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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⑥ 문자적 성서해석에서 <사건적 성서해석>으로 (5)-성경공부 교재, 어떻게 할 것인가    
  글쓴이 : 정강길 날 짜 : 06-06-14 13:02 조회(43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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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환기의 기존 기독교, 바뀌어야 산다! (19)
⑥ 문자적 성서해석에서 <사건적 성서해석>으로 (5)
 

정강길 위원 minjung21@paran.com

 
 
1. 21세기 기독교와 한국 기독교의 위기
2. 21세기 기독교 변혁을 위한 12가지 패러다임 대전환
   ※ 관념적 이원론에서 <현실적 관계론>으로
   ① '무조건 믿어라'의 기독교에서 <깨달음의 기독교>로
   ② 이웃종교에 배타적인 기독교에서 <열린 기독교>로
   ③ 가부장적 기독교에서 <모성애적 기독교>로
   ④ 초월신론에서 <범재신론>으로
   ⑤ 교리적 예수에서 <역사적 예수>로
   ⑥ 문자적 성서해석에서 <사건적 성서해석>으로
   ⑦ 숭배하는 예배에서 <닮으려는 예배>로
   ⑧ 서구식 목회문화가 아닌 <한국식 목회문화>로
   ⑨ 수직적 구조의 교회에서 <수평적 구조의 교회>로
   ⑩ 죄의식의 종교에서 <이웃과 함께 성찰하는 종교>로
   ⑪ 영혼구원의 강조에서 <총체적인 인간구원의 강조>로
   ⑫ 저 세상이 아닌 <이 땅에서의 하나님 나라 운동>으로
3. 오늘날의 선교 대상은 기독교 그 자신부터
4. 나오며
 

풍요 속의 빈곤, 보수 진영의 성경공부 교재


오늘날 기독교 서점에 가보면 성경교재라는 이름을 달고 나온 책들이 어찌 그리도 많은가. 일일이 세어보기도 힘들 정도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이 있다. 그렇게 많고 많은 성경교재들 가운데 정작 제대로 된 성경교재가 거의 없다는 점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오늘날 성경교재랍시고 나와 있는 교재들의 거의 대부분은 앞의 글에서도 언급한 바 있는 보수 근본주의의 5대 교리들을 핵심 전제로 깔고 있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해서 그것은 <성경공부> 교재라기보다는 <교리공부> 교재일 뿐이다. 참으로 풍요 속의 빈곤을 절감케 하는 현실이라고 하겠다.

네비게이토 성경공부 시리즈, 두란노에서 나온 ‘소그룹 나눔’ 성경공부, 예수전도단, 좋은 씨앗, 말씀과 만남 성경공부 시리즈, 목적이 이끄는 삶 성경공부 교재, 베드로서원, 새생명, 투데이, IVP, 엔크리스토, 프리셉트에서 나온 GBS 등등 이외에도 사실상 온갖 것들의 대부분이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예컨대, 잘 알려진 것 중의 하나인 옥한흠 목사의 『제자 훈련 시리즈』(국제제자훈련원)를 살펴보자. 이 책은 각 칩터마다 충실하게 기존의 보수 기독교의 교리요약으로 끝맺음하고 있다. 이를 테면, 성경의 절대적 무오성과 이를 무조건 믿어야만 하는 무조건의 순종 그리고 하나님은 통치자시며, 우리는 그 앞에 경배할 뿐이라는 얘기들을 전체 내용에 대한 핵심 요약으로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 성경공부 교재들의 질문 수준이나 요구하는 내용들은 거의 하나같이 개인의 성품 향상 위주와 문자적 성경해석 위주에 맞춰져 있는 실정인데, 그렇기에 그 개인에게는 죄와 이를 극복하는 장치인 믿음과 순종의 개념이 매우 강조되고, 만일 믿지 않으면 불순종 혹은 불신앙으로 치부되도록 주 내용의 패턴이 그렇게 짜여져 있다.

이런 식으로 대부분의 모든 성경교재라고 나온 것들은 기본적으로 ‘무조건 믿어라’의 보수 근본주의 교리들을 이미 깔고서 나아갈 뿐이며, 애초부터 이런 식으로 끝을 맺도록 이미 설정되어 있다는 얘기다. 그렇기에 이러한 성경공부 교재들은 본인이 앞에서 제시했던 ‘무조건 믿어라’의 내용에 따른 그리스도인 분류 도표에서 1번 유형의 그리스도인만 충실하게 재생산될 뿐이다. 오늘날 한국 기독교의 대부분이 바로 여기에 속한다.

민중해방 전통에 있는 진보 진영의 성서공부 교재

반면에 진보적인 성경교재들도 있긴 하다. 하지만 물량적으로 따지면 진보적 성경교재는 보수적인 성경교재에 비해 거의 잽도 안될 만큼 많질 않다. 진보측의 성경교재란, 예컨대 『함께 읽는 신/구약성서』(한국신학연구소) 같은 것을 들 수 있겠다. 이 책은 진보 진영의 성서학자들이 모여서 함께 작업한 성과물이기도 하다.

게다가 이 책은 오래전에 진보 진영에서도 꽤 알려졌던 『해방공동체 시리즈』만큼이나 오늘날 진보 진영의 성경공부 교재로서도 좀 알려져 있는 편이다. 적어도 보수측의 성서교재들에 비하면야 진보측의 이러한 성서공부 교재들은 매우 좋은 성경공부 교재라고 생각된다. 괜찮다면 당장이라도 기독교 서점으로 달려가서 양자를 서로 한 번 비교해보는 것도 괜찮을 듯 싶다.

이러한 현재 진보측 성경공부 교재들의 대부분은, 앞서의 보수 진영의 성경공부 교재가 보수 근본주의 교리로 집약되는 것처럼 그 내용에 있어서 결국은 <민중(약자)해방 전통>으로 요약될 수 있겠다. 요즘에는 <생명평화>라는 개념이 진보 진영에 유행처럼 번져 있어 여기에 생태해방까지 곁들이고 있는 실정이다.

즉, 하나님이 말씀인 성서는 결국 이러한 해방 전통에 서 있는 책이라는 얘기며, 하나님과 예수님 그리고 성서의 많은 예언자들의 행적들과 말씀들은 결국 억눌린 약자들과 생명들을 해방시키고 이 땅에 평화를 심는다는 점에 가장 큰 핵심적인 초점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진보 진영의 성경공부 교재는 사회구조와 체제변혁이라는 실질적인 역사적 사안의 문제들과 관련해서 성서를 고찰하게끔 만드는 데는 매우 유용하고 탁월한 점이 있다.

 
   
▲ 보수적인 성경교재들은 <풍요 속의 빈곤>인 반면에, 진보적인 성서교재에는 <조직신학적 성경교재>가 희박하리만치 드물다.
 
사실 보수적인 성경교재들과 비교할 때 그 수준의 차이는 정말 확연히 난다는 점에서 나는 주저없이 이러한 진보적인 성경공부 교재들을 추천하는 바이다. 왜 그런지 직접 비교해보면 알겠지만, 진보 진영의 성경공부 교재들은 좀더 솔직하게 성서의 내용들을 다루고 있을뿐더러 당시의 시대적인 역사적 정황과 학계에 축척된 학설들을 많이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보수측의 허접스런 교리공부 교재들보다는 분명하게 앞서 있다고 본다.

성서비평에 대한 성과들도 물론 반영되어 있거니와 그 시대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라는 제반적인 역사적 상황들을 깊이 조명하여 보다 전문적인 역사적 배경 지식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점도 그 특징에 해당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 한국교회 신자들의 대부분은 이러한 성경공부 교재들을 거의 접하지도 못했을 뿐더러 그것이 있는지조차도 모르는 사람들이 꽤 많다. 혹은 이단시하며 거부하거나 그러한 실정인 것이다. 적어도 이러한 상황 자체는 문제가 있다고 보여진다.

진보 진영에는 없는 조직신학적 성경공부 교재

그렇다면 이러한 진보적 성경공부 교재들의 경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가? 우리는 이것으로 만족스러운가? 다시 말해, 아무리 보수측의 교리공부 교재들보단 훨씬 낫다고 보는 진보 진영의 성경공부 교재라고 해도 그 역시 결코 만족할 수 없는 한계를 노출시키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실 성경공부 교재의 성격을 보면, 이것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뉠 수 있는데, <성서신학적 성경공부> 교재와 <조직신학적 성경공부> 교재가 바로 그것이다. 현재 진보 진영의 성경공부 교재들은 거의 하나같이 성서신학적 성경공부 교재에 속한다. 즉, 대부분이 성서 본문 맥락의 역사적 정황들을 살펴보고서 성서본문의 뜻을 살피고 있는 것이다.

반면에 보수진영의 성경공부 교재들 가운데는 성서신학적 성경교재들도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조직신학적 성경공부 교재들이 월등히 많이 나오는 형편이다. 보수측의 조직신학이란 건 결국은 정통교리에 머물거나 이를 수호하려는 변증신학적 성격을 띠고 있는데, 성경공부의 차림표에 있어서도 이것이 성경론(관), 신론, 기독론, 성령론, 교회론, 죄론, 구원론 등등 이러한 식으로 정리되어 있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그 내용상에 있어선 대체로 교리중심이라는 문제가 있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비록 그것이 잘못된 시각과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하더라도) 기독교적 입장이라는 종합화의 시각을 제공한다는 사실이다. 그럼으로써 많은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틀로서 성경을 해석하고 삶을 영위하게끔 이끌어주는 것이다. 따라서 <조직신학적 성경공부>란 것은 실로 매우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여기서 진보 진영의 성경공부 교재에 있어 가장 치명적인 약점은 바로 <조직신학적 성경공부> 교재가 부재하다는 사실이다. 적어도 나 자신은 아직까지 단 한 번도 본적이 없다. 행여 바르트신학 계열의 책을 떠올릴 진 모르나 내게 있어 그는 문자주의는 아니래도 여전히 보수주의자일 뿐이다(그 이유는 본장의 두번째 글 참조). 혹시 이미 나와 있는 게 있었다면 누군가 제발 알려주길 부탁드리는 바이다.

『해방공동체』나 『함께 읽는 신/구약성서』는 성서텍스트의 맥락들을 짚어보는 <성서신학적 성경공부> 교재에 해당한다. 그것은 역사적ㆍ사회학적 데이터들과 깊이 있는 연관을 가지기는 하지만, 신과 세계를 종합적으로 혹은 기초 세계관으로서 보는 이해에 있어서는 모호하거나 두루뭉실하게 남겨놓고 있다는 점이 치명적 약점이라는 사실이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진보 진영의 성경공부 학습들이 대부분이 그러하다.

사실상 여기에는 그럴만한 이유도 있긴 하다. 왜냐하면 이 부분은 세계 안의 모든 다양한 현실 상황들을 하나의 일관된 체계로서 종합화 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럴려면 실로 엄청난 학문적 역량이 요구되고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엄두가 안나거나 혹은 별로 필요성을 못느끼거나 했던 것이다. 심지어 그러한 종합화 자체를 거부한 흐름도 있긴 하다. 그래봐야 어차피 또 다른 권력 담론일 뿐이라는 것이다. 보편 담론 자체를 폭력적인 것으로 여기기에 회의적이고 냉소적인 반응들을 보이는 것이다.

대체로 진보 진영의 신학들을 살펴보면, 거의 대부분이 특정한 현실에 기반된 상황신학들로 거대 담론에 해당하는 보편적 체계를 가지기는 힘들었고, 언제나 지엽적인 현실 테제들에만 머물곤 하였다. 물론 그 나름대로 현실적인 힘을 가지는 맥락들도 있기에 저마다 조금씩은 보편적인 통찰들을 부분적이지만 공유한다고 보고 있다. 단지 파편화된 다양한 현실 상황들을 보다 일관된 맥락에서 종합적으로 보여주지 못하는 점이 나로서는 매우 안타까울 따름이며, 그럼으로써 우리가 놓치고 있는 부분들도 무시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크다는 사실이다.

새롭고 건강한 기독교가 추구하는 성경공부 교재

현재로서 나 자신이 원하는 성경공부 교재는 바로 이를 종합화해서 보여줄 수 있는 <새로운 조직신학적 성경공부> 교재다. 이것은 성서신학적 성과들도 당연히 깔고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더 많은 역량들을 요구한다. 즉, 기존의 주류 보수신학을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신학에 따른 성서관, 신론, 기독론, 인간론, 교회론, 죄론, 구원론 등등 이러한 성경공부 교재가 우리에게 있어야 한다.

이것이 절실히 필요한 이유는 성경공부에 있어 이를 종합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세계를 보는 근원적인 기독교적 시각이 뒤바뀌어지고 내 삶 전체의 새로운 변혁을 이끌어내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대체적으로 기존의 보수측 성경교재가 개인적 신앙이라는 성품변화에 초점을 두고 있다면, 진보 진영의 성경공부 교재들은 사회정의 혹은 타자와의 평등을 강조하는 경향이 매우 강하였다.

나로서는 이것이 이분된 성향으로 나왔다는 거 자체가 둘 다 온전하지 못한 신앙적 현실이었다고 본다. 나 자신이 추구하는 방향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온전한 조화이며, 그것은 내가 어디에 있든 간에 <삶 그 자체의 변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진정한 존재 자체의 변화는 언제나 전체 세계 변혁과도 맞물려 있다. 개인구원 따로, 사회구원 따로 그렇게 존재하질 않는 것이다. 모든 생명들은 관계적이며 전인적인 것이다.

따라서 나는 <관념적 이원론>에 기반한 성경공부 교재가 아니라 <현실적 관계론>의 패러다임에 기반한 성경공부 교재를 추구하는 바이며, 그럼으로써 성서를 보는 눈, 하나님에 대한 이해, 예수를 보는 눈, 교회와 역사를 보는 눈 등등 이러한 모든 것들이 새로운 패러다임에 기반함으로써 새롭게 눈뜨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라는 바이다.

(* 혹시 새로운 기독교를 위한 조직신학적 성경공부 교재에 대한 감이 오지 않을 수 있을까봐 본인이 속한 ‘세계와기독교변혁을위한연대’ 홈페이지( http://freeview.org )에 새로운 기독교 조직신학 신론에 해당하는 <새롭게 만난 하나님> 편을 하나 올려놓았다. 이것은 올해 초 한국기독청년학생회 겨울수련회 때 시범적으로 같이 나눈 바 있는데 이를 좀더 보완한 것이기도 하다. 누구든지 회원가입 후 다운로드 받을 수 있다.)

아마도 나 자신은 현재의 이 연재 칼럼이 모두 끝나면, 기존의 기독신앙을 대체할 만한 새로운 조직신학적 성경공부 교재 만들기에 돌입할 것 같다. 왜냐하면 내가 보기에 이것은 정말 새로운 기독교 운동을 위해선 절실히 필요할 만큼 요구되고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건강한 조직신학적 성경공부가 가져야 할 요건

그리고 사례로 올려놓은 <새롭게 만난 하나님>편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이러한 성경공부를 이끄는 리더로서는 기존의 초월적 유신론의 허점도 명확히 짚고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이신론, 범신론, 무신론 같은 신 이해에도 그 맥락들을 꿰뚫어 볼 수 있어야 하는 많은 역량들이 요구된다고 하겠다.

기본적으로 새롭고 건강한 성경공부의 첫 출발은, 그 시간은 정말 솔직하게 터놓는 자리가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구성원 중에 한 명이 “도대체 이런 게 어떻게 가능하냐며 못믿겠다”고 나올 수 있어도 그것에 대해 “무조건 믿어야 한다”는 식으로 억누르려 하거나 그러면 안된다는 얘기다. 이해되지 않는 사실을 억지로 믿게 만들려고 하는 것은 오히려 자율성에 대한 침해요 폭력일 뿐이다.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존재를 설득하진 않으신다.

그런 뒤에 저마다의 솔직하고 다양한 입장들이 서로 간에 충돌할 경우, 가장 정합적인 설명력을 확보하는 그러한 지점으로 이끌어내야 한다는 점이 내가 보는 성경공부의 두 번째 핵심요건이다. 이른바 가능한 한, 건강한 합리성에 기반하면서 통합적으로 나가야 한다는 사실이다. 누누이 말하지만 건강한 합리성은 타자와 유일하게 소통가능한 지점이다. 그럴 때에야 그것은 타자를 제대로 설득시킬 수 있다.

예컨대, 상대방이 범신론자나 무신론자의 경우라고 해도 그러한 눈높이에서 출발하여 자신이 최종적으로 염두에 두고 있는 새로운 신이해로 이끌어내고자 할 때, 그 과정은 매우 합리적으로 이끌어내야 한다는 점이다. 이 작업의 핵심은 나 자신이 범신론이나 무신론의 입장에 처해 있을 경우에도 설명이 안되는 부분들을 발견하고서 이를 정합적으로 제시해 보여주면 된다.

그럴 경우 상대는 자신의 입장마저도 구멍뚫림을 발견하고서 문제의식을 가지게 되며, 보다 더 나은 해결을 찾아보려 할 것이다. 바로 그 지점에 성경공부를 이끄는 리더는 그 자신이 최종적으로 이끌어내고자 하는 새롭고 대안적인 신 이해를 제시하면서 그러한 구멍뚫림마저도 해결을 해 보일 때 상대에게 보다 설득력 있게 다가설 수 있게 된다.
 
성경공부를 이끄는 리더(이끔이)의 역할
 
한 가지 알아두어야 할 점은, 성경공부의 리더는 철저히 ‘돕는 자’로서의 역할이라는 점이다. 즉, 진정한 리더는 모든 사람들이 리더가 될 수 있게끔 돕는 역할에 있다는 얘기다. 그렇기에 성경공부의 구성원들을 억지로 무리하게 자신의 결론으로 끌고가고자 하거나 ‘무조건 믿어야 한다’는 그런 식으로 나오는 것은 사실상 성경공부 시간 자체를 깽판 놓겠다는 것밖에 안된다. 그러한 성경공부는 별 유익도 없는 것이다.

리더는 온갖 다양한 입장들에 대해서도 제대로 설명해보일 수 있어야 하고, 또한 가능하면 다양한 상황설정들에도 대비하는 것이 좋다. 그렇기에 적어도 성경공부의 리더라면 어느 정도는 훈련된 이가 해야 한다는 점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더 역시 자기 그룹의 구성원들로부터 자신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가진다는 점도 분명하게 인지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아무리 자신이 뛰어나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가능성을 결코 배제해선 안된다.

리더 자신도 배우는 학생일 수 있다는 사실을 기본적으로 인지하면서 함께 성경공부를 이끌어나갈 때, 그나마 가장 이상적인 ‘그룹 성경공부’가 되지 않을까 싶다. 실로 현실적 관계론에 기초한 성경공부는 ① 보다 솔직하게! ② 보다 설득력 있게! 펼쳐나감으로써 기존의 성경공부에서 나온 결론들보다 훨씬 정합적이고 우월한 설명력들을 확보할 수 있게끔 보여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럼으로써 ③ 구성원 모두가 주체적인 리더가 될 수 있도록! 하는 데에 이끄는 리더의 최종 목적이 있다.

또 한 가지 덧붙인다면, 그것이 건강한 합리성에 기반한 것인지 아닌지가 예증되려면, 즉 그것이 제대로 해석된 성서해석이냐 아니냐의 궁극적 여부는 결국 실제적 삶의 적용에서 드러난다는 점도 덧붙여두는 바이다. 언젠가는 알겠지만, 이론의 정합성과 실제적 삶의 유용성 사이에는 사실상 긴밀한 관련이 있다.

   
▲ 성경공부 리더(이끔이)의 역할은 그룹에 참여하는 모든 구성원들을 하나님 나라 운동의 리더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리더화하는 데에 있다.
 
 
진정한 경전성은 배타적인 폐쇄성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끝으로 성경과 관련해서 얘기할 점은 성경의 경전성과 덧붙임의 문제이다. 사실 깨달은 자에게 성경의 경전성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문제가 되는 지점은 그 배타적인 폐쇄성에 있다. 즉, 많은 보수 기독교인들은 성경만이 유일무이한 경전이라고 보기에 인류의 다른 고전들에 대해선 거의 제대로 들여다보지도 않을뿐더러 더러는 사탄의 책으로까지 여길 정도이다.

단적으로 말하지만, 만일 주변에 그러한 사람들이 있다면 그는 여전히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깨닫지 못한 사람이라고 봐도 좋다. 진정한 경전은 오히려 진리를 향한 세계 안의 모든 지혜들을 거부하지 않는다. 위대한 경전이 있다면 그것은 이 땅의 빛과 소금의 열매로서도 예증될 것이기에 그럴 필요조차 없는 것이다.

그렇듯이 그리스도교의 성경이 세계 안에서 경전이 된 이유에는 그것이 진정한 삶의 의미를 가져다준다고 보았기 때문인데, 이에 대한 확증은 그것은 인류의 삶의 효율적 증진이라는 상향적 변화의 체험과 관련한다. 경전은 역사 속에서 지속적으로 반복해서 그 위대함의 가치를 예증할 따름이다. 진정한 경전성은 인류가 쌓아놓은 다양하고도 풍부한 지적 자산들을 결코 거부하지 않는다.

소위 성령의 9가지 열매들을 생각해보라. 그러한 9가지 열매의 발견은 동양의 고등한 사상과 종교들에서도 얼마든지 발견되지 않은가. 실로 악한 나무가 선한 열매를 맺을 수는 없는 것이다. 즉, 우리는 그 역시 성경의 확장이라는 생각을 가질 필요가 있다. 단지 우리 기독교인으로서 손에 쥐고 읽고 있는 이 성경책은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그 핵심을 담고 있기에 그리스도인의 삶의 중심 교본으로 삼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기독교의 성경을 내 생활의 중심으로 삼되, 그렇다고 해서 인류의 자산이라는 다른 지혜 경전들에 대해 적어도 배타적인 폐쇄성만큼은 띨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성경의 성경됨은 사랑이라는 그리스도인의 삶으로서 확증시켜라!

성경을 다시 새롭게 써야 하는 것인가

또한 혹자는 말하길, 성경은 오히려 옛날 시대의 경전일 뿐이며, 오늘날에서 본다면 너무나도 문제가 많기에 이젠 더 이상 필요 없을뿐더러 새롭게 다시 써야 하지 않은가 라고 말하기도 한다. 주로 진보 진영이나 기독교 밖의 사람들에게서 이러한 주장이 나오기도 한다.

오래 전에 16세기경의 루터는 야고보서 따위는 지푸라기 책이며, 요한계시록 같은 건 성경에서 아예 빼버려야 한다고까지 주장했었다. 만일 루터가 오늘날 한국교회 안에서 이러한 얘길 해댔다면, 그도 역시 돌 맞아 죽기 십상이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나 자신은 이러한 주장들이 나오는 현실에서 다음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

내가 보기에 기존 성경의 어느 부분을 뺀다고 보는 것은 자신의 모태를 부정하는 것이기에 부당할 뿐만 아니라 현실적으로도 불가능하다고 본다. 이미 있어왔던 기존의 성경들도 오히려 그 해석학을 뒤바꿈으로서 충분히 유용한 경전으로서 나아갈 수 있다. 중요한 지점은 성경을 해석하는 그 해석학적 눈이 새롭게 뜨이는 것이야말로 핵심 관건이라고 본다. 따라서 나는 기존의 성경에서 어떤 부분을 빼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하는 입장에 서 있다.

대신에 앞으로 필요하다면, 새로운 글을 넣음으로서 기존 성경에 더할 수는 있다고 본다. 아마도 이러한 나의 주장에 대해 문자주의에 빠진 보수 기독교인이라면 당장에 요한계시록 22장 18-19절을 들먹이며 너희가 더하거나 빼거나 하지 말라고 노발대발할 지도 모르겠다(본래 그 구절의 ‘이 책’이란 것도 그저 요한계시록을 말한 것인데도). 물론 굳이 보수 기독교인이 아니래도 이 문제에 대해선 다소 논란이 분분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데에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긴 하다.

내가 보기에 종교와 마찬가지로 그 종교의 경전도 언제나 형성과정에(in the Making) 있을 뿐이다. 앞으로도 이미 더 이상 손댈 수도 없게끔 완전무결한 것이라면 그것은 더 이상 발전할 여지도 필요도 없는 죽은 것일 따름이다. 만일 기존의 성경이 더 이상 불변해야 할 것으로 이미 꽝!꽝!꽝! 못박아놓은 것이라면 그것은 엄연히 창조적인 미래에 대한 피할 수 없는 반역에 해당한다.

진정한 종교라면 도래할 모든 창조적인 가능성과 자율성들까지 미리 꼼짝달싹 못하게끔 묶어놓아선 곤란하다. 그 같은 완고한 경전 아래에서의 미래란 더 이상 숨 쉬기 힘든 암울함만 떠올려질 뿐이다. 그렇기에 그러한 어리석은 처사는 앞으로 안티기독교인들만 재생산하기엔 딱 알맞다고 본다. 따라서 나는 기독교의 정경 작업이 이미 완전무결한 것으로 여김으로서 더 이상 손댈 수 없게끔 못박아놓았다는 점에 대해선 분명하게 반대하는 바이다.

나의 이러한 얘기는, 기독교의 경전이 그 옛날 오경과 예언서를 구약으로 삼고 여기에다 복음서와 서신들을 새로운 경전으로 추가하여 신구약 66권을 새로운 정경으로 정했듯이, 앞으로도 필요하다면 기존의 정경들을 구약으로 삼고 여기에다 다시금 새로운 정경을 더 추가할 수도 있다고 본다. 나는 적어도 기존 기독교의 한계를 생각한다면 이러한 점에 있어서는 열려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점에 있어선 민중신학자 안병무 역시 보수적인 면을 보여준 적이 있었다. 언젠가 안병무는 전태일 열사의 글을 읽고 감동에 눈물을 흘린 적 있었는데 그때 당시 옆에 있던 서울대 정진홍 교수가 “그것도 정경에 넣으시죠” 라고 제안하자 안병무는 그럴 순 없다며 거절했다고 한다. 정진홍 교수의 얘기로는 그 부분에선 결국 안병무도 기존의 정통 기독교인과 다를 바 없는 신앙인이라고 하였다. 물론 종교학자의 눈으로 볼 때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렇다고 함부로 아무 책을 정경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얘긴 당연히 결코 아니다. 그 어떤 새로운 글이 정경화된다는 것은 당연히 매우 신중하고 또 신중해야 할 필요가 있다. 내가 보기에 지금의 21세기는 모든 다양성들과 자율성들이 만개하면서 서로 교호하는 지구촌 시대이기도 하다. 그 같은 다양한 삶들에 적용되고 그럼으로써 또 응축된 새로운 지혜서들이 앞으로도 얼마든지 나와서 기존 기독교를 다시금 새롭게 변혁시키게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미 불교의 경우에도 보면, 불교 경전이란 게 한 둘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반야심경, 화엄경, 금강경 등등 불교에는 이처럼 경전들이 많다. 그런 점에서 볼 때도 앞으로 기독교의 성경도 이미 있는 기존의 정경들을 뺄 수는 없다고 해도 열린 미래를 생각한다면 새롭게 덧붙여 나올 수는 있다고 본다.

이천 년 기존 기독교의 몰락이라는 작금의 세계적인 흐름은 내가 보기에 이미 때가 무르익어 차올라 있으며, 이제는 바야흐로 무언가 거대하게 폭발할 시점에 이르렀지 않았나 싶다. 내가 느끼기에 아마도 빠르면 1-2세기 이내로 새로운 기독교에 의한 새로운 정경화 작업도 있을 수 있다고 판단된다. 전환기의 기존 기독교, 이젠 바뀌어야 산다!
 
   
▲ 미래의 기독교는 결코 자율성을 압박하지 않는다.
미래에서 온 기독교


앞으로 도래할 새롭고 건강한 기독교는 가능한 교리를 최소화하고 우리 삶의 실제적인 열매로서 이어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다. 그 자신의 삶이 제대로 변혁되지 않는 종교란 이미 종교로서의 가치를 잃은 것이다. 또한 이미 공식화된 교리조차도 이로 인해 발생된 혹은 앞으로 발생할 모든 오류와 비극들에는 겸허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진정한 생명력은 그 자신의 쓰디쓴 오류와 비극마저 먹고 소화해낼 때 제대로 성장하는 것이다.

현실적 관계론의 패러다임에 기반한 기독교는 성경을 솔직하고 건강하게 대하는 기독교이다. ‘무조건 믿어라’고 압박하는 기존 기독교가 아니라 모든 자율성들과 함께 출발하면서 하나님 나라로 설득적으로 이끄는 그러한 기독교가 바야흐로 성큼 도래하고 있다. 다가올 미래의 기독교는 자율성과 신성의 합일을 추구한다. 그럼으로써 우리네 삶을 <하나님나라화> 하는 기독교가 되고자 한다.
 
성경은 결코 존재의 자율성을 빼앗거나 압박하지 않는다. 오히려 창의적인 자율성에 기반한 신성의 획득을 추구할 뿐이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 남겨놓은 계시의 선물이다. 그것은 깨달은 자에겐 은총일 것이요, 어리석은 자에게는 화일 것이다.
 
성경, 이젠 더불어 사는 우리들의 삶 자체가 성경이 되게끔 살도록 노력하자!


( 알리는 말씀 - 2004년 11월부터 대장정에 올랐던 <전환기의 한국 기독교, 바뀌어야 산다!>시리즈가 이제 전체 연재글의 반을 하였습니다. 지금까지의 글들이 대체로 큰 뼈대를 이루는 조직신학적 작업이었다면, 앞으로의 글은 이제 실천신학에 해당하는 예배와 목회 및 교회론에 해당되는 글들이 연재될 것입니다. 기독교가 새로운 패러다임에 기반할 경우 예배와 목회 및 교회문화가 어떻게 전면적으로 새롭게 뒤바뀌게 되는 것인지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관심있게 지켜봐 주시기를 바라겠습니다.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아무쪼록  그 동안 제 글에 대해 비판적이었든 지지하셨든 간에 관심 가져주신 모든 분들에게 진심으로 고마움의 말씀을 전해드립니다. <지금 여기>에서부터 일궈나가는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주님의 평화가 우리 모두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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