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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어느 관념적 자유주의자에 대한 단상    
  글쓴이 : 미선이 날 짜 : 10-03-12 05:38 조회(5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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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관념적 자유주의자에 대한 단상
 
방편적 소통 자체의 현실을 무시하는 사유의 일방적 자유로움과 게으름 
 
 
"달은 보지 않고 왜 손가락만 보는가?"
 
"손가락 없이 달을 가리킬 수 있는가?" 
 
"그렇다면 달과 손가락 모두 봐야 하지 않겠는가!"
 
 
책상을 '탕'치는 현각의 퍼포먼스에서 발견되는 자기 모순

현재 본인은 불교대학원을 다니고 있다보니 불교인들 중에는 자칫 잘못된 쪽으로 빠지는 <관념적 자유주의자들>을 종종 볼 수 있기도 하다. 이들은 대체로 <마음 근본주의자들>이기도 한데, 사물을 보는 건 마음에 달려 있기에 마음을 세상의 근본으로서 알파요 오메가로 보는 것이다. 특히 유식불교와 선불교 진영에서 좀더 많이 찾아볼 수 있는데, 실제로 현각 스님의 선불교 강의 중에 이런 대목이 있다. 그는 책상을 ‘탕’하고 치면서 “이것이 무엇입니까?”라고 묻는다.

그는 선불교(Zen)에 대해 설명하면서 생각 이전, 언어 이전으로 돌아가야 이를 깨달을 수 있다고 말한다. 생각과 언어들에 사로잡히면 이를 영원히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때의 현각이 원하는 정답은 무엇일까? 그 어떤 말과 글 혹은 생각과 개념들을 얘기해버리면 결코 답이 못된다. 정답은 그냥 똑같이 책상을 ‘탕’하고 치면 된다. 그 뿐이다. 이는 생각과 개념으로는 절대로 순수한 진리를 깨달을 수 없다고 보는 일종의 퍼포먼스라고 해야 할 것이다.

선가에서는 불립문자(不立文字)·교외별전(敎外別傳) 또는 직지인심(直指人心)이라 하여 말이나 글로서가 아닌 마음과 마음이 직접 소통하는 체험을 강조한다(이러한 선불교에 대해 이미 많은 학자들은 인도에서 발생된 초기 석가의 불교와 다르게 매우 중국화된 불교로서 보고 있다. 특히 중국 도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얘기한다). 그런데 자칫 이러한 내용들을 문자주의적으로 받이들이면, 이는 매우 위험스런 완전한 순수 관념에 해당될 뿐이다. 즉, 우리는 생각과 개념 그리고 언어나 글 없이 소통하기란 힘든 불가피한 현실임에도 순수한 직접적 마음의 소통 이것이 가능하다면서 이를 추구하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위의 현각도 자신의 생각을 전하기 위해서 그냥 책상만 탕 친 게 아니라 “What is this?"라고 엄연히 자신의 말로서 전달하며 묻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선불교가 뭔지에 대해선 글로 쓰며 책 까지 내고 있다는 점에서 자기 모순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제 아무리 엄청난 불교수행의 제1인자라도 진리를 전달할 때만큼은 직접적 텔레파시로 전달해주고 있진 않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에 대해 또다시 할 수 있는 답변이라곤, 언어나 글은 진리를 전달하기 방편일 뿐이라고 얘기한다. 물론 그러한 것들은 진리 전달의 방편일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방편 자체의 불가피성은 제아무리 진리를 깨달아서 고고한 경지에 이르렀다고 해도 결코 피할 수 없는 현실임을 여실히 입증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스스로의 한계마저 인정하는 답변이기도 한 것이다.
 
보편적 논리적 소통의 차원을 무시하는 관념적 자유주의(또는 일방적 관념주의)
 
분명히 말하지만, 언어나 글, 생각과 개념들의 착종에 얽매이는 것도 문제이지만, 이를 완전히 싸그리 무시하고 그저 책상만 ‘탕’ 치며 “진리가 뭐냐?”를 논한다면 그야말로 유치한 수준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언어나 글, 생각과 개념들은 소통의 차원에서는 불가피하게 필요할 뿐이며, 그러한 소통을 위해선 정교하고 엄격하게 사용할 수밖에 없는 것뿐이다. 결국은 타자와의 소통을 위해서는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논리적 규칙들을 필요로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소통 자체가 가능한가 라고 얘기할 수도 있겠으나, 그렇다고 대화 소통의 현실 자체를 무시하고 아무렇게나 지껄이거나 내뱉을 수도 없는 노릇이잖은가. 그것 자체가 절대적 진리가 아니라고 해도 단지 현실적 소통을 위한 최선의 노력으로선 분명하게 필요한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앞서 간 사람들의 말과 생각 및 개념 이해들에 대해서도 공부를 해야만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것을 절대화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나의 생각을 최선으로 소통하고자 하기 위해서 말이다.

이러한 소통 자체의 피할 수 없는 현실을 무시한다는 점에서 이들은 전형적인 소통 불능의 관념주의자에 해당된다. 게다가 소통 차원의 불가피한 현실을 무시한 채로, 오직 자기식으로 규정한 말과 개념만을 전달하려는 그러한 일방적 태도라면 이는 참으로 타자와의 소통을 무시하는 일방적 사유라는 점에서 사유의 폭력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진정으로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선 방편 자체의 소통성에 대해서도 분명하고 엄격하게 요구될 수밖에 없다고 하겠다.

실제로 이런 패턴의 관념적 자유주의자들은 불교를 믿는다는 사람들을 비롯해서 도처에 꽤 많다. 순수 의식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매한가지다. (아마도 보수 기독교인들은 자신이 속한 기독교 세계만 알고 있으니 이런 형편들을 잘 모를 수 있겠으나 본인은 불교대학원을 다니기에 이를 매우 가까이서 접하기도 한다. 실제로 기독교를 포함해서 불교든 어느 종교든 아무런 문제와 폐해가 없는 종교는 없다고 보여진다).
 
이들은 언뜻 보기엔 모든 생각과 철학사상들 및 모든 종교들 및 붓다와 예수 등등 그러한 것들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움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게 중에는 예수를 영지(비밀스런 지식)를 전한 지혜자로 보는 이유도 이쯤되면 알만하잖은가. 역사적 예수의 실존이 중요한 문제가 아닌 것이다.

하지만 정작 이들의 치명적 한계는 말과 생각 및 개념을 전달하는 방편의 소통 자체에 대해선 보편적 소통성을 상실한 채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자기가 던지는 얘기에 대해선 매우 일방적 소통성만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분명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고 하겠다. 그냥 자신들이 던지는 말과 글에 대해선 “그저 생각하지 말고(혹은 오직 모를 뿐) 그냥 깨달아라”는 것이다.

책이나 논문에 있는 진리보다 그저 책상 한 번 ‘탕’ 치면 진리가 전달될 수 있다고 보는 관념적 자유주의자들인 것이다. 아, 이 얼마나 게으른 불교도들인가! 물론 자신은 이것이야말로 진리를 가장 빨리 깨달을 수 있는 지름길이라고 얘기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 얼마나 게으른 진리 탐구자들인가!

그러면서도 정작 자신이 전달하고 싶은 말과 글은 몽땅 다 한편으론 내뱉고 있다. 단지 자신의 말과 글은 자신이 깨달은 진리를 전달하기 위한 방편이라면서 말이다. 아, 이 얼마나 순진스런 사유의 폭력적인 관념주의자들인가!
 
사실상 우리는 달과 손가락 모두 봐야 한다. 이미 현실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다. 진리에 이르는 왕도란 없다. 그게 우리 시대의 최선인 것이다.

P.S.- 아마도 나의 이러한 비판에 대해 틀림없이 이들은 또다시 자신의 말과 글로 자신의 마음 생각을 전달할 것이리라! 그러면서 자신의 말과 글과 생각에 얽매이지 말라고 하면서 말이다. 정말 이 웃기는 이런 장난질에 많은 사람들이 미혹되서 놀아날 하등의 이유가 없다고 보여진다. 만일 응대한다면 이들에 대한 대처 방법은 매우 간단하다. 그냥 똑같은 말과 반응으로서 대해주면 그만이다. 왜냐하면 어차피 방편으로만 볼 뿐이니 어떻게 말하든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다.
 

[또다른 참조글] 불교 안에 깃든 위험스런 관념성에 대하여
http://freeview.org/bbs/tb.php/e005/10

 
늘오늘 (10-03-12 09:17)
 
한성영씨의 ‘마음’, 기독교인의 ‘복음’, ,,
이들 만병통치약(?)을 아무 데나 들이대는 게 문제겠죠.
질병에 대해서, 목사가 의사를 앞에 두고 설교를 하는 게 문제이고,
철학에 대해서, 땡중이 학자를 앞에 두고 가르치려 드는 게 문제죠.

현각 스님의 퍼포먼스는 느낌에로의 초대라고 생각합니다.
남의 말이나 글이 아닌, 생생한 현실을 직접 느끼라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그래야 한다는,,

“아빠, 바람이 달아!”
이 아이가 현각 스님보다 한 수 위?  ㅋㅋ^^

하늬바람 (10-03-12 09:26)
 
좋은 글 잘 보았습니다.
전 지식이 없어 공감한다는 말씀을 드릴 수 없어 미안합니다. 참 님의 학구열 만큼은 대단하십니다. 불교 대학원을 다니신다구요? 경하드릴 일입니다. 공부를 많이 하셔서 치우침 없는 균형잡힌 주장을 하실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현각스님의 반론을 들을 수 없어 아쉽군요. 독자로선 흥미로운 논쟁이 될 것이고 그 사유의 의미를 알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정실장님의 건필과 열공을 기대합니다.

미선이 (10-03-12 09:45)
 
다닌지도 이젠 꽤 되지요. 저 역시 현각의 반론을 못들어 유감이군요^^
하지만 평소 스님들 및 불교학 전공 교수들과 대화하면서 이 문제를 언급한 적은 많습니다.
게 중에는 이미 이러한 제 생각과 일치하시는 분도 계셨고
저의 견해로 인해 미처 생각못했다며 자신의 생각을 교정한 분도 계신 답니다.
이곳 세기연 게시판에는 불교 진영의 개혁자들의 글이 있는데 오히려 저는 그러한 분들과 비슷한 입장이지요.

불교는 매우 흥미로운 종교입니다. 경전도 많고 역사적 변천마다 변화된 갈래들이 있습니다.
인도에서의 초기 불교와 유식불교 및 중국화된 선불교는 역시 서로 간에 많이 다른데
우리나라의 경우는 중국불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답니다. 하지만 일반 대중들이 믿는 불교는
매우 샤머니즘화된 측면이 있는 기복 불교의 모습이 많지요. 학교를 다니다보니 조계사 세미나 혹은
절에도 갈 기회가 많은데 특히 절에 가보면 마치 교회에 각종 헌금 봉투들이 펼쳐져 있는 것처럼
주렁주렁 연등을 매달아 복을 기원하는 것을 정말 많이 본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보수 기독교인들이 그것과 거의 다르지 않은 느낌이랍니다.
하지만 초창기 힌두이즘의 한계를 뛰어넘은 석가의 신선한 통찰만큼은 꼭 인지할 필요가 있답니다.
그리고 이곳 게시판에 있는 암베드카르의 불교 이해도 저는 좋아하는 편입니다.

하늬바람 (10-03-12 11:30)
 
전 아쇼카 집정시절 불교가 지중해 연안 즉 레반트 지역에 많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 짐작은 하면서도 이를 논증하질 못해서 미안합니다.  성서에도 환생설 같은 불교의 사상 유입이 발견되기도 하니까요. 구교의 예배는 불교의 예배의식과 많이 닮아 있는데 아마도 이건 이교도의 재례방식을 흡수한 것으로 보여지기도 합니다. 많은 면에서 구교와 불굔 닮은 꼴이 발견되거든요. 아마 개신교보단 구교가 불교에 더 친화적이지 않는가 보여집니다. 불교가 기독교에 미친 영향이라던지. 이런 분야의 집중 연구도 좋을 것으로 보이는데 실장님 어떠세요. 허지만 자기의 좋아하는 분야가 있을 것이고 목표하시는 분야가 있을 것이니 얘길 해 놓고도 벌줌 하네요. 영지주의가 뭔진 아직 잘 개념이 잡히질 않지만 아마 불교의 많은 영향이 미쳤을 거라고 추측됩니다. 여기에 헬레니즘 철학 사상이 덧입혔을 거고 이방종교의 많은 사상과 전례가 영향을 주었을 거고. 다만, 제 추측일 뿐입니다. 기독교 눈으로 보는 영지주의 말고 객관적인 연구가 이루어지면 좋겠는데 영지주의 분야를 연구한 논문이나 서적이 있나요? 객관적인 서술과 논증말씁입니다.

    
미선이 (10-03-12 13:55)
 
환생설은 불교 이전에도 고대로부터 있어왔던 것입니다. 저는 초기 기독교가 불교의 영향을 받았다고는 보질 않습니다. 인도로 간 예수 운운하는 것도 이미 1세기 전에 유행한 한물간 얘기라고 보구요. 물론 나름대로 몇 가지 고대 중동 지혜 문헌의 유사성을 언급하는 사람들도 있긴 한데, 이것 역시 전세계 각 지역의 고대 신화들이 어느 정도 보편적 유사성을 갖는 정도의 흡사함을 넘어선다고 보진 않습지요.
제 개인적으로는 영지주의에 대해선 스티븐 횔러의 <이것이 영지주의다>라는 책이 괜찮더군요. 적어도 이 책은 기독교인의 선입견을 갖고 쓴 책은 아니니까요. 읽어볼만 합니다. 하지만 제 개인적으로는 영지주의에 대해선 이원론적이고 관념적인 측면이 있어 솔직히 비판적인 입장에 있다고 봅니다. 위의 선불교처럼 직접적 깨달음 같은 닮아 있는 측면도 있기에 늘상 신비사상과 연관되고 있긴 하죠. 그렇다고 해도 그러한 측면들은 여전히 관념적 성격을 많이 갖고 있다고 봅니다. 진리를 깨닫는 데에는 왕도가 없습니다. 깨닫다는 것은 결국 구체적인 현실의 삶을 성찰한다는 것이며, 그것은 언제나 전체에 대한 성찰과 맞물려 있을 따름입니다.

치노 (10-03-12 16:40)
 
글이 참 재미있네요. 비트겐슈타인의 전기/후기 철학이 생각이 나네요. 전기 때에는 말할 수 없는 것에는 침묵하자구 했다가, 후기로 오면 언어는 일종의 게임이다라고 합니다. 우리가 신비 앞에서는 침묵하게 되죠. 혹시 선불교에서 말하는 것이 비트겐슈타인의 전기 사상에 해당하는 건가요?

    
미선이 (10-03-12 22:21)
 
비트겐슈타인의 전기 사상은 오류로 판명난 것입니다. 당시 비엔나 학파였던 논리실증주의자들에게는 전기 때의 논리철학론이 거의 경전시되기도 했지만, 오늘날 이를 받아들이는 학자들은 거의 없답니다. 말할 수 없거나 검증할 수 없는 명제는 무의미하다고 했을 때 실상은 자연과학의 법칙명제까지 제외시켜버리는 우를 지니게 되죠. 게다가 관찰의 객관성을 담보할 수 있는 명제라는 게 사실상 가능하지가 않지요. 주체와 객체 자체가 경험과 실재의 문제와 함께 이미 존재론적으로 엮여 있으니까요. 말씀하신대로 어떤 점에서는 선불교와 전기 비트겐슈타인이 비슷할 수도 있겠습니다. 불가해한 신비와 맞닿아 있긴 하니까요. 하지만 알고 보면 신비 아닌 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침묵이 아니라 이미 적극적으로 말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인 거죠.

산삼 (12-01-24 03:24)
 
세상은 넓고 고수가 강호 어딘가에 있다고,
인터넷 한 귀퉁이에 이렇게 고수가 계신지는 몰랐습니다
몇날 몇일 미선 실장님이 장시간 학습하신 자료에 매료되고 있습니다

세기연의 모임, 포럼, 커뮤니티 등이 지금도 진행되는지 궁금합니다
있다면 가서 좀 배우고 싶습니다

    
관리자 (12-01-24 09:15)
 
별말씀을요. 감사합니다.
현재는 진행되는 게 없습니다.
다만 조만간 2월중에 세기연 강좌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일정이 잡히게 되면 공지사항에 뜨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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