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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재복음화>를 제안한다! (이민재)    
  글쓴이 : 미선이 날 짜 : 09-04-08 08:34 조회(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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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세기연이 추구하는 바와 비슷한 글을 웹상에서 만날 때는 매우 반가움이 앞선다.
그래도 기존 기독교에 대해 진지하게 <대안 기독교>를 고민을 하시는 분이 계신 것이다.
그저 이제서야 발견됨이 유감스러울뿐..!
 
 
.........................................
 
 
 
위기와 격랑의 소용돌이 속에서 
 
<재복음화>를 제안한다!
 
 
글쓴이 / 이민재 
 

 Ⅰ. 교회의 위기와 재복음화
 
이 글은 한국교회의 위기를 진단하고 그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을 제시하는 글이다. 이 글이 진단하는 위기는 한국교회가 그 동안 매진해온 ‘복음화’이며, 그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제시하는 대안은 ‘재복음화’이다. 따라서 이 글은 ‘복음화’를 지양하며 ‘재복음화’를 지향한다. 그렇다고 해서 ‘복음화’는 악이요 ‘재복음화’는 선이라는 이분법적 흑백논리를 전개하는 것이 이 글의 근본 취지는 아니다. 알다시피 복음화는 언제나 기독교를 발전시켜온 근본 동력이다. 그러나 복음화에 대한 오해와 왜곡이 기독교를 위기에 처하게 했다고 진단하기 때문에 치유책으로써 ‘재복음화’를 말하는 것일 뿐이다. 따라서 이글의 목적은 진정한 복음화의 회복에 있지 복음화의 폐기에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굳이 사족을 글머리에 적는 까닭은 이 글이 위기를 진단하는 과정에서 사용한 수사적 과장이나 단정적 어법이 혹시라도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복음화의 사명을 다하고 있는 이 땅의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지나 않을까 하는 노파심에서다. 그럴 의도는 추호도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해둔다. 다만 다소 비판적인 어투와 단정적인 논조는 복음화의 패러다임 자체가 바뀌어야 한국교회에 희망이 있겠다는 절박감의 표현이지 비판을 위한 비판 때문은 아니라는 점을 헤아려주기 바란다.

예수, 복음인가 저주인가

그러면 ‘재복음화’를 제안한다니 무슨 말인가? ‘복음화’를 지양하며 ‘재복음화’를 지향한다니 대체 복음(화)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인가? 까닭인즉 복음화의 원조인, 아니 그 자신 ‘큰 기쁨의 좋은 소식’(눅 2:10)이신 예수님이 더 이상 기쁜 소식으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당혹스런 사실 때문이다. 말 나온 김에 물어보자. “예수님은 오늘날 우리에게 복음인가?” 이 물음엔 신중하게 대답해야 한다. 그 동안 들어온 교리나 설교에 의지해서 건성으로 대답한다든지, 진지한 반성이나 깊은 성찰 없이 반사적으로 “아멘!”한다면 곤란하다. 생각해 보라. 예수님의 계명을 축복의 기술과 맞바꾼 그리스도인들에게 청빈의 도를 말씀하시는 예수님이 기쁜 소식이겠는가. 백주 대낮에 감투싸움을 벌이는 교계 지도자들에게 섬김의 도를 말씀하시는 예수님이 기쁜 소식이겠는가. 남의 교인 뺏어서라도 공룡 같이 비대해지려는 대형교회들에게 자기 비움과 나눔을 말씀하시는 예수님이 기쁜 소식이겠는가. 더 크고 화려한 교회건축에 올인하고 있는 교회들에게 성전의 해체를 예고하시는 예수님이 기쁜 소식이겠는가. 인정하기 싫지만 예수님은 오늘날 한국교회에 ‘복음’이 결코 아니다. 저주요 심판의 채찍이라 말한다면 지나친 말일까.(이 글을 쓰는 동안 받은 전화 중에서 황당한 전화가 두통 있었는데 하나는 호텔에서 온 전화요, 다른 하나는 골프장에서 온 전화다. 새해 들어 목사님들을 특별 우대해서 싸게 이용할 수 있게 해주겠단다. 어느덧 이런 전화를 받을 정도의 반열에 든 나를 기뻐해야 하나 슬퍼해야 하나?)

스스로 복음이요, 복음화의 원조이신-예수님의 공생애는 복음화의 과정이다-예수님이 기쁜 소식이 아니라 저주요 심판으로 느껴진다면 그 동안 한국교회는 ‘복음화’에 게을렀다는 말인가. 물론 아니다. 한국교회만큼 ‘복음화’에 치열하게 복무한 교회도 없을 것이다. 이천년 기독교 역사에 비해 백년 남짓한 짧은 역사로 이룬 괄목할 만한 성장은 한국교회의 복음화의 열정을 보여주고도 남는다. 교회 수 4만을 헤아리고, 목사 수 7만을 넘고, 교인 수는 천만이라지 않는가. 한국에서 파견된 선교사 수만 해도 180여개 국가에 2만 명이라지 않는가. 게다가 세계에서 10등 안에 드는 교회가 여럿 된다지 않는가. 그러면 왜 ‘재복음화’를 말하는가. 복음화에 대한 오해와 그 오해로 인한 위기 때문이다.

복음화에 대한 오해

복음화란 무엇인가.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인 예수님의 초청에 응답함으로써 인격과 삶이 변하는 것이요, 그런 변화를 위한 모든 활동과 노력이다. 물론 이 응답에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메시아)로 고백하는 일과, 복음적 가치관을 향한 근본적인 전향이 포함된다. 쉽게 말해 복음화란 예수 믿기 이전의 삶을 버리고 예수님과 함께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이다. 회개 즉 메타노이아란 이러한 근본적인 전향과 변화를 일컫는 말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이러한 복음화가 가능한 까닭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펼쳐지는 전적으로 새로운 삶의 지평 때문이다. 누가복음은 이러한 새로운 삶의 지평을 ‘자유’와 ‘은혜’라는 말로 요약한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다.”(눅 4:18-19)

따라서 복음화를 통해 예수님을 마음과 삶의 중심에 모셨다면 모든 것이 변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삶의 목적과 그것을 추구하는 방식, 인간관, 가치관, 세계관 등 모든 것이 달라지는 것이다. ‘산천도 초목도 새 것이 되고 죄인도 원수도 친구로 변하는’ 새로운 삶의 지평이 펼쳐지는 마당에 마음 씀씀이라든가 사고 패턴, 정서적 프로그램, 언어습관, 인간관계 등이 새로워지는 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얼굴 표정은 물론 존재의 향(香)과 격(格), 이미지와 분위기가 바뀌는 것은 차라리 덤이라 하겠다. 그렇다. 복음화란 근본적인 혁명인 것이다.

복음화가 이런 것이라면 이런 복음화는 어디에서 시작하는 것일까? ‘보수들’처럼 예수의 신성을 강조하는 것에서일까, 아니면 ‘진보들’처럼 예수의 인성을 강조하는 것에서일까.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맹목적인 믿음을 주입하는 것에서일까, 아니면 예수님이 가난한 민중들의 친구였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에서일까. 은유적으로 말해서 위로부터일까 아래로부터일까. 둘 다 아니다! 예수님의 공생애가 복음화의 시작이라면 예수님의 복음화는 ‘위’나 ‘아래’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다. ‘위’와 ‘아래’의 은유는 상반되어 보이지만 ‘겉’이라는 점에서는 같다. 말인즉 예수님은 공생애를 위 또는 아래로부터가 아니라 ‘안으로부터’ 시작하셨다는 것이다. 공생애(복음화)를 시작하기 전 광야에서 금식하면서 ‘안’을 다스리신 것, 즉 마귀가 끈질기게 부추겼던 물질과 갈채와 권력에의 유혹을 극복하신 것이 이런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런 예수님이었기에 때로는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될 수도 있었고, 자연스럽게 민중의 벗이 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안으로부터 시작하지 않는 복음화는 그것이 보수의 복음화든 진보의 복음화든 실패하게 되어 있다. 이것이 오늘날 한국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위기의 핵심이다. (한국사회도 예외는 아니다. 보수든 진보든 결국 안을 다스리지 못해 넘어지지 않는가.) 그렇다. 복음화란 지극히 내적인 문제요, 질적인 문제요, 깊이의 문제인 것이다. 일차적으로는 마음과 관련된 ‘변화’의 문제요, 이차적으로는 존재와 관련된 ‘변형’의 문제요, 그 결과로서 세계와 관련된 ‘변혁’의 문제이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고백하건데 오늘날 우리의 의식 속에서 복음화가 교회의 양적 팽창과 외형적 성장을 의미한다는 것처럼 명징한 사실은 없다. 우리들의 무의식에서조차 복음화는, 그리고 복음화의 전략인 전도는 고객 확보를 위한 기업의 마케팅 전략과 너무도 닮았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는 사이 목회는 비즈니스가 되어버렸고, 이렇게 말하고 싶진 않지만, 복음은 미끼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한국교회의 ‘복음화’가 얼마나 외적인 차원에 치우쳤는지는 ‘복음화’라는 단어가 언제나 공간 개념과 결합되어 사용되는 현상을 지적하는 것으로 족하다. ‘전국’ 복음화니 ‘캠퍼스’ 복음화니 ‘세계’ 복음화니 하는 말들이 그렇다. 예를 들어, 만일 어떤 마을이나 지역에 교회가 세워지면 그 마을은 복음화된 것이다. 그 결과 오늘날 한국에는 ‘전국 복음화’라는 이름으로 교회가 없는 지역이 거의 없을 정도이고, 등록된 신자들의 수는 천만을 헤아린다고 보고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 수치는 명목상 신자의 수로서 복음적 삶을 결단한 실질적 신자의 수와는 큰 차이가 난다. 따라서 공간개념과 관련된 복음화는 ‘삶의’ 복음화나 ‘가치의’ 복음화를 뜻하는 진정한 복음화와는 거리가 있는 셈이다.

이 대목에서 마태복음 28장 19절을 떠올리는 독자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그리고 ‘모든 족속’에 방점을 찍으면서 모든 족속, 모든 민족, 따라서 모든 나라와 모든 지역에 복음을 전하라는 ‘지상 명령’ 아닌가, 하고 되물을지 모르겠다. 그럼으로써 복음화란 모든 지역에 교회를 세우는 것이 아닌가 하면서 비약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물음이나 비약은 그 다음 구절인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20)를 신중하게 고려하지 않은 성급한 결론이다. 여기서 복음화는 ‘가르침을 지키게 하는 것’ 즉 계명의 실천으로 의미가 규정되고 있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위기

그러면 이러한 복음화에 대한 오해가 일으킨 위기는 무엇인가? 신앙의 위기, 삶의 위기, 교회의 위기 이렇게 셋이다.

첫째, 신앙의 위기. 이것은 복음화에 대한 오해가 기독교 신앙을 변질시키고 심각하게 훼손시켰다는 문제의식이다. 전후 사정은 이렇다. 복음화가 양적 팽창이나 외형적 성장을 의미하다 보니 어떻게 해서든지 많은 사람들을 끌어모아야 했다. 그러자니 산상설교의 계명을 지켜야 한다든지, 복음적 가치관으로 살아야 한다든지, 인격이 변하고 성숙해야 한다든지, 예수님처럼 자신을 비우고 나눔과 섬김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등의 부담스러운 말은 꺼낼 수도 없었다. 그 대신 이렇게 말하기 시작했다. 믿으면 원하는 게 다 이루어진다고. 믿으면 부자 되고, 일등하고, 합격하고, 성공하고, 출세한다고…. 아아, 그럼으로써 한국교회는 기독교 신앙을 ‘신념의 마력’이나 ‘적극적 사고방식’, ‘긍정의 힘’이나 ‘끌어당김의 법칙’ 같은 현대판 주술로 왜곡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주술’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인간의 탐욕과 야합했을 때 믿음은 더 이상 ‘예수의 길’과 상관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믿음은 더 이상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는 것도, 복음적 삶을 사는 것도, 예수님을 닮고 계명을 지키는 것도 아니게 된 것이다. 기껏해야 욕망 충족을 위한 정신의 테크닉이나 성공을 위한 처세술에 지나지 않았다고나 할까? 오죽하면 ‘예수 안 믿는 목사, 예수 안 믿는 교인’이라는 제목의 책이나 ‘예수 없는 예수 교회’라는 책이 세간에 나돌 지경이 되었을까.

둘째, 삶의 위기. 이것은 기독교 신앙에서 삶이 소외되는 현상, 즉 신앙과 삶이 일치하지 않는 현상에 대한 문제의식이다. 어쩌면 이것은 왜곡된 복음화의 당연한 귀결이다. 반복하지만 기존의 복음화는 마음 다스리기를 통한 존재의 변화나 가치관의 변화, 그로 인한 삶과 세계의 변혁에는 큰 관심이 없다. 양적 팽창, 수적 증가, 지리적 확장과 그것을 수치화한 통계가 중요할 뿐이다. 신앙과 삶이 분리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삶이 신앙에서 소외되는 이러한 현상은 신앙과 상식의 관계를 생각할 때 분명해진다. 신앙과 상식의 관계는 어떻다고 생각하는가? 두말하면 잔소리다. 계시와 기적과 맞닿아 있는 기독교 신앙은 상식이 아니다. 상식의 영역을 초월하는 신비의 영역과 무관하다면 기독교 신앙은 더 이상 신앙이 아니다. 그러나 오해해서는 안 된다. 신앙은 상식이 아니라고 말한다고 해서 상식 이하라는 말은 아니니까. 그렇다. 신앙은 상식을 포함하면서도 초월하는 것이지, 상식 이하나 몰상식은 아닌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 요즘 세상에 진정한 기적이란 기독교인들이 상식적으로 되는 것이라는, 세간에 떠도는 슬픈 농담은 무슨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인가. 시민사회가 민주화과정에서 획득한 상식과 양심에도 못 미치는 한국교회가 과연 어떻게 동시대인의 삶에 개입할 수 있겠는가. 한국교회가 신비체험에 집착하면서 자기방어에 몰두하거나 편협한 교리를 고집하면서 점점 더 배타적인 집단으로 되어가는 까닭은 시대의 상식과 양심을 존중하면서도 궁극적인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계시와 신비를 잃었기 때문 아닌가. 그리고 이런 현상들이야말로 삶을 소외시키고 있는 신앙의 명백한 징후 아닌가.

셋째, 교회의 위기. 이것은 오늘날의 한국교회는 더 이상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라는 문제의식이다. 이 점은 앞에서의 묘사만으로도 충분하다. 조금 더 부연하면, 오늘날의 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훈과 계명이 이끌어가는 교회가 아니다. 주님의 가르침보다는 목회자의 성공과 명예와 권력 욕구라는 은폐된 동력에 의해 이끌려가는 교회다. 교회의 ‘기초’는 목회자의 욕심이며, 교회의 ‘모퉁이돌’은 세포화된 조직이며, 교회의 ‘머리’는 목회자의 야망이다. 디모데후서 3장 15절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이라는 표현에 주목하자. ‘믿음’이면 다 ‘믿음’이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도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그리스도 “밖에” 있는 믿음’도 있다는 말일 터! 아, 그러고 보니 한국교회의 형편이 그 지경인 것이다.
 
전도인가 영성인가

이쯤만 하더라도 오늘날 한국교회의 과제가 무엇인지 분명해진다. 복음화에 대한 오해가 위기를 초래했다면 위기를 극복하는 길은 하나다. 복음화의 진정한 의미를 되살리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재복음화’라 부르고 싶은 것이다. 기존의 복음화가 교인수의 증가에 관심을 갖는다면, 재복음화는 내적 변화에 관심을 갖는다. 기존의 복음화가 교회건축을 목표로 한다면, 재복음화는 존재의 변형을 목표로 한다. 기존의 복음화가 세속적 축복을 추구한다면, 재복음화는 계명의 실천을 추구한다. 기존의 복음화가 ‘겉’에 치중한다면, 재복음화는 ‘안’을 다스린다. 기존의 복음화가 탐욕과 야합했다면, 재복음화는 하나님의 뜻에 헌신한다. 기존의 복음화가 현대판 주술에 빠졌다면, 재복음화는 예수의 신앙과 실천을 내면화한다. 기존의 복음화가 성공의 처세술로 전락했다면, 재복음화는 복음적 가치관에 투신한다. 기존의 복음화가 삶을 소외시켰다면, 재복음화는 삶 속에 성육신한다. 기존의 복음화가 그리스도 ‘밖에’ 있는 믿음을 대변한다면, 재복음화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을 증언한다. 기존의 복음화가 그리스도인을 통계상의 유령으로 만들었다면, 재복음화는 그리스도인을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 재창조한다.

재복음화가 한국교회의 위기를 극복할 대안이라면 그것을 구체화할 수 있는 전략은 무엇인가? 그 동안 한국교회가 매진해온 복음화의 전략은 두 말 나위 없이 전도다.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치는 노방전도에서 시작하여, 지하철 전도, 관계전도, 이슬비 전도, 전도 폭발, 사영리, 태신자 운동, 고구마 전도, 진돗개 전도, 알파코스 등 헤아릴 수 없는 전도 전략이 홍수를 이루고 있다. 내가 속한 감리교회만 하더라도 수년 전부터 ‘300만 전도운동’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전도에 힘쓸 것을 독려하고 있다. 가톨릭교도가 74.4% 증가한 반면, 개신교인 수는 1.6% 감소했다는 문광부 통계(2005년)는 이러한 전도 운동에 더욱 박차를 가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어서 광주복음화니 영남복음화니 하는 대형 전도집회가 계속되었고, 2007년에는 개신교 연합으로 1907년의 대부흥운동을 재현하려는 대형집회가 상암월드컵 경기장에서 개최되기도 했다. 이 모두가 감소하는 교인 수에 대한 초조감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질문 하나 하겠다. “과연 지금 한국교회는 전도할 때인가?” 감히 이런 불량한(?) 물음을 던지는 이유는 재복음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전도도 별 의미가 없겠다는 생각이 자꾸 들기 때문이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예수님이 더 이상 복음이 아니라 저주인 상황에서, 믿음이 현대판 주술과 처세술로 전락한 상황에서, 복음화가 삶과 가치관의 질적 변화가 아니라 외적 성장에의 욕망을 뜻하는 상황에서 무턱대고 사람들을 교회로 끌어들여 뭘 하겠다는 것인가. 이 시대의 지친 영혼을 살찌울 푸짐한 영적 식탁도 마련하지 못하고, 이 시대의 상처를 치유할 따뜻한 사랑의 손길도 준비하지 않은 채 감히 어떻게 사람들을 초대할 생각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현대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를 초래한 ‘탐욕’의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가난하고 맑은’ 영성과 하나님을 담을 수 있는 ‘깨끗한’ 그릇을 준비하지 못한 상황에서 교인수만 자꾸 늘여서 뭘 하겠다는 것인가. 요즘 사람들은 까닭 없이 교회를 등지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복음이라고 말하면서도 예수님을 닮으려는 마음이 없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마침내 눈치 채고 만 것이다. 그리고 자신들은 이 위선을 변명하기 위한 통계상의 유령에 불과했다는 불쾌한 사실을 깨닫고 만 것이다. 생각 있는 사람으로서 누가 교회에 남고 싶어하겠는가.

이같은 이유로 복음화의 전략인 ‘전도’는 지양되어야 하는 것이다. 오해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전도 무용론을 펴려는 것은 아니니까. 전도 없이 어떻게 기독교가 가능했겠는가. 기독교의 역사는 전도의 역사 아닌가. 그럼에도 전도의 지양을 말하는 까닭은 한시적이고 잠정적으로 매진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요, 그것이 재복음화라는 것이다. 재복음화가 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전도도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거니와 혹여 신자의 수가 늘어난다고 해도,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 재앙일 수 있기 때문이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재복음화만큼 최선의 전도전략이 없기 때문이다. 이치가 분명하지 않은가.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적 가치를 내면화하고 복음의 향기를 흩날리는 것만큼 훌륭한 전도의 길이 또 어디 있겠는가.

전도가 아니라면 재복음화의 전략은 무엇인가? 복음화의 전략이 전도였다면, 재복음화의 그것은 영성이다. 재복음화란 광야 40일 금식기도를 통해 물질과 명예와 권력에의 욕망을 뿌리 뽑고 공생애(복음화)를 시작하신 예수님과 함께 시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위로부터 시작하는 것도(보수), 아래로부터 시작하는 것도(진보) 아닌 ‘안’으로부터 시작하는 복음화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전략’이라는 말이다. 이 말은 영성과 어울리지 않는다. 영성은 전략이 아니라, 그냥 받아들이고 걸어야 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복음화가 전도 전략으로 성취하는 것이라면, 재복음화는 ‘영성의 길’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Ⅱ. 재복음화와 영성의 길

이제 영성의 길을 통한 재복음화의 내용에 대해 이야기할 차례다. 재복음화의 구체적 내용은 기존의 복음화가 일으킨 위기―신앙의 위기, 삶의 위기, 교회의 위기―를 극복하려는 노력으로부터 규정될 수 있다. 따라서 그것은 ‘신앙’과 ‘삶’과 ‘교회’의 세 영역으로 범주화될 수 있으며, 여기에 이 모든 것의 실천적 토대인 ‘기도’의 범주가 추가된다. 결국 재복음화를 논의하는 범주는 넷이다. 그리고 각 범주에 해당하는 내용들은 위기를 극복하려는 노력이므로 지양할 것과 지향할 것으로 구성된다.
 
신앙의 회복

재복음화는 신앙의 위기를 극복하여 진정한 기독교적 신앙을 회복하려고 한다. 이때 재복음화가 지양하려는 신앙의 위기는 비는 신앙, 기적을 추구하는 신앙, 축복을 구하는 신앙, 간증 신앙 넷이며, 지향하려는 대안은 배우는 신앙, 수덕신앙, 지복을 추구하는 신앙, 죄의 고백 넷이다.

① 비는 신앙에서 배우는 신앙으로
모든 종교에는 절대자의 도움으로 삶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비는’ 차원이 있다. 기독교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궁극적 지향이 분명하지 않을 때 ‘비는 신앙’은 욕망과 야합하여 신앙을 타락시킨다. 풍요와 다산의 종교인 바알종교가 순수한 야웨신앙을 오염시켰던 것처럼, 오늘날 한국교회의 ‘비는 신앙’은 현대적 풍요와 다산을 뜻하는 ‘축복’을 약속하면서 기독교 신앙을 ‘기복적’이며 ‘무속적’ 신앙으로 변질시켰다. 그러는 과정에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계명은 무시되었다. 예수의 계명을 무시하는 교회는 기독교회가 아니다. 초대교회의 신앙은 복받기 위해 비는 신앙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본받으려는’(살전 1:6, 고전 11:1) 신앙이었다.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배우고 본받고 닮는’ 신앙의 본을 보였다. 기독교는 ‘기독(基督)’ 즉 ‘그리스도’를 ‘가르치고 배우는’(敎) 종교 아닌가.

② 기적에서 수덕으로
종교의 ‘비는’ 차원에 상응하는 것이 ‘기적’이다. 기적은 종교의 기본 요소이며, 기적이 없다면 종교는 메마른 교리체계나 조직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모든 초자연적 현상이 기적은 아니며, 더욱이 그런 현상을 성령과 관련시킬 때 문제는 심각하다. 그런데 한국교회에서는 그런 일이 비일비재하다. 성령은 치유력을 갖고 있는 초능력이나 초자연적 에너지가 아니다. 마술도 요술도 아니다. ‘예수를 주로 시인하게 하는 영’(고전 12:3)이요,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을 생각나게 하는 분’(요 14:26)이요, ‘가르치는 영’이요, 그래서 ‘진리의 영’(요 16:13)이다. 예수 없이 성령 없고, 성령 없이 예수 없다. 성령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칭의의 은총을 받은 사람들을 도와 성화의 길을 걷게 하는 영이다. 따라서 한국교회는 기적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성령의 도움으로 예수의 길을 걷는 ‘수덕(修德) 신앙’으로 나아가야 한다. 예수 믿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벗어났으니 이제는 몸을 닦고, 마음을 닦고, 행실을 닦아 ‘생명과 성령의 법’을 지키도록 힘써야 하지 않겠는가.

③ 축복에서 지복으로
비는 신앙과 기적을 추구하는 신앙의 밑바닥에는 ‘축복’에 대한 갈망이 숨어있다. 그래서 강단에서는 ‘축복’에 관한 설교가 넘친다. 축복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부의 획득, 성공, 출세, 형통, 건강, 합격, 학벌, 지위, 권력 같은 것만을 의미할 때는 문제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런 축복을 획득하는 수단이 될 때 그것은 심각한 불신앙이 된다. 또한 이런 축복들이 주로 외적이며 물질적인 차원에 머물고 있다는 점도 문제다. 성경은 물론 이런 복을 말하지만, 악인의 꾀를 좇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고, 오만한 자리에 앉지 않는 복에 대해서도 말하며, ‘신령한 복’(엡 1:3)에 대해서도 말하며, 마음이 가난하고 애통하는 복에 대해서도 말한다.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없어도 하나님으로 만족하는 복에 대해서도 말한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이런 복을 아는가. 하나님과의 깊고 친밀한 사귐에서 누리게 되는 저 깊고 그윽한 행복,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하기 어려운 ‘지극한 행복’(至福)을 아는가. 오늘의 강단에는 재산도 지위도 안전장치도 기꺼이 버리게 하는 이런 ‘지복’에 대한 설교가 있는가.

④ 간증에서 죄의 고백으로
기적과 축복에 대한 갈망은 간증을 통해 확산된다. 물론 간증은 결코 나쁜 게 아니다. 간증은 하나님을 체험하게 하고, 영적 세계에 눈을 뜨게 하고, 신앙에 생기와 활력을 불어넣는다. 그러나 간증에는 역기능도 있다. 간증은 시간을 들이고 정성을 기울여야 터득할 수 있는 신앙의 진리보다는 순간적인 재미와 감동을 좇는다. 간증은 종종 과장되거나 하나님보다는 간증자를 드러낸다. 간증은 똑같은 현상을 갈망하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다양한 섭리를 획일적인 틀에 가둔다. 극적인 간증에 맛들이면 일상의 은총에 대한 감각이 무뎌진다. 기적과 요행을 바라게 하는 간증은 삶의 문제를 주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성숙한 인격의 성장을 방해한다. 간증은 성경 없이도 가능한 미신과 기복신앙에 빠지게 한다. 이제 한국교회는 영웅적인 간증에 대한 도취에서 깨어나 죄의 고백을 통한 용서의 은혜를 회복해야 한다. 간증을 통해 쏟아지는 성공담을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기보다는 죄의 고백 속에 담긴 실패담을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다시 경험해야 한다.
 
삶의 회복
재복음화는 삶의 위기를 극복하려고 한다. 신앙에서 삶이 소외되는 현상, 즉 신앙과 삶이 겉도는 현상을 지양하려는 것이다. 신앙에서 삶을 소외시킨 요인은 교리주의, 전통주의, 상벌신앙, 그리고 예속신앙 넷이다. 재복음화가 지향하는 삶의 회복은 삶 자체에 대한 관심과, 삶의 경험을 소중하게 여기는 정신과, 축제적 삶을 지향하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과, 그리스도의 공로로 이루어진 자유를 지금 여기에서 누리는 것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때 신앙은 삶에 방향을 주며, 삶은 신앙에 생기와 풍부한 내용을 준다.
 
① 교리에서 삶으로
교리는 삶을 신앙에서 소외시킨 가장 큰 요인이다. 교리란 무엇인가? 세속의 풍조와 이단의 위험에서 지켜주는 신앙의 ‘정답’이다. 그러나 교리란 특정한 삶의 자리에서 ‘정식화’(定式化)된 것이므로 다양하며, 따라서 상대적이다. 그런데도 교리를 절대화하고 맹신한다면 교리는 폭력이 되며 소통은 단절된다. 이뿐 아니라 절대화된 교리는 합리적 이성의 지적 정직성을 억압함으로써 위선적이며 유아적 신앙을 초래한다. 교리에는 세 종류가 있다. 첫째는 보수의 ‘신조’이며, 둘째는 진보의 ‘이념’이다. 이 둘의 내용은 상반되지만, 절대적·배타적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보수가 ‘이단’이라고 하는 것을 진보는 ‘반동’(또는 꼴통)이라고 부를 뿐이다. 세 번째로 ‘목사님 말씀’이라는 아주 고약한 교리(?)가 있다. 이 교리는 때로 신조나 이념보다 더 절대적이다. 주일성수 하면 운수대통하고 안 하면 재수 옴 붙는다, 십일조하면 복받고 안하면 망한다, 전도하면 상급이 크고 안 하면 쪽박 찬다, 따위의 성장주의 율법이 여기에 속한다. 재복음화는 교리보다는 삶의 경험에서 깨달은 통찰을 소중하게 여긴다. 물론 한 개인의 삶의 경험과 통찰은 단편적이며 상대적이지만, 이것을 겸허하게 인정하고 열린 마음으로 소통할 때 절대적 진리를 ‘함께’ 찾아가는 공동체신앙과 평등공동체가 가능하다. 이때 기독교는 상호비방의 종교가 아니라 상호존중의 종교로 탈바꿈할 것이다. 이 시대는 삶의 깨달음과 통찰을 격려할 줄 아는 열린 기독교의 출현을 고대하고 있다.

② 전통에서 경험으로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전통이 중요한가 경험이 중요한가. 정답은 “둘 다 중요하다”이다. 그러나 전통이 경험을 억압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경험이 전통보다 중요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오해하지 말자. 여기서 말하는 경험은 방언, 입신, 환상 같은 종교적 체험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삶의 경험’을 뜻한다. 따라서 “전통에서 경험으로”라는 지향은 전통을 통해 전달된 신앙의 언어들이 삶의 경험의 빛에서 재조명·재해석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함축한다. 그렇지 않으면 신앙의 언어들은 삶의 리얼리티와 단절된 사어(死語)나 게토 언어가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삼위일체’는 맹목적으로 믿어야 하는 교리인가, 아니면 삶의 경험과 연관된 기독교 신앙의 진수인가. 후자이다. 성부 하나님은 삶의 ‘근거와 목적’이 심각하게 문제가 되는 삶의 경험에서 유의미하게 말해질 수 있다.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마음’의 어둠(죄)으로 인한 불의와 부조리에 대한 경험에서 새롭게 고백될 수 있다. 성령 하나님은 이기적 욕망을 동력으로 한 혼돈의 경험에서 새로운 삶의 동력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삼위일체만이 아니다. 죄사함, 중생, 칭의, 성화, 영생 같은 신앙의 언어들 역시 삶의 경험의 빛에서 재조명·재해석 되어야 한다.

③ 상벌에서 축제로
한국교회의 성장주의의 바탕에는 상벌신앙이 깔려 있다. 앞에서도 언급한 주일성수나 십일조나 전도가 언급되는 맥락은 예외 없이 그렇다. 주일성수 안 하고, 십일조 안 하고, 전도 안 해서 불행한 일을 당했지만 다시 했더니 대박이 터졌다는 얘기는 강단에서 난무한다. 그러니 죽기살기로 교회출석 해야 하고, 십일조 해야 하고, 교인 뺏으러 돌아다니지 않으면 안 된다. 복 받으려면 다른 도리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상벌신앙은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관념을 조장한다. ‘두려운’ 하나님이 그것이다. 하나님은 경찰관이거나 고리대금업자거나 조폭이다. 이런 하나님을 믿는 신앙생활이 즐거울 리 없다. 예수님이 ‘아빠’라고 부르라신 하나님은 지치고 상한 영혼에게 ‘연회를 베푸시는’ 하나님이시다. 이런 하나님을 소개하는 예수님은 포도주 떨어진 잔치집에 최상품 포도주를 공급하는 분이시다. 자신에게 있는 신적 권능을 잔치의 흥이 깨지지 않기 위해 발휘하신 분이신 것이다. 이런 잔치의 기쁨과 즐거움이 한국 기독교에 있는가.

④ 예속에서 자유로
한국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진정 자유인인가. 예수 믿어 죄사함 받았다지만 죄사함의 자유를 누리고 있는가. 죄사함이란 무엇인가. 죄의 정화 아닌가. 죄란 태어나서 현재까지의 시간의 흐름 속에서 행한 온갖 불의와 악행 아닌가. 아니 그 불의와 악행의 뿌리인 ‘마음’ 그 자체 아닌가. 과거라는 시간의 축적과 함께 형성된 왜곡된 성격과 내면의 어둠과 마음의 상처가 빚어낸 온갖 모순 아닌가. 그렇다면 죄사함이란 과거로부터의 자유, 시간의 굴레로부터의 해방 아닌가. 그럼으로써 지금, 현재라는 ‘순간’에 현존하는 것 아닌가. 오늘에 담겨 있는 은총과 행복을 깨닫고 맛보고 누리는 것 아닌가. 그러기에 지금 자족하는 삶 아닌가. 그럼으로써 내일에 대한 염려에서도 자유로워지는 것 아닌가. 그런데 죄사함 받았다는 우리는 왜 그렇게 욕망에 예속되어 있는 것인가. 왜 여전히 자족할 줄 모르며, 나눌 줄 모르며, 베풀 줄 모르는 것인가. 죄사함 받았다는 것을 교리적으로 암송하고 있을 뿐이지 삶의 현실은 여전히 죄의 지배 아래 있기 때문 아닌가. 그럼으로써 우리는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자유를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욕보이고 있는 것 아닌가.
 
교회의 회복

재복음화가 관심을 갖는 셋째 범주는 교회이다. 여기서 지양하고자 하는 교회의 위기 역시 넷이다. 첫째, 개신교 전통을 기독교 전통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 둘째, 건물 중심의 교회관의 폐해. 셋째, 교회 직분과 관련된 계급의식. 넷째, 성장주의에 결부된 빈익빈 부익부 현상. 이것을 극복하는 것은 기독교 전통을 전체적인 시각으로 보는 것과, 사람을 세우는 교회, 은사와 잠재성을 구현하는 평등공동체, 그리고 나눔과 연대의 정신이다.

① 부분에서 전체로
앞선 논의를 통해 드러난 ‘지향들’은 결코 새로운 것도 독창적인 것도 아니다. 기독교 2천년 역사의 중심을 관통하는 신앙의 본류이다. 이단의 위협, 세속화의 위기, 정치적 박해 등 여러 가지 환란과 어려움 속에서도 목숨을 걸고 지켜온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다. 따라서 한국 개신교회는 500년 역사의 좁은 시각에서 벗어나 기독교 역사 전체를 보아야 한다. 개신교는 기독교의 발전과정과 역사의 진보과정과 하나님의 구원사 속에서 꼭 출현해야 했지만, 자신이 기독교의 전부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만일 그렇다면 그것이야말로 ‘장님 코끼리 만지기’의 오류를 되풀이하는 것이며, 자신 이외의 모든 기독교 전통을 이단으로 정죄하는 어리석음을 반복하는 것이다. 이제 한국교회는 자신의 교파 전통을 존중하면서도 전체 기독교 영성 전통에 문을 열어야 한다. 그리고 그 속에 숨어 있는 영적 가르침을 끊임없이 발굴하고, 배우고, 실천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 가르침들은 모든 기독교인들이 창조적으로 계승·발전·공유해야할 보고(寶庫)요 광맥 아닌가. 개신교가 새로운 종교개혁의 대상이 된 오늘, 기독교 신앙의 본류와 화해하는 일은 시급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② 건물에서 사람으로
한국교회의 급성장은 세계교회가 놀라는 ‘기적’이다. 아시아를 넘어서 세계 최대인 교회도 여럿 있고, 교회 밀도도 최고라고 한다. 목회성공의 여부를 교회 건축에서 찾은 까닭이다. 개척교회의 최대 목표는 월세에서 전세, 지하에서 2층을 거쳐 단독 건물을 짓는 것이다. 더 크고 화려한 건물을 짓고자 하는 욕심은 꺼질 줄 모른다. 그러나 성경은 교회를 건물로 이해하지 않는다. 물론 구약의 경우 건물로서의 성전은 매우 중요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전을 폐기하셨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 2:19)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이다. 교회의 머리도(골 1:18), 교회의 기초도(마 16:16-18), 교회의 모퉁이돌도 그리스도이다.(엡 2:20-22) 성도는 또 다른 교회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3:16) 사람이 교회라는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이 모인 ‘에클레시아’가 교회다. 한국교회는 복음을 성전에 가두지 말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는 ‘사람들의’ 네트워크를 통해 일상 속으로 해방시켜야 한다.

③ 직분에서 은사로
재복음화가 반드시 극복해야 하는 것이 집사, 권사, 장로 같은 직분이다. 직분은 더 이상 섬김과 봉사와 희생의 직임이 아니다. 일종의 명예나 계급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그런가, 몇몇 대형교회들에서는 직분의 금액이 정해져 있다고 한다. 권사는 몇 백, 장로는 몇 천 하는 식으로…. 돈 없는 사람은 교회도 못 다닌다는 세간의 풍문이 악의적 비방이 결코 아닌 것이다. 이런 한국교회가 섬기는 교회가 될 수 없음은 자명하다. 이런 교회에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 할 것 없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인” 평등공동체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따라서 직분은 없애든지, 그게 힘들면 나이에 따라 주는 명예직으로나 생각하는 것이 차라리 솔직하지 않을까. ‘고(故) 아무개 성도’보다는 ‘고 아무개 장로’가 더 폼나(?) 보이니까. 교회의 고귀한 직분에 시비를 걸어서 미안하지만 없는 얘기를 하는 건 아니지 않은가. 교회는 직분이 아니라 구성원들 하나하나가 갖고 있는 은사와 잠재성이 존중되고 계발되고 발휘되는 곳이어야 하며, 그것이 교회를 세우는 벽돌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누구나 교회를 찾지 않겠는가.

④ 성장에서 나눔으로
성장주의의 폐해는 이 글 곳곳에서 언급한 바 있다. 여기서 하나 더 덧붙인다면 그것은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다. 대형교회는 잘 짜인 프로그램이나 이벤트를 통하여, 그리고 각종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교인들을 불리기에 혈안이 되어 있고, 그럴 여력이 없는 작은 교회들은 있는 교인들마저 빼앗기면서 점점 더 빈곤해지고 있다. 이런 악순환이 되풀이되면서 작은 교회의 고급 인력들이 의욕상실증이나 무기력증의 늪에 빠져들고 있다. 능력의 유무나 자본주의 논리로 이런 현실을 합리화하지 말자. 영성의 맑기나 순수함, 설교의 진실성이나 사역에 대한 소명감으로 치면 작은 교회 목회자라고 해서 결코 뒤지지 않는다. 마중물이 땅 속에 풍부하게 저장되어 있는 물을 끌어올리듯 작더라도 지속적인 나눔과 연대의 실천이 주는 감동은 작은 교회의 능력과 잠재성을 충분히 끌어낼 수 있다. 이때 교회는 섬처럼 고립된 죽은 건물들이 아니라 사랑과 감동으로 네트워크화된 살아있는 유기체가 될 것이며, 그러한 네트워크를 통해 이 시대를 구원할 생명의 에너지는 힘차게 퍼져나갈 것이다.

기도의 회복

이제까지 논의한 재복음화의 과제는 그에 적합한 영적 훈련으로 뒷받침되지 않으면 결코 열매를 거둘 수 없다. 따라서 재복음화가 마지막으로 관심을 갖는 범주는 영적 훈련의 핵심인 ‘기도’이다. 여기서 재복음화가 지양하고자 하는 영적 훈련은 비상의 기도, 외면적 기도, 통성기도, 소음의 폐해이다. 재복음화가 지향하는 새로운 영적 훈련은 일상의 기도, 내면의 기도, 묵상과 관상기도, 그리고 침묵의 회복이다.

① 비상에서 일상으로
왜 한국교회는 복음화를 왜곡했을까? 먹고 살기 힘들어서 그랬다. 생존 자체가 문제가 되는 ‘비상한’ 상황을 일제시대와 6·25를 거치면서 계속 겪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밥보다는 문화, 생존보다는 삶의 질을 추구하는 시대이다. 비상시의 기적이 아니라 일상의 의미와 행복을 찾아야 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또 군사독재정권을 무너뜨린 민주화의 과정은 시민사회의 양심과 도덕성과 의식의 수준을 향상시켰다. 욕망보다는 가치를 고려해야 하는 시대에 돌입한 것이다. 삶의 패러다임이 근본적으로 바뀐 것인데 교회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요구하는 영적 훈련을 제공하지 못했다. 비상시의 영성만 알았지 일상의 영성에 대해서는 무지했던 것이다. ‘주여 삼창’, ‘불길 같은 주 성령’ ‘할렐루야, 아멘!’에는 익숙해도 일상의 도처에 현존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감수성은 없으며, 햇살처럼 소리 없이 임재하시는 ‘비둘기 같이 온유한’ 성령은 아예 외면한다. 삶의 대부분은 비상(非常)이 아니라 일상(日常)이다. 따라서 오늘날 한국교회는 비상한 현실에서 뿐만 아니라 일상의 모든 시간과 공간에서 통용될 수 있는 영성의 계발을 절실하게 필요로 한다. 영적 훈련의 방향을 비상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일상이라는 보편 지평으로 재조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② 바깥에서 안으로
예수님이 복음이라는 사실을 새롭게 경험하려면 보수의 길을 걸어야 할까. 진보의 길을 걸어야 할까.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인가,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신가? 복음화는 ‘예수천당 불신지옥’인가, 가난한 자들과의 연대인가? 구원은 개인구원인가 사회구원인가? 천국은 저 위 하늘에 있는가, 하나님의 뜻이 실현된 인류역사인가? 공간의 은유를 사용해서 묻는다면 재복음화는 ‘위’(신성)로부터의 길을 택해야 할까, ‘아래’(인성)로부터의 길을 택해야 할까? 정답은 이 모두이면서도 이 모두가 아니다. 보수건 진보건 예수님에게서 나온 것일진대 예수님은 보수이면서도 진보다. 하지만 예수님에게는 보수가 다 이해할 수 없는 뭔가가 있고, 진보가 다 체험할 수 없는 뭔가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보수도 아니고 진보도 아니다. 따라서 한국교회는 보수와 진보의 이분법에서 벗어나야 한다. 보수든 진보든, 위든 아래든 ‘신조’와 ‘이념’이라는 ‘바깥’에서 부과된 타율에 머물 뿐이다. ‘신조’와 ‘이념’을 생성시킨 내밀한 경험을 서로 무시함은 물론이다. 그래서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바깥’에서는 하나님이신 예수님과 인간이신 예수님이 서로 충돌하지만 ‘안’에서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며 참 인간이시다. ‘바깥’에서 보수의 복음과 진보의 복음은 서로 싸우지만 ‘안’에서 예수님은 보수와 진보를 포월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서 다시 한 번 ‘큰 기쁨의 좋은 소식’으로 경험되는 것이다.

③ 통성에서 관상으로
기도에는 청원기도, 묵상기도, 관상기도 세 가지가 있다. 청원기도가 하나님께 소원을 ‘말하는’ 기도라면, 묵상기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기도이며, 관상기도는 하나님과 ‘하나되는’ 기도이다. 한국교회 신자들에게 가장 익숙한 기도는 물론 청원기도일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통성기도다. 한국교회는 통성기도를 통해 삶의 문제들을 극복했고, 교회를 부흥시켰다. 통성기도는 분명히 성서적인 근거를 갖고 있다. 그러나 통성기도의 결정적인 한계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다는 것과 문제해결에 치중한다는 점이다. 시공의 제약을 받는다는 이 사실이야말로 통성기도가 일상의 기도가 아니라 ‘비상’의 기도임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문제해결에 치중하다 보니 인격의 성숙을 통한 계명의 실천을 등한히 했음도 당연하다. 결국 복음화의 왜곡과 그로 인한 기독교의 위기를 초래했다는 혐의에서 통성기도는 자유롭지 못하다. 이제 한국교회는 묵상과 관상기도를 통해 통성기도가 가진 한계를 보완·극복해야 한다. 묵상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기도 내용의 변화), 관상기도를 통해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일치’로 나아가야 한다.(존재의 변화) 그래야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으며, 하나님과의 일치 속에서 ‘지복’을 누릴 수 있으며, 복음적 가치를 실천할 수 있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재창조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 그리스도인들은 “뜻이 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통성으로 간절히 부르짖으며 기도할 것이다.

④ 소음에서 침묵으로
통성기도의 외형적 특징이 ‘소음’이라면, 묵상과 관상의 그것은 ‘침묵’이다. 잘라 말해 한국교회가 재복음화의 과제를 완수하려면 침묵의 가치를 강조하고 또 강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제까지 열거한 한국교회의 모든 문제들은 침묵을 사랑하지 않거나 무시했기 때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침묵이란 무엇인가? 단순히 공기를 진동시키는 물리적 파동으로서의 ‘소리 없음’ 또는 ‘말 없음’이 아니다. 아무리 소음이 없고 말 없는 곳에 앉아 있더라도 우리의 감각과 생각과 의지가 분주한 활동을 멈추지 않고 있다면 침묵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감각이 쾌감을 느끼려고 하고, 생각이 쾌감을 성취하는 방법을 모색하고, 의지가 그 방법을 실천하려고 작용하는 한 우리는 내적 소음 속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침묵이란 분주한 마음의 활동이 멈추는 것이다. 이러한 ‘멈춤’으로서의 침묵이 이루어질 때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를 신조에 의해 믿는 것이 아니라 ‘현존’으로 경험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현존 속에서 무슨 말이 필요한가. 사랑하는 님의 품에 있을 때 무슨 말이 필요한가. 우리는 그냥 있는다. 그 품(현존)의 그윽함을 맛본다. 그리고 조용히 기다린다. 님의 말씀을. 님의 말씀은 언제나 한결같다. ‘너를 사랑한다!’ 이러한 사랑의 언어는 삶의 모든 염려와 시름을 잊게 한다. 삶의 응어리와 마음의 상처를 치유한다. 침묵 속에서 맛보는 이러한 하나님 맛은 돈과 명예와 권력이 줄 수 있는 모든 쾌감을 능가한다. 하므로 어떻게 하나님 이름으로 세속적 축복, 이기적 욕망의 만족을 추구할 생각을 하겠는가. 이미 그분 안에 모든 것이 있고, 그분 안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졌는데 대체 뭐가 더 필요하단 말인가.

맺으면서
이글은 처음 부분에서 복음화의 왜곡이 초래한 위기에 대한 대안으로서 ‘재복음화’를 제안했고, 둘째 부분에서 재복음화의 내용을 신앙·삶·교회·기도 네 개의 범주에서 논의했다. 그리고 각 범주에서 지양할 것과 지향할 것을 네 개씩 제시했다. 그것을 그림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재복음화가 지양하고자 하는 복음화의 위기들을 묘사하는 데 사용한 언어들은 빎, 기적, 축복, 간증, 교리, 전통, 상벌, 예속, 부분, 건물, 직분, 성장, 비상, 통성, 바깥, 소음 등이었다. 바울의 용법을 빌어 표현하면 몇몇을 제외하고는 거의 ‘표면적’ 언어들이다. 이로써 그 동안 한국교회가 전념한 복음화의 양상이 얼마나 외적인 차원에 편중되었는지 분명해졌다고 본다. 이와는 달리 재복음화가 지향하는 대안들을 묘사하는 데 사용한 언어들은 배움, 수덕, 지복, 고백, 삶, 경험, 기쁨(축제), 자유, 사람, 은사, 나눔, 일상, 묵상과 관상, 안, 침묵 등이었다. 대부분 ‘이면적’ ‘깊이’의 언어들이다.
바울은 유대인의 위기를 비판하기 위해 ‘표면적’이라는 말을 썼고, 위기의 극복을 말하기 위해 ‘이면적’이라는 말을 썼다.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롬 2:28-29) 여기서 바울이 유대인을 향해 ‘표면적’이라 한 말은 오늘날 그리스도인과 한국교회와 복음화에도 타당하다. 바로 이 ‘표면적’ 집착이 신앙과 삶과 교회와 기도의 위기를 불러왔고, 한국교회를 상식 이하의 집단으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이다.

이제 어쩔 도리가 없다. 주저하거나 미적거릴 여유가 없다. ‘이면’에 대한 새로운 감수성과 함께 ‘안’에서 시작하는 새로운 복음화의 여정을 서둘러 출발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전도 전략으로부터 영성의 길로의 과감한 전향을 통해 재복음화의 여정을 걷겠다는 단호한 결기가 필요하다. 무엇보다 ‘그리스도 “밖에” 있는’ 믿음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으로의 래디컬한 메타노이아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고서는 예수님이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임을 더 이상 노래할 수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그래,
그간 우리의 믿음 얼마나
그이 밖에 있었는가
신념의 마력이
적극적 사고방식이
끌어당김의 법칙이
믿음 행세한 세월 얼마인가
그러니 성도는 놀부되어 욕심사납고
목사는 무당 되어 푸닥거리 한판!
찰떡궁합으로 주거니 받거니
하며 성소를
청빈한 영감의 샘이어야 할 성소를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온 지 얼마인가
그래, 믿음은 모름지기
그이 안에 있어야 하거늘
못질로 붉게 물든 십자가
여린 심장으로 울어야 하거늘
그래야 충혈된 욕망은 시나브로 잦아들고
마침내 삶의 울음 껴안으며
맑은 혼으로 진리 찾아 길 떠나든가
따뜻한 가슴, 가난한 벗들과 어울리든가
빈 마음에 하늘 씨앗 담아
난장 같은 세상 꽃밭으로 만들든가
 
..........
 
 
이민재 l 목사는 도봉구 창동에 위치한 은명교회에서 당신이 만나게 하시는 사람들을 벗삼아 낮고 느리게 잔잔한 삶의 감동을 서로 조금씩 나누면서 목회하고 있다. ‘숨은 기도이며 빛은 행동이고, 숨은 예배이며 빛은 삶이고, 숨은 영성이며 빛은 실천이고, 숨은 하나님 사랑이며 빛은 이웃 사랑’임을 ‘숨빛인’에 담아, 숨쉰 만큼 자라고, 자란 만큼 비추고, 비춘 만큼 밝히는 교회가 되기를 작지만 낮게 소리 없이 전하고 있다. 감신대와 같은 대학원에서 공부했다. 
 
 
http://www.clsk.org/gisang/gisang_view.asp?tab=sasang_hot&flag=01&board_idx=76&page=1&block=&theologry_sec=&set_year=2009&set_month=03
 
 
 
정강길 (09-04-08 08:44)
 
적어도 이민재 목사님은 세기연이 표방하는 <새로운 기독교 운동>에 대한 그 어떤 글을 읽으신 분으로 여겨진다.
새로운 기독교 운동은 이미 『화이트헤드와 새로운 민중신학』에서도 밝혔지만 <재신학>Re-Theology를 표방한다.
게다가 이민재님이 쓴 윗글의 전반적인 글 내용이나 글을 전개해나가는 형식도 흡사하지만 특히 본인이 처음으로
『미래에서 온 기독교』책에서 썼던 <포월>이라는 표현을 쓴 것을 발견하고선 더 없이 그러한 확신이 느껴진다.
물론 윗글에는 용어의 출처에 대한 설명이 없기에 더이상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암튼 <대안>을 논한 기독교 글이라는 점에선 매우 반가운 글이라는 사실만큼은 너무나 명백하다.
바야흐로 기존 기독교에 대해선 보다 더 나은 제안으로서의 <대안 기독교 시대>가 점점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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