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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그런 신은 없다! 하지만 신은 있다! (3)    
  글쓴이 : 미선이 날 짜 : 10-09-21 10:18 조회(1005)
   트랙백 주소 : http://freeview.org/bbs/tb.php/b001/516 




 
그런 신은 없다! 하지만 신은 있다! (3)
 
- 기존의 고전 유신론과 현대 무신론마저 넘어서는 새로운 유신론을 위하여
 
 

“하나님도 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만유의 아버지이시며,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하여 일하시고,
 만유 안에 계십니다.”      - 에베소서4장6절(표준새번역)
 
 
 
 
불가지적 무신론과 불가지적 유신론
 
전투적 무신론자(military atheist)인 리처드 도킨스는 매우 솔직한 학자다. 그의 문장은 매우 힘이 있고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그의 현재 입장은 “아마도 신은 없을 것”이라고 보는 <불가지적 무신론>의 입장이다. 불가지라고 남겨두는 것은 절대적이고 최종적인 이론은 그 어느 누구도 확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도킨스의 솔직하고 겸허한 면도 볼 수 있는 지점이다. 사실상 이는 무신론자든 유신론자든 그 어떤 누구이든 마찬가지라고 본다.

그런 점에서 마찬가지로 나 자신은 <불가지적 유신론>의 입장에 해당된다고 하겠다. 즉, “아마도 신은 있을 것”이라는 입장이다. 그리고 이러한 나의 입장은 현대 자연과학의 성과들을 기본 자료로 삼아서 전체 우주를 설명하는 통합적 철학사상인 화이트헤드의 과정 형이상학에 기반한다. 물론 일반인들에겐 너무 어렵다는 점이 한계일테지만, 알고보면 지금까지의 철학 사상 중에서 유일하게 논리적으로 정직하려 했던 <신 존재 증명의 철학>이기도 하다(혹자는 증명 자체의 불필요성을 얘기하기도 하지만 이는 형이상학 자체에 대한 무지로도 이어지기에 나는 이에 동의하지 않는 입장임).

이러한 새로운 신 이해는 기존의 신 존재 이해와는 전혀 다르기에 서구인들로는 이를 이해하기가 퍽이나 힘들었을 걸로 본다. 이는 기독교 사상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일 터. 다시 말해서 우리들이 신 존재를 언급할 때 흔히 떠올리게 되는 신 개념은 서구 기독교 사상의 유신론 개념인 것이다. 이슬람교의 신(알라)까지 포함하더래도 결국 그 신이라는 존재는 초자연적인 존재로서의 신이자 절대적이고 전능한 존재로서 창조주라는 점에선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새로운 신 이해는 바로 그러한 신에 대한 고정관념적 이해에서 벗어나있다는 얘기다(이에 대해선 http://freeview.org/bbs/tb.php/b001/21 참조).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유신론자의 입장은 논리적 정합성에 대한 정직함과 사유의 솔직함을 더 근원적으로 내세우기 때문에 “신은 무조건 있다”는 식의 유신론적 근본주의자는 아니라는 점도 첨언되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만일 새로운 유신론에도 얼마든지 오류가 있다면 얼마든지 이를 수정 또는 폐기처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그 지점에까지도 열려 있어야 한다고 본다. 무엇이 진리인가의 문제는 결국 발견한 오류에 대한 문제와 이에 대한 수용여부로서의 태도 문제와도 결부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마찬가지로 “신은 무조건 없다”는 식의 <무신론적 근본주의> 역시 또 다른 폐해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즉, 무신론에서도 설명되지 못하는 난점과 부정합성 앞에서조차 여전히 “신은 무조건 없다”는 입장이 옳다는 식으로만 나간다면 그 역시 유신론적 근본주의자들과 똑같은 패턴의 <무신론적 근본주의자들>일 뿐이다. 물론 역사적으로 따지고 보면 유신론적 근본주의자들의 폐해가 훨씬 더 심각했었기에 이 둘만 놓고 본다면 나는 오히려 무신론자들의 입장을 옹호하는 편이다.

하지만 역으로 무신론자들 역시 발견된 논리적 허술함 앞에서 여전히 “신은 없다”라는 것을 맹목적 전제로 삼는다면 적어도 사유의 패턴이 지니는 그 유사성만큼은 유신론적 근본주의자들의 맹목적 신앙과도 다르지 않다고 본다. 무신론자들이 적어도 기존의 보수 근본주의 기독교인들보다는 훨씬 이성적이고 훨씬 더 낫다 라는 사실에는 공감할 지언정, 이들 역시 무신론적 근본주의자들이 되는 것이다.

불가지론은 불가지로 남아 있기 보다는 현실 변혁을 위해 재활용되어야

과학도 일종의 종교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진정으로 과학에 종속되는 우를 범할 수 있다. 현대인들에겐 과학도 일종의 종교다. 궁극의 기반으로 삼는다는 점에선 보수 기독교인들과 별다르지 않다. 하지만 고대 종교와 달리 좀더 진화된 형태의 현대 종교라는 점에서 다르다. 바로 그런 점에서 현대 과학은 새로운 기독교와 파트너일 순 있다. 하지만 과학 자체가 종교여선 곤란한 것이다.

오늘날 특히 과학을 철저하게 추종하는 자들은 과학적 탐구 이후에도 여전히 남아있는 물음들에 대해선 불가지적 입장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렇게 불가지론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사유의 정직함으로서 이해한다. 나 역시 여기까지는 충분히 동의하는 입장이다.

그런데 불가지론이 갖는 의미는 그것이 여전히 새로운 가능성으로도 열려 있다는 점을 예증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신이 있다’는 가능성과 ‘신은 없다’는 가능성은 늘 있다. 이때 보수 기독교인들도 불가지론의 입장을 지닐 때 있다. 물론 이들의 불가지론은 “그것은 하나님만이 아신다”라는 식으로 돌려버리는 것이다. 그렇기에 과학에서 말하는 불가론과 기존 기독교에서 말하는 불가지론은 그 의미는 다르다. 그러나 “인간은 알 수 없다”라고 보는 불가지론이라는 영역을 상정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또한 결코 다르지 않다.

나는 이 지점에서 불가지론이 갖는 영역은 결국 현실 변혁의 실용적 차원에서 재활용될 수 있는 영역이라고 보고 있다. 왜냐하면 어차피 <모름의 영역>은 결국은 <모든 가능성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가지론의 영역을 그저 불가지로서 남겨두기보다는 현실 변혁을 위해서 재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설명력 확보로서의 순위 : 고전 유신론 < 무신론 < 새로운 유신론

그런데 이 부분에서 한 가지 오해해서 안될 사항은, 어차피 앎의 영역에서 불가지의 영역이 남게 되는 것은 인간 인식의 한계에서 비롯되는 사유의 불가피한 한계적 결과이기도 하지만 나는 적어도 <이론의 설명력 확보>에 있어서 만큼은 기존의 유신론보다는 기존의 무신론이 좀더 설명력 확보가 되어 있다고 보는 입장이며, 또한 기존의 무신론보다는 적어도 새로운 유신론의 입장이 좀더 설명력 확보가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즉, 불가지의 영역이 있게 되는 것은 어차피 마찬가지의 차원이지만, 이론적 설명력의 확보에 있어서만큼은 기존 유신론 < 무신론 < 새로운 유신론의 입장이라는 것이다. 오늘날의 최신 과학도 창발성(emergence)의 수수께끼만큼은 여전히 풀지 못하고 있다. 이는 자연세계에 있어 새로움(novelty)의 원천과 관련되고 있다. 그 질문에선 막히고 있을 따름이며, 불가지의 영역으로 남겨두고 있는 것이다. 도킨스를 비롯한 무신론자들의 유신론 공격은 초자연주의적 유신론에 대한 공격이었을 따름이다.

오히려 새로운 유신론은 <자연주의적 유신론>Naturalistic Theism으로 얘기되며, 최근에 물리학자 호킹의 무신론 발언이 화제를 모은 바 있는데, 새로운 유신론의 입장에서 볼 때는 이것이 하등의 문제가 안된다. 왜냐하면 새로운 유신론은 태초와 종말을 말하는 기존의 고전 유신론과 비교해볼 때 그 우주론이 다르기 때문이다. 즉, 새로운 유신론의 입장에서의 우주론은 애초부터 신과 세계의 관계 자체만큼은 영원한 과정상에 놓여 있다고 보기 때문에 신이 이 세계를 전적으로 창조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신의 세계의 창조에 기여하는 것은 공동협력자로서 부분적으로 기역하는 것이며, 그것은 태초의 창조가 아니라 항상 -ing로서의 창조인 것이다.

그렇기에 태초란 것도 세계의 처음이 아니라 영원한 과정상에 있어서 어느 한 시점에서부터 시작된다고 여겨지는 <한 처음>일 따름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창세기1장1절의 “태초에”라는 번역에 관한 공동번역의 “한 처음에”라는 번역이 새로운 유신론의 입장에 훨씬 더 타당한 것으로 보고 있다. 새로운 유신론의 입장은 태초와 종말이 아닌 영원한 과정적 우주론을 취한다. 고로 우리의 우주시대를 출현시킨 빅뱅 사건의 기원조차 실은 얼마든지 이전의 다른 우주 시대로부터 넘어온 것으로 봐도 이것이 새로운 유신론의 입장에선 하등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최근의 학술적 정보의 최전선에선 물리학에서의 벡터(Vector)에 대한 매트릭스로서의 텐서(Tensor) 개념을 통해 신의 존재를 말하기도 한다. 우주에는 타자원인적인 요소뿐만 아니라 자기원인적인 측면도 얼마든지 있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될 것이다. 21세기 최첨단 물리학은 <다중우주론>을 얘기할 정도로 얼마든지 끝없이 무한한 우주, 혹은 또다른 우주 등등 현실 세계의 영원한 과정을 얘기한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하나의 우주시대만 있는게 아니라는 것이다.

이미 새로운 유신론적 입장에선 태초에서 종말로 가는 우주론을 택하지 않는다. 그런 낡은 우주론 같은 건 이젠 엿장수한테나 줘버려라는 것이다. 신과 세계의 관계 자체는 영원한 과정에 놓여 있을 따름이다. 이처럼 최신의 과학적 성과들과도 얼마든지 양립할 수 있는 최신의 우주론이 기존의 낡은 기독교에는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않다. 그렇기에 늘상 과학 진영과 싸울 수밖에 없다. 피곤하지도 않은가.

과학과 종교의 관계
- 초자연주의와 신비주의를 구분하는 준거점은 그때까지 성취된 세계 안의 합리성의 수용 여부로

과학은 미지의 영역을 이성적으로 탐구하여 세계 안에 해명시킨다. 과학은 모호한 베일에만 있던 미지의 영역들을 수학적 이성으로서 하나하나 풀어헤치면서 결국엔 명료한 느낌으로 세계 안에 노출시킨다. 반면에 종교는 그 시작부터 미지의 영역을 믿음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종교에도 이성의 검증을 얼마든지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진정한 종교는 이성의 검증을 두려워할 이유가 전혀 없다. 왜냐하면 진정한 신비주의라면 그것은 세계 안에 노출되지 않은 미지의 합리주의일 뿐이기 때문이다. 또한 세계 안에 성취된 합리주의는 세계 안에 해명된 신비주의일 뿐이다.

사실상 합리주의와 신비주의는 동전의 양면 같은 것이다. 이때 초자연주의와 신비주의를 구분할 수 있는 준거점이 바로 그때까지 성취된 합리주의의 수용 여부에 따른다는 것이다. 이성의 검증은 바로 이 지점에서 필요하다. 다시 말하면 과학적 발견의 성과들과 양립가능한 종교와 그렇지 않은 종교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종교에서 미신적이고 주술적인 영역들은 걸러내야만 한다. 종교의 해악적인 면은 너무나 끔찍하고 위험스럽기 때문이다.

대체로 인류 역사에서 보면 종교는 고대로부터 신화와도 결합되면서 그 반응이 의례적 숭배로서 이어져 내려왔다. 따라서 고대로부터 종교에는 주술과 마법 혹은 미신적 요소들도 함께 뒤섞여 있었다. 나는 이 부분에서 종교야말로 과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보고 있다. 과학에 대한 적극적 수용은 오히려 종교의 더 나은 발전을 위해선 더욱 좋은 것이다.

합리주의와 신비주의가 동전의 양면이듯이 과학과 종교는 그런 식으로 서로 보완협력의 파트너일 때 가장 최적의 시너지를 낼 수 있다고 본다. 과학은 종교에서 미신을 걸러내고, 종교는 과학의 반성을 이끌어내는 나침반 역할이 되어야 한다. 물론 이때 내가 말하는 종교란 초자연주의를 인정하는 그런 종교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과학과 소통하는 가운데 이를 넘어서고자 하는 종교를 뜻한다.

그러한 종교는 오히려 과학 진영에게도 이로운 것이다. 인간의 과학 탐구는 종종 낙관주의에 사로잡힘으로 인해 세계 안에 윤리의 문제들을 야기하기도 한다. 종교는 바로 이 부분에서 필요한 것이다. 종교의 주제들은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자각을 이미 전제하고 나온다. 삶의 고통과 죽음 등등 피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에 대해 이를 극복할 수 있는 해방과 구원을 지향한다. 종교가 인간 유한성의 자각을 전제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는 과학의 한계와 맞물려 있기도 하다.

종교는 인간이 신으로 진화되지 않는 한 영원히 남아 있아서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자각을 항상 일깨워줄 것이다. 과학은 그 부분에서 종교의 성찰적 문제들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도킨스처럼 종교를 비판하는 과학자들 중에는 종종 “빈틈의 신”을 얘기하는데, 이는 자기모순적 언급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빈틈을 허용하는 것은 이미 인간 인식 자체의 한계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여기에는 과학이 빈틈을 부득이하게 허용하고 있는 측면도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알고 보면 과학과 종교는 서로의 빈틈을 메꿔주는 관계이기도 하다. 즉, 과학의 빈틈에 종교가 자리할 수 있다면, 과학 역시 종교가 허용하고 있는 빈틈에서 왕노릇 하는 신일 수 있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도 그렇고 종교라고 해서 마냥 옳진 않다. 그러한 지점에서 과학은 그야말로 어설픈 미신적 종교들을 강력히 청소해줄 수 있는 요소라고 볼 수 있겠다. 그런 점에서 과학을 수용하지 않는 종교는 장님이 되기 십상인 것이다. 과학의 한계에서 나오는 빈틈이든, 종교의 한계에서 나오는 빈틈이든 모두 인간 인식의 한계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은 동일하다.

성서의 역사비평이란 성서에 대한 과학적 탐구를 수용한 것

백두의 언급처럼, 종교는 원시적인 상상력의 소산인 극히 유치한 심상들과 뒤섞인 채, 인간의 경험 가운데 출현하였다. 이는 기독교의 경전인 성경에도 고스란히 깃들어 있다. 그런데도 많은 기독교인들은 축자영감설 혹은 성서무오설을 받아들이고 있다. 그리고 성서에 기록된 내용들은 모두 역사적 사실로 인식하고 있다.

예컨대, 신이 6일 동안 세상을 창조하고 7일에 안식했다는 창세기1장, 노아의 홍수이야기, 모세의 온갖 기적이야기, 여리고성이 무너진 이야기, 욥의 이야기, 큰 물고기 뱃속에서 살아난 요나의 이야기, 신악에서는 예수의 동정녀 탄생이야기, 물위를 걸은 이야기 등등 이런 것들이 모두 죄다 실제로 있었던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이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만일 이러한 것들이 백퍼센트 사실이 아니라면 성서를 믿을 필요성조차 없다고 여기고 있다.
 
성서를 믿는 이유는 그것이 백퍼센트 사실이라고 믿기 때문에 성서를 믿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얘기들이 예컨대 삼국유사 같은 다른 책에 쓰여 있었다면 그 역시 역사적 사실로서 믿었을까? 결국 이런 중세 시절에나 통할 법한 신앙 자세가 지금 21세기에도 버젓이 통용되며 횡행하는 곳이 바로 종교라는 영역이다.

르네상스 이후 근대 인문과학의 발달은 성서 연구에도 깊이 들어오게 되었다. 주로 대학을 중심으로 성서에 대한 인문학적 비평작업이 진행되었는데 이를 성서에 대한 역사비평적 방법이라고 부른다. 성서의 역사비평은 애초에 성서를 읽어가는 가운데 서로 중복되거나 상호 모순된 진술들을 발견함으로서 그 의문이 촉발되고 그로 인한 새로운 가설적 탐구가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예컨대, 창세기1장과 창세기2장4절 이하의 창조 순서가 서로 상반되고 있는 점이나 창세기 14장14절의 단이라고 하는 지명은 아브라함 시대에는 물론이고 모세오경을 썼다는 모세 시대에도 없었던 지명인지라 당연히 의문을 가지게 된다(성서 안의 여러 오류와 모순에 대해선 http://freeview.org/bbs/tb.php/b001/27 참조)

혹자는 성서의 역사비평을 받아들이면, 성서가 해체되고 기독교가 와해될 것이라고 보기 때문에 이를 거부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럴 경우 교인들을 불러모으기가 힘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말하지만 성서의 역사비평을 거부하는 것은 종교가 과학을 거부하는 태도와 다르지 않다고 본다. 성서의 역사비평을 거부할 경우 오히려 성서는 중세 시절에나 통할 법한 낡은 책으로 전락될 뿐이다. 21세기를 사는 오늘날에 성서를 그렇게 취급하는 것이야말로 성서를 더욱 쓰레기 취급하는 것이요, 그저 낡은 박물관에 보내는 일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성서는 각 시대마다 인문학적 발달의 성과와 함께 더불어 읽어져야 마땅하다.

이런 나의 얘기에 대해 혹자는 말하길, 그런 과학적 탐구로 인해 성서가 해체되어도 좋단 말인가? 라고 되물을 것이다. 실제로 에타 린네만 같은 이는 성서비평학을 받아들일 경우 전혀 다른 예수를 말하게 된다며 거부반응을 보기이기도 한다(그런데 그는 신학과 철학에 대해 놀라울 정도의 무지함을 보여주고 있다. 이에 대해선 http://freeview.org/bbs/tb.php/f001/2894 참조).

내가 보기엔 이런 우려야말로 과잉한 우려요 선입견일 뿐이다. 오히려 엄밀한 성서연구에 이성적 탐구를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성서가 훨씬 더 성서다워진다고 할 수 있겠다. 성서는 진화한다. 그럴 때 성서는 성서로서의 가치를 더욱 발휘하게 된다. 나는 나의 저술에서 이미 언급했었지만, <성서무오설>이야말로 우리를 놀랄만큼의 무지로 안내하는 사탄의 교설이라고 보며, 오히려 <성서오류설>이야말로 하나님의 계시로 안내하는 성찰의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을 분명하게 논증한 바 있다(이에 대해선 http://freeview.org/bbs/tb.php/b001/30 참조).

오늘날 성서의 역사비평을 못받아들이는 태도는 과학에 대한 종교 진영의 반발과도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내가 볼 때 이러한 보수 기독교인들의 반발은 시대적으로 점점 더 퇴색될 것으로 본다. 세계 지성계는 이미 서구의 낡은 기독교와 결별하고 있는 중이다. 반면에 현대 과학의 탐구와 발달은 지금도 쉼 없이 계속되고 있으며, 오늘날의 현대인들에게 과학은 많은 유익한 정보들을 제공하고 있는 실정인지라 과학을 거부하는 태도 자체는 그리 설득력을 얻지 못할 것으로 본다. 그래서 구차하게 생각해낸 것이 <창조과학> 또는 <지적설계> 같은 것들인데, 정작 현대 과학 진영에서는 이러한 것들이 오히려 사이비과학으로 취급될 따름이다.

새로운 유신론의 관점에서 읽는 성경

새로운 유신론의 입장에서 읽는 성경은 매우 각별하다. 성경을 솔직하게 들여다 볼 경우, 여기에는 여자와 아기까지 몽땅 말살시키려는 정복적이고 야만적인 하나님의 모습도 보여주고 있지만, 동시에 소외된 약자를 위해 아파하고 사랑으로 품으려는 하나님의 모습도 함께 보여주고 있다. 성경 역시 시대적 한계와 제약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에 고대인들의 원시적인 신 이해와 함께 맞물려 있다. 힘의 전능성을 강조하는 신의 모습은 사실상 기독교 외의 다른 종교들에서도 흔히 엿볼 수 있는 지점이기도 하다.

따라서 성경은 그 자체 안에 신 이해에 대해서도 모순성을 가지고 있는데 그 이유는 성경을 기록했던 고대인들이 이해하는 신 이해 자체가 여전한 형성 과정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만군의 여호와로 불리는 전쟁신 야훼의 모습은 참으로 극악무도하다. 이처럼 엄청난 힘을 과시하는 전능한 절대자로서의 신 이해가 있는 반면에 놀랍게도 힘의 전능성에 반하는 신의 모습도 함께 깃들어 있다.

예를 들어 전능한 하나님도 자신이 한 일의 결과를 예견하지 못해서 탄식하고 후회까지 하신다(창 6:6~7, 삼상 15:11, 삼상 15:35, 대상 21:15 참조). 신도 현실 존재들이 어디로 튀게 될는지 알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신은 질투를 한다. 신도 현실 존재들의 자율적 결정들을 자기 마음대로 제어할 순 없기 때문에.

그런데 또 한편에는 신도 현실 존재들의 결정에 개입해서 좌지우지 하기도 한다(출10:27, 욥기1장, 이사야45:7 참조). 그렇기에 성경은 정말 말그대로 뒤죽박죽인 하나님의 보여주고 있다. 그렇기에 어떤 하나님을 채택할 것인가는 전적으로 본인의 성장적 관점에 달렸다. 자신의 이해 성숙도가 높으면 높을수록 새로운 하나님을 발견하게 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엔 여전히 낡은 유신론의 하나님 모습만 찾게 된다. 그렇기에 성경을 읽는 방법에 있어 올바른 관점의 채택은 매우 중요하다.

제아무리 성경구절을 백퍼센트 인용하고 발췌해서 배열한다고 하더라도 애초에 그렇게 보는 관점 자체부터가 틀렸을 경우엔 분명한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그 관점의 궁극적 기초가 바로 세계를 이해하는 철학의 자리다. 해석학적 렌즈라는 철학적 베이스가 알게모르게 성경해석의 주도권을 좌우하게 된다. 그러한 구도하에서 역사적 배경 및 자료수집들도 이뤄지게 되는 것이다. 물론 보수든 진보든 이 지점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다. 새로운 유신론은 성서의 역사비평의 성과들과 성서오류설을 받아들이고 있는 입장이기에 그 어떤 성서비평에 대해서도 두렵거나 거부감을 느끼질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새로운 유신론의 관점에서 다시 성경을 읽어야 할 필요성을 느낄 수 있다. 나는 이미 기독교 성경이 갖는 경전의 특별함에 대해서 설파한 바 있다. 성경은 여타의 다른 종교 경전들과 달리 온갖 오류와 모순들은 물론이고, 별의별 내용들 심지어 너저분하고 에로틱한 얘기들까지도 주워담고 있을 정도로 온갖 소란스런 잡탕들이 다 깃들어 있는 독특한 경전에 속한다. 심지어 그것은 매우 성차별적인 내용과 정복적이고 야만적인 하나님의 모습까지도 그려내고 있다.

사실상 이는 일반적으로 말하는 종교 경전과는 동떨어진 느낌이기도 하다(그래서 혹자는-라즈니쉬 였나- 성경에서 예수의 산상수훈을 제외한다면 나머지 대부분은 쓰레기라고까지 말할 정도다). 따라서 내가 볼 때 기독교 성경은 어떤 면에서 경전으로서의 자기해체성을 갖는 독특한 경전이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성경의 이러한 특성들은 다름아닌 우리 사는 세계 그대로를 보여주고 있는 거울이라고 여겨진다. 온갖 소란스런 잡다함은 이미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세계의 특성이기도 하다. 그래서 성경은 또한 깨닫는 만큼만 보여줄 따름이다.

성경은 바로 이러한 현실 세계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가운데서 유유히 흐르고 있는 광맥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예수사건에 해당한다. 구약의 예언자 운동도 결국은 하나님나라 운동이라는 예수사건에서 절정을 이룬다. 성경을 읽는다는 건 바로 소란스러운 삶의 복잡함 속에서 이 같은 광맥을 발견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성경에는 좋은 내용들도 있지만, 타산지석으로 삼을만한 해로운 내용들도 있다. 사실상 그게 바로 우리 사는 세상 자체이기도 한 것이다. 최종 결단과 선택은 읽는 자의 몫이다.
 
그렇기에 성경을 읽는 이가 성장하면 성경은 전혀 새롭게 보이는 것이다. 성차별적인 성서구절로 현실의 성차별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도 여성해방적인 사건들을 발견하면서 경전이 현실 변혁의 활용을 위해 쓰일 수 있음을 발견하게 되고, 또한 잔인한 힘의 하나님이 아닌 약자와 함께 아파하는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이며, 전능하신 절대적 초월자로서의 신이 아니라 불완전하고 무기력하신 신에 대한 새로운 신뢰적 발견이 이뤄지게 되는 것이다.

성경은 읽는자와 함께 공명하고 반응하는 유례없는 독특한 경전이다. 그것은 죽임의 책이 되기도 하고 살림의 경전이 되기도 한다. 이점에서 새로운 유신론의 입장에서 읽는 성경은 기존의 유신론을 대체하는 성서읽기일 필요가 있겠다. 왜냐하면 기존 유신론에서 말하는 그런 신은 무신론자들이 부정하는 것처럼 정말로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런 전능한 신의 실체는 결국 힘의 하나님이요 믿음을 강요하는 파쇼적인 하나님일 뿐이며, 생명을 죽이고 전쟁을 신의 이름으로 정당화하는 폭력적 하나님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런 신은 새로운 유신론의 입장에서 보면 겉표현상으로는 '하나님'이라고 불리지만 실상은 결국 '악마'일 뿐이다.
 
오히려 새로운 유신론의 신관을 잘 대변해주는 성경구절을 찾는다면 두말할 것도 없이 에베소서 4장6절에 있는 꼽을 수 있겠다. “하나님도 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만유의 아버지이시며,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하여 일하시고, 만유 안에 계십니다.” 아마도 이 글을 쓴 바울도 온전한 신관이 정립된 것이 아님에도 부지불식 간의 통찰로서 나온 언명일 수도 있다. 적어도 새로운 유신론의 입장에서 볼 때 신은 세계에 대한 초월적 절대자가 아니라 세계를 자신의 몸으로서 품고 있는 존재론적인 동반자일 뿐이다.
 
자.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새로운 유신론의 입장에서 '신'이라는 존재를 어떻게 발견할 것이며, 그것은 내 삶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를 알아보도록 하자.
 
(* 계속 이어집니다 )
 
(다음 번에는 새로운 유신론에서 말하는 하나님을 이제 생활속에서 발견하고 찾기에 대해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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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신은 없다! 하지만 신은 있다! (1)
 
 
그런 신은 없다! 하지만 신은 있다! (2)
 
 
관리자 (10-09-29 15:06)
 
잘못 쓰여진 문장이 있어서 아래와 같이 바로 잡습니다.

혹자는 성서의 역사비평을 받아들이면, 성서가 해체되고 기독교가 와해될 것이라고 보기 때문에 이를 거부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럴 경우 교인들을 불러모으기가 힘들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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