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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그런 신은 없다! 하지만 신은 있다!    
  글쓴이 : 정강길 날 짜 : 10-01-29 08:32 조회(1373)
   트랙백 주소 : http://freeview.org/bbs/tb.php/b001/449 




 
 
그런 신은 없다! 하지만 신은 있다! (1)
 
- 힘센 하나님에 대한 숭배, 구원하는 폭력의 신화로서의 기독교는 이제 사라져야!
 
 
 
 
"기독교의 신 관념은 나에게는 악마의 관념입니다.... 천사나 인간을 창조하여 밤낮으로 영구히 찬양할 수 있도록 하는
신이란 대체 어떤 유형의 신일까요? 그것은 제정신이 아닌 그리고 야만적인 허영심을 가진 전제 군주자의 모습이지요”
 
-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
 
 
 
 
하나님은 전지전능하고 완전무결할 것이라는 뿌리 깊은 고정관념

새로운 기독교 운동에 대해 설명할 때 나는 기존의 신 이해에서 새로운 신 이해로의 전환을 요구한다. 이때 새로운 신 개념에 대해 가장 큰 알레르기 반응은 절대적 초월자, 전지전능한 하나님, 초자연적인 신이라는 고정관념을 포기하지 못하겠다고 나오는 반응인 것이다. 예컨대, 악과 고통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도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지 않아서 그걸 해결 못하시는 게 아니라 그러한 해결능력이 있으심에도 단지 미천한 우리에게 당신의 더 크신 뜻을 알게 해주고 싶어서 그러할 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럴 경우 신은 자비하지 않은 존재다. 적어도 세계 안에는 의로운 사람들도 그냥 죽고 마는 현실이 있잖은가. 태어난 것 자체가 죄가 되어야만 했던 어린아이와 여자들도 무수히 죽어갔던 현실은 부지기수다. 인류사의 비극에 속하는 전쟁 및 인종대학살이나 최근의 아이티 참사 같은 고통과 비극의 사건들은 지구 역사 이래로 살펴보면 그렇게 드물었던 사건도 아니다. 전쟁과 폭력과 재해로 인한 삶의 고통과 비극들은 이미 우리 일상에서부터 국가사회와 전세계 지구 역사 도처에 널려 있다. 만일 하나님께서 전능하신 존재이라면 세계 안에 있는 악과 고통의 문제를 꼭 그런 식으로 해결했어야만 했는가? 결국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의 대답은 ‘미천한 인간이 어찌 하나님의 뜻을 죄다 알 수 있겠는가’라는 불가지론(不可知論)으로 돌려버리기가 일쑤다. 즉, 마침내 설명 못하는 지경에 이르면 ‘무조건 믿어야만 한다’라는 압박이 요구되고 있는 실정인 것이다.

그렇지만 불가지(不可知)라고 해도 끊임없이 모색해보는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탐구 자체마저 봉쇄시켜선 안될 것이다. 어차피 보수 근본주의자들이든, 온건 복음주의자들이든, 진보 기독교인들이든 간에 모두다 저마다의 한계 인식들 가운데서 제각기 모색해나가는 현실인 것이다. 흔히 말하길, 하나님한테 사람의 잣대를 적용시켜선 안된다고 말하지만 그렇게 주장하는 교인들 역시 그 같은 명제의 적용에서 결코 예외일 순 없다는 보여진다(나중에 기회가 되면 “오직 하나님만 홀로 영광 받으소서”의 실체가 결국 무엇인지를 말씀드리겠지만, 현실에서 정작 영광 받고 있는 분들은 알고보면 교회계급 종사자들일 따름이다).

찰스 하츠온 및 그의 종교철학사상을 이어받고 있는 과정신학자들은 말하길, 현실 세계 안의 악과 고통의 문제와 신은 전지전능하고 자비하다는 관념은 애초부터가 서로 양립가능하지 않다고 보고 있다(이에 대해선 http://freeview.org/bbs/tb.php/b001/20 참조, 혹은 데이빗 그리핀의 <과정신정론>(이문출판사) 참조). 이미 근본적인 차원에서부터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논제를 놓고서 이에 대해 억지스럽게 집착해왔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흔히 말하길, 신앙은 논리로 설명될 수 없다는 핑계를 대면서 결국은 신자들에게 “이해되지 않는 점이 있더라도 무조건 믿어야 한다”식의 <무조건 믿어라의 기독교>를 전수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 기독교 신앙의 체계로는 합리적 이성으로서의 소통과 기능을 아예 무시하는 점들이 매우 많을 수밖에 없다. 뿐만 아니라 성경에 쓰인 하나님은 전지전능하다고 표현하는 성서 구절도 실은 그 시대적 상황의 한계가 반영된 것과 더불어 사실의 차원보다는 고백의 의미로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점도 간과되어선 안될 것이다. 물론 그 옛날에는 고백의 차원도 그 자신한테는 사실로서 받아들여졌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오늘날의 현대인들이 그 옛날의 고대인들이 아니라는 사실 역시 너무나 자명한 이치인지라 이제 우리는 신에 대해서도 또다시 새롭게 말해야 될 시점에 이르렀다고 하겠다.

기존의 낡은 유신론보다 훨씬 설득력 있는 무신론자의 주장들

얼마 전 리처드 도킨슨의 <만들어진 신>의 세간의 베스트셀러가 된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아마도 오늘날 많은 현대인들은 무신론적 상황에 공감하고 있어 보인다. 무엇보다 현대 과학의 세례를 입고 있는 현대인들에게는 기존의 유신론이 너무나 낡아 있어 보이는 것이다. 그럴 만도 한 게 기존 유신론자들의 신 관념은 전적으로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완전자로서의 신 이해에 사로잡혀 있는 실정이다.

리처드 도킨스는 이에 대해 <만들어진 신>에서 하나하나 조목조목 반박하고 있다. 도킨슨 뿐만 아니라 오늘날 많은 지식인들은 무신론을 주저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형편이다. 자신들을 거리낌없이 무신론자로서 소개한다. 그리고 이들은 종교가 저지르고 있는 살육과 폐단과 미신적 행위들에 대해 날카로운 공격들을 해대고 있다. 인류사의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라 부정할 수도 빠져나갈 수도 없다.

이에 대해 온건한 보수 신학자 알리스터 맥그라스가 반론이랍시고 <도킨스의 망상>이라는 짧은 반론서를 펴냈지만 내가 볼 땐 제대로 반박했다고 보기엔 너무 많이 불충분한 것으로 보인다. 맥그라스는 자신이 궁극적으로 추구하고 있는 유신론적 신관이 어떤 유형의 것인지, 그리고 도킨스가 공격한 기존 유신론이 어떤 유형의 유신론이었는지를 제대로 분석해내지도 못하고 있다. 오히려 따지고 보면 무신론자인 도킨스의 글이야말로 훨씬 더 훌륭했을뿐더러 솔직한 만큼이나 매우 힘 있는 명문들로 즐비했었다고 본다.

나는 새로운 기독교의 입장에서 미리 말한다면, <전(前)이성>의 차원에 있는 기존의 낡은 유신론보다는 좀 더 이성적인 무신론 진영이야말로 훨씬 더 낫다고 본다. 적어도 비교적으로만 말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실제적으로 기존 기독교인들 대부분은 ‘신은 있다’와 ‘신은 없다’라는 점에 대해 논증적으로 직면할 수 있고 이를 제대로 소화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심지어 신학자든, 목사든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처드 도킨스 같은 전투적 무신론자들의 공격을 비껴가는 방법은 매우 간단하다. 그것이 뭔가? 바로 기존의 기독교 유신론을 폐기처분하면 그만인 것이다. 아, 이 얼마나 간단하면서도 어려운가!

이천 년 동안 전통화된 습관은 무섭도록 나 자신과 나를 둘러싼 가족들과 교회 환경 및 사회문화까지 지배함으로써 여전히 기존 기독교의 유신론 사상에 미련을 두도록 만들고 있다. 하지만 제발 원컨대 미련 없이 폐기 처분해 버려라!

기존의 유신론, 신에 대한 고정관념을 폐기처분하라!

기존 유신론의 신 관념에는 원시적이고 야만적이며 정복적이고도 조잡스런 신 관념 사상이 함께 깃들어 있다. 이는 성서 안에도 있다. 예를 들어, 여호와의 말씀과 명령에 의해 여자와 아이와 유아들까지 호흡이 있는 모든 생명들을 싸그리 말살하라는 성경구절들(신2:31-35/수6:16-21/10:39-40/11:11-15/삼상15:1-3 등등)에 대해 이를 온전히 설명할 수 있고 제대로 솔직하게 설교할 수 있는 목사는 거의 없다. 성경에 그토록 나오는데도 그 같은 구절들은 차마 피하고 싶은 껄끄러운 구절들일 따름이다. 어차피 성경구절들도 자기 입맛에 맞게 취사선택 하잖은가.

악과 고통의 문제에 대해서도 그저 할 수 있는 구차한 얘기라곤 결과적으로는 천국의 보상을 위한 시련과 연단의 의미일 뿐이라는 식의 별로 현실성 떨어지는 자조적 위안으로서만 얘기해줄 따름이다(물론 그런 식의 자위도 어떨땐 필요하다곤 생각하지만). 그러나 그런 식의 해석들은 죽지 않고 살아남은 자들의 입에서나 정당화될 수 있을 뿐, 지구 역사 이래로 이 땅에 무수히 그리고 무참히 죽어갔던 수많은 여자와 아이들의 생명들 앞에선 한낱 기만적이고 사치스런 망언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기에 다시 한 번 더 분명히 말한다. 신이 전능하다고 보는 건 분명한 망상(delusion)이다. 혹은 신은 자비하다는 쪽이 망상이거나..

고대로부터 형성된 신 관념에는 다신론, 유일신론 등등 이러한 유형으로도 나뉠 수 있긴 하지만 이른바 <신>God이라는 개념 자체를 그 어떤 절대자, 완전자, 초월자로 이해하는 관념 역시 서구 기독교 사상사 안에 깃들어 왔었다. 그것은 처음에는 고대 히브리 역사의 이해에서 출발하였으나 그리스 로마 시대를 거치면서 점차적으로 그 보편적 해석의 체계를 쌓아감에 있어 그리스 철학의 이론을 통한 해석학적 토대와 그 기준들을 마련해갔었다.

이러한 신론 확립의 과정에서 신플라톤주의자였던 플로티노스의 <일자>the One 개념을 나름대로 받아들였던 어거스틴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부동의 동자>Unmoved Mover를 기독교의 신 관념에 적용시킨 토마스 아퀴나스의 조직신학적 신론은 기독교의 하나님 이해를 체계화하는데 있어 매우 결정적인 신학적 작업에 속했었다. 신이라는 존재는 모든 시간적인 현실 존재들의 창조자이자 가장 궁극적인 원인자이면서 그 자신만큼은 완전무결하여 현실 세계의 인과적 영향들에 대해선 초월적이고 독립적인 자존자로서 정식화된 것이다. 무례하게도 '스스로 있는 자'라고 하잖은가(출3:14에 대한 다른 히브리어 해석을 참조하려면 김이곤,『출애굽기의 신학』(한국신학연구소), pp.52~56을 보라).

이미 오래전부터 기독교 변증가들이나 교부들 및 중세 철학자들은 그러한 해석학적 관점에서 성서의 내용들을 해석하였었고 서구교회의 신앙을 확립하는데 이바지 하였었다. 뿐만 아니라 심지어 이같은 조직신학적 신 관념들은 루터와 칼뱅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서구 교회와 한국교회 현장에까지 끊임없이 영향을 미치고 있는, 신에 대한 지배적인 고정관념으로서 자리 매김되어 있다. 적어도 기독교 메인 스트림은 이 같은 조직신학적 신론의 하나님 이해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한 실정이다. 오늘날 우리가 교회 현장에서 성경공부 교재를 통해 배우고 있는 하나님 이해는 바로 이러한 신 관념들에 맞춰져 있다.

종교철학자 찰스 하츠온은 전지전능으로서의 신, 절대적 군주자로서의 신, 완전불변의 신 개념들은 오류가 있는 개념이라 폐기되어야 할 신 관념으로 꼽고 있다. 마찬가지로 과정신학 진영의 경우 천국행이냐 지옥행이냐를 결정하는 유일무이한 심판의 주제자이자 우주적 도덕가로서의 신 개념 및 가부장적 유형으로서의 남성적 신 개념을 거부한다. 이러한 하나님 이해들은 하나같이 신에 대한 구멍 뚫린 개념들이라는 것이다. 흥미로운 사실 하나는 특히 종교의 경우에 있어선 이론적 오류라는 사태가 결국은 폭력의 자행이라는 실천적 사태로 손쉽게 이어진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종교라는 것이 우리네 삶의 모든 전반들을 가장 강력하고 뿌리 깊게 지배하고 있는 기제이기 때문에 그러할 지도 모르겠다. 즉, 종교의 경우 신앙을 지배하는 이론적 신념들이 그저 이론상으로만 끝나는 게 아니라 결국은 나의 생활 전반에 깊게 영향을 미치는 핵심에 속한다. 게다가 종교라는 분야는 초창기 성립된 이론이나 정식화된 교리에 대해선 웬만해선 이론적 수정을 하지 못하는 점들이 있다. 그리하여 이론적 반성과 수정이 안될 경우 그로인한 비극적인 폭력사건들은 반복적으로 되풀이 될 위험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기독교 사상사는 기독교 폭력사와 동전의 양면처럼 맞물려 왔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정말로 그러한지 어디 한 번 살펴보자.
 

"왜 하나님의 이름으로 전쟁을 하냐구요? 최고의 명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전쟁을 원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더 전능한 존재가 어디있겠어요.
전쟁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경우 승리가 보장된다고 말해왔습니다."  - 한스 큉(신학자)
 
God is Too Big For Just One Religion
하나님은 한 종교에 국한되기엔 너무나 큰 분이다.  - 가자지구 장벽 담벼락 낙서

 

힘의 하나님 : 전제 군주왕 모델로서의 제국주의적 하나님

기존 기독교의 하나님 신앙에는 <힘의 과잉>에 대한 숭배와 찬미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힘의 과잉>이라는 용어를 좀더 쉽게 이해하고자한다면 <폭력>이라고 봐도 좋다. 오늘날 폭력이란 개념에는 물리적 폭력만을 일컫지 않는다. 사회구조 혹은 국가폭력 같은 체제 시스템의 과잉한 힘으로부터 받는 폭력도 분명한 폭력에 해당한다. <폭력>이란 개념에는 힘의 과잉 집중 혹은 힘의 넘침 및 힘의 불균형성을 전제하고 있는 개념인데, 관계적 사태에서 볼 경우 그러한 힘의 과잉(넘침)은 또 다른 한 편에서 볼 경우 힘의 결핍이라는 약자를 낳게 한다. 내가 기존 기독교를 유달리 비판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간단하다. 이들이 믿는 하나님 이면에는 구원하는 폭력에 대한 신화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이에 대해선 월터 윙크, <사탄의 체제와 예수의 비폭력>(한국기독교연구소) 참조). 그것은 곧 힘에 대한 숭배인 것이다.

나 자신의 이런 주장에 대해 혹자는 순진하게도 “기독교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인데, 우리가 언제 폭력의 신을 섬겼다는 얘기냐? 기독교인들도 알고 보면 사회봉사도 많이 하고 착한 일도 많이 하지 않느냐?”라고 따져 물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본인의 기독교 짠밥 정도도 설마 그런 점까지도 모르고서 얘길 꺼냈겠냐만, 나로선 좀더 시야를 세계사적으로 봤으면 하는 바램이 있다. 역사적으로 서구 기독교가 자행해왔던 폭력의 역사는 너무나도 일일이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그것은 예수사건 이후 교리가 확립되어 가는 과정에서도 종교 논쟁과 폭력의 싸움들은 자행되었으며(리처드 루벤슈타인의 <예수는 어떻게 하나님이 되셨을까>(한국기독교연구소) 참조), 로마의 국교가 된 이후에도 여전히 폭력적이었고, 중세 기독교가 지배하던 시절에도 여지없이 폭력적이었다. 물론 십자군 전쟁과 마녀사냥은 대표적 사례일 것이다. 

그리고 천주교와 개신교가 갈라진 종교분파 사건(세간에선 ‘종교개혁’이라 불리지만 개혁이 못되었다고 봄, 본인의 "그것은 과연 종교개혁이었나?" 참조) 사건 중에도 엄청난 생명들이 죽었으며, 그 이후에도 기독교가 자행했었던 폭력의 역사는 멈추지 않고 계속되어 왔었다. 신대륙 원주민들과 인디언들을 무참히 학살했던 기독교인들은 부지기수였다. 살해한 생명의 수가 1억 명 정도라면 엄청난 재앙이 아닌가. 기독교인들은 흑인 노예에 대한 폭력을 성경적이라고 보기도 했었다. 서구 제국주의 땅따먹기 경쟁에는 언제나 기독교의 복음전파도 함께 있었다.
 
어디 그뿐이랴. 20세기에도 여전히 기독교도들은 유대인 학살 방조, 흑백차별, 남녀차별의 죄과가 끊이지 않았었다. 심지어 최근까지도 우리는 신실한 기독교인 부시 행정부 시절의 이라크 침공을 기억하고 있다. 부시가 기독교의 하나님을 믿고 따르려는 이유는 간단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힘센 분이니까! 알고 보면 그 하나님의 실체가 바로 강력하고 전능한 힘 곧 폭력이라는 종교였던 것이다.

아, 그것은 신을 잘못 믿는 인간들의 잘못이지 기독교의 신 개념 자체가 폭력적이라서 그런 건 아니라고 항변할 지도 모르겠다. 물론 어리석은 인간의 잘못임은 너무나 분명하다. 하지만 기독교가 자행해왔던 폭력사는 거의 대부분이 신의 이름으로 살인과 전쟁이 저질러졌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조찬선, <기독교죄악사>(평단문화사) 참조, KBS다큐 <신의 나라 인간의 나라> 3부작 참조). 신실한 크리스찬 신앙을 표방하는 많은 사람들이 마치 자신이 하나님의 대리자인양 심판을 빌미로 해서 다른 생명들에게 폭력을 자행해왔던 것이다.

혹자는 그러한 사건들은 세계사적인 매우 큰 사건들이 그러했을 뿐이고, 우리네 기독교의 일상과는 거리가 먼 얘기라고 말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천만의 말씀! 결코 그렇지 않다. 기존 기독교가 자행하는 폭력은 이미 우리 삶의 일상에서도 여지없이 발견되고 있다. 확성기로 고래고래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고 떠들어대는 열혈 교인들, 동네 장승과 불상을 우상숭배라며 베어버리는 열혈 신자들, 이해되지 않더라도 무조건 믿어야만 한다고 억지 부리는 기독교인들 등등 이런 자들은 우리가 흔히 일상에서 접하는 기독교 폭력의 일상들이다. 사실 알고보면 기독교 구원독점주의를 표방하는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교리 자체가 기독교 아닌 것들에 대해선 인정하지 않는 태도라서 심각한 폭력을 낳고 있는 점이 있다.

무엇보다 기독교인들은 이해되지 않더라도 억지로라도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으라고 강권함으로써 사실상 제 스스로 하나님을 파시스트적인 군주로도 만들고 있는 것이다. 존재의 자율적 결정 자체는 기본적으로 그 누구도 심지어 신조차도 침해할 수 없음에도 말이다. 물론 이러한 행태들이 비단 신관 하나만의 문제는 아닐테지만, 어쨌든 여기에는 기존 기독교의 뿌리 깊은 신 관념 역시 부지불식 간에 관여되어 있다는 얘기다. 물론 전능한 신 개념 자체가 폭력적이라는 얘기는 아니다(물론 이론적으로는 정확히 반합리적이다). 그러한 반합리적 신앙의 신념이 삶의 행태로 드러날 경우 폭력적 행태를 띨 여지가 많다는 것이다.

전제 군주왕으로서의 하나님 이해는 그 자신이 마치 신의 대리자인 양 현실에 드러날 때에는 세계 안에 왕노릇 하게 만들뿐만 아니라 그러한 자신의 왕노릇이 또다시 군주 모델로서의 하나님 신앙을 지속하게끔 함으로써 끊지 못하는 끔찍한 악순환이 되어 있는 실정이다. 교회의 대형화와 황제식 권력 구조를 지향하고 있는 오늘날의 교계 현실은 전능왕 신앙의 충실한 반영일 뿐이다. 하나님이 힘이 세면 셀수록 힘센 하나님을 믿는 나의 힘도 계속 커지고 확장될 수 있는 기복신앙으로도 이끌고 있다. 믿고 구하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복주시고 이뤄주시리라! 자본주의적 성공 신화 및 맘몬주의 신앙도 역시 알고 보면 힘의 과잉에 대한 숭배에 다름 아니다.

과정신학자 그리핀은 말하길, 미국의 패권 외교를 사례로 하여 그 밑변에는 힘의 하나님이라는 제국주의적 신관이 깔려 있음을 갈파한 바 있다. 모든 사물을 통제하는 힘으로 이해되는 전능성은 신을 규정하는 특성이 되어 버렸고, 이것은 서구 사회가 근대 이후에도 글로벌 제국주의를 지향하게 만든 하나의 요인이 되기도 했다는 것이다.

바야흐로 이제 우리는 “전능왕 오소서~”가 아니라 “전능왕 저리 가소서~”를 외쳐야만 하지 않을까 싶다. 그러한 하나님은 이제 제발 좀 찌그러졌으면 좋겠다.

위계적 이원론, '힘의 과잉'이라는 폭력을 정당화해주고 있는 진리 담론

힘의 하나님을 표방하는 신앙은 당연히 힘의 복음으로 드러난다. 이러한 힘의 복음이 보다 세계만방으로 뻗어나가기 위해선 결국은 진리 담론에도 기대려는 보편화의 작업이 필요했다. 따라서 이들은 결국 ‘힘의 과잉’을 정당화하는 철학 사상을 끌여들였고 이를 기독교 조직신학의 바탕으로서 깔았는데 그것이 뭔고 하니 바로 <위계적 이원론>hierarchical dualism 이었던 것이다(<위계적 이원론>에 대해선 http://freeview.org/bbs/tb.php/e001/58 참조). <위계적>이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존재를 성찰할 때 어느 한 쪽이 본질적 핵심적이라면, 다른 한 쪽은 종속적 파생적이라고 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위계적이라고 간파했던 자들은 특히 여성신학자들이었는데 이들은 서구인들의 무의식을 지배해왔던 진리 담론으로서의 이 철학적 이원론의 몹쓸 행태를 무던히도 고발했었다. 왜냐하면 특히 여성의 경우는 약자들 중의 약자로서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도 가장 심각한 피해자들이었고 고통 받는 경험을 한 우선적 민중들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오늘날 기독교계의 윗대가리들은 거의가 하나같이 남정네들의 독점 구조로 이뤄져 있는 실정이다. 구성원으로 따지면 여성들이 훨씬 많음에도 말이다. 심지어 이러한 남정네들의 강단 독점 구조가 지극히 성경적이라고 보기도 한다. 선악과를 따먹은 첫 장본인이자 피를 흘리는 여성은 불경스럽고 불결한 존재로서 기본적으로 성스러운 강단에 설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기독교만이 유일무이한 구원의 종교라고 보는 것 역시 이미 다른 종교들에 대해 폭력적인 작태일 뿐이다. 알고 보면 <배타성>이라는 것은 폭력성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자기만 인정하겠다는 의미니까 말이다. 배타적 구원론 입장이 아니면서도 얼마든지 기독교적 정체성 및 선교가 가능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가능성을 모색하거나 염두에 두고 있는 기독교인들은 거의 드물다. 많은 교인들은 배타적 구원론에 세뇌되어 있으며, 그럼으로써 사유의 폭력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미 그 같은 폭력적 사유는 다른 이웃종교인들이 보기에도 매우 혐오스러울 정도다.

기독교는 또한 합리성을 추구하는 자연과학 진영에 대해서도 매우 폭력적이었다. 수많은 종교재판은 수많은 과학자들을 심판하고 처벌했었다. 종교와 과학의 대결 양상은 현대라는 20세기와 21세기 오늘날에 들어서도 여전히 일어나고 있다. 이른바 창조론(with지적설계) 대 진화론의 대결 양상이 그것이다. 사실상 생물학의 진화론 자체가 유신론이냐 무신론이냐를 말해주고 있진 않지만, 기존의 성서 창조이야기를 협공하는 것으로 받아들인 기독교인들에게는 마치 진화론 자체가 무신론을 지지하는 것처럼 여기고 있다. 진화론을 받아들이는 자연과학자들 중에는 유신론자도 여지없이 많다.

오늘날의 진화론이라는 학설은 생물학이라는 한 분야에서 인정받고 있는 그런 협애한 성격의 이론이 아니다. 이것은 천문학, 지질학, 화학 등등 우주 형성과 지구 탄생을 연구하는 다양한 자연과학 분야들의 성과들과도 맞물려 있다. 따라서 오늘날 진화론을 반대한다는 것은 생물학 진영 하나에 대한 공격이 아니라 현대 과학 진영 전반에 대한 공격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오늘에까지 기독교인들의 폭력성은 과학 교과서에 어떻든지 창조론 혹은 지적설계론을 집어넣고자 혈안이 되어 있다. 혹자는 이렇게 얘기할 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진화론을 밀어내려는 게 아니라 동등하게 교과서에 실리고 싶을 뿐이기에 폭력적인 게 아니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내가 볼 때 동등하려고 보는 그 발상부터가 현대과학 진영의 기본적 룰을 어기는 폭력성이라는 사실이다.

과학은 종교 분야와 다르게 과학 진영의 룰을 따라야 한다. 과학은 학문적 성격부터가 분명한 근거와 추론을 핵심으로서 지향하고 있다. 많은 자연과학자들이 진화론을 아무 검토없이 맹목적으로 받아들이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종교 색깔을 띠고 있는 창조론이나 환원불가능한 복잡성 어쩌구하면서 택도 없는 지적설계론을 과학계에 디민다는 것은 정말이지 쪽팔리는 웃음거리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그 옛날 기독교가 천동설을 지지한 것만큼이나 쪽팔리는 역사로 남게 될 것이다. 그 옛날 천동설이 권력을 확보하고 있을 때 초라한 지동설의 등장은 너무나 허약해보였다. 하지만 우습게도 오늘날 근본주의 기독교인이라고 하더라도 그 옛날의 천동설을 지지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이 현대의 진화론을 폄하하는 작태는 지금도 웃음거리지만 사실상 날이 갈수록 더욱 확실한 쪽팔리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며, 결국은 우리 모두가 쪽팔리는 일이라는 점을 알아차렸을 때 머잖아 진화론은 그 옛날 지동설만큼이나 지극히 당연한 과학상식으로서 자리매김 되어 있을 것으로 본다. 찰스 다윈의 한(恨)은 그때쯤이나 풀리려나.. 내가 볼 때 근본주의 기독교는 이론상의 반합리성이 실천상의 폭력성으로 드러날 수 있음을 너무나 잘 보여주고 있는 인류사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 이제 과학자들도 예전에 갈릴레오가 종교재판을 받을 때보다는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을 것이다.

다시 한 번 더 강조하지만, 놀랍게도 사탄의 실체는 기독교 밖에 있지 않다. 사탄이 곧 힘의 하나님이며, 적그리스도는 이미 기독교 신앙으로 신앙화 되어 있는 작금의 현실임을 제발 똑똑히 인지했으면 하는 바램이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힘의 기독교, 폭력의 기독교여,  반합리적 기독교여, 이제는 가라! 언젠가 너네들은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멸망할 때가 올 것이다. 구약시대 예언자들은 하나같이 말했었다. 너 이스라엘이여,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할 것이라고!! 그런데 놀랍게도 그 외침은 지금도 마찬가지의 패턴을 지니고 있다. 너 기독교여, 뒤바뀌지 않으면 멸망할 것이라고~!!!
 
물론 이런 나의 의견에 반대하는 보수 기독교인들은 나에 대해 이렇게 말할 지도 모르겠다. 당신도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지옥 불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하지만 나는 오히려 그런 비난자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기꺼이 냉소를 보내드리는 바이다. 그런 하나님은 없으니까 말이다! 신화가 과거에 있어선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을 진 모르나 지금도 여전히 이를 문자적 사실로만 본다면 그건 현대인의 커다란 오해요 망상일 뿐이다. 그런 "신은 없다. 그러니 마음 놓고 인생을 즐겨라!" 요기까지는 도킨스의 무신론 이론에도 일정 부분 지지하는 어느 새로운 유신론자의 고백이기도 하다.
 
다음부터는 현대의 무신론과 새로운 유신론과의 차이에 대해서 언급될 것이다.

(계속 이어집니다)
 

정강길 / 세계와기독교변혁연구소 연구실장

 

 

정강길 (10-02-02 11:24)
 
윗글에 대해 박창진님이라는 분이 당당과 뉴조에 제 글에 대한 반론이라면서 글을 올렸네요.
아마도 일반적인 보수 기독교인이라고 생각되는데 암튼 이곳 세기연에도 이 분의 글을 실어놓습니다.
하지만 굳이 세기연에서 이 분의 글에 대한 저의 재반론까지 걸어놓진 않겠습니다.
이미 다 아는 얘기일꺼라 생각도 들구해서리.. 암튼 그냥 한 번 읽어보시면 됩니다요..^^;;

...........................................

바른 신관과 바른 삶에 대해

- 박창진

현대의 지성이라는 면에서는 아주 설득력이 있고 만족스러운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주장들이 당당하게 이야기될 수 있는 현실은 기독교계가 자초하였다는 점도 부인할 없다고 생각합니다. 계속해서 적을 내용들은 분명히 지금의 입장을 더욱 공고히 하는 자료로 작용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렇다고 하여서 정강길 님의 글이 옳은 주장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전혀 별개의 것을 엮어서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하는 것일 뿐입니다. 기독교의 역사에서 나타난 그러한 잘못된 모습이 기독교의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이해와 고백에 의해서 필연적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단적인 예로 저는 님이 비판하는 그러한 하나님 관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님이 말하려고 하는 그러한 역사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잘못된 신관으로 인해 나타나는 잘못된 모습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잘못된 모습이 모두 신관이 잘못되었다는 증거는 아닙니다. 신관이 바르더라도 잘못된 모습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신관을 삶에 잘못 적용하여서 그러한 잘못된 모습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 역사에서 나타난 잘못된 모습의 많은 경우가 그에 해당된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이해를 피력하는 것으로 님의 입장에 대하여 반박하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에 대한 이해에 차이가 있습니다만, 저는 하나님과 서로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사람들 간에 서로 사랑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피조 세계를 다스리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의 완성된 모습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은 하나님과 서로 사랑하셨습니다. 사람들을 사랑하셨습니다. 피조 세계를 하나님의 뜻을 따라 다스리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사랑하고 사람들 간에 서로 사랑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피조 세계를 다스리는 사람들로 땅이 가득 채우기를 원하셨다는 뜻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예수님과 같은 사람들로 이 땅에 가득하게 되기를 원하셨다는 뜻입니다.

그 원하심은 사람에 의해 철저하게 거부됩니다. 첫 사람과 그 이후로 사람들이 자신들의 의사로 그 원하심을 거부하고 자신들이 원하는 바를 따라 살고 있는 것입니다. 참 우스운 사실은 무신론자들의 태도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의 주장을 따르면 현재의 사람 역사에서 나타난 모든 일은 하나님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사람들에 의해 자율적으로 이루어진 역사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신론을 이야기하면 그 역사에 대한 책임을 하나님께로 돌린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사람들에 대해 의인이 하나도 없다는 하나님의 선언이 정말 맞다는 한 근거로 봅니다.

바울 사도는 사람들의 양심에 율법의 일들이 새겨져 있는데, 그것으로 서로 고소하며 책임을 떠넘기고 자신을 합리화한다고 적었습니다(롬 1:14). 무신론자들의 태도와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앞에 언급한 뜻을 이루기 위하여 일하셨고 지금도 일하십니다. 그에 부합되지 않은 사람의 역사는 그분의 책임이 아닙니다. 전적으로 사람의 책임입니다. 특별한 목적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자연에 대해 역사하시고 활용하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집트에 임한 아홉 재앙, 가나안 정복 때에 있었던 현상 등입니다. 그 이외의 경우는 자연 재해입니다. 자연 재해는 자연 재해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역사에 개입하셔서 행하시는 일은 언약이라는 것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언약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다음으로 미루겠습니다. 언약은 변화가 있습니다. 아담 언약, 노아 언약, 아브라함 언약, 모세 언약, 포로 후 회복 언약(새 언약), 예수님으로 말미암는 새 언약(완성된 새 언약)까지. 이는 사람의 성장기와 연결하여 생각할 수 있습니다. 갓난아이, 유아기, 소년기, 청소년기, 청년기, 장년기입니다. 각각의 단계에서 그 대상에 대한 부모의 태도는 다릅니다. 각 기간에 부모의 가장 적절한 태도는 다릅니다. 그렇게 다름이 잘못은 아닙니다. 그리고 각기 다른 태도를 나타내지만 부모가 한 사람입니다. 각 언약의 시대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모습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많은 무신론자들은 그 모습의 차이를 잘못이라고 하거나 아니면 다른 존재라고 말합니다. 제게는 언약에 대한 무지로 인한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이 땅은 하늘을 아로새기는 것입니다. 이 땅이 제2의 하늘이 되는 것입니다. 각각의 모든 언약이 추구하는 목표입니다. 이 땅이 거룩하신 하나님이 즐거이 거할 수 있는 집이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모두 그 목표를 향하여 나아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 한 모습이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바와 완전히 반대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땅의 경우에는 그 사람들을 완전히 멸하시고 새 사람으로 새롭게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노아 홍수가 그렇습니다. 가나안 땅에 대한 완전한 멸망 요구가 그렇습니다. 전자는 모든 땅이 그 대상이고 후자는 아닙니다.

노아 홍수의 경우에 예수님이 감람산 강화(마 24장)에서 언급하십니다. 그 내용은 옛 언약의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통하여 옛 언약을 완전히 끊으시는 것입니다. 이는 주후 70년 로마를 통하여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옛 언약의 중심인 돌 성전이 완전히 파괴되는 것으로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역사적 사실에 대한 예언에서 언급하셨음을 생각하면 노아 홍수를 사실로 생각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전통적인 신관을 거부하면서 예수님에 대해서는 참 사람으로 닮아야 한다는 사람들이 이에 대해 충격적이기는 하겠지만 말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을 최고의 가치로 삼습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고자 합니다. 이는 마치 사람이 스스로를 위하여서는 존재하지 않고 하나님만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주인의 즐거움만을 위하여 존재하는 애완견과 같이 생각될 수 있습니다. 최고의 애완견은 주인이 원하는 대로 먹고 주인이 원하는 대로 배변하며 주인이 원하는 대로 꼬리를 흔들며 주인이 원하는 대로 짖는 개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사람도 그렇게 여겨질 수 있습니다만 그것은 오해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사람은 철저하게 자율적인 존재입니다. 주인으로서 사랑하는 애완견과는 다른 차원의 자율적인 존재입니다. 먹는 것과 마시는 것 그리고 잠자는 것 등으로 길들여지는 자율이 아닙니다. 사람은 짐승과는 애초부터 다른 차원의 존재입니다.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창조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지니게 된 자율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짐승과 같은 수준에서 자신의 자율을 값싸게 사용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먹는 것과 마시는 것 그리고 잠자는 것에 의해 길들여지는 자율로 살아가는 경우입니다. 반면에 자신의 뜻과 의지를 지키기 위하여 목숨까지도 기꺼이 내어놓는 경우도 있습니다. 스스로 받아들인 참 가치를 위하여 전 존재를 던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애완견을 길들이는 사람 주인과는 다르십니다. 먹는 것과 마시는 것 그리고 잠자는 것으로 우리를 길들이려고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시고 사람이 스스로 생각하여 받아들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은 사람을 가장 사람답게 살아가도록 이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과의 사랑 안에서 사람이 서로 사랑하며 이 땅을 바르게 다스리는 것입니다. 사람과 직접 연관된 하나님의 뜻은 사람이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곧 주 예수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하신 것과 같이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가장 사람답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산다는 것은 주인의 즐거움을 위하여 존재하는 애완견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가치는 배제되고서 하나님만을 위하여 산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가치를 바르게 알고서 가장 사람답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사랑하신 것과 같이 하나님을 사랑하기,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과 같이 서로 사랑하기, 우리 밖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는 선을 행하기, 피조 세계를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리기.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완전하게 된 새 언약의 시대에 하나님께서 기독교회에게 원하시는 바입니다. 어떤 국가나 단체 또는 종교 간에 폭력, 전쟁 등을 통하여 복음을 확장하겠다며 나타난 모든 모습은 그 원하심을 저버린 것입니다. 악행입니다. 그런 악행을 앞세워 하나님을 재단하겠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무지일 뿐입니다.

하늬바람 (10-02-03 07:56)
 
위 박창진 님에 대한 뉴스엔조이에 올렸던 댓글을 세기연 회원님 들과 공유코 신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정강길 실장님의 주장과 대비하면 어린아이의 답변과 같은 것을 반론이라고 올려 놓아 기가차서 댓글을 단 것입니다.

묶은 신론은 그 자리를 새로운 대안 신론에 자리를 내어주어야 한다는 것은 아주 지당한 일입니다. 신의 정의란 결국 소통하거나 실증할 수 없는 관념적 언어이고 자기 고백의 언어에 불과합니다. 수메르 신화인 창세기의 표현은 그 시대의 표현이고 신학입니다. 노아의 신화의 언어도 동일한 신학에 지나지 않습니다. 출애굽 사건도 그 시대의 그 민족에 필요한 신학적 표현이고 해석이겠지요. 인간의 언어란 이미 해석이니까요. 더욱이 부족을 위한 언어라면 해석적 언어의 산물은 어떤 지향점이 있었을 것이며 자기 고백적 언어란 점은 쉽게 추론할 수 있는 점입니다. 따라서 기독교가 발전시키고 제도를 위하여 정의한 신학적 신론은 묶은 관념적 표현으로 이제 폐기함이 마땅합니다.
기독교의 탄생배경이 결국 유대교를 모태로 탄생한 종교이고 복음서는 유대교의 문하와 전통적 언어가 배경이 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복음서엔 많은 부분이 유대교 전례(예배)의 메아리가 아주 많습니다. 복음서는 유대교(기독교)예배를 위하여 창작되었다는 쉘비 스퐁 주교의 주장을 받아드립니다. 이제 부족신의 하나인 여호와를 범 세계적으로 믿어야 할 당위성은 없다고 보여집니다. 왜냐하면 여호와는 유대교의 신으로 유대인의 고유신으로 믿고 있는 신이며 전도를 하지 않고 고유신을 보존하고 있는 유대교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 신을 차용하여 믿고 있는 기독교의 모순 중 하나입니다. 여호와신과 예수를 신의 믿음으로 정당화 하기 위한 신학적 변증이 바로 삼위일체가 아닌가 여겨집니다. 종교란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그 오류만 더 보이게 됩니다. 허기야 종교가 진리를 담보하진 않습니다. 어차피 인간의 두려움과 공포를 위안케 하는 것이 종교의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종교제도에 대고 진리를 외친다는 것 자체가 무리입니다. 종교사를 보면 그렇습니다. 어차피 인간 세의 제도 중 하나이고 우리가 필요하여 만들어진 제도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 제도의 전승 보존 확대를 위하여 쓰인 성서는 더욱 그 제도의 지향되는 신학의 언어가 쓰였다는 사실을 우린 받아드려야 하겠지요.
따라서 종교 내부자들에겐 그 고백이 아주 소중하고 귀중한 경이겠지만 외부인에겐 참 허황되고 믿을 수 없고 소통할 수도 실증할 수도 없는 언어로 가득합니다.
경의 해석과정에 경이 절대화되고 이를 그대로 받아들인 뭇 신자 들에게 왜곡된 신앙이 그들의 사고를 좌우하게 되면, 맹신이 절대화되고 이는 세계 종교갈등의 원인이고 공포와 소요와 살인을 야기하는 것이 바로 종교의 폐해입니다. 이것은 이슬람과 기독교 모두에게 해당됩니다. 종교사의 종교 해악사가 이를 실증합니다.
결국은 경의 해석과 신학적 주장이 기독교를 분열시키고 있는 현실은 기독교 자체의 내장 된 이해의 산물입니다. 지금 몇 개의 교단이 있는지 저는 잘 모릅니다. 전 기독교 내부부터 정화하고 세상에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고 봅니다. 내가 없으면 종교가 무엇입니까?
모두 인간들의 노름이며 기독교 분열사를 보면 인간사의 노름이라는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이를 어떤 레토릭으로 운위한다고 하더라도 정당화되진 않겠지요.
실증될 수도 소통할 수도 없는 언어인 신의 정의에 몇 말씀 드렸습니다.

치노 (10-02-03 16:47)
 
이 기사 당당뉴스에서 봤는데, 반론의 초점이 전혀 없더군요. 걍 신앙 고백일수도^^

Windwalker (10-02-05 17:42)
 
아! 제가 우려하고 번민하고 있는 것들을 제대로 적시해 놓으셨군요. 

저 자신이 (기존 보수) 교회에서 중책을 맡고 있는 사람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구조적이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폭력성에 눌려서 제대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고민만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의 사랑”을 외치고 있지만 강매하는 느낌이 들더군요.

앞으로 한 세대 정도가 지날 때쯤이면 좀 더 각성된 신앙관이 자리를 잡겠지요.

다음 글은 멀더의 Occult 연구소에서 퍼 온 글입니다.

기독교인과 유대인과의 싸움에 대하여
진정한 신앙은 '전도'나 '선교'가 아니라 '존중'임을...

다큐멘터리 작품의 특징이라고 하면 뭐가 있을까?
정보전달, 호소력, 집요함, 생생함 등등 여러 개가 있겠지만...
나는 그 중에서도 '중립성'이야 말로 다큐멘터리를 '다큐멘터리'로 만드는 가장 큰 덕목이라 여긴다. 

그런 의미에서 크리스챤 다큐멘터리 영화를 표방한  <회복>은 진정한 다큐멘터리에서 많이 벗어난 느낌이다.
한국 사람들이 이스라엘에 가서 찍은 영화라서 그런지 영화 중간 중간에 한국어로 된 찬송가를 크게 틀어 대며 '전도'를 하는 것은 물론이요,
선민의식에 찌들은 유태인들을 또 다른 선민의식을 가진 개신교도들이 어르고 달래는 포맷이 계속 되기 때문이다.

영화 시작을 알리는 첫단추는 그나마 잘 끼운 듯 보였다.
이스라엘의 어느 집앞에 소포가 배달되어 온다.
그 집의 아들은 무심코 소포를 열어보게 되고 곧이어 소포를 가장한 폭탄이 터지면서
폐가 드러나고 목의 일부분이 잘리는 등의 끔찍한 상처를 입고 병원으로 후송된다.

가족들은 이슬람교 신자의 테러로 여겼으나 경찰을 통해 '유태인'의 소행이라는 충격적인 얘기를 듣게 된다.

왜 유대인이 유태인에게 이런 끔찍한 테러를 저질렀을까?
영화는 이 미스테리를 밝히기 위해 각 인물들의 주변을 돌아 다니고 이스라엘 곳곳을 훓고 다닌다.

그 결과... 폭탄 테러를 당한 가족은 "예수를 믿는 유태인" 즉 메시아닉 쥬(Messianic Jew)였고 이들에게 폭탄 테러를 가한 유대인들은 "예수를 믿지 않는 전통적 유태교 신자"였다는 것이 밝혀진다.

다 아시는 것 처럼 유태교는 구약만 믿고 신약을 믿지 않는다.
유태인들은 예수에 대해, 율법을 어기고 제사장들과 맞짱을 뜨다가 사형당한 부랑아 정도로 알고 있기에 기독교를 믿는 유럽인들에게 수천년 동안 온갖 핍박과 박해를 받아오다가
20세기 초에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내 쫓고 이스라엘을 세우게 된다.

그러니 그 피해의식이 얼마나 대단하겠는가?
신이 선택한 민족이라는 선민의식 사상에 더하여 피해의식까지 뭉쳐졌으니 이라크나 시리아 같은 아랍의 군사 강대국들과 맞짱을 떠도 끄떡 하지 않는 깡다구가 자연스럽게 생길 수 밖에 없었으리라.

그런데 문제는..
유태인들의 적이 비단 외부에만 있는게 아니라 같은 유태인 안에서 점점 자라나고 있다는 것을 감지하게 됐으며 그들이 바로 자신들이 그토록 혐오하는 마귀 대왕 예수를 믿는 메시아닉 쥬였던 것이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어줍쟎게 유태인들을 크리스챤으로 개종시키려는 이들 메시아닉 쥬에게 있었다.
자신들의 율법을 지켜며 힘겹게 살아가는 유태인을 자꾸 자극 하는 것이었다.
게릴라 식으로 이스라엘 전역을 돌며 기타 치고 노래 부르며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쳐대니 유태인들이 가만 있겠는가?

둘 다 똑같이 선민의식으로 똘똘 뭉쳐 으르렁 대고 있으니...
합의점이 나올리도 없고, '화해'라는 단어는 아예 끼어들 틈 조차 없다.

오쇼 라즈니쉬 선생은 일찌기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할 자유가 있다.
자신이 좋아하는 대로 보고 자신이 좋아하는 대로 해석할 자유가 있다.
그대는 그들이 어리석다고 여겨서는 안된다.
그들에겐 그들의 마음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아름답다.
제발 지성적이 돼라.
그리고 타인의 자유와 타인의 존재를, 그들의 방식과 그들의 스타일을 존중하라.

그렇다..
지금 이스라엘에서 벌어지고 있는 문제들은
타인의 스타일을 전혀 존중하려 하지 않는 양상에서 기인한다.

그런데 이 영화 <회복>은 그 중간지점에서 합의점을 도출할 생각 보다는
크리스챤 입장에서 유태인들의 무식하고 야만적인 부분을 크게 확대하여 선정적으로 보도하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건 엄밀한 의미에서 보자면.. 크리스챤 홍보영화이지 다큐멘터리 영화는 아니다.

알프스 수도원의 일상을 그린 다큐멘터리 영화 <위대한 침묵>이 왜 종교와 종파를 가리지 않고 사랑받는지를 보면 여실히 알 수 있는 문제이다.

<위대한 침묵>에는 인류의 보편 타당한 사랑이 밑바탕으로 흐르고 있지만
<회복>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너희들을 내가 전도해야만 돼"라는 선민의식이 흐르고 있기에 신도가 아닌 사람들이 보기에는 매우 불편한 느낌을 받을 수 밖에 없다.
중도를 지키면서 있는 사실 그대로를 전달하여 관객이 스스로 판단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진정한 다큐멘터리가 될 수도 있었는데...
그 선을 지키지 못하고 기독교 신자들만의 잔치가 되어버린 홍보 영화가 만들어 졌으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한국에서도 이런 종교 다큐에 대한 시도가 있었다는 것에 나름대로 의미가 있을 듯 하며 초반부의 흡입력 있는 사건 구성 등에서 한국 다큐멘터리 영화의 발전을 가늠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음도 밝힌다.

정강길 (10-02-09 16:34)
 
윗글 오늘 오마이뉴스에도 올렸습니다. 탑기사는 못되고 아직 잉걸에 걸려 있더군요.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321080&PAGE_CD=&BLCK_NO=&CMPT_CD=A0101

불독사랑 (10-02-11 17:06)
 
그냥 신 개념(또는 가설)을 포기하는게 속편하지 않나요?

    
정강길 (10-02-12 08:14)
 
그렇다고 속편하자고 버리는 건 아니라고 보는데요..^^;;
그리고 다음 연재글에선 과학의 한계에서 발견하는 새로운 유신론에 대한 것이랍니다.
기존의 기독교 신관에 대한 폐해가 있는 상황에서 이름을 어차피 신God이라고 명칭하니까
아무리 새로운 유신론이라고 해도 기존 기독교를 싫어하는 분들에겐 어느 정도는 알레르기 반응까지도 있을 수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중요한 건 신이라는 개념이 도대체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그 내용이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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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지금 믿고 있는 것은 과연 진리인가 정강길 4169 04-27
"어차피 이러한 기독교로 바뀌게 된다!" (모든 분들에게 고함) (17) 정강길 2765 02-18
새로운 기독교를 위한 조직신학적 성경공부 (신론) (2) 관리자 5448 05-28
새롭고 건강한 21세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위한 신앙선언서 (26) 관리자 4640 05-23
180 21세기 종교 진화의 방향, 몰락이냐? 도약이냐? 미선 379 06-16
179 "함께 만들어가는 종교와 진리" (2) 미선 419 06-10
178 기독교에서 얘기하는 병치유 귀신쫓음을 어떻게 볼 것인가? (1) 미선 449 06-10
177 몸에 모시는 하나님 (탈유무신론의 신앙) 미선 362 06-09
176 초자연주의>에서 <자연주의>로 가야 기독교가 산다! 미선 395 06-07
175 과학의 진화론에 대한 기독교의 창조론 입장들 미선 390 05-30
174 신학이 아닌 몸학에 기반하는 <몸학 기독교>로! 미선 373 02-10
173 신의 영어 표기 God ----> Gio 로 바뀌어야 미선 348 02-07
172 약자에 대한 눈뜸 - 잠자와 깬자의 차이 미선 386 12-08
171 <초자연주의>를 인정하면 나타나는 문제들.. 미선 305 11-04
170 [어떤 진리관] 진리(眞理)와 진리(進步)의 차이 그리고 퇴리(退理) 미선 275 07-05
169 시작이 있는 우주인가? 시작도 끝도 없는 우주인가? 미선 279 06-18
168 <종교 위의 종교>에 대해.. 미선 287 05-04
167 초자연주의와 자연과학 그리고 신비주의 구분 미선 291 04-06
166 지적설계론(창조론)자들과 유물론적 과학자들 간의 공통점 미선 275 12-10
165 종교 신앙의 반지성에 대한 단기적 대안 (1) 미선 280 11-24
164 "몰락이냐 도약이냐" 21세기 종교 진화의 방향 (종교학회 발표) 미선 269 09-10
163 '나(I)는 누구인가?'라는 근원적인 물음에 답하려면.. (1) 미선 303 04-13
162 유신론-무신론을 넘어서 <탈신론>으로 미선 445 05-04
161 <초자연주의>를 버려야 기독교가 산다! 미선 401 02-04
160 몸학 기독교 & 몸학 사회주의 추구 미선 319 12-31
159 <자유>에 대한 짧은 생각.. (2) 미선 383 08-24
158 몸학 기독교에선 기독교 신학이 굳이 필요하지 않은 이유 미선 442 03-24
157 인간 무의식의 두 가지 상태와 보다 상향적인 의식 발달을 위하여 미선 364 03-03
156 (1998년 원글) "화이트헤드 철학에서 본 민중신학 비판과 대안적 모색" (2) 미선 317 02-18
155 종교(宗敎, Religion)에 대한 동서양의 어원적 의미와 전후 혼동 오류 미선 318 02-06
154 기존 기독교와 <몸 기독교>의 분명한 차이들 미선 347 01-21
153 GIO명상 방법 12단계 (몸기독교가 제안하는 수행 방법 중 하나..) (5) 미선 550 01-16
152 2013년 계획.. 몸 기독교 (4) 미선 457 01-02
151 민중신학 40년.. (20년전 안병무 기사를 보며..) 미선 288 12-25
150 진보정치 교육의 사각지대와 민중 역사 주체론에 대한 반성과 재고찰 미선 274 12-22
149 교회에 대한 권력비판? 교리비판? 어느 것이 더 유효할까? (4) 미선 450 12-06
148 왜 예수인가 (필독 원함!) (13) 미선 1532 11-04
147 새로운 기독교의 방향과 몸학의 종교관 (2) 미선 313 10-05
146 새로운 기독교의 방향과 몸학의 종교관 (1) 미선 342 08-17
145 기독교 교리의 문제는 기독교만의 문제가 아니다! (3) 미선 401 06-11
144 초대교회와 바울에 대해... 미선 445 04-28
143 '작은 교회'가 정말 대안인가? 핵심은 교리다! 미선 373 04-22
142 진선미의 기원과 예수사건 (1) 미선이 353 02-24
141 중간 복음주의 신학자 알리스터 맥그리스의 <과학신학> 비판 (13) 미선이 361 12-13
140 끔찍한 <몸의 신학>에 속지 마시길! (유사품 주의) (8) 미선이 421 11-15
139 종교운동과 사회운동을 구분 못하는 오류-기존 진보 기독교 비판 (1) (2) 미선이 521 10-14
138 여전히 예수얼굴에 똥칠하는 개신교 정치세력들 (5) 미선이 410 08-30
137 새로운 기독교 역사의 국내 선구자들 : 유영모, 함석헌, 김재준 미선이 381 06-26
136 조용기 목사의 할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미선이 399 05-14
135 몸학과 새로운 기독교 운동 그리고 30년 후의 기독교 미선이 526 04-11
134 <인간의 자유의지>라는 착각과 환상에 관한 문제 (14) 미선이 691 03-04
133 기존 진보 기독교인들의 <생명평화> 담론에 반대한다! (업그레이드판) (8) 미선이 620 02-17
132 기존 진보 기독교계의 ‘생명평화' 담론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미선이 286 02-10
131 영혼구원의 강조에서 <총체적인 생명구원의 강조>로 (4) 미선이 336 02-05
130 성서문자주의 또는 성서무오설 신앙보다 더 뿌리 깊은 고질병은? (9) 미선이 796 02-02
129 죄의식의 종교에서 <이웃과 함께 성찰하는 종교>로 미선이 335 02-01
128 수직적 구조의 교회에서 <수평적 구조의 교회>로 (2) 미선이 427 01-21
127 서구식 목회문화가 아닌 <우리식 목회문화>로 미선이 374 01-21
126 과정신학에 대한 비판과 민중신학의 신 이해 접맥 미선이 595 01-13
125 ★ 예언 (1) 미선이 674 12-24
124 ♣ 새로운 기독교 신학의 인간론 (4) 미선이 497 12-19
123 ♣ 새로운 기독교 신학의 인간론 (3) (4) 미선이 591 12-12
122 ♣ 새로운 기독교 신학의 인간론 (2) (10) 미선이 791 12-05
121 새로운 기독교의 시간관, 태초와 종말로서의 시간관을 거부한다! (4) 미선이 643 12-01
120 ♣ 새로운 기독교 신학의 인간론 (1) 미선이 782 11-30
119 [예수운동 예배 견본] 새로운 기독교의 <예수운동 예배>를 위하여 미선이 849 11-28
118 숭배하는 예배에서 <닮으려는 예배>로 (1) 미선이 781 11-19
117 거꾸로 흘렀던 감리교 역사, 바로 세우기엔 아직 멀었나 미선이 672 11-10
116 <새로운 기독교>를 소개하는 전체 안내 링크글 (계속 업데이트 예정) 관리자 2189 11-03
115 [논평] 봉은사 땅밟기 추태, 성경 '문자주의' 그 야만의 역사 넘어서야 (1) 관리자 831 10-29
114 기존의 진보 기독교와 새로운 기독교 운동 (1) 미선이 663 10-22
113 1세대 민중신학자 안병무의 미완의 작업과 기존 민중신학의 과제 미선이 643 10-19
112 [새기운 성명] 4대강 사업 관련, 문정현 신부의 정진석 추기경 비판을 지지한다 관리자 620 10-19
111 스퐁, "스티븐 호킹과 유신론/인격신의 죽음" (작은불꽃님 역) 관리자 896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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