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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감정의 장난(2) - 전두환도 친하면 용서된다    
  글쓴이 : 정강길 날 짜 : 08-11-05 07:33 조회(5863)
   트랙백 주소 : http://freeview.org/bbs/tb.php/e005/64 




 
전두환이 나의 가족이라면, 나는 전두환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흔히 알고 있듯이 전두환은 5.18 광주 학살의 원흉인 역사의 죄인이자
이제와서는 통장 29만원이 자기 재산의 전부라고 주장하는 몰염치한 파렴치범이다.

하지만 그의 아내나 아들이 전두환을 보는 평가는 어떨까?
전두환을 가까이서 모셨던 장세동의 평가는 어떠할까?
내가 만일 전두환과 함께 살았던 아들이었다면 나는 정작 어떻게 나왔을까?

전두환이 아무리 나쁜 짓을 많이 했다고 해도 그의 가족들이나 그와 가까웠던 사람들은
아마도 '나쁜 독재자'라는 세간의 평가와는 다르게 평가하고 이를 받아들일 수 있다.

물론 일상적 대면관계가 아니어도 전두환을 사모할 수도 있고
또한 일상적 대면관계임에도 전두환을 세간과 똑같이 나쁜 독재자로 평가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내가 지금 말하는 바는 주 성향에서 그러하다는 얘기다.

우리의 친애하는 그 어떤 친구가 범법자로 세간에 알려져 있다고 했을 경우
세간의 많은 사람들은 이를 비난하기도 하지만
그가 만일 나의 가까운 동료의 경우라면 무턱대고 이를 비난하진 않을 것이다.
이 역시 감정이 저지르는 장난에 기인한다.
이는 나 자신을 포함해서 그 어떤 누구도 여기에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감정의 장난은 매우 위험스럽기도 하지만 매우 인간적이기도 하다.
우리는 감정이 있어 인간적인 정을 서로 교감하고 느낀다.
하지만 동시에 감정이 있어 개인의 일상과 사회의 평가들이 서로 충돌하기도 한다.

만일 누군가가 차가운 이성적 측면만 보일 경우 인간미가 없다고도 얘기하잖은가.
하지만 동시에 이성적 측면보다 감정적 견해나 표출이 중심이 될 경우에도 그 역시 한계를 지닌다.
따라서 감정의 장난 문제에 대한 온전한 해결은
결국 매순간들의 자기 감정을 알아차림하는 자각의 훈련이 매우 중요하다고 하겠다.
 
감정의 장난들은 대부분 일상적 대면관계의 범주에서 일어난다.

특히 생활반경에서 일어나는 일상적 대면관계의 영역은
주로 이성보다는 감정이 매우 주요하게 교류하는 영역들이다.

가족의 경우를 생각해 볼 때도
가족이기 때문에 그 어떤 극악한 죄를 짓더라도 용서가 되기도 하지만
혹은 가족이기 때문에 그 어떤 사소한 짓으로 인해 원수가 되기도 한다.
이 같은 변죽을 울리게 만드는 것이
바로 일상적 대면관계에서 일어나는 감정의 장난에 의한 것이다.

우리는 흔히 그 어떤 사건을 직접 가까이서 목격하고 경험할 경우
우리의 판단은 그 사건에 대해 사실에 매우 근접한 것으로서 생각할 수 있으나
실은 그 반대로 가까이서 보았기 때문에
본래의 사실이 오히려 굴절되고 왜곡되는 경우 역시
그만큼 커지게 되는 위험성도 함께 지닌다는 점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즉, 우리는 가까이서 본다고 해서 제대로 본다고 생각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위험천만한 착각일 수 있다는 얘기다.
따라서 일상적 대면관계일수록 감정에 대한 알아차림의 훈련이 있을 필요가 있다.
 
일상에서 감정의 장난은 때론 즐거운 유쾌함도 가져다주지만
앞서 말한 위험성과 폐해들도 함께 가져다준다.
특히 감정의 장난이 주는 폐해들은 무심코 벌어지는 무의식적 차원에서 일어나는 것이라
곧잘 알아차림 하기가 매우 힘이 든다.
감정의 장난은 알아차림만 해두어도 이를 탁월하게 감정 조율력을 배양할 수 있다.
 
알아차림 훈련으로 감정의 장난 극복하기

앞서 이성에 의한 감정의 조율을 얘기하기도 했었지만
감정의 조율력을 기르는 데 있어 <알아차림> 훈련만큼 탁월한 효과를 주는 것도 없다.
불교의 위빠사나 수련도 바로 이러한 알아차림을 효과적으로 배양하는 수행이기도 하다.
(참고로 팔리어 sati를 영어로는 mindfulness
그리고 우리말로는 '마음챙김' 혹은 '알아차림'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감정 콘트롤은 하루 아침에 되지 않으며
그것은 '알아차림'이라는 자각의 훈련이 매우 뛰어난 효과를 발휘해준다.

내가 화를 내고 있는 그 순간에도 "나는 화가 많이 난다"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현재 나의 모습은 화를 내고 있는 중이다'라는 것을 알아차림 한다는 것이다.
즉, 매순간순간 자기 안에 올라오는 감정을 거부하지는 않되
자기 안에서 느껴지는 그 모든 감정들을 조용히 응시하고 관찰하면서 인지해본다는 것이다.

불교의 위빠사나 수행을 열심히 잘 하는 사람들은
매순간 호흡의 들숨과 날숨의 순간마다에도
그리고 걸음을 한 발짝 한 발짝 걷는 그 순간마다에도 알아차림 한다.
결코 자각의 의식의 끈을 놓지 않고서 살아가는 훈련이 중요한 것이다.

알아차림은 자기 수용적 관찰 훈련이다.
요동치는 감정의 장난들은 바로 이같은 알아차림 훈련을 통해 조금씩 극복이 가능하다.

그리고 이 알아차림의 범주를 그냥 '나'에만 둘 것이 아니라
'전체 관계 안에서의 나'로 둘 경우
보다 더 분명하고 명확하게 자신을 잘 관찰할 수 있게 된다.
(앞서 말한 불교 위빠사나 비롯한 기존의 알아차림 수행들은
바로 이 부분에서 어느 정도 한계를 보이고 있다.
그럼으로써 수행이 지나치게 개인적 선정에 촛점을 맞춰져 있다는 얘기다.)

물론 우리들은 감정이 저지르는 그 장난을 굳이 나쁘게만 볼 이유도 없다.
인간 자체가 이미 지극히 감정적 존재이니까..
하지만 인간은 감정적 존재라는 사실을 우리가 그저 인정하는 데만 그쳐서도 곤란하다.
왜냐하면 그럴 경우엔 우리는 아무런 발전을 도모할 수도 없고, 그럴 필요성도 못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존재는 끊임없이 지금 보다 더 나은 상향적 발전을 지향한다.
따라서 감정 콘트롤 능력의 배양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일상에서 감정이 저지르는 장난에 쉽게 지배당하지 않으려면 말이다.

그리하여 궁극적으로는
감정에 지배당하지 않으면서 감정을 생생하게 향유하는 습관의 배양이야말로
지성을 넘어서는 영성의 차원 및 예술의 경지라고 하겠다.

즉, 이러한 경지에 이르러면 적어도 중간 단계인 지성의 차원을 거칠 필요도 있다.
지성은 자기의 사적 감정이 공공의 차원에서 소통 가능한 것인지 아닌지를 걸러주는 기능을 한다.

혹자는 지성의 차원을 격하하고 비하하기도 하지만
내가 보기엔 지성을 격하하거나 비하하는 수행가들치고
제대로 된 올바른 수행가들을 본 적이 없다.
 
오히려 알고 보면 지성의 차원을 폄하하는 사람들 중에는
대체적으로 지성에 대한 자기 콤플렉스의 발현일 때가 많다.
쉽게 말해 공부가 너무 힘드니까 공부 해서 뭣하냐는 식으로
공부 자체를 격하시키기도 하는 일종의 <자족적 합리화>인 셈이다.

혹자는 그럼 일자무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어쩌란 말인가 라고 얘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가장 중요한 태도는,
자기 자신이 제아무리 일자무식의 감정 콘트롤이 안되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거기에서부터 출발하여 가능한 상향적 변화들을 추구하는 자세에 달려있는 것이다.

자, 이제 맨 앞의 논지로 돌아가서
앞서 나 자신이 전두환의 아들이라고 생각해보자.
그렇다면 나는 아버지 전두환을 용서할 수 있을까?

그 답은 자신의 자아를 일상적 생활반경의 범주에 둘 경우와
자신의 자아를 일상적 생활반경을 넘어서 세계사회 전체로 두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분명하게 말하지만, 자기 관찰과 알아차림에 있어서는 자신의 자아를 
자기와 곧잘 관련한다고 보는 일상적 대면관계의 생활반경에만 둘 것이 아니라
그 같은 일상적 생활반경마저도 포함하며 넘어서는
세계사회 전체에 자기(Self)의 알아차림을 두고자 할 때에
일상에서 저지르는 감정의 장난들도 조금씩 극복 가능할 수 있다.

감정에 지배당하지 않으면서 감정을 생생하게 향유할 줄 아는 것,
가능한 이성을 발휘하면서도 이성의 차원을 전부로만 생각하지 않은 것
이 같은 절묘하고도 균형 있는 태도의 확보야말로 매우 중요한 관건이라고 하겠다.

바로 그래서 싯다르타는 유언으로 남겨놓았었다.
"끊임없이 정진하고 또 정진하라"고 말이다.
 

[관련글] "좋다/싫다"와 "옳다/틀렸다"의 표현들, 어떻게 볼 것인가 : 감성과 이성의 문제 
 
 
정관 (08-11-05 19:00)
 
그 이성이나 직관이 내려오는 근저가 있을겁니다. 그래서 성찰도 개인 나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위빠싸나를 오래하셨던 분인데, 하루에 8시간씩 3년을 수행하다가  요즘은 그래서 그런지
무문관을 하고 있더라구요. 얘기해보면 각각 입니다.

미선이 (08-11-06 13:38)
 
참고로 사람이 얼마나 감정적 존재인지를 알게 해주는 참고 동영상 자료도 함께 첨부해둡니다.
[동영상 자료] http://freeview.org/bbs/tb.php/g003/307  참조

정관 (08-11-06 16:02)
 
맞아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80-90% 정도가 충동적입니다.  그렇다 보니 이성이라고 하는것도
감성에 속아 있는 부분이 많이 있지요. 그러나 이성 우월주의가 되어도 또 곤란하다는 얘기이죠...
또 딴지 건다 그럴까봐...  이성보다 우월한 부분에도 관심을 계속 가져야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성적 판단이라것도 에고적 판단이면 재고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미선이 (08-11-08 11:07)
 
죄송하지만 제가 정관님께 너무 엄밀하게 말씀드리는 것인지는 몰라도 가급적이면
제게 가해지는 일말의 오해라도 걷어내고자 이를 말씀드림을 양해바랍니다. 사실 정관님의
위의 언급도 실은 <허수아비의 오류>에 속하기도 한답니다. 왜냐하면 이미 상대방은 이성우월주의자도 아닌데
정관님의 인식 속에서 보는 상대방의 글은, 은연 중에 상대가 '이성우월주의'를 갖고 있다고 판단을 내리고
상대방이 언급도 하지 않은 이성우월주의 얘기를 꺼낸 것이니까요. 그래서 상대방에 대한 논박을 할 경우엔
가급적이면 우리 모두가 명백하게 공유하고 있는 것들이나 상대방이 썼던 말을 비판의 근거로 삼아야지
그렇지 않고 상대방이 주장하지도 않았고 결코 쓰지도 않은 얘기나 단어를 먼저 쓰며 할 경우에는
오히려 상대방에 대한 오해만 불러일으키게 만들어서 보는 이로 하여금
자칫 상대방에 대해 부당한 굴레를 덧씌우는 좋지 않은 글이 되기도 한답니다. 이 역시 주의할 부분이지요.
혹시라도 이러한 저의 논박들이 제가 너무 엄밀하고 뻑뻑하게 나온다고 보실는지 몰라도
제 생각엔 정관님께는 어느 정도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어서 몇 자 남긴 것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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