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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⑤ 교리적 예수에서 <역사적 예수>로 (3)    
  글쓴이 : 정강길 날 짜 : 06-06-14 11:01 조회(4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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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환기의 한국 기독교, 바뀌어야 산다! (14)
⑤ 교리적 예수에서 <역사적 예수>로 (3)
 

정강길 minjung21@paran.com



 
1. 21세기 기독교와 한국 기독교의 위기
2. 21세기 기독교 변혁을 위한 12가지 패러다임 대전환
   ※ 관념적 이원론에서 <현실적 관계론>으로
   ① '무조건 믿어라'의 기독교에서 <깨달음의 기독교>로
   ② 이웃종교에 배타적인 기독교에서 <열린 기독교>로
   ③ 가부장적 기독교에서 <모성애적 기독교>로
   ④ 초월신론에서 <범재신론>으로
   ⑤ 교리적 예수에서 <역사적 예수>로
   ⑥ 문자적 성서해석에서 <사건적 성서해석>으로
   ⑦ 숭배하는 예배에서 <닮으려는 예배>로
   ⑧ 서구식 목회문화가 아닌 <한국식 목회문화>로
   ⑨ 수직적 구조의 교회에서 <수평적 구조의 교회>로
   ⑩ 죄의식의 종교에서 <이웃과 함께 성찰하는 종교>로
   ⑪ 영혼구원의 강조에서 <총체적인 인간구원의 강조>로
   ⑫ 저 세상이 아닌 <이 땅에서의 하나님 나라 운동>으로
3. 오늘날의 선교 대상은 기독교 그 자신부터
4. 나오며



(*조금 긴 글이라 차분히 읽어주시면 더욱 감사하겠습니다.)


역사적 예수 연구에 있어 해석의 두 가지 원칙

알다시피 역사적 예수 연구는 근대 모더니티가 신약학에 스며들면서 촉발되었다. 제1탐구, 무(無)탐구, 제2탐구 그리고 제3탐구로 오면서 역사적 예수에 대한 여러 연구방법들도 보다 다양하고 보다 복잡한 양상으로 발전되어갔다. 나는 여기서 일단은 그 해석학적 연구방법의 틀에서 볼 때 기본적인 두 가지 원칙을 상정해두고자 한다. 어쩌면 이미 이 원칙들은 깔려 있을 수도 있겠지만 보다 분명히 하는 차원에서 말해둔다.

첫째는 성경의 복음서 뿐만 아니라 적어도 지금까지 발견되었던 모든 고대 문서들과 자료들 그리고 밝혀진 고대 근동 지역의 다양한 사회상들 등등 이러한 모든 축척된 데이터들에 대한 해명과 그동안의 성과들을 결코 무시해선 안되기에 이에 대해선 설명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 첫 번째이며, 두 번째는 그러한 첫 번째의 긴장을 유지하면서 적어도 오늘 이 시대에서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펼쳐 나가는 데 있어 가장 유용할 수 있는 역사적 예수를 정립해보자는 것이 두 번째 원칙이다.

이때 여기서 이를 보다 깊게 고찰해본 사람이라면 두 번째 원칙이 첫 번째 원칙보다 더 상위적으로 작동될 수도 있지 않느냐 라고 질문할 수 있겠다. 인간의 해석능력이란 또 한편으론 구성능력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충분히 그럴 여지가 있음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실은 이 두 원칙은 어느 정도 서로가 서로를 제약하는 그러한 긴장관계에 있을 수밖에 없다고 본다.

하지만 나 자신이 여기서 첫 번째 원칙에 대해서 말하고자 했던 바는, 적어도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는 학계의 축적된 정설들이나 반론의 여지가 별로 없는 사항들에 대해선 그 기조가 유지될 필요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가운데 행여 다양한 해석들이 가능한 부분이 있고, 이것이 다른 사항들과도 잘 맞아 떨어지면서 조화되고 있을 경우, 우리는 두 번째 원칙에도 충실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요약해서 말한다면, 첫 번째는 <정합적인 설명력>에 대한 것이고, 두 번째는 운신할 수 있는 <가능한의 유용성>에 대한 것이다.

이 두 가지 요인이 나는 역사적 예수를 연구하는 해석학적 틀의 원칙적인 양대 기둥이 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솔직히 이는 역사적 예수 담론 뿐만 아니라 인간의 모든 해석들에도 관여되어야 할 언급들이기도 하다. 그리고 더 깊게 고찰해 볼 경우, 실은 저 둘은 궁극적으로는 나누어질 수 없는 하나의 사태임을 알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굳이 이에 대해서까지 여기서 논의하진 않겠다.

역사적 예수 담론은 이미 오래전부터 서구 위주의 담론이었고, 그런 점에서 그 안에도 서구 중심의 다양한 이데올로기적 층차들이 서로 교호하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특히 오늘날의 탈식민주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러한 우려를 안 할 수도 없는 노릇이겠다. 따라서 역사적 예수 담론도 그 자체로 이미 기본적으로는 투쟁의 공간이란 사실을 필히 인지할 필요가 있다. 당연히 우리안의 모든 일상들조차 정치적이고 이데올로기 아닌 것들도 없겠지만 말이다.

물론 아무리 이렇게 말한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지금까지 발견된 데이터들은 역사적 예수를 탐구하기엔 턱없이 빈곤함은 말할 나위 없으리라. 그런 면에서 역사적 예수 연구에 대한 회의적인 점도 없잖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역사적 예수 연구 자체를 폐할 수도 없는 노릇일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저 두 원칙을 통해 <가능한의 최선으로서의 역사적 예수>를 제시했으면 하는 것이다. 아마도 예수세미나 학자들의 연구 방법 틀도 궁극적으로는 이러한 원칙 안에 있을 거라고 본다.

역사적 예수에 대한 탐구가 적어도 현재까지 발견되고 드러난 데이터들과 쌓아온 연구의 성과들을 결코 무시해선 안될 것이며, 가능한 일관된 정합성을 가지면서 지금까지의 축적된 데이터들에 대한 설명들도 해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또한 그런 면에서 두 번째 원칙을 가지고 첫 번째 원칙을 훼손해서도 곤란하다고 하겠다. 적어도 두 번째 원칙은 첫 번째 원칙 안에서 운신할 수 있는 가능성들이다.

저 두 원칙의 긴장은 역사적 예수 탐구에 필요한 기본 전제들이며, 그럼으로써 <정합적인 설명력>을 겸비한 오늘의 이 시대에 가장 유용할 수 있는 역사적 예수상을 제시하고 싶었던 것이다. 물론 정합적인 역사적 예수상의 수립이라는 것 자체가 가능할 수 있는지는 의문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나의 주장을 포함하여- 그 어떤 이론이든 그 어떤 역사적 예수 연구이든 발견된 데이터들과 충돌하거나 오류를 보일 경우엔, 언제든지 수정 또는 폐기처분이 가능해야 할 것으로 본다.

‘역사적 예수’는 그 어떤 <사건>의 이름

나 자신이 보는 역사적 예수 역시 이러한 바탕에 기반하면서 추구하고 있을 뿐이다. 지금부터 소개하는 역사적 예수는 아직 국내에 소개도 되지 않은 논의일뿐더러 제3탐구 진영과도 좀더 다른 이해에 서 있다. 게다가 보수적인 한국교회의 예수만 알다가 역사적 예수를 처음 접한 사람이라면 매우 충격적이고 믿겨하지도 않을 얘기이기도 하다. 기존 주류 전통에 젖어있는 기독교인들이라면 결코 받아들이려 하지 않을 것으로도 짐작된다. 하지만 이미 신약학의 고등비평에서는 근자에 논의되고 있는 얘기이기도 하다.

   
▲ 역사적 예수는 이 땅의 수많은 고통의 한복판에 현존하면서 거기에서부터 하나님 나라 운동을 추동하는 <사건>의 이름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들보다 더 놀라운 점은 이에 대한 단초들이 이미 한국 민중신학의 역사적 예수 이해에 충분히 내재해왔었다는 점이다. 1세대 민중신학자 안병무의 유명한 논문인 <예수사건 전승모체>라는 논문을 보면, 그는 불트만의 역사적 예수 탐구의 불필요성에 대해 반대하면서 “태초에 -케리그마가 아닌- 사건이 있었다”라고 정식화한다. 여기서 그는 그 어떤 ‘말’ 혹은 교리적 선포보다도 ‘사건’의 존재론적 우선성을 내세운다.

예컨대, 쉽게 얘기하면 복음서에서 예수가 안식일에 바리새인들과 충돌한 문제로 인해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다.”(마가 3:27)라는 말씀을 남겼을 경우, 불트만 같은 양식사학파들은 그 말씀을 기존의 전통 유대교와 달랐던 초대교회 공동체 삶의 자리에서 이미 양식화된 것으로 보면서 이 말씀을 더 중요시여기면서 연구하지만, 한국의 민중신학은 그 말씀이 나오게 된 보다 깊은 원천으로서의 <사건>event을 보다 우선적이라고 못박고 탐구하는 것이다.

어찌보면 너무나도 당연한 얘기 같지만, 이 발견은 거간의 양식사학파의 한계를 극복하게 해주는 중요한 실마리가 되었다. 즉, 복음서는 초대교회 공동체의 삶의 자리를 정당화해주는 그러한 문서만이 아니라 그러한 차원 이전에 실제로 예수라는 그 어떤 역사적 사건에 대한 저마다의 경험고백들이 담겨 있는 문서라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민중신학은 예수를 <사건>으로서 이해한다. “예수는 사건이다”

갈릴리 민중과 예루살렘 성전 체제

물론 민중신학은 그 사건을 민중사건이라고 말한다. 예수는 민중사건 속에 현존하는 그리스도라는 사실이다. 그 옛날의 갈릴리 민중(오클로스ochlos: 복음서에선 주로 예수와 함께 있던 ‘무리’, ‘떼’라고 번역됨)과 함께 했던 그 만남과 연대 그리고 함께 밥상공동체 모임이 바로 사건이요, 교회의 원형이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 오클로스 민중들이란, 주로 가난한 자, 병든 자, 옥에 갇힌 자, 헐벗은 자, 굶주린 자 등등 실로 그 당시의 유대사회에서 소외된 체제 밖의 사람들이었다. 당시 유대사회를 지배했던 것은 유대교 율법체제다. 그 유대교 율법체제는 앞서 말한 그러한 자들을 죄인으로 규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납품팔이를 하는 가난한 자들은 안식일에도 일을 해야만 먹고 살 수 있기에 안식일법을 어길 수밖에 없다. 병든 사람들은 정결법에서 볼 때 죄인으로 낙인된 자들이다. 그 당시의 유대 민족을 위해 싸웠던 정치범들 역시 그 체제에서 볼 때는 강도나 죄인으로 규정되어 옥에 갇히거나 끔찍한 십자가 형틀에 못박혀 죽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세리와 창녀들 역시 유대사회가 천시했던 소외자들이다.

또한 갈릴리 지역은 소작농을 비롯한 가난한 민중들이 거하는 땅이었다면, 예루살렘 지역은 제사장과 바리새인들 혹은 대지주들을 비롯한 상류귀족들 중심의 성전체제를 형성하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유대교 율법체제의 첨예한 상징을 드러냈던 예루살렘 성전 시스템은 그때 당시의 팔레스타인 민중을 이중으로 착취하고 있었다.

예컨대, 유대민족의 명절을 통해서 예루살렘 성전으로 모이게 하는 것인데 이런 축제는 성전의 이데올로기화에서 발생한 것이다. 그것은 예루살렘 성전에만 야훼 하나님이 현존한다는 도그마였다. 그러므로 야훼 하나님 신앙을 가졌던 이스라엘민은 모든 재산을 털어 예루살렘 순례의 길에 나서야 했다. 저들은 속죄의 제물로 짐승을 사서 바쳐야 했는데 그 짐승에 대해서는 정결한 것이어야 한다는 단서를 붙임으로서 성전당국이 전매권을 점유했다. 왜냐하면 그 순결성은 사제계급이 결정하기 때문이다.

그 뿐만 아니라 저들이 지니고 온 돈도 외국 화페일 경우 부정한 것이라 하여 예루살렘에서 통용되는 화폐로 바꾸도록 제도화하였다. 그러므로 성전이 은행의 역할까지 겸한 것이다. 예루살렘 성전시스템은 당시로선 유례가 없을 만큼 부패와 착취의 온상이었다.

따라서 일반 민중들도 하나님을 믿고 싶어도 결국은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 파는 양이나 비둘기를 사야지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성전 예배를 올릴 수 있었다(사실 '성전이데올로기'의 역사적 원천은 다윗왕조에까지 올라간다. 이것은 왕조체제 하에서 왕권강화이데올로기와 결부된다). 그렇기에 식민지 백성들은 로마 제국에 세금으로도 뜯기면서도 유대교 율법체제로 인해서도 또 이중으로 착취당하는 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예수께서 당시의 성전체제를 담당하고 유지했던 바리새파나 제사장 계급들과도 종종 충돌을 빚었던 이유도 충분히 짐작할 만하다.

<하나님 나라 운동>이라는 사건의 복음서

사건으로서의 예수 이해는 바로 하나님 나라 운동을 말한다. 그 하나님 나라는 복음서에서 가난한 자, 병든 자, 억눌린 약자를 해방시키는 귀신축출과 병치유 사건 그리고 밥상공동체로서 그려지고 있다.

'하나님 나라'(바실레이아 투 테우)란 하나님의 주권을 의미한다. 헬라어 바실레이아는 꼭 공간적인 왕국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기에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하나님의 통치>라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 하나님 나라는 그저 추상적인 세계가 아니다. 실제적으로 나의 육체와 영혼이 전인적이고도 총체적인 몸의 해방을 경험하는 자리이다.

히브리 민족의 역사는 본래부터 인간의 영혼과 육체를 이분적으로 나누는 그런 헬라적인 관념론적 역사가 아니다. 히브리 민족의 출애굽과 가나안 정착은 이들에게 당면한 절박한 생존의 문제였었다. 구약은 종종 야훼 하나님을 "나는 너희 이스라엘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한 야훼 하나님"으로서 고백하고 있다.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직 야훼만>mono-yahwism의 기치 아래 신앙으로 단결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모노 야훼즘이란 다른 종교들과의 경쟁에서 야훼만을 내세우는 그런 종교적인 의미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리에 사람이 대신 앉으려는 인간의 권력욕에 대해서도 그것을 거부하는 입장을 나타낸 말이다. 특히 구약의 열왕들을 비판한 예언자 전승들을 살펴보면 속히 야훼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를 대망하고 있다. 궁극적으로 신약의 하나님 나라 운동도 바로 이러한 맥락과 연관이 된다.

예수님의 온갖 말씀들과 비유들은 온통 하나님 나라에 대한 것이다. 이 하나님 나라는 지금 여기 세상에 대해 <우선성의 원리>를 가진다. 이것은 앞서 '④ 초월신론에서 <범재신론>으로'에서 말했던 그 우선성의 원리다. 즉, 하나님은 이 세계의 가장 고통받는 자들을 우선적으로 치유하시려 한다는 그 원리처럼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 역시 그러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얘기다.

"너희 가난한 자들아 복이 있다. 하나님 나라가 너희 것이다"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 "아흔 아홉 마리 양보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이 더 중요하다" 등등... 예수의 이러한 온갖 말씀들은 하나님 나라 운동이라는 것이 도덕경의 상선약수(上善若水) 구절에 나오는 흐르는 물처럼, 많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밑바닥 삶인 낮은 곳에서부터 우선적으로 처하는 운동임을 말해준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생명의 전인적인 구원(해방)사건으로서 주를 따르는 우리들을 영원히 추동하고 있는 <다이나믹한 불멸의 좌표>이다.

역사적 예수의 실체는 하나가 아닌 <여럿>

나 자신은 솔직히 그 동안 역사적 예수 연구 서적들에 대해서 그다지 심증에 딱 들어오는 해답을 찾을 순 없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앞서 말했듯이 지금까지의 역사적 예수 연구는 많은 학자들이 탐구한 역사적 예수들의 수만큼이나 제각기 달랐기 때문이다. 아주 극단적으로 말하면, 역사적 예수는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가 되는 현상이라고까지 할 수 있겠다.
그러한 역사적 예수의 모습은 구원자, 묵시 운동가, 체제 변혁자, 지혜자, 랍비, 농부 등등 매우 다양한 양태로서 우리에게 제시되어 왔었다. 심지어 예수를 신화로 보는 학파 역시 나름대로의 근거들을 제시하면서 역사적 예수 연구의 한 학파로서 이미 인정받고 있는 실정이다. 참으로 역사적 예수는 너무나 많다고 하겠다.

그러한 차원에서 나 자신이 “아 이거다!”라고 만났던 역사적 예수가 바로, 역사적 예수는 놀랍게도 한 명이 아닌 여러 명의 역사적 예수들이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을 하나로서 서사적으로 엮은 것이 오늘날에 우리가 보고 있는 『마가복음』이라는, 가장 먼저 쓰여졌다는 복음서이다. 사실 이러한 얘기는 기존의 주류 전통 기독교에 있는 신앙인으로 볼 때는 매우 거부감이 드는 쇼킹한 얘기일 것이다.

나 자신이 역사적 예수를 여럿으로 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매우 많다. 가장 중요한 이유로는 앞서 말한 지금까지의 모든 역사적 예수상들을 모두 얘기할 수 있는 기반이 된다는 것이며, 그러한 복음서들 간의 불일치 혹은 많은 학자들이 보는 예수상들의 불일치들을 한데 모아서도 설명할 수 있을 뿐더러, 사실상 바울이 역사적 예수에 대해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설명들도 가능하다는 점이다.

또한 이것은 기존의 <예수 유일회성>을 아예 근원적으로 해체시켜버리는 아주 강력한 신학적 장치로도 작동 가능할 뿐더러, 인류사적으로도 그리고 오늘날에도 그러한 예수사건이 끊임없이 일어난다고 볼 수 있는 매우 래디컬한 소스가 될 수 있다고 하겠다. 물론 이 때의 예수사건이란 보수측에서 말하는 죄가 무슨 피로 사해진다는 그런 식의 주술적 예수 이해와 사건을 가리킨 말이 아니다. 사랑은 사건이다. 그것은 인간구원 혹은 존재의 해방으로서의 사건을 의미한다. 상기하자! 예수란 그 어떤 사건의 이름이란 사실을!

보다 더 정확하게 기술해보자. 다시 말해 역사적 예수란, 당시 1세기 팔레스타인을 중심해서 일어났던 고대 근동의 여러 메시아 운동들과 다양한 예언자 전승들을 마가가 하나로 서사적으로 엮어서 형상화 한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그 집약적 형상화의 핵심은 예수라는 어떤 한 인격체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근본적으로는 ‘하나님 나라 운동'이라는 <사건>으로서 집약된다는 사실이다. 바로 그런 점에서 그 하나의 정형화는 인물이라기보다 그 어떤 사건으로 봄이 보다 더 정확하고 유용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적 예수란 사건이자 <하나님 나라 운동>의 이름의 다른 표현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복음서의 역사적 예수가 전적인 복수라기보다 그 어떤 중심적인 대표급의 한 명의 인물을 충분히 염두에 두면서, 동시에 다른 여러 예언자 운동의 형상들이 마가에 의해 덧붙여진 것이라고 본다면 이 역시 충분히 가능한 논의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는 <사건으로서의 역사적 예수 이해>에서 좀더 나아간 얘기가 되며, 보다 복잡하고 전문화된 논의들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여기선 지면상으로도 대략적으로만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음을 이해해주길 바라는 바이다.

아무래도 나 자신이 여기서는 이에 대한 전문적이고도 상세한 소개들을 하기보다는 이러한 논의에 대한 대략적 설명과 이를 본격적으로 하고 있는 핵심 저작을 소개하는 것이 보다 더 나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 점에서 일단은 로버트 프라이스(Robert M. Price)의 『Deconstructing Jesus』를 소개하고자 한다.

   
▲ Robert M. Price의 『Deconstructing Jesus』책 표지
프라이스는 궁극적으로는 '역사적 예수 불가지론자'(Jesus Agnostic)의 입장이지만, 그가 이 책에서 실험적으로 내어놓는 가설은 <복수로서의 역사적 예수 이해>인 것이다. 그는 예수 세미나 회원이면서도 일반적인 역사적 예수의 제3탐구 진영조차 비판적으로 보는 입장에 서 있다. 프라이스의 저작들을 직접 공부해보면 알겠지만, 그는 자신의 역사적 예수 연구에서 크로산과 버튼 맥마저 비판적으로 극복하면서 넘어서고자 한다. 그래서인지 이 책은 역사적 예수 연구에 대한 매우 치밀한 전문서적이라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라고 본다.

물론 내가 지금 이 책 한 권에만 전적으로 의지해서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앞서 말했듯 그 단초들은 이미 한국 민중신학자들의 역사적 예수 연구에서도 놀랍게도 매우 여러 번 강조되어 왔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물론 안병무가 명시적으로 역사적 예수를 단수가 아닌 복수라고 명시한 적은 없었다고 해도, 거의 그러한 언급들에 가깝게 얘기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기본적으로 그는 예수를 한 사람의 인격이 아닌 ‘집단’으로서 해석한다. 특히 예수가 자신을 지칭할 때 썼던 ‘인자’(人子) 개념의 복수성을 밝혀낸 점은 매우 특기할 만하다. 그 당시 고대 근동에서는 뛰어난 예언자 혹은 메시아 운동을 한 사람에 대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가 붙는 것은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예수에게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점과 함께 ‘사람의 아들’이라는 ‘인자’라는 명칭도 발견되고 있다. 분명하게 예수는 자신을 인자로서 칭하고 있다.

그런데 이 인자 개념이 본래 집단적 개념이었다는 사실이다. 성경에서 보는 그 인자 개념은 구약의 에스겔서나 다니엘서 7장 13-14절을 보면 나오고 있는데, 이것이 집단 개념이었다는 점은 이미 많은 학자들(M. 노트, F 한, E. 슈바이처, C. H. 다드, C. W. 맨슨 등등)도 지지하고 있는 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구신학자들은 정작 ‘인자’ 예수를 볼 때는 주로 예수라는 한 개인의 인격적 측면에만 주목했다고 안병무는 비판한다.

그는 말하길, “서구 전통의 학자들은 ‘예수가 누구냐?’만 물었기에 예수를 한 개인의 인격(personality)으로만 이해할 줄 알았고 거기에 안주하고만 것”이라고 지적한다. 하지만 예수를 일종의 사건으로 볼 경우 그 패러다임은 달라진다는 것이다. 게다가 안병무는 예수사건이 유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세계의 역사적 사건들의 분기점으로서의 <화산맥>처럼 분출한다는 표현을 쓰고 있다. 이러한 언급들은 역사적 예수를 복수로 이해하는 맥락에 있다고 봐도 좋은 요인들이다.

다시 강조해서 말한다. 즉, 놀랍게도 홍길동은 한 명이 아니었다는 얘기다.
덧붙여 소개할 글이 있는데, 얼마 전에 게르트 타이센이 국내 신약학계를 방문했을 때, 한국신약학계에서 정기학술제를 열면서 발표한 논문 가운데 신약학을 전공한 김덕기 교수의 <‘역사적 예수’ 제3탐구의 딜레마와 그 해결책>이라는 글이 있는데,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에게도 적극적으로 추천하고 싶은, 매우 빼어난 논문이라 할 수 있겠다.

그는 이 글을 통해 그 동안의 역사적 예수 연구-특히 제3탐구-의 한계를 짚어보고 있는데, 아마도 이 글을 읽어본다면 나 자신이 지금 소개하고자 하는 역사적 예수 이해의 배경들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내가 알기에 최근에 나온 역사적 예수 연구 관련 글로는 매우 뛰어난 글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그 자료들은 한국신약학회 2005년도 정기학술제 자료집으로 나와 있다.

나 자신은 제3탐구를 비롯하여 지금까지의 역사적 예수 연구에 대한 성과들과 다양한 입장들을 우리 신학인 한국의 민중신학적 내용과도 함께 고찰해보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이라고 보는 입장이다. 특히 역사적 예수에 대한 사건적 이해는 기독론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 전환을 의도하게끔 이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의 기독론은 한 특정의 인물론이었지만 이제는 그 기독론이 <사건론>으로 전환되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이에 대한 자세한 글을 쓰긴 하겠지만, 기독론에 있어 이는 거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마가복음은 faction(실화적 창작)

나는 앞서 마가복음은 그 당시의 1세기 여러 예언자 운동들을 예수의 행적에 집약시켜 서사적으로 하나로 엮어놓은 것이라고 하였다. 굳이 전문적인 학자가 아니라고 해도 우리가 마가복음을 잘 들여다보면 금방 알 수 있는 사실 하나는, 마가복음은 전체 분량이 많지 않은데도 그 안에 있는 각각의 이야기들이 ‘자체 완결적’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마가는 그 각각의 사건에 대한 파편화된 기술들을 ‘그리고’, ‘그때에', ‘곧’ 등등 이러한 접속사들로 이어놓았다는 사실이다. 마가는 각각의 이야기들을 통해 궁극적으로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이라는 사건에 관심하고 있다.

마가복음은 어떤 한 개인의 전기를 쓰려고 쓰여진 책이 아니다. 맨 처음 쓰여진 복음서인 마가복음에는 놀랍게도 출생도 없고 죽음도 없다. 마가는 1세기의 역사적 상황과 그 체험들을 토대로 하면서도 동시에 여기에다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위하여 명민한 창작을 가했던 것이다. 경전에 대한 주석과 유대의 랍비문학에 속하는 미드라쉬를 공부한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신학적 입장을 위해 역사적 사건을 뜯어고치거나 다른 것들과 편집해서 넣기도 한다.

이렇게 볼 경우 바울이 왜 그토록 복음서의 역사적 예수에 대해 침묵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이유도 충분히 짐작가능하다고 하겠다. 즉, 바울은 복음서가 말한 그 역사적 예수를 몰랐었다는 얘기다. 나로서는 이렇게 보는 것이 가장 정직한 것이라고 본다. 정확히 말해서 바울의 체험은 다메섹 도상의 예수(흥미로운 사실은 성경에 나온 다메섹 기사는 사도행전에 세 번 나오는데 그 내용들이 각각 조금씩 충돌나고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사도행전9장7절을 보면 같이 있던 동행자는 소리는 들었으나 아무 것도 보지는 못했다고 했지만, 22장9절에서는 빛은 보고 소리는 듣지 못했다고 오히려 그 반대로 쓰고 있다는 점 등등)였지, 이는 엄격히 말해서 복음서의 예수는 아닌 것이다(이 다메섹 사건에 대해선 김창락의 <다마스쿠스 사건-무엇이 일어났는가> 참조).

어떤 점에서 바울이 왜 역사적 예수에 대해서 그렇게 침묵했는지에 대해선 대체로 신약학 연구에서 볼 경우 아킬레스건 같은 것이기도 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바울과 복음서의 예수가 완전한 단절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바울과 예수의 연속성은 사실상 바울이 처한 삶의 자리와 관련하여 바울신학에 대한 새로운 이해에서 확보되고, 또한 바울신학을 섭렵한 마가에 의해서 이뤄진다. 신약에서 마가복음은 바울신학과 하나님나라 운동을 잇는 가교적 역할을 하고 있다.

어쨌든 바울은 복음서의 그 흔한 나사렛이란 이름이나 십자가의 역사적 장소인 골고다조차도 왜 단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을까? 복음서에는 예수의 행적들과 비유말씀들이 그렇게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것들 가운데 단 하나라도 바울서신들에서 얘기할 법한데, 어찌 단 한 번도 얘기하지 않고 침묵할 수 있었단 말인가? 더 나아가 복음서에서도 예수에 대한 외양적인 묘사가 어찌 단 한 줄도 기록되지 않았던 것인가? 물론 어떤 면에서 필요가 없어서일 수도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한 인물보다는 애초에는 그 어떤 사건에 대한 증언이 궁극적인 신학적 목적이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나 자신은 바로 그렇게 보고 있다.

일반적으로 마가복음의 수난설화는 마가의 창작이라는 점은 진보학계에선 점점 설득력을 얻고 있다. 왜냐하면 마가복음(대략 70년경)에까지 이에 대한 그 중간의 독립된 전승과정이 없고 결국은 그 판본이 마가복음 하나밖에 없게 되기 때문에 그 진위성이 의심되는 것이다. 이와 달리 역사적 예수를 연구했던 크로산 경우는 마가복음의 수난설화는 「십자가복음서」(크로산의 가설적 자료)가 그 원형이라고 보며 이를 부인하지만, 반면에 로버트 펑크나 버튼 맥 등은 마가의 서사적 창작이라는 점을 지지한다. 사실 이미 예전부터 학계에선 마가복음을 ‘확대된 서론을 가진 수난설화’라는 명칭으로 통용되기도 했었다.

이 수난설화는 당시의 지혜 민담에 속하는 무고한 의로운 자의 죽음이 이스라엘을 구원한다는 모티브를 가지고 있다. 프라이스의 경우는 이것이 극적인 고대 연애소설의 장르와 유사하다고 평가한다. 안병무는 민중전승의 하나로 이것이 유언비어의 형태로서 전승되었을 가능성을 언급한다. 이점은 역사적으로도 종종 확인된 사실인데 가깝게는 우리네 광주민중항쟁의 역사가 그러했다. 서슬 퍼런 독재 군사정권시절에 5월의 광주를 공개적으로 얘기한다는 것은 금기였기에 그것은 민중들 사이에 유언비어의 형태로서 전해졌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당시 예수는 로마제국의 식민지 지배체제 하에 있던 갈릴리 민중에게 있어선 ‘군대’(Legion, 로마의 군대를 가리키는 말로서 보병 6천명의 병력을 가리킨다) 귀신마저도 쫓아낸 놀라운 메시아였다. 즉,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자신이 메시아임을 누구한테 얘기해선 안될 것이었고, 그것은 비밀스러운 것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점에서 그때 당시의 메시아 운동은 자기 목숨을 내어놓는 운동이었던 것이다. 마가복음에는 바로 이러한 시대적 반영이 깔려있으며 그러한 가운데서 <하나님 나라 운동>을 지향하는 하나의 서사적인 연속적 구성물로서 엮어냈던 것이다.

마가의 창작물일 가능성은 특히 앞서 말한 예수 신화 학파가 제시했던 증거들 가운데서도 매우 무시못할 얘기들이 많다는 점에서도 엿볼 수 있다. 시대적으로도 예수사건 보다 훨씬 앞서 생긴 오시리스-디오니소스 신화를 들여다보면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복음서의 내용들과 흡사한 이야기들이 매우 많다. 구세주가 나귀를 타고 입성하고, 빵과 포도주로 기념하고, 부활절 무렵에 세상 죄를 짊어지고 나무에 달려 죽는다는 설정은 이미 복음서 시대 이전에 나온 고대의 것이다.

물론 예수의 수난설화에 전혀 역사적 자료가 없다고 보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요세푸스와 타키투스 이 두 역사가들의 기록을 통해서도 적어도 다음과 같은 얘기 정도는 충분한 사실적 개연성을 가진다. 즉, 마가복음의 얘기처럼 예수라는 사람이 본디오 빌라도의 총독 시절 동안(주후 26-36)에 로마당국에 체포되어 처형되기 전 관례대로 채찍질을 당하였고 골고다에서 십자가로 처형되었으며, 그를 따르던 제자들은 예수 체포 때 도망갔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마가복음 전체를 볼 때는 이 예수가 꼭 한 사람이라고 상정될 순 없다는 것이다.

마가는 그때까지의 파편화된 여러 다양한 전승들을 서사적으로 하나로서 엮어내었다. 래디컬한 얘기겠지만, 나 자신이 보는 역사적 예수 이해에 있어서 마가복음은 마가의 창작이란 사실을 지지한다. 하지만 그 마가의 창작이 당대의 역사적 사건들과 무관한 그러한 창작이라는 점에선 예수 신화 학파에 반대한다. 오히려 그 당시의 역사적 사건들에 대한 정황적 기술과 마가의 창작이 합쳐진 것이라는 얘기다. 바로 그런 점에서 마가복음은 팩션‘faction’(=사실fact+허구fiction, 재밌는 사실은 이 두 단어가 어원이 같다고 한다)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예컨대, faction이란 것은 우리가 <불멸의 이순신> 같은 작품을 떠올려보면 될 것이다. 일정 정도 역사적 사건들에 기반하면서도 신학적 작업을 위한 창작이 가미된 것이라는 얘기다. 마가는 바울신학의 입장도 가미하여 기존의 율법 체제인 유대교와의 차별성을 극대화한다. 이미 잘 알려진 정설로서 마가복음에는 이방인 선교에 대한 관심이 각별하다는 점과, 또한 이는 예수를 기소하는 기소장면에서도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 기소장면은 각각의 복음서마다 저마다 다른 것인데, 애초 마가복음에서는 예수가 빌라도 법정이 아니라 유대교 산헤드린에서 기소되고 있다. 물론 이는 총독정치를 하던 당시의 일반적인 역사적 정황에도 어긋나는 것이다.

빌라도 당시에는 산헤드린에서 사형 평결을 내릴 수 없었고, 정죄하였다면 41-44년이나 62년 당시에 야고보가 처형된 것처럼, 산헤드린으로부터 돌로 쳐 죽이는 처형방식을 채택해야 했을 것이다. 학자들은 마가복음에 나타난 산헤드린에서의 기소 묘사는 빌라도 이후의 아그립바 1세와 2세 때의 상황과 초기 기독공동체 내부의 이방기독교인과 유대기독교인 사이의 갈등들도 함께 반영된 것이라고 보고 있다. 이와 달리 누가와 요한은 예수의 사형이 빌라도 법정에서 기소된다.

그때 당시 ‘예수’(Jesus)라는 이름도 그 옛날의 갑돌이, 갑순이 만큼이나 매우 흔하게 볼 수 있는 이름이었다. 또한 십자가 처형도 간혹 있는 그러한 형벌이 아니라 하루에도 수천 명씩 십자가 처형으로 죽어나가기도 했던 그러한 형벌이었다. 만일 우리들이 타임머신을 타고서 1세기 팔레스타인 땅에 서 있다고 해보자. 즉, 그때 당시에는 하나님의 아들로 불리는 메시아 운동과 예언자 운동이 특정의 한 사람에게만 소급된 것이 아니었다는 점을 목도할 수 있게 된다는 얘기다.

이러한 가운데 로마제국의 지배 하에 있던 유대 민중으로서는 매우 절박하고 암울한 시대상황을 겪고 있었으며, 특히 주후 66-70년경의 끔찍한 유대전쟁의 결과는 많은 유대인들을 더욱 항구적인 절망 속으로 빠뜨렸었다. 마가는 그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이젠 끝장나게 된 낡은 유대교 율법체제의 종말을 보았었고, 그 자신의 복음서를 통해 새로운 종교의 탄생을 알리려 했던 것이다. 쉽게 말해서 마가는 울면서 복음서를 썼다는 얘기다.

마가복음은 마태 누가 요한에게선 핵심적인 기초 자료들 중 하나로서 반영되어 있다. 그리고 복음서 전승과 초대교회 공동체의 형성과정에 있어 후대로 갈수록 점점 교리화되는 반면에 본래의 치열한 운동성과 역사성은 점점 탈각되어 갔었다. 어떤 점에서 독생자 교리가 나온 맥락도 예수사건 전승에 대한 진정성 이어받기와 우주적 보편성 확보의 차원과도 결부된다고 하겠다. 한 가지 본인의 글에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나는 마가복음이 전적으로 백퍼센트 마가의 순수창작이란 얘기는 결코 아니다. 역사적 예수가 복수라고 해도 그 중심인물의 역사성 여지 또한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본다.

하지만 이점을 주장하기 위해 굳이 또 억지로 논지를 밀고나갈 순 없다. 우리가 치열한 이성의 한계에까지 도달했을 경우, 거기서부터는 결국 믿음의 문제로 나아갈 수 있을 뿐이다. 엄격한 객관적 증거들은 여전히 빈약하며, 이는 역사적 예수 연구 자체의 가장 큰 딜레마 중 하나로 남아있다. 즉, 치열한 이성의 범주 안에서만 볼 경우 앞으로 새로운 데이터들이 나타나지 않는 한, 더 이상 ‘알 수 없음’(不可知)이 가장 정직한 최선의 답변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아마도 이런 점 때문에 신앙인들은 종종 엄격한 학문의 정직성을 두려워하거나 경시하기도 하지만 말이다.

‘역사적 예수’란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십자가를 지며 죽어갔던 그 모든 무명의 이름들

자, 이제 정리를 해보자. 나로서는 역사적 예수의 진상은 사실상 ‘하나’가 아닌 ‘여럿’이라고 본다. 지금까지의 역사적 예수 연구가들은 저마다의 예수상을 제시하였는데, 사실은 본래적으로 이미 다양한 예수들이 있었다는 얘기다. 다시 말해서, 당시 1세기 팔레스타인에는 묵시 운동가 예수도 있었고, 견유학파적인 지혜자 예수도 있었고, 사회체제 변혁가 예수도 있었고, 유대 종교 랍비로서의 예수도 있었고, 시인 농부로서의 예수 등등 여럿 다양한 예수 운동이 있었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그것은 즉, 우리가 신앙하는 대상의 역사적 실체인 ‘역사적 예수'란 이 땅의 역사 속에서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사라져간, 고통의 십자가를 지고서 하나님 나라 운동을 위하여 죽어갔던 저 수많은 무명의 죽음들, 수많은 슬픔들의 이름이자 사건이라는 것이다. 마가복음은 이 모든 것을 ‘사건으로서의 예수’에 집약시켜 놓은 매우 놀라운 작품이다. 나로서는 이 사실이 초기 민중신학의 그 첨예한 성찰만큼이나 매우 전율스럽게 느껴졌다.

그러한 수많은 역사적 예수들은 무엇을 했던 것인가? 그것은 마가의 본문에서도 암시하고 있는 바다. 이것은 바로 유대교적 전통을 넘는 새로운 해방으로서의 하나님 나라 운동으로서 집약된다. 즉, 우리가 알고 있는 이 역사적 예수는 분명하게 말해서 인물의 이름도 아닌 엄밀하게 말하자면 <사건>의 이름으로서, 그 수많은 역사적 예수들의 하나님 나라 운동이라는 그 사건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마가는 왜 그러한 작품을 썼단 말인가? 끔찍한 유대전쟁을 겪고 난 이후의 참담함 속에서 당시의 수많은 메시아 운동을 하는 자들을 통해 유대교의 폭력적 희생 제의를 넘는, 비폭력적 사랑으로서의 메시아를 그렸고, 그럼으로써 실의에 찬 유대민족들에게 강력한 희망의 새로운 메시아상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것은 유대교 율법의 전통을 넘는 새로운 운동의 모색에서 나온 것이다. 그 운동이 바로 하나님 나라 운동이다. 복음서에서 그것은 가난한 자, 병든 자, 억눌린 약자를 해방시키는 귀신축출과 병치유 사건 그리고 밥상공동체로서 그려지고 있다.

인류의 생명해방 사건 속에 현존하고 계시는 예수

그렇기에 이 예수사건은 이천 년 전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인류의 역사 속에서 그것은 <화산맥>처럼 분출하고 있다. 역사를 보라. 이 땅에 생명과 평화와 정의를 위해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흘린 그 수많은 희생의 죽음들을 말이다. 역사는 그러한 값진 피의 희생으로서 전진한다. 역사란 근본적으로 수난의 문명사다.
















▲ 예수사건은 이천 년 전에 한 번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역사적 예수들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화산맥>처럼 분출하고 있다. 역사적 예수란 이 땅에 정의와 평화와 생명을 위하여 이름 없이 빛도 없이 피흘리고 숨져갔던 그 수많은 희생의 죽음들을 대표하는 이름이자 밀알이 된 사건이다.

한국의 민중신학이 노동해방의 초석이 된 전태일 사건 속에서도 예수를 읽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복음서는 바로 인간해방 생명살림이라는 팔레스타인 민중의 사회적 전기일뿐더러 모든 역사의 알파와 오메가를 꿰뚫는 존재의 진정한 구원과 해방의 좌표를 담고 있다. 신은 바로 십자가의 형틀에 매달려 있고, 고난과 고통의 삶의 현장에서 우리를 부르고 계시며, 수난의 역사 한가운데서 세상의 그 모든 질곡들을 정면으로 껴안고 계신 것이다.

나는 지금 여러분들에게 <우리가 만나야 할 예수>가 있고, <우리가 되어야 할 예수>를 말씀드리고자 한다. 우리는 ‘선한 사마리인의 비유’를 잘 알고 있다. 거기서 누가 예수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는가?

대체로 기존의 전통신학은 선한 사마리아인만을 떠올릴 것이지만, 민중신학은 강도 만나서 쓰러져 다쳐 있는 자가 바로 예수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증언한다. 길바닥에 피 흘리고 다쳐서 쓰러져 있는 자가 바로 우리가 만나야 할 예수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만나야 할 예수는 가난한 자, 헐벗은 자, 굶주린 자, 옥에 갇힌 자, 슬픔에 젖어 있는 자들인 것이다.

오늘날 우리 주위를 한 번 돌아보라. 놀랍게도 우리가 만나야 할 예수는 너무나도 많이 있잖은가. 예수를 정말로 만나고 싶은가? 눈을 뜨고 귀를 열어보라. 이미 우리 사회에, 우리네 역사에, 우리 곁에도 너무나도 많이 있어왔잖은가. 실로 우리가 애타게 찾았던 그 주님이야말로 바로 곁에서 귀가 왕왕거리도록 우리를 애타게 부르고 계셨는데도 말이다.

그렇다면 선한 사마리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우리가 되어야 할 예수>의 모습이다. 상처받고 쓰러져 있는 약자의 고통을 함께 나누며 따스한 사랑을 베풀고, 감옥에 갇힌 자를 위해 함께 투쟁하는 것이야말로 역사적 예수의 삶을 따르는 ‘예수따르미’가 아니겠는가. 우리는 사회구조악에 대한 투쟁 역시 억눌린 약자를 위한 하나님 나라 운동임을 분명하게 인지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누가 나에게 교회의 정의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바로 우리가 <만나야 할 예수>와 우리가 <되어야 할 예수>의 접속이라고 말하겠다.
이것이 바로 사건이다. 이것이 바로 구원사건이고 해방사건이며, 민중사건이고 치유사건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그리그도교 교회의 원형이다. 요컨대, 그리스도란 바로 이러한 <사건의 퍼스날리티>인 것이다.

신앙이란 내 삶을 통한 역사적 예수의 재현과정

우리가 역사적 예수를 신앙의 대상으로 섬길 때, 결국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그 이유는 근본적으로 무엇 때문인가? 앞서 말했듯이, 세계의 고통은 하나님 그 자신의 고통이기도 하다. 역사적 예수는 바로 그 고통의 한복판에 현존하셨던 <사건의 퍼스날리티>이며, 이 땅의 역사 속에서 이 땅의 역사를 초월하는 잊을 수 없는 하나님 나라 운동으로서 면면히 부활하고 계신 것이다. 그 하나님 나라 운동, 바로 그 지점에 인류 역사의 전진과 내 삶의 증진이 깊숙이 창출된다.

우리는 이 땅의 역사적 예수를 통해서 <걸어다니는 하나님 나라 운동>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예수는 곧 ‘걸어다니는 하나님 나라 운동’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는 예수를 믿고 내 평생의 주인으로서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는 내 삶의 전부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언제나 ‘예수를 따르는 예수’를 잉태하는 과정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렇게 볼 때 한국교회에는 예수가 없거나 예수를 아예 죽이고 있다고 봐도 거의 과언이 아닌 이유가 바로 여기에 놓여있다. 한국교회여, <예수에 관한 교리>와 <예수의 역사적 삶 자체>를 혼동하지 말라. ‘예수에 관한 교리’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예수의 역사적 삶’을 살아라.

그 삶의 시작은 <깨달음>에서 시작된다. 깨달음은 내 안의 가장 원초적인 미시적 해방사건! 나의 성찰과 나의 생활 그리고 내가 몸담고 있는 이 땅에서부터 하나님 나라를 위한 사건을 일으켜라.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고, 평화가 들풀처럼 흐드러지도록 신들린 듯이 사건을 일으켜라. 그 사건이야말로 이 시대에 역사적 예수의 현현이 될 것이다. 안병무는 <민중사건 속의 그리스도>라는 표현을 쓴 바 있다. 아-아, 가장 아픈 우리네 삶의 사건들 속에 현존하시는 그리스도시여..

알고 보면 신앙이란, 내 삶을 통한 <역사적 예수>의 재현과정에 다름 아닌 것을!


감초 (07-03-08 21:41)
 
글을 읽기가 참 수월해서 좋았습니다.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Mosaic (09-03-03 08:36)
 
Bravo!!!!
couldn't be better!!

Joe (09-03-03 14:19)
 
정실장님;
Beautiful 입니다.
세기연에서 많이 배우고 있읍니다.
나의 눈이 뜨여지고 세상을 너무 좁은 시야로 보아온 자신을 발견합니다.
감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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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 끔찍한 <몸의 신학>에 속지 마시길! (유사품 주의) (8) 미선이 343 11-15
139 종교운동과 사회운동을 구분 못하는 오류-기존 진보 기독교 비판 (1) (2) 미선이 434 10-14
138 여전히 예수얼굴에 똥칠하는 개신교 정치세력들 (5) 미선이 350 08-30
137 새로운 기독교 역사의 국내 선구자들 : 유영모, 함석헌, 김재준 미선이 325 06-26
136 조용기 목사의 할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미선이 342 05-14
135 몸학과 새로운 기독교 운동 그리고 30년 후의 기독교 미선이 424 04-11
134 <인간의 자유의지>라는 착각과 환상에 관한 문제 (14) 미선이 620 03-04
133 기존 진보 기독교인들의 <생명평화> 담론에 반대한다! (업그레이드판) (8) 미선이 493 02-17
132 기존 진보 기독교계의 ‘생명평화' 담론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미선이 236 02-10
131 영혼구원의 강조에서 <총체적인 생명구원의 강조>로 (4) 미선이 272 02-05
130 성서문자주의 또는 성서무오설 신앙보다 더 뿌리 깊은 고질병은? (9) 미선이 684 02-02
129 죄의식의 종교에서 <이웃과 함께 성찰하는 종교>로 미선이 267 02-01
128 수직적 구조의 교회에서 <수평적 구조의 교회>로 (2) 미선이 351 01-21
127 서구식 목회문화가 아닌 <우리식 목회문화>로 미선이 303 01-21
126 과정신학에 대한 비판과 민중신학의 신 이해 접맥 미선이 485 01-13
125 ★ 예언 (1) 미선이 602 12-24
124 ♣ 새로운 기독교 신학의 인간론 (4) 미선이 438 12-19
123 ♣ 새로운 기독교 신학의 인간론 (3) (4) 미선이 499 12-12
122 ♣ 새로운 기독교 신학의 인간론 (2) (10) 미선이 702 12-05
121 새로운 기독교의 시간관, 태초와 종말로서의 시간관을 거부한다! (4) 미선이 590 12-01
120 ♣ 새로운 기독교 신학의 인간론 (1) 미선이 689 11-30
119 [예수운동 예배 견본] 새로운 기독교의 <예수운동 예배>를 위하여 미선이 722 11-28
118 숭배하는 예배에서 <닮으려는 예배>로 (1) 미선이 705 11-19
117 거꾸로 흘렀던 감리교 역사, 바로 세우기엔 아직 멀었나 미선이 596 11-10
116 <새로운 기독교>를 소개하는 전체 안내 링크글 (계속 업데이트 예정) 관리자 1937 11-03
115 [논평] 봉은사 땅밟기 추태, 성경 '문자주의' 그 야만의 역사 넘어서야 (1) 관리자 761 10-29
114 기존의 진보 기독교와 새로운 기독교 운동 (1) 미선이 605 10-22
113 1세대 민중신학자 안병무의 미완의 작업과 기존 민중신학의 과제 미선이 579 10-19
112 [새기운 성명] 4대강 사업 관련, 문정현 신부의 정진석 추기경 비판을 지지한다 관리자 557 10-19
111 스퐁, "스티븐 호킹과 유신론/인격신의 죽음" (작은불꽃님 역) 관리자 821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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