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검색
아이디    비밀번호
   자동로그인     
  현재 총 54명 접속중입니다. (회원 0 명 / 손님 54 명)     최신게시글    성경검색   
자유토론광장
문화 예술 Cafe
생활 나눔 Cafe
책과 이야기
Sayings
한 줄 인사


  방문객 접속현황
오늘 268
어제 462
최대 10,145
전체 2,674,679



    제 목 : [펌] 리차드 도킨스와 마커스 보그를 통해 본 신학방법론 (김희헌)    
  글쓴이 : 정강길 날 짜 : 08-03-17 06:22 조회(9224)
   트랙백 주소 : http://freeview.org/bbs/tb.php/f001/1210 


세기연의 새로운 기독교 운동을 지지하는 분이라면
아마도 현재 한신대 강사로 있는 김희헌 박사의 이름을 기억해둬도 좋을 것이다.
기회가 되면 세기연에서도 한 번 모셔야 할 분이 아닐까 싶다.
 
 
 
 
신학을 할수록 답하기 어려워지는 질문은 도대체 ‘정통신학이란 무엇일까’ 하는 것이다. 모든 신앙인들이 믿음의 지표로 삼을만한 신학적 표준이란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대표적인 반응 중 하나는 원형 그대로(가까이) 보존되어온 (가장) 오래된 기독교 전통에서 해답을 찾아야 한다는 주장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성서와 신조와 교리의 ‘전통적’ 권위를 잘 계승해 가는 것이 ‘정통적’ 신학방법론이라는 소박한 이해가 탄생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는 계몽주의 시대를 뚫고 나온 현대 신학의 눈으로 보면 너무나 ‘소박한’ 바람일 뿐이다. 신학은 역사비평 방법을 통해서 이미 오래전에 기독교의 원原역사 속에 수많은 전통들traditions이 존재하였다는 사실을 밝혀냈을 뿐만 아니라, 그것들 중 어느 하나가 소위 전통the tradition이라는 권위를 걸머지고 비잔틴의 기독교문명 시대로 들어갔던 과정이 순수하지 않았다는 의구심마저 갖고 있다. 따라서 ‘무슨’ 전통을 계승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오늘날의 영민한 신학은 대답하기를 주저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더해지면 일치된 결론은 기대하기 어렵게 된다. 한마디로 오늘날의 신학계에서 전통tradition을 계승하여 정통orthodox신학을 세우는 일은 아무리 복잡한 공정과정을 거친다하여도 그 성공을 보장받기 힘든 작업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21세기에 넘어오면서 신학은 ‘말하기’를 자제하고 ‘듣기’에 관심하며, 깨달은 만큼이라도 ‘행하기’로 그 관심을 돌리고 있는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정통신학”을 주장하는 소리를 곧잘 듣는다. 특히 ‘정통’을 향한 열망에 제 몸이 수백 개로 찢어져 불구가 된지도 몰랐던 한국의 장로교회에서 이 소리는 여전하다. 또한 정통이라는 이름Label이 가져다주는 명예의 유혹에 다른 개신교파도 자유롭지 못해 보인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통신학이란 무엇일까’라는 본원적인 질문보다 더 ‘긴급한’ 물음이 있다. 그것은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정통신학이란 이름으로 대중적Popular으로 통용되고 있는 신학의 실체는 무엇인가?’ 이다.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그다지 어렵지 않으면서 유용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전자의 질문이 지닌 신학적 의도까지 만족시킬 수 있을 듯하다.

사실 이 질문에 대해서 “한국교회가 맞고 있는 신학적 위기의 뿌리는 어디에 있는가” 라는 지난 호의 글에서 이미 대답하였다. 거기에서 필자는 우선 정통신학이라는 이름으로 난무하는 주장들의 실체를 규명해야 할 필요가 생긴 것은 그 ‘정통’ 주장들이 오히려 한국교회에 신학적 위기를 일으키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그 위기의 뿌리는 정통신학이 “초자연주의적 이신론”이라는 (18세기에 확립된) 낡은 세계관을 이용하여 기독교 전통을 해석함으로서 변화된 이 시대의 과학적 지성을 만족시키지도 못하고 종교적 영성을 추동해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현실에 대한 평가는 저마다의 안목에 의지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의 동의를 구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그러나 최소한의 공감을 원하였던 것은 지난 3세기 동안 개신교 내에서 정통신학이라고 불리어지던 신학적 주장들이 오늘 우리가 (우리의 신학적 위기를 넘어서기 위해) 지표로 삼고자 추구하고 있는 그 정통신학 자체는 아니라는 점이다. 이 차이를 분명히 하지 않은 채 우리에게 익숙한 ‘정통’이라는 이름을 지닌 (지난 시기의) 신학에 미래를 맡기는 것은 교회의 위기를 심화시키는 결과만 가져올 것이다.

17,8세기의 과학적 (기계론적) 세계관에 반응하여 세워진 이신론적 (정통)신학은 (진화해 가는 과학적 세계관의 점증하는 도전과 이에 따른 새로운 신학의 등장으로 인해) 그 지위가 점점 추락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정통’이라는 타이틀은 지켜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럴수록 그 이름은 더 이상 (바른 신학을 가리키는) 일반명사가 아닌 (이신론적 세계관에 기초한 완고한 이원론적 신학적 사유를 지칭하는) 고유명사로 사용될 뿐이었다. 19세기 말엽의 미국에서 이 정통신학은 근본주의 신학과 거의 합류하였고, 한국의 ‘정통’이라는 이름의 신학은 그 영향을 대부분 흡수하였다.

이제와 과거청산이라는 명목으로 그 신학에 붙어있는 ‘정통’이라는 아름다운 칭호를 떼어내고 싶은 (논리적인 당위성은 느끼지만, 현실적인)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한다. 떼어 와서 어디에 붙일 것인가? 현실을 보면, 가톨릭과 동방 정교회를 제외한 개신교 신학만 하더라도 저마다의 역할을 서로 다른 모습으로 감당하는 수많은 신학방법론이 있다. 이 다양성 앞에 ‘정통신학’이라는 명찰을 달고 홀로 나서는 일은 얼굴이 여간 두껍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그게 아니면 ‘듣기’ 훈련을 해 본적이 없는 유아론자solipsist임을 자인하는 행동이거나.

그러나 주목해야 할 현실은 오늘 한국 교회에서 정통신학이라는 고유명사가 종종 일반명사로 둔갑하여 앞으로 나아가야 할 교회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점이다. 어떻게 이 무게를 털고 일어설 것인가? 이 문제를 고심하는 신앙인의 대열에 나도 서 있으면서 앞서 간 사람들이 주는 교훈을 배운다.

미국 성서학회(SBL) 역사적 예수 연구분과를 오랫동안 이끌었던 마커스 보그가 그 중 한 사람이다. 이 신약성서 학자는 자신이 어린 시절 배운 루터교 신앙으로부터 출발하여 수십 년에 걸친 오디세이적 신학 여정을 통해 얻은 신학적 결론을 ?새로 만난 하나님?이라는 책에서 밝힌다. 보그는 이 책에서 자신에게 익숙했던 (그러나 새로운 하나님을 만나고서 버린) (그 고유명사적) 정통신학이 설파하는 신이 “초자연주의적 신론”Supernatural theism이란 프리즘을 통해 이해된 신이었다고 말한다. 이 신은 다음의 두 가지 성격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이신론의 신과 같다. 첫째 이 신은 초자연적supernaturalist으로 이 세계를 떠나out there 존재하고, 둘째 이 신은 무엇인가를 요구requirement하며 그것에 대한 반응으로 간헐적인 간섭interventionist의 방식으로 세계와 관계를 맺는다.

보그에 의하면 이러한 신관은 일련의 방식을 통해 성서, 우리의 삶, 예수, 구원의 방식, 신앙의 의미, 영생 등의 주제들에 독특한 이해의 틀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1) 이 신은 저 멀리서 우리의 행동을 관찰하며 잘잘못을 판단하는 분Finger-shaker으로 가끔 (참다못해) 직접 세상일에 관여 하신다. 2) 성서는 이러한 신의 활동의 특징을 보여주는 유일한 책이요, 거기엔 신이 원하는 우리의 믿음과 삶의 방식이 신의 영감을 통해 (그분의 영감이 전능하다면 오류가 없이) 기록되어 있다. 3) 우리는 신의 형상으로 지어진 그분의 사랑을 받은 존재이지만, 불순종으로 죄에 빠졌고 처벌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해결책을 내놓으셨다. 4) 그것은 예수다. 예수는 하나님의 독생자로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 나신 신이자 인간이다. 그분은 우리의 죄가 용서받도록 죽기 위해 오셨다. 5) 이 예수를 믿는 것이 구원을 얻을 유일한 조건이다. 믿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하는데, 이런 가슴 아픈 사태가 벌어지는 것을 막는 것이 선교사의 사명이다. 6) 선교사는 강하고 바른 믿음을 전한다. 강한 믿음이란 의심이 없는 믿음이요, 바른 믿음이란 (보그에게는) 루터교의 믿음이다. 7) 이 믿음으로 얻을 것은 죽고 나서 천국에 가는 것이다. 믿지 않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은 지옥이다.

어릴 때부터 자신에게 내재화되었던 이러한 믿음의 방식은 한마디로 “지금 믿고, 나중에 천국 가는”Believe now, for the sake of heaven later 것이었다고 보그는 말한다. 물론 위에 열거한 목록들은 기독교 신학의 핵심적인 주제들이다. 그러나 그 주제들이 이신론적인 틀을 통해 해석되었을 때, 그 위에 형성된 믿음의 양식이란 이성의 세계에 눈을 뜨자마자 무너지고 그 뒤를 잇는 경험은 무신론뿐이었다고 고백한다. 보그에게서 다행스러운 것은 이 이신론적 믿음의 방식이 믿음을 구성할 유일한 방식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점이다. 그가 “이전에 만나지 못했던 신”을 만난 것이다. 그 신은 “범재신론”panentheism의 틀에서 새롭게 이해되기 시작한 하나님이었다고 그는 말한다. (이신론과 범재신론이란 신학적 사유의 틀을 통해 제각기 다르게 이해되는 믿음의 방식들에 대해서 다음 호부터 다룬다.)

보그의 경험은 교회의 갱신을 꿈꾸며 전진하는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경험하는 신앙의 싸이클이다. 그리고 그가 이성의 세계를 만나고 나서 부정하게 되었던 이신론에 기반한 정통신앙, 다시 말해 어린 시절부터 그토록 깊이 체화되었지만 또 한편 그토록 쉽게 무너진 신앙에 대한 경험의 고백은 오늘날 교회에서 젊은이들이 사라지고 있는 이유를 설명하는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 준다.

여기 다른 시각에서 교회의 미래를 위해 (고유명사적 의미의) 정통신학을 떠날 것을 정중히 충고하는 성공회의 주교를 소개한다. 그는 뉴욕의 한 교구를 맡으면서 자신의 신학을 진지하게 밀고나간 끝에 ?기독교,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 1998?는 책을 출판한 존 쉘비 스퐁이다. 그는 다른 책에서 정통신학의 폐쇄적인 모습을 비판한다. 그에 따르면 정통신학이 절대주의적이고 제국주의적인 성격을 띨 수밖에 없는 것은 자기 언급적인self-referential (결과적으로 비합리적인) 논리 구조를 갖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이렇다. (정통신학은 말하기를) “우리의 신은 오직 참된 신이다. 이 신의 진리가 우리에게 주어졌다. 그것이 계시다. 이 계시는 신에게서 직접 온 것이므로 그 진리성은 [다른 어떤 것으로도] 의심받을 수 없다. 우리는 이 신적 계시를 받은 유일한 존재들이다. 따라서 우리만이 이 계시를 바르게 해석할 수 있고, 이 해석은 도전받을 수 없다.”

조지 부시 대통령이나 김홍도 목사의 입을 통해 잘 알려진 논법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들만이 사용하고 있는 신학적 인식론이 아니다. 정통신학이 오랫동안 고수하여 온 ‘정통’ 논리다.

이러한 사고방식에 저돌적인 반기를 들고 나선 사람들이 있었으니, 안타깝게도 그들 중 대다수는 전혀 다른 진영에 속한 무신론자들이었다. 우리 시대의 최고 논객 중의 하나는 리처드 도킨스가 아닐까 싶다. 그는 ?만들어진 신?이라는 최근의 책에서 무모한 열정에 사로잡힌 종교가 저지르고 있는 잘못에 대해서 치열한 인문주의적 비판을 가한다. 그가 지적하는 내용은 실로 광범위하다. 무엇보다 먼저 그는 “종교가 미치는 진정으로 나쁜 효과 중 하나는 ‘몰이해에 만족하는 미덕’을 가르친다는 점”이라며 종교의 반지성주의를 공격한다. 그리고 이 반지성주의 자체가 종교적 폭력의 직접적 원인은 아니지만, 폭력을 일삼는 근본주의의 온상이 되어주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왜냐하면 근본주의자들과 똑같이 절대주의적 자기 논리에 갇혀 “둔감하고 예의 없는 질문”을 일삼는 종교는 자기 경험에 진실하다기보다 상대방에게 위험한 세력이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은 광신적 근본주의자가 되어 “역겹고 사소한 것에 몰두하느라 인생을 낭비하느니” 그 대신 “예수를 위해 무신론자”가 되라고 권하고 싶다고 말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도킨스의 주장에 담긴 과장과 오해 그리고 비아냥을 여러 곳에서 들었지만 쓴 약으로 받아 삼켰다. 그 역시 틸리히나 본훼퍼, 몰트만이나 스퐁 같은 이름을 열거하며 “그런 세심하고 미묘한 종교가 주류였다면 다른 책을 썼을 것이라”는 상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서로 공감하였던 “우울한 사실은 [그들과 같은] 개혁적인 종교가 [현실을 움직이는 일에서] 소수파라는 것”이었다.

기록적인 판매부수를 자랑한 이 책의 한국독자들이 모두 도킨스와 같은 합리주의적 무신론자들만은 아니었으리라. 거기에는 정통신학에서 답을 얻지 못하였지만 그 글을 읽으며 무릎을 치는 신앙인도 많았으리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이 신앙인들은 그 책의 어느 지점에서 자신의 신학적 논리가 한계를 맞고 있음을 느꼈을까? 최소한 두 곳에서 이 신심 깊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정통신학에서 배운 것만으로는 합리적 사고를 이어갈 수 없다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그 첫 번째는 조지 부시가 “신으로부터 이라크를 침공하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 말에 대해서 “딱하게도 신은 그곳에 대량 살상 무기가 없다는 계시[까지는] 내려주지 않았다”는 도킨스의 사족(p. 140)을 유념해서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미국의 대통령 후보에 나선 적이 있던 부흥사 팻 로버트슨을 비롯한 많은 미국의 목사들이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닥친 것은 뉴올리언즈에 살고 있는 레즈비언들의 죄 때문이라고 말할 때, 도킨스는 “당신이 전능한 신이라면 좀 더 표적을 좁혀서 범죄자를 해치우지 않았을까?” 하고 비웃는데(p. 360) 이점 역시 생각의 걸음을 멈추게 하는 대목이다.

도킨스의 글을 읽으며 (정통신앙이 이성의 세계를 만날 때) 좌절을 경험했을 젊은 시절의 마커스 보그를 연상하게 되었고, 지난 학기 내가 만난 학부의 신학생들뿐만 아니라 이 땅의 교회 안팎에서 고민하는 이름 없는 무수한 신앙인을 마음에 담게 된다. 그리고 그들에게 하고픈 말은 도킨스의 도움을 받아 정통신학을 깨뜨리고, 보그가 다다른 그 지점을 향해 나아가라는 권고다.

도킨스가 자신의 책에서 비판의 대상으로 삼은 신학은 정통신학이라는 고유명사를 일반명사로 소개하며 (여러 가지 이유로) 여전히 대다수의 교회 강단을 점령하고 있는 신학이다. 이 신학을 가리켜 마커스 보그는 “초자연주의적 신론”에 기초하였다 하였고, 지난 세기 중엽부터 범재신론을 새롭게 주장했던 찰스 하트숀은 “초월적 이신론”transcendental deism이라고 불렀다. 이 두 사람은 이러한 명칭을 부여함으로 (고유명사의) 정통신학이 오늘날의 계몽된 합리주의적 과학적 세계관과 더 이상 대화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더 나아가 이러한 상황에서 과학이 설명하지 못할 종교와 신앙 영역의 존재를 핑계 삼아 자신의 폐쇄적이고 독선적인 이해방식을 고집하고 있는 것은 건전하지 못하다는 (교회의 미래를 위해 해악적이기도 하다는) 비판을 한다.

정통신학이 때로는 복음주의라고 포장되고 때로는 (냉정한 비판자를 만나) 근본주의로 거명된다고 하더라도 그 이름이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만약 이 신학이 이신론적 세계관에 의거하여 자신의 신학적 목소리를 채운다면, 그 주장들은 무너져야 한다. 그때부터 한국교회와 신학을 덮고 있는 위기의 먹구름이 걷혀가기 시작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신학 방법론만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신학적 대안은 아니라는 점이다. 도킨스처럼 과학자였지만, 그와는 달리 과학과 종교와의 대화를 주장하며 이 분야의 독보적 업적을 남긴 핵물리학자 이안 바버는 ?과학이 종교를 만날 때?라는 책에서 과학의 합리적 세계관과 종교의 신학적 세계관이 서로 만나서 관계를 맺는 유형을 네 가지로 구분하였다.

첫째는 갈등모델이다. 이것은 과학적 유물론자와 성서문자주의자들이 과학적 논의와 종교적 논의가 가진 차이점을 깨닫지 못하고 자기 주장할 때 맺어지는 관계이다. 바버는 여기서 과학적 유물론자의 전형적인 예로 리차드 도킨스를 언급하고, 도킨스는 자신의 책에서 성서의 역사를 1만년 미만으로 보는 창조과학회나 (극단적) 지적설계론자, 폭력을 일으키는 종교 기득권자, 비과학적 종교 경험주의자, 이신론적 교리주의자를 주된 표적으로 삼았다.

둘째는 독립모델이다. 이는 과학과 종교가 서로 다른 종류의 언어를 사용하여 서로 다른 방향으로 질문을 (종교는 “왜?”를 과학은 “어떻게?”를) 던지고 있으므로 각자의 기능을 수행할 뿐 서로 충돌할 필요가 없이 때때로 상보관계를 가질 수 있음을 인정하는 관계이다. 바버는 이 유형의 신학에 개신교의 신정통주의와 하나님의 제1원인과 세상의 제2원인의 관계를 구분하여 설명하려는 가톨릭의 토미즘을 포함시킨다. 그러나 독립모델의 신학은 과학과 종교를 격리시키는 이원론적 평행(통전적 세계관의 구성 불가능성)이라는 대가를 치러야만 한다.

셋째는 대화모델이다. 이 대화법은 과학과 종교의 차이점만이 아닌 유사성 또한 인정할 때 가능하다. 이 모델의 주창자들은 과학이 객관적 관찰과 논리적 추론에 의지하는 특징을 갖고 종교가 주관적 경험과 실존적 결단이라는 특징을 갖는다고 할지라도, 과학이 생각만큼 객관적이지도 않고 또 종교가 주관적이지만도 않다는 주장을 한다. 과학과 종교는 하나의 전통 안에서 형성된 형이상학적, 철학적, 개념적, 방법론적 전제의 집합체로 형성된 공통된 사고 패러다임 위에서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넷째 통합모델이다. 이 방식은 대화모델과 공통된 이해를 갖고 있으나, 대화모델이 지닌 (개념적 통일성을 형성할 패러다임이나 철학적/신학적 틀을 제시하지 못하는)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대안적 사고 틀을 제공하는 방법이다. 이안 바버는 이 모델의 특징을 과정신학에서 찾고 여기서 진화와 창조의 관계, 자연 속에 존재하는 우연과 법칙의 관계, 인간의 자유와 하나님의 응답의 관계, 악과 고통의 존재 대한 신정론적 대답, 신의 남성성과 여성성의 통합적 이해방식, 종교 간의 대화 문제 등이 새롭게 조명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한다. 

이 네 모델 중, 갈등모델은 이신론적 세계관 위에서 벌어지는 공방이요, 통합모델은 범재신론 위에서 진행되는 신학적 모험이다. (독립모델은 전자에 기울고, 대화모델은 후자를 꿈꾸는 듯하다.) 필자의 눈에는 이 네 모델이 각자의 운명을 지니고 있는 듯하다. 갈등모델은 교회의 위기를 심화시켜 마침내는 교회로 하여금 독배를 마시게 할 것이요, 독립모델은 (외부와 차단된) 교회의 결속을 강화시키고, 대화모델은 교회의 외연을 넓힐 수도 그 외곽을 해체시킬 수도 있으며, 통합모델은 교회가 세상을 향해 나갈 때 지혜의 복음을 쥐어줄 것이라 생각한다.

다시 생각해 볼 문제는 (일반명사의 의미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정통신학은 무엇인가 이다. 여전히 유효한 판단의 근거는 성서가 증언하는 하나님(의 말씀)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직면하게 되는 문제는 성서 역시 신론의 발전과정을 보여줄 뿐 일관된 상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신앙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거슬러 올라가보면 거기에서 우리는 부족신의 성격을 가진 다신론을 발견하게 되고, 여호수아에 이르면 (다신론을 전제한) 강력한 택일신론의 제창을 듣고, 제2이사야에 와서야 창조신학을 동반한 유일신론을 보게 된다. 그러나 그 신론 역시 해석자에 따라 이신론으로 곡해되기 일쑤다. 또한 복음서에 나타난 기독론적 이해의 다양성 역시 성서적 전거를 찾고자 하는 신학자들을 미궁으로 빠뜨리곤 한다. 어떻게 성서의 말씀으로 이 시대의 정신을 꿰뚫고 나갈 길을 찾을까?

니케아 회의(325년) 이후 최소한 9번 이상 아리우스파에 의해 점령된 주교회의를 통해 (그 중엔 250여명이 모인 니케아 회의보다 훨씬 많은 400여명의 주교로 구성된 리미니-셀류키아 회의(359년)도 있었다) 니케아 신조는 번복되곤 하였다. 이 상황은 동서방 로마의 아우구스투스들의 역학관계에 따라 생겨난 변수가 강하게 작용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결국 381년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 니케아 신조가 최종 확정 될 수 있게 된 과정에는 카파도기안 신학자들에 의해 착실하게 준비된 신학적 상수도 있었다. 니케아 회의에서 미처 다루지 못한 성령에 대한 신학적 이해의 문제로 생긴 논란을 잠재우기 위해 바질은 374년 “성령론”을 집필한다. 아직 성령에 대한 신학적 정설이 없던 시기에 바질이 택한 학문적 자세는 오늘 우리에게 교훈이 된다. “진리는 쉽게 얻을 수 없는 목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그 흔적을 찾아 모든 곳을 보아야 한다. 진정한 종교를 획득하려면 공예crafts를 하듯 조금씩 자라나는 과정을 거쳐야한다. 도제徒弟들은 어느 것 하나 버리지 말아야 한다.”(I.2)

이 도제의 정신으로 성서가 증언하고자 했던 복음의 내용, 세상을 사랑하신 구원의 하나님의 말씀을 이 시대의 언어로 옮겨볼까 한다. 이신론적 신학 방법론에 의해 배제되고 가려졌던 신학적 고민들을 빠뜨리지 않고 끄집어내 한올한올 짜 갈 수 있는 지혜가 생겨나길 빌 뿐이다. 다음 호부터 이어질 글들은 과정신학이 발전시켜온 통합모델 즉, 범재신론의 입장에서 중요한 몇 가지 신학사상들을 토론해 볼까 한다.
 
 
 기장회보 / 492호
 
 
 
 
늘오늘 (08-05-09 04:11)
 
다음 글이 기대됩니다.
진심으로, 간곡히, 다음 글의 연재를 부탁드립니다. ^^



게시물수 1,218건 / 코멘트수 2,021건 RSS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허위 기재로 가입하실 경우 접속 제한 및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관리자 22962 06-16
[알림] 이곳 자유토론게시판에 펌글을 올리시는 모든 분들께..정확한 출처 표기 바람! 관리자 26220 09-13
★ 회원 가입시 유의 사항 (정확한 메일주소 기입 요망) (1) 관리자 95124 07-10
토론(논쟁)이 주는 즐거움과 가치 미선이 31852 01-28
몸학기독교는 '예수'보다 '오류'를 더 섬기는 곳인가요? (12) 미선이 35536 06-14
이곳의 새로운 기독교 운동 포지션 : 기존 기독교 및 안티기독교에 대한 입장 관리자 34457 02-10
★ 이곳에 처음 오신 기독교인이라면 필히 읽어주세요~^.^! 정강길 43276 07-02
[필독] 기독교 전통에 대한 몸학기독교의 입장 (2) 관리자 37124 05-30
[논쟁3] 다비아 정용섭 목사와의 논쟁 (헨리 나우웬과 전통 기독교에 대한 시각차이 논쟁) (12) 미선이 58784 11-28
♣ 지난 날에 썼던 정치 사회 시사적인 글모음 정강길 49757 11-11
[필독] 논쟁(혹은 토론)의 기술 : 참다운 자유토론을 위하여 관리자 46099 04-22
418 아! 혜진아! 예슬아! 이신우 5326 03-21
417 [펌] 중국 강경 진압으로 티베트 유혈사태 사망자만 80명, 베이징 올림픽 흔들 미선이 9395 03-18
416 죄와 사망이 아담 한 사람으로부터 세상에 들어왔는가 김영순 5801 03-18
415 [펌] 리차드 도킨스와 마커스 보그를 통해 본 신학방법론 (김희헌) (1) 정강길 9225 03-17
414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김영순 6241 03-16
413 인간 본성에 대한 기존 신학의 문제점. jojn 4691 03-05
412 인간 존재 본 생명과 형상화(영성의 근본 의미와 그 방법01) jojn 5005 03-05
411 "하늘나라에 가장 가까운 것은" (정연복) (1) 미선이 6560 03-02
410 천국의 비밀을 아는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됨 김영순 6032 03-01
409 전업주부다이어트는 이렇게 (1) 허브시아 5785 02-29
408 성경의 대맥, 징조와 사시를 이루라 김영순 5731 02-27
407 삼각 관계ㅋ 정강길 5386 02-26
406 살안찌는 음식 허브시아 6581 02-24
405 요번주 일요일엔 모두 청계천으로^^ 무신론 5506 02-21
404 하나님의 말씀만이 사람을 온전케 합니다. (9) 이신우 6829 02-21
403 [3/13 저녁7시] <소외된 이들을 위한 인문학> 무료입니다. 많이 오세요! Artizen 5443 02-17
402 청소년의 성과 동성애 (웰스프링 세미나, 2월 28-29일) (2) 웰스프링 6971 02-15
401 성경은 그렇게 시시한 책이 아닙니다. (1) 이신우 6238 02-14
400 [이웃 종교 소식]과 [상담 전용 게시판]을 새로 마련했습니다. 관리자 9832 02-14
399 어느 열 받은 안티기독교인에게.. 정강길 8348 02-13
398    위의 게시글을 읽고 몇자 끄적여본다. (4) 스마일맨 7493 02-15
397    반기독교인이 두 번째로 드리는 말씀 (최신근) (6) 미선이 8524 02-15
396       안티기독교인 최신근씨 글에 대한 반론 미선이 7506 02-15
395 성경말씀은 영의 언어입니다. (6) 이신우 6949 02-12
394 증언을 받아오면 증인 1인당 5천만원 드립니다 (1) 스토킹 피… 5474 02-11
393 [펌]고려대·소망교회 `新 KS인맥`이 뜬다 미선이 5980 02-11
392 대언자와 진리증인에게 관리자 5606 02-11
391 이곳의 새로운 기독교 운동 포지션 : 기존 기독교 및 안티기독교에 대한 입장 관리자 34457 02-10
390 진리란 무엇인가? (1) 이신우 5688 02-09
389 신약성경의 복음서신은 오류가 있어야 정답 김영순 5367 02-09
388 패러다임 쉬프트(paradigm shift) (7) 이신우 8350 02-09
387 한 번쯤은 생각해 보아야 할 과제입니다. (1) 컨설턴트 5321 02-06
386 "민주노동당은 죽었다"(진중권) 정강길 6713 02-05
385 [펌]동성애혐오증 고발 “게이사실 폭로 아웃팅 괴로웠다” 미선이 9275 02-05
384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외계인들 김영순 7104 02-04
383 ['세기연'의 정강길 님에게 드리는 글] (1) 대언자 6727 02-04
382 “전엣 계명이 연약하며 무익하므로” (1) 대언자 5146 02-04
381 [펌] "한반도 대운하, 그 뒤에 숨은 욕망을 보라" 미선이 5477 02-03
380 [제가 올리는 글이 옳다고 생각하여 부담을 느끼지 않습니다] (1) 대언자 4596 02-03
379 [기독교의 경전인 성경을 무시하고 부정하는 신학교수들과 목사들에게 고함] (3) 대언자 6386 02-03
378 전형적인 보수 근본주의자 '대언자'의 게시판 글쓰기 제한을 요구합니다. (3) 컨설턴트 7288 02-02
377    [기독교인이 쓴 참으로 폭력적인 글입니다.] 대언자 4747 02-03
376       저, 기독교인 아니거든요? 적어도 님이 생각하는 그런 기독교인 아니랍니다 ㅠ.ㅠ 컨설턴트 6354 02-05
375 세기연 가입 (2) 좌파기장 5730 02-01
374 [동성애에 대하여] (4) 대언자 6472 01-31
373    [회개하고 돌이켜 지키도록 함이 마땅할 것입니다] (4) 대언자 5995 02-03
372 나사로반열 같은 님들에게 고함 (4) 김영순 5529 01-30
371 [동영상] 교회 앞에서 벌거벗고 예수님을 부르다 "네 이웃의 비정규직을 사랑하라" 미선이 6636 01-29
370 [사진] 탑골공원 대운하반대 서명운동 모습 무신론 4994 01-28
369 [펌] 종추련 이드 사무처장 보름째 연락두절…경찰, 전국수배 조치 (1) 미선이 5911 01-20
368 [돈을 받고 하나님의 축복을 팔아먹는 거짓 목사들] 대언자 5216 01-17
367 대학등록금 20%인하 서명운동에 동참해주십시오. 늘아침처럼 5426 01-17
366 [2/13 저녁 7:30] 황대권 - 생명평화운동과 초록문화 Artizen 4831 01-15
365 ‘자기 실현’에 성공한 사람들의 15가지 심리적 특징들 (매슬로우) 미선이 9073 01-13
364 대운하반대서명운동에 동참합시다!!! 무신론 4393 01-10
363 바보야, 경제 다가 아냐! (1) 장동만 5127 01-03
362 [해외동향] 독일_‘새로운 무신론자’에 관한 논의 미선이 5728 01-03
361 375번 정강길님의 글에 대한 저의 생각입니다. (2) 조정현 5686 01-02
360 [기독교의 목사들은 선지자 나단과 같은 자들이 되라] 대언자 4824 12-29
359 예수님은 마굿간에서 태어나셨다. 그 이유는 (7) 김영순 9132 12-28
358 정강길 선생님께! (1) 두발로 6641 12-28
357 [조화순 목사님 인터뷰] 하얗게 센 머리, 면류관이었네! 미선이 7444 12-26
356 [쿠키뉴스] 무신론의 발흥에 고심하는 미국기독교계 미선이 12536 12-22
355 시민사회운동의 대안찾기 (박종렬) 미선이 4899 12-13
354 한국인의 4대 한(恨)과 유권자 선택 (3) 김금산 6146 12-02
353 김씨 성의 유래와 유권자 선택 김금산 7127 11-30
352 “마음에 찔려” (1) 대언자 5780 11-28
351 안티기독교에게 당부한다. (3) 정강길 6764 11-28
350 [토론회 발제문] 해외에서 본 안티 운동 - 지성수 목사 (호주 시드니 사랑방) 관리자 7973 11-26
349 [토론회 발제문] 대안기독교 입장에서 보는 안티기독교 - 정강길 관리자 6733 11-25
348 [토론회 발제문] 보수측 입장에서 보는 안티기독교 - 조성돈(실천신학대학원 교수) 관리자 5718 11-25
347 과도기운과 3대운으로 본 미래 예측 김금산 6076 11-23
346 민심과 천심으로 본 미래 예측 김금산 5149 11-21
345 한국무신론자협회가 탄생했습니다 무신론 7642 11-20
344 예수 믿으면 엿 먹는다(?) 미선이 5715 11-16
343 [펌] '가장 악명 높은 무신론자는 어떻게 전향했나' 미선이 8231 11-16
342 “나를 사랑하는 자” 대언자 5345 11-13
341 [펌] 11월 11일에 일어난 폭력 시위에 대해... 세인트 5249 11-12
340    폭력 시위를 바라보는 사람들에 대해... (1) Suns 5728 11-19
339 11월12일(월) 오후2시 <미래에서 온 기독교>책 강좌 있습니다. 관리자 5241 11-10
338 미국 남부 캘리포니아에 있는 진보적인 이민 교회를 찾고 있습니다. (1) 진달래타는… 5811 11-09
337 감신대 종교철학회 추계강좌 - 과정철학의 신 이해 미선이 6298 11-07
336 [펌]"철학 전공? 그럼 점 볼 줄도 알겠네" 치노 4999 11-06
335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대언자 4591 11-05
334 [펌] 목사가 세운 신학대학, 학위 위조 운영 미선이 5762 11-03
333 종교인과 대선 김금산 5359 11-01
332 [펌] 불교의 영성과 심층심리학 특강 미선이 6007 10-30
331 새로운 기독교를 위한 강좌 예고 (1) 김금산 4844 10-23
330 몇권의 책들 소개 합니다^(^ (1) Stephen 5123 10-21
329 “믿는 자마다 멸망치” 대언자 4338 10-17
328 허리 라인 가꾸는 반달 자세 (2) 짱짱맘 5614 10-10
327 신의 부재 증명(논리 게임) (3) 치노 7011 10-07
326 신과 종교, 리처드 도킨스 vs 스캇펙 차이점 미선이 5853 10-07
325 가신님 붙잡지 말고 오시는님 붙잡아두어리 (6) 김영순 5981 10-06
324 “지극히 작은 것에” 대언자 4724 10-05
323 여자의 후손은 누구인가 김영순 6054 10-02
322 신존시대는 처음하늘 처음땅이요, 인존시대는 새하늘 새땅이다 김영순 4644 10-01
321 미얀마 유혈사태…민생불만서 촉발 민주화요구 ‘폭발’ 미선이 5517 09-27
320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보라 하나도 빠진것이 없고 (7) 김영순 5601 09-27
319 자연인(自然人)과 하나님형상의 사람은 다르다(추가했음) (4) 김영순 6363 09-25
 1  2  3  4  5  6  7  8  9  10    



Institute for Transformation of World and Christiani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