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검색
아이디    비밀번호
   자동로그인     
  현재 총 101명 접속중입니다. (회원 0 명 / 손님 101 명)     최신게시글    성경검색   
새로운 기독교 운동
월례포럼
기획강좌
연구소 활동


  방문객 접속현황
오늘 268
어제 731
최대 10,145
전체 2,317,353


    제 목 : <기독운동>의 새로운 전환을 위하여 (2)    
  글쓴이 : 정강길 날 짜 : 06-08-25 19:32 조회(2760)
   트랙백 주소 : http://freeview.org/bbs/tb.php/b001/55 




기독운동의 새로운 전환을 위하여 (2)
<새롭고 건강한 기독교> 형성을 위한 하나님 나라 운동

 

정강길 위원 minjung21@paran.com


 
* 전환시대의 모든 기독운동가들에게 드리는 두 번째 글

 
<현장>이란 무엇인가

흔히 우리는 <현장>을 말할 땐 대체로 집회현장을 떠올릴 때가 많다. 이 현장이라는 개념은 기존 민중신학에서도 매우 중요한 신학적 개념 가운데 하나다. 민중신학을 일컬어 <현장의 신학>이라고도 얘기하잖은가. 이때 이러한 현장의 뜻은 보통 사회학적 측면으로서 고려되는 경우가 많았었다.

나는 <현장>이란 개념을 불합리함 혹은 부조리가 자리하고 있는 모든 존재의 영역들을 현장이라고 본다. 그렇게 볼 경우 모든 사람들도 기본적으로 자기 현장을 지니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이해에는 곧바로 사회학적 고찰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는 현장에 대한 <존재론적 성찰>이 먼저 기본으로 깔려있다. 이것은 나 자신의 새로운 민중신학에서 <보편적 민중> 혹은 <내적 일그러짐>이라고 얘기했던 바로 그 지점에 해당되는 얘기이기도 하다.

(※ 참고로 <내적 일그러짐>이란 것은 자신의 욕구를 제대로 제어하지 못한 상태라고 언급한 바 있는데, 나 자신이 월터 윙크의 『사탄의 체제와 예수의 비폭력』(한국기독교연구소)을 읽으면서 보다 구체적으로 느꼈던 것은, 그 <내적 일그러짐>이란 게 다름 아닌 <‘힘의 과잉’에 대한 숭배>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때 기존의 보수 기독교 신앙시스템이란, 힘(=존재)의 과잉욕을 근원적으로 정당화하고 있는 시스템인 것이다. 이것은 월터 윙크가 미국의 진짜 종교는 기독교가 아니라 <‘폭력’이라는 이름의 종교>라고 폭로할 때의 바로 그 신앙시스템을 말한다. 그리고 이것은 비단 기존 기독교 시스템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예수 시대 당시 예루살렘 체제의 유대교시스템에도 있었고, 기독교 종파 바깥의 이슬람이나 힌두교에서도 종종 목격될 수 있는 가장 근본주의 시스템이다. 그렇기에 그것은 각각의 종교들에서도 찾아 볼 수있는, 모든 종교 위의 타락된 근원적 종교시스템 이다. 보편적 일반인이 자본을 숭배하는 것도 마찬가지 맥락! 기회가 되면 이를 보다 디테일하게 거론할 날이 올 것으로 본다.)

현장을 존재의 부조리함으로 이해할 경우, 여기에는 사회적으로 가난한 사람뿐만 아니라 심지어 부자라고 하더라도 말 못할 심한 부조리가 자리할 수 있다. 예컨대, 소위 말하는 돈 많은 부르주아들도 종종 비참한 죽음으로 내던져지는 심각한 억압과 압박에도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종교란 것은 기본적으로 이 모든 부분들을 기초 현장으로서 고찰될 수 있어야 한다. 내적 일그러짐은 존재의 가장 기초적인 피폐상태다.

종교의 탁월한 효과는 일그러져 있던 존재 고독에 대한 치유의 효과에서부터 서서히 외부로 발현되어 나가는 데에 있다. 그 효과를 경험한 자의 뒤바뀐 신념이란, 그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뒤바꿔놓기도 한다. 세계 안에 종교만큼 삶을 경이롭게 뒤흔들어놓는 영역도 없다. 이때 자각인은 적어도 그러한 내적 일그러짐 혹은 온갖 부조리의 영역을 제어할 수 있는 탁월한 기제를 지닌 자를 일컫는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그 기제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이다. 만일 우리의 운동이 기독운동이고자 한다면, 그것은 기본적으로 그 같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 전거로 삼지 않으면 기독운동이라고 보긴 힘들지 않을까 싶다(여기서 굳이 종교다원론 논쟁까지 꼭 얘기할 필요는 없을 듯~). 어떤 예수냐 어떤 성서냐 라는 내용상의 문제만큼은 별문제로 해둔다면, 알다시피 적어도 기독교 정체성은 예수와 성서에 뿌리박고 있다 는 점을 잊어선 안된다.

이때 우리는 그러한 보편적 현장을 염두에 두면서도 동시에 자신의 삶에 접근되는 <우선적인 현장>―혹은 나의 생활반경에서 일어나는 우선적인 고통과 아픔의 영역들―도 같이 볼 수 있어야 마땅할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은 자신에게 익숙해져 있는 시공간적 점유로 인한 특질들이 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전태일에겐 장애인이나 농민들보다도 노동자가 우선적인 1차적 현장일 것이다. 아이를 가르치는 교사에겐 아이들과 교육일선 현장이야말로 우선적인 현장일 것이다.그렇듯이 희귀병 환자들은 의료보험처리조차 되지 못하고 있는 희귀병 환자들의 고통과 그 아픔의 처지들을 가장 잘 알 것이다. 모든 현장의 보편성과 다양성 이해도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고찰될 수 있겠다.

누구나 삶의 현장을 지니고 있다고 했을 때, 우선적인 현장이란 것은 언제나 그 자신의 익숙한 시공간적 삶과 결부되어 있다고 하겠다. 이때 각자의 삶의 자리에 기초된 다양한 현장들은 언제나 전체 하나님 나라를 조망하면서 함께 일궈나가야 할 것이다. <양립 가능함>이란 것은 그 모두가 전체 하나님 나라로서 함께 묶여질 수 있고 조정되어질 수 있음을 일컫는다.

기독운동은 하나님 나라 운동이며, 그 모델은 예수


하나님 나라란 모든 존재의 목적들이 가장 이상적으로 조화롭게 조정된 나라다. 그 나라는 하나님께서 물리적인 현실 세계가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제안하는 가장 이상적인 그림이자 세계를 향한 신의 플랜이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 나라는 이미 오래전부터 하나님께서 계획하셨지만, 온전한 물리적 성취로는 아직 아닌 것이다. 이미(already)와 아직 아닌(not yet)의 사이, 그리스도인이 가지는 긴장은 바로 여기에 놓여 있다. 만일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라는 비전조차 없다면 우리 자신들은 여전히 존재의 과잉욕심에만 사로잡힌 보편적 일반인, 즉 중생에 속할 뿐이다.

또한 하나님 나라가 모든 존재의 목적들이 조화롭게 조정된 나라라고 할 경우, <악>devil이란 것은 그 존재의 목적들이 상호 충돌함으로써 빚어지는 사태 를 의미한다(이 충돌과 부조화에는 정신적 병이든 신체적 병이든 그러한 것들 모두 포함된다). 이때 어느 한 존재가 과잉욕심을 부린다면, 조화롭게 조정되어 있던 그 전체 그림은 연쇄적으로 다시 뒤엉클어질 것이다. 그 생명존재들의 목적들이 충돌하여 서로가 서로를 반목하게 되고 다투게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 세계를 사랑하셔서 끊임없이 그 나라로 가기위한 희망의 비전을 지속적으로 제시해주고 계신 것이다. 그 나라로 가기 위한 가장 강력한 지름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다. 예수는 곧 <걸어다니는 하나님 나라> 인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 운동가>다. 기존의 완악한 유대교 시스템을 포함하여 모든 불합리한 삶들에 대해 <하나님 나라>를 제시함으로 새로운 희망과 치유의 시대를 열었던 자다.

나는 기독교인이라면 모름지기 운동가여야 한다고 본다. 또한 기독교는 애초부터 운동적인 종교라고 본다. 운동이 상실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것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보기 힘들지 않을까 싶다. 왜냐하면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이야말로 바로 그러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물론 그 운동이란 존재의 치유운동이요, 해방운동이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로 의식화ㆍ조직화된 공동체

그렇다면 교회란 무엇인가? 교회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각인이 그 자신의 우선적인 삶의 현장에서 만나는 이들과 함께 예수를 주로서 섬기는 연대요 모임이다. 또한 목회란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각인이 그 자신의 우선적인 삶의 현장에서 만나는 이들을 온전한 자각인이 되도록 돕는 일을 말한다.

하나님 나라 운동은 내가 서 있는 삶의 시공간적 자리가 하나님 보시기에 좋지 않는 악한 세계일 땐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세상으로 바꾸는 것까지 모두 포함하는 노력들이다. 실제적인 목회현장이란 바로 그 지점에 있다. 따라서 목회는 목사만 하는 게 아니다. 목사란 그저 표상적 직무일 뿐 이지 그것 자체가 예수를 따르는 자각인임을 확증시켜 주는 것은 아니다. 장로, 권사, 집사 등등 다 마찬가지. 확증은 언제나 그 삶의 열매로서 그나마 얘기될 수 있을 뿐이다.

하나님 나라 운동은 하나님 나라로 만들려는 운동이기에, 따라서 그것은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혹자는 기독교인이 무슨 놈의 정치노릇이냐며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라고 따질는지도 모른다. 분명히 말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탈정치도 무정치도 아니다. 하나님 나라 운동은 매우 분명한 정치운동 이다.

기독운동은 세상에서 펼치는 하나님 나라를 위한 정치노릇이다. 그것은 세상의 모든 부조리들을 하나님의 뜻에 맞도록 온전하게 바로잡으려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등 전반적인 운동인 것이다. 그렇다면 신앙인이 정치노릇 못할 것도 또 무엇인가. 진정한 교회는, 언제나 현실 저 너머에 있으면서도 동시에 현실을 하나님 나라의 질서에 맞게끔 변혁을 추동하는 <하늘의 비전으로 의식화된 정치세력들>이라고 본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위한 의식화ㆍ조직화 운동체여야 한다. 또한 그 예배도 예전성과 운동성을 같이 겸비한 예배를 드림이 옳다고 본다(나는 이것을 <예수살기예배>라고 부르는데,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지는 어차피 앞으로 전환기의 기독교 연재 글에서도 답변될 것이다). 역사적으로 기독운동은 그 사회의 불합리성의 정도에 따라 그것은 사회운동으로도 드러나기도 했고, 종교분야에만 한정되는 종파운동으로도 드러나기도 했었다. 어둠이 짙을수록 빛은 더 밝아지듯 말이다.


   
▲ '무조건 믿어라'의 기독교가 갖는 신앙 시스템은 매우 쉽게 정복적이며 폭력적이다.

새롭고 건강한 기독교 형성 운동

오늘날의 기독운동은 기존 기독교를 새롭게 대체하는 <새로운 기독교> 운동일 때, 제 자리에서 제 일 제대로 찾는 운동이라고 본다. 지금까지의 한국 기독교는 대부분이 ‘무조건 믿어라’의 기독교다. 자율성을 거세하는 그러한 기독교는 이제 더 이상 온전한 설득력과 생명력을 지닐 수 없다.

최근 서구에선 기독교가 쇠퇴하고 불교가 날로 증가하는 이유 가운데에 자율성의 존중을 꼽은 바 있다. 보수 근본주의 기독교는 자율성을 너무나 분명하게도 말살한다. 이러한 행태들이 『예수는 신화다』를 절판시킨다거나 <다빈치 코드 사태>를 낳기도 하는 것이다. 아예 사지도 보지도 말라는 거다.

게다가 그 같은 ‘무조건 믿어라’의 기독교는 오히려 역사적으로는 지배이데올로기와 친화적이었다. 이때 서구로부터 전해 받은 그러한 기독교에 반대하여 한국의 기존 민중신학은 자기정체성을 <반서구신학>으로 자처한 바 있다. 3세대 민중신학자인 김진호 목사는 이를 <반신학>으로 명시화하기도 했었다. 사실 1세대 민중신학에도 어느 정도 탈중심주의 혹은 중심부를 해체하려는 해체주의적 성향이 녹아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성격들을 기독운동의 핵심으로 삼는 것은 한때 반짝할 뿐 결국 오래가지 못할 것으로 본다.

근대성에 대한 공격들은 이젠 정말 진부하리만큼 나이브하게 여겨질 때도 되지 않았나. 물론 이는 근대성의 폐해들이 완전히 치유되었다고 본다는 얘기가 아니라, 탈근대가 근대성에 대한 비판을 자꾸만 과잉하게 우려먹는 것이야말로 근대성과 탈근대성의 암묵적인 공생관계만 예증할 뿐이라는 얘기다. 제발이지 대안 자체가 폭력이라고 보거나 대안은 없다고 보는 비판의 공허성과 허무성을 뒤늦게 알아차리진 않길 바란다.

이제 기존 기독교로서는 더 이상 아니다. 그렇다고 기존 기독교에 대해 비판이나 반대 혹은 해체로서만 까댈 수도 없다. 나는 기존 기독교를 비판하고 반대하더라도 대안 없는 무책임한 비판이나 반대(해체)는 결코 원치 않는다. 책임 있는 답변이란 것은 적어도 일말의 대안의 그림이라도 가지고 비판하는 것일 게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나 자신이 제시하는 <새롭고 건강한 기독교>만이 유일한 대안이라고도 결코 생각지 않는다. 실험적 대안들은 얼마든지 나올수록 더욱 좋다. 다양한 시도들과 실험들은 마구 쏟아낼 수 있어야 한다.

다양성이란 좋은 것이다. 적어도 다양성들 간에 서로 충돌 없이 정합적인 양립 가능함을 유지한다면 말이다. <다양성>과 <충돌성>에 대한 고려는 언제나 정합적인 관계 통합으로 가는―혹은 그 밸런스를 유지하는― 중요한 두 요인이다 (다양성의 정치를 설파하는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은 다양성들끼리의 충돌성이라는 요인은 별로 고려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저마다 상이하게 다른 입장과 입장의 충돌은 그 자신에게도 새로운 성장의 기회이다. 따라서 구체적이고 정합적인 근거에 기반한다면야 나 자신이 제시하는 대안론이란 것도 언제든지 열어놓고 있음을 분명하게 말씀드린다. 진리는 그 어떤 금지에 대한 두려움 없이 오히려 모험을 즐길 따름이다.

새롭고 건강한 기독교 운동은 기존 기독교에 대해 반대만 하는 운동이어선 곤란하고, 기존 기독교의 기초 토대부터 다시 점검하고 다시 세우는 대안 기독교 운동으로 나아갈 때 보다 바람직할 것으로 본다. 물론 여기에는 당연히 기존 전통의 교리들까지도 포함해서 검토되어야 마땅하다. 그럼으로써 새롭고 건강한 기독교 운동은 언제나 솔직하고 건강한 합리성에 기반하고자 힘쓰면서 동시에 오류와 비극에는 언제나 겸허한 기독교를 형성하고자 하는 운동을 의미한다.

교권과 교리논쟁

흔히 기독운동가 중에는 교회권력(교권)과 교리논쟁을 별개로 보면서 교권문제가 더 중요하기에 교리논쟁 부분을 경시하거나 지리한 것으로만 보는 사람이 있다. 내가 아는 활동가 목사님들 가운데도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꽤 있다. 하지만 이것은 별로 온당치 못한 시각이다. 왜냐하면 그 같은 교리논쟁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교회권력을 정당화하는 근거나 명분으로서도 작동되고 있기 때문이다.
 
   
▲  '힘의 과잉'을 숭배하고 쫓는 사회적 행태는 기존 교리 전통을 무조건 믿어야만 한다고 보는 자들에게서도 쉽게 발견된다.
교리는 저들의 신념 체계가 공식화되어 굳어져 온 것들이다. 물론 거기에는 유용한 것도 있고, 반면에 폐해가 되는 것들도 있다. 따라서 기독교 전통은 교리를 포함하여 전면적으로 그 뿌리부터 다시 재검토 재수립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교리의 정립 문제만큼은 가능하면 거의 간소하게만 공식화해두는 것이 훨씬 낫다고 본다.
 
개인적으로 나는 <뉴스앤조이>나 <교회개혁실천연대> 같은 개혁적인 복음주의 진영에 대해서도 분명한 한계가 있다고 보는 이유는 저들이 아무리 교회비리를 고발하고 교회제도 개혁 혹은 정치 사회 개혁을 외친다고 하더라도 도대체 핵심적인 교리 문제를 언급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썩은 부패의 심장부를 정곡으로 찌르진 않고 그저 그 언저리만 콕콕 찌르는 것에 지나지 않다고 보기 때문이다.
 
혹자의 말대로 이를 전략상의 과정으로 보기엔 현재 너무 지나치게 그런 쪽은 도외시되고 있잖은가. <성서한국>이 성서무오설을 신봉하면서 기독인의 정치 사회적 책임을 말한다? 제발 그 성서부터나 제대로 보라고 얘기해주고 싶다. 행여 <성서한국> 자체를 현장으로 대하는 자각인들이 있다면 그들에겐 미안한 얘기겠지만. 그래도 교리 문제는 어차피 넘어서야 할 산이고 적어도 한 번 이상은 정직하게 뚫고 거쳐가야 할 벽인 것이다.
 
예수는 바리새인들과 논쟁할 때 저들의 권력숭배 행태만 비판한 것은 아니었다. 이들의 인식을 지배하고 있는 잘못된 성서이해와 당연한 것으로 믿고 있었던 하나님 이해에 대해서도 신랄하게 비판하지 않았던가. 그것은 저들이 믿고 있던 불합리한 그 신념 체계에 대한 비판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기존 보수 기독교 교리의 부조리함을 제대로 내다보는 사람이라면 그 같은 자들이 지닌 부당한 교회권력 시스템이란 것도 연관하여 한 눈에 훤하게 들어옴은 말할 나위 없다.
 
교리 논쟁이 지리한 것이라고 말하지 말라. 사실 이천 년 동안 기독교는 잘못된 세계관에 기초되어 왔었고, 교리도 대체로 이원론적 기반에서 형성되어 온 것들이다. 그동안 기독교는 제대로 된 해석학적 세계관에 기초되면서 근원적으로 새롭게 확립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기껏해야 다시 성경으로 혹은 예수로 돌아가자는 얘기만 있었을 뿐. 그것은 결코 대안을 제시한 것조차도 못되고 그저 시험지가 다시 있으니까 다시 풀어보자는 식에 지나지 않을 뿐이었다.
 
소위 말하는 16세기 종교개혁이란 것도 이전의 잘못된 기초 세계관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다는 점에서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개혁도 못된다는 얘기다. 나는 그래서 처음부터 전방위적으로 다시금 우리네 기독교가 세워지고 확립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새로운 기독교> 운동은 이전의 기존 기독교에 대해 새로운 틀로 짜는, 이른바 <새판짜기> 운동이다.
 
내 삶의 온갖 불합리한 것들과의 투쟁
 
기존 기독교는 그 옛날의 예루살렘 성전체제처럼 머잖아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는 날이 올 것으로 본다. 서서히 소멸의 때가 점점 오고 있는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빠르면 2-30년 내에 새로운 기독교 운동은 전세계에서 보다 가시적으로 나타날 수 있다고 보여지는데, 물론 미국의 부시같은 자들이 자꾸 집권한다면야 좀더 더딜지는 몰라도. 그러나 내가 볼 때 도도하게 전환되고 있는 문명의 새로운 이 흐름 자체를 거스를 순 없을 걸로 보인다.
 
지금 유럽은 물론이거니와 기독교 국가라는 미국과 캐나다에서조차 기독교인이 빠른 속도로 감소하고 있다고 한다. 내가 보기엔 유럽의 교회들이 문을 닫았다는 것도 어떤 면에선 기존 보수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것보다는 적어도 낫다고 보는 성숙한 징조라고 본다. ‘무조건 믿어라’의 불합리한 기독교는 이제 더 이상 쪽도 쓰지 못하는 처지가 되어있는 것이다. 기존 기독교는 ‘힘의 과잉’에 대한 숭배를 정당화하는 신앙시스템이다. 도대체 이것이 어찌 합리적일 수 있겠는가.
 
그것은 분명한 불합리한 시스템에 해당한다. 종교의 성숙은 건강한 합리성의 성취와 무관하지 않다. 합리성은 신성(神性)의 것이다. 합리성이란 애초 인간에게 속한 것이 못된다. 인간에게 속한 것은 오히려 불합리성이다. 온갖 오류와 비극에 대한 성찰 없이 합리성을 성취할 순 없다. 합리성의 부분적 성취야말로 이 땅에서 그나마 발견되고 있는 신성(神性)의 성취이자 현현인 것이다.
 
그렇기에 사실 합리주의와 신비주의는 동전의 양면처럼 신성의 양측면일 뿐이다. 그나마 우리가 성취할 수 있고 발견할 수 있는 합리주의란 다른 말로 하면 이 땅에 <노출된 신비주의>이며, 우리 인식의 한계를 넘어서 있는 신비주의란 다른 말로 하면 아직 우리가 성취하지 못한 <미지의 합리주의>인 것이다. 종교와 과학이 궁극적으로는 충돌되지 않는 이유 역시 바로 여기에 있다.
 
고로 싸워야 할 것은 <모든 불합리한 것들>이다. 그 불합리함은 내 안에도 있고 세계에도 있다. 이 세계 자체가 <내 몸의 몸>임을 생각한다면 우리 사회의 모든 사건들이 결코 나와 무관할 수도 없는 현실이다. 나의 불합리한 성격과 습관들, 불합리한 사고와 생활방식들, 불합리한 생활공동체(가정과 직장)의 관행들, 불합리한 우리 사회와 세계의 시스템들 등등 모든 것들이 싸워서 이겨내야 할 투쟁의 대상들이다. 이 모든 것들은 결국 <불합리한 삶>으로서 집약될 수 있겠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삶의 현장을 끼고서 살아간다. 기독운동은 내 삶의 현장에서 전방위적으로 온갖 불합리성을 극복하는 운동이어야 한다. 내가 언제 어디에 놓여 있든 간에, 언제나 합리적인 삶을 추구하고자 하는 것이다. 기독교인에게 이것은 결코 추상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그 합리성의 구체적 현현이 바로 예수였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 운동이란 합리주의의 모험이다. 
 
현재 보수교회를 현장으로 끼고 있는 자각인들에게
 
또한 이미 보수교회를 다니고 있는 자각인들도 없잖아 있을 것으로 본다. 나는 오히려 그러한 보수교회를 하나님께서 그 자신에게 맡겨놓은 현장으로 알고서 오히려 이를 적극적으로 변화시켜 나가길 바라는 바이다. 아주 확고한 신념에 찬 자각인이라면, 흡사 7, 80년대에 노조 결성을 위해 공장에 위장취업 하듯이 하나님 나라 운동을 위해 어떤 면에서 보수교회에 위장신자로 들어가는 미션도 있을 수 있다 고 본다.
 
하지만 이것은 어떤 면에서 평택이나 FTA 문제를 제기하는 것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그 이상으로도 목숨까지 내어놓아야만 할 <위험천만한 미션>이기도 하다. 생각해보라. 일명 광신자들이 뭔 짓을 저지를 진 모르잖은가. 예수의 죽음에는 기존의 유대교 체제를 굳건하게 하려했던 유대교 광신자들도 분명하게 관여하잖은가.
 
 
   
▲ 이미 보수교회를 생활현장으로 가지고 있는 자각인이라면, 이 시대에도 여전히 매우 위험스런 미션을 수행하는 것이겠지만 그래도 가장 효과적인 기독운동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렇기에 어쩌면 한편으로는 먼저 자각인들끼리의 연대망도 그 기반으로서 충분히 마련될 필요도 있다고 본다. 정작 기존 보수교회 현장에서 총알이 떨어질 때 공급받는 곳도 있어야 하잖은가. 물론 아직 그렇게 하기에는 한국교회 상황이 많이 열악하다. 현재 기존의 진보 진영도 그러한 형편에 있진 못하다.

나 자신의 새로운 기독교 운동이란 것도 이제 겨우 시작이라 현재 새로운 총알―혹은 어느 분의 표현대로 '불'―을 만들기에도 여념이 없을 지경이다. 물론 그 총알이란 새로운 기독교를 위한 <조직신학적 성경공부 교재>이다(여기에 대해선 전환기의 시리즈 19번째 글 참조). 이른바 학습교재일 것이다.
 
의식화ㆍ조직화라는 표현은 한때 좌파 운동 진영에서도 유행한 말이기도 한데, 작금의 보다 전문화된 새로운 기독교 운동을 위해선 더욱 가열찬 의식화ㆍ조직화 운동으로 나가도 좋다고 본다. 그러나 의식화ㆍ조직화란 표현만으로는 웬지 부족하고 무미건조한 느낌이 있다. 즉, 결국엔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물론 이런 얘긴 매우 진부한 얘기일 수 있겠지만, 어쨌든 한 치 앞도 못보는 어리석은 인간들을 그나마 아름다움으로서 낙관하도록 지탱해주었던 인류 최고의 학설이 바로 사랑이다. 기독운동은 존재의 모든 관계 자체를 결국은 사랑의 관계로 만드는 <사랑화 운동>이다. 그리하여 이제는 나의 신체에서, 나의 일상에서, 나의 생활반경에서, 내가 속한 사회의 여기저기에서 민들레처럼 피어나는 새로운 기독교를 위한 물결과 몸짓이 있어야 할 것이다.
 
기존 기독교가 문을 닫고 새롭고 건강한 기독교의 서막이 열리는 그 날, 진정 하늘이 열릴 것이리라~!
  
 


게시물수 180건 / 코멘트수 490건 RSS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왜 예수인가 (필독 원함!) (13) 미선 1538 11-04
GIO명상 방법 12단계 (몸기독교가 제안하는 수행 방법 중 하나..) (5) 미선 554 01-16
교회에 대한 권력비판? 교리비판? 어느 것이 더 유효할까? (4) 미선 452 12-06
종교운동과 사회운동을 구분 못하는 오류-기존 진보 기독교 비판 (1) (2) 미선이 525 10-14
몸학과 새로운 기독교 운동 그리고 30년 후의 기독교 미선이 529 04-11
기존 진보 기독교인들의 <생명평화> 담론에 반대한다! (업그레이드판) (8) 미선이 625 02-17
성서문자주의 또는 성서무오설 신앙보다 더 뿌리 깊은 고질병은? (9) 미선이 798 02-02
과정신학에 대한 비판과 민중신학의 신 이해 접맥 미선이 595 01-13
[예수운동 예배 견본] 새로운 기독교의 <예수운동 예배>를 위하여 미선이 849 11-28
<새로운 기독교>를 소개하는 전체 안내 링크글 (계속 업데이트 예정) 관리자 2200 11-03
내가 지금 믿고 있는 것은 과연 진리인가 정강길 4172 04-27
"어차피 이러한 기독교로 바뀌게 된다!" (모든 분들에게 고함) (17) 정강길 2767 02-18
새로운 기독교를 위한 조직신학적 성경공부 (신론) (2) 관리자 5451 05-28
새롭고 건강한 21세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위한 신앙선언서 (26) 관리자 4644 05-23
180 21세기 종교 진화의 방향, 몰락이냐? 도약이냐? 미선 383 06-16
179 "함께 만들어가는 종교와 진리" (2) 미선 422 06-10
178 기독교에서 얘기하는 병치유 귀신쫓음을 어떻게 볼 것인가? (1) 미선 451 06-10
177 몸에 모시는 하나님 (탈유무신론의 신앙) 미선 365 06-09
176 초자연주의>에서 <자연주의>로 가야 기독교가 산다! 미선 397 06-07
175 과학의 진화론에 대한 기독교의 창조론 입장들 미선 394 05-30
174 신학이 아닌 몸학에 기반하는 <몸학 기독교>로! 미선 375 02-10
173 신의 영어 표기 God ----> Gio 로 바뀌어야 미선 350 02-07
172 약자에 대한 눈뜸 - 잠자와 깬자의 차이 미선 389 12-08
171 <초자연주의>를 인정하면 나타나는 문제들.. 미선 305 11-04
170 [어떤 진리관] 진리(眞理)와 진리(進步)의 차이 그리고 퇴리(退理) 미선 276 07-05
169 시작이 있는 우주인가? 시작도 끝도 없는 우주인가? 미선 279 06-18
168 <종교 위의 종교>에 대해.. 미선 288 05-04
167 초자연주의와 자연과학 그리고 신비주의 구분 미선 292 04-06
166 지적설계론(창조론)자들과 유물론적 과학자들 간의 공통점 미선 276 12-10
165 종교 신앙의 반지성에 대한 단기적 대안 (1) 미선 283 11-24
164 "몰락이냐 도약이냐" 21세기 종교 진화의 방향 (종교학회 발표) 미선 269 09-10
163 '나(I)는 누구인가?'라는 근원적인 물음에 답하려면.. (1) 미선 303 04-13
162 유신론-무신론을 넘어서 <탈신론>으로 미선 447 05-04
161 <초자연주의>를 버려야 기독교가 산다! 미선 402 02-04
160 몸학 기독교 & 몸학 사회주의 추구 미선 319 12-31
159 <자유>에 대한 짧은 생각.. (2) 미선 383 08-24
158 몸학 기독교에선 기독교 신학이 굳이 필요하지 않은 이유 미선 442 03-24
157 인간 무의식의 두 가지 상태와 보다 상향적인 의식 발달을 위하여 미선 364 03-03
156 (1998년 원글) "화이트헤드 철학에서 본 민중신학 비판과 대안적 모색" (2) 미선 320 02-18
155 종교(宗敎, Religion)에 대한 동서양의 어원적 의미와 전후 혼동 오류 미선 318 02-06
154 기존 기독교와 <몸 기독교>의 분명한 차이들 미선 347 01-21
153 GIO명상 방법 12단계 (몸기독교가 제안하는 수행 방법 중 하나..) (5) 미선 554 01-16
152 2013년 계획.. 몸 기독교 (4) 미선 457 01-02
151 민중신학 40년.. (20년전 안병무 기사를 보며..) 미선 288 12-25
150 진보정치 교육의 사각지대와 민중 역사 주체론에 대한 반성과 재고찰 미선 275 12-22
149 교회에 대한 권력비판? 교리비판? 어느 것이 더 유효할까? (4) 미선 452 12-06
148 왜 예수인가 (필독 원함!) (13) 미선 1538 11-04
147 새로운 기독교의 방향과 몸학의 종교관 (2) 미선 314 10-05
146 새로운 기독교의 방향과 몸학의 종교관 (1) 미선 342 08-17
145 기독교 교리의 문제는 기독교만의 문제가 아니다! (3) 미선 402 06-11
144 초대교회와 바울에 대해... 미선 447 04-28
143 '작은 교회'가 정말 대안인가? 핵심은 교리다! 미선 375 04-22
142 진선미의 기원과 예수사건 (1) 미선이 353 02-24
141 중간 복음주의 신학자 알리스터 맥그리스의 <과학신학> 비판 (13) 미선이 362 12-13
140 끔찍한 <몸의 신학>에 속지 마시길! (유사품 주의) (8) 미선이 422 11-15
139 종교운동과 사회운동을 구분 못하는 오류-기존 진보 기독교 비판 (1) (2) 미선이 525 10-14
138 여전히 예수얼굴에 똥칠하는 개신교 정치세력들 (5) 미선이 410 08-30
137 새로운 기독교 역사의 국내 선구자들 : 유영모, 함석헌, 김재준 미선이 382 06-26
136 조용기 목사의 할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미선이 401 05-14
135 몸학과 새로운 기독교 운동 그리고 30년 후의 기독교 미선이 529 04-11
134 <인간의 자유의지>라는 착각과 환상에 관한 문제 (14) 미선이 692 03-04
133 기존 진보 기독교인들의 <생명평화> 담론에 반대한다! (업그레이드판) (8) 미선이 625 02-17
132 기존 진보 기독교계의 ‘생명평화' 담론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미선이 286 02-10
131 영혼구원의 강조에서 <총체적인 생명구원의 강조>로 (4) 미선이 338 02-05
130 성서문자주의 또는 성서무오설 신앙보다 더 뿌리 깊은 고질병은? (9) 미선이 798 02-02
129 죄의식의 종교에서 <이웃과 함께 성찰하는 종교>로 미선이 337 02-01
128 수직적 구조의 교회에서 <수평적 구조의 교회>로 (2) 미선이 429 01-21
127 서구식 목회문화가 아닌 <우리식 목회문화>로 미선이 375 01-21
126 과정신학에 대한 비판과 민중신학의 신 이해 접맥 미선이 595 01-13
125 ★ 예언 (1) 미선이 675 12-24
124 ♣ 새로운 기독교 신학의 인간론 (4) 미선이 499 12-19
123 ♣ 새로운 기독교 신학의 인간론 (3) (4) 미선이 593 12-12
122 ♣ 새로운 기독교 신학의 인간론 (2) (10) 미선이 793 12-05
121 새로운 기독교의 시간관, 태초와 종말로서의 시간관을 거부한다! (4) 미선이 644 12-01
120 ♣ 새로운 기독교 신학의 인간론 (1) 미선이 788 11-30
119 [예수운동 예배 견본] 새로운 기독교의 <예수운동 예배>를 위하여 미선이 849 11-28
118 숭배하는 예배에서 <닮으려는 예배>로 (1) 미선이 784 11-19
117 거꾸로 흘렀던 감리교 역사, 바로 세우기엔 아직 멀었나 미선이 673 11-10
116 <새로운 기독교>를 소개하는 전체 안내 링크글 (계속 업데이트 예정) 관리자 2200 11-03
115 [논평] 봉은사 땅밟기 추태, 성경 '문자주의' 그 야만의 역사 넘어서야 (1) 관리자 832 10-29
114 기존의 진보 기독교와 새로운 기독교 운동 (1) 미선이 665 10-22
113 1세대 민중신학자 안병무의 미완의 작업과 기존 민중신학의 과제 미선이 646 10-19
112 [새기운 성명] 4대강 사업 관련, 문정현 신부의 정진석 추기경 비판을 지지한다 관리자 620 10-19
111 스퐁, "스티븐 호킹과 유신론/인격신의 죽음" (작은불꽃님 역) 관리자 898 10-11
 1  2  3  



Institute for Transformation of World and Christiani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