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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그것은 과연 <종교개혁>이었나?    
  글쓴이 : 정강길 날 짜 : 06-06-09 08:42 조회(3806)
   트랙백 주소 : http://freeview.org/bbs/tb.php/b001/9 




혹시 이미 읽어보신 분도 없잖아 있을진 모르겠는데, 예전에 감리교 토론방에 올린 글이기도 합니다.. 소위 말해지는 루터를 비롯한 16세기 종교개혁 사건을 전혀 다르게 봄으로써 현재 앞으로 나아갈 기독교 변혁의 방향성을 얘기하고 있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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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것은 과연 <종교개혁>이었는가?
- '종교개혁'인가? '종교분파' 사건인가? 
 
 
 
들어가며
 
나는 오늘날 교회개혁을 말하는 사람들에게 얘기하고 싶다. 우리가 세계사를 통해서도 잘 아는 16세기에 일어났던 종교개혁 사건은 정말로 <종교개혁>이었을까? 솔직히 나 자신은 우리가 아는 16세기 발생한 종교개혁 사건을 두고서 이를 ‘종교개혁’이라고 불리어지는 것 자체부터 강한 의구심을 지녀왔었다. 그렇기에 나는 여기서 현재의 기존 기독교를 새롭게 변혁하고자 하는 새로운 기독교 운동이 16세기 종교개혁을 모델로 해서는 매우 곤란하며,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는 점을 말해두고자 한다.
 
몸말 : 루터와 뮌처를 중심으로
 
<종교개혁>이란 사실상 종교개혁이 아니라 그것은 개신교가 태동된 <종교분파> 사건에 불과한 것이 아닐는지. 즉, 종교개혁이란 이름은 르네상스 이후 근대 권력을 잡은 상공계층의 시민 권력들(당연히 이들은 신교가 많다)이 실은 개신교 태동의 사건에 대해 그들 자신이 부여한 이름일 여지가 많다고 본다. 이미 그 당시 중세시대 말부터 독일은 도시의 상공계층이 매우 발달되어 있었고 도시 자체도―특히 북부지방은 더욱― 어느 정도 자유롭게 자치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200년 간 지속되었던 중세 말의 십자군 전쟁의 실패는 이를 매우 가속화했던 점이 있었다.
 
이러한 정황에서 교회의 정치권력에서 자유롭고자 했던 제후들과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루터의 종교개혁은 진정한 의미로서 교회를 회복시켰고 변화시켰던가에 대해 강한 의구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고 하겠다. 솔직히 루터의 칭의론은 사회적 행위는 없고 믿음만 있어도 된다는 신앙의 역병폐를 낳기도 했었다. 행위로 인정받는다는 것은 열매로 보고서 판단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의미할 뿐이다. 그런데 이것이 꼭 <공로주의>로만 귀결되는 것은 결코 아닐 게다. 대가를 바라지 않는 선행도 분명하게 존재하잖은가.
 
온전한 믿음과 온전한 행실은 동전의 양면인 것이다. 다시 말해, 루터의 칭의론 자체 역시 근본적 한계와 오류를 가졌다는 얘기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두 왕국설>을 말했었지 거기에 이 땅에서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찾아보기 힘들고 여전히 이원론적 병폐와 한계를 노출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교회는 루터를 따르겠다는 교회들 많으며, 이들 역시 “오직 믿음으로만”이라고 부르짖는다. 하지만 이들 대부분의 신앙은 개인의 내면적인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 실정이다. 즉, 크게 보면 루터 역시 관념론자의 젖줄에 닿아 있을 뿐이다.
 
사실상 루터가 개혁했다고 보는 지점은 기존 교회권력의 과잉한 타락에 대한 일말의 저지선 같은 거였는데, 이것이 당시 교회 권력과 귀족 계층과의 충돌과 맞물리면서 결국은 루터 자신도 비대해진 권력을 자기 쪽으로 몰아오기 위한 신앙적 합리화로서 성서를 말한 것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의 칭의론은 오늘날의 한국교회에 무던히도 잘 수용되고 있다지만 한국교회의 개혁은 여전히 요원한 것으로 남아있는 이 끔찍한 현실은 무엇을 반증해주고 있는지 생각해 볼 일이잖은가.
 
한국교회는 "오직 믿음으로만", "오직 성서로만" 부르짖지만 이들의 신앙은 개인주의적이면서도 사회정의와는 다소 동떨어진 행태를 보이고 있으며, 오히려 더 극우적이고 보수적인 행태로 드러나고 있을 뿐이다. 내가 보기에 마르틴 루터와 토마스 뮌처가 서로를 비난한 방향으로 나간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고 보는데ㅡ 루터의 칭의론은 결코 뮌처의 신앙으로 나아갈 수도 없는 것이었다. 
 
반대로 당시 농민들과 함께 했던 뮌처는 진보 기독교인들에게는 루터보다 훨씬 더 매력적이고 자주 오르내리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는 뮌처신학이 가진 한계도 분명하게 짚을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내가 볼 때, 뮌처의 한계는 성령이라는 이름에 의해 정당화되는 개인의 주관적 성경해석에 있다고 본다. 즉, 이를 성령의 감화로 보는 근거 역시 매우 주관적인 것이다.
 
만일 뮌처의 말대로 개인의 주관적 경험으로서의 신앙이 성경 해석의 핵심적 열쇠라고 한다면, 농민이 아닌 제후의 성경해석이 서로 간에 배치될 경우에는 어떤 기준으로서 누구의 성경해석을 지지할 것인가의 문제는 여전히 남게 되지 않은가. 실상은 뮌처의 성경해석이 아니라 진짜는 뮌처가 처한 상황적 자리가 그러한 성경해석을 정당화해주고 있진 않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어떤 면에서 뮌처의 신앙은 처한 상황적 맥락에 따라 매우 급진적인 <계급적 해체주의> 측면도 없잖아 있다. 그래서인지 기존의 민중신학도 당연히 루터가 아닌 뮌처 쪽에 좀더 우호적인 입장을 갖고 있다. 즉, 계급적 이해관계와 해체적 측면에서 볼 때 그러하다는 얘기다. 하지만 뮌처가 말하는 성경해석의 기준이 되는 그 성령은 여전히 해명되고 해석되어야 될 오리무중의 것으로 남아 있잖은가.
 
애초부터 루터와 뮌처는 아예 근본적으로 조화되기 힘든 독자적 노선들이었다. 그런데도 이를 조화롭게 본다는 입장 자체가 어불성설이 아닐는지. 다시 말해, 양자를 서로 보완하며 서로 변증법적으로 조화롭게 봐야 한다는 그러한 주장들(김주한) 역시 그저 물과 기름의 조합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다. 루터와 뮌처를 보완적으로 조화시켜 보아야한다는 주장은 일관된 관점에서의 통일적 조화가 아니라 그저 조화되기 힘든 것들의 공존적 짬뽕이요, 모순된 개념들의 혼재적 조합일 따름이다.
 
종교개혁자들의 모토는 “오직 성서만” 즉, <성서지상주의>였다. 하지만 이것은 그저 문제를 원점으로 돌려놓은 것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그 성서는 여전히 온전하게 해석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은 정말 종교를 개혁시켰는가? 물론 일정 부분의 갱신은 있었다고 본다. 당시 카톨릭 교회체제가 워낙 극심한 타락적 행태를 보여줬으니까! 하지만 거기에도 여전히 이 땅에서의 하나님 나라 운동이 온전하게 구현되고 있진 않다는 점에서 16세기 종교개혁은 가장 큰 치명적 한계를 가진다.
 
그런 점에서 루터가 농민이 아닌 독일 군주와 제후들의 편을 들게 된 것도 짐작할 만하다. 그는 많은 농민들을 죽이는데 여지없이 앞장섰던 자다. "나, 마르틴 루터는 반란 동안에 농민을 모두 전멸시킨 셈인바, 그 이유는 농민들을 죽음에 부치도록 명령한 사람은 바로 나였기 때문이다. 그들의 모든 피가 내 머리 위에 있다. 그러나 나는 그 모든 것을 우리 주 하나님께 전가시키는 바이다. 왜냐하면 당신이 내게 그렇게 말하라고 명하신 까닭이다."(티쉬레덴; 에르랑거 Ed., Vol.59 p.284)
 
사람을 죽이는 일에 있어선 기독교를 강요했던 칼빈도 만만치 않다(『미래에서 온 기독교』pp.100-102). 루터나 칼빈을 비롯하여 소위 신앙적으로 추앙받는다는 종교개혁가들은 끔찍한 살인마저도 종교적으로 정당화하면서 사람들을 죽이는 만행들을 저지르곤 했던 것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적어도 저들은 존경을 받을만큼의 위인은 전혀 못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신교에선 여전히 지고한 추앙들을 받고 있는 실정이며, 그럼으로써 이들 신학의 한계와 그 잘못된 만행들은 곧잘 묻혀지고 있는 현실인 것이다.
 
사실상 16세기 종교개혁은 하나님 나라 운동이 계승되었다기보다 계승된 것은 낡은 기독교가 자행하던 헤게모니를 둘러싼 권력쟁탈전이었으며, 그러한 가운데 당시 르네상스의 무드를 타고 일정부분의 갱신이 있었던 것뿐이었다. 한신대 류장현 교수의 따르면, 종교개혁의 한계는 교회를 개혁한다고 하지만 실상은 교회의 잘못된 전통들―예컨대, 니케아 신조(325년)나 칼케돈 신조(451년)에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고백이 빠져있다―을 여전히 이어받고 있기에 16세기의 종교개혁은 태생적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으며, 라가츠의 표현대로 그것은 “종교개혁의 타락”이라고 보고 있다.
 
내가 볼 때, 한국교회의 진정한 변혁과 이천 년 서구 기독교의 한계를 진정으로 변혁시키고자 한다면 그러한 사건조차 종교개혁이라고 불러선 안된다고 본다. 그것은 <종교분파> 사건 정도에 더 가깝다. 우리가 은연중에 이를 <종교개혁>이라고 이름 붙임으로서 오히려 역설적으로 기독교에 대한 모든 개혁의 이름들은 그 옛날의 종교개혁의 이름으로 비교 검증을 받는 치명적 한계를 드러내고 있진 않는지 곰곰이 생각해 볼 일이다. 즉, 그 옛날의 종교개혁의 범주적 한계를 넘어서긴 힘들지 않냐는 것이다.
 
나오며
 
그렇기에 나 개인적인 입장으로서는 철저히 <종교개혁>이라는 명칭 자체도 반대하며 거부하는 바임을 분명하게 말해두고자 한다. 먼 훗날 기독교가 진정으로 환골탈퇴하여 거듭난 그 시점이면 이 사건은 점차 다른 이름으로 평가될 여지가 여전히 그리고 충분히 잔존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역사는 사실상 온갖 시행착오들의 역사이며, 달리 고쳐 써야 할 부분들은 여전히 매우 많다고 본다. 그리하여 언젠가는 현재의 기독교를 포함한 신학들이 진정한 변혁을 성취하게 될 경우, 그 옛날의 종교개혁은 그 실체적 한계를 명징하게 드러낼 수밖에 없다고 생각되는 바이다. 
 
나는 분명히 말하고 싶다. 우리의 종교개혁은 16세기가 아닌 본래의 <역사적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에 두어야 할 것이라고. 이러한 차원에서 앞으로 기독론도 <'인물' 중심이 아닌 '사건' 중심으로> 기술되어야 옳다고 본다. 즉, 역사적 예수란 그 어떤 <사건>의 이름이라는 얘기다. 그 사건이 곧 예수가 손가락으로도 가리켰던 <하나님 나라 운동>이다. 
 
16세기 종교개혁은 이전의 기독교 전통들을 전면적으로 다시 재구성하거나 절연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과거의 기독교 전통들을 계승하는 측면이 훨씬 더 많았었다. 니케아 신조에 해당하는 사도신경 안에 무슨 하나님 나라 운동이 있는가. 그것은 오늘날의 힘 있는 21세기 신앙고백으로 다시 대체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의 기존 기독교 변혁운동도 16세기 종교개혁을 모델로 할 경우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고, 한국교회 개혁은 언제나 역사적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에 두어야 마땅할 것으로 본다.
 
  
 
주희 (13-07-16 14:05)
 
<나오며>

 환골탈태(換骨奪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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