 알맞다. 이른바 '종교영역 땅따먹기'가 되는 것이다. ⓒ기사제공 한겨레


 실제로 95년의 '인구주택 총조사'에서 집계된 8백 76만 명의 개신교 신자 가운데 절반가량이, 97년 '한국인의 종교와 종교의식' 조사에서 개신교인 70% 이상이 타종교에 대해 배타적인 감정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나왔다. 따라서 한국 기독교의 현실에선 이 문제가 매우 심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나는 적어도 한국교회가 다원주의가 아닌 포용주의라도 괜찮으니 저 극렬한 배타주의만큼은 극복하자 고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칼 라너(Karl Rahner)라는 신학자의 유명한 표현인 '익명의 그리스도인'(Anonymous Christian)이라는 차원쯤은 충분히 가능할 수 있잖은가.

포용주의는 기독교가 상대주의나 혼합주의로 빠지는 그러한 차원이 결코 아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기독교적 입장에서 다른 종교에도 얼마든지 기독교적 가치가 있을 수 있다고 보는 자세이기 때문에 그러한 점들은 전혀 문제가 안 된다고 본다. 나 자신이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현실적으로 모든 한국교회가 다원주의를 받아들이긴 힘들 수 있다고 보기에 적어도 한국 기독교가 타종교에 대해 전투적이고 배타적인 기독교인들을 더는 배출해선 곤란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물론 다른 이웃종교의 입장에서 볼 경우, 포용주의 입장도 여전히 '기독교우월주의'에서 나온 발상이 아니냐고 비판할 테지만, 어차피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에서부터 정당화될 수밖에 없는 사태인지라 어느 정도 불가피한 점은 충분히 고려해줄 필요도 있다고 본다. 게다가 진정한 종교는 다른 종교보다 우월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궁극적으로 그것은 더욱 조화로운 총체적 구원을 위한 상생의 극을 향해 있어야 할 것이다.

또한 종교다원주의도 마찬가지로 흔히 상대주의나 혼합주의로 빠진다고 비판하지만, 그렇지 않은 종교다원주의도 있다는 점을 잘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예를 들어 존 캅의 '그리스도 중심적 다원주의' 같은 경우가 여기에 속할 수 있겠다. 여기에서는 그리스도적 실존이 궁극적인 것이며, 그것을 접하는 시공간상의 경험은 다른 것이기에 예수를 믿는다는 것과 석가를 믿는다는 그 경험만큼은 분명히 다른 '종교적 체험'이라고 말한다.

그의 그리스도 중심적 종교다원론은 모든 종교가 같다는 차원을 말하고 있지도 않으며, 오히려 종교 간의 차이와 정체성에 기반하면서 궁극적인 그리스도적 실존에 다가가려는 것 이기에 기독교의 아이덴티티를 훼손하지 않고 절묘하게 살리면서 열린 신앙을 가질 것을 권한다. 다시 말해, 각자의 종교 신앙에 충실하게 그리고 '깊게' 믿을 것을 권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여러분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오직 예수만 믿어라. 대신에 제발 좀 깊게 믿어라"
고...

배타주의 입장은 결국 '기독교제국주의'라는 종교전쟁을 정당화하기에 딱 알맞다. 이른바 '종교영역 땅따먹기'가 되는 것이다. 만일 오늘날 예수와 석가가 한 자리에서 만난다면, "왜 남의 종교 영역을 마구 침범하느냐"며 서로 싸울 것이라고 보는가? '믿으라'고 강요하지 말고, 그 자신이 처한 자리에서부터 그냥 작은 예수가 되는 삶을 살면 되잖은가. 진리의 힘은 언제나 부드럽고 설득적으로 스며듦에 그 위대한 탁월함이 있잖은가.

선한 것에서 선한 것이 나며, 악한 것에서 악한 것이 난다

일반적으로 기독교 종파 밖의 세계 안에 선한 열매를 맺는 자들은 누구로부터 왔는가 물으면 배타주의 입장의 보수 기독교인들은 대체로 인간으로부터 왔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나는 그 선한 열매를 맺은 그 존재는 도대체 궁극적으로 누구 안에 있는 것인지 더욱 되묻고 싶다. 우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 유한자인 인간 존재는 언어를 넘어선 무한이 드러나고 있는 다양한 시공간적 맥락에 처해 있을 수밖에 없음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무한의 차원이 언어를 넘어서는 차원이라면 그것이 '무'(無)이든 '도'(道)이든 '한울님'이든 '하느님'이든 '알라'로 표현되든 결국은 그 또한 궁극적으로는 '선'으로부터 아니면 '악'으로부터 발현되고 있는 것이다. 그럴 경우 우리가 믿는 궁극적 존재자인 하나님은 창조 세계 안의 모든 선한 열매들의 근원이 되신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겠다.

만일 우리 자신들이 불교문화권에서 태어나 자랐다고 한다면 그 상향적 체험들은 무슨 언어로서 말해질 수 있단 말인가? 불교문화권에서 자라고 생을 마감한 사람들은 버림받고 저주받은 생명들인가? 기독교 종파 바깥에 있는 자들은 아무리 개과천선하고 아무리 노력해봐야 아무 소용없는 한낱 헛된 생명들인가. 그것이 일반계시든 특수계시든 어쩌든 간에 하나님이 역사하는 그 어느 곳이라면 왜 구원의 역사가 없다고 보는 것인가. 사실상 보수주의권에서 말하는 일반계시와 특수계시로 나누는 입장은 알고 보면 하나님의 활동을 오히려 축소시키는 신학적 입장 이기도 하다.

갈라디아서 5장 22절의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생각해 보라. 사랑과 기쁨과 평화와 인내와 자비와 양선과 신실과 온유와 절제 이 같은 열매들이 인류사적으로 기독교라는 종파 범주 안에서만 발견되어 왔던가? 보라. 이런 것을 금할 법이 없다고 했잖은가. 왜 성령의 활동을 기독교 안에만 가둬두려 하는가. 우리는 이제부터 기독교를 '기독교를 넘어선 기독교'의 차원으로서 볼 줄 아는 열린 눈이 있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선 언제나 창조 세계를 사랑하사 이 땅에 자유와 평등을, 무릇 모든 생명을 살리시고 사랑과 평화를 심으신다. 나는 분명하게 말한다. 하나님의 일을 사탄이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사실상 그 맺은 열매로 따진다면 오늘날의 한국 기독교인들이야말로 세간의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잖은가. 보혈로 죄사함 얻고 구원받았다는 개신교인들이 1천만 명이나 가까이 되는 오늘날의 한국사회는 왜 이토록 각박하고 악해져만 가는가. 참 종교는 그 사회를 건강한 척도로 이끄는 궁극적 답변이 되어야만 한다. 유한자라는 존재의 행실들은 언제나 그 행실의 준거로 작동되는 내적 신념의 체계가 지닌 궁극성과 맞물려 있음 을 기억하라.

악한 나무가 선한 열매를 맺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누가 6:43). 선한 열매는 선한 것에서만 나올 수밖에 없다. A에서는 A만 나올 수 있지 B가 나올 수 있다고 보는 것은 논리적으로도 모순이다. 주께서 말씀하셨듯이, 우리는 열매를 보아서 그 나무를 알아야 한다(마태 7:15~20). 이 땅에 생명을 살리고 평화를 심는 그 모든 에너지의 근원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다. 그럴 경우 오늘날의 한국교회는 적어도 ‘배타주의’만큼은 극복하고 기독교라는 종교적 범주의 바깥에도 항상 계셔왔던 하나님도 만남으로서 우리의 그리스도교 신앙이 더욱 큰 차원으로 확대되는 그 ‘무진장한 넓음’을 체험할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어쨌든 지금까지 나 자신이 본 논의에서 가장 핵심적으로 전달하고픈 요지는 적어도 현재 한국 기독교의 저 끔찍한 '배타성' 만큼은 제발 극복하자는 데에 가장 큰 핵심적 호소가 있음을 덧붙여 두는 바다. 진리는 궁극적인 합리성에 기반하며, 그 옳음으로 인해 능히 그릇된 것을 압도하는 힘을 이미 지니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만일 진리 안에 있다고 여긴다면, 굳이 그 어떤 금지된 배타적 영역을 둘 필요도 없잖은가. 무엇이 두려우랴. 참으로 진리는 존재를 자유케 하는 것인데.

(다음 시간에는 그렇다면 오늘날 종교다원주의 시대에서 타문화권에 대한 기독교 선교의 문제는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 종교다원주의에 대한 보수주의권의 입장을 대변하는 서적들

전호진, 『종교다원주의와 타종교 선교 전략』(개혁주의신행협회)
안점식, 『세계관과 영적 전쟁』(죠이선교회)
리처드 마우, 『무례한 기독교』(IVP)
(이중에서 앞의 두 권이 보다 더 전투적ㆍ보수적이며, 리처드 마우의 저서는 IVP 서적들이 흔히 그렇듯이 실상은 보수적이면서도 좀더 온건주의적인 경향이 있다. 하지만 성서문자주의나 모두 기독교 밖의 구원가능성을 인정하고 있진 않는 입장이라는 점에서는 공통된다.)

♣ 종교다원주의 혹은 토착화 신학에 대한 주요 연구서들

폴 니터, 『오직 예수이름으로만?』(한국신학연구소)
W. C. 스미스, 『지구촌의 신앙-타인의 신앙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분도출판사)
L. 보프, 『하느님은 선교사보다 먼저 오신다』(분도출판사)
레이몬드 파니카, 『종교 간의 대화』(서광사)
존 캅, 『종교다원주의와 오직 예수』(조명문화사)
존 힉, 『하느님은 많은 이름을 가졌다』(도서출판 창)
해롤드 키워드, 『종교다원주의와 세계종교』(대한기독교서회)
유동식, 『한국종교와 기독교』(대한기독교서회)
강성도. 『종교다원주의와 구원』(대한기독교서회)
한인철, 『종교다원주의의 유형』(한국기독교연구소)
김경재, 『이름 없는 하나님』(삼인刊)
(물론 이외에도 더 많겠지만 임의로 그냥 몇 가지만 추린 것이다. 현재 한국 기독교인들 대부분이 보수 측 진영에 속해 있는 현실임을 고려하여 아직 제대로 잘 모르고 있는 진보 측의 서적들을 좀더 많이 소개해 올린 것뿐이다. 물론 스스로 직접 그 논지들을 확인·비교해 봐도 좋겠다.)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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