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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불교와 화이트헤드 (김상일)    
  글쓴이 : 미선이 날 짜 : 10-03-22 19:36 조회(6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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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평론에 있길래 퍼왔습니다. 불교와 화이트헤드 간의 차이점 보다는 주로 공통점을 강조한 글인데
그래도 읽어볼 만합니다. 김상일 교수의 경우 화이트헤드 철학의 신조어 번역이
약간 다른 점이 있다는 점도 참조하시길 바랍니다.
 
.........................
 
 
불교와 화이트헤드
 
 
김상일 / 한신대 철학과 교수
 

불교와 화이트헤드 간의 대화는 하와이대와 과정연구소 간에 1970년 대 중반부터 시작되었다. 그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양자 간의 관계는 지금 성숙기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필자는 1978~1981 동안 미 클레어몬트 대학원에서 존 캅 교수와 함께 이 방면의 연구를 지금까지 계속하고 있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와서 점차로 깨닫게 된 사실은 양자 사이를 연결시킬 수 있는 논리적인 고리를 찾는 것이었다. 그래서 필자는 두 가지 종류의 논리적 형을 나름대로 개발하게 되었다.

 A형 논리와 E형 논리가 그것이다. 전자는 전통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식 논리를 두고 하는 말이다. A형 논리로서는 양자 간에 관계를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 본 논문의 결론이다.

A형 논리에 대하여 불교와 화이트헤드의 과정사상 사이에는 다른 논리가 있다는 것이다. 바로 그 논리가 E형 논리이다.

 E형 논리는 일명 역설의 논리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불교와 화이트헤드는 역설적인 논리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지금부터 이러한 E형의 논리가 어떻게 양자 사이에 나타나는가를 살펴 고찰해 보기로 한다. 불교의 12연기론을 중심으로 하여 화이트헤드의 사상을 E형 논리라는 관점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A형 포함(包涵)의 논리와 E형 포함(包含)의 논리

불교와 화이트헤드(1861~1947)의 관계를 말하기 전에 과연 동서 철학의 차이는 무엇인가부터 알아보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필자는 동서양 철학의 차이는 논리의 차이에 있다고 보아, 서양을 A형 그리고 동양을 E형이라고 한다. A형이란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와 아퀴나스(Aquinas) 같은 서양의 주류 철학자와 신학자들 이름의 첫 알파벳에서 유래한 것이고, E란 에피메니데스(Epimenides)나 유브라이더스 (Eubrides)의 같은 그것에서 유래한 것이다. 전자는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만 후자는 생소한 것이 사실이다.

서양의 논리학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오르가논’에서 유래한 것도 잘 알려져 있다. 그가 논리학을 쓴 동기 자체가 바로 이 논리적인 차이에 있었다. 여기서 그 논리적인 차이를 쉽게 설명하는데 包涵과 包含의 차이를 설명함으로써 분명해진다. 전자는 그릇에 물이 담기는 것과 같이 전체와 부분이 분명하게 나뉘어지는 관계이고 후자는 물과 차의 관계와 같이 상호 침투하는 관계이다.

화이트헤드는 전자를 ‘외인적 관계(external relation)’라고 하였고 후자를 ‘내인적 관계(internal relation)’라고 하였다(PR, 58-59, 307-09). 결국 우리의 사고는 두 가지 집합 관계에 의하여 결정된다고 할 수 있다. 내인적 관계는 서양인들에게 매우 생소한 관계이다. 주객이 분명하게 나뉘는 관계에 이들이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전통적 이해 방식의 논리로는 불교와 과정사상을 이해하기 어렵다.

사실 이렇게 논리를 나누어 보는 동기 자체가 철학의 본질을 말하는 것일 수 있다. 최근 논란이 된 플라톤의 후기 작품 《파르메니데스》가 누구의 것이냐고 할 때에 학자들 가운데는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이 《파르메니데스》에서 제기된 제반 논리적인 문제에 대한 답으로 쓰인 것이 오르가논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파르메니데스》에는 어떤 논리적인 문제가 제기되고 있는가?

그것은 이미 잘 알려진 ‘큼’의 문제이다. ‘가장 큼’이란 문제를 제기할 때에 이 가장 큰 것이 ‘큼’이라는 속성을 가져야 할 것이냐 말아야 할 것이냐고 할 때에, ‘가져야 한다’와 ‘갖지 말아야 한다’는 두 가지 답이 모두 가능해진다.1) 이것은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모순율을 어기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모순 혹은 역설을 제거하기 위해 세 가지 사고의 법칙 모순율, 동일율, 배중율을 말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이후 서양 철학은 이 사고의 법칙을 한 치도 어겨서는 안 되는 철학을 전개해 오게 되었다. 여기서 서양 철학의 고질적인 병인 이원론(dualism)이 유래한다는 것이다. 모순과 역설을 배제하기 위한 시도가 바로 이원론과 외인적 관계를 만들어 낸다.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포함(包涵)해 버리는 관계로 만들어 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 철학자들 가운데 에피메니데스는 소위 거짓말쟁이 역설로 알려진 “거짓말쟁이가 거짓말을 한다면 참말이 되고 참말을 한다면 거짓말이 된다.”로 유명하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모순율에 정면 배치되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E형 논리적 철학이 먼저 선재하였고 A형이 이를 제거 내지 박해하면서 서양철학사는 시작한다. 이런 E형 논리를 주장하는 철학자와 신학자는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여 제거의 대상이 되었고, 특히 중세기의 경우 E형 논리는 위험시되기까지 했다.

아퀴나스와 같은 시기의 에크하르트(Eckhart) 같은 신학자는 E형 논리의 전형적인 사상가이나 결국 아리스토텔레스―아퀴나스 맥락의 교권에 의해 화형에 처해지게 된다. 이렇게 하여 서양 철학의 주류 논리는 A형이고 E형은 이단시되고 말았다.

동양 철학의 논리는 두말할 것 없이 E형이다. E형이 주류이고 A형이 비주류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렇게 서양과 동양은 그 논리 형에 있어서 서로 상반된다. 그러나 문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제거하려 했던 E형 논리가 서양에서 19세기 말부터 서양 사상 전반에 두루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 역설 즉 거짓말쟁이 역설이 드디어 1904년 ‘러셀 역설’이란 이름으로 재등장하면서 러셀은 화이트헤드와 함께 이 역설 제거의 목적으로 ‘수학 원론’을 저술한다. 이와 같이 화이트헤드는 수학자로서 그의 학문적 삶은 시작한다. 두 사람은 역설 제거의 3학파 가운데 하나인 논리주의를 이렇게 확립한다.

수를 한번 논리적 기호로 다 바꾸면 역설을 제거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1910년경이면 무위로 돌아가고 양인은 책을 같이 저술하는 것을 포기하고 만다. 화이트헤드는 그 이후 물리학을 거쳐 1926년경 미국 하버드대학 생활부터는 철학자로 변신한다. 물론 그의 철학자로서의 여정은 궁극적으로 수학에서 제기된 역설의 문제와 씨름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존재의 원리와 과정철학

서양의 실존을 의미하는 ‘exist’ 는 ‘ex(밖에) ist(있다)’와 같다. 밖에 있는 것만이 실존하는 것이란 뜻이다. 그러면 무엇의 밖에 있다는 뜻인가? 그것은 자기의 밖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위의 거짓말쟁이 역설과 러셀 역설에서 ‘모든 집합(A)’과 그 집합 안의 요소들을 a라고 한다면 모든 집합 A도 a라는 것이다. A가 a일 때에 이를 자기 언급(self-reference)이라고 한다.

A와 a는 메타 언어와 대상 언어의 관계이고 전체와 부분의 관계이다. 그런데 자기 언급이란 부분이 전체가 되고 전체가 부분이 되는 것이고, 대상이 메타가 되고 메타가 대상이 되는 것이다. 이른 자기 언급 혹은 사상(寫像)이라고 한다. 이렇게 자기 언급을 하고서는 일관성을 가질 수도 없고 이는 모순율에 정면 배치되는 것이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존재하자면 반드시 자기 언급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ex-ist라고 한 것이다. 자기가 자기에 귀속하는(belonging) 일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러셀은 역설을 해소하는 방안으로 유형론(typology)을 제안한다. 즉, 위에서 A와 a는 서로 유형이 다른 언어라는 것이다. 그래서 엄격하게 유형이 자기 위계를 어기지 않으면 역설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러셀의 역설 해의는 그의 가장 어리석은 제안 가운데 하나이다.

 아마도 화이트헤드가 러셀과 헤어지게 된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이 점에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 결국 화이트헤드의 철학은 오랫동안 서양에서 외면당한 E형 논리에로 복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의 사상이 동양 사상 전반에 일치하는 이유도 다름 아닌 양자가 공히 E형 논리에 기초하여 사고를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존재 원리를 따를 때 사실 존재는 ‘가득 참’의 완성된 실존체이다.

사실 존재들이 잇달아 연접되어 있는 세계의 바깥 세계란 비존재의 세계이다. 그래서 exist는 비존재라는 궤변이 성립한다. 화이트헤드는 “사실 존재를 떠난 세계는 비존재의 세계이며 비현존의 세계이다. 그 나머지 세계는 모두 고요할 뿐”이라고 했다. 그러나 서양의 존재론은 이러한 잇따라 일어남의 존재론을 무시하고 철저하게 existence의 존재론이었다. 화이트헤드는 이러한 ‘being’ 같은 것을 단순 정위(simple location)라 했으며, 이런 단순 정위를 구체화시킴으로써 생기는 오류를 ‘잘못 놓은 구체화의 오류(fallacy of misplaced concreteness)’라고 했다.

‘이것’이 불성이다

화이트헤드는 자기의 철학을 설명하기 위해 몇 개의 원리들과 범주 들을 만들어 사용하고 있다. 임의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것들이 경험 이전의 규범이 아닌가 하는 오해도 받게 된다. 사실 화이트헤드는 이런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 이들 범주들과 원리들이 일관성과 논리성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 그의 철학을 전개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화이트헤드의 존재의 원리는 현대 물리학자들이 발견한 원리이지만 동양 철학, 특히 불교 철학에서는 이미 2,500여 년 전에 발견한 진리라고 할 수 있다. 여기 《열반경》에 있는 한 구절을 인용해 보면 “모든 존재에는 불성이 있다(―切衆生 悉有佛性)”와 같다. 만약 서구 신학이 모든 인간 속에 신성이 있다고 한다면 이단으로 정죄되고 말 것이다. 이것은 전형적인 E형 논리적 표현이다. a 속에 A가 들어 있다고 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부분 속에 전체가 들어 있다고 하는 것이다. 대승불교에서는 위의 《열반경》의 구절을 주석하는 것으로 그 종지를 삼고 있다.

일본의 도겐(道元, 1200~1253)은 “일체 중생이 불성을 가졌다”라는 《열반경》의 문장을 광의로 해석하고 있다. 첫째로 그는 모든 존재 (―切衆生)라는 개념을 식물이나 동물계에 국한시키지 않고, 무생물계까지 포함시키고 있다. 생명뿐만 아니라 모든 존재 자체―존재하는 모든 것―를 의미한다고 말하고 있다.

육조혜능 선사가 제자인 남악회양(南嶽懷讓)과의 처음 상봉에서 “이 무슨 물건이 왔는고?” 하고 물었을 때, 도겐에게 있어서는 만물의 실재와 불성과의 관계가 동일성의 관계 이외에는 달리 이루어질 수가 없다. 그는 하나(―) 속에서 여럿(多)의 바탕을 찾아내려는 일원론 철학의 경향을 피하고 있다. 하나와 여럿은 잇달아 일어난다. ‘이것’ 속에 일과 다는 소용돌이를 만든다. 잇달아 일어나고 있다. 불성을 보고 있을 때면 만물, 그 구체적 존재 속에서 모든 ‘이것’을 보고 있는 것이다.

불성과 만물의 관계를 화엄 불교에서는 이(理)와 사(事)의 관계로 만든다. 이는 개념적 보전성의 그리고 사는 개다적(個多的) 특수성의 뜻이다. 〈돈오무생반야송(頓悟無生般若訟)〉에 의하면 “이와 사는 모두 같아 이는 깨끗한 곳으로부터 나아가 사의 다양성 가운데 도달한다. 사는 이와 같이 하여 이와 상통하고 간격이 없고 장애가 없이 통한다(理事皆如 理淨處 事能通達 事理通無碍).” 화엄 불교의 이사무애(理事無碍) 사상은 바로 화이트헤드의 존재 원리의 요약된 표현이다.

결국 A형 논리는 파르메니데스가 그러한 바와 같이 거대한 일자를 다자 위에 설정하는 것으로(One above many) 고착된다. 파르메니데스가 일자와 다자 사이의 역설적인 관계를 파악했음에도 그 사이의 역설을 피하기 위해 이렇게 설정한 것은 서양 철학의 불치의 병의 근원을 만든다. 이것이 러셀의 유형론으로까지 이어진다. a와 A가 서로 사상하여 하나가 여럿, 그리고 여럿이 하나라는 표현이 불교에서만큼 진지하게 철저하게 다루어진 곳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화이트헤드는 자기 사상의 고향은 아시아라고 하지 않았나 한다.

12연기와 화이트헤드의 경험 이론

12연기의 주요 관심사는 한 사실적 존재가 다른 사실적 존재 속에 어떻게 나타날 수 있는가를 밝히는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앞의 장에서 ‘경험함’을 통해 그것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한 존재는 경험함의 과정을 통해서 다른 존재를 객관적 소여 대상으로 삼는다.

그래서 한 존재가 다른 존재 속에 어떻게 나타나느냐의 문제는 결국 앞의 장에서 지적한 객관화의 문제인 것이다. 화엄 불교에서 말하는 하나의 사(事)가 다른 사(事)에 어떻게 나타나느냐 하는 것이 지금부터 다루려고 하는 주제의 핵심이다.

화이트헤드가 말하는 ‘경험’이란 말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한 존재가 다른 존재 속에 ‘나타난다’는 말의 의미를 ‘경험함’이라든지 ‘객관화’라는 말만으로 단순화시키는 것은 별로 바람직하지 못하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객관화’란 말의 의미를 더 자세하게 설명하겠다. ‘경험함’이란 인간 경험에서부터 일반화시킨 것이다. 화이트헤드가 이 말을 사용할 때 결코 인간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닌 광범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근대 철학자 데카르트가 ‘경험’이란 말을 사용할 때 이 말은 형이상학적 이원론의 틀 속에서 쓰였다. 그가 사용한 경험’은 ‘인간 경험’을 의미했으며, ‘정신성(mentality)’, 또는 ‘의식(consciousness)’ 같은 것이었다. 따라서 ‘무의식적 경험’ 같은 것은 자연히 경험의 영역에서 도외시될 수밖에 없었다. 의식적, 그리고 정신적 경험을 논함에 있어서 두 개의 큰 학파가 있어 왔다. 하나는 합리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경험주의이다. 데카르트 같은 합리주의자들은 ‘사고(thinking)’나 ‘숙지(cogitation)’ 같은 것이 의식을 만드는 일반적인 특징이라고 보았다. ‘지각(perception)’ 같은 것을 사고의 본질적인 내용으로 간주하기도 했다. 로크 같은 경험주의자들은 ‘지각’이 일차적이고 ‘사고’는 이차적인 것으로 보며 합리주의와는 반대되는 주장을 하고 있다.

‘관념(idea)’이라는 말에 대해서도 데카르트는 ‘지적인 사고’로 본 데 비하여, 로크는 ‘감관적 인상(sensory impression)’으로 보고 있다. 칸트는 양자의 입장을 종합하여 ‘감관적 인상’과 ‘지적인 사고’ 모두가 ‘경험’을 구성시키는 본질적인 것으로 보았다. 그러면 이 양자의 균형을 무엇이 조절하느냐고 할 때 그는 ‘사고’라고 했다. 잘 만들어진 경험은 인과, 실체, 성질, 질량 같은 사고의 양태들이 조직화됨으로써 가능해진다고 보았다. 이 점에서 칸트나 헤겔은 모두 합리주의적 입장으로 회귀하고 만다.2)

화이트헤드는 경험적 일반적인 본성을 말함에 있어서 데카르트의 ‘사유’가 로크의 ‘지각’보다 더 거리가 멀다고 했다. ‘인간성’의 자기 정체성을 뚜렷이 하는 것이 ‘사유’이다.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것이 사유이다. 그러나 사유가 곧 우리 경험의 일반적 본성은 아니라는 것이다.

사유는 매우 간헐적이며 심지어는 중단되어 침묵할 때도 있다. 예를 들면 잠잘 때에는 무의식에 의해 사유가 닫혀 있지만 여전히 ‘실존’하는 것과 같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는 명제는 ‘사유’의 사실로부터 ‘실존’의 사실을 이끌어 낼 때만 정당하지, 사유가 우리 실존의 본질을 구성시킨다는 그러한 의미의 사유로부터 이끌어 낼 때에는 적당하지 못하다. 이는 실존주의가 관념론을 비판하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이 점에 있어서 화이트헤드는 경험주의자들과 의견을 같이한다. 화이트헤드는 인간의 모든 사유적 반성은 ‘감관’으로 유래된다는 흄의 주장을 받아들인다. 이 점은 과정철학의 존재 원리와 일치한다. 지각이 근본적인 것이라는 경험론자들의 주장을 받아들이면서도 화이트헤드는 감각주의자들의 ‘지각’ 이론인 ‘지각’은 곧 ‘감관―지각(sensepercep-tion)’이라는 이론은 용납하지 않는다. 화이트헤드가 지적하는 감각주의자들의 이론은 다음과 같다.

(1) 모든 지각은 우리 몸의 눈, 코, 입이나 몸의 촉각 같은 것에 의해서 매개된다.

(2) 직접적인 현재성 속에 모든 지각물들은 주어진다.

(3) 우리가 사는 사회적 세계의 경험은 완전히 이런 지각으로부터 이끌려 나온 것으로, 거기에 해석을 붙인 것이다.

(4) 우리의 감정적 그리고 목적 의도적 경험은 이 원초적 지각에서 이끌려 나와 반성적 관조를 가함으로써 생긴 것이다.

(5) 해석을 붙인 것과 반성적 관조를 한 이 두 가지는 하나의 과정에서 나온 두 가지 다른 양상이라고 할 수 있다.3)

본질적으로 지각을 구성시키는 것은 분명하고 정확한 ‘감관’이다. 바로 이 감관이 경험 속에서 근본적인 요소가 되는 것이다. 그 밖에 있는 모든 것은 모든 이 감관에서 이끌려 나온 것이다.

감관을 떠나서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감정, 열정, 희망, 공 포, 사랑, 미움 같은 것 모두가 이 감관에서 유래된 것이다. 인간의 모든 다른 경험이란 이 감관에서 유래되어 나온 것에 지나지 않는다.4)

그러나 이런 감각주의자들의 주장에 대하여 화이트헤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 경험의 삶 속에서 이들 감각적 요소들은 매우 변화무쌍한 요소들이다. 눈을 감았을 때나 영구적으로 장님이 되더라도 우리는 살아 있을 수 있다. 귀가 멀어도 우리는 여전히 살아 있을 수 있다.5)

우리는 감관의 기능이 사라지거나 없어져도 여전히 실존하고 살아 있을 수 있다. 일상생활 속에서 감관이 하는 역할은 다양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방법도 다양하다. 깨어 있기도, 명상하기도, 잠자기도, 졸기도 한다. 감관을 뚜렷이 어떻게 느끼고 받아들이느냐에 대해 명확한 기본적 기준 같은 것이라고는 없다. 자궁에서 생겨나 요람에서 커 우리는 점차로 감관 경험을 더 높은 차원으로 올려 가면서 경험한다. 그래서 감각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은 확고하고 정확한 감관 같은 것이란 없다.

인간 본성은 실존적인 본질에 의해서가 아니고, 생생한 우연성에 의해 서 설명될 수 있다. 분명한 의식이라는 것도 사실상 인간 실존의 우연성에 지나지 않는다. 분명한 의식이란 인간을 인간되게 한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를 실존하도록 만들지는 못한다. 그런 것은 우리 인간성의 본질은 될 수 있으나 단지 우리 실존의 우연성에서 나온 것에 불과하다.6)

이 점이 화이트헤드가 감관주의 경험론자들과 다른 점이다. 후자들은 감관을 토대 같은 것으로 절대시했지만 화이트헤드는 매우 비결정적인 것으로 파악했던 것이다.

지각의 두 가지 양상들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에서 사용되는 ‘지각’이란 말은 감각적인 것뿐만 아니라 비감각적인 것까지도 포함하는, 보다 폭넓은 의미를 지니고 있는 말이다. 아직 그의 지각이라는 말 속에 ‘의식’과 같은 것이 있는 것으로 기대해서는 안 된다. 전통 철학에서 말하는 감각이나 지각 같은 것을 화이트헤드는 현재적 직접성(presentational immediacy)이라고 한다. 이것은 ‘경험’의 가장 원초적인 형식에서 이끌려 나온 것이며, 그 형식에 기초해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감각 지각보다 더 원시적인 형식을 가진 지각이 있다. 예를 들면 눈, 귀 같은 감각기관이 발달되지 않는 불가사리 같은 동물적 삶의 경험은 분명한 감관기관이 발달되어 있지 못해서 환경에 거의 반응을 보일 수 없을 정도이다.

화이트헤드는 이와 같이 매우 낮은 차원의 몸의 기관을 가진 동물들의 희미한 경험의 종류도 지각의 범위 안에 넣고 생각한다. 매우 낮은 지각을 가진 동물적 존재이기는 하나 환경에 감응하고 어떤 느낌을 가질 때 이것도 지각의 범위에 넣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통 철학은 이런 지각은 비합리적인 것으로서 배제시키고 말았다. 환경에 얼마만큼 반응을 할 수 있는가는 감각 경험이 갖는 분명도(clarity)에 달렸다고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화이트헤드는 불교적 경험론에 접근하고 있다.

낮은 정도로 내려갈수록 이 낮은 유형에서는 희미한 무의식의 꿈 속에 서 헤매게 되고, 전혀 분별이라고는 할 수 없는 느낌 정도를 가지고 있다. 이와 같이 낮은 단계의 지각에서 경험은 형상을 사실적인 것으로 실증할 수도 없고, 의식을 관조할 수도 없고, 어떤 의도와 목적의식을 가질 수도 없다. 무분별적 느낌에서 유래된 한 집적체와 같은 무의식적 충동만이 지배적이다. 이런 무분별적 느낌은 그 자체가 직접적 과거에서 유래될 때가 많다.7)

분명하고 의식적인 감관적 분별력과는 반대로, 이러한 무분별적 느낌은 모호하고 무의식적이며, 단지 ‘인과적’ 반응만을 보일 뿐이다. 이러한 반응은 그 시발점에 있어서 감각―경험에 의존되어 있지 않다. 왜냐하면 분명한 감관―경험이 중지되고 완전히 없어진 상태에서 이런 모호하고 무의식적인 반응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런 모호하며 무의식적인 지각을 인과적 효능성(causal efficacy)이라고 한다. 이 인과적 효능성은 더 근본적이고 요소적인 지각의 종류이다. 이런 인과적 효능에 해당하는 것이 불교의 무명이라고 할 수 있다.

화이트헤드는 이와 같은 인과적 효능성의 양태를 인간 경험에서 정의할 때 ‘몸과 더불어 있음(withness of the body)’이라고 했다. 인과적 효능성의 지각 양태는 가장 천연 그대로의 지각이며, 합생의 최초 국면에서 일어난다. 전통 철학에는 몸에 묻혀 있는 지각을 별로 중요한 것으로서 취급하지 않았다. 감관적 지각만이 철학을 취급할 수 있는 유일한 것으로 보았다. ‘현재적 직접성’이나 ‘인과적 효능성’의 양자는 그 어느 것도 우리가 일상적으로 말하는바 의식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 그리고 오류를 산출할 능력도 없다.

화이트헤드가 이러한 가장 원초적 지각을 인과적이라고 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흄은 인과성을 표상 상호 간의 연상, 혹은 연결을 일으키는 심적 경향으로서 인간의 습관이나 신념에 불과하고, 하나의 가설이나 추론으로 보는 데 반하여, 화이트헤드는 인과성의 근원은 ……잇달아 일어나는 사건들 간의 순응에 있다고 본다. 인간이나 인간 이외의 하등 동물에 있어서까지 개념적 분석이 시작되기 전에 가장 원초적인 것으로서 상호 연관적 관련 느낌이 소여 자료로서 있다고 주장한다. 화이트헤드의 입장에서 볼 때에 흄의 경험마저 매우 관념적일 수 있다.

어떻게 해서 한 사건이 다른 사건에 원인이 될 수 있을까? ……각 사건 들은 적극적으로 그 자신의 본질 가운데 이미 내포되어 있는 선행 세계를 전제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사건들은 그들 상호 간에 상대적으로 규정된 지위를 가지고 있다고 할 것이다.8)

한편 칸트는 인과성을 순수 오성 개념인 범주의 하나로 보아 선천적 개념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화이트헤드는 그것을 감성적 단계에서의 원초적인 소여인 것으로 주장함으로써 흄의 경험론과 칸트의 선험적 관념론이 공유하고 있는 전통적인 인과 개념의 만점을 비판하고 있다.9)

이제 원초적 지각으로서의 인과적 효능성에 관해서 좀더 자세히 언급해 보기로 하자, 데카르트는 《명상록Ⅰ(Meditation I)》에서 이들 ‘손들과 몸은 나의 것(Th.5. hands and body are mine.)’이라고 했다. 흄도 우리의 눈으로 본다고 했다. 이 말들은 우리의 감각―지각 속에 있는 몸의 기능으로부터 직접 아는 지식이 가능함을 지적한 말이라고 할 수 있다. 흄의 경우에는 더욱 뚜렷하기는 하지만 양자가 모두 몸을 지닌 혹은 몸과 더불어 있는 지각이 감각―지각임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흄과 데카르트는 이 직접적 지각인 몸과 더불어 있는 지각으로서의 인과적 효능성을 제거시키고 말았으며, 그들은 안타깝게도 지각을 제시적 직접성 에만 국한시키고 말았다. 제시적 직접성은 이미 관념화된 경험이다. 산타야나는 이들 두 철학자들과 같이 몸에 묻어 있는 지각을 동물적 신앙(animal faith)이라고 했다. 흄과 데카르트는 결국 이런 동물적 신앙에 해당하는 지각, 즉 인과적 효능성을 제거해 버렸으며, 이를 비합리적인 요소들로 취급했다. 불교의 12연기 속에는 이런 경험들이 무명의 이름으로 들어와 있다.

화이트헤드는 이러한 몸과 더불어 있는 ‘몸+마음= ’적 지각을 일반적인 지각에 연관시켜 일관성 있게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동물적 신앙에 해당되는 부분도 전체 지각 이론의 통전적인 한 부분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지각에 부적합한 것이거나 일치하지 않는 것으로 무시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동물적 신앙을 보았던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다. 주위 세계에 대한 우리의 지식을 가능하게 만드는 시발점은 바로 몸과 더불어 있는 지각이다.”10) 라고 화이트헤드는 말한다. 즉 우리의 지각적 지식은 육체적 감각기관들에서 출발한다. 그 다음에 이 넓은 세계와 환경에 접촉하게 된다.

그러나 분명한 의식인 제시적 직접성의 지각 속에서는 이런 몸과 ‘더불어’ 있음을 의식하지 못하고 만다. 감관적 지각 속에서 작용하는 이 몸의 기능을 의식적으로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특별한 주의를 요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은 이 분명한 의식인 제시적 직접성마저도 몸의 감관 기관들에서 ‘유래된’ 것이라는 점이다. 여기서 ‘유래됨’이라고 할 때 우리는 보통 몸에서 유래될 때 유래함 그 자체를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 즉 무의식적으로 제시적 직접성 속으로 흘러들어가 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우리가 우리 눈으로 보기는 한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눈으로 사물을 보는 동안만은 우리들의 눈 자체를 보지 못하고 만다. 그래서 제시적 직접성은 감각 지각 속에서 ‘몸’으로부터 무의식으로 일어난다.

 몸의 감관 기관에서 무의식적으로 유래된 이 ‘더불어’ 있음 속에서 우리는 직관적 지식인 ‘인과적 효능성’을 발견하게 된다. 여기서 화이트헤드는 선불교에서 말하는 선문답, 즉 “눈이 자기 눈은 못 본다.”는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엄격하게 말해서 어떤 객관적 사물을 볼 때 우리는 눈을 사용하지만 단지 그것을 무의식적으로만 의식하게 된다. 그리고 바로 제시적 직접성으로 넘어가 마치 눈 없이도 사물을 본 것처럼 착각한다. 그때는 사물을 보았다는 의식만 작용하게 된다. 화이트헤드는 이러한 무의식적 작용을 ‘인과적 효능’이라고 한다. 그런데 선불교는 이미 이 점을 알고 있었지만, 전통 철학자들은 이런 무의식적 효능성을 비합리적인 것으로 빠뜨려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인과적 효능성은 E형 논리의 포함(包含)의 논리로만 파악될 수 있는 의식이다. 보는 자기의 눈이 이미 보는 대상에 들어 있다는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동물이나 식물, 그리고 아주 낮은 생명체마저도 이런 인과적 효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생명체가 주위 환경과 인과적으로 갖는 관계성에는 물론 정도의 차이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모호한 느낌, 민감한 느낌, 그리고 질적 양적으로 그 느낌의 심도가 다양한 것이 사실이다. 해파리 같은 생명체도 나아가고 오므라드는 운동을 함으로써 주위 세계와 인과적 관계를 맺으며 낮은 지각 작용을 한다.

식물은 습기 있는 낮은 땅으로, 혹은 햇빛 있는 높은 곳을 향해 자라 나간다. 제시적 직접성 같은 감각 지각이 없이도 인과적 연계망 속에서 잇달아 일어남으로써 희미하기도 하고 매우 느리기도 한 운동을 생명체들은 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인과적 효능에 의한 지각 같은 것을 다 포함한 지각의 형식을 말해야 한다고 화이트헤드는 보고 있다. 이 점에 있어서 그는 서양적 세계관보다는 동양적 세계관에 매우 가깝게 접근하고 있다. 이러한 경험에 대한 이해는 불교의 12연기설과 연관해 이해함이 가장 타당하다고 본다.

인과적 효능과 십이연기설

제시적 직접성 혹은 현재적 직접성은 경험론자들이 말하는 감각이나 인상같이 바깥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칸트는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보며 물자체(物自體)는 범주에 의해 걸러져 주관에 왜곡된 모습으로 포착된다고 본다. 이 점에서 화이트헤드의 현재적 직접성은 경험론자들의 견해와 가까운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화이트헤드는 경험론자들의 감각이나 지각 같은 것은 이미 고도로 높은 단계에 도달된 관념적인 것으로 본다. 그보다 더 낮은 동물적 의식이나 심지어는 식물, 그리고 무생물에까지 이르는 낮은 단계의 감응 같은 것이 있다고 보는데 이를 인과적 효능이라고 한다. 이러한 원초적인 지각 양식은 인간의 신체가 세계와 직접 만나는 심층적 경험이다.11) 이를 두고 육감이라 불러도 좋다. 프로이트의 무의식, 혹은 융의 집단 무의식 같은 차원의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즉, 흄 같은 경험론자들은 인간의 감각을 가장 발가숭이 같은 원초적인 경험으로 보았다. 그런데 화이트헤드는 그것을 이미 고도화된 인간 경험으로 보고, 그보다 더 낮은 원초적 감각을 ‘인과적 효능’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불교는 십이인연설(十二因緣說)에서 이미 이렇게 낮은 차원의 경험을 체계화시켜 놓고 있다. 연기설(緣起說)은 석가 세존이 정각(正覺)을 이룬 후 보리수 밑에서 7일간 결가부좌하고 해탈의 기쁨을 누리면서, 자신이 미망의 무지 상태에서 정각에 이른 단계를 순차적으로 거슬러 생각해 본 결과 12단계의 인연이 잇달아 일어나 무지에서 정각의 이름을 터득하여 내놓은 것이다.

연기라 함은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此有故彼有), 이것이 일어나기 때문에 저것이 잇달아 일어난다(此起故彼起).”는 《잡아합경(雜阿含經)》 제12권에 있는 말에서 유래한다. 전자는 공간상의 연기를, 후자는 시간상의 연기 관계를 두고 한 말이다.

이제 석가 세존이 정각을 이룬 후에 어떻게 무지의 상태에서 정각에 이르렀는가를 12단계에 따라 밟아보면 다음과 같다. 이제 12연기를 시간적인 면(즉 “이것이 일어나므로 저것이 잇따라 일어난다”)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12)
 
1. 무명(無明): 과거 세상의 번뇌의 근본인 무지(無知).
2. 행(行): 무지로 인하여 과거 세상에 지은 모든 선악의 업.
3. 식(識): 과거 세상의 무명과 행으로 인하여 침식이 어머니의 태 가운데 생겨남.
4. 명색(名色): 모태에서 태어났으나 아직 육근(六根)이 완전히 구비되지 못함.
5. 육입(六入): 태 안에서 육근이 완전히 구비됨.
6. 촉(觸): 아직 심식이 발달하지 못하여 고·락·사(苦·樂·捨) 삼수(三受)의 원인은 알지 못하고 다만 단순히 감각만이 움직임.
7. 수(受): 심식이 발달하여 고·락·사의 상수를 느끼는 중생의 괴로운 현실상.
8. 애(愛)·괴로운 현실의 원인을 알지 못하고 순간적인 쾌락에 탐닉함.
9. 취(取): 애착심을 일으키는 데 그치지 않고 이것을 가지려 함.
10.유(有): 애(愛)·취(取)로 인하여 여러 가지 번뇌를 구사하고 다시 업을 지어감.
11. 생(生): 위의 업으로 인하여 미래의 삶을 받음.
12. 노사(老死): 미래의 생을 받아 고통 속에 살다가 또다시 사멸함.

이상은 시간적인 면에서 12연기설을 설명한 것이다. 이를 다시 과거, 현재, 미래로 나누면 다음과 같다.
 1  2  3  4  5  6  7  8  9  10  11  12
 無 行 識 名 六 觸 受 愛 取 有 生 老
 明   色 入       死

     前前生                     前生                現生

여기서 우리는 불교의 12연기설에서 다루고 있는 인간 경험의 폭이 서양의 그것과는 비교될 수 없음을 발견하게 된다. 인지발달론자 피아제(J. Piaget)도 0세부터 2세까지를 감각운동기라고 했다. 즉 일단 인간이 어머니 태에서 떨어져 나온 이후부터의 인지발달 단계를 논하고 있는 것이다. 에릭슨(E. Erikson)이나 마슬로(A. Maslow)도 이 점에 있어서는 모두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12인연설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인간이 어머니 태에 착생되기 이전의 전생(즉 ‘無’와 ‘行’)으로부터 인간 경험 세계가 출발된다고 본다. 식, 명색, 육입은 어머니의 태중에 있는 단계이다. 아마도 피아제의 감각운동기는 촉(觸)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흄 같은 경험론자들이 말하는 감각이나 인상 같은 것은 수(受)의 단계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화이트헤드의 현재적 직접성은 6과 7의 단계라 할 수 있다. 그 이전의 단계가 인과적 효능성의 단계이다.

서양에서 촉(觸) 이전의 단계를 인정하기 시작한 것은 철학자들에 의해서가 아니고, 20세기에 들어와 심리학자들에 의하여 가능해졌다고 할 수 있다. 즉, 프로이트의 무의식 세계의 발견은 서양철학사에 획기적인 사건이다. 인간 경험이 결코 의식의 세계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무의식의 세계에까지 미친다고 한 것은 놀라운 발견이었다. 그러나 불교는 인간의 무의식의 세계, 즉 프로이트가 말하는 무의식마저도 12연기와의 관계에서 볼 때 훨씬 이차적이다. 즉 무명과 행은 인간이 태어나기도 전의 경험이다.

이것까지도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이 불교의 주장이다. 프로이트는 이 점을 못 받아들인 것이다. 그러나 그의 제자 융은 집단 무의식을 말함으로써 인간은 태어나기 이전의 조상, 그리고 속한 문화의 전통적 집단의식을 그대로 물려받는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융이 집단 무의식을 넘어선 전생의 세계까지 언급하고 있는지는 의심스럽다. 그러나 그의 주장 속에는 상당 부분이 상징을 통한 인류의 공동 경험을 말하고 있다.

화이트헤드의 인과적 효능이란 말이 의도하는 것은 바로 인간의 무의식적 세계, 그리고 인간이 의식으로 다 파악하지 못하는 육감의 세계를 언급하려는 것이 분명하다. 이 점에 있어서 그의 주장은 많은 점에서 불교의 12연기설에 접근하고 있다.

 
출처 : 불교평론 http://www.budreview.com/news/articleView.html?idxno=8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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