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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교회와 사회를 변혁하기 위한 신학의 변혁 (필립 클레이튼)    
  글쓴이 : 미선 날 짜 : 13-02-06 03:57 조회(5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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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사회를 변혁하기 위한 신학의 변혁
(Transformation of Theology for Transforming the Church and Society)

필립 클레이튼(Philip Clayton)

클레어몬트 신학교 학장 및 조직신학교수



오늘 여러분에게 강연을 할 수 있는 특권을 주셔서 감사를 드립니다. 특히, 오늘 여기에 올 수 있도록 도와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클레어몬트 신학교의 전체 학생 중 약 30%가 한국학생들입니다. 제가 지난 10년 동안 클레어몬트 신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는데, 한국학생들과 한국교수님들이 저의 사고와 실천에 중대한 영향을 끼쳐왔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에게 오면서 저는 매우 기쁜 마음으로 많은 기대를 가지고 왔습니다.

강연의 제목을 “교회와 사회를 변혁하기 위한 신학의 변혁”으로 정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적어도 저의 나라 미국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교회의 변혁에 관하여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급변하는 세계 속에서 기술과 소셜 미디어는 인간의 상호작용 및 소통형성의 방식을 빠르게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그 결과로 오늘날의 사람들은 과거에 비하여 더 복잡한 정체성들을 지니며 더 다양한 역할들을 담당합니다. 교회가 하나님 앞에 있는 그 무엇이라고 하더라도, 교회는 또한 인간의 제도임을, 그래서 교회는 매우 구체적인 역사적 특징들과 문화적 특징들을 지닌 제도임을 사람들은 깨닫습니다. 이러한 특징들 중에서 많은 것들이 과거시대의 것입니다. 오늘날의 세계에서 교회가 여전히 적실성을 지니며 여전히 유효할 수 있기 위해서 우리는 교회라는 제도를 어떻게 변혁시킬 것입니까?
 
변혁이라는 개념은 기독교적 삶과 사상의 최중심부에 놓여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12장 2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이 세대의 형태]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변혁]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우리가 앞으로 살펴보는 바와 같이, 신약은 변혁의 신학을 풍성하게 전개할 수 있는 기초를 제공하여 줍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어떠한 이유로, 성경적이면서도 변혁적인 신학들을 형성하는 것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여 왔습니다. 미국 교회의 상황을 먼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미국교회는 특히 어려움에 처해 있습니다(한국교회의 상황이 비슷한지, 아니면 전혀 다른지를 제게 말씀해주세요). 저의 나라 미국에서, 성경문자주의자들(Biblical literalists)은 철저한 변혁을 진지하게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이 신약에서 일어났었던 변혁들에, 즉 신앙과 실천 상의 변혁들에 문자 그대로 관심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아울러 성경문자주의자들(Biblical literalists)은 그러한 변혁들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우리가 채택해야 하는 정확한 조치들로서 지지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고린도 지역의 교회를 휩쓸고 있는 혼돈에 대한 바울의 해결책들 중의 하나는 고린도전서 14장 34-35절에 있습니다. 즉, 여자는 교회에서 말하지 말며, 기다렸다가 집에 가서 자기 남편에게 묻도록 요구하였습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11장 5-6절 및 10절에서 바울은 다른 구체적인 이유들로 인하여 여자는 머리에 베일을 쓸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성경문자주의자들(Biblical literalists)은 이러한 말씀들이 오늘날 여성들의 행동을 똑 같은 방향으로 “변혁해야” 하는 충분한 이유가 된다고 여깁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성경을 읽는 것이 오늘날의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최선의 방식이 되는지에 관해서는 저로서는 여러 가지 이유들로 인하여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진보적인 기독인들과 신학자들(Progressive Christians and theologians)은 더 세련된 틀을 사용하여 성경을 해석합니다. 그러나, 적어도 저의 나라 미국에서는, 이들에게도 또 다른 종류의 문제들이 생겨납니다. 즉, 때때로 전혀 변혁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진보적인 정치인이 교회를 다니기 시작합니다. 얼마 동안 교회를 다닌 후에 그는 진보적인 기독인이 됩니다. 진보적인 정치인에서 진보적인 기독인으로 명칭은 바뀌었으나, 그것 뿐입니다.
좀 더 많은 관심을 끄는 다른 경우들에서, 진정한 변혁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새롭게 기독인이 된 자들은 정의를 촉진시키고 억압에 저항하며 가난한 자들을 편들라는 소명을 이해하고 받아들입니다. 자신들의 삶의 양식들과 행동들을 통하여 이러한 가치들을 반영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미국의 많은 진보적인 교회들이 가지는 문제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들의 신념들과 실천들을 기독교신학적으로 정당화하는 작업을 전혀 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설상가상으로, 이들은 그러한 신학들이 적실성이 없으며 또한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들은 제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진보적인 가치들과 삶의 양식들은 본질적으로 선하다. 반면에 신학에 관하여 생각하는 것은 단지 보수적인 기독인들이 하는 활동이다. 사회의 부정의는 명백하게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정의의 가치를 정당화하는 작업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문제는 이럼으로써 성경연구(그리고 성경에 관한 신학적인 성찰)가 적실성이 없는 것이 된다는 점입니다. 참으로, 거의 모든 기독교적 용어가 중요성을 상실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물론, 정의와 가난과 억압과 관련된 주제들이 명시적으로 언급되는 성경구절들과 전통은 예외입니다.
 
보수주의자와 진보주의자와의 이러한 이분법적 분리는 애석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분열은 오늘날의 세계에서 교회의 통일성을 손상시키고, 교회의 목소리의 효력성을 떨어뜨리며, 기독교적 실천의 정합성을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분열이 초래하는 다른 결과들로, 진지한 진보적인 신학의 부재가 다음과 같은 인상들을 끼칩니다. 즉, 모든 신학들이 보수적이라는 인상을, 진보적인 가치들은 어떤 정당화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기독교 진보주의자와 세속적 진보주의자가 동일하다는 인상을, 그리고 예수-언어(Jesus-language)는 오직 근본주의자들의 소유라는 인상을 줍니다. 그래서 우리가 의도하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진보적인 기독인들의 언어를 (말하자면) 잘라버린 것이 되었습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개인주의적인 인격성장에 요구되는 필요들 및 교회의 내적인 관심들만을 충족시킬 수 있는 일방적인 기독교신학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진보적인 신학들이 없다면, 교회의 예언자적 목소리는 제거됩니다. 그리고 교회의 예언자적 목소리가 침묵하게 된다면, 오늘날의 세계에서 교회가 어떻게 계속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손과 발과 목소리가 될 수 있겠습니까?
남은 시간 동안 저는 진보적인 신학들을, 즉 당당하게 그리고 확고하게 기독교적이면서도 진보적인 신학들을 다시 불 붙일 수 있는 틀을 상세하게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러한 신학들은 예수의 말과 행동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에, 교회 전체가 이러한 신학들을 자랑스러워하고 간직해야 합니다.


변혁의 신학(A Transforming Theology)

 
기독교 교회의 신학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계시로부터, 그러므로 예수의 말과 행동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이 점에 관하여 성경의 권위있는 학자들은 일치합니다. 예수의 어머니인 마리아가 수태고지에 대하여 보인 첫 번째 반응은 전통적으로 마리아찬가(Magnificat)로 알려져 있습니다. 여기에는 예수의 사역의 핵심가치들이 이미 표현되어 있습니다. 마리아는 비천한 자들 중에서도 가장 비천한 자이었습니다. 즉, 마리아는 로마가 점령한 이스라엘의 가난한 유대인 여자였고 혼인하지 않은 채로 아이를 잉태하였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하나님께서 온 세계의 질서를 전복시키시는 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 손으로 보내셨도다(눅 1:46-47, 51-53).

예수가 성인이 되어 공적으로 행한 첫 번째 말은 하나님 및 하나님의 사자에 관한 마리아의 설명을 분명하게 반향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자신의 고향인 나사렛의 회당에서 일어서서 이사야서를 낭독하면서, 자신의 공적인 사역을 시작하기 위하여 선택한 성경본문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라(눅 4:18-21).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전파하는 것,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는 것,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는 것 ? 이러한 것들을 위하여 예수는 자신이 부름을 받았다고 말씀합니다. 마리아찬가(Magnificat)를 반향시키고 있음이 확실합니다. 포로된 자들, 눈 먼 자들, 눌린 자들 ? 바로 이러한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가 자신의 메시지와 전체 사역을 집중할 의외의 대상들인 것입니다.
 
기독교신학은 하나님의 은혜와 계시에 대하여 예수의 제자들의 사상과 행동 안에서 드러난 응답으로서, 이 응답은 어려운 자들의 관점에서 해석되며, 우리 자신의 시대와 문화와 지역의 개념적 범주들의 관점에서 해석된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여기에서 언급한 본문들과 함께 우리의 신학들을 시작한다면, 우리는 무엇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셨다. 그러면 여러분은 여기에서 무엇을 도출하여 낼 수 있겠습니까? 세 가지를 도출하여 낼 수 있다고 저는 제안합니다. 즉, 첫째, 거꾸로 뒤집어 놓으시는 하나님(a topsy-turvy God). 둘째, 위를 아래로 전복시키는 윤리(an upside-down ethics). 셋째, 안에서 밖으로 나가는 흩어지는 교회(an inside-out church). 이제부터 예수 신학(Jesuanic theology)이 지닌 세 가지 특징들을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거꾸로 뒤집어 놓으시는 하나님(A topsy-turvy God). 여러분은 아마도 우주의 하나님이며 만물의 창조주인 자는 독재자이며 전능한 통치자이며 무자비한 왕이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과 은혜로 모든 살아있는 것들에로 다가가시는 분입니다. 이것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알려진 하나님은 케노시스(kenosis), 즉 자기비움(self-emptying)의 특징이 있습니다.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던”(빌 2:6-7) 그 분이 하나님의 본성을 가장 충분하게 알리셨습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면, 자기비움의 정도가 죽음보다 더 완전한 경우는 없습니다. 요한은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 15:13)라고 기록하였습니다. 빌립보서의 유명한 케노시스 구절은 정확하게 이러한 정도까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8).
 
인간의 권력관계들의 관점에서 볼 때에, 이와 같은 것은 어느 것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볼 때에, 이와 같은 것은 마치 하나님에 관하여 거꾸로 뒤죽박죽으로 설명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케노시스의 관점으로 볼 때에, 그것은 전적으로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저는 이것이야말로 신약의 본문들에 걸쳐있는 공통된 주제이라고 제안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후 12:9)라고 말하는 바울의 역설에서 시작한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권능에 관하여 뭔가를 알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 위를 아래로 전복시키는 윤리(An upside-down ethic).
 
다음과 같은 팔복은 예수의 윤리체계의 중심을 드러냅니다: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너희가 인자를 따르는 자이기 때문에
그들이 이 모든 일을 하느니라.
그들의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이러한 일들이 너희에게 일어날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며 화가 있도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Luke 6:17-26).
 
마리아찬가와 같이, 이러한 윤리세계에서의 모든 것들은 위를 아래로 전복시키는 것처럼 보입니다. 권력에 기반한 윤리와는 정반대입니다. 이러한 메시지는 이해하기 어렵지 않으며, 다만 놀라울 뿐입니다. 기독교신학자들은 이러한 예수윤리(Jesuanic ethic)를 그리스나 유럽의 철학적 체계들을 토대로 하는 하나의 깔끔한 체계로 자주 순응시켜 버립니다. 우리는 예수윤리를 희석시키기 보다는 오히려 예수윤리를 본래의 모습대로, 즉 인간의 역사에서 가장 과격한 “가치들의 변혁”의 모습대로 드러내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위를 아래로 전복시키는 이러한 윤리를 철학적인 언어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즉, 이러한 윤리는 자신을 고려하는 것보다는 “남을 고려하는 것”을 우선시하는 윤리입니다.[1] 이러한 예수윤리는 가족이나 친족을 먼저 고려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마 12:48)고 물으셨던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윤리는 “우리 대 그들”이라는 대립관계를 허용하지 않는 윤리입니다. 그 대신에 우리는 원수를 이웃만큼 사랑하고 도와야 합니다. 철학자들이 명명하는 “상호이타주의(reciprocal altruism)”(즉, 네가 나를 도와주기 때문에 내가 너를 돕는다)는 보편적 이타주의(universal altruism)에로 우리를 나아가게 합니다. 즉, 나는 다른 모든 자들을 똑같이 도와주도록 부름을 받습니다.

 
철학자들은 이러한 윤리를 초과의무의 윤리(ethics of supererogation)로 명명하곤 합니다. 즉, 산상수훈에서처럼 남에 대한 의무가 무제한적이라고 여기는 윤리적 입장입니다. 이러한 일이 일어날 때, 윤리는 계산적인 영역을 넘어설 수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는 말씀으로 예수가 기대감을 무한한 수준으로 올리셨을 때에 예수는 이러한 결과를 의도하셨음이 분명합니다. 엠마누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가 표현하듯이, 타자에 대한 우리의 의무들은 유한하지 않고 무한합니다.[2] 신학적으로 이것은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긍휼이 무한하기 때문에, 타자를 향한 우리의 긍휼도 또한 무한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이러한 윤리를 확증할 때마다 여러분은 비례성(proportionality)의 원리에 기반한 윤리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또한 권위에 대한 복종(obedience)의 윤리를 인간적으로 불가능한 것으로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하나님의 은혜가 인간행동의 유일한 정황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마 19:26).


이와 같은 기준으로부터 어떤 교회론이 도출될 수 있겠습니까? 교회가 거꾸로 뒤집어 엎으시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위를 아래로 전복시키는 예수의 윤리를 실천한다면, 교회가 어떤 모습이 될 것 같습니까?

셋째, 안에서 밖으로 나가는 흩어지는 교회(An inside-out church). 아마도 한국에서는 다르겠지만, 미국에서는 교회들에 관해 제일 먼저 발견할 수 있는 점은 장벽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장벽들로 인하여 교회는 교회 아닌 세상과 분리되며, 교회 안에 있는 사람과 교회 밖의 사람이 분리됩니다.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교회를 정의하기 위하여 대개 장벽들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장벽들로 인하여 우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당신네들과 같지 않소. 이것이 기독인이 된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요.”

 
문제는 이러한 접근법이 - 사회 내에 있는 하나의 그룹을 모든 다른 그룹들과 대립적인 관계 하에서 정의하는 표준적인 방식의 접근법이 - 제가 방금 기술하였던 예수의 윤리와, 즉 위를 아래로 전복시키는 윤리와 충돌한다는 점입니다. 보편적 이타주의의 원리인 아가페(agape)를 받아들인다면, 배타성의 관점으로 교회를 정의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의 윤리는 배타의 논리를 전적으로 폐기하였기 때문입니다.

 
장벽들은 단지 경계선만을 표시하지 않습니다. 또한 그것들은 외부인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오기 위해서 반드시 넘어야 하는 장애물이 됩니다. 히르쉬(Hirsch)와 프로스트(Frost)가 다음과 같이 말하는 바와 같습니다. “전통적인 교회에서는 사람들이 교회의 문화적, 신학적, 사회적 장벽들로 형성된 복잡한 미로를 넘어 교회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매우 어렵다. …. 그리고 교회 안으로 새로 들어온 자들이 교회 주위에 세워진 울타리들을 넘어설 때에는, 이들도 이미 교인들로 동화되어 버려서 자신들이 본래 속하였던 사회그룹들과는 어떠한 연관성도 유지할 수 없게 된다.”[3]

학자들은 “경계집합(bounded sets)”과 “중심집합(centered sets)”을 구별합니다. 최근에 신학자들은 교회를 더 이상 중심집합(a bounded set)으로 생각해서는 안되고 이제 “중심집합(a centered set)”으로 여겨야 한다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히르쉬(Hirsch)와 프로스트(Frost)는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경계집합에서는, 세련되게 정의된 이념적-문화적 경계선에 ? 보통 신조상의 규정들과 도덕적 및 문화적 규범들에 - 근거하여, 누가 (울타리) 안에 있고 누가 밖에 있는지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경계집합은] 이러한 경계선들을 넘어서는 핵심적인 정의를 많이 다루지 않는다. 경계선은 접근하기 어렵지만 중심은 용이합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중심집합은] 마치 중심부에 수원이 있는 [오스트레일리아] 오지의 큰 목장과 같다. 중심부에 매우 강력한 이데올로기가 있지만 경계선들은 없다. 중심부는 접근하기 어렵지만 가장자리는 용이합니다. 새롭게 생겨나는 문화 속에서 선교적 공동체들을 세우는 것에 필요한 실질적인 단서는 중심집합에 놓여 있음을 주장한다.[4]

그래서 드와이트 프리센(Dwight Friesen)은 교회를 그리스도 중심적인 중심집합(a Christ-centered set)으로 정의할 것을 제안합니다. 예수의 삶과 가르침들이 중심에 놓여 있으며, 원하는 자들은 예수에게로 가능한 한 가까이 다가올 수 있습니다.[5] 여기에는 어떠한 장벽들도 쳐져 있지 않습니다. 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올 수 있습니다(참고. 계 22:17).

그리스도 중심적인 교회론(a Christ-centered ecclesiology)은 교회를 안에서 밖으로 나가는 흩어지는 교회로 만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전에는 기독인들이 다른 기독인들과 함께 사귐으로써, 즉 똑같은 것을 보고 똑같은 것을 말함으로써 기독인의 정체성을 형성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기독인의 정체성은 세상 안에서의 살아있는 예수윤리로부터 형성될 것입니다. 이전에는 사람들이 예수가 누구이었는지를 발견하기 위해서 우리에게로 와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가 그들에게로 가서 예수가 누구인지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이전에는 사람들이 우리의 건물들 안으로 들어와서 우리가 그들에게 말하는 해답들을 그들이 들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가 그들과 함께 앉아서 그들의 질문들이 무엇인지를 들어야 합니다. 예수의 철저한 방식대로 산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 때, 우리가 믿는 바와 우리가 그렇게 사는 이유에 관하여 많은 시간 동안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말하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제자도의 삶과 케노시스(kenosis)의 윤리는 어려운 일입니다.

안에서 밖으로 나가는 흩어지는 교회를 잠시 동안 그려보십시오. 교회 건물의 천장이 제거되어 있다고 상상해보십시오. 그리고 사방의 장벽들이 조용하게 바깥쪽으로 무너져 우리 주위에 놓여 있다고 상상해보십시오. 그러면 갑자기 우리는 밖을 볼 수 있고 다른 이들은 안을 볼 수 있습니다. 자연스럽게 다음에 할 일은 무엇입니까? 자리에서 일어서서 밖으로 걸어나가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만나고 인사를 나누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물을 것입니다. “당신들은 누구입니까? 그리고 당신들이 왜 이러한 방식대로 살고 있습니까? 우리 시대의 가장 난해한 문제들에 관하여, 그리고 오늘날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세계문제들 중에서도 가장 복잡한 문제들에 관하여 당신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러면 우리는 거리로 나가서 이들과 함께 앉아서 차를 마시며 얘기를 나눕시다. 그들의 말을 경청하고 그들을 알아 갑시다. 교회의 장벽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안에 있는 자들은 밖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장벽들 안에 갇혀있지 않습니다. 안에 있는 자들이 밖으로 나갈 때에, 밖에 있는 자들이 안으로 들어오기가 훨씬 더 쉽습니다.


결론(Conclusion)

우리 주변 모두에서 변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오늘날과 같이 급격한 속도로 일어나는 변화를 인류가 이전에 경험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변화를 요구하는 소리들이 범세계적인 교회들로부터 들려오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교회와 사회의 참된 변혁의 토대를 잘 갖춘 기독교 신학들을 발견하는 일에 있어서 우리가 얼마나 잘 해왔었는지요?

저의 나라 미국에서, 보수적인 신학들은 성경적인 토대를 갖추고 있습니다. 보수적인 신학들은 내적인 변혁과 개인인격의 성화를 장려합니다. 그러나 사회의 변혁을 촉진하는 일에 있어서는 효과적이지 못하였습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진보적인 교회들은 예수가 대변하였던 자들, 즉 가난한 자들, 억눌린 자들, 폭력의 희생자들, 그리고 고통 당하는 자들을 훨씬 잘 옹호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유로든지 진보주의자들은 예수의 본보기들을 기독교 신학들로 충분하게 전개하고 발전시키는 일에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기독인들이 이렇게 깊이 분열되어 있다면, 하나님의 나라로 명명되는 철저한 변혁을 일으키는 데에 교회가 어떻게 기여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예수의 가르침과 행동들의 중심적인 특징들을 집중적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예수의 삶 안에서 그리고 예수의 삶을 통하여 내적인 변혁과 외적인 변혁에로의 철저한 부르심이 있음을 주목하였습니다. 이렇게 기대하지 못하였고 심지어 놀랄만한 복음은 거꾸로 뒤집어 놓으시는 하나님(a topsy-turvy God)과 위를 아래로 전복시키는 윤리(an upside-down ethic)를 가르칩니다. 이러한 하나님은 케노시스(kenosis)의 하나님입니다. 즉,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십자가의 수치를 당하신 하나님입니다. 케노시스 신학(a kenotic theology)은 필연적으로 전복의 윤리(an ethic of reversal)를 주창합니다. 왜냐하면 (마리아가 말한 것처럼) 바로 이런 하나님은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시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자들에게 주시는 은혜를 중심으로 삼는 신학은 권세와 특권에 대한 심판을 중심으로 삼는 윤리를 일으킵니다.

기독인들이 이러한 케노시스 신학을 주장할 때, 기독인들은 교회를 안에서 밖으로 나가는 흩어지는 교회로 바꿀 수 있습니다. 장벽들 뒤에 앉아 있으면서 어떤 사람들을 받아들일 것인지에 관하여 기준들을 설정하는 대신에, 우리는 밖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어려움이 있고 부정의가 있는 곳은 어디든지 나아가야 합니다.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뿌려야 합니다.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의심이 있는 곳에 믿음을, 절망이 있는 곳에 소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뿌려야 합니다.”[6]


미주(Endnotes)
 
[1] See Jeffrey Schloss, “Evolutionary Perspectives on Other Regard,” now available on the web at: http://www.altruists.org/f128, accessed Oct. 1, 2011.
[2] See Emmanuel Levinas, Totality and Infinity: An Essay on Exteriority, trans. Alphonso Lingis (Pittsburgh, PA : Duquesne University Press, 1998).
[3]Alan Hirsch and Michael Frost, The Shaping of Things to Come: Innovation and Mission for the 21st-Century Church (Baker Books, 2004). See also the discussion of these ideas on the web at http://nextreformation.com/wp-admin/general/centered.htm, accessed Oct. 2, 2011.
[4]Alan Hirsch and Michael Frost, The Shaping of Things to Come.
[5] Dwight Friesen, Thy Kingdom Connected: What the Church Can Learn from Facebook, the Internet, and Other Networks (Baker, 2009).
[6]From the Prayer of St. Francis of Assisi; see http://www.catholic-forum.com/saints/pray0027.htm, accessed Oct. 2, 2011.
 
 
출처 : http://www.cyworld.com/jdj0921/3602940
 
 
[언론보도]
 
 
필립 클레이튼 “현 시대 복음의 한 면만 제시해선 안돼”
 
 
미국 클레어몬트신학대학원 필립 클레이튼(Philip Clayton) 학장이 12일 서울 수유동 한신대 신대원에서 ‘종교다원사회 상황에서 기독교 신학의 변혁’이라는 주제로 강연했다.

필립 클레이튼 학장은 영국의 천체물리학자인 스티븐 호킹이 자신의 책 ‘위대한 설계’에서 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생물학자인 리처드 도킨스가 이를 지지하자, “도킨스는 호킹의 발언을 종교의 최대 라이벌로 과학을 규정하는 데 이용할 것이고, 그에 대한 답례로 종교인들은 종교의 이름으로 과학의 죽음을 선언할 것”이라며 논쟁을 벌여 화제가 됐었다.

이날 강연에서 그는 ‘진보’(progressive)와 ‘보수’(conservative)로 나뉜 미국 교회 현실을 직시하며 종교 다원주의 사회 상황이라는 시대적 조류에 바람직한 신학적 방향을 제시하고자 노력했다.

그는 앞서 미국 보수주의자를 향해서는 "불의를 언급하기 위한 신학적 틀을 발견하지 않는다"며 "대부분의 백인 그룹들은 자신들에게 직접적으로 발생한 부정의에만 관심을 갖는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정의롭지 못한 글로발 구조가 인간과 환경에 무수한 피해를 끼치고 있음에도 이를 침묵한다는 지적도 곁들였다. 반면, 미국 진보주의자를 향해서는 "확고한 기독교 정체성을 선포하는 것에 대해 어려움을 토로한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필립 클레이튼은 중도적 입장을 추구하는 기독교 신학자로서 기독론, 성령론, 교회론 등에 대한 진보주의자들과 보수주의자들 간의 생각의 차이를 말하고 중재안을 제시해 봤다.

기독론에 관하여서는 보수주의자들이 하나님에 대한 모든 언어들을 무미건조하게 명문화, 선언화 시킴으로써 하나님의 통치 하에 있는 ‘나’를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연관시키지 않고, 신성한 삶 속에 참여하도록 은혜로 부름 받았다는 것을 연관시키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필립 클레이튼은 "인간 예수 안에 하나님의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자기 계시가 일어나는데 이런 예수로부터 고립되어있는 삼위일치네 그리스도의 두 본질은 신학적으로 설명될 수 없다"며 "정직하게 말하자면 모든 기독교인들 가운데 신학자들이 이런 잘못을 저지를 소지가 가장 많다. 기독론을 객관적인 대상으로 취급해서 우리가 손으로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이쪽저쪽으로 돌리고 뒤집어서 모든 면들을 다 보이려고 한다. 더 나쁜 것은 어느 한 기독론을 무기처럼 사용해서 다른 신학자들을 반대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다른 종교들에 대해 문자적 무기를 사용했던 것 처럼 말이다"고 지적했다.

반면,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대개 기독론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필립 클레이튼의 스승 예일대 한스 프레이(Hans Frei) 교수는 자신에게 "자기만의 기독론을 쓰기 전까지는 신학자가 아니다"라고 말했던 것을 상기하며 기독론 연구에 대해 주저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꼬집었다. 그는 진보적인 신학자들이 감당해야 할 기독론 연구 분야는 무궁무진하다며 △삼위일체 그리스도 △우주적 그리스도 △신비한 그리스도 △케노틱 그리스도(Kenotic Christ) △내재하는 그리스도 등에 관한 연구를 독려했다.

또 이 같은 다섯 가지 기독론에 보수적인 기독교인들과 진보적인 기독교인들이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며 기독교인들이 앞서 제시한 위대한 기독교적인 논증들을 갖고 서로 결속 되어 있는 시점에서 비기독교인 세계와 우리의 논쟁을 유지하면서 어떻게 기독교인들끼리 서로 저주할 수 있단 말이냐고 안타까워했다.

이어 보수와 진보 기독교인들 간의 분열로 인해 성령론보다 더 큰 피해를 본 논의는 없을 것이라며 ‘성령론’을 둘러싼 진보와 보수 교회들의 분쟁의 일례로 해방신학이 탄생된 라틴아메리카 교계 얘기를 꺼냈다. 필립 클레이튼 교수는 "라틴 아메리카는 이제 오순절적이고 카리스마적인 교회들의 놀라운 성장을 경험하고 있다. 해방 신학자들과 오순절파가 함께 연합할 수 있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공동협력체가 될 것인가"라며 "그러나 두 그룹은 서로 비판하는 것에 힘을 쏟아 붓고 있으며 연합된 교회보다는 분리된 교회로 세계에 비치고 있다"고 말했다.

진보주의자들과 보수주의자들의 이러한 갈등이 비단 라틴 아메리카 뿐 아니라 전 세계 많은 나라들이 겪고 있는 유비적 현상이라고 본 필립 클레이튼 교수는 "우리는 보수주의건 진보주의건 상관 없이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공동의 장을 부여하는 성령론을 말해야 한다"며 진보나 보수 모두가 공감할 만한 ‘해방의 성령론’을 제시했다.

필립 클레이튼은 특히 앤드류 성 박(Andrew Sung Park)의 책 『상처에서 치유로: 상처입은 자의 신학』을 인용, 저자가 ‘죄인들’(sinners)과 ‘죄의 희생물이 된 사람들’(the sinned-against)을 구분하고는 전자의 신앙은 하나님의 용납을 구하는 것이며 후자의 신앙은 하나님의 정의를 구하는 것이라고 주장한 데에 "하나님의 은혜는 두 그룹 모두를 위해 충분한 것인데 그것은 두 가지 하나님의 근원적인 신학적 특징이 (죄인들을 위한)연민(compassion)과 (죄의 희생물이 된 사람들을 위한) 정의(justice)이기 때문이다"라며 "우리는 성령이 이 두가지 사역들을 절대로 분리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죄인들의 기도가 죄의 희생물이 된 사람들의 기도를 압도하도록 우선시해서는 안된다. 예수는 이런 분열을 결코 만들지 않았다"고 말했다.

역할론을 놓고 보수주의자들과 진보주의자들 간 분쟁이 끊이지 않는 교회론에 대해서는 역시 앤드류 성 박 교수(클레어몬트 신학대학원 교수 역임)에게서 ‘한’(恨) 개념을 들춰낸 뒤 "예수는 주변사람들의 한을 치유하는 것만 하지 않았다"며 "예수도 직접적으로 한을 경험한다. 박해와 거절, 재판과 고문 그리고 십자가상의 고뇌하는 외침에서 한을 경험한다. 예수의 십자가는 하나님 자신의 한을 나타내는 위대한 상징이다"라고 말했다.

또 "한의 치유는 오순절 경험으로 교회에 들어왔다"면서 "예수의 몸인 교회를 통해서, 상처 입은 자기 자신의 상처를 초월한다. 또 성령은 타자들을 똑같이 돕도록 상처 입은 세계에 하나님의 치유를 몰고 온다. 억압받는 자들의 구원은 그들 자신의 구조속에서 억압자들에게 도전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여전히 교착상태에 머물고 있는 개인구원과 사회구원을 놓고 설전을 벌이는 보수주의자들과 진보주의자들에 대해 감리교 전통이 중요한 공헌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 필립 클레이튼에 따르면, 웨슬리 신학 전통이 개인적인 성화와 사회적인 성화가 조화를 이루게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차원들의 통합성을 가지고 성화에 대한 웨슬리의 풍부한 개념들을 재발견해야 할 때"라며 "교회는 이 두 차원들안에서 성화가 일어나도록 연구하고 교육하는 곳이다. 그러므로 성화는 개인적인 형태와 사회적인 형태로 기독교 선교의 싹을 튀우는 토양이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끝으로 진보주의자들과 보수주의자들이 건전한 소통을 가능케 하는 중도적 입장을 취한 필립 클레이튼은 "오늘 나는 기독론, 성령론, 교회론 안의 핵심 주제들은 모두 ‘양자/모두’(both/and)의 문제이지 ‘양자택일’(either/or)의 문제가 아니라고 주장했다"며 "기독교는 내적 구원과 성화를 포함한다. 그러나 기독교는 교회가 오늘 우리들의 세계 속에서 예수의 예언자적 목소리를 갖고서 권력에 대항하는 진리를 말하도록 요청한다. 성령은 내적인 자아를 변혁시키고, 변혁시켰고 우리도 변화되어 우리를 둘러싼 세계 속에 존재하는 구조악의 변혁에 참여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아울러 "만약 우리가 종교 다원 세계에서 복음의 한 면만을 제시한다면 우리는 혼동속에서 잘못된 연합을 창출하게 된다"며 "만약 우리가 지상의 소금이 되고 세계의 빛이 되길 원한다면, 우리는 21세기 세계의 복잡한 글로발 도전들을 향해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복음을 이끌어내야만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진한 기자
 
 

[신학기고]


종교 다원 사회 상황에서 기독교 신학의 변혁
Transforming of Christian Theology in a Religiously Pluralistic Social Situation
 
 
오늘 여기서 강의하고 한국 학자들과 교회 지도자들과 함께 대화할 수 있어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1) 나는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났고 독일 위대한 학자들의 마지막 세대에게서 배웠습니다. 머리카락이 희끗 희끗한 나이가 되었지만, 나는 지난 10년 동안 아시아를 다니며 신학자들과 기독교 사상가들을 만나면서 다시 배우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지난 수십 년 동안 고난의 세월을 겪어 온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어쩌면 그것이 한국교회로부터 많이 배워야만 하는 이유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세계 교회는 종교 다원주의의 사회 상황에 놓여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자신들만의 단일한 종교 현상속으로 스스로를 소외시키는 때는 지났습니다. 오늘날 인류가 직면한 가장 어려운 문제는 글로발 문제들입니다. 이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다른 종교들과 파트너십이 요구 됩니다. 그러나 종교 간의 파트너십을 형성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적어도 미국에서는 교인들은 기독교인들과 일하는 것에 친숙해있습니다. 사회 선교나 환경 문제, 특히 글로발 구제와 같은 일들의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슬람교인과 힌두교인 그리고 불교인과 함께 일하는 것이 요구됩니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손과 발이 된다는 것이 종교의 경계를 넘어 문제를 함께 풀어감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오늘 나는 신학과 기독교 실천 안에서 변혁들을 말하고자 합니다. 이 변혁들은 이 새로운 도전을 대면하는 일에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의 교회(글로발 교회)는 국가, 문화, 인종, 계급으로만 구분되지 않습니다. 신학적으로도 매우 다른 두 그룹으로 나눠져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이 두 그룹이 “진보”(progressive)와 “보수”(conservative)로 구분됩니다. 다른 나라에서는 다르게 구분될 것입니다. 신학적인 해결책을 찾기 위해서 이런 양분화가 지닌 문제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국 상황과 비슷한지 다른지는 여러분들이 판단하시기 바랍니다. 나는 미국 상황만을 설명하겠습니다. 미국 보수주의자는 불의를 언급하기 위한 신학적 틀을 발견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백인 그룹들은 자신들에게 직접적으로 발생한 부정의에만 관심을 갖습니다. 예를 들면, 공립학교에서 기도를 할 수 없거나, 미국의 이민자들과 가난한 사람들의 비용을 백인들이 대신 지불한다고 생각할 때 부정의가 발생했다고 봅니다. 그 백인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대변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인종과 문화적인 선입견으로 인한 희생자들을 대신해서 정의를 요구하지 않고, 글로발 교역의 영향으로 일어난 경제적 불의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변호하지 않습니다. 미국의 전쟁으로 인한 경제적인 손실이나 그에 따른 희생자들은 안중에 없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그들은 불의한 글로발 구조의 중심부에서 그들이 자행하고 있는 역할에 대해 직시하고 있지 않습니다. 정의롭지 못한 글로발 구조가 인간과 환경에 무수한 피해를 끼치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이러한 백인 그룹들은 미국과 글로발 시스템을 다른 관점으로 해석하고, 그에 따라서 행동해야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됨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반면에 미국의 진보주의는 이러한 미국과 글로발 시스템들을 잘 간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보주의자들은 확고한 기독교 정체성을 선포하는 것에 대해 어려움을 토로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게 하라”(암 5:24)로 이해하면 할수록, 자신들의 정체성을 기독교라는 하나의 특정 종교를 따르는 사람들로 보거나 또는 특별한 한 구세주(예수 그리스도를 포함해서)를 믿는 사람들로 여기는 일을 하지 못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진보주의자들은 “우리는 모든 사람들의 고난과 관련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그들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만약에 우리가 심도 깊은 기독론을 신학적으로 성립하게 되면, 우리는 다른 종교인들을 배척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부정의와 억압으로 희생된 모든 사람들의 편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아마도 우리는 예수에 대해서 더 이상 이야기 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진술들에서 문제가 보입니까? 몇 세대 동안, 미국 기독교인들은 보수주의자들과 진보주의자들로부터 서로 자신의 편이 되라고 들어왔습니다. 아마도 한국의 기도교인들도 같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지난 몇 해 동안 이런 분열은 교회에 피해를 가중시켰고 통제를 불가능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미국의 젊은 기독교인들은 보수와 진보라는 그릇된 양분화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교회에 더 이상 출석하지 않는데 그들의 부모와 조부모들의 싸움들이 더 이상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클레어몬트 신학 대학원(Claremont School of Theology)에는 한국 학생들이 많이 있습니다. 지난 십년동안, 한국 학생들은 나에게 한국 문화는 “중도”(middle way)에 가치를 둔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이 강연에서 나는 현대 신학에서 두 경쟁적인 진보와 보수 사이에서 중도적인 입장을 추구하는 기독교 신학자로서 강의하고자 합니다. 이런 이유로 인해, 나는 오늘의 강연을 지난 수년간 함께 해온 나의 한국 학생들에게 헌정합니다. 그들에게 공개적으로 깊은 감사를 표합니다.

신학자로서 글을 쓴다는 것은 조직신학의 대 주제들에 관심을 가지고 조직신학의 자리매김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강의는 세 부분(기독론, 성령론 또는 성령에 대한 교리, 교회론 또는 교회에 대한 교리)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I. 기독론

나는 어렸을 때, 축구 시합을 즐겼습니다. 내가 집에 오면 아버지는 승부에 대해 질문하시곤 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최종 점수에만 관심을 보이셨습니다. 나는 아버지가 축구 시합에서 중요한 것을 항상 놓치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무엇보다도, 실질적으로 중요한 것은 경기에서 벌어지는 드라마라는 것입니다. 수비를 잘하고, 운동장에서 공을 잘 차고, 공을 골인시키는 그런 드라마가 축구 시합을 이끄는 것입니다. 점수와 승부에만 관심을 보일 때 축구의 제 맛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기독론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케 하시며” (고후 5:19)라는 것은 진실입니다. 그러나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빌 2:9-11)만을 강조하는 것은 최종 점수에만 관심을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을 다해 (때론 몸을 다해) 골고다언덕 길을 걸어가 보지 않는다면 기독론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에 드러난 초대 교회 찬가의 절정은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2:9)에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결론에 해당하는 “이러므로”(therefore)입니다. 위대한 기독론적 선언들이 결론지은 이야기들로 사람들이 동시대 안에서 삶을 살지 않으면, 그 선언들은 공허한 구절이 될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5-8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여러분 안에 이 마음을 품으십시오. 그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 ()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새번역)

나의 스승인 볼프하르트 판넨베르그(Wolfhart Panneberg)와 그 다음의 스승인 제프리 웨인라이트(Geoffrey Wainwright)는 하나님에 대한 모든 언어들은 송영찬가/영광송(doxological)으로 이뤄진 찬양 언어라고 가르쳤습니다. 하나님-언어는 궁극적인 실제들에 대한 무미건조한 선언문 시리즈로서 취급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언어는 자신을 포함해서 이뤄집니다. 만약에 내가 하나님에 관해 말하면서, 하나님의 통치하에 있는 나를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연관시키지 않고, 신성한 삶속에 참여하도록 은혜로 부름 받았다는 것을 연관시키지 않는다면, 나는 그릇된 발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론에도 이런 원칙이 적용됩니다. 인간 예수 안에 하나님의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자기-계시가 일어나는데, 이런 예수로부터 고립되어있는 삼위일체나 그리스도의 두 본질은 신학적으로 설명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무한한 원천(infinite Source)에 대한 암묵적인 언급 없이 당신 스스로를 유한한 존재라고 기술할 수 없듯이, 이 사건을 별개의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정직하게 말하자면 모든 기독교인들 가운데, 신학자들이 이러한 잘못을 저지를 소지가 가장 많습니다. 신학서적들은 기독론을 단순한 객관적인 사실로 소개하기도 합니다. 기독론을 객관적인 대상으로 취급해서 우리가 손으로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이쪽저쪽으로 돌리고 뒤집어서 모든 면들을 다 보이려고 합니다. 더 나쁜 것은 어느 한 기독론을 무기처럼 이용해서 다른 신학자들을 반대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이 다른 종교들에 대해서 문자적 무기들을 사용했던(지금도 때때로) 것처럼 말입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기독론에 대해 침묵하고 있습니다. 기독론 연구에 대해 주저하는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복음서에서 예수가 제자들에게 가장 자주한 질문은 아주 직설적인 질문인데,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 16:15)입니다. 나의 스승이신 예일대 한스 프레이(Hans Frei) 교수는 나에게 “자기만의 기독론을 쓰기 전까지는 신학자가 아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신학 수업을 바로 시작하면서 신학생들에게 자신의 기독론을 서술하라고 요구합니다.

진보주의가 기독론 연구를 기피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진보적인 신학자들이 감당해야 할 기독론 연구 분야는 무궁무진합니다. 다섯 가지만 예로 들겠습니다.

1) 삼위일체 그리스도. 성부에게 자신을 영원히 내어주는 신의 위격으로서의 삼위일체 그리스도(Trinitarian Christ)는 우리로 하여금 예수의 지상 사역이 신적 존재 자체의 영원한 역동성을 명시했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2) 골로새서의 “우주적 그리스도”론. 이것은 교회나 국가로부터 눈을 돌려 전 세계가 직면한 우주적으로 중요한 예수의 사건을 질문하게 합니다. 3) 요한복음의 대제사장 기도문 안에 나온 그리스도의 영 (요 14-17)은 우리가 현재에 주목하도록 즉, “우리와 함께 하는 하나님,” 그리고 우리의 일상적 실존의 직물 안으로 짜여 들어 온 성령에게 주목하도록 만듭니다.(이 부분은 다시 다룰 것입니다) 4) 신비한 그리스도론.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삶에 참여하도록 하는 기독론입니다.(신비적인 표현 en Christo는 서신들에서 93번 정도 반복됩니다) 5) 성서에는 그리스도에 관한 수많은 표상들(faces)이 있지만, 빌립보서 2장의 케노틱 그리스도(Kenotic Christ), 자기-비움의 예수보다 더 힘 있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케노시스 (kenosis, 하나님의 자기비움) 안에서, 그 가르침을 받지 않고 정의의 기독교 신학을 논할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해방신학과 민중신학의 “가난한 사람들의 우선권”(preferential option for the poor)이라는 개념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해방신학자들은 그 “우선권”이 바로 자기를 비운 예수의 케노시스를 정확히 의미한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는지 질문하고 싶습니다.

보수적인 기독교인들과 진보적인 기독교인들은 이 다섯 가지 기독론에 대해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여기 제시한 위대한 기독교적인 논증들을 가지고 서로 결속되어 있는 시점에서, 비-기독교인 세계와 우리의 논쟁을 유지하면서, 어떻게 기독교인들끼리 서로 저주할 수 있단 말입니까?
 
II. 성령론

위르겐 몰트만은(Jurgen Moltmann)은 “성령의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성령간의 관계성은 무엇인가?” 하고 질문합니다. 몰트만은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의 탄생, 사역, 죽음과 부활이 반드시 현존한다고 대답합니다. 예수는 지상에서 하나님의 왕국을 시작하도록 신적인 성령으로 가득 차있습니다. 몰트만은 “성령 안에 거함이란 열광적이고 차고 넘치는 완전성을 향해 가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예수안의 삶의 신적인 역동성을 몰고 오는 것이다”2)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방법은 약자에게 강함을 주는 것이고 강자에게 두려움을 주는 것입니다. 성령의 길은 힘의 축적함 보다는 항상 타자들을 위해서 존재함을 뜻합니다. 이런 면에서, 성령은 예수를 고난으로 인도하고, 종국에는 십자가로 향하게 합니다. 성령은 예수의 고난의 때에 아버지 하나님의 부재를 견디도록 힘을 줍니다. 이런 면에서 죽음과 부활은 성령의 한 행동이면서 동시에 두 측면인 것입니다. 즉 “출산의 고통과 출산의 기쁨”3)이라는 것입니다.

오순절 아침 교회에 임한 성령은 신적인 역동성과 함께 활동하며 영적인 선물들(charismata)을 사역위에 부여하며 교회에 임합니다. 성령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요구들과 조화를 이루면서 우리들의 소원을 빌기 때문에 “법”을 초월하고 있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주의 할 것이 있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이와 같은 성령을 따르고 있다면, 오늘날 성령이 교회에 부여한 힘은 예수가 말했고 행동했던 것과 같은 목표를 향해서 가도록 지시할 것입니다. 복음서들은 성령의 진정한 사역을 말하고 있는데, 성령 안에서 우리의 참여는 반드시 예수의 지상 사역 기준의 반대로 측정될 것입니다.

보수와 진보 기독교인들 간의 분열로 인해 성령론보다 더 큰 피해를 본 논의는 없을 것입니다. 해방 신학을 탄생시킨 라틴 아메리카는 이제 오순절적이고 카리스마적인 교회들의 놀라운 성장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해방 신학자들과 오순절파가 함께 연합할 수 있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공동협력체가 될 것인가요? 전 세계를 향한 간증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두 그룹은 서로 비판하는 것에 힘을 쏟아 붓고 있으며, 연합된 교회보다는 분리된 교회로 세계에 비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이 한국에도 있는지 모르겠지만, 전 세계 많은 나라들의 진보주의자들과 보수주의자들은 공개적으로 싸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 바울은 “모두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서 한 몸이 되었고, 또 모두 한 성령을 마시게 되었습니다”(고전 12:13)라고 주장합니다.

우리는 보수주의건 진보주의건 상관없이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공동의 장을 부여하는 성령론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요? 해방의 성령론입니다. 그렇다면 거룩한 성령은 누구입니까?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를 알 수 있습니까? 우리는 예수가 행한 모든 행동과 그가 말한 모든 비유에서 그리스도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는 누구를 위해서 이 비유들을 말했습니까? 예수는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서 회개를 시키러 왔다”(눅 5:32)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신학자들은 카리스마타(charismata), 성령의 선물들을 설명하길 좋아하는데 이는 올바른 것으로 보입니다. 아울러 누구를 위해서 그리고 무엇을 위해 성령이 주어졌는지를 강조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요한복음 성령론에서 성령은 파라클레토스(Paracletos 요 14:16), 보혜사 (Comforter, 위로자) 또는 “옆에 계시는 자”를 의미합니다. 누구 옆에 있는 것일까요? 그는 고난을 위로합니다. 바울은 작은 자가 큰 자가 되는 곳에서 카리스마의 힘이 가장 강력하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내 능력은 약한 데서 완전하게 된다”(고후 12:9)고 했기 때문이다.

판넨베르그는 성령은 성자를 영광스럽게 할 뿐만 아니라(요 16:14), 성령은 “또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것이다”(요 14:26)라고 강조합니다. 예언들과 가르침들이 얼마큼 힘을 가지고 있든 간에 복음서의 예수에게 빛을 비추지 못하면, 이는 성령의 예언들과 가르침이 아닙니다.

미국 초대형 교회들의 성직자들은 부와 번영에 대한 설교로 유명합니다. 이런 교회에서는 개인의 부에 대한 설교들과 오순절 예배를 매우 대중적으로 연결시킵니다. 그러나 내가 설명하는 원칙들은 성령이 부와 권력과 명성과 혼합되는 것에 대해 의구심을 갖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성령은 아주 다른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만약 누군가가 예수의 말씀들로부터 예수의 성령을 분리시키길 원한다면 이것은 성령을 단지 부와 권력과 연결시킴으로써 가능합니다.

앤드류 성 박 (Andrew Sung Park)은 그의 훌륭한 책, 『상처에서 치유로: 상처입은 자의 신학』(From Hurt to Healing: A Theology of the Wounded)에서 “죄인들”(sinners)과 “죄의 희생물이 된 사람들”(the sinned-against)을 구분하였습니다. 그는 “죄인들의 신앙은 하나님의 용납(acceptance)을 구하는 것이고, 죄의 희생물이 된 사람들의 신앙은 하나님의 정의를 구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4) 하나님의 은혜는 두 그룹 모두를 위해 충분한 것인데, 그것은 두 가지 하나님의 근원적인 신학적 특징이 (죄인들을 위한) 연민(compassion)과 (죄의 희생물이 된 사람들을 위한) 정의(justice)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령이 이 두 가지 사역들을 절대로 분리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죄인들의 기도가 죄의 희생물이 된 사람들의 기도를 압도하도록 우선시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는 이런 분열을 결코 만들지 않았습니다.
III. 교회론

나는 친구이자 클레어몬트 신학대학원의 교수였던 앤드류 성 박 교수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특별히, 그는 교회와 한(恨)을 항상 같이 생각하도록 가르쳤습니다. 한은 서양인들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입니다. 그러나 박 교수는 최고의 정의를 내렸습니다. “한은 아무런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악한 상항에서 무죄한 사람이 고난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세계에서 무력하고 소외되고 발언권이 없는 사람들의 경험이 한으로 요약될 수 있다”5)고 정의하였습니다. 기독교의 교회론은 바로 한의 장소에서 반드시 시작되어야 합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완전한 연민(compassion)을 인류에게 계시합니다. 복음서들을 통해서, 한을 치유하는 특별한 방식 안에서 연민은 유발됩니다. 예수는 부자들에게 좀처럼 설교하지 않지만, 설교할 때는 매우 비판적입니다. 그의 사역은 억압받는 자나 상처 입은 자를 위한 것입니다. 박 교수는 말하기를, 예수는 근본적으로 유죄(guilt) 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지 않았는데 유죄는 권력을 가정하기 때문입니다. 대신에 예수는 사회 소외층들이 느끼는 상처받기 쉬운 수치심(shame)에 대해 말하였습니다.6) 그러므로 우리의 관심은 파괴된 관계성을 치유하는 것인데, 가난한 자들이 희생으로 부자들이 특권을 누리고 있는 사회 경제적인 구조들에서 생긴 파괴된 관계성입니다.

그런데 예수는 주변사람들의 한을 치유하는 것만 하지 아니었습니다. 예수도 직접적으로 한을 경험합니다. 박해와 거절, 재판과 고문, 그리고 십자가상의 고뇌하는 외침에서 한을 경험합니다.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마 27:46) 예수의 고난은 죄의 결과도 하나님의 인과응보와 정의를 위한 필요에 의한 것도 아닙니다.7) 대신에, 예수의 십자가는 하나님 자신의 한을 나타내는 위대한 상징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고난당하고 고통의 시간 속에서 우리와 함께 연대하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십자가는 교회의 상징으로써 우리도 같은 의미로 십자가를 져야합니다.

박 교수에 의하면 한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보살핌(care)과 존경(respect)과 도전(challenge)이라는 세 단계를 요구합니다. 예수의 부활은 치유의 과정 속에 있는 하나님의 모델을 보여줍니다. 예수의 부활은 고통의 최상의 두려움인 죽음 자체에 도전하지만, 예수를 죽음으로 내몬 사람들이 지닌 인간성을 부인하지 않는 방식으로 도전합니다. 부활을 통해 하나님은 세계의 폭력에 도전합니다. 동시에 하나님은 세계를 포용하면서 다른 가능성을 세계에 제시합니다.

한의 치유는 오순절 경험으로 교회에 들어왔습니다. 예수의 몸인 교회를 통해서, 상처 입은 자기 자신의 상처를 초월합니다. 또한 성령은 타자들을 똑같이 돕도록 상처 입은 세계에 하나님의 치유를 몰고 옵니다. 억압받는 자들의 구원은 그들 자신의 구조 속에서 억압자들에게 도전합니다.

앞서 설명한 기독론과 성령론이 교회론과 어떻게 일맥상통하는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이 세 가지 주제는 교회가 우리의 상처 입음과 치유와 성장을 위한 우리의 필요에 대해서만 관계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상기시킵니다. 성령이 가져온 치유는 독일인들이 말하는 “wozu”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치유되고 그러므로(so that) 우리는 치유자들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은 어떤 종류의 치유를 이뤄내고, 교회는 어떤 종류의 치유를 실천합니까? 나의 보수적인 친구들은 개인적인 치유, 특별히 개인 구원에 중심을 두고 이것이 기독교인들의 유일한 사명이라고 나에게 말합니다. 나의 진보적인 친구들은 교회의 사명은 사회와 세계의 치유자가 되는 사회 정의에 있다고 말합니다. 이런 치열한 논쟁 싸움 속에서 신학은 피를 보고 있습니다.

이러한 교착상태에서 감리교 전통은 중요한 공헌을 합니다. 존 웨슬리는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사회 종교라고 설교했습니다. 김홍기 교수는 “웨슬리에게 있어 기독교를 혼자만의(solitary) 종교로 돌리는 것은 기독교를 파괴하는 것이다”8)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김 교수는 진정한 웨슬리 신학의 신앙생활은 “개인적인 성화(sanctification)와 사회적인 성화가 조화”를 이루는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9) 박 교수도 이에 동의하며 “개인적인 치유는 구조적인 치유와 친밀하게 서로 섞여 짜여져 조화를 이루고 있다. 구조적인 한과 따로 떼어서 개인적인 한을 치유하기는 어렵다”10) 고 말하고 있습니다. 웨슬리 신학은 경건과 개인적인 성화를 확실하게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신학은 또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양자에 대해 도전하는 경제윤리를 수반합니다.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차원들의 통합성을 가지고 성화에 대한 웨슬리의 풍부한 개념들을 재발견해야 할 때입니다. 교회는 이 두 차원들 안에서 성화가 일어나도록 연구하고 교육하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성화는 개인적인 형태와 사회적인 형태로 기독교 선교의 싹을 틔우는 토양이 되는 것입니다.
 
IV. 결론

세계 많은 국가들안에 교회의 역사는 비슷한 세 단계로 움직였습니다. 건강하게 균형이 잡힌 복음의 시기에는 내적인 변혁과 세계 안에서의 행동 사이에 간격이 발생하지 않습니다. 박해의 때에는 종교적이 되거나 정치적이 됩니다. 이런 새로운 상황에서 박해 받는 교회의 구성원들은 내향성을 띄게 됩니다. 이 때 신앙의 내적인 삶과 교회의 사적인 삶이라는 만연된 두 주제가 있습니다. 박해 이후, 교인들은 “정상적”이 되길 원하고 주류가 다시 되길 원합니다. 교회는 많은 수의 보수파와 적은 수의 진보파로 갈라집니다. 이 반대적 성향은 각각의 그룹을 각자의 성향 쪽으로 점진적으로 몰고 갑니다.

그러나 이 양분화는 신학적으로 이치에 맞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나는 기독론, 성령론, 교회론 안의 핵심주제들은 모두 “양자/모두”(both/and)의 문제이지 “양자택일”(either/or)의 문제가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기독교는 내적인 구원과 성화를 포함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교회가 오늘 우리들의 세계 속에서 예수의 예언자적 목소리를 갖고서 권력에 대항하는 진리를 말하도록 요청합니다. 성령은 내 적인 자아를(마 15:10-20, 롬 12:1-2) 변혁시키고, 변혁시켰고 우리도 변화되어 우리를 둘러싼 세계 속에 존재하는 구조악의 변혁에 참여합니다.

만약 우리가 종교 다원 세계에서 복음의 한 면만 제시한다면, 우리는 혼동 속에서 잘못된 연합을 창출하게 됩니다. 만약 우리가 지상의 소금이 되고 세계의 빛이 되길 원한다면, 우리는 21세기 세계의 복잡한 글로발 도전들을 향해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복음을 이끌어내야만 할 것입니다.
 
옮긴이 l 박혜경(이화여대 외래교수)
 
 
(출처 : 기독교사상 2011년 11월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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