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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감정의 장난(1) - 가슴형 인간의 위험성과 통합성    
  글쓴이 : 정강길 날 짜 : 08-11-04 09:41 조회(7135)
   트랙백 주소 : http://freeview.org/bbs/tb.php/e005/45 




감정의 장난, 가슴형 인간과 머리형 인간
 

사람은 감정의 영향을 매우 잘 받는다.
이미 사람 자체가 감정적 동물이다.

심리학에서는 감정을 중요시 여긴다.
왜냐하면 의식은 이성과 연계되고
무의식은 감정과 연계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어떤 사람이 감정을 표출하고 있는 경우란
바로 그 사람 자신의 무의식을 드러내고 있는 때다.

옳다/그르다는 이성의 차원에서 주로 얘기되지만
감정의 차원에서는 주로 좋다/싫다가 얘기된다.

이때 우리는 흔히 이런 말을 잘 쓴다.

A. 나는 너가 좋아. 좋은데 무슨 이유가 필요해
B. 나는 너가 싫어. 싫은데 무슨 이유가 필요해

그런데 곰곰히 따지고 보면 이유와 원인이 없는 것이 아니다.
단지 감정은 무의식적 차원인지라
이를 의식적 차원에선 잘 명료하게 인지하지 못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냥 감정에만 충실한 것이다.

그럴 경우 위에서 A의 경우는 좋은 게 좋은 거니까 묻어갈 수 있지만
B의 경우는 사실상 감정이 저지르고 있는 폭력이다.
(*그런데 A의 좋은 감정도 사회적 관계에서 끼리끼리가 충돌할 경우는
 매우 위험할 수 있다. 이를 테면 삼각관계 같은 것도 이에 해당된다..)

이유 없이 싫다는 것이야말로 상대방을 정말로 황당하게 만드는 것이다.
바로 그래서 이성적 차원의 설명과 해명이 필요한 것이다.

히틀러가 유대인은 이유 없이 싫다고 말했을 때의 그 끔찍함을 떠올려보라.
그 유대인들은 이유 없이 히틀러의 '싫음'을 당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적 관계에서의 감정 표출에는 이유가 주로 달리지 않는 경우들도 있지만
사회적 공공의 차원에서 저질러지는 감정 표출의 경우는 이유가 달려있기도 한다.
그것을 우리는 흔히 <명분>이라고도 부른다.

이를 테면 권력 투쟁의 경우
그 어떤 왕이 자기가 싫어하는 귀족을 내친다고 할 경우
그 어떤 명분이 달리지 않으면 자기 행위가 정당화가 되기 힘들기에
어떻게 해서든지 그 어떤 명분을 내세워서 자기가 싫어하는 사람을 내치려고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인류의 역사는
감정을 주요 기제로 삼는 사람들과
가능하면 지성적인 이성에 호소하는 사람들과의
대립 및 상호 교호적인 역사라고 말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다.
 
트랜스퍼스널 심리학계의 분류에 따르면 
인류의 전체 7-80%는 거의 감정형 인간이다.
반면에 머리형 인간인 지성인은 2-30%에 지나지 않는다.

이때 가장 극소수에 속하는 가장 이상적인 차원이 있다(많아야 2% 적으면 0.2% 정도).
가장 이상적인 차원은 이성에 기반한 감정 즉, 이성과 감성이 서로 통합될 때다.
이성 및 지성의 차원은 매우 건조하고 메마를 수 있다.
반면에 감정의 차원은 변덕이 심하지만 그래도 여기에는 매우 풍부한 느낌들이 잔존한다.

위대한 영성가들이나 예술가들은 바로 이 두 가지 차원이 통합된 사람이다.
영성은 바로 이러한 통합의 차원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감성이 풍부한 가슴형 인간을 좋게 보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어떤 면에서 매우 위험스러운 점도 있다.
왜냐하면 가슴형 인간에는 두 가지 차원이 있기 때문이다.

그냥 사물에 대한 느낌들을 곧잘 가져오는 감정만 풍부한 가슴형 인간이 있는가 하면
차가운 머리의 이성을 거쳐서 다시 가슴에서 뜨겁게 소화하는 가슴형 인간이 잇다.
즉, 후자는 머리를 거쳐서 나온 가슴이기에 통합된 차원인 것이다.
타자에 대한 위험한 폭력이 될 수 있는 경우란 바로 전자의 경우다.

요약하자면 우리 앞에는
1 가슴 - 2 머리 - 3 가슴 세 가지 차원의 단계가 있는데
여기서 1번과 3번은 똑같은 가슴으로 보일지언정 똑같지 않다.
왜냐하면 3번의 경우는 적어도 2번을 거쳐서 나온 가슴이기 때문이다.

이때 우리가 흔히 <1번 가슴형 인간>과 <3번 가슴형 인간>을 혼동하는 오류를 가리켜
켄 윌버가 말했던 바로 그 유명한 개념인 <전초 오류>pre-trans fallacy 라는 것이다.

감정이 메마른 사람들을 포함해서 우리가 <가슴형 인간>이 되고 싶다고 하더라도
분명하게 말씀드리지만, 머리를 거쳐서 나온 <3번 가슴형 인간>을 추구함이 가장 온전한 것이다.
개인적으로도 부족한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기도 하다.

만일 그렇지 않을 경우 그저 감정의 장난에만 휘둘리는 <1번 가슴형 인간>은 
감정 충실을 따른다는 것이 그야말로
감정이 저지르고 있는 몸의 반응에 아몌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는지라
오히려 자기가 처한 전체를 고려하지 않음으로서
은연 중에라도 종종 상대에 대한 폭력적 자세로도 나타날 수 있는 위험성을 지닌다.
이것은 분명하게 극복되어야 할 지점인 것이다.

감정에 충실하다는 것은 그리 좋은 것만은 아니다.
그렇다고 감정을 억압한다는 것 역시 그리 좋은 것이 못된다.
자기 감정을 자각할 줄 알면서 느낀 그 감정들을
차가운 이성에 의해 조율시켜 다시금 가슴으로 뜨겁게 표출시킬 줄 아는 것
바로 이것이 가장 건강한 일상을 사는 사람의 모습인 것이다.
 
 
[관련글] "좋다/싫다"와 "옳다/틀렸다"의 표현들, 어떻게 볼 것인가 : 감성과 이성의 문제 
 
 
정관 (08-11-04 15:11)
 
지성의 장난도 장난아니죠. 감정의 장난이야 그때는 금방 몰랐어도 자신도 알게되고 남도 알게 되지만, 지성의 장난은
본인도 잘못알고 있다가 죽기도 하고 오랜 세월이 지나서도 모르는 경우가 있잖아요?  히틀러가 유태인을 싫어했던 이유가
어릴적 경험때문이라 얘길 하지만 히틀러도 잘못된 영의 지도를 받아서 그렇지 처음에는 신비주의자 였는데, 유태인들이
여호와 신을 자기들 민족신으로 만든 것에 아주 분노했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히틀러 같은 적그리스도야 금방눈에 띄지만,지성적으로 잘 단련된 적그리스도는 알아볼 재간이 없죠. 그래서 영성에서는
감성을 초월하고,지성을 초월하고,영성을 초월하라고 합니다.  어둔밤을 지나라 합니다.

은혜의 감정이나 지적 만족이나 영적인 희열도 초월을 향하는 데는 장애가 된다는 얘기입니다.

    
미선이 (08-11-04 17:41)
 
제가 보기엔 거꾸로 말하셨는데, 모르고 넘어가는 경우들이라면
오히려 지성의 경우보다 감정의 발현에서 더욱 빈번하게 많습니다.
이미 심리학계에서도 그렇게 얘기하고 있구요. 또한 지성은 그래도 오류로 판명될 경우
분명하게 판정이 가능할 수 있지만, 감정은 그게 아니지요.
 
게다가 인간은 결코 이성적 존재가 아니라 감정적 존재라는 점에서 더 큰 폐해사례들이 더 많구요.
그리고 우리가 아는 대부분의 지성적 행태들도 사실 알고보면 감정에서 비롯된 것들이 훨씬 더 많답니다.
정관님이 말씀하시는 지성이란 게 어떤 건지는 몰라도
제가 말하는 이성이나 지성들은 적어도 소위 말하는 수학적 이성에 기반한 것들을 의미합니다.

정관 (08-11-04 19:13)
 
즉각 나올수 있는 얘기가 아니라서 솔직히 좀 꺼려지기는 하는데요. 통제되지 않은 감정을 얘기하는 것은
아니지만 감정은 꾸며 반응하기가 어려운데 물론 그것도 지성이나 직관이 판별하겠지요. 감정의 근원을
추적하여 억압되었거나 가리워졌던 부분을 밝혀내고 바르게 표현하도록 하는 것도 이성적인 역할들이죠.
그런데 이성또한 어디에 지배를 받지 않습니까? 흔히들 정향이라고들 얘기하는데 그것을 지각하기는
많은 과정이 필요했을 줄 압니다.  점증적 으로 쌓여져 있던 것을 정교하게 해체하는 작업에 숙달한 사람이
아무래도 유리할 터인데, 그러한 작업을 통해서 궁극적인 실체에로 인도 될수 있다고 보는데에도 이견이
있는 것처럼 이것은 분명 오류의 문제는 아닐 터인데 그렇다고 진위의 문제인가?
결론은 더 숙달된 사람이나 존재에 의해 요리나 조정이 가능하다고 보여집니다. 이것을 선한목적을 갖고
부단히 타파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의도에 의해 교묘하게 꾸며질수 있다고 봅니다.
가령 삼위일체론 같은 경우 동.서방교회의 예가 될수 있겠지요.

    
미선이 (08-11-04 19:24)
 
지성이 감정의 장난과 똑같은 비중이라고 보신다면 저로선 별로 동의하기가 힘들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흔히 <지성인> 혹은 <지식인>을 지향할 이유도 없지요.
물론 진정한 지성인과 지식인은 드문 거겠지만, 정관님이 말씀하시는 지성은 제가 보기엔
여전히 감정에 휘둘리는 그런 지성을 의미하며 그것 역시 감정의 장난에 기인한 것이라는 점을
인지하실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그렇게 치장된 지적 이론들은 소위 그래서 명분론으로서 나오잖아요.
그런 명분들은 어차피 궁극적으로는 자기 감정을 합리화하기 위한 지성이라 사실상 그것은 지성이 아닌 거죠.
저로선 진정한 지성의 한계에 대한 극복은 사실상 신비 체험으로 이어진다고 보고 있습니다.

정관 (08-11-04 19:40)
 
정감에 휘둘리지 않고 바라볼수 있다면 문제는 다른 얘기가 되잖아요. 그리고 약간 빗나가고 있는것 같네요.
신비체험이 해석되든 아니되든 있는 것인데 지성적으로 해석하려고 많은 시도를 합니다. 그렇다고 신비체험에
이르는 것은 결코 아닌데.... 이것이야 말로 정말 잔머리의 대가들이 교리적으로 심리학,철학적으로 해석들 합니다.
그리하여 무슨 결론을 얻으려 하는가? 지적인 착각?  점점 신비와는 멀어지고 있으면서 말입니다.

    
미선이 (08-11-04 20:00)
 
지성이 정감에 휘둘리지 않는 차원이라면 그것은 보다 더 나은 방향으로 가는 새로운 차원이 되겠죠.
궁극적인 선(Goodness)의 본성에는 이미 긴밀한 수학적 질서가 깔려 있답니다.

그리고 정관님이 말씀하시는 신비라는 게 어떤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제가 말씀드리는 진정한 신비라는 건 오히려 지성을 다 쓴 뒤에 그 한계에서 촉발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신비주의란 <미지의 합리주의>를 말하며,
우리가 성취하고 있는 합리주의란 <이땅에 노출된 신비주의>일 따름입니다.
바로 그래서 저는 궁극적으론 합리적 지성과 신비주의가 대립된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릇된 신비주의>야말로 반지성적이고 반합리주의인 것이죠.
그래서 진정한 신비는 지성을 다 쓴 뒤에도 여전히 소여되어 남아 있는 그 어떤 무엇인 거구요.

또한 합리적 지성은 우리가 곧잘 성취될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니랍니다.
그것은 결국 오류를 통해서나마 부분적으로 성취할 수 있는 진리로 나아갈 따름인 거죠.

정관 (08-11-04 20:12)
 
바로 그게 문제인데 그렇다면 그 경계란 무엇인가?  답은 모른다는 거죠.
사실 무척 합리적인것 같지만 그렇지 않죠. 되지 않을 짓 하고 있는것이죠.
학문적으로는 말씀하신것 처럼 얘길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것은 된사람과 관찰하고
있는 사람을 구분해야 합니다. 관찰하고 있는 사람은 그 사람의 안경을 결코 벗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어느 지점에서 벗어야 하느냐? 그걸 그 사람이 어떻게 알겠어요? 그것은 지성이 아니라
다른것에 의한 것인데...

    
미선이 (08-11-04 20:16)
 
다른 것? 그게 대체 무엇인가요? 답은 모른다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정관님은 답을 아신다는 것인지요.
아니면 정관님 역시 답을 모르면서 그렇게 얘기하고 계신 것인지요..

정관 (08-11-04 20:26)
 
후자가 맞는것 같습니다. 지성을 의지에 의한 두뇌의 활동이라고 본다면
그 두뇌를 돌리는 공장이 멈추게 된 것이죠. 정전이 된것도 그렇다고 죽은 것도 아니지만..
여하튼 그런 것 같아요.  그것도 에너지의 변용이라고 보는데. 지성에 의한 것은 적어도 아니라고 봅니다.
그리고 여지껏 우리는 지성적인 작업을 하였었구요. 그런데 감성이든 지성이든 이들은 반응인데
이 반응과 행함사이에는 의지가 작용하면서 의도가 숨겨지게 될수가 있잖아요. 이런것이야
내적 성찰을 계속 해보면 알수 있는 것이구요. 여기에 거짓이 개재할 수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미선이 (08-11-04 20:36)
 
그러면 말씀하신 그 의지는 또한 무엇의 의해 작동되는 것인가요? 감정도 지성도 아니라면 말입니다.
저로선 그 같은 의지 역시 감정이나 지성에 의해서도 작동될 수 있다고 보는데..
저로선 의지나 의도에 거짓이 있는지 없는지를 분별할 수 있는 최선이 그나마 합리적 지성이라고 보는 거구요.
그러한 최선을 다한 뒤에는 온전히 신께 맡겨지는 체험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정관 (08-11-04 20:48)
 
일반적으론 동의합니다만, 좀 미진한것 같아서요. 의지는 지성이나 감성보다 상위의 것입니다.
즉 창조때 부터 있었다 해야 될것 같아요. 그리고 신께 맡겨지도록 되어 있어야 하는데,
그렇다면 의지의 탈진이라고 표현하고 싶은데요. 깊이 수행해 보시면 지성이 작용하지 않는 영역들이
있거든요. 거기에서 합리성이다 뭐다 찾는게 어울리지 않아요.

    
미선이 (08-11-04 21:10)
 
의지는 궁극적으로 무엇에 의해 작동되는 것인지에 대해선 답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기에 의지가 감성이나 지성보다 상위의 것인지에 대해선 저로선 잘 납득이 안되고 있는거구요.
혹시 이를 깊이 체험해보면 알게 된다는 식으로 얘기하시려는 것이라면
저역시 그런 얘긴 똑같이 되돌려서 드릴 수 있는 얘기라는 것도 미리 말씀드리는 바입니다.

그리고 수행을 할 때 지성이 작용하지 않은 영역이 있다는 데는 저역시 이미 동의하고 있는 바구요.
그러한 차원은 이미 지성을 거쳐간 것이라 당연히 거기서 합리성을 찾을 이유도 없지요.
윌버 역시 그래서 이성의 눈을 넘어선 관조의 눈을 얘기한 거구요.

정관 (08-11-04 21:21)
 
지성이 선재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길들여진 해석으로 하려는 것 같아요. 그렇게 해서 된 분이 있다면
인정하겠지만 제가 보기엔 그렇지 않습니다. 토마스아퀴나스를 사람들이 예를 드는데, 교조화된 시각이죠
아빌라 테레사도 그렇지 않거든요. 사람들이 밑에서 해석을 하니까 그렇게 끼워맞춰 놓는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의지는 무엇에 의해서가 아니라 애초부터 있었다니까요.

    
미선이 (08-11-04 21:31)
 
길들여진 해석이란 것은 혹은 설명을 위한 해석들을 얘기하는 것인가요?
그것은 결국 옳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는 것을.. 그런데 제가 애초부터 말씀드린
그 합리적 지성은 이미 그런 차원이 아니라 그 '궁극적 옳음 속에 깔려 있는 질서'를 의미한 것이랍니다.
제 생각에는 애초 핀트가 어긋난 얘길 제게 하신 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그리고 합리적 지성이 빠져 있으니 테레사도 부자들의 성녀가 되기도 하는 거구요.

그리고 제 얘기인즉슨, "의지는 태초부터 스스로 있었다"는 정관님의 그 같은 주장이
도대체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인지를 저로서는 잘 모르겠다는 것이며
바로 그렇기에 의지가 상위라는 정관님의 그 같은 주장에 저로선 납득이 잘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렇다면 역으로 제가 감정과 지성 역시 태초부터 있었다고 정관님께 주장을 하면
정관님께선 그 얘기가 저절로 납득이 되실 건가요? 아니잖아요.
혹시 정관님의 그 같은 주장의 정당성을 결국은 그저 불가해한 수행 체험의 영역으로 돌려버리는 것이라면
그런 얘긴 어차피 하나마나한 거구요. 왜냐하면 저역시 똑같이 정관님께 돌려드릴 수 있는 얘기니까요.

정관 (08-11-04 21:49)
 
맞는것 같지만 옳지 않아요. 지성을 질서에서 찾는 다면 그럴듯 합니다.
그것보다는 의지는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여기서 의지란 desire가 아니라 will이라는것은
아실터이니 어떻게 얘기해야 할지 막막하네요.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있었다하면 말씀과 하나님이
인과 관계로 성립되는게 아니잖아요. 욕구처럼 의지가 인과 관계로 나온것이기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이해하셨으면 좋을것 같아요. 그리고 지성과 신비와의 관계도 학자들의 일반적 견해가
그러하지만 그건 학자들의 눈으로 보기 때문에 그러한데.... 이들은 신비가가 아니거든요.
참 내가 써 놓고도 우습네요. 심지어 머리에 쥐가 날  정도가 되어야 한다는데 ...
정말 그렇게 해 보아라. 미치기는 할지언정 신비체험은 못한다고 얘기하고 싶네요.

    
미선이 (08-11-04 22:08)
 
정관님~ 토론을 하시는 한에선 아무 근거도 없이 '옳다 그르다'를 강변할 수는 없답니다.
자칫 그런 식의 대화와 토론은 상대방에 대한 폭력이 되기도 하는 거구요.

그리고 의지Will와 욕구는 구분되는 것인데
둘 다 똑같이 인과 관계로 나온 것이 아니라고 보는 건 또 무슨 얘긴가요?
행여 처음과 나중의 것을 서로 혼동하는 전초 오류를 범하시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다른 곳에서 정관님의 글을 보니까
"합리적 이성은 인간만의 언어"라고 쓰셨던데 저는 그것에 동의하지 않는답니다.
오히려 인간은 비이성적일 경우가 훨씬 더 많지요.
아마도 지성에 대한 개념 이해가 애초부터 서로 다른 게 아닐까 싶습니다.

혹시 괜찮으시면 이곳 세기연 게시판에 올린 <토론(논쟁)의 기술>에 대해서도 참조 바랍니다.
이에 대해선 http://freeview.org/bbs/tb.php/f001/2 참조

왜냐하면 서로 핀트가 맞지 개념들을 애초부터 상대방의 논지에 개입시킬 경우
대화가 서로 평행선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먼저는 상대방이 말하는 개념을 잘 이해하고 파악한 후
자신이 평소 생각해왔던 개념과의 비교를 해보고서 이를 상대방에게도 소개한 뒤에나(혹은 소개하면서)
상대방의 주장에 대한 논박을 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차피 정관님도 글로서 상대방과 대화를 하시는 것인데
합리성은 최소한의 소통성을 위해서 필요한 룰 같은 것이랍니다.
만일 그런 것이 없다거나 무시해도 좋다고 생각할 경우 서로 간의 소통은 요원할 따름이죠.
토론이란 게 무슨 창작 영감시 발표와는 다른 것이잖아요.

분명하게 말씀드리지만
우리가 합리적 지성을 추구한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인간의 한계를 솔직하게 인정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답니다.
지성은 인간이 지닌 소통의 한계로 인해 요구되는 것이랍니다.

그렇다고 '지성만이 최고다' 이런 태도 역시 아니지요.
왜냐하면 저 역시도 이를 넘어서는 신비의 차원이 있다고 보고 있을 뿐더러
세계 안에서는 어떤 것이 제대로 된 지성인지를 분별하기란 참 힘드니까요.
바로 그래서 세기연이 오류의 문제를 강조하는 것이구요.
저로선 지성에 대한 바로 이같은 균형 있는 태도와 감각이 모두 있어야 한다고 보는 입장이랍니다.

정관 (08-11-04 22:53)
 
이제 정리를 해보죠. '의지력 강화' 같은 것은 엄밀히 욕구의 강화라 보여집니다. 우리가 얘기하는 의지는 서로
입장차가 많이 납니다. 인식차이이죠. 똑 같은 얘기라면 할 필요가 없겠지요.순수의지가 인간 작위에 의해 영향을 받는가?
이것또한 독자들 판단에 맡길 수 밖에 없는것 같습니다.

그리고 '합리적 이성은 인간만의 언어'라는 것도 독자의 판단에 맡길 수 밖에 없지 않겠어요.

핀트도 많이 벗어낫구요. 대화중에 비합리적인 부분을 합리적 해석으로 찾으려 하니 이것도 해결을 볼 수가 없을것 같네요.
그 외의 얘기는 서로 많이 겹칩니다.  결국은 원점으로 그대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똑 같은 툴로 몰고 가는 의도는 뭘까?  오해하신것은 . '욕구처럼 의지'에서 오해의 소지가 있었던것 같은데 이것은 정정되어야 할것 같습니다.. . 꼭 필요할 얘기이면 해야 하겠지만..
또 발견되는데  합리성이란 유한한 인간만의 도구라는 것입니다.

    
미선이 (08-11-05 01:21)
 
결국은 의지력 강화=욕구 강화라는 얘기군요. 그런데 한편으로는 의지나 욕구는 다르다고 하시더니..
솔직히 저로선 정관님의 그 같은 주장이 그다지 깔끔하게 잘 들어오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비합리적인 부분에 대한 주장들을 하실 경우엔 명확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는 한
당연히 서로 간에 소통의 한계를 보일 수 밖에 없는 법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들은 불가피하게 언어로 소통할 수 밖에 없는 인간들이지
그 어떤 동시적인 텔레파시로 모든 걸 교감하고 교류할 줄 아는 무슨 영능자나 초능력자들도 아니니까요.

토론은 결국 정합적인 근거 유무에 기반한 대화인 것입니다.
아무런 구체적 근거도 없이 토해내는 자신의 일방적 주장들은 김홍도 같은 사람들도 곧잘 저지르잖아요.
물론 그것과는 다르다고도 생각하지만 그래도 사적 경험의 주장들이 이곳처럼 웹상이든
어디든 공공의 영역으로 표출될 때에는 그 같은 주장의 진정성을 위해서는
정합적인 근거를 요구할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소통의 한계가 있답니다.
우리 사는 세상은 그저 혼자 떠들며 체험하며 살아가는 세상도 아니니까요.

그렇기에 애초에 상대방의 논지에 반론을 하실 경우라면 가급적이면
먼저 상대방의 주장을 잘 이해하고 파악한 후 자신의 개념도 함께 비교해보이면서
상대측 주장에 대한 논박을 하는 것이 오히려 궁극적으로는 독자들을 위한 배려일 수 있다고 봅니다.
물론 "의지가 상위"라는 정관님의 그 같은 주장의 정당성을 위해선 구체적이고 정합적인 근거가 필수이구요.

끝으로 토론의 생산적 결말은 누가 누구를 이기기 위해 있는 것도 아니며
서로의 견해들 간의 충돌이 누가 봐도 매우 클리어하게 잘 드러나고 있기만 하다면야
그것만으로도 그 토론은 매우 생산적이고 성공적인 토론이 될 수 있지요.
이후의 몫은 말씀하신대로 이를 꼼꼼하게 살펴보는 독자의 몫으로 남겨둬도 될 것입니다.

달라이 라마한테서 들은 얘기지만 티벳 불교 승려들은 수행에 있어서도
토론 문화를 습득케 하는 훈련도 필수적으로 포함시킨다고 하더군요.

"입장들 간의 충돌은 재난이 아니라 기회이기에!!" - 백두

정관 (08-11-05 08:26)
 
덕분에 잠도 없는 깊은 잠을 잔것 같습니다.  많이 깨달은 것도 있고 ,이제 퇴근해야 하는데
조금 있다가 제가 더 옳지 않나 얘길 할께요.  참 어리석은 짓이기 하지만요. 또한 미선님 글이 많이 옳기도 하지만요.

    
미선이 (08-11-05 08:34)
 
네에, 토론을 위해선 구체적이고 정합적인 근거에만 기반한다면야 얼마든지 환영입니다.
우리의 토론이 어리석은 짓이 되느냐 아니냐는 바로 그 지점에 달려 있는 거구요.

솔직히 저는 토론 논쟁에 있어 누가 더 옳으냐 그르냐에 궁극적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제가 틀릴 수도 있고 정관님이 옳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그 반대일 수도 있겠구요.
결정적인 관건은 어디까지나 구체적이고 정합적인 근거에 기반한 설명력 확보의 유무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저의 오류를 지적해주신다면야 저로서는 오히려 감사하지요.
반대로 정관님께서도 토론을 하실 땐 자기 오류의 가능성만큼은 열어놓으셨으면 합니다.
부디 정합적인 근거도 없이 제시하시는 일방적 주장만큼은 가급적 지양하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정관 (08-11-05 10:34)
 
마직막 답변에는 동의 합니다. 제가 지금 충분히 깨어 깊이 바라보면서 써 내려 갈수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있습니다.
여하튼 정합성에 근거하도록 하는 훈련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통합심리학을 모임을 같이 하는 분들께도 꼭 읽어보라고
얘길했는데, 그 이유는 다 옳아서가 아니라 그정도의 준비가 되어 있어야 영적인 면으로 진입이 가능하다고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러한 일반론적인 얘기를 하는 것은 아니구요..

우리의 사유를 관할것 같으면 불연속의 연속이라는 것을 발견합니다. 즉 생각이 전후 관계나 인과 관계의 연속적인 흐름이 아니라
계속 끊어지고 있는데 그것이 연속적으로 보이는 것은 나의 에고의식 즉 나의 저급성이 계속 끌어당기고 있습니다.
그 끌어 당기는 동인이 뭐냐면 바로 죄성입니다.

예수께서 "네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도 모르게 하라"고 한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의 의식은 우주의식에 동조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나","나"하면서 우주의식에  되 튀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근거도 자기에게 유리한 것을 어디선가 끌어옵니다.

그러나 근거가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상대가 근거제시를 못할 수도 있고, 싫을 수도 있고, 또한 상대방이 발견하지 못할 수도 있어요
진술자체, 행위자체가 바로 근거입니다. 독립되어 어느날 갑자기 빅뱅처럼 발생한 일이 아니니까요.

생각이든 지성이든 거기에는 부지불식간에 나의 선택이 있게 마련이잖아요. 그 선택이 정합성이든 무엇이든에 묶이지 말고 놓임이 되도록
하라는 겁니다.

정관 (08-11-05 12:00)
 
아 그리고 발전을 바라는 마음에서 결론을 짓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을 합니다.  독자들은 게임을 즐기려 한다는 것이죠.
지나고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도 게임에 빠졌던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되는데요.
요즘 교인들이 목사들 입에서 나오는 얘기에만 오락가락 하지 자기들이 씹어서 자기 것으로 하는 과정이 부족하잖아요.
똑 같은 일들이 토론에서도 벌어질 수가 있다고 보여집니다.  그냥 내버려 둠이 독자들을 더욱 배려하는 마음이라는 것이죠.
반복적인 얘기는 평형을 잃고 있다는 얘기가 될 수 있잖아요.

미선이 (08-11-05 14:35)
 
"진술 자체, 행위 자체가 바로 근거"라는 말씀하시는 정관님 앞에서는 제가 더이상 드릴 얘기도 없을 것 같습니다.
정관님의 그런 얘기가 타당하다면 무조건 믿어라고 강요하는 기독교인들이 저지르는 폭력도 그저 근거가 될 따름입니다.

다시 한 번 분명하게 말씀드리지만, 자신의 주장이 정당성을 지니려면 정합적인 근거 없이는
일관성도 가질 수 없고 상대를 비롯한 독자와의 소통도 힘들다는 점을 분명하게 말씀드립니다.
근거 없이 주장을 하는 것이 대화와 토론에서 얼마나 큰 사유의 폭력이 될 수 있는 지에 대해서도 인지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제 생각에는 이미 정관님의 글은 위의 본문과도 그렇고 애초 논지에서 많이 평형을 잃고 벗어났다는 느낌이 들어 저도 마무리를 짓고자 합니다.

정관 (08-11-05 17:58)
 
왜 이럴까? 마찬가지로 나에게 다가오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심층에는 화이트헤드가 있는 겁니다.
미선님과 대화하기 위해서는 화이트헤드의 이해가 먼저이다 라는 생각을 합니다. 화이트헤드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의 글은
보았지만 화이트헤드를 직접 탐색해 본적은 없읍니다.버나드 로너간 같은 이도 그렇지만 이들의 재능은 사람들에게 유용한
도구들을 제공해서 많은 사람들이 편하게 사용합니다. 관심은 있지만 과연 내가 그만한 여력이 있을지 의문입니다.
나는 나의 얘기를 하고 있는데, 미선님은 화이트헤드의 얘기를 하는겁니다. 그 차이입니다. 유용한 도구 일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관심은 갖고 있겠습니다. 화이트헤드도 그렇고 하이데거도 그렇고
미선님 덕분에  유용한 도움이 되었습니다.

    
미선이 (08-11-06 04:25)
 
갑자기 무슨 얘길 하시는 건가요? 여기서 화이트헤드가 별안간 왜 나오는 건지요?
위의 얘기는 일반 심리학계에서도 얘기되고 있는 바에 기초한 내용들인데..
애초에 화이트헤드 얘기였다면 이곳 심리학 파트에 글을 쓰진 않았지요.

글구 심층에 화이트헤드가 있다고 해도 그것이 화이트헤드라서 다가오지 않는다는 것은
제가 보기엔 정관님의 더 큰 편견과 부당한 오류지요.
화이트헤드가 다가오지 않는다면 뭔가 이유와 근거를 대셔야지 그 어떤 이유도 없이 싫다는 건가요?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위의 얘기는 화이트헤드를 언급할 필요도 없이
화이트헤드를 굳이 모르는 일반 심리학 공부한 사람의 입에서도 나올 수 있는 얘기랍니다.

앞으로는 정관님이 정관님의 얘기를 하시는 건 참 좋다고 생각하지만 뭔가 논의에 맞게
그리고 상대방의 주장에 반론을 하실때는 보다 매끄러운 토론을 위해서
구체적이고 정합적인 근거에 기반해서 얘기를 해주시길 바랍니다.
이런 얘긴 일반 토론방 진영에서도 원하고 있는 주장들 아닌가요?
님 스스로는 자신이 얼마나 근거도 없이 얘길 하고 있다는 것을 끝까지 인정하시지도 않는 것 같습니다.

제가 보기엔 정관님과의 차이는 이미 토론의 방식 자체에서부터 차이가 있다고 봅니다.
저는 정관님식의 글쓰기들 즉, 끝까지 자신의 주장들에 별다른 근거도 없이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는 자세들은 분명한 문제가 있다고 제기하는 것이랍니다.

정관 (08-11-06 09:11)
 
이해에 차이가 있어요. 미선님 덕분일까요? 과정과 실재라는 책도 구해서 보고 있는데, 그분의 통찰력 그리고 기독교에 대한
비판은 겸허히 수용해야 할 부분도 많다고 봅니다. 지적하신대로 그분에 대한 이해와 또 적용에 있어서의 문제이지 그분 철학자체에
대해 비판하기는 아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상대를 통해 자신을 보게 된다고, 심리적인 문제, 사유의 양태등이 실은 문제라고 저도 보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심리분석, 정신분석을 하게 된다면 이것이야 말로 지성의 장난으로 떨어지는 입증이 될수가 있어요.

제가 철학적 신학적 기반이 보시다시피 약하기 때문에 여력이 되는데로 보강해볼까 하는 유혹도 받고 욕심도
생깁니다.  아마 유혹이라 보고 싶은데...

한가지 지켜 주셨으면 하고 바라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임의로 글을 지우거나 순서를 바꾸거나 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어요.  아니면 정 지워야 하겠다면  미선님 의견에 동의하는 분들과의 협의를 거쳐서 했으면 합니다.

이렇게 제안하는 이유는 우리의 공통기반인 기독교의 당면한 위기상황에 어떻게 기독교를 바르게 정립해 가는가 하는데는
일반적으로 동의할 것이라 보지만,  기독교의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에게서도 문제점이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더욱 젊은분들께 희망을 걸어야만 하고,  말씀하신데로 정합성에서는 떨어질지 모르지만  서로 모르는 부분도 있고
경험해 보아야 아는 부분도 있는데 그것을 일일이 열거할 필요로까지 느끼지는 않아요.

이러한 문제는 종종 다른 곳에서 충돌을 할겁니다. 정합성을 갖추라 ... 지적하신대로 갖춰보도록 하겠지만 신통치는 않을겁니다.
그것으로 해결안되는 것도 많을 터인데. 그렇다면?
여하튼 제가 스스로 이거 정말 아니다 하고 물러갈 때까지는 지우지 말았으면 합니다.

저도 교회의 문제로 글을쓰다보니 욕설에다가 심지어는 죽는다는 협박까지 받았는데..
미선님도 그런경험을 하셨는지 모르겠지만 이곳에 글 올리는 분들이 그렇게 무지막지 하지는 안잖아요?

심리적인 문제? 왜 꼭 그렇게 반응하는지..동의합니다. 저도 그렇고 미선님도 그렇고  하기야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럼에도 어떻게 풀어나가느냐 이것이 더 중요하겠지요.

    
미선이 (08-11-06 09:55)
 
이해의 차이가 있다는 얘긴 지극히 너무 당연한 얘기지요. 제가 보기엔 차이 정도가 아니라
그 차이로 인한 차이의 충돌, 즉 견해의 충돌로 인해 서로 간에 논박을 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그런 적도 없는데 글을 지우거나 순서를 바꾼다는 얘긴 도대체 무슨 말인지요?
정관님의 글을 지우거나 바꾼 적이 없는데도 말입니다.
혹시 간혹 글을 옮긴 것을 두고 얘기하시는 거라면 그것은 적절한 게시판에 싣기 위함일 뿐입니다.
제 기억상에도 정관님의 글을 지우거나 삭제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는 것으로 압니다.

끝으로 저도 한 가지 부탁을 드리겠습니다.
누누이 말씀드리지만 자기 주장의 정당성을 위해선 근거 제시는 필수입니다.
상대와 논박을 하는 토론은 결국은 <근거 확보에 기반한 설명력 확보 싸움>에서 판가름 나게 됩니다.
싸움이라고는 하지만 서로 간에 분명한 근거만 제시된다며야
그 같은 학문적 논쟁과 토론은 오히려 생산적인 싸움일 수 있답니다.

적어도 정관님께서 상대방의 논지에 비판적인 딴지를 걸지 않는
혼자만의 독후감 정도의 글이라면 제가 이런 얘길 드리지 않습니다.

단지 최소한으로 상대방의 논지에 대해 딴지를 거는 비판을 가할 때만큼은
가급적 구체적이고 정합적인 근거를 이렇게 부탁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상대방과의 토론에 있어 토론의 규칙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별다른 근거도 없이 상대를 비판하는 것은 사실상 '비판'이 아니라 <비난>이 되기 때문이죠.

사실 지성을 혐오하거나 격하하는 사람들치고 알고 보면 역으로
은근히 자신의 지적 훈련의 게으름 정당화하기 위해 지성을 혐오하는 경우도 종종 있답니다.
물론 이런 얘긴 정관님 그렇다는 얘긴 결코 아닙니다.

단지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수학적 질서 및 수리논리적 사고가
우리의 영성 수행과 아무 관련없다고 보는 것은 매우 어불성설이라는 사실입니다.

아무튼 정관님의 건필을 기원하는 바입니다.

정관 (08-11-06 15:49)
 
서로 거짓증언 하지 않는다는 신뢰는 적어도 있어야 될것 같아요. 실수도 오류도 있을 수 있습니다.
[세기연의 명칭을 세계와 종교 변혁 연구소로 바꾸는것이] 란에 보면 뎃글 순서가 독자의 편의상 배열했는지는 몰라도
시간상 배열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당연히 위엣글을 보고 뎃글을 썼는데 편의에 따라 순서를 바꾸어 버리면 이상해지지 않겠어요.

그리고 글을 지우는 경우는 실수로 지울수도 있을것 같고요, 저의 실수도 있을 수 있고요. 다른 곳에서라도 그러한 경험을 당한다면
유쾌한 일은 아닌듯 합니다. 딴지 걸 필요도 없고 아마 논쟁에는 들어 오지 않을것입니다.
지성이든 감성이든 다 중요한 요소이고 둘다 성찰이 필요한 부분들이고 이점은 하등 얘기할 필요도 없고요.
사견이라기 보다는 시일을 두고 지성의 속임도 가능하다는 부분에 대해서는 구체적 실증이 나오는데로 지적 할까 합니다.

그리고 보다 중요한 것은 세기연 사람들의 어떠한 색깔을 형성하는데,물론 교회의 발전적 개혁을 바라는 마음에서야 똑같은
마음이지만 생각과 그 속내용에서 곤란하게 느껴지는 것도 장차 얘기를 할까 합니다.

    
관리자 (08-11-06 17:44)
 
정관님께서 뭔가 착각하신 것 같습니다. 글의 순서를 바꾼 게 아니라
그 어떤 특정 댓글에 대한 답변 아이콘을 누르시면 그 댓글 바로 밑으로 답변 댓글이 들어간답니다.
그 아래에 또 다른 댓글이 달려 있을 지라도 말입니다. 관리자도 댓글 순서는 바꿀 수가 없답니다.

그리고 글을 삭제하는 경우란 욕설 도배의 경우가 아니라면 없습니다.
일전에 딱 한 번 바비도님의 경우는 본인 스스로의 요청이 들어와서
부득이 글을 내리길 원하셨기 때문에 글을 내린 것뿐이랍니다.
그 외에 글을 지우거나 한 적이 없습니다.

암튼 정관님께서는 부디 착오 없으시길 바랍니다.  - 관리자 드림

        
정관 (08-11-06 19:04)
 
아 이게 답변이로구나... 근데 글이 길어서 그런지 무척 헷갈립니다. 색깔을 좀 달리하면 어떨지...

            
관리자 (08-11-07 01:45)
 
네, 우측에 있는, 댓글의 답변 단추를 잘 확인하셨나요. 앞으로는 가능하면 먼저 세심하게 잘 살펴봐주시고서
얘기해주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가급적 오해를 줄일 필요는 있으니까요.
글구 색깔 문제는 관리자의 능력을 넘어서 제작자에게 의뢰를 해야 할 사항인데 아직 그럴 계획까지는 없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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