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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세계화 시대, 남미해방신학의 유산 (장윤재)    
  글쓴이 : 정강길 날 짜 : 07-01-07 03:30 조회(1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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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 시대, 남미해방신학의 유산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들어가는 말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붕괴한 지 17년이 흘렀다. 그 날 사람들은 사회주의가 죽었으니 이제 해방신학도 함께 몰락할 것이라 예견했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 이른바 ‘자본주의 승리의 시대'에 인류는 더욱 극심한 부의 편중과 가난의 확산 그리고 생태계의 파괴를 경험하고 있다. 과연 몰트만이 “자본주의에 대한 첫 신학적 대안”1) 이라고 말한 남미의 해방신학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여전히 유효한가? 필자는 이 글에서 1960년대 후반 남미에서 시작하여 전 세계적으로 커다란 영향력을 미쳤으나 1989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 이후 ‘대중성’을 상실한 남미 해방신학의 기원과 배경과 핵심적 메시지를 되돌아보고 그것의 현재적 의미를 고찰할 것이다. 필자는 이 글에서 남미 해방신학이 “기독교를 마르크시즘의 하나로 변화시키려는 의도”에 불과하다는 우파적 편견도,2) 혹은 그것이 이 세계의 혁명적 변화를 위한 실천적 이론이라는 좌파적 환상도 모두 거부하고, 주요 남미 해방신학자들의 저술 속에 나타난 그들의 신학적 질문과 깊은 고뇌와 신앙적 고백을 성찰할 것이다. 그리고 필자는 남미 해방신학의 핵심은 ‘사회주의에 대한 정치적 선택’(political option for socialism)이 아니라 ‘가난한 자들에 대한 신학적 선택’(theological option for the poor)이기 때문에 오늘날 가난한 자들의 고난이 전 지구적으로 확산·심화되고 있는 신자유주의 경제 세계화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유산임을 주장하게 될 것이다.
 

1. 해방신학의 ‘해방’
 
해방신학의 기원은 대단히 ‘목회적’이며 동시에 ‘신학적’인 다음의 한 질문이다. “사랑이 거절된 상황 속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신다고 말할 수 있는가?”3) 그런데 왜 남미의 신학자들은 자신들의 신학을 ‘사랑’의 신학이라 부르지 않고 굳이 ‘해방’의 신학이라 이름 지었는가?

남미의 해방신학은 1950-60년대 남미라고 하는 독특한 상황에서 탄생하였다. 구티에레즈의 증언대로, 1950년대의 남미는 “자족적 경제개발의 가능성에 대한 낙관주의”가 팽배하던 시기였다.4) 하지만 1968년 남미의 가톨릭 주교들이 메델린에서 모임을 가질 때가 되면 근 20년에 걸친 남미의 경제개발 계획들이 실패로 판명되기 시작한다. 자본주의적 발전정책들은 기대했던 결과를 가져오지 않았으며, 그것은 실망을 넘어 깊은 불신과 비관주의가 팽배하게 하였다. 미구에즈 보니노는 이 때 남미가 자신이 북미에 ‘종속’되어 있다는 기초적인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말한다.5) 즉, 약 20년간에 걸친 ‘자본주의적 개발주의’(desarrollismo)를 실험한 이후, 남미인들은 이제 “개발의 종착역이 저개발이며,” “자본주의 경제의 역학은 중심부와 주변부를 창출하고,” “남미는 애당초부터 (북미에) 구조적으로 종속되어 있었다”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6) 이것은 남미인들에게 매우 충격적인 발견이었다. 여기서 ‘종속이론’이 남미 해방신학의 태동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7) 물론 이 말은 남미 해방신학자 모두가 똑같이 자본주의 중심부로부터의 혁명적인 방법을 통한 탈출을 희망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8) 하지만 종속이론은 왜 오랜 노력에도 불구하고 남미의 단 한 국가도 자본주의 개발의 사다리를 오르는데 성공하지 못했는가를 설명해주는 강력한 도구로 자리 잡게 되었다.

만약 그렇다면, 즉 자본주의적 경제발전이 오직 북미에 대한 남미의 구조적 종속만을 심화시킬 뿐이라면, 과연 남미의 선택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미구에즈 보니노에 따르면, “오늘날 주린 자를 먹이고, 헐벗은 자를 입히고, 병든 자와 옥에 갇힌 자를 돌보는 유일한 방법은 혁명뿐”이다.9) 구티에레즈에 따르면 그것은 곧 “기존질서로부터의 근본적인 단절, 즉 사적재산제도의 근본적 변혁과 사회혁명” 뿐이다.10) 그리고 “이런 점에서 ‘해방’을 이야기하는 것이 보다 더 적절한데, 왜냐하면 이 용어는 ‘개발’ 혹은 ‘발전’이라는 용어가 주지 못하는 메시지, 즉 (남미에)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아주 명확하게 전달해주기 때문”이다.11) 이렇듯 남미 해방신학에서 ‘해방’이라는 단어는 남미가 북미와 서유럽의 종속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면 진정한 발전을 이룰 수 없다는 확신에서 의도적으로 선택된 용어라 할 수 있다.12) 다시 말해서, 남미 해방신학에서의 ‘해방’은 남미의 국가들이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서 주변부에 속하며 그 안에 있는 한 아무런 희망도 없다는 시대적 인식과 합의에 의해 의식적으로 사용된 것이었다. 물론, 남미 해방신학자들은 ‘완전한 해방’이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자유로운 선물”이라고 주장하였고, 나아가 기독교 복음의 메시지를 단순한 혁명 이데올로기로 축소시키는 것을 철저히 반대하였지만,13) 남미 해방신학에서의 ‘해방’은 원래 ‘사회적 해방’ 즉 ‘가난한 자들의 물질적 해방’을 의미한다.14) 가난한 자들을 해방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성서적 성찰과 고백은 늘 있었지만, 해방신학의 ‘해방’이라는 용어는 특별히 수탈적인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종속성으로부터의 사회적·경제적 그리고 정치적 출애굽을 강조하는 용어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남미 해방신학이 종속이론과 더 깊은 연관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남미 해방신학에 대한 비품〉湧?남미 해방신학의 마르크시즘 사용에 그들의 비판을 집중하였는가?15) 그런데 우리가 남미 해방신학의 저서들을 깊이 읽다보면 우리는 그 안에 마르크스주의적 사회분석의 ‘과다’에 놀라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것의 ‘부재’에 놀라게 된다. “해방신학이 가장 빚지고 있고 또 해방신학과 가장 가까운 신학자”로 불린 몰트만은,16) 남미 해방신학자들은 마르크스로부터 아주 소수의 기본 개념만 빌려갔고, 그것을 아주 표피적으로 사용했다고 비판한다.17) 흥미롭게도 키(Alistair Kee)나 피에로(Alfredo Fierro)와 좌파 이론가들이 볼 때 남미 해방신학의 문제점은 마르크스주의적 방법론 사용이 “너무 적다”는 것이었다.18) 때문에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를 자처하는 키는 남미 해방신학이 겉으로는 진보적이고 좌파적이나 “장기적으로는 진정한 혁명의 전략적 적대자”라고 단정한다. 실제로 남미 해방신학의 고전(古典)으로 간주되는 구티에레즈의『해방신학』을 분석해 보면 마르크스주의적 사회분석의 내용은 극히 일부분이고 나머지 대부분은 성서적·신학적 성찰에 할애되고 있다.19) 소브리노(Joh Sobrino)의 책 안에는 마르크스주의 이야기가 한 줄도 없다. 콤블린(Jose Comblin)에 가면 오히려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강한 비판과 만나게 되는데, 그는 마르크시즘을 “국가안보 이데올로기와 동일한 반민주적 이데올로기”라고 맹공을 퍼붓는다.20) 유일하게 힌켈라메르트(Franz J. Hinkelammert)에 가서야 우리는 유일하게 마르크스주의 방법론을 가지고 자본주의의 물신성을 비판하는 제대로 된 연구를 만나게 된다.21) 그렇다면, 콤블린의 말대로, 남미 해방신학자들이 마르크시즘으로부터 빌려간 것은 “그것의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이며, 누구라도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지 않고도 그렇게 할 수 있었다.”22) 해방신학자들은 마르크스의 아이디어를 사용했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자본주의에 대한 가장 분명한 비판의 도구’였기 때문이며, 그들은 마르크스주의의 무신론이나 철학적 물질주의에 빠지지 않고 그것을 사용할 수 있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왜 비판가들은 남미 해방신학이 마르크스주의 신학이라고 비판하고, 대중적으로도 그렇게 알려졌는가? 보프는 이렇게 말한다. “그들은 해방신학의 가난한 자들에 대한 선택이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서, 즉 성서의 하나님에 대한 핵심적 가르침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그것이 좌파 이데올로기나 마르크시즘에서 나온 것이라고 주장하고 싶었을 것이다.”23)

하지만 남미의 해방신학자들이 실제 마르크스주의적 사회주의를 선호하고 그것을 역사적 대안으로 선택한 것은 사실이 아닌가? 필자의 연구에 의하면, 남미 해방신학자들의 사회주의에 대한 ‘정치적 선택’은 기존의 질서에 대한 ‘저항의 수사학’일 뿐 그 실제 내용은 공허한 것이었다.24) 구티에레즈나 미구에즈 보니노와 같은 일부의 해방신학자들이 사회주의를 대안으로 생각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이유는 그들이 자본주의가 스스로 개혁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25) 하지만 남미의 모든 해방신학자들이 다같이 사회주의를 지지한 것은 아니었다. 콤블린은 사회주의를 “기술적 진보를 가로막는 지배체제”라 비판하였으며,26) 보프는 비록 자본주의가 “최대의 악이며, 대중의 가난과 굶주림과 질병과 죽음과 같은 열매를 맺는 썩은 뿌리”이고 또 “도덕적인 시장제도를 만드는 것은 기독교인 창녀를 만드는 것과 똑같이 불가능한 것”일지라도 그것에 대한 대안은 “자본주의와 동시에 사회주의를 넘어서는 어떤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27) 더욱 중요한 것은 사회주의를 자본주의의 대안으로 말한 미구에즈 보니노나 구티에레즈와 같은 해방신학자들도 그들이 의미한 사회주의는 언제나 동유럽에 존재하고 있던 그런 사회주의가 아니라 언제나 어떤 ‘토착적’이고 ‘자결적’인 남미식 사회주의였던 것이다.28)

남미의 해방신학에 있어서 사회주의에 대한 정치적 선택이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는 주장의 또 다른 근거는 그들이 사회주의를 말할 때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체제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하지도 또 설명하려 노력하지도 않았다는 점이다. 사회주의에 대한 남미 해방신학자들의 개념정의는 아주 단순하다. “생산수단의 사적소유의 제거,” 이것이 전부 다이다. 하지만 이것은 경제학적으로 수없이 많은 다른 어떤 체제를 의미할 수 있다.29) 때문에 좌파와 우파를 막론하고 남미 해방신학에 쏟아진 비판은 그들이 말하는 사회주의가 “구체적이지 않고,” “모호하며,” “잘해봐야 표피적”이라는 것이었다.30) 뜻밖에도 이 점에 관한 가장 강력한 비판가는 독일의 진보적인 정치신학자 몰트만인데, 그는 과연 이제까지 남미에서 토착적인 사회주의의 길이 한번이라도 존재하기나 하였는지, 나아가 남미 해방신학자들은 사회변혁의 ‘필요벙??급급한 나머지 그것의 실제 ‘가능성’을 너무 안이하게 판단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강력히 비판하였다.31)

이러한 점들을 모두 고려할 때 우리는 남미의 해방신학자들에게 있어서 사회주의란, 콤블린이 말하는 것처럼, “구체적인 내용이 없는 하나의 유토피아”에 불과했다고 결론내릴 수 있다.32) 그것은 어떤 경제적 전략도, 구체적인 사회적 프로그램도 아니었다. 그것은, 보프나 미구에즈 보니노의 말처럼, “공동의 선을 이룰 수 있는 어떤 정치적 제도” 혹은 “인류의 역사에서 ‘신인간’(hombre nuevo)이 탄생하는 거대한 역사적 프로젝트”의 다른 말에 불과했다.33) 말하자면 그것은 기존질서에 대한 부인을 핵으로 하는 일종의 ‘저항의 수사학,’ 혹은 ‘기독교적 이상주의의 수사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기독교적 이상주의’(Christian Idealism란, 알베스(Rubem A. Alves)의 정의에 따르면, “하나의 완벽한 사회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a belief in the possibility of a perfect society)이 아니라 “지금의 불완전한 질서가 숙명적일 필요는 없다는 믿음”(the belief in the non-necessity of this imperfect order)이다.34) 남미 해방신학자들에게 사회주의란 “무언가 새로운,” 그리고 “무언가 남미에 적합한” 어떤 막연한 것을 의미했다. 그것은 그것이 ‘무엇인가’보다 그것이 ‘무엇이 아닌가’에 의해 정의되는 어떤 것이었다. 즉 현재의 질서에 대한 ‘확고한 종말론적 부정’(an eschatological big No)이었다. 사실 남미 해방신학의 기본적인 방법론에 비추어 볼 때도 남미 해방신학자들이 사회주의에 대한 구체적 이론제시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것은 어쩌면 매우 자연스런 일이었다.35) 보프는 다음과 같이 남미 해방신학에서 사회주의에 대한 정치적 선택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했는지를 우리에게 잘 설명해준다.

해방신학이 사회주의에 관심을 가졌던 이유는 그것을 자본주의에 대한 역사적 대안의 하나로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회주의가 구체적으로 따라야 할 모델로 제시된 적은 없었다… 사회주의는 순전히 하나의 역사적 참고사항이었을 뿐, 해방신학의 진정한 뿌리는 다른 곳(elsewhere)에 놓여 있었다.

이 ‘다른 곳’이 바로 남미 해방신학의 ‘신학’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리고 이 ‘신학’을 바로 이해하지 않고서는 우리는 남미 해방신학을 제대로 이해했다고 말할 수 없다고 믿는다.36)
 

2. 남미 해방신학의 ‘신학’
 
남미 해방신학을 기존의 정통신학과 구분 짓는 특징은 여러 가지가 있다.37) 하지만 필자는 여기서 그것을 세 가지로 요약해 보려 한다.

첫째로, 구티에레즈가 말하다시피, 해방신학은 그리스도 신학에 어떤 새로운 주제를 소개했다기 보다 신학을 하는 새로운 방법론을 소개하였다. 다른 모든 신학과 마찬가지로 해방신학 역시 신학의 모든 주제들, 즉 예를 들어 신, 삼위일체, 그리스도, 성령, 은혜, 죄, 교회 등에 관해 이야기한다. 하지만 해방신학이 다른 모든 신학과 구별되는 독창성은 그것이 이 모든 주제들을 가난하고 억압된 사람들의 관점에서 이야기한다는 점이다.38) 즉 구티에레스 말대로, 이 세계를 ‘가난한 자,’ ‘역사의 패배자,’ 혹은 ‘역사의 하부’(underside of history)의 눈으로 보고 이야기한다는 점이다.39) 바로 이 ‘가난한 자에 대한 선택’(option for the poor)이라는 신학적 방법론이 남미 해방신학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난한 자들의 문제를 직시하지 않고 해방신학을 논한다는 것은 사실 어불성설이다.

둘째로, 남미의 해방신학은 ‘강한 성서적 색채’(a strong biblical coloring)를 지니고 있다. 놀랍게도 이 점을 남미 해방신학에 대한 우호적인 자나 비판적인 자 모두가 종종 놓치곤 하는데, 남미의 해방신학은 그것에 대한 반발로 북미에서 일어나 신보수주의 신학이나 오늘날의 생태신학과 비교할 때 대단히 성경적이다.40) 해방신학은 한마디로 인간의 고난과 억압의 한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에 관해 이야기하는 방법을 찾으려는 시도이다. 보프 형제의 말을 빌리면, “억압이라는 상황에 직면하여 기독교 신앙이 무엇인지를 성찰하려는 것”이 바로 해방신학이다.41) 즉 인간에 대한 억압과 해방의 과정을 “성서 안에서 구체적으로 발견되는” 신앙의 눈으로 보려고 한 것이 해방신학인데,42) 해방신학자들에게 있어서 ‘신앙의 눈’이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의 시각’ 즉 성서적 관점과 동의어였다. 성서에 계시된 하나님이 ‘가난한 자들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은 해방신학자들에게 있어서 한마디로 “기독교 신앙의 근본적인 논거(datum)”였다.43) 그래서 구티에레즈는, “우리가 성서를 통해 알게 된 하나님은 해방하시는 하나님이시며, 그 하나님은 불의한 구조를 부수기 위해 역사에 개입하시는 분이다”라고 말한다.44) 실제로 성서의 수많은 곳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가난한 자들의 하나님이며 이스라엘은 과부나 고아나 나그네에 특별한 책임을 가지고 있고 권세자들은 부와 권력을 오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경고하는 예언자들의 목소기를 들을 수 있다. 사실 하나님은 가난한 사람들이 단지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쏟으신다는 성서의 시각은 다른 모든 종교의 가르침과 비교할 때 독특하고 유일한 것이다.45) ‘가난한 자들에 대한 선택’은 일부 급진적 경제학자들의 주장이 아니라 성서의 중심적 메시지인 것이다.

셋째로, 이러한 신학적 방법론과 성서적 논거를 가지고 남미 해방신학자들이 탐구하려 했던 핵심적 주제는 이 ‘지상에서의 해방’(earthly liberation)과 ‘하늘에서의 구원’(heavenly salvation) 사이의 관계에 관한 문제이다. 해방신학에서 가난한 자들의 하나님은 곧 역사의 하나님인데, 역사는 하나님의 활동의 무대이자 길로 이해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남미의 해방신학자들이 인간의 해방을 어떤 우연하고 일시적인 사건으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역사적 필연으로 이해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남미 해방신학자들에게 ‘해방’은 언제나 사회적·경제적·정치적인 것을 넘어서는 어떤 것이었다.46) 그리고 역사는 “자유의 정복으로서의 역사”(history as conquest of freedom)였다.47) 이 말은 해방신학자들이 해방을 단순히 경제적 · 사회적·정치적 종속관계에서 벗어나는 일시적이고 우연한 사건으로서가 아니라 인류의 역사 안에서 인간의 자유가 확대되어 “인류가 자기를 실현하는 과정”(the becoming of humankind)으로 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독자들이 이미 간파했다시피, 이러한 특정한 역사관은 데카르트와 칸트와 헤겔을 거쳐 완성된 19세기 유럽의 역사철학의 역사관이다.48) 말하자면 남미 해방신학은 철학적으로 역사를 자유의 정복으로 보는 헤겔의 역사철학과 (이것은 역사의 주체로서의 인간의 창조성을 강조한다) 유대-기독교 전통에서 온 유신론적 해석학 (이것은 역사를 신의 활동의 현장이자 신에 이르는 길로 강조한다), 이 둘 사이의 변증법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 이런 질문이 제기된다. 만약 역사가 자유를 향한 정복의 과정이라면, 그리고 신을 역사를 통해 활동하시고 구속하신다면, 도대체 ‘자유의 정복’으로서의 역사와 역사 안에서의 ‘하나님의 현현’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존재하는가? 그래서 구티에레즈가 이렇게 묻는다. 이제 “문제가 단순히 이 지상에서의 행동을 아는 것이 아니라 인간해방의 의미를 신앙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이라면,” 그리고 “기독교 신학은 지금의 시대적 징조인 인간의 해방에 직면하여 그것의 의미를 성찰하는 것이라면,” 과연 “하나님의 나라와 인간의 해방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존재하는가?”49) 이것이 바로 구티에레즈에게 있어서 핵심적이고도 최종적인 신학적 질문이었다. 콤블린의 증언대로 남미 해방신학의 핵심적 주제는 그 시작부터 “일시적인 해방과 영원한 구원 사이의, 그리고 하늘에서의 구원과 땅 위에서의 해방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연결 짓느냐”하는 것이었다.50) 남미 해방신학을 비판하는 북미의 신보수주의 신학자 맥켄(Dennis P. McCann)은 남미 해방신학 안에 있는 헤겔의 역사철학과 유신론적 해석학 사이의 변증법적 긴장에 주목하여 남미 해방신학의 문제는 “‘해방자 하나님’과 ‘역사의 주체로서의 인간’ 사이의 존재론적 화해의 문제”라고 비판하였지만,51) 해방신학자들은 이 문제를 ‘존재론적’ 문제로서가 아니라 ‘종말론적’ 문제로 풀어나갔다. 그리고 그들은 이 문제의 답을 ‘하나님 나라’라고 하는 종말론에서 찾았다.

남미 해방신학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소브리노가 지적하듯이, 해방신학의 “중심적 목표”일 뿐만 아니라 “해방신학 전체를 조직하는 대원칙”이었다.52) 남미 해방신학에서는 ‘이 세계에 대한 부정’(world negation)으로서의 종말론이 핵심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데, 이는 은혜의 성육신과 편재성을 강조하는 북미의 신보수주의 신학과 구분되는 중요한 특징이다.53) 따라서 우리는 해방신학의 종말론, 즉 해방신학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를 제대로 이해하지 않고는 남미 해방신학의 ‘신학’을 이해했다고 말할 수 없다. 해방신학의 하나님 나라 이해는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특징으로 요약할 수 있다. (1) 해방신학은 미래의 저 세상에 있는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이 땅 위에 역사적 변혁으로 이루어지는 현재의 하나님 나라에 더 관심을 가졌다.54) (2) 하나님 나라는 철저하게 가난한 자들의 나라이고 그들에게 속해 있다. 즉, “하나님의 다스림은 곧 가난한 자들의 다스림”이다.55) (3) 해방신학의 하나님 나라는 매우 현실주의적이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에 대한 반대세력과 죄의 힘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는 백지상태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반(反)하나님 나라 세력과의 투쟁에서 생기고, 때문에 그것은 후퇴하기도 하고 전진하기도 한다.56) (4) 하나님의 나라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는 일시적인 역사의 진보로 축소되거나 그것과 동일시될 수도 없다.57) 사실 여기까지는 별다른 논쟁적 내용이 없다. 만약 해방신학자들이 하나님 나라에 대해 여기까지만 말했더라면 독일의 정치신학자들과 그렇게 심한 논쟁을 벌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남미의 해방신학자들은, (5) 하나님 나라가 하나님의 선물임을 강조함과 동시에 그것이 인간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임을, 즉 ‘인간의 인과성’(human causality)을 강조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주장과 모순되는 것은 아닌가? 구티에레즈는 이렇게 설명한다.

하나님 나라는 선물(gift)이지만 그것은 또한 요구(need)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유롭게 주시는 선물이기에 우리가 생명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의지에 복종하도록 요구한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제자됨이 요구하는 바인데, 제자됨이란 값없이 주시는 무상의 은혜와 윤리적 요청 사이의 경계선에 사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오게 한다(We cause the kingdom to come). 우리가 카이로스의 시간이 도래하게 만든다. 어떤 운명적인 것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을 받아들이기로 자유롭게 결정한 결과로서 말이다.58)

필자가 보기에 이 주장은 바울이 로마서 3장에서 펼치고 있는 ‘정통적’인 구원관과 크게 다르지 않다.59) 그리고 사실 이 주장은 “만약 해방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면 그것은 어떤 면에서 ‘인간의 투쟁’으로 얻어야 하는 것인가?”는 맥켄의 물음에 대한 답변이기도 하다.60) 하지만, 흥미롭게도,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인간의 인과성 대 하나님의 자유로운 주권’을 둘러싼 본격적인 논쟁은 남미 해방신학자들과 북미 신보수주의 신학자들 사이에서가 아니라 스스로를 “남미 해방신학의 친족”이라고 생각하는 몰트만 사이에 벌어졌다.

남미 해방신학자들과 독일 정치신학자들 사이의 논쟁은 한마디로 ‘하나님의 종말적 질서와 역사 안에서 인간의 정치적 행위 사이의 관계’에 관한 논쟁으로 요약될 수 있다. 몰트만은 기독교 신학이 특정한 이데올로기나 권력구조를 신성화시키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역사 안에서 하나님의 현존을 ‘유형화’(materialize) 하는 것을 피해야 하며, 그리스도의 복음과 이 세상의 질서 사이에 ‘비판적 자유’를 유지해야 한다고 말했다.61) 하지만 남미 해방신학자들에게 이 말은 결과적으로 서구의 사회민주주의라고 하는 특정한 자본주의 체제와 이데올로기를 합리화하는 것으로 밖에 들리지 않았다.62) 즉 하나님의 종말론적 질서에 대한 모든 인간적 원인성을 부정하고 또한 모든 정치질서의 상대성을 강조한다는 명분하에 중립지대에 섬으로써 결과적으로 서구 자본주의의 기존 체제를 이데올로기적으로 합리화하게 된다는 것이었다.63) 아무 것도 선택하지 않음으로써 결국 기존의 것을 옹호하게 된다는 것이 비판의 요지였다. 그래서 독일의 정치신학은 “이름만 혁명적인” 신학이라고 비난받아야 마땅했다.64)

하지만 몰트만에게 있어서 남미의 해방신학자들은 “현실의 뒤꽁무니를 좇는”(limp after reality)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이었다. 잘 알다시피 몰트만은 기독교를 현대사상과 흐름에 일치시키는 것에 반발하여 그의 ‘희망의 신학’에서 이 세계의 진보와 질적으로 다른 미래의 힘으로서의 그리고 새로운 초월의 패러다임으로서의 ‘희망의 하나님’을 이야기한다.65) 몰트만의 종말론에서는 현실로부터 발전되어 이어지는 시간적 미래가 아니라 ‘하나님의 미래’가 중요하며 이 하나님의 미래의 현재로의 ‘도래’가 중요하다.66) 때문에 억압과 해방으로 점철된 현재로부터 하나님 나라가 자라나온다는 남미 해방신학자들의 생각은 당연히 ‘현실의 뒤꽁무니를 좇는’ 것으로 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남미 해방신학자들에게 희망은 현재 안에 잉태되어 있었다. 보프에게 있어서 하나님 나라는 “현재 안에 있는 미래의 현존”이었다.67) 세군도는 복음서의 구절을 근거로 “예수의 신학”을 거론하며 예수는 비록 불완전한 것이지만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해방의 사건에 초점을 두었음을 상기시키면서, “비록 인간의 인과성이 부분적이고 연약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독일의 정치신학자들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기대’(anticipation) 혹은 ‘유비’(analogy)보다 더 중요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68) 구티에레즈 역시 현재는 미래를 잉태하고 있는 자궁과도 같은 것이라 보았고 따라서 몰트만의 종말론은 ‘희망의 가현설’에 빠질 위험이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는 이렇게 비판한다.

몰트만은 인간의 구체적인 역사적 경험에 뿌리를 내린, 즉 억압받고 수탈당하나 잠재성으로 가득한 인간의 구체적인 역사적 경험에 뿌리를 내린 助低?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희망은 역사적 실천(historical praxis)에 그 뿌리를 내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도피 혹은 한낱 미래파의 환상에 불과하게 된다. 몰트만은 ‘저 세상의 기독교’(Christianity of the Beyond)를 ‘미래의 기독교’(Christianity of the Future)로 바꿔치지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만약 전자가 이 세계를 잊어버리곤 한다면 후자는 현재의 비극적이고 불의한 상황에서 해방의 투쟁의 중요성을 무시하게 한다.69)

30년 전에 남미와 북유럽 사이에 오고간 이 종말론 논쟁을 돌이켜 보면서, 필자는 몰트만에 대한 구티에레즈의 비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두셀(Enrique Dussel)이 말하는 것처럼, 오늘 우리의 삶과 실천이 “종말적 진보의 진정한 사인”이며 “이와 같은 구체적인 매개물이 없이는 기독교적 희망이 헛된 꿈을 꾸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70) 하지만 독일의 정치신학이 자신의 상황에서 역사적 실천의 중요성을 무시했다고 보지는 않는다. 몰트만 스스로가 이후에 밝히고 있다시피, 독일의 정치신학은 반전·반핵·평화·환경운동과 같은 유럽인들의 저항과 운동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71) 남미의 해방신학과 독일의 정치신학 둘 다 나름의 역사적 상황과 경험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둘 사이의 경험의 밀도의 차이로 보인다. 구티에레스는 그의 고전적인 『해방신학』을 집필할 당시, “지금 우리는 혁명의 기운이 가득한 상황의 한복판에 살고 있다”고 말했다.72) 미구에즈 보니노는 “심지어 지금 맹인도 남미가 사회주의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눈으로) 볼 수 있었으며,” 쿠바 혁명은 “변화가 가능하다는 사인”을 분명히 제공해 주고 있었다고 말한다.73) 실제로 1960년대의 남미와 제3세계는 희망과 꿈과 혁명의 용광로 안에 있었다. 만약 그러한 상황에 살고 있었다면 사람들은 과연 어디에서 역사의 희망을 기대할 것인가? “인간의 구체적인 역사적 경험, 즉 억압되고 수탈당하고 있으나 거대한 잠재성으로 가득 찬 인간의 구체적인 역사적 경험”74) 에 기대하려하지 않겠는가?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남미의 해방신학자들에게 하나님 나라는 애타게 기다려야 하는 ‘유토피아’(u-topia), 즉 ‘어디에도 없는 곳’(no where)이 아니라 ‘지금 여기’(now here) 이루어지는 ‘토피아’(topia)였던 것이다.75)

3. 1989년과 그 이후

하지만 1960년대를 휩쓸었던 혁명의 시대는 가고 1989년 동구 사회주의의 붕괴 이후 남미의 해방신학은 새로운 도전과 시련에 직면해 있다. ‘베를린 장벽의 붕괴’(Wende)에 대한 해석은 실로 다양하지만,76) 사람들은 ‘실제 존재하는 사회주의’의 붕괴가 곧 해방신학의 붕괴를 의미한다고 생각하였다.77) 남미 해방신학자들이 해방신학의 미래에 대해 아직도 낙관적임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것은 오늘의 남미에서 사회주의는 해방의 대안으로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고, 또한 오늘날의 남미인들은 기존의 체제로부터의 급진적인 혁명보다는 해방에 관해 보다 실용적 입장을 가지게 되었다는 점이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1989년 이전에도 남미의 해방신학자들은 해방의 목표와 방법에 대해 서로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었지만, 1989년 이후 그들은 해방의 목표와 방법에 대해 두 가지 서로 다른 궤도를 걷기 시작했다고 말할 수 있다. 한편으로는 콤블린(Jose Comblin), 리처드(Pablo Richard), 아스만(Hugo Assmann)과 같은 사람들이 보다 개혁주의적 방향으로 나아가는 반면, 구티에레즈나 보프는 여전히 혁명적 열정을 버리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콤블린은 개혁주의(reformism)가 더 이상 나쁜 말로 간주되어서는 안 되며, 이제 시장경제의 수용은 불가피하고, 나아가 “기존의 국제관계의 틀 속에서도 남미는 상당한 정도의 자치를 지킬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78) 리처드 역시 같은 선상에서 근본적인 사회변혁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으며 따라서 이제 해방신학은 정치적 신학에서 ‘시민의 신학’으로, 주변부 신학에서 ‘교회안의 신학’으로, 그리고 대결을 추구하는 신학에서 ‘화해를 추구하는 신학’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한다.79) 아스만 역시 이제 반자본주의적 태도에서 벗어나 자유주의 사상과의 동맹을 추구해야 한다고까지 주장한다.80) 이 첫 번째 그룹의 신학자들은 자본주의와의 일정한 협상과 타협을 추구한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반해 구티에레즈와 보프는, 현실의 변화를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근본적인 사회변혁에 대한 혁명적 열정을 버리지 않고 있다. 구티에레즈는 이제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와 시장경제를 수용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국가나 사회에 의해 통제될 수 있다는 것을 조건으로), 오늘날의 신자유주의 경제가 ‘시장 우상’이자 현대판 ‘맘몬 예배’라고 강력히 비판한다.81) 그는 사회주의가 더 이상 역사의 대안이 아니라고 인정하지만 사회주의를 대체할 어떤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고 있지는 있으며, 30년 전 새로운 역사적 시대를 갈망했던 ‘온전한 해방’에 대한 깊은 열망은 아직도 유효하다고 말하고 있다.82) 보프는 역시 기존의 종속적인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가난한 자들에게 구원과 희망이 없다고 본다. 따라서 그는 우리가 이 체제를 과감히 버려야 하며, 비록 해방이라는 단어가 과거와 같은 의미는 상실했더라도 절대다수의 인류가 처하고 있는 곤경에서 탈출해야 한다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해방이라는 용어가 계속 사용되어져야 한다고 말한다.83) 그리고 그는 이제 사회주의의 대안으로 생태경제를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이 두 번째 노선은 과거의 비타협적인인 혁명적 정신을 보존하고 자본주의에 대한 반대를 유지하면서 사회주의를 넘어서는 대안을 모색하는 노선이라 정리할 수 있겠다.

이처럼 두 가지 뚜렷한 노선의 분화에도 불구하고, 1989년 이후 남미 해방신학에는 세 가지의 공통적인 변화가 엿보인다. (1) 과거에 해방신학자들은 가난의 문제에 대한 사회경제적 분석을 지나치게 강조하였으나 이제는 인종적, 문화적, 그리고 여성의 문제에 관해 관심을 지평을 확대하고 있다.84) (2) 이제 해방신학자들은 인간 실존의 복잡성과 모호성을 인정하면서 심지어 ‘가난한 자들에 대한 우상화’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구티에레즈는 가난한 자들 역시 인간이며 때문에 그들도 은혜와 죄에 참여한다고 말하는데, 실로 이것은 대단히 충격적인 선언이다.85) 왜냐하면 과거 구티에레즈는, 세군도와, 달리 해방의 신학이 가난한 사람들의 경험으로부터 ‘직접’ 나와야 한다고 줄기차게 주장하였기 때문이다.86) (3) 해방신학자들은 이제 ‘환경’문제를 해방에 대한 신학적 성찰을 위한 중요한 주제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구티에레즈는 사회적 연대의 개념을 자연에까지 확장하면서 “창조와 생명의 신학은 정의를 위한 우리들의 투쟁에 커다란 활력소가 되어줄 것”이며, “의심의 여지 없이 이것은 해방에 대한 우리의 신학적 성찰에 비옥한 토양을 제공할 것”이라고 말한다.87) 사실 그 누구보다도 남미 해방신학자 가운데 해방신학의 관점에서 생태신학을 발전시켜 나가고 있는 이는 레오나르도 보프이다.88)

4. 남미 해방신학의 유산과 한계

한 세대 전 남미의 해방신학은 ‘자본주의적 발전주의’(capitalist developmental-ism)를 비판했다. 하지만 남미 해방신학자들이 ‘발전주의’ 그 자체를 비판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우리는 유념해야 한다. 그들은 자본주의적 발전주의가 남미의 자주적 발전을 가져다주지 못할 것이기에 그것을 반대했을 뿐이지,89) 경제의 발전 그 자체 혹은 무한한 발전은 당연한 것으로 전제하고 있었다.90) 그들은 자본주의적 근대화 모델에 반대하면서 사회주의적 근대화 모델을 하나의 역사적 대안으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적 사회주의 역시 또 하나의 전형적인 서구 이데올로기의 하나일 뿐이다. 그리고 그것의 모델은 다름 아닌 ‘19세기 자본주의 공장’이다. 자본주의나 사회주의는 모두 유럽 계몽주의의 자식들로서, 다양한 인간의 역사와 문화를 단일한 한 보편문명으로 통합하려 했던 근대유럽의 열정을 공유하며, 따라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충돌은 “서양 이데올로기 가족 내의 분쟁”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91) 바로 이 때문에 몰트만이 남미의 해방신학이 “충분히 남미적”이지 않고 “지나치게 유럽적”이라고 비판한 것이었다.92) 사실 이 점에 관한해서는 아메리카 대륙 원주민들의 비판이 더욱 따갑다. 팅커(George Tinker)는 “남미해방신학의 ‘해방의 복음’에 비추어서도 우리 원주민들은 여전히 비인간일 뿐”이라고 비판하는데, 왜냐하면 생산수단을 가난한 사람들 손에 쥐어준다 하더라도 그들은 원주민과 자연에 대한 새로운 수탈자로 변모할 수 있기 때문이다.93) 그래서 들로리아(Vine Deloria, Jr.)는 남미의 해방신학이 “억압의 뿌리”는 뽑으려 하지 않고 단시 “억압의 방식”만 바꾸려 하는, 그래서 결국은 피억압자들에 대한 억압을 영구화시킬 수 있는 “최신 계략”(the latest gimmick)이라고까지 비난한다.94)

남미의 해방신학자들이 철학적으로 빚지고 있던 19세기 유럽의 역사철학은 철저히 기계론적이고, 인간중심적이며, 또한 남성중심적인 역사관이다. 이 역사 안에서 인간의 ‘자유의 정복’(conquest of freedom)은 곧 ‘자연에 대한 정복’(conquest of nature)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구티에레즈가 이해한 ‘자유의 정복’의 역사는 ‘자연의 정복’을 당연한 것으로 전제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노동을 통해 세계/자연을 변화시킴으로써 진정한 자유를 축적하고 그를 통해 스스로를 해방한다.”95) 하지만 이러한 자유관은, 생태여성주의자들이 즉시 지적할 수 있듯이, “이성(reason)과 합리성(rationality)의 힘으로 자연으로부터 해방되는 과정”이 곧 자유라고 인식하는, 전형적인 “남성적 자유”관인 것이다.96) 보프도 인정하다시피 그와 같은 자유는 인간이 자연을 변화시키는 행위를 무한한 진보의 행위로 이해함으로써 자연 자체의 내적 논리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문제가 있다.97) 그래서 몰트만은 구티에레즈가 말하는 해방이 “유럽의 자유의 역사의 연속이자 그 절정”이라고 비판했던 것이다.98) 이렇게 본다면 남미의 해방신학은, 한 때 해방신학에 헌신했던 남미의 여성신학자 게바라(Ivone Gebara)가 꼬집어 비판하는 것처럼, 하나의 혁명적 신학이기는 하나 “서양 가부장적 전통 안에서의 혁명적 신학”이었다고 결론지을 수 있을 것이다.99) 이제 해방신학은 자신과 인류의 미래를 위해 19세기 유럽의 역사철학에 지고 있던 그들의 지적 부채를 청산해야 할 것이다. 해방신학자들의 논거였던 성서 안에서의 해방은 억압된 사람들뿐만 아니라 억압된 땅까지도 포함하며, 성서의 신앙은 인간의 구속과 전 창조세계의 구속을 별개로 보지 않는다는 점을 그들은 다시금 인식해야 할 것이다.100) 30년 전 남미의 해방신학자들을 한껏 고무시켰던 쿠바의 사회주의 혁명이 1989년 동유럽의 사회주의 붕괴 이후의 절대적 위기상황에서 오히려 지금은 이 세상의 모든 생태학자들이 부러워하는 ‘생태혁명’으로 탈바꿈한 역사의 아이러니를 그들은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101)

나가는 말

1960년대 남미대륙을 휩쓸었던 혁명적 열정은 사라졌다. 하지만 남미의 해방신학이 우리에게 남긴 소중한 유산이 있다. 그것은 그들의 ‘사회주의에 대한 정치적 선택’이 아니라 ‘가난한 자들에 대한 신학적 선택’이다. 보프 형제의 말처럼, 남미의 해방신학은 “(기독교) 신앙이 가난한 자들에게 가해진 불의와 만날 때”102) 탄생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해방신학은 “억압이 있는 곳 어디서나” 존재한다.103) 때문에 우리는 해방신학이 한 시대와 함께 사라지는 신학이 아니라 ‘보편성을 갖는 하나의 상황신학’(a contextual theology that has universal implications)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104)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라” (마가 14:7)
가난한 사람들이 우리와 함께 있는 한 ‘해방의 신학’(theology of liberation)은 기독교 신학이 포기할 수 없는 중요한 신학이다. 특히 오늘날과 같은 신자유주의 경제의 세계화 시대에 해방신학의 유산은 더욱 소중한 ‘살아있는’ 유산이다.105) 콤블린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들의 헌신은 마르크시즘이 아니라 가난한 자들을 향한 것이었고, 오늘날처럼 신자유주의가 가난을 더 악화시키고 있을 때 해방의 신학은 더욱 긴급하게 요구된다.”106) 구티에레즈의 말대로, 비록 사회주의의 붕괴가 지구촌의 형세를 바꾸었다 하더라도 해방신학이 여전히 필요한 이유는, “마르크시즘의 위기가 인간에 대한 불의와 낡은 억압의 문제를 결코 해결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107) 해방의 신학은, 보프의 주장대로, 사회주의에 대한 정치적 선택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가장 독창적인 신학적 통찰, 즉 “생명의 하나님과 가난한 자와 해방, 이 삼자의 친밀한 관계의 발견”(the discovery of the intimate relationship between the God of life, the poor, and liberation)에 의해 사는 것이다.108)
한 세대 전, 광활한 남미대륙과 제3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해방신학의 미래는 과연 무엇일까? 구티에레즈는 이렇게 담담하게 말한다.

나는 해방신학이 앞으로 살아남을 건지 아닌지에 사실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나의 관심은 내가 속해 있는 사람들이 겪는 고난과 희망에 관한 것입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메시지와 경험에 관한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사랑과 우리의 믿음의 골자입니다. 신학은 바로 이 메시지와 경험을 심화시켜주는 매개에 불과하다. 신학이란 희망의 해석학입니다. 하나님의 선물로 살아낸 희망의 해석학이 바로 신학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 세계에 해방하는 희망을 선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109)

구티에레즈는 우리에게 “해방신학의 우상화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경고한다. 신학이 신앙보다 더 중요해질 때 그는 신학의 우상화가 시작된다고 말한다.110) 비록 1960년대의 혁명의 열기는 사라졌어도 우리는 아직도 한 노(老)신학자의 가슴 속에 타오르고 있는, 믿음에 기초한 심오한 희망의 열정을 발견한다.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의 메시지와 희망의 열정이 바로 30여 년 전 남미에서 하나의 해방의 신학을 탄생하게 했고 앞으로도 다른 많은 해방의 신학들을 탄생하게 할 것이다.

장윤재 l 교수는 연세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뉴욕의 유니온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 석사와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지금은 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과 교수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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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Jurgen Moltmann, “Political Theology and Theology of Liberation,” in Liberating the Future: God, Mammon and Theology (Minneapolis: Fortress Press, 1998), 61. 개인의 자유(individual liberty)를 통한 전제정치과 빈곤으로부터의 해방을 약속했던 경제 자유주의, 즉 시장 자본주의가 또 다른 이름의 억압과 지배라고 보고 그것에 대한 신학적 · 윤리적 대안을 찾아 나선 것이 바로 남미의 해방신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경제 자유주의란 외부적 권위와 억압과 강요 없이 시장 스스로의 메커니즘을 통해 전제정치와 빈곤으로부터 해방을 실현하겠다는 약속이었으며, 그것의 전제는 시장경제 자체 안에는 억압과 지배가 없다는 것이었다.
2) Michael Novak, Will It Liberate?: Questions about Liberation Theology (New York: Paulist Press, 1986), 273.
3) Gustavo Gutierrez, A Theology of Liberation: History, Politics, and Salvation (Maryknoll, N.Y.: Orbis, 1973), 34.
4) Gutierrez, Ibid., 49. UN은 1950년에 남미에 대한 ‘1차 발전 10개년 계획’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이에 뒤이어 케네디는 1961년에 ‘진보를 위한 동맹’(Alliance for Progress)을 발족시켰다.
5) Jose Miguez Bonino, Doing Theology in a Revolutionary Situation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75), 14-15. 미구에스 보니노의 말에 의하면, “스페인으로부터의 정치적 해방은 오직 앵글로 색슨의 식민지, 신식민지로의 이전을 의미했다.”
6) Gutierrez, A Theology of Liberation, 51-54.
7) 종속이론은 신고전주의 경제이론의 국제경제 관계론에 대한 비판으로, 또한 전통적인 근대화 모델에 대한 반발로 발전되었다. 특히 레닌의 제국주의론이 이 종속이론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남미에서는 종속의 외적 요소를 강조하는 프랑크(Andre Gunder Frank)의 보다 강경하고 단순한 이론과, 내적 즉 국내 계급적 요소를 강조하는 카르도소(Fernando Henrique Cardoso)의 이론이 서로 대립하였다. 유명한 프랑크의 종속이론에 관해서는 Frank, Capitalism and Underdevelopment in Latin America (1967)을 참조하라.
8) 미구에스 보니노는 종속이론 중 프랑크의 모델을 따라 남미의 저개발은 “북미 개발의 이면”이며 북미의 발전은 남미와 제3세계의 저개발을 전제로 하고 있다고 말한다. (Miguez Bonino, Doing Theology in a Revolutionary Situation, 14-16). 하지만 콤블린은 종속이론이 “해방을 생각하는 가장 쉬운 길”이라고 비판하는데, 그 이유는 중심부로부터의 탈출이 남미에 자치는 주겠지만 기술 이전의 시대로 돌아가게 할 것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Jose Comblin, “Freedom and Liberation as Theological Concepts,” in Concilium [1974], 101-103). 레오나르도 보프는 미국에 대한 캐나다의 종속과 같은 모델이 그가 속한 브라질이 따를 수 있는 실용적이며 실행 가능한 길이라고 생각하였다. 구티에레즈는 카르도소의 모델을 따라 외세에 의한 종속보다는 국내 계급적 지배를 더 강조하였다. (Gutierrez, “Liberation Praxis and Christian Faith,”in Frontiers of Theology in Latin America, ed. Rosino Gibellini [Maryknoll, N.Y.: Orbis, 1979], 17.)
9)Miguez Bonino, Doing Theology in a Revolutionary Situation, 44.
10) Gutierrez, A Theology of Liberation, 16-17.
11) Gutierrez, Ibid., 24-25. 여기서 구티에레즈는 또한 ‘해방’이라는 단어가 ‘개발’ 혹은 ‘발전’보다도 성서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주시는 것(‘죄에서의 해방’)을 더 잘 표현해준다고 말한다.
12) Arthur F. McGovern, Liberation Theology and Its Critics: Toward an Assessment (Maryknoll, N.Y.: Orbis, 1989), 117.
13) Gutierrez, A Theology of Liberation, 24, 271.
14) 보프 형제는 심지어 “해방신학의 핵심은 신학이 아니라 해방”이라고까지 말한다. (Leonardo and Clodovis Boff, Introducing Liberation Theology, 9; Clodovis Boff, “Methodology of the Theology of Liberation,” in Jon Sobrino and Ignacio Ellacuria, eds. Systematic Theology: Perspectives from Liberation Theology [Maryknoll, N.Y.: Orbis, 1993], 4, 6, 11.)
15) 앞서 인용한대로 마이클 노박은 남미 해방신학이 “기독교를 마르크시즘의 하나로 변화시키려는 의도”라고 비판한다. (Michael Novak, Will It Liberate?, 273.) 남미 해방신학에 대한 대표적 비판가들은 남미의 트루히요(Alfonso Lopez Trujillo) 주교, 베케만스(Roger Vekemans, S.J.), 클로펜버그(Bonaventure Kloppenburg)와 유럽의 라트징어(Joseph Ratzinger) 주교, 그리고 북미의 느하우스(Richard Neuhaus), 노박(Michael Novak), 맥켄(Dennis P. McCann) 등이 있다. 이들의 비판의 요지는 (1) 해방신학이 실천(praxis)을 진리의 규범으로 삼으며, (2) 인간개발을 사회적, 정치적 변화로 국한시키며, (3) ‘오직 한 역사’만을 이야기함으로써 구속사(salvation history)를 일반사로 축소시키고, (4) 신앙을 정치로 축소시키며, (5) 하나님의 나라를 인간의 진보와 해방운동과 동일시하며, (6) 개인의 죄를 부인하고 구조적 죄만 강조하며, (7) 성서가 말하는 가난한 자를 사회 · 정치적 계급과 동일시 한다는 점 등이다. (McGovern, Liberation Theology and Its Critics, 99-101에서 정리.)
16) Miguez Bonino, Doing Theology in a Revolutionary Situation, 144; Moltmann, “Political Theology and Theology of Liberation,”60.
17) Moltmann, “An Open Letter to Jose Miguez Bonino,”in Liberation Theology: A Documentary History (Maryknoll, N.Y.: Orbis, 1990), 199.
18) ‘전통’ 마르크스주의자인 키는 남미 해방신학이 “충분히 마르크스적이지 않으며” 특별히 종교에 대한 마르크스의 비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Alistair Kee, Marx and the Failure of Liberation Theology [Philadelphia: Trinity Press International, 1990], passim.) 피에로는 구티에레즈 신학을 논하면서 그의 신학이 “사회적 진보주의와 신학적 보수주의의 결합”이라고 비판한다. (Robert McAfee Brown, Theology in a New Key: Responding to Liberation Themes [Philadelphia: The Westminster Press, 1978], 121-123에서 재인용.)
19) 총 13장 가운데 제2장과 6장만 그 내용을 담고 있으며, 이것의 분량은 전체 170페이지 중 20페이지뿐이다.
20) Comblin, The Church and the National Security State, 140-142, 220.
21) Franz Hinkelammert, The Ideological Weapons of Death: A Theological Critique of Capitalism (Maryknoll, N.Y.: Orbis, 1977)을 보라.
22) Comblin, Called for Freedom: The Changing Context of Liberation Theology (Maryknoll, N.Y.: Orbis, 1998), 214.
23) Leonardo Boff, Ecology and Liberation, 99. 맥가번은 이에 대해 종속이론은 실제로 정당의 건설이나 대중적 운동으로 나아가지 않는 반면, 마르크스주의는 변화를 위한 구체적인 전략과 전술 그리고 운동에 연결되기 때문에 예민하게 받아들여졌다고 설명한다. (McGovern, Liberation Theology and Its Critics, 99-101).
24) 존 캅 역시 남미 해방신학자들이 마르크즈수의를 “주요 대화 파트너”로 삼고 남미 해방신학자들이 기독교를 마르크스주의 쪽에 위치지운 것은 그것이 “기존의 질서에 반하기 때문”이라고 인식한다. (John B. Cobb, Jr., “Liberation Theology and the Global Economy,” in Liberating the Future: God, Mammon and Theology, ed. Joerg Rieger [Minneapolis: Fortress Press, 1998], 34.)
25) 예를 들어 미구에스 보니노는 사회주의를 유일한 실제적 대안이라고 보았는데, 왜냐하면 “자본주의는 결코 개혁될 수 없기 때문이다.” (Miguez Bonino, Doing Theology in a Revolutionary Situation, 52). 구티에레즈도 “개혁이 아니라 혁명, 발전이 아니라 해방, 근대화가 아니라 사회주의”를 말했는데 이도 같은 이유에서이다. 만약 자본주의가 개혁되어 가난한 사람들의 생존을 위한 기본적일 필요를 충족시켜줄 수 없다면, 당시의 상황에서는 사회주의가 유일한 실제적 대안이 되는 것이다. (Gutierrez, The Power of the Poor in History: Selected Writings [Maryknoll, N.Y.: Orbis, 1983], 45.)
26) 아스만(Hugo Assmann)에게 있어서 ‘자본주의 대 사회주의’라는 이분법은 남미 신학의 ‘원죄’이기까지도 하다. (Michael Novak, ed. Liberation Theology and the Liberal Society [Washington D.C.: American Enterprise Institute for Public Policy Research, 1987], 59-60을 보라.)
27) Leonardo and Clodovis Boff, Introducing Liberation Theology, 93; McGovern, Liberation Theology and Its Critics, 138-139에서 재인용.
28) 사회주의 혁명을 이야기한 구티에레즈가 그 예이다. 그는 페루의 전설적인 인물인 마리아테기(Jose Carlos Mariategui)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마리아테기는 유럽 마르크스 정당들의 무신론과 과학적 도그마주의를 거부한 마르크스주의 이론가이다. 그는 남미에서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 간의 대화를 주도한 사람이며 1920년대에 ‘페루 공산당’을 창당하는데 중심적 역할을 했다. 이 마리아테기를 따라 구티에레스는 언제나 ‘사회주의로 가는 토착적 길’ 혹은 ‘Indo-American 사회주의’를 주장하였다. (Gutierrez, A Theology of Liberation, 54-57; McGovern, Liberation Theology and Its Critics, 149; Gary Dorrien, Reconstructing the Common Good: Theology and the Social Order [Maryknoll, N.Y.: Orbis, 1990], 104를 참조하라.)
29) 도리언이 지적하듯이 사회주의에 대한 그와 같은 정의는 대기업과 소기업 사이의 가장 기본적인, 나아가 경제적 사회화의 다양한 형태 간의 차이를 무시하는 것이다. (Dorrien, Reconstructing the Common Good, 110-113). 세군도는 이렇듯 사회주의에 대한 구체적 모델을 제시하지 않는 (혹은 못하는) 이유가 “미래를 예측하거나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강변하나 이는 문제의 핵심을 피한 것으로 보인다.
30) 남미 해방신학에 우호적인 도리언은 이 때문에 남미 해방신학이 말하는 사회주의가 사실상 ‘관료적 권위주의,’ ‘국가 집체주의,’ 혹은 ‘집단적 노예로의 길’을 의미할 수도 있다고 비판한다. 남미 해방신학에 비판적인 노박은, 남미 해방신학에서 사회주의란 말은 “최고의 이상향”을 가리키는 것이며 자본주의는 이와 정반대로 “최고의 이상향의 부재”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는 자본주의에 대한 “제국주의적 개념정의”라고 비판한다. (Novak, Will It Liberate?, 172.)
31) Moltmann, “An Open Letter to Jose Miguez Bonino,” 199-202. 몰트만은 정치적 자유와 민주주의를 강조하는 민주적 사회주의자이다. 그는 이 두 가지를 의식적으로 강조하지 않는 남미 해방신학자들을 위험하게 보았다. 하지만 구티에레즈는 정치적 자유와 민주주의를 강조하는 전통이 서구 자유주의의 전통일 뿐이고, 이것이 지난 2백 년 동안 자유의 이름으로 약탈적인 자본주의를 전 세계에 확장시켜 나갔기 때문에 이에 비판적이라고 말한다. 그는 ‘민주적’이라는 수사도 종종 경제적 수탈과 심지어 군사적 개입을 정당화하는 수사로 사용되는 점에 매우 비판적인 것이다. 때문에 구티에레즈에게 중요한 것은 부르조아 정치학의 개혁주의적 수사학으로부터의 완전한 분리이다. (Dorrien, Reconstructing the Common Good, 108-109에서 재인용.)
32) Comblin, Called for Freedom, 99, 112-113, 207.
33) Leonardo Boff, “Salvation and Liberation,” in Concilium (1974), 88-90; Segundo, “Capitalism-Socialism: A Theological Crux,” in Ibid., 115; Miguez Bonino, “Love and Social Transformation in Liberation Theology,” in The Future of Liberation Theology: Essays in Honor of Gustavo Gutierrez, eds. Marc H. Ellic and Otto Maduro (Maryknoll, N.Y.: Orbis, 1989)., 124.
34) Rubem A. Alves, “Christian Realism: Ideology of the Establishment,” in Christianity and Crisis, Sept. 17, 1993, 175.
35) 구티에레스에 의하면 신학의 기본과제는 “사회주의 이론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눈으로 현재 역사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해방을 향한 실천의 의미를 성찰하는 것”이다. (Gutierrez, The Power of the Poor in History, 101).
36) Boff, Ecology and Liberation, 96-98.
37) 브라운은 기존의 전통적 신학과 남미 해방신학의 차이점이, (1) 다른 출발점 : 가난한 자, (2) 다른 매개점 : 비인간(non-person), (2) 다른 도구 : 사회과학, (4) 다른 분석 : 갈등의 현실, (5) 다른 방식의 개입 : 실천(praxis), 그리고 (6) 다른 신학 : 후속행동(second act)이라고 정리한다. (Robert MacAfee Brown, Theology in a New Key, 60-74.)
38) Boff, “The Originality of the Theology of Liberation,” in The Future of Liberation Theology, 41-43.
39) Alfred T. Hennelly, Liberation Theology: A Documentary History (Maryknoll, N.Y.: Orbis, 1990), 16에서 재인용.
40) 실제로 북미 신보수주의 신학자인 마이클 노박은 오래전에 쓰여진 성서의 정치경제학을 현대사회에 적용하는 것은 ‘성서 근본주의’(biblical fundamentalism)이며 하나님은 성서 밖에 일반계시로 존재하며 아무도 성서 한가지에서만 특정한 정치경제 체제를 유추해 낼 수 없다고 말한다. (Novak, The Spirit of Democratic Capitalism [New York: A Touchstone Book, 1992], 21; Novak, “Political Economy in Our Time,” in Three In One: Essays on Democratic Capitalism, 1976-2000 [New York: Rowman & Littlefield Publishers, Inc., 2001], 182.)
41) Leonardo and Clodovis Boff, Introducing Liberation Theology, 3.
42) Clodovis Boff, “Mothodology of the Theology of Liberation,” 15.
43) Victorio Araya, God of the Poor: The Mystery of God in Latin American Liberation Theology (Maryknoll, N.Y.: Orbis, 1987), 130.
44) Gutierrez, A Theology of Liberation, 116.
45) 스리랑카의 신학자 피에리스가 지적하다시피 하나님과 맘몬 사이의 화해할 수 없는 적대관계에 대한 가르침은 기독교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종교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것이지만, “하나님과 가난한 자들 사이의 돌이킬 수 없는 계약관계”를 가르치는 것은 오직 기독교의 성서뿐이다. (Aloysius Pieris, “Monastic Poverty in the Asian Context,” in Love Meets Wisdom: A Christian Experience of Buddhism [New Delhi: Intercultural Publications, 1988], 90).
46) 구티에레즈에 의하면, “우리 대륙에서의 해방은 경제적 · 사회적 · 정치적 종속을 극복하는 것 이상을 의미하는데, 역사 속에서 인간의 해방의 과정은 인류가 자기됨(the becoming of humankind)을 실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역사의 목표가 단지 “보다 낳은 삶의 조건의 창출이나 급진적인 사회혁명”이 아니라 “인간이 되는 새로운 길의 지속적인 창출, 또는 영구적 문화혁명, 혹은 새로운 인간됨의 건설”로 보았다. (Gutierrez, A Theology of Liberation, 17-19, 21-22, 24-25, 56.)
47) 구티에레즈는 상당부분 인간의 역사를 ‘자아해방’(self-liberation)의 과정으로 이해하고 있다. 미구에즈 보니노도 같은 주장을 한다. “해방은 현재의 체제에 의해 왜곡된 개인주의적 인간이 연대와 창조성을 가진 ‘새로운 인간’(hombre nuevo)으로 형성되는 과정을 의미한다.” (Miguez Bonino, Dong Theology in a Revolutionary Situation, 40.)
48) 헤겔의 『역사철학』(Philosophy of History, 1837)을 보면 “세계의 역사는 자유의식의 진보과정 외에 다름 아니며 자유는 역사의 절대적 목표”이다. (G.W.F. Hegel, The Philosophy of History [New York: Dover Publications, 1956], 225.) 이러한 19세기 역사철학에 기초하여 해방신학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집단적이고 주체적인 역사의 활동주체로 보았던 것이다.
49) Gutierrez,” Toward a Theology of Liberation,” in Hennelly, ed., Liberation Theology: A Documentary History, 67-69.
50) Comblin, Called for Freedom, 50.
51) Dennis P. McCann, Christian Realism & Liberation Theology: Practical Theologies in Creative Conflict [Eugene, OR: Wipf and Stock Publishers, 2001], 184-185, 194, 197을 보라.
52) Jon Sobrino, “Central Position of the Reign of God in Liberation Theology,” in Systematic Theology, 72.
53) 북미 신보수주의 신학은 유토피아적 사상에 대한 반발로 은혜의 성육신을 강조하는데, “은혜는 모든 곳에 있”고 따라서 현대 자본주의의 핵심적 기관인 기업(corporations) 안에서 있다. 이 점에 관해서는 필자의 다음 논문(예정), “북미 신보수주의 신학과 마이클 노박의 ‘창조성’ 신학 비판”을 참조하라.
54) Boff, “Salvation and Liberation,” in Concilium (1974), 80-82, 87; Gutierrez, A Theology of Liberation, 133; Gutierrez, The God of Life (Maryknoll, N.Y.: Orbis, 1998), 92, 101; Sobrino, Spirituality of Liberation: Toward Political Holiness (Maryknoll, N.Y.: Orbis, 1985); Sobrino, Jesus the Liberator: A View from the Victims (Maryknoll, N.Y.: Orbis, 2001), 99, 129를 보라.
55) Sobrino, Systematic Theology, 62, 67, 79-80, 82를 보라.
56) Sobrino, “Jesus and the Kingdom of God,” 72, 126; Sobrino, Spirituality of Liberation, 125, 131; Sobrino, Jesus the Liberator, 99, 129; Gutierrez, A Theology of Liberation, 99, 103; Gutierrez, The God of Life, 99, 107; Gutierrez, The Truth Shall Make You Free (Maryknoll, N.Y.: Orbis, 1991), 146을 보라.
57) 소브리노는 하나님의 나라가 “완전히 하나님의 주도에 의한 선물이자 은혜”라고 말한다. (Sobrino, Jesus the Liberator, 7.) 구티에레즈도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자유롭고 공로에 의존하지 않는 사랑이며 이것은 인간의 도덕적이거나 종교적인 노력에 의존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Gutierrez, A Theology of Liberation, 104; Gutierrez, The God of Life, 115; Gutierrez, The Truth Shall Make You Free, 144를 보라.)
58) Gutierrez, The God of Life, 118.
59)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말하면서 그렇다고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라고 말한다. (로마서 3:23-31 참조)
60) McCann, Christian Realism & Liberation Theology, 157, 194.
61) Moltmann, “An Open Letter to Jose Miguez Bonino,” 197-200.
62) Miguez Bonino, Doing Theology in a Revolutionary Situation, 144-150을 보라.
63) Cluade Geffre, “Editorial: A Prophetic Theology,” in Concilium (1974), 9f.
64) Segundo, “Capitalism-Socialism: A Theological Crux,” in Ibid., 111-113, 117.
65) 20세기 기독교신학에서의 종말론 부흥의 역사는 Carl E. Braaten, “The Kingdom of God and Life Everlastin,” in Christian Theology: An Introduction to Its Traditions and Tasks, eds. Peter C. Hodgson and Robert H. King (Minneapolis: Fortress Press, 1994)을 참조하라.
66) 몰트만의 종말론에 관해서는 특별히 Moltmann, The Coming of God: Christian Eschatology (Minneapolis: Fortress Press, 1996); Moltmann, “Liberating and Anticipating the Future,” in Liberating Eschatology: Essays in Honor of Letty M. Russell. eds., Margaret A. Farley and Serene Jones (Louisville, Kentucky: Westminster John Knox Press, 1999) 등을 보라.
67) Boff, “Salvation and Liberation,” in Concilium (1974), 80-82, 87.
68) Segundo, “Capitalism-Socialism: A Theological Crux,” in Ibid.을 참조하라. 그는 마태 11:2-5와 누가 7:18-22를 근거로 “예수의 신학”을 말한다. 세례요한이 예수께서 하시는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당신이 오실 그이인가’라고 물을 때 예수께서는 직접적 답변을 하지 않으시고 단지 자신이 하고 있는 일, 즉 “맹인이 보고, 못 걷는 사람이 걷고,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고, 귀먹은 사람이 듣고,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보고 들은 대로 말하라고 한다. 즉 세례요한의 ‘종말론적’ 질문에 대해 예수는 지극히 역사적이고 상대적이며 모호한 ‘시대의 징조들’을 가지고만 답할 뿐이다. (다시 보게 된 맹인은 후에 노안으로 다시 못 보게 되었을 수도 있고, 다시 살아난 자도 다시 죽었을 것이다.)
69) Gutierrez, A Theology of Liberation, 124.
70) Dussel, “Domination-Liberation: A New Approach,” in Concilium (1974), 69.
71) Moltmann, “Political Theology and Theology of Liberation,” 69.
72) Gutierrez, A Theology of Liberation, 54-57.
73) Miguez Bonino, Doing Theology in a Revolutionary Situation, 23, 38, 195.
74) Gutierrez, A Theology of Liberation, 124.
75) 영어로 ‘no where’에서 w 한 글자만 앞으로 당기면 ‘now here’가 된다.
76) 이에 관해서는 크게 네 가지의 서로 다른 견해가 존재한다. (1) 비관적인 견해, 즉 ‘혁명의 죽음’ (로즈마리 류터가 여기에 속함). (2) 낙관적 견해, 즉 ‘people power’의 승리로 보는 견해 (몰트만이 여기에 속함), (3) ‘예언적’ 견해, 즉 서구의 승리가 아니라 근대화의 모델에 기초한 서구 전체의 붕괴의 시작으로 보는 견해 (John Gray, False Down: The Delusion of Global Capitalism [New York: The New Press, 1998]), 그리고 마지막 (4) 가장 대중적 견해로 자본주의의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승리로 보는 견해 등, 이상 George Katsiaficas, ed. After the Fall: 1989 and the Future of Freedom (New York: Routledge, 2001), 35, 48-49에서 정리.
77) 사실 콤블린은 해방신학의 잘못이 “실제로 존재하는 사회주의’에 대한 공개적인 비판을 하지 않음으로써 침묵이 그들에 대한 승인을 의미하는 것으로 비쳐졌고 이것이 바로 사회주의의 붕괴가 해방신학의 몰락을 의미한다는 인상을 주었다”고 개탄한다. (Comblin, Called for Freedom, 214.)
78) Comblin, Ibid., 113-118. 때문에 그는 해방을 통한 사회주의로의 구조적 변혁 없이 ‘시장 경제 안에서의 사회복지적 개혁’을 주창한다. 흥미롭게도 그는 아시아의 네 마리 호랑이 모델을 따라 수출지향적 산업화가 남미가 나아갈 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이제 ‘해방’이라는 말 대신에 남미의 신학이 ‘자유’라는 말을 써야 하며 그래서 해방의 신학이 아니라 '자유의 신학’(theology of freedom)이라고 이름까지 바꿀 것을 제안한다.
79) Pablo Richard, “Liberation Theology in Latin America in Dialogue with Theologies from Africa, Asia, and the Minorities in the United States: A Historical Perspective,” in Voices from the Third World, Vol. 18 No. 2, December 1995, 38-43.
80) Hugo Assmann, “The Improvement of Democracy in Latin America and the Debt Crisis,”in Liberation Theology and the Liberal Society, 59-60.
81) Gutierrez, “Liberation and Development,” in The Density of the Present: Selected Writings (Maryknoll, N.Y.: Orbis, 1999), 130f.; Gutierrez, “New Things Today,” in Ibid., 50-52, 54; Gutierrez, “Liberation Theology and the Future of the Poor,” in Liberating the Future, 15-16, 108, 116f. 구티에레즈의 이와 같은 변화는 1991년 5월 1일 발표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Centesimus Annus에 영향받은 바 크다. Rerum Novarum 발표 100주년을 기념해 발표된 이 교황의 문서는 (Centesimus Annus의 뜻이 바로 “100주년”이다) 그동안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비판적이었던 전통적인 교황청의 입장에서 ‘우향우’로 선회하고 있다. 교황청의 경제윤리를 ‘우향우’ 하는데 크게 기여한 사람이 바로 미국의 마이클 노박이며 그 역시 같은 문서로부터 그의 ‘민주적 자본주의’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많은 것을 인용한다. (참고로 Novak, The Catholic Ethic and the Spirit of Capitalism [New York: The Free Press, 1993], 136-138을 참조하라.)
82) Gutierrez, “New Things Today,0” in The Density of the Present, 51, 54; Gutierrez, “Expanding the View,”A Theology of Liberation, 17, 20.
83) Boff, Ecology and Liberation, 101-104, 124-125.
84) 구티에레즈는 “가난의 사회경제적 측면이 기본적인 것이나 모든 것을 다 포괄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Gutierrez, “Expanding the View,” A Theology of Liberation, 21, 23.)
85) Gutierrez, “Liberation Theology and the Future of the Poor,” in Liberating the Future, 117-118, 123. 구티에레즈에 의하면, “우리가 가난한 자들이 항상 선하며, 관대하며, 깊이 종교적이며, 따라서 가난한 자들로부터 오는 모든 것은 참되고 어떤 면에서 거룩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가난한 자들을 우상으로 만들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이 가난한 자들에 대한 우상화는 해방에 아무런 공헌을 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난한 자들과의 연대의 궁극적 이유는 가난한 사람들의 도덕적이거나 종교적인 자질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행위를 일깨우시는 하나님의 선함에 있기 때문”이다.
86) 그래서 세군도는 이에 대해 구티에레즈의 신학이 대중에 대한 비판을 잃고 있다고 비판한 적이 있다. (Segundo, “Two Theologies of Liberation,”in Liberation Theology: A Documentary History, 353.)
87) Gutierrez, “Liberation Theology and the Future of the Poor,” in Liberating the Future, 121-122.
88) 해방신학을 생태신학과 연결시키려는 그의 노력은 Boff, Ecology and Liberation; Boff, Cry of the Earth, Cry of the Poor에서 잘 나타나 있다.
89) Comblin, Called for Freedom, 98-99.
90) 구티에레즈는 “보다 보편적이고, 심오하며, 그리고 급진적인 해방의 관점”에 발전을 재위치 시킨다면 문제가 없는 것으로 간주했다. 즉 ‘사회주의 혁명’의 틀 안에서 경제발전은 “그의 진정한 의미와 무언가 가치 있는 것을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하게 해줄 것이라 믿었다. (Gutierrez, A Theology of Liberation, 24-25.)
91) John Gray, False Dawn, 102, 215.
92) Moltmann, “An Open Letter to Jose Miguez Bonino,” 196, 200.
93) George Tinker, “The Full Circle of Liberation,' in Ecotheology: Voices from South and North, David G. Hallman, ed. (Geneva, Switzerland: WCC Publications & Maryknoll, N.Y.: Orbis, 1994), 220.
94) Vine Deloria, Jr. “A Native American Perspective on Liberation,” in Mission Trends, No. 4, 262.
95) Gutierrez, A Theology of Liberation, 17-20을 보라.
96) Maria Mies and Vandana Shiva, Ecofeminism (New Jersey: Fernwood Publications, 1993), 6.
97) Boff, Cry of the Earth, Cry of the Poor, 196.
98) Moltmann, “An Open Letter to Mose Miguez Bonino,” 197-198.
99) Ivone Gebara, “The Face of Transcendence as a Challenge to the Reading of the Bible in Latin America,” in Searching the Scripture: Vol. I, A Feminist Introduction. ed. Elizabeth S. Fiorenza (1993), 178.
100) 구약성서의 희년법이 가난한 자의 해방뿐만 아니라 땅의 해방을 이야기한 것만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사실 환경의 문제는 새로운 근대의 발견이라기보다 성서 시대로 돌아가는 오래된 주제일 수도 있다.
101) 쿠바의 생태혁명에 관해서는 요시다 타로, 『생태도시 아바나의 탄생 : 작은 나라 쿠바의 커다란 도전』(서울 : 들녘, 2004)을 참조하라.
102) Leonardo and Clodovis Boff, Introducing Liberation Theology, 3.
103) Robert McAfee Brown, Liberation Theology: An Introductory Guide (Louisville, Kentucky: Westminster/John Knox Press, 1993), 9.
104) 몰트만 역시 이 정의에 동의한다. 그는 해방신학이 “하나의 상황신학이나 남미만을 위한 상황신학이 아니라 모든 인류를 위한 상황신학”이라고 말한다. (Moltmann, “Political Theology and Theology of Liberation,” 77-79.) 보프 형제 역시 남미 해방신학은 “변방에서 제기된, 그러나 보편적 의미를 갖는 문제들 위에 세워진 신학”이라고 정의한다. (Leonardo and Clodovis Boff, Introducing Liberation Theology, 88.)
105) 오늘날 경제의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에 대해서는 필자의 졸고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와 기독교윤리,” 『경제문제와 기독교윤리』(한국기독교윤리학 논총 제6집, 2004); “경제 세계화와 하이에크의 신자유주의에 대한 신학적 비판,” 『신학사상』2003 겨울, 229-262를 참조하라.
106) Comblin, Called for Freedom, 7, 203.
107) Gutierrrez,” New Things Today,” in The Density of the Present, 45, 47.
108) Gutierrez, “Liberation Theology and the Future of the Poor,” 117-118, 123.
109) Boff, Ecology and Liberation, 96-98, 120.
110) Gutierrez, Ibid.
111) 물론 이러한 신학들은, 구티에레즈의 말처럼, “귀에 좋게 들리지도 코에 좋은 냄새로 맡아지지도 않을 것”이다. ‘역사를 변혁시키는 신앙’을 기본적 통찰력으로 갖는 이러한 신학들은 물론 모두에게 받아들여지지는 않을 것이다. 헤넬리(Alfred T. Hennelly)가 지적하듯이, “가난한 사람들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이러한 신학은 시작부터 반대와 갈등에 부딪히는 운명을 타고났었다.” (Hennelly, ed. Liberation Theology: A Documentary History, 25.) 앞서 밝혔다시피 필자는 앞으로 이러한 ‘반대와 갈등’에 대해 계속 소개할 예정이다. 구체적으로 남미의 해방신학에 반기를 들고 일어난 것이 북미의 ‘신보수주의’(neo-conservative) 신학파를 소개하려 한다. 이 운동은 1979년 영국의 대처와 미국의 레이건이 동시에 집권에 성공하면서 등장한 ‘신우파’(New Right)라는 정치적 보수주의와 맞물려 1980년대 시작되었다. 이 학파는 반사회주의(anti-socialist) 신학이며, 그 대안으로 민주적 시장 자본주의(democratic market capitalism)를 제시한다. 이 진영의 주요학자들은 마이클 노박(Michael Novak), 맥스 스텍하우스(Max L. Stackhouse), 그리고 데니스 맥캔(Dennis P. McCann) 등이 있다. 
 
글쓴이 / 장윤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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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이안 바버가 보는 과학과 종교 간의 관계 유형 (김흡영) 정강길 11454 07-16
38 창조과학이 기독교인의 선택이 될 수 없는 세 가지 이유(커트 놀) 미선이 10458 07-07
37 진보는 좀더 많이 알려질 필요가 있다! 정강길 13917 06-12
36 사사기 6장9절에 담긴 비밀 : 고대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착 사건 정강길 10735 06-12
35 거룩한 전쟁 이데올로기 : "야훼는 전쟁神" 사상에 관하여 정강길 9764 06-12
34 “한국교회에서 이런 예배는 기독교 아닌 줄 알겠어요” 정강길 8595 05-22
33 기독교와 불교가 만나 구원과 해탈을 얘기하다 정강길 9509 04-28
32 <신본주의>의 반대는 <인본주의>가 아닌 <사탄주의>일 뿐 (1) 정강길 13598 02-17
31 시중(時中)신학(1) - 하나의 세계, 하나님 (장경현) 정강길 8964 01-30
30 즐겁게 반란하고 전복하라 (서정민갑) 정강길 8285 01-30
29 세계화 시대, 남미해방신학의 유산 (장윤재) 정강길 10212 01-07
28 과정신학이 '낙관적'이라는 편견에 대해.. 정강길 8601 12-16
27 함께 가는 길 - 종교와 종교의 만남 (오강남) 관리자 9400 11-22
26 [펌] 세계해방신학대회 폐막 정리..."세계화는 역설적으로 연대의 세계화로 이어져" 정강길 7955 11-16
25 [펌] 세계해방신학포럼 참관기 (2) 해방신학의 거목 레오나르도 보프 정강길 8920 11-16
24 ‘욱’하는 성질과 영성 (1) 정강길 8606 11-16
23 우리와 함께 고통을 앓고 계신 하나님 정강길 8004 11-16
22 하나님마저도 건드릴 수 없는 것!!! 정강길 7367 11-14
21 기독교가 말하는〈사랑〉Love과 〈정의〉Justice 정강길 8513 11-14
20 [말씀나눔] 정의가 이길 때까지 (박종렬) 정강길 7879 11-14
19 [펌] 신학을 어떻게 할 것인가? (김경재) 관리자 8194 11-12
18 종교다원주의 문제로 고민하는 분들께: 종교다원주의? 열린중심주의!! (5) 정강길 32590 11-09
17 진화냐 창조냐 (기독교인으로서 창조론과 진화론을 어떻게 볼 것인가) (2) 관리자 18859 11-04
16 [펌] 현경교수와의 인터뷰 관리자 12669 08-04
15 그리스도인일수록 <논리>와 놀자! 정강길 8781 06-14
14 [필독] '무조건 믿어라'의 내용에 따른 기존 기독교 분류 정강길 19325 07-02
13 에코페미니스트 현경 교수 인터뷰 (2) 관리자 13346 06-17
12 [펌] 한국신학의 태동과 흐름 김경재 7931 06-17
11 '월드컵선교'에 대한 비판적 시론 리민수 7945 06-03
10    '월드컵선교'에 대한 비판적 시론 정강길 7744 06-03
9 [펌] 한겨레21 - 하나님은 많은 이름을 가졌다.. (3) 관리자 9384 06-03
8 [펌] 존 캅의 그리스도 중심적 다원주의 (유정원) 정강길 8120 05-20
7 그리스도인일수록, <논리>와 놀자! 정강길 15873 04-30
6 [펌] 진화론과 창조론 양승영 9026 04-30
5 [펌] 예수는 정말 누구였나 - 21세기 캠페인을 하면서 박인용 9295 04-30
4 진정한 유일신론은 다원론 정강길 9491 04-28
3 악과 불완전한 하나님.. 정강길 8479 04-28
2 떼이야르 드 샤르댕의 『인간현상』을 읽고서... 정강길 46568 04-27
1 전체 한국 기독교 신앙을 보는 개괄적 이해 (처음 오신 분들은 필독!!) (19) 미선이 143576 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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