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검색
아이디    비밀번호
   자동로그인     
  현재 총 141명 접속중입니다. (회원 0 명 / 손님 141 명)     최신게시글    성경검색   
새로운 기독교 운동
월례포럼
기획강좌
연구소 활동


  방문객 접속현황
오늘 833
어제 865
최대 10,145
전체 2,268,971


    제 목 : ③ 가부장적 기독교에서 <모성애적 기독교>로 (2)    
  글쓴이 : 정강길 날 짜 : 06-06-14 09:47 조회(3069)
   트랙백 주소 : http://freeview.org/bbs/tb.php/b001/19 




전환기의 한국 기독교, 바뀌어야 산다! (8)
③ 가부장적 기독교에서 <모성애적 기독교>로 (2)

 

정강길 minjung21@paran.com



 
1. 21세기 기독교와 한국 기독교의 위기
2. 21세기 기독교 변혁을 위한 12가지 패러다임 대전환
   ※ 관념적 이원론에서 <현실적 관계론>으로
   ① '무조건 믿어라'의 기독교에서 <깨달음의 기독교>로
   ② 이웃종교에 배타적인 기독교에서 <열린 기독교>로
   ③ 가부장적 기독교에서 <모성애적 기독교>로
   ④ 초월신론에서 <범재신론>으로
   ⑤ 교리적 예수에서 <역사적 예수>로
   ⑥ 문자적 성서해석에서 <사건적 성서해석>으로
   ⑦ 숭배하는 예배에서 <닮으려는 예배>로
   ⑧ 서구식 목회문화가 아닌 <한국식 목회문화>로
   ⑨ 수직적 구조의 교회에서 <수평적 구조의 교회>로
   ⑩ 죄의식의 종교에서 <이웃과 함께 성찰하는 종교>로
   ⑪ 영혼구원의 강조에서 <총체적인 인간구원의 강조>로
   ⑫ 저 세상이 아닌 <이 땅에서의 하나님 나라 운동>으로
3. 오늘날의 선교 대상은 기독교 그 자신부터
4. 나오며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보았듯이 기존 기독교의 가부장성 문제는 매우 고질적 병폐가 아닐 수 없겠다. 이러한 기독교 안에 스며든 가부장적 체제 정착의 가장 깊숙한 성공적 사례를 하나 꼽으라고 한다면, 바로 "하나님 아버지"라는 표현이다. 하나님 아버지라는 표현은 오늘날 예배 시간의 기도를 비롯하여 많은 기독교인들에게서 숱하게 들을 수 있는 말이 아닐 수 없다. 이 흔한 표현은 이미 우리 안에 관례화된 것이다.

하나님은 정말 남성인가? 진정한 하나님이라면 분명히 남성도 여성도 아닌 어느 한 쪽의 성으로서 말해질 수는 없는 노릇이잖은가. 그런데도 왜 우리들은 하나님을 말할 때 꼭 하나님 아버지로서만 회자하고 "하나님 어머니"는 안 되고 있는 것인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도 있어야 한다면 하나님 어머니도 마땅히 자연스레 나올 수도 있어야 하지 않는가.

혹자는 굳이 이런 것을 문제 삼을 이유는 무엇이냐며 비판해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미 우리 안에 관례화되었다는 점은 역으로 사태의 심각함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관례화란 우리의 일상에선 거리낌 없이 쓸 만큼 자신의 의식 안에서는 의심 없이 당연한 것으로서-전혀 문제되지도 않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을 뜻한다. 즉 하나님 아버지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며 별로 문제되지 않는 참진리로 여겨진다. 이것은 기독교에서 보여진 가부장적 체제에 대한 몸의 순응적 습득이기도 하다.

메리 데일리(Mary Dalye)라는 여성신학자는 "하나님이 아버지면 아버지는 하나님이냐"고 말한다. 즉 하나님 아버지라는 그 일상화된 표현에서 은연 중에 남성은 하나님 자리에 떠받들어져 있다는 것이다. 예수의 말씀의 진정성도 그것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적 친밀성에 있지, 하나님이 남성이라는 점을 강조하거나 가리킨 것에 있지 않다. 사실상 하늘의 위대한 가부장으로서 하나님 아버지라는 이미지는 수천 년에 걸쳐 많은 사람들의 상상력을 지배해왔었다.

이같은 기독교에 의해 그럴듯하게 유지되어온 서구 문명은 하나님 아버지라는 상징을 통해 여성에 대한 억압이 정당화되고, 그러한 사회를 만들어내는 데 언제나 봉사해왔다. 이러한 연유로 하늘에 있는 하나님 아버지의 통치가 정당한 것처럼 그것은 사회가 남성 지배적인 것이 자연스러운 일로 여겨지고, 신성한 계획과 우주의 질서를 따르는 것이 된다.

다시 말해 가부장적인 하나님의 이미지는 기존의 여성억압적인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현상을 합법화하는 역할을 한다고 하겠다. 이 뿌리 깊은 고질적 구조화는 바로 우리 몸 안에 하나님 아버지라는 일상적 표현으로서 전혀 껄끄럽지 않게끔 깊숙이 들어와 있는 것이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하나님의 성이 분명히 남성이 아님을 안다면 하나님 아버지라는 표현은 재고되어야 한다.

어떤 면에서 이미 종교 안에 관례화된 것을 바꾼다는 것은 참으로 힘이 들겠지만, 어차피 미래의 기독교를 그려볼 때 바뀌어야 할 것이라면 당연히 바뀌어야 한다. 그냥 하나님을 부를 때 성을 아예 붙이지 않든가 아니면 성을 붙이더라도 하나님 어머니도 자연스레 쓸 수 있는 열린 분위기로 말이다. 이것은 매우 개인적인 결심이 필요한 것이기도 하지만, 사실상 어떤 면에서 엄청 큰 용기와 노력을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것은 무의식까지 길들여진 그 자신의 '습관'을 고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성 억압과 자연 억압은 연결되어 있다

실로 여성의 억압은 매우 구조화되어 있는데, 특히 이러한 여성억압이 놀랍게도 자연억압과 함께 얽혀 있다는 점은 오늘날 '생태여성주의'(Eco-feminism)에서 우리가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신선한 통찰이 아닐 수 없다(참고로 ‘생태여성주의’라는 용어는 1974년 생태학과 여성주의가 합쳐진 말로 프랑수아즈 도본느에 의해 처음 사용). 이 같은 생태여성주의의 통찰에 대해 독일 녹색당의 창시자인 패트라 켈리(Petra Kelly)는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한 여성이 능욕을 당하는 것과 이 지구가 능욕을 당하는 것은 구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고대적 사유에서 자연은 양육하는 어머니와 동일시되어 이 지구는 '어머니 지구'(Mother Earth)로 자리매김 되어 왔었다. 오늘날 인류학적으로도 자연과 인간의 발달사를 연구한 많은 학자들은 고대 모계사회의 흔적과 여신 숭배를 통해 자연과 여성의 밀접성을 언급한 바 있다(Eisler, M. Mies, C. Merchant, M. Gimbutas 등등). 그러다가 농경과 정착사회로 접어들면서 잉여생산물에 대한 지배와 소유가 점차로 확립되고 힘에 대한 숭배가 이뤄지면서 가부장적 체제가 정착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가부장성은 적어도 서구사회에서 희랍과 유대-기독교적 전통의 관념적 이원론과 근대 세계관의 주체/객체로서의 이원론적 세계관에 의해 여성-자연은 정복하고 다스려야 할 존재로서 인식되어 왔다는 것이다. 마릴린 웨어링(Marilyn Waring)이란 학자는 세계 여성의 경제적 상황을 조사한 결과, 세계 경제구조 아래서 여성과 자연이 근본적으로 똑같이 취급 당해 왔었다고 지적한다(1988).

생태여성주의자들은 이같은 여성 억압과 자연 억압을 '쌍둥이 억압'(twin-oppression)이라고 명명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 관심의 지평이 넓어지면서, 여성주의자들은 여성차별(sexism), 자연차별(naturism, 조안 그리스콤이 고안한 용어로 '자연주의'와는 다른 맥락적 의미), 인종차별(racism), 계급차별(classism)이 서로 간에 구조적으로 맞물려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고, 이 네 가지 억압의 뿌리에 가부장주의가 자리하고 있으며, 이 네 가지 지배구조는 지구적 가부장제를 유지하는 '연쇄 대들보'(interlocking pillar)라는 점을 밝혀내었다(S. D. Collins).

가부장성 인식의 근원적 뿌리, 위계적 이원론

   
▲ 『생태여성주의와 기독교 윤리』(한들출판사, 2005)
한국의 생태여성신학자인 구미정은 그 자신의 책인 『생태여성주의와 기독교 윤리』(한들출판사, 2005)에서 여성 억압과 자연 억압이 구조적으로 맞물려 있다는 점과 함께 가부장성은 '군사주의'(militarism)하고도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고 보았다.

이 점은 가부장제의 역사적 기원을 인지한다면 쉽게 이해될 수 있는 측면이다. 유명한 여성신학자 로즈마리 류터(R. R. Ruether)는 서구 기독교 전통의 근간에 놓여 있는 존재의 위계사슬 구조가 바로 명령의 위계사슬 구조라고 비판하면서 이러한 잘못된 뿌리를 철저히 뽑아내지 않는 한 결코 가부장성은 극복될 수 없다고 얘기한다.

이 점에서는 우리는 강력한 성차별과 가부장성을 낳게 한 그 인식의 근원적 뿌리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여성신학자들은 이를 '위계적 이원론'(hierarchial dualism)이라고 말한다. 위계적 이원론을 보면, 이것은 통전적인 하나를 대립적인 둘로 나누고, 여기에 '위'(up)와 아래 또는 우월과 열등의 가치를 주입한 후 지배와 종속의 관계로 옭아 묶는, 전형적인 분할-지배의 양상을 띠고 있다.

주로 희랍철학과 유대-기독교 전통에 의해 강화된 이 이원론은 정신과 물질, 영과 육, 이성과 감성, 남성과 여성, 인간과 비인간, 문화와 자연, 하나님과 세계를 구분하고, 전자가 후자를 지배하는 질서를 구축한다. 이러한 구조에서 남성은 정신, 영, 이성, 인간, 문화, 하나님과 동일시되고, 여성은 육체, 감정, 비인간, 자연, 세계를 대변하는 존재가 된다. 데카르트는 이것을 주체/객체의 도식으로 설명했고, 시몬느 보봐르는 초월/내재의 구도로 보았다(이상 구미정 '앞의 책' 발췌 재인용).

<현실적 관계론>으로 인식의 패러다임 전환을

그렇다면 우리는 위계적 구조를 갖는 '관념적 이원론'에서 '현실적 관계론'의 패러다임으로 바뀌어야 할 필요가 있다. 나 자신이 애초에 '전환기의 한국 기독교, 바뀌어야 산다'의 글에서 인식의 가장 기초 패러다임 전환으로서 제시한 점도 바로 여기에 놓았다. 우리는 사실상 하나님을 대하고, 성경을 대하고, 세계를 대하고, 사람을 대하고, 자연과 우주를 대하는 시각이 현실적 관계론의 지평에서 모든 것을 사유할 방향으로 바뀌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사물을 보는 시각이 기계적이고 고정적이고 개체적인 마인드가 아니라 통전적이고 과정적이며 관계적인 마인드에서 고찰할 때 세계는 놀랍도록 새롭게 인식된다.

인간은 관계적 존재다. 그 어떤 존재도 홀로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는 없다. '나'(Self)라는 존재는 언제나 이 우주 전체와 관계적 회로에 놓여 있는 가운데 그 자신을 형성해나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임의의 타자에 대한 억압은 사실상 그것은 우주 전체에 대한 억압이며, 이것은 궁극적으로 그 자신의 자기 파멸로 이어짐을 알아야 한다. 단지 근시안적인 시각으로 인해 당장의 눈앞의 이익과 소유욕에만 집착하기 때문에 우주 전체에서 벌이고 있는 자신의 짓거리를 모르고 있는 것일 뿐.

바로 그렇기 때문에 분명하게 말하지만, 여성 억압은 결국 남성 스스로의 일그러짐과도 맞물려 있다고 하겠다. 이 점에서 칼 융(C. G. Jung)은 매우 날카로운 통찰을 한 바 있는데, 여성에 대한 지배는 동시에 남성의 무의식에 있는 여성적 부분, 곧 '아니마'(anima)에 대한 억압을 낳는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여성성에 대한 억압은 곧바로 그 자신조차도 갉아먹는 자멸로의 초대라는 것이다.

가부장적인 한국 교회의 초상

   
▲ 우리네 기독교 패러다임의 인식 뿌리가 근원적으로 뒤바뀌지 않는 한 한국 교회는 여성 비하 물의와 이에 대한 사과와 제도 개선 요구가 계속 반복적 패턴을 보일 것이다. ⓒ뉴스앤조이 이승균

오늘날 한국 기독교는 분명하게 가부장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점에서 나는 이러한 한국 기독교에 대한 근원적 치유를 소망한다. 일전에 예장합동측의 총회장 목사가 "기저귀(생리대)를 찬 사람은 강대상에 오를 자격 없다"라고 말하여 물의를 일으킨 바 있다. 그러자 이에 대한 조치로 여성계에서는 발언에 대한 사과와 제도적 개선을 촉구하는 성명들을 발표하였다. 나는 이러한 일이 앞으로도 계속 반복적으로 발생될 것 같다는 우려를 지울 수가 없다. 사실상 우리네 기독교 패러다임의 인식 뿌리가 근원적으로 뒤바뀌지 않는 한, 여성비하 물의와 이에 대한 사과와 제도개선 요구는 계속 반복적 패턴을 보일 것이다.

또한 여성안수가 제도적으로 허락되었다고 해도 목회 현장에서 불러주질 않는다면 여성은 여전히 전도사로 만족할 수밖에 없다. 왜 남성은 장로, 여성은 권사라는 고정된 인식이 우리의 뇌리에 안주하고 있는가. 따라서 나는 현재의 불평등한 구조가 적어도 공평한 구조로 가기까지는 어느 정도 여성을 우선적으로 편애하려는 제도화가 필요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이것은 차별받는 현재적 시점의 현실 때문에 요구되는 것이요, 또한 궁극적으로는 공평함을 위해서인 것이다.

예컨대 교단별로 '여성목회자(장로) 쿼터제'를 도입할 것을 요청하는 바이며(물론 이것은 먼저 하나의 사례로서의 제안임을 밝혀둠), 이와 동시에 교회 현장의 의사 결정 구조도 여성의 참여를 더욱 높일 것을 제안하는 바이다. 이러한 점은 결국 교회 현장에서의 수평적 구조화로서 제도 개선과도 맞물려 있는 셈이다. 왜냐하면 교회의 제직회나 당회 구조 자체가 수평적으로 민주화되지 않는다면, 여성 참여에 대한 인식은 소원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혹시 '봉사이데올로기'를 아는가? 오늘날 한국 기독교의 남성 목회자는 교인들에게 기독교 정신의 하나인 봉사의 중요성을 무던히도 강조한다. 이때 한국교회의 여성들에게 부여되는 그 봉사 정신이란 딴 게 아니라 결국은 교회의 가사노동을 돕는 투철한 봉사 정신의 의미에 머문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여성이 교회의 가사노동을 돕는 것뿐 아니라 강대상에서 설교하거나 가르치는 직분도 분명히 하나님 앞에서 매한가지 봉사임에도 그러한 의미로서 봉사는 여성들에게 거의 차단되는 교회 현실을 꼬집고 있는 것이다.

교회 봉사를 그렇게 강조하면서 왜 여성안수는 반대되어야 하나. 즉 이것은 분명히 형평성에서부터 어긋나 있으며, 여성에게 부여되는 봉사라는 소명의식은 대부분은 남성 권력 유지의 범주 안에서만 의미를 가질 뿐이다. 나는 한국 기독교의 그런 목사들의 그런 구라에 놀아나는 한국 교인들이 더 이상 없기를 간절히 소원하는 바이다. 여자든 남자든 능력만 있다면 가르침의 직분 역시 봉사에 해당하잖은가. 한국 교회는 그동안 소외되어 왔던 여성의 목소리를 더욱 주체적으로 내세울 필요가 있다.
 
순결이데올로기

한국 교회의 주류가 대부분 보수 기독교인이어서 그런지 대체로 금욕주의적인 분위기가 상당히 만연해 있다. 술, 담배도 그렇지만 성에 대한 인식도 매우 보수적인 측면이 많다. 일각에선 교회를 다니는 청소년들과 젊은이들 사이에 혼전 순결서약서 운동도 전개된 바 있다. 물론 하나님 주신 성(sex)을 함부로 쓰는 것도 문제지만, 나는 그것이 가부장적 사회의 순결이데올로기를 암묵적으로 조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단연 반대하는 입장이다.

순결이데올로기는 가부장적 사회가 여성에게는 순결을 원함으로써 뜻하지 않게 당한 여성은 놀랍게도 가해자를 고발하지도 못하고 감추기에 급급하도록 만드는 치명성을 담고 있다. 따라서 피해를 당한 여성은 한 번 더 죽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여권이 점차적으로 신장되어 그나마 다행으로 많이 개선되고 있지만, 한국 기독교 집단은 여전히 그러한 사회 변화의 흐름을 못따라오고 뒤쳐질 만큼 보수적이지 않은가 싶다.

만일 교회 구성원 중에 누군가 원치 않는 봉변을 당한 여성이 있다고 생각해보라. 정작 피해당사자는 신고가 가능할까 싶다. 다니는 교회를 계속 다니려면, 시집을 제대로 가려면 여전히 피해당사자는 고발도 못하고 덮어두거나 숨기는 게 상책인 것이다. 교회에서 성담론은 아직 여전히 터부시되는 경향이 많다. 나는 어떤 의미에서 구성애 아줌마의 일은 사실상 교회가 진작에 했어야 하는 일이라고 본다. 억압된 성담론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피해자가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한국 사회의 남성들은 대체로 그동안 '음성적 체험'-야한 책이나 포르노물 같은-을 통해 은연중에 성에 대한 가치관이 형성되어 왔다. 그렇기에 왜곡된 성가치관을 가지고서 여성을 대할 확률이 높을 수 있다. 물론 사랑하는 사람에게 순결을 바친다는 것은 그 의미상 십분 이해가 간다. 하지만 순결 바침이 꼭 제도적 결혼 이후여야 한다고 보는 것은 매우 전근대적인 발상이라고 생각된다.

연애든 결혼이든 순결이든 섹스를 하든 뭐든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고 바람직하게 한다면 그것은 그 어떤 제도나 규칙 혹은 서약으로 묶어둘 수는 없잖은가. 오히려 한국 교회는 피해를 당한 여성들을 양지로 품어줄 줄 아는 그리스도인이 되길 간절히 원하는 바이다. 예수님의 마음을 살펴보면 놀랍게도 피해를 당한 여성들을 더욱 우선시하고 가까이하며 품어주셨던 분이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 모든 육체의 경험과 아픔들은 저마다 다양하다. 사진은 월경페스티벌. ⓒ뉴스앤조이

육체를 사랑하라

어떤 면에서 금욕이란 에너지의 차단이다. 하지만 에너지는 반드시 흘러나가게 되어 있는 것, 이때 금욕으로 인해 차단된 에너지는 다른 음성적 출구를 찾게 되고 그리로 분출될 확률이 높다고 하겠다. 멀쩡한 목사가 왜 여성 신도와 간통을 하게 되는 것인가. 나는 성담론을 터부시하거나 욕구를 억압하는 보수주의자일수록 오히려 결혼 후에는 그 본색을 드러내 억눌렀던 욕구를 마음껏 분출하면서 폭력적이게 될 확률도 높다고 본다.

인간도 소유물로 여기게 되는 가부장적 문화는 결국 여성쯤은 남성의 힘으로 제압할 수 있다는 발상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 아내가 소유물로 여겨지는 가부장적 체제에서는 구타당하는 아내는 그저 집안 문제로 여겨지기도 한다. 건강한 성문화는 금욕이 아니라 제대로 된 에너지의 흐름과 분출이다. 현 시점에선 혼전순결서약서를 쓸 바엔 차라리 올바른 피임 상식이나 가르쳐주는 것이 더욱 실질적인 복음이 아닐까 싶다

'영적'인 것이라면 좋다고 떠받드는 암묵적인 기독교 문화에 우리의 육체는 한편으로 억압되고 있고, 성에너지는 변칙적으로 분출되고 있다. 우리의 몸뚱아리인 육체를 깊이 사랑하라. 건강한 육체 역시 건강한 정신으로 인도한다는 점을 결코 잊지 않길 바란다. 그것은 인간 생활의 활력이 될 뿐이다.

첫 월경을 함께 축하해 줄 때 그 아이는 그 자신의 육체적 변화인 생리 현상이 조금도 이상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되고, 이후의 생리통 같은 월경스트레스도 해방될 수 있는 가능성이 높다. 교회의 청소년들이 그 자신의 자위 문제로 죄책감을 가지고 고민하는 것을 안다면, 교회는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결코 죄가 아니라는 점을 올바르게 설명해주고 성숙한 성문화를 유도하도록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자신의 몸뚱아리인 육체를 깊이 느껴라. 하나님의 구원과 해방에는 우리 몸뚱아리의 건강함도 같이 포함되는 것이다.

동성애와 가족의 의미

곁들여 동성애 문제도 얘기해 보자. 동성애는 동성을 향한 지속적인 감정적, 정서적, 신체적, 성적 끌림을 수반한다. 즉 단순히 동성한테 성적인 행위를 했다고 해서 동성애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동성애자들 가운데는 이성애자와 마찬가지로 동성과 성적인 경험이 전혀 없는 사람들도 상당수 있다. 그런 면에서 동성애자들은 '동성애'와 '동성연애'를 구분한다.

따라서 성경에 동성애에 대한 반대 구절들(레 18:22, 레 20:13, 로 1:27, 고전 6:9 등등)로 알려져 있는 내용은 남자가 남자에게 대하는 성적 행위에 대한 반대로서지, 동성애의 진정성 자체를 거부한 것인가 하는 것은 사실상 분명치 않다. 특기할 사항은 성경에도 여자끼리의 동성애 반대 구절은 명시적으로 나와 있지 않다는 점이다. 물론 백보 양보해서 그것이 동성애 자체에 대한 반대 구절이라 하더라도, 그것 역시 성경에서 여성 차별이 정당화되었던 맥락과 같은 이치다.

즉 그 옛날 성경 기자들의 시대상황적 인식의 한계가 함께 스며들어 반영되어 있을 따름이다.
이때 정확하게 짚어야 할 지점은 당시 일관성 없는 성풍속의 문란함을 반대한다고 보는 게 좋지, 동성애 자체를 금지해야 할 것으로 본다면 성경은 철지난 구닥다리 고서(古書)밖에 안된다. 어디 동성애 반대뿐이겠는가. 성경은 질외 사정이나 생리중의 성관계도 반대(창 38:9~10, 레20:18)한 것을. 우리는 여기서 이같은 반대의 배경에는 실은 가부장제와 관련한 뿌리깊은 연유도 있음을 눈치 챌 수 있어야 한다.

즉, 그 당시의 동성간의 성행위 반대도 사실상 가부장제 하에서 생식(生殖)주의와 관련된 것으로, 당시로서 성관계는 자손을 번식하기 위한 성관계만 인정되었던 것이다. 씨를 뿌리는 남자의 소중한 정액을 엉뚱한 곳에 사정하거나 같은 남자에게 흘린다는 건 죄악시되었다.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이야말로 당시 절박한 생존에 놓여 있던 히브리 민족으로선 언제나 존속적 과제였던 것이다.

성경을 보면 곳곳에 집안과 자손이 대대로 복을 받느니 대가 끊기니 마니 어쩌니 하는 구절들을 허다하게 볼 수 있는 것도 결코 이와 무관하지 않다. 또한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성경이 남자 동성애만 문제 삼은 이유도 알만 하잖은가. 대를 이어야 하는 가부장적 사회에서 씨를 함부로 흘리거나 출산 능력 없는 남자한테 줘선 안되는 것이다. 대체로 동성애를 반대하는 한국 교회는 생육하고 번성하는 데는 유달리 앞장서기에 결국은 교회마저도 대를 잇는 가부장적 세습 문화까지 보여주고 있다.

혹시 지금까지 이 글을 읽고서 착각할까봐 얘기하지만 나는 지금 성의 문란성을 주장하려 함이 아니다. 즉, 분명하게 현존하고 있는 '성의 다양성'을 얘기하는 것이다. 우리가 타자를 이해함에 있어 다양성은 그 이해의 기본적 전제다. 어찌 타자가 나와 같을 수 있겠는가. 모든 것은 그 모습 그대로 이해되면서부터 출발될 필요가 있다. 이때 나와 다른 타자와의 관계맺음은 서로를 살찌우는 최선의 합리적 관계로 나아감이 가장 좋으리라 본다.

   
▲ 한기총의 동성애 반대 성명과 관련하여 목숨을 끊은 동성애자 고(故)육우당의 유서. ⓒ뉴스앤조이
역사적으로 동성애자들은 주류 사회에서 늘상 배제되어왔던 소수자들이었다. 이러한 사회적 왕따들의 고통과 아픔들을 마냥 '죄'라고 정죄하기만 한다면 그 문제가 해결될 것인가. 오히려 더 큰 어울마당으로 함께 더불어 살 길을 모색함이 보다 바람직하지 않은가.

우리는 '가족'(family)이란 것도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을 이뤄서 가족이 된다는 그 고정관념조차도 버릴 필요가 있겠다. 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 이제는 가족해체의 시대에서 가족의 의미는 매우 새로운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예컨대 동성애 부부와 그 가정에 입양된 자녀가 함께 식탁에서 따뜻한 저녁식사를 나누는 장면을 떠올려보라. 그들이 적어도 사랑으로 엮여진 공동체라면 나는 가족이라는 이름을 붙여줄 수 있다고 본다.

다시 말해 가족의 진정성은 '그 사회의 가장 기초적인 사랑공동체'에 있지, 꼭 남녀가 짝을 이뤄서 가족을 이뤄야한다는 그 구성원에 대한 형식적 법칙에 있지 않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가족에 호주제 같은 가부장 제도는 결코 들어올 수 없는 것이다. 호주제란 남성의 가족 소유화며 지배화지, 가족의 진정성과는 거리가 멀다. 나는 동성애자든 이성애자든 다양한 성애자들이라도 그것이 사랑과 신뢰로 엮어진 것이라면 그 사회의 기초공동체로서 받아들여도 괜찮다고 본다(기회가 된다면 하사구치 료스케 감독의 <허쉬>라는 영화를 추천한다. 그 영화는 가족이라는 정체성과 진정성을 묻고 대안가족의 그림-동성애 남자 둘과 이들의 아이를 갖고 싶다는 여성과 함께 살림을-도 보여주고 있다).

한국 교회는 언제까지 동성애 반대가 성경적이니 어쩌니 하면서 잠꼬대만 할 생각인가(혹시 동성애가 성경에 위배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일단 이미 잘 알려진 Daniel A. Helminiak의 저서인 『성서가 말하는 동성애-신이 허락하고 인간이 금지한 사랑』(해울출판사)을 소개한다. 저자는 그렇다고 동성애자들을 무조건 편향하지도 않는다. 즉 동성애자들이 무엇을 하든 옳다는 것이 아니라, 이성애자와 마찬가지로 동성애자들도 그리스도의 평화와 사랑을 실천할 때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다고 말할 따름이다). 한국 교회여, 성적 소수자인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자.

소외되어 왔던 소수자들의 목소리를 주체로

여성 스스로도 이제 더욱 주체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본다. 혹시 남성 목회자의 카리스마에 길들여진 교인들의 표정과 혹은 그 자신의 모습을 깊이 성찰해 본 적이 있는가. 여성이란 남성에게 길들여지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살찌우는 관계로서 하나님 앞에 존재한다. 그럼에도 남성우월주의는, 사실상 길들여진 한국 교계의 여성들에게도 분명하게 발견되고 있다. 남녀의 관계는 상호 협력과 서로 살림의 관계로 하나님에게서 부름받은 것이다.

   
▲ 한국 기독 여성들은 더이상 교회의 실질적 지도력을 거의 독점한 남성들에게 길들여진 종속 적 관계가 아니라 상호 협력의 평등 관계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사진은 모교단 총회. 남성 총대들에게 한복을 차려입은 여신도들이 인사하고 있다. ⓒ뉴스앤조이 주재일

이제는 여성 스스로 성경을 더욱 주체적으로 읽고 나서길 바란다. 더 이상 성경의 문자적 한계에 얽매이질 않기를 간곡히 바란다. 앞서 성경이 성차별을 말하고 있다고 해서 하나님의 본래 뜻도 그럴 것이라고는 결코 생각지 말라. 본래의 하나님 뜻은 사실상 인간의 그 문자적 한계를 훨씬 넘어서 있는 <성경 속의 성경>에 담겨 있다. 그러한 '성경 속의 성경'이란 성경 안에 스며든 가부장적 시대상황의 한계에 대한 과감한 극복으로서의 성경이며, 놀랍게도 여성들의 주체적 참여와 결부된 <살아서 역사하는 성경>이다.

하나님은 우리 자신들의 주체적이고도 능동적 참여를 통해 진리에 접근하기를 바라신다. 분명히 말하지만, 지금 현실의 잘못된 성차별적 관행을 방관하는 그런 성경이란 결코 있을 수 없다. 살아서 역사하는 그 성경은 지금의 이 21세기에도 살아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다. 그것은 언제나 잘못된 것에 대해선 시대의 아픔과 늘 같이해 왔던 놀라우신 은총의 말씀이요, 폐부를 찌르는 예언자적 말씀이다. 이제 우리는 그동안 억압되어왔던 여성 해방과 자연과 우주의 해방으로 나아가는 그러한 기독교의 벽돌을 쌓아야 할 것이다.

오늘날의 한국 기독교만이라도 제대로 바뀌어 보라. 그것만 제대로 한다 해도 아마 대한민국 사회 전체가 놀랍도록 질적으로 업그레이드 되지 않을까 싶다. 그동안 소외되었던 약자들을 우선적으로 돌봄으로써 사람을 살리는 기독교, 생명 살림과 평화누림의 기독교가 될 때에 21세기 한국 기독교는 분명한 희망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산자여 따르라'는 말이 있듯이, 결국 주체적으로 참여하고픈 깨달은 자의 몫에 21세기 한국 기독교의 미래와 운명이 달려있다고 하겠다.

눈을 떠보면, 참으로 하나님 나라는 여러분의 손에 달려 있잖은가!

(계속 이어집니다)


게시물수 180건 / 코멘트수 490건 RSS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왜 예수인가 (필독 원함!) (13) 미선 1299 11-04
GIO명상 방법 12단계 (몸기독교가 제안하는 수행 방법 중 하나..) (5) 미선 412 01-16
교회에 대한 권력비판? 교리비판? 어느 것이 더 유효할까? (4) 미선 341 12-06
종교운동과 사회운동을 구분 못하는 오류-기존 진보 기독교 비판 (1) (2) 미선이 434 10-14
몸학과 새로운 기독교 운동 그리고 30년 후의 기독교 미선이 424 04-11
기존 진보 기독교인들의 <생명평화> 담론에 반대한다! (업그레이드판) (8) 미선이 493 02-17
성서문자주의 또는 성서무오설 신앙보다 더 뿌리 깊은 고질병은? (9) 미선이 684 02-02
과정신학에 대한 비판과 민중신학의 신 이해 접맥 미선이 485 01-13
[예수운동 예배 견본] 새로운 기독교의 <예수운동 예배>를 위하여 미선이 722 11-28
<새로운 기독교>를 소개하는 전체 안내 링크글 (계속 업데이트 예정) 관리자 1937 11-03
내가 지금 믿고 있는 것은 과연 진리인가 정강길 4041 04-27
"어차피 이러한 기독교로 바뀌게 된다!" (모든 분들에게 고함) (17) 정강길 2652 02-18
새로운 기독교를 위한 조직신학적 성경공부 (신론) (2) 관리자 5289 05-28
새롭고 건강한 21세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위한 신앙선언서 (26) 관리자 4545 05-23
180 21세기 종교 진화의 방향, 몰락이냐? 도약이냐? 미선 269 06-16
179 "함께 만들어가는 종교와 진리" (2) 미선 307 06-10
178 기독교에서 얘기하는 병치유 귀신쫓음을 어떻게 볼 것인가? (1) 미선 319 06-10
177 몸에 모시는 하나님 (탈유무신론의 신앙) 미선 240 06-09
176 초자연주의>에서 <자연주의>로 가야 기독교가 산다! 미선 287 06-07
175 과학의 진화론에 대한 기독교의 창조론 입장들 미선 279 05-30
174 신학이 아닌 몸학에 기반하는 <몸학 기독교>로! 미선 273 02-10
173 신의 영어 표기 God ----> Gio 로 바뀌어야 미선 247 02-07
172 약자에 대한 눈뜸 - 잠자와 깬자의 차이 미선 277 12-08
171 <초자연주의>를 인정하면 나타나는 문제들.. 미선 231 11-04
170 [어떤 진리관] 진리(眞理)와 진리(進步)의 차이 그리고 퇴리(退理) 미선 198 07-05
169 시작이 있는 우주인가? 시작도 끝도 없는 우주인가? 미선 221 06-18
168 <종교 위의 종교>에 대해.. 미선 227 05-04
167 초자연주의와 자연과학 그리고 신비주의 구분 미선 224 04-06
166 지적설계론(창조론)자들과 유물론적 과학자들 간의 공통점 미선 208 12-10
165 종교 신앙의 반지성에 대한 단기적 대안 (1) 미선 211 11-24
164 "몰락이냐 도약이냐" 21세기 종교 진화의 방향 (종교학회 발표) 미선 204 09-10
163 '나(I)는 누구인가?'라는 근원적인 물음에 답하려면.. (1) 미선 221 04-13
162 유신론-무신론을 넘어서 <탈신론>으로 미선 366 05-04
161 <초자연주의>를 버려야 기독교가 산다! 미선 309 02-04
160 몸학 기독교 & 몸학 사회주의 추구 미선 246 12-31
159 <자유>에 대한 짧은 생각.. (2) 미선 321 08-24
158 몸학 기독교에선 기독교 신학이 굳이 필요하지 않은 이유 미선 365 03-24
157 인간 무의식의 두 가지 상태와 보다 상향적인 의식 발달을 위하여 미선 288 03-03
156 (1998년 원글) "화이트헤드 철학에서 본 민중신학 비판과 대안적 모색" (2) 미선 248 02-18
155 종교(宗敎, Religion)에 대한 동서양의 어원적 의미와 전후 혼동 오류 미선 243 02-06
154 기존 기독교와 <몸 기독교>의 분명한 차이들 미선 275 01-21
153 GIO명상 방법 12단계 (몸기독교가 제안하는 수행 방법 중 하나..) (5) 미선 412 01-16
152 2013년 계획.. 몸 기독교 (4) 미선 369 01-02
151 민중신학 40년.. (20년전 안병무 기사를 보며..) 미선 213 12-25
150 진보정치 교육의 사각지대와 민중 역사 주체론에 대한 반성과 재고찰 미선 202 12-22
149 교회에 대한 권력비판? 교리비판? 어느 것이 더 유효할까? (4) 미선 341 12-06
148 왜 예수인가 (필독 원함!) (13) 미선 1299 11-04
147 새로운 기독교의 방향과 몸학의 종교관 (2) 미선 239 10-05
146 새로운 기독교의 방향과 몸학의 종교관 (1) 미선 269 08-17
145 기독교 교리의 문제는 기독교만의 문제가 아니다! (3) 미선 322 06-11
144 초대교회와 바울에 대해... 미선 373 04-28
143 '작은 교회'가 정말 대안인가? 핵심은 교리다! 미선 301 04-22
142 진선미의 기원과 예수사건 (1) 미선이 285 02-24
141 중간 복음주의 신학자 알리스터 맥그리스의 <과학신학> 비판 (13) 미선이 310 12-13
140 끔찍한 <몸의 신학>에 속지 마시길! (유사품 주의) (8) 미선이 343 11-15
139 종교운동과 사회운동을 구분 못하는 오류-기존 진보 기독교 비판 (1) (2) 미선이 434 10-14
138 여전히 예수얼굴에 똥칠하는 개신교 정치세력들 (5) 미선이 350 08-30
137 새로운 기독교 역사의 국내 선구자들 : 유영모, 함석헌, 김재준 미선이 325 06-26
136 조용기 목사의 할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미선이 342 05-14
135 몸학과 새로운 기독교 운동 그리고 30년 후의 기독교 미선이 424 04-11
134 <인간의 자유의지>라는 착각과 환상에 관한 문제 (14) 미선이 620 03-04
133 기존 진보 기독교인들의 <생명평화> 담론에 반대한다! (업그레이드판) (8) 미선이 493 02-17
132 기존 진보 기독교계의 ‘생명평화' 담론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미선이 236 02-10
131 영혼구원의 강조에서 <총체적인 생명구원의 강조>로 (4) 미선이 272 02-05
130 성서문자주의 또는 성서무오설 신앙보다 더 뿌리 깊은 고질병은? (9) 미선이 684 02-02
129 죄의식의 종교에서 <이웃과 함께 성찰하는 종교>로 미선이 267 02-01
128 수직적 구조의 교회에서 <수평적 구조의 교회>로 (2) 미선이 351 01-21
127 서구식 목회문화가 아닌 <우리식 목회문화>로 미선이 303 01-21
126 과정신학에 대한 비판과 민중신학의 신 이해 접맥 미선이 485 01-13
125 ★ 예언 (1) 미선이 602 12-24
124 ♣ 새로운 기독교 신학의 인간론 (4) 미선이 438 12-19
123 ♣ 새로운 기독교 신학의 인간론 (3) (4) 미선이 499 12-12
122 ♣ 새로운 기독교 신학의 인간론 (2) (10) 미선이 702 12-05
121 새로운 기독교의 시간관, 태초와 종말로서의 시간관을 거부한다! (4) 미선이 590 12-01
120 ♣ 새로운 기독교 신학의 인간론 (1) 미선이 689 11-30
119 [예수운동 예배 견본] 새로운 기독교의 <예수운동 예배>를 위하여 미선이 722 11-28
118 숭배하는 예배에서 <닮으려는 예배>로 (1) 미선이 705 11-19
117 거꾸로 흘렀던 감리교 역사, 바로 세우기엔 아직 멀었나 미선이 596 11-10
116 <새로운 기독교>를 소개하는 전체 안내 링크글 (계속 업데이트 예정) 관리자 1937 11-03
115 [논평] 봉은사 땅밟기 추태, 성경 '문자주의' 그 야만의 역사 넘어서야 (1) 관리자 761 10-29
114 기존의 진보 기독교와 새로운 기독교 운동 (1) 미선이 605 10-22
113 1세대 민중신학자 안병무의 미완의 작업과 기존 민중신학의 과제 미선이 579 10-19
112 [새기운 성명] 4대강 사업 관련, 문정현 신부의 정진석 추기경 비판을 지지한다 관리자 557 10-19
111 스퐁, "스티븐 호킹과 유신론/인격신의 죽음" (작은불꽃님 역) 관리자 821 10-11
 1  2  3  



Institute for Transformation of World and Christiani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