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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왜 우리는 예수를 믿는가?    
  글쓴이 : 정강길 날 짜 : 09-12-14 14:32 조회(1893)
   트랙백 주소 : http://freeview.org/bbs/tb.php/b001/425 




 

“‘예수가 주’라고 하는 주장은 그때까지의 내 삶의 많은 것들에 대한 포기를 내포한다. 그것은 내가 따라야 할 충성의 문제, 궁극적 권위의 문제, 삶의 최고의 규범과 표준의 문제에 뿌리를 박고 있는 급진적인 주장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기독교는 다른 권위에 편하게 충성하는 쪽을 택한 적이 많았다.” - 리 캠프
 
 
"왜 우리는 예수를 믿는가?"를 묻는다면

“왜 우리는 예수를 믿는가?”에 대한 답변들로서 가장 많은 답변은 “구원받기 위해서!”라는 대답이 많은 실정이다. 이때 구원이 무엇인가를 얘기하면 대체로 내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를 믿으면 내가 죽은 뒤의 영혼이 지옥에 가질 않고 천국에 가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4영리 참조). 미안하지만 그런 구원 개념은 결코 예수적이지 않다. 예수의 하나님나라 운동에서 보여주었던 구원 개념은 결코 내세적이지 않다. 오히려 그것은 건강과 관련이 되어 있다.

데이비슨 뢰어 목사가 쓴 『아메리카, 파시즘 그리고 하느님』을 살펴보면 그는 이를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나는 '구원이라는 단어는 원래 의미가 건강함health 혹은 온전함wholeness이라고 생각한다. 이 단어는 그 어원이 '구하다'save를 뜻하는 라틴어에서 유래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고통을 가라앉히다'salve라는 뜻의 라틴어에서 유래하기도 한다."(p.66). 그렇다. 진정한 구원은 이 세계 안에서 필연적으로 <건강한 삶의 증진>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예수의 하나님나라 운동을 보면 구원을 말할 때 온통 고통과 관계의 충돌을 완화하는 치유의 역사와 관련되어 있잖은가.

게다가 천국이라는 개념조차도 예수는 그런 천국을 말한 적이 없다. 복음서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예수는 천국에 들어간다는 표현보다 천국이 이 땅에 임한다는 표현히 훨씬 많다. 예수가 말하고자 했던 천국은 결코 비역사적인 내세적 개념이 아니라 지금여기에서부터 확장될 수 있는 그러한 성격으로서의 하나님나라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왜 예수를 믿는가?”에 대한 물음을 보다 근원적으로 성찰할 필요가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예수는 달이 아닌 손가락

‘손으로 달을 가리키고 있는데 왜 자꾸 손가락만 쳐다보고 있느냐’의 의미를 우리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와 비슷한 경우가 오늘날 기존 기독교 안에도 똑같이 일어나고 있다. 왜냐하면 사실상 깊이 생각해볼 경우 예수 역시 달이 아닌 손가락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이 땅에 하나님나라 운동을 했던 자였다. 그의 삶의 목표는 전적인 하나님나라 운동이었다. 예수는 당시의 낡은 유대교에서 새로운 대안 유대교로서의 하나님나라를 설파했다. 그의 성경해석은 당대의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해석이었고 새로운 깨달음의 차원으로 인도되었다. 그러다가 십자가 처형을 받은 것이다.

예수의 그러한 새로운 유대교 운동이 오늘날에는 아시다시피 기독교가 되었다. 말할 나위 없이 기독교의 교주는 당연히 예수다.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나의 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자들을 일컫는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 섬기는 기독교라는 종교의 탄생으로 이끈 핵심적 인물을 굳이 꼽는다면 바울을 들 수 있겠다. 다시 말해서 기독교 태동의 주요 인물 사건을 얘기한다면 그것은 예수와 바울의 결합이라고 할 만하다. 만일 바울이 없었다면 예수가 그만큼 알려졌고 오늘날까지 전해졌었을까? 나는 회의적이라고 본다.

예수의 주제는 철저히 하나님나라 였다. 그런데 복음서를 제외한 서신들(바울서신을 포함)을 보면 그 주제는 예수 그 자신으로 옮겨갔다. 논의의 주제 포인트가 하나님나라에서 기독론으로 이동해간 것이다. 바울은 예수를 보편화(세계화)하고자 했던 기독교의 초기 신학자였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유감스러운 점은 바울은 역사적 예수를 몰랐었다는 사실이다(증거가 너무 많다). 다시 말해서 예수사건에 대한 보편화가 잘못 형성된 점이 없잖아 있다는 것이다. 이후의 기독교 사상사는 철저히 헬라화된 기독교의 전수로 오늘날에까지 이르고 있는 실정이다. 기존 기독교의 신앙에는 잘못 보편화된 예수가 실재 예수로서 자리하고 있다고 하겠다.

일정부분 바울 및 초기 변증가들의 공헌들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사실상 예수는 파트너를 잘못 만난 점도 없잖아 있다. 즉, 새 술을 새 부대에 담아내진 못한 것이다. 예수는 여전히 낡은 서구철학(헬라철학)의 틀에 갇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예수를 새롭게 보편화할 필요가 있겠다. 예수의 삶의 목표는 하나님나라 운동이었다. 이것은 그 당시에 새로운 성경해석 및 새로운 유대교 운동으로 이어졌다(초기 회당 중심으로 형성된 흔적도 있음). 결국 예수는 믿어야 할 대상이라기보다 사실은 닮아야 할 우리 삶의 모델이 된다.
 
수행이란 우리의 몸삶을 하나님나라화 하는 것

그런데 이 하나님나라는 두 가지 차원을 지닌다. 궁극적으로 이뤄져야 할 하나님나라가 있는가 하면 지금 여기에서 이뤄지고 있는 하나님나라가 있다. 그리스도인은 이 두 가지의 긴장 속에 놓여 있다.

전자는 GIO(God-I-Others)전체가 하나님나라화 되는 차원을 의미하고 있으며, 후자는 우리 자신의 몸삶이 하나님나라화 되는 차원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이때 우리가 시작할 수 있는 차원은 바로 우리의 몸삶이 하나님나라화 되어야 한다는 점을 오늘 신앙의 포인트로 들고 싶다. 바로 이 지점에서 그리스도인에게는 몸수행이 요구된다고 하겠다. 이러한 몸수행은 기도를 열심히 드린다거나 예배 찬송을 은혜스럽게 부르는 그런 소박한 차원의 신앙이 아니다. 내 삶의 총체적인 변혁을 의미한다. 이것은 우리의 몸 이해를 새롭게 봄으로써 새로운 인식의 전환을 해야 할 것이다.
 
몸에 대한 새로운 이해들(몸학에서 부분 인용)

우리의 몸은 관계들로 이루어진 온갖 관계들의 복합체다. 그리고 그러한 관계자체는 동시적 복합체로서 자리한다.
 
 
 
<관계의 충돌>을 겪는 것이 우리네 몸삶의 현실이다. <관계의 충돌>은 서로의 목적들이 충돌하고 어긋남으로서 일어난다. 서로 <상생할 수 있는 관계>가 확립되면 관계의 충돌은 사라진다.  <상생의 관계>를 체득하는 것이 도(道)를 아는 지혜이자 통전적 건강을 향한 <몸학>의 진정한 목적이다. <몸학>은 GIO만족으로 향하는 상생의 관계 실현을 통해 비로소 진정한 행복과 삶의 의미를 찾는다.
 
B층에서의 충돌은 각종 신체질병으로
L층에서의 충돌은 여러 대인관계 충돌로
W층에서의 충돌은 정치/사회/문화 등등 각종 집단 이데올로기의 충돌로
M층에서의 충돌은 모든 관계적 충돌의 시원으로서 궁극적으로는 문명의 충돌로
G층에서의 충돌은 정신적 고독으로 나타나면서 다른 모든 관계 충돌의 가능성들을 높여줌(ex-종교 갈등 및 전쟁)
 
따라서 몸나가 추구하는 바는 마음의 평온을 추구하는 <마인드콘트롤>보다는 <관계조절력 확보>에 가깝다. 마음의 평안함도 모든 관계들에 대한 조절력을 확보할 때 수반되는 부수적인 감정이다. 그리고 <관계조절력 확보>라는 그 패턴에 따라 다음과 같이 나누어 볼 수 있다.
 

즉, 영성수련 곧 몸수행의 정도에 따라 이렇게 나뉠 수 있겠다(위에선 아주 간략하게만 얘기한 것임).
 
...
 
기독교인은 예수를 나의 주 그리스도라고 고백한다. 이 고백의 의미는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결국 이것은 곧 예수가 걸어갔던 길을 그대로 따르겠다는 결의적 의미이자 그러한 새 삶의 길을 위해 앞으로의 내 삶의 전적인 헌신과 수행을 의미한다. 우리의 몸이 그리스도가 되기까지 말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정말 그리스도인 되기 위한 준비 자세가 되어 있는 것인가?
 
정강길 / 세계와기독교변혁연구소 연구실장 
 
 
 
 
라크리매 (09-12-14 23:55)
 
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서양철학으로 해석하는 신 ,신학 보다 이런 실제적인 수행이나 현실의 체화를 경험하는 것에 관심이 더 가는것이 사실입니다만..
그렇담 기독교의(제가 이제까지 경험했던 기독교는 예수가 곧 달이라  말합니다)부활, 삼위일체설,구원론...모두 버려야 하는 것이
되는건 아닌지...? 그렇담 굳이 기독교란 종교를 고집할 필요가 있을까...란 생각까지 다다르게 되네요

    
정강길 (09-12-15 00:25)
 
대안은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전혀 다른 안을 제시하는 것이지요.
목욕물이 더럽다고 아기까지 버릴 순 없지 않을까요?
세기연이 계속 기독교를 붙잡는 이유에 대해선 아래의 글 참조 바랍니다.
http://freeview.org/bbs/tb.php/b001/374

그럼으로써 세기연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대안으로서의 기독교를 형성해보고자 하는 것이랍니다.

        
라크리매 (09-12-15 00:55)
 
저 역시 예수와 성서를 버리려는 것은 아닙니다
올려놓은신 글의 2,3번이 제겐 해당되는 이유기도 하구요
단지 기독교 교리적인 측면의 삼위일체나 구원론, 부활은 새로운 기독교의 역사적 예수와는
공존할수 없는 것이 아닌가란 질문이였습니다

            
정강길 (09-12-15 01:34)
 
질문에 감사드립니다.

저로선 얼마든지 양립가능할 수 있다고 봅니다.
삼위일체나 구원론이나 부활도 결국은 새로운 기독교의
역사적 예수에 대한 해석의 맥락과 보편화 과정에서 나온 것이라
얼마든지 다른 관점에서 재해석이 가능할 수 있다는 얘기지요.

본인의 <미래에서 온 기독교>의 역사적 예수론에서 그 징후적 해석을 나눌 수 있겠고
또한 http://freeview.org/bbs/tb.php/b001/251 글도 참조해보시길 바랍니다.
삼위일체도 예수를 한 인물이 아닌 사건적 기독론으로 볼 경우
지금까지의 삼위일체 해석과는 완전히 다른 색채를 띨 수 있다고 봅니다.

새로운 구원론에 대해서는 본문글에서도 약간 얘기한 바 있구요.
구원이란 지구적 현실 세계를 살아가는 몸삶의 건강 문제이니까요.
물론 보다 상세한 내용들은 앞으로도 얼마든지 제시될 것입니다.

부활에 대한 해석도 기존의 민중신학이 말하는 예수의 부활 해석을 저는 받아들이는 측면이 있는데
여기에다 저는 위의 몸학의 구도와 맥락에서 재해석하고 있는 측면이 있답니다.

저는 라크리매님처럼 그러한 솔직한 질문들과 관심들이 앞으로도 더욱 필요하다고 봅니다.
새로운 기독교는 솔직한 의문들을 가지고 참여하는 자들과 함께
건강하고 창조적인 답변을 모색해나가는 운동이기도 하니까요. 고맙습니다.

늘복음 (09-12-26 06:45)
 
정강길님 안녕하세요^^
올려주신 글 계속 읽고 있는 중입니다만.. 성경을 보는 입장이 개인적으로 저와는 다른 부분이 있군요^^
특히 정강길님의 예수 이해와 저의 이해, 그리고 바울에 대한 이해도 많은 거리가 있네요^^

어떻게 보면 정강길님이 저를 (제 조잡한 글들) 보았을 때는 역시 보수주의의 한계로 볼것이고....
저 역시 보수냐 진보냐라고 딱 못을 박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안다고 봅니다만,
암튼 간에 저는 그러한 주의자 라기보다는 예수에 집중하고자 합니다.

바울이 예수를 원래의 뜻과 다르게 이용(?)한 당시 신학자로 이해하시는 군요^^
예수에 대하여 전혀 몰랐다는 말이신데...

한가지 간과한 부분이 보입니다만...
만일 님의 주장대로 바울과 예수가 동상이몽을 했고...
이상한 기독교와 잘못 전해진 예수가 보편화 되었다고 하시는 부분은
수긍하기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사도행전이나 이러한 신약성경에 대한 것도 단지 당시의 예수 추종자들에 의하여 기록되고 편집되었다는 식이라는 것이고... 결국은 성령의 간섭하심과 개입의 여지는 무시되는 것이라고 봅니다만...

오늘날의 로마 카토릭과 개신교라는 기독교와 사도들을 통하여 이어져온
복음의 발자국은 전혀 다르다는것이 저의 견해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곳곳에 들어 있는데도 그것을 간과하고 단지 역사적인 예수를 바울이 알지못했다고 한다는것은 자칫 치명적인 오류로 해석할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요?

예수가 달이 아니라 가르키는 손이라 해도 하늘 나라의 주체는 예수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주체와 본질이 예수자신임을 성령이 증거하셨기에 초기 사도들이 자연스럽게
예수를 조명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가 승천하고 성령이 오셨습니다.
성령이 이제 예수를 분명하게 증거하고자 사도들과 복음을 통하여 이어져 온것이지요.
그 중간기에 교부들과 당시의 기득권자들에 의하여 성령의 인도하시던 교회공동체와는 전혀 다른 기독교가 득세를 한것이지요. 그 후예들이 오늘날의 개신교가 아닌지요?
바울이 신학자라니오?
그것은 사람들이 신학자들이 밥벌어 먹으려고 억지로 둔갑시킨 것입니다.
바울은 오직 예수에 살고 예수에 죽었던 사도입니다.
예수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 바울입니다.
예수를 믿는 다는것은 예수를 따른다는 것이고 예수와 함께 산다는 것입니다.
신학과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구약과 모든 예언자들이 증거하고 기다렸던 그 메시아가 예수라는것을 증언한 증인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신학하고는 상관 없이 말입니다.
서신서를 통하여 전한 복음의 진리가 사도들의 자유 의지와 신념에 의하여 학습에 의하여 기록되었다는 것은 아니시지요?
성령의 게입하심 없이 서신서가 전해졌다는것이라면 모를까...그렇지 않다면 바울과 예수를 전혀 다르게 이해하시는 것은 좀 우려가 됩니다.

그저 무식한 제가 보는 입장으로 주절 주절 했습니다.^^
그럼 이만...

    
정강길 (09-12-28 05:49)
 
신학과 상관 없다구요? 신앙을 체계화한 것이 신학인데
도대체 님이 부정하고 싶어하는 그 신학(theology)이라는 게 님에겐 어떻게 정의되고 있는지요?
제가 보기엔 님이 쓴글을 보니 님도 나름대로 님의 입장에서 신학을 하고 있잖아요.

글구 님이 말하는 성령이라는 것도 여전히 설명이 필요한 지점입니다.
그렇게 따지면 어차피 세기연 역시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져 나가고 있는거니까요.

그리고 바울이 역사적 예수를 알지 못했다는 그 부분은 차라리 예수퍼즐 책을 추천합니다.
http://freeview.org/bbs/tb.php/f003/58
차분히 읽어보시면 하도 증거가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으리라 봅니다.

참고로 바울은 예수의 그 흔한 비유 한 구절이라도 언급한 적 없고
예수님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이나 골고다 한 번 얘기한 적 없답니다.
더군다나 예수를 선교하는 입장이라면 굳이 예수어록에 대해 침묵할 이유가 없음에도
철저히 역사적 예수에 대해 침묵한 사람으로 유명하답니다.
바울의 역사적 예수 침묵만큼은 이미 진보 신학계에선 널리 알려진 얘기구요.

그리고 가급적이면 세기연에 있는 여러 글도 좀 읽어보시고서 대화를 하심이 좋을 듯 싶습니다.
마냥 어줍잖은 썰을 이곳에서 풀기엔 님의 논지가 이곳에선 너무나 허약하게 보이는데
그래도 혹시 님의 글을 읽고 개과천선하실 분도 계실는지는 모르겠군요.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지금까지 발견된 데이터들을  통해 축적된 신학적 성과들이 엄연히 있는데
님이 부정하고 싶다고 해서 부정되는 건 아니립니다.

정말로 스스로를 무식하다고 생각하신다면 부디 좀더 많은 정보들을 두루두루 섭렵하셔서
이곳 세기연이 추구하는 바들에 대해 제발이지 예리하게 반론을 해주십사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럼 즐거운 연말 보내시길 바랍니다.. 꾸벅~

늘복음 (09-12-30 01:03)
 
감사합니다^^
제가 세기연에 시비하려고 덤비는것으로 생각하는것은 아니시지요^^
그럴 실력도 시간도 없답니다. 그나 저나 정강길님은 워낙 바쁘시고 스트레스가 많으셔서 인지..아니면 상대할 가치가 없는 자가 자꾸 시간을 잡아 먹으니까 귀찮으신지...좀 까칠하군요^^

사실 안바쁜사람 거의 없겠지요~
그럼에도 여기와서 "님이 보기에 어줍잖은 썰"을 늘어 놓는것도
이를테면 긍정이든 부정이든 다양한 관심의 한 표현 방법이라고 보시면 편하실 텐데요^^

제가 신학을 부정한다고 부정되어질리는 없겠지요^^
다만 신학 일변도로 가는 것에 대하여 강한 어조로 비평을 하다보니 부정한다, 부정하고 싶어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마찬가지 아닐가요. 진보가 보수를 부정하다고 부정되어지는 것이 아니며 보수가 진보를 부정한다고 부정 되어짐도 아니고...

암튼 님의 충고 덕분에 예수퍼즐이나 예수는 신화다 예수세미나 역사적 예수를 뒤져보고 님의 글도 읽었습니다.

역사적 예수에 집중하는 신학자들은 성서 자체를 사람의 창작이나 편집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아마도 복음서에 등장하는 예수에 대하여 연구하고 분석하고 또 자료를 찾아서 해석해 보려는 시도에 힘을 쓰고 있기 때문에 시간도 많이 걸리고 앞으로도 어떤식으로 방향이 바뀔지 알수 없다고 봅니다.

계속 진행형이라는 말이지요^^
예수가 허구나 신화이며 많은 예수들을 하나의 인격체나 복음서의 예수 즉, 교리적인 예수와 사건으로 보는 예수 이해에 대하여 아직도 완성된 예수, 이것이 예수의 실체다 라고하는것을 증명하지 못한것이지요.

세기연에서 말하는 구원에 대한 부분이나 부활에 대한 개념역시도 온전한것은 아니라 봅니다. 물론 보편 타당성과 일부 수용할 수 밖에없고 가슴 뭉클한 대목들도 눈에 띄는것은 사실입니다.

바울이 역사적 예수를 몰랐기에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 어록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았고 역사적 예수에 대하여 침묵했다고 보는 시각이 세기연의 입장이군요^^ 역사적 예수 신학자나연구가들의 입장이 그렇겠습니다.

그렇게 왜? 라는 질문을 통해서 성서읽기가 진행되면 결국은 예수의 신성이 대부분 부인될 수 밖에 없으며 인간 예수로서 순교자의 한 사람으로서의 예수를 필요로 하게 되는것이고...
여기에 구약의 창세기로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계획과 미래에 보내실 구원자, 그리스도, 메시아는 여전히 아직 오지 않은것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복음서가 특히 마가의 창작에 의하여 집필이 되었다고 객관적으로 인정한다해도 예수의 기적 사건, 치유사건 초 자연적인 신적인 표적, 메시아로서의 권능에 대하여 곤혹스러울 텐데요^^

바울 서신을 보면 예수 어록에 대하여 언급은 없지만 그가 주장한 것은 예수에 대한 증거뿐입니다. 그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하여 말입니다. 물론 예수와 바울이 직접 만났다는 결정적인 증거나 기록은 없습니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에 의하여 이것도 어떤 식으로든 편집이나 삽입이 되었다해도 말입니다.

부활 이후에 예수를 만났다는 바울의 간증을 믿을 수 밖에 없지 않는지요? 그 바울의 간증이 약간씩 틀린것이 그것을 부정할 근거는 아닙니다. 사람의 기억 장치가 그리 믿을만한것은 아니거든요^^

저는 개인적으로 구약보단는 신약에 집중하는 입장입니다. 그래서 구약에 대한 언급은 극히 적거나 아예 없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바울이 부활하신 예수를 체험하고 이후에 완전히 변화 되어서 예수를 전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바울을 통해 성령이 개입하지 않고서는 그러한 사역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단지 예수를 이용해서 바울교를 세우려고 한것이 아님은 주지의 사실이고 바울이 도대체 역사적 예수를 몰랐다해도 그가 예수를 이용해서 무엇을 얻었다는 것일가요? 그가 개인적인 어떤 야망을 이뤘다는 것을 찾아 볼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로 살고 예수로 죽었던 바울입니다.

예수 세미나, 역사적 예수에 대하여 자료를 발굴하고 연구하고 분석하는것 좋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도대체 신앙과 어떤 상관 관계가 있겠는가 생각이 듭니다. 사실 복음서를 통해서 계시한 예수를 알고 만나기만도 시간이 부족합니다.

제가 기존 교단 교파주의 목사와 교회를 옹호하는 입장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자유주의 신학사상이나 민중신학을 지지하는 입장도 개인적으로는 아닙니다. 예수 이해와 예수를 해석하는 것이 복음서의 예수와 다르다는 것을 봅니다.

복음서가 편집이나 창작이나 어떤 식으로든 간에 오류가 있다해서 다른 것을 기준으로 복음서를 해체하고 예수를 분석하고 연구한다는것 자체가 교만입니다. 우리가 신을 연구하고 이해하고 찾아 보겠다는 발상입니다.

인문학적 성서 읽기의 한계와 문제점도 그것이며 세기연의 역사적 예수 연구의 발상도 그부분이 문제라고 봅니다. 그렇다고 보수골통신학과 보수주의가 옳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추구해야 하고 믿어야할 대상으로서의 예수에 대하여 복음서를 벗어날 수는 없지 않겠는냐 하는것입니다. 서신서와 복음서가 서로 어긋나며 연결이 부자연 스럽다고 보는 시각에서는 당연히 새로운 예수를 찾기를 원할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볼 때 복음서와 서신서간의 부자연스러움이란 전혀 없습니다. 얼마든지 연결이 가능하고 무리가 없습니다. 물론 이렇게 주장하면 귀에 걸면 귀거리 식이라고 조롱할 수 있겠지만...그것은 피장 파장이겠지요^^*

결론은 각자의 신앙과 신념과 믿음대로 가는 수 밖에 없겠습니다.
제가 세기연에 시비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예리하게 비판할 실력도 시간도없습니다. 간간히 읽는 세기연의 글을 읽고 동감도 하며 무릎도 치며 감동도 받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밀한 부분에서의 예수에 대한 이해와 구원에 대하여와 부활신앙에 대한 입장에서 약간은 당황스러운 부분 때문에 잠시 횡설 수설한것입니다. 세기연의 글이 저의 신앙관을 흔들수는 없으며 마찬가지로 제가 세기연을 통하여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저 취할것은 취하고 버릴것은 버리고 받을 것은 받고 걸를것은 걸러내면서 그러는 것입니다. 아무튼 열심과 수고에 박수를 보냅니다. 다가올 새해에도 더욱 평안하시며 준비하고 계획한 사업들이 무리없이 진행 되기를 소망하면서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해피 뉴이얼스~

    
정강길 (09-12-30 01:27)
 
시비를 건다는 생각은 안합니다. 저도 한때 보수적 입장에 있을때는
늘복음님과 비슷하게 그렇게 말하고 돌아댕긴 적도 있으니까요.
늘복음님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근데 늘복음님이 쓴 글에서는 성서의 편집 오류 주장이 왜 나왔는지에 대해서는 쏙 빼먹고 있군요.
세기연 글을 제대로 읽어보셨더라면 잘 아셨을텐데요.
그런 주장들이 그냥 할일없이 나왔겠습니까. 성경에 다 나와 있으니까 하는 얘기지요.
성경에는 그런 사례들이 너무 많아서 일일히 다 열거하지 못할 정도인데
http://freeview.org/bbs/tb.php/b001/18
http://freeview.org/bbs/tb.php/b001/27
위의 글을 읽어보시고 왜 저렇게 써 있는지에 대해 온전히 설명해보이면 된답니다.
그런 것을 일일히 설명하기가 피곤하니까 그냥 곧이 그대로 믿어라 라고 얘기한다면 참 곤란하잖아요.

피장파장이 아니라 결국은 근거와 설명력 싸움입니다.
늘복음님이 더 많은 근거와 설명을 해보이신다면 저는 늘복음님을 기꺼이 따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하고 그저 끝이 없는 공부라고 판단하고선
그냥 자신이 믿는 바를 그저 제시한다고 할 경우 결코 설득력을 지닐 수가 없답니다.

일일히 죄다 의문나는 것들을 설명하기가 힘드니까
그냥 무조건 믿어야 한다 밖에 더 되겠어요.

저희에게 소망과 감사를 빌어주셔서 감사해요.
저희의 소망은 늘복음님 같은 분을 생산하는 기존 기독교야말로
하루바삐 제대로 좀 개과천선하고 바뀌었으면 한답니다.
그렇다고 님한테 감정 같은 거 없습니다.
그저 님을 그렇게 만든 그러한 기존 기독교라는 그 체제가 미울 뿐이지..
해피뉴이얼스~

        
늘복음 (09-12-31 06:46)
 
바쁘신데도 시간을 내서 저를 설득시켜 주시니 고맙습니다.^^
다시한번 확인시켜 드린다면 저는 보수 주의나 기존 기독교에서 이미 빠져 나온 상태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싶군요.
물론 완전하게 그동안 익숙해진 기독교 문화의 잔상에서 훌훌 털어 버린것은 아닐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기독교적 용어나 교회적인 단어등등...마땅히 다른 대안이 부족해서 사용할 뿐이지요.
교회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제가 의미하는 교회는 세기연에서 비판하는 기존 기독교의 교단 교파주의나 조직단체의 교회가 아니라는 부분입니다.

저는 오히려 기존 기독교에 대하여 강하게 비판하는 입장이라
대부분의 기독교나 개혁주의 싸이트에서도 기피의 대상이랍니다^^*

말하자면 아웃사이더인 샘이지요^^
거기다가 신학도 치워라 교리도 치워라 막무가내로 휘젖고 다니니 여기 세기연에서도 아주 이상하고 멍청한 놈으로
보이나 보네요^^

다비아는 판넨 베르크 신학과 정목사의 신학이 돌똘 뭉쳐서 제 글은 계속 차단되고
어차피 세기연도 화이트 헤드 신학이 중심이며 거기다가 민중 신학의 강한 영향권에 속해 있다보니
제가 사실 끼어들 형편도 주제도 안되는줄 알고 있답니다^^*

님이 친절하게 가르쳐준 글을 정독했습니다.
다시한번 말하지만 깜짝 깜짝 놀라면서 읽고 있습니다.
매우 공감 가는 부분도 있더군요^^*

제가 시간과 논리적인 능력이 없는것이 안타깝습니다. 그랬더라면 해주고싶은 말이 좀 있거든요^^*
물론 님이 보기에는 우습겠지만요^^*

그래서 마침 제 의중을 잘 대변해준 글을 발견했길래
일단 "여성차별" 에 대한 성경 오류에 대한 어느정도의 답변이라 생각해서 링크를 소개해 드립니다.

http://blog.naver.com/carimari/140093328268

님이 주장한 성서 해석에 대하여 동의합니다.

다시한번 노파심에서 말한다면 "그냥 무조건 믿어야 한다" 라는 식은 저도 반대한답니다^^

여성 신학자들의 주장도 일리는 있어 보이지만 그것은 역시 해석의 문제아닐가요?

제가 보기에 성경은 여성 차별을 지지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인간의 오류와 허점과 실패를 통해서까지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당신의 열심으로 기어이 뜻을 성취하심에 대한 시각으로 보았으면 한답니다.

구약의 창조부터 신약에 이르기까지 성서가 하고있는 이야기의 핵심은 "예수" 에 대한 증거입니다.
모든것이 예수를 위하여 시작되었고 예수로 인하여 이어져 왔고 예수로 말미암아 끝낼 것입니다.

예수가 신화냐 허구냐 예수가 누구냐? 에 대한 대답을 성서는 집요하게 묻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역시 이미 성서가 충분히 보여주었습니다.
문제는 그 대답을 사람들이 대부분은 오해하였고
극소수의 무리들은 비밀하게 깨달았고(이부분은 오해와 분쟁의 소지가 많겠지요^^)

또한 님의 다음 글에서 "사탄이 기독교를 선택하였다"는 지적은 탁월한 통찰이며 진심으로 공감하는 바입니다.
방법은 다르겠고 수준도 다르겠지만 늘복음(사랑그리고편지) 역시 기존 기독교라는 체제에 대하여 심히 미워하고 있으며 무조건 믿어라에 맹종파 소위 병신도들을 양산하는 구조에 대하여 계속 소리치고 있는 중입니다.

세기연에 비하면 많이 부족하고 지적 학습적 수준이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지만...말입니다^^*
암튼 간에...이제 2010년 새해에나 인사해야할까 봅니다^^*

그럼 평안하시길~

            
정강길 (09-12-31 10:54)
 
세기연은 자신의 주장에 분명한 근거가 있고 설득력만 있다면
얼마든지 자신의 논지를 펴시기를 오히려 바랄 따름이랍니다.

사실 솔직히 말씀드리면 늘복음님의 글을 처음부터 대면한 순간에
한 가지 다짜고짜 묻고 싶었던 게 있었는데
님께선 혹시 신천지 아니시냐? 는 겁니다. 혹은 그 비슷한 것들.. 구원파 등등..

이들을 보면 일견 기존의 보수 기독교 진영과도 엄청 거리를 두고 있는 것처럼
혁신적인 성경해석을 하는 것마냥 보일는지 몰라도
실은 알고보면 진보 기독교 진영이나 세기연의 입장에서 보면 그다지 별로 새롭지도 않은 것들이죠.

만일 님이 신천지 같은 부류가 아니더라도 적어도 님의 글을 잘 뜯어보면
성경을 해석하는 방식은 이들에게서 보여지는 방식과 거의 흡사한 것입니다.
즉, 기존의 보수 기독교의 성경해석과는 내용은 다를지언정
그 성경해석의 패턴만큼은 서로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혹시 알레고리적 성경해석 방법이라고 들어보셨는지요? http://freeview.org/bbs/tb.php/b001/29 참조.
성경을 해석하는 방법들 중에 알레고리적 성경해석이라는 게 있습니다.
근대 성서비평 발달하기 이전에 중세 때도 있었던 것으로
주로 성경의 내용들을 비유와 상징으로 짜맞춰서 해석하는 방식들인데
근대 성서비평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기존의 보수 기독교 진영의 경우는
여전히 이런 방법으로 해석하는 경우들이 많지요.
기존의 주류 기독교에서 이단 판정을 받았던 신천지, 구원파 등등 이들도 마찬가지..

사실 그 지점에선 늘복음님의 성경해석 방법도 동일한 알레고리적 성경해석 방법에 해당할 따름입니다.
그렇기에 님이 제게 읽어보라고 한 그 글은 제 입장에 있어선 전혀 반론이 되질 못한답니다.
물론 님은 적어도 기존의 보수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성경해석보다는
좀더 보다 그럴듯한 설득력이 있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신천지 교인들도 보니까 자신들의 성경해석이 우월하다면서
보수 기독교인들에게 성경공부로서 접근한다고도 하더군요.
자기들로선 어느 쪽의 성경해석이 더 그럴듯한지 견줘보자는 거겠지요.

하지만 저희 세기연 입장에서 보면 그러한 것들은 양자 모두 성서비평의 성과들을 거치지도 않은 채로
시행되는 성경해석 작업이라서 그저 도토리 키재기 마냥 거기서 거기라고 볼 뿐입니다.
그러한 것들은 진보 기독교 진영이나 적어도 이곳 세기연에선 유감스럽게도 어림반푼 어치도 없는 얘기들이지요.
부디 말씀드리는데, 전체 기독교의 다양한 지형들을 미리 잘 파악하셔서 번지수를 잘 잡으실 필요가 있답니다.

제가 위에서 성경의 모순과 오류들에 대해 말씀을 드린 까닭은 바로 그러한 점들 때문에
성서비평이라는 신학 영역이 세워지게 된 것이란 점을 말씀드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냥 갑자기 툭 나온 게 아니라는 것이죠.

성경도 진화하는 경전이라서 공부하는 만큼 보이는 것이고 깨닫는 만큼 열리는 것입니다.
지적 능력 운운 하기 이전에 가급적이면 발견된 모든 데이터들을 통해서
보다 정합적이고 설득력 있게 하는 성경공부와 해석들이 필요하지 않겠어요?

만일 님의 성경해석 입장이 설명하기 힘드니까 무조건 믿어야 한다는 쪽이 아니라고 할 경우
그렇다면 어느 정도 충분한 이해의 바탕이 될 수 있도록
적어도 구체적이고도 정합적인 근거와 설명력을 확보해야 어느 정도 상대방에게 먹혀들지 않겠어요?^^*
영성 혹은 신앙은 지성의 과정을 무시하거나 배제하지 않으며, 그것을 포함하면서 넘어설 따름이지요.

행여라도 어느 정도 엄격한 합리적 해석 체계로서의 조정 과정조차 없을 경우
그야말로 별의별 해괴한 성경해석들이 우리 앞에 짜맞추기식으로 난무하게 될테지요.
기존의 보수 기독교에는 그런 엄격한 합리적 장치들이 거의 없으니
어떨땐 신천지나 구원파 부류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도 하거나
혹은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정명석 JMS 같은 것들도 나오는 거잖아요.
휴거와 종말론으로 삶이 고달픈 민중들에게 구라치는 부류나 김기동 베뢰아 귀신 감람나무등등
한국의 보수 기독교로부터 떨어져 나온 온갖 이단 사이비 분파들이 어쩜 그렇게도 많은지요. 

이곳 세기연 입장에서보면 참 그 나물에 그 밥 같이 보일 따름이랍니다.
마치 기독교와 이슬람이 서로 자기들이 옳다고 싸우는 것처럼
알고 보면 서로 그 패턴에 있어선 그다지 다르지 않는데도 말입니다.

그럼 평안한 연말연시 보내시길~

                
늘복음 (10-01-01 03:21)
 
감사합니다^^
이젠 2010 새해로군요^^(떡국은 드셨는지)

핀잔을 들어도 자구 들어오는것을 보니 어지간히도 세기연의 글들에 빠지긴 했나 봅니다^^

신천지 하니까 님이 지적한것같이 제 글이 읽혀질수 있겠구나 싶습니다.
객관적인 조언이 맞는것 같습니다. 알레고리식 해석(사실 이런 해석이 뭔지 몰랐는데 누군가 지적하더군요)
그동안의 보수 기독교권에서의 영향이겠지요^^*

마침 제 글에 신천지인 김 아무개씨가 트랙백을 날렸길래 한번 들어가보긴 했습니다.
말만 들었지 실제로 신천지 증거장막 인가 뭔가 하는 사이트를 보기는 처음이었네요^^
거기 이만희 교주에 대한 소개와 그쪽 신학교에 대한 소개글을 읽고 아주 살짝 웃어주고 나왔습니다.

모 싸이트에는 신천지측에서 한기총인가에 공개적으로 토론한번 해보자라는 기사도 있더군요^^*
재미난 세상입니다^^

제가 누군가를 설득할 순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 설득 시키고자 함도 아닙니다.(비겁하겟지만...)
다만 최근 작성한 제 졸고가 아마도 저의정체성에 대하여 가장 자세하게 언급한것 같아서 혹시시간 나시면 재미삼아 읽어 보시라고 올려 봅니다.

http://7935.tistory.com/111

아마도 중간 부에 나왔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조용히 공부 더 하면서 님의조언대로 번지수를 잘 살펴서 지혜롭게 처신하렵니다. 암튼 그동안 시간 내주시고 응대하여 주셔서 감사드려요^^

또 나중에 공부좀 더하면 인사드리지요^^*
그럼 평안을 빕니다!

                    
정강길 (10-01-01 05:00)
 
자신은 신천지가 아니라는 얘기시군요. 그럼 혹시 구원파쪽 부류인가요?
괜찮다면 소속이 어디신지요? 아니면 소속 없이 그저 혼자서 각개 전투 하시는 분인가요?

올려주신 글 잘 읽었습니다. 읽어보니 저는 님의 주장과 기존의 보수 기독교측 주장과
어떤 큰 차이가 있는지를 잘 모르겠더군요. 예컨대 아래의 글의 경우 님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구주로 믿으십니까? 그가 십자가에서 흘린 피로 당신의 죄가 단번에 영원히 씻겨졌다는 것을 믿으십니까? 아니...믿어지십니까? 하나님은 아들 예수의 피를 인하여 당신의 머리카락 같이 많은 죄들 뿐만 아니라 모래알 같은 허물과 죄까지도 전혀 기억지도 못하신다는 말씀을 믿으십니까? 그 믿음을 가능하게 한 것이 당신의 의지입니까? 노력입니까? 정보입니까? 교리적인 지식 때문입니까?
>>성령으로 하지 아니하고는 단순한 구원의 말씀이 믿어지지 않습니다. 아무리 달변가가 당신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설득한다해서 예수가 믿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의 십자가의 피를 인하여 내 죄와 허물이 하나님 앞에서 가리워 졌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나의 어떤 공로나 의로운 행위나 선함 때문이 아니라 오직 예수의 십자가 구속 때문으로만 주어진 은혜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런 얘긴 기존의 보수 기독교에서도 흔히 볼 수 있고 너무 많이 주장하는 것들이잖아요.
이미 사영리에서도 그렇게 주장하구 있구.. 그래서 다시 말씀드리지만,
늘복음님이 사용하고 있는 예수, 십자가, 죄, 구원, 성령, 부활, 승천 등등 이러한 용어들은
다시금 보다더 구체적인 개념 정의와 해석들을 필요로 하고 있기에
아직까진 여전히 추상적인 언명들에 지나지 않는답니다.
그래서 자신의 가장 뿌리 깊은 기초 관점(궁극적인 해석학적 렌즈)에 대한 논의들이 필요한 거구요.

즉, 같은 단어인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을 다들 믿는다고 하더라도
자신들이 이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또한 저마다 그 내용들이 서로 달라지니까요.
성경에 나온대로 믿는다고 할 경우에도 성경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또한 달라지구요.
게다가 이미 그같은 성서 본문 안에는 서로 충돌하고 있는 모순과 오류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겐 좀더 보다 엄격한 해석의 장치들이 요구되고 있는 거구요.
바로 그 지점에선 우리 모두에겐 좀더 큰 정보들의 확보라는 지적 공부들이 필요한 것이지요.

글구 노파심에 말씀드리지만 행여 저의 그같은 얘기들에 대해선
가급적이면 조금이라도 감정과 상처를 받진 않으시길 바라겠습니다.
적어도 님의 답변과 응대는 성실했었고 저는 그 지점에 대해선 님에게 아무런 문제를 느끼지 않는답니다.
단지 제게 있어선 논의 전달 방식의 차원에 있을 이기에 정말로 상대방의 인격을 그렇다고
여길 정도의 그런 인격 침해나 모독으로 나온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하게 말씀드리는 바입니다.

역으로 만일 제 입장에 있어선 세기연을 반대하는 누군가가 구체적이고 정합적인 근거에 기반하여
이곳 세기연의 주장들을 조모조목 비판한다면 그가 아무리 심하고 격하게 말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오히려 세기연으로선 감사한 일일 수 있다는 점 역시 받아들이고 있답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구체적인 근거들의 제시와 더 큰 설명력 확보의 차원인 것입니다.

어차피 님이나 저나 공부는 평생 공부입니다. 저는 공부도 신앙수련 영성수련에 해당된다고도 보구요.
어쩌면 혹시 님이 더 옳을 수도 있고 반대로 저의 생각이 틀릴 수도 있을테지요.
바로 그래서 생각의 차이를 가늠하는 토론(논쟁)은
더많은 근거들의 제시와 더 큰 설명력 확보가 핵심 관건이라는 것입니다.
예컨대 천동설과 지동설, 창조론과 진화론의 경우와도 마찬가지인 셈이죠.
결국 사람들은 더 큰 설명과 해명들을 해주고 있는 입장들에 대해 더 많은 지지와 공감들을 표명하잖아요.

적어도 그것이 분명한 진리라면 그것은 동서고금 언제 어디서든
시간이 갈수록 보다 광범위하게 점점 더 큰 보편적 설득력을 확보할 것입니다.
만일 님이 이곳 세기연에 대해서도 좀더 그러한 차원으로 합리적으로 반박을 하신다면
오히려 사람들은 더욱 자연스레 님을 더 따르지 않을까 생각되네요.

그래서 사실상 토론은 말할 나위 없지만 사람의 대화 역시 합리적 차원에 서 있을때
그나마 서로 다른 입장들이 서로 합의할 수 있는 최선으로서 소통될 수 있는 지점이랍니다.
포스트모던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했던 하버마스의 합리성과 소통 이론 역시 괜히 나온 게 아니잖아요.

그럼 새해에도 평안을 빌며.. 꾸벅~

하늬바람 (10-01-20 18:46)
 
전 신학이 뭔지도 모릅니다.
다만, 두 분의 대화(논쟁, 또는 자기주장)을 보면서 큰 벽을 느낍니다. 같은 신학을 한 사람 들로서 이렇게 보는 시야가 다른가? 신기할 따름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주의와 진보 신학자 의 논쟁을 보는 느낌이 들어서입니다. 전 지금 죤 쉘비 스퐁 주교의 Jesus for non-religiuos 를 재독 중입니다.
반 안티 성서적인 서적과 역사적 예수 탐구에 관한 서적은 꽤(내 나름의 기준으로) 보았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성서와 관련된 신화서적(켐벨)과 고고학서적 등도 많이 보았습니다.
그 분은 예수의 출생, 제자, 기적, 부활 등 예수에 얽힌 얘기는 모두 해체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공동체가 신의 현존을 예수 체험으로 해석한 것이 복음서란 것입니다. 특히 인상 적인 것은 유대교 전례(예배)를 위하여 쓰였다는 주장입니다. 위에서도 정강길님이 지적하신대로 유대인 들의 회당 예배를 위한 해석적 산물이며 창작이란 주장이 설득력 있게 다가 왔습니다.
십자가 사건은 유대인 들의 유월절과 연계시킨 희생양과 광야에 놓아주는 속죄양을 병합한 욤 키프르 예배의식이란 주장입니다.
특히 시편22장과 이사야(제 2 이사야서)53장 주의 종 개념을 유월절 희생양과 대치시킨 창작이란 주장이고 보면 그 주장이 신선하고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다만,예수의 출생지를 나사렛으로 기정 사실화 함으로서 예수를 역사화 시킨 점은 받아드리기가 어려웠습니다.
왜냐하면 나사렛은 아직도 신학적 결론이 나지 않은 걸로 알고 있으며 나자레안 또는 나자로쓰 등 천문학적 또는 종교 분파로 불릴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이며 그 지역은 4세기 이후 급조된 도시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현제 신학적으론 어떻게 결론이 났는지가 궁금하기도 합니다.

신조 교리 종교까지도 넘어서자는 주장을 하고 계시는 것으로 보아 전 해체를 주장시며 대안적 기독굘 제시하십니다.
정강길님의 많은 독서에 감탄할 따름이며 더욱 사고의 발전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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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 기존 진보 기독교계의 ‘생명평화' 담론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미선이 392 02-10
131 영혼구원의 강조에서 <총체적인 생명구원의 강조>로 (4) 미선이 450 02-05
130 성서문자주의 또는 성서무오설 신앙보다 더 뿌리 깊은 고질병은? (9) 미선이 1033 02-02
129 죄의식의 종교에서 <이웃과 함께 성찰하는 종교>로 미선이 445 02-01
128 수직적 구조의 교회에서 <수평적 구조의 교회>로 (2) 미선이 596 01-21
127 서구식 목회문화가 아닌 <우리식 목회문화>로 미선이 513 01-21
126 과정신학에 대한 비판과 민중신학의 신 이해 접맥 미선이 811 01-13
125 ★ 예언 (1) 미선이 815 12-24
124 ♣ 새로운 기독교 신학의 인간론 (4) 미선이 658 12-19
123 ♣ 새로운 기독교 신학의 인간론 (3) (4) 미선이 747 12-12
122 ♣ 새로운 기독교 신학의 인간론 (2) (10) 미선이 973 12-05
121 새로운 기독교의 시간관, 태초와 종말로서의 시간관을 거부한다! (4) 미선이 795 12-01
120 ♣ 새로운 기독교 신학의 인간론 (1) 미선이 974 11-30
119 [예수운동 예배 견본] 새로운 기독교의 <예수운동 예배>를 위하여 미선이 1075 11-28
118 숭배하는 예배에서 <닮으려는 예배>로 (1) 미선이 928 11-19
117 거꾸로 흘렀던 감리교 역사, 바로 세우기엔 아직 멀었나 미선이 814 11-10
116 <새로운 기독교>를 소개하는 전체 안내 링크글 (계속 업데이트 예정) 관리자 2745 11-03
115 [논평] 봉은사 땅밟기 추태, 성경 '문자주의' 그 야만의 역사 넘어서야 (1) 관리자 965 10-29
114 기존의 진보 기독교와 새로운 기독교 운동 (1) 미선이 810 10-22
113 1세대 민중신학자 안병무의 미완의 작업과 기존 민중신학의 과제 미선이 788 10-19
112 [새기운 성명] 4대강 사업 관련, 문정현 신부의 정진석 추기경 비판을 지지한다 관리자 751 10-19
111 스퐁, "스티븐 호킹과 유신론/인격신의 죽음" (작은불꽃님 역) 관리자 1055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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