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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④ 초월신론에서 <포월신론>으로 (3)    
  글쓴이 : 정강길 날 짜 : 06-06-14 10:09 조회(28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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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환기의 한국 기독교, 바뀌어야 산다! (11)
④ 초월신론에서 <범재신론>으로 (3)

 

정강길 minjung21@paran.com



 
1. 21세기 기독교와 한국 기독교의 위기
2. 21세기 기독교 변혁을 위한 12가지 패러다임 대전환
   ※ 관념적 이원론에서 <현실적 관계론>으로
   ① '무조건 믿어라'의 기독교에서 <깨달음의 기독교>로
   ② 이웃종교에 배타적인 기독교에서 <열린 기독교>로
   ③ 가부장적 기독교에서 <모성애적 기독교>로
   ④ 초월신론에서 <범재신론>으로
   ⑤ 교리적 예수에서 <역사적 예수>로
   ⑥ 문자적 성서해석에서 <사건적 성서해석>으로
   ⑦ 숭배하는 예배에서 <닮으려는 예배>로
   ⑧ 서구식 목회문화가 아닌 <한국식 목회문화>로
   ⑨ 수직적 구조의 교회에서 <수평적 구조의 교회>로
   ⑩ 죄의식의 종교에서 <이웃과 함께 성찰하는 종교>로
   ⑪ 영혼구원의 강조에서 <총체적인 인간구원의 강조>로
   ⑫ 저 세상이 아닌 <이 땅에서의 하나님 나라 운동>으로
3. 오늘날의 선교 대상은 기독교 그 자신부터
4. 나오며


십자가에 처형당하신 하나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자,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세계 안의 온갖 무신론적 현장에서조차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악이 승리하는 고통의 현장에 하나님은 정작 어디에 계셨을까? 저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가스실에서 비극적 참상이 진행되고 있을 때 하나님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계셨던 것일까?

즉, 하나님 역시 저희와 함께 처참하게 죽어가고 계셨던 것이다. 몰트만의 유명한 책 제목처럼 하나님은 십자가에 처형당하고 계신 것이었다. 참으로 인간은 신마저 말살하는 죄악을 일삼는다. 그러나 이 사실은 (뒤에서도 얘기할 것이지만) 하나님이 나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결코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순간에 하나님은 힘없이 죽어가는 자들과 함께 애처롭게 몸부림치며 고통을 같이 나눈다는 점에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은 기본적으로 언제나 약자의 편에 계신다.

왜 예수는 십자가에 달리면서 하나님이 나를 버렸다고 소리쳤을까? 그것은 바로 신마저도 버린 무신론적 현장에서 경험되는 처절한 고통마저 그 극한에서 직접적으로 경험함으로써 하나님 자신의 자기 해체와 죽음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계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참으로 신의 침묵이자 신의 일식이며 신 자신의 죽음인 것이다. 그렇기에 세계 안에 부조리하게 희생된 억울한 모든 죽음은 바로 하나님 자신의 처절한 부르짖음임을 결코 잊어선 안될 것이리라.
 
   
'세계 안에 부조리하게 희생된 억울한 모든 죽음은 바로 하나님 자신의 처절한 부르짖음임을 결코 잊어선 안될 것이리라.' (사진은 서남동, <민중신학의 탐구>(한길사) 표지)
십자가의 현장은 부조리한 현장이다. 악이 기고만장하여 승리한 것으로 보이는 현장이며, 인간이 신을 죽이고 있는 현장이다. 역사적 예수는 처절한 고통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껴안고 있는 것이다. 뒤에서 서술할 것이지만 사실상 이 십자가의 현장이야말로 놀랍게도 세계를 정화하는 매우 통쾌한 역설로 이어진다.
 
병을 앓고 계신 하나님

나는 여기서 '하나님도 죽어간다'는 표현이 단순히 하나님을 의인화하는 그런 표현이라고 생각한다면 곤란하다는 점을 말해두고 싶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실제로 세계 존재들이 죽어가는 고통과 억울한 죽음의 느낌을 생생하게, 하나님 자신도 직접적으로 경험한다는 사실이다[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전문적인 논의를 필요로 하는데, 이는 자연주의적 유신론 사상에선 '신의 결과적 본성'(the consequent nature of God)으로서 얘기될 수 있는 지점이기도 하다].

분명하게 말하지만, 이 세계가 썩고 병들어갈 때 하나님 자신도 역시 썩고 병들어 간다는 사실이다. 참고로 이사야 53장 3절에 보면 ‘고난 받는 종’에 대한 묘사에서 표준새번역 성경과 한글개역 성경의 번역이 다르게 번역되어 있음을 혹시 알고 있는가?

표준새번역 성경은 "그는 사람들에게서 멸시를 받고 버림을 받고, 고통을 많이 겪었다. 그는 언제나 병을 앓고 있었다. … (중략) …"로 번역되어 있는 반면에 기존의 한글개역은 메시아라는 존재가 어떻게 병을 앓고 있을 수 있겠냐며 '그는 병을 알고 있었다'로 살짝 고쳐서 번역되어 있다.

하지만 생각해보라. ‘병을 앓는 것’과 ‘병을 아는 것’은 사실상 천지차이잖은가. 실제 히브리어 원문은 ‘병을 앓고 있었다'는 뜻에 더 가까움에도 어떤 면에서 은연중에라도 기존의 보수 기독교인들의 인식 속에는 ’완전무결하고 절대적인 존재가 병을 알 수는 있어도 결코 앓을 수는 없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결국 입맛에 따라 성경이 살짝 달리 번역되기도 하는 것이다.

 
고난의 동반자로서의 하나님

그렇기에 하나님도 우리와 함께 고통과 병을 앓고 계신다. 따라서 우리의 하나님은 바로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와 함께 고난을 나누는 동반자로서의 하나님'(God as the companion who shares our suffering with us)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인류의 무신론적 현장은 바로 신 자신의 죽음이요 고난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무신론적 현장에서도 하나님은 언제나 '희망'의 비전으로 우리에게 침투하면서 다시 또 한 발짝 내딛어보자고 우리를 독려하고 계신다. 희망은 언제나 슬픔의 한가운데서 꽃피는 것이며 부활을 낳는 힘이 된다.

이 땅에 새 역사를 창조한다는 것이,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고 평화가 들풀처럼 꽃피는 그의 나라를 실현한다는 것이 비록 '바위에 계란치기'처럼 도무지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라고 해도 우리네 현실은 결코 이를 포기할 수도, 멈출 수도 없는 노릇이잖은가. 하나님은 바로 이 불가능할 것 같은 작전에 대해 충분히 가능하다고 늘 곁에서 속삭이시며 우리를 독려하시고 계신 분인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여러 가능성 중에 '최선'을 의미

여기서 우리는 좀더 생각을 심화시켜 새로운 유신론에 기초된 하나님을 더욱 구체적으로 고찰해보자. 즉, 이러한 하나님은 우리의 일상적 지평에서는 어떠한 모습으로 역사하고 계신지를 알아보자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입버릇처럼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말을 많이들 하고 다닌다. 과연 이 말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임마누엘 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이끄시는 분이라는 얘기가 도대체 무슨 뜻인가?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라면 이 말을 지겹도록 많이 들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여기에 담긴 뜻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지는 못하고 막연히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속에 언제나 함께 계신다는 추상적 다짐에서 그칠 때가 많지 않았던가. 과연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나는 여기서 가능한 쉽게 일상적 적용으로 언급해 보겠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데 도대체 우리한테 뭘 항상 하고 계신다는 얘기인가? 이에 대한 답변은 앞서의 단락에서 생각을 조금만 깊게 해본다면 금방 알 수 있다. 우리는 매순간 선택하는 결단의 계기를 통해 변화하는 이 세계를 경험하고 있다.

즉 하나님은 항상 매순간마다 나 자신이 최선으로 택할 수 있는 선택적 상황의 하나로서 우리에게 항상 역사하고 계신 분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자율적 판단을 그러한 하나님의 계획에 부합하게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다른 선택적 상황 가운데서 하나를 택했다면 이 세계는 다시 그 자신이 선택한 결단으로 인해 영향을 받으며 새로운 상황을 돌출시킬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 자신의 의지로 인해 빚어진 이 새로운 상황은 다시 또 하나님의 계획에도 영향을 주면서 하나님의 계획을 수정하게 만든다. 신의 불완전성이란 바로 이것 때문에 빚어진다. 하지만 그런 뒤에도 하나님은 그렇게 빚어진 여건 하에서 다시 또 우리가 최선의 방책으로 택할 수 있는 선택적 상황의 하나를 또 제시하면서 우리에게 개입하신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모든 존재들의 자율적 판단을 존중하면서 다시금 그 안에서 가능한 가장 최상의 선택지를 계속 제공해 주고 계신다는 얘기다. 우리는 다시 그러한 상황에서 우리 자신의 결정을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도록 할 수도 있고, 그렇게 안 할 수도 있는 결단의 순간을 또 맞이하게 된다.

만약 여기서 우리가 다행히 하나님의 뜻을 밟아나간다면 하나님 나라는 한 발짝 더 앞당겨지는 것일 게다. 그러나 우리가 또다시 그분이 의도한 것과 다른 방향으로 나간다면, 그분은 어쩔 수 없이 그 자신의 계획을 또 수정하고, 다시 또 주어진 현실태 안에서 하나님 자신의 주체적 목적을 향한 새로운 계획을 계속적으로 우리에게 제시할 것이다.
 
'사회구조악'은 약자에게 선택의 협소성을 가져다줌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보다 제한

이때 한 가지 알아둘 점은, 만일 세계가 줄기차게 하나님 나라를 거부하고 계속 악의 방향으로만 흘러갈 경우,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들은 점점 더 협소해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악은 생명을 죽이며 점점 세계를 피폐하게 만든다. 그리스도인은 왜 ‘사회구조악’에 대해서 관심을 해야만 할까? 그것은 바로 세계에 창궐하는 사회구조악들이 우리들에게 임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자꾸만 제한시키는 선택의 협소성을 낳기 때문이다.

예컨대 감당할 수 없는 부채에 찌들린 농민이나 카드 빚에 내몰린 최악의 극빈자의 상황을 생각해보라. 이들이 택할 수 있는 선택적 가능성이란 기껏해야 안타깝게도 '죽거나 나쁘거나'의 선택지만 있을 따름이다. 이같은 극한의 절망 때문에 하나님은 종종 냉혹한 분으로 묘사되기도 하지만, 실은 그렇게 되기까지 세계는 계속 악의 장벽을 더욱 굳건하게 쌓아감으로써 소중한 생명을 자꾸만 벼랑 끝으로 내몰기 때문에 결국은 선택지가 갈수록 좁아지고 제한되는 것이다.

그럴 경우, 하나님 자신도 그러한 세계에 의해 제약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세계는 참담한 비극을 발생시키면서 하나님을 또다시 아프게 만들고 있는 셈이 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라면 세계 안의 온갖 체제와 사회구조악에 대해서도 주도면밀한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나라는 세계 모든 피조물의 참다운 해방을 내포한다.

 
설득적 사랑으로서 임마누엘 하시는 하나님

그리스도인이란 언제나 '그 나라'와 '이 세계'를 대비시켜서 가능한의 최선을 지향하는 자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가 매순간 맞닥뜨리는, 개방된 여러 실제적 가능성 중 하나를 택할 수 있는 상황에서 그 자신의 나라를 향한 최선의 결단을 내릴 것을 요구하고 계신 분이시다.

만일 이 세계가 하나님을 외면하여 하나님 자신의 주체적 목적에 제약을 가하고 멀어지더라도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계속적으로 이 세계에 인내와 설득으로 그의 창조적 작업을 묵묵히 수행하시고 계신다. 세계가 하나님의 말을 듣지 않더라도 하나님은 끊임없이 세계를 껴안고서 '그 나라'로 향하도록 인내어린 애정을 가지고 설득하고 계신 것이다. 이 분이 바로 임마누엘 하나님이시다.

바로 이런 점에서도 하나님은 세계에 있어 한없는 어버이 같은 분이시니, 어찌 고마우신 하나님의 은혜라 아니할 수 있으랴! 항상 우리 곁을 떠나지 않고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우리에게 언제나 최선의 선택을 제시하시는 하나님이야말로 진정한 의미로서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사랑이란 무엇인가? 사랑이란 그 대상이 자율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존재를 변화케 만드는 가장 탁월한 힘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은 '나'와 '세계'를 아는 것에 비례

나는 여기서 일전에 '① 깨달음의 기독교로'에서 언급했던 <깨달음>이라는 미시적 해방 사건의 공식을 다시 한번 떠올려줄 것을 요청하는 바다. 거기서도 분명하게 말했지만, 하나님의 뜻이란 저 홀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현실 세계의 상황과 인간의 결단과 함께 더불어 이뤄지는 것이라고 언급하였다.

그렇기에 다시 말한다면, 우리가 우리 앞에 놓여진 선택지 가운데 어느 것이 참으로 최선인지를 알고자 한다면, 그것은 언제나 우리 자신에 대한 깊은 인지와 타자와 함께 살고 있는 이 세계에 대한 깊은 인지에 비례한다는 점이다. 곧 하나님의 뜻을 체득한다는 것은 '나'와 '세계(타자)'를 아는 것에 점점 비례한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말기를 당부하는 바이다.
근원적으로 이 세계가 '나'(Self)라는 존재와 떨어질 수 없는 나의 몸(Mom)을 형성한다는 점을 인지한다면, 결국 하나님을 아는 것은 나를 아는 것과 직결된다고도 볼 수 있겠다. 또한 바로 이런 점에서 깨달은 자일수록 전체 세계를 합리적으로 이해하려는 공부(工夫)도 필요로 하게 되는 것이다[참고로 내가 말하는 공부란 '몸의 훈련'(discipline of Mom)으로서의 영성수련에 다름 아니다. 즉, 영성 훈련이란 진정한 의미에서 '공부(’Kung-Fu)와 다르지 않다. 물론 이것은 스터디(study)로서의 공부 개념이 아니다. 나 자신이 보는 영성 훈련에 대해선 『화이트헤드와 새로운 민중신학』의 제11장인 '영성론'을 꼭 참고하길 바란다].

나의 최선이 되는 그러한 하나님의 뜻은 그 자신을 위해서도 가장 최상의 것이며, 나와 관계하는 타자를 위해서도 가장 최상의 것이며, 근원적으로는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도 가장 최상의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고려한 뒤에 각각에 맞는 가장 최상의 선택지를 제공해주고 있기 때문이며, 그것은 또한 불완전한 이 세계를 자신의 완전한 나라로 전환하고자 하는 가운데 제공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면에서 누군가의 말대로 구원이란 언제나 '신-인 협력의 구원'이기도 한 것이다.

'우선성의 원리'(principle of preference)로서의 하나님

하나님은 모든 존재들의 구원 해방을 의도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보편적이나, 그 개별자들이 처한 상황과 관련해서는 우선적으로 현존하신다. 위의 얘기를 잘 인지하는 사람이라면,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온 세계 만물의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 그 자신이 택하신 신학적 원리를 하나 발견해 낼 수가 있을 것이다. 그것이 뭔가? 이것이 바로 저 유명한 '우선성의 원리'(principle of preference)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선성의 원리로서 이 세계를 이끌어 가신다. 그렇다면 그 기준은 무엇인가? 우선성의 기준은 무엇인가? 당연히 이것은 세계 안의 힘없는 생명들이 받는 고난과 고통의 정도이다. 즉, 우선성의 원리란 하나님께서는 고난과 고통의 정도가 심하고 큰 곳일수록 우선적으로 치유하려 한다고 보는 원리이다. 생각해보라. 아흔 아홉 마리 양보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이 왜 그다지도 중요한 것이 될 수 있는지를.

예수는 왜 하필이면 화려한 궁궐보다 초라한 마굿간에서 태어났으며, 부자보다 가난한 자를, 정상인보다 병자를, 남성보다 여성을, 요즘 세대의 용어로 얘기해서 일반인보다 ‘왕따’를 더욱 가까이 하셨단 말인가? 왜? 왜? 왜? 그것은 바로 이 세계가 뿌리 깊게 간직하고 있는 상처를 관조함에 있어서 이 땅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자들일수록 그 상처의 아픔이 더 크다고 봤기 때문이리라.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사회학에서 말하는 <계급>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깊은 분석과 통찰이 필요한 것이다.

즉 세계 전체가 병들었다고 보더라도 그에게는 가장 급한 곳을 우선적으로 치유해야함이 필요했으며, 이것이야말로 세계 전체를 치유함에 있어서 가장 힘 있고도 효율적인 사역이었던 것이다. 우선성의 원리가 영성을 쌓고 있는 깨달은 자의 관점에서 볼 때엔 사회상의 억압과 모순이 크게 횡행하는 곳일수록 하나님께서는 우선적으로 함께 하신다는, 민중이 처한 권력체제와 사회학적 분석에 따른 원리이기도 하다.

<우선성의 원리>는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습성

나는 분명히 말한다. 기독교 신앙은 이 같은 우선성의 원리를 포기하거나 간과할 때, 그것은 한낱 빛 좋은 개살구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추구하고자 하는 모든 종교적 영성이나 성경에 대한 해석 그리고 우리의 예배를 비롯한 모든 종교적 장치들이 고통 받는 이들에 대한 우선적인 관심들을 결여시킬 때 그것은 바로 거짓 영성이요, 거짓 성서 해석이며, 거짓 종교로 기울어지는 것임을 단적으로 증명해주는 세계 안의 사례임을 우린 결코 잊어선 안된다. 왜냐하면 우선성의 원리는 이미 이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습성이기 때문이다.

만일 세계 안에 사과를 1개 가진 사람과 사과를 3개 가진 사람이 있을 경우, 공평하신 하나님은 사과를 1개 가진 사람에게 좀더 힘을 더 실어줌으로써 그 자신의 공평함을 실현하고 계신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우선성은 궁극적으로 합리성의 발현에서 나온 것이며, 불의한 권력체제로 인해 힘을 빼앗긴 약자에게는 그만큼 하나님의 역사가 더욱 함께 한다고 하겠다. 알고 보면 하나님의 정의와 보편적 사랑은 서로 모순되지 않았다.

가진 게 많은 사람일수록 구원은 똑같이 나눠 받으려고 하면서 그 자신의 사회적 실천 양식들은 미미하거나 모호해지길 은연중에라도 바라지만, 실로 하나님에겐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소리일 뿐이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로 가는 그 문이란 좁은 문인 것을! 이는 이 세상 자체가 이미 불평등하게 기울어져 있기에 그러하다. 하나님은 강자들의 하나님이 아니라 우선적으로는 히브리 노예들과 함께 하셨던 약자들의 하나님이셨음을 잊지 않길 바란다.

 
신은 최대치의 고난이 있는 곳에 더욱 강하게 역사를

최대치의 고난이 있는 곳에는 역으로 그만큼 하나님의 치유의 역사가 강하게 도사리고 있다. 손등을 살짝 긁힌 상처랑 피가 콸콸 흐를만큼 창자가 터지는 상처의 정도는 그 차원이 다르지 않은가. 고난의 정도가 클수록 그곳엔 하나님의 치유하심이 강하게 역사한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바로 그러한 고난과 고통이 결국은 언제나 세계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세계의 아픔은 하나님 자신의 고난이요 아픔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하나님의 치유 역사는 필히 깨달은 자들을 통해서 드러난다. 이들은 십자가의 현장이 바로 하나님 자신의 처절한 부르짖음의 소리임을 아는 자들이다. 세계 안의 수많은 약자들의 억눌림이 곧 자신의 아픔이자 하나님의 아픔임을 아는 자들인 것이다. 이때 하나님은 이 세계의 온갖 아픔을 치유하길 원하시지만 그것은 결정적으로 깨달은 자각인의 몫에 맡겨 놓고 계신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세계 안의 모든 비극들 혹은 죽임 당함의 현장은 하나님 자신의 죽임당함 현장이며, 바로 그럼으로써 고난을 통해 부활을 꽃피우는, 희망의 싹을 다시 싹틔우려는 놀라운 역설적 현장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 몫을 바로 불나방 같은 자각인들에게 맡겨놓으셨고, 그 방법은 우선성의 원리에 입각한 사랑으로서다. 피폐한 이 세계는 그럼으로써 한 발짝씩 하나님 나라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

변혁의 하나님 : 십자가에서 부활로

   
▲ 신은 세계에 대한 십자가를 지고 가는 위대한 동반자이자 세계의 시인이다.' (사진제공 김기돈)
따라서 이 땅에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되었던 세계 안의 온갖 무신론적 현장들은 사실상 신의 부재를 뜻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놀랍게도 정반대가 되고 있는 것이다. 그 부조리한 비극의 현장들이야말로 우리를 깨어나게 만들며, 매우 강하게 부르고 계시는 '부르심의 현장'임을 기억하라! 십자가는 하나님 자신의 처절한 부르짖음이며, 부르심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되었던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현장에서 인류의 잔혹한 비극을 보게 되지만, 그로 인해 더 이상 우리 가운데 이러한 끔찍한 비극이 있어선 안된다는 결실을 얻을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왜 자꾸 평화를 추구하려 하는 것인가? 그것은 바로 저 참혹하고 끔찍한 전쟁과 비극에 대한 감각을 생생하게 인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족상잔의 분단비극이 우리를 부르고 있는 것이며, 5·18 광주의 비극이 우리를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귀 있는 자들이라면, 하나님 없는 현장일수록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근래에 크게 일어났던 쓰나미의 참상 역시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결코 관념적이거나 추상적이지 않다. 언젠가 말했듯이, 모세는 이스라엘의 부르짖음 속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들었으며, 하나님의 부르심 속에서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을 들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언제나 구체적인 삶의 역사의 지평 한가운데서 역사하고 계신다. 이제 실패라고 기억했던 온갖 것이 다시 새싹을 돋아내며 아픈 상처를 딛고 일어설 수 있게 된다. 십자가는 실패로 기억되는 현장이었지만 놀랍게도 그것은 부활의 초석이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있을 수 없다.

우리는 정말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확증하고 있는가. 솔직히 말해서 우리는 무슨 좋은 일이 생겼을 때만 부랴부랴 하나님께 감사기도나 감사헌금을 드리는 건 아닌지 묻고 싶다. 참으로 하나님 없이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가. 우리는 오히려 고난과 고통을 함께 나누자는 그 분의 부르심에 따를 수 있는가.

하나님을 주일날 교회에서 찾는 것도 좋다. 하지만 그 분의 부르심은 나를 포함한 전체 세계의 아픈 상처들로부터다. 우리는 선한 사마리인의 비유를 잘 알 것이다. 강도를 만나서 피를 흘리고 있는 사람이 우리 앞에 있다고 할 때, 세계 안에서 나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선택지가 무엇이겠는가. 이때 내가 할 수 있는 그 최선의 선택지가 바로 '나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인 것이다.

신은 세계에 대한 십자가를 지고서 함께 나아가는 위대한 동반자

나는 짧게 압축적으로 쓴 이 칼럼을 통해 우리의 하나님 이해가 더 이상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이지 않고 오히려 정직하게 세계를 들여다보면서 구체적으로 활동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우리의 삶 가운데서 어디서부터 작동되고 있는지를 명징하게 느끼고 인지할 수 있기를 바랄 따름이다. 21세기 기독교 변혁은 이러한 신 이해로의 전환을 요구한다.

신이 이 세계의 잘못된 결정들로 인해 불완전성을 띤다는 사실은 신 그 자신에게도 매우 서글픈 사실이자 고통이 아닐 수 없겠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러한 세계의 잘못된 결정들마저도 껴안고서 함께 그 자신의 나라로 나아가고자 계획하신 것이다. 그것이 곧 신이 세계에 대해 지고 계신 십자가이며, 신이 수행하는 세계의 구원이다.

화이트헤드는 그러한 하나님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신(God)은 진(truth)ㆍ선(goodness)ㆍ미(beauty)에 관한 자신의 비전에 의해 세계를 이끌어가는, 애정어린 인내심을 갖고 있는 세계의 시인"이라고. 또한 "우리를 이해하는 '일련탁생(一連托生)의 수난자'(the fellow-sufferer)이자 위대한 동반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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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고 건강한 21세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위한 신앙선언서 (26) 관리자 4392 05-23
180 21세기 종교 진화의 방향, 몰락이냐? 도약이냐? 미선 121 06-16
179 "함께 만들어가는 종교와 진리" (2) 미선 165 06-10
178 기독교에서 얘기하는 병치유 귀신쫓음을 어떻게 볼 것인가? (1) 미선 153 06-10
177 몸에 모시는 하나님 (탈유무신론의 신앙) 미선 108 06-09
176 초자연주의>에서 <자연주의>로 가야 기독교가 산다! 미선 144 06-07
175 과학의 진화론에 대한 기독교의 창조론 입장들 미선 132 05-30
174 신학이 아닌 몸학에 기반하는 <몸학 기독교>로! 미선 136 02-10
173 신의 영어 표기 God ----> Gio 로 바뀌어야 미선 115 02-07
172 약자에 대한 눈뜸 - 잠자와 깬자의 차이 미선 133 12-08
171 <초자연주의>를 인정하면 나타나는 문제들.. 미선 122 11-04
170 [어떤 진리관] 진리(眞理)와 진리(進步)의 차이 그리고 퇴리(退理) 미선 110 07-05
169 시작이 있는 우주인가? 시작도 끝도 없는 우주인가? 미선 129 06-18
168 <종교 위의 종교>에 대해.. 미선 126 05-04
167 초자연주의와 자연과학 그리고 신비주의 구분 미선 130 04-06
166 지적설계론(창조론)자들과 유물론적 과학자들 간의 공통점 미선 117 12-10
165 종교 신앙의 반지성에 대한 단기적 대안 (1) 미선 119 11-24
164 "몰락이냐 도약이냐" 21세기 종교 진화의 방향 (종교학회 발표) 미선 121 09-10
163 '나(I)는 누구인가?'라는 근원적인 물음에 답하려면.. (1) 미선 143 04-13
162 유신론-무신론을 넘어서 <탈신론>으로 미선 276 05-04
161 <초자연주의>를 버려야 기독교가 산다! 미선 231 02-04
160 몸학 기독교 & 몸학 사회주의 추구 미선 160 12-31
159 <자유>에 대한 짧은 생각.. (2) 미선 231 08-24
158 몸학 기독교에선 기독교 신학이 굳이 필요하지 않은 이유 미선 258 03-24
157 인간 무의식의 두 가지 상태와 보다 상향적인 의식 발달을 위하여 미선 187 03-03
156 (1998년 원글) "화이트헤드 철학에서 본 민중신학 비판과 대안적 모색" (2) 미선 161 02-18
155 종교(宗敎, Religion)에 대한 동서양의 어원적 의미와 전후 혼동 오류 미선 150 02-06
154 기존 기독교와 <몸 기독교>의 분명한 차이들 미선 176 01-21
153 GIO명상 방법 12단계 (몸기독교가 제안하는 수행 방법 중 하나..) (5) 미선 269 01-16
152 2013년 계획.. 몸 기독교 (4) 미선 258 01-02
151 민중신학 40년.. (20년전 안병무 기사를 보며..) 미선 131 12-25
150 진보정치 교육의 사각지대와 민중 역사 주체론에 대한 반성과 재고찰 미선 123 12-22
149 교회에 대한 권력비판? 교리비판? 어느 것이 더 유효할까? (4) 미선 194 12-06
148 왜 예수인가 (필독 원함!) (13) 미선 991 11-04
147 새로운 기독교의 방향과 몸학의 종교관 (2) 미선 149 10-05
146 새로운 기독교의 방향과 몸학의 종교관 (1) 미선 187 08-17
145 기독교 교리의 문제는 기독교만의 문제가 아니다! (3) 미선 228 06-11
144 초대교회와 바울에 대해... 미선 282 04-28
143 '작은 교회'가 정말 대안인가? 핵심은 교리다! 미선 218 04-22
142 진선미의 기원과 예수사건 (1) 미선이 202 02-24
141 중간 복음주의 신학자 알리스터 맥그리스의 <과학신학> 비판 (13) 미선이 224 12-13
140 끔찍한 <몸의 신학>에 속지 마시길! (유사품 주의) (8) 미선이 256 11-15
139 종교운동과 사회운동을 구분 못하는 오류-기존 진보 기독교 비판 (1) (2) 미선이 292 10-14
138 여전히 예수얼굴에 똥칠하는 개신교 정치세력들 (5) 미선이 258 08-30
137 새로운 기독교 역사의 국내 선구자들 : 유영모, 함석헌, 김재준 미선이 247 06-26
136 조용기 목사의 할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미선이 255 05-14
135 몸학과 새로운 기독교 운동 그리고 30년 후의 기독교 미선이 276 04-11
134 <인간의 자유의지>라는 착각과 환상에 관한 문제 (14) 미선이 474 03-04
133 기존 진보 기독교인들의 <생명평화> 담론에 반대한다! (업그레이드판) (8) 미선이 342 02-17
132 기존 진보 기독교계의 ‘생명평화' 담론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미선이 145 02-10
131 영혼구원의 강조에서 <총체적인 생명구원의 강조>로 (4) 미선이 192 02-05
130 성서문자주의 또는 성서무오설 신앙보다 더 뿌리 깊은 고질병은? (9) 미선이 526 02-02
129 죄의식의 종교에서 <이웃과 함께 성찰하는 종교>로 미선이 191 02-01
128 수직적 구조의 교회에서 <수평적 구조의 교회>로 (2) 미선이 250 01-21
127 서구식 목회문화가 아닌 <우리식 목회문화>로 미선이 214 01-21
126 과정신학에 대한 비판과 민중신학의 신 이해 접맥 미선이 344 01-13
125 ★ 예언 (1) 미선이 527 12-24
124 ♣ 새로운 기독교 신학의 인간론 (4) 미선이 338 12-19
123 ♣ 새로운 기독교 신학의 인간론 (3) (4) 미선이 404 12-12
122 ♣ 새로운 기독교 신학의 인간론 (2) (10) 미선이 581 12-05
121 새로운 기독교의 시간관, 태초와 종말로서의 시간관을 거부한다! (4) 미선이 494 12-01
120 ♣ 새로운 기독교 신학의 인간론 (1) 미선이 579 11-30
119 [예수운동 예배 견본] 새로운 기독교의 <예수운동 예배>를 위하여 미선이 568 11-28
118 숭배하는 예배에서 <닮으려는 예배>로 (1) 미선이 601 11-19
117 거꾸로 흘렀던 감리교 역사, 바로 세우기엔 아직 멀었나 미선이 500 11-10
116 <새로운 기독교>를 소개하는 전체 안내 링크글 (계속 업데이트 예정) 관리자 1642 11-03
115 [논평] 봉은사 땅밟기 추태, 성경 '문자주의' 그 야만의 역사 넘어서야 (1) 관리자 672 10-29
114 기존의 진보 기독교와 새로운 기독교 운동 (1) 미선이 518 10-22
113 1세대 민중신학자 안병무의 미완의 작업과 기존 민중신학의 과제 미선이 498 10-19
112 [새기운 성명] 4대강 사업 관련, 문정현 신부의 정진석 추기경 비판을 지지한다 관리자 469 10-19
111 스퐁, "스티븐 호킹과 유신론/인격신의 죽음" (작은불꽃님 역) 관리자 732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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