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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진보 기독교 진영의 한계 (2)    
  글쓴이 : 정강길 날 짜 : 08-09-30 09:05 조회(2826)
   트랙백 주소 : http://freeview.org/bbs/tb.php/b001/206 




* 조용석님께

(먼저 조용석님이 내게 반론을 보내준 것에 대해선 감사하게 생각하는 바이다. 적어도 내 글에 대한 관심의 표현이긴 하니까. 하지만 반론 내용의 대부분은 지금까지 내가 에큐에 써 놓은 글들을 읽지 않았던 분의 글인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조용석님이 묻고 있는 대부분의 질문들은 이미 그동안 에큐에도 올려놓은 나의 모든 글에서 조목조목 답변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아주 상세하게 말이다.

따라서 이 글은 굳이 조용석님의 글에 대해 재반론을 취하기보다 앞서 '진보 개신교 진영'의 한계에서 못다한 나머지 얘기들까지도 포함시켜 논하고자 한다. 물론 읽어보면 알겠지만 재반론에 해당되는 부분들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나의 논조는 전혀 새로운 것도 못되고 예전에 에큐에도 썼던 나의 많은 주장들을 재탕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아직까지도 나 자신의 주장을 이채롭게 받아들이는 분들이 여전히 있다는 것은 그만큼 나 자신이 추구하는 <새로운 대안 기독교> 운동에 대한 관심이 없어서이기도 할 것이다)

어쨌든 조용석님글 가운데서 굳이 하나만 먼저 답변을 하고 간다면, “신앙과 신학이 보수적인 구교형, 방인성, 박득훈님은 머리가 아니라 발만 진보 진영에 걸치고 있는 것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서다.

이 답변에 대해서는 나는 “그렇다”이다. 물론 조용석님의 발만 걸쳤다는 표현은 오해가 있을 수 있다고 본다. 내가 보기엔 현재로선 이분들의 신앙과 진보 개신교 목사의  신앙은 그다지 뚜렷하게 구분되진 않는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실제로도 직접적으로 들은 표현이지만, 박득훈 목사의 경우는 “나는 신앙과 신학은 전통교리에 기반하면서도 실천적으로는 약자해방 민중해방을 추구한다”고 얘기한 적 있다.

게다가 진보 진영에 계신 분들 가운데도 자신에 대해 말하길, “나는 신앙은 보수요, 신학은 진보다”라고 말하는 분들도 있다. 내가 보기엔 이러한 괴리를 못느끼는 이유는 딱 하나다. 바로 철저하게 고찰하지 못하고 두루뭉술하게 고찰해서이다. 심지어 기독교 신관에 대해서도 초월과 내재에 대한 개념을 올곧게 이해하지 못하고 범재신론을 신의 전지전능성과 함께 양립가능하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적어도 조용석님 같은 분들께서 미리 참조해주시면 고마운 글들은 아래와 같다.)

- 한국 기독교의 보수 진보 표 - http://freeview.org/bbs/tb.php/d002/1
- '무조건 믿어라'의 내용에 따른 기독교 분류 - http://freeview.org/bbs/tb.php/d002/15
- 복음주의 진영, 어떻게 볼 것인가 - http://freeview.org/bbs/tb.php/d0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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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그 열매로 그들을 알아야 한다. 가시나무에서 어떻게 포도를 따며, 엉겅퀴에서 어떻게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찍어서 불 속에 던진다. 그러므로 너희는 그 열매로 그 사람들을 알아야 한다." (마태 7: 16-20)
 

기독교의 전통교리와 우리 사회의 진보적 사회운동은 양립 가능한가?

오래 전에 나 자신이 보수신앙에서 민중신학으로 인해 신앙이 뒤바뀌면서 한 가지 의문을 가진 바 있다. 7, 80년대 우리 사회의 민주화 운동, 통일 운동을 해오신 기독교인들은 대부분이 소위 말하는 진보 개신교 진영에 속하는 분들이었다. 김재준, 문익환, 안병무, 함석헌 등등 많은 기독교 인사들이 그러했었다.

그런데 신학교 시절의 커리큘럼을 보면 보수 개신교 진영과 진보 개신교 진영의 신학 커리큘럼이 매우 달랐었다. 민중 해방 신학이나 토착화 신학 및 종교다원론 같은 현대 신학 사상들은 진보 개신교 신학대에서만 그나마 편견이나 이단시되지 않고 올곧게 접할 수 있었고, 보수 개신교 진영의 신학교에서는 아예 커리큘럼에는 아예 빠져 있거나 살짝 언급한다고 하더라도 표피적이거나 이미 정통교리의 답을 전제하고서 거론하는 터라 결코 온전하게 접할 수가 없었다. 이때 기존의 보수 개신교 진영과 진보 개신교 진영의 가장 극명한 차이는 성서비평의 수용 여부에서 갈라지고 있었다(http://www.newsnjo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3756 참조).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한국교회 현장의 대부분은 성서비평을 터부시하는 성서문자주의가 지배하고 있었다. 당시 나의 의문은 이것이었다. “기독교의 성서문자주의와 우리 사회의 진보적 사회 운동은 그 어떤 관련이 있을까?”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성서문자주의를 받아들이는 대부분의 한국교인들의 의식들을 보면 한국사회에 대해 정치적 관심을 아예 갖지 않음으로서 기존의 보수적 흐름에 합류되거나 혹은 진보적 사회운동에 대해 아예 노골적으로 반대하는 기독교인들이 꽤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지금의 한국교회 현실을 봐도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잖은가.

한국의 대표적인 진보 개신교 신학자로 유명한 살아 생전의 안병무 박사는 말하길, 우리에게 사회적인 민중해방 투쟁도 계속 있어야하지만 기독교의 잘못된 교리신앙에 대해서도 저항하는 것 역시 계속 필요하다고 했었다(나 자신이 한신대 입학 이전에 90년대 초반에 부산에서 서울에까지 올라와 딱 한 번 그를 뵌 적이 있었는데 그때 종로 기독교회관의 강연에서 분명하게 그렇게 얘기했었다). 1세대 민중신학자 안병무는 우리가 아는 <사도신경>을 고백하지도 않았을뿐더러 그 내용에 대해서도 인정하지도 않았었다고 한다.

오늘날 개신교 복음주의 진영에서조차 돌아가신 늦봄 문익환 목사를 존경한다고 말하는 교인들이 꽤 있는데, 사실 문익환 목사의 신앙은 매우 래디컬한 기독교 신앙이었다. 감옥에서 썼던 그의 편지글을 보면 그는 떼이야르 샤르뎅의 진화론적 신학 사상이나 화이트헤드의 과정사상까지도 받아들인 목사였다. 다시 말해, 전통 기독교의 신앙관에서 보면 문익환 목사를 매우 받아들이긴 힘든 부분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극명하고 철저하게 고찰하지 못한 채로 문익환 목사의 실천적 삶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뿐이라는 얘기다.

가톨릭과 개신교가 함께 공통으로 삼는 전통교리를 포함하여 우리가 교회에서 대표적인 신앙고백으로 받아들이는 <사도신경>에 대해서도 나 자신은 면밀히 검토하여 분명한 수정 또는 폐기나 재개정이 이뤄져야 한다고 보는 사람이다. 보수 근본주의자들은 다음과 같은 교리를 확정짓고 있다. 1. 성서무오설 / 2. 동정녀 탄생 / 3. 대속적 죽음 / 4. 육체적 부활 / 5. 재림

그 외에도 신관을 보면, 기존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관은 전지전능하고 완전무결한 하나님이라는 <초월적 유신론>에 해당한다. 그런데 이러한 내가 보기엔 이러한 신관은 이제 낡은 것이다(이에 대해선 http://freeview.org/bbs/tb.php/b001/21 참조). 성서 안에는 원시적이고 야만적이며 조잡스런 신관이 있는가 하면 지배이데올로기에 저항하며 약자해방에 서 있는 예언자 전통의 신관도 함께 내포되어 있다. 하지만 오늘날의 신앙교리에 천지창조의 전지전능한 하나님은 고백되고 있긴 하지만, 이 세계와 함께 고난과 고통을 받으면서 함께 약자해방을 위해 일하시는 변혁의 하나님은 신앙고백문으로 표현되지 않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래서인지 오늘날 그래도 진보적이라는 몇몇 교회들 가운데는 '사도신경'을 아예 쓰질 않고 그 교회공동체의 신앙고백으로 대체하고 있는 경우들도 점점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기도 하다. 실로 우리는 이천 년 기독교 역사가 새롭게 바뀌고 있는 거대한 전환기에 놓여 있다.

나는 그 같은 낡은 전통교리 사상이 지금까지조차 왜 예수의 역사적 삶과 동일시되어야 하는 지에 대해 그 이유를 잘 알지 못한다. 가장 오리지날한 기독교 전통은 전통교리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 나라 운동을 일으켰던 <예수사건> 그 자체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의 전통교리 전부가 다 낡았다고는 보질 않는다. 이를테면 <성육신> 같은 교리는 오늘날에도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는 좋은 개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나 자신은 기독교 전통교리를 포함해서 기독교 사상사에 대한 전면적인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것이며, 가능하면은 지금까지의 현대 사상사의 성과들도 함께 반영될 수 있는 새로운 기독교 건설 작업이 있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 대안으로서 내놓은 작업이 나 자신이 이곳 뉴조에도 연재하고 썼던 <미래에서 온 기독교>이다.

우리가 전통교리를 받아들인다는 것인 그때 당시에 축조된 거기에 깔려 있는 철학적 세계관까지 암묵적으로 수용하게 되는 위험성도 함께 지니고 있다. 이를 테면 자신은 그리스 헬라 철학의 관념적 이원론에 빠졌다고 생각지 않을 진 몰라도 신과 인간, 계시와 이성, 교회와 세상, 영과 육, 정신과 물질, 본질과 현상, 등등 이러한 숱한 개념들은 위계적 이원론이라는 철학적 베이스를 함께 깔고서 축조된 것이라 부지불식 간에 세계 이해에 대한 왜곡들도 은연중에 함께 스며들게 된다(나 자신은 이미 이에 대해서도 언급한 바 있다. http://freeview.org/bbs/tb.php/b001/13 혹은 <미래에서 온 기독교>(에클레시안) pp.74-84 참조).

유물론자들의 경우 종교를 관념으로 보며 이를 받아들이기 힘든 근원적인 이유에는 사실상 서로 간의 철학적 패러다임의 충돌에 기인한다. 반면에 진보 개신교 진영의 민중신학이 깔고 있는 철학적 세계관에 대한 고찰은 http://freeview.org/bbs/tb.php/d001/10 참조(보다 자세한 내용들은 본인의 졸저 <화이트헤드와 새로운 민중신학>(한국기독교연구소)에서 상세하게 논증하고 있음).

신학현장과 교회현장의 이분화 현상 및 진보 기독교인들의 위선

내가 보기에 진보 기독교 진영의 고질적인 문제를 들라고 할 경우 나는 서슴없이 <신학현장과 교회현장의 이분화 현상>을 꼽을 것이다. 보수 기독교는 애초부터 신학교 시절부터 보수적일테니까 목회현장도 당연히 보수적이겠지만 진보 기독교 진영의 경우는 신학현장과 목회현장의 이분화 현상이 매우 두드러져 있다. 물론 이점에 대해서도 나 자신은 이미 자세하게 썰을 푼 바 있다.

“성서비평? 인문학적 소양? 토착화신학? 종교다원론 문제? 그딴 것들은 교회현장에선 웃기는 얘기다. 그저 『목적이 이끄는 삶』이나 네비게이토 시리즈, 두란노 소그룹 나눔, 예수전도단, 프리셉트 GBS, 옥한흠 제자훈련 등등 그런 성경공부 교재 같지도 않은 교리교재들이 성경공부인 것 마냥 떡 하니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현실 아닌가. 그저 오늘날의 교회들은 주구창창 경배와 찬양으로 시간을 쳐발라서 은혜의 도가니탕에 빠뜨려버리면 그만인 것이다.

많은 이들은 신학현장을 나와 목회현장으로 들어가면, 신학교에서 배웠던 것들을 가르치지 않는다. 오히려 자라오면서 그 자신의 교회 시스템에서 익혀 왔던 것들을 뻔히 다시 재생산해대는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보다 열려 있고 자유로워야 할 작금의 신학현장도 이제는 역공을 받게 되면서 보수적인 목회시스템의 영향과 통제를 받는 심각한 지경으로 나아가고 있다.http://freeview.org/bbs/tb.php/b001/109 발췌 참조.

90년대 이후의 기장의 보수화 현상이나 변선환 종교재판 이후의 감리교 진영의 행보는 이에 대한 극명한 예증사례에 지나지 않는다. 목회자들만 그렇지 않다. 진보 기독교에 속한다는 신학자들 가운데도 솔직하지 못한 분들이 꽤 많다. 이를테면 동정녀 탄생을 역사적 사실로 믿지 않는 신학자들도 꽤 있는 것으로 안다. 그렇지만 이를 분명하고 솔직하게 표현하진 않는다. 어떤 점에서 그런 교리들은 역사적 사실 유무보다 신학적 의미가 더 중요하다고 말하면서 살짝 비껴가곤 할 따름이다.

아마도 동정녀 탄생을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고 얘기했다간 한국교회 사람들로부터 지탄받거나 교단에 불려가서 사상검증을 받을 가능성은 여전히 꽤 높아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온전한 자기 밥줄을 보전하기 위해서라도 솔직하게 표현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사례는 최근에까지도 있었다(최근 뉴스앤조이에 나온 ‘신의길 인간의길’ 연출자 인터뷰 내용 기사를 보라). 물론 죄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진보 신학자들 가운데도 그런 점들에 대해 솔직하게 얘기하는 걸 꺼려하거나 시끄러워진다고 회피하는 분들도 있다는 점만큼은 부인하기 힘든 사실이라는 얘기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생각해보라. 한국교회 현장은 여전히 동정녀 탄생의 역사적 사실의 유무에 매달리고 이를 중요시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역시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이다. 비단 성경의 동정녀 탄생뿐만 아니라 노아홍수와 여리고성 이야기를 비롯해서 성서 안의 많은 초자연적 사건들을 실제로 일어난 역사적 사실로 여기는 한국교인들이 어디 한 둘이란 말인가. 그렇기에 이러한 현실을 외면하는 처사는 소신 있는 온전한 신학자로서의 모습이라고 보기엔 힘들다.

따라서 진정으로 분명한 답변을 해주고자 한다면, 동정녀 탄생설의 역사적 사실 유무에 대하여 솔직하게 답변하면서 동시에 그에 대한 신학적 의미를 함께 제시해주는 것이야말로 보다 바람직할 것이다. 만일 후자만 취할 경우엔 당면한 현실의 문제는 여전히 오리무중으로 두루뭉술하게 남겨지게 될 따름이다. 자신의 밥줄을 온전히 보존하기 위해 혹은 시끄러지는 반발이 두려워 솔직하지 못하는 진보 기독교인들에게도 나는 다음과 같은 예수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눈먼 사람이 눈먼 사람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 (누가 6:39 )

실제로 이제 진보 진영의 신학교도 예전과 다르게 진보 기독 운동가들을 배출하기보다는 그저 자기 교단의 교세 확장을 위한 재생산 수단으로 변질된 점이 없잖아 있다. 정말로 둘 다 구덩이에 빠지고 있는 것이다. 오래전 김재준 목사에 대하여 한국 보수신학의 거두라는 박형룡이 나서서 시행한 신학사상 검증 사건은 한국기독교 역사에서도 이젠 잘 알려져 있다.

알다시피 장공 김재준 목사는 거기에 굴하지 않는 기개와 소신을 가지며 한국교회사 찬연한 대표적인 진보 교단인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 교단을 세우기까지 했다. 하지만 현재의 보수화되어 가는 진보 개신교의 전반적 현실을 보노라면, 이제는 한국교회에 정말로 진보 진영이 있기라도 한 것인가라는 격세지감마저 느껴질 정도다.

기존의 진보를 넘어 새로운 진보를 위하여

진정한 진보는 오류에 대한 성찰과 반성에서 출발한다. 나는 오늘날 기독운동의 1차적 텃밭은 바로 기존 기독교라고 생각하는 바이다. 오늘날 많은 진보 기독교인들도 기독 운동의 대중성을 고민하곤 하는데, 만일 우리 한국의 기독교인들만이라도 제대로 건강하게 서 있도록 해보라. 그것은 이미 그 자체로 수많은 대중들을 포섭하는 운동이기도 하잖은가. 게다가 우리의 기독신앙이 제대로만 서 있다면, 내가 보기엔 한미 FTA나 촛불집회 같은 많은 사회적 이슈들을 직접 토로하지 않아도 저절로 관심을 가지리라고 보고 있다.

삶의 동기부여는 그 자신의 궁극적 신념에서 나온다. 따라서 우리에겐 새로운 동기부여를 갖는 삶의 전인적 변화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효과는 한 개인의 삶에서조차 전인적 지평으로 나타나는 것이기에 실로 어마어마한 것이다. 우리 시대의 진보적인 기독운동은 바로 현실의 삶을 하나님 나라화하도록 기존 기독교인들을 <새롭고 건강한 기독교인>으로 이끌어내는 운동이다.

더이상 한기총 같은 꼴통들이 생산되는 기존 기독교 시스템으로선 곤란한 것이다. 이미 그들과는 근원적으로 다른 신앙의 젖줄에 서 있다. 내가 보기에 결국 기독교인에게 결정적인 것은 성서해석, 신해석, 예수해석에 대한 문제다. 이것이야말로 기독교 정체성을 지니려는 신앙인에게 있어선 핵심 키워드며, 이에 대한 신념을 변화시키는 운동이 보다 1차적이고 근원적이라고 본다.   

보수 근본주의자들의 교리인 성서무오설과 제국주의 만행을 저지른 미국과의 혈맹 주장이 서로 아무 관련이 없다고 보는 건 하나님 나라의 총체적 관련성을 보지 못한 파편화된 시각일 뿐이다. 김홍도가 멸공 반공을 좋아하고 미국을 좋아하는 이유가 개인적 취향이라고 생각하는 건 크나큰 오산인 것이다.

인식이 바뀌고 삶이 바뀌어야 한다. 즉, 내가 의도하고자 하는 기독 운동은 기독교인으로서 살아가야 하는 <삶의 동기부여>를 지속적으로 심어주고자 하는 운동이다. 결국 기독인으로서(혹은 예수와 성서를 가지고서) 바른 시각과 바른 견해를 가지도록 이끌고 형성시키는 데에 나는 새로운 진보 기독운동의 자리가 있다고 보는 사람이다.

신자유주의의 폐해와 미국의 제국주의적 만행을 백날 홍보해봐도 그 효과는 기껏해야 그것은 그때뿐일 수 있다. 보다 중요한 건 <삶>이며, 또한 그 삶을 지탱하는 <신념>이다. 삶을 총체적으로 변화시키는 운동이 아니라면 그것은 제대로 된 기독교가 아닐 것이다. 우리들이 추구하고자 하는 새로운 기독교 운동은 바로 전인적인 삶에 대한 총체적 해방과 건강한 구원을 지향한다. 만일 그것이 제대로 된 기독교 신앙이라면 그것은 결국 예수의 라이프스타일로서 드러난다.

이제 나로서는 새로운 기독교를 위한 계몽운동이 일어나야 할 것으로 본다(노파심에 하는 얘기지만, 계몽이라고 해서 꼭 근대 계몽주의를 떠올릴 필욘 없다). 지금 한국교회 현장에는 수많은 민중들과 그 영혼들이 죽어가고 있다. 기존 기독교의 그 이원론적 폐단은 기껏해야 종교의 아편 구실을 할 뿐이잖은가. 기존 기독교라는 현장은 정말이지 매우 심각한 지경이다.

따라서 기존 기독교를 대체하는 <새로운 기독교>를 형성하는 운동이야말로 나는 보다 근원적인 오늘날의 진보 기독운동이라고 본다. 이 패턴은 역사적 예수가 수행한 운동과도 동일하다. 이천 년 전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바로 기존 유대교 율법서와 경전들을 다시 새롭게 해석해서 나온 <새로운 유대교 운동>이 아니었던가!

다시 말해, 현재로선 참종교를 추구하는 운동, 새롭고 건강한 기독교를 위한 변혁운동이야말로 기독교인으로서 세계 전체에 기여하는 진보적 사회운동이기도 한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1차적으로는 기독교인의 자리에 놓여 있음을 피할 수가 없다. 그래서 건강한 사회로 나아갈 수 있는 건강한 기독교, 말 되는 기독교, 현대 과학의 성과들과도 충돌하지 않는 솔직한 최선의 합리성에 기반하면서 한편으로는 오류와 비극에는 언제나 겸허한, 그러한 건강한 기독교, 새로운 기독교의 건설이야말로 더욱 시급한 과제라고 볼 따름이다.
 
 
 
 
 
신명 (08-10-01 17:24)
 
문득 들러 글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글 쓰신 분은 그동안 많은 연재물을 통해 성실하고 일관되게 논지를 펴나가고 계신 듯 합니다.^^ 그러나 이 댓글의 저는 성실한 독자가 아닙니다. 하여 이 댓글이 실례가 될 수도 있음을 염두에 둡니다. 진보진영의 한계라는 연재 두 개를 읽고난 느낌입니다. 첫째,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는 말이 있지요?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가 각 단계가 점증적으로 나열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모든 것을 꿰뚫는 한 가지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수신하게 하고, 제가, 치국, 평천하 하도록 하는 어떤 것(중용)이 있다는 것을 중심에 두고 해석하자면 수신, 제가... 그 단계는 어쩌면 설득의 기술에 불과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생각으로 볼때, 님께서 '1차텃밭 그리고 나서...'라는 관심사를 가진 것은 다소 속좁아 보입니다. 그 속좁은 관점이 기독교정신에 대한 자기고백으로 사회운동에 관심을 갖고 사회현상 중에 하나님의 형상을 보고자 하는 기독운동을 옳게 평가할 수 없겠다는 생각입니다. 제 생각에 님께서는 지금 기독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못내 못마땅한데 그 이유는 교회자체부터 개혁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들리기 때문입니다. 음... 이 말이 맞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맞다 하더라도 아주 일부에 지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사회변혁을 위한 기독운동은 어떤 고백(핵심동기, 행동을 보장하는 어떤 감동)으로부터 시작되겠지요. 그 고백이 육신이 되는 현장은 교회도 되고, 사회도 되며, 또 순전히 개인적인 차원의 영성의 장도 될 수 있다고 봅니다. 수신을 완료해야만 제가를 할 수 있다는 논리는 고백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1차 텃밭이라고 했는데, 님의 말을 엄밀히 보자면, 그보다 앞선 것이 개인의 올바른 신학쳬계이고 그 신학체계는 2000년 전 팔레스틴에서 고백되었던 예수의 해방운동에 맞춰져야 한다는 강요가 깔린 것 같습니다. 저의 이런 비판은 그야말로 두루뭉술하고 나아갈 바를 흐릿하게 하는 반동적인, 또는 딴지를 위한 글로 여길 수도 있겠습니다만, 저는 앞서 말한 고백이란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님보다 래디컬하다 할 만합니다. 둘째, 기독운동 진보진영의 한계가 있다면 그것은 말에 있다고 봅니다. 저는 이것이 현대사조의 한계라고 생각해요. 진리랄 만한 것은 다 드러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문제는 어떻게? 이지요. 님께서도 열매를 보고서 안다는 예수의 말씀을 인용하셨더군요. 열매를 내는 방법이 화두인 시대에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제 생각하에 님께 하고 싶은 말은, 정강길 선생님, 이제는 그렇게 하신 글을 보여주십시오라는 말입니다. 생각을 말하는 것이 아닌 삶으로 표현해내는 것, 표현하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음... 이 말은 조금 왜람되었지요?^^ 이미 그렇게 살고 계실지도 모르는 일인데 말입니다. 셋째, 그러나 왜람된 윗줄을 지우지 않았습니다. 왜냐구요? 님의 글에서는 적대적인 느낌이 물신풍겨납니다. 글쎄요. 함께할 사람들이 연대하기를 꺼려할 만한 느낌이 난다고나 할까요? 글은 논리만 전달하는 것이 아니겠지요. 저는 글과 말에서 감정읽기를 더 선호합니다. 평행선을 유지할 만한 논리는 얼마든지 있기 때문에 논리만 따지자는 것은 참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감정을 공유하면 사람 만나는 것이 참으로 즐겁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기독운동 뿐만 아니겠지요. 이 시대의 새로운 대안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연대하는 자들끼리의 공감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의 논리로 통합되지 않는 이유는 각자 처한 상황이 다르기 때문이겠지요. 저마다 다른 경험에서 출발했으니 논리의 지향점이 같다손 치더라도 그 방법의 전개는 다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연대하지 못하고, 그리고 자괴감에 빠집니다. 이런 한계라니... 하면서 말이지요. 이제 이런 것은 지긋지긋합니다. 다른 것이 틀린 것은 아니잖아요? 다른 것 인정하면서 공감하는 것에 더 신경을 써야하지 않을까... 이것이 제 사고의 저변입니다. 물론, 흐리멍텅하다, 치열하지 않다, 두루뭉술하다.. 뭐... 이런 말 듣습니다만, 그렇다고 중심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넷째, 기독운동이든, 무엇이든, 현재 진행상황을 단정하여 결과삼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무엇이든지 창조의 과정 중에 있지 않습니까? 새로운 기독교 건설이 시작되지 않았다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까지 저는 나름대로 님의 글에 대한 비판을 전개했습니다. 제 비판이 좀 어설프지 싶긴 합니다. 게다가 배수진 치는 것을 항상 잊지 않으니 불손하기도 하네요.^^ 그러나 맞받아친 것은 되지 싶습니다. ^^지목

    
정강길 (08-10-02 01:48)
 
오래전 80년대에도 그런 일이 있었지요. 집회 현장에서 민주화 운동의 필요성을 한창 외치고 있는데
자유 발언 시간에 어떤 분이 갑자기 단상으로 올라가서 마이크를 잡고서
"우리 사회를 위한 운동도 참 좋지만 먼저 개인이 구원받지 않으면 안된다. 개인이 온전해야 결국은
이 나라가 우리 사회가 바로 선다"라며 집회 현장에 참여하신 분들에게 개인구원을 역설한 열혈 개신교인이 있었지요.
물론 신명님이 그같은 열혈 개신교인이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그런데 먼저 그 개인이 기본적으로 삶이 건강해야 한다는 얘기는 너무나 당연한 얘기입니다.
그것은 저뿐 아니라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얘기일 것입니다.
님이 스스로 성실한 독자가 아니라고 밝혔듯이, 제가 보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에 대해서
그리고 개인과 사회에 대해서 이미 밝혀놓은 여러 글들이 있는데도 제 글에 대해 잘 안읽고
저에 대해 얘기하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니면 아예 필요없다고 생각하시거나..
게다가 세기연 소개에도 나오지만 1.자기변혁 2.교회변혁 3.사회변혁을 분명하게 명시하고 있지요.
어쨌든 저 역시 신명님을 모르지만 신명님이 저를 잘 모르는 것 역시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제 글이 날이 선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제게 분명한 전선이 있기 때문입니다.
양보할 수 없는 지점 또한 있는 것이죠. 예수가 종종 바리새인들과 적대적 전선을 그을 수 밖에 없었듯이
우리 사회의 적대 세력들에게 대해 "독사새끼"라는 표현을 할 때도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감정 차원의 문제가 아니니까요. 님이 감정 읽기를 선호하는 것은 그것은 님의 개인적 취향의 문제일뿐
이미 우리의 시대는 항상 개인적 차원을 넘어서 있다는 것또한 역시 잘 아시리라 봅니다.
전선을 분명히 해두고자 하는 것은 논지를 애매하지 않고 뚜렷하게 하기 위한 점도 있답니다.

저 역시 개인적으로는 <일상적 대면의 관계>에서는 가급적 논리보다는 <감정읽기>를 선호합니다.
제가 요즘은 특히 심리학 공부를 하면서 그런 점에서는 님 못지 않게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저를 직접 만난 분들 중에는 저에 대해 언론에 써 놓은 글로만 뵙다가
직접 뵙고 얘기나누니까 너무 다른 느낌이라는 얘기도 종종 듣곤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개인의 일상적 대면 관계를 넘어서 사회적 차원의 언술은
감정으로만 나아갈 수 없는 지점이 있습니다.
신학도 불가피하게 logic을 다룰 수밖에 없는지라 논리적 합리성을 중요하게 여길 수밖에 없지요.
하버마스가 얘기했듯 사실상 타자와의 소통은 바로 그 지점에서 일어나니까요.
설령 그것이 예술 문화의 차원이라고 하더라도 위대한 예술에는 이성에 기반한 감성이지..
그저 감성만 터치한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위대한 작품들은 정교한 우주적 통찰도 같이 담고 있다고 봅니다.
단지 그 표현을 감성적으로 드러내고 있을 따름이지요.

우리 안에 감정의 문제만 있다면 사실 그것은 영원한 평행선이 되기 십상이지요.
명박이나 한미FTA가 감정적으로 싫다는 것만으로도 공감이 될 수 있는 건 결코 아니잖아요.
싫더라도 거기에는 분명한 근거와 이유가 제시될 때 설득적 공감이 일어나는 거라고 봅니다.

끝으로 기독운동이 창조의 과정에 있다는 것 공감합니다. 그렇게 따지면 저의 비판적 행보도
여전히 진행과정에 있다는 말로 똑같이 되돌려주고 싶군요. 신명님 역시 저에 대해 단정하시면 곤란하지요.

전반적으로 말해서 신명님의 말씀은 너무 당연한 얘기들이라 역설적으로 그저 하나마나한 얘기가
되고 있다는 점도 분명하게 직시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얘기들이라면 나름대로 받아들이겠지만
비생산적이고 피곤한 반복적 얘기들을 계속 할 수만도 없는 상황도 있잖아요.
아마도 제 생각에는 제 글이 신명님의 그 어떤 부분을 감정적으로 자극해서
님이 결국은 이런 글을 쓰게 된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것은 신명님이 처하고 있는 삶의 자리에서 연유하겠지요.

님 스스로는 제 글에 대해 맞받아쳤다고 하지만.. 글쎄요... 아직까진 좀 아닌 것 같아 어쩌지요.
물론 앞으로도 제 글에 대해 계속적인 비판적 관심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이것은 제 바램이긴 해도 궁극적으로는 님의 자유에 달려 있겠지만요.
그럼 좋은 하루 되십시요.

주님의 평화~!!

P.S - 혹시 다음번에 글을 쓰실 경우에는 친절하게 문단을 좀 나눠주시면 더욱 감사하겠습니다.
그럴 경우 님 글에 대해 좀더 읽기가 편할 수 있기에 그만큼 공감의 확률도 높일 수 있지 않을까요?^^*

신명 (08-10-02 10:27)
 
^^ 답글 감사합니다. 잘 읽고 갑니다.

이전에도 종종 뵈었으니(지목)
앞으로도 뵐 날이 있을 것 같습니다.
뵙고 진심을 논하면 좋겠습니다.

늘 주님의 평화!^^

추신.
어랄라? 윗글 수정이 안 되네요.
문단을 나누려고 했는데...ㅎㅎ

    
정강길 (08-10-02 12:09)
 
(훔.. 내가 아는 한신의 지목인가? )

어쨌든 원한다면 뵐 기회는 얼마든지 있으니..

글구 내가 말하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강요가 아니라
그것은 기독교라는 정체성의 차원에서 제시되는 것임을 인지해주시길..
내가 알기에 기독교의 정체성은 어떻게 해석하든 간에 성서의 예수를 빼고 논할 순 없다고 봄..
그러한 정체성의 문제는 강요적 전제가 아닌 종교 선택의 차원에서 이미 제시되고 있을 뿐임을..

늘 평화와 건강을 빌며..^^*

P.S - 원래 코멘트가 달린 글은 수정이 힘듦
그래서 부득이 다음번 글부터라고 말한 것임..

21세기예수 (08-10-03 01:14)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뵙네요. 화이트헤드와 새로운 민중신학이후에 기독교진영내부에 활발한 토론과 확장이 있기를 바랬습니다만 생각보다 21세기 우리 기독진영이 훨씬 딱딱하고 폐쇄적이라는 생각이 들고,인적,물적 자원도 좋은 의미에서는 풍부하지 못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반면 물신숭배적이고 사대적이고,천박한 기독교의 흐름들은 올해들어 노골적이고,더더욱 지배적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21세기 한국기독교의 모습을 만신창이로 만들고 말입니다. 대안을 향해가는 새로운 시도,접근들은 적극적으로 환영하고,열린마음으로 더 많은 토의를 거치고, 자양분을 흡수하고, 그리고 실천적으로 검증해보고 이것을 다시 이론화하는 노력들이 있어야 하는데, 그리고 그런 활발한 움직임이 물질증식과 천박한 교세확장의 흐름을 따라잡을 만한 속도를 내야 하는데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암튼 저는 좀더 새로운 시도들, 연대,최선을 향한 더 많은 이론적 노력들이 경주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선생님의 새로운 후속작품들도 은근히 좀 압박을 하고 싶군요.^^ 교회도 운영하시고 까페도 운영하시고 학교까지, 시간이 많지 않으실 것 같습니다. 건강하시길...

    
정강길 (08-10-03 05:49)
 
21세기예수님.. 오랜만이시네요.^^
말씀하신대로 지난한 과정에 있답니다. 저도 좀 속도를 내고 싶은데
생활여건들이 잘 받쳐주질 않네여..
그래도 포기하는 일은 없을터이니 넘 심려하진 않으셔도 될 듯~^^;
어쨌든 힘이 되는 격려와 관심에 감사드릴 따름입니다.
21세기예수님도 늘 건강하시길..

Windwalker (08-10-06 15:04)
 
작년부터 이 사이트를 우연히 알게 된 후, 처음 읽은 정강길님의 글부터 제가 그 동안 생각해 온 것과 아주 많이 합치한다는 점을 발견하게 되었고 전부는 아니지만 많은 글들을 읽었습니다.  제 자신은 대단히 보수적인 교회를 십 수년간 다니고 있는데 참으로 답답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제 눈에는 말도 안되는 모순들과 비이성적인 것들이 확실히 보이는데, 그저 믿음으로 인한 구원만 암암리에 강요하는 식에 허탈함과 비애마저 느낍니다.

중세에 일어났던 일들이 모습만 바꾸어 재현되는 것을 보면 역사는 반복한다는 말을 실감합니다.  아마도 동정녀 마리아, 지구 6000천년설, 신격화된 예수 등등을 믿지 않으면 이미 예약해 놓은 천당행 티켓을 잃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심층 저변에 깔려 있어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러나 아무리 시계를 거꾸로 돌리려고 해도 진실은 결국 드러나게 마련이라고 생각합니다.  빠르면 30년, 늦어도 100년 안에 15세기의 천동설처럼 문자주의에 기초한 현재의 보수적인 믿음들 (상기 외에 아담과 이브, 7일 창조설, 노아의 배 등등)이 무지의 소산이었던 것이라고 밝혀질 것을 확신합니다.  그 때쯤이면 (저도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겠지만) 예수에 관한 신앙이 아닌 예수의 신앙으로 바뀌어질까요?

요즘 세상에 코페르니쿠스같이 화형에야 처해지겠습니까마는 워낙 신앙 환경이 보수적이고 교회내에 제 나름의 위상과 무게 때문에 (아주 완곡하게 제 소신을 표현하기는 해도) 강한소리는 내지 못하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예수의 신성을 완곡하게 부인만 해도 출교당할 것이 뻔한 상황이다 보니, 죽음의 위협 (물론 그 정도는 아니지만) 앞에 굴복하는 갈릴레오의 심정을 십분 이해하는 것으로 자위하고 있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저의 심경을 토로하는 나약함을 나무라셔도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런 연유로 읽고 공감하는데서 그치지 않고 정강길님을 비롯한 필진들의 용기에 뜨거운 박수와 격려를 보냅니다.

- 그래도 지구는 돈다.

    
정강길 (08-10-07 08:25)
 
Windwalker님~ 반갑습니다^^
그동안 많이 힘드셨겠지만 그래도 시대의 흐름을 잘 읽고 계신 거라 생각합니다.
이천년 동안 곤고화된 긴긴 흐름들이 이제 가까스로 점점 바뀌어가고 있을 뿐인데
어디 금방 바뀌어지겠습니까.. 이제 시작일 따름이니
스스로를 너무 나약하다고 생각하실 필요는 없다고 보여집니다.
결코 Windwalker님이 나약하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오히려 비슷하게 고민하는 분들도 많습지요.
혹시 괜찮으면 세기연 모임에 오시면 Windwalker님처럼
그 비슷한 고민을 하시는 분들을 많이 만나실 수도 있답니다.
말씀하신대로 그래도 지구는 돌고 있기에..
힘이 되는 Windwalker님의 말씀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정강길 드림

        
Windwalker (08-10-10 15:31)
 
댓글 감사합니다.

저는 오랜 세월을 미국에서 살아 온 교포입니다.  그러나 여기도 한인교회의 상황은 한국과 그리 다를 바가 없습니다.  공맹의 나라인 중국보다도 훨씬 더 보수적인 유학 이념을 가지고 있었던 조선처럼, 미국 안에서 미국 교회들보다 훨씬 더 보수적입니다.

현재 한국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피상적으로 밖에는 잘 모릅니다.  오체투지같은 말은 들어는 봤는데 무엇을 하고자 하는 것인지 정확히 몰랐었습니다.  주최하시는 포럼같은 곳에 가고 싶어도 공간적, 시간적 여건상 갈 수가 없음을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제 눈을 항상 젖게 만드는 마리안느, 마가렛, 테레사 수녀, 본 회퍼 목사 이야기는 예수가 따로 없다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이기적인) 개인 구원론이나 위협적인 종말론보다 훈훈한 인간성이 살아 숨쉬는 신앙의 교회가 되기를 바라면서...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한 8:23).

    
바비도 (08-10-07 17:32)
 
Windwalker님 만나뵙게 되서 반갑고 환영합니다.^^ 어려운 교회 여건 속에서도 열심히 노력하시는 모습이 느껴집니다.

너무낙담 하지 마시고 힘을 내시길 바랍니다. 저희 세기연에도 Windwalker님과 같은 고민을 하시는 분들이 많으니

여건이 되시면 월례포럼에서 뵐 수 있었으면 합니다. 좋은 가을 되시길 바랍니다.^^

산수유 (08-10-08 09:24)
 
농사를 짓기 위해서 나름대로 공부를 하고, 묻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책을 통해서는 이성적 부분이 해결 되었으나 질문을 통해서는 이성적 부분의 해결은 요원하기만 하였습니다. 몇 십년을 농사를 지은 사람보다 이론적으로는 내가 앞서게 되었으나 실제로 농사에 있어서는 정반대의 효과가 나타났습니다.
앎에 관한 역사를 훓어보면 계몽의 시기까지 이성적 앎이 앞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포스트 모던 이후 이성적(지적) 앎보다는 몸의 앎을 중요시하는 경향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리 호이나키가 그의 책 정의의 길로 비틀 거리며 가다에서 밝힌바 있듯이 땅에 잇대어 사는 농부들은 이론적으로는 캄캄하지만 몸으로는 박식합니다. 부르디외도 이성적 앎보다 몸의 앎에 대해 역설하고 있습니다.
진보 기독진영에서 사회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은 논리적으로는 정선생님처럼 정합성을 갖추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운동의 현장에서 어떻게 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 건설에 더 필요한 것인가 하는 것을 몸으로 알고 있는것 같습니다. 그래서 일찍이 사도신경을 고백하지 않는 사람도 여럿 보았습니다.
몸의 앎과 지적 앎은 서로 상충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지적 앎은 몸의 앎으로 가야하고(이것이 진정한 공부요, 신앙일 것입니다.) 몸의 앎은 실천의 현장에서 의문이 드는 것을 끈질긴 사유를 통해 묻고 답해야 할 것 입니다.
지적 앎을 우선시하는 경향이 있는 사람들은 흔히 지식인이 이러한 경향을 보이는데, 그곳에는 그렇게 예수가 함께 하고자 했던 민중이 소외될 수 있음을 인식해야 할 것 입니다.
또 운동의 현장에 있는 사람들은 이론이 뒷받침 되지 않고는 운동의 성찰과 지속성을 담보할 수 없다는 인식하에 이론적 작업을 하는 사람들의 도움을 힘입어야 할 것 입니다.
예수살기 운동에 동참하는 사람으로서 정선생님의 이론에 도움 받는 바가 많다는 사실을 알아 주셨으면 합니다. 그러나 예수살기에 동참하시는 분들의 몸의 앎도 또한 변호할 필요가 있어 부득이 댓글을 남깁니다.
저는 요즘 수경스님과 문규현 신부님이 하시는 기도 사람의 길, 생명의 길, 평화의 길을 찾아가는 오체투지 순례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오신 다양한 분들 목사님들 이론적으로는 밝지 못하지만 이미 몸으로 교리의 한계를 극복하지 않았나 합니다.
10월 포럼에 김홍술 목사님께서 오신다니 저도 시간을 내서 참석하도록 하겠습니다.

    
마루치 (08-10-18 02:54)
 
뒤늦게 그을 보았는데 "이성적 앎에서 몸의 앎으로" 라는 말씀이 인상적이네요.

사실 요즘에 이성적으로 안다는게 몸과 괴리될 때 오는 부작용을 벌써부터 혹독히 겪고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月光 (08-10-08 11:20)
 
김광철목사님! 오랫만입니다. 촛불시위 중 개신교목사님들 성명서 발표하실 때 뵈었으니 한 4개월 가까이 되었나요?
저 역시 목사님의 말씀을 절감하고 있습니다.
과거 몸으로 운동할 땐 비록 이론적으론 부족했지만 내 이웃이 존재했었는데, 이론으로 무장하면서부터는 현실에서는 내가 돌봐야할 이웃들이 사라져버렸었습니다.
그러다가 이현주목사님을 만나뵈면서부터 삶으로 자본주의를 거부하고, 삶으로 세상을 이겨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이론보다 교리보다 중요한 것이 삶이 예배가 되고, 예배를 내 삶으로 드리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 곳곳에서 삶으로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는 이들이 남아있는 것을 보며 저도 역시 그렇게 삶의 현장에서 그렇게 살고 싶다고 다짐하며,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합니다.
이 번 10월 포럼은 어떻게든 가고 싶은데 그 분께서 허락하실지...???

바비도 (08-10-08 15:11)
 
김광철 목사님 반갑습니다.^^  지난 촛불시위에서 세기연 회원들과 목사님이 함께하면서 광화문 인근 인도에서 입가심(?) 하다가
"뉴스후" 취재 기자와 우리 일행이 인터뷰하였던 일, 촛불시위 도중에 허기진 배를 채우려고 인사동 감자탕 집에서 야식을 함께한
일, 명박산성을 보며 놀랬던일들의 기억이 새록새록 합니다.^^

그리고 저번주 PD수첩에서는 목사님께서 "오체투지 순례"에 동참하고 계시고 현장에서 인터뷰 하시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목사님의 말씀처럼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삶의 현장에서 "예수로 살아가기" 일 것 입니다. 그리고 이론과 신학은 이러한
"예수로 살아가기"의 방향성과 지속성을 담보하는 역할로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러나 삶이 없는 이론과 신학은 "정치적 수사(레토릭)"
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부족 하지만 이런 점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목사님 건강관리를 잘하시면서 "오체투지 순례"에 참여하시길 바라며 같이 참여 하시는 다른 모든 분들도 건강 하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이번 10월 세기연 월례포럼에서 뵐 수 있었으면 합니다. 목사님 힘내세요!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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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 수직적 구조의 교회에서 <수평적 구조의 교회>로 (2) 미선이 591 01-21
127 서구식 목회문화가 아닌 <우리식 목회문화>로 미선이 511 01-21
126 과정신학에 대한 비판과 민중신학의 신 이해 접맥 미선이 808 01-13
125 ★ 예언 (1) 미선이 810 12-24
124 ♣ 새로운 기독교 신학의 인간론 (4) 미선이 654 12-19
123 ♣ 새로운 기독교 신학의 인간론 (3) (4) 미선이 742 12-12
122 ♣ 새로운 기독교 신학의 인간론 (2) (10) 미선이 966 12-05
121 새로운 기독교의 시간관, 태초와 종말로서의 시간관을 거부한다! (4) 미선이 791 12-01
120 ♣ 새로운 기독교 신학의 인간론 (1) 미선이 969 11-30
119 [예수운동 예배 견본] 새로운 기독교의 <예수운동 예배>를 위하여 미선이 1068 11-28
118 숭배하는 예배에서 <닮으려는 예배>로 (1) 미선이 924 11-19
117 거꾸로 흘렀던 감리교 역사, 바로 세우기엔 아직 멀었나 미선이 811 11-10
116 <새로운 기독교>를 소개하는 전체 안내 링크글 (계속 업데이트 예정) 관리자 2731 11-03
115 [논평] 봉은사 땅밟기 추태, 성경 '문자주의' 그 야만의 역사 넘어서야 (1) 관리자 961 10-29
114 기존의 진보 기독교와 새로운 기독교 운동 (1) 미선이 807 10-22
113 1세대 민중신학자 안병무의 미완의 작업과 기존 민중신학의 과제 미선이 782 10-19
112 [새기운 성명] 4대강 사업 관련, 문정현 신부의 정진석 추기경 비판을 지지한다 관리자 748 10-19
111 스퐁, "스티븐 호킹과 유신론/인격신의 죽음" (작은불꽃님 역) 관리자 1051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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