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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위빠싸나 명상의 심리학적 고찰    
  글쓴이 : 미선이 날 짜 : 08-04-24 02:16 조회(8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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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빠싸나 명상의 심리학적 고찰
A Psychological Examination of Vipassana Meditation
 
                                                                김정호
 
<목 차>
I. 서론
II. 위빠싸나 명상의 방법
III. 위빠싸나 명상의 효과
IV. 결어
참고문헌
 
 
ABSTRACT
The present paper examined vipassiana meditation from the point of psychology. First, the method of vipassana meditation was delat with, and next the effects of vipassana meditation were explained psychologically in relation to the methods. The effects of vipassana meditation were classified into the classical effects and the applied effects. The former are the ultimate goals at which the Buddhists aim traditionally. And the latter are the effects which are valuable for modern lay persons as well as for the Buddhists. Finally, some limitations of the present paper are also discussed.
Kim, Jung-Ho
본 연구는 95학년도 덕성여자대학교 연구비 지원으로 이루어졌음.
덕성여자대학교 심리학과 부교수
 
 
 
I. 서론
 
최근들어 명상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고 있다. 현대생활이 한편으로는 더 경쟁적으로 되는 등 생활의 압력을 증가시키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너무 물질적으로 치닫게 되면서, 자연스러운 반작용의 하나로 정신적인 수양에 대한 일반인의 관심이 커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심리학 내에서도 서양심리학의 분석적인 방법의 한계와 그 극복을 위한 방안이 하나로 동양심리학에 눈을 돌리면서, 동양심리학의 주요한 접근방법이라고 할 수 있는 명상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는 것으로 보인다 (김기석, 1969, 1978; 김정호, 1994a, 1994b, 1995b, 1996; 설기문과 김기주, 1996; 윤호균 1970, 1991; West, 1987).
 
서양심리학과 동양심리학은 모두 인간의 마음을 이해하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공통되지만, 그 접근법에서 특징적으로 구분된다. 한마디로 서양심리학이 분석적 이해 혹은 앎을 추구한다면, 동양심리학은 체험적 이해 혹은 앎을 추구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차이는 커피에 대한 앎을 통해 비유적으로 설명해 볼 수 있다. 커피를 아는 데 있어서, 커피를 분석하여 그 성분과 작용을 낱낱이 밝히는 방법이 있고, 커피를 냄새맡고 마셔 보는 방법이 있다. 전자의 경우를 분석적 앎, 그리고 후자의 경우를 체험적 앎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 분석적으로 밝혀 놓은 커피의 성분과 기능을 모두 알고 있다고 해도 실제로 커피의 향과 맛을 음미하고 그 효과를 체험하지 않았다면, 그는 가리켜 커피를 아는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그는 자신의 지식으로 커피와 커피 아닌 것을 구분할 수 있고, 심지어 여러가지 성분을 조합하여 커피를 만들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실제로 자신의 몸과 마음을 통해 커피를 체험하지 못했다면, 커피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이다. 차리리 커피가 무엇으로 만들어져 있는지는 모르지만, 커피를 먹어본 사람이 커피를 아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비유가 인간의 마음에 대해서도 적용될 수 있다. 즉, 인간의 마음에 대한 분석적인 앎 만으로는 인간에 대하여 제대로 안다고 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동양심리학은 인간이해에 있어서 새로운 가능성을 제공해 주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에 대한 보다 온전한 앎을 위해서는 서양심리학의 분석적 접근과 동양심리학의 체험적 접근이 상보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김정호, 1994a; 1994b). 앞에서의 커피에 대한 비유를 다시 들어보자. 우리의 커피에 대한 체험은 커피의 분석에도 도움을 준다. 또한 커피에 대한 분석적 앎을 통해 다양한 커피를 만들 수도 있으며, 이는 우리의 커피에 대한 체험을 풍요롭게 해 줄 수 있다. 이러한 전체 과정이 커피에 대한 우리의 앎을 보다 온전하게 해준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비유는 인간의 마음에 대해서도 유사하게 적용될 수 있다. 따라서 서양심리학과 동양심리학은 상호수용을 통해 서로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으며, 동시에 이러한 상보적 접근을 통해 인간의 마음에 대한 보다 온전한 앎이 가능해 질 것이다.
 
본 논문은 동양심리학의 주요 접근법인 명상을 서양심리학의 관점에서 고찰함으로써 동양심리학과 서양심리학의 상호이해와 상호발전에 도움이 되고자 한다. 구체적으로 본 논문에서는 명상 중에서도 위빠싸나 (vipassana) 명상에 초점을 두고 고찰하고자 한다. 명상의 유형은 크게 집중명상 (concentrative meditation)과 통찰명상 (insight meditation)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위빠싸나 명상은 통찰명상에 속한다. 집중명상은 비교적 고정된 대상에 주의를 집중하는 것이고, 통찰명상은 주의집중의 대상이 고정되지 않고 일상생활에서 매순간의 변화하는 경험에 열린 마음으로 주의를 집중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명상유형에 대한 자세한 구분에 대해서는 김기석 (1978)과 김정호 (1994a, 1996)를 참조.) 본 논문에서 위빠싸나 명상을 심리학적 고찰의 대상으로 삼은 이유는, 이것이 오랜 전통을 가지며 현재에도 널리 행해지고 있다는 사실 때문만이 아니라, 마음의 현상을 직접적으로 체험하도록 하는 명상이며 또한 특별한 조건에서만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수행될 수 있어 현대의 생활인들에게 비교적 쉽게 다가갈 수 있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II. 위빠싸나 명상의 방법
 
위빠싸나 명상의 위빠싸나는 빠알리어 (Pali)로 존재 (자기자신과 세계를 포함)의 특성을 직접적으로 체험한다고 정의할 수 있으며, 일반적으로 영어권에서는 insight (통찰)로 번역된다. (위빠싸나에 대한 자세한 어구적 설명은 김정호 (1994b)를 참조) 따라서 위빠싸나 명상은 존재의 특성을 직접적으로 체험하게 하는 명상이라고 할 수 있다.
위빠싸나 명상은 불교의 오래된 명상방법으로 일반적으로 남방불교에서 많이 수행되며, 최근에는 구미지역과 우리나라에서도 수행하는 사람들이 점차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위빠싸나 명상이 비록 불교에서 비롯되고 불교지역에서 널리 수행되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 내용으로 볼 때, 특정한 종교의 교리나 그에 대한 믿음을 전제로 하지 않으고 스스로 체험을 통하여 존재의 특성을 직접적으로 알도록 하는 방법론으로 특정 종교와 무관하게 수행될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여러 통찰명상들의 기본적인 특징인 마음챙김 (mindfulness)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마음챙김 명상이라는 명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위빠싸나 명상의 방법에서 핵심적인 요소는 자신의 의식경험에 대한 마음챙김 (mindfulness)이다. 먼저 마음챙김에 대하여 설명하고 다음에 의식경험에 대하여 설명하면서 관련된 명상방법에 대하여 기술하고자 한다. 아래에서 기술하는 위빠싸나 명상의 방법은 다음의 참고문헌과 필자의 개인적 체험에 바탕을 두었다: 거해 (1993); 보천 (1993); 현음 (1994); Bhikkhu Bodhi (1984); Debvedi (1988); Goldstein (1976); Goldstein & Kornfield (1987); Goleman (1972); Hart (1991); Kornfield (1992); Mahasi Sayadaw (1995); Nyanaponika (1962); Nyanasamvara (?); Nyanatiloka (1982); Osho (?); U Pandita (1992).
 
 
II.1. 마음챙김
 
마음챙김은 체험을 통해서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마치 테니스 치는 기술처럼 말 보다는 실제로 행하면서 더 잘 알게 된다. 그러나, 테니스에도 교본이 있듯이, 마음챙김을 실제로 잘 체험하도록 돕기 위해 아래와 같이 몇가지 방식으로 언어적으로 설명할 수 있겠다.
 
 
1. 비사변적 관찰
 
마음챙김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비사변적 혹은 비판단적인 (nonjudgmental) 관찰을 말한다. 이것은 순수한 주의 (bare attention) 혹은 순수한 관찰이라고도 부를 수 있다. 즉, 자신에게 있는 어떠한 사전지식, 선입견, 또는 욕구 등을 가지고 마음의 현상을 판단, 비판, 비교, 평가, 논평, 상상, 또는 추론 등을 하지 않고, 어디에도 편향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것이다. 또한 마음의 특정 현상에 대하여 집착하거나 배척함 없이 있는 그대로 본다. 만약 이러한 사변적 또는 판단적 작용이 일어나거나 집착 또는 배척이 나타나면, 그 또한 있는 그대로 관찰한다. 이러한 마음챙김의 특징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분별심 없는 태도 또는 분별심 없는 알아차림 (awareness)이라고 할 수도 있다. 또는 마음을 직시한다고도 할 수 있다.1) 또는 어떠한 마음의 작용/현상이라고 해도 그것에 빠지지 않고 떨어져서 관찰할 수 있어야 한다고도 할 수 있다.2)
 
이러한 마음챙김은 반응적 (reactive)이라기 보다는 수용적 (receptive)이라고 할 수 있다. 비유적으로 표현하면, 마음에서 변화를 거듭하는 의식경험들을 일종의 내적 대화라고 할 때, 그 내적 대화에 참여하지 않고 그저 관찰하는 자세이다. 따라서 마음챙김은 현재 진행하는 마음의 작용/현상에 간섭을 일으키지 않고 오직 순순하게 바라볼 뿐이다. 그러나, 마음챙김 상태는 결코 무기력한 상태는 아니며 매우 또렷이 깨어 있는 상태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깨어 있다고 하면 매우 활발하고 똑똑한 상태를 말한다. 이것과 저것을 잘 비교하고 판단하고 등등, 매우 왕성한 분별력을 갖춘 상태를 말한다. 그렇지 못할 때는 멍청한 상태로 간주한다. 그러나, 전혀 그러한 상태와는 반대이면서 동시에 매우 깨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이와같은 상태가 바로 마음챙김의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마음챙김 상태는 매우 고요하면서도 또한 매우 또렷이 깨어 있는 상태이다. 옛부터 이러한 마음상태를 성성적적 (惺惺寂寂)이라고도 표현해 왔다.
 
 
2. 지금-여기에 온전하게 출석하고 온전하게 알아차림 하기
 
마음챙김은 또한 지금-여기에 온전하게 출석하고 (fully present), 온전하게 알아차림 하는 (fully aware) 것이다. 온전하게 알아차림 한다는 것은 위에서 설명한 비사변적 관찰이 충분하게 이루어져서 마음현상을 명확하게 알아차리는 것을 말한다. 지금-여기에 온전하게 출석한다는 것은 알아차림이 지금-여기의 마음작용/현상과 즉각적/동시적이어야 함을 말한다. 인지심리학적으로 표현하면 알아차림이 동시진행적 처리 (on-line processing)가 되어야 함을 말한다. 이와같이 볼 때, 지금-여기에 온전하게 출석하고 온전하게 알아차림 한다는 것은 비사변적인 관찰이 매순간 변화하는 바로 지금-여기의 마음작용에 대해 즉각적으로 이루어져야 하고 그러한 관찰이 애매하지 않고 또렷하게 이루어져야 함을 말한다.3)
 
우리는 일반적으로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온전하게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러한 주장에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즉, 우리는 간혹 잡다한 백일몽에 빠지거나, 몽롱한 상태에 있거나, 허둥지둥 일을 하여 무엇을 하였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지만, 깨어있는 대개의 경우에 우리는 명확히 깨어서 대화를 하고, 신문을 보고, TV를 보는 등의 행위에 주의집중을 한다고 반박할 수 있다. 물론, 주의집중하여 일하는 중간에 누군가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물어보거나, 주의집중이 끝난 후에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되돌아 알 수 있고 기억에 남아 나중에 그 활동의 내용을 인출할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주의집중하는 동안 거기에 주의집중은 있으나 자신이 집중하여 처리하는 과정과 내용에 대한 알아차림은 없다는 것이다.4) 알아차림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온전하지 못하고 부분적이며 그나마도 나중에 돌아보아 알게 되므로 즉각적이지 못하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의 일상적인 깨어 있는 활동의 대부분에는 지금-여기의 알아차림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II.2. 마음챙김의 대상: 의식경험
 
위빠싸나 명상에서 마음챙김의 대상, 즉 의식경험은 4가지로 나뉘어진다. 이것을 사념처 (四念處)라고 한다. 사념처에서 염처란 빠알리어 (Pali)로 sati-patthana이다. sati는 마음챙김의 뜻을 가지며, patthana는 밀착, 접착, 머뭄의 뜻을 갖는다. 따라서 사념처는 마음챙김의 4가지 대상이라고 보면 되겠다. (사념처에 대한 자세한 어구적 설명 및 현대심리학적 이해는 김정호 (1994b)를 참조.) 이러한 4가지 마음챙김의 대상은 신 (身), 수 (受), 심 (心), 및 법 (法)의 4가지로 구성된다. 이들은 현대적인 개념으로는 각각 감각 (sensation), 느낌 (feeling), 마음의 상태 (states of mind), 및 정신적 요소 (mental elements)로 표현할 수 있다. 감각은 몸을 통해 경험된는 감각들로서, 시각, 청각, 후각, 미각, 및 촉각 등 오감으로 구성되며 여기에는 몸의 움직임에 따른 감각도 포함된다. 느낌은 쾌 (樂), 불쾌 (苦), 및 쾌도 불쾌도 아닌 느낌 (非苦非樂)의 세가지로 구분된다. 마음의 상태는 탐욕이 있는 마음과 탐욕이 없는 마음, 성냄이 있는 마음과 성냄이 없는 마음 등 대비되는 마음의 쌍 여덟가지로 구분된다. 정신적 요소에는 오개 (五蓋), 오온 (五蘊), 육처 (六處), 칠각지 (七覺支), 및 사성제 (四聖諦)를 포함한다.
 
사념처, 특히 심과 법을 더 세부적으로 상술하는 것은 현대인의 명상수행에 다소 번쇄한 느낌을 줄 수 있다고 생각되어 여기서는 더 이상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겠다. (사념처에 대한 좀더 자세한 설명을 원하는 경우에는 김정호 (1994b)를 참조.) 단지 사념처는 마음의 작용에 따른 마음의 현상 혹은 의식경험에 대한 분류라고 이해해 두면 되겠고, 실천적인 측면에서는 현대적으로 이해해 볼 때, 감각기관을 통한 감각, 마음에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생각, 감각이나 생각 등에 따른 쾌나 불쾌 등의 느낌, 여러가지 맥락적 역할을 하는 마음의 상태를 가리킨다고 보면 되겠다. 사실 사념처의 각 요소는 스스로 수행하며 체험적으로 증득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위빠싸나 명상을 수행할 때에 마음챙김의 대상들을 어떻게 마음챙김 해야 하는가는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된다. 예를 들면, 마음의 현상으로서 사념처가 동시적으로 발생하는가 혹은 독립적으로 발생하는가 등의 특성에 따라 사념처에 대한 마음챙김 방법이 달라져야 할 것이다. 또한 위빠싸나 명상의 대가들 사이에서도 사념처의 요소들에 대한 마음챙김의 순서나 비중 등에 있어서 서로 주장이 다른 것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부분에 대한 논의는 좀더 상세히 다루고자 한다. 아래의 논의는 위빠싸나 명상의 대가들인 남방의 선지식들의 입장에 대한 김정호 (1994b, 196-7)의 논의를 조금 보완한 것이다.
 
먼저 사념처에 대한 수행에서 순서를 중시하는 입장이 있다. 케마마하짜리 장로는 신, 수, 심, 및 법의 사념처에 대한 관찰에서 관찰대상을 혼합하면 안된다고 하였으며 (김열권, 1993, 64), 신, 수, 심, 및 법의 순서로 올라갈수록 고급단계의 관찰인데, 신의 관찰에서 법의 관찰로 나아갈수록 점점 더 미묘해진다고 하였다 (김열권, 1993, 74). Achaan Dhammadaro는 사념처 중 한번에 한가지에만 마음챙김할 수 있다고 보았다 (Kornfield, 1992, 348). 또한 그는 신, 수, 심, 및 법의 순서로 마음챙김의 수행을 해야 한다고 보았다 (Kornfield, 1992, 348-357).
 
그러나, 사념처에 대한 수행이 위와같이 순서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입장도 있다. Sunlun Sayadaw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신, 수, 심, 및 법의 사념처는 각각 독립해서 일어나지 않으며 서로 연결되어 (in association) 함께 발생하므로, 한가지에 마음챙김 함으로써 나머지 모두에 대해 마음챙김 하게 된다. 단지 한가지 요소가 다른 요소들보다 지배적일 때, 보통 그 지배적 요소에 대한 마음챙김이라고 한다. (Kornfield, 1992, 162). Mogok Sayadaw도 사념처는 함께 일어나고 함께 사라진다고 보았으며, 마음챙김에서 사념처 중 하나를 취하는 것이 나머지를 제외하는 것은 아니며, 사념처 중 한가지가 보다 지배적일 수는 있다고 보았다 (Kornfield, 1992, 300- 302). 그는 또한  사념처 중 마음과 느낌에 대한 마음챙김을 강조했는데, 그것이 뿌리깊게 조건화된 그릇된 견해를 몰아내고 올바르게 마음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Kornfield, 1992, 303). Nyanaponika (1962, 93)는 일상생활의 사념처 수행을 설명하면서, 각 요소가 나타나는 대로 알아차리고 관찰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수행을 함에 따라 마음은 보다 차분해 지고, 관찰은 예리해지며, 마음챙김은 더욱 또렷해진다고 하였다.
 
이상에서 볼 때, 신, 수, 심, 및 법의 사념처가 일상생활의 경험에서 모두 포함되는 요소라는 점에서는 위의 견해들이 일치하는 것으로 보인다. Achaan Dhammadaro도 사념처가 각기 독립적으로 일어나지 않고 함께 일어남을 인정하고 있다 (Kornfield, 1992, 355). 그러나, 실제로 사념처 마음챙김을 할 때는 그 구성요소의 마음챙김 순서에 있어서 서로 견해가 다르고 중시하는 구성요소에 있어서도 서로 견해가 다름을 알 수 있다. 필자의 견해로는 신, 수, 심, 및 법의 고정된 순서로 수행을 하기보다는 가급적 매 순간의 경험에서 나타나는 대로 알아차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물론 신, 수, 심, 및 법의 순서로 관찰의 어려움이 증가할 수 있고, 따라서 방편적으로 그러한 순서대로 관찰을 해나갈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사념처의 네가지 요소가 일상경험에서 일어나는 대로 모두 관찰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마음챙김 방법은 '선택없는 알아차림 (choiceless awareness)' 혹은 '선택없는 관찰'이라고도 불리는데 위빠싸나 명상과 마찬가지로 통찰명상에 분류되는 묵조선 (默照禪)이나, 현대의 영적 지도자로 인정되는 Krishnamurti의 방법과도 일치하는 것으로 보인다.
 
참고적으로 일상생활의 경험과 인지심리학의 연구에서도 알 수 있듯이, 수행을 많이 할 수록 숙달되어 한번에 수행할 수 있는 작업의 양이 증가할 수 있음을 지적해야 할 것 같다 (Hirst, Spelke, Reaves, Caharack, & Neisser, 1980; Spelke, Hirst, & Neisser, 1976). 사념처 수행과 관련지어 볼 때, 수행이 증가하면 사념처의 네가지 요소의 알아차림이 매우 신속하게 이루지게 된다고 할 수 있다. 이와같이 볼 때, 사념처의 네가지 요소는 동시적으로 일어날 수 있지만, 수행의 정도에 따라 한번에 관찰할 수 있는 수와 속도에 차이가 있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볼 때, 수행의 초기에는 알아차림이 제대로 숙달되지 않았으므로, 매순간 자신의 의식에서 보다 뚜렷하게 경험되는 요소에 마음챙김하는 것이 적절하다. 또는 수행자의 특성에 따라 자신이 좀더 관찰하고자 하는 의식경험의 요소를 선택적으로 마음챙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위에서 위빠싸나의 대가들 사이에서도 중시하는 마음챙김 대상의 요소가 서로 다른 것은 위빠싸나 수행에 있어서 그들의 개인적인 특성이 반영되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마음챙김의 대상을 잡아 나가지 않으면, 무엇을 관찰해야 할지 마음만 번거롭게 되고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마음챙김 하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떠한 방식을 선택하든, 결국 숙달되면, 사념처로 분류되는 의식경험을 모두 마음챙김 하게 될 것이다.
 
 
II.3. 호흡마음챙김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마음챙김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주의집중이 중요하다. 마음챙김의 대상에 마음이 집중되지 않으면 순수관찰도 할 수가 없다. 따라서, 위빠싸나 명상을 수행할 때, 초기에는 마음집중을 도와주면서 마음챙김을 잘 할 수 있도록 마음챙김의 대상을 호흡 (정확하게는 호흡감각)으로 정하고 하는 호흡마음챙김을 수행하는 경우가 많다. 일반적으로 호흡감각의 장소로는 코끝 혹은 배로 한다. 편안히 앉되 허리는 적절히 바르게 세우고 매순간 자연스럽게 들어오고 나가는 호흡을 관찰한다. 물론 이 관찰은 앞서 설명한 비사변적인 관찰이다. 호흡을 관찰할 때, 앞에서 설명한 의식경험의 여러 요소들이 나타날 수 있다. 이때, 각각이 나타날 때 마다 즉각적으로 알아차리고 다시 호흡으로 돌아온다. 호흡감각 이외의 의식경험에 집착하거나 혹은 반대로 그것을 밀어내려고 하지 말고 단지 '음, 그래' 하고 알아차림 하고 돌아 온다. 이렇게 보면, 호흡마음챙김은 호흡만을 마음챙김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작용/현상 모두를 마음챙김하는 것으로 단지 호흡감각을 중심점 (anchor point)로 한다는 것만이 특징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때 호흡감각에 더 중점을 둘 수도 있고, 아예 호흡감각 마저도 놓아 버리고 마음에서 경험되는 어떠한 것이든 알아차림 하는 방법, 즉 앞에서 언급했던 선택없는 알아차림을 수행할 수도 있다. (호흡마음챙김 방법의 좀더 상세한 설명은 김정호 (1995b)를 참조하기 바람.)
 
위빠싸나 명상은 일상생활 전체에서 수행되어야 하지만, 위빠싸나 명상의 초보자의 경우 일상생활을 하면서 동시에 비판단적인 관찰을 수행하는 것은 쉽지가 않다. 이런 측면에서 호흡마음챙김은 집중의 힘을 증가시켜줄 뿐만 아니라, 고요함 속에서 여러가지 일어나고 사라지는 여러가지 마음의 작용/현상을 관찰할 수 있게 해 줌으로써, 마음의 작용/현상에 빠지지 않고 그것들의 여러가지 특성들을 비교적 용이하게 비판단적으로 관찰할 수 있게 해 준다. 또한 고요히 호흡에 마음챙김하며 마음을 가라앉힘으로 해서, 특정한 일을 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움직이는 마음의 여러가지 작용/현상을 더 잘 관찰하게 되며, 더 나아가 마음의 내면에 있는 여러가지 것들이 자연스럽게 올라오고 내려가는 것을 있는 그대로 관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준다.
 
 
II.4. 일상생활에서의 마음챙김
 
앞에서도 설명한 것처럼 위빠싸나 명상은 특정한 조건이 갖추어진 상황에서만 수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수행할 수 있는 특징을 갖는다. 따라서 궁극적으로 위빠싸나 명상은 일상생활 전체 속에서 지속적으로 진행될 수 있을 때 온전하게 수행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일상생활에서의 마음챙김을 할 때, 위빠싸나 명상의 초기에는 마음챙김의 힘이 충분하지 않으므로, 비교적 단순하고 반복적인 행위에 마음챙김한다. 이러한 행위에는, 이닦기, 세수하기, 식사하기, 설거지하기, 옷갈아 입기, 문 열고 닫기, 버스타기, 걷기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이러한 경우에 마음챙김의 주된 대상은 각 행위에 따른 신체감각이 되겠다. 물론 이러한 마음챙김 동안에 다른 의식경험의 요소가 나타나면, 호흡마음챙김에서 처럼, 즉시 알아차리고 지금 하는 행위에 돌아온다.
 
앞에서 마음챙김의 특징을 설명하면서, 지금-여기에 온전하게 출석하고 온전하게 알아차림 하기를 언급했다. 일상생활에서의 마음챙김과 관련해서 지금 하는 일에 온전하게 출석하는 것이 매우 소중하다. 마음챙김은 마음이 다른 시간, 다른 곳에 가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몸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도록 하고, 몸이 하는 일에 마음이 있도록 한다'는 지침이 주어지기도 한다. 우리는 종종 지금 하는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지난 일을 되씹고 있거나 앞으로의 일을 미리 예측하여 걱정하거나 혹은 들떠있거나 한다. 마음은 지금 여기에 있어야 한다. 지금 여기에서 경험하는 것을 온전하게 알아차림 하여야 한다. 만약 마음이 지금-여기에 있지 않고 다른 때, 다른 곳에 가 있다면 바로 그것을 알아차림 하여야 한다. 그러나, 이것이 과거를 반성하거나 미래에 대한 적절한 계획을 세우는 등의 일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어떠한 마음의 작용이든 지금 하는 일에 온전하게 출석하여 온전하게 알아차림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일상생활의 마음챙김에서 또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마음의 강한 정서적인 상태에 대한 마음챙김이다. 특히 위빠싸나 명상의 초기에는 마음챙김의 힘이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미세한 마음의 변화는 잘 감지되지 않는다. 따라서 강한, 분노, 슬픔, 불안 등강한 정서가 일어날 때, 놓치지 않고 즉각적으로 마음챙김 하도록 한다.
 
마음챙김의 훈련이 잘 진행되면, 대화를 하면서도 마음챙김이 이루어질 수 있다. 이때 상대방이 이야기를 할 때는 그 말을 정확하게 알아차림 하며, 자신이 이야기를 할 때에도 자신이 하는 말을 정확하게 알아차림 한다. 이와 같이 된다면, 일상상활을 하면서도 마음챙김이 끊어짐 없이 밀밀히 지속되게 되며, 이럴 때 마음챙김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할 것이다.
 
 
III. 위빠싸나 명상의 효과
 
위빠싸나 명상의 효과에서는 일반적으로 명상의 효과를 다룰 때 언급되는 신체적 변화 (예, 산소의 소비율와 이산화탄소의 배출률이 감소하고, 심장박동과 호흡이 느려지며, 체내의 특정 물질이 감소하거나 증가함 등)보다는 자기와 세계에 대한 통찰과 그에 따른 심리적 변화를 정보처리적인 측면에 초점을 두고자 한다.
 
 
III.1. 위빠싸나 명상의 전통적인 효과
 
위빠싸나 명상은 불교적 전통에서 수행되어 왔기 때문에 위빠싸나 명상을 통해 궁극적으로 얻게 되는 효과를 전통적인 효과라는 제목하에 기술하도록 한다. 그러나, 아래에서도 설명하겠지만, 위빠싸나를 통해 얻게 되는 것으로 전통적으로 기술되는 효과는 특정한 종교나 전통에만 국한되지 않고 현대 심리학의 입장에서 중요한 시사점을 갖는다.
 
 
III.1.1. 무상 (無常), 무아 (無我), 및 고 (苦)의 체험적 앎
 
위빠싸나 명상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자기와 세계의 실상을 체험적으로 철저하게 알게 되어 해탈을 하게 된다고 보는데, 그 실상은 바로 무상, 무아, 고이다.
 

1. 무상
위빠싸나 명상은, 대부분의 명상이 그러하듯이, 체험을 통해 자기와 세계에 대한 올바른 앎을 얻음으로써 올바른 삶을 살게 하는 효과를 가져온다. 다시 말하면, 올바른 깨달음을 얻기 전까지 우리는 자기와 세계의 실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위빠싸나 명상을 통해 통찰하게 되는 자기와 세계의 실상은 무엇인가?
 
앞에서도 기술했듯이, 위빠싸나 명상은 명상을 수행하는 사람이 존재의 특성을 직접적으로 체험하게 하는 명상이다. 위빠싸나 명상의 전통에서는 위빠싸나 명상을 통해 깨닫게 되는 존재의 특성이 무상, 무아, 및 고라고 설명한다.
 
먼저 무상이라고 하는 것은 글자 그대로 어떠한 것도 항상되게 존재하지 않고 끊임없는 변화 속에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물질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그러하다. 이 점은 이제 과학의 발달로 우리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세계의 사물들이 고정된 듯이 보여도 매순간 변화를 한다. 기체나 액체는 물론이고 고체라 할 지라도 그것을 구성하는 기본 입자들은 끊임없이 운동 속에 있으며, 소립자의 세계로 들어가면 매순간 탄생하고 사멸하는 작용이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물질로 되어 있는 우리의 몸의 경우, 입자보다 좀더 거시적인 수준에서 보아도 우리의 몸을 구성하는 세포들은 시시각각으로 변화를 하고 있으며, 좀더 거시적 수준에서도 태어나서 성장하고 늙고 죽는 과정에서 우리의 몸은 동일하지 않은 것이다. 우리의 마음도 미시적으로 볼 때, 매순간 가만히 있지를 않고 여러가지 것들이 나타나고 사라진다. 거시적으로 볼 때에도, 어린 시절의 마음과 나이들면서 갖게 되는 마음이 동일하지 않다. 특별한 명상을 하지 않아도 우리는 이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는 이것을 철저하게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냥 알고 있는 것이다. 이점은 아래에서 무아를 설명하며 자세히 언급하도록 한다.
 
무상을 설명할 때 한가지 첨가할 점은, 무상이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사용될 때, 다소 소극적 뉘앙스를 띄며 사용된다. 아름다움을 마음껏 과시하던 미인이 나이 들어 주름 많은 얼굴로 되었을 때, 건강하던 사람의 갑작스런 죽음을 듣게 되었을 때 등과 같은 경우에 우리는 무상하다고 말한다. 혹은 세월이 무상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무상이라는 말은 그런 경우에만 해당하는 용어는 아니다. 코흘리게 계집아이가 예쁜 숙녀가 된 것도 무상한 것이고, 기어다니던 아기가 어느덧 건장한 청년으로 성장한 것도 무상한 것이다. 무상하지 않다면, 코흘리게는 항상 코흘리게이고 기어다니는 아이는 항상 기어다닐 것이다. 따라서 무상이라는 말은 이 세상 존재의 변화하는 특성을 객관적으로 기술하는 용어이다.
 
 
2. 무아
무아는 무상과 관련된 것으로 특히 인간의 존재적 특성을 나타내는 용어이다. 우리의 몸과 마음을 볼 때, 끊임 없는 변화가 있을 뿐이지, 거기에는 어떠한 영혼과 같은 불변하는 개체가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5) 나 (Self)라고 하는 것은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여러 구성요소들의 조합으로 되어 있지, 이것들과 구분되는 별개의 불변적인 개체를 갖지는 않는다. 인간의 마음을 하드웨어 (hardware)적으로 연구하는 생리심리학 혹은 신경과학을 통해 인간 마음의 하드웨어 라고 할 수 있는 신체적 기관인 뇌가 기능적으로 구분되는 여러 하부요소들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인간의 마음을 소프트웨어 (software)적으로 연구하는, 인지심리학을 포함한 여러 심리학을 통해 인간의 마음이 인지, 정서, 의지 등 여러가지 하위 체계와 그들의 활동으로 구성됨을 알 수 있다. 여기에는 이러한 구성요소들의 상호작용을 떠나서 어떠한 영속적이고 불변하는 개체도 상정되지 않는다. 이러한 입장은 심리학의 초창기에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변함이 없다. 심리학의 초창기 주요 학파인 구조주의 (Structuralism)에서도 인간의 마음이란 의식경험의 총합이며, 의식경험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끊임없는 흐름이라고 보았으며, 이러한 맥락에서 영속적인 자기 (permanent self)를 부정하고 있다 (Titchener, 1910, 15-19). 이와 유사한 입장이 구조주의와 동시대의 학파인 기능주의 (Functionalism)에서도 발견된다 (Angell, 1918, 265). 최근에도 인간의 마음을 자기라고 부를 수 있는 단일한 개체가 아니고, 더 이상 자기라고 부를 수 없는 여러가지 대행자들 (agents) 혹은 단원 (modules)의 집합으로 보는 입장 (예, Minsky (1986))이 커다란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자기' 혹은 '나'가 없다고 할 때, 나라고 부를 수 있는 물질적 혹은 심리적 현상 마저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분명히 나라고 부를 만한 것은 있으며, 이것이 하나의 단위로 기능하는 것은 사실이다. 비유하자면, 마치 '사회'의 존재에 대한 논의와 유사하다. 사회가 있는가 혹은 없는가? 인공위성을 타고 내려다 봐도 거기에는 한국사회가 없다. 한국이라고 지칭되는 물리적인 지형과 그 위에 살고 있는 이러이러한 특성의 사람들과 그들의 활동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것들을 떠나서 별개의 독립적인 개체로 한국사회가 존재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한국사회는 그 자체의 단위로 기능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나'는 여러 구성요소들의 집합이며, 게슈탈트 (Gestalt) 심리학의 용어를 빌면, 그들의 상호작용에서 즉발적으로 나타나는 총체 (emergent whole)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과학적 혹은 분석적 앎이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체험적으로 알고 있는 것과 상치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어떠한 방식으로든 간에 개별적인 '나'를 상정하고 살아간다. 신체도 '나'의 신체이고 마음도 '나'의 마음이다. 내 다리가 아프고 내 등이 가려우며, 내 마음이 아프고 내 마음이 즐겁다. 과학적 앎과 우리의 체험적 앎 사이에는 어느 정도의 괴리 혹은 상치가 존재한다. 지구가 둥글며 지구는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알게 된지 몇 백년이 지났지만, 우리는 여전히 체험적으로는 지구가 평평하며 태양은 날마다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진다. 우리의 몸과 우리의 몸이 놓여 있는 의자는, 과학적으로 볼 때 그것들을 이루는 기본 요소들이 동일하다고 해도, 체험적으로 분명히 구분되는 물질들이다. 한편, 이러한 앎의 괴리 또는 상치가 우리를 괴롭히지는 않는다. 일상생활의 체험적 앎으로 살아가면서 필요할 때는 과학적 앎으로 로케트도 쏘아 올리고 신소제를 개발하기도 한다. 그러나, 자신의 존재에 대한 앎의 괴리 혹은 상치는 심각하게 받아들여져야 하지 않을까? 평소에 '나'라고 알고 있는 존재가 실제와 다르다면, 기가 막힌 일이 아니겠는가? 어린 백조가 어쩌다가 오리틈에 끼어 미운 오리새끼로 구박받으며 살고 있는 형국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3. 고
고는 염세적 의미의 고라기 보다는 앞에서 설명한 자기와 세계의 실상이 무상과 무아로 되어 있어서 끊임없이 변화하고 영속적인 것이 없다는 의미에서 고이다. 그런데 이러한 것을 고라고 표현한 것은 이것이 우리가 극복해야 할 상황이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상황에 안주하지 않고 진정으로 자유롭고 행복해지도록 하기 위해서 무상과 무아의 실상을 고라고 표현했다고 할 수 있다. 혹은 무상과 무아의 실상을 깨닫지 못하고 반대로 생각하고 그것에 따라 살고 있는 것을 고라고 할 수도 있다.
 
 
III.1.2. 위빠싸나 명상의 역할
 
위에서 기술한 세가지 존재의 실상은 어느 정도 머리로 이해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심정적으로 쉽게 받아들여지지는 않을 수 있다. 이것은 그만큼 과학적 앎과 우리의 체험적 앎 사이에 상당한 괴리가 있다는 것을 뜻한다. 역사적으로 볼 때, 물리세계의 실상을 받아들이는 데에도, 적어도 서구에서, 상당한 시일이 걸렸으며 적지 않은 사람들이 신체적 정신적 탄압을 당했고 목숨까지 잃었다. 이제와서는 비록 우리의 체험적 앎과는 다르지만, 지구가 둥글다거나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다는 등의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다. 요즘에는 심지어 보이지 않는 소립자 세계에 대한 물리학자들의 주장들도 별로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와같이 물리세계의 실상에 있어서는 저항감 없이 과학자들의 주장이 수용되고 있으며, 그에 따른 과학적 앎과 체험적 앎과의 괴리나 상치가 있어도, 즉 불일치가 있어도 별로 개의하는 일도 없고 일상생활에 큰 문제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마음의 세계의 실상에 있어서는 최근에 심리학 등의 과학이 발전했으나, 여전히 일상생활의 체험에 따른 앎, 즉 개별적인 '나'가 있다는 믿음이 더 지배적이다. 여기에는 마음의 과학의 발전이 아직 일천하여 충분히 설득력 있게 '나'가 없음 (無)을 (혹은 더 정확하게는 비어있음 (空)을) 증명하지 못하는 것도 중요하게 작용한다고 할 수 있다.6) 마음이라고 하는 것이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어서 증명하기도 어렵거니와 반증 (falsification)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특히 영혼과 같은 개별적인 실체에 대한 질문이 반증가능하지 않으므로 애당초 마음의 과학의 질문에 포함되지 않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마음의 과학은 아직 그러한 질문에 대해서는 있다 없다 가부간의 답을 하지 않고 그러한 질문을 회피하고 있다고 해야겠다. 이밖에도 전통적인 교육과 대다수 종교적인 가르침이 개별적인 영혼이나 '나'가 존재한다는 믿음을 심어주는데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상황이 이러하기는 하지만, 위에서 설명한 대로 마음의 과학에서는 개별적인 영혼이나 '나'를 상정하지 않고 여러 요소들의 상호작용으로 인간을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과학자가 객관적인 연구를 하듯이, 체계적인 수행을 하여 자기자신에 대하여 알아보는 것이 의미있는 일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위빠싸나 수행은 자신을 체계적이고 객관적으로 체험할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심리학의 연구를 통해 우리는 인간의 정보처리가 객관적인 세계를 있는 그대로 처리한다기보다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물질적 및 심리적 특성이 개입하여 만들어 경험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의 세계에 대한 앎은 감각 및 지각의 수준과 인지적 수준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 둘의 구분은 깊이 들어가면 엄밀하게 나눠지지 않을 수 있으나, 대략 다름과 같은 예로써 그 차이를 설명할 수 있다. 지금 여기서 '마음'이라는 글자를 본다고 할 때, 이 글자의 모양을 보는 것은 감각 및 지각의 수준이다. 이 글자는 흑과 백을 구분할 수 있는 시각능력만 있으며, 한글을 몰라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글자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이고 이것을 좋아하고 싫어하고 등의 판단은 한글에 대한 언어적 지식과 세상경험 등이 있어야 파악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파악 수준이 인지적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감각 및 지각의 수준에서 볼 때, 우리는 보고,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감촉을 느끼는 등의 작용을 통해 세계를 구성한다. 세계로부터 다양한 자극 혹은 에너지 (전기적이든, 화학적이든)가 우리몸의 수용기에 도달하면 각 수용기는 자신의 특성에 따라 에너지 변환을 하며 최종적으로는 뇌에서의 작용을 통해 특정한 색, 소리, 냄새, 맛, 촉감 등을 경험한다. 다시 말하며, 색, 소리, 냄새, 맛, 촉감 등은 세계에 있다기보다는 우리 마음 혹은 마음의 현상에만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감각을 통해 알고 있는 세계는 바로 우리 마음이 만든 것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닌 것이다. 인지적 수준에서 볼 때도, 특정한 대상을 보고 그것이 무엇이며, 그것이 좋다-나쁘다, 예쁘다-밉다, 귀하다-천하다 등의 판단은 어느만큼은 계통발생적으로 획득한 요소가 작용했을 수 있지만, 상당한 부분은 후천적으로 문화적 영향과 개인적인 경험으로 획득한 요소가 작용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어떤 경험을 할 때, 그 경험에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내적인 요소들의 작용이 이미 개입한 것으로, 혹은 '위-아래로의 처리 (top-down processing)'가 이루어진 것으로 그 경험을 일으킨 대상 자체는 아닌 것이다.7)
 
위와같은 우리의 세계에 대한 경험의 특성은 우리 자신, 즉 내부세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즉, 자기자신의 신체적 및 심리적 특성/현상도 우리 자신의 내적 요소들이 개입하여 구성적으로 알게 되는 것이다. 사회심리학의 자기지각이론 (self-perception theory) (Bem, 1972)은 자기자신에 대한 판단을 할 때에도 다른 사람에 대하여 판단할 대 사용하는 것과 동일한 추론과정을 사용한다는 것을 보여 주며, 그로 인한 여러가지 부적절한 자기이해의 예들을 잘 보여 주고 있다.
 
한편 위빠싸나 명상은 자기자신과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는 훈련이다. 자기자신과 세계는 자신의 마음을 통해서 경험되지만, 그 경험은 마음의 여러가지 요소들에 의해 착색된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러나, 위빠싸나 명상을 통해 마음의 작용/현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즉 마음챙김 하는 훈련을 하므로, 위-아래로의 처리를 점차적으로 명확하게 체험하게 되며, 더나아가 적어도 획득된 위-아래로의 처리가 차츰 감소하게 되어8) 자기와 세계를 차별심 없이 보는 힘이 증가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같이 해서 얻어지는 앎은 단순히 머리로 이해해서 아는 앎과는 달리, 앎의 과정에서 자신의 습관적인 정보처리의 방식에 변화가 오게 되므로 앎과 함이 둘이 아닌 진정한 체험적 앎이 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자기와 세계의 실상에 대한 통찰적 앎을 얻게 되는데, 여러 단계를 거쳐 최종적으로 아라한 (阿羅漢, Arahat)의 경지에 들어 진정한 해탈을 이루게 된다고 본다. 그러나, 이 부분은 개인적 체험의 영역으로 적어도 아직은 체계적인 과학적 연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봐야 하겠다.
 
 
III.2. 위빠싸나 명상의 응용적인 효과
 
위빠싸나 명상의 수행은 위와같이 거창한(?) 혹은 탈세속적인 목표는 아니더라도 우리의 일상적인 혹은 세속적인 생활에서도 많은 긍정적 효과를 가져온다. 이러한 긍정적인 효과는 마음의 정화라고 요약해 볼 수도 있겠으나, 여기서는 몇가지로 나누어서 다루도록 하겠다.
 
 
III.2.1. 주의훈련
 
아래에서 설명하는 주의훈련은 그밖의 여러가지 위빠싸나 명상의 응용적 효과에 관여한다. 인간의 일상생활을 정보처리라고 볼 때, 주의는 매우 중요한 정보처리의 요소이다. 무엇을 생각하거나 행동을 한다는 것은 생각이나 행동에 주의가 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일상생활에서 부적응적인 생각이나 행동으로 고통을 받는다면 그것은 상당부분 주의의 문제로 볼 수 있는 것이다.
 
 
1. 주의집중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자칫 산만해지기 쉬운데, 위빠싸나 명상을 통해 지금-여기에 집중하여 마음챙김 함으로써 주의의 훈련이 이루어지게 된다. 호흡마음챙김의 경우에 호흡감각에 주의를 집중하며 동시에 다른 생각 등이 떠오르면 알아차리고 다시 돌아오는 과정이 포함되므로, 주의집중력의 증가를 가져오고 주의집중의 대상에 대한 정확한 정보처리가 가능해진다. 또한 일상생활에서의 마음챙김은 동적인 상황에서의 주의집중력과 정확한 정보처리를 증가시킨다. 특히 일상생활에서의 마음챙김은, Norman & Shallice (1986)의 주의감독체계 (Supervisory Attentional System; SAS) 모형으로 볼 때, SAS를 강화시키는 과정을 포함한다고도 할 수 있다. SAS는 특정 행위를 수행할 때, 필요한 일련의 하부행위단위들이 다른 하부행위단위들에 간섭당하지 않고 적절하게 연결되도록 해주는 기능을 한다. SAS가 충분히 기능하지 못할 때, 일상생활에서의 여러가지 행위실수 (action slip)가 나타나게 된다고 볼 수 있다. 행위실수에는, 중년의 주부가 공부하는 아들을 위해 밥을 비벼 주다가 다 비비고는 왜 비빈지 모르고 혼자 먹어버리거나 자동차 시동을 끄지 않고 차문을 잠가버리거나 하는 덜 심각한 것에서 부터 공장에서 기계를 잘못 조작하여 사고를 일으키는 심각한 경우까지 여러가지 유형이 있다 (Reason, 1979; Sellen & Norman, 1992). 따라서 위빠싸나 명상은 일상생활에서 여러가지 행위의 실수를 줄이며 나아가 심각한 산업재해를 포함한 업무상의 중대한 실수 등도 감소시키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2. 탈습관화 및 탈자동화: 지금-여기에 깨어있기
 
호흡마음챙김에서의 호흡이나 일상생활 마음챙김에서의 이닦기나 걷기 등과 같은 행위는 변화가 많지 않고 반복적이고 단순한 자극을 제공하기 때문에 주의를 계속적으로 유지하기가 어렵다. 사람을 포함한 유기체는 새롭고 특별한 자극에 대해서는 주의가 가고 (정향반사, orienting reflex) 흥미가 있으면 계속 주의를 유지할 수 있지만, 단순하고 반복적인 자극에 대해서는 처음에는 주의를 줄 수 있으나 곧 관심을 잃어버리고 주의를 주지 않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심리학에서는 습관화 (habituation)라고 한다. 따라서 위빠싸나 명상을 통해서 탈습관화, 즉 습관화의 경향성을 극복하고 항상 지금-여기에 깨어 있는 훈련이 이루어지게 된다. 또한 습관화 경향성의 극복은 위에서 설명한 행위실수를 감소시키는 데도 기여한다.
 
인간의 정보처리를 자동처리 (automatic processing)와 통제처리 (controlled processing)로 나누기도 한다 (Schneider & Shiffrin, 1977; Shiffrin & Schneider, 1977). 자동처리는 연습을 통해 숙달된 처리로서 정신용량을 거의 요구하지 않고, 신속하게 이루어지고, 의식할 수 없으며, 한번 획득되면 변형하기가 어렵고, 적절한 자극만 주어지면 원하지 않아도 즉각적으로 이루어진다. 통제처리는 의도적으로 이루어지고, 의식할 수 있고, 상황에 따라 융통성 있게 사용될 수 있다. 한때는 통제처리로 이루어지던 처리가 연습을 통해 숙달되어 자동처리가 된 것을 자동화라고 한다. 앞에서 인간의 정보처리에서 위-아래로의 처리를 설명했다. 이러한 위-아래로의 처리는 대부분 자동화된 처리이다. 특정 사건, 사물, 사람 등을 접하게 되면 우리는 거의 즉각적으로 나름대로의 인식구조를 동원해 판단을 하게 된다. 이러한 판단은 우리의 선입관이나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어서 종종 오해와 갈등을 일으킨다. 한편 위빠싸나 명상의 수행은 일상생활에서 마음의 작용/현상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는 훈련이다. 어떠한 처리에 대해서도 또렷이 깨어 알아차림 한다. 따라서 위빠싸나 명상에는 탈자동화의 과정이 포함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탈자동화는 인지적 수준에서뿐만 아니라 지각적 수준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 (Deikman, 1966, 1971). Deikman (1966)은 명상에 지각적 자극을 조직하고, 제한하고, 선택하고, 해석하는 심리적 구조의 탈자동화가 포함된다고 한다. 이러한 심리적 구조를 통해 세계를 지각하는데, 이러한 세계는 위에서도 논의한 것처럼 있는 그대로의 세계는 아니며, 게다가 위-아래로의 자동화된 처리로 해서 특정한 면이 부각되거나 다른 면은 축소 또는 무시된 것이다. 따라서 위빠싸나 명상을 포함한 명상의 수행과정에서 세계가 지각적으로 새롭게 경험되기도 하는데 (예, 사물이 더 밝아 보인다거나 신비롭게 보임), 이러한 현상은 명상을 통한 탈자동화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탈습관화 및 탈자동화와 관련된 위빠싸나 명상의 효과로 일상생활에서 항상 새로울 수 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일상생활에서 단순하고 반복적인 일에 대해 더 이상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고 무료해 하거나 안절부절 못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평소에 위빠싸나 명상을 하고 있다면 어떠한 일도 항상 새롭다. 그저 가만히 호흡만 관찰하여도 심심하지 않다. 지금-여기에 기존의 틀을 가지고 위-아래로 처리하지 않고 (혹은 관념으로 대하지 않고) 비판단적으로 마음챙김할 때 매 순간이 새로울 수 있는 것이다. 사람, 사물, 상황 등이 항상 새롭다.
 
참고적으로 조용히 앉아서 호흡마음챙김을 할 때에 초보자들은 시간이 너무 느리게 간다고 느끼며 끝날 때 안되었나 하고 생각하는 경우가 적지 않게 있다. 이것은 지금-여기에 마음챙김 하지 못하고 마음이 미래에 가 있기 때문이다. 시간은 관념이다. 실재는 항상 지금만이 있다. 마음이 과거의 정보처리 결과나 미래의 가능한 정보처리를 다룰 때 시간이 있다. 마음이 지금-여기에 있을 때, 거기 시간은 없고, 따라서 시간이 너무 느리게 간다거나 너무 빠르게 간다는 생각은 일어나지 않는다.
 
 
III.2.2. 심리적 성장 (삶의 질의 향상): 자가상담/자가심리치료
 
위빠싸나 명상은 자기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로 보는 훈련이기도 하므로, 자기자신을 좀더 잘 이해하게 되며, 그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서 여러가지 습관적인 그릇된 사고 및 행동체계로 부터 벗어나게 되어, 심리적으로 성장되게 된다. 자기와 세계 (특히 자신이 대하는 사람들)를 객관적으로 보게 됨으로써 더 이상 무익하게 자신을 괴롭히거나 세계를 자신의 욕망의 대상으로만 보지 않게 된다. 점차적으로 비집착의 삶을 살게 되며, 금강경에서 표현한 '머무른 바 없이 마음을 내라'가 되는 것이다. 집착없이 산다는 것이 무미건조하게 방관적으로 산다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Barbieri (1996, 6)의 비집착 (non-attachment)과 분리 (detachment)의 구분을 인용하는 것이 도움이 되겠다: "비집착은 분리와 혼동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우리의 인생에서 무엇인가로부터 분리되려고 할 때,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냉담하게 떨어져 있게 되고 관계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것을 두려워 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억압하고 그것을 다루고 싶어하지 않는다. 비집착은 우리가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려고 하지 않으면서 일들이 자연스럽게 오고 가도록 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감정이 일어나는 대로 주의를 줌으로써 수용하지만, 그것에 집착하지는 않는다."
 
위빠싸나 명상의 위와같은 특성은 최근에 심리치료의 한 방법인 현실치료 (reality therapy) 내에서 위빠싸나 명상의 마음챙김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움직임을 가져오고 있다 (Barbieri, 1996). 현실치료에서는 삶에서 개인의 통제력과 책임을 중시하는 통제이론 (control theory)에 기반을 두고 있는데, 이러한 통제력의 발휘에서 올바른 선택이 중요하기 때문에 최근에는 선택이론 (choice theory)으로 불리기도 한다. Barbieri (1996)는 이러한 통제이론에 마음챙김이 수용되면 통제이론의 유용성이 증가한다고 본다. 즉, 마음챙김을 통해서 자신의 마음을 비판단적으로 알아차림 함으로써, 공포와 같은 자신의 감정을 억압하지 않고 직면함으로써 갈등을 멈추고 몸과 마음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게 된다. 실생활에서의 작은 예를 들면, 평소 같으면 거의 즉각적으로 분노를 터뜨리는 상황에서 그 상황에 대한 마음의 움직임이 마음챙김 됨으로 해서 필요한 경우에 적절하게 분노를 표현할 수도 있고 혹은 다른 더 나은 반응을 선택할 수도 있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작은 분노의 경우에는 알아차림 즉시 사라져 버리는 경우도 있다.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돌아보면, 종소리에 조건화된 Pavlov의 개처럼, 특정 단서에 대하여 즉각적으로 특정한 생각이나 행동을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우리는 마음챙김을 통해, 더 이상 Pavlov의 조건화된 개처럼 종소리에 즉각적으로 침흘리듯이 반응하지 않고, 행동과 사고에 더 많은 자유를 얻게 된다. 이것을 통제이론으로 표현하면 삶에 있어서 개인의 통제력이 증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위빠싸나 명상을 통해 점차적으로 '나'로부터 자유로워지게 된다고도 할 수 있다. 즉, 좋든 나쁘든 과거의 경험을 통해 형성된 자기의 상 (욕망, 가치관, 기호, 반응양식 등)을 고정시키는 (혹은 화석화시키는) 대신 자신의 가능성을 열어 놓고 지금-여기에 깨어서 생활함으로써 심리적으로 더 성장하게 된다.
 
 
III.2.3. 상담 및 심리치료에서의 효과
 
1. 내담자를 위한 효과
위에서 위빠싸나 명상을 통해 심리적 성장이 가능함을 설명하였다. 이것은 상담 또는 심리치료와도 관련을 갖는다. 과거에는 상담이나 심리치료가 심리적 또는 행동적 어려움을 갖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이었으나, 최근에는 정상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인간적 성장을 도와주는 일도 하고 있다. 이것은 최근의 의학이 질병이 발생한 후에 치료하는 것에서 질병을 예방하는 것을 중시하게 되는 경향과 같은 맥락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상담과 심리치료에서 정상인의 인간적 성장을 도와주는 프로그램이 많이 개발되고 있는데, 그중에 위빠싸나 명상과 같은 명상 프로그램은 자기성장에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위빠싸나 명상의 경우 이끄는 이와 함께 집단상담으로 진행할 수도 있고, 그것에 바탕을 두고 스스로 수행할 수도 있다. 이와같이 위빠싸나 명상을 꾸준히 수행함으로써 점진적으로 자기와 세계에 대한 통찰이 증가하면서, 여러가지 개인적인 문제가 해결되고 인간적으로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위빠싸나 명상은 자기 스스로가 자기자신에 대하여 상담가 혹은 심리치료가가 되어 문제를 해결하고 성장해 가는 것으로 일종의 자가상담 (self-counseling) 혹은 자가심리치료 (self-psychotherapy)라고 할 수 있겠다.
 
위빠싸나 명상은 일반인들의 자기성장을 위한 자가상담 또는 자가심리치료의 효과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나름대로 심리적 또는 행동적 어려움을 가지고 있어서 상담이나 심리치료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되고 있다. 위빠싸나 명상 뿐만 아니라 여러유형의 명상이 상담이나 심리치료와 많은 공통점을 갖는다는 논의는 명상이 서양의 심리학과 정신의학에 알려지면서부터 다루어져 왔다 (예; 김기석, 1978; 윤호균, 1970; 1991; 정창용, 1974; 1984; 1993; Fromm, Suzuki, & De Martino, 1977; Shapiro, 1980). 여러 명상 중에서도 특히 위빠싸나 명상은 여러 상담 혹은 심리치료의 기법들과 관련을 갖는다. 여기서는 위빠싸나 명상을 상담 혹은 심리치료의 대표적인 방법인 정신분석, 인지치료, 및 인본주의치료와 관련해서 논하고자 한다.
 
정신분석에서는 자유연상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의식으로 나오게 하는 기법을 사용한다. 이러한 자유연상과 치료자의 해석의 도움을 통해 내담자는 자신의 무의식적 갈등에 대한 통찰 (insight)을 얻게 되며, 실행 (working through)를 통해 그 갈등을 해결하게 된다. 실행의 과정에서 무의식적 갈등을 여러 장면에서 검토하게 됨으로써 점차적으로 고통스러운 기억과 정서를 더 적은 불안을 가지고 직면할 수 있게 되고 그것들을 좀더 합리적으로 다룰 수 있게 된다. 위빠싸나 명상에서는 지금-여기에 마음챙김 할 때 (특히 조용히 앉아 호흡마음챙김을 할 때) 여러가지 생각들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알아차림하게 되는데, 이러한 알아차림의 과정을 통해 자기자신에 대한 통찰을 얻게 된다. 그러나, 위빠싸나 명상에서는 다른 사람의 도움없이 자기 스스로 통찰을 얻는 점이 다르며, 여러가지 자신의 내면적 특성을 알아차림하며 다시 지금-여기의 마음챙김 대상으로 돌아오는 과정 내에 여러가지 갈등들의 해결과정이 포함된다. 여기에는 체계적 둔감화 (systematic desensitization)의 기제가 작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체계적 둔감화는 공포증과 같이 특정 대상에 대하여 과도한 불안을 보일 때 그 원인을 그 대상과 불안반응의 조건화로 보고 그 연결을 해체하는, 즉 탈조건화 (deconditioning)시키는 방법이다. 구체적으로는 심신을 이완시키는 조건을 만든 후에 점진적으로 공포를 일으키는 대상을 도입함으로써 그 대상에 대하여 더 이상 공포반응을 보이지 않게 한다. 위빠싸나 명상에서 심신이 편안한 상태에 있게 되므로, 이때 나타나는 여러가지 부정적인 기억, 정서, 생각 등은 체계적 둔감화의 과정을 겪게 된다. 이때 부정적인 상념들은 위빠싸나 명상을 수행하며 마음챙김의 힘이 커짐에 따라 그 강도가 약한 것에서 강한 것으로 점진적으로 나타나게 된다.
 
인지치료는 인지행동치료라고도 하는데, 행동의 변화를 위한 학습심리학의 원리를 적용할 뿐만 아니라 인지체계의 변화에도 초점을 둔다. 인지치료에서는 장애적인 행동의 원인을 사람들의 부적절한 인지체계에서 찾는다. 즉, 사람들은 사건 자체보다는 그것에 대한 해석이 부적응적이라서 고통을 당한다고 본다. 따라서 자기자신과 세상에 대한 인지체계에 변화를 가져옴으로써 부적응적인 행동이나 심리적 고통을 치료한다. 이러한 입장은 위빠싸나 명상에서 사람들이 자기와 세계에 대한 올바른 통찰을 얻음으로써 자유로워진다는 입장과 맥을 같이 한다. 그러나, 인지치료에서는 치료자가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내담자가 자신의 부정적인 인지체계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하지만, 위빠싸나 명상에서는 치료자의 도움없이 스스로 통찰을 통해 자신의 인지체계에 변화를 가져온다. 또한 인지치료에서는 특정한 부적응적인 행동이나 심리적 장애에 초점을 두고 그것과 관련된 인지체계만을 변화시키려고 하는데 비하여, 위빠싸나 명상에서는 인지체계 전반에 걸친 변화를 가져온다.
 
인본주의치료에서는 개인의 성장과 자기실현의 타고난 경향성을 중시하며, 정서와 동기 등 자신의 내면에 대한 알아차림을 증가시키고자 한다. 인본주의치료의 대표적인 것으로 Rogers의 내담자중심치료를 들 수 있는데, 여기서는 내담자에게 적극적을 개입하여 해석하여 주거나 지시하지 않고, 내담자의 자신의 내면에 대한 알아차림을 명료하게 하는 것을 도와준다. 치료자는 내담자의 이야기를 들을 때, 나름대로 비판하거나 분석하지 않는다. 단지 내담자에게 공감적인 자세로 경청하며 내담의 내적인 느낌을 좀더 명료하게 하는 것을 도와준다. 이러한 기법은 위빠싸나 명상에서 비판단적으로 자신의 의식경험을 알아차림 하는 것과 유사하다.9) 단지 치료자 없이 혼자 행하는 것이 다르다. 이런 측면에서도 위빠싸나 명상은 자가상담 또는 자가심리치료라고 부를 있을 것이다. 즉, 마치 치료자가 내담자의 이야기를 비판단적으로 경청하듯이 위빠싸나 명상 수행자는 자기의 일부가 자기의 또다른 부분이 하는 이야기 (즉, 의식경험)를 비판단적으로 알아차림 하는 것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비판단적으로 들어주는 치료자를 통해 자신의 문제를 통찰하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게 되는 것처럼, 위빠싸나 명상을 통해 자기자신의 내면을 비판단적으로 마음챙김 함으로써 자신의 문제를 통찰하고 해결하게 되는 것이다.
 
각 상담 또는 심리치료의 기법은 나름 대로의 장점과 단점을 갖는다. 무엇보다도 각 기법은 내담자의 특성에 따라 그 적용의 적합성에 차이가 있을 것이다. 내담자에게 적합한 기법이 적용되지 않으면 그 효과가 적거나 혹은 부작용이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위빠싸나 명상을 포함한 명상 일반에 있어서도 그러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특히 명상을 보통의 정상인이 아닌 특정한 행동적 또는 심리적 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적용할 때는 더욱 주의를 해야 할 것이다. 명상에 있어서 대개의 경우 여러 심리적 또는 행동적 장애에 도움이 된다는 보고가 많지만, 비록 적지만, 일부 연구에서는 명상이 오히려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보고도 있다 (예; French, Schmid, & Ingalls, 1975; Lazarus, 1976; Otis, 1980). 따라서 적어도 명상을 행동적 또는 심리적 장애를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상담이나 심치치료의 방법으로 사용할 때에는 내담자의 특성, 증상의 유형과 정도, 치료목표 등에 따라 적절한 명상의 유형이 결정되어야 할 것이며, 상담가나 심리치료가의 적절한 지도하에 명상이 실시되어야 할 것이다. 혹은 전통적인 상담이나 심리치료에 한부분으로 필요에 따라 적절하게 포함하여 명상을 수행하도록 할 수도 있다.
 
 
2. 상담가/심리치료가를 위한 효과
 
위빠싸나 명상은 내담자를 위해서 뿐만 아니라 상담가나 심리치료가를 위한 훈련으로도 사용될 수 있다. 내담자의 말에 제대로 주의집중하는 것은 대부분의 상담가/심리치료에서 요구되는 능력으로 위빠싸나 명상을 통해 강화될 수 있다. 특히 상담가/심리치료가의 개인적, 문화적, 또는 전문적 선입관을 갖지 않고 내담자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경청하는 능력은 비판단적 알아차림을 하는 위빠싸나 명상을 통하여 훈련될 수 있다. 한마디로 좋은 상담/심리치료를 위해 필수적인 올바른 듣기 훈련이 위빠싸나 명상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III.2.4. 스트레스 관리
 
일상생활 속에서 여러가지로 괴로움을 받는 스트레스를 타개하는 데에도 위빠싸나 명상은 도움이 된다. 특히 현실적으로 도움이 안되는 크고 작은 걱정을 다스리는 데도 위빠싸나 명상은 도움이 된다. 즉, 지금-여기에 마음챙김하는 것이, 지금-여기의 마음챙김의 대상 이외의 다른 사념들이 떠오르면 즉시 알아차리고 돌아오는 것이, 그러한 다스림에 쓸모가 있다. 종종 우리는 이미 다 지나가서 더 이상 어쩌지 못하는 과거의 일을 되씹고 앉아 있거나, 아직 불확실한 미래의 일을 미리 걱정하며 마음을 불행한 상태로 만들고 있다. 할 일을 못하고 있거나 지금-여기서 하는 일에 제대로 몰두하지 못하고 있다. 예를 들어, 식사를 하면서도 혹은 사무를 보면서도 부정적인 사념에 빠져 있다. 이럴 때는 그러한 사념에 빠지기 보다는 지금-여기에서 할 일 혹은 누릴 수 있는 일에 마음챙김하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그리고 적당한 때에 해결해야 할 문제를 직면해서 그 해결을 위한 합리적인 방법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식사를 할 때는 식사에 마음챙김 하여 음식을 먹는 행위와 그에 따른 음식의 맛을 온전하게 경험할 수 있어야 하고, 사무를 볼 때는 사무에 전념해야 할 것이다. 사실 현실적으로 아무런 도움이 안되고 오히려 방해가 되는 부정적 사념이 식사의 향유와 사무의 능률을 훼방할 어떠한 권한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은 스스로도 잘 안다. 문제는 그렇게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마음이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자기 마음을 자기 마음대로 하는 데도 학습이, 훈련이 필요하다. 이러한 훈련은 바로 앞에서 설명한 주의훈련이기도 하다. 따라서 위빠싸나 명상이 바로 그러한 훈련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위빠싸나 명상을 통해 주의를 선택할 수 있는 힘이 생길 뿐만 아니라, 마음을 괴롭히는 생각들을 비판단적으로 바라봄으로써 이들 스스로 물러난다. 마음 속의 생각들은 어떤 것이든 관심을 먹고 자란다고 할 수 있다. 마음 속에 일어나는 사념들을 비판단적인 자세로 떨어져서 바라봄으로써, 이들에게 더 이상 심리적 에너지가 투입되지 않게 되고 따라서 스스로 소멸하게 된다. 원하지 않는 생각을 지우려고 하면 할 수록 그 생각은 더욱 강해진다.10) 없애려고 하는 시도 자체가 없애려는 대상을 마음에 붙들어 두게 하는 것이다. 쫓아 가려고도 하지 않고 쫓아 버리려고도 하지 않고 그저 비판단적으로 바라봄으로써 그 대상에 투여되던 과도한 심리적 에너지는 더 이상 투입되지 않고 그로부터 자유로와지는 것이다.
 
우리들은 일상생활에서 여러가지 것들을 자기자신의 선입관에 따라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평가하며 생활하게 되는데, 특히 자신이 피하고자 하는 것들이 의식이 들어오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부적절하게 심리적 에너지를 사용할 때는 피로, 과도한 긴장, 및 불안정함을 유발하는 것으로 보인다. 마음챙김은 이러한 무익한 싸움을 멈추게 한다. 특히 예리한 마음챙김을 통해 자극과 자극에 대한 반응 (reaction)을 구분함으로써 습관적인 반응이 차단된다. 이러한 구분 그리고 각각에 대한 비판단적인 관찰로 더 이상 그들에게 에너지 공급이 되지 않게 한다.
 
 
IV. 결어
 
본 논문에서는 위빠싸나 명상을 심리학적 관점에서 살펴보았다. 먼저 위빠싸나 명상의 방법을 다루었고, 다음으로 위빠싸나 명상에 따른 효과를 살펴보았다. 위빠싸나 명상의 효과는 그 방법과 관련지어 설명하였다. 그 과정에서 위빠싸나 명상의 방법과 효과 간의 관계를 심리학적으로 고찰하였다. 특히 위빠싸나 명상의 효과를 다룸에 있어서는, 위빠싸나 명상을 주로 수행하는 불교에서 전통적으로 추구하고 설명하는 효과 (전통적인 효과)를 다루었을 뿐만 아니라, 현대적 의미에서 위빠싸나 명상이 주는 효과 (응용적 효과)를 다루었다.
 
그러나, 본 논문에서 다룬 위빠싸나 명상의 효과는 몇가지 점에서 제한점이 있다. 첫째, 전통적인 효과에서는 위빠싸나 명상에서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목표 혹은 효과에 대해서는 다루었지만, 위빠싸나 명상을 체계적이고 집약적으로 전통적으로 수행하는 과정에서 거치게 되는 다양한 경험과 수행의 단계에 대해서는 거의 다루지 못하였다. 이러한 경험과 수행의 단계에 대해서는 4-5세기에 인도와 세일론에 생존했던 Buddhaghosa (1976)가 지은 Visuddhimagga (淸淨道論)에서 자세히 기술되고 있다. 이러한 경험과 수행의 단계에 대한 현대적 연구가 요망된다고 하겠다.
 
둘째, 응용적인 효과에서는 위빠싸나 명상을 통해서 나타나는 신체적 변화는 다뤄지지 않았고, 주로 심리적 변화에 초점을 두었으며, 정보처리적 관점에서 다루었다. 그간의 명상연구가 주로 신체적 변화를 중점적으로 다루었기 때문에 본 논문에서는 심리적인 변화에 좀더 무게를 두었었다. 심리적 변화와 신체적 변화가 독립적이지만은 않으므로, 함께 다루어질 때 위빠싸나 명상의 효과를 좀더 통합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예를 들면, 심리적 변화의 경우에도 정보처리적 관점이외에 신경생리적 접근을 함께 도입한다면, 심리적 변화에 상당하는 신경생리적 변화를 함께 다룰 수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끝으로 아직 위빠싸나 명상의 수행이 일천하여 체험도 충분하지 못한데 여러가지 앞선 논의를 한 것 같아 부끄러운 마음이 앞선다. 명상에서 추구하는 것이 체험적인 앎이므로, 명상을 연구하는 사람으로서는 과학적인 접근을 통해 객관적인 앎이 증진될 뿐만 아니라 수행을 통해 체험적인 앎이 함께 열려가는 것이 바람직 할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의 논의를 스스로 학문을 하고 수행을 하는데 있어서 강을 건너는데 쓰는 뗏목처럼 삼고자 한다.
 
 


1) 요즘말로 하면 마음의 작용/현상에 대한 모니터링 (monitoring)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모니터링이 비사변적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다.
2) 마음챙김의 관찰에서 '관찰자' 또는 '보는자'를 상정할 필요는 없다. 그보다는 마음의 특정한 작용/현상을 마음의 또다른 부분이 관찰한다고 하면 될 것이다. 단, 그 관찰은 비판단적인 관찰이다. 보는자, 관찰자 라는 표현이 때로는 괜찮을 수도 있으나, 혼란을 일으킬 수도 있다. 자칫 특정한 개성을 갖는 또 다른 인격적 존재를 상정할 수 있는데, 이는 바른 마음챙김의 방법이라고 볼 수 없다. 마음챙김의 자리는 어떠한 인격적 특성이 붙지 않으며, 어떠한 내용도 갖지 않는 순수의식의 자리하고 해야 할 것이다. 마음챙김은 마음의 작용/현상을 비판단적으로 관찰하고자 하는 마음갖춤새라고 할 수 있으며, 이러한 마음갖춤새에 따라 여러 마음의 작용/현상을 있는 그대로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3) 참고적으로 마음챙김에 해당하는 빠알리어 원어인 'sati'에 대한 한역은 '염 (念)'인데, 그 글자가 지금을 뜻하는 글자 (今)와 마음을 뜻하는 글자 (心)를 합성한 것이라는 점이 시사적이다.
4) 여기서 우리는 주의집중이 알아차림 혹은 비사변적 관찰과는 구분될 수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물론 알아차림을 위해서는 주의집중이 긴요하다. 지금-여기의 마음현상에 주의집중 할 수 없다면, 알아차림도 없다. 이러한 측면에서 김정호 (1995)는 마음집중과 마음챙김의 관계를 '마음챙김 = 마음집중 + 순수관찰' 이라고 도식적으로 표현하였다.
5) 다른 사물에 있어서도 무아를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우리 눈에는 명확하게 구분되어 보이는 삼라만상이 실제로는 개개의 실체를 갖지 않으며, 단지 생멸하는 요소들의 합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6) '없다'는 표현보다도 '비어있다'는 용어를 사용하는 이유는 이렇다. '나'라고 불릴만한 영속적이고 개별적인 놈은 없으나, '나'라고 불릴 만한 현상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나'의 자리가 비었다고 하는 것이 좀더 바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역설적이게도 '나'가 비어있기 때문에 모든 존재가 '나'라는 주장도 나오는 것이다. 붓다다사는 상주론 (常住論; 완전하고 영원한 존재에 대한 믿음)과 단멸론 (斷滅論; 어떤 것도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의 중간이 올바른 불교라고 하며, 무는 단멸론으로 자아가 없다는 것이고 공은 불교의 입장으로 자아가 없이 존재한다는 것이라고 하였다 (Buddhadasa, 1993, 79). 그러나, 이부분의 설명에는 언어적 표현의 한계가 많이 나타난다고 해야겠다. 실제적인 체험이 매우 절실히 요구되는 부분이다. 참고적으로 이와 관련해서 불가에서는 진공묘유 (眞空妙有)라는 표현이 있다.
7) 이렇게 볼 때, 우리의 인식과 독립적인 세계를 상정할 수는 있어도, 그것에 대해 한마디라도 언급한다며, 이미 그 세계는 우리의 인식이 개입한 세계이다. 결국 존재와 인식의 문제가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동양의 불교나 도교의 가르침에 잘 나타나 있으며, Kant의 인식론의 기초와도 상통한다. 현대에도 철학과 심리학의 구성주의 (contructivism)에서 이러한 주장을 발견할 수 있다 (김정호, 1995a).
8) 이러한 설명은 명상이 인지적 해석의 억제를 가져온다는 주장 (Naranjo & Ornstein, 1971)과 상통한다. 참고적으로 과거로부터 도를 닦는다는 것은 새로 얻는 공부가 아니고 버리는 공부라고 하였다.
9) 참고적으로 이러한 비판단적인 관찰은 Husserl의 현상학에서 언급하는 판단중지와 관련이 많은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판단중지라는 것도 여러가지 선입견이나 인위적 가설로 부터 벗어나는 것을 말하며, 그럼으로써 순수의식을 통해 본질에 대한 직관을 하게 된다고 본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다루지 못하지만, Husserl의 현상학과 위빠싸나 명상의 마음챙김을 비교하는 것은 흥미로울 수 있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비교와 관련해서 설기문과 김기주 (1996)를 참고하면 좋겠다. 이 연구는 위빠싸나 명상과 관련이 있는 선 (禪)과 Husserl의 현상학에 대해 비교하며 상담과의 과련을 논하고 있다.
10) 이러한 현상을 Wegner 등은 정신통제의 역설이라고 부르고 있다 (Wegner, 1994; Wegner, Erber, & Zanakos,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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