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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기도에 관하여: 함께 기도합시다 <새로운 기독교 운동>을 위하여!    
  글쓴이 : 미선이 날 짜 : 10-09-27 12:08 조회(1048)
   트랙백 주소 : http://freeview.org/bbs/tb.php/b001/518 




 
함께 기도합시다 <새로운 기독교>의 실현을 위하여!
 
- 새로운 기독교 입장에서 말하는 기도란
 
 
 
 
기도란 하나님의 결정에 관여하는 통로
 
"기도란, 청원자의 의지를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의지에 굴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움직여서, 만일 그렇게 기도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이 하시지 않았을 일을
기도를 통해 하나님이 그 일을 하시도록 만드는 것이다" - 루돌프 불트만
 
근자에 기도의 불필요성을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나는 이에 대해 단호히 반대하는 입장임을 말해둔다. 기도는 필요하다. 필요할 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엄청난 효과를 가져다주는 실제적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단지 <어떤 기도냐>에 대한 문제가 있을 따름이지 분명히 말하지만, 기도 자체는 당연히 필요한 것임을 힘주어 말하고 싶다.
 
흥미롭게도 일급의 성서비평학자였던 불트만도 기도에 대해선 매우 명확한 입장을 취한 사람이었다. 물론 나 역시 이를 받아들이는 입장이다. 왜냐하면 성서를 연구해보니 실제로 성서에 나타난 기도는 그러했었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초자연적인 기적의 실현을 바라는 그러한 기도를 얘기하는 게 아니다. 성서에 나타난 신과 인간의 관계에서 시행된 그 기도 자체의 패턴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이다.
 
성서에서 나타나고 있는 기도란 하나님에게 따져묻는 것이며, 하나님께 더욱 부르짖고 종요하는 것이다. 그래서 심지어 기도는 하나님의 결정을 바꾸는 데에 큰 영향을 끼치기까지 한다. 성서에 나타난 여러 사례들과 관련해서 기도에 대해 알고 싶다면 월터 윙크(Walter Wink)의 <사탄의 체제와 예수의 비폭력> 제16장 "기도와 사탄의 세력들"을 꼭 참조했으면 하는 바램이다. 본인이 생각하는 기도를 보다 정확하게 언급하고 있는 이는 다름 아닌 성서학자 월터 윙크다. 그의 성서 주석은 보고 또 봐도 늘 감탄을 자아낼 정도다.
 
기도는 효과가 있다
 
기도의 효과는 이미 과학적으로도 입증된 바 있다. 기도는 기도자에게 심리적으로 차분해지는 심리학적 안정의 효과를 주기도하지만, 그 외에도 바라는 의지가 보다 빨리 실현되도록 하는 <앞당김의 효과>까지 있다. 왜냐하면 기도란 희망의 현재화를 의도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기도 자체는 기독교든 천주교든 혹은 새벽에 정화수를 떠 놓고 천지신명님께 기도하는 그런 민간 무속 신앙의 기도이든 간에 기도는 효과를 지닌다고 본다.
 
과학적으로 보면, 기도는 일종의 NLP(Negro Linguistic Programming : 신경 언어 프로그래밍)의 효과가 보여주는 것과도 유사한 효과를 발한다. NLP란 말 그대로 신경 언어에 원하는 정보를 프로그래밍하여 뜻을 이루는 방법에 해당한다. 쉽게 말하면, 일종의 자기 암시 혹은 자기 최면의 효과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이 실제적인 효과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물론 늘상 그렇진 않으나 의학적으로도 이것은 치유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기적을 불러일으키는 상상치유> 책 참조). 그 효과에 대한 범주적 한계 지점은 있으나 그런 자기 암시적 요법이 불러일으키는 효과 자체까지도 간과되어선 안될 것이다.
 
물론 내가 말하고자 하는 기도가 꼭 NLP와 동일하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단지 기도에는 그러한 NLP적 요소도 내포되는 점이 있음을 얘기하고 싶을 따름이다. 기도는 기도자와 기도를 받는 신적 대상이 있기에 그런 점에선 NLP와는 또 다른 것이다. 단지 기도를 수행함으로써 자기 암시적 효과마저 같이 얻게 되는 측면 또한 있기 때문에 그런 점에선 NLP가 지닌 효과와 중첩된다는 사실이다.
 
신은 있다! 우리와 더불어 있는 살아 있는 존재로서!
 
기도는 하나님께 하는 것이다. 누차 말했지만, 신이라는 존재는 있다. 단지 스스로 홀로 있지 않을 뿐이다. 신은 언제나 현실 세계와 더불어 함께 있을 따름이다. 신이라는 존재는 현실 세계를 물리적인 몸으로서 삼고 있는 <한얼>에 가깝다(이에 대해선 추후에 본인의 <몸학>에서 논할 예정임). 신이 없으면 세계도 없고, 세계도 없으면 신 역시 없다.
 
이러한 신은 우주적인 법칙이나 원리가 아니다. 만일 신이 그 어떤 우주적인 법칙이나 원리라고 한다면, 어차피 자연의 인과적 질서로 편입시키는 게 더욱 마땅할 것이다. 내가 말하는 신이라는 존재는 살아 있는 존재요, 자기 결정의 자유를 지닌 존재를 의미한다. 신 역시 모든 존재가 자율적 결정의 자유가 있듯이 신이라는 존재 역시 그러하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신 또한 존재이지 그 어떤 우주적인 법칙이나 원리가 아닌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 또한 우주적인 법칙과 원리의 지배를 받는 측면이 있다. 이는 신이 세계의 영향을 받는 측면에 해당된다. 전통 신관은 바로 이 점을 간과했었다. 그렇기에
기존 기독교인들 대부분은 신이라는 존재를 초자연적인 존재로서만 이해했었고, 그러한 초자연적인 존재을 믿기 때문에 이들 중에는 기도라는 것을 여전히 초자연적인 기적 또한 바라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바로 그래서 극단적인 맹신자는 병이 걸려도 아예 병원에 가질 않고 기도하면 다 낫는다는 식으로 나오다가 결국 어이없는 참변을 당하기도 한다. 즉, 아무런 응답도 효과도 없는 기도를 드리는 것이다. 물론 이는 허공에다 삽질하는 격이다.
 
효과가 없는 기도란 다음과 같다. 지금까지 발견된 자연의 법칙을 무시하고 초자연적 사건을 의도하는 기도다. 그런 기도는 하나님이 들어주고 싶어도 들어주질 못한다. 존재가 끊임없이 물려받고 있는 물리적인 자리와 인과적 영향들은 신도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인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아무런 장치도 없이 하늘을 날아다닐 수도 없는 노릇인 거며, 썩은 시체가 벌떡 일어나도록 하는 것은 마술의 트릭에서나 가능하지 실제적으로 가능한 일이 결코 못된다.  
 
기도는 하나님께 명령하고 하나님을 자꾸만 종용하는 것
 
기도는 하나님이 들어주실 수 있는 것들 중에서 최대한 얼마나 더 빨리 들어주실 것인지를 결정하도록 종용할 따름이다. 그런 면에서 기도는 하나님이 하는 결정의 자유에 영향을 미친다. 기도는 하나님께 명령을 내리는 지점이기도 하다. 이미 주의 기도문부터가 그러하다. 뜻이 하늘에서 이뤄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생존을 위한 모든 기도는 정당성을 지닌다. 기독교인이 하든 비기독교인이 하든 누가 기도하든지 간에 이는 정당하다고 본다. 하지만 그 이상의 과잉한 탐욕들에 대해선 정당성을 지니기 어렵다고 본다. 그렇다면 우리가 흔히 말하는 기복 신앙의 기도를 어떻게 볼 것인가?
 
우리가 기도를 하다보면 자기가 처한 삶의 복을 구하는 기도를 하기 마련이다. 우리 남편의 승진을 위해서, 우리 자신의 합격을 위해서, 나의 부모님의 만수무강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내가 볼 때 인지상정이라고 보여진다. 다시 말하면, 복을 구하는 기도를 한다는 것은 이미 인간의 일반적인 본성이라는 것이다. 그것 자체를 욕할 순 없다고 여겨진다. 이들은 그리스도인이라기보다는 그냥 일반적인 세속적 인간일 따름이다.
 
따라서 기복 신앙이라는 것은 어차피 기독교 안에도 있고, 불교 안에도 있고, 무속에도 있고, 이슬람과 힌두교 안에도 있을 만큼 보편적인 인간 양태일 뿐이다. 너 왜 그렇게 생겨먹었냐고 나무랄 수 없듯이 왜 그런 기도를 하냐고 나무랄 순 없을 걸로 본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결국 깨달음이며, 그러한 깨달음이 깃들어 있을 때 이른바 제대로 된 기도가 나올 수 있다고 여겨진다.
 
진정한 우리의 기도는 삶의 상처와 연약함을 위해 우리 안에 고통받는 자를 위해 죽어가는 생명을 위해 정의와 사랑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다. 잘못된 부조리한 사탄의 체제가 하루 속히 물러갈 수 있도록 말이다. 정말 그렇게 되는가? 물론 나는 그렇게 된다고 믿는다! 나는 <기적>이라는 표현을 바로 이 부분에서 사용하고 싶다. 이러한 기적들이 실제로 역사상의 많은 비폭력적 저항의 사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는 점은 한편으론 너무나 놀랍기도 하다(월터 윙크의 저서인 <사탄의 체제와 예수의 비폭력>에 나타난 실제 역사상에 있었던 수많은 비폭력 저항의 사례들을 참조 바람).
 
그밖에 기도에 대한 용어 표현의 문제들
 
흔히 기독교인들 중에는 기도할 때 "하나님 아버지" 또는 "아버지 하나님" 라는 표현을 종종 쓰곤 한다. 어떤 이는 그냥 "아버지"라고 쓰기도 한다. 이는 가부장적 기독교가 무의식 중에 심어놓은 결과이기도 하다. 이것이 자연스럽게 느껴진다는 것은 그만큼 몸에 배여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즉, 체질적으로 관습화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점에 대해선 여성신학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바이기에 가급적이면 "아버지"라는 표현보다는 그냥 "하나님" 혹은 "하나님 어버이"를 쓰도록 노력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은연 중에 우리의 이러한 습성으로 인해 저도모르게 남성적 이미지로서의 신관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물론 예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 당시엔 하나님을 아예 아버지라고 부를 수도 없었던 시대였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할 경우엔 신성모독에 해당하는 일이었다. 그런 점에서 예수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것은 하나님이 남성임을 강조한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성을 강조한 것이 그 핵심 포인트에 속한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 아빠" 혹은 "아빠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도 괜찮다고 여겨진다(실제로 한완상 박사의 기도는 그러했다). 어쨌든 가급적이면 일말의 오해가 없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아버지라는 표현은 삼가하는 게 좋다고 여겨진다.
 
반면에 기도 말미에 붙이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에 대해선 강한 거부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내가 볼 때 이것은 <어떤 예수냐>의 문제일 뿐이지 굳이 거부 반응을 보일 것까진 없지 않을까 싶다. 우리가 믿는 예수가 이 땅에서 소외된 약자들을 위해 참된 일을 하고 갔던 예수라고 한다면 굳이 거부할 이유가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물론 심적으로 웬지 꺼림칙하다고 생각되면 굳이 강요하고 싶진 않다. 하지만 적어도 그런 심리적 거부라면 명료한 근거나 이유는 못된다는 점도 함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다.
 
늘상 말하지만 기독교의 정체성은 예수와 성서에 기초되어 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하지만 아예 기독교인이길 거부한다면 얼마든지 다른 이름으로 기도해도 좋다고 생각된다. 이는 어차피 익숙한 종교 선택의 문제일 뿐이라고 여겨진다. 물론 나 자신에게는 여전히 예수와 성서가 의미가 있다고 보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새로운 기독교 운동도 결국은 어떤 기독교냐의 문제일 뿐인 것이다.
 
새로운 기독교의 실현은 시간 문제일 뿐이며, 바로 그 지점에 기도가 필요한 것임
 
그런 점에서 나는 새로운 기독교 운동을 위해 오늘도 쉼 없이 기도하는 바이다.
(개인적으로는 묵상 기도에 해당되는 'GIO명상'을 주로 많이 하는 편임.
GIO명상에 대해선 http://freeview.org/bbs/tb.php/b001/158 참조. )
 
새로운 기독교에 대한 꿈은 결코 헛된 꿈이 아니다. 어떤 이는 정말로 그것이 가능할 수 있을까 라며 회의하기도 한다. 결과를 봐야겠다는 거지만 그런 식으로 나는 결과를 보고서 새로운 기독교 운동을 하지 않는다. 동시에 나 자신에는 이미 결과적이다. 십자가상의 예수는 말하길 하나님마저도 나를 버렸다며 울부짖었다. 그러한 예수운동은 실패한 운동인가? 성공한 운동인가? 전태일은 죽었다. 그는 실패한 것인가?
 
흥미롭게도 예수는, 하나님나라는 이미 현재화되어 있음을 함께 말하고 있다. 내 안에 하나님나라는 이미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새로운 기독교의 실현은 내겐 이미 주어진 결과로서 현재화되어 있다. 단지 남은 건 시간 문제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 시간을 좀더 줄이고 앞당기기 위해선 바로 기도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당연히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으시며 새로운 가능성을 공급해주신다.
 
내가 존경하는 참그리스도인이셨던 문익환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역사는 꿈을 통해 부활한다" 
한 사람이 꿈을 꾸면 몽상이겠지만, 여러 사람이 하나의 꿈을 꾸면 현실이 된다.
 
분명히 말하지만, 기도는 항상 필요하며,
실로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위대한 기적>을 실현시킨다.
 
 
(* 다시 한 번 더 강조하지만, 이곳 세기연에서 기독교 서적에서 유일하게
별다섯개 만점을 준 월터 윙크의 <사탄의 체제와 예수의 비폭력>을 꼭 읽어보길 권하는 바이다.
솔직히 내가 말하고자 하는 기도에 대해선
이미 월터 윙크가 많이 써 놓고 있으며, 위의 글은 그저 보론에 지나지 않는다.
이 책은 새로운 기독교 운동을 위해서도 교본처럼 필요한 책이다.
아직도 여전히 안읽은 분들이 있다면 정말이지 간곡히 추천하는 바이다.)
  
호치민 (10-09-27 16:59)
 
정실장님 오랫만입니다. 호치민에서 연락드려요..^^

윗글을 읽고, 기도없이 살아온 제 지난 40년 인생에 새로운 전환점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건조하고, 반복적이며, 단순한 제 일상을 다른 차원으로 변화시켜 볼 수 있을것 같네요.

'흥미롭게도 예수는, 하나님나라는 이미 현재화되어 있음을 함께 말하고 있다. 내 안에 하나님나라는 이미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새로운 기독교의 실현은 내겐 이미 주어진 결과로서 현재화되어 있다. '

윗 언급은 참 신선하게 다가오네요,,,많은 사람들이 이미 자신 속에 들어와 있는 그 분을 못깨닫고 방황하고 있거나, 여기 모인 분들의 맘 속엔 우리가 염원하는 새로운 기독교가 이미 들어와 있을 수 있는데,,,^^~좌절하거나 넘 조급해 해서는 안되겠습니다.

명확한 입장표현과 잘 정리된 글 늘 감사합니다.

    
미선이 (10-09-29 00:27)
 
호치민님, 방갑습니다.

도마복음에 "하나님나라는 너 안에도 있고 너 밖에도 있다"는 말씀이 있더군요.
내 안에 있는 하나님나라는 이미 현재화이며, 내 밖의 하나님나라는 아직 미래에 있을 것입니다.
아마도 참된 그리스도인은 바로 그 긴장 속에서 살아가며 그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것 같습니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이제는
한 사람의 꿈이 아닌 여러 사람의 함께 꾸는 꿈이었으면 합니다.
앞으로도 계속 정진해나가도록 하겠습니다. 늘 건강하시구요.

고맙습니다~^^*

정관 (10-09-28 05:40)
 
볼트만이 진술하는 기도가 생동감이 있어 보이네요..  에르네르또 까르데날 신부가 지은 [침묵속에 떠오르는 소리]를 보게 되면 토마스 머튼이 정갈하게 그를
소개하지 않더라도 그의 체험과 확인 속에서 우러나오는 그의 글을 대할때면 우린 또 다른 풍요를 느끼게 됩니다. 그는 하느님과의 만남이라는 글 속에서
"기도는 말을 한다거나 한숨을 쉰다거나 무엇을 본다거나 하는 것처럼,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의 가슴이 뛰는 것처럼 그렇게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이다.
기도의 본질은 바로 그런 데 있다. 중얼거림, 한숨, 눈매, 사랑으로 울렁거리는 가슴, 이런 것이 기도다. 그것은 인간에게 있어 하나의 본능처럼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은 그 본능을 새로이 배우지 않으면 완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잊혀진 본능이기 때문이다.
 기도란 바로 하느님과 긴밀한 접촉을 맺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하느님과의 대화이고 그렇기 때문에 기도는 반드시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마음속에서 명확히 생각으로 정리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우리는 동작을 통해서뿐 아니라 눈길로, 미소로, 한숨으로도 대화를 할 수 있다. 하다못해 담배를
피우는 것까지도, 그림을 그리는 것조차도, 혹은 하늘을 쳐다보거나 물 한모금 마시는 것까지도 기도가 될 수 있다. 우리의 신체의 움직임은 모두 원래가 기도인
것이다. 목마른 육신이 물 한모금을 마실 때 우리는 우리의 육신은 생리적으로 완전한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이다. 무더운 여름날 우리가 시원한 강물에서
 수영을 즐길때, 우리의 살갗은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는 감사의 찬미기도를 드린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행위를 기도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일과 노동은
실존적인 기도의 한 형태이다."

    
미선이 (10-09-29 00:33)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혹시 담엔 줄바꿈 표시를 좀더 신경써주시면
읽는 이에게도 좀더 편하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은데..그럴경우 정관님의 좋은 글이 더 돋보일 것 같아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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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 기존 진보 기독교인들의 <생명평화> 담론에 반대한다! (업그레이드판) (8) 미선이 981 02-17
132 기존 진보 기독교계의 ‘생명평화' 담론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미선이 458 02-10
131 영혼구원의 강조에서 <총체적인 생명구원의 강조>로 (4) 미선이 513 02-05
130 성서문자주의 또는 성서무오설 신앙보다 더 뿌리 깊은 고질병은? (9) 미선이 1173 02-02
129 죄의식의 종교에서 <이웃과 함께 성찰하는 종교>로 미선이 511 02-01
128 수직적 구조의 교회에서 <수평적 구조의 교회>로 (2) 미선이 676 01-21
127 서구식 목회문화가 아닌 <우리식 목회문화>로 미선이 590 01-21
126 과정신학에 대한 비판과 민중신학의 신 이해 접맥 미선이 930 01-13
125 ★ 예언 (1) 미선이 919 12-24
124 ♣ 새로운 기독교 신학의 인간론 (4) 미선이 750 12-19
123 ♣ 새로운 기독교 신학의 인간론 (3) (4) 미선이 833 12-12
122 ♣ 새로운 기독교 신학의 인간론 (2) (10) 미선이 1090 12-05
121 새로운 기독교의 시간관, 태초와 종말로서의 시간관을 거부한다! (4) 미선이 866 12-01
120 ♣ 새로운 기독교 신학의 인간론 (1) 미선이 1091 11-30
119 [예수운동 예배 견본] 새로운 기독교의 <예수운동 예배>를 위하여 미선이 1190 11-28
118 숭배하는 예배에서 <닮으려는 예배>로 (1) 미선이 1017 11-19
117 거꾸로 흘렀던 감리교 역사, 바로 세우기엔 아직 멀었나 미선이 902 11-10
116 <새로운 기독교>를 소개하는 전체 안내 링크글 (계속 업데이트 예정) 관리자 3055 11-03
115 [논평] 봉은사 땅밟기 추태, 성경 '문자주의' 그 야만의 역사 넘어서야 (1) 관리자 1046 10-29
114 기존의 진보 기독교와 새로운 기독교 운동 (1) 미선이 899 10-22
113 1세대 민중신학자 안병무의 미완의 작업과 기존 민중신학의 과제 미선이 859 10-19
112 [새기운 성명] 4대강 사업 관련, 문정현 신부의 정진석 추기경 비판을 지지한다 관리자 830 10-19
111 스퐁, "스티븐 호킹과 유신론/인격신의 죽음" (작은불꽃님 역) 관리자 1164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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