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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하나님 중심/계시/신비> 중심의 사고에 감추어진 사유의 폭력    
  글쓴이 : 정강길 날 짜 : 08-11-06 10:01 조회(2523)
   트랙백 주소 : http://freeview.org/bbs/tb.php/b001/224 




 
<하나님 중심/계시/신비>를 빙자한 사유의 폭력
 
바르트식의 신학적 사유 패턴의 한계와 러셀 패러독스

 
"종교는 헛점이 많습니다...인간이 헛점이 많은 것이기에..." - 영화 <천사와 악마> 중에서
 
 
 
하나님 말씀과 계시를 중심적으로 삼는다고 하면 그만인 것인가?
 
흔히 말하듯 보수 기독교인 두고 종종 “묻지마 신앙인”이라고도 말한다. 왜냐하면 그 어떤 교리적 전제에 대해서는 의문을 가져선 안되고 결국은 무조건 믿어야만 신앙이 성립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결코 건들면 안되고 비판이 불허되는 지점이 있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여전히 전통 교리가 깨어지면 기독교 자체가 깨어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즐비한 현실이다.

이때 이들 가운데는 하나님의 신비와 계시를 매우 강조하면서 이에 대해서 더 이상 캐내는 것은 합당치 않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는데, 언뜻 보기에는 매우 하나님을 매우 높이고 있는 신실한 신앙인이 아닌가 라고 생각될 정도다. 왜냐하면 모든 것들을 하나님 중심으로 보겠다는 것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하나님 중심 혹은 하나님의 신비와 계시 중심이라는 이런 주장들을 내세우는 사람들의 신학적 사유가 저지르는 또 다른 폭력의 위험성도 감지할 필요가 있겠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중심으로 놓는다지만 실상 그 자리는 그렇게 얘기하는 사람의 언명과 행위가 중심으로서 놓여지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식의 신학적 사유 패턴의 한계는 흔히 루터나 칼빈 등등 독일 및 유럽 계통의 신학들을 추구하는 사람들, 현대에선 더 뚜렷하게는 바르트 신학 추종자들에게서도 종종 보여지는 사유의 패턴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어째서 그러한지를 잘 살펴보자.
  
바르트 신학과 <하나님 중심/계시/신비>주의라는 신학적 사유
 
바르트의 신학은 흔히 잘 알려져 있듯이 그는 <계시 중심>의 신학자다. 그가 보는 성서 이해도 성서는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책이 아니라 인간에게 건네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거기에 담긴 하나님의 계시는 스스로 드러낼 뿐이지 그 어떤 인간의 것에 의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보고 있다. 이러한 바르트의 신학적 사유에는 초월자인 하나님의 계시를 절대화함으로서 역으로 시공간의 모든 현실적인 것들은 상대화시켜버리겠다는 신학적 전략이 짜여져 있는 것이다.
 
당시 바르트는 세계 대전을 겪으면서 인간 문명의 전적인 타락과 위기를 경험하였었고, 시대의 위기를 부르짖으며 하나님만을 신뢰하게 되는 신앙적 토대를 가지게 되었다. 바로 그렇기에 히틀러의 독재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저항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모든 것들은 상대화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 개인적으로 생각할 때, 칼 바르트는 나름대로 그 시대에서만큼은 최선을 다한 신학자였다고 본다.
정작 멍청한 것은 루터-칼뱅-기독교 전통 운운하면서 여전히 바르트의 신학을 끌어쓰고 있는 그 추종자들인 것이다. 
이들은 사실상 바르트식 신학에 깔려 있는 그 사유 패턴의 폐해와 한계를 전혀 읽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물론 그 시대 바르트의 삶의 정황에서 볼 땐 나름대로 정당성을 가질 수 있을는지 몰라도 그 같은 바르트식의 사유 방식은 시대적 상황과 여건에 따라 좋을 수도 있지만 매우 나쁜 사유의 폭력이 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 같은 사유의 패턴을 꼼꼼히 살펴볼 경우, 그러한 상대화의 범주 속에 사실상 히틀러 뿐만 아니라 바르트 그 자신도 예외일 수 없기에 바르트 신학 역시 상대화되어야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즉, 바르트 자신의 신학적 언명들만큼은 모든 상대화의 예외로 치부된다는 얘기다. 하지만 우리가 철저히 바르트식으로 따른다고 할 경우에는 실상 그 자신도 상대화되어야만 하는 모순적 운명에 처해 있는 것이다.

이런 사유 방식들은 흔히 <궁극적으로 불가해한 것>을 중심으로 놓고서 실상 자신은 판단할 것은 다 하고 있는 그런 이율배반적인 모순의 형극을 낳는 꼴인 것이다. 이를 테면 용왕을 믿는 <용왕교>의 그 어떤 교주가 “우리는 용왕님의 말씀만 받들어 모셔야 한다”고 말했을 때, 용왕님을 모시고 있는 그 교주의 말은 진실로 용왕님의 말씀인가? 아니면 용왕교 교주 자신의 말인가?
 
러셀 패러독스, 자기 언급만큼은 예외로서 치부해버리는 자기 모순의 논리

논리학에서 이 같은 모순의 발견이 바로 수리논리학자이자 무신론자인 버트란트 러셀(B. Russell)에 의해 발견이 되었고, 그래서 이를 <러셀 패러독스>Russell's paradox라고 부른다. 혹은 경우에 따라 <수행 패러독스>라고도 불린다. 왜냐하면 자기 이론대로 충실히 수행을 하게 될 경우 자기 모순에 직면하기 때문이다. 러셀의 이 유명한 발견은 프레게의 논리체계와 칸토어의 소박한 집합론이 치명적 모순을 지닌다는 것을 보여준 예이기도 하다.

논리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하지 않은 일반인들도 이해하기 쉽게 이해하고자 한다면, 흔히 잘 알려져 있는 기원전 6세 때 철학자이자 크레타 섬 사람이었던 에피메니데스가 외친 “모든 크레타 섬 사람은 거짓말쟁이다”라는 문장으로 유명한 <거짓말쟁이 모순>을 떠올려도 좋을 것이다(물론 모순에 대한 발견은 후세의 발견이며, 러셀 자신은 대중판 버전으로 '이발사 이야기'를 예로 들었다). 자기 자신을 그 어떤 집합의 구성원으로 하면서 그 자신이 그 집합에 대해 언급할 때는 반드시 모순에 직면하고 만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 자신은 애초에 하나님의 계시와 신비 중심 어쩌구 하는 신학 얘기를 하다가 왜 갑자기 나는 지금 논리학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인가? 왜냐하면 나는 지금 바르트식 신학이 지닌 그 사유의 형식적 패턴이 낳고 있는 폐해와 한계를 그 치명적 문제로서 지적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는 비단 바르트 신학만의 문제도 아니다. 이외 비슷한 사고 패턴을 가지고 있는 기독교 신앙인들을 비롯하여 (특히 종교 진영에서) 불가해한 영역을 빙자하여 자신의 입지를 중심화 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문제인 것이다.

바르트식의 신학적 사유에는 하나님만이 절대로 숭상되면서 인간의 나머지 것들은 상대화되어야 한다고 외치고 있지만, 그렇게 얘기하는 그 언명 자체는 절대화되고 있는가? 상대화되고 있는가? 즉, 은근히 바르트 그 자신의 신학적 언명들은 절대화되고 있으며, 하나님 위치에 놓여 있는 자기 모순을 낳게 된다는 얘기다. 물론 그 자신은 자기는 하나님이 아니라고 말할 진 몰라도 말이다.

하나님만을 높이고 모든 것은 상대화하면서 은근히 그 같은 자신의 주장과 언명은 중심적인 위치 즉, 하나님의 위치에 올려놓고 있는 이 같은 사유의 폭력성을 나는 지금 문제 삼고 있을 따름이다. 그렇기에 실상 꼼꼼하게 따져보면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여전히 사람 중심으로 대체되고 있을 따름이다. 물론 이 같은 사유가 바르트 당시엔 하나님 위치에 있던 독재자 히틀러마저 상대화해버리는 좋은 기능으로서 발현되기도 했었다. 하지만 바르트식의 신학적 사유 패턴 그 자체는 바로 오늘날 포스트모더니즘이 저지르고 있는 횡포와 모순과도 매우 흡사하게 닮아 있는 것이다.
 
 
하나님중심을 강조하는 인간 신학자의 저서
 
 
<하나님중심주의자>들을 조심하라

나는 그래서 하나님 중심/계시/신비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기독교인들이 종종 부르짖는 그 <하나님 중심>이란 게 도대체 무슨 뜻인지, <하나님의 신비와 계시>라는 게 도대체 어떤 것인지를 더욱 철저하게 구체적으로 물어야 한다고 본다. 혹자는 철저히 묻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계시나 신비가 퇴색된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얘기야말로 더욱 어불성설이 아닐 수 없다. 만일 "계시나 신비에 대해선 묻지 말고 스스로 드러내도록 그대로 두어라"고 한다면 결국 우리의 기독교 신앙도 <묻지마 신앙>이 되기 십상인 것이다.

또한 혹자는 철저히 묻는 것을 두고, 이를 ‘환원주의자’라고 비판하기도 하는데 내가 보기엔 이들이야말로 <환원>과 <소통을 위한 설명적 해명>을 분명하게 혼동하고 있을 따름이다. 돈 큐빗(Don Cupitt)이 적나라하게 비판한대로 기독교인들은 그 자신들끼리만 통하는 비밀 용어들을 잘도 쓰고 있는 형국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그저 자기들끼리만 통용되는 '계시'니 '성령'이니 어쩌구 저쩌구 하며 모임을 가질 뿐이다. 그런데 정작 “그것이 뭐냐?” 물으면 “묻지마! 그냥 체험해!” 라는 말한다. 아, 이 얼마나 일방적이고 폭력적인가!

나는 그렇기에 바르트가 자유주의 신학자들처럼 성서비평을 받아들였다고 하더라도 그를 진보 신학자로 분류하거나 혹은 바르트가 보수 근본주의 기독교를 온전히 극복했다고는 결코 보질 않는다. 왜냐하면 그가 수행하고 있는 사유의 형식적 패턴 자체는 여전히 보수 근본주의자들의 그것과 너무나도 닮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점에서 바르트식의 신학적 체계 역시 은연 중에라도 가부장적 사유 체계를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흥미롭게도 가부장적 폐해를 극복하겠다는 국내 여성신학자들 중에는 멋모르고 바르트 신학을 추종하는 이들도 꽤 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알고 보면 바르트가 그의「교회교의학」에서 가부장적 질서를 주장한 것도 우연만은 아닌 것이다(* 참고로 바르트는 그의 교회교의학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주종관계는 구조적이며, 여자는 남자에게 순종함으로써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고, 여자의 신앙적 응답은 자기의 합당한 위치를 지키고 남자의 선도를 따르는 데 있다고 얘기했을 뿐만 아니라, 여자가 진정으로 해방되기 위해서는 반항하지 말아야 하며, 그러한 여자의 반항은 하나님의 질서에 대해 모독하는 것이라고 보았던 남성 신학자였다).
 
또한 바르트의 신관은 상호 관계적 소통의 신관이 아니라 절대 타자로서의 초월 신관이자 결국은 일방 관계로서의 신관이라는 점에서 다분히 마초적 성격의 신관이라는 점도 첨언될 필요가 있겠다. 쉽게 말해서 세계에 대해 영향을 주기만 하는 일방 관계로서의 하나님이지, 세계에 대해 영향과 제약을 받을 수 있는 상호 소통으로서의 하나님을 말하는 범재신론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 중심주의자들을 조심하라. 그들은 하나님 중심을 부르짖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온갖 난리들을 펴대지만 실상 알고 보면 결국은 그 자신의 입장을 중심으로 놓고 있을 따름이다” 즉, 알고 보면 하나님을 모신다면서도 정작 하나님이 배제되고 있는 아이러니한 형국이라고 하겠다. 이는 평화의 이름으로 평화가 말살되고, 정의의 이름으로 오히려 정의가 더렵혀지는 역설적 현실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하나님 중심/계시/신비를 줄창 강변하는 보수 기독교인들일수록 합리성을 중시하는 현대인들을 점점 설득해내기가 어려워지는 것도 알고 보면 지극히 너무나 당연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그 이면에는 바로 러셀 패러독스라는 논리적 모순을 해결해내지 못하는, 그 같은 사유 방식에 대한 필연적 한계가 은연 중에라도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한계로 인해 보수 기독교인들은 합리적 설득 차원에선 제 풀에 지쳐 "신앙이 어떻게 합리적일 수 있느냐. 그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아신다"라는 불가지적 입장으로 처리해버리고, 그리고 나서 전도 대상자들에겐 "믿어라, 직접 체험해보면 안다"는 이런 식의 강요적 태도로만 나올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진리(혹은 감춰진 계시)에 대한 탐구는 오류와 비극에 대한 성찰에 기초되어야

끝으로 그렇다면 나 자신의 입장 즉, 나의 이 같은 주장들은 또 어떻게 정당성을 지닐 수 있는가 라고 질문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당신도 그렇고 우리 자신들 모두 그 어떤 주장을 하더래도 결국 상대주의 입장에 처해 있을 수 밖에 없잖은가 라고 물을 수 있겠다. 그렇다! 인간의 그 어떤 주장도 그 출발에 있어선 절대화될 수 없다. 심지어 하나님 중심주의 주장 자체도 그러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진리에 가까이 갈 수 있다는 것인가? 인간은 결코 직접적으로 진리를 붙잡을 수 없다.
 
바로 그래서 나 자신은 <오류>와 <모순> 및 <비극>의 발견을 매우 중요시 여기는 것이다. 이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우리가 진리로 나아가는 길은 그나마 <오류>와 <비극>을 통해 조금씩 나아갈 수 있을 따름이다. 당연히 나 자신에 대해서도 얼마든지 오류 가능성을 열어 놓고 있다. 구체적이고 정합적인 근거만 있다면야 얼마든지 나의 이런 얘기들에 대해 그 어떤 얘기들도 기꺼이 환영하는 바이다. 참고로 나 자신이 추구하는 진리 추구 방법에 대해서는 "내가 믿고 있는 것은 과연 진리인가" http://freeview.org/bbs/tb.php/b001/108 라는 글을 참조 바란다.
 
자신의 그 어떤 주장들도 예외 없이 결국 모든 주장들, 모든 이론들의 경합은 언어상에 있어서는 소통 차원에서의 설명력 확보 유무에 달려 있다는 점을 우리는 결코 잊어선 안된다. 설령 그것이 <하나님 중심/계시/신비> 어쩌구 강변하는 종교 이론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관련글] 우리가 흔히 쓰는 신앙적 언명들의 무기력함과 공허한 비생산성
 
 
 
치노 (08-11-06 12:58)
 
대부분의 사람들이 논리를 펼 때 이성에 근거하기 보다는 감정이나 아니면 자기의 주관적 시각을 가지고 주장을 하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됩니다. 사람들은 이성적이기보다는 감정적이니까요. 그리고 또 한가지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논리적 전개에 대한 교육을 전혀 받지 않는다는 겁니다. 프랑스의 경우만 보더라도, 대학 입시에서 '바칼로니아'라는 대학 입시 정책이 있어 체계적인 철학 교육을 받는 반면, 우리나라의 경우, 허접한 논술이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신학생들에게는 매우 미안한 이야기지만, 다양한 분야(예를 들면, 철학이나 문학)의 책을 읽지 않고 교리 중심으로 신학을 대하기 때문에 많은 문제점에 노출되어 있다고 봅니다. 또 하나는 선지식입니다. 적어도 어느 분야에 논쟁을 하려면 그에 대한 철저한 자기 지식화가 있어야 하는데 그런 사람은 흔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미선이 (08-11-06 13:43)
 
저는 그래서 가급적 한국 기독교인들에게도 제발 우리 사는 사회와 세상과 잘 소통을 하기 위해서라도
논리적 글쓰기 훈련을 쌓을 수 있는 책들, 이를 테면 『오류를 알면 논리가 보인다』(책세상)라는 책 같은 것도
신앙적 발전을 위한 영성 수행의 책으로서 꼭 추천하고 싶기도 하답니다.

[관련글] 그리스도인일수록 논리와 놀자
http://freeview.org/bbs/tb.php/d002/7 참조

치노 (08-11-06 15:16)
 
또한 보통 사람들을 보면, 자기의 고정관념을 바꾸려는 의지가 전혀 없고, 따라서 자신의 신념 체계와 다른 논리적인 공격이 들어오면 귀를 닫거나 화를 내버리는 경우가 일상사죠. 더군다나 소위 신학을 했다는 목사님이나 근본주의 신앙을 고수하는 기독인들은 논리적으로 접근한다 하면 '하나님은 논리적으로 알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라면서 권위에 의존해서 논리에 반박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결국 논리적인 대화도 소통의 전제되어야 하는데, 소통이 먼저 막혀버리니 논리적이고 생산적인 대화는 막혀버립니다. 논리도 결국 소통의 문제로 봐도 되겠죠.

정관 (08-11-06 15:57)
 
고정관념을 어떻게 바꿉니까? 자기도 고정관념에 희생자이다 하는 인식이 먼저 있어야 할것 같습니다.  뇌과학 책에 보니까 우리가 느끼는
쾌감에는 도파민이라는 물질이 생성된다고 하네요. 그것이 감성에만 있는게 아니라 지성적판단 논쟁의 우열에서 조차 쾌감이 작용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먼저 쓴 맛에 먼저 익숙해져야 하지 않을까요?

치노 (08-11-06 16:15)
 
물론 고정관념을 바꾸기란 어렵지요. 그러나 학문적인 마당에서는 자기를 객관화해서 봐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럴려면 고정관념의 틀을 마땅히 부수어야지요. 그게 전제되지 않으면 소통은 전혀 불가능한 것입니다. 어찌보면 고정관념을 없애가는 과정이 학문이나 진리를 추구하는 자세 아닐까요? 방금 미국 정치에서도 고정관념을 깨는 '흑인 대통령'의 탄생이 있었잖아요. '흑인은 미국 대통령이 될 수 없다'는게 미국 보수 백인들의 생각아니었습니까?

정관 (08-11-06 16:51)
 
수일전에 수리신학을 쓰신 분과 통화를 한적이 있어요. 화이트헤드 아냐고?  러셀은 알지만 화이트헤드는 모른다 그래요
그분이 신학도 하시고 선학도 하였기 때문에 또 수학자이기도 하기 때문에 좀 조언을 구할까 했었지요.
제가 아는 분중에도 바르트신학 별거아니다 그러는 분도 있어요. 그 거성을 지가 어떻게 판단을 한단말인가? 하는 생각이 있었는데
그러한 안목을 갖게 된다면야 참 즐거운일이라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가톨릭에서 그와 쌍벽을 이루는 칼 라너에 대한 견해는 어떠한지
많이 궁금합니다. 토마스아퀴나스 후에 가장 뛰어난 분이라 하거든요. 저는 속으로 신이 되어야지 되지도 못하면서 다 거기서 거기지 합니다.

    
미선이 (08-11-08 10:57)
 
"저는 속으로 신이 되어야지 되지도 못하면서 다 거기서 거기지 합니다." <---정관님의 이런 언급도
위의 본문이 지적하고 있는 수행 패러독스의 모순을 보여주는 사례에 해당됩니다.
왜냐하면 정관님 역시도 신이 아니잖아요. 정관님도 예외일 수 없이 신이 아닌데도
정관님의 글 또한 나름대로 무엇에 대한 판단을 하고 있기 때문에 자기 모순을 노출시키는 것이죠.
특히 그 어떤 절대 경지를 강조하는 종교인들에게선 이와 같은 언급들이
실상 자신에게는 수행 패러독스의 모순인 줄도 모르고 이런 모순을 보이는 분들 꽤 많답니다.

정관 (08-11-08 16:23)
 
미선님과 또 선의의 부딪힘이 있네요.  미선님과는 실은 많은 부분을 동감하고는 있지만 말입니다. 저는 신이 되어야지 하는 부분을
"요한복음  10:35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자를 신이라 하였거든" 에서 근거를 둔답니다.
유태인들과 주님이 앞뒤 정황상 받은 대화와 그리고 주님께서 그것도 시편의 말씀을 인용하신 것인데 말이죠.
이것도 해석의 차이일까요?

    
미선이 (08-11-08 17:45)
 
수행 패러독스라는 얘기는 정관님의 그러한 말은 똑같이 정관님 자신에게도 해당되는 얘기라는 것입니다.
즉, "정관님도 역시 신이 아니니까 어차피 다 거기서 거기가 아니냐" 라는 것이죠. 정관님께서는 신이세요?
아니면, 신은 아니더라도 그저 요한복음 10:35만 인용하면 자기도 신이 되는 정당화가 된다고 보시는 것인지요.

정관 (08-11-08 18:02)
 
에고 이거 또 깨지는구나!  부족하지만 어쩔 수 없이 또...
우리 삶의 과정이 "참신이 되어 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말씀을 인용한 것처럼 미선님이나 저나 또 다른 어떤
분들 어떤 영혼들이라도 참으로 신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말씀을 받은 자는 이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그 말씀이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겁니다.  한번 스스로들 물어 보시고 다를 깨닫기를 바라고 싶습니다.

여담이지만 가톨릭 교의 신학자와 우연히 그런 예기를 한적이 있는데 이 구절을 모르는 겁니다.
조금 생각해 보면 가톨릭도 그렇고 개신교도 그렇고, 이 말씀의 진정한 뜻을 모를수 밖에 없지 않겠어요?
요즘 유행하는 데로 다 생각나름이죠.... 그러나 진정 자신을 신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으리라 봅니다.

아 미선님 위엣글을 읽어보니 미선님이 경계하신 글들도 맞는 말씀입니다. 주의 해야죠..
자기 착각에 빠져서 연약한 영혼들 등처먹는 사이비들 말이죠?

제가 책 한권 소개해 드릴께요 미선님께도 어려운 책일것 같은데요. <UNDERSTANDING MYSTICISM>
Edited by Richard Woods 입니다.이러한 툴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해악을 분별키 위해서이죠.
그러나 저는 여기서 한걸음 더 진보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저의 당착일수도 있지만요...

    
미선이 (08-11-08 18:12)
 
그렇다면 절 너무 미워하시지 마시고 질문에 대한 온전한 답변만이라도 부탁드리겠습니다.
1. 정관님의 얘기대로 그러면 자신을 신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면
상대방에게 "다 거기서 거기지"라고 그렇게 판단을 내려도 괜찮다는 것인지요?
2. 그 판단의 기준은 요한10:35의 뜻을 깨닫고 안깨닫고에서 갈라지는 것인가요?
3. 그래서 애초에 정관님과 대화한 그분이나 칼라너나 혹은 토마스아퀴나스는 거기서 거기가 아니라는 것인가요?

정관 (08-11-08 18:36)
 
때로는 아주 밉습니다. 그러나 꼭 그렇지는 않은것도 아시리라 봅니다.
1.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저는 우열의 차이가 없다라는 뜻입니다.
2.그렇다고 봅니다. 이건 뜻풀이 하려면 한참 걸리니 오랜 세월두고 얘기합시다.
3.아니죠. 다 거기서 거기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의식의 차이는 있다고 봐야죠.
어쩌다 미선님과 이리되었는지..

    
미선이 (08-11-08 18:46)
 
감정의 장난에 휘둘리지만 않는 냉철한 공방이라면 그리 미워하실 것도 없답니다.^^*
결국 결정적인 핵심은 정관님의 아직 풀어놓지도 않은 그 뜻풀이에 달려있군요.
기회가 되면 그게 어떤 뜻인지를 한 번 구체적으로 밝혀주시길 바랍니다.
글구 정관님은 그뜻을 깨달으신 분인데
정관님이 거기서 거기라고 판단해버린 그사람들은 왜 그뜻을 몰랐다고 보는 건가요?

정관 (08-11-08 19:24)
 
지금 면접시험 치루고 있습니다. 미운것 부터 얘길하면 상대방의 타당한 얘기도 있겠지만 미선님 자기가 아는
범위에 들어왔다 하면 그 받다리로 계속 공격을 해대는데 풀려날 재간이 있어야지....

그리고 저는 논쟁보다는 영성에 심취하고자 하기 때문에 실지로 사람들과의 만남도 꺼리고 대화도 그냥 감상하고
느끼고 이럽니다.  단지 영성모임에서는 성경말씀이던지 영적독서를 통한 자기 성찰과 자기오류에 대해서는 자신을
까발려야 된다고 얘길 하고 제가 먼저 모범을 보입니다.  그러니 이런 논쟁에는 많이 떨어집니다.

지금이야 깨인분들이 성서의 오류를 지적하고 하지만 80년대에는 어디 그런 생각도 못해봤구요. 나만 이단입니다.
어디 얘기도 할 수없고, 그러나 이런 저런 수행을 하다가 보니 성서에는 참뜻이 있는데 이것을 정말 제뜻데로 해석을
하지 않는 겁니다.
 그러다가 요즘 바르게 신학하시는 분들을 보니 무척 반갑죠..
저는 신학으로 부터 출발을 한것은 아니구요. mystic으로 부터 출발을 했읍니다. 그러다가 최신의 신학과 상당부분이
일치를 하는 겁니다. 미선님이 얘길하시는 정합적인 부분을 제가 많이 연습을 해야 합니다. 이것도 착각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리고 미선님이 질문하신 부분은 미선님도 어느정도 감을 잡고 말씀하시는것 같은데 성서의 바른 전통이 이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때로는 깨달은 신비가도 있었지만 그때 그 전통내에서 살려면 어쩔 수없이 타협을 했으리라 보고 있고요.

그리고 저는 멀리서 바라볼께요...
솔직히 말해서 우도님도 한번 만나뵙고 싶지만,  가장 끊기 힘든것이 사람입니다.  늦었지만 요즘 부버가 쓴 <나와 너>를
읽고 있는데 제가 잘못 인식하고 있는 부분은 없는가 묵상하면서 읽고 있어요..

얼마전 학술대회때 부버를 연구하시는 분이 말씀하기를
부버가 신체험,하나님 체험에 관심이 지대 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신체험을한 청년과 대화를 나누다가 크게 깨달은게
있어서 <나와 너>를 쓰게 되었다고 하네요.. 기독교 해석과 타종교의 해석에서 oneness와 voidness는 중대한 차이이면서도
가장 해명하기 어려운 문제라고 봅니다.

그러나 저는 그래요. 이걸 하던 저걸하던 그 만큼 다다르지는 못하더라도 수행을 하면서 하라고 권하고 싶어요.
이게 옳으네 저게 옳으네 너무 따지다 보면 우리 짧은 여정에 귀중한 시간들을 다른곳에 허비하는것 같거든요

    
미선이 (08-11-08 19:30)
 
훔.. 저는 공격을 한 게 아니라 <방어>입니다. 잘 생각해보십시요. 누가 먼저 딴지를 걸었는지에 대해서 말입니다.
즉, 정관님께서 적어도 상대방의 논지와 충돌나는 그러한 딴지를 거는 경우에만큼은
부디 소통을 위해서라도 구체적이고 정합적인 근거라는 게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거 없이 주장할 경우엔
오히려 상대방에 대한 부당한 오해를 형성시키는 요인이 되기도 한답니다. 그런 일은 사실상 수행자에게도 합당치 않잖아요.^^*

정관 (08-11-08 20:32)
 
그래서 공격이 최상의 방어다 라는 말이 생긴것 같은데... 아닌가요.
여하튼 모르겠습니다. 영성모임에서는 서로 세워주고 어려움에 같이 동참하려 하다 보니까
바른 비판이 때론 결여되곤 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주도하시는 선한 모임인데 어디 마귀가
들어오나 하고 긴장하고 있기는 어렵죠...  그러나 그 시간이 다 지난 후에는 고요히 그 시간들을
성찰해 보곤합니다.  많은 오류들이 발견되고 인간의 한계성도 발견되곤 하지요.
자기오류를 발견하고 혹은 상대방으로 부터 발견된다는 것은 실은 감사한 일이예요. 당시엔 쓰릴지라도..

    
미선이 (08-11-08 20:40)
 
저는 단지 제 글에 대한 일말의 오해만이라도 없기만 바랄 따름입니다. 고맙습니다.ㅡㅡ;

sydney (08-11-08 20:36)
 
미선, 정관 두 분께
미선 님의 글과 두 분의 논쟁을 자세히 읽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끼어드는 것은 아니고 평소에 정관 님의 글을 읽으면서 가졌던 질문 하나 드리고 싶습니다.
가톨릭에 바탕을 두고서 종교를 넘나드는 실천적 수행에 관심이 있으신 것 같습니다.
그런데 가끔 성경구절을 근거로 하시는 것 같습니다.
성경 자구에 근거할 필요가 있는지요?
저는 성경 어디 몇장 몇절에 어떻게 써있다는 것은 별로 의미를 두고 싶지 않습니다.
다른 경전도 마찬가지이고.
큰 틀에서 예수, 석가 등의 뜻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한지 않은가 생각 합니다.
조심스러운 말씀임니다만 그래서 지금은 별로 성경을 읽으려고 노력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새로운 정보를 주는 책들을 열심히 읽으려고 하면서도...
제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깨우쳐 주시기 바랍니다.

정관 (08-11-08 22:38)
 
참 제가 나설곳 나서지 못할곳 가리지 못해서 죄송스럽기만 합니다. 제가 잘 안다면야 연결해서 결국 같은 뜻임을
풀이할수 있어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못합니다.  그러나 일단 경전이라는 것은 오늘날 교회의 해석과는 많이 다르지만
상당한 영성과 비전을 포함하고 있다고 봅니다. 일례로 유태신비 전통인 카발라 같은 경우의 성서해석은 마치 주역처럼
해석을 합니다. 사실 신학에서 이쪽으로 연구를 해보고 싶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신뢰할 만한 지식을 갖고 있는 분이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학술적으로 말이죠. 이러한 점들은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알지도 못하면서 ...
관심이 있으시면 Zohar에 관한 책들을 읽어 보십시오. 사실 계시록 같은 것도 카발라 용어를 모르면 해석이 안되는데
많이들 그동안 감추어져 왔다고 봅니다, 이것이 정말 학술적으로 드러내기 위해서는 그러한 정합적인 절차를 거쳐야 하겠지요.
바라보기만 해도 질려버릴 정도입니다....  능력있는 분들이 점차 밝혀내겠지요.

    
우도 (08-11-13 21:11)
 
저도 한때는 열심히 성경구절을 외우다 보니 본의 아니게 성경고사를 일등도 하게 되고 설교준비를 하던 분들이 이런 말씀이 어디에 있느냐고 종종 묻던 시절이 오래 전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는 텍스트를 통한 하나님보다는 콘텍스트를 통하여 하나님이 더욱 가깝게 그리고 진정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이 드는 것을 발견하는 경우가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도리어 성경이 하나님을 가리우는 것 같았으나 정선생의 말대로 성경의 오류를 통한 하나남의 뜻을 발견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호주에 계시는 선생님의 말씀처럼 성경은 뒷전이고 컨텍스트라고 하는 것들이 저에게는 텍스트가 되었습니다.
저는 노자를 좋아하는데 노자의 가르침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다 보니 신학적, 철학적 논쟁이 정선생님이나 여러분들에게는 큰 의미가 있고 그리고 꼭 필요한 일인지도 알면서도 저는 점차  흥미를 잃어가니 요즘은 제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합니다.
저도 호주에 계신 선생님의 말씀처럼 이제는 큰 틀에서 놀아보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정관선생님의 박학다식함과 넓은 교제를 보며 늘 궁금해 하고 있었습니다.
인간의 인연이라는 것이 몇겁의 인연일 수도 있고 찰나일 수도 있는 것인데 뭐 그것이 대수입니까
보고 싶으면 보는 거지요
저도 한번 뵙고 싶습니다.
손전화가 0163549932입니다

하랑 (08-11-11 17:54)
 
퍼갑니다~

컨설턴트 (08-11-30 00:54)
 
워낙 정선생과 이성적으로 감정적으로 교류를 많이 하다보니 정선생이 이야기 하고자 하는 의미를 평소에 많이 체득하고 있었던 차에 이 글을 읽고 느낀 바를 적습니다.
위 글에서 제가 가장 추천하고자 하는 구절은 바로 [우리가 진리로 나아가는 길은 그나마 <오류>와 <비극>을 통해 조금씩 나아갈 수 있을 따름이다.]라는 부분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기도 하고, 기도도 하고, 예배도 드리고, 각종 종교적 행위를 통해서 하느님의 뜻을 깨닫기를 바라는 것은 바로 '진리'가 무엇이며 그 '진리'를 향해 우리는 어떻게 나갈 수 있는가 하는 수행의 과정아닐까요? 거기에 구태여 전통을 빙자로 한 '종교적 해석'이 무에 그리 중요하고 또 (전통이라 불리는) 그 길을 따라야만 하느님의 뜻을 따를 수 있겠습니까? 그러하기에 저 자신이 매우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기존 기독교의 어이없는 행태를 보면 '나는 꼭 진리에 이르러야만 하겠다'는 전의(?)에 불타게 된답니다. ㅋㅋㅋㅋ 정선생님, 건필하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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