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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새롭고 건강한 기독교>를 위한 하나님 나라 운동    
  글쓴이 : 정강길 날 짜 : 06-07-14 04:11 조회(3340)
   트랙백 주소 : http://freeview.org/bbs/tb.php/b001/50 




올해초 에큐메니안에 올렸던 글이기도 하다..
 
.......................................................................................................................
 
 
 
 
 
 
<새롭고 건강한 기독교>를 위한 하나님 나라 운동
- 2006년 병술년 하나님 나라 운동을 위한 제언
 

정강길 minjung21@paran.com

 
 
우리가 희망하는 기독교
 
어떤 면에서 나 자신이 지향하고 원하는 기독교는 다음과 같다.
그저 다음의 세 가지 사항만 있어준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1. 솔직하고 건강한 합리성에 기반한 기독교
2. 오류와 비극에는 언제나 겸허한 기독교
3. 힘없는 약자를 우선적으로 위하는 기독교
(사실 3은 1과2의 효과에 속함)
 
그런데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오늘날의 기존 기독교는 위와 같은 기독교인가? 전혀 아니잖은가. 아니라면 바꿔야지! 바야흐로 전환기의 시대는 점점 무르익어 가고 있다. 기존 기독교는 너무나도 분명하게 바뀌어야 한다. 그것이 전통교리이든 뭐든 간에 그러한 부작용과 폐해의 발생들 앞에서조차 반성할 줄 모르는 기독교를 어찌 기독교로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그런데 우리가 아는 기독교 전통 교리에는 아래와 같은 것들이 있다.
1. 성서의 축자영감설
2.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3.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
4.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
5. 그리스도의 재림
 
우리는 이러한 전통교리들을 <똥>으로 여길 수 있을까? 물론 이 전통교리들이 죄다 오류를 내포한다고 볼 순 없다고 해도, 이러한 교리적 전통들로 인해 인류사에 지속적으로 유발되어 왔던 폐해와 비극은 없었는지는 더욱 중요하게 고찰되어야 한다고 본다. 게다가 아무리 좋게 해석을 가한다고 해도 오늘날 현대인의 건강한 일반성들과 불가피한 충돌의 지점이 있음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초자연주의란 결국 반합리주의일 뿐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전통이 오류와 비극에 앞설 수는 없다.
 
나는 이 오류와 비극의 문제를 더 중요시하고 싶다. 인간은 언제나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종교란 것도 언제나 <형성과정>에 있을 뿐이지 종교를 완결된 것으로 보는 것은 매우 자만스럽고 어리석은 독단에 지나지 않는다. 실은 우리에게 진정한 전통이 있다면 그것은 오류와 비극에 대한 끊임없는 극복이어야 할 것이다. 이때 오류와 비극이란 우리가 진보를 위해서 치르는 댓가인 것이다.
 
건강한 합리성은 언제나 자기해체적 여지마저 함께 열어두어야 마땅하다. 합리성의 근거는 실제론 <오류>error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합리주의는 언제나 모험 가운데 있다. 진정한 신비는 합리성을 꿰뚫고서 넘어서는 것이지 결코 합리성을 배제하진 않는다. 건강한 합리성의 끝자락에는 언제나 무한한 신비에로 열려 있다. 신비는 인간 인식의 한계에 대한 고백과 함께 자리한다.
 
신학적 입장과 사회적 입장
 
지금 우리 앞에는 지겹기까지한 같은 패턴의 문제의 발생들이 있다. 예컨대, 예장합동측의 목사가 기저귀 발언으로 물의를 빚은 바 있음을 기억할 것이다. 한국교회의 여성안수 반대나 여성비하의 문제를 생각해본다면 이런 사건들은 한두 번 나온 얘기가 아님을 알 것이다. 설교 도중에 터져 나오는 김홍도의 무지스런 발언들은 쓰나미 사태에 이어서 카트리나 사태 때에도 여전히 건재함을 과시해주었다. 앞으로 계속 될 전망 같다.
 
금번에 조용기가 은퇴를 하지 않겠다고 한다. 이에 대해 몇몇 기독 단체들은 조용기를 공격하면서 교회 제도의 개혁을 외치고 있다. 그러면 한국교회는 온전히 치유가 되는 것인가? 한기총이 국가보안법 폐지 반대에다 이번에는 사학법 개정 반대를 들고 나온다. 이와 달리 진보 진영의 기독 단체들은 국가보안법 폐지 뿐 아니라 사학법 개정을 지지하고 있다.
 
내가 볼 때 서로가 공방은 하지만 정작 중요한 핵심은 아직 빠져 있어 보인다. 결국은 저들이 지닌 신학적 입장이 궁극적으로 뒤바뀌지 않는 한, 보수와 진보 진영 간의 사회적 공방들은 계속적으로 반복적 패턴만을 발생시킬 것으로 본다. 즉, 어떤 사회적 사안이나 이슈가 있을 때마다 서로의 상반된 입장들로 공박을 이어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적 사건 혹은 비리의 발생이 터지고 이에 대한 성명 발표 혹은 책임사과 요구 등등 이런 식의 패턴들에 이제 우리 기독교도 매우 익숙해져버렸다. 물론 이런 것들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얘긴 전혀 아니니 오해는 없길 바란다. 나로선 정작 더 중요한 핵심을 찔러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조용기 목사한테서 은퇴와 은퇴번복에 대한 사과를 받아낸다고 하더라도 한국교회에 이 같은 목회자 일인체제로 인한 문제가 또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고 누가 장담할 것인가. 만일 교회제도가 민주적으로 정비되어 있다고 치자. 하지만 만일 그 당사자가 매우 근본주의적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고 할 경우 그것은 언제든지 다시 뒤틀려질 가능성이 많다고 하겠다.
 
이번에 사학수호단체가 기장 교단과 교계지도자들을 자기편으로 무단 도용한 것에 대해 사과를 한다고 해도, 이들은 어찌되었든 사학법 개정 반대의 생각을 결코 굽히진 않을 것이리라. 마찬가지로 이러한 저들의 소아적 태도는 여전히 계속될 전망이다.
 
 
 
▲ 국보법, 사형제, 사학법 등등 앞으로도 계속 터져나올 여러 사회적 사안들에 대한 피곤한 반복적 대립들은 사실은 보다 더 근본적인 충돌과 대립의 영역으로까지 파고 들어가야 한다. 실로 저들과는 세계를 보는 <해석학적 렌즈>부터 다른 것이다. (사진제공 뉴스앤조이)
 
기독교의 근원적 개혁
 
그렇기 때문에 소로(H. D. Thoreau)의 말대로, “악의 이파리를 수천 개 잘라내는 것보다 그 뿌리를 한 번 잘라내는 것이 더 효과적” 이라고 본다. 다시 말해서, 나는 여기서 기독교에 대한 근원적이고도 근본적인 대대적 재구성 작업이 있지 않으면 안될 것이라고 보고 있다. 물론 이파리를 자르는 작업들도 같이 병행되면 더욱 좋긴 하겠지만, 어쨌든 중요한 사실은 그 깊숙한 뿌리에 대한 공략이 더 큰 핵심이라는 얘기다.
 
국보법, 사형제, 사학법 등등 앞으로도 계속 터져나올 여러 다양한 사회적 사안들에 대한 피곤한 반복적 대립들은 사실은 보다 더 근본적인 충돌과 대립의 영역으로까지 파고 들어가야 한다. 그럴 경우 잘 알다시피 서로의 신학적 입장이 다르기에 사회적 입장도 달리 나오게 되는 경우 역시 인지할 것이다.
 
실제로 보수 기독교인들은 신God을 <절대적 군주자> 모델로서 이해하고 있다. 반면에 초자연적인 전능왕 하나님 이해에 대해 진보 진영의 기독교인들은 별로 탐탁해하지 않는다. 예수의 피로 죄가 사해졌다는 보혈과 대속 교리에 대해 죽자살자 목메고 있는 진보 기독교인들은 별로 없다. 마찬가지로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주장하면서 동시에 미제국주의 반대와 국가보안법 철폐를 주장하는 기독교인 역시 그렇게 많지 않다고 본다. 도대체 왜 이런 현상이 보이고 있는 것일까?
 
감리교단의 악법이 그냥 나온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곤란하다. 마찬가지로 고(故) 변선환 학장이 그냥 축출된 것도 아니었다. 물론 그것은 헤게모니 투쟁과도 관련이 있다. 당연한 얘기!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그 신학적 입장의 무지로 인한 잘못 역시 크게 작동된 것이라고 본다.
 
이때 이러한 신학적 충돌 역시 더 깊이 파고들어가서 고찰되어야 할 지점이 있다. 즉, 내가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고, 성경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고, 교회와 구원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는, 결국 내가 세계를 어떻게 해석하고 있느냐 라는 <해석학적 렌즈>에 달려 있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신학적 충돌의 이면에는 바로 해석학적 세계관의 충돌이라는 철학의 자리에까지 더 깊이 파고들 수 있어야 한다. 기존 보수 기독교에는 <기독교전통=완전무결함>이라는 인식이 알게 모르게 전제되고 있다. 그 지점에 이르러서는 비판이 불허되는 것이다. 하지만 완전무결함 혹은 완벽이란 것에선 통찰의 느낌은 사라져버린다. 엄밀히 말해서 완벽함이란 곧 죽은 것이다.
 
전통을 다시 세운다는 건..
 
기독교 전통이 지속적인 오류와 비극을 발생시키고 있다면 계속 이를 붙잡을 이유가 도대체 뭐있겠는가. 바로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 전통은 다시 세워져야 하며, 그 작업은 올바른 해석학적 렌즈를 가지고서 신과 성경과 예수와 교회와 역사 등등 이를 제대로 해석해내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 해석학적 렌즈에도 언제나 오류의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할 것이다. 이 여부는 실제적 적용에서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새로운 전통의 수립은 꼭 학자만 해야 하는 작업도 아니며 목회자만 해야 하는 작업도 아니다. 부조리한 현실을 직시하고 깨우친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해야 하는 작업이다. 엄밀히 말해서 목회란 것도 신학의 대중화의 응용이라고 볼 경우, 목사들이 신학자들보다도 더 큰 역량을 필요로 하는 점도 없잖아 있다. 또한 신학자들은 목회현장에 귀를 기울이면서 그 신학적 적용과 오류의 여부를 분명하게 캐치하고서 더욱 창조적 신학으로 발맞춰나가야 할 것이다.
 
그런데 작금의 현실은 교단마다 교세주의가 가로막고 있는 실정이다. 무릇 신학자든 목회자든 자신이 속한 교단 시스템의 통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는 하나님 나라를 더욱 더디게 만들 따름이다. 만일 의롭지 못한 결정들이 교단을 지배할 때, 신학자나 목회자가 모두 자기 교단에 눈치를 본다는 건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는 현실이 된다. 물론 그것이 쉽게 말할 수 없는, 고민어린 것이라곤 하지만 결국은 그 길이 예수를 따르는 길이 아니라고 한다면 가지 말아야 하는 것이 마땅하잖은가.
 
어떤 점에서 우리의 길은 궁극적으로는 양자택일에 직면될 수밖에 없다. ‘나’라는 존재는 퇴행과정에 있거나 혹은 발전과정에 있거나 둘 중 하나일 뿐이다. 유동하는 이 우주의 흐름에서 정지나 완벽한 중립이란 있을 수 없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넓고 편리하지만, 구원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험하며 매우 불편한 것이다.
 
따라서 전통을 세운다는 건 깨우침과 함께 용기를 필요로 한다. 괜히 교단의 눈치를 보거나 전통에 대한 미련으로 인해 모호하게 자신의 입장을 발표하지 말았으면 한다. 예컨대 예수의 동정녀 탄생설이나 종교다원주의 입장에 대해 애매모호한 희석된 발언들 말이다. 용기를 가지고 전진하는 발걸음을 내딛었으면 한다.
 
요즘 추세를 보면, 교단도 없고 목사도 없는 <평신도 교회>도 하나 둘씩 점점 세워지고 있는 실정이다. 오히려 평신도들이 목회자들의 의식을 앞서나가는 경우도 많이 있다. 사태의 추이가 이러한데도 보고도 못 본 척 계속 잠잠할 경우 나중에는 돌들이 소리 칠 지도 모를 일이다.
 
보수 근본주의와는 전선을!  타종교 및 진보세력들과는 가열찬 연대를!
 
금번에 사학법을 두고 한기총을 비롯한 기독교의 보수 근본주의 세력들은 아예 사활을 걸은 듯이 보인다. 나는 이러한 시점에서 작금의 한기총과도 분명한 전선을 표명하길 바라는 바이다. 하나님 이해나 모세오경에 대한 해석을 두고서도 예수는 바리새인들과 분명한 전선을 그었듯이 그러하길 바란다.
 
이때 사학법 개정에 대한 입장만 문제삼을 것이 아니라 저들이 가지고 있는 신학적 입장에 대해서도 아주 깊이 물고 늘어져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반면에 서로 통하는 다양한 진보세력들과는 더 굳건한 연대로 이어졌으면 한다. 흔히 진보 기독교인들은 보수 근본주의자들보다 진보적인 타종교인에게 더 우호성을 느끼고 있다.
 
기독교의 보수와 진보가 대화를 한다고 하더라도 궁극적으로 서로의 신학적 입장이 합의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여전히 물과 기름의 혼합에 지나지 않는다. 생각해보라. 진보측 기독교에서 볼 때 보수적인 한기총 보다는 차라리 정토회 불교 단체가 오히려 더 가깝고 친숙한 대화상대자로까지 여겨진다. 도대체 왜 이런 느낌이 드는 것일까?
 
이현주 목사가 김홍도와 사이좋게 어깨동무 한 모습을 상상하는 것보다는 법륜스님과 다정하게 포옹하는 상상이 실제론 훨씬 더 현실적이다. 사실 종교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이것의 동질감은 세계를 보는 해석학적 렌즈의 흡사함에서 나온다. 이현주 목사와 김홍도의 세계 이해는 서로 매우 큰 이질감이 자연스레 느껴지지만, 이현주 목사와 법륜스님의 세계 이해는 희한하게도 서로 잘 조화되는 것마냥 정답게까지 여겨진다.
 
그만큼 내가 어떤 해석학적 렌즈를 지니고 있느냐의 문제는 매우 중요한 문제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부지불식간에 자신 안에 자리잡기까지 한다. 그럼으로써 내 안에 모순된 개념들이 알게 모르게 혼재되고 있는 것이다. 가령 KNCC와 한기총 모두 수용가능 할 만큼 둘 다 옳다고 보는 것은 자기 안의 무지를 못보고 있는 것과도 같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있어왔던 분명한 그 충돌의 지점과 그 근원적 맥락의 이유를 깊이 고찰할 필요가 있지 않은가.
 
그렇기에 보수 근본주의와는 전선을, 이웃종교 및 전세계 진보세력들과는 연대를,
어떤 면에서 이것이 바로 에큐메니칼의 진정한 의미가 아닐는지-.
 
                                                [표 - 새로운 패러다임의 전환들]

기존 기독교 새로운 기독교

※ 관념적 이원론 → 현실적 관계론 (해석학적 렌즈)

 '무조건 믿어라'의 기독교깨달음의 기독교

문자적 성서해석 → 사건적 성서해석

초월적 유신론 → 포월적 유신론

교리적 예수 → 역사적 예수

배타적 기독교 → 열린 기독교

가부장적 기독교 → 상호평등의 기독교

숭배하는 예배 → 닮으려는 예배

서구식 목회문화 → 우리식 목회문화

수직적 구조의 교회 → 수평적 구조의 교회

죄의식의 종교 → 이웃과 함께 성찰하는 종교

영혼 구원의 기독교 → 삶의 구원의 기독교

천당 강조의 기독교 → 하나님 나라 강조의 기독교

 
 
  
2006년 한 해를 새로운 기독교 형성운동으로! 
나는 그것이 제대로 된 기독교라면 다음과 같은 사항으로서 드러난다고 본다.
 
1. 자기 개혁
2. 교회 개혁
('기독교'를 말함)
3. 사회 개혁
 
이 세 가지는 새로운 기독교 운동이 지향하는 효과적 열매다. 이 세 가지를 하나로 줄여서 말한다면 그것은 곧 <삶의 변혁>Revolution of Life이다. 위의 세 가지는 <삶의 변혁>으로서 집약된다. 삶이란 나를 포함한 전체다. 즉, 나는 '전체 세계의 자기화'이다.
 
나의 시작에 세계가 있고, 세계의 끝에 내가 있다. 이 우주에선 어느 한 부분도 고립적이고 독립적으로 작동되는 건 없다. 무(無)속에 떠도는 자족적 사실 같은 건 있지도 않을뿐더러 아무런 의미조차 못가진다. 기독교의 복음과 구원은 바로 그러한 ‘전체 세계를 사는 삶의 변혁’을 의도한다. 진정한 구원이라면 그것은 이 땅의 문명사에 <삶의 증진>으로 드러날 것이다. 
 
우리가 저 유명한 문구인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 를 기억한다면, 위와 같은 얘기는 사실상 상식적 언급에 지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삶의 증진의 효과가 드러나는 그 순서는, 첫 단계로 자신의 몸을 다스려지고 두 번째 단계로 자신이 속한 집-기독교의 가(家)는 교회-이 가지런해지고 그리고 세 번째 단계로 나라와 천하에 평화가 도래한다고 볼 수 있겠다.
 
나는 이러한 하나님 나라 운동이 자신이 속한 삶의 자리에서부터 시작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설령 자신은 진보적인 교회를 다니고 싶은데 현재 자신이 속한 교회가 매우 보수적이라고 하더라도 그 속에서부터 하나님 나라를 위한 그 어떤 <조직화ㆍ의식화 작업>을 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새로운 기독교 운동은 하나님 이해, 역사적 예수 이해, 성경 이해, 교회 이해 등등 기독교 전통을 더없이 새롭게 체계화하는 운동이지만, 동시에 기독교의 원형으로 돌아가는 회복운동이기도 하다. 나는 교회나 예배의 원형도 종교개혁이나 초대교회보다는 오히려 역사적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에서 찾아야 할 것으로 본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이야말로 우리가 안심하고 기댈 수 있는 진정한 원형의 신앙이다.
 
<지금 여기>에서부터 시작하는 하나님 나라 운동 
 
<하나님 나라>에는 두 가지 차원이 있다. 원초적인 것으로서의 하나님 나라는 바로 이 땅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이다. 그것은 이미 세워진 것이다. 또한 종국적인 것으로서의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계획이 이 세계에 실현된 물리적 성취이다. 그것은 아직 오지 않았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하나님의 계획에다가 우리의 자율적 참여와 결단마저 함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자>라기보다 <우리와 더불어 계신 자>이다. 하나님 나라는 그 자신의 나라이자 우리에게 진정으로 사는 길을 제시하는 나라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신정정치와 민주주의가 모순적으로 작동되지 않는 세계다. 그것은 가장 효과적인 자율성들의 통치이자 운용 세계다.
 
<깨달음>이란 이 세상과 대비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인지이며, 본래 ‘나’라는 존재가 창세전부터 계획하셨던 원초적 하나님 나라에서 그 구성원이었음을 아는 것이다. 이미 그 분은 나를 택하고 계셨다. 하지만 그 택함은 이제 나의 참여와 결단을 기다리는 택함이다. 그럼으로써 하나님 나라는 물리적 성취를 가질 수 있다.
 
이때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나 자신의 욕구와 욕망을 제어하는 기제는 바로 하나님 나라며, 그 본보기였던 모델은 역사적 예수였다. 기독교는 결코 나의 욕구와 욕망을 금지시키거나 거세하는 금욕의 종교가 아니다. 적어도 나의 욕구와 욕망을 하나님 나라에만 맞춰달라고 말하는 종교일 뿐이다.
 
그리고서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나의 달란트를 발견하고서 가능한 것부터 시작하자. 각자의 삶의 현장에서부터, 내가 속한 직장에서, 학교에서, 병원에서, 운동장에서, 도서관에서, 집에서, 식당에서, 차안에서 운전하면서까지도 하나님 나라를 내 삶의 목적으로 맞출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리고 더욱 가능하다면 보다 연대하자. 비슷한 문제의식을 느끼는 사람들끼리 연대하여 고민을 나누는 것은 참으로 서로에게 힘이 된다. 그런 면에서 인터넷 같은 사이버 세계도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겠다.
 
자각 없는 욕망의 맹목적 충동이 계획하신 하나님 나라와 양립가능하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한기총의 작태와 하나님 나라 신앙이 양립가능하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제국주의 또는 신자유주의가 오늘 우리가 믿는 하나님 나라 운동과 양립가능하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하나님 나라와 양립가능한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지향해야 할 것이다.
 
전세계 자각인들이여, 단결하여 2006년 병술년의 하나님 나라 운동을 다함께 가열차게 진행해보자. 우리가 서 있는 모든 자리에서부터 아무쪼록 정의가 강물처럼, 평화가 들풀처럼, 사랑이 햇빛처럼 하나님 나라가 지금여기에서부터 임하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바이다. 우리에겐 언제나 십자가를 통해 부활하신 그 분이 계시잖은가.
 
바야흐로 새롭고도 건강한 기독교의 시대가 우리 앞에 머잖았으니..
 
 
  
                                                                      2006년 01월 11일 17:17:49
 
 
 
 
 
 
정강길 (06-07-14 04:15)
 
위의 국가보안법 문제도 사학법 개정 문제도 그렇고
그리고 평택 대추리 문제때도 그렇고
요즘은 한미 FTA 문제로도
같은 기독교라는 사람들끼리도 여전히 충돌하고 있잖은가..
크게 보면 보수와 진보라는 두 개의 기독교가
서로 충돌하는 이런 패턴의 양상은 앞으로도 여전히 계속 될 듯~

누림 (06-07-25 01:11)
 
안녕하세요. 저는 프리뷰홈피에 오면 많은것(사회에 관심두는 일)을 배우게 되었고.
종교인도 아니면서 하나님나라 이야기가 거부감 없이 스며들었으며,
종교적이 아니더라도 개인의 내적성장을 부추기는 커다란 힘이 있었습니다.
공부며. 영성이며. 자각인이며 하는 글들..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죠~
강좌도 참여하고 싶은데, 아이 둘 키운다는 이유로 또 수줍음때문에 그러질 못해 너무 아쉽습니다.
요즘 세상 돌아가는 일들이 정말 험악하기 짝이없어 답답한 심정 그지없는데 그래도 이곳에선
하나님나라 운동으로 분주한것을 보니 너무 좋습니다. 보이지 않게나마 응원합니다.. 모두들 힘내세요!

정강길 (06-07-25 06:08)
 
누림님 안녕하세요..
무척 오랜만에 인사나누네요~^^*
저희의 새로운 기독교 운동은 여성들의 일상적 삶의 소소함도 나눌 수 있는
그러한 기독교 운동이 되고자 합니다..

특히 종교인이 아니신데도 저희의 하나님 나라 운동이 거부감 없이 스며들었고
또한 성장의 힘을 받으셨다는 말씀에 오히려 깊은 인상을 받고 있습니다..
가능하다면 언제나 지속적인 인연의 끈이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아참, 괜찮다면 용기를 내서 이번 화이트헤드 독서모임에 참여하셔도 좋을 거 같아요..
물론 시간이 문제일테지만, 용기를 가지고 참여해보시면 참 유익한 시간이 되실 거라고 봅니다..ㅡ.ㅡ
아무쪼록 늘 나와 세계를 살찌우는 건강한 삶이 되길 희망합니다..

앞으로도 더욱 더 많이 응원해주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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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 신학이 아닌 몸학에 기반하는 <몸학 기독교>로! 미선 802 02-10
173 신의 영어 표기 God ----> Gio 로 바뀌어야 미선 770 02-07
172 약자에 대한 눈뜸 - 잠자와 깬자의 차이 미선 845 12-08
171 <초자연주의>를 인정하면 나타나는 문제들.. 미선 609 11-04
170 [어떤 진리관] 진리(眞理)와 진리(進步)의 차이 그리고 퇴리(退理) 미선 594 07-05
169 시작이 있는 우주인가? 시작도 끝도 없는 우주인가? 미선 627 06-18
168 <종교 위의 종교>에 대해.. 미선 577 05-04
167 초자연주의와 자연과학 그리고 신비주의 구분 미선 628 04-06
166 지적설계론(창조론)자들과 유물론적 과학자들 간의 공통점 미선 563 12-10
165 종교 신앙의 반지성에 대한 단기적 대안 (1) 미선 610 11-24
164 "몰락이냐 도약이냐" 21세기 종교 진화의 방향 (종교학회 발표) 미선 583 09-10
163 '나(I)는 누구인가?'라는 근원적인 물음에 답하려면.. (1) 미선 578 04-13
162 유신론-무신론을 넘어서 <탈신론>으로 미선 723 05-04
161 <초자연주의>를 버려야 기독교가 산다! 미선 694 02-04
160 몸학 기독교 & 몸학 사회주의 추구 미선 595 12-31
159 <자유>에 대한 짧은 생각.. (2) 미선 656 08-24
158 몸학 기독교에선 기독교 신학이 굳이 필요하지 않은 이유 미선 737 03-24
157 인간 무의식의 두 가지 상태와 보다 상향적인 의식 발달을 위하여 미선 689 03-03
156 (1998년 원글) "화이트헤드 철학에서 본 민중신학 비판과 대안적 모색" (2) 미선 605 02-18
155 종교(宗敎, Religion)에 대한 동서양의 어원적 의미와 전후 혼동 오류 미선 612 02-06
154 기존 기독교와 <몸 기독교>의 분명한 차이들 미선 602 01-21
153 GIO명상 방법 12단계 (몸기독교가 제안하는 수행 방법 중 하나..) (5) 미선 951 01-16
152 2013년 계획.. 몸 기독교 (4) 미선 786 01-02
151 민중신학 40년.. (20년전 안병무 기사를 보며..) 미선 576 12-25
150 진보정치 교육의 사각지대와 민중 역사 주체론에 대한 반성과 재고찰 미선 553 12-22
149 교회에 대한 권력비판? 교리비판? 어느 것이 더 유효할까? (4) 미선 860 12-06
148 왜 예수인가 (필독 원함!) (13) 미선 2503 11-04
147 새로운 기독교의 방향과 몸학의 종교관 (2) 미선 579 10-05
146 새로운 기독교의 방향과 몸학의 종교관 (1) 미선 634 08-17
145 기독교 교리의 문제는 기독교만의 문제가 아니다! (3) 미선 682 06-11
144 초대교회와 바울에 대해... 미선 744 04-28
143 '작은 교회'가 정말 대안인가? 핵심은 교리다! 미선 579 04-22
142 진선미의 기원과 예수사건 (1) 미선이 557 02-24
141 중간 복음주의 신학자 알리스터 맥그리스의 <과학신학> 비판 (13) 미선이 557 12-13
140 끔찍한 <몸의 신학>에 속지 마시길! (유사품 주의) (8) 미선이 659 11-15
139 종교운동과 사회운동을 구분 못하는 오류-기존 진보 기독교 비판 (1) (2) 미선이 851 10-14
138 여전히 예수얼굴에 똥칠하는 개신교 정치세력들 (5) 미선이 632 08-30
137 새로운 기독교 역사의 국내 선구자들 : 유영모, 함석헌, 김재준 미선이 600 06-26
136 조용기 목사의 할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미선이 613 05-14
135 몸학과 새로운 기독교 운동 그리고 30년 후의 기독교 미선이 873 04-11
134 <인간의 자유의지>라는 착각과 환상에 관한 문제 (14) 미선이 1035 03-04
133 기존 진보 기독교인들의 <생명평화> 담론에 반대한다! (업그레이드판) (8) 미선이 981 02-17
132 기존 진보 기독교계의 ‘생명평화' 담론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미선이 458 02-10
131 영혼구원의 강조에서 <총체적인 생명구원의 강조>로 (4) 미선이 513 02-05
130 성서문자주의 또는 성서무오설 신앙보다 더 뿌리 깊은 고질병은? (9) 미선이 1173 02-02
129 죄의식의 종교에서 <이웃과 함께 성찰하는 종교>로 미선이 511 02-01
128 수직적 구조의 교회에서 <수평적 구조의 교회>로 (2) 미선이 676 01-21
127 서구식 목회문화가 아닌 <우리식 목회문화>로 미선이 590 01-21
126 과정신학에 대한 비판과 민중신학의 신 이해 접맥 미선이 930 01-13
125 ★ 예언 (1) 미선이 919 12-24
124 ♣ 새로운 기독교 신학의 인간론 (4) 미선이 750 12-19
123 ♣ 새로운 기독교 신학의 인간론 (3) (4) 미선이 833 12-12
122 ♣ 새로운 기독교 신학의 인간론 (2) (10) 미선이 1090 12-05
121 새로운 기독교의 시간관, 태초와 종말로서의 시간관을 거부한다! (4) 미선이 866 12-01
120 ♣ 새로운 기독교 신학의 인간론 (1) 미선이 1091 11-30
119 [예수운동 예배 견본] 새로운 기독교의 <예수운동 예배>를 위하여 미선이 1190 11-28
118 숭배하는 예배에서 <닮으려는 예배>로 (1) 미선이 1017 11-19
117 거꾸로 흘렀던 감리교 역사, 바로 세우기엔 아직 멀었나 미선이 902 11-10
116 <새로운 기독교>를 소개하는 전체 안내 링크글 (계속 업데이트 예정) 관리자 3055 11-03
115 [논평] 봉은사 땅밟기 추태, 성경 '문자주의' 그 야만의 역사 넘어서야 (1) 관리자 1046 10-29
114 기존의 진보 기독교와 새로운 기독교 운동 (1) 미선이 899 10-22
113 1세대 민중신학자 안병무의 미완의 작업과 기존 민중신학의 과제 미선이 859 10-19
112 [새기운 성명] 4대강 사업 관련, 문정현 신부의 정진석 추기경 비판을 지지한다 관리자 830 10-19
111 스퐁, "스티븐 호킹과 유신론/인격신의 죽음" (작은불꽃님 역) 관리자 1164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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