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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⑥ 문자적 성서해석에서 <사건적 성서해석>으로 (4)-새롭고 건강한 기독교에 대한 꿈    
  글쓴이 : 정강길 날 짜 : 06-06-14 12:57 조회(33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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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환기의 한국 기독교, 바뀌어야 산다! (18)
새롭고도 건강한 기독교에 대한 꿈 : ⑥ 문자적 성서해석에서 <사건적 성서해석>으로 (4)
 

정강길 위원 minjung21@paran.com

 

 
1. 21세기 기독교와 한국 기독교의 위기
2. 21세기 기독교 변혁을 위한 12가지 패러다임 대전환
   ※ 관념적 이원론에서 <현실적 관계론>으로
   ① '무조건 믿어라'의 기독교에서 <깨달음의 기독교>로
   ② 이웃종교에 배타적인 기독교에서 <열린 기독교>로
   ③ 가부장적 기독교에서 <모성애적 기독교>로
   ④ 초월신론에서 <범재신론>으로
   ⑤ 교리적 예수에서 <역사적 예수>로
   ⑥ 문자적 성서해석에서 <사건적 성서해석>으로
   ⑦ 숭배하는 예배에서 <닮으려는 예배>로
   ⑧ 서구식 목회문화가 아닌 <한국식 목회문화>로
   ⑨ 수직적 구조의 교회에서 <수평적 구조의 교회>로
   ⑩ 죄의식의 종교에서 <이웃과 함께 성찰하는 종교>로
   ⑪ 영혼구원의 강조에서 <총체적인 인간구원의 강조>로
   ⑫ 저 세상이 아닌 <이 땅에서의 하나님 나라 운동>으로
3. 오늘날의 선교 대상은 기독교 그 자신부터
4. 나오며
 
 
 
오류 중의 오류, 해석학적 전제의 오류

성서학자들은 오류의 교정을 위해 많은 비평적 방법들을 동원한다. 본문비평, 사본비평, 편집 비평 등등 이러한 비평적 방법들은 발견된 자료들에 대한 해석의 설득력을 보다 높이기 위한 학문적 장치들이다. 오류에도 본문 단어나 문장의 오류나 부정합한 논리적 오류 등등 여러 가지들이 있을 것인데, 다양한 비평적 방법들은 그러한 오류들을 좀더 줄여나가려는 노력에 속한다고 하겠다.

오류의 인지는 사실 실제적 적용이라는 경험상에서 터득된 이치다. 그럼으로써 합리주의에 대한 감각을 키우고 훈련하는 것이다. 우리는 1+1= 2가 적어도 1+1= 3보다는옳다는 것을 몸으로 느끼고 있다. 왜냐하면 후자를 경험상에서 취할 경우 분명하게 시간 허비와 낭패를 많이 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류의 인지는 근본적으로 후험적이며, 합리주의가 오류의 극복을 통해서만 세계 안에 드러나는 것이라고 볼 때, <시행착오>라는 것은 바로 <합리주의의 모험>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오류란 우리가 진보를 위해서 치르는 댓가이다. 온건한 보수신학자인 D. A. 카슨이 쓴 『성경 해석의 오류』(성서유니온선교회)의 분류에도 다양한 오류 얘기들이 나온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는 성경 해석의 문제에 있어 가장 중요한 차원의 오류 문제를 그 책에선 언급하지도 또한 해결하지도 못하고 있다. 이를 해결할 수 있는 해석학적 대안은커녕 오히려 그 반대로, 이 중요한 오류는 오늘날의 많은 기독교인들뿐만 아니라 전문적인 성서학자나 신학자들조차도 숱하게 범하고 있는 가장 치명적인 오류에 속한다.

참으로 이것은 모든 오류들 가운데서도 가장 근원적인 차원의 오류라고 할 수 있겠다. 그것은 바로 <해석학적 전제>에 대한 오류다. 사실 이것은 성서해석의 오류뿐만 아니라 깊이 알고 보면 지구상의 온갖 오류들은 근본적으로 해석학적 전제의 오류에 뿌리박고 있다. 우리는 이 <해석학적 전제>에 대한 문제를 제대로 짚지 않는다면, 우리 앞에 많은 다양한 비평적 방법들이 성서해석에 동원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매우 헛수고에 지나지 않을 가능성이 큰 것이다.

예컨대, 우리가 ‘A’라는 해석학적 전제를 깔고서 성경을 읽을 경우, 결국 성경을 백 번 읽어도 나오는 것은 어찌되었든 A', A'', A'''..... 등등 이런 식이 될 것이다. 아무리 죽었다 깨어나도 이미 A가 전제된 성서에서 새로운 B가 나올 리는 만무한 것이다. 즉, 이 같은 해석학적 전제의 문제는 온갖 비평들이 동원되는 범주적 영역에 대한 문제이기도 하다.

이 문제가 제대로 짚어지고 해결되어야만 다른 여러 비평과 해석들 그리고 다른 오류의 맥락들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날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의 해석학적 렌즈부터가 오류가 있는데 자꾸 다른 오류들을 탓하는 것은 이미 자기 자신을 제대로 보질 못하는 경우에 속한다. 결국 이 문제는 성서를 읽을 때, 우리가 무조건 믿어야만 하는 그 해석학적 전제의 내용을 분명하게 파악해보는 문제라고 할 수 있겠다.

<해석학적 전제>로 작동되는 “무조건 믿어라”의 내용에 따른 분류

보수와 진보가 제시하는 양 진영의 정보 스타일을 비교해볼 때 가장 큰 차이는 이것이다. 보수는 어떻든 무조건 믿어야만 하는 그 전제가 이미 깔려 있고서 접근한다. 반면에 진보는 보수측처럼 무조건 믿어야만 하는 전제가 깔려 있는 경우와 무조건 믿어라의 전제가 없이 출발해나가는 그 두 가지가 함께 있다고 하겠다.

 

보수

진보

진보

진보

‘무조건 믿어라’의 전제 여부

‘무조건 믿어라’의
전제가 있다. (O)

‘무조건 믿어라’의
전제가 있다. (O)

‘무조건 믿어라’의
전제가 없다. (X)

‘무조건 믿어라’의 전제가 없다. (X)

‘무조건 믿어라’의 전제 내용
(이는 범주적 한계를 의미)


성서무오설
예수의 유일회성
동정녀 탄생
예수의 피 대속설
부활 승천 재림
삼위일체 등등
전통 교리들


민중해방 전통 or
생명평화 전통
(진보 기독교인들 가운데는 이것을 당위로서 여기는 사람들이
꽤 있다)


진리는 없다.
온갖 오류들과
권력(힘)만 있다.
(허나 진리가 없다는 명제 자체만큼은 진리로서 통용된다는 점에 모순이 있다)


진리는 있지만
우리에겐 없다.
그 진리는 우리들의 오류와 비극을 통해서만 근접해나갈 수 있을 뿐이다.

나타나는 행태

전통교리는 무조건 믿어야 하며, 성경을 읽어도 여기서 벗어나면 안된다고 말한다.

(정통 교리를 포함,

사도신경, 사영리에서 표방된 신조들이 많은 성경공부 교재의 기본 전제로서 이미 자리함)

민중해방 전통을 가장 중요시하기에, 타자를 위한 사회변혁이 그 시작부터 강요될 수 있다.

(나 자신은 이것도 당위로 보면 곤란하다고 보는 입장이다.)

진리는 없다고 보기에 회의주의 혹은 인식론적 상대주의적 성격을 곧잘 보여주기도 한다.

(후기구조주의와
친화적이기에
가장 냉소적인 비판적 진영에 속한다.)

자기해체에까지도 열려 있으면서
끊임없이 새로운
창조적 구성 모색

(진리 탐구 과정
자체에서 얻는
합리주의적 성취를 중요시)

해당 진영

기존의 주류
보수 기독교 대부분

기존 민중신학 혹은
이와 비슷한 성격의 
에큐메니칼 진보 진영

3세대 민중신학
혹은 탈기독교나
탈교회, 탈중심주의를 표방하는 진영

정강길의
새로운 민중신학
혹은
과정신학 진영


 
많은 기독교인들은 성경을 읽을 때, 바로 저러한 해석학적 범주들을 은연중에라도 전제(설정)하고서 성경을 읽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에 대한 해석학적 전제들을 검토하고 오류를 살펴보는 작업은 매우 중요한 차원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보수 근본주의자들은 대부분이 ①번의 성향을 보여주는 자들로서, 다른 진영에 대해선 잘 모르거나 별로 인정치도 않으려는 자들이다. 오로지 ①번만이 진리이며 다른 진영은 이단시되는 경향이 강하다. 성경의 다른 해석의 가능성도 잘 모르거나 오로지 ①의 잣대로서만 판단할 뿐이다.
 
물론 보수진영도 ①번 안에서는 여러 갈래로 분화가 가능할 수 있다. 저들 나름대로도 '무조건 믿어라'고 말하는 전통교리의 내용들이 조금씩 저마다 차이가 있기도 한 것이다. 하지만 그래봐야 어디까지나 ①번의 범주 안에서의 차이일 뿐이다. 언뜻 듣기엔  웬지 진보적일 것 같은 기만적 표현의 <개혁주의 신학>이라는 보수진영의 신학도 근본적으로는 ①번의 범주 안에서만 개혁적일 뿐이지, 결코 그것은 개혁적인 것이 못된다. 저들은 결코 저 교리를 포기하지 않는다.

소위 말하는 복음주의 진영 역시 ①번의 해석학적 전제를 포기하지 않는다고 볼 때, 이들 역시 보수 진영에 속할 따름이다. 즉, 이들은 ①번의 입장을 고수하면서 다소 ②번 정도에 관심하는 진영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흔히 ‘복음주의’라고 불리는 진영의 색조다. 그렇기에 때에 따라서 복음주의 진영은 보수 진영인 ①과 나머지 진보 진영으로 분화되기도 한다.

그럴 경우에 복음주의자들은 자기 안의 모순을 제대로 보질 못하거나 아니면 자신의 발톱을 숨기고 있거나 둘 중 하나일 가능성이 높다 고 하겠다. 전자는 결국 ①번에 속할 가능성이 높은 경우이고, 후자는 진보에 속하는 경우인데, 여기서 발톱을 숨긴다는 얘기는 결국 그 어떤 복음주의자가 보수에서 진보로 넘어왔다고 해도 태생적 토양 자체가 이미 보수 진영의 바탕에 기반해 있기 때문에 함부로 자신의 진보적 입장을 표방하지 못하고 있는 경우를 의미한다.

즉, 자신의 생각과 머리는 진보에 속하지만, 자신의 손발이 활동하는 그 집안 영역은 보수인 경우이다. 이때 <복음주의>라는 표현은 자신의 변화된 입장을 슬쩍 가리고 있는 매우 전략적인 용어로서 채택되기도 한다. 실제로 복음주의 진영의 활동가로 알려진 내가 아는 분들 가운데도 이러한 분들이 적잖이 있다. 그만큼이나 복음주의라는 용어는 매우 두루뭉술하거나 애매모호한 용어인 것이다.

②의 경우는 기존의 민중신학자나 민중운동 혹은 사회현장 활동가들에게서도 많이 볼 수 있는 유형이다. 물론 앞서 말한 진보적 복음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②를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나름대로 ①의 내용을 펴는 사람들도 없잖아 있는 줄로 안다. 하지만 지금 내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자신의 신앙에 있어 가장 궁극적으로 전제하고 있는 바로 그 결정적 지점에 대해서다.

③번의 경우는 진리 탐구에 대해선 냉소적이고도 회의적인 진영인데, 진리가 없다고 보거나 혹은 다양한 전제들이 있을 뿐이라고 주장하는 입장과도 별다르지 않다. 현재 한국의 기독교 진보권에선 주로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같은 후기구조주의 입장을 따르는 진영에서 이 같은 색조를 많이 보여주고 있다.
 
언뜻 보기엔 매우 지적인 테제들로 무장된 거 같지만(그래서 꿈뻑 넘어가는 이들도 많다), 알고보면 포스트구조주의 진영은 그 자신들도 역시 매우 파쇼적이고도 멍청한 진영에 속한다. 물론 이들도 기존 기독교의 폐해와 해체를 주장하지만, 결국은 '힘에 대한 합리적 설득의 승리'를 간과해버리는 진영일 뿐이다.

④번은 진리 탐구 과정 자체를 중요시 여기는데, 여기서는 오류와 비극이라는 요인이 중요하게 취급되며 이를 극복하기 위한 삶의 유용성과 적실성을 지향한다. 물론 주지하다시피 <새로운 민중신학>을 추구하는 현재 본인의 입장이기도 하다.
 
<민중해방>은 당위적 전제가 아니라 예증되어야 할 명제일 뿐

나는 여기서 잠시 기독교 진보 진영에 대해 조금 성토하고자 한다. 아마도 기독교 진보권인 에큐메니칼 진영에는 ②번에 속하는 사람들이 꽤 많을 것이라고 본다. ‘민중해방’이라는 명제(요즘 진보권의 최대 유행어인 ‘생명평화’까지 포함)는 이들에게 일종의 도그마로 여겨질 정도이다. 따라서 민중해방을 당위적 전제로 여기는 것에 대해 딴지를 거는 나를 두고 어쩌면 매우 보수 반동적인 언사로 여길는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힘있게 말하고자 한다.
   
▲ 자신들의 행복과 성공을 위한 각종 성공지침서들이 난무하는 오늘날의 현실에서, 자꾸 타자를 위한 민중해방과 생명평화 전통의 당위만을 강조하고 부르짖기보단, 먼저 자기 삶의 강력한 '동기부여'부터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기존의 진보 기독인들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민중해방(생명평화) 투쟁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사실 나의 개인적인 신앙에 비춰볼 때도, 나는 이 말이 결과적으로는 결코 틀렸다고 보진 않는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그 <동기부여>가 생략되고 곧바로 제시되고 있다는 점을 나로선 지적하고 싶은 것이다.

물론 ②번에 속한 자들의 답변은,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고 예수님께서도 그렇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를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역시 틀린 말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더욱 가열차게 밀어부쳐서 묻고 싶다. 도대체 하나님은 왜 그렇게 해야만 했으며, 예수님은 또 왜 그렇게 했는지를 말이다. 이러한 물음들의 꼬리를 물고 그 극한에까지 이르면 어디에까지 이어지는고 하니 결국은 존재론적 지평의 물음에까지 맞닥뜨리게 된다.

다시 말해서, 신은 도대체 어떤 존재며, 인간은 도대체 무엇이며, 신과 세계는 어떤 관계에 있느냐는 물음이다. 이것은 존재론(ontology)과 우주론(cosmology)이라는 형이상학적 고찰에 속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나는 아무리 당위적으로 옳게 보이는 ‘민중해방(생명평화)을 위한 사회적 실천과 투쟁’이라고 해도 존재론적 사태에서부터 지속적으로 솟구쳐 올라오는 그 끊임없는 <동기부여>를 제대로 보여주질 않는다면, 민중해방(생명평화)조차도 대중들에게는 그 자신의 정당한 관심사로서 등극하긴 힘들다 고 보는 것이다.

그동안 진보적이라는 ②번 진영은 사회적 실천에 곧잘 관심하는 경향이 많아서 심층적인 형이상학적 고찰에 대해선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곤 했었다. 쉽게 말해, 나 자신이 주장하는 ④번 입장과 ②번 진영의 뚜렷한 큰 차이는 가장 근원적이고 궁극적인 지평에 대한 고찰 유무다. 오히려 나로선 심층적인 <존재론적 사태>ontological fact에서부터 민중해방이 정당하다는 점을 증명해보이고 싶은 것이며, 이것이야말로 진보를 위해 더욱 튼튼한 기반을 쌓는 것이라고 본다. 이것은 자기 실존과 민중해방의 근원적 연계고리를 찾는 작업마저 내포하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나 자신은 기존 민중신학 진영에도 철학적 해석학이라는 형이상학적 고찰이 궁극적으로 요청될 수밖에 없다고 봤던 것인데, 기존의 민중신학을 비롯한 진보 진영에서는 거의 이 부분을 관념적인 것으로만 여겨 대체로 도외시되어 왔었다. 단지 기존의 진보 진영은 민중해방(생명평화)이 옳다는 사실을 무의식적인 직관으로서만 모호하게 부여잡고 있었을 뿐, 그것에 대한 존재론적 구축과 해명에는 별다른 관심을 두진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 문제가 불분명하거나 제대로 고찰되지 못할 경우 ‘내가 왜 가난한 민중을 위해서 투쟁해야 하는 거지?’라는 회의에 빠지거나 민중해방이란 명제자체부터 나 자신에게는 매우 부담스럽고도 거추장스럽게 들리기도 하는 것이다.

90년대 이후 진보 진영이 동력을 상실한 가장 근원적인 이유

솔직히 그동안 기존의 민중신학을 포함해서 기존의 에큐메니칼 진보 진영은 이러한 철학적ㆍ형이상학적 물음과 고찰에 대해선 도외시한 측면들이 너무나도 많았었고, 즉각적인 사회적 실천 현장의 얘기들로 가득 채워지곤 했었다. 하지만 이 역시 1층부터 튼튼하게 짓지 않고 곧바로 3층부터 짓겠다는 매우 멍청한 처사에 속할 뿐이다.

내가 보기엔 이것이야말로 90년대 이후에 진보 진영의 이론이 동력을 상실한 가장 큰 근본적 이유라고 본다. 즉,자신과 관련한 존재론적 물음과 동기가 자명하지 않거나 부재했다는 것이다. 90년대 이전의 7, 80년대에는 그 동기부여로서의 동력이란 게 <암울했던 시대적 상황>만으로도 충분했었다. 하지만 오늘날에 민중해방이 당위적 전제라고 생각하고서 대중 작업을 벌인다면 그것은 매우 큰 오판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민중해방(생명평화)이 무조건 옳다며 윽박 지를 수도 없는 노릇이잖은가.

생각해보라. 가장 궁극적이고도 기초적인 물음에서부터 시작되지 않고 곧바로 민중해방을 당위적 전제로서 깔아놓았을 때, 이것이 타자에게 곧바로 설득적으로 먹혀들기란 만무한 것이다. 특히 386세대보다 더 밑의 젊고 어린 세대들의 경우엔 <민중>이란 표현자체마저 부담스럽거나 낯설게 들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럴 경우 누가 민중을 위한 투쟁을 말하랴? 요즘 세대들은 민중해방은 고사하고, 자기 자신의 취직 성공에만 엄청 여념이 없잖은가.

예를 들어보자. 『함께 읽는 구/신약성서』(한국신학연구소)는 잘 알려진 진보적 성서교재에 속한다. 그런데 이 책은 이미 민중해방을 당위적 전제로서 깔아놓고 있는 충실한 책이다. 성서가 그러한 내용을 편 책이라는 것이다. 물론 실제로 성서는 그러한 책일 수 있다. 또한 내가 볼 때 보수진영의 꽉 막힌 교리주의자들의 성서교재들보다는 훨씬 백배 더 낫다고 본다. 그렇다면 이것은 곧바로 성서를 읽는 자들에게 먹혀 들어갈 수 있을까?

보편적 인간이란, 개인의 만족과 행복 문제가 우선적으로 작동되는 자들이다. 타자를 위한 헌신과 봉사가 곧바로 자신의 만족과 행복으로 여겨지는 사람을 찾기란, 웬만한 소명의식을 이미 가지고 있지 않으면 힘들거나, 성인군자가 아니고서는 거의 불가능한 얘기인 것이다. 무엇보다 오늘의 시대는 예전만큼 7, 80년대의 힘겹고 암울했던 시대적 절박성이 매우 분명하고도 뚜렷하게 경험되는 시대도 아닌 것이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아무리 좋은 ‘가난한 자를 위한 사랑과 민중해방’이라도, 존재란 무엇이며, ‘나’는 누구이며, 나는 어떤 존재며, 세계와 나와 하나님은 어떠한 상관성을 가지는지에 대한 이 궁극적 이해와 물음들이 자명하지 않는 한, 민중해방이란 것도 여전히 파쇼적인 압박에 지나지 않을 뿐 이다. 물론 그렇게 부담스러우면,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는 얘기처럼, 믿지 말라고 얘기하면 그만이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말로 그렇게 말할 건가?
 
보수 근본주의자들의 교리적 신앙이 분명한 오류가 있고 폐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오류와 폐단을 캐치하지 못한 자들의 입장에서 느낄 때, 거기에는 적어도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라는 존재론적 상관성에 대한 자명한 이해가 분명하게 명시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이 매우 강력한 삶의 동기와 영향력을 행사하게끔 만들고 있는 것이다. 진보 기독교인들은 바로 이 점을 정확하게 직시할 필요가 있다.
 
즉, 존재론적 이해에 대한 부분을 보수 근본주의자들의 그것과는 달리 보다 정합적인 내용을 담아서 지속적으로 실천적 삶의 동기를 제공하게끔 선명하게 정리해놓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참고로 불교 역시 이 부분에서부터 성찰적으로 확립되어 있기에 강력한 흡인력을 지니고 있다. 애초 불교는 형이상학에서 시작하여 세계적인 종교로 발전하게 된 경우다. 오늘날 불교의 생태살리기 운동도 실은 저 심층적인 존재론적 이해에서부터 그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다).
 
나로서는 당위가 아닌 설득적인 근거를 가지고서 타자와 동등하게 기초적인 물음에서 출발하여 마침내 민중해방 투쟁으로까지 이끌어내고픈 욕심이 있다. 진정한 진보는 모든 타자의 입장들에게도 먹혀들어갈 수 있게끔 가장 기초적이고도 근원적인 물음의 지평에서부터 시작하여 완정하게 끌고 나갈 수 있을 때에 세계 안에 가장 큰 설득력 있는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 본다.

성서해석의 문제도 결국 해석학의 문제로 귀결된다고 할 때, 이렇게 볼 경우 성서신학도 철학을 다루는 해석학적 영향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고 하겠다. 실로 해석학이란 것은 궁극적으로 철학적ㆍ형이상학의 문제와 관련되고 있는 것이다. 본인이 늘상 얘기하지만, 철학은 언제나 모든 학문의 밑변에 깔린 베이스에 놓여 있다.
 
 
   
▲ 요즘 세대들은 민중해방은 고사하고, 자기 자신의 취직 성공에만 엄청 여념이 없는 실정인데다, 그런 차원에서 민중은 오히려 부담스럽기에 비운동권이 더욱 늘어만가는 추세다.
 
 
'신이 있다'는 것조차도 '무조건 믿어라'의 전제에 속해선 안된다.
 
철학이 신학의 베이스로 자리한다는 점에서, 개인적으로  나는 '무조건 믿어라'의 전제 내용에 행여 '신이 있다'고 미리 전제해놓는 것조차도 그래선 안된다고 보고 있다(본인의 연재글 (10)번 글 참조). 신학은 철학과 함께 더 깊이 있는 치열한 물음들까지 밀고들어가서 그 답변마저 확보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신이 없다'는 얘긴가? 물론 그것 역시 아니다! 신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는 궁극적으로 어떤 신학적-철학적 이론의 전제로 자리해선 곤란하며, 그것은 불가피하게 도출해낼 수 밖에 없는 결과여야 마땅하다고 본다.
 
다시 말해서, '신이 있다'는 얘기 역시 모든 신학적-철학적 이론들의 붕괴를 막기위해 불러들인 신학적-형이상학적 전제가 아니라 부조리한 이 세계의 현실을 정당하게 고찰해서 나온 예증 영역에 속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나는 이렇게 보는 것이야말로 더욱 힘있고 더욱 정당한 입장이라고 생각한다.
 
그럴 때에 우리는 심지어 무신론자들과도 설득력 있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여지가 마련되고, 또한 모든 입장들의 눈높이에서조차 신의 현존으로 정당하게 이끌어 내는 가능성들을 발굴해낼 수 있다. 사실 이런 자세야말로 모든 입장들에 전방위적으로 열어놓으면서도, 동시에 가장 효과적으로 다가설 수 있는 방법이라고 본다.
 
나 자신이 '신의 현존'을 인정하고 있는 이유는 우리 사는 세계의 현상들을 설명하는 데에 보다 깊이있고 보다 유용하며 보다 더 논리적이라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말하는 신은 기존 기독교의 그 같은 신 존재가 아니다. 그냥 라고 불러도 상관은 없다.
 
즉, 신의 현존을 나 자신이 잘 받아들이고 있는 이유가 모든 경험적 현실에 대한 설명력 수위에 있어서도 현재로선 가장 높다고 보기 때문이다. 만일 이에 대한 반대되는 데이터들이 발견되거나 도출된다면, 나로선 '신이 있다'는 그 전제마저도 과감이 버릴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하지만 기회가 되면 언젠가 얘기할 테지만, 무신론적인 입장이야말로 오히려 세계의 현상들을 설명못하는 부분들이 더 많다는 사실이다. 또한 놀랍게도 화이트헤드는 신의 존재를 미리 전제하고서 신을 거론했던, 그런 유치한 사상이 결코 아니었다는 점도 기억되어야만 한다. 그의 사상은 오히려 현대 자연과학과 경험주의에 뿌리박고서 나아가는 첨단의 사상이다.
 
신학이 어차피 철학을 그 베이스로 취할 수 밖에 없다면, 우리는 세계를 설명함에 있어서 가장 유용한 철학사상이 있을 경우, 이를 베이스로 하여 기독교라는 건물을 구축해나갈 필요가 있잖은가. 그 옛날 기독교 역사에서 플라톤 철학에 혹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기초되면서 기독교 신학이 체계적으로 수립되고 조직화된 경우와 마찬가지로 말이다. 그리고 이 작업은 예수와 성서를 해석함에 있어 정교한 <해석학적  렌즈>의 확립이기도 하다.
 
기독교 신학의 수립

역사적으로 기독교는 이천 년 전의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이라는 종교 경험에 뿌리박고 있다. 그러한 가운데 이에 대한 보편적ㆍ일반적 해석이라는 기독교 신학이 수립되고 교리적 전통이 확립되면서 오늘에까지 이른다.

단계별로 보면 다음과 같다.
A. 이천 년 전의 역사적 예수의 행태의 발현(사건의 출현 단계)
B. 앞의 A를 모든 시대에 적용할 수 있게끔 보편적으로 해석해내는 상상적 일반화의 작업(사건의 해석 단계)
C. 앞 단계에서 확립된 B를 이천 년 전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다양한 현실 상황에도 충분히 적용(해석의 적용 또는 사건의 재현 단계)

기독교는 역사상에서 볼 때, 일단은 어떤 특정 시대의 비범한 종교적 경험의 순간들에서 나온 것이다. 이때 특별한 이 경험은 전승과정에 있어 보편화하려는 작업이 수행되는데, 이것이 바로 B의 단계에 해당한다. 궁극적 지평에 대한 신학적 상상력이 동원되는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교리(Dogma)에 대한 추출들도 결국은 A에 대한 해석 작업인 B에서 나온다. 그리고서 모든 각 시대의 현실 상황에도 적용시켜 보는 것이다.
 
만일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이 기존의 교리적 전통으로서만 설명이 된다면 좋겠지만, 사실상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결코 그러한 교리적 해석에 갇혀 있지 않다. 또한 나 자신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오늘날의 시대에도 소통할 수 있는 진리라고 보지만, 오늘날의 전통 교리들은 시대와 결코 소통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따라서 기존의 주류 전통 기독교는 분명하게 바뀌어야 한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기존의 주류 기독교 신학 수립의 핵심이었던, 역사적 예수의 행태를 해석한 일반화ㆍ보편화 작업의 수행에 나는 치명적 오류가 있다고 본 것이다. 일찍이 헬라문명권의 관념적 이원론은 바로 이 지점에서 기독교의 <해석학적 렌즈>로서 재빨리 흡수되어 자리매김하였다. 오늘날의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원론자라는 점에서 플라토니안이라는 사실은 매우 이채롭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기존의 주류 신학은 연역적인 신학이다. 즉, ‘무조건 믿어라’의 전제 내용이 있으며, 이를 무차별적으로 적용하는 신학이다. 위로부터 내려받는 신학인 것이다. 반면에 제3세계를 비롯한 특정의 상황들에서 생긴 기존의 진보 진영의 신학들은 주로 귀납적인 신학이다. 기존 민중신학, 해방신학, 달릿신학, 여성신학, 생태신학, 종교다원주의 신학 등등 저마다 세계 안의 다양하고도 특수한 상황적 경험들에서 파생한 신학들이다.

기존의 주류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연역적인 신학은 보편적 일반화로서의 신학이란 점에서 안정감은 있지만, 다양한 현실 상황이라는 시대와 소통하지 못하는 단점이 있다.
그것은 오히려 타자에게 독단과 폭력을 행사하는 경우가 많다. 반면에 기존의 진보 진영에서 주로 나타났던 귀납적인 신학은 현실 상황과 소통하는 측면은 있으나 보편적 일반화로서의 신학이 되기 힘들거나 그렇지 못하는 단점을 가지고 있다. 시대의 추이에 따라 늘상 변하는 것이다.

참고로 앞서 제시한 도표에서 진보권의 ③번 진영의 경우는 B에 대한 작업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보는 진영에 속한다. 이들에게 보편적 일반화의 신학이란 그릇된 망상일 뿐이며, 그러한 신학이 있다면 그것은 매우 폭력적이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③번 진영에서는 그야말로 보편적 진리에 대한 논의 자체가 봉쇄되어진다. 진리 논쟁 자체에 대해 매우 회의적이고도 냉소적인 진영이 바로 ③에 해당한다.

이들에게 가장 핵심적인 치명성은 적어도 '보편적 진리란 없다'는 것 자체만큼은 아주 자명한 진리로서 통용되는 데에 있다. 이들은 자신들 안에 내함된 치명적인 자기 모순에 대해선 별 말 없고, 그저 "<다양성의 정치>와 <힘 싸움>으로 겨루자"는 입장으로 나아갈 뿐이다. 이들이 주로 비판적으로 공략하고자 하는 실체는 근대성에 대한 것들인데, 바로 그런 점에서 아이러니하게도 근대와 탈근대는 묘한 공생관계이기도 하다.

기존의 주류
보수신학

기존 진보권의
다양한 특정신학들

정강길의 새로운 민중신학
혹은 과정신학

논증형태

연역적

귀납적

연역과 귀납을 수렴한
귀추법적

보편적 종합화의 여부

X

특징

전통교리는 시대가 흘러도 불변한다고 본다.

시대적 상황에 따라 저마다 다르기에 변한다.

오류와 비극으로 나타나지 않는 한에서만 불변가능.
‘최선의 신학’이 있을 뿐이다.


 
나 자신이 제안하는 기독교 신학의 수립 방법
 
나는 여기서 <귀추법>retroduction으로서의 신학적 수립 방법을 제시하고자 한다. 귀추법이란, 연역과 귀납의 두 가지 긴장을 적절히 포섭하는 추론법으로서 주로 귀추법 혹은 <가추법>abduction이라고도 불린다. 귀추법의 논증은 흔히 “최선의 설명으로의 추론”the inference to the best explanation 으로 알려져 있다, 이것은 우리가 최선으로서 확보할 수 있는 보편담론의 범주인 것이다.

이것은 앞의 기독교 해석학 수립의 A, B, C 단계에서 D 단계를 하나 더 추가로 넣으면 된다. 그것의 경우는 다음과 같다.
 
if) 이때 만일 C 단계가 충분한 적용이 되지 못하고 오류와 비극을 보일 경우 :
D. 앞의 A를 다시 재고찰하여 <새로운 B> 작업을 수행하여 다시 새롭게 C 단계를 밟는다.

즉, 위의 기독교 신학의 수립 단계에서 볼 때, 확립된 B 단계가 C 단계에 이르러서는 시대와 소통하지 못하고 적용되지 못하는 불충분한 사례가 발생할 경우, A의 보편적 해석 작업인 B에 대해 전면적인 수정 또는 개정 작업이 있지 않으면 안된다고 본다. 이것이 바로 나 자신이 기존 기독교에서 <새로운 기독교>New Christianity로의 대변혁 혹은 기독교의 새로운 전환을 위한 대수술 작업이 필요하다고 보는 이유다.

나 자신이 추구하는 기독교는 부정합적인 오류나 시대와 소통되지 못하는 비극이 발생할 경우, 언제든지 수정 가능한 것으로 열려 있다. 단, 오류와 비극의 발생이 아닌 한에서만큼은 연역적으로 자리할 수 있는 분명한 진리라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온갖 창조적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열린 보편성으로서의 신학>이다.

(참고로 과학철학에 해박한 사람이라면 본인이 제시한 <신학 수립 방법론>이 칼 포퍼의 <반증주의>를 연상시킬 수 있다. 하지만 그것과 비슷한 점이 있으면서도 더 정확하게 말하면, 칼 포퍼와 토마스 쿤의 <패러다임론>을 합쳐놓은 것에 더 가깝다. 왜 그런지는 깊이 생각해보면 잘 아시리라고 본다.)
 
그렇다면 누군가 이렇게 질문할 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최선의 신학이기에 진리라고 볼 수 있겠지만, 나중에 미래에선 오류와 비극이 발생할 경우 그때는 수정되거나 폐기되기 때문에 진리가 아니지 않겠느냐 라고 말이다. 사실 이러한 질문은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대한 질문이라 매우 어폐가 있다고 보지만, 굳이 답변한다면 나로서도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본다. 아무리 멋들어진 사상도 언젠가는 폐기될 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현재 시점에 있어 오류와 비극을 보이질 않는다면, 인간의 한계에 있어선 가장 최선이라고 보며, 이것을 최선의 진리라고 할 때, 나는 그 역시 하나님께서 주신 최고의 진리라고 여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결국 언제나 최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리의 요체는 그 어떤 특정한 사상의 체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알고 보면 오류와 비극에 대해 반성하고 극복하려는 그 끊임없는 과정 자체에 본질적 핵심이 놓여 있다 (화이트헤드는 이를 <합리주의의 모험>rationalistic adventure이라고 말한다). 그러한 흐름들을 부단히 부여잡는 자세야말로 더욱 중요한 관건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눈여겨보시는 지점은 오류와 비극에 대한 반성적 자세를 가지고서 끊임없이 창조적 모험을 감행하는 그 과정 자체, 그 지속적인 최선의 노력에 있다. 진정한 합리성은 신성(혹은 영성)의 특성에 속하며, 역사상 가장 위대한 종교적 성인들은 위대한 합리주의자들에 속한다. 그들의 삶은 여전히 타당했었고 옳았던 것이다. 위대한 종교적 진리들은 시대가 변하는 온갖 유동성의 한복판에서조차 빛을 잃지 않는 탁월한 영속성을 보여준다.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기독교를..

내가 원하는 <건강한 기독교> 에 굳이 최소한으로 요청되는 자세를 두고자 한다면, 
나는 딱 두 가지로 족하다.
1) 솔직하고 건강한 합리성에 기반한 기독교
2) 오류와 비극에는 언제나 겸허한 기독교

나는 이것을 <꿈의 기독교>Christianity of Dream라고 부른다.
적어도 이러한 자세로서 예수와 성서가 고찰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나로선 그거면 족하다. 이것은 '무조건 믿어라'의 전제는 아니다.
그렇다고 백퍼센트 완전 무(無)전제의 자세도 있을 수 없다.
아무 개념 없이 무뇌아적으로 살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여기에 굳이 하나의 자세를 더 두고자 한다면
3) 약자를 우선적으로 사랑하는 기독교
하지만 나로선 1)과 2)만 가지고도 충분히 3)을 도출해낼 수 있다고 본다.
알고 보면, 3)은 진리에 대한 예증 영역이기도 하다.

예수를 믿되 예수를 열어놓고 믿자.
성경을 읽되 성경을 열어놓고 믿자.

‘자기만의 예수’나 ‘자기만의 성경’에 가둬두지 말고,
분명한 오류와 비극이 보일 경우에는 언제든지 겸허히 수용하고 극복하자.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예수와 성경으로 가는 지름길이라고 하겠다.

기존 기독교는 뚜렷하게 오류와 비극들을 보여주고 있다. 나 자신이 금과옥조로 여기는 기존의 전통 교리들까지도 과감히 “바꿔라!”고 자신 있게 주장할 수 있는 그 배경에는 역사적으로도 너무나 자명했던 숱한 오류들과 비극들에 기인한다. 정말이지 기존 기독교는 엄청난 대수술로서 <환골탈퇴>하지 않으면 안된다. 바뀌어야 산다!

진정한 보수는 열려 있는 보수며, 진정한 진보는 중심이 있는 진보다.
따라서 궁극적으로 진정성을 물을 경우, 진보와 보수는 서로 통할 수 있는
하나의 통합적 차원으로서 귀결될 수 있다고 하겠다.

진리란, 온갖 다양성들의 대비(contrast)를 통한 통합의 차원에서 얻어지는 결정체인 것이다. 따라서 진리는 <온갖 다양성을 두려워하지 않는 창조적 모험>과 <분명한 자기 확신>을 그 특징으로 한다. 바로 그렇기에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할 수 있는 것이다.
 
(계속 이어집니다..)
 
 
예수사람 (06-07-04 10:45)
 
진리란, 온갖 다양성들의 대비(contrast)를 통한 통합의 차원에서 얻어지는 결정체인 것이다. 멋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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