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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④ 초월신론에서 <포월신론>으로 (2)    
  글쓴이 : 정강길 날 짜 : 06-06-14 10:03 조회(4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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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환기의 한국 기독교, 바뀌어야 산다! (10)
④ 초월신론에서 <범재신론>으로 (2)
 

정강길 minjung21@paran.com


 
1. 21세기 기독교와 한국 기독교의 위기
2. 21세기 기독교 변혁을 위한 12가지 패러다임 대전환
   ※ 관념적 이원론에서 <현실적 관계론>으로
   ① '무조건 믿어라'의 기독교에서 <깨달음의 기독교>로
   ② 이웃종교에 배타적인 기독교에서 <열린 기독교>로
   ③ 가부장적 기독교에서 <모성애적 기독교>로
   ④ 초월신론에서 <범재신론>으로
   ⑤ 교리적 예수에서 <역사적 예수>로
   ⑥ 문자적 성서해석에서 <사건적 성서해석>으로
   ⑦ 숭배하는 예배에서 <닮으려는 예배>로
   ⑧ 서구식 목회문화가 아닌 <한국식 목회문화>로
   ⑨ 수직적 구조의 교회에서 <수평적 구조의 교회>로
   ⑩ 죄의식의 종교에서 <이웃과 함께 성찰하는 종교>로
   ⑪ 영혼구원의 강조에서 <총체적인 인간구원의 강조>로
   ⑫ 저 세상이 아닌 <이 땅에서의 하나님 나라 운동>으로
3. 오늘날의 선교 대상은 기독교 그 자신부터
4. 나오며


④ 초월신론에서 <범재신론>으로 (2)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저희를 버리셨나이까! 우리는 세계 안에 신의 침묵의 현장, 신 부재의 무신론적 현장이 너무도 많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예수의 이 십자가 외침은 신마저도 부재한 극한의 현장에서 발하는 고통의 처절한 부르짖음이라고 하겠다. 분명하게도 이 세계는 때때로 악이 승리하기도 하는 그러한 현상을 곧잘 보여주곤 한다.

그 같은 상황에서 어떤 무신론자는 말하길, 인간이 신을 붙잡는다는 것은 매우 허약한 자의 마음가짐이고 관념적인 것이며, 그럴 바에야 차라리 정직하게 신을 부정하고, 자기 운명을 개척하는 신을 오히려 자기 자신으로 볼 것을 주장한다. 무신론자들의 말대로 과연 신은 없는 것인가? 신은 도대체 그러한 때에 무엇을 하고 계셨던 것일까?

전통적 유신론과 초자연주의라는 특징

기독교 내에 전통적으로 인정받아왔던 신관인 초월적 유신론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초자연주의'(supernaturalism)에 있다. 초자연주의란, 신과 세계의 관계에서 신은 세계에 대해 전적으로 다른 초월한 존재로서, 현실 세계 안의 근본적인 인과적 질서를 간헐적으로도 깨트릴 수 있다고 보는 사상을 의미한다. 초자연주의에서는 신이 자연의 인과적 법칙을 초월하기 때문에, 신은 언제나 자신이 원할 때마다 세계 내의 법칙에 마음대로 개입하고 그것에 대해 변경 가능한 존재로 여겨진다.

이런 초자연주의적 유신론은 현대에 와서 많은 문제점을 노출하게 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치명적인 약점은 그 같은 관점이 자연의 우연성과 돌발성 그리고 종합적으로 말한다면 현실 세계의 부조리한 악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만일 세계와 자연의 법칙마저도 초자연적이고도 초월적인 신의 의지 안에 놓여 있고 또한 그에 따라 움직인다고 한다면, 온갖 자연의 돌발성은 결국 신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는 오리무중으로 남겨놓을 수밖에 없잖은가.

만일 누군가가 자연재해로 죽는다고 해도 그것은 결국 신이 저지른 계획 가운데 있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알다시피 자연 안에는 카오스 즉 무질서가 존재하며, 또한 신의 의지를 넘어서는 돌발적인 자연의 자율성이 얼마든지 발견되고 있다. 선하고 완전한 신이 자연의 법칙을 지배한다면 자연은 그러한 신의 의지를 따라서 돌발적이고 우연적인 상황이 발생하지 말아야 하잖은가.

이런 이유로 초자연주의적 유신론은 현대의 지성인들이 받아들이기에는 부적합한 이론으로 여겨져 왔고, 이에 대한 신학적 대안이 요구되어 왔다. 만일 신 이해에 대한 새로운 대안이 부재할 경우, 어떤 의미에서 현대인들이 자꾸 무신론이나 반기독교로 귀결하는 것은 매우 자명한 현상이라고 하겠다. 19세기 중후반부터 무신론과 반유신론이 전통적 기독교를 두드러지게 위협하면서 대중에게 어필하고 있을 즈음에 또 한편에선 매우 새로운 유신론이 등장하게 된다.

새로운 유신론 : <자연주의적 유신론>의 등장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로 넘어가는 그 시대는 근대 자연과학의 절대성이 붕괴되고 새로운 현대과학에 의해 새로운 패러다임이 기개하기 시작한 시대였다. 인간 이성에 대한 낙관주의로 기울였던 근대 세계관은 결국 그 한계를 드러내면서 세계대전이라는 참혹한 비극으로 이어진다. 그 즈음 현대 물리학과 경험주의에 기초하면서도 놀랍게도 신 존재를 말하는 새로운 유신론 사상이 등장하였는데, 그것은 이전의 전통적 유신론과는 다른 형태의 신론이었다.

이 새로운 유신론은 이전의 고전적 유신론과도 다르지만, 이전의 무신론적 현상들마저도 설명해내는 새로운 형태의 신관이었다. 사람들은 초월신론-이신론-범신론-무신론-포스트모던 이후의 것으로 여겨지는 이 새로운 유신론을 가리켜, <자연주의적 유신론>(naturalistic theism) 혹은 고전적 유신론과는 구분하여 <신유신론>(New Theism) 혹은 <범재신론>(panentheism)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앞서 보았듯이, 자비한 신의 전지전능성과 악의 발생은 논리적으로 양립 가능하지 않다. 이는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새로운 유신론이라는 자연주의적 유신론에서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고 있는가.

신은 현실 세계 존재들의 자율적 결단을 존중함으로써 제약 받는다

지금까지 주류 기독교의 신 이해의 배경은 신은 세계와 질적으로 다른 별개의 존재라는 관념이 암묵적으로 전제되어 있다. 이러한 신학 사상은 신의 완전성과 세계의 불완전성이라는 두 차원을 철저하게 이분적으로 보고 있다.

만일 신과 세계의 도식에서 양자를 관계적 사태로 설명한다면, 우리는 신이 세계에 영향을 주기도 하지만, 신 역시 세계의 영향에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까지 미쳐야 한다. 이러한 차원은 신이 세계가 겪는 고통과 그 모든 경험에 대하여 전적으로 신 자신의 완전성 안에 세계의 불완전성마저도 수용 또는 내포된다는 의미이다.

자, 그럴 경우 무엇이 달라지는가? 이것은 결국 신이 완전 무결한 존재로는 결코 설명될 수 없다는 얘기이다. 우리가 만일 신과 세계를 관계적 도식에서 보고 있다면, 신의 완전성과 세계의 불완전성 이해는 결국은 신 자신의 완전성과 불완전성으로도 이어지게 된다는 점을 인지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신의 완전성은 신의 초월성에서, 신의 불완전성은 세계에 대한 신의 내재성에서 확보된다.

왜 그렇게 되는가? 만약에 신이 제 아무리 전지전능하다고 해도 그토록 우리가 믿는 하나님마저도 터치하지 못하는 영역이 있기 때문에 그러하다. 그곳이 어디인가? 바로 세계 존재들의 자율적 결단의 영역이다. 이 부분은 신마저도 어찌할 수 없는, 간섭 불가능의 지점에 해당한다. 신은 세계 안의 존재들을 태엽을 감아놓은 로봇이나 조종할 수 있는 인형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니잖은가.

그럴 경우, 세계 안의 자율적 결단만큼은 전적으로 세계의 고유한 주체적 영역에 맡겨놓으셨는데, 그러한 결단이 신의 뜻과 어긋난 결단을 하게 될 경우 세계 안에는 악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때 신은 세계에 대해 영향을 주기도 하지만 놀랍게도 신 역시 세계의 자율적 결단에 의해 그러한 악의 발생을 감당하기도 한다는 점이다. 이는 신과 세계는 관계적 지평에 놓여있는 동반자적 관계라는 사태에서 비롯된다.

   
신이 현실 세계에 의도하는 것은 그 자신의 주체적 목적인 하나님의 통치 곧 하나님 나라이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모든 존재의 자율적 판단을 빼앗고 강제적으로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그 결정의 주체는 존재의 자율적 결단에 맡겨놓으셨다. 이때 만일 세계가 신이 원하는 그 물리적 성취로 나아갔을 때 세계는 하나님 나라에 한 발짝 다가서는 진보를 보여주지만, 반대로 세계는 그 자율적 결정에 따라 얼마든지 신의 뜻을 거스를 수도 있다고 하겠다. 따라서 신학적으로 말하면, 악의 성격은 '불순종'에 해당한다.

악은 현실 세계의 잘못된 결단에서 빚어진 사태이며, 신은 이러한 악에 대해서 어찌하지 못하고 현실 세계의 자각적 성장과 참여를 유도하면서 인내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은 세계에 대해 설득적으로 접근할 뿐, 세계의 자율적 결단 그 자체를 침범하여 건드리진 못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내가 말하는 신의 불완전성이란 바로 이 지점을 의미한다.

신이 완전무결과 전지전능한 존재라는 고정관념에서 탈피하라!

이것은 어떤 면에서 신 스스로 자기 제한이라고도 볼 수 있겠지만, 어떻든 신은 현실 세계 존재를 자율적으로 창조하신 분이시기에 그러한 악의 발생마저도 이미 감수하고서 우리와 함께 계신 것이다. 지금까지 주류 전통의 기독교 신학을 보면 거의 대부분이 전능하신 하나님은 세계에 영향을 끼치지만, 세계는 그러한 하나님에 대해 조금도 영향을 끼칠 수 없도록 봉쇄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 점은 신정통주의 신학자라는 바르트의 신 이해에서도 그러하다.

나의 분명하게 말한다. "신이 꼭 완전무결하고 전지전능한 존재여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버리라고." 우리들이 분명하고도 엄연하게 맞닥뜨리는 세계 안의 악의 발흥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면 그로 인한 하나님에 대한 제약 역시 불가피하다는 사실 또한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말해, 신이라는 존재가 전지전능하고 완전무결한 존재가 아니라 신조차도 세계의 불완전함에 대해 그 영향을 불가피하게 받는다는 점이다. 결국은 신 역시 완전무결한 존재가 아니라 여전히 세계로 인해 제약을 받고 있기 때문에 불완전하다고 봐야 한다는 얘기다.

이러한 점은, 나의 자유의지를 하나님이 조종하는 그러한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은 어디까지나 나의 판단 혹은 세계의 행보-그것이 설령 악이라는 비극을 초래한다고 해도-를 이를 존중해줄 수밖에 없는 사태에서 비롯되는 필연적 귀결인 것이다. 제 아무리 위대한 칼 바르트가 하나님의 절대성과 초월성을 내세웠다고 해도 그가 이러한 점을 간과하는 한, 적어도 그의 신론도 한계를 지닌다고 하겠다.

하나님이 이 세계에 대해 초월한다면, 이 세계 역시 하나님에 대해 초월한다. 하나님이 이 세계에 대해 내재한다면 이 세계 역시 하나님에 대해 내재한다. 하나님이 완전하다면 세계는 완전하다. 그러나 이 세계가 불완전하다는 사실은 하나님 역시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기본적으로 우리는 정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된다. 이때 범재신론이 신의 초월성과 내재성을 말하고 있듯이, 우리는 신의 완전성과 불완전성을 다음과 같이 보면 된다.

존재는 과정(process)이다[사실 이 말의 의미는 매우 중요하지만 이에 대한 상세한 언급을 여기서 하진 않겠다. 단지 모든 실재(reality)는 과정(process)이며, 과정이 곧 실재인 점만은 알아두기를 바란다. 그러나 우리는 대체로 존재를 과정이 아닌 고정적 실체(substance)로 이해하는 습관을 지니고 있는데, 가능하면 존재를 역동적이고도 과정적 존재로 보는 마인드로서 들여다 볼 것을 제안한다]. 즉, 우리가 믿는 신이라는 존재는 완결된 고정적 존재가 아니라 신은 언제나 불완전성에서 완전성으로 끊임없이 나아가는 과정적 존재로서 파악할 때 가장 잘 설명될 수 있다.

다시 말해, 신에게 불완전성과 완전성이 있다고 할 때, 이는 신 그 자신의 양극적 본성에 속한다는 것이다. 쉽게 이해하고자 한다면, 유동의 흐름을 의미하는 기호인 화살표(→)를 떠올려보라. 하나님은 언제나 활동 가운데 계신 분이며, 그 분은 세계의 불완전성을 그 자신의 한 축으로 삼지만 여기에 머무르지 않고 그 자신의 또 다른 한 축인 완전성으로 끊임없이 세계를 이끌고 추동하며 나아가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점에서 신은 세계와 언제나 함께 나아가는 <동반자적 관계>라고 할 수 있겠다. 종교철학자 찰스 하츠온(Charles Hartshorne)은 하나님을 세계의 아픔과 고통에도 무감각하거나 불변하는 도덕적 군주자가 아니라, 재밌게도 <민주적 지도자>로 비유한다. 즉, 하나님은 세계 모든 존재들의 모든 자율적 결정을 존중하면서도 동시에 그 자신의 완전무결한 이상으로 세계를 항상 설득적으로 이끄는 민주적 지도자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지도자는 세계의 온갖 잘못과 아픔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면서 함께 품어 안으며 간다고 하겠다.

초자연주의와 신비주의를 구분하라

신이 세계 존재들의 모든 자율적 결정을 존중한다는 것은 그러한 자율적 결정이 잘못된 결과들을 빚어내는 점까지도 충분히 감수하겠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초월신론의 특징인 초자연주의는 마땅히 배격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초자연주의는 세계 존재들의 자율적 결정을 빼앗고 침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연도 자율적 결단을 한다. 우리가 보는 자연의 우발성과 돌발성은 인간을 포함한 전체 우주의 자율적 결단이 총체적으로 관련해 합의를 빚어내는 것이기도 하다(이에 대해선 지면상 따로 부연 설명을 하지 않을 것이다. 양자물리학에서도 나오지만 궁극적으로 존재는 절대적인 인과법칙에 뿌리박고 있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기껏해야 확률적인 근사값으로 측정될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거시적일수록 그리고 무기적 존재일수록 오차가 낮고, 미시적일수록 그리고 고등한 존재일수록 그 예측불가능성을 보여주는 오차는 매우 커진다).

여기서 한 가지 유념할 것은, 나는 초자연주의는 배격하지만 '신비주의'(mysticism)는 긍정하고 있다. 이 둘은 전적으로 다른 개념이다. 초자연주의는 엄밀한 의미에서 세계 존재의 자율적 결단에 대한 신의 전적인 침범에 속하는 것이다. 이것은 곧 신이 세계를 자율적으로 존중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의미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초자연주의에서는 그 원인이 결국은 세계 존재의 자율적 결단이 아니라 신의 전지적 권능을 그 원인자로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병이 나면, 일단은 세계 안의 건강한 일반성에 기반하는 가까운 진료 의사한테 가는 것이 낫지, 무턱대고 병을 낫게 해달라고 기도원부터 찾는 것은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는 모습이 아닌 것이다. 이때 예를 들어, 모든 병원에서도 다 포기하여 결국은 종교적 심성에 의지했는데 마침내 그 병이 나을 수도 있는 경우가 충분히 있을 수 있겠다. 하지만 나는 이것을 초자연주의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때까지의 건강한 합리성마저 넘어서는 신비의 영역으로 본다.

그렇다면 초자연주의와 신비주의와의 그 결정적 차이는 무엇인가? 초자연주의는 세계 안의 건강한 합리적 일반성마저 깨트리며 이와 양립 가능하지 않는 것에 속하지만, 신비주의는 세계 안의 건강한 합리적 일반성을 깨트리지 않고도 이를 넘어선다는 점에서 양자는 전적으로 구별된다. 신비란 '비합리주의'적 영역에 속한다고 해도 이것이 곧바로 '반합리주의'는 아닌 것이다. 반면에 초자연주의는 반합리주의에 속한다.

신비주의란 언제나 현실 세계의 한계와도 결부되어 있다. 인간이 신이 아닌 한 신비주의는 우리에게 언제나 영원한 경외의 지점으로 항상 함께 남아있다. 신비주의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존재 스스로의 한계를 인정치 않는 교만과 독단일 뿐이다. 사실 근대 계몽의 프로젝트를 전담했던 합리주의는 신비주의를 인정하지 않고 경멸했던 독단적 합리주의에 지나지 않는 것이며, 그것의 정체는 오히려 반합리주의였을 뿐이다.

포스트모던에까지 이르는 오늘날에 근대 사유의 기조였던 데카르트의 이원론이나 뉴톤적 세계관이 옳다고 받아들일 사람은 거의 없다고 생각된다. 인간 이성은 계몽에 매우 유용한 도구이긴 해도 맹신해야 할 도구는 아닌 것이다. 유명한 조직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의 말이었던가, '이성은 신비의 자식'이라고.

또한 그런 면에서 합리주의는 신비주의를 더욱 예리하게 구별하게 한다는 점에선 유용한 것이다. 합리주의는 우리가 저급하고 잘못된 신비주의에 빠지지 않게끔 견제해주고 분별하게 해준다. 진정한 합리주의는 낙관주의도 아닌 겸손한 것이며, 그것은 언제나 신비주의의 영역을 남겨놓는다. 반면에 진정한 신비주의는 합리주의를 결코 도외시하지 않으며 과학적 사유들을 배제하지도 않는다. 종교는 바로 이같은 신비주의가 발현된 세계 안에서의 합리주의다.

히브리의 하나님 : 신은 질투도 하고 후회도 한다

나 자신이 "초월신론에서 <범재신론>으로"라고 쓴 것을 보고, 혹시 범재신론에 대해 잘 들어보지 못했던 분들은 매우 의아했을 것이라고 본다. 이것은 '범신론'(pantheism)과도 다른 것이다. 범재신론은 성경에도 있다. 에베소서 4장6절에 묘사된 '하나님은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하여 일하시며, 만유 안에 계신다'는 표현은 범재신론에 대한 정확한 묘사이기도 하다. 범신론에는 내재성만 있지만, 범재신론에서는 초월성과 내재성 양자를 모두 확보한다.

나는 앞에서 세계의 불완전성으로 인해 신 그 자신도 그러한 제약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얘기한 적이 있다. 놀랍게도 이것 역시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 전거들이 있다. 대표적인 표현이 우리가 잘 아는 '질투의 하나님'(출 34:14, 신 4:24, 신 6:15, 수 24:19 등등)이다. 왜 하나님인데 질투를 하실까? 즉, 질투를 한다는 것은 전지전능하다는 하나님 자신도 무언가 자신의 마음대로 안되는 게 있다는 것이다.

또한 놀랍게도 하나님은 창조 세계를 지은 것을 '후회'하시기도 한다(창 6:6~7). 도대체 완전무결한 신이라는 그 존재가 후회도 한단 말인가? 하나님도 후회하신다는 명시적 표현은 이외에도 성경 곳곳에 나와 있다(삼상 15:11, 삼상 15:35, 대상 21:15). 전지전능한 신 존재도 후회를 한다는 것은 매우 아이러니한 사태잖은가.

다시 말해, 우리는 히브리 성경을 보면 놀랍게도 하나님은 인간과 매우 교감하는 하나님이셨음을 알 수 있다. 우리의 하나님은 이 세계 안의 억압과 고통과 오염과 생명이 죽어가는 현실에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는 무심한 초월자가 아니다. 그는 이 세계와 함께 같이 아파하고 같이 세계를 이끌어 가는 분이시다.

초월신론에서 <포월신론>으로

그렇지만 나 자신이 여기서 주장하려는 하나님 이해가 불완전하기만 한 그런 신이라고 본다면 그 역시 잘못된 독해임을 다시 한번 밝혀두는 바이다. 하나님은 세상의 불완전함(=하나님 나라를 거부한 세계 존재들의 잘못된 결단과 그로 인한 결과들) 때문에 바로 불완전함과 완전함을 그 자신의 양극적 성격으로 하면서 불완전함에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완전함으로 나아가는 과정적 존재로서의 하나님이시다. 바로 이런 점에서 세계는 신을 필요로 할 수밖에 없으며 또한 신으로 인해 세계는 구원의 길을 얻게 된다.

신은 그 자신의 주체적 목적인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를 위해 하나님 나라라는 비전을 세계 모든 존재에게 끊임없이 제공한다. 하나님 나라는 완전함의 차원이다. 요컨대, 그리스도란 현실 세계 안에서의 하나님 나라의 실현이다. 그 같은 하나님 나라는 1)존재 스스로 최고의 자아실현을 위해서도, 그리고 2)현실 세계의 타자를 위해서도, 또한 3)궁극적으로는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도 최상의 길(道)인 것이다. 그리고 이 하나님 나라는 모든 존재들에게 설득적으로 부여되는 것이지 결코 강요적으로 부여되는 것이 아니다.

그 하나님 나라는 깨달음의 차원에서부터 시작된다. 그것은 여전히 영성 수련을 필요로 할 만큼 죽기까지 그 자신의 훈련이 요구되는 것이며, 그 자신을 비롯한 전체 세계를 살리는 최상의 거울인 것이다. 나 자신은 이 글의 제목을 "초월신론에서 범재신론으로"라고 했지만 이러한 범재신론을 달리 표현한다면, "초월신론에서 <포월신론>(抱越神論)으로"라고도 해두고 싶다.

초월이란 말에는 현실을 '뛰어 넘는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반면에 포월은 '품어 안고서 넘는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즉, '포월적 신 이해'에서는 세계를 초월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와 함께 부비면서 이를 끌어안고서 넘어가는 모성애적 하나님을 말한다.

분명히 말하지만, 우리의 하나님은 현실 세계와 언제나 함께 나아가는 그러한 인내어린 동반자로서의 하나님임을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앞으로 21세기의 건강한 기독교 신학을 위해서 나는 이 같은 신 이해의 근본적인 패러다임 전환을 주장하는 바이다.

(계속 이어집니다.)

 
 
감초 (07-03-10 20:17)
 
이제야 범재신론의 의미를 잘 이해할 것 같습니다. 어려운 신학에 대한 쉬운 이해를 도와주시는 정강길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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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 유신론-무신론을 넘어서 <탈신론>으로 미선 366 05-04
161 <초자연주의>를 버려야 기독교가 산다! 미선 309 02-04
160 몸학 기독교 & 몸학 사회주의 추구 미선 246 12-31
159 <자유>에 대한 짧은 생각.. (2) 미선 318 08-24
158 몸학 기독교에선 기독교 신학이 굳이 필요하지 않은 이유 미선 365 03-24
157 인간 무의식의 두 가지 상태와 보다 상향적인 의식 발달을 위하여 미선 288 03-03
156 (1998년 원글) "화이트헤드 철학에서 본 민중신학 비판과 대안적 모색" (2) 미선 247 02-18
155 종교(宗敎, Religion)에 대한 동서양의 어원적 의미와 전후 혼동 오류 미선 241 02-06
154 기존 기독교와 <몸 기독교>의 분명한 차이들 미선 274 01-21
153 GIO명상 방법 12단계 (몸기독교가 제안하는 수행 방법 중 하나..) (5) 미선 412 01-16
152 2013년 계획.. 몸 기독교 (4) 미선 368 01-02
151 민중신학 40년.. (20년전 안병무 기사를 보며..) 미선 213 12-25
150 진보정치 교육의 사각지대와 민중 역사 주체론에 대한 반성과 재고찰 미선 202 12-22
149 교회에 대한 권력비판? 교리비판? 어느 것이 더 유효할까? (4) 미선 340 12-06
148 왜 예수인가 (필독 원함!) (13) 미선 1291 11-04
147 새로운 기독교의 방향과 몸학의 종교관 (2) 미선 239 10-05
146 새로운 기독교의 방향과 몸학의 종교관 (1) 미선 269 08-17
145 기독교 교리의 문제는 기독교만의 문제가 아니다! (3) 미선 321 06-11
144 초대교회와 바울에 대해... 미선 372 04-28
143 '작은 교회'가 정말 대안인가? 핵심은 교리다! 미선 301 04-22
142 진선미의 기원과 예수사건 (1) 미선이 284 02-24
141 중간 복음주의 신학자 알리스터 맥그리스의 <과학신학> 비판 (13) 미선이 310 12-13
140 끔찍한 <몸의 신학>에 속지 마시길! (유사품 주의) (8) 미선이 342 11-15
139 종교운동과 사회운동을 구분 못하는 오류-기존 진보 기독교 비판 (1) (2) 미선이 433 10-14
138 여전히 예수얼굴에 똥칠하는 개신교 정치세력들 (5) 미선이 350 08-30
137 새로운 기독교 역사의 국내 선구자들 : 유영모, 함석헌, 김재준 미선이 324 06-26
136 조용기 목사의 할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미선이 342 05-14
135 몸학과 새로운 기독교 운동 그리고 30년 후의 기독교 미선이 424 04-11
134 <인간의 자유의지>라는 착각과 환상에 관한 문제 (14) 미선이 617 03-04
133 기존 진보 기독교인들의 <생명평화> 담론에 반대한다! (업그레이드판) (8) 미선이 491 02-17
132 기존 진보 기독교계의 ‘생명평화' 담론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미선이 235 02-10
131 영혼구원의 강조에서 <총체적인 생명구원의 강조>로 (4) 미선이 272 02-05
130 성서문자주의 또는 성서무오설 신앙보다 더 뿌리 깊은 고질병은? (9) 미선이 682 02-02
129 죄의식의 종교에서 <이웃과 함께 성찰하는 종교>로 미선이 266 02-01
128 수직적 구조의 교회에서 <수평적 구조의 교회>로 (2) 미선이 351 01-21
127 서구식 목회문화가 아닌 <우리식 목회문화>로 미선이 302 01-21
126 과정신학에 대한 비판과 민중신학의 신 이해 접맥 미선이 483 01-13
125 ★ 예언 (1) 미선이 602 12-24
124 ♣ 새로운 기독교 신학의 인간론 (4) 미선이 438 12-19
123 ♣ 새로운 기독교 신학의 인간론 (3) (4) 미선이 499 12-12
122 ♣ 새로운 기독교 신학의 인간론 (2) (10) 미선이 702 12-05
121 새로운 기독교의 시간관, 태초와 종말로서의 시간관을 거부한다! (4) 미선이 590 12-01
120 ♣ 새로운 기독교 신학의 인간론 (1) 미선이 689 11-30
119 [예수운동 예배 견본] 새로운 기독교의 <예수운동 예배>를 위하여 미선이 721 11-28
118 숭배하는 예배에서 <닮으려는 예배>로 (1) 미선이 705 11-19
117 거꾸로 흘렀던 감리교 역사, 바로 세우기엔 아직 멀었나 미선이 596 11-10
116 <새로운 기독교>를 소개하는 전체 안내 링크글 (계속 업데이트 예정) 관리자 1932 11-03
115 [논평] 봉은사 땅밟기 추태, 성경 '문자주의' 그 야만의 역사 넘어서야 (1) 관리자 761 10-29
114 기존의 진보 기독교와 새로운 기독교 운동 (1) 미선이 604 10-22
113 1세대 민중신학자 안병무의 미완의 작업과 기존 민중신학의 과제 미선이 579 10-19
112 [새기운 성명] 4대강 사업 관련, 문정현 신부의 정진석 추기경 비판을 지지한다 관리자 557 10-19
111 스퐁, "스티븐 호킹과 유신론/인격신의 죽음" (작은불꽃님 역) 관리자 821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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