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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⑥ 문자적 성서해석에서 <사건적 성서해석>으로 (3)-'성서오류설'을 통한 해석학의 새로운 지평    
  글쓴이 : 정강길 날 짜 : 06-06-14 12:50 조회(3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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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환기의 한국 기독교, 바뀌어야 산다! (17)
⑥ 문자적 성서해석에서 <사건적 성서해석>으로 (3) : '성서오류설'을 통한 성서해석학의 새로운 지평
 

정강길 minjung21@paran.com



 
1. 21세기 기독교와 한국 기독교의 위기
2. 21세기 기독교 변혁을 위한 12가지 패러다임 대전환
   ※ 관념적 이원론에서 <현실적 관계론>으로
   ① '무조건 믿어라'의 기독교에서 <깨달음의 기독교>로
   ② 이웃종교에 배타적인 기독교에서 <열린 기독교>로
   ③ 가부장적 기독교에서 <모성애적 기독교>로
   ④ 초월신론에서 <범재신론>으로
   ⑤ 교리적 예수에서 <역사적 예수>로
   ⑥ 문자적 성서해석에서 <사건적 성서해석>으로
   ⑦ 숭배하는 예배에서 <닮으려는 예배>로
   ⑧ 서구식 목회문화가 아닌 <한국식 목회문화>로
   ⑨ 수직적 구조의 교회에서 <수평적 구조의 교회>로
   ⑩ 죄의식의 종교에서 <이웃과 함께 성찰하는 종교>로
   ⑪ 영혼구원의 강조에서 <총체적인 인간구원의 강조>로
   ⑫ 저 세상이 아닌 <이 땅에서의 하나님 나라 운동>으로
3. 오늘날의 선교 대상은 기독교 그 자신부터
4. 나오며

 
※ 이 글은 <성서오류설>로 적극 전환하는 새로운 성서해석학을 모색한 글이기에, 다소 긴 글이지만 아무쪼록 차분하게 읽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필자] 

 
합리성의 근거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인가?

근대는 철저히 이성중심의 세계였고 그럼으로써 계몽주의를 지향했다. 반면에 오늘날의 후기 근대 사회는 철저히 이성을 불신하고 회의한다. 포스트모던은 근대 세계관의 합리성이 결국은 독단과 횡포에 지나지 않음을 폭로하고 이성도 권력의 시녀에 지나지 않음을 적나라하게 까발렸다. 니체의 표현대로, 우리에겐 <진리>가 있는 게 아니라 <진리에의 의지>가 있을 뿐이라는 얘기다. 이른바 포스트모던은 근본적으로 합리성의 해체를 기획했던 바였다.

만일 이 같은 포스트모던의 기획과 발상들이 옳다면 근본적으로 우리의 진리 추구는 진리 탐구가 아닌 그저 <힘의 싸움>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정말 진리란 없는 것인가? 우리는 진리를 어떻게 파악할 수 있는가? 진리가 있다면 무엇이 진리인가? 만일 그것이 진리라면, 그것이 옳다고 말할 수 있는 그 근거는 도대체 어디로부터 나오는 것인가? 합리성의 근거는 도대체 무엇인가?

정통 기독교는 진리를 추구하는 종교라고 주장한다. 진정한 정통이라면 그것은 분명 진리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이 진리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정통이란 무엇인가? 결국은 진론드(W. G. Jeanrond)의 언급처럼, ‘무엇이 정통인가?'에 대한 정의는 일련의 일관성 있는 납득할만한 기준이 존재하느냐에 달려 있을 것이다. 모두가 납득할만한 그 기준이란 게 도대체 존재하긴 하는 것인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어떻게 우리를 납득시키고 있는가?
 
포스트모던을 넘어 <새로운 합리주의>로

포스트모던의 기획들은 분명 자기 모순적이다. 니체도 푸코도 그 자신들의 주장들의 정당성은 또 어디에서 구할 것인가? 즉, ‘이성이 권력에 오염되었다’는 주장 또는 ‘힘에의 의지가 있을 뿐’이라는 그 주장들 자체가 옳다는 점은 또 어떻게 납득시키고 증명할 수 있단 말인가? 결국 진리 논쟁이 아닌 힘의 교전들뿐이라면 상대 주장에 대한 모든 반박들은 힘으로 까부수려는 또다른 파쇼적 작태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전락될 것이다.

나는 이런 점에서 포스트모던을 단호히 반대한다. 물론 기존의 권위에 대한 참신한 도전과 다양성을 위한 기획에 대해선 참으로 반갑게 맞이할 수 있겠지만, 근본적으로는 자기모순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합리주의는 필연적으로 요구될 수밖에 없는 처지다. 그렇다면 도대체 합리성은 무엇에 근거해서 존재하고 있는 것인가?

놀랍게도 합리성은 바로 <오류>error에 근거하고 있었다(영어로는 오류에 error뿐만 아니라 errancy나 fallacy도 있다. 이때 error는 무의식중에 저지르는 실수까지도 내포한다는 점에서 포괄적이라 쓴 것뿐이다). 근대 세계관의 한계는 이성중심의 합리주의였지만 적어도 그 오류를 인정치 않았던 독단적 합리주의였다는 점에서 근대 세계관도 포스트모던세계관과 함께 다같이 한계를 가지긴 매한가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합리주의는 존재한다. 하지만 합리주의는 어리석은 유아적 존재에 지나지 않는 우리 인간에게 결코 곧바로 붙잡히지 않는 그 무엇이다. 그것은 <오류>와 이것의 문명적 사태인 <비극>tragedy이라는 잔인한 댓가를 치뤄야만 그나마 겨우 그 기회를 얻을 수나 있는 아주 혹독한 것이다. 인간이 진리를 아주 간편하고도 손쉽게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주 황홀하고도 뻔뻔스런 착각이자 놀라울만치 멍청한 교만일 뿐이다.

따라서 나의 진리관은 근본적으로 선험적이지 않고 후험적이다. 모든 선험적 전제들에 오류가능성을 열어두고 회의한다는 점에서 포스트모던의 전략을 따르지만, 그러한 시도를 통해 겪는 오류와 비극에 대한 경험들이 또다시 새로운 차원의 극복가능성도 열어준다는 점에서 잃어버린 합리주의를 다시금 새롭게 부활시키고자 한다. 이 합리주의 결코 근대 합리주의가 아닌 새로운 합리주의다.

말할 나위 없이 이제부터 얘기할 나 자신이 말하는 성경해석학은 근대 합리주의가 아닌 <새로운 합리주의>에 기반해 있다. 나는 이를 후기 근대마저 넘는 <후기합리주의>post-rationalism라고 붙여 본다(이 표현이 건축학에서도 쓰인다는 얘길 들은 바 있는데, 어떤 관련이 있는지는 모르나 여기서는 적어도 근대와 포스트모던 모두를 뛰어넘는 <새로운 합리주의>neo-rationalism라는 의미에서 사용한 것임을 말해둔다). 아마도 이 표현이 포스트구조주의자들에게는 후기합리주의라는 말자체가 어불성설이라고 생각할 지도 모르겠다. 구성(construction)이라는 합리주의와 이를 해체(deconstruction)하고 있는 해체주의가 어떻게 같이 나란히 함께 있을 수 있냐고.
 
   
▲ 화이트헤드의 사상에는 근대 세계와 후기 근대마저도 뛰어넘는 새로운 지평이 있다.
그런데 이것이 가능한 자리를 어느 한 철학자가 이미 20세기 초반부터 마련하고 있었으니 그가 바로 세상에서 가장 어렵고 난해해서 아무도 읽지 않는다는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라는 철학자다. 그에게서는 포스트구조주의 뿐만아니라 일찌감치 가다머-하버마스 논쟁에서도 드러났던 해석학의 한계마저 이미 훨씬 넘어서 있다.

그가 구축한 유기체 철학은 그 자체로도 이미 <해석학적 존재론>이다(나 자신이 지금 여기서 세세한 철학적 얘기들로 지루하게 쌓아나갈 생각은 없다. 어차피 이 지면은 결국 기독교 신학과 관련하기에 간략히만 언급할 것이다. 하지만 그에 대한 공부는 정말로 절실히 필요하다고 본다).
 
포스트모던 사상에도 알고 보면 두 가지 흐름이 있다(David R. Griffin의 분류). <해체적 포스트모던>deconstructive-postmodern과 <구성적 포스트모던>constructive-postmodern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가 아는 푸코, 데리다 쪽의 흐름들이 전자에 해당한다면, 나 자신이 지향하는 바는 바로 후자에 가까우며 그 사상적 조류의 젖줄이 바로 화이트헤드 사상에서 나왔다는 사실이다.
 
무엇보다 화이트헤드의 사상은 현대 자연과학과 경험주의에 기반하면서도 신God을 현실적 존재로서도 보는 유일한 철학사상이기도 하다. 그는 당대에 아인슈타인마저 오히려 압도하기까지도 했던 첨단의 철학자였다. 어쨌든 나는 후기구조주의마저도 뛰어넘는 새로운 해석학의 모델을 화이트헤드에게서 발견하고 이를 성경해석학에 적용코자 한다. 화이트헤드 자신이 직접 성경해석학을 거론한 적은 없기에!
 
텍스트냐? 컨텍스트냐?

알다시피, 성서학에서 텍스트(text)가 ‘성서본문’을 말한다면, 컨텍스트(context)란 이에 대한 ‘맥락’ 혹은 ‘상황’을 말한다.

흔히 말하듯, 대체로 보수적인 신앙인일수록 텍스트를 중심적으로 삼는 반면에, 진보적 신앙인들은 컨텍스트에 더 치중을 두는 면이 있다. 텍스트 중심의 해석은 대체로 교회 중심적이고 종교 지향성이 강하긴 하지만, 오늘날의 현실 상황과는 잘 안맞거나 거리가 멀게 느껴지는 치명성이 있다.

반면에 컨텍스트 중심의 성서해석은 역사적 맥락과 현실 상황을 더 중요시하기 때문에 현실적인 설득력은 있으나, 성서본문을 현실 상황에 끼워맞춘다는 인상이 짙고 그런 점에서 본문의 중요성은 퇴색되어 버리기에 실제적으로 교회신앙에선 잘 수용되기가 힘든 단점이 있다.

물론 보수-진보 할 것 없이 모두 가급적이면 경전적이고 종교적이며, 사회적이고 현실적인 성경해석을 지향하고 있다지만, 지금까지 걸어 온 대체적인 지향성의 색조로서 볼 경우, 보수측은 주로 <텍스트>에 대한 강조를, 진보측은 주로 <컨텍스트>의 대한 강조가 많은 흐름들을 차지해왔었던 게 사실이다.

자 그렇다면 우리는 성서읽기의 이 문제를 어떻게 가장 바람직하게 풀어나갈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텍스트를 통한 컨텍스트 읽기

우리는 대화를 할 때, 같은 문장의 말이나 단어라도 그 맥락에 따라서 그 의미들이 제각기 달라질 수 있음을 경험한다. 이때 서로가 서 있는 자리인 그 맥락을 파악치 못할 경우 그 말의 의미는 서로 매우 다르게 받아들여지고 그때의 대화는 뒤틀려진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은, 우리가 상대방의 생각을 직접적으로 읽을 수도 없는지라, 어차피 그러한 맥락들도 그 사람이 내뱉은 표현을 통해서만이 파악될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다.

성경의 뜻을 간파하는 것도 나는 그러한 경우와 흡사하다고 본다. 우리는 텍스트로 드러난 표현들을 통해서 결국은 그 이면의 전체 맥락을 유추하고 다시 그 맥락에 따라 텍스트의 표현들을 독해해나갈 뿐이다. 분명한 사실은 애초에 성경기자가 경험했던 그 맥락들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어야 성경 본문의 의미가 더욱 명확해질 것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이에 대한 경로들을 다음과 같이 정식화해볼 수 있다.

하나님의 계시 → 성경본문의 모체인 컨텍스트 → 텍스트(본문의 언어/문자) → 중간경로 (다양한 해석의 전승들) → 독자가 처한 삶의 컨텍스트 → 오늘 독자의 이해

결국은 앞의 과정들이 모두 더해져서 오늘날에 성경을 읽는 독자의 이해를 구성한다. 그 어떤 성경주석의 대가나 할아버지가 오더라도 어느 누구도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은 분명하게 인정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성경해석을 제대로 수행하고자 한다면, 역으로 다시 들어가서 탐구하는 과정들이 있어야 할 것이다.
   
▲ 성서탐구에 있어 나 자신이 역사 속에 있는 한, 성서와 역사를 객관화 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일종의 망상이다.

다시 말해, 독자는 독자가 처한 삶의 상황과 그 성경 본문에 대한 다양한 해석의 전승들 그리고 본문의 언어와 문자 및 그 본문인 놓인 컨텍스트에까지 온전히 깨우치고 이르러야 그나마 하나님의 계시에 접근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하지만 성서탐구에 있어 나 자신이 역사 속에 있는 한, 성서와 역사를 객관화 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일종의 망상일 것이다. 그렇지만 이 사실은 역으로 그 시원적인 출발로 나아갈 수 있도록 가능한의 모든 비평과 탐구방법들을 동원함이 마땅함을 역설적으로 지지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저마다 주장하는 성경 해석가들의 최종 주장은 결국 “그 성경본문의 본래 뜻은 이러이러하다”는 식의 언급이다. 여기서 바로 그 <본래>라는 표현의 의미에는 그 성경본문이 놓이게 된 컨텍스트에 대한 고려가 내포되어 있다. 그리고서 자신은 하나님의 계시를 통달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선 우리는 너무나도 신중하지 않으면 안된다.

인간 스스로의 한계를 시인한다면 하나님의 진리 혹은 계시에 이르는 왕도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물론 우연적인 직관적 통찰로서 하나님의 계시를 파악할 수 있는 통로와 가능성도 나는 열어두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여전히 형언하기 힘든 신비의 차원일 뿐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스스로의 한계를 인지하면서 지금 여기서 분명하게 논의될 수 있는 지점들부터 차근히 밟아 나가는 것 역시도 이전까지 미지의 신비로만 머물고 있었던 지점들을 하나하나 이해하는 작업임을 알아야 한다. 참다운 신비는 결코 이성을 거부하지 않는다. 세계 안에 합리성을 축척해나가는 학문적 진리탐구란, 곧 <직관적 통찰>과 <명료한 지성> 간의 화해작업인 것이다).

성서에 대한 역사비평학을 어떻게 볼 것인가?

따라서 해석의 수행을 위한 가능한의 모든 방법들이 동원되고 검토되어야 할 것이며, 이에 대한 분명한 인지와 적용들이 있어야 할 것이다. 솔직히 나 자신이 성서의 역사비평학을 무시하거나 폄하하는 사람들을 오히려 더 우습게 보는 이유가 다름 아니라 계시에 대한 접근으로서 이를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을 두고서 괜히 왈가왈부 하는 데에 있다.

사실상 역사비평학은 기존의 교리적 전통의 해석들을 침해하거나 벗어나곤 하기 때문에 툭하면 무시하거나 한계가 어쩌니 말한 거겠지만, 역사비평학도 결국은 계시 접근의 수단으로서 본다면 특별히 이를 겁내하거나 무시할 필요가 뭐 있겠는가. 즉, 알고 보면 역사비평학에 마음을 열지 못하는 자들의 인식 배경에는 전통 교리와 하나님의 계시를 이미 같은 것으로서 놓고 보는 그 맥락적 진의가 깔려있다고도 볼 수 있다.

<전통교리=하나님의 계시>인가? 그 교리는 불순한 인간의 해석이 전적으로 배제되거나 감화된 순수 계시의 결정체란 말인가? 분명히 말하지만, 교리적 해석 역시 인간이 수행한 다양한 해석들 중의 하나일 뿐이다. 알고 보면 모든 존재의 경험활동 자체가 이미 해석활동이다. 교리도 해석이며, 해석은 언제나 그 자신이 지닌 <해석학적 렌즈>의 영향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하나님의 계시는 결코 교리로 단순화될 수도 없을뿐더러 거기에 가두어 질 수도 없다.

계시는 이성을 넘어서 있지만 이성마저 꿰뚫고서 넘어서 있을 뿐이다. 따라서 궁극상에서 보면 신학이란 이성이 계시에 대해 명료하게 설득 당하는 과정에 해당한다. 그렇기에 우리가 굳이 역사비평학에도 겁을 낼 필요가 없는 것이다. 역사비평학은 최종 대안이 아니라 수단일 뿐이며, 그럼으로써 그것은 오히려 계시에 봉사할 수 있다고 본다.

<성경의 문자 및 언어>와 <하나님의 말씀>은 동일한 것인가?

가만히 생각해보자. 성경은 본래 문자로 기록되기 이전에는 입으로 전해졌던 구두전승(oral-tradition)으로 있었다. 구두전승 역시 오랜 세월을 거쳐 왔다. 그러한 구두 전승 이전에는 그럼 무엇이 있었나? <사건>이 있었다. 그 사건이란 바로 세계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구원사건을 말한다.

   
▲ 진짜 성경은 언어나 문자가 아니다. 그 이전에 그 어떤 원형의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에 대한 체험을 신앙고백으로 담아놓아서 처음에는 입으로 전하다가 나중에는 문자로 기록하여 책이 되었고, 이를 계승하다가 그 가운데서도 일부는 제외하고 다시 몇 권들을 경전으로 지정하여 세상에 널리 읽히도록 한 결과, 마침내 오늘날 우리 손에서 보고 있는 성경책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일련의 그 오랜 과정에는 부단한 인간의 첨삭과 오류의 과정 역시 있었음을 인정치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 과정을 곰곰이 숙지할 경우, 이것은 성서를 하나님의 말씀과 동의어로서 보질 않는 차원임을 알아야 한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 혹은 구원사건을 인간의 불완전한 언어로서 담아놓은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인간의 언어는 분명한 시대적 한계의 제약과 문제가 있고 오류가 있을 수 있기에 당연히 모든 시대적 비평에도 열려 있어야 함은 말할 나위가 없다고 하겠다. 핵심
적 관건은 그러한 온갖 오류와 모순들 뒤에 계신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내는 것이다.
하나님은 오류와 온갖 부조리함 뒤에 계신다.

그렇다면 진짜 성경은 언어나 문자가 아니다. 그 언어나 문자에 담긴 하나님의 구원사건이다. 언어나 문자 이전에 그 어떤 원형의 사건이 있었다. 히브리어는 고대 이스라엘인들의 사고와 사상을 표현한 히브리인들의 언어이지 하나님의 언어는 아니다. 하나님의 언어는 인간의 문자화된 표기나 발성이 아니라 세계가 치유 받는 하나님의 계시일 뿐이다. 이 계시에 대한 경험을 인간의 언어로서 담아놓은 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보고 있는 성경책이다. 이때 우리가 읽고 있는 성경은 바로 하나님과 상호교호 했던 이 구원사건(역사적으로는 해방사건)을 히브리어로 그리고 헬라어로 담아 놓았다는 것뿐이다.

물론 히브리어나 헬라어 등은 성서를 이해하는데 유용한 도움을 주는 언어이긴 하다. 그러나 언어라는 것은 어차피 사상을 담고 전달하는 역할로서의 그릇이라고 볼 때, 어떤 측면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매개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럴 경우 우리는 성서 속에 성서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언어 자체가 인간의 해석의 산물이라는 사실은 오늘날의 건강한 학문에서는 기본적 명제에 속한다.
 
 
   
▲ 말씀이 육신으로 왔듯이, 계시는 <책>으로 왔다!
 
 

오류를 통한 해석학 : 성서무오설에서 <성서오류설>로의 적극적 전환

앞서 본인은 1) 정합적인 설명력과 2) 가능한의 유용성이 나 자신이 보는 해석수행의 양대 기둥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이것은 알고 보면, 오류와 비극 앞에서는 철저히 낮아지는 해석학이다. 부정합성과 비극을 낳는 해석들은 분명하게 교정되어야 한다고 본다. 결국 이 얘긴 오류와 비극을 통해서 전진해나가는 해석학이라는 얘기이기도 하다.

나는 성경을 하나님의 계시와 이를 경험한 인간해석(오류가능성 부분)의 결합물로 본다.
따라서 나는 이제부터 여러분들에게 새로운 성경해석을 주장하는 바인데, 곧 <오류를 통한 성서해석>을 말한다. 애초에 성경해석을 다룬 본연재글의 첫 번째 글에서 나는 “성서는 오류와 함께 간다!”고 설파한 적이 있음을 기억할 것이다. 그 얘기를 이제 풀고자 한다.

이 같은 나 자신의 입장은, 그동안 진보 진영에서도 어쩔 수 없이 마지못해 성서의 오류를 인정하던 정도의 차원이 아니다. -앞서 언급한 우연적인 직관적 통찰의 경우만 제외한다면- 오히려 나 자신은 오류를 통해서만이 하나님의 계시에 접근할 수 있다고 보는 성서해석이기에 성서오류설을 더욱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입장인 것이다.

나는 성서오류설이야말로 성서무오설보다 훨씬 더욱 심오하고 위대한 것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성서오류설은 그야말로 인간 스스로의 한계를 인정하고서 겸허하게 나아가는 입장이며, 그 같은 <오류를 통한 성경해석>이란 결국은 인간의 무수한 시행착오를 솔직하게 인정하는 자기 반성적 성찰을 통한 성경해석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오류와 비극 앞에서는 철저히 낮아지는 해석학이며, 오류와 비극을 통해서만이 그나마 전진해나갈 수 있다는 해석학적 입장이다
.

성경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계시는 결코 그 자체로 드러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 인간의 적극적 참여 곧 해석이라는 참여과정과 같이 결부되어 있다. 이때 그 해석의 작업이 곧 계시와 함께 뒤섞여 있는 그 오류들을 한꺼풀씩 계속 벗겨나가고 조금씩 교정해나가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계시는 가리워져 있다. 무엇으로? 인간의 오류들로! 그런 점에서 오류란 계시로 가는 관문이다.

하나님 말씀이 성서와 동일하다고 볼 경우
하나님 말씀 = 성서

하나님 말씀이 성서와 동일하지 않다고 볼 경우
하나님 말씀 ≠ 성서

성서무오설이 맞다.

성서오류설이 맞다.

계시의 접근에 있어 별 어려움이 없다.

오류를 통하여 계시에 접근,
비평적 탐구가 절실히 필요

문자주의적 해석이 판을 칠 수 있으며,
많은 비평적 방법들에 문을 닫기 십상이다.

오류의 극복들을 위해선
다양한 비평적 방법들을
시도하고 동원함이 필수적이다.



위의 도표에서 혹자는 하나님 말씀과 성서의 부분적 동일을 주장할진 몰라도 그것은 결국 '동일하지 않음'일 뿐이다. 그렇다고 하나님 말씀과 성서가 완전히 동떨어진 별개의 것이라는 얘기도 아니다. 앞서 말했듯,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담고 있는 인간의 책이기에 동일하지 않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무오설보다 오류설이 훨씬 심오한 것은, 오류설이야말로 진정으로 무오한 하나님의 계시에 접근하는 창구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오류는 결국 오류에 의해서 근접될 수 있다. 반면에 성서무오설은 우리에게 신앙을 빙자한 무지로 안내할 뿐만 아니라 알고 보면 거기에는 인간의 추악한 교만이 종교의 힘을 덧입고 자리하고 있다는 점에서 분명하게 거부되어야 한다고 본다. 인간은 결코 하나님이 아니다.

오류를 통한 새로운 성서해석의 방법으로 성경을 볼 때, 우리는 진리탐구의 해방감을 만끽하고 맛볼 수 있다. 오류로 인해 단련되는 진리의 축척은 점차로 그 어떤 비평에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 쪽으로 가는 것이기에 어디든지 거침없이 활보할 수 있을뿐더러 오히려 더욱 솔직하고도 신나게 그리고 자유롭게 성경을 성찰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오류들은 바로 신앙의 성장의 기회들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 오류는 나의 반성적 성찰의 참여를 기다리고 있는 오류다. 그러한 오류에 대한 성찰이 바로 성장의 기회가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오류의 발견에 감사하라! 오류는 일그러진 우리 자신의 모습이요 흔적이다. 그러한 우리 자신들의 모습을 극복해야 진정한 하나님의 역사와 섭리를 맛볼 수 있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우리의 학문사야말로 결국은 오류를 줄여나가고자 했던 운동이었음도 알 것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이제는 해석학에서 오류에 대한 존재론적 성찰부터 분명하게 확립되어야 한다는 것이 현재 나의 입장이다. 우리는 그동안 무의식적으로라도 오류를 꺼려함으로써 오류가 주는 진정한 가치를 잘 몰랐다고 하겠다.

지금까지 성경해석의 역사에서 거의 대부분의 기독교 성서학자들은 성경의 오류들을 은폐하거나 억지로라도 성서무오설을 지지하기에 바빴었다. 반면에 역사비평학을 받아들인 진보 진영의 경우는 성서에 오류가 있다는 사실을 수용은 하되 이를 더 적극적이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진 않았었다. 내가 아는 한, 오류를 오히려 성경을 이해하는 데 있어 새로운 해석학을 열어주는 열쇠로서 본 사람은 아직 과문하여 본적이 없다.
 
   
▲ 성경은 계시와 오류가 뒤섞인 <계오書>이다. 오류를 인정하지 않는 한 계시는 요원하며, 바로 그렇기때문에 오류를 통한 계시로의 접근이야말로 타당성을 가질 수 있다.
 

성경의 오류란 하나님의 말씀이 수행하고 있는 십자가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계시와 나의 주관적 해석을 분명하게 분별할 수 있는가? 주관성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다. 아무리 믿음과 영빨이 좋다고 해도 기본적으로는 그 자신의 주관성에 기반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

가장 근본적인 차이는 시간성일 것이다. 계시는 시간을 넘어선다. 하지만 인간의 주관성은 한시적 시간에만 자리할 뿐이다. 계시는 시간을 넘어서기에 전(全)시간에 걸쳐있다. 바로 그렇게 때문에 계시는 전(全)시간에 걸쳐 역사 속에서는 <영속적인 탁월함>을 발한다. 하지만 인간의 주관성은 역사적 유용성에 있어서 그 한계를 가지며, 그것의 운명은 짧다.

이때 그 시간성의 차이에 대한 경험이 바로 오류에 대한 경험에 있다는 것이다. 결국 인간의 주관성의 한계의 극복은 오류를 통해서만 계시에 근접될 수 있다. 그렇기에 나 자신은 오류란 인간이 신적 계시로 접근할 수 있는 관문이라고 누누이 강조하는 것이다.우리가 철저하게 낮아지는 반성 없이는 결코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가 없다.

<오류를 통한 성서해석>은 모든 전제들의 오류가능성을 타진하면서 파고 들어가기에, 철저히 인간의 반성적 성찰을 유도하는 해석이다. 여기에는 그 어떤 기존 전통적 교리도 예외일 수 없다. 앞서 말했듯이, 그것이 아무리 권위있는 전통이라도 그것은 결코 오류와 비극에 선행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제 성경에 대해서 매우 솔직하고 정직해질 필요가 있다.

성경은 계시와 오류의 뒤섞임물이다. 나는 이러한 차원을 <계오>(啓誤, apocalypserror)라고 부른다
(<계오>apocalypserror란, 곧 계시apocalypse와 오류error라는 단어를 합한 본인의 신조어). 알고 보면 성경은 사실과 허구가 결합된 <팩션>(faction=fact+fiction)이지만, 성경은 또한 계시와 오류가 뒤섞인 <계오書>이기도 하다.

사실상 알고 보면 하나님의 계시는 이미 모든 만물 자체에 끊임없이 개입되고 있기에, 실제로는 우리 사는 세상 전체가 계오적 사태에 놓여 있다. 하지만 그 계시의 현현은 세계 안의 깨달은 자를 통해서만 드러날 뿐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성경은 고대 팔레스타인이라는 시공간에서 일어났던 그 어떤 상향적 체험(구원사건)들을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여 특화해놓은 집적물인 것이다. 기독교라는 정체성(identity)의 자리는 바로 여기에 놓여있다.

동정녀 탄생설화에도 계시경험과 시대적 한계의 오류가 함께 녹아 있어

동정녀 탄생설화의 경우를 보자. 그것은 역사적 사실이 아닌 고백의 오류일 뿐이다. 그러나 그러한 고백의 배경에는 계시경험이 깔려있다. 마태복음의 기자는 어쨌든 하나님의 계시경험 혹은 자신이 체험한 역사적 예수와의 만남을 그러한 식으로 표현했던 것이다. 이것은 그 어떤 체험에 대한 <고백>인 것이다.

이 점을 잘 이해하고자 한다면 다음과 비유를 할 수 있겠다. 우리는 나의 가장 사랑하는 애인이야말로 세상에서 최고로 이쁜 사람이라고 고백한다. 그런데 그것은 정말로 객관적인 사실일까? 다시 말해서, 우리는 그 고백적 표현이 비록 분명한 사실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매우 의미깊은 표현으로서 즐겁고 기쁘게 받아들인다. 성서의 고백적 진술도 그 패턴에 있어선 바로 이와 흡사하다는 것이다.

역사적 사실로서의 진술이 아닌 고백으로 인해 오류를 낳았지만, 그렇더라도 그것은 그 어떤 계시경험으로 인해서 나온 것이다. 만에 하나 동정녀 탄생설화에 인간을 상향적으로 성숙시키는 그 어떤 계시경험이 조금도 담겨 있지 않다면, 그 기록 자체가 나온 동기란 결국 세계와 단절된 오로지 <자기만족을 위한 공상놀음>이 될 뿐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성경의 이런 성격을 첨예하게 고찰해 볼 경우, 그것은 적어도 계시경험을 담고 있거나 아니면 그저 자기만족적 공상기록물이거나 혹은 진솔한 것이거나 우리가 여전히 속고 있거나 결국 최종적으로는 둘 중 하나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혹시 어름한 중간이나 다른 쪽이 있다면 말해주길 바란다. 이 같은 나의 주장은 비록 요나서가 문학서라고 하더라도 거기에도 이스라엘의 역사와 관련한 계시경험으로 인해 나왔다는 것이며, 바로 그 계시 경험이 인간세 안에 성서라는 흔적물을 형성케 했다는 것이다.

비록 동정녀 탄생이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거기에는 역사적 예수를 신격화함으로써 하나님을 미쁘시게 하려는 저자의 순박한 신앙적 의도를 엿볼 수 있게 한다. 실로 이 오류는 매우 인간적인 것이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계시경험과 결부되어 있다. 우리는 바로 이 오류의 표현을 통해 인간적 요소와 신적인 요소에 대한 두 가지의 대비적 느낌을 맛볼 수 있다. 알고 보면 성경에는 이러한 고백의 오류들로 그득하다.

엄격한 과학적 진술이 아닌 신화적 얘기들을 있을 법한 사실로서 당연스레 받아들이는 시대에선 성서에 기록된 초자연적 기적이나 동정녀 탄생에 대한 이러한 얘기들은 계시경험의 진술을 더욱 빛나게 만들어주는 표현양식에 속한다. 마태는 왜 그렇게 썼을까? 그 시대에선 그것이 일반적인 것이었다. 아닌 말로 내가 그 당시에 태어난 마태였어도 동정녀 탄생 얘기처럼 신성한 분의 출생을 위해 그런 식으로 썼을 수 있는 것이다. 어쨌든 그 자신은 의미 깊은 상향적 체험을 했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현대과학의 시대에서 그 같은 진술들은 그 자체가 역사적 사실로서 받아들여질 수는 없고 이전의 신화적 시대를 객체화함으로써 오히려 그 진술에 담긴 <의미>를 구현하고자 한다(동정녀 탄생을 역사적 사실로서 보질 않는 이런 나의 얘기에 혹자는 “그럼 당신은 부활은 믿소?”라고 질문을 던질지도 모르겠다. 물론 믿는다만 이 얘긴 매우 디테일한 설명들을 해야 한다. 왜냐하면 부활은 훨씬 더 새로운 차원이기 때문이다).

본래적으로 시대를 관통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언어 문자의 표현양식과 그 진술 자체에 있다기보다 오히려 그것의 이면에 있는 <의미>에 더 가까이 담겨있다. 그 의미야말로 본래적인 계시경험을 가리키고 있으며, 이를 명확히 인지할 경우 마침내 시대를 유유히 관통하고 있었던 하나님의 말씀과 조우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의미는 표현의 집적물인 텍스트의 문자 이면에 있긴 하지만, 그 표현과정의 오류로 인해 의미는 곧바로 구현되기보다 곧잘 미끄러지고 가리워지기 십상이라고 하겠다. 바로 그래서 우리는 오류와 정직하게 대면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시(무오류) → 계시경험(그 어떤 구원사건의 체험) → 고백(오류가능성 부분)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언어로 담아놓은 것을 성경이라고 했을 때, 성경이란 곧 계시경험에 대한 인간의 흔적물이다. 이 계시경험의 가장 기본적인 양태가 내가 앞서 말한, <깨달음>이라는 사건이다(나의 네 번째 연재글에서 ‘깨달음’이라는 사건의 내적 구조를 참조하길 바란다). 세계 안에서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체험하는 모든 계시경험에는 이 깨달음이라는 사건이 가장 기초적 성질로서 자리한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이 같은 나의 입장은 불트만의 해석학적 입장마저도 넘어선다. 불트만이 그 자신의 해석학에서 추구했던 바는 ‘계시 앞에 선 <인간 실존>’이다. 그가 보는 성서는 계시 앞에 선 인간 실존의 자취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서슴없이 “신학은 인간학이다”라고 외쳤지만, 안타깝게도 그 실존은 결국 매우 개인적이고도 심리적인 범주에 한정될 뿐이었다.

하지만 내가 보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깨달음은 실존과 다른 것으로 내 삶의 자리인 세계를 자기화하는 가운데 얻는 성찰이다. 이는 나 자신과 세계를 깨닫는 만큼 비례하는 것이기에, 결코 개인적인 것이거나 사회적인 것으로 이분화되지 않는다. 실존은 나와 하나님과의 1대1 관계에서 나온 것이지만, 깨달음은 하나님과 나와 이웃이라는 3자적 관계에서 빚어진다. 이미 ‘나’라는 존재 자체가 그냥 <나>가 아닌 <세계 안에서의 나>이다.

따라서 불트만이 말하는 그러한 실존은 추상일 뿐이다. 나와 하나님이라는 1대1 관계만 생각하는 것은 내 안에 있는 분명한 타자를 배제하는 것밖에 안된다. 성경에는 깨달음의 자취가 있는 것이지 실존의 자취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성경은 결코 개인적으로 읽을 수 없고 총체적으로서 성경을 해석하고 읽을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의 계시를 터득하는 명료한 이해의 수준은 언제나 나와 세계를 아는 만큼에 비례한다는 점을 잊지 않길 바란다.

 
   
▲ 진짜 성경공부 시간은 하나님을 외우거나 기억하는 행위가 아니다. 그 시간은 하나님과 솔직하게 맞서서 부딪히고 씨름하는 시간이다. 흡사 얍복 강가의 야곱처럼 말이다. '무조건 믿어라'의 성경공부는 죽은 것이다. 자유하라! 성서에게 솔직히!
 

말씀이 육신으로 왔듯이, 계시는 <책>으로 왔다!

그렇더라도 어느 광고의 카피처럼, 기록은 기억을 지배한다. 성서텍스트는 그 어떤 계시경험에 대한 해석물이며, 그것은 시대를 꿰뚫지 못하는 다양한 한계들도 함께 내포된 채로 집적되어 온 것이다. 나는 지금 하나님의 계시 자체를 부정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다시 한 번 상기해주길 바란다.

놀랍게도 성서는 읽는 자와 더불어 커가는 경전이다. 그 자신이 깨달은 만큼만 성서는 보여줄 뿐이다. 이는 성서와 개인의 관계에서도 그러하지만 이점을 좀더 깊이 파고들어가서 인지할 경우, 성서는 언제나 각 시대와의 관계에서도 더불어 커가는 경전이었음을 알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계시는 한결같아도 성서는 <진화>evolution한다. 혹시 '진화'라는 개념이 괜히 정서상(진화론에 대한 불신감 같은) 낯설게 들린다면, 성서는 언제나 시대와 관련해서도 창조적 새로움을 발하며 역동적 전개를 보여주고 있는 경전이라고 봐도 좋겠다.

중세 시대를 사는 사람으로서 대하는 성경과 21세기를 사는 오늘날의 눈으로 대하는 성경은 분명한 차이가 있다. 여호수아가 태양을 가리켜 멈춰라고 말한 구절을 두고서 중세인으로서 성경을 읽을 경우 그 구절들은 여지없이 태양이 지구를 도는 천동설을 예증한다고 생각했을 것이지만, 현대인으로서 성경을 읽을 경우 이는 당연히 받아들이지 않게 된다. 해가 계속 중천에 멈춰있는 초자연적 기적이 일어났다고 보는 점들은 현대인의 인식으로선 거부되기 십상이다. 그래서 이를 넘어서는 또다른 납득할만한 설명들이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알고 보면 이는 성경에 담긴 하나님의 계시(뜻) 자체가 변했다는 얘기가 아니라 성경을 읽는 시대정신들이 변하기 때문에 성경이 달리 읽혀지고 보여지는 현상일 뿐이다. 우리 자신들은 분명하게도 시공적 제약을 받는 존재이기 때문에 이런 점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말씀이 육신으로 왔듯이 계시는 <책>으로 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만일 성서가 지금 이 시대에 출현한다면, 오늘 우리에게 내려지는 계시는 오늘의 표현양식으로써 쓸 수밖에 없잖은가.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그 시대적 제약 속에서 나타나는 <영속적 탁월함>인 것이다.

혹시 노파심에서 하는 얘기지만, 누군가 말하길 그렇다면 거짓말투성이 책일수록 오류가 더 많으니 더 경전적 가치가 있지 않느냐라고 혹자는 반문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런 얘긴 나의 주장을 제대로 이해치 못한 결과다. 나는 지금 오류 자체를 경전성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본질적으로 경전성은 그것이 계시를 담고 있다는 점과 이를 통한 상향적 체험의 효과에 있다. 이때 오류란 바로 참여를 불러일으키는 자리라는 것이다. 성경은 오류로 인해 역동적으로 내게 다가올 뿐이다.

그리고 이때의 경전성은 나의 참여가 함께 어우러지지 않으면 안되는 경전성이다. 오류란 계시로 이끄는 여백의 자리이다. 그리고 바로 이 점에서 나의 개인적인 고백을 한다면, 내게 있어 성경은 다른 그 어떤 종교 경전들보다도 매우 현묘한 탁월함이 있다고 여겨진다. 켄 윌버(K. Wilber)의 <전초오류>Pre-Trans Fallacy를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성경의 차원이 바로 평상심의 극치를 보여주는 경전임을 인지할 것으로 본다.

진정한 성경공부 시간은 하나님을 기억하거나 외우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과 부딪히는 시간이다.
진리를 구하는 독한 회의를 가지고서 하나님과 씨름하길 바란다. 흡사 얍복 강가의 야곱처럼 말이다. 이젠 더 이상 오류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오류에 민감하고, 이를 겸허히 수용하고 낮아질 때 성경은 제대로 높아질 수 있다. 성경은 그야말로 <역설의 경전>이다.

오류와 비극 앞에 겸허한 성서텍스트와 기독교가 되어야

각 시대는 끊임없이 이전 시대를 객체화하면서 새로운 시대로 나아간다. 이때 그러한 시대 흐름의 속성에는 이전 시대에 대한 오류와 비극의 극복도 함께 있다. 역사비평학도 오류를 발견하고 줄여나가는 과정에 있을 뿐이다. 물론 가끔은 택도 없는 소릴 하는 자(이를테면 매우 정보력이 열악한 자)가 튀오나올 수도 있기에 오류를 증대시킬 수도 있겠다.

이때 모든 이론의 성공적 관건은 엄격한 상상적 모험을 위한 필수조건인 바로 <정합적인 설명력>과 <가능한의 유용성>에 달려있다. 인간세에서 진리 탐구의 창조적 여정은 <상상력>과 <경험>으로서 새롭게 일궈져 나간다. 그리고 그것은 오류와 비극 앞에선 고개를 숙인다. 정합적인 설명력의 확보는 보다 나은 해석을 위해 오류를 덜어내는 작업이며, 가능한의 유용성을 얘기하는 것은 오늘날의 적용에서의 비극을 막기 위한 노력이다.

오류와 비극이야말로 이전보다 더 나은 시대로 진보할 수 있는 기회의 창구인 것이다. 이 우주 안에서 유아적이고도 어리석은 존재인 인간으로선 이것 외에 기대할 만한 창구는 그 어디에도 없다. 요행수를 바라듯 신의 우연스런 은총을 기대하지 않는 한 말이다. 하지만 더욱 현명하고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그러한 신의 은총은 이미 우리 자신과 주변 세계에 무수히 내려지고 있다는 사실에 참회의 눈물부터 흘릴 것이리라.

지금까지 이 세계 안의 수많은 오류와 비극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고 있는 매우 따끔한 가르침이라는 사실부터 직시하자. 문명은 기본적으로 수난의 역사에 의해 새롭게 창조되고 있다. 태초부터 영원까지 시대를 관통하는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접근은 결국은 오류에 민감하고 그것을 극복함으로써 영원한 진리에 다가설 수 있을 뿐이다.
 
내가 믿는 종교와 신앙에는 오류가 있을 수 없다고 보는 것이야말로 실제로는 하나님에 대한 완고한 교만임을 알아야 한다. 혹자는 중요한 부분에선 오류가 없다고 끝까지 고집을 피울지도 모르겠지만 도대체 어떤 부분이 중요하고 어떤 부분이 덜 중요하단 말인가? 그것은 또 누가 판단하는가? 하나님은 바로 그 지점까지도 우리들이 엎어지기를 원하고 계신다. 역사적으로 기독교라는 종교야말로 엄청난 오류와 비극을 낳았던 심각한 원인이었다는 사실을 우리 종교인들은 왜 그다지도 자꾸 못알아먹는단 말인가.

아마도 그놈의 낡은 전통 딱지들인 교리 수호 자세 때문이겠지만. 분명히 말한다. 명백한 오류 앞에서 자기부정을 인정할 줄 모르는 자는 결코 하나님의 계시에 온전히 접근할 수 없다. 바로 이 점에서 나는 화이트헤드의 다음과 같은 경구를 남기며 이번 회차의 글을 맺고자 한다.
 
“오류를 놓고 두려워하는 것은 그 자체로 이미 종말일 뿐이다. 진리를 사랑하는 길은 곧 오류를 보호하는 것이다”(MT 16)
 

 

"There is no short cut to truth" - Religion in the Making

 

 
예수사람 (06-07-04 10:21)
 
성서는 하나님 및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있는 아주 좋은 매체라는 것입니다. 성서를 통하지 않고도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겠으나, 그 효율성 면에서 아주 뒤떨어지지 않겠습니까?
예수도 하나님의 매체였지요? 매체! 매체가 없다면...하나님을 어떻게 인식할 수 있을까요?

정강길 (06-07-06 02:54)
 
그럴경우 기본적으로 매체란 곧 현실 세계 전체져..

예수사람 (06-07-06 09:24)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단, 성서가 또는 예수가 일반 현실 세계보다는 더 우월적 매체수단이 아닐까요?

정강길 (06-07-06 12:11)
 
우월하다는 건 고백의 언어이지 그것이 합리적 실증의 체계와 혼동될 순 없다고 보는데요.. 만일 우월하다고 보시면 그 근거는 구체적으로 어디에 있는지요? 결국 자신의 신앙체험을 제대로 기술하고 표현해야 기독교 외의 다른 사람들에게도 설득력 있는 거잖아요..

예수사람 (06-07-06 14:57)
 
고백의 언어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고백과 사랑은 그 대상과의 배타적 관계에서 성립되는 것이지, 밖에 있는 분들에게 자연과학적으로 증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여깁니다. 배타적 사랑의 관계를 우월성(우월한 관계)이라고 해서 큰 문제가 될까요.

그리고 하나님을 체험한 사람의 사랑의 언어를 그 사랑의 지평 안에 있지 못한 사람에게 어떻게 전달하느냐 하는 문제는 쉽지 않은 사항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사랑의 지평 안에서 한 식구가 되기 전에는... ...애 낳지 못하는 남자가 산모의 마음을 이해할 방법이 있을까요? 구름 위의 세계와 구름 아래의 세계... 과학이 아무리 발전해도...우리의 인생에서 삶의 비밀 가운데 구름 위의 세계에 대한 것이 구름 아래 사람들에게 완전히 드러나는 경우는 그 날에 되어서야 가능하지 않을까요? 물론, 인간의 인지능력 발달로 꾸준히 드러나고 있다고도 할 수 있으나, 그럴수록 하나님은 은폐되시는 것도 진실 같습니다.

정강길 (06-07-06 21:59)
 
고백의 언어 당연히 중요하죠.. 그렇지만 합리성을 거쳐서 나온 고백의 언어와 그것을 배제하거나 무시해서 나온 고백의 언어는 분명히 구분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성의 단계도 궁극적으로는 이성 너머의 단계로 가듯이.. 진정한 고백의 언어는 합리성을 품고 나가지 그것을 배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자신의 아내가 세상에서 가장 이쁘다는 표현은 실제 사실이 아닌 고백의 언어 범주에 속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비록 사실이 아니더라도 매우 의미깊은 것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마저 꼭 사실이다라고 얘기하면서 다른 사람의 아내나 여자에게마저 배타적 우월성을 고집하는 사람이 있지요.. 하지만 진정한 신앙이란 게 그런 거 아닌 줄은 잘 아시잖아요.. 막무가내로 성서무오설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인정한다고 해서 진정한 신앙이 되고 고백의 언어가 되는 것은 분명히 아니라고 봅니다.. 치열한 과정과 훈련 없이 달디 단 열매는 없는 법..

잘 알려진 불교의 법문 중에 이런 있지요..
1.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2. 산은 산이 아니요, 물은 물이 아니다.
3.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여기서 1의 단계와 3의 단계는 같은 표현으로 보이지만, 1과3은 엄연히 다른 것입니다.. 2는 이성적 훈련의 단계에 속하겠죠..
어쨌든 여기서 1과 3을 혼동하는 것을 <전초오류>Pre-Trans Fallacy라고 합니다.. 아마도 제가 윗글에서도 쓴 거 같네요..
고백의 언어 중요합니다.. 하지만 우리 시대에 난무하는 맹목적인 짝퉁 고백언어와는 분명하게 구분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예수사람 (06-07-07 09:24)
 
다른 사람의 아내나 여자에게마저 배타적 우월성을 고집하는 사람이 있지요. 그런 사람을 어떻하겠습니까? 그냥 내버려두는 수밖에... ...그러한 배타적 관계가 그때 그 사람들의 생명(=삶의 의미)이라면...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각인이라고 스스로 자부하는 자들은 자신의 설득력에 문제가 없는지를 먼저 점검해야 할 것입니다. 학문적/이성적/훈련적 차원의 과정을 모든 사람에게 요구할 수가 없으므로...  오히려 자각인이나 그 길을 추구하는 사람은 보통사람들의 정서와 지식 수준에서 납득시킬 책임이 있으며, 효율성이라는 잣대를 내세워, 민주적 과정이나 설득의 과정을 무시한다면, 차라리 부족한 이해 가운데에서라도(아래 수준으로 내려가는 것이 사실은 더 어려울지도 모르지요) 서로 사랑하기를 힘쓰는 것이 공동체에 유익이 될 것으로 여겨집니다. 천천히 전체적 공감대가 이루어지기를 인내해야... ...이 세상 모두를 가죽으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내 발을 가죽으로 싸는 편을 선택해야지...

인간은 높아지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되고자 하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오히려 성육신 하신다고 합니다.
근본주의자들은 좋지 않게 여기지만.. 그들을 뽑아버려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버려 두는 것이 심판이지요.

정강길 (06-07-07 09:48)
 
이젠 앞의 논점과는 약간 바뀐 얘기네요..
그런 사람들은 내버려두자고 하셨지만, 그럼 방치하자는 얘긴 아니져? 그런 사람 역시 우리의 이웃이니까요..
훈련의 과정은 필요하다고 봅니다.. 하나님은 이 백성이 자신에 대해 알기를 원하시니까요..
이때 단지 강압으로서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하신 설득의 과정이 필요한 것이겠구요..

예수사람 (06-07-07 09:54)
 
예수 그리스도를 체득(=구원)할 수 있다면...즉 자연 이성만으로도 거듭나는 것이 가능하다면...
이성, 성서, 전통, 체험...어느 것도 무시할 수 없겠지요.

(정강길님의 글 가운데, 아주 그럴듯한 '신' 개념이 있습니다. 자각인이라고 하는 분들은 이러한 '신'을 모방할 필요가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에서 신은 세계와 언제나 함께 나아가는 <동반자적 관계>라고 할 수 있겠다. 종교철학자 찰스 하츠온(Charles Hartshorne)은 하나님을 세계의 아픔과 고통에도 무감각하거나 불변하는 도덕적 군주자가 아니라, 재밌게도 <민주적 지도자>로 비유한다. 즉, 하나님은 세계 모든 존재들의 모든 자율적 결정을 존중하면서도 동시에 그 자신의 완전무결한 이상으로 세계를 항상 설득적으로 이끄는 민주적 지도자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지도자는 세계의 온갖 잘못과 아픔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면서 함께 품어 안으며 간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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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 <초자연주의>를 인정하면 나타나는 문제들.. 미선 231 11-04
170 [어떤 진리관] 진리(眞理)와 진리(進步)의 차이 그리고 퇴리(退理) 미선 198 07-05
169 시작이 있는 우주인가? 시작도 끝도 없는 우주인가? 미선 221 06-18
168 <종교 위의 종교>에 대해.. 미선 227 05-04
167 초자연주의와 자연과학 그리고 신비주의 구분 미선 224 04-06
166 지적설계론(창조론)자들과 유물론적 과학자들 간의 공통점 미선 208 12-10
165 종교 신앙의 반지성에 대한 단기적 대안 (1) 미선 211 11-24
164 "몰락이냐 도약이냐" 21세기 종교 진화의 방향 (종교학회 발표) 미선 204 09-10
163 '나(I)는 누구인가?'라는 근원적인 물음에 답하려면.. (1) 미선 221 04-13
162 유신론-무신론을 넘어서 <탈신론>으로 미선 366 05-04
161 <초자연주의>를 버려야 기독교가 산다! 미선 309 02-04
160 몸학 기독교 & 몸학 사회주의 추구 미선 246 12-31
159 <자유>에 대한 짧은 생각.. (2) 미선 321 08-24
158 몸학 기독교에선 기독교 신학이 굳이 필요하지 않은 이유 미선 365 03-24
157 인간 무의식의 두 가지 상태와 보다 상향적인 의식 발달을 위하여 미선 288 03-03
156 (1998년 원글) "화이트헤드 철학에서 본 민중신학 비판과 대안적 모색" (2) 미선 248 02-18
155 종교(宗敎, Religion)에 대한 동서양의 어원적 의미와 전후 혼동 오류 미선 243 02-06
154 기존 기독교와 <몸 기독교>의 분명한 차이들 미선 275 01-21
153 GIO명상 방법 12단계 (몸기독교가 제안하는 수행 방법 중 하나..) (5) 미선 412 01-16
152 2013년 계획.. 몸 기독교 (4) 미선 369 01-02
151 민중신학 40년.. (20년전 안병무 기사를 보며..) 미선 213 12-25
150 진보정치 교육의 사각지대와 민중 역사 주체론에 대한 반성과 재고찰 미선 202 12-22
149 교회에 대한 권력비판? 교리비판? 어느 것이 더 유효할까? (4) 미선 341 12-06
148 왜 예수인가 (필독 원함!) (13) 미선 1299 11-04
147 새로운 기독교의 방향과 몸학의 종교관 (2) 미선 239 10-05
146 새로운 기독교의 방향과 몸학의 종교관 (1) 미선 269 08-17
145 기독교 교리의 문제는 기독교만의 문제가 아니다! (3) 미선 322 06-11
144 초대교회와 바울에 대해... 미선 373 04-28
143 '작은 교회'가 정말 대안인가? 핵심은 교리다! 미선 301 04-22
142 진선미의 기원과 예수사건 (1) 미선이 285 02-24
141 중간 복음주의 신학자 알리스터 맥그리스의 <과학신학> 비판 (13) 미선이 310 12-13
140 끔찍한 <몸의 신학>에 속지 마시길! (유사품 주의) (8) 미선이 343 11-15
139 종교운동과 사회운동을 구분 못하는 오류-기존 진보 기독교 비판 (1) (2) 미선이 434 10-14
138 여전히 예수얼굴에 똥칠하는 개신교 정치세력들 (5) 미선이 350 08-30
137 새로운 기독교 역사의 국내 선구자들 : 유영모, 함석헌, 김재준 미선이 325 06-26
136 조용기 목사의 할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미선이 342 05-14
135 몸학과 새로운 기독교 운동 그리고 30년 후의 기독교 미선이 424 04-11
134 <인간의 자유의지>라는 착각과 환상에 관한 문제 (14) 미선이 620 03-04
133 기존 진보 기독교인들의 <생명평화> 담론에 반대한다! (업그레이드판) (8) 미선이 493 02-17
132 기존 진보 기독교계의 ‘생명평화' 담론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미선이 236 02-10
131 영혼구원의 강조에서 <총체적인 생명구원의 강조>로 (4) 미선이 272 02-05
130 성서문자주의 또는 성서무오설 신앙보다 더 뿌리 깊은 고질병은? (9) 미선이 684 02-02
129 죄의식의 종교에서 <이웃과 함께 성찰하는 종교>로 미선이 267 02-01
128 수직적 구조의 교회에서 <수평적 구조의 교회>로 (2) 미선이 351 01-21
127 서구식 목회문화가 아닌 <우리식 목회문화>로 미선이 303 01-21
126 과정신학에 대한 비판과 민중신학의 신 이해 접맥 미선이 485 01-13
125 ★ 예언 (1) 미선이 602 12-24
124 ♣ 새로운 기독교 신학의 인간론 (4) 미선이 438 12-19
123 ♣ 새로운 기독교 신학의 인간론 (3) (4) 미선이 499 12-12
122 ♣ 새로운 기독교 신학의 인간론 (2) (10) 미선이 702 12-05
121 새로운 기독교의 시간관, 태초와 종말로서의 시간관을 거부한다! (4) 미선이 590 12-01
120 ♣ 새로운 기독교 신학의 인간론 (1) 미선이 689 11-30
119 [예수운동 예배 견본] 새로운 기독교의 <예수운동 예배>를 위하여 미선이 722 11-28
118 숭배하는 예배에서 <닮으려는 예배>로 (1) 미선이 705 11-19
117 거꾸로 흘렀던 감리교 역사, 바로 세우기엔 아직 멀었나 미선이 596 11-10
116 <새로운 기독교>를 소개하는 전체 안내 링크글 (계속 업데이트 예정) 관리자 1937 11-03
115 [논평] 봉은사 땅밟기 추태, 성경 '문자주의' 그 야만의 역사 넘어서야 (1) 관리자 761 10-29
114 기존의 진보 기독교와 새로운 기독교 운동 (1) 미선이 605 10-22
113 1세대 민중신학자 안병무의 미완의 작업과 기존 민중신학의 과제 미선이 579 10-19
112 [새기운 성명] 4대강 사업 관련, 문정현 신부의 정진석 추기경 비판을 지지한다 관리자 557 10-19
111 스퐁, "스티븐 호킹과 유신론/인격신의 죽음" (작은불꽃님 역) 관리자 821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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