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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뇌 이데올로기>를 아십니까    
  글쓴이 : 미선 날 짜 : 13-04-05 05:05 조회(4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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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 이데올로기
 
 
 
 
뇌과학 열풍, 뇌과학은 과연 우리를 구원할 것인가?

뇌과학이 유행처럼 많은 열풍을 일으키고 있는 듯하다. 출판가도 그렇고 언론 매체들도 뇌과학 분야에 대한 집중적 관심을 많이 보이고 있다. 특히 이것이 대한민국 사회에서는 부모들의 교육열과 취업에 있어서도 자기계발 열풍과도 함께 맞물리면서 하나의 트렌드가 되고 있는 것이다.

사실 그럴 만도 한 게 인간의 뇌 연구는 어떤 면에서 자연과학 연구의 정점이라고 할 만한 점이 있다. 초기 빅뱅 이후로 137억 년 우주 진화의 과정에서 결국은 지구행성의 생명계가 마련되고 또한 그 생명계 안에서 인간 뇌 의식의 출현이 발생한 것이기에 어찌 뇌에 대한 관심이 없을 수 있겠는가. 우리는 뇌 의식의 출현 이후에야 이 우주라는 것을 의식하였고, 사물의 체계를 인식하였다. 알다시피 인류 학문의 역사는 결국 뇌 의식의 출현 이후에야 마련되었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이제는 그 관심이 너무 지나쳐 가능한 모든 사안들을 뇌로서만 설명하고 뇌로서만 해결하려는 작업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다. 이들은 심지어 존재의 정체성을 뇌에 두기도 한다. 정말 뇌를 알면 많은 문제가 해결되는 것인가?
 
물론 해결에 도움은 될 것이다. 거기까진 옳다. 하지만 뇌과학적인 문제 해결은 결코 문제 해결의 전부를 제공해줄 수도 없을뿐더러 만에 하나 이러한 뇌지상주의 경향이 하나의 대세를 이를 경우 사회적으로 볼 때 매우 심각한 문제를 낳을 수 있다고 본다.

사례, 강박장애에 대한 뇌과학적 해결과 그 한계

먼저 뇌를 안다고 해서 문제 해결의 전부가 될 수 없는 사례를 들어보자. 예컨대, 현대인들의 정신질환 중의 하나인 강박장애에 대한 뇌신경학적 설명은 다음과 같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뇌과학자 뿐만아니라 의학 종사자들 중에도 강박장애 원인을 뇌신경 회로의 이상으로 설명하는 경우들이 많은데, 즉, 강박장애는 눈 바로 위쪽 안와전두엽(orbitofrontal cortex)과 미상핵(caudate Nu) 그리고 시상(thalamus)을 잇는 신경회로가 지나치게 활성화되는 것이 원인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불안과 우울감을 조절하고 충동을 억제하는 역할을 하는 세로토닌 전달 체계에 문제가 생겨 정신 장애가 일어난다고 보는 것이다. 이미 잘 알려져 있듯이 세로토닌은 우리의 생각과 감정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결국 안와전두엽-미상핵-시상으로 이어지는 이 신경회로의 과도한 활성화로 인해 지나치게 불안을 느끼고, 원치 않는 생각과 동일한 행동을 자꾸 반복하게 된다는 것이다. 실제 강박장애의 경우 전두엽 촬영을 해보면 그 차이가 측정된다고 한다.

이때 뇌과학 입장에서는 결국 세토토닌 체계를 바로 잡는 약물치료를 그 해결로 내어놓는데, 이는 일종의 세로토닌 농도를 높여주는 방법에 해당한다. 즉, 신경세포 간의 세로토닌 균형을 회복시켜서 과도하게 활성화되었던 뇌신경 회로가 정상화되면 강박 증상이 완화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환자의 증세가 일시적으로는 좋아지다가도 여전히 재발된다는 점에 있다. 그 이유는 뇌에서 찾기가 힘들었고, 오히려 이 환자가 거주하는 일상적 영역 자체가 부조리하게 구조화된 상황에 있었다. 즉, 알고보니까 그 환자의 생활권이 애초 신경전달물질로서의 세로토닌이 제대로 마련될 수가 없는 그러한 삶의 생활구조를 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럴 경우 어찌 이를 뇌 신경에 투여하는 약물로서만 치유할 수 있겠는가? 잠간의 일시적 해결은 될 수 있을지언정 결코 온전한 대안로서의 해결 치유는 못된다.

<뇌 이데올로기>의 출현
 
사실상 뇌신경회로의 이상은 결국 사회적 삶과 함께 얽혀 있기에 결코 생물학적으로만 진단될 수가 없다. 어찌보면 그 원인은 오히려 뇌를 넘어서 있다. 수전 헐리(Susan Hurly)도 말하길, 우리의 두개골은 ‘마법의 막(magical membrane)’이 아니며. “우리는 우리 머리 밖에 있다”고 하였다.

약간 이상하게 들릴는지 모르지만, 신경전달물질인 세로토닌은 결코 공짜로만 얻어질 수 없다. 자신의 일상생활이 그나마 안정되고 행복한 소통 관계가 될 수 있을 때, 비로소 그 신경전달물질은 나의 뇌 안에 지속적으로 건강하게 생성되어질 수 있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현재 우리 시대에도 폭력적인 가부장적 구조의 가족 집안 및 서로 대화 소통이 전혀 되지 않는 부부와 부모 자녀 간의 관계를 떠올리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애초 세로토닌의 생성이 어려운 이런 불합리한 구조적 상황을 놔두고 어찌 뇌과학적 설명과 해결만을 기대할 것인가. 만일 이를 뇌과학이 해결하겠다고 나선다면, 아마도 가족 구성원 전체를 대상으로 뇌신경에 약물치료를 받도록 해야할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가족의 해체까지도 많이 경험하고 있다. 현재의 우리 사회를 보면, 치열한 무한 경쟁 시스템 속으로 벼랑 끝까지 몰아가고 있는, 매우 절박하고도 각박한 사회적 삶을 살고 있는 터라 우리의 호르몬 불균형과 스트레스 작용들은 결코 이와 무관할 수 없는데, 소위 입시 경쟁, 취업 경쟁, 사회의 양극화 현상, 불안한 국제 정세 등등 사실상 삶의 여러 가지 요소들이 몸의 불안 증세를 키우는데 한몫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뇌과학 진영이 이를 치유하려면 마치 영화 <이퀼리브리엄>에 나온 장면처럼, 전국민의 뇌에 약물을 투여시켜 얌전하게 지낼 수 있도록 조치하는 것이 그 해결책일 수 있겠다.

따라서 나 자신이 오늘날의 뇌지상주의에 대한 사회적 흐름들에 대해 이를 <뇌 이데올로기>라고 표현한 이유는 간단하다. 이른바 우리 사회가 뇌과학을 마치 많은 것들을 설명해주는 만능해결 산업으로까지 경도할 경우, 문제의 보다 근본적인 원인일 수 있는 부조리한 사회구조적 폭력의 문제에 대해선 이를 못보고 눈을 감거나 혹은 무기력할 수 있다는 점에서다. 적어도 그 부분에선 <뇌이데올로기>가 되고 있는 것이다.

뇌과학에 대한 지나친 선망과 경도는 자칫 뇌과학만능주의로 나아갈 수 있기에 구조적인 사회부조리 문제에 대해선 되려 눈을 감게끔 만들 수도 있을 뿐더러 그런 점에서 역으로 수구 우익을 양산할 수 있는 흐름에도 기여할 수 있다고 본다. 여기에는 아마도 국가기술이데올로기 역시 커다란 한 몫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지난 황우석 사태때, 문제된 사안을 덮고자 빼든 그놈의 국익레퍼토리와 애국타령들이 얼마나 우리의집단무의식 안에 깊이 박혀 있었는지를 익히 잘 경험했었잖은가.

뇌신경작용으로 인간의 희로애락 감정과 정체성 혹은 자유의지를 설명하려는 건 사실 한편으로는 필요한 일이면서도, 정작 그것만으로도 이를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태도의 경우는 참으로 뇌과학에 경도된 <뇌이데올로기>가 아니고 뭐겠는가.

인간 몸삶의 문제는 이미 중층결정화된 관계적 사태의 문제

사회구조의 문제뿐만 아니라 가정과 일터에서 형성된 생활구조 문제에서도 마찬가지다. 만일 우리가 부조리한 삶의 구조에 놓여 있을 경우 그 스트레스 해결은 결코 뇌과학적으로 온전히 해결해낼 수가 없다. (물론 잠시 일시적 도움은 되겠지만 말이다) 그것은 부조리한 구조 관계를 서로 소통하는 관계로 바꿀 수 있도록 가족 심리 상담이든 집단 상담이든 받아야 하는 것이며, 또한 사회 정책적으로도 치유가 되어야 하는 좀 더 포괄적인 차원의 삶의 문제인 것이다.

구조화된 삶의 문제가 탈각된 그런 식의 뇌 치유 접근들을 떠올려보라. 마르크스는 종교가 아편이라고 했지만, 내가 볼 때 그런 식의 뇌과학적 해결법도 충분히 삶의 아편으로 기능할 수 있다고 여겨진다. 존재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관계이며 사회성이다. 존재가 있고서 관계를 맺는 게 아니라 관계 자체가 존재를 형성한다.

최근 놀랍게도 하버드 대학교의 유명한 생물학자인 에드워드 윌슨(Edward O. Wilson)은 유전자 중심의 포괄적응도 입장을 버리고 <다수준 선택설>로 입장을 선회했다고 한다. 윌슨에 따르면, 지금까지 수행된 실험과 측정을 통해 볼 때, 자연 선택의 메커니즘에 있어 핵심은 <사회성>이라는 관계 자체에서 비롯되고 있기에 결국은 <다수준 선택설>로 갈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물론 생물학 진영에서는 진화의 자연선택이 개체냐 전체냐에 논란은 여전히 있겠지만, 적어도 나는 이 <사회성>이라는 게 존재의 부차적인 특성이 아니라 오히려 존재의 본질적인 특성이라고 보는 입장에 서 있다. 그런 점에서 말씀드리는 것이다. 상호작용이라는 관계적 특성은 이미 양자 수준에서부터 일어나고 있잖은가.
 
우리는 인간의 몸삶 건강을 생물학적 차원에만 한정시킬 수 없다. 이미 인간을 규정하는 많은 관계적 사태와 요인들이 있기 때문이다. 스탠포드 대학의 세계적인 심리학자인 필립 짐바르도(Philip George Zimbardo) 역시 다음과 같이 언급한 바 있다.
 
“우리는 개인에게만 국한되었던 기존의 의학적 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질병에는 상황성, 시스템의 문제도 있다는 것을 인지하는 새로운 공공보건 모델을 갖추지 않으면 안된다.”

의사이자 인류학자인 폴 파머 (Paul Farmer)는 전염병을 연구하면서 의사는 진정한 치유를 위해 정치 사회 구조의 개혁에 있어서도 함께 참여되어야 한다고 강변한다. 왜냐하면 잘못된 사회구조야말로 대량으로 병을 양산시키고 있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는 점에서다.
 
뿐만 아니라 사회와 건강 문제를 연구한 권위자인 리처드 윌킨슨(Richard G. Wilkinson)은 “평등해야 건강하다”고 말한다. 이는 책제목이기도 하지만, 실제 그의 연구는 수십개국의 국민들 건강과 사회를 수년간 연구조사하면서 얻은 결론이기도 했었다.  리처드 윌킨슨 지음, 김홍수영 옮김, 『평등해야 건강하다』(서울: 후마니타스, 2008) ; 리처드 윌킨슨 지음, 손한경 옮김, 『건강불평등-무엇이 인간을 병들게 하는가』(서울: 이음, 2011) 참조.

윌킨슨이 조사한 것 외에도 우리나라 상황에 해당하는 한국보고서도 이미 나와 있다. 이창곤 지음, 『추적 한국 건강불평등』(서울: 밈, 2007) ; 김기태 지음, 『대한민국 건강 불평등 보고서-가난한 이들은 쉽게 아팠고 쉽게 다쳤고 쉽게 죽었다』(서울 나눔의 집, 2012) 참조.

인문학적 성찰과 함께 가야 하는 뇌과학

만일 우리들이 뇌과학에만 온통 장밋빛 미래를 걸고 있는 것이라면 이는 그야말로 바보 같은 짓에 해당할 뿐이다. 그러나 한 가지 오해해선 안 될 점은, 나는 뇌과학 연구 자체가 잘못 됐다거나 뇌 연구를 그만둬야 한다는 얘긴 결코 아니니까 부디 오해는 없길 바란다. 나의 입장은 뇌과학 연구가 지닌 그 유용성은 인정하되 그것이 자리하는 범주적 한계를 지적하고 있는 것이며, 뇌과학의 범주적 한계를 자각하지 않은 채로 마치 뇌과학이 많은 문제들을 설명해주고 해결해주는 것인냥 주장하는 일부 오만한 뇌지상주의자들에게 경고하는 것뿐이다.

우리의 몸에는 부모의 몸이 새겨져 있다. 이는 생물학적 유전의 차원만을 뜻하는 게 아니다. 어릴 때부터 부모와 주고받는 관계, 즉 부모로부터의 교육과 학습에 따라 달라지는 몸의 차원을 말한다, 우리 사회와 문화에 대한 것들 역시 <몸화>되어 있다. 이는 결코 생물학적으로 발견되지 않는다. 이를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하는 건, (예컨대 감정이 뇌의 작용이라고들 하나) 우리 역사의 전라도와 경상도 지역 감정이 역사학적 차원보다 신경학적 발견으로 대체될 수 있다고 주장하거나 혹은 이를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만큼이나 어불성설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어느 정도 관련된 뉴런의 작용들은 저마다 있을 수 있겠지만, 그것의 전모는 신경세포 차원에서 발견되어지는 게 아니다. 즉, PET(양전자방출단층촬영)나 fMRI(기능성자기공명영상) 등의 뇌 영상 촬영만으로는 이를 찾아볼 수 없다는 얘기다. 더 나아가 동서양의 철학 및 형이상학 역시 우리 자신의 생활방식을 결정지을 만큼 일상적 관점과 시각을 좌우할 정도로 무의식적으로 <몸화>되어 있다( 참조).
 
결국 인간은 생물학적 존재이면서 동시에 생물학적 차원을 넘어서 있는 그러한 존재인 것이다. 더군아 인간의 삶에서 일어나는 정신 질환에 대해 뇌과학은 그것의 현상을 하나하나 세부적으로 기술(description)할 뿐이지 이를 온전히 설명(explanation)하거나 하진 않는다. 인과적 사태를 서술하는 것과 사태의 전모를 온전히 설명해내는 것은 다른 것이다(물론 서술도 절반의 설명일 순 있겠다). 진정한 해명은 삶의 총체적 차원에서 수행될 때 가능할 수 있을 뿐이다.

뇌과학에서는 개체적 신체 안의 구체적인 신경회로의 문제들을 지적하는 것뿐이기에 그나마 약물치료 같은 해법은 뇌과학이 제공하는 가장 효과적인 대안일 수는 있겠다. 그러나 인간은 동시에 사회적 존재이면서 <의미장>에 놓여 있는 존재다. 단순히 중력장과 물질 감각장에만 놓여 있는 게 아닌 것이다. 가끔 뇌과학을 한다는 사람을 보면 이 사실을 망각한 채로 과도하게 용감(?)한 발언을 할 때가 많다.
 
물론 이들이 뇌에 대해선 똑똑할는지 모르나 인간에 대해선 결코 똑똑한 것은 아니라고 본다. 인간은 뇌를 지녔으나 뇌에만 종속되어지는 그러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인간의 뇌에는 우리 사회 문화의 구조적 관계들 그리고 가정과 일터로부터 받는 정서적 관계들 그리고 신체적 경로들로부터 오는 인과적 영향들이 함께 깃들어 있다. 그렇다면 내가 볼 때 진정한 뇌과학은 자연과학적 성과들을 포함해 인간과 사회 문화 역사에 대한 종합적인 인문학적 성찰과 함께 가야함이 마땅하다.
 
"인간이란 무엇인가(혹은 누구인가)" 하는 이 성찰은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협력적 관계에서 터득되어질 수 있는 것들이지 자연과학의 단독적 탐구만으로는 결코 성찰될 수가 없다는 얘기다. 왜냐하면 인간의 추상 능력이 발현된 의미장을 직접적으로 다루는 건 자연과학이 아닌 인문학 분야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인문학을 수행하게 된 건 생물학적인 인간 뇌의 능력 덕분이다.
 
그런데 그 능력이란 게 바로 <고등한 추상 능력>이다. 이는 호모 사피엔스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매우 뚜렷하게 보여주는 특징에 속한다. 지금까지 지구상 어디에도 인문학적 성찰을 하는 침팬지를 나는 본 적이 없다. 고로 인간에게서만큼은 적어도 인문학과 자연과학은 서로 맞물려 있는 관계인 셈이다. 분명한 사실은, 뇌과학도 결국 관계 없이 자존할 수 없는 분야라는 점이다.
 
잊지말자. 세로토닌은 결코 뇌 안에서 마냥 공짜로만 생성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어쩌면 한 개체의 세로토닌의 생성에 결국은 전체 세계의 협력들이 함께 관여되어진다는 쪽이
좀 더 설득력 있지 않을까 싶다. 적어도 지속가능한 안정적 차원의 생성을 확보하려면 분명 그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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