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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행복, GIO만족을 성취해나가는 그 과정 자체에서 얻는 만족적 느낌    
  글쓴이 : 정강길 날 짜 : 08-06-19 08:16 조회(5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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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GIO만족을 성취해나가는 그 과정 자체에서 얻는 만족적 느낌
 
 

"국가가 교회이고 교회가 국민인 어떤 나라를 꿈꾼다. 셋이 하나고 하나가 셋이다. 그 나라는 일이 놀이고 놀이가 생활인 국가, 곧 셋이 하나고 하나가 셋이다. 그 나라는 성직자가 예배자이고 예배자가 예배를 받는 성전이다. 그 나라는 모든 생명이 인간적이고 모든 인간이 신적인 신격(godhead), 즉 셋이 하나고 하나가 셋이다. 요컨대 그것은 미친 사람의 꿈인 셈이다"
- 버나드 쇼, John Bull's Other Island 中에서
 
 

들어가며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은 행복을 추구하면서 살아가고자 한다. 그렇다면 그 행복이란 과연 무엇일까? 물론 지금까지 행복에 대한 많은 정의들이 있어왔겠지만, 생각건대 적어도 행복의 상태에는 그 어떤 충돌이나 마찰이 없는 온전한 만족의 상태일 것이라 생각된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모든 존재는 과정적이고 관계적인 존재다. 모든 존재는 필연적으로 그러하다. 따라서 나는 존재를 관계적이고 과정적으로 보는 맥락의 두 차원에서 행복이 무엇인가에 대해 논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것은 궁극적으로 GIO만족에 놓여 있을 때에 자기만족을 넘어선 진정한 행복을 맛볼 수 있다고 본다. 이때의 GIO란 신(God)과 나(I)와 타자(Others)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행복은 내 몸의 리듬과 매우 밀접한 관련을 지닌다. 우리의 몸은 리듬을 지녔기에 매너리즘을 싫어한다. 우주는 창조적 전진의 리듬의 놓여 있다. 따라서 행복은 존재의 창조적인 리드미컬한 그 과정 자체에서 맛보는 느낌이라고 본다. 이에 대해서도 보다 구체적으로 알아보고자 한다.
 
관계체로서의 존재와 'GIO만족'

우리가 관계적 지평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결국 한 사람의 온전한 행복 추구란 것은 사실상 전체 모든 존재의 행복과도 함께 결부되어 있다는 사태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을 것으로 본다. 결국은 관계적 지평에서 얽혀 있기 때문에 나와 너가 아무런 관련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상 우리 삶의 현실은 결코 그렇지 않은 것이다. 요즘의 사회적 이슈를 떠올려 볼 경우에도 태평양 건너의 저 아메리카 소와 대한민국의 내가 무슨 관련이 있을까를 생각해본다면 쉽게 납득이 갈 것으로 본다. 우리 모두는 더불어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모든 존재의 목적의 충돌이 없는 상태를 꿈꾼다고 할 경우, 모든 존재들이 서로 충돌나지 않게 합의 가능할 수 있는 최상의 그림을 한 번 꿈꾸어 본다. 이른바 상생의 나라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나는 이를 GIO-satisfaction이라고 부른다.
 
이기적 유전자를 가진 것으로 보이는 시간적인 현실 존재들은 기본적으로 다음과 같은 3중의 충동을 가진다. 그것은 바로 "1) 산다(to live) 2) 잘 산다(to live well) 3) 더 잘 산다(to live better)"이다(FR 8/49).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첫 번째는 생존하는 것이며, 두 번째는 만족스러운 방식으로 사는 것이며, 세 번째는 그러한 만족의 증가를 획득하는 것이다(FR 8/49). 이것이 바로 시간적인 현실 존재들의 특성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란 모든 존재의 목적들이 서로 충돌하지 않는 가장 최적화된 사태를 얘기한다. 은 말그대로 신(God)과 나(I)와 타자들(Others) 모두가 합의 가능할 수 있는 최상의 상생적 사태를 가리키고 있다. 화이트헤드의 말하는 유기체적 세계관도 GIO 만족으로 향하는 과정상의 진화론적 세계관이다.
 
모든 존재는 기본적으로 에 놓여 있다. <실재>reality하는 존재란 결국 <관계체>relational entity로서의 존재인 것이다. 그럴 경우 우주와 맺는 모든 관계들 자체가 내 <몸>Mom에 해당한다. 사실상 <실재>의 세계로 들어가면 <나>와 <나 아닌 것들>과의 분명한 경계를 지을 수도 없고 확정할 수도 없다. 윌버의 표현대로 그야말로 <무경계>No Boundary인 것이다. 당연히 이는 존재 자체가 이미 근원적으로 분리할 수 없는 관계적 사태에 놓여 있기 때문인데, 이때 나(I)라는 존재는 신(God)과 타자들(Others)을 자기화하고 있는 과정적 존재에 해당한다. 마찬가지로 타자들(Others)이란 나(I)와 신(God)을 여건으로 하여 각각 자기화하고 있는 존재들인 것이다. 그리고 신(God)이라는 존재는 나(I)와 타자들(Others)이라는 현실 세계를 영속적인 관계 대상으로 삼고서 나아가는 영원자에 해당한다.
 
참고로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신은 기존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을 떠올리기보다 불완전한 세계의 극복을 위한 이상적 비전으로서의 신을 떠올려도 좋겠다. 그것은 동양에서 말하는 도(道)가 될 수도 있고 유교에서 말하는 태극(太極)이 될 수도 있으며,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과 열반의 성취 상태일 수도 있다. 여하튼 이 세계 안에는 없는 것으로서 거기에는 모든 존재들의 자리가 가장 최적화된 상태에서 자리 매김된 궁극적인 이상적 사태의 영역을 의미한다. 따라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신 개념은 기존의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 개념을 떠올리면 곤란하다.  
 
이러한 GIO만족은 두 가지의 상태에 놓여 있다. 하나는 이미 개념적으로는 성취된 경우이며, 다른 하나는 물리적으로는 아직 성취되지 않은 상태를 얘기한다. 우리는 이 두 가지 긴장 위에 놓여 있는 것이다. 즉, 이상과 현실 사이에 놓여 있다는 얘기다.

그런데 이러한 이상 없이 살아가는 현실이라고 할 경우 그 현실은 얼마나 삭막한 현실이겠는가. 어찌되었든 사람들은 저마다 각자가 목표하는 바를 자신의 이상으로 삼고서 이를 성취하는 데서 그 각별한 재미와 행복을 느끼며 사는 현실이다. 그것이 설령 불가능한 이상이라고 하더라도 어찌되었든 현실을 추동하는 것은 이상인 것이다. 이때 GIO만족은 결국 많은 저마다의 사람들의 목적들이 서로 충돌나지 않는 최적화의 사태이기에 어떤 면에서 그것은 우리 삶의 기준점 같은 것으로 삼을 수 있다고 본다.
 
행복의 시작은 GIO만족을 아는 깨달음에서 시작한다

나는 바로 GIO만족이라는 상생의 사태를 삶의 궁극적인 목적으로 두지 않을 경우 그것은 언제든지 자신의 이기적인 삶 속에 또다시 손쉽게 휩싸이게 될 것이라고 본다. 따라서 모든 존재들이 서로 더불어 상생할 수 있는 그 이상적 그림을 떠올리는 것은 언제나 중요하며 그러한 현묘한 도를 품고서 살아가는 삶이 1차적으로 의미가 있는 삶이라고 본다.
 
만에 하나 GIO만족이라는 이상적 비전이 아예 없다고 할 경우에는 그야말로 우리는 삶에 대한 아무런 기준을 가질 수도 없으며 그럼으로써 질서를 확보하기도 매우 힘들 것이다. 그저 우리는 아무렇게나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GIO만족이라는 것은 사실상 우리 삶의 기준점 같은 것이며, 은 온전한 행복으로 감에 있어서의 초석이다. 알고 보면 <깨달음>이란 것도 GIO만족에 대한 개념적 성취를 의미하고 있다. 
 
흔히 수행을 하는 사람들에 있어서 조심해야 할 점 하나는, 오늘날 깨달음을 말하는 많은 종교인들이나 도인들이 숱하게 깨달음을 강조하고 부르짖기도 하지만 만일 <깨달음>에 타자(Others)라는 이웃이 빠져 있다면, 그것은 관념적인 깨달음이요, 자기만족 경향의 아편의 역할만 한다는 점을 분명하게 잊어선 안된다. 예를 들어 기존 기독교가 말하는 종교 신앙이 그러하다. 그것은 신과 나의 관련성만을 강조하고 있기에 다분히 개인구원적이다. 기존의 보수적인 불교가 말하는 깨달음에도 마음수련을 다룸에 있어 개인주의적인 경향 역시 있는 것으로 안다. 
 
대체로 깨달음은 궁극적인 이상과 나 개인과의 관련성만을 강조하는 데 진정한 깨달음이라면 그것은 결코 그럴 수 없다. 이미 존재 자체가 현실적 관계적 지평에 놓여 있기에 그것은 결코 자기만족적 성향으로 나아갈 수 없는 것이다. 깨달음이라는 내 안의 미시적 해방사건은 분명하게도 신(혹은 이상적 비전)과 그리고 나 자신과 타자(이웃)이라는 3자적 관계에 대한 온전한 성취를 내포하고 있다. 진정한 깨달음은 이 세 가지 중에 어느 하나라도 배제되지 않는다. 깨달음은 바로 에 대한 눈뜸인 것이다.
 
욕망이나 집착 자체를 버려야 할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욕망이나 집착도 GIO만족의 맥락에 놓여 있느냐 아니냐가 더욱 중요

 
이때 흔히 우리는 모든 욕망과 집착들도 사실 버려야 할 것이라고 얘기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의 욕망과 집착 같은 것들도 궁극적으로는 GIO만족으로 향해 있는 욕망과 집착이라면 충분히 의미가 있을 수 있다. 왜냐하면 욕망이나 집착 자체가 나쁜 것이라기보다 실은 내가 무엇을 욕망하고 집착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심지어 사람을 죽이고 싶은 욕망조차도 GIO만족의 맥락에 놓여 있을 경우 그 색조가 상당히 달라지게 된다. 예를 들면 우리는 안중근 의사가 이토오 히로부미를 죽인 것을 두고 살인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히틀러 암살을 우리는 살인이라고 일컫지 않는다. 얼핏 같은 살인인 것 같지만 여기에는 뭔가가 다른 맥락의 차원에 놓여 있음 역시 인지되고 있기에 함부로 살인죄라는 딱지를 붙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추구하는 모든 일들이나 욕망들이나 집착들도 궁극적으로는 GIO만족의 맥락에 놓여 있는지를 살펴보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그만큼이나 GIO만족은 행복으로 나아가는 데 있어서의 초석인 것이다.
 
존재는 언제나 그 어떤 선택을 하면서 그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해가고 있다. 그러한 선택은 그 어떤 욕망에 대한 선택이다. 욕망이 없는 선택이란 있을 수 없다. 그 어떤 순간의 선택이든 그것은 그 선택 자체를 추구하고 있는 욕망의 발현인 것이다. 이때 우리가 매순간 맞닥뜨리는 선택지들에 있어 가장 최선의 선택지로 나아가고자 할 경우 GIO만족을 언제나 염두에 두는 선택과 판단을 내리면서 살아감이 현명한 것이라고 하겠다.
 
몸(Mom) 수련에 따라 GIO만족에 대한 분별력 비례
 
그렇다면 우리는 GIO만족을 어떻게 지향할 수 있으며, 어떠한 나의 욕망적 선택이 GIO만족에 놓여 있는지 없는지를 알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GIO만족에 대한 분별은 사실상 내(I)가 타자(Others)를 이해하고 알아가는 것만큼 비례한다. 즉, GI의 관계 발달은 현실적으로 IO의 관계 발달에 비례한다는 것이다.
 
나(I)와 신(God)과의 관계는 곧바로 나(I)와 타자(Others)와의 관계와 결부되어 있다. 왜냐하면 나(I)라는 존재 자체가 다수 타자에 대한 자기화 과정으로서의 관계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모든 존재는 각기 자신이 처한 자리의 입각점들이 다르기 때문에 GIO만족에 대한 분별 내용들도 결코 똑같거나 한결같지 않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통전적인 몸(Mom) 수련이 필요한 것이다. 즉, 깨달은 만큼만 보인다는 얘기처럼, 몸 수련하는 만큼 GIO만족의 맥락이 보이는 것이다. 나 자신은 이를 위한 통전적인 몸(Mom) 수행 프로그램이 있음을 첨부해두는 바이다.
 
발달 진화의 과정에서 만나는 삶의 도전들
 
존재는 항상 하위차원의 대비들을 넘어서 상위 차원으로 도약할 발전 및 진화를 꿈꾼다. 그러한 진화의 최종 지점이 바로 GIO만족인 것이다(그림1 참조).

 
 [그림1] 에서의 발달 및 진화
 
 
이러한 발달 및 진화에 있어 각 단계마다 언제나 장애물들이 있을 수 있다. 우리의 인생에 어둡고 절망적인 상황들이 찾아오듯이 말이다. 그것은 곧 그 사람에게 주어진 과제 같은 것이다. 우리는 바로 현실 세계의 삶이 주고 있는 이 과제를 풀기 위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 이 도전은 사실상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다. 피하고 싶다고 해서 피해지는 것이 결코 아니다. 삶 자체가 이러한 도전들의 연속이다. 흔히 우리는 이 도전을 고통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사실상 고통이나 고난은 도전의 다른 말일 따름이다. 우리가 고통이나 장애를 삶의 도약을 향한 도전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우리는 언제나 커다란 체념과 불행의 늪에서만 허우적거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고통을 삶의 피드백으로 삼아라는 것은 바로 고통과 장애를 더 큰 삶을 위한 도전으로 받아들여라 라는 의미와 크게 다르지 않은 말이다. 
 
아마도 가장 큰 고통은 죽음 같은 시간이 주는 소멸일 것이지만, 그런 면에서 종교란 것은 결국 인간의 한계와 유한성에 대한 자각인 동시에 이러한 인간의 한계와 유한성을 새롭게 극복해보고자 하는 참신한 도전이기도 하다.
 
이때 이러한 삶의 도전에 직면했을 때 우리는 이를 뛰어넘어야만 하는 과제를 부여받게 된다. 어찌되었든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잖은가. 자기 한계를 넘어 자기 초월로 나아가는 정신이야말로 진취적인 도전 정신일 것이다. 꾸준히 자기 한계를 뛰어넘는 자기 능력들을 배양할 필요가 있겠다. 삶의 난관이 없는 삶의 행보는 매우 밋밋하며 역으로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한다. 그런 점에서 행복이란 감정에는 사실상 쓰디쓴 고통에 대한 느낌도 함께 녹아 있는 감각인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도전 정신을 갖고 삶의 어려운 난관들을 하나씩하나씩 풀어나가는 성취감에서 행복을 맛본다. 긍정심리학의 <몰입>에도 나와 있지만 진정한 행복은 그 어떤 도전에 대한 극복이 주는 재미이다(어떤 면에서 긍정심리학이 말하는 긍정은 부정성을 거친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는 <초긍정>에 대한 심리학이 아닐까 싶다. 그저 부정성이 배제된 긍정이라면 그것은 유아적인 단계에 있는 낙관론으서의 긍정일 뿐이다. 그것은 금방 쓰러지기에 딱 좋다고 하겠다). 이러한 삶의 어려운 도전, 숙제, 문제를 풀고 난 뒤에 오는 성취감은 짜릿한 흥분과 희열을 주기도 한다. 삶의 도전과 어려운 난관을 해결한 뒤에는 꿀맛 같은 휴식의 과정이 있을 것이다. 그 역시 행복의 과정이다.
 
행복은 전진해나가는 삶의 과정의 리듬 속에 있다.
 
따라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행복의 실체는 다음과 같다. 먼저는 나 개인의 만족이 아닌 GIO만족을 깨닫고서 내가 살아가는 그 모든 관계들에서 의미를 찾는 것이다. GIO만족을 향하여 한 발짝 한 발짝 전진해나가는 삶을 살고자 할 때, 이때 부딪히는 삶의 난관들이 있을 것이다. 그 난관이 버겁고 힘겹게 되면 고통이 될 것이며, 그것을 삶의 여정 속에서 맞닥뜨리는 내 삶의 숙제요 도전이라고 여긴다면 바야흐로 행복이 형성되는 전초전이 마련되는 것이다. 그리고는 그 문제를 해결하고자 몰입하면서 삶의 힘든 난관을 진취적으로 극복할 경우 바로 그 맛에 삶을 살아가는 행복감을 느낄 수 있으리라 본다.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그 과정 자체에 참된 기쁨과 진정한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문제를 해결하였다면 한동안은 꿀맛 같은 휴식을 누릴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시간이 계속 되는 것 역시 삶의 매너리즘과 피로에 빠질 수 있기에 진정으로 행복한 삶은 언제나 진취적이고 도전적인 자극들이 꼭 있어야만 한다. 이때 그 다음에 찾아오는 도전 과제에서는 이전의 극복과정에서 좀더 배양된 능력으로 인해 좀더 자신감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이전보다는 좀더 어려운 난관을 극복하는 상황에 직면해서 이를 해결할 경우 그 성취감 역시 비례하여 이전보다 더 커지게 될 것이다.
 
즉, GIO만족으로 가는 여정에 있어 고난과의 조우→몰입적 극복→성취감의 향유로서의 휴식→좀더 크거나 다른 형태의 고난과의 조우→또 다시 몰입적 극복→또 다시 성취감의 향유로서의 휴식 이라는 식으로 우리는 여기서 일정한 리듬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고통의 도전→몰입적 해결→휴식→(또 다른 양상의) 고통의 도전→…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도전→해결→휴식→새도전이라는 삶의 리듬적 패턴을 느낄 수 있으리라 본다. 행복은 바로 이러한 과정, 즉 도전에서 해결로의 과정, 혹은 고난에서 성취로의 과정 그 자체에 배여 있는 균형어린 대비(contrast)에 대한 느낌이다. 바로 이러한 과정의 리듬을 유지하는 것이 지속가능한 행복의 비결인 셈이다.
 
나오며
 
나는 행복의 성취가 결국 GIO만족을 향한 몸 수행 과정에서 이를 하나씩 하나씩 극복해나가고 체득해나가는 데서 얻는 재미와 즐거움이라고도 생각된다. 이것은 공자가 공부하는 재미, 혹은 공부하는 즐거움을 얘기할 때의 바로 그 느낌이 아닐까 싶다. 누구에게는 어려운 공부가 끔찍스런 고통으로 다가오는데도 말이다.
 
우리의 삶의 여정에 어려운 과제가 주어지고 고통이 발생했을 때 우리는 이를 극복해나가는 과정에서 저마다의 드라마를 쓰게 된다. 드라마의 주인공에 역경과 시련의 시기가 없다면 정말 그 드라마는 참으로 재미없듯이, 마찬가지로 행복 역시 고난의 과정에 들어설 때 행복 형성의 전초전이 마련되는 것이라 여겨진다. 행복이란 힘든 시련과 난관을 통해서 내가 내 자신의 한계를 분명하게 직면하고 동시에 이러한 어려움을 내가 잘 극복해가고 있다는 것에 대한 자각적 인식에서 오는 희열감 같은 것이다. 
 
그리고 창조적 전진의 리듬은 고통극복, 고난해결 후의 성취감을 향유하는 휴식만을 바라지 않는다. 다시 또 새로운 도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행복은 바로 이러한 리듬의 과정에 녹아 있다. 그러한 과정은 그 자체로 살아가는 보람, 즉 삶의 의미를 더욱 강화해준다.
 
어려움과 슬픔이 벅찬 삶이란 당연히 불행한 삶일테지만, 어려움과 슬픔이 없는 삶 역시 따분하며 매너리즘에 빠지기 쉬운 삶이잖은가. 따라서 그 역시 천국이라고 말하기 힘들다. 천국이란 결국은 이러한 힘든 현실의 세상을 어쩌면 저 실현 불가능한 이상적 세계와 견주어 끊임없이 새로움을 성취하려는 리드미컬한 그 과정 자체에 놓여 있다고 볼 수 있겠다.
 
삭막하고 답답한 우리네 삶의 현실은 어느 미친 사람의 꿈에 의해 다시금 들끓게 되고 추동하게 된다. 불가능한 이상적 비전은 분명히 어느 미친 사람의 헛소리일 수 있다. 궁극적인 GIO만족은 영원한 이상이자 희망일 뿐이니까. 하지만 행복은 어떤 면에서 그러한 불가능에 대한 도전으로부터 마련되고 있다. 왜냐하면 현실에서 천국을 창조하려는 그 시도와 모험 자체가 보람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바로 그 지점에서 볼 때 GIO만족은 사실상 저 멀리 있다기보다 실은 이미 우리 가운데 내재해있으면서 우리 자신들을 끊임없이 추동해나가고 있는 것이다. 삶의 행복은 삶의 파도와 함께 넘고 있음에, 그리고 그러한 삶의 굴곡과 파도를 넘는 그 리듬 속에 함께 녹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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