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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⑥ 문자적 성경해석에서 <사건적 성경해석>으로 (2)    
  글쓴이 : 정강길 날 짜 : 06-06-14 12:30 조회(40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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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환기의 한국 기독교, 바뀌어야 산다! (16)
⑥ 문자적 성경해석에서 <사건적 성경해석>으로 (2)

 

정강길 minjung21@paran.com


 
 
1. 21세기 기독교와 한국 기독교의 위기
2. 21세기 기독교 변혁을 위한 12가지 패러다임 대전환
   ※ 관념적 이원론에서 <현실적 관계론>으로
   ① '무조건 믿어라'의 기독교에서 <깨달음의 기독교>로
   ② 이웃종교에 배타적인 기독교에서 <열린 기독교>로
   ③ 가부장적 기독교에서 <모성애적 기독교>로
   ④ 초월신론에서 <범재신론>으로
   ⑤ 교리적 예수에서 <역사적 예수>로
   ⑥ 문자적 성서해석에서 <사건적 성서해석>으로
   ⑦ 숭배하는 예배에서 <닮으려는 예배>로
   ⑧ 서구식 목회문화가 아닌 <한국식 목회문화>로
   ⑨ 수직적 구조의 교회에서 <수평적 구조의 교회>로
   ⑩ 죄의식의 종교에서 <이웃과 함께 성찰하는 종교>로
   ⑪ 영혼구원의 강조에서 <총체적인 인간구원의 강조>로
   ⑫ 저 세상이 아닌 <이 땅에서의 하나님 나라 운동>으로
3. 오늘날의 선교 대상은 기독교 그 자신부터
4. 나오며


우리가 알던 성경은 실제론 교리의 시녀였을 뿐

보수 근본주의 성경 해석에는 이른바 5대 전제가 있다.
1. 성서의 축자영감설
2.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3.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
4.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
5. 그리스도의 재림


이는 이들이 읽는 성경의 전제이자 결론이다. 이것을 벗어나면 결코 안된다. 우리가 예배시간에 사용하는 <사도신경>이나 혹은 C.C.C 동아리 회원들이 그토록 들고 다니며 전파하는 『사영리』는 바로 위와 같은 기독교 전통 교리들에 대한 축약적 설명문들이다.

오늘날 기존 기독교인들의 대부분이 성경을 어떻게 읽고 있는지를 알아보자. 우리는 니케아 신조였던 <사도신경>을 지금도 매주 주일마다 예배당에서 암송할 것이다. ‘신앙고백’이랍시며 말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라.

오늘날의 한국교회가 성경에 대해 해석하고 논의하는 언급들은 거의 대부분이 이 사도신경이나 혹은 '사영리'의 의미 범주들을 벗어나지 않는다. 앞서 말한 보수 근본주의 5대 강령들은 암묵적으로 이미 성경에 내포되어 있다고 보는 실정이다. 기독교 전통이란 사실 저러한 교리들을 오로지 지키고 수호하고자 하는 폐쇄적 전통일 뿐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내가 성경을 읽는다고 해도 실은 성경 그 자체를 투명하게 만났던 것이 아니라, 성경을 읽고 나서도 내가 미리 전제하고 있었던 저 전통 교리들에 대한 <재확인 작업>밖에 안된다는 충격적 결론이 나올 수 있다. 손오공이 설쳐봐야 부처님 손바닥 안에 있었듯이, 한국교인들이 열심히 성경 읽는다고 난리부르스 쳐봐야 결국은 전통 교리들 안에서 맴돌 뿐이다.
 
솔직히 한국교인들 가운데 이점을 제대로 인지하고서 성경을 읽는 사람은 몇 되지 않을 것으로 본다. 이것은 이미 우리 가운데 <무의식적 전제>로서도 깊이 박혀 있기 때문이다. 성경을 아무리 골백번 읽어도 의문을 가지지 못한다(혹시 노파심에서 얘기하지만 그렇다고 성경 읽지 말란 얘긴 결코 아님을 말해둠!). 그저 “아멘 주시옵소서”라는 식이 될 뿐이다.

성경이 교리(dogma)의 시녀에 불과하다는 얘기는 바로 이 점에서다. 대부분의 한국 교인들이 제아무리 성경을 지지고 볶고 한 대도 보수 근본주의가 쳐놓은 저러한 교리들의 그물망을 벗어나진 않는다. 그 교리의 범주를 벗어나지만 않는다면 저들은 안심인 것이다. 따라서 저들이 그토록 수호하고자 하는 그 전통의 실체란 놀랍게도 <성경>이 아니라 <교리>였던 것이다.

소위 복음주의 진영들 역시 적어도 저러한 전통 교리들에 어쨌든 기반한 채로 역사와 사회 정치 경제 문제들에 관심을 가지겠다는 진영에 가깝다. 언젠가 자세히 말하겠지만, 진정한 우리의 전통은 교리가 아니라 진리를 추구하는 태도(attitude)여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 어떤 전통도 '오류'와 '비극'에 선행할 순 없다.

만일 <성경 대 인간> 사이에 저러한 보수 근본주의 교리들 없이 그냥 성경 그 자체를 투명하게 대한다고 생각해보라. 그럴 경우 동정녀 탄생을 비롯한 성경의 온갖 기적들은 솔직히 믿기 힘들다고 보는 태도들이야말로 오히려 현대인들에게는 더 자연스러운 현상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수 근본주의자들은 오히려 죄다 역사적 사실이라며 확고하게 믿고 있다. 만일 동정녀 탄생 같은 성경에 쓰인 초자연적 기적들이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고 볼 경우,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불경죄를 저지르는 것이 되는가?

성경은 언제나 열려있는 책

혹시 성경이 사도신경 혹은 저 다섯 교리로만 해석되어진다고 생각하는가? 나의 대답은 단연 “아니다!”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성경에 대해 그 어떤 해석의 범주나 한계를 그어 놓을 순 없다. 성경은 기존 교회들의 그 교리마저도 넘어선다. 성경은 사도신경 혹은 보수 근본주의의 5대 강령식으로 말고도 얼마든지 다른 식으로도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꿰뚫어진다.

예컨대, 진보 진영에서 곧잘 해석하는 <민중해방 전통>이 바로 그것이다(이점에서 나는 들꽃향린교회 김경호 목사님의 <성서학당 코스>를 적극 추천하는 바이다(http://hyanglin.net). '80주 코스'로서 성경 한 권 전체를 통독할 수 있고, 신구약 전체를 처음부터 끝까지 자세하게 공부해 볼 수 있다. 내가 보기엔 시중의 웬만한 성경공부 교재들보다는 훨씬 낫다고 본다. 네비게이토 성경교재? 옥한흠 목사의 제자훈련? 웃기지 마시라!!).

이러한 해석의 눈으로 성경을 볼 경우, 위와 같은 저 교리들은 그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부차적 사안들일 따름이다(참고로 나 자신은 진보에서 곧잘 수행하는 ‘민중해방 전통’ 역시 성경해석에 있어 기초 명제로서 미리 전제되는 것을 거부하는 입장임을 말해둔다. 아마도 이런 얘긴 진보적 기독교인들이 듣기엔 유감스럽거나 아이러니하겠지만 말이다. 기회가 되면 자세한 얘길 할 것이다).

혹시 잘 알려진 진보적인 교회들을 가보면 나타나는 현상들 중의 하나는 대체로 예배시간에 사도신경을 쓰지 않고 자기 교회의 주체적 신앙고백으로 대체하고 있다는 점은 알고 있는가. 사도신경에는 역사적 예수의 삶이 고스란히 빠져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은 콘스탄틴 황제와 관련하여 니케아 공회의에 대한 배경에 정치적 암투와 권력이 스며들어 있다는 점에서도 비판된다. 물론 보수 근본주의자들은 그래도 여전히 거기엔 하나님의 섭리가 들어가 있다고 우길 테지만.
 
 
   
▲ 우리가 성경을 아무리 백번 넘게 읽어도 자기자신의 <해석학적 렌즈>가 편협한 교리적 전통에만 머문다면 성경은 언제나 <닫힌책>이 될 뿐이다.


성경은 열린 책이다. 어느 한 부분으로서 범주를 그어놓을 수도 없고 한계를 지어놓을 수도 없다. 언젠가 역사적 예수 연구의 원칙에서도 피력한 바 있듯이, 적어도 올바른 성경 해석은 그동안 발견된 데이터들과 축적된 학문적 성과들에 대한 <정합적인 설명력>과 동시에 이를 유지하면서 오늘날의 상황에서 운신할 수 있는 <가능한의 유용성>이 바로 나 자신이 수용하는 해석학적 원칙의 양대 기둥이다.

어차피 이에 대한 얘기는 대안적 모색을 얘기하는 다음 장에서 자세하게 거론될 것이다. 먼저 역사적으로 수용되어 왔던 성경관에 대해 대략적으로 개관해보자.

알레고리적 성서해석

오래전부터 성서는 거룩한 책이라는 전통 때문에 의심(같은 말도 ‘의심’이라고 하면 웬지 부정적으로 느껴지지만, ‘의문’이라고 표현하면 다소 온건한 느낌으로 여겨진다)이란 게 허용되지 않았다. 예컨대, 애초 구약성서를 기독교가 받아들였을 때도 모세오경의 모세저작설에 대해선 확고한 전통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이상한 구절들-예컨대 모세의 죽음 기사나 창14:14 같이 모세 시대엔 없던 지명 같은 것들-이 눈에 뜨이기 시작했었고, 차츰씩 모세저작설에 의문을 제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중세 시대에는 라틴어 성경이 있었지만 이것은 일반 대중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고 스콜라 교부들이나 몇몇 상위의 성직자들에게만 제한적으로 통용되었을 뿐이다. 모든 것은 교회권력이라는 교권(敎權)의 독점 하에 있었고, 라틴어 성경을 몰랐던 일반 대중들은 그저 윗분들이 성경에 대해 어쩌구저쩌구 하면 대체로 주는 대로 받아먹기만 하는 그런 식이었다.

이 시기에는 <알레고리적>allegorical 성서해석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이것은 다분히 주관적이고 은유적인 성서해석에 가깝다. 예컨대, 우리가 잘 아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강도 만나 쓰러져 있는 사람은 죄의 결과로 그렇게 된 가사상태의 인류이며, 선한 사마리아인은 예수이고, 그가 다쳐서 쓰러진 사람에게 기름을 부은 것은 세례를 베푼 것이고, 그가 데리고 간 여관은 교회를 뜻하는 것이다”라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알레고리적 성경해석은 다분히 본문에 대한 역사적 맥락과 이와 관련된 구체적인 자료에 따른 치밀한 근거가 있어서라기보다 그저 교회 지도자들의 입맛에 맞는 식으로 전락되기 쉬운, 다소 주관적인 성경해석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치명적인 난점이 있다. 그럴 경우 일반 신자들은 그것이 곧바로 하나님의 말씀인양 성경에서 말하는 지침인 줄로 여기는 것이다. 여기서는 교권이 매우 크게 작용된다.

이러한 성경해석의 성향은 어떤 면에서 오늘날까지도 누구에게나 발견된다고 볼 수 있겠는데, 특히 보수적인 목회자들 가운데는 성경을 그런 식으로 해석하면서 이를 <성령에 따른 성서해석>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성경해석이 옳음을 정당화시키는 것이다. 만일 적어도 맥락과 축적된 데이터들을 무시하는 처사의 성경해석이라면 이는 매우 기만적이고 독단적인 성경해석이 되기 십상이라고 하겠다.

만일 자신의 성경해석이 제아무리 <성령에 따른 성서해석>이라고 내세우더라도 이것이 그 <자신의 주관적 성경해석>과는 서로 어떻게 차이가 나고 명확하게 구분되는지에 대해선 분명한 근거와 별 다른 언급이 없다. 즉 냉정하게 말한다면, 성경의 여러 본문들에 대하여 다양한 은유들을 사용하여 해석하지만 그 실상은 결국 자기 입맛에 맞게끔 갖다 붙일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알레고리적 성경해석이 때로는 유용할 수도 있겠지만, 자칫 성경 해석자의 선입견이나 편견마저 깃든 그 주관성에도 함몰될 위험이 있다는 사실 또한 결코 잊어선 안될 것이다.

16세기 프로테스탄트 신학자들이 말한 '솔라 스크립투라'의 의미

   
▲'오직 성서만으로'라는 말은 성서무오설과 무관하다. 오히려 사실상 중세 교권에 대항하기 위해, 진정한 권위는 교권에 있지 않고 오직 성서에 있다는 점을 말한 것이다.
중세기가 지나고 인문학의 부흥과 함께 인쇄술이 발달하면서 루터는 고고한 언어로 쓰였던 라틴어 성경을 쉬운 독일어로 번역하여 대중들이 잘 읽게끔 하였다. 사실 이점은 매우 높이 살만하다. 흔히 얘기하듯 16세기 종교개혁(나는 이 사건을 ‘종교분파’ 사건으로 보는 입장이지만 여기선 편의상 이렇게 씀)의 모토는 <솔라 스크립투라>sola scriptura 였다. 즉, “오직 성서로만”입장인 것이다.

혹자는 이 말이 축자영감설 혹은 성서무오설을 지지해주는 말로 생각하는데 그것은 오히려 심각한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오직 성서만으로'라는 이 말은 성서에 대한 축자영감설 지지라기보다 사실상 중세 교권에 대항하기 위해, 진정한 권위는 교권에 있지 않고 오직 성서에 있다는 점을 말한 것 이었기 때문이다.

즉, "오직 성서만"이라는 표현의 역사적인 본래 자리가 중세 교권에 대한 저항적 의미로서 쓰였다는 점에 그 일차적 진의가 있다는 사실이다(이에 대한 언급은 대구성서 아카데미[http://dabia.kehc.org]의 정용섭 목사님께서도 말씀한 바가 있기에 나로선 오히려 그분의 글을 권하고 싶다). 이러한 맥락을 고려치도 않고서 솔라 스크립투라라는 말이 성서의 축자영감설을 마냥 지지해주는 표현으로서 생각한다면 크나큰 착각임을 알아야 한다.

솔라 스크립투라의 맥락은 당시 부당한 교회 권력에 대한 프로테스탄트 신학자들의 저항성을 담고 있다. 생각해보라. 만일 루터가 축자영감설이나 성서무오설을 지지했다면, 야고보서를 두고 “그 따위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매도할 이유도 없잖은가. 또한 루터는 요한계시록 같은 건 아예 성서에서 빼야 한다고까지 주장했던 자였다.
 
16세기 종교개혁가들은 성경 연구에 있어 적어도 인간 이성의 사용을 불필요한 것으로서 보진 않았었다. 성경해석의 역사에서 인간 이성에 대한 적대감이 명백하게 나타났던 것은 '17세기 개신교 정통주의 시대'에 이르러서다. 다시 말하지만, "오직 성서만"이라는 그 의미는 부당한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서 쓰였다는 점에 그 본래의 맥락적 진의가 있다. 진정한 권위는 성서 안에서부터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근대적 성서관인 역사비평학의 전개와 교회전통의 분열

다 알겠지만 성경의 권위가 본격적으로 의심받고 흔들리게 된 것은 르네상스 이후의 근대에 들어서다. 16세기 이후에 성경은 여러 언어로의 번역과 인쇄술의 발달로 인해 본격적으로 대중들 속으로 들어갔지만 그래도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었는데, 그것은 희한하게도 성서에 대한 해석권 만큼은 여전히 교계지도자들이 쥐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너희들이 성경을 읽어도 이렇게 해석해야 옳고 바른 성경이 된다는 식으로 강권되는 것이다. 교회의 해석적 전통은 매우 특별난 것으로 여전히 교회 안에서는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반면에 근대 이성주의자들은 오히려 성서를 이성으로 비판해버림으로써 성서신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럴 경우 크게 보면 근대에서 성서를 대하는 입장은 뚜렷이 나눠지게 된다.

근대 학문의 발달과 함께 <대학을 중심>으로 전개된 성서신학의 발전은 매우 자유롭고 개방적인 신학적 전개로 나아갔다면, <교회 중심>의 보수 근본주의자들은 여전히 축자영감설을 내세움으로서 아예 성서비평학으로부터 문을 닫아버리고, 여전히 전통 교리들을 고수하는 방향으로 나갔었다.

기독교 신학의 역사에서 역사비평학의 등장은 매우 잊을 수 없는 것이었다. 이른바 신성시되었던 경전인 성서에 인간 이성의 날카로운 메스를 본격적으로 들이대었던 것이다. 그럼으로써 학자들은 기존 교회 전통의 권위와 해석에 아랑곳없이 자유롭게 학문을 탐구하고 연구하는 분위기를 만들어 놓았다. 이것은 성서 역사비평학의 매우 강력한 장점이었다.

성서의 역사비평학은 이른바 근대 계몽주의 물결을 타고 <자유주의 신학>liberal theology의 물결을 형성하였다. 솔직히 거간의 보수 교회의 입장에서 본다면 근대의 역사비평학자들이 성서를 대하는 입장은 매우 파격적인 것이었다. 종교 경전이라는 성경이 알고 보니까 오랜 기간 동안의 수많은 첨삭과 편집 그리고 역사적 사실이 아닌 신화나 기적들이 담겨 있다고 했을 때 교회 전통으로서는 아연질색하며 받아들이기 힘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잘 알다시피 근대 학문의 뚜렷한 특징은 인간 이성에 대한 낙관적 신뢰와 그에 따른 계몽성이다. 근대 합리주의는 바로 그런 점에서 장점과 단점을 함께 공유하고 있었다. 장점은 교회 전통의 권위에서 벗어나 그동안 교회가 여지껏 알지 못했던 성경에 대한 편집과정의 베일들이 하나둘씩 벗겨짐으로써 성서학에 대한 연구가 더욱 정밀해졌고 매우 엄격해졌다는 점이다.

진보적 학풍의 신학교에선 흔히 배우는 구약성서학의 J / E / D / P 편집 문서 얘기나 신약성서의 Q 자료의 발견들도 근대 성서비평학의 공헌이다. 역사적 예수에 대한 학문적 탐구도 근대의 성서비평학에서 촉발되었다. 그런 점에서 성서비평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한 채로 성경 본문의 뜻이 어쩌구저쩌구 함부로 말하기도 힘들어졌다고도 볼 수 있겠다. 물론 이러한 성서의 역사비평학적 성과들을 무시한다면야 다른 얘기가 되겠지만.

반면에 단점은 앞서 말했듯, 교회 전통들과는 불가피하게 갈라설 수밖에 없었다는 점에 있었다. 사실 역사비평적으로 성경을 거론한다는 것은 기존 교회 입장에선 볼 때 매우 골치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크게는 종교적 경전으로서의 가치가 땅바닥에 떨어지게 된 셈이라 교회에서 떠받드는 성경이 결국은 인간의 책에 불과한 것이 되어버렸기에 당연히 교회와는 화해불가능 했다. 당시 성경의 기적들은 있지도 않은 거짓말이라고 책을 펴냈던 근대 자유주의 성서신학자들은 교회 진영에선 거의 왕따 당하고 파문취급 당할 정도였으니.

근대 해석학의 아버지 슐라이에르마허 : 성경도 일반 해석학적 규칙에 묶여있어

근대 계몽주의 발달로 인한 성서비평학이 대학을 중심으로 발달하고 교회는 여전히 성서에 대한 특별한 해석적 전통을 고수하고 있는 가운데, 교회의 그 같은 특별한 해석적 전통에 반기를 들고서 근대 계몽주의적 정신의 해석학을 학문적으로 확립했던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근대 해석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프리드리히 슐라이에르마허(Friedrich Schleiermacher)였다.

슐라이에르마허가 보기에
성경해석자는 그 어떤 유별난 특권들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성경외의 다른 분야의 텍스트 해석자들과 마찬가지로 일련의 <해석학적 규칙>들에 묶여 있다고 보았었다. 그에게 해석학이란 “이해의 예술”(the art of understanding)이다. 오늘날 많은 다양한 학문들이 근대 세계의 토대에서 분화되어 나왔듯이, 해석학이란 분야가 일종의 하나의 학문으로서 인정받는 데에는 슐라이에르마허의 공헌이 아주 지대했었다.

그는 성경은 특별한 영감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교회 전통에 대해서 “영감에 대한 교리적 결정 그 자체도 결국은 해석에 의존한다”고 보았기 때문에 구별된 해석학적 규칙들을 적용해야 한다는 주장을 논박하는 데 상당한 정력을 쏟았다. 물론 슐라이에르마허도 신성한 책은 특별한 해석학을 요구한다는 점에는 동의하지만 그렇더라도 “특별한 것은 보편적인 것을 통해서만이 이해될 수 있다”고 보았었다. 즉, 보편적 일반화는 모든 특별한 것들의 공통부분들을 추출하는 작업이기에, 결국 그 어떤 특별한 해석학도 일반적 해석학의 토대에서 검토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슐라이에르마허의 이런 생각은 오늘날의 현대 신학계에선 어느 정도 보편화되어 있다. 아주 극단적인 보수 근본주의자들을 제외한다면, 성경해석학을 다룰 때 ‘텍스트’와 ‘텍스트를 대하는 독자의 해석’ 문제를 다루는 일반적인 철학적 해석학이라는 이 지점도 필연적으로 같이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성경해석학이 시대적 흐름들과 관련한 일반적인 해석학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로 남아있다.

그러나 슐라이에르마허 역시 근대적 한계를 지녔었다. 그에 따르면, “단어와 내용에 대한 설명 그 자체는 해석이 아니며 해석의 여러 측면들만을 제공할 뿐”이라고 했지만, 단어와 내용에 대한 설명 그 자체 역시 해석이라는 사실을 간과한다. 그는 텍스트가 생겨난 <상황>보다는 텍스트의 <의미>를 이해하고 결정하는 지점에 해석학의 출발을 두고 있는데, 상황과 의미가 이분될 수 없음을 간파한다면 이는 분명히 잘못된 시각임을 알았어야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슐라이에르마허의 몇몇 유용한 제안들은 오늘날의 해석학적 입장에도 여전히 그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는 점에선 결코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신정통주의 신학자 바르트의 성서해석학적 입장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성서관이 교회 전통과 분리된 채로 여전히 갈라서서 진행되고 있을 즈음에 20세기 들어서 칼 바르트라는 신학자가 출현하였다. 그는 당시 끔찍한 세계 대전의 참상을 통해 근대 계몽주의의 종말을 보았었고 이를 <위기>로서 읽었다. 그러한 가운데 이 바르트라는 신학자는 근대적 성서관에서 나온 역사비평학의 한계를 부르짖으며 성경이 교회전통을 회복할 것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그는 그때까지의 역사비평학적 성과들을 무시하거나 거부하진 않았다. 다만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성서를 종교사학적 관점이나 혹은 윤리나 도덕에 대한 책으로 격하시키고 있는 점에 대해선 그는 극렬하게 반대하였다. 그에 따르면, 근본적으로 성서는 인간이 아닌 하나님의 계시에 서 있는 것으로, “성서의 내용을 이루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바른 생각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바른 생각”이라고 보았었다.

그때까지의 자유주의 신학을 뛰어넘는 새로운 정통주의라는 점에서 이른바 <신정통주의> 신학자로도 불리는 바르트는 근대의 낙관적 인본주의 신학의 철저한 한계를 오로지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데우스 딕시트)는 그 계시에 귀를 기울일 것을 명시하였다. 바르트에 따르면, 진정한 성서해석은 인간학적 사유방식을 뛰어넘어, 초월적인 방식으로 우리에게 개입되는 그분의 계시에 의해서 가능하다고 보았었다. 우리가 아무리 종교사적인 접근이나 심미적 차원에서 추적해본들 그 하나님은 우리의 인식 안에 들어올 수 없다는 것이다.

바르트에게 있어 그 하나님은 전적인 타자이며, 전적인 초월자이다. 따라서 그분을 인간의 인식능력 안에서 규정하는 것은 곧 우상숭배이며, 죄라고 얘기한다. 성서는 끊임없이 우리의 문화적 인식을 뛰어넘는, 전적인 타자로서의 하나님을 통찰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인간학적인 역사비평학에 대한 한계도 같이 놓여 있다고 바르트는 보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 보수 근본주의자들에게 바르트는 여전히 '자유주의 신학자'로 오해되고 있어 매우 우스운 형국을 연출하고 있는 실정이다. 사진은 1962년 4월<타임>誌 커버인물로도 나왔던 칼 바르트.
사실 이런 얘긴 알고보면 매우 보수적인 견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 보수 근본주의자들에게 바르트는 여전히 '자유주의 신학자'로 오해되고 있어 매우 우스운 형국을 연출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 결정적인 이유는 역사비평학의 수용 여부인데, 예컨대 오늘날 예장 합동측의 총신대 신학자들은 바르트를 자유주의 신학자로 여기면서 싫어하는 맥락이 있는 반면에, 예장 통합측의 장신대의 경우는 바르트에 매우 우호적인 입장에 서 있다. 혹자는 장신대의 복음주의적 신학 입장을 아예 ‘신정통주의’라고 못박기까지 한다. 그렇지만 이런 세부적 사정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바르트는 글자와 텍스트의 정신을 동일시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하여 문자주의나 성경주의(Biblicism)를 비난한다. 성경은 무오하지 않다. 그것은 인간의 책이지만 하나님의 초월적인 말씀을 증거하는 책이다. 그래서 바르트는 인간의 말인 성경을 통한 하나님의 계시는 결국 그 자체로서 말해지고 들려지도록 해야 한다고 보았었다. 계시 앞에 인간은 기다릴 뿐이고 그러한 성경에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반응은 성경에 <순종>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기꺼이 성경이 자신들을 해석하도록 할 것과 성령이 본문을 통해 독자에 대해 판단의 말씀을 하도록 해야 한다고 보았었다. 그렇기에 바르트의 해석학은 <계시의 해석학>이라고 불릴 순 있겠지만 적어도 의미작용의 해석학은 아니었다. 그러한 계시의 해석학이란 매우 구체적이지 않은, 추상적이고도 모호한 언급으로서 여전히 남아 있다.

계시에 대한 기다림 그리고 성경이 스스로 해석하도록 해야 한다는 얘기나 성령에 의해 판단되어야 한다는 얘기들은 결국 '하나님은 하나님이다'라는 식의 동의반복일 뿐이잖은가. 결정적으로는 바르트가 성경 해석에 적용하는 이 같은 공리들은 모든 해석에 미리 전제되어 있는 것으로 보았었다. 즉, 적어도 이 부분만큼은 모든 인간적 비판들이 불허되는 면제 영역으로 남아있어야 한다는 얘기가 된다.

그런데도 바르트의 그 같은 얘기는 그 자신도 우리에게 권고하고 있는 바다. 따라서 바르트의 해석학적 입장 그 자체에 대한 비평적 성찰 없이 그의 해석학적 공리들을 받아들일 경우, 그것은 이미 너무 많은 것을 결정하는 데 관여한다는 점에서 매우 우려되는 것이라고 하겠다. 내 개인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바르트는 <절충적인 보수주의자>로 볼 뿐이다.
 
인간 인식의 한계를 지적한 점은 나로서도 동의하지만, 그렇다면 성서에 담긴 하나님의 계시를 우리가 어떻게 접근하고 발견할 수 있느냐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얘길 안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에 대한 그의 답변은 인간의 접근 가능성은 봉쇄되기에 그저 “기다려라”, “순종하라” 등등 매우 추상적인 대답으로 인도되고 있다. 흔히 그의 신학은 <기다림의 신학>이라고도 불려진다.

굳이 거론해본다면, 바르트는 인간 인식의 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성서의 증언에 기대어 이 하나님에 대해 “단지 몇 마디로 더듬거리고 암시하고 약속할 수 있을 뿐”이라면서, <삼위일체론적 시각>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삼위일체론적 시각이란 게 앞서 지적한 것처럼 매우 모호하고 추상적인 언술인데, 도대체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건 거의 없고, 결국은 이러한 시각이 오히려 -바르트가 의도했든 안했든 간에- 기독교 전통이라는 근본주의적 교리로 귀결되는 사태를 낳고 있다는 점은 이 신학의 분명한 한계를 보여주는 시사점이라고 하겠다.
 
지하다시피 바르트의 해석학적 입장은 앞서의 슐라에르마허의 입장을 거부한다. 그는 신학적 해석학의 특별함을 수호하는데 자신을 제한시켰다. 바르트의 이런 맹점은 나중에 슐라이에르마허를 비판적으로 계승하고 또한 하이데거의 실존주의를 그 자신의 신학적 작업에 수용했던 불트만(R. Bultmann)의 해석학적 입장과도 논쟁을 벌이기에 이르렀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신의 제자들마저 포함하여 이후의 많은 학자들에게서도 공격을 받았었다.
 
또한 이와 관련하여 바르트 신학의 초월적 타자로서의 하나님 이해에도 치명적 한계가 있다. 하지만 여기서 바르트 신학에 대해 일일이 전반적인 평가를 하기엔 턱없기에, 나로선 언젠가 기회가 되면 본격적인 논의를 할 날도 오지 않을까 싶다. 바르트의 경우는 진보 진영의 신학계에서도 그 영향이 크게 남아있다. 그의 신학은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이 뒤섞여 혼재되어 있으며 우리는 이를 매우 정밀하게 구분할 필요가 있다고 여겨진다.

물론 메첸, 바빙크, 벌코프 등등 이러한 꼴통 보수 근본주의 신학자들에 비하면야 바르트는 그나마 건강한 보수 쪽에 속한다고 하겠다(참고로 성경해석학의 역사에서 살펴야 할 주요 신학자들-예컨대 불트만, 마일렌버그, B.S.차일즈 등등-은 몇몇 더 있을 수 있겠지만, 너무 분량들이 많아지는 터라 불가피하게 한정했음을 밝혀두는 바이다).

포스트모던 시대 : 상호-텍스트적 성서해석

그런데 20세기 후반에 들어서부터 본격적으로 불어닥친 포스트모던 시대에서 성경이 갖는 권위와 해석은 이제 더이상 교회전통과 양립하기가 더욱 힘들어졌다. 근대가 말한 이성 중심은 해체되고 <탈중심화로서의 성경해석>이 유용성을 띠게 되었다. 포스트모던 시대란 그동안 중심을 차지해왔던 본문Text이 아닌, 소외되고 주변부로 밀려나 있었던 모든 각주들이 들끓으며 용솟음치는 시대이다. 성경 본문이 갖는 텍스트의 권위란 그저 성경 담론의 폭력일 뿐이다.
 
소쉬르(Saussure)의 언어학에서부터 푸코(M. Foucault)의 계보학과 데리다(J. Derrida)의 <차연>에 이르러 내려진 결론은, 본문 밖에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텍스트들은 서로의 차이들에 의해 동일성을 유지할 따름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한 텍스트를 이해하는 것은 그것이 다른 텍스트들과 구별되기 때문이라는 얘기다. 그래서 포스트모던 사상가들은 해석의 <상호-본문적 성격>을 강조하는데, 이 같은 작업의 수행은 기존 텍스트가 지닌 그 권위의 해체에 곧잘 맞춰져 있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해체>란 용어는 우리 시대의 유행어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전략은 기본적으로 이성 중심의 근대 합리주의가 가졌던 근대성의 해체에 맞춰져 있다. 이러한 시대에서 성경을 읽는다는 것과 다른 책들을 읽는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별다른 차이를 갖지 않는다. 이들은 끊임없이 근대성의 횡포와 폭력에 대해 공격한다.

그럼으로써 포스트모던이 수행하는 그 적대적 대상들에 대한 최종 목적은 알다시피 <로고스 중심주의>의 종말이며, 진리 담론의 폐기에 있다. 진리란 권력과 결탁된 것으로 결국 그것은 '지식의 계보학'으로서 유용성을 가질 뿐이다. 이로써 보편에 대한 거대 담론은 축소되고 모든 미시적 담론의 영역 확보를 위한 정치적 투쟁들이 만개된다.

포스트모던이 지향하는 성경해석은 <상호-텍스트적 성경 이해>로 불릴 수 있다. 여기서 <상호-텍스트>란, 기존 기독교에선 성경본문이 권위를 갖는 텍스트라고 가르쳐왔지만, 실은 오늘의 독자들이 느끼는 바들, 지금 내가 처한 삶의 자리와 상황 역시 중요한 텍스트라는 것이다. 언젠가 현경 교수는 기존의 성경 담론에 대해 맞서 “내가 바로 텍스트다!” 라고 외친 적이 있다.

이렇듯이 성경이 갖는 텍스트와 성경을 읽는 ‘나’라는 독자의 독해는 중요성에 있어 근본적인 차이를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성경 해석은 오로지 그러한 상호관계적 의미를 고찰함으로써 독해될 뿐이다. 그리고 이것은 오히려 기존의 <성경 중심주의>를 해체시킨다는 점에서 더욱 급진적으로 들리기도 한다. 경전성은 폭력성일 뿐이다. 

그리고 이점에서 성경에 대한 모든 해석들은 기본적으로 상대화되고, 의미를 둘러싼 다양한 해석들 간의 각축들은 그저 지적 세력들의 권력 확보전으로 전개된다. 사실 포스트모던은 근대 합리주의라는 모던에 대한 반발일 수도 있겠지만, 어떤 의미에서 프리모던(free-modern)에도 가까운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특히 오늘날의 유럽교회가 거의 사람들이 찾지 않을 만큼 텅텅 비어 있는 현실에 이르게 된 것이 그동안 유럽 대륙에 불었던 근대 이성주의와 이에 대한 반동인 포스트모던을 거친 열병과도 무관하진 않다고 보고 있다. 기독교 전통에 대한 냉소적 태도는 기본적 자세에 가깝다.

내가 볼 때, 포스트모던 사상의 치명성은 사실 합리주의의 근거를 제대로 못찾고 이를 아예 내다버린 점에 있다고 본다. 흡사 목욕물에 담긴 아기까지 버리듯이 말이다. 결국 포스트모던의 자리 또한 설득의 진리보다는 힘의 권력에 기반될 뿐이다. 이는 매우 이율배반적인 것이다. 물론 비록 근대 합리주의가 독단이었고 진리 담론이 갖는 폭력이었으며, 그렇기에 역으로 모든 소외된 주변부들에 관심을 유도해야 한다는 그 유용한 폭로와 설정만큼은 포스트모던의 결정적 공헌이겠지만 말이다. 포스트모던 이후의 대안적 얘기는 다음 장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하게 될 것이다.

(참고로 혹자는 케빈 J. 밴후저의 포스트모던 시대의 성경해석학을 대안이랍시고 거론하지만, 나는 그 책이 지향하는 바에 동의하지 않는다. 대체로 밴후저는 기존의 포스트모던 사상가들에 대한 요약들은 잘해놨다고 할 순 있겠지만, 정작 그 자신이 대안이라고 제시한 해석학적 렌즈는 포스트모던이 그토록 반발했던 근대로 또다시 회귀하는 것에 가깝다. 왜냐하면 그가 결국 선택한 해석학적 렌즈는 <삼위일체적 해석학>이라는 것으로 칸트식처럼 성경 해석의 선험적 조건으로서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어떤 면에서 앞서 말한 바르트의 '삼위일체론적 접근'을 떠올리게도 한다. 적어도 밴후저가 보수 근본주의자는 아니라고 해도 이를 정당하게 넘어서고 있진 않아 보인다. 그 역시 자신만의 렌즈에는 선험적 권위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포스트모던 이후의 21세기 새로운 패러다임의 성경 해석은?

일단 각 시대별로 일별해본다.

시대별

중세

근대
(대립과 분화)

후기 근대(현대)

그럼 이제는?

각각의
성경해석
입장들

엄격한 전통과
권위에 따른 
성경무오설→

성서비평학

성서무오설→

신정통주의 / 구조주의 /
상호텍스트적 성경해석..
→성서무오설→

적어도 앞서 시도된
해석학적 입장들에 대한
분명한 고찰과 인지는
있어야 할 것! 그리고선?



여기서 한 가지 알아 둘 것은, 보수 근본주의자들의 성경 해석은 성경의 역사비평을 터부시하기에 철저히 근대 성서비평학과는 분화된 길을 걸어갔다는 점이다. 성경무오설(혹은 축자영감설) 지지는 보수 근본주의자들 그룹에 들기 위한 맹세적 서약이자 필수 조건일 뿐이다. 즉, 이들은 중세→근대→현대를 거쳐 왔으면서도 여전히 <전근대적>인 중세적 입장을 고수하고 있을 뿐이다.

보수 근본주의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 변하면 안되는 것이다. 적어도 폐쇄적으로라도 지켜내어야 신앙을 수호했다고 여기는 진영인 것이다. 이들에게 <웨스트민스트 교리>같은 것들은 기독교 전통을 공증하는 보증수표처럼 통용된다. 행여 변하면, 변절이요 배교에 해당될 뿐이다. 이들 그룹들이 타자에게는 유달리 정죄가 심한 이유도 바로 이런 점에서다.

저 도표에서 볼 때, 사실 냉정하게 말한다면 오늘날 대부분의 한국교회는 여전히 <전근대적인 중세기>에 있는 실정이다. 적어도 우리는 앞서 걸어왔던 각 시대별로 다양한 성경해석의 입장들을 어찌했든지 중요한 사안들에 대해서만큼은 명확히 짚고 소화하고서 넘어가야 하지 않겠는가. 한국교회가 수행하는 대부분의 성경공부 교육은 참으로 이 교육이 제대로 되어 있지 못하다.

자기 교단의 입장과 다르다고 해서 제대로 정당하게 알아보지도 않고 배움의 시작부터 배제하면 안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총신대 같은 보수 신학교들은 근본적으로 다양한 배움의 기회마저 그 교육과정에서부터 박탈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이들은 자신들의 신학적 입장을 <개혁주의> 신학라고 이름 붙이는데 그런 식의 용어표현은 내가 볼 때 기만에 지나지 않는다. 아니라면 당장 교육 커리부터나 개혁하든지―). 

적어도 몽땅 제대로 공부한 사람이라면, 그 결과적 입장에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보며, 적어도 거치지도 않고 어느 한 쪽의 입장에만 서 있다면 정작 자신의 입장에 대한 설득력은 매우 약할 것이라고 본다. 우리 앞에 놓인 온갖 다양성들을 일단은 정당하게 섭렵한다는 것은 (성서)진리를 탐구함에 있어 기본적 태도다. 그런 후에 섭렵된 다양성들 간의 충돌(모순)들을 점검하고 고찰하여 궁극적으로는 <설득력 있는 일관성>으로서 꿰어낼 때, 비로소 진정한 깊이를 확보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혹자는 보수 근본주의 학자들 가운데는 몽땅 이를 거쳤는데도 결국은 보수 근본주의로 귀결되었다는 사람이 있는데, 이것은 매우 웃기는 얘기밖에 안된다. 그것은 자기 안의 모순을 제대로 보질 못했거나 아니면 억지 논리를 폈다는 얘기일 뿐이다. 왜냐하면 사실상 각 시대별로 태동했던 새로운 성서해석 입장들은 대부분이 보수 근본주의가 지녔던 성서해석의 한계들에서 촉발되거나 관련되고 있기 때문이다. 

   
▲ 오늘날 대부분의 한국교회는 지금까지의 다양한 해석학적 입장들을 정당하게 살펴봄도 없이 늘상 교리 수호를 외치는 지경이라 여전히 <전근대적인 중세기>에 있는 실정이라 말할 수 있다.


 

그것은 결코 자기 안의 모순을 제대로 보질 못하거나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채 억지논리를 피는 경우일 뿐이다. 첨단의 시대라는 21세기 오늘에도 여전히 전근대적으로 사는 이들은 부지기수다. 진정한 정합성을 지닌 탐구였다면 그것은 결코 과거로 회귀하는 법이 없다. '극복의 극복'은 누적적 과정이며 그것은 언제나 또다른 새로움일 뿐이다.

자 그렇다면 독자들은 이제 당신의 입장은 무엇인가 하고 궁금해 할 것 같다. 나로선 적어도 지금까지 즉, 중세와 근대 그리고 후기 근대(현대)마저 몽땅 꿰뚫는 <새로운 해석학적 패러다임>이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 이것은 성서무오설도 아니고 역사비평을 대안으로 삼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당연히 전통 교리로의 회귀도 아니며, 그렇다고 저마다의 다양한 해석들의 방기도 아니다.

새로운 해석학적 패러다임은 오늘날의 포스트모던 이후에도 살아남을 수 있는 <새로운 합리주의>에 기반될 따름이다.

 
(계속 이어집니다)
예수사람 (06-07-04 10:16)
 
현경 교수는 기존의 성경 담론에 대해 맞서 “내가 바로 텍스트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전적으로 맞는 말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 분의 생각을 존중한다 해도, 텍스트는 성경, 독자, 상황(과거, 현재, 하늘-영원-비시간차원) 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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