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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⑥ 문자적 성서해석에서 <사건적 성서해석>으로 (1)    
  글쓴이 : 정강길 날 짜 : 06-06-14 11:11 조회(68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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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환기의 한국 기독교, 바뀌어야 산다! (15)
⑥ 문자적 성서해석에서 <사건적 성서해석>으로 (1)

 

정강길 위원 minjung21@paran.com

 

 
1. 21세기 기독교와 한국 기독교의 위기
2. 21세기 기독교 변혁을 위한 12가지 패러다임 대전환
   ※ 관념적 이원론에서 <현실적 관계론>으로
   ① '무조건 믿어라'의 기독교에서 <깨달음의 기독교>로
   ② 이웃종교에 배타적인 기독교에서 <열린 기독교>로
   ③ 가부장적 기독교에서 <모성애적 기독교>로
   ④ 초월신론에서 <범재신론>으로
   ⑤ 교리적 예수에서 <역사적 예수>로
   ⑥ 문자적 성서해석에서 <사건적 성서해석>으로
   ⑦ 숭배하는 예배에서 <닮으려는 예배>로
   ⑧ 서구식 목회문화가 아닌 <한국식 목회문화>로
   ⑨ 수직적 구조의 교회에서 <수평적 구조의 교회>로
   ⑩ 죄의식의 종교에서 <이웃과 함께 성찰하는 종교>로
   ⑪ 영혼구원의 강조에서 <총체적인 인간구원의 강조>로
   ⑫ 저 세상이 아닌 <이 땅에서의 하나님 나라 운동>으로
3. 오늘날의 선교 대상은 기독교 그 자신부터
4. 나오며

 
들어가기 전에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이 부분을 먼저 했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기독교는 그 정체성을 성경에 기반을 둘 정도로 성경해석에 대한 부분은 매우 중요하다고 하겠다. 아마도 기독교 신학에서 <해석학적 패러다임>의 문제 다음으로 가장 중요한 부분이 있다면 바로 이 지점일 것이다.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성경 역시 해석학의 문제로 귀결된다.

(* ‘성경’과 ‘성서’의 표현차이는 무엇인가? 물론 뜻이야 같겠지만, 굳이 짚어낸다면 성경이라는 표현이 성서라는 표현보다는 좀더 종교적 경외감이 배여 있다는 점일 게다. 이에 비해 성서라는 표현은 약간 객관적 거리를 두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인지 보수 진영과 진보 진영을 잘 관찰해보면, 보수측은 성경이라는 표현을 잘쓰는 반면에 진보측은 성서라는 용어를 더 빈번하게 쓴다는 사실이다. 나는 이 글에서 두 표현 모두 자유롭게 쓸 것이기에 미리 참조해두길 바란다.)

기독교에서 진보와 보수의 결정적 구분은 <성서해석> 때문

언젠가 어떤 분이 나에게 이러한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 자꾸 보수와 진보 운운하는데 기독교에서 보수와 진보로 나눌 수 있는 그 결정적 기준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여러분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개인구원과 정치 사회적 구원의 유무? 에반겔리즘이냐? 에큐메니즘이냐? 혹은 기독교 배타주의냐? 종교다원주의냐? 한국 기독교의 야사에는 이에 대한 답변을 가늠케 하는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언젠가 국내 진보 진영의 학자들이 보수 진영의 학자들에게 우리가 한 자리에 모여서 허심탄회하게 한국 기독교를 위한 대토론회를 크게 열자고 제의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물론 보수 진영의 학자들은 처음에 거절했다. 그러자 진보측은 다시 제의하길, 그렇다면 그냥 비공식적이라도 한 번 모여보자고 제의하자 보수측이 이를 수락했었다고 한다. 이리하여 양 진영의 신학자들이 지리산에서 숙식을 하면서 한국 기독교의 일치를 위한 허심탄회한 토론자리를 갖게 되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여전히 보수와 진보의 화합으로 이어지지 못했었는데 그렇게 서로 합의되지 못했던 그 결정적 지점은 개인주의니 사회변혁이니 에반겔리즘이니 에큐메니즘이니 배타주의니 종교다원주의니 하는 그런 지점이 아니었다. 그것은 놀랍게도 성경해석 즉, 성서비평의 유무에서 서로 첨예하게 갈라졌다고 하였다. 참고로 이 에피소드의 출처는 그때 계셨던 교수님으로부터 직접 들은 바다.

<성경적>이라는 표현의 함정

성경해석에 대해 본격적으로 거론하기에 앞서 두 가지만 먼저 짚고 넘어가자.
첫째는 "성경적"이라는 말에 대해서다. 흔히 기독교인들은 "성경적"이라는 표현을 무지하게 잘 쓴다. 이러한 성경적이라는 표현은 일반 신자든 목사든 누구든 대부분의 한국 기독교인들이 입버릇처럼 달고 다닌다. 무엇을 하든 성경적으로 하라고 말한다. 이 "성경적"이라는 표현은 "복음적" 혹은 "기독교적"이라는 말의 쓰임과도 흡사하게 기독교인으로서 지향해야 할 최상의 지점을 의미하고 있다.

그런데 재미난 사실은 똑같은 성경책 한 권을 두고서도 저마다 그 해석을 다르게 한다는 점이다. 어떤 때는 한 구절을 놓고도 그 해석이 서로 첨예하게 갈라진다. 심지어 같은 구절을 두고 번역본도 저마다 다르다. 킹제임스역본, NIV, RSV, 개역, 공동번역, 새번역 등등 헤아릴 수 없다. 물론 할 수만 있다면 나는 히브리어/헬라어 원문을 보길 권하며, 여의치 못할 경우 많은 번역들과 서로 대조해보면서 뜻을 찾아가길 권한다.

"성경적"이라고 하는 말의 함정에 대해 예를 들어보겠다. 성경이 쓰인 여성에 대한 입장이 그러하다. 현재 추세는 여성 안수를 지지하는 교단이 늘어가긴 하지만, 여성 안수를 반대하는 진영도 그것이 "성경적"이라고 보기 때문에 반대하는 것 이다. 실제로 성경 본문을 찾아보면 여성에 대한 비하가 허다하다(본 연재물의 ‘전환기의 한국 기독교 바뀌어야 산다 (7)’번 글 참조. 믿기지 않는다면 직접 성경을 찾아보면서 대조해 봐도 좋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성경이 말이다.

   
▲ 한기총은 사형제도 존속이 '성서적'이라고 주장해 NCC와 신학계의 비판을 받았다. 성경은 결국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죽임의 책이 되기도 하고 '살림의 책이 되기도 한다.

최근 시끌벅적대고 있는 <사형제 논쟁>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한기총은 사형제를 지지하는 이유가 성경이 그러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반대로 사형제를 반대하는 진보 진영 역시 성경을 얘기하지만 한기총과는 전혀 다르게 성경을 독해해낸다. 그 내용을 일일이 여기서 나열하진 않겠다. 이런 현상은 비난 오늘날의 경우만이 아니다.

예를 들어, 노예제를 정당화 했던 그 근거 역시 성경에 기인한다. 반대로 노예제 반대 역시 성경에 기인하고 있다. 노예제 때문에 창세기 9장의 함의 저주 본문과 마태복음 5-7장의 산상수훈이 서로 부딪히기도 한다(『두 얼굴을 가진 하나님-성서로 보는 미국 노예제』[살림] 참조). 같은 성경끼리 부딪히는 것이다. 국가보안법 철폐가 성경적으로 옳은가? 아니면 존속유지가 성경적으로 옳은가?

나는 여러분들에게 분명하게 말한다. 역사적으로 기독교의 성경은 때로 사람을 살리기도 했지만 무수하게 사람을 죽이기도 하였다 는 사실을. 물론 성경을 그릇되게 해석한 자가 사람을 죽였겠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현상은 무엇을 뜻하는가. 즉, 성경은 결국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죽임의 책’이 되기도 하고 ‘살림의 책’이 되기도 한다 는 것이다. 냉정하게 말해서 성경은 무섭고도 끔찍한 책이었던 적도 많았었다.

<성경적>이라는 표현은 하나마나한 말

그렇기에 분명히 알아야 한다. 성경적이라는 표현은 사실상 하나마나 한 표현이며, 별로 쓸모도 없는 비생산적인 표현일 뿐이다. 성경적이라는 표현은 그냥 ‘가장 옳고 타당한 것’이라는 의미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흔히 쓰는 “성경적이어야 한다”는 표현은 “가장 옳고 타당해야 한다”는 말의 동의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는 사실이다.

“성경으로 돌아가라.” “성경에 기반하라.” 등등 이런 얘기들도 마찬가지로 죄다 하나마나한 말이며, 그저 “하나님 뜻에 맞게 잘해보라”는 뜻의 동의반복일 뿐이다. 실제로는 우리에겐 저마다의 다양한 성서해석들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실상 가장 중요한 것은 해석상의 문제다. 성경을 어떻게 해석해야 가장 좋은 것인가?

성경의 숱한 오류와 불일치들 (직접 성경을 찾아볼 것!)

중요한 점, 한 가지만 더 짚고 넘어가자. 두 번째는 성경에는 오류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다. 대다수의 보수 기독교인들은 성경에 쓰인 오류를 모르거나 알아도 애써 인정치 않으려 한다. 이때 성서는 완전무오하다고 주장하면서 축자영감설을 지지하는 자들이 곧잘 써먹는 레퍼토리 구절 중의 하나는 특히 디모데후서 3장16절을 언급하는 것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어쩌구저쩌구 하는 것이다.

하지만 분명히 말하건대, 그런 식의 대응은 도무지 한심스럽기 짝이 없는 처사다. 도대체 자기 주장의 근거를 자기 주장에 둬버리는 처사가 어디 있는가? 게다가 디모데후서의 그 구절이 가리킨 성경이란 것도 본래는 당시의 구약의 경전을 말한 것이었지 디모데후서를 포함한 신약성서는 포함되지도 않았던 것을. 하지만 이런 저런 얘기할 것도 없이,

기계적 영감설이든 유기적 영감설이든, 나 자신이 여기서 성경의 오류들을 직접 찾아서 보여주면 될 것으로 본다. 감히 말하지만, 성경에서 오류들을 찾아내는 것은 정말 ‘식은 죽 먹기’보다도 더 쉽다. 일단 앞서 말한 ‘성차별 전서’에서 추려낸 신구약 구절들만 봐도 그러한 오류의 사례들이 한 둘이 아님을 알 것이다.

◀ 성경은 특히 차별당하는 여성의 입장에서 볼 경우, 너무나 많고도 분명한 오류들이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예컨대 전도서 기자는 남녀를 비교하면서 "해답을 찾는 남자는 천에 하나 있을까 말까 하지만 여자들 가운데는 하나도 없다"(전 7:28)라고 말하고 있다. 명백하게 여성을 열등한 존재로 보고 있는 성차별적 구절이다. 버젓이 하나님의 말씀인 양 담겨 있어서 읽는 이로 하여금 혼란스럽게 한다. 이런 성차별적인 성경구절들은 성경 곳곳에 참 많다.

그럴 경우, 성경이 완전무오하다고 보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성차별적 인식과 태도는 매우 성경적이고 자연스러울 것이다.  여성을 비하하는 예장 합동측 목사의 기저귀 발언이 그저 나온 얘기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물론 성경에는 여성에 대한 오류 사례만 있지 않다. 너무 많아서 무엇부터 꺼내야 할지 모를 지경일 정도로 말이다.

서로 말이 안맞는 성경

성경에는 불일치의 사례들도 허다하다. 창세기 1장과 창세기 2장 4절 이하에 나오는 두 가지 창조이야기를 보면 서로 창조순서가 모순된다는 점은 널리 알려진 사례 중 하나다. 노아홍수의 기사도 두 번 반복되는데, 창세기 6장 19절에는 모든 짐승들이 암수 한 쌍씩 방주에 들어가지만, 7장 2절에 보면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 쌍씩, 부정한 짐승은 암수 두 쌍씩, 공중의 새는 암수 일곱 쌍씩 방주에 들어가도록 하고 있다. 도대체 누구 장단이 옳은 것인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나타난 예수의 족보는 서로 일치되지 않고 있다는 점도 널리 알려진 성경의 불일치 사례에 속한다.

놀랍게도 성경에는 하나님이 사탄과 동일한 존재로 묘사되기도 한다. 사무엘하 24장 1절을 보면 주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셔서 백성들을 치시려고 다윗을 부추기셨다고 나오는데, 역대기상 21장 1절을 보면 놀랍게도 똑같은 구절인데 거기에는 사탄이 이스라엘을 치려고 다윗을 부추겼다고 나온다. 도대체 누가 시킨 것인가? 하나님이냐? 사탄이냐? 때에 따라서 성경은 하나님을 사탄으로 살짝 둔갑시키기도 하는 것이다. 참으로 놀라운 역사(?)가 아닐 수 없다.

어떤 것은 성경을 쓴 기자가 착각해서 잘못 인용한 구절들도 있다. 마태복음 27장 9절에서 성서기자는 예언자 스가랴가 11장에서 한 말을 예레미야가 한 말이라고 잘못 착각하고 있다. 아무래도 마태복음을 쓴 성서기자는 예레미아 32장 6-9절의 내용과 잠시 혼동한 것으로 보인다. 적어도 마태복음 기자가 인용한 구약성경의 그 구절만큼은 예레미아의 것이 아닌 스가랴의 것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성경은 생물학적 사실마저 왜곡하기도 하는데, 곤충 다리가 네 개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레위기 11장 20-23절). 하나님 혹은 레위기 기자가 곤충 다리를 잘못 세어 본 것인가? 이처럼 성경에 나타난 시시콜콜한 오류와 불일치의 사례들까지 죄다 따진다면 부지기수다. 하지만 한국교회의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성경에 쓰인 하찮은 토씨하나까지도 어떨 땐 매우 중요하게 보잖은가.

이런 세상에! 성경은 완전무오한 책이 아니었던가요?

성서에 대해 투명하고 솔직하게 대하라!

누구든 좋다. 성경이 완전무오하다고 보는 사람이 있으면, 이러한 오류와 불일치들에 대해서 제발 좀 온전한 설명들을 해보라. 보수진영의 캡짱 석학이 나와서 나와 공개토론을 해도 좋다. 이러한 온갖 오류와 불일치의 사례들은 위에 언급한 것 외에도 너무나도 많아서 일일이 나열하기조차 힘들 정도다.

만에 하나 우리가 이를 제대로 설명해내지 못한다면 우리는 일단 성경에도 오류가 있다는 사실만큼은 겸허히 받아들여야 함이 마땅한 것이고, 정직한 태도일 것이다. 이 사실을 도무지 받아들이기는 싫다고 한다면 ‘무조건 믿어라’의 기독교로 전락하던지!

원컨대, 이러한 성서에 대해 제발 좀 솔직하게 대할 것을 권한다.
나중에 얘기하겠지만,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제대로 믿기 위한 그 출발이다.

혹자는 이런 오류들에 대해 설명하기 힘들기 때문에 ‘원본무오설’을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내가 지금 지적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지금 손에 들고 있는 성경의 오류를 말한 것이다. 여기서 갑자기 원본을 거론하는 것은 핀트가 어긋난 것이며, 역사적으로 원본이 발견된 사례도 없다. 이런 얘긴 논증 불가능한 것을 끌어들여 물타기 하려는 시도일 뿐이다. 생각해보라. 그렇다면 원본무오설은 적어도 사본오류설만큼은 인정한다는 얘긴가?

혹자는 성경의 불일치와 모순은 그저 성서기자들 진술의 차이일 뿐이라고 말한다. 예컨대, 예수 사건 하나를 두고 마태와 누가가 일치하지 않는 것은 서로가 보는 강조점의 차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런 차원이 있음은 나 역시 당연히 염두에 두고 있는 바다. 하지만 정작 나 자신이 지금 들먹이고 있는 지점은, 한 사건에 대한 양립 불가능한 두 진술에 대한 지적들이다.

이를테면, 마태복음의 예수는 적어도 헤롯왕이 죽기(B.C. 4년) 전에, 반면에 누가복음의 예수는 구레뇨 총독 때(A.D. 6년) 태어난 것으로 되어있다. 무려 십 년이 넘는 시간 차이가 있다. 마태복음에 따르면 예수는 베들레헴에서 이집트로 그리고 최종적으론 나사렛으로 간다. 그런데 누가복음에 따르면 요셉과 마리아는 이미 나사렛 사람들이었고(눅 2:39), 잠시 베들레헴에 들려서 다시 나사렛으로 돌아오는 걸로 나온다. 이때 마태복음의 예수는 태어나자마자 곧 이집트로 피신가지만, 누가복음의 예수는 태어나자마자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았고, 40일 후에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봉헌된다. 어떻게 한 인물이 동시에 전혀 다른 두 시간과 두 공간에 공존할 수 있단 얘긴가? 두 번 태어났단 얘긴가?

혹자는 이렇게 말할 지도 모르겠다. 성경에 이러한 오류가 있긴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근본적으로 오류가 있지 않다고. 물론 궁극적으로는 나 역시도 그렇게 보고 있다. 하지만 정작 지금의 관건은 성경에 오류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이 문제부터 우선 확실하게 먼저 짚고 나가려는 것이다.

그렇기에 지금까지 보수 근본주의 기독교에서 금이야 옥이야 지켜왔던 성서무오설이 정말로 틀린 것이라면, 그렇다면 오히려 성서오류설이 맞느냐? 라고 내게 반문할 것이다. 분명하게 답한다면 “그렇다”이다.

성경의 오류설에 대한 보수측의 항변

이에 대해 보수측 기독교인 존 C. 라일의 말처럼 어쩌면 이렇게 반론할 수도 있겠다.
"성경의 기자들이 실수를 범할 수 있고 또한 모든 것에 있어서 성령의 인도를 받은 것이 아니라는 원칙을 받아들인다면, 나는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를 알지 못할 것이다. 나는 내 신앙의 기초에 있어서 그 어떤 확실한 것도 그 어떤 굳건한 것도 그리고 그 어떤 신뢰할 만한 것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안개가 하나님의 책 위에 내리깔려 모든 장들을 불확실성으로 감싸 버릴 것이다. 성경의 기자가 언제 실수를 범하였고 언제 실수를 범하지 않았는지 그 누가 결정할 것인가?

어디에서 영감이 끝나고 어디에서 영감이 시작되었는지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영감 받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을 다른 사람들은 영감받지 않았다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내가 의존하고 있는 본문들이 필사자에 의해 삽입된 부분이 아니라고 어떻게 장담하겠는가. 나는 성경 전체가 성령으로 감동된 저자들의 손을 거쳐 기록된 것이기 때문에 축자적으로 완전하며 실수가 없다는 사실을 믿는다. 나는 성령으로 감동된 저자들이 그들의 주제의 선택과 단어의 선택에 있어서까지 성령에 의해 무오하게 인도하심을 받았음을 믿는다."

언뜻 보기에 이 사람의 주장은 매우 신실한 신앙인의 것으로 여겨질지 모른다. 하지만 내가 볼 때 이러한 자의 생각은 매우 순진한 발상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여기서 진리를 찾아가는 그 과정의 방법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저러한 혼란과 불확실로만 귀결되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성경에 오류가 있다고 해서 이것이 ‘무조건 믿음’이냐 혹은 ‘불확실성’이냐의 양자택일적 가능성으로만 기울지도 않을뿐더러 곧바로 신앙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라는 얘기다.

또한 지금까지 숱하게 언급한, 피할 수 없이 명백한 성경의 오류와 불일치의 사례들에 대해 보수 진영의 신학자들이 도대체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도 여전히 궁금할 따름이다. 메첸, 핫지, 워필드, 린드셀 등등 이런 골수 근본주의자들이 뭘 알겠는가. 소위 복음주의권에서도 인기짱이라는 멍청한 프랜시스 쉐퍼(Francis A. Schaeffer)가 제아무리 올바른 성경관 운운한대도, 내게는 그런 자들의 항변들이 너무나도 참을 수 없을만큼, 가소로운 아규로만 들릴 따름이다.

저들은 성경안의 분명한 의문들에 대해선 전혀 눈을 감고 있는 소경들에 지나지 않는다. 분명히 말하지만, 저들은 제대로 된 온전한 설명들을 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진리 탐구의 다른 가능성들에 대해선 고려되지도 않는다. 결국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꼴이니 이들을 따르던 기독교 신자들도 어떻게 되겠는가. 죄다 무지의 구렁텅이에 빠질 뿐이다.

마침내 저들은 성경의 통일성 운운하면서 ‘무조건 믿어라’의 기독교로 전락하게끔 만든다. 굳이 성경 안의 무수한 오류와 불일치 사례들에 대하여 보수 기독교인들의 궁색한 답변들을 찾는다면, 그저 “무조건 믿어라”, “그 문제는 하나님만이 아신다.”, “인간은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만 성경을 알 수 있을 뿐, 인간의 지식으론 알 수 없다” 뭐 그런 식으로 기울기 십상이잖은가. 이런 레퍼토리들은 참으로 지겹기 짝이 없다.

나는 성경의 오류 문제를 제대로 인정하고 들어가지 않는다면, 궁극적으로 무오류의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고 보고 있다. 그 이유는 성경해석에 대한 이 글이 계속 연재되면서 충분히 알게 될 것이라고 본다. 우리가 왜 성경의 오류와 함께 가야하는지를 말이다. 제발 부탁드리건대, 얄팍하게 성서를 논하지 말라!

성서무오설 혹은 성서문자주의야말로 사탄의 교리

나는 분명히 말한다. 성서무오설 혹은 축자영감설 같은 성서문자주의 태도야말로 오히려 성경을 사탄의 바이블로 만든다는 사실을. 이것은 앞서 얘기한 것처럼, 성경을 생명살림의 책이 아닌 생명죽임의 책으로 만든다는 뜻이다.

특히 한국교회에서 성경의 오류를 얘기하면 금기시된다. 성서는 무조건 백퍼센트 역사적 사실이며 완전무오하다는 것이다. 성서문자주의가 최고로 편한 입장인 것이다. 만일 평신도가 성서비평을 알고서 머리가 커질 경우 목회자로선 여간 껄끄럽지 않을 수 없을 게다. 하지만 성경의 오류문제는 이미 학계에선 일반화된 얘기다. 그것이 일반교회 안에서는 금기시되고 소통이 안되고 있는 것뿐이다.

소위 말하는 복음주의(온건주의) 진영의 가장 치명적 한계도 바로 이 성서무오설에 대한 입장이 모호하게 처리되어 있거나 지지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면서도 죄 많은 세상과 역사 사회에 대한 관심은 가지고 있다. 기독교세계관 또는 성경적 세계관을 말하면서도 성경의 오류와 역사적 비평들에 대해선 명확한 검토를 보여주진 않는다.

얼마 전에 성대하게 치러졌다는 복음주의 진영의 행사였던 <성서한국> 단체의 신앙고백문을 보면 이들 역시 성서무오설에 기반한다고 밝히고 있는데, 이러한 점도 별로 놀라운 사실이 못된다. 성서한국의 성서 역시 태생적 한계를 지닐 뿐이며, 사실 이것은 복음주의 진영 전반의 치명적 한계와도 맞물려 있다. 또한 이것은 내가 IVP 출판사니 두란노니 생명의 말씀사니 하는 출판사 서적들을 대체적으로 유감스럽게 보는 이유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언뜻 보기에 저들은 신실한 것 마냥 "성경적", "복음적" 운운하지만 정작 알고보면 저들이야말로 성경을 제대로 모르는 자들이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제대로 무지하거나 혹은 솔직하지 못하거나 라는 얘기다. 제발 성경 안의 분명한 의문과 오류들에 눈감지 말라!



▲ 소위 복음주의 진영의 행사였던 <성서한국>도 결국 성서무오설에 기반해 있다. ⓒ 뉴스앤조이
 
아무리 정치, 사회, 역사에 지대한 관심을 가진 복음주의라 하더라도 분명하게 성서무오설을 전제해버리면 복음주의 진영 역시 언제라도 보수 근본주의로 회귀될 가능성을 안고 가는 것이기에, 진보 진영이 이들 중도 진영을 두리뭉실한 집단이나 혹은 이들마저 보수로 규정하는 이유도 근본적으로는 바로 이 지점에 놓여 있다고 하겠다.

사탄은 마침내 기독교를 선택했습니다!

이렇듯 나 자신이 지금까지 조금 심하게 얘길 내뱉는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성서문자주의가 주는 폐해가 너무나도 끔찍하고도 심각하기 때문이다. 이건 정말 매우 심각한 문제다.  성서무오설은 그리스도교를 좀먹는 매우 치명적인 '독 중의 독'이다.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 예장(대한예수교장로회)과 기장(한국기독교장로회)이 역사적으로 갈라진 직접적 이유도 바로 이것과 관련한다.

당시 기장 교단을 세웠던 김재준 목사는 성서비평을 받아들였던 자였고, 보수적인 장로교단은 이를 용납하지 않은 채 축출해버렸던 것이다. 이때 한국의 보수 근본주의 신학의 대부였던 박형룡은 성서무오설의 잣대로 김재준을 축출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하였다. 하지만 역사는 안다!

오늘날 예장 통합측의 장신대에서는 그 후로 뒤늦게나마 성서비평만큼은 받아들이고 있다. 하지만 당시로서 그 얘길 했을 때 김재준 목사는 장로교단에서 쫓겨나게 되었고, 김재준은 성서비평이라는 학문의 자유와 사회역사 참여를 부르짖으며 한국 기독교 역사의 찬연한 진보 교단인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 교단을 세웠던 것이다.

또한 웃기지도 않은 '창조과학회'가 과학이랍시고 거들먹거리는 것도 실상은 성서문자주의 태도에 기인한다. 즉, 저들은 성서무오설을 우선 전제해놓고서 거기에다 과학적 지식을 끼워 맞출 뿐이다. 그 궁극적 실체는 어디까지나 자연과학이 아니라 성서문자주의가 먼저 자리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창조과학회는 근대 모더니티와 다윈의 진화론에 대한 보수적 반동으로서 형성된 것으로 애초부터 보수 근본주의의 맥락과 철저히 같이 했던 단체이다. 근래에 회자되는 '지적설계' 패거리들 역시 이러한 맥락을 계승하고 있는 변형이론에 지나지 않는다. 
 
* 기독교인으로서 올바른 진화론과 창조론 이해에 대해선
http://www.rathinker.co.kr/paranormal/creationism/creationism.htm 참조.
 
우리가 언뜻 느끼기에 성서를 완전무오하다고 보는 입장이야말로 기독교의 하나님을 매우 굉장히 높게 숭앙하는 것같이 여겨지지만, 실은 이것이야말로 사탄의 놀라운 전략과 전술임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 같은 성서무오설의 임무는 놀랍게도 <신앙의 탈을 쓴무지>로 안내할 뿐 이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해서 그것은 신앙이 아니라 맹신이다.
 
잊지 말라. 사탄은 마침내 대중문화를 선택했다기보다 아예 기독교를 선택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겠지만, 보수 신앙인 여러분들은 지금까지 자신이 어려서부터 다녀왔던 가까운 교회 목사님이 말한 기독교가 우리가 믿는 기독교 세계와 신학의 전부인 줄 알고서 몸에 배여 왔던 것뿐이며, 그렇기에 그 실상은 속아왔던 것이었다. 그 자세한 내막은 다음 글에서 보여주고자 한다. 평화가 평화의 이름으로 유린되듯, 성경은 성경의 이름으로 짓밟히고 오히려 그 뜻은 은폐된다.

솔직하고 건강한 합리성에 기반한 기독교를 위하여! .

부디 하나님 앞에서도 혹은 성경 앞에서도 언제나 솔직히 대할 것을 권한다. 나는 확신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조건 믿습니다"라는 기도보다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혼란스럽습니다”라는 기도가 오히려 하나님께서 더 어여삐 보실 거란 점을. 왜냐하면 거기에는 진정성이 있기 때문이다.

‘혼란’이란 지금까지 자족해왔던 세계에서 안심하고 있다가 미처 알지 못했던 보다 새로운 차원과 조우함으로써 빚어지는 과정일 뿐이다. 다시 말해 위기가 곧 기회란 말이 있듯이, 혼란 역시 새로운 성장과 도약을 위한 기회란 얘기다. 하나님은 자신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더욱 알기를 원하고 계신다.

미리 말해두지만, 성경에 대한 신뢰는 놀랍게도 그 오류마저도 신뢰하는 것이다. 나는 앞으로의 글에서 기독교의 성경이야말로 얼마나 놀라운 경전인지를 보여주고자 한다. 내 개인적인 신앙고백으로서 말한다면 성경에는 다른 그 어떤 종교의 경전들보다도 더 놀랍고도 위대한 점이 담겨 있다고 본다. 성서는 닫힌 자들의 것이 아닌 열린 자들의 것이기에!

성서는 오류와 함께 간다! 나는 앞으로의 글에서 오히려 이것이야말로 보다 더 심오하고 위대하다는 사실을 설파할 것이다. 물론 이것은 결코 말장난도 아니며 여기에는 진정한 성찰이 있음을 힘주어 말하고 싶다. 그리고 그 숱한 오류와 모순 뒤에 계셨던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와 그 오묘한 섭리를 함께 느끼기를 바라는 바이다.

앞으로의 글은 여러분들과 함께 올바른 성경해석 그리고 진리탐구의 방법을 같이 모색해보고자 할 것이다. 누구든지 좋다. 지금까지 보수 진보 할 것 없이 성경해석에 대해 운운하는 모든 이론적 지식들을 총동원해도 좋겠다. 대체로 보수진영은 성서비평을 받아들이지 않는 반면에 진보진영은 받아들이고 있는 입장이다. 게다가 그 성서비평 연구에도 본문비평, 문헌비평, 양식사적 비평, 편집비평, 수사학적 비평, 구조주의 해석, 경전적 해석 등등 매우 많다.

나는 모호하거나 에둘러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단지 건강한 합리성에 기반하면서 정정당당하고 솔직한 자세로만 임해주길 바란다. 부디 여러분들과 같이 여행을 떠남에 있어 지금까지의 고정관념들을 버리고, 사유의 지평을 생각지 못한 데까지 보다 더 확장하도록 노력하면서, 기존 성경관에 대한 근원적인 패러다임 전환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바이다.

솔직하고 건강한 합리성에 기반한 기독교를 위하여!


* 성서비평이 반영된 신ㆍ구약성경 개론에 대한 참고도서
1. E. 젤린ㆍG. 포러, 김이곤ㆍ문희석ㆍ민영진 옮김, 『구약성서개론』(대한기독교서회)
2. 김정준ㆍ김찬국ㆍ박대선 지음, 『구약성서개론』(대한기독교서회)
3. 김영진 외 지음, 『구약성서개론-한국인을 위한 최신연구』(대한기독교서회)
4. 안병무ㆍ김철손ㆍ박창환 지음, 『신약성서개론』(대한기독교서회)
5. 노만 페린ㆍ데니스 C. 덜링, 박익수 옮김, 『새로운 신약성서개론』(한국신학연구소)
6. 김창락 외 지음, 『신약성서개론-한국인을 위한 최신연구』(대한기독교서회)
7. 노만 K. 갓월드 지음, 김상기 옮김, 『히브리 성서 1, 2』(한국신학연구소)
8. 월요신학서당 편, 『새롭게 열리는 구약성서의 세계』(한국신학연구소)
9. 월요신학서당 편, 『신약성서는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증언한다』(한국신학연구소)
10. 성서교재위원회, 『함께 읽는 구약성서』(한국신학연구소)
11. 성서교재위원회, 『함께 읽는 신약성서』(한국신학연구소)
12. 에드가 크렌츠 지음, 김상기 옮김, 『역사적 비평 방법』(한국신학연구소)
( * 1, 2, 4는 감신/장신/한신대 신학교가 공동으로 썼던 교재이기도 하다. 반면에 고신/총신/성결신 등등 보수측 신학대에선 성서비평을 위험한 것으로 보기 때문에 위와 같은 서적들은 배움의 과정 자체에서부터 이미 배제되거나 언급되더라도 매우 피상적으로 논의되는 실정이다. 그만큼 서로가 다른 것이다.

3번의 경우 구약의 최신연구라고 제목을 써 놓았지만 앞의 1번과 비교하면 그렇게 큰 차이가 나진 않는다. 신약개론서로는 특히 5번이 추천할 만하다. 7번은 매우 전문적인 구약성서 연구서 중의 하나로 탁월한 사회학적ㆍ문학적 비평 연구를 보여주고 있다. 8, 9번은 비교적 쉽게 쓰여져서 부담없이 볼 수 있는 진보진영의 얇은 책이며, 10, 11번의 경우는 다소 민중신학적 해석이 가미되어 있는 성서공부 교재이다. 물론 성서비평의 성과도 함께 반영되어 있다.

12번은 성서를 비판하는 <역사적 비평 방법>이란 어떤 것이며, 역사적으로 어떻게 전개되어 왔으며, 그것의 방법과 목적, 그리고 이에 대한 신학적 논의들을 보여주는 연구서이다. 이외에도 언급할 서적들은 많지만 일반적인 것만 몇 가지 추려보았다.
)


(계속 이어집니다..)
 
예수사람 (06-07-04 09:59)
 
성서무오설의 본 뜻은 기독교 경전으로서의 성서의 권위를 세우려는 데에 있어야 하는 것이지...근본주의 신앙인들의 문자주의, 내지는 성경 각 권의 상호 비교를 통한 역사적 불일치에 대한 답변으로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과학주의자들이 지나치게 성경을 역사적 사실, 자연과학적 사실과 비교하고, 성경의 경전성을 무시하므로 이에 대한 강한 반발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성경을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것은 필요하겠으나, 과학주의 역시 하나의 세계관에 불과한 것이므로, 그 것 또한 절대화 될 때 문제를 발생시키는 것 아닐까요?
성경을 자연과학 서적을 대하듯이 읽는다면, 문제가 되지요. 자연과학적 차원의 오류가 있다고 하여 그것이 그리 큰 문제가 될까요? 성경읽기는 다른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우선 자신의 마음을 혁신하는 목적-예수마음-을 가지고 읽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때 자연과학적 오류는 별로 문제될 것이 없는 것 아닐까요?

해답을 찾는 남자는 천에 하나 있을까 말까 하지만 여자들 가운데는 하나도 없다"(전 7:28) 이 구절을 가지고 성차별을 정당화하려는 사람이 문제이지, 성경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본래의 뜻이 성차별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정강길 (06-07-06 02:52)
 
안녕하세요.. 예수사람님..

권위란 것은 그저 세워지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작금에선 성서무오설은 오히려 성서의 진정한 권위를 가리는 독이 될 뿐..
또한 자연과학적 오류를 문제 있게 만드는 서글픈 현실이 이미 먼저 놓여 있기에
저와 같은 얘길 하는 것뿐일테죠..

그리고 말씀하신 그 '예수마음'이란 것도 모호한 듯 싶습니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고리라는 뜻..
언급하신 '성경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본래의 뜻'이란 말도 마찬가지구요..
성차별을 정당화하는 사람은 성경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본래의 뜻이 그렇다고 주장하는 현실이잖아요..

예수사람 (06-07-06 09:22)
 
사랑 겸손 온유 등을 예수마음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러한 예수마음이 부족하기에 성경을 놓고...논쟁과 시비를 하는 것이겠지요! 서로 사랑하고 존중하는 마음이 과학적 탐구보다 더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학문의 차원이 아니라, 목회와 삶의 차원이지요. 동양적 사고는 모호한 하늘의 차원까지도 수용하는 것이고, 서양적 사고는 지나치게 합리적이고자 하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설명하려해도 되지 않는 차원은 모호하고, 신비롭고, 언어를 넘어서는 것이 아닐까요?
동양적 성서읽기에서는 과거와 현재의 지평 이외에 하늘의 지평도 염두에 두는 것이지요. 그 하늘이라는 것이 서양적 읽기에서는 모호한 것이지만... ...에스겔서 1장

예수사람 (06-07-06 10:00)
 
성서는 기독교인의 경전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성서를 경전으로 인정하지 않으면서 기독신앙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근본주의적 주장의 폐해가 대단하다 해도...성서가 경전으로 와 닿지 않는다면...학문공동체는 될 수 있어도, 신앙공동체(교회)가 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이면서, 동시에 하나의 고전 이라는 양면이 있는 것 아닙니까?

정강길 (06-07-06 12:09)
 
제가 보기에는 기독교가 지나치게 합리적이지 못해서 나온 문제가 더크다고 보는데요.. 글구 제가 말한 합리주의는 근대합리주의가 아닌 건 잘 아실테죠? 합리주의는 신적인 것이지 인간의 것이 아니라는 말씀도 드렸구요.. 인간이 무슨 수로 진리파악이 가능하겠어요.. 경전으로 와 닿는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것은 개인적 경험의 질의 차이에서 나오는 고백의 언어일 뿐이죠.. 가장 이상적인 거겠죠.. 하지만 그 이상도 인간 한계의 현실을 어디까지나 고려하고 품어가면서 나아가야 할 이상인 것이죠..

질문 (08-07-09 17:10)
 
켑짱도 아니고 온전한 설명도 아시지만 문제제기하신 부분에만 대답하겠습니다.

서로 말이 안맞는 성경

 1.성경에는 불일치의 사례들도 허다하다. 창세기 1장과 창세기 2장 4절 이하에 나오는 두 가지 창조이야기를 보면 서로 창조순서가 모순된다는 점은 널리 알려진 사례 중 하나다.

1.의 답변
1:1-2:3의 천지 창조 기사와는 일견  모순되는 듯한 구절이다.  왜냐하면 그곳에선 사람이 창조되기 이전(1:26-31)의  세째날
에  이미  하나님께서  각종  채소와  괴목을  창조하신  것으로  되어있기  때문이다(1:11-13).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차이점을 다음과 같이 이해해야 한다. (1) 2장  전체의 관점이 창조 사역의 순서적 전개에 있지 않고 인간을 중심한 창조  과정의  의미 추적에 있으므로 본절도 단순히 인간이 이땅에 존재하기 전의 지구 상태를 묘사한  것일 뿐이다.  즉 당시 땅은 식물이 살기에 적합한 여건을 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6절).(2) 하나님께선 이러한 땅에 각종 생물과 인간이 살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여 주셨다(8, 9절) (3) 그리고 나서 하나님께선 피조 세계에 새로운 질서와 명령을  부여하셨는데 곧 인간이 땅을 정복하고 각종 생물을 다스리는 것이다(15절 ; 1:28).  들(사데) - '땅'(에레츠)과는 다른 말이긴 하나 그래도 이 말은 '드넓은 판'이라기 보다는 경작하기 적당한 땅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같은 단어가 하반절에선 밭으로 번역되어 있다.

2.노아홍수의 기사도 두 번 반복되는데, 창세기 6장 19절에는 모든 짐승들이 암수 한 쌍씩 방주에 들어가지만, 7장 2절에 보면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 쌍씩, 부정한 짐승은 암수 두 쌍씩, 공중의 새는 암수 일곱 쌍씩 방주에 들어가도록 하고 있다. 도대체 누구 장단이 옳은 것인가?

2.의 답변
 얼핏보아 6:19,20과 모순되는 듯한 구절이다. 그러나 이는 앞의 것이 개괄적인  지시였던데 반해 본절의 것은 세부적인 지시인데서 나타난 차이일 뿐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홍수 심판을 일주일 앞둔 시점(4절)에서 보다 구체적이고도 세부적인 지시를  내릴 필요성이 있었던 것이다.정결한 짐승...부정한 것 - 당시는 짐승의 정,부정 규례가 주어지지 않았던 시점이
기에 짐승의 정결과 부정을 구분할 근거가 무엇인지 분명치 않았겠으나 아마 제사  제물로서의 효용성(8:20)에 근거했던 것같다.암수 일곱씩 - 학자들에 따라 이견을 보이고 있는 구절이다 칼빈(Calvin)이나 랑게(Lange)같은 이는 '일곱씩'을 '세 쌍과 한 마리'로 보는 반면 70인역은 '일곱 쌍'으로보고 있다. 만일 전자가 합당하다면 여분의 한 마리는 후일 하나님께 번제물로 드리기위한 것으로 추측된다(8:20).

3.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나타난 예수의 족보는 서로 일치되지 않고 있다는 점도 널리 알려진 성경의 불일치 사례에 속한다.

3.의 답변
여러가지 해석이 있으나 마태는 요셉의 족보 누가는 마리아의 족보를 기록하였다는 설이 일반적이다. 두 족보에서 겹치는 인물이 있는 이유는 동명이인이거나 요셉과 마리아는 둘 다 다윗의 계보에 속하기 때문에 같은 조상을 가지기 때문이다.

4.놀랍게도 성경에는 하나님이 사탄과 동일한 존재로 묘사되기도 한다. 사무엘하 24장 1절을 보면 주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셔서 백성들을 치시려고 다윗을 부추기셨다고 나오는데, 역대기상 21장 1절을 보면 놀랍게도 똑같은 구절인데 거기에는 사탄이 이스라엘을 치려고 다윗을 부추겼다고 나온다. 도대체 누가 시킨 것인가? 하나님이냐? 사탄이냐? 때에 따라서 성경은 하나님을 사탄으로 살짝 둔갑시키기도 하는 것이다. 참으로 놀라운 역사(?)가 아닐 수 없다.

4.의 답
대상 21:1에서는 '사단이 다윗을 격동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 두 기록은 상호 모순되지 아니한다. 왜냐하면 넓은 의미에서 볼 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사단을 이용하시기 때문이다(욥 1:12;삼상 26:19). 사무엘과 역대기를 말하면서 왜 욥기는 말하지 않는가? 성경 내적으로 볼때 이 문제는 오히려 성경의 정합성을 보여주는 근거가 될 수 있다.

5.어떤 것은 성경을 쓴 기자가 착각해서 잘못 인용한 구절들도 있다. 마태복음 27장 9절에서 성서기자는 예언자 스가랴가 11장에서 한 말을 예레미야가 한 말이라고 잘못 착각하고 있다. 아무래도 마태복음을 쓴 성서기자는 예레미아 32장 6-9절의 내용과 잠시 혼동한 것으로 보인다. 적어도 마태복음 기자가 인용한 구약성경의 그 구절만큼은 예레미아의 것이 아닌 스가랴의 것이기 때문이다.

5.의 답변
선지자 예레미야로 하신 맡씀이 이루었나니 - 구약 예언의 성취를 강조하는 전형적인 마태의 문구이다.  구약 예언의 성취를 알리는 이 문구는 예레미야에서 온  것처럼 되어있는 본문과는 달리 사실은 스가랴의 예언으로 보아도 좋을만큼 대부분이 슥  11:12, 13에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렘 18:3에서 토기장이의 집을 방문한 것에  대하여,그리고 렘 32:6ff.  에서는 밭을 산 것에 대해 하고 있어서 예레미야서가 완전히 배제될 수는 없다.  여하튼'예레미야'란 이름을 후기 편집자들이 첨가했다거나, 순전히 렘32:8-14의 인용이라는 사실을 들어 이 차이를 해명하는 학설들이 있다. 이와 함께  선지자의 이름이 '예레미야'로 제시된 이유로는, 스가랴서를 위시한 모든 예언서들을 대표하는 이름이 '예레미야'이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Light  foot;Talmud, Baba Bathra 14b). 그러나 예레미야 대신에 '이사야'가 예언서의 대표격으로
더 자주 사용된다는 점에서 이 견해는 큰 호응을 얻지 못하고 있다.  가장 유력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즉 마태가 렘 18:2;19:1,2;32:8-15의내용을 종합하고, 즉 11:13과결합시켜  하나의 문장을 만든 후 그  구절을 대표적인  선지자 예레미야의 이름으로인용하였다는  학설이다(Bruce, Meyer, Gundry).  이러한 예는 신약의 다른 곳 에서도발견된다(2:23;막 1:2, 3).

6.심지어 성경은 생물학적 사실마저 왜곡하기도 하는데, 곤충 다리가 네 개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레위기 11장 20-23절). 하나님 혹은 레위기 기자가 곤충 다리를 잘못 세어 본 것인가? 이처럼 성경에 나타난 시시콜콜한 오류와 불일치의 사례들까지 죄다 따진다면 부지기수다. 하지만 한국교회의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성경에 쓰인 하찮은 토씨하나까지도 어떨 땐 매우 중요하게 보잖은가.

6.의 답변
'네 발로 기어 다니는 모든 곤충'이라는 곤충이 다리가 네 개뿐인 곤충을 의미하지 않는다.'네발로 가어다니는 모든 곤충 '중에' 그 발에 뛰는 다리가 '있어서' 땅에서 뛰는 것은 너희가 먹을찌니' 라는 부분을 잘 읽어보자. 네 발도 있고 뛰는 다리도 있는 곤충을 말하고 있다. 즉 메뚜기, 베짱이 등은 (기어다니는데 쓰는 짧은다리 네 개)+(뛰는데 쓰는,점프하는 기다란 다리 2개)= 합이 6개이다. 그럼 '네발로 기는 곤충중 뒤의 기다란 뛰는 다리가 없는 곤충이 있는가?' 하는 질문이 나올 수도 있겠다. 사마귀가 전형적인 예이다. 네 다리로 기나 뛰는 다리는 없다. 즉 사마귀는 가증한 곤충의 범주에 들어간다.

저는 성경에 난제는 있으되 아직까지는  명백한 오류라고 증명된 것은 없다고 보고 있습니다.(물론 성경의 내적인 논리성이나 정합성 측면에서입나다. 성경 외적인 비평등은 다른 장에서 논의해보아야할 문제인것 같습니다.) 성경 내적으로 드러나는'일일히 말하기 어려운 다른 오류'를 아신다면 다른 복음주의 켑짱들에게 이 사이트에서만 '보수진영의 캡짱 석학이 나와서 나와 공개토론을 해도 좋다.'라고 외치지 마시고 정식으로 선전포고를 하시고 논쟁을 해보시는것이 어떨까요? (그냥 이 공간에서만 '너희들은 다 틀렸다!'라고 외치는 것은 골방에서 내가 최고다라고 외치는 사람을 연상시킴니다.) 쉐퍼를 우습게 여기시니 한국라브리에 가서 토론하셔도 될 것 같고, 총신대같은 '꼴통'신학교에 메일이나 전화로 논쟁을 제의하시는 것은 어떨까요? 한국교회언론회가 안티 기독교와도 토론장을 마련한 적이 있으니 거기로 연락하시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질문 (08-07-09 18:16)
 
7. 에큐메니안(http://www.ecumenian.com)에 있는 추가로 덧붙이신 내용입니다.
우리는 주일학교 때부터 배웠던 <다윗과 골리앗> 동화를 너무나 잘 안다. 하지만 성경은 골리앗을 죽인 건 놀랍게도 '엘하난'이라고도 써 놓고 있다(삼하 21:19, 참고로 이 구절은 한글개역성경에선 골리앗의 아우 라흐미로 살짝 입맛에 따라 첨가되어 고쳐져 있다. 이것은 다윗을 숭앙했던 역대기의 20장5절에 따른 것이다. 물론 본래 히브리어 원문에는 ‘엘하난이 골리앗을 죽였다’고 명시적으로 나와 있으며, 개역의 번역은 틀린 것이다. 적어도 개역보다는 새번역이 좀더 낫다고 본다).

그래서 보수측 사람들 가운데는 먼저 쓰인 사무엘서가 의도적으로 오기한 것이라고 보는 사람도 없잖아 있다. 하지만 이것은 더 웃기는 얘기다. 그럴 목적이 무엇인가? 아니면 아닌 것을 말이다. 엘하난은 다윗의 부하인 명장이었다. 게다가 우리가 정작 다윗이 골리앗을 죽였다는 그 드라마틱한 장면의 해당구절(삼상)을 찾아보면 실제로 골리앗이라는 고유명사 대신 온통 ‘블레셋 사람’으로 쓰여 있다.

따라서 오히려 더 후대에 쓰인 역대기야말로 다윗에 대한 숭앙에 의해 기존의 사실들을 재구성했을 가능성이 많다고 본다. 실제로 사무엘서와 비교해서 역대기에는 다윗의 죄와 허물이 나와 있지 않다고 봐도 좋을 만큼 다윗시대를 이상향의 중심에 놓고 기술한다. 참고로 대부분의 진보 학자들은 다윗과 골리앗 얘기는 역대기에 담긴 왕권이데올로기가 성경 안에서조차 반영된 것으로 보고 있으며, 자기 부하의 공이 결국은 권력자 다윗에게 돌아가서 전승된 것으로 보고 있다.

7.의 답변
야레오르김의 아들 엘하난이 가드 골리앗...죽였는데 - 같은 내용을  기록한  대상 20:5에는 '야일의 아들 엘하난이 가드 사람 골리앗의 아우 라흐미를 죽였는데'라고 되어 있다.  즉 본 구절의 '야레오르김'은 역대기에서는 '야일'로, 그리고 대상  20:5과는 달리 본 구절의 원문에는 '...의 아우 라흐미'란 말이 빠져있다(한글 개역  성경에 있는 이 말은 첨가된 것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두 구절의 상이한 기록이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주장들이 제기되고 있다.  (1)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역대기의 기록을 옳은 것으로, 그리고 본서(삼하)의 기록을 오기(誤記)로  본다(Piscator, Clericus, Michaelis, Movers, Thenius).  (2) 반면, 다른 소수의 학자들은 본서의 기록을 옳은 것으로, 그리고  역대기의  기록을  오기라고  주장한다(Ewald,  Bertheau, Bottcher).  즉 이들은 골리앗이란 이름의 사람이 실제로 둘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주장은 억측이다.  (3)  혹자는  다윗과  엘하난을  동일  인물로  본다(Jerome, Targum).  즉 '다윗'이란 이름은 본래 이름이 아니라 왕명(throne name)이었으며, 그의 본래 이름은 '엘하난'이었다는 주장이다.  특히 '엘하난'(Elhanan)이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다'란 뜻을 지닌다는 사실은 이같은 주장을  입중해  준다고  한다.  그러나 이같은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다.  왜냐하면 본 구절의 배경이 되는 장소,  곧 엘하난이 골리앗을 죽였다고 하는 곳은 '곱'이지만, 다윗이 골리앗을 죽인 장소는  엘
라 골짜기이기 때문이다(삼상 17:19).  이상과 같은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우리는  본 구절이 잘못된 오기(誤記)이며, 역대기의 기록이 원문에 일치하는 올바른 기록임을 인정해야만 한다.  따라서 본 구절은 역대기의 기록에 맞추어 '...의 아우 라흐미'를 첨가하여 읽어야 한다(Keil).  결론적으로 다윗은 '골리앗'을 죽였고, 엘하난은 '골리앗의 아우'를 죽인 것이다.

따라서 오히려 더 후대에 쓰인 역대기야말로 다윗에 대한 숭앙에 의해 기존의 사실들을 재구성했을 가능성이 많다고 본다. 실제로 사무엘서와 비교해서 역대기에는 다윗의 죄와 허물이 나와 있지 않다고 봐도 좋을 만큼 다윗시대를 이상향의 중심에 놓고 기술한다. 참고로 대부분의 진보 학자들은 다윗과 골리앗 얘기는 역대기에 담긴 왕권이데올로기가 성경 안에서조차 반영된 것으로 보고 있으며, 자기 부하의 공이 결국은 권력자 다윗에게 돌아가서 전승된 것으로 보고 있다.
=>카러라 주장만 나열하셨지 근거가 없습니다. 유일하게 드신 근거인 '역대기에는 다윗의 죄와 허물이 나와 있지 않다고 봐도 좋을 만큼 다윗시대를 이상향의 중심에 놓고 기술한다.' 가 역대기 재구성설을 뒷받침하기에는 불충분한니다. 가설정도로는 모르지만 단언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보수측 사람들 가운데는 먼저 쓰인 사무엘서가 의도적으로 오기한 것이라고 보는 사람도 없잖아 있다. 하지만 이것은 더 웃기는 얘기다. 그럴 목적이 무엇인가? 아니면 아닌 것을 말이다. 엘하난은 다윗의 부하인 명장이었다. 게다가 우리가 정작 다윗이 골리앗을 죽였다는 그 드라마틱한 장면의 해당구절(삼상)을 찾아보면 실제로 골리앗이라는 고유명사 대신 온통 ‘블레셋 사람’으로 쓰여 있다.
=>빈정대는 것 말고  이 주장의 근거는 '엘하난은 다윗의 부하인 명장이었다.'와 '고유명사 대신 온통 ‘블레셋 사람’으로 쓰여 있다.' 뿐입니다. 첫번째 근거는 다윗의 많은 공훈은 부하들의 공적을 조작한 것이라는 전제에 대한 증거를 명확히 제시하지 않는 이상 의미가 없습니다. 또한 이름 대신 블레셋 사람으로 쓰인 것이 다윗이 골리앗을 죽이지 않았다는 근거가 될 수 있을까요?

고등비평에서 이루어진 근거들을 제시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고등비평은 많은 추론과 확실하지 못한 가설에 근거합니다. '나는 그럴듯해 보여서 그 해석들을 신뢰한다.' 라고 주장하실 수는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놀라운'사실'로 남에게 강요하기에는 근거가 너무나 부족합니다. 그럴듯한 것과 사실은 다릅니다.

추신 : 글에서 '올바른'이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하십니다. 자신의 주장이 옳고 '보수측'이라는 사람들이 틀렸다는 말씀이신데요. 그러면 먼저 포스트모더니스트들과 먼저 토론을 하셔야 할 듯 합니다.

미선이 (08-07-09 19:17)
 
사람이란 대략 써 놓은 글만 봐도 그 사람이 그 어떤 부분에 대해서
적어도 내용 파악과 공부를 하고서 쓴 것인지쯤은 대략 짐작이 갈 데가 있다(혹시 CCC출신이 아니신지도 궁금함..)
그런 쪽에서 하도 어이없는 얘기들을 잘도 꺼내는 걸 보아온 터라..
암튼 이번에도 답변이라고서 써 놓은 글이 답변은 커녕 하등의 억지논리만 전개한다면
그 역시 무조건 믿어라의 기독교들이 말하는 그런 태도에 대한 변죽만 울릴 따름이다.

암튼 그래도 올만에 답변이 올라왔으니 답변을 드리고자 한다.

1. 질문님은 말하길 2장은 인간이 이땅에 존재하기 이전의 지구 상태를 묘사했다고 하는데
하지만 1장에서의 인긴이 존재하기 이전의 지구 상태는 분명하게 각기 씨맺는 채소와
식물들 동물들이 있었던 세상이기에 그 부분이 모순되고 있음을 말할 뿐이다.

앞으로도 알겠지만 질문님이 써 놓은 답변들은 대부분이
그저 한 쪽만 잘 틀어막으려하다가 그러다보니 또 다른 한 쪽은
또다시 간과해버리는 그런 웃지못할 답변들이 대부분이다.
대부분이 성경은 모순이 없다는 점을 이미 전제하고서 거기에 억지로라도 끼워맞추려는 전략인 것이다.

2. 글구 노아홍수 기사에서도 질문님은 개괄적인 지시와 세부적인 지시라고 했는데
개괄적인 지시와 세부적인 지시를 그토록 모순되게 하나? 하나님이란 분이 말이다.
질문자가 언급한 칼빈과 랑게의 학설을 수용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분명히 앞 지시에 대한 수정된 번복일 뿐이지 양립가능한 지시가 결코 아닌 것이다.

3. 누가는 마리아의 족보란다.. 둘 다 다윗의 계보라면
그럼 예수는 결국 그때까지 근친 상간을 행해왔던 가문의 자손이라도 된다는 얘긴가?

이런 얘기들은 질문님의 글을 보면 꼼꼼하게 잘 들여보면나오지만
거의 성서비평의 문제의식조차 접해보지 않은 사람의 글임을 말해줄 따름이다.

4. 하나님이 사단을 이용한다면 결국 주체는 하나님이라는 얘긴데,
그렇다면 성서의 사건들은 결국 하나님의 온갖 자작극으로 결론 날 듯 싶다.
성경의 정합성? 오히려 내가 보기엔 그 반대일 듯 싶다.
악에 대한 책임성이 결국 신한테로 귀속된다는 얘긴가?

5. 적어도 마태가 예레미야의 이름을 인용했다고 하더라도 출처를 오기하거나
빼먹은 것은 사실인 셈이다. 예컨대 우리가 다른 사람의 논지를 인용할 때
대표자인 그 한 사람만 출처를 표기하는가? 일일이 다 해야 하는 것이다.
하물며 오류와 빈틈이 없다는 성경이 왜 그리도 허술하단 말인가?

6. 6의 답변은 완전히 코디미의 극치다. 성경이 곤충 다리 4개라고 한 건
곤충 다리 6개 중 기어다니는데 쓰는 다리 4개와 점프 다리2개가 있는데
성경은 기어다니는 다리 4개만을 얘기했다는 건가? 정말이지 반박할 가치도 못느낀다.
소위 보수적이라는 복음주의 학자들조차도 이런 구절들은 그저 실수와 오류라고 보며,
단지 이들의 주장은 그런 오류들은 성경의 핵심적인 오류는 아니기에 별 대수롭지 않게 볼 뿐인데
그런데도 질문님 같은 사람은 그조차도 억지로라도 끼워맞춰보려는 그 노력이 참으로 대견하게도 여겨진다.

7. 질문님이 말하는 대부분의 주석자라는 건 보수 진영의 학자들일테죠.
그런데 어쨌든 여기서는 성서의 오기를 인정하는 걸로 보이는군요.
역대기는 오히려 다윗 왕조 사가의 작품이니 오기 확률이 더 높지요.
역대기가 다윗 중심의 기술이란 건 누가 봐도 뻔한데 그게 왜 불충분한 이유가 되는 것인지?
오히려 역대기엔 왜 다윗의 허물조차 지적이 안됐는지에 대한 해명과 근거를 대야 할 사람은 바로 질문자님인데..

글구 가설이라고 따지면 사실상 모든 게 가설 아닌 게 어디겠어요..
그렇게 따지면 성서무오설도 역시 가설일뿐이지..

또한 한국교회언론회의 안티토론회때는 저 역시 패널로도 나갔었구요. 기사 아직 못보셨남?
뭐 다른데서도 불러주기라도 하면 저야 감사하지요.
아마도 님은 성서비평이 들어간 구약성서개론이나 신약성서개론 책은
공부 안하신 거 같은데 한번 쯤 읽어라도 보시고서 글을 쓰시면 참 좋겠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끝으로 제가 말하는 '올바른'이란 어디까지나 설명력의 확보의 차원이며
당연히 저 역시 포스트모던까지도 비판하고 넘어서는 지점은 어차피
윗글 이후의 연재 글에서도 잘 밝히고 있답니다. 아직 안읽어보신 것 같습니다.^^*

어쨌든 그래도 긴 글 써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삼손 (12-11-04 14:31)
 
정강길 선생님께서 말씀내용에는 많은 부분 동의합니다.
성경은 합리적인 이성적인 논지로 이해하는 것은 맞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성이 없는 성서 읽기도 믿음이 없는  단어로 치부되지요 그것은 아닌것 같구요 그러나 성서비평이 너무 앞서는 것도 신앙이라는 차원에서 보면 문제는 있지 않겠나 생각합니다. 성서는 성서기자들의 신앙고백서이지 과학을 탐구하는 책이 아니지 않겠습니까? 저는 감리교에서도 공부도 해보았고 장로교 고신에서도 공부를 해 보았는데요 요즈음은 성서비평을 진보 보수 할것 없이 전부 합니다. 오류가 있는 것도 인정을 하구요 진보나 보수로 나뉜것의 관점은 성서해석의 차이라기 보다는  우리나라 정치상황과 맞물려 있지요 정치적으로 그당시 진보기독교가 보수기독교단체보다 정권에 순응을 하지 못했지요 그래서 더 많은 진보기독교인이 우리나라 상황에서 크지 못한 이유가 될것 같습니다.
아무튼 성경이 오류가 있는 것은 맞고 문자주의를 통해 수많은 이단이 들어와 있는 것도 맞지만 그것은 정치 경제 교단내 이해관계가 맞물려 벌어지는 것이지 성서해석에만 결과가 있는 것은 아닐 것 같습니다.
요즈음 보수 기독교인들도 교단은 그개교회에 다녀도 성경을 해석하는 관점에서 많이 진보측 주장을 수용합니다. 성경은 성서기자들의 신앙고백서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과학적 근거를 들이대는 근본주의자들은 요즈음 많지 않습니다. 단지 이단들이 오히려 더 문자주의를 들이밀지요 아무튼 많은 부분 공감합니다. 그러나 성서를 성경비평의 차원에서만 다루어서도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성서기자들의 영적깊이를 우리가 어찌 다 알수 있겠습니까?  학문적 깊이로만 보아서도 문제가 되겠지요 아무튼 이성적 감성적 모든 것을 동원해야 읽을 수 있는 책이 성서라고 할수 있겠지요 이어령 교수님이 말씀하신 것과 같이 성서는 시적 이성적 학문적 모든 것을 동원해야 구조적인 것을 이해할수 있다고 말씀하시던데 사람이 가지고 있는 모든 부분을 동원해서 읽어야 할 책이라 생각됩니다. 아무튼 좋은 글 잘 보았습니다.

    
미선 (12-11-04 20:11)
 
삼손님 반갑습니다.

그런데 고신도 교회마다 다른가보군요. 제가 잘 아는 고신의 대형교회는 성서 역사비평을 입에도 못꺼낼만큼 보수랍니다. 주일날 먹는 것도 사먹어선 안될 정도로 칼이구요. 더 중요한 건 고신 신학대에선 정식으로 성서 역사비평 배우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예장합동측 교단인 총신대도 마찬가지구요. 정확히 확인해보시길 바랍니다. 이들은 지금도 자유주의 신학이라면서 멀리한답니다. 오히려 역사비평에 반하는 반문서설을 배울 정도지요.

그리고 우리나라 정치상황 뿐만 아니라 미국의 기독교 진영도 마찬가지로 보수와 진보로 구분하기도 한답니다.

우리나라 진보 기독교가 정치적으로 순응했다는 얘긴 저는 금시초문이군요. 크지 못한 이유는 순응 때문이 아니라 박해 때문이지요. 대표적으로 기장만 해도 정권의 탄압때문에 신학과 모집 정지까지 당했을 정도였으니..

또한 님얘기대로 정치경제 교단내 이해관계와도 관계가 있다고는 생각합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는 신학적 입장의 차이에서 빚어진다고 봅니다. 실제로 보수와 진보 진영의 신학자들도 이미 그렇게 보구 있구요. 이는 저 혼자만의 주장도 아니랍니다.

그리고 과학적 근거를 들이대는 근본주의자들이 많지 않다고 하셨는데, 창조과학 주장하는 이들은 근본주의자들 아닌가요? 최근까지도 보수 기독교 진영의 신학자들과 함께 성서무오류설에 입각한 책을 내기도 했었구요.

성서를 역사비평의 차원에서만 다루어서도 당연히 안되지요. 어차피 성서는 다각도로 검토되어야 하니까요. 허나 역사비평을 빼놓고서도 얘기할 수 없다는 점을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합리적으로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여기서 말한 합리란 이성 뿐만 아니라 감성도 모두 포함해서 가장 올바른 길을 찾는 것을 두고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령의 기독교에 대해선 http://freeview.org/bbs/tb.php/f005/261 참조.

암튼 좋은 글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좋게 봐주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삼손 (12-11-04 22:01)
 
요즈음은 교신교단은 생각하시는 것보다는 많이 바뀌었습니다. 저는 감리교단에서 신앙생활을 많이 했는데 감리교 목사님들보다도 오히려 고신고단 목사님들의 신학이 요즈음은 더 개혁적인 것 같습니다. 대화도 되구요 열린 마음이 많습니다. 그건 교단마다 틀릴 겁니다.
보수교단도 숨어 있는 재야의 인재들이 상당합니다. 교단의 눈치를 보지만 그런 속에서 소신껏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신학공부를 하시는 좋으신 분들이 많습니다.
고신 뿐만 아니라 합동 합신 장신 성결등 여러 교단의 목사님들중에서도 숨어 있는 분들이 많으십니다.
예를 들면  가장 진보적이다 라고 하는 교단들도 일반 목회나 설교나 교회내에서 공동체를 이끌어가는 모습은 한국현실에 토착화 되어 별반 다를것이 없습니다. 한신대 측에서 배운 신학을 하신 목사님들도 설교말씀을 때로는 보수교단고 비교해서 보면 별반다를게 없는 것 같아요 그것은 마마도 제도권의 무언의 힘이 있겠지요 그래서 평신도들이 제대로 공부를 해야 할것 같습니다. 학교에서 배운 신학과 현실목회는 왜 틀리는가? 그런 문제의식도 필요하지요 신학은 좀더 높은데서 대중속으로 들어올 필요가 있을 겁니다.
신학교 내에서도 많이 배우지 못하고 교회 강도사 전도사로 일하다 보면 책보는 시간도
없다고 하시더군요 결국 신학은 평생 공부하는 습관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돈에 구애받지 않고 눈치 보지 않고 제대로 자기소신을 이야기 할수 있는 사람들이 별로 없을 겁니다. 그리고 이어령 교수님에 대한 선생님이 적은 견해는  잘 읽었는데요 동의할수 없는 부분도 많습니다.그분은 신학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무신론적인 입장에서 본인이 기독교에 들어올수 밖에 없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지요 경동교회에서도 강의한 내용을 들으니 도올 선생님 보다도 훨씬 논리적이고 이성적이고 문학적인 내용을 말씀하셔서 깜짝 놀랐습니다.
그분의 내공도 무시못하죠.. 아무튼 질문이 생기면 지면으로 인사를 계속 드리겠습니다.
정선생님도 한신대에서 공부하신 천재라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어릴적부터 가난과 싸우시고 스스로 공부하시고 수많은 책을 읽으셔서 진보진영 기독교 내에서도 알아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도 42살밖에 안되어 잘 모르지만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많은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미선 (12-11-05 00:46)
 
제 생각에는 교단보다 틀리다기보다 교회마다 틀리지 않나 싶습니다.
교단은 그 교단의 신학 교육 커리큘럼을 들여다봐야 한다고 봅니다.
아무래도 그게 교단의 정식 입장이 반영된 것일테니까요.
제가 고신과 합동을 특히 잘아는 이유는 저와 너무나 가까운 분들이
여전히 그쪽에 몸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때 저는 한신대가 아닌
고신대에 들어갈 뻔한 적도 있었지요. 고신의 경우는 그쪽으로부터
지금도 고신측 신앙의 출판물도 많이 받아본답니다.
어쨌든 분명하게 한신대나 성공회대 같은 진보 신학대의 커리큘럼들과는 많이 다릅니다.

그리고 고신이 개혁적일 수 있습니다. 이들 중에도 역시 한국교회가
타락했다는 생각을 하는 분들도 계시구요.
그런데 그 내용적으로 깊이 들어가면 관점이 조금 다릅니다.
예컨대, 어떤 분들은 현재의 한국교회가 주일을 제대로 지키지 않아서
그렇다고 보시는 분들도 계시고, 윤리의식이 없어서 그렇다는 분들도 계시고
암튼 뭐 그렇습니다. 현재의 한국교회가
예수님의 삶을 따라 살지 않는다고 보는 점에서는
개혁적인 진보와도 비슷하게 느껴질 수 있으나 그 구체적 내용으로 파고들어가면
또다시 신학적 입장의 완연한 차이를 느낄 수 있답니다.

현재 한국에서 보수와 진보의 차이가 가장 대립되는지를 극명하게 알 수 있는 지점은
내년 WCC총회 문제를 놓고 서로 극명하게 대립한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한 뉴스나 기사들은 너무 많이 나와 있으니 검색해보시면 될 것입니다.
특히 WCC가 종교다원주의와 자유주의 신학을 받아들인다면서 이를 거부하지요.
WCC를 혐오하며 유치 자체를 반대하는 보수 교단도 많습니다.

그런데 언급하신 사례처럼 한신대 나온 목사님들의 설교와
보수 교단과 크게 다를 바 없다는 경우들도 많다는 점은 동의합니다.
저도 많이 경험했으니까요. 그런데 여기에는 기장교회의 서글픈 현실이 있습니다.

진보 교단의 경우 신학현장과 목회현장이 괴리된 이원현 현상이 있고
저는 이 문제점에 대해 <화이트헤드와 새로운 민중신학>과
<기독교 대전환>에서 상세하게 다룬 바 있습니다.
특히 <화이트헤드와 새로운 민중신학>이 좀 더 상세하게 다루고 있지요.
이곳 세기연에도 제가 어딘가에 써 놓은 글이 있을 것으로 봅니다.

이어령 교수의 기독교에 대해선 왜 그런지를 따로 토론의 글로 올려주시면
저역시 그에 대한 답변을 올려놓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님과 달리 이 분의 글을 읽고 심하게 실망했던지라...^^;;

그리고 제가 천재라는 얘기는 어디서 들으셨는지 모르지만, 잘못된 얘기일 것입니다.
소문이란 게 으례히 과장 왜곡이 있듯이, 저와 직접 얘기해보시면 아실테지만
저는 천재나 그런 사람은 전혀 못된답니다. 공부성적도 그렇게 썩 신통치도 못했구요.
가난의 경우 그것은 지금도 아마도 평생을 벗하며 싸워야 할 지도 모르겠군요.

신학을 공부하시는 분이시니 저 역시 반가운 마음입니다.
하지만 님에게 가르침을 줄 만한 그런 사람은 아직 못된답니다.
저도 여전히 더 많이 배워야 하는 사람일 뿐입니다. 평생을 그래야 할테죠.

배움도 어차피 상호 배움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기에
구체적이고 분명한 정합적인 근거만 있다면야 언제든지 함께
건강한 토론으로서 나누기를 희망합니다.

감사합니다.

삼손 (12-11-05 07:10)
 
선생님 감사합니다. 제가 많이 잘 모르는 사람인데 이렇게 긴 답변을 해주시고 여러면에서
자세히 말씀해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저도 개인적인 의견이라서 특별히 무엇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제가 생각하는 것이 그렇다는 것이지 선생님의 의견에 반론을 제기하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늘 건강하십시요

    
미선 (12-11-05 13:53)
 
별말씀을요. 저역시 감사드리며, 님도 건강하시길 바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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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 기존 진보 기독교인들의 <생명평화> 담론에 반대한다! (업그레이드판) (8) 미선이 493 02-17
132 기존 진보 기독교계의 ‘생명평화' 담론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미선이 236 02-10
131 영혼구원의 강조에서 <총체적인 생명구원의 강조>로 (4) 미선이 272 02-05
130 성서문자주의 또는 성서무오설 신앙보다 더 뿌리 깊은 고질병은? (9) 미선이 684 02-02
129 죄의식의 종교에서 <이웃과 함께 성찰하는 종교>로 미선이 267 02-01
128 수직적 구조의 교회에서 <수평적 구조의 교회>로 (2) 미선이 351 01-21
127 서구식 목회문화가 아닌 <우리식 목회문화>로 미선이 303 01-21
126 과정신학에 대한 비판과 민중신학의 신 이해 접맥 미선이 485 01-13
125 ★ 예언 (1) 미선이 602 12-24
124 ♣ 새로운 기독교 신학의 인간론 (4) 미선이 438 12-19
123 ♣ 새로운 기독교 신학의 인간론 (3) (4) 미선이 499 12-12
122 ♣ 새로운 기독교 신학의 인간론 (2) (10) 미선이 702 12-05
121 새로운 기독교의 시간관, 태초와 종말로서의 시간관을 거부한다! (4) 미선이 590 12-01
120 ♣ 새로운 기독교 신학의 인간론 (1) 미선이 689 11-30
119 [예수운동 예배 견본] 새로운 기독교의 <예수운동 예배>를 위하여 미선이 722 11-28
118 숭배하는 예배에서 <닮으려는 예배>로 (1) 미선이 705 11-19
117 거꾸로 흘렀던 감리교 역사, 바로 세우기엔 아직 멀었나 미선이 596 11-10
116 <새로운 기독교>를 소개하는 전체 안내 링크글 (계속 업데이트 예정) 관리자 1937 11-03
115 [논평] 봉은사 땅밟기 추태, 성경 '문자주의' 그 야만의 역사 넘어서야 (1) 관리자 761 10-29
114 기존의 진보 기독교와 새로운 기독교 운동 (1) 미선이 605 10-22
113 1세대 민중신학자 안병무의 미완의 작업과 기존 민중신학의 과제 미선이 579 10-19
112 [새기운 성명] 4대강 사업 관련, 문정현 신부의 정진석 추기경 비판을 지지한다 관리자 557 10-19
111 스퐁, "스티븐 호킹과 유신론/인격신의 죽음" (작은불꽃님 역) 관리자 821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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