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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디가니까야 해제-각묵스님    
  글쓴이 : 미선 날 짜 : 20-06-23 19:10 조회(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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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가니까야 해제-각묵스님

 

「범망경」(梵網經, Brahmajāla Sutta, D1)

 

인간은 견해의 동물이다. 인간은 매순간 대상과 조우하면서 수많은 인식을 하게 되고 그런 인식은 항상 견해로 자리잡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이 가지는 견해는 너무도 다양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견해는 항상 무엇이 바른 견해인가라는 질문을 수반한다. 견해란 무엇인가? 아니 바른 견해란 도대체 무엇인가? 바른 견해란 도대체 가능한 것일까? 인간은 견해 없이 살 수 있는가? 여기에 대해서 부처님께서는 어떻게 말씀하고 계실까?

 

견해의 문제에 대한 고뇌를 누구보다 많이 하신 분이 바로 부처님이시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디가 니까야』의 첫 번째가 되는「범망경」에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다양한 견해를 과거에 관한 것 18가지와 미래에 관한 것 44가지로 나누어서 모두 62가지로 분류해서 심도 있게 설명하고 계신다. 이를 분류해 보면 다음과 같다.

 

㈎ 18가지 과거를 모색하는 자들

I-1. 영속론자들 - 4가지

I-2. 일부영속 일부비영속론자들 - 4가지

I-3. 유한함과 무한함을 설하는 자들 - 4가지

I-4. 애매모호한 자들 - 4가지

I-5. 우연발생론자들 - 2가지

 

㈏ 44가지 미래를 모색하는 자들

II-1. 사후에 자아가 인식과 함께 존재한다고 설하는 자들 - 16가지

II-2. 사후에 자아가 인식 없이 존재한다고 설하는 자들 - 8가지

II-3. 사후에 자아가 인식을 가지는 것도 아니고 인식을 가지지 않은 것도 아닌 것으로 존재한다고 설하는 자들 - 8가지

II-4. 단멸론자들 - 7가지

II-5. 지금여기에서 열반을 실현한다고 주장하는 자들 - 5가지

 

그러나「범망경」이 중요한 것은 단순히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견해를 모두 62가지로 정리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범망경」은 오히려 왜 이렇게 다양한 견해가 생길 수밖에 없느냐하는 구조적인 문제를 연기(緣起)의 관점으로 명쾌하게 설명해주기 때문에 중요하다. 견해란 조건이 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본경에서 견해는 ‘느껴진 것(vedayita)’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것을 복주서는 “체험되고(anubhūta) 경험된 것(anu-bhavana)”으로 설명한다.

 

중요한 것은 이 경험된 것은 대상과 감각기능과 알음알이의 세 가지가 서로 조우할 때 일어나는 감각접촉[觸, phassa]에 조건 지워진 조건발생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조건 발생을 불교에서는 연기(緣起)라고 말한다. 이렇게 부처님께서는 견해를 감각기능․감각대상․알음알이[根․境․識]의 삼사화합(三事和合)에서 기인한 감각접촉의 산물이라고 불교의 연기 구조로 명쾌하게 정의하신다. 이렇게 하여 견해의 문제는 마침내 괴로움의 발생 구조[流轉門]와 소멸 구조[還滅門]를 적나라하게 밝힌 연기의 가르침으로 회통이 되고, 이것은 괴로움[苦]과 괴로움의 원인[集]과 괴로움의 소멸[滅]과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道]로 정리된 불교 만대의 진리인 사성제(四聖諦)의 가르침으로 귀결이 될 수밖에 없다.

 

한편 이런 연기의 가르침이야말로 무아의 가르침이요 무아의 가르침은 바로 존재론적인 실체인 자아를 해체하는 가르침이다. 이처럼 연기-무아로 존재론적인 실체인 자아가 있다는 견해를 떨쳐버릴 때 그것이 바로 견해의 그물에 걸리지 않는 것이라고 부처님께서는 설하신다.

 

그러므로 62견은 연기-무아를 철견할 때 극복된다는 것이 본경의 결론이라 할 수 있겠다. 이처럼 본경은 팔정도의 첫 번째인 바른 견해[正見]와 바른 견해의 내용인 연기의 가르침을 천명한 가르침이다. 그러므로 4부 니까야의 첫 번째인『디가 니까야』를 대표하는 첫 번째 경으로 결집이 되었을 것이다.

 

사문과경」(沙門果經, Sāmaññaphala Sutta, D2)

 

출가란 말 그대로 집을 떠나는 행위이다. 집을 떠난다 함은 단순히 물질적인 집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집으로 표현되는 세상의 모든 의무나 권리나 욕망이나 희망을 모두 접는다는 뜻이기도 하다.「사문과경」이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경의 제목처럼 이러한 출가 즉 사문됨(출가생활)의 결실이다. 본경에서 출가생활의 결실을 세존께 질문하는 사람은 아자따삿뚜라는 당대에 제일 막강했던 마가다를 통치하는 왕이다. 그는 그 시대를 풍미하던 여섯 종교 지도자들의 사상과 비교하면서 불교 수행자들이 부처님 가르침을 통해서 실현하게 되는 결과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고 있다.

 

그는 세존께 “세상에는 여러 가지 기술 분야들이 있습니다 … 그런 기술의 결실은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보아 알 수 있으며 그들은 그런 결실로 살아갑니다. 그들은 그것으로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만족하게 하고, 부모를 행복하게 하고 만족하게 하고, 처자식을 행복하게 하고 만족하게 하고, 친구와 동료를 행복하게 하고 만족하게 하며, 사문․바라문들에게 많은 보시를 합니다. 그러한 보시는 고귀한 결말을 가져다주고 신성한 결말을 가져다주며 행복을 익게 하고 천상에 태어나게 합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도 이와 같이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보아 알 수 있는 출가생활의 결실을 천명하실 수 있습니까?”라고 질문 드린다.

 

이러한 왕의 질문에 대해서 세존께서는 23가지로 정리된 계․정․혜 삼학의 정형구로 대답하시는 것이 본경의 전체 구조이다. 「사문과경」은 출가자가 닦아야 할 것으로 3가지 계의 무더기와 감각대문의 단속 등의 공부지음을 들고, 이것을 통해서 4가지 禪과 8가지 지혜를 실현하는 것을 사문됨의 결실이라고 정리하고 있다. 이것을 정리해 보면 모두 23가지가 되는데 그것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 여래가 이 세상에 출현한다 … 그는 법을 설하여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고 지극히 청정한 범행(梵行)을 드러낸다.

② 이런 법을 장자나 장자의 아들이나 다른 가문에 태어난 자가 듣는다 … 머리와 수염을 깎고 물들인 옷을 입고 집을 떠나 출가한다.

③ 이와 같이 출가하여 계목의 단속으로 단속하면서 머문다 …

④ <짧은 길이의 계 - 모두 26가지로 계를 지님>

⑤ <중간 길이의 계 - 모두 10가지로 잘못된 행위를 멀리함>

⑥ <긴 길이의 계 - 모두 7가지로 삿된 생계를 멀리함>

⑦ 이와 같이 계를 구족한 비구는 어느 곳에서도 두려움을 보지 못한다 …

⑧ 비구는 감각의 대문을 잘 지킨다 …

⑨ 비구는 마음챙김과 알아차림을 잘 갖춘다 …

⑩ 비구는 [얻은 필수품으로] 만족한다 …

⑪ 그는 세상에 대한 욕심을 제거하여 욕심을 버린 마음으로 … 악의가 없는 마음으로 … 해태와 혼침을 버려 … 들뜸과 후회를 제거하여 … 의심을 건너서 머문다.(다섯 가지 장애의 극복)

⑫ 초선(初禪)을 구족하여 머문다 …

⑬ 제2선을 구족하여 머문다 …

⑭ 제3선을 구족하여 머문다 …

⑮ 제4선을 구족하여 머문다 …

16. 지(知)와 견(見)으로 마음을 향하게 하고 기울게 한다 …

17. 마음으로 이루어진 몸으로 마음을 향하게 하고 기울게 한다 …

18. 신통변화[神足通]로 마음을 향하게 하고 기울게 한다 …

19. 신성한 귀의 요소[天耳界, 天耳通]로 마음을 향하게 하고 기울게 한다 …

20. [남의] 마음을 아는 지혜[他心通]로 마음을 향하게 하고 기울게 한다 …

21. 전생을 기억하는 지혜[宿命通]로 마음을 향하게 하고 기울게 한다 …

22. 중생들의 죽음과 다시 태어남을 [아는] 지혜[天眼通]로 마음을 향하게 하고 기울게 한다 …

23. 모든 번뇌를 소멸하는 지혜[漏盡通]로 마음을 향하게 하고 기울게 한다 …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꿰뚫어 안다.

 

이렇게 모두 23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본서「수바 경」(D10)에서 아난다 존자는 이 가운데 ①부터 ⑦까지를 계의 무더기[戒蘊, sīlakkhandha]라고 정리하고 있고, ⑧부터 ⑮까지를 삼매의 무더기[定蘊, samādhi- khandha]라고 정리하고 있으며, 16부터 23까지를 통찰지의 무더기[慧蘊, paññā-khandha]라고 정리하고 있다. 이렇게 계온과 정온과 혜온은「사문과경」에서 모두 23가지로 정리되어 나타난다. 물론 보는 입장에 따라서 예를 들면 오개(五蓋)의 극복에 대한 정형구를 초선에 포함시킨다든지 하여 23가지보다 더 적게 정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역자는 이렇게 23가지로 파악하는 것이『디가 니까야』의 다른 경들이나 다른 니까야의 경들에 나타나는 정형구들과 비교해 볼 때 가장 적절한 분류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본경은 우리에게 육사외도(六師外道)로 알려진 부처님 시대의 여섯 명의 종교 지도자의 사상을 서로 비교해서 살펴볼 수 있는 경이다. 육사외도 가운데 불가지론(不可知論)으로 알려진 산자야를 제외한 나머지 5명은 적취설(積聚說)로 대표되는 인도 사문 전통의 가르침에 기초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암밧타 경」(Ambat*t*ha Sutta, D3)

 

인도 최고(最古)요 최고(最高)의 권위인『리그베다』의「뿌루샤 숙따」(Pruṣa Sūkta, 原人에 대한 찬미가)는 노래한다. “바라문은 그(뿌루샤)의 입이고/ 그의 팔로부터 끄샤뜨리야가 만들어졌고/ 그의 넓적다리로부터 와이샤가/ 발로부터 수드라가 태어났다.”(Rv.x.90:12) 이것이 인도의 정통적인 계급관이다. 그런데 만일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너는 나쁜 놈이다. 왜냐하면 내 일기장에 너는 나쁜 놈이라고 적혀있기 때문이다.”라고 한다면 이 진술은 과연 타당성을 확보할 수 있을까? 비천함과 고귀함을 논하려면 최소한의 객관적인 기준은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본경은 이런 존귀함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최고로 존귀한 사람이라고 일컫는 바라문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등에 대해서 암밧타라는 바라문 학도와 세존의 긴장감 감도는 대화로 진행되고 있다.

 

뽁카라사띠라는 연로하고 유명한 바라문의 제자인 암밧타라는 바라문 학도는 스승의 분부를 받고 많은 바라문 학도들과 함께 세존을 뵈러온다. 그러나 그는 스승의 당부를 잊기라도 한 것처럼 아주 거만한 태도로 세존과 대면하였다. 그러자 세존께서는 그러한 거만한 태도는 자신의 인격이 아직 완성되지 못한 것을 드러내는 것일 뿐이라고 암밧타를 타이르신다. 이에 격분한 암밧타가 바라문에 대한 선민의식을 본격적으로 드러내면서 경은 점점 긴장감이 감돌게 된다.

 

본경은 세존과 암밧타 간에 긴장감 감도는 대화를 통해서 세존께서는 참으로 존귀한 사람, 진정한 바라문, 참답게 삼베다에 통달한 삼명(三明, tevijja) 바라문이 되기 위해서는 도덕성, 고귀한 인품, 높은 식견으로 일단 쉽게 풀이해 볼 수 있는 계․정․혜 삼학을 닦지 않으면 안된다는 강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계신다.

 

이런 자질을 갖추어야 세상 사람들은 그를 객관적인 입장에서 존귀한 사람이라고 인정할 것이고, 만일 그렇지 않으면 옛 바라문 선조들을 팔아서 일꾼 노릇이나 하면서, 삼명의 타락의 입구에조차 미치지 못하는, 단지 생계유지를 위한 직업 바라문이 되고 만다고 엄히 꾸짖으신다.

 

이 경을 통해서 세존께서는 참으로 베다(Veda)의 달인이 되기 위해서는 계율과 삼매와 통찰지의 삼학을 닦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동시대 바라문들에게 권고하신다. 즉 참된 바라문은 계․정․혜 삼학을 닦는 자이지 베다 만뜨라를 외는 자가 아니라는 말씀이다.

 

 「소나단다 경」(Son*adan*da Sutta, D4)

 

인도 문화는 계급 문화이다. 이러한 문화를 선도해 오고 지켜온 집단이 바로 바라문 집단이다. 이미 앞의「암밧타 경」을 통해서도 살펴보았지만 바라문 계급의 선민의식은 참으로 강하였다. 그러면 이제 묻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참된 바라문이란 무엇인가? 순수 혈통을 가진 자가 진정한 바라문인가? 삼베다에 통달한 자가 진정한 바라문인가? 멋진 외모를 갖춘 자가 바라문인가? 바른 품행을 갖춘 자가 바라문인가? 현명하고 슬기롭고 학식이 있는 자가 진정한 바라문인가?

 

본경은 세존과 소나단다라는 연로하고 유명한 바라문 사이에 있었던 참된 바라문이라고 인정하는 요인에 대한 대화로 구성되어 있다. 소나단다는 참된 바라문이 되는 요소로 모두 다섯 가지를 든다. 그리고 그 다섯 가지 가운데서 버릴 수 있는 것을 하나씩 버리면서 최종적으로는 계행이 청정함과 지혜로움의 두 가지가 가장 중요한 요인이라고 확정한다.(§20)

 

이처럼 본경은 소나단다 바라문이 참된 바라문이 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꼽은 계행과 지혜에 대해서「사문과경」에서 정리한 계의 정형구와 8가지 지혜야말로 진정한 계행과 지혜임을 천명하고 있다.

 

앞의「암밧타 경」이 젊은 바라문 학도와의 설전을 바탕으로 바라문들의 타락에 대한 준엄한 비판을 하면서 진정한 바라문의 길을 보여준 경이라면, 본경은 도대체 어떤 기준을 가지고 바라문이라 하는가에 대해서 소나단다라는 연로하고 학식 있는 바라문과 합리성과 이성에 바탕 한 진지하고 격조 높은 대화를 통해 심도 있게 점검해 보고 있다.

 

「꾸따단따 경」(Kūt*adanta Sutta, D5)

 

인류는 일찍부터 우주와 자연의 섭리를 찾고 아울러 그 섭리와 적극적으로 대화하고 교류를 하고자 하였던 듯하다. 그러한 현상으로 여러 문화권에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 바로 제사라는 문화 현상이다. 이런 제사 문화는 고대 인도문화의 가장 큰 특징 가운데 하나였다. 특히 바라문들은 베다의 찬미가를 바탕으로 방대한 분량의 제의서를 만들어 가면서 실로 다양한 제사 의식을 만들고 제사를 지내왔다. 그러므로 제사 없는 바라문교란 생각조차 할 수 없다.

 

세존께서도 이러한 인도의 가장 중요한 문화 현상인 제사에 대해서 진정한 제사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답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제사에 대한 불교식 대답이 바로 본경이다. 그러므로 본경은 인도 사회와 문화의 입장에서 볼 때 그만큼 중요한 경이다.

 

본경에서는 꾸따단따라는 유명한 바라문이 세존을 친견하고, “세 가지 제사의 성취와 열여섯 가지 제사의 필수품들”에 대해서 질문을 드린다. 꾸따단따의 질문에 먼저 세존께서는 전생 일화를 통해서 동물을 죽이고 나무를 베고 하는 대신에 16가지 덕을 갖추어 널리 보시하는 제사를 설하신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수승한 것으로

 

① 계를 갖춘 출가자들을 위해서 보시하는 것

② 사방승가를 위해서 승원을 짓는 것

③ 깨끗한 믿음을 가진 마음으로 부처님께 귀의하고 법에 귀의하고 승가에 귀의하는 것

④ 깨끗한 믿음을 가진 마음으로 오계를 받아 지니는 것

⑤ 그리고 본 품에서 23가지로 정리하고 있는 계․정․혜 삼학을 갖추는 것을 설하신다. 이처럼 이상적인 제사를 궁극적으로는 계․정․혜 삼학의 실천으로 설하시는 것이 본경이다.

 

많은 인도학자들은 불교가 인도대중에게 크게 어필할 수 있었던 것으로 의례․의식의 단순명료화를 든다. 바라문 제사는 거행하기 어렵다. 제사는 큰 공장의 기계(yantra)에 비유되었다. 대기업의 공장에서 복잡한 공정으로 이루어져 있고 수많은 부품으로 이루어진 큰 기계는 한 곳이라도 고장 나면 제품을 생산해 내지 못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복잡한 제사의 절차 가운데 한 부분이라도 잘못 거행되면 천상이라는 과보를 생산할 수 없다고 제의서들은 설명한다. 무엇보다도 이런 복잡한 공정으로 이루어진 제사는 엄청난 경비가 든다. 보통사람들은 제사의 주인이 될 수가 없다. 그래서 꾸따단따 바라문도 덜 번거롭고 덜 어려우면서도 더 많은 과보와 이익을 주는 방법을 부처님께 여쭙고 있다.

 

불교는 의례․의식을 중시하지 않으며 오히려 의례․의식에 집착하는 것[戒禁取]은 해탈을 방해하는 족쇄라고 가르친다. 본경에서 설명하듯이 10선업도 등의 계행과 선정과 지혜 등 실제생활 속에서의 실천을 중시하였다. 초기부터 불교는 제사 등의 복잡한 의례 의식을 통해서가 아니라 보시하고 계를 잘 지니면 천상에 태어난다[施․戒․生天]고 가르친다.

 

 「마할리 경」(Mahāli Sutta, D6)

 

여기 일상적인 삶의 방식으로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는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그들은 일상적인 삶의 방식과 구조를 과감히 버리고 집을 나와 독신으로 살면서 자기 내면의 문제를 전면적으로 궁구하면서 살아간다. 우리는 그들을 일러서 출가자라고 한다.

 

그러면 이러한 출가자들의 목적은 무엇일까? 우리는「사문과경」을 통해서 이미 그 전체 구조를 살펴보았다. 이제 다시 본경에서는 삼매 수행을 통한 신통이라는 하나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 과연 그것이 출가의 궁극적인 목적이 되는가를 점검하고 계신다.

 

본경은 마할리라 불리는 릿차위의 옷탓다에게 설하신 것이다. 환속한 수낙캇따가 옷탓다에게 말하기를, 세존 아래서 삼매 수행을 통해서 천상의 모습들은 보았지만 천상의 소리들은 듣지 못했다고 하자, 그 원인을 말씀해 주신 뒤에 이런 삼매 수행이 출가의 목적이 아니라고 하시고, 출가는 네 가지 성자가 되는 것이며 이것은 팔정도를 닦아서 실현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이처럼 삼매와 삼매를 통한 신통은 분명히 가능하지만 이것은 출가의 궁극이 아님을 천명하시고 팔정도를 통한 해탈의 실현이 출가의 궁극이라 설하시는 것이 본경의 핵심이다. 이것은 삼매 수행이나 좌선 지상주의에 잘못 빠져드는 요즘 일부 수행자들이 깊이 새겨봐야 할 가르침이다.

그런 뒤 다시 두 유행승의 예로써 계․정․혜를 설하시는데 팔정도를『장부』제1권『계온품』의 주제인 계․정․혜 삼학과 배대(配對)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이 부분은 다음 제7경의 내용이기도 하다.(아래「잘리야 경」 편을 참조할 것)

 

 「잘리야 경」(Jāliya Sutta, D7)

 

인간은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많은 의문을 가진다. 그중의 하나가 소위 말하는 육체와 영혼의 관계이다.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천착해 보고 있는 경이 바로「잘리야 경」이다. 세존께서 꼬삼비의 고시따 원림(園林)에 머물고 계실 때 만딧사와 잘리야라는 두 유행승이 세존을 뵈러왔다. 그들은 세존께 “참으로 생명이 바로 몸입니까, 아니면 생명과 몸은 다릅니까?”라고 질문을 드린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부처님께서는「사문과경」(D2)에서 정리하신 계․정․혜 삼학의 정형구를 설하시는 것이 경의 전체 내용이다.

 

그들은 4선의 정형구와 7가지 통찰지의 정형구를 말씀하실 때까지는 육체와 영혼이 같은가 다른가라는 그들의 의문 자체가 무의미한 것임을 깨닫지 못한다. 그러다가 번뇌가 완전히 소멸하는 경지 즉 누진통의 경지에 이르러서야 드디어 자아와 몸이 같은가, 다른가 하는 질문이 애초부터 잘못된 것임을 알고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보는 비구에게 ‘참으로 생명이 바로 몸이다.’라거나 ‘생명과 몸은 다르다.’라는 그러한 주장은 타당하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한다. 물론 ‘생명이 바로 몸입니까, 아니면 생명과 몸은 다릅니까?’라는 이러한 질문은 저 유명한「작은 말룽꺄 경」(M63, 한역『중아함』의「전유경」) 등(D9, M72)에서 부처님께서 설명하시지 않은 열 가지 문제[十事無記]에 속한다. 수행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존재론적인 단정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에게「독화살 비유경」(箭喩經)으로 잘 알려진「작은 말룽꺄 경」(M63)과「뽓타빠다 경」(D9) 등에서는 십사무기에 대해서는 설명을 하지 않으시고 고․집․멸․도의 사성제를 설하셨지만 여기서는 일단 그들의 질문을 물리치지 않고 인정하고 받아들여서 그것을 바탕으로 본 품에서 23가지로 정리한 계․정․혜의 경지를 설해 들어가시면서 최종적으로 번뇌의 소멸[漏盡通]을 설하셔서 그들의 질문 자체가 의미가 없음을 깨닫게 하신다는 뜻이다.

 

존재론적 실체에 대한 수행자들의 끈질긴 집착은 무섭다. 본경이 그렇고 특히「뽓타빠다 경」(D9)이 그러하다. 이것은 지금의 우리나라 수행자들에게도 그대로 해당되는 말이라 생각된다. 우리는 성불을 이야기하고 돈오를 이야기하고 살불살조(殺佛殺祖)를 이야기 하지만 기실은 여래장, 불성, 주인공, 마음을 모두 존재론적 실체로 이해해서, 이러한 자아나 대아와 하나 되고 계합되는 것쯤으로 불교를 이해하고 그것을 최상승인 양 떠벌리니 참으로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깟사빠 사자후경」(Kassapasīhanāda Sutta, D8)

 

출가란 세속 생활방식의 포기이다. 그러면 출가자의 삶은 어떻게 세속적인 삶과 달라야 하는가? 인도의 오래된 사문 전통에서는 출가자가 밟아야 할 길로 고행을 주장해 왔다. 고행이 아니라면 도대체 출가와 세속적 삶이 다를 수가 없지 않은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본경에서도 고행주의자 깟사빠는 고행이야말로 사문의 본업이요 바라문의 본업이라고 강하게 주장하고 있다.

 

과연 그런가? 과연 이러한 고행이 출가자의 삶의 방식이어야 하고 출가의 궁극적 목적이 되어야 하는가?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고행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계실까?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이 바로 본경의 내용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고행이 출가자의 목표가 아니라고 세존께서는 본경을 통해서 말씀하신다. 출가는 계․정․혜 삼학을 완성해서 마음의 해탈[心解脫]과 통찰지의 해탈[慧解脫]로 표현되는 해탈과 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지, 단지 고행을 위한 것은 결코 아니라는 말씀이다.

 

세존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게 된 나체 수행자 깟사빠는 마침내 계의 구족과 마음의 구족과 통찰지의 구족에 대해서 질문을 드리고, 세존께서는「사문과경」(D2)에서 23가지로 정리하여 설하신 계․정․혜 삼학으로 대답하신다.(§§18~20) 그리고 계속되는 부처님의 사자후를 듣고 크나큰 환희심이 생긴 나체 수행자 깟사빠는 세존 아래로 출가해서 아라한이 되었다고 한다.(§23)

 

「뽓타빠다 경」(Pot*t*hapāda Sutta, D9)

 

인간의 정신 영역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인식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세존께서는 인간을 설명하시면서 심리현상들[行, 상카라] 가운데서 인식[想, 산냐]을 따로 독립시켜 오온에다 따로 인식의 항목[想蘊]을 넣으셨다. 그러면 도대체 이러한 인식은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인가? 인식이 있다면 인식하는 주체가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아니면 적어도 영원한 인식이 있어서 그것을 자아라고 불러야 하지 않는가?

 

이런 미묘하면서도 중요한 문제에 대한 부처님의 답변이 바로 본경이다. 본경에서는 이러한 인식과 인식을 하는 자는 도대체 어떻게 해서 존재하는가를 두고 뽓타빠다라는 유행승과 여러 측면에서 다양하고 심도 깊은 대화가 전개된다. 역자는 본서 제1권의 중요한 경 세 가지만을 들라면 주저하지 않고「범망경」(D1)과「사문과경」(D2)과 본경을 들고 싶다.

 

본경에서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밝혀주신다.

① 인식은 수행의 정도에 따라 바뀐다.

② 무소유처가 인식의 구경이다.

③ 인식의 완전한 소멸도 가능하다. 그것을 상수멸이라 한다.

④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인식은 그것이 아무리 미묘하고 섬세하다 하더라도 존재론적 실체인 자아가 아니다.

⑤ 어떤 방식으로 자아를 상정하든 그것은 바뀔 수밖에 없다. 존재란 흐름 자체이기 때문이다. 마치 우유가 응유(curd)로, 생 버터로, 정제된 버터(ghee)로, 최상의 버터[醍醐]로 바뀌어 가는 것과 같다. 자아라는 것은 흐름의 특정한 기간의 특정한 상태를 인습적으로 이름붙인 것일 뿐 고정불변의 실체는 없다.

 

이처럼 본경에서 말하는 인식은 단순히 대상을 무엇이라고 아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본경에서 말하는 인식은 매순간 촐랑대는 그런 종류의 인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수행을 통해서 실현되는 삼매의 경지 혹은 경계에서 드러나는 고상한 인식(sukhuma-saññā)을 말하고, 이는 사문들이 삼매 수행을 통해서 실현하고자 하는 일종의 이념이나 이상향 등을 나타내는 술어이다. 그러므로 본경에서 말하는 인식[想, 산냐]은 자아라는 인식[我相], 중생이라는 인식[衆生相], 영혼이라는 인식[壽者相], 개아(個我)라는 인식[人相]으로 대표되는 금강경의 4상(相, 想, 산냐)과 일맥상통한다.

 

본경이 주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이처럼 ‘존재론적 실체, 즉 자아란 결코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존의 고구정녕하신 말씀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뽓타빠다는 안타깝게도 계속 존재론적인 실체를 상정하고 그것을 세존께 질문한다.

 

본경은 무언가 궁극적 실재를 상정하는 그런 관념과 관심을 버리지 못하는 한 결코 부처님의 메시지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것은 현재 우리 불교 수행자들도 깊이 새겨볼 말씀이라 생각된다. 우리는 이름만 불교를 하고 있지 어쩌면 대아, 진아, 주인공, 불성, 여래장이라는 존재론적인 실재를 상정하고 그것을 추구하고 그것을 깨치고 그것과 하나 되거나, 아니면 그것의 은총과 광명으로 살려는 발상을 굳게 움켜쥐고 놓지 못하고 있지나 않는가? 참으로 이런 다른 발상을 가지고 있다면 그는 부처님의 제자가 아니라 다른 수행, 다른 스승, 다른 가르침을 불교라는 이름으로 거머쥐고 있는 것이리라. 그런 자는 부처님의 고구정녕한 메시지를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뽓타빠다는 세존의 말씀을 공감하고 세존을 존경하였기에 세존의 신도는 되었지만 자아라는 존재론적인 단정에 대한 집착을 완전히 버리지는 못했다. 그래서 세존 문하로 출가하지는 못했다. 이런 점에서 그는 본서 제8경의 나체 수행자 깟사빠와 대조가 된다. 깟사빠는 계․정․혜 삼학의 길이야말로 사문이 닦아야 할 본업이라는 세존의 말씀을 완전히 이해해서, 고행이야말로 사문의 본업이라는 그의 견해를 버리고 세존의 문하로 출가하여 아라한이 되었다.

 

그러나 본경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찟따는 자아와 세상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관심이 괴로움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해탈․열반의 실현과는 아무 상관이 없음을 분명히 파악하고 부처님 문하에 여덟 번째로 출가를 결심한다. 그는 이전에 일곱 번이나 출가와 환속을 거듭했지만, 본경을 통해서 부처님의 이와 같은 심심미묘한 가르침을 정확히 파악하였기에 다시 여덟 번째로 출가를 감행하여 다시는 환속하지 않았고 아라한이 되었다. 존재론적인 가설을 끝까지 버리지 못했던 유행승 뽓타빠다와는 큰 대조를 이룬다.

 

「수바 경」(Subha Sutta, D10)

 

세존께서 돌아가셨다. 세존께서는 성도하신 뒤 45년 간을 인류를 위해서 많은 가르침을 주셨다. 세존이 반열반하신 지금 우리는 도대체 세존의 가르침을 어떻게 정리해서 이해해야 하는가? 이것은 세존 입멸 직후의 불제자들뿐만 아니라 현대를 살아가는 재가와 출가를 망라한 우리 불자들에게도 가장 중요한 관심일 것이다. 이러한 중차대한 사항을 수바라는 바라문 학도는 25년 가까이 세존을 시봉했으며 세존의 임종을 지켜보았고 다문제일(多聞第一)이라는 칭호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아난다 존자에게 질문하고 있다.

 

수바의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아난다 존자는 “성스러운 계의 무더기[戒蘊], 성스러운 삼매의 무더기[定蘊], 성스러운 통찰지의 무더기[慧蘊]를 그분 세존께서는 칭송하여 말씀하셨으며 그 안에서 사람들을 격려하고 분발하게 하고 기쁘게 하셨다.”라고 먼저 대답한다.(§1.6) 그리고 수바가 이를 구체적으로 말씀해 달라고 요청하자, 아난다 존자는 이 각각의 무더기를「사문과경」(D2)에서 정리한 계․정․혜 삼학의 정형구로 대답을 하는 것이 본경 전체의 구성이다.(§§1.7~2.37)

 

본경은 아난다 존자가 세존의 가르침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를 볼 수 있는 경이다. 아난다 존자는 부처님 일대시교(一大示敎)를 계․정․혜 삼학으로 파악하고 있다. 아난다 존자가 이렇게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일차합송에서 아난다 존자의 제자들에게 전승의 책임이 맡겨진 이『디가 니까야』의 첫째 품인『계온품』은 계․정․혜 삼학의 정형구가 핵심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무튼 계․정․혜는 불교의 전부이다.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을 한 마디로 말하라면 연기․무아라 할 수 있고, 이것을 진리 체계로 구성한 것이 사성제이며, 이것을 실천 체계로 완성한 것이 팔정도요, 이것을 확대하면 37조도품이 되고, 팔정도를 다시 간추린 것이 계․정․혜며, 이것을 다시 3戒-4禪-8通의 정형구로 상세하게 정리하고 있는 것이『장부』제1권인『계온품』의 기본 골격이라고 이해하면 될 것이다.

 

「께왓다 경」(Kevaddha Sutta, D11)

 

예나 지금이나 범부 중생의 지대한 관심 중의 하나는 신통이나 기적이다. 특정 종교 교단의 어떤 성직자나 수행자가 신통을 나투면 삽시간에 많은 신도들이 생길 것이고 그 교단은 탄탄하게 뿌리를 내릴 것이라는 생각은 예나 지금이나 많은 범부들을 유혹하고 있다. 본경은 께왓다라는 재가 신도의 간청을 통해서 불교 신도가 가지고 있는 그러한 유혹을 드러내고 있다. 이에 대해서 세존께서는 그러한 신통이 쓸모없음을 설하신 뒤에 이『계온품』의 주제인 계․정․혜의 가르침이야말로 진정한 신통이요 진정한 기적임을 드러내 보이신다.

 

본경을 통해서 세존께서는 신통의 기적과 [남의 마음을 알아] 드러내는 기적[觀察他心神變]과 가르침의 기적[敎誡神變]이라는 세 가지 신통이 있다고 말씀하신 뒤(§3) 앞의 두 가지 신통에는 좋지 않은 여러 사항이 있으므로 이러한 신통의 기적을 탐탁하지 않게 생각하고 멀리하고 좋아하지 않는다고 결론지으신다. 그리고 나서 가르침의 기적[敎誡神變]에 대해서 본 품에서 23가지로 정리한 계․정․혜의 정형구로 길게 설명하신다.(§§8~66)

 

그런 뒤 어떤 비구가 신통으로 사대천왕부터 시작하여 13번째로 대범천에게까지 가서 “도대체 어디서 이 네 가지 근본물질[四大], 즉 땅의 요소[地界], 물의 요소[水界], 불의 요소[火界], 바람의 요소[風界]는 남김없이 소멸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지만 아무도 해결을 해주지 못하고, 마침내 세존께로 돌아와서 질문을 드리고 해탈․열반에 관한 궁극의 말씀을 듣는 일화를 소개하는데, 계․정․혜 삼학을 통한 해탈이 신들을 찾아다니는 신통보다 더 수승하고 더 귀중함을 일깨워주는 말씀이다. 아무튼 본경도 삼학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하는 경이다.

 

 「로힛짜 경」(Lohicca Sutta, D12)

 

깨달은 자는 무엇을 해야 하나? 깨달은 자라 할지라도 남에게 그것을 드러내어 가르치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 아닌가? 서울 지하철과 서울역 앞에서 공공연히 해대는 전도단들의 광적인 행위를 너무나 많이 목격한 대한민국의 보통 사람들은 아마 대부분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부처님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시는가? 본경은 이처럼 전도단들의 집요한 종교공세에 짜증난 분들에게 전하는 부처님의 말씀이다.

 

로힛짜라는 연로하고 유명한 바라문이 있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여기서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이 유익한 법을 증득했다 할지라도 유익한 법을 증득한 뒤 남에게 전해 주어서는 안 된다. 참으로 남이 남에게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마치 이전의 속박을 자른 뒤 다른 새로운 속박을 만드는 것과 같다. [남에게 전하는] 이것은 사악하고 탐욕스런 법이 되고 만다고 나는 말한다. 참으로 남이 남에게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라는 견해를 품고 있었다고 한다.(§2)

 

세존께서는 질책받을 만한 스승들을 질책하는 것은 사실이고 옳고 법다워서 비난받지 않는다고 분명히 말씀하신다. 그러나 계․정․혜를 실현한 스승이 그러한 궁극의 길을 드러내지 않는 것은 마치 왕이 왕국의 모든 생산품을 혼자 독식하려는 것과 같은 지극히 이기적이고 개인적인 발상이라고 말씀하신다. 세상을 위한 구세대비(救世大悲)가 없는 스승은 진정한 스승이 아니라는 단호한 말씀이다.

 

깨닫고 나서는 나무 등걸이나 돌덩이처럼 그냥 멍하니 있는 것이 아니다. 깨달은 분들은 세상의 이익을 위해서 바른 법을 설한다. 그것이 성자들의 무연(無緣)의 자비이다. 이웃과 바른 법과 바른 도를 함께 나누는 자가 진정한 불자다.

 

「삼명경」(三明經, Tevijja Sutta, D13)

 

부처님 당시 인도 바라문들의 유일한 염원은 그들의 신인 범천(브라흐마)이 거주하는 범천의 세상에 태어나는 것이었다. 그러면 당연히 따라 오는 의문이 어떻게 하면 범천의 세상에 태어나게 되느냐는 것이다. 본경에서 세존께서는 누구든지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람이라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범천으로 서술되고 있는 천상(하늘나라)에 태어나는 길을 설하고 계신다.

 

와셋타와 바라드와자라는 두 바라문 학도가 서로 각각 자기 학파에서 가르치는 도만이 진정으로 범천에 이르게 하는 길이라고 주장하지만 서로를 설득시킬 수가 없어서 세존께 찾아와서 이 뜻을 여쭙는다. 세존께서는 그들이 바라문들의 가르침은 벗어남으로 인도한다고 말하는 것을 들으시고, 장님 줄서기 비유(§15)와 달과 태양에 가는 길에 대한 가르침(§§16~18)과 나라의 제일가는 미녀의 비유(§19)와 사다리의 비유(§21)와 아찌라와띠 강의 비유(§24)와 범천과 소유물의 가르침(§31) 등으로 그들의 가르침의 부당함을 말씀하신다.

 

그러자 마침내 두 바라문 학도는 “고따마 존자시여, 저는 ‘사문 고따마께서는 범천의 일원이 되는 길을 알고 계신다.’라고 들었습니다.”라고 말씀드리면서 범천의 일원이 되는 길을 가르쳐주시기를 간청한다.(§39) 그러자 세존께서는 「사문과경」(D2)의 계의 구족과 다섯 가지 장애를 제거함까지 설하시고(§§40~75) 뒤이어 자애, 연민, 같이 기뻐함, 평온의 네 가지 거룩한 마음가짐[四梵住, 四無量]을 비유와 함께 설하신다.(§§76~79) 본경에서는 본서「사문과경」(D2)에 정리된 삼매[定]와 통찰지[慧]에 해당하는 정형구가 나타나지 않는다. 와셋타의 관심과 질문이 범천에 이르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세존의 이러한 확신에 찬 말씀을 듣고 두 바라문 학도는 세존의 재가 신도로 귀의하는 것으로 경은 끝을 맺는다.(§82) 본서 제3권「세기경」(D27)에 의하면 그들은 그 후에 세존 문하로 출가하여 견습 기간을 가지고 있었고, 마침내 구족계를 받고 아라한이 되었다고 한다.

 

「대전기경」(大傳記經, Mahāpadāna Sutta, D14)

 

 부처님은 깨달으신 분이다. 그러면 이 세상에 부처님은 석가모니 부처님 한 분만 계시는 것일까? 아니면 이전에 이미 많은 부처님이 계셨던 것일까? 당연히 부처님 시대부터 불자들이 가져왔던 의문일 수밖에 없다. 여기에 대한 부처님의 답이 바로 본경이다. 본경을 통해서 세존께서는 당신 이전에 여섯 분의 부처님이 이미 출현하셨음을 설하고 계시며,「전륜성왕 사자후경」(D26)에서는 미래에 미륵 부처님이 출현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본경에서는 91겁 전에 출현하셨다는 위빳시(Vipassi) 부처님의 출생에서부터 출가와 성도와 전법에 이르기까지 그분의 일대기를 통해서 모든 부처님께 보편적 법칙으로 통용되는 부처님들의 일대기를 볼 수 있다. 한편 본경이 가지는 신화적인 표현과 부처님들의 일대기를 주제로 하고 있다는 이유 때문에 본경을 후대에 결집된 것으로 보려는 견해가 있기도 하다. 그러나『닛데사』(Niddesa, 義釋)에 의하면 본경은 초기 자따까의 형태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경이라고 소개하고 있는데(Nd2.80) 이미『쿳다까 니까야』(소부)에 속하는『닛데사』에 본경이 언급되고 있다는 점만 보아도 본경의 결집을 후대로 보는 견해는 인정할 수가 없다.

 

본경이 신화적인 기법을 동원해서 부처님의 일대기를 서술하고 있다고 해서 현대적 취향에 맞지 않는다고 등한시 하면 안 될 것이다. 본경을 통해서 우리는 위빳시불의 깨닫는 과정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본경에서 위빳시불은 일반적으로 경에서 정리하고 있는 12지 연기 대신에 10지 연기를 통찰하고 계신다.

 

위빳시불은 노사우비고뇌 → 생 → 유 … → 명색 → 식으로 연기법을 고찰하고, 다시 식과 명색의 상호 관계로부터 식 ↔ 명색 → 육입 … → 생 →노사우비고뇌로 이들의 법들이 일어남[起]을 통찰하셔서, ‘일어남, 일어남’이라고 전에 들어 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눈[眼]이 생기고, 지혜[智]가 생기고, 통찰지[慧]가 생기고, 영지[明]가 생기고, 광명[光]이 생겼다고 서술하고 있다. 그런 뒤에 같은 방법으로 이러한 법들이 소멸함[滅]을 통찰하셔서, ‘소멸, 소멸’이라고 전에 들어 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눈이 생기고, 지혜가 생기고, 통찰지가 생기고, 영지가 생기고, 광명이 생겼다고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연기의 이치를 순관하고 역관한 이것으로 해탈이 성취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본경에는 위빳시 부처님이 이렇게 연기법을 순관하고 역관한 뒤에 다시 “‘이것이 물질이다. 이것이 물질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물질의 사라짐이다. … 이것이 알음알이다. 이것이 알음알이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알음알이의 사라짐이다’라고 취착하는 다섯 가지 무더기들[五取蘊]에 대해서 일어나고 사라짐에 대한 관찰을 하면서 머물렀다. 그가 이렇게 관찰하면서 머물자 오래지 않아 취착이 없어져서 번뇌들로부터 마음이 해탈하였다.”(§2.22)라고 나타난다.

 

다시 말하면 연기법의 순관(順觀)과 역관(逆觀) 혹은 유전문(流轉門)과 환멸문(還滅門)의 관찰을 통해서는 안․지․혜․명․광(眼․智․慧․明․光)은 생기지만 해탈은 성취하지 못하였으며, 다시 이것을 토대로 해서 오취온과 그 일어남과 사라짐을 철견함으로 해서 해탈하셨다고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오온의 무상․고․무아를 통찰해서 오온에 대해서 염오․이욕․소멸을 실현하고 그래서 해탈하고 열반을 실현한다는『중부』나『상응부』의 여러 경들과 일맥상통한다.

 

「대인연경」(大因緣經, Mahānidāna Sutta, D15)

 

불교의 핵심사상을 한마디로 말해 보라면 초기, 부파, 대승이 이구동성으로 한결같이 그리고 주저 없이 연기(緣起)라고 할 것이다. 연기는 존재론적인 실체가 없음을 천명하는 무아와 동의어이며, 진리로서는 사성제로, 실천 체계로서는 팔정도로 시현된다. 다시 연기는 무상․고․무아라는 제법의 보편적 특징을 결정짓는 준거가 되며, 이는 해탈의 세 가지 관문으로 설정이 된다. 이처럼 연기는 불교를 불교이게 하는 가장 중요한 가르침이다.

 

중요한 것은 초기경에서 연기의 가르침은 우주의 법칙이나 생성원리를 설명하는 체계가 결코 아니라, 현실 즉 지금여기에서 괴로움이 어떻게 일어나는가 하는 발생 구조와 어떻게 괴로움을 소멸시킬 것인가 하는 소멸 구조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가르침으로 설해졌다는 사실이다. 그렇지 않고 연기를 우주의 전개 원리를 설명하는 쪽으로 적용해서 저 밖으로 천착해 들어가다 보면 괴로움의 소멸, 해탈, 열반이라는 부처님의 실천적인 고구정녕한 말씀을 잊어버리게 된다.

 

본경은 연기를 설하는 대표적인 경이지만 12지 연기를 설하는 경이 아니다. 그리고「대전기경」(D14)에 나타나는 10지 연기에서 육입이 생략된 9지 연기로 나타난다. 본경에서 설하는 연기는 9지 연기이다. 이것은「대전기경」의 10지 연기와 궤를 같이하는 가르침이며 육입을 제외시킴으로 해서 명색과 육입의 중복을 극복하였다. 사실 명색(名色, 정신․물질)과 육입(六入, 여섯 감각장소)은 같은 현상의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대전기경」이나 본경에서 무명과 행을 언급하지 않는 이유는 연기구조를 과거 생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이해하지 않고 현재 생에서 어떻게 연기각지(緣起各支)가 서로 조건지워져 있는가를 보여 주기 위한 것이라고 주석서는 설명하고 있다.(본서「대전기경」(D14) §2.19의 주해를 참조할 것)

 

이를 통해서 볼 때 6지, 8지, 9지, 10지 연기가 아닌 12지 연기는 반드시 삼세양중인과(三世兩重因果)로 해석해야 마땅하다고 보며, 그래서 상좌부 아비담마와『구사론』으로 대표되는 북방 아비달마는 공히 12지 연기를 삼세양중인과로 이해한다고 역자는 받아들인다. 그리고 현재 생에서의 연기나 찰나연기는 본서 제1권「범망경」(D1)의 8지 연기(§3.71)와 본경의 9지 연기와「대전기경」의 10지 연기와『중부』「육육경」(六六經, Chachakka Sutta, M148)의 6지 연기 등을 통해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 보다 명확해진다고 본다.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Mahāparinibbana Sutta, D16)

 

부처님이 입멸하셨다. 남은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제자들이 가졌던 당연한 문제의식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아난다여, 그런데 아마 그대들에게 ‘스승의 가르침은 이제 끝나 버렸다. 이제 스승은 계시지 않는다.’라는 이런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아난다여, 그러나 그렇게 봐서는 안 된다. 아난다여, 내가 가고난 후에는 내가 그대들에게 가르치고 천명한 법과 율이 그대들의 스승이 될 것이다.”(D16 §6.1)라는 부처님의 마지막 유훈을 가슴 깊이 간직하고 바로 부처님 말씀을 결집하는 대합송 작업에 들어갔다. 그 작업은 라자가하의 칠엽굴에서 부처님께서 입멸하신 두 달 뒤에 시작하여 장장 7개월에 걸쳐서 이루어졌다고 한다.(본서 제3권 부록『장부 주석서』서문 §69)

 

그리고 그들은 부처님의 마지막 행적을 소상히 합송하여 부처님의 위대한 발자취를 전승해주고자 했을 것이며 그것이 제자 된 자들의 당연한 도리라 생각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탄생한 것이 본경이다. 본경은 세존께서 입적하시기 약 2년 전의 행적부터 시작해서 부처님 유체를 화장하여 사리를 분배하고 탑을 만든 것까지 총 6개의 바나와라가 되는 많은 분량으로 이루어져 있다.

 

본경은「유행경」(遊行經)으로 한역되어서『장아함』의 두 번째 경으로 중국에 소개되었다. 그리고 동진(東晉) 때 법현(法顯) 스님이「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으로 단행본으로 번역하였다. 그러나 본경은 담무참(曇無讖)이 번역한 것으로 전해오는 대승의「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과는 그 체제나 내용이 완전히 다르다.

 

본경은 세존께서 반열반하시기 전 1~2년 동안에 하신 말씀을 모은 경이다. 그런 만큼 세존께서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하시고자한 육성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경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본경에 나타나는 여러 말씀은 불제자들이 가슴 깊이 새기고 그대로 실천하려 노력해야 할 것이다. 특히 마지막 제자인 수밧다에게 하신 ‘불교교단에는 팔정도가 있기 때문에 진정한 사문의 집단’이라는 취지의 말씀과 경의 도처에서 마음챙김을 강조하신 점과 ‘방일하지 말고 [해야 할 바를 모두] 성취하라.’는 마지막 유언은 우리가 가슴깊이 새겨야 할 말씀이라고 역자는 파악한다.

 

「마하수닷사나 경」(Mahāsudassana Sutta, D17)

 

세존께서는 꾸시나라라는 조그마하고 척박하고 볼품없는 도시에서 반열반하셨다. 인류의 대 스승이신 부처님께서 이런 볼품없는 곳에서 입멸하신다는 것이 격에 맞지 않는 것이 아닌가? 아난다를 위시한 몇몇 비구들은 분명히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래서「대반열반경」 §§5.18~19에서 아난다 존자는 세존께 이렇게 간청을 드린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이처럼 조그마하고 척박하고 볼품없는 도시에서 반열반하지 마시옵소서. 세존이시여, 짬빠, 라자가하, 사왓티, 사께따, 꼬삼비, 와라나시 같은 다른 큰 도시들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세존께 청정한 믿음을 가진 많은 끄샤뜨리야 부호들과 바라문 부호들과 장자 부호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여래의 존체를 잘 수습할 것입니다.”

 

이런 아난다 존자의 간청에 세존께서는 “아난다여, 그렇게 말하지 말라. 아난다여, 조그마하고 척박하고 볼품없는 도시라고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하신 다음 옛적에 이곳이 마하수닷사나라는 전륜성왕의 수도인 꾸사와띠였다고 하시며, 꾸사와띠의 번창함을 묘사하시는 것이 본경의 주요 내용이다. 그러므로 본경은 바로 앞의「대반열반경」에 대한 보유(補遺)의 성격이 강한 경이다.

 

본경이 주는 더 중요한 메시지는, 세존께서 §2.15에서 말씀하고 계시듯이 그처럼 굉장한 왕이 제아무리 큰 궁전에 살아도 자는 곳은 한두 평 남짓한 침상뿐이며, 제 아무리 많은 재물과 재산과 음식이 있어도 한 끼 먹는 것은 일정 분량의 밥과 반찬이었다는 등의 묘사이다. 이러한 말씀이야말로 본경을 통해서 세존께서 제자들에게 간곡하게 전하고자 하시는 메시지일 것이다.

 

이처럼 세속적 권위를 모두 다 갖추어 누린 전륜성왕에게도, 깨달음을 실현하시고 법을 선포하신 여래에게도, 죽음이라는 현상은 필연적이다. 그러므로 세속적인 것이든 비세속적인 것이든 그 성취가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그것에 조금의 의미라도 부여하는 한 염오․이욕․해탈은 불가능하다. 상카라[行]들로 표현되는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해서 사무치도록 넌더리치지[厭惡] 못하는 한 해탈․열반은 공허한 구호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본경은 이러한 간곡한 말씀을 간직하고 있는 가르침이다.

 

「자나와사바 경」(Janavasabha Sutta, D18)

 

본경도「대반열반경」(D16)에 대한 보유(補遺)의 성격이 강한 경이다.「대반열반경」의 §§2.6~2.9에 이미 나타났듯이, 세존께서 나디까 사부대중들이 죽어서 성스러운 과위(果位)를 증득한 것에 대해서 말씀하시자, 아난다 존자가 마가다의 빔비사라 왕과 마가다의 신도들의 행처에 대해서 질문을 드리고 세존께서 여기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경이다.

 

빔비사라 왕이 죽어서 자나와사바라는 사대왕천에 속하는 힘센 약카가 되어 세존께 와서 나누는 대화가 본「자나와사바 경」의 전체 구조이다.

 

비록 본경은「대반열반경」 §§2.6~2.9에 대한 보유적인 성격의 경이고 전체가 신화적인 표현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그 내용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할 수 있다. 본경에서는 인도인들, 특히 바라문들이 제일의 신으로 믿고 섬기는 범천(Brahma)이라는 신의 입을 통해서 부처님 가르침이 수승함을 천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본경은 신화적 이야기로 가득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본경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까지 부정하면 안 될 것이다. 오히려 신화적 표현을 통해서 당대의 종교인들과 종교적 심성에 불교의 메시지를 더 강력하게 호소하는 것이라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즉 불교가 아닌 바라문교라는 토착 종교의 언어와 관점으로 불교를 설명하는 것으로 봐야 할 것이며, 이것이 그 시대의 신화를 빌어서 불교를 표현하는 가장 중요한 목적일 것이다.

 

본경에서는 부처님 가르침을 믿고 그대로 실천하면 오히려 천상에 태어나는 자들이 더욱더 증가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범천 등 천상의 신들도 더 기뻐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렇게 본경은 ‘불교는 전통 바라문교를 더욱더 빛나게 하는 가르침’이라는 안도감을 당대 바라문들을 비롯한 종교인들과 민중들에게 전하는 경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본경은 “이렇게 해서 청정범행은 잘 유지되고 번창하고 널리 퍼지고 많은 사람들이 따르고 대중적이 되어 신과 인간들 사이에서 잘 설명되었다.”라고 끝맺고 있다.

 

「마하고윈다 경」(Mahāgovinda Sutta, D19)

 

본경은 앞의「자나와사바 경」(D18)에 대한 보유(補遺)의 성격이 강한 경이다.「자나와사바 경」의 주요내용은 범천이 설주(說主)가 되어 세존의 가르침을 요약 정리해서 삼십삼천의 신들에게 설한 것을, 위룰하까 대천왕의 일원이 되어 그 회합에 참석한 자나와사바 약카가 듣고 세존께 와서 그 이야기를 알려드리는 형식으로 전개되었다. 마찬가지로 본경에서도 주요 내용은 범천이 설주가 되어 마하고윈다라는 부처님 전생담을 설한 것이다. 범천이 신들의 회합에서 삼십삼천의 신들에게 들려준 이런 이야기를 본경에서는 빤짜시카 약카 동자가 듣고 부처님께 찾아와서 부처님께 고하는 형식으로 전개되고 있다.

 

본경뿐만 아니라 초기경 전체에서 부처님께서 설하시는 범천에 태어나는 길은 자애[慈], 연민[悲], 같이 기뻐함[喜], 평온[捨]의 네 가지 거룩한 마음가짐[四梵住, 四無量]이다. 그러나 해탈․열반을 실현하는 길은 팔정도이다. 그래서 본경에서 부처님께서는 전생에 마하고윈다였을 때는 팔정도를 근본으로 하는 청정범행을 몰랐기 때문에 대중들을 범천에 태어나게만 인도했지만 금생에는 팔정도를 드러내고 실현했기 때문에 아라한, 불환자, 일래자, 예류자라는 성자의 경지로 무리들을 인도한다고 천명하신다. 그러므로 본경은 팔정도의 중요성을 거듭 천명한 경이다.

 

그리고 본경은 인도의 가장 유력한 신들 가운데 한사람인 끄리슈나의 이름인 고윈다를 등장시켜 그는 부처님의 전생 이름이었다고 하고 있으며, 그들의 친구가 바로 일곱 명의 바라따 왕들이었다고 하여 불교의 종교화와 신화화를 전개시켜 나가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런 이야기들이 모여서 오히려 나중에 힌두교에서는 끄리슈나(고윈다)를 위슈누(Vis*n*u)의 여덟 번째의 화신이라 하고 부처님을 위슈누의 아홉 번째 화신이라고 받아들이고 있다고 불 수 있을 것이다.

 

「대회경」(大會經, Mahāsamaya sutta, D20)

 

본경은 범부의 관점에서는 이해하기 힘든 수많은 신들의 세계를 언급하고 있다. 앞의 두 경을 통해서 우리는 인도 신화의 정상을 차지한다 할 수 있는 범천과 신들의 왕이라 불리는 삭까(인드라)를 필두로 하여 삼십삼천과 사대왕천에 속하는 천상의 신들이 모두 모여서 회합을 가지는 광경을 살펴보았다. 본경은 그런 신들뿐만 아니라 더 저급한 신들이나 정령의 무리들까지 모두 포함하여, 부처님과 비구 승가에 관심을 가지고 모여든 모든 신들을 언급하고 있다.

 

본경도 불교가 종교화 되고 신화화 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고 여겨지는데 지금이나 예전이나 다신교적이요 물활론적이요 범신론적 성향이 아주 강하였던 인도 민중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종류의 경이 결집될 수밖에 없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들은 사성제, 팔정도, 37조도품 등의 생사를 뛰어넘는 가르침이나, 계를 지키고 보시를 하여 천상에 태어나는 실천보다는, 직접적으로 여러 신들이나 눈에 보이지 않는 초자연적 현상의 가피를 입어서 삶의 현장에서 복잡다단하게 자신들을 힘들게 하는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고 싶어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지금 시대에 종교를 찾는 모든 나라의 사람들에게도 널리 퍼져 있는 관심사이기도 하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 불교 교단도 그냥 있을 수만은 없었을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신도들의 관심에 응답을 해야 했을 것이다. 이런 요구에 부응하여 불교도 일찍부터 종교화와 신화화의 길을 채택하여 받아들였다고 보아지며 특히『디가 니까야』는 이런 성향을 잘 간직하고 있다. 본경의 결집도 이러한 배경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며, 본경의 결집과 같은 과정을 거쳐서 본서 제3권의「아따니띠야 경」(D32)과 같은 경들이 완전히 정착되어서 불자들의 일상생활을 보호하는 보호주(保護呪)의 역할을 하였으리라고 본다. 그러므로 본경은 불교가 어떻게 종교화되고 신화화되어 가는가를 여실히 볼 수 있는 경이라 하겠다.

 

「제석문경」(帝釋問經, Sakkapañha Sutta, D21)

 

본서의「자나와사바 경」(D18)과「마하고윈다 경」(D19)이 불교를 외호하는 범천 사낭꾸마라가 중심이 된 경이요,「대회경」(D20)이 여러 신들과 정령에 관한 경이라 한다면, 이제 본경은 불교를 외호하는 최고의 천신이며 신들의 왕으로 불리는 삭까(인드라)가 중심이 되는 경이다. 앞의 두 경들을 통해서 보면 범천은 세존께 법문을 청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나지만, 인드라는 여기서처럼 세존께 질문을 드리고 이 질문을 통해서 그는 예류과를 증득하여 불교의 성자(ariya) 반열에 들어가게 된다.

 

본경에서 삭까는 결국은 연기적인 고찰 끝에 깨달음을 증득한다. 그는 세존과 더불어 질투와 인색, 좋아하고 싫어함(piya-appiya), 열의[慾, chanda, 의욕, 애정], 일으킨 생각[尋, vitakka], 사량분별을 가진 인식이라는 헤아림(papañcasaññāsan#khā)으로 진행되는 문답을 나눈 뒤, 이러한 사량분별을 가진 인식이라는 헤아림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의 실천에 대한 법문을 세존께 청한다. 사량분별의 소멸은 바로 열반이다. 그래서 세존께서는 열반을 실현하는 방법으로 세 가지 느낌들을 통찰하는 것을 심도 깊이 설명하신다. 삭까는 이 법문을 듣고 마침내 예류자가 된다. 이것은 수행자들이 깊이 새겨볼 가르침이다.

 

주석서에서는 명상주제를 물질의 명상주제와 비물질(정신, 名)의 명상주제로 둘로 나누어서 자세히 설명한 뒤(이 내용은『네 가지 마음챙기는 공부』 200~201쪽과 같다) “그런데 여기서는 세존께서 비물질의 명상주제를 느낌을 상수(上首)로 하여 설하신다.”(DA.iii.723)고 적고 있다. 아마 신들의 왕인 삭까가 자신의 죽음이라는 정신적인 괴로움 때문에 지금 세존을 방문하여 법문을 듣고 있으므로 이러한 느낌의 관찰은 물질의 관찰보다도 그에게 더 큰 호소력이 있었을 것이다.

 

비록 본경은 삭까(인드라)라는 인도의 신을 내세운 신화적인 구성으로 전개되는 가르침이지만 상좌부 전통에서는 본경을 수행과 관계된 중요한 경으로 취급하고 있다. 본경을 통해서 삭까가 예류자가 된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불교에서 설하는 성자가 되기 위해서 구체적으로 어떤 수행을 해야 하는가를 본경은 심도 있게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석서도 그 내용이 상당히 길다. 이런 배경을 이해하여 본경을 소홀히 하지 말고 정독해야 할 것이다.

 

「빠야시 경」(Pāyāsi Sutta, D23)

 

과연 저세상이란 존재할까? 과연 내세란 존재할까? 금생에 이 몸이 죽어서 없어져 버리면 모든 것은 그것으로 끝나 버리는 것이 아닌가? 과연 도덕적 인과율이라는 것은 존재할까? ― 이런 것은 현대인들이 가지는 의문들이며,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도덕적 인과율을 좀처럼 믿지 않으려한다.

 

그것은 부처님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던 듯하다. 여기 빠야시라는 태수도 그러한 사람 가운데 한 명이다. 그래서 그는 대놓고 “저세상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화생하는 중생도 존재하지 않는다. 선행과 악행의 업들에 대한 열매도 과보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본경은 이러한 사고에 물들어 있던 빠야시라는 태수에게 꾸마라깟사빠 존자가 한 법문이다.

 

꾸마라 깟사빠 존자는 태양과 달의 비유 등 대략 14개 정도의 비유를 들어서 마침내 태수를 설복시킨다. 태수는 “저는 깟사빠 존자께서 해 주신 바로 처음의 비유로 마음이 흡족하고 크게 기뻤습니다. 그래도 이러한 여러 가지 뛰어난 답변을 듣고 싶어서 깟사빠 존자께 이의를 제기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라고 하면서 불교로 귀의한다. 본경은 특히 재가자들에게 인과의 이치를 분명히 믿게 하기 위한 목적이 크다. 불교는 한결같이 내세도 있고 보시를 베푼 공덕의 과보도 있다고 가르친다.

 

불교는 찰나생멸을 거듭하면서 흘러가는 것으로 윤회를 설명한다. 이런 윤회를 서양 사람들은 재생(再生, rebirth)이라고 표현한다. 물론 불교는 어떤 불변하는 자아나 영혼이 있어서 금생에 이 몸을 받고 죽어 내생에 또 다른 몸으로 들어가는 재육화(再肉化, reincarnation)는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갈애가 있는 한 재생의 흐름은 결코 멈추지 않는다고 분명하게 말한다. 그래서 여러 경들에서는 갈애를 뽀노바위까(ponobbhavika, 다시 태어남[再生]을 가져오는 것)라고 부른다. 특히 아비담마는 이전의 심찰나에 지은 의도적 행위는 업의 조건[業緣]에 따라서 그 과보를 반드시 다음의 어느 찰나에서 생기게 한다고 가르친다.

 

그리고 본경이 흥미롭고 중요한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사실 자이나 문헌과 불교 문헌 가운데서 서로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경은 극히 드물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본경과 내용이 아주 흡사한 문헌이 자이나 문헌에 나타난다.

 

역자가 인도에서 유학할 때 범어학과 교수님과 개인적으로 본경을 읽었는데 그때 그분은 어떤 노교수님이 쓴, 본경과 자이나 경전에 나타나는 어떤 경을 비교 연구한 글을 보여주었다. 아쉽게도 마라티로 쓰여 있어서 제대로 알 수가 없었다. 교수님이 간략히 소개해준 것을 노트에 적어두었고, 역자가 직접 해당 자이나 경전을 열람하여 몇 가지 사실을 기록해 두었는데, 한국으로 짐을 옮기는 와중에 그 노트가 분실되어 지금 자료가 남아있지 않아서 아쉽다. 역자가 자이나 경전의 자료를 다시 찾아보니 자이나의『우빵가숫따』(Uvangasutta)에 포함된『라야빠세나이야(Rāyapasen*aiya, 빠세나디 꼬살라 왕을 뜻함) 품』의「빠에시 까하나감」(Paesi-kahāṇagaṁ)이다. 본경의 빠야시 태수는 자이나의 이 자료에서 빠에시 라자(Paesi Rāja) 즉 빠에시 왕으로 언급이 되고 있다.

 

 「빠띠까 경」(Pāt*ika Sutta, D24)

 

‘오는 사람 막지 말고 가는 사람 잡지 말라.’ 절집에 출가하러 들어오면 제일 먼저 듣는 말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출가란 완전히 출가하는 사람 개인 의지이다. 아무도 출가하라고 부추기지 않고 환속한다 해서 잡지 않는다. 부처님 당시에도 많은 사람들이 출가하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환속을 하였다. 그것은 전적으로 개인의 자유의사이다. 예를 들면 본서 제1권「뽓타빠다 경」(D9 §32)에 나타나는 코끼리 조련사의 아들 찟따는 이미 7번이나 환속하였고 8번째에 자아에 관한 세존의 법문을 듣고 다시 출가하여 아라한이 되었다고 한다.

 

본경은 릿차위의 후예 수낙캇따의 환속을 두고 전개되는 세존과 박가와곳따라는 유행승의 대화로 구성되어 있다. 본경에서 수낙캇따는 자신이 환속하는 이유를 두 가지로 들고 있는데, 첫째는 세존께서 자신을 위해서 신통의 기적을 나투시지 않는다는 것과, 둘째는 세상의 기원(agga- ññā, 악간냐)을 천명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세존께서는 이미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런 신통변화와 세상의 기원을 보이셨지만 수낙캇따는 그래도 환속을 하였다고 경은 말하고 있다.

 

이처럼 수낙캇따의 환속 사유는 신통과 세상의 기원이라고 하는 출가자가 추구하는 도닦음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다. 그는 신통이라는 비본질적인 관심과 세상의 기원이라고 하는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 견해의 문제 때문에 출가하였으니 환속은 불 보듯 뻔한 일일지도 모른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불교의 근본입장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불교식으로 말하면 바른 견해[正見]가 확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른 견해가 확립되지 않고 뒤뚱대면 그의 중노릇도 수행도 뒤뚱대게 마련이다. 그래서 환속은 불 보듯 뻔한 것이 되고 만다.

 

그리고 본경이 세존과 박가와곳따라는 유행승이 수낙캇따의 환속을 두고 나눈 대화로 구성되어 있으면서도 경의 제목이「빠띠까 경」인 이유는 신통변화로 세존께 도전을 한, 나체 수행자 빠띠까뿟따에 대한 세존의 대처를 기본으로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신통변화는 세속인들의 관심사이기도 하면서 외도들의 관심사이기도 하다. 빠띠까는 신통변화로 세존께 도전장을 던지지만 세존의 단호한 대처에 겁을 먹고 안절부절 어찌할 바를 모른다. 물론 세존은 필요할 때 적지 않게 신통을 나투신 것으로 경들에 나타난다. 그러나 세존께서는 근본적으로 신통변화를 비롯한 인간을 넘어선 법(uttarimanussa-dhamma)을 재가자들에게 드러내지 말 것을 비구계목 안에 포함시키셨다.

율장의 해당 부분의 설명이 보여주듯이 비구계목(구족계) 속에 신통변화를 나투는 것을 금지하는 조항이 나타난다는 말은 세존뿐만 아니라 적지 않은 비구들이 신통을 나툴 수 있었다는 말이기도 하고 그런 신통이 승가에게 불편함을 주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우둠바리까 사자후경」(Udumbarikasīhanāda Sutta, D25)

 

출가의 목표는 무엇인가? 도대체 무엇을 얻기 위해서 출가하는가? 천상에 태어나서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서인가? 신통력을 구족하기 위해서인가?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꽃다운 젊은 나이에 세속의 모든 것을 팽개치고 출가하는가? 여기에 대한 답이 본경에 고스란히 들어있다.

 

외도들은 천상에 태어나는 것으로, 그것도 최고로 잡아서 범천에 태어나는 것으로, 그리고 5신통을 구족하는 것 정도로 출가의 최고 목표를 삼고 장부의 일대사로 삼는다. 세존께서는 그런 것을 전면적으로 부정하시는 것은 아니다. 나무로 치면 그런 것도 지저깨비는 되고 겉껍질 정도는 된다고 하신다. 그러나 출가의 핵심, 출가의 골수, 출가의 심재(心材)는 되지 못한다. 출가의 심재는 구경(究竟)의 지혜를 구족하여 지금여기에서 해탈․열반을 실현하는 것이다.

 

본경은 우둠바리까 왕비가 기증한 니그로다 유행승의 원림에서 세존과 니그로다 사이의 대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니그로다 유행승이 세존을 비난하자 세존이 가셔서 그들이 최상으로 여기는 고행을 통한 금욕을 주제로 하여 타심통까지 설하신 뒤, 청정범행의 완성에 대해서 설하려 하셨지만 그들은 멍청히 있을 뿐 질문하지 않았다. 이 경을 통해서 고행을 위주로 하는 수행과 부처님 가르침의 차이를 분명하게 드러내 보이고 계신다.

 

그러므로 본경을 통해서 우리는 번뇌가 다 해소된 해탈․열반의 경지가 천상에 태어나는 것이나 신통을 구족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수승한 것이며, 출격장부의 입지를 가지지 않은 자들은 팔정도를 실천하여 최상의 지혜를 완성하고 해탈․열반의 실현을 이해조차 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본경에서 세존께서는 “니그로다여, 이처럼 나는 상좌로 만들 욕심에서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그대들의] 가르침으로부터 떠나게 하려고 그렇게 말하지도 않는다. 생계 수단으로부터 떠나게 하려고 그렇게 말하지도 않는다. 그대들의 법들은 해로운 것이요 스승들의 전통에 있는 것들도 해로운 것이라 불리니, 그런 법들에 그대들이 굳게 서게 하려고 나는 그렇게 말하지도 않는다. 그대들의 법들은 유익한 것이요 스승들의 전통에 있는 것들도 유익한 것이라 불리니, 그런 법들로부터 그대들이 멀어지게 하려고 나는 그렇게 말하지도 않는다.

 

니그로다여, 오염원이요 재생으로 인도하고 걱정거리요 괴로운 과보를 가져오며 미래의 태어남과 늙음과 죽음을 가져오는 해로운 법들이 제거되지 못한 채로 있다면, 그런 것을 제거하도록 나는 법을 설한다. 그대들이 그대로 도를 닦으면 오염원인 법들은 제거될 것이고 깨끗한 법들은 증장할 것이며 통찰지의 완성과 충만함을 지금여기서에서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실현하고 구족하여 머물 것이다.”라고 간곡히 말씀하신다.(§23)

 

그러나 유행승들은 단 한 명도 ‘오, 참으로 우리는 구경의 지혜를 얻도록 사문 고따마 아래서 청정범행을 닦도록 하자.’고 말할 엄두조차도 내지 못한다. 참으로 출격장부의 길은 일대사인연이 없으면 갈 수 없는 것인가?

 

「전륜성왕 사자후경」(Cakkavattisīhanāda Sutta, D26)

 

천지현황(天地玄黃)이라 했던가. 우리의 선조들도 천자문을 통해서 어린 아이들에게 광활한 우주를 가르치려고 하였다. 도대체 우주는 끝이 있는가, 없는가? 도대체 생명의 기원은 언제부터인가? 생명은 어떤 절대자로부터 창조되었다고 밖에는 할 말이 없는 것이 인간의 한계인가? 인류의 대 스승이신 세존께서도 이런 물음에 대답을 하시지 않으면 안된다. 본경과 다음의「세기경」(D27)은 이러한 의문에 대한 대답으로서 인간의 기원과 수명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본경에서는 도도한 강물처럼 흘러가는 유장한 우주의 질서 속에서 인간들이 어떻게 타락하여 수명이 줄어들고, 인간들이 어떻게 다시 마음을 다잡아 향상하여 수명이 증장하는가를 달하네미라는 전륜성왕과 그의 후손인 왕들의 일화로부터 시작해서 밝히고 있다.

 

이러한 도도한 인간의 삶의 흐름에 단 한 가지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법(dhamma)이다. 법을 따를 때 인간은 증장하고 법을 거스를 때 인간은 타락한다. 그러면 그 법이란 무엇인가? 제일 보편적이고 기본적인 법으로 본경에서는 살생, 도둑질, 삿된 음행, 거짓말을 금함과 열 가지 유익한 업의 길[十善業道]을 실천하는 것을 들고 있다. 이런 가장 기본적인 인륜 도덕을 무시하고 이를 예사롭지 않게 여길 때 이 우주의 질서도 같이 퇴보하고 타락한다고 부처님께서는 본경을 통해서 밝히고 계신다.

 

물론 부처님 가르침은 이러한 인륜도덕에만 머무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래서 경의 시작과 끝에서 세존께서는 담담하게 “자신을 섬(혹은 등불)으로 삼고 자신을 귀의처로 삼고, 법을 섬(등불)으로 삼고 법을 귀의처로 삼아라[自燈明 自歸依, 法燈明 法歸依]”고 말씀하시고 그 방법으로 몸․느낌․마음․심리현상[身․受․心․法]에 대한 마음챙김을 말씀하신다. 그러시면서 경의 마지막에 인간의 수명이 8만 살이 될 때 미륵 부처님이 출현할 것이라고 예언하신다.

 

이런 광활하고 무시무종(無始無終)인 중생의 흐름에서 우리가 의지해야 할 궁극적인 의지처는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마음챙기는 공부(sati)뿐이다. 이것이 본경에서 부처님께서 인류에게 전하는 가장 귀중한 메시지이다.

 

 「세기경」(世紀經, Aggañña Sutta, D27)

 

불교는 생명의 기원을 어떻게 설명하는가? 설명할 수 없는 사실[無記]이라고만 말하고 넘어가버리는가? 부처님은 여기에 대해서 전혀 말씀을 하시지 않았는가? 그렇지 않다. 말씀을 하셨다. 그것이 바로 본경이다. 본경은 본격적으로 생명의 기원 문제를 다루고 있다.

 

세상의 기원[世紀]이라는 경의 제목이 나타내듯이 본경은 이 세상은 어떻게 시작되고 전개되어 가는가 하는 주제를 다룬 것이다. 초기경의 도처에서 세존께서는 태초의 개념을 부정하신다. 그래서 세존께서는『상응부』『시작 없음의 상응』(S15) 등에서 “비구들이여, 시작이 없는 것이 바로 이 윤회(saṁsāra)이니 처음 시작점은 알려지지 않는다.”(S.ii. 178 등)라고 하셨다. 세상의 기원을 설하시는 본경도 마찬가지다.

 

본경에서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점은 세상의 기원이라고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그 이전이라고는 절대로 존재하지 않는 태초니 최초니 하는 하나의 고정된 시점은 부정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본경에서 우주의 전개에 대한 설명도 사마야(samaya)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우주가 팽창하는 특정한 어떤 하나의 시점(samaya)에서 출발하고 있다. 그 특정 시점은 다시 그 이전의 조건에서 비롯된 것일 뿐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무시무종으로 세상의 기원을 설하고 있다.

 

그리고 본경에서 세존께서는 어떻게 끄샤뜨리야, 바라문, 와이샤, 수드라의 네 집단과 사문 집단이 생겨나게 되었는가를 설명하신 뒤, 이들은 모두 “중생들로부터 생겨났으며 다른 것들로부터 생겨난 것이 아니다. 그들은 같은 자들에 의해서 생겨났으며 다른 자들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 아니다. 그들은 법에 의해서 생겨났으며 비법(非法)에 의해서가 아니다. 와셋타여, 왜냐하면 지금여기에서도 내세에서도 법이 이 세상에서 최상이기 때문이다.”라고 매 단락에서 분명히 밝히신다. 이들은 결코 범천이나 어떤 다른 절대자가 만든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그래서 경은 깨달음의 편에 있는 법[菩提分法]들을 닦아서 지금여기에서 [오염원들을] 완전히 적멸하게 하여 열반을 얻는 그러한 아라한이야말로, 네 계급 가운데 어디 출신이든 제일이라고 부른다고 결론짓고 있다.

 

광음천에서 온 중생들(디가 니까야 제3권 161페이지)

 

10. "와셋타여, 참으로 긴 세월이 지난 그 어느 때, 어느 곳에서 이 세상이 수축하는 그런 시기가 있다.

세상이 수축할 때, 대부분의 중생들은 광음천에 나게 된다. 그들은 거기서 마음으로 이루어지고, 희열을 음식으로 삼고, 스스로 빛나고, 허공을 다니고, 천상에 머물며 길고 오랜 세월 산다.

 

와셋타여, 참으로 긴 세월이 지난 그 어느 때, 어느 곳에서 이 세상이 팽창하는 그런 시기가 있다.

세상이 팽창할 때, 대부분의 중생들은 수명이 다하고 공덕이 다하여, 광음천의 무리에서 떨어져서 이곳[인간계로] 오게 된다.

 

그들은 여기서도 역시 마음으로 이루어지고, 희열을 음식으로 삼고, 스스로 빛나고, 허공을 다니고, 천상에 머물며 길고 오랜 세월 살게 된다."

 

달콤한 땅의 출현

 

11. "와셋타여, 그런 시기에는 완전히 하나인 물 만이 되어 있으며, 거기에는 암흑과 칠흑 같은 어두움만이 있다.

 

태양과 달도 알려지지 않고, 별들도 알려지지 않고,

별의 무리들도 알려지지 않고, 밤과 낮도 알려지지 않고,

한 달과 보름도 알려지지 않고, 계절과 연도도 알려지지 않고,

여자와 남자도 알려지지 않고, 중생들은 다만 중생이라는 용어로 불릴 뿐이다.

 

와셋타여, 그러자 참으로 긴 세월이 지난 어느 때, 어느 곳에서 달콤한 땅이 물 위에 퍼지게 되었다. 마치 끊인 우유가 식으면 그 위에 엷은 막이 생기는 것 처럼 그와 같이 나타났다.

 

그것은 아름다움을 갖추었고, 향기를 갖추었고, 맛을 갖추었다.

마치 정제된 버터기름과 정제된 생버터처럼 그와 같은 색깔을 가졌다.

그것은 마치 순수한 벌꿀처럼 그러한 맛을 가졌다.

 

달과 태양 등의 출현

 

12. "와셋타여, 그러자 어떤 중생에게 '오, 참으로 이것이 무엇일까?' 라는 탐심이 생겼다.

그는 손가락으로 달콤한 땅을 맛보았는데, 그 맛은 그를 뒤덮었고 갈애가 엄습해왔다.

 

와셋타여, 다른 중생들도 그 중생을 본보기로 따라하여 손가락으로 달콤한 땅을 맛보았는데, 그 맛은 그들을 뒤덮었고 갈애가 엄습해왔다.

 

와셋타여, 그러자 그 중생들은 달콤한 땅을 손으로 한 덩어리씩 깨어서 먹기 시작했다.

 

와셋타여, 그 중생들이 달콤한 땅을 손으로 한 덩어리씩 깨어서 먹기 시작했기 때문에,

그들이 본래 타고난 광채가 사라져 버렸다.

본래 타고난 광채가 사라지자, 태양과 달이 드러났다.

태양과 달이 드러나자, 별들과 별의 무리들도 드러났다.

별들과 별의 무리들이 드러나자, 낮과 밤이 알려지게 되었다.

낮과 밤이 알려지자, 한 달과 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한 달과 보름이 알려지자, 계절과 연도가 알려지게 되었다.

와셋타여, 이렇게 하여 이 세상은 다시 팽창하는 것이다.'

 

땅의 부산물의 출현

 

14. "와셋타여, 그 중생들에게 달콤한 땅이 사라지자, 그 때 땅의 부산물이 생겨났다.

그것은 마치 버섯이 생기듯이 그와 같이 생겨났다.

 

그것은 아름다움을 갖추었고, 향기를 갖추었고, 맛을 갖추었다.

마치 정제된 버터기름과 정제된 생버터처럼, 그와 같은 색깔을 가졌다.

그것은 마치 순수한 벌꿀처럼 그러한 맛을 가졌다.

 

와셋타여, 그러자 그 중생들은 땅의 부산물을 먹기 위해서 다가갔다.

그들은 그것을 먹을 것으로 삼고, 그것을 음식으로 삼고, 그것을 영양분으로 삼아서 긴 세월을 보냈다.

 

와셋타여, 그 중생들이 땅의 부산물을 먹을 것으로 삼고, 그것을 음식으로 삼고, 그것을 영양분으로 삼아서 긴 세월을 보내는 동안 그 중생들의 몸은 더욱 더 견고하게 되었고 잘생기고 못생긴 용모가 드러나게 되었다.

 

어떤 중생들은 잘생기게 되고, 어떤 중생들은 못생기게 되었다.

그러자 잘 생긴 중생들은 못생긴 중생들에게 '우리는 이들보다 잘 생겼다. 이들은 우리보다 못생겼다.' 라고 거만을 떨었다.

그들이 잘생긴 것으로 거만을 떠는 것을 반연하여 자만과 거만이 생기자, 땅의 부산물은 사라져 버렸다.

 

와셋타여, 그 중생들에게 땅의 부산물이 사라지자 그 때 바달라따 덩굴이 생겨났다.

그것은 마치 죽순이 생기듯이 그와 같이 생겨났다.

그것은 아름다움을 갖추었고, 향기를 갖추었고, 맛을 갖추었다.

마치 정제된 버터기름과 정제된 생버터처럼 그와 같은 색깔을 가졌다.

그것은 마치 순수한 벌꿀처럼 그러한 맛을 가졌다.

 

15. "와셋타여, 그러자 그 중생들은 바달라따 덩굴을 먹기 위해서 다가갔다.

그들은 그것을 먹을 것으로 삼고, 그것을 음식으로 삼고, 그것을 영양분으로 삼아서 긴 세월을 보냈다.

 

와셋타여, 그 중생들이 땅의 부산물을 먹을 것으로 삼고, 그것을 음식으로 삼고, 그것을 영양분으로 삼아서 긴 세월을 보내는 동안,

그 중생들의 몸은 더욱 더 견고하게 되었고, 잘생기고 못생긴 용모가 드러나게 되었다.

어떤 중생들은 잘생기게 되고, 어떤 중생들은 못생기게 되었다.

그러자 잘생긴 중생들은 못생긴 중생들에게 '우리는 이들보다 잘 생겼다. 이들은 우리보다 못생겼다.' 라고 거만을 떨었다.

그들이 잘생긴 것으로 거만을 떠는 것을 반연하여 자만과 거만이 생기자, 바달라따 덩굴은 사라져 버렸다.

바달라따 덩굴이 사라지자 그들은 함께 모여서 '오, 우리는 참으로 어쩌란 말이냐. 오, 참으로 우리는 바달라따를 잃었도다.' 라고 소리 내어 울었다.

그래서 지금도 인간들은 어떤 괴로운 것을 겪으며, '오, 참으로 우리는 어쩌란 말이냐. 오, 참으로 우리 것을 잃어 버렸도다.' 라고 말한다.

 

이것은 태고적 세상의 기원과 관계된 단어를 기억하기 때문인데 그 뜻은 잘 알지 못하고 있다."

 

경작하지 않고도 익는 쌀의 출현

 

16-1. "와셋타여, 그 중생들에게 바달라따 덩굴이 사라지자, 그 때 경작하지 않고도 익는 쌀이 생겨났다.

그것은 속껍질도 없고, 겉껍질도 없고, 깨끗하고 향기로운 쌀열매였다.

그들이 저녁에 저녁식사를 위해서 가져가면, 아침에 익어서 원래대로 다 자라 있었고,

아침에 아침식사를 위해서 가져가면, 저녁에 익어서 원래대로 다 자라 있었으며, [껍질 등] 버릴 것이라고는 없었다.

 

와셋타여, 그러자 그 중생들은 경작하지 않고도 익는 쌀을 먹을 것으로 삼고, 그것을 음식으로 삼고, 그것을 영양분으로 삼아서 긴 세월을 보내었다.

 

여자, 남자 성기의 출현 [여자의 특징, 남자의 특징이 생겨남, 성행위가 생겨남]

 

16-2. 와셋타여, 그 중생들이 경작하지 않고도 익는 쌀을 먹을 것으로 삼고, 그것을 음식으로 삼고, 그것을 영양분으로 삼아서 긴 세월을 보내는 동안, 그 중생들의 몸은 더욱 더 견고하게 되었고, 잘생기고 못생긴 용모가 드러나게 되었다.

 

여자에게는 여자의 성기가 생겼고, 남자에게는 남자의 성기가 생겼다.

여자는 남자를, 남자는 여자를 지나치게 골똘하게 생각하였다.

그들이 서로서로 지나치게 골똘히 생각하자, 애욕이 생겨났고, 몸에는 [애욕으로 인한] 열이 생겨났다. 그들은 [애욕의] 열을 반연하여 성행위를 하게 되었다.

 

와셋타여, 그 시절의 중생들은 성행위를 하는 것을 보면,

'불결한 것은 사라져 버려라, 불결한 것은 사라져 버려라.

어떻게 중생이 중생에게 저런 식으로 할 수 있단 말인가!' 라고 하면서,

어떤 자들은 흙먼지를 던지고, 어떤 자들은 재를 던지고, 어떤 자들은 소똥을 던졌다.

 

그래서 요즘에도 인간들은 어떤 지방에서는 신부를 데리고 갈 때에,

어떤 자들은 흙먼지를 던지고, 어떤 자들은 재를 던지고, 어떤 자들은 소똥을 던진다.

이것은 태고적 세상의 기원과 관계된 단어를 기억하기 때문인데, 그 뜻은 잘 알 지 못하고 있다.

 

17. "와셋타여, 그 시절에 비법(非法)으로 간주되었던 것이 지금에는 법이라고 간주되고 있다.

와셋타여, 그 시절의 중생들은 성행위를 하게 되면 한 달이건 두 달이건 마을이나 읍에 들어가지를 못했다.

와셋타여, 그 중생들은 그러한 비법에 대해서 아주 심하게 비난을 받았기 때문에 그러한 비법을 가리기 위해서 집을 짓게 되었다.

 

사유재산이 생겨남

 

와셋타여, 그러자 어떤 게으른 중생에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오, 나는 왜 저녁에 저녁식사를 위해서 쌀을 가져오고, 왜 아침에 아침식사를 위해서 쌀을 가져와야 하는가! 참으로 나는 아침과 저녁식사 거리로 한꺼번에 쌀을 가져와야 겠다.' 라고.

와셋타여, 그러자 그 중생은 아침과 저녁식사 거리로 한꺼번에 쌀을 가져왔다.

 

와셋타여, 그러자 다른 중생이 그에게 다가왔다. 와서는 그 중생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보시오, 이리 오시오, 쌀을 가지러 갑시다.'

'여보시오, 나는 충분합니다. 나는 아침과 저녁식사 거리로 한꺼번에 쌀을 가져 왔습니다.'

와셋타여, 그러자 그 중생은 '여보시오, 그렇군요, 이렇게 하니 참으로 좋군요.' 라고 하면서, 그를 본보기로 따라하여 아침과 저녁식사 거리로 한꺼번에 쌀을 가지고 왔다.

와셋타여, 그러자 또 다른 중생이 그에게 다가왔다. 와서는 그 중생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보시오, 이리 오시오, 쌀을 가지러 갑시다.'

'여보시오, 나는 충분합니다. 나는 아침과 저녁식사 거리로 한꺼번에 쌀을 가지고 왔습니다.'

와셋타여, 그러자 그 중생은 '여보시오, 그렇군요, 이렇게 하니 참으로 좋군요.' 라고 하면서, 그를 본보기로 따라하여 아침과 저녁식사 거리로 한꺼번에 쌀을 가지고 왔다.

와셋타여, 그러자 또 다른 중생이 그에게 다가왔다. 와서는 그 중생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보시오, 이리 오시오, 쌀을 가지러 갑시다.'

'여보시오, 나는 충분합니다. 나는 아침과 저녁식사 거리로 한꺼번에 쌀을 가지고 왔습니다.'

 

와셋타여, 그러자 그 중생은 '여보시오, 그렇군요, 이렇게 하니 참으로 좋군요.' 라고 하면서, 그를 본보기로 따라하여 아침과 저녁식사 거리로 한꺼번에 쌀을 가지고 왔다.

 

와셋타여, 그 중생들이 축적을 하면서 쌀을 먹기 시작하자, 속겨가 쌀을 에워쌌고, 겉겨가 쌀을 에워쌌다.

베어도 다시 자라지 않았고, 결핍이란 것이 알려지게 되었으며, 벼는 무리를 지어 자라게 되었다."

 

벼의 배분 [사유재산의 성립]

 

18. "와셋타여, 그러자 그 중생들은 함께 모였다.

함께 모여서는 '존자들이여, 사악한 법들이 중생들에게 생겨났습니다. 우리는 전에는 마음으로 이루어졌고, 희열을 음식으로 삼았고, 스스로 빛났고, 허공을 다녔고, 천상에 머물렀으며 길고 오랜 세월 살았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참으로 긴 세월이 지난 그 어느 때, 어느 곳에서 달콤한 땅이 물 위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아름다움을 갖추었고, 향기를 갖추었고, 맛을 갖추었습니다.

그런 우리는 그 달콤한 땅을 손으로 한 덩어리씩 깨어서 먹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달콤한 땅을 손으로 한 덩어리씩 깨어서 먹기 시작했기 때문에, 우리가 본래 타고난 광채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본래 타고난 광채가 사라지자, 태양과 달이 드러났습니다.

태양과 달이 드러나자, 별들과 별의 무리들도 드러났습니다.

별들과 별의 무리들이 드러나자, 낮과 밤이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낮과 밤이 알려지자, 한 달과 보름이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한 달과 보름이 알려지자, 계절과 연도가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달콤한 땅을 먹을 것으로 삼고, 그것을 음식으로 삼고, 그것을 영양분으로 삼아서 긴 세월을 보내었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사악한 해로운 법들이 생겨났기 때문에 달콤한 땅은 사라져 버렸습니다.

달콤한 땅이 사라지자, 그 때 땅의 부산물이 생겨났습니다.

그것은 아름다움을 갖추었고, 향기를 갖추었고, 맛을 갖추었습니다.

그런 우리는 땅의 부산물을 먹기 위해서 다가갔습니다.

그런 우리는 그것을 먹을 것으로 삼고, 그것을 음식으로 삼고, 그것을 영양분으로 삼아서 긴 세월을 보내었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사악한 해로운 법들이 생겨났기 때문에 땅의 부산물은 사라져 버렸습니다.

땅의 부산물이 사라지자, 그 때 바달라따 덩굴이 생겨났습니다.

그것은 아름다움을 갖추었고, 향기를 갖추었고, 맛을 갖추었습니다.

그런 우리는 바달라따 덩굴을 먹기 위해서 다가갔습니다.

그런 우리는 그것을 먹을 것으로 삼고, 그것을 음식으로 삼고, 그것을 영양분으로 삼아서 긴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사악한 해로운 법들이 생겨났기 때문에 바달라따 덩굴은 사라져 버렸습니다.

 

바달라따 덩굴이 사라지자, 그 때 경작하지 않고도 익는 쌀이 생겨났습니다.

그것은 속껍질도 없고, 겉껍질도 없고, 깨끗하고 향기로운 쌀열매였습니다.

그런 우리가 저녁에 저녁식사를 위해서 가져가면 아침에 익어서 원래대로 다 자라있었고,

아침에 아침식사를 위해서 가져가면 저녁에 익어서 원래대로 다 자라있었으며,

[껍질 등] 버릴 것이라고는 없었습니다.

 

그런 우리는 경작하지 않고도 익는 쌀을 먹을 것으로 삼고, 음식으로 삼고, 영양분으로 삼아서 긴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사악한 해로운 법들이 생겨났기 때문에 속겨가 쌀을 에워쌌고, 겉겨가 쌀을 에워쌌습니다.

베어도 다시 자라지 않았고, 결핍이란 것이 알려지게 되었으며, 벼는 무리를 지어 자라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참으로 우리는 벼를 나누어야 합니다. 경계를 설정해야 합니다.' 라고.

와셋타여, 그러자 그 중생들은 벼를 나누게 되었고, 경계를 설정하게 되었다."

 

 「확신경」(確信經, Sampasādanīya Sutta, D28)

 

세존의 제자가 되려는 자든 이미 세존의 제자가 된 자든, 그가 세존의 출가한 제자든 아니면 재가에 있는 제자든, 누구나 스스로를 부처님의 제자라고 생각하는 자는 당연히 세존께 대한 절대적인 확신과 절대적인 신뢰가 있어야한다. 그것은 부처님이 살아 계실 때나 부처님이 입멸하신 후나 다름이 없을 것이다.

 

그러면 도대체 불제자는 세존께 대한 어떤 확신을 가져야 하고, 어떤 절대적인 신뢰를 가져야하는가? 세존의 제자 된 우리로서는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직계 제자들 가운데서도 법의 대장군이라 불리었으며 상수제자로 인정받던 사리뿟따 존자는 부처님께 대해 어떠한 확신과 절대적인 믿음을 가졌던가를 살펴보는 것은 지금의 우리 불제자들, 특히 현대를 살아가는 출가자들에게도 정말 중요한 사안이 아닐 수 없다. 다행히 본경이 전승되어 우리가 가져야 할 세존에 대한 절대적인 확신을 들려주고 있다.

 

이 경의 첫 부분(§§1~2)은 이미 본서 제2권「대반열반경」(D16)의 §§ 1.16~17에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볼 때, 본경은 사리뿟따 존자가 입적하기 얼마 전에 세존을 만나서 세존의 면전에서 세존께 대한 자신의 믿음과 확신을 표한 것을 상세하게 기록한 경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세존에 대한 절대적인 확신과 신뢰를 표하고 사리뿟따 존자는 세존보다 먼저 반열반하였다. 아마도 그는 세존께 대한 믿음과 존경이 너무도 커서, 입적하시는 세존을 뵙는 것을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세존보다 먼저 입적을 하였을 것이리라. 본경에서 사리뿟따 존자가 확신에 차서 천명한 말은 다음과 같이 정리해볼 수 있다.

 

‘만일 누가 나에게 묻기를, 왜 그대는 오직 세존만을 전적으로 인정하는가라고 한다면 나는 이렇게 답할 것이다. 우리 세존 부처님께서 스스로 말씀하시기를, 과거나 미래의 부처님들이나 나와 동등할까 그 외는 어느 누구도 나와 동등한 자란 없다고 하셨고, 또 하나의 세계에 두 사람의 정등각이 동시에 출현하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지금 세상에서는 오직 우리 세존만이 가장 수승하신 분이시다. 그러니 내가 이런 세존만을 인정하고 절대적인 신뢰를 가지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본경 §20의 주해에서 인용)

 

사리뿟따 존자는 이렇게 어느 절대자에게도 바칠 수 없는 최고의 확신과 신뢰를 부처님께 바치고 있다. 현대를 사는 우리 불자들은 과연 부처님을 향해서 사리뿟따 존자와 같은 절대적인 신뢰를 가지고 있는지 스스로 점검해 봐야 할 것이다.

 

「정신경」(淨信經, Pāsādika Sutta, D29)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참으로 중요하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군사부일체라 하였으며 인도 바라문 전통에서도 스승은 부모 이상으로 중시하였다. 그러면 이러한 스승과 제자를 이어주는 연결 고리는 무엇일까? 만일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속된 말로 파투(破鬪)가 난다면 그 잘못의 원인은 무엇이며, 그 책임은 궁극적으로 어디에 있는가?

 

부처님 후반기에 니간타의 지도자였던 나따뿟따가 임종하였다. 그가 임종하자 니간타는 극심한 분열을 맞게 되었다. 이건 불교 교단에서도 타산지석이 될 중요한 사건이었다. 특히 데와닷다의 분열을 경험한 뒤라서 더욱더 그러했을 것이다. 그래서 본서「합송경」(D33)은 이러한 소식을 접한 사리뿟따 존자가 대중들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법수별로 정리해서 설하는 것이다.

 

니간타의 분열에 관한 소식을 쭌다 사미로부터 전해들은 세존께서는 본「정신경」에서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엄밀하게 살펴보시면서 그것을 불교 교단에 적용하여 말씀하시고 당부하신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부처님께서는 당신 스스로가 당신의 가르침과 불교 교단에 대해서 어떠한 평가를 하고 계신가하는 점이다.

 

부처님께서는 스스로가 한 점 오점이 없는 스승이라는 확실한 입지를 제자들에게 보여주고 계시며, 아울러 부처님뿐만이 아니라 불교 교단에는 여러 단계에 머물고 있는 수많은 제자들이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훌륭한 교단이 갖추어야 할 구비조건을 다 갖추었다고 단언하신다.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불법에 대한 여러 가지를 길게 말씀하신 뒤, “쭌다여, 이러한 과거에 대한 견해의 국집들과 이러한 미래에 대한 견해의 국집들을 제거하고 뛰어넘기 위해서 나는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을 가르치고 천명하였다.”라고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四念處]을 당부하시면서 긴 말씀을 마치신다.(§40)

 

네 가지 마음챙기는 공부는 부처님 말씀의 핵심이다. 니간타 나따뿟따의 임종에 대한 소식을 듣고 설하기 시작하신 길고 간곡하신 부처님의 말씀은 마음챙김의 확립으로 이제 귀결이 되고 있다. 지금여기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몸, 느낌, 마음, 심리현상[身․受․心․法]에 대해서 마음챙김을 확립하는 것이야말로 과거와 미래에 대한 견해에 속거나 계박(繫縛)되는 것을 극복하는 방법이라고 부처님께서는 천명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본경의 제목인 청정한 믿음은 마음챙기는 공부를 할 때 실현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본서의 도처에서 마음챙김이야말로 가장 요긴한 부처님의 말씀임을 보았다. 특히 본서 제2권「대반열반경」에서는(D16 §2.12, §2.26 등)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이야말로 자귀의, 법귀의, 자등명, 법등명을 실천하는 것임을 천명하고 계시며, 부처님의 마지막 유훈인 불방일(appamāda)도 주석서에서는 마음챙김의 현전(sati-avippāvasa) 혹은 지혜를 수반한 마음챙김으로 해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본서 제2권「대반열반경」(D16) §6.7의 주해를 참조할 것) 그러므로 아지랑이와도 같은 자아와 세상에 대한 존재론적인 실체를 찾아 귀중한 시간을 다 허비할 것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를 몸, 느낌, 마음, 법으로 해체해서 꿰뚫어 보는 마음챙김을 매순간 닦아야 할 것이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부처님 제자라 할 것이며, 부처님께 대한 청정한 믿음을 낸 사람이라 할 것이다.

 

 「삼십이상경」(三十二相經, Lakkhan*a Sutta, D30)

 

불교 경전의 도처에 부처님이나 전륜성왕은 32가지 대인상을 갖추었다고 나타난다. 본서 제1권의「암밧타 경」(D3) 등『디가 니까야』의 많은 경들에서도 대인상은 언급이 되고 있다. 그리고 본서 제2권「대전기경」(D14) §1.32는 32가지 대인상을 나열하고 있다. 이처럼 32가지 대인상을 나열하는 경우는 드물게 있지만(M91) 정작 32상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경은 없다. 빠알리 니까야들 가운데서 32상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경은 아마 본경뿐일 것이다.

 

본경은 32상이 구체적으로 무엇이며, 무슨 이유 때문에 부처님이나 전륜성왕은 이러한 32상을 구족하게 되었는지를 전생에 닦은 공덕과 연결해서 나름대로 설명하고 있다. 32상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며, 이러한 32상을 어떻게 해서 구족하게 되는지를 알고자 하는 분들의 일독을 권한다.

 

「삼십이상경」으로 옮긴 빠알리 원어는 Lakkhan*a Sutta이다. 그러므로 ‘상경(相經)’이라고 직역할 수 있다. 그런데 lakkhan*a도 초기경들에서는 여러 의미로 나타나고 있고, 한역에 나타나는 相이라는 단어도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본경의 주제를 정확하게 드러내기 위해서「삼십이상경」으로 구체적으로 옮겼다. 한역『장아함』에는 본경처럼 32상을 상세하게 설명하는 경은 없고,『중아함』의 59번째에「삼십이상경」(三十二相經)으로 번역된 경이 있다. 그러나『중아함』「삼십이상경」은 본경처럼 32상을 상세하게 설명하지는 않고 있으며, 단지 32상의 나열만이 나타나고 있다.

 

「교계 싱갈라 경」(Sin#gālovāda Sutta, D31) 


초기경들을 결집한 분들은 모두가 출가한 비구들이었고, 게다가 모두 장부일대사를 해결한 아라한들이셨다. 그러다 보니 자연 그분들이 모은 경들은 장부일대사를 해결하는 가르침에 초점이 맞춰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분들이 부처님으로부터 들은 것은 이런 해탈도의 가르침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며 재가자들의 삶의 방식을 구체적으로 들은 경우도 적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기경들에서 재가자들의 구체적인 삶의 윤리나 삶의 방식을 보여주는 경들은 드물 수밖에 없다. 


본경은 그런 의미에서 아주 특색이 있고 의미가 있는 경이다. 본경은 재가 불자가 어떻게 불교적인 윤리로 가정생활과 사회생활을 영위해야 하는가를 기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찍부터 재가자들의 삶을 다룬 경으로 널리 알려진 유명한 경전이다. 


재가자는 재가자의 삶의 도리를 다하여 천상에 태어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재가자들에게는 항상 보시와 지계와 천상에 태어남[施․戒․生天]에 관한 법문부터 먼저 하신 뒤에 그들의 근기가 무르익었다고 판단이 되시면 “모든 부처님들께서 찾아내신 괴로움[苦]과 일어남[集]과 소멸[滅]과 도[道]라는 법의 가르침을 드러내신다.”(본서 제1권「암밧타 경」(D3) §2.21 참조)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본경에서도 보시와 지계로 요약할 수 있는 재가자의 삶의 덕목을 여러 측면에서 설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경의 내용은 소위 말하는 선진국에서 국민이 함양해야 할 덕목으로 거듭 강조하고 있는 봉사하는 삶(보시)과 건전한 삶(지계)과도 일맥상통하는 가르침이요, 그래서 현대 생활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귀중한 재가자의 삶의 방식이다.

 

「아따나띠야 경」(Āt*ānāt*iya Sutta, D32) 


우리의 오관의 영역을 넘어서고 일상적인 사고의 범위를 넘어선 소위 말하는 초자연적인 현상이나 심령현상을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역사적으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러한 현상에 대한 기록은 아주 많다. 물론 이것은 현대 유물론적 관점으로 볼 때 인정할 수 없다고 해버리면 그만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일 이런 현상이 실제로 나타나서 인간들을 괴롭힌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그냥 쳐다만 보고 있어야 할까? 당하지 않는 사람에게야 대수롭지 않겠지만 당사자들에게는 중요하고 급한 생존의 문제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초기경은 이런 현상에 대한 대처로 보호주를 설하고 있다. 본경은 초기경에 나타나는 몇 가지 보호주 가운데 하나이다. 


여기서 보호주로 옮긴 원어는 빠릿따(paritta)인데, 이것은 일반적으로 질병이나 악령의 해코지나 다른 여러 위험 등으로부터 보호하는 주문을 뜻한다. 그래서 호주(護呪)라 옮겨지는 술어이다. 빠릿따는 후대에 새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이들은 이미 5부 니까야에 나타나는 경들인데 보호를 목적으로 독송되고 있기 때문에 빠릿따라 불리는 것이다. 보호주에 대한 더 자세한 설명은 본경 §2의 주해를 참조하기 바란다. 


우리는 아따나따 보호주를 통해서 많은 신들과 특히 사대왕천에 속하는 많은 신들의 이름을 알게 된다. 이들이야말로 불법을 보호하고, 불법을 따라 수행하는 수행자들을 보호하고, 불법에 귀의한 신도들을 보호하는, 말 그대로 호법선신들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많이 독송하는 대비주나 능엄주에 익숙한 분들은 대비주와 능엄주에, 특히 능엄주에 수많은 신들과 비(非)인간들이 나타나는 것을 잘 알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아따나따 보호주도 능엄주와 같은 성격의 비밀주라 할 수 있다. 


물론 혹자는 이러한 보호주를 두고 신비주의의 극치를 달리는 비불교적인 경전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불교는 해탈․열반을 실현하는 체계이면서도, 현생의 행복과 내생의 행복을 증장시키는 종교이기도 하다. 특히 재가자들에게는 더욱더 그러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만뜨라나 다라니 독송을 통해서 자신과 가족과 재산과 영토의 보호와 행복의 증장을 바라는 인도종교 전통을 따라 사는 그 시대의 재가자들에게는 이러한 보호주의 독송이 어쩌면 삶의 안위를 위해서 가장 필요한 장치였는지도 모른다. 

 

「합송경」(合誦經, San#gīti Sutta, D33) 


부처님 후반기에 니간타의 지도자였던 나따뿟따가 임종하였다. 그가 임종하자 니간타는 극심한 분열을 맞게 되었다. 이건 불교교단에서도 쉽게 넘길 수 없는 사건이었다. 특히 불교교단도 데와닷다의 분열을 경험하였기 때문에 더욱더 그러했을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 가르침을 제대로 정리하여, 교단 내에 부처님 가르침을 두고 이설과 분열이 횡행하지 못하도록 해야겠다는 각성이 직계제자들에게는 강하게 일어났을 것이다. 


니간타의 분열은 특히 법의 대장군이라 불리던 사리뿟따 존자에게 부처님 가르침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야 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한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이런 결과로 나타난 경이 바로 본경이다. 본경은 니간타의 분열이라는 소식을 접하고 사리뿟따 존자가 대중들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숫자[法數]별로 정리해서 설한 것이다. 사리뿟따 존자를 비롯한 직계제자들이 부처님 가르침을 온전히 보존하여 후대로 전하려는 진지한 노력을 엿볼 수 있다. 


본경의 제목은 San#gīti Sutta이다. 여기서 san#gīti는 saṁ(함께)+√gai(to sing)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함께 노래한 것, 함께 외운 것’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보통 일차결집이니 이차결집이니 하면서 결집(結集)이라고 옮긴 단어가 바로 san#gīti이다. 이러한 결집은 문헌을 모은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들어서 알고 있던 것을 함께 노래해서 가사와 운율을 결정한 다음 이를 다시 함께 노래해서 서로 공유한 일종의 합창대회였기 때문에 역자는 ‘함께 노래함’이라는 원의미를 살려서「합송경」(合誦經)이라고 옮겼다. 중국에서는「중집경」(衆集經)으로 한역되어『장아함』의 9번째에 포함되어 있는데 san#gīti를 중집(衆集)으로 이해하였다. 


본경은 사리뿟따 존자가 1에 관계된 법들부터 시작해서 10에 관계된 법들까지 모두 230가지의 부처님 가르침을 정리해서 비구들에게 설한 것을 그 내용으로 한다. 본경에서 사리뿟따 존자가 법수별로 정리하고 있는 것을 그 숫자만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1에 관계된 법(§1.8) - 2가지 

2에 관계된 법(§1.9) - 33가지 

3에 관계된 법(§1.10) - 60가지 

4에 관계된 법(§1.11) - 50가지 

5에 관계된 법(§2.1) - 26가지 

6에 관계된 법(§2.2) - 22가지 

7에 관계된 법(§2.3) - 14가지 

8에 관계된 법(§3.1) - 11가지 

9에 관계된 법(§3.2) - 6가지 

10에 관계된 법(§3.3) - 6가지 

합계: 230가지 법들이다

 

「십상경」(十上經, Dasuttara Sutta, D34) 


본경도 부처님 가르침을 법수별로 체계적으로 모으려는 노력에서 탄생한 사리뿟따 존자의 작품이다. 부처님 말년에 가까워질수록 부처님의 가르침은 다 기억하기 힘들 정도로 많아졌을 것이다. 이러한 많은 가르침을 어떻게 모아서 노래하고 기억하여 후대로 전승해 줄 것인가는 직계제자들에게는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방대한 부처님 가르침을 체계적으로 모아서 전승시킬 것인가? 그것은 기존의 인도 종교의 전통에서 찾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불교가 생기기 이전에 이미 인도의 여러 바라문 가문들은 각 가문이 속하는 문파에 따라서 베다 본집(本集, Sam*hitā)과 제의서(祭儀書, Brāhman*a)와 삼림서(森林書, Āran*yaka)와 비의서(秘義書, Upanis*ad)를 모아서 노래의 형태로 전승해 오는 전통이 튼튼하게 뿌리내리고 있었다. 예를 들면 전체 10장(만달라, Man*d*ala)으로 구성되어 있는『리그베다』의 2장부터 7장까지는『리그베다』파에 속하는 바라문 가문들에서 전승되어 오는 찬미가를 각각 가문별로 모은 것이다. 예를 들면 본서 제1권「암밧타 경」(D3 §2.8)에서 언급되고 있는 유명한 바라문 가문들 가운데 웻사미따(Sk. Viśvāmitra)는『리그베다』3장을 전승해온 가문의 이름이며, 와마데와(Sk. Vāmadeva)는 4장을, 바라드와자(Bharadvāja)는 6장을, 와셋타(Sk. Vasis*t*ha)는 7장을 전승해온 가문의 이름이다. 그리고 8장은 깐와와 앙기라스 두 가문의 전승을 모은 것이며 9장은 제사에서 아주 중요한 소마(Soma) 즙에 관계된 찬미가들을 모은 것이다. 여기에다 1장과 10장은 일종의 잡장인데 가문과 관계없는 시대적으로 늦은 찬미가들을 모아서 구성한 만달라이다. 


그리고『리그베다』의 각 장은 모두 다시 주제별로 모아져 있는데 먼저 바라문들의 신인 아그니에 관계된 찬미가를 모으고, 다음은 인드라, 그 다음은 다른 여러 신들의 순서로 모았다. 이처럼 이미 불교가 생기기 이전부터 바라문들은 체계적으로 그들의 찬미가를 모아서 노래로 전승하고 있었다. 


음악을 구성하는 두 요소는 음정과 박자일 것이다. 그들은 음정으로는 우닷따(udātta, 고음), 아누닷따(anudātta, 저음), 스와리따(svarita, 굴리는[曲折] 음)라는 세 가지 음정을 사용하였고, 박자로는 짧고(hrasva), 길고(dīrgha), 빼는 세 가지 박자를 인정하였다. 이처럼 음정과 박자를 사용하여 베다를 정확하게 노래하여 후대로 계승해온 것이다. 


그들은 베다를 이와 같은 방법으로 노래한 것만이 아니고 베다를 단어(pada)별로 끊어서 독송하는 방법도 개발하였고, 1 → 1,2 → 1,2,3 → 1,2,3,4 … 씩으로 각 어절을 처음부터 반복하는 식으로 각파에 속하는 베다를 독송하는 방법도 개발하였다. 기상천외하게『리그베다』를 제일 뒤에서부터 거꾸로 독송해 올라오는 방법까지 개발해 내었고 실제로 이렇게 독송하는 사람이 지금도 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베다의 한 음절도 틀리지 않게 후대에 전승하려 노력하였다. 그리고 찬미가를 숫자별로 증가하는 방식으로 모으기도 하고, 숫자별로 감소하는 방식으로 모으기도 하였다. 이렇게 다양한 방법으로 그들의 베다와 가르침을 결집하였다. 


이 방식은 자이나교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자이나의 앙가(An#ga)들도 다양한 방법론으로 결집되어 전승되어 온다. 물론 정통 자이나교라고 자처하는 공의파(空衣派, Digambara)에서는 마하위라 혹은 나따뿟따의 가르침은 이미 자이나 교단 초기에 인도 중원에 큰 기근이 들어서 자이나 수행자들이 탁발을 쉽게 할 수 있는 남쪽으로 내려가는 와중에 모두 잃어버렸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내려가지 않고 흰 옷을 입고 덜 엄한 고행으로 교단 체제를 바꾼 백의파(白衣派, Śvetāmbara)에서는 지금까지 그들이 전승해 오고 있는 앙가(An#ga)들을 정전으로 인정하고 있다. 물론 이런 앙가들을 모두 마하위라나 초기 자이나 교단 수행자들의 가르침이라 보기에는 무리가 따르지만『아야랑가』(Āyaran#ga, Ācāran#ga Sūtra),『수야가당가』(Sūyagad*an#ga, Sūtrakr*tan#ga Sūtra), 불교의『숫따니빠따』와 같은 성격을 가진『웃따라댜야나수뜨라』(Uttarādhyayana Sūtra) 등은 언어학적으로나 문헌학적으로도 아주 오래된 것이라고 여러 학자들이 공히 인정한다. 


인도 종교계의 사정이 이러하였기 때문에 불교교단도 부처님 말씀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기 위해서 자연스럽게 이러한 방법론을 그대로 받아들였으며 특히 사리뿟따 존자와 깟사빠 존자와 같은 바라문 가문 출신들에게는 자연스런 추세였을 것이다. 


가르침을 모으는 방법은 다양하겠지만 본경은 그 가운데서도 조금 더 특이한 방법을 취하고 있다. 사리뿟따 존자는 본경에서 비구들이 받아 지니고 공부해야 할 주제를 ① 많은 것을 만드는 법 ② 닦아야 할 법 ③ 철저히 알아야 할 법 ④ 버려야 할 법 ⑤ 퇴보에 빠진 법 ⑥ 수승함에 동참하는 법 ⑦ 꿰뚫기 어려운 법 ⑧ 일어나게 해야 하는 법 ⑨ 최상의 지혜로 알아야 하는 법 ⑩ 실현해야 하는 법이라는 열 가지로 정리한다. 그런 다음 이 열 가지에 해당되는 법들을 각각 하나의 법수부터 시작해서 10까지 증가하면서 설한다. 그래서 경의 제목을 다사-웃따라(Dasa-uttara, 다숫따라, 열 가지를 하나씩 증가하며, 혹은 열까지 하나씩 증가하며)라고 붙였고 십상(十上)으로 한역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본경에서는 (1×10) + (2×10) + … + (10×10)하여 모두 550개의 가르침이 10가지 주제 하에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설해지고 있다. 왜 사리뿟따 존자를 법의 대장군이라 부르는지를 알 수 있는 경이다. 


출처 http://blog.daum.net/gikoship/1578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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