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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수운의 시천주 체험과 동학의 신관 (김경재)    
  글쓴이 : 미선 날 짜 : 13-05-03 16:38 조회(6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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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ILE #1 : 수운의_시천주_체험과_동학의_신관-김경재.hwp (50.5K), Down:10, 2013-05-03 16:38:20




 
수운의 시천주 체험과 동학의 신관
 
 
김 경 재
(한신대, 문화신학)
 
 
 
1. 들어가는 말

   이 글은 수운의 시천주 체험을 종교현상학적으로 분석함으로서 동학의 신관을 현대신학의 관점에서 서술해 보려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동학과 천도교를 특별하게 구별하지 않을 것이다. 현대 신학의 관점에서 서술해 보려고 한다는 말은 동학의 신관을 기독교 신관의 관점에서 왜곡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연구자의 해석학적 한계를 미리 말하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글은, 한국인의 한 사람으로서 기독교인이면서도 동학의 시천주 체험에 기초한 하나님 체험이 기독교의 하나님 체험과 매우 친화성을 가지고 있음을 발견하고 그 점을 말해보려 한다.

   그렇게 함으로서 한국 천도교 교인들은 천도교를 이해하는 자기정체성 확인과정에서 지나친  민족종교라는 닫힌사고를 극복하고, 모든 참된 종교체험이 지닌 우주적 보편성을 직시하여 신관에 있어서 열린사고에로의 전환을 촉구하려고 한다.  예수는 유대인이었으나, 그의 하나님 체험과 하나님 의식은 우주적 보편종교를 형성했고, 마호멧은 아라비아 부족 종교지도자 였으나 그의 신체험과 계시체험이 우주적 보편종교로서 민족주의 한계를 극복함과 같은 것이다.

   동학의 발생은 근원적으로 최수운의 ‘시천주 체험’에 기초하고 있으며, 동학을 동학되게 하고, 천도교를 천도교답게 하는 그 본질핵심도 바로 ‘시천주 체험’인 것이다. ‘시천주’는 동학의 여러교리들 중의 하나가 아니라, 동학의 주춧돌이며, 동학을 살아 움직이게하는 심장역활을 하는 가르침이며, 동학을 당시 민중과 현대인들을 끌어당기는 본질적 힘인 것이다. 3대교주 의암 손병희가 이끄는 천도교시대에 이르러 ‘시천주’는 ‘인내천’이라는 보다 종교철학적 개념으로 일반화되었고 일반인들 특히 지식인들의 이해접근을 가능하게 했지만, 동경대전 안에는 ‘인내천’이라는 말이 나타나지 않으며, 비록   ‘인내천’은 ‘시천주’에 대한 다른 표현 곧 ‘시천주’의 본질적 종교체험의 내용을  변화시키지 않고 당시 시대적 상황 속에 적응 하기 위한 천도교의 신학적 해석학의 결과물, 곧 천도교신학의 산물이라고 강변할런지 모른다.

그러나, 필자의 논지는 ‘시천주’가 동학의 종교적 체험이요 신앙적 고백이라면, ‘인내천’은 그 원초적 체험과 근본적 신앙고백에 대한 종교철학적, 또는 관념적 작업의 결과물이다.

   카나다 종교학자  윌프레드 칸트웰 스미스(Wilfred Cantwell Smith)가 그의 명저 <종교의 의미와 그 목적>1)에서 잘 갈파한 것 처럼, 엄밀하게 말하면 ‘신앙’(faith)과 ‘종교’(religion)는 구별된다. ‘신앙'은 본질적으로 신앙인의 깊은 생명 속에서 생생하게 체험되고 그 체험에 의해 신앙인 자신이 새롭게 변화되고 생동적 삶을 살도록 하는 상태 곧 ’궁극적 실재의 힘에 붙잡힌 상태‘(틸리히)라고 말 할 수 있다. 수운에 있어서 ’시천주‘ 체험은 바로 그런 신앙체험의 상태를 말한다. 그에 비하여 ’종교‘란 일단 생동하던 신앙체험을 반성적으로 사유하고 논리와 제의로서 표현하고, 그것에 의하여 성립되어 전승된 ’축적된 전통‘이다.  이해 접근하기 쉬운 통로를 마련하려는 실질적 요구에 의하여, 종교적 상징, 이론적 체계, 제의적 절차, 기구와 제도적 정비를 거치는 동안 생동하는 ’신앙‘은 어느듯 정태적인 ’종교‘로 변질된다.

   천도교 시대에 있어서 ’인내천‘ 교리는 수운의 원초적 신체험에 기초하여 발생한 동학적  초기 신앙이 종교 단계로 변화해가는 과도기적 현상을  나타내는 결과물이라고 필자는 보는 것이다. ‘시천주’ 라는 중심화두가  ‘인내천’이라는 말로 더 많이 회자 됨으로서 말미암아 천도교(동학)는 동양적 사상의 거대한 존재론적 원리 곧 ’존재론적 동일성 원리‘에로 귀속 해버리는 위험을 안고 있는 것이다.

   이 글은 먼저 제2절에서  동경대전에 나타나는 최수운 자신의 ‘시천주’ 해설에 기초하여 ‘시천주 체험’을 종교현상학적으로 분석하면서 그 의미를  추적 할 것이다. 제3절에서 이러한 ‘시천주체험’에 기초한 동학의 신관 특징을 현대신학의 담론과 대비하면서 고찰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서 동학(천도교) 신관의 보편성과 특수성, 세계성과 민족성, 개방성과 폐쇠성의 양면을 보다 명료하게 인지하는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마지막 제4절 결론에서는 동학의 ‘시천주 체험’ 이 지니는 의미와 가치를 현대 문명전환적 시대상황 속에서 점검할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시도와 노력이 이미 한국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자기 정체성을 삼은 한 기독교 신학자의 글이기 때문에, 그로 말미암는 해석학적 이해의 한계와 해석학적 굴절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필자만의 한계가 아니라 모든 인간의 이해과정에서 감내해야 하는 ‘해석학적 제한이며 운명’임을 잊어서도 아니될 것이다.

2. ‘시천주’ 체험의 종교현상학적 이해

   필자는 천도교 종교계 안에서 그 도의 진리를 설파하는 많은 인사들 중에서 夜雷 이돈화의 해설에 힘입은 바 크다. 필자는 기독교인이지만, 야뇌의 동학해설이 금방 이해되고 납득된다. 특히 그의 말년의 동학이해 결정판이라고 학계에서 말하는 <東學之 人生觀>2) 이 초창기 그의 다양한 종교철학적  작품들을 밑바탕에 깔고서도 “수운 선생의 본 뜻 그대로 종교적 신앙 방향으로 정리하였다는 의미”에서 필자는 시천주체험의 종교현상학적 해설에 있어서 야뇌의 조언에 많이 귀 기울일 것이다.

   수운의 신체험에 있어서 그 이전의 유교적 전통이나 불교적 종교관과 구별시켜주는  결정적 특징은 하늘님을 모든 사람이 그의 생명체 몸에 ‘모신다’(侍)는 체험적 신앙이다. 그는 스스로 동경대전안에서 ‘모신다’(侍)는 종교현상적 체험 상태를 풀어 설명하려 했는데 “侍者 內有神靈 外有氣化 一世之人 各知不移者也”3)가 그것이다. 그러므로, 수운의 ‘시천주 체험’의 종교현상학적 분석도 위 세마디 말의 의미를 바르게 이해하는 해석학적 과정이 될 것이다.
 
   (1) 내유신령(內有神靈)의 체험으로서 모심

   수운은 하눌님을 내 생명으로 모시는 것이 종교인의 구경적 목적이요 바른 자세라고 보았는데, 그 ‘모심’의 종교현상학적 특징은 사람의 생명체, 몸 안에 신령한 기운이 현존하는 체험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내유신령’을 해석학적으로 분석하기 전에 수운의 신체험에 있어서 ‘몸’의 중요성에 먼저 주목해야만 하겠다. 동학의 신체험은 본질적으로 ‘몸으로서, 몸안에서, 몸과 더불어 체험’이란는데 그 특징이 있다. 한마디로 동학의 신학은 ‘몸의 신학’인 것이요, 동학의 영성도  ‘몸의 영성’이라는데 있다.

   수운의 원초적 신체험이 기초한 동학적 ‘몸의 신학’과 몸 안에서, 몸으로서, 몸과 더불어 신체험을 한다는 말은 우선 신체험을 관념적 정신현상으로 부터와 단순한 심리적 감정체험으로 부터 구별해주는 개념이다. 그렇다고 해서 동학의 ‘몸 안에 하늘님을 모신다’는 천도교적 ‘몸의 신학’이 말하려는 몸이라는 개념이 단순히 육체 곧  물리 화학적 법칙 지배를 받는 생리적 총체물로서의 신체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동학에 있어서 ‘몸’ 그 자체가 서구 데까트적인 물질/정신 이원론에 기초한 존재론을 초극한 것이기에 단순히 몸을 신체험이 일어나는 ‘장소적 신체공간’으로 이해해서는 않된다. 엄밀하게 말하면 ‘몸의 존재성’ 그 자체가 ‘내유신령’의 창발적 현상이요, 사람의 몸이 먼저 존재론적으로 존재하고나서, 후험적으로 ‘내유신령’체험을 한다기 보다  사람의 무궁생명 , 특히 영성적 존재로서의 사람다움의 생명체로서 몸의 존재가능성과  ‘내유신령’은 같은 현상의 양면성이다.

   ‘內有神靈’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안에 신령이 계심’이라고 할 수 있는데, 여기에서 문제는 ‘몸 안에, 생명체 안에“라는 표현의 의미와  ’神靈‘이 누구이며 어떤 존재인가 하는문제와, ‘있다, 계시다’는 현존체험을 할 때, 그 신령의 현존체험 상태에서 인간의  주체성과 그 분의 현존을 체험토록하는 더 큰 무궁생명 주체성과의 상호관계 또는 주객구조관계는 어떤 상태인가 하는것 등이 종교현상학적으로 문제가 된다.

   우선 ‘안에 계시다’(內有)라는 표현은 인간의 생명체, 구체적으로 ‘몸 안에 계시다’는 말이다. 물론 ‘안과 밖’이라는 공간적 표현은 신령한 존재자가 어떤 구체적 존재물처럼 시공간적 제약을 받고서,이런 장소엔 현존하고, 그런경우, 저런 다른 장소에는 현존할 수 없다는 그런 의미는 아니다. 소위 신의 보편적 현재성을 일컬어 신적 존재의 편재성이라 하거니와, 신령존재가 특정 장소적 공간에 제약되는 유한 존재는 아니다. 그러므로 ‘안에, 밖에’라는 공간적 표현은 차라리 인간의 존재방식이 구체적 몸이라는 형태를 띄고서 존재하는 만큼, ‘안에’라는 말은  ‘인간의 생명체, 몸 안에’라는 말이다. 이것은 인간의 실존적, 신령적 체험양식을 공간상징을 통해 표현한 것이다. 동학의 신체험은 몸이라는 구체적이고도, 전일적인 생명체로서 체험되고 그 심령의 중심부에서 체험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몸의 기능적 일부가 아니라, 몸의 총체적 종합기능을 통해서 이다. 지적 인식능력, 감성적 심미능력, 도덕적 가치판별과 결단능력이 총체적으로 통전된 생명체로서의 몸 안에서 신령한 궁극적 실재가 현존한다는 체험이다.

   둘째, 누구가 또는 무엇이 현존하는 체험인가? 그것은 ‘신령’(神靈)이 현존하고 작동하고 역사한다는 체험이다. 동학에 있어서 ‘신령’은 무엇인가? 그것은 ‘궁극적 실재’로서의 ‘지기’(至氣)의 동태적 현상에 대한 별명(別名)이다. 동학의 ‘궁극적 실재’는 다름아닌 ‘至氣’인데, 至氣는 단순한 우주를 구성하는 ‘우주적 질료’(universal stuff)가 아니라, 신령성, 초월성, 편재성, 정언적 명령성을 다 내포한 궁극적 실재이다.(虛靈蒼蒼 無事不涉 無事不命). 지기(至氣)는 단순한 신유학적 이기론에서 말하는 ‘기’(氣)일반이 아니며, 우주물리학적 에너지라고만 말 할수도 없다. 물론 일반적인 氣와 양자물리학적 극미적 에너지와 아무런 관계성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욧점은 그 ‘至氣’는 단순한 물질성이나 정신성이라는 일원적 극성(一元的 極性)에로 환원시킬 수 없는 궁극적 실재라는 것이다. 더우기 이 ‘지기’가 本具的으로 지닌 초월성, 신령성, 초인격성에 의하여 인간심령의 지극한 종교적 지성과 誠願에 감응하며 응답하는 실재이다.

    이 궁극적 실재가 신령한 존재자로서 영글어져 우주 속에 출현한 인간생명 안에서는 ‘신령’(神靈)으로서 체험된다.   그러므로 ‘內有神靈’이라고 말 했을 때, 그것은 다름아닌 동학이 파지하는 우주의 궁극적 실재인 ‘至氣’가 인간심령 안에, 인간 몸 안에서 생동적으로 현존하는 체험인 것이다. ‘지기’와 ‘신령’은 서로다른 두가지 실재가 아니라 ‘이위일체’(二位一體)적인 관계이다. 천주(天主)를 종교철학적 용어로 표현하면 ‘至氣’이며, ‘신령’(神靈)을  또한 종교현상학적으로 표현하면 ‘氣化之神’이다. 그러므로 ‘신령’의 내주체험(內住體驗)은 양면성을 지니게 되는데, 몸을 지닌 인간존재와 구별되는 ‘無事不命’하는 어떤 신령적 존재, 초월자의 내주적 체험이면서, 동시에 인간생명을 영험하게 하고, 투명하게 하고, 황홀하게 만들면서, 일상적인 인식론적 주객구조를 돌파 하게하는 역동적 ‘無事不涉’하는 존재로서의 ‘신령사건’으로 체험된다.

  다시말하자면, ‘신령’은 어떤 객관적 실체로서 단순히 몸안에 들어와 거주하는 객체로서가 아니라, 몸으로 하여금 심령존재가 되게 하는 신령존재,  인간의 몸과 신령은 상호침투 상호순환, 상호의존하는 관계 속에 들어가게 되는 그런 존재이다. 至氣인 神靈이 인간 생명 안에 현존하시도록 마음을 깨끗하게  하여 至氣이신 하눌님을  모실수 있도록 겸허하게 자기를 비워야 한다. 신령의 임재를 지성껒 청원하는 하는 것 곧 ‘願爲大降’하는 인간의 청원에 응답하여 신령이 인간의 생명안에 임재 현존하는 체험, 그것이 ‘모심’(侍)의 첫째 현상으로서 ‘내유신령’이다.

   종교학적으로 보면, ‘내유신령’의 체험은 루돌프 오토가 말하는 ‘거룩체험’4) 인데, 셈족 계통의 거룩체험에서의 특징은 ‘두려운 경외감과 지복의 황홀감‘의 동시적 체험이다. 불교, 유교, 도교등 동양종교에서의 ’거룩한 신령‘체험은 셈족계 종교에서처럼 ’경외감과 황홀감‘이라는 서로 상반되는 역설적 체험의 강도가 약하지만, 동학에서는 그 흔적이 조금더 뚜렷하게 나타난다.5) 단순히 신령한 존재와 접촉하여 영험성을 얻게 되고, 투시력, 예언능력, 초능력을 얻게된다는 외형적 결과보다는 , 종교체험의 본질인 ’通過祭儀‘를 경험함으로서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게 된다. 소아적 자아, 자기중심적 이기적 자아, 집착적인 자아를 벗어버리고 대아적 자아, 이타적 자아로 재탄생한다. 동학에서는 후천개벽, 광제창생이라는 대의적 사회실천윤리에로 전환하고, 인간의 모든 평등성과 존엄성을 선언하면서, 불의한 인간관계나 사회구조에 저항하게 하는 비판적 에너지를 공급받게 된다.
 
   (2) 외유기화(外有氣化)의 체험으로서 모심
 
   수운의 시자해설(侍字解說)에서 두번째 어휘는 ‘外有氣化’이다. 문자적 의미로서는 단순히 ‘밖으로는 기화가 있다“는 의미이지만, 이 어휘가 지니는 종교현상학적 의미는 자못 새로운 것이며, 동학으로 하여금 동학다운 독특한 종교체험에 이르게 하는 동학적 신체험의 핵심적 구성요소이다. ‘외유기화’는 ‘내유기화’와 쌍을 이루면서 동학적 신체험의 유기체적 전일적 생명관을 이루는 토대가 된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앞서말한 지기, 신령, 무사불섭, 무사불명등의 상호관계성을 야뇌의 말을 통해 다시한번 확인하기로 하자.야뇌 이돈화는 이렇게 말한다:
 
    無事不涉이라면 至氣를 理로 볼수 있으나, 無事不命이라 하는 점에서 至氣는 다만 理性의 理가 아니요 어떤 靈識을 가진 鬼神的 神靈이다. 그러니까 ‘如形而 難狀 如聞而 難見’은 신령적 造化를 의미한다.......그러므로 至氣는 氣化之神으로 천지만유를 창조하는 능력을 가졌을 뿐 아니라 인간의 誠願에 感應하는 기적도 가졌다.  .... 天主의 靈力이 현상계를 창조할 이념으로 움직일 때에 영력은 곧 至氣로 化하는 것이다. 일단 至氣로 化한 천주의 理念은 그 자체가 자율적 造化능력으로 현상계의 形相이 되어지며, 個性이 되어지며, 인간의 心理가 되어지는 것이다. 6)
 
   위 글에서 보는데로, 동학의 신관에서 天主, 至氣, 氣化之神]은 상호 환치할 수 있는 동일한 ‘궁극적 실재’의 어떤 계기적 현상에 대한 칭호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굳이 구별하여 그 특성을 말한다면, 天主 칭호는 ‘궁극적 실재’ 를 어버이 존경하듯 섬기며 예배하는 경배적 경외적 대상으로서의 총칭적 별호이며, 至氣는 본체론적 차원 또는 존재론적 차원에서 天主를 언표하는 용어이며, 氣化之神은 至氣의  역동적  활동과 그 기능적 특성을 나타내는 용어이다.

   본시 한문글자의 용례에서 ‘化’ 라는 어휘는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는 글자인지라, ‘造化’라는말에서보는대로, 창조성과 생성능력 “스스로 자연스럽게 그러하다”는 ‘無爲而化’라는말의 뜻을 동시에 함유하고 있다. ‘外有氣化’ 할 때의 ‘氣化’란 ‘至氣’로서의 신령존재가 단순히 인간생명체 몸안에 폐쇄적으로 상주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생명체 몸을  신령한 존재에로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인감몸을 둘러싼 전우주 자연의 외계생명계와 유기적 관계성을 가지도록 연계시키고 통전시킨다는 의미이다.

  ‘氣化’의 구체적 모습은 인간생명과 대자연과의 유기체적 공속성, 상호의존성, 상호 순환침투적 창발성, 과정적 진화성을 모두 포함하는 다의적 의미를 지니게 된다. 창조적이면서도 자연히 그렇게 되어가는 법칙성도 지닌다. 氣化의 氣는 물론 보통일반적  氣가 아니라 至氣이며, 神靈이며, 하눌님이다. 인간생명과 만물을 창발적 생성운동 속에 있게하며, 서로 불가분리적 상호 공속적 관계 속에 있게 한다. ‘外有氣化’ 는 바로 절대초월적 하눌님이 시공 속에서 자신을 스스로 나타내고 만물을 지어가고 만유 속에 내재하면서, 만유를 자기와 하나되게 하는 창발적 운동태를 말한다. 인간이 하눌님을 잘 모시는 방식은 바로 이러한 하눌님 곧 ‘신령한 至氣’의 창발적 활동에 순응하고 참여하고 응답하면서 살아가는 존재방식을 말한다.

  ‘內有神靈’이 하눌님 곧 ‘至氣’가  인간생명체 몸안에서 이뤄가는 내재적-신령적 존재양식이라면 ‘外有氣化’는  몸을 포함하고 몸을 둘러싼 전체 우주속에서  전개해가는 하눌님의 시공간적-물질적 존재방식이기도 하다. 다시말해서 ‘내유신령’은 인간의 생명체 몸을 보다 ‘體化된 靈’으로서 만들고, ‘외유기화’는  보다 ‘靈化된 肉體’로서 만든다.  더 쉽게 단순화시켜 말하면, ‘내유신령’은 인간의 생명체를 영적 신령존재로 만들며, ‘외유기화’는 인간생명체를 신묘한 유기체 곧 물질-정신-영의 통일체적 ‘몸’이 되게 한다.  ‘내유신령’은 인간생명체를 그 가장 깊은 속에서 ‘영적 존재’로서 자의식하게 만들며, ‘외유기화’는 인간생명체를 그 가장 넓고 높음 속에서 ‘우주적 존재’가 되게 하여  萬物同體感을 갖게한다.

  (3) 각지불이(各知不移) 체험으로서의 모심

  최수운의 시자해설(侍字解說)의 세번째 구문은 ‘一世之人各知不移者也’이다. 문자적 의미로서는 “세상사람 각자 모두는 (그것)을  옮기지 못함을 인지하는 것”이다. 그러나 ‘모심’에 대한 수운자신의 해설 마지막 구절인 이 세번째 구문은 그 해석과 이해가 단순하지 않고, 동학 사상가들 안에서도 다양한 해석을 보이거나 애매한 해석입장을 드러내고 있다. 해석의 문제는 ‘옮기지 못함’(不移者)에 있다.

  무엇을, 또는 어떤 내용을, 또는 어떤 현상적 체험이나 체험적 현상자체를 옮기지 못한다는 것일까? ‘옮기지 못함’이란  타인이 이해 할수 있도록 자기경험 내용을 설명형태로 표현전달 할수 없다는 말인가, 아니면 신령한 지기(至氣)의 양면적 존재방식인 ‘내유신령’ 상태와 ‘외유기화’상태 그 두가지 상태를 별개상태로서 이분화하거나 분리 시킬 수 없다는 말인가? 아니면, 하눌님의 ‘無事不涉’, ‘無事不命’하는 보편적 편재와 도덕적 지고자로서의 우주적 통찰력에서 도피할수 없다는 말인가?

  야뇌 이돈화의 해석은 좀 독특하다. 그는 수운의 시자해설(侍者解說)의 세가지 어휘 곧 ‘내유신령’, ‘외유기화’, 그리고 ‘각지불이’를 매우 변증법적 논리에 입각하여 파악하고 있다.7) 夜雷는 수운이 말하는 ‘하눌님을 모신다’는 현상은 결국 인간이 신령한 몸으로서 영적 존재로서, 육체적 존재로서, 그리고 정신적 존재로서 현재화하고 창발적으로 생기(生起)하는 과정자체와 다름아니라고 보는 견해를 피력한다. 이것은 매우 과정철학적 사고이다. 야뇌가 당시에 화잇트헤드의 과정철학을 습득 하였으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불교의 인연생기설등에 깊은 이해를 가진 야뇌로서는 놀라운 일도 아니다. 다시말하면, 인간이라는 존재가 먼저 존재하고나서, 하눌님을 그 인간이 모시는  그런 시간적 선후관계가 아니라, 인간이라는 영물의 존재발생자체와 ‘하늘님을 모심의 사건과 결과 그 자체’는 동일한 것이라는 말이다.

   야뇌는 위에서 언급한 창발적 인간학을 지니었기에, ‘하눌님을 모심’이란 결국 신령한 존재로서 몸의 형체를 지닌 인간의 영, 육체, 정신의 세가지 양태로 나타나고 각각에 해당하는 생명 창발 현상이 ‘내유신령’, ‘외유기화’,그리고 ‘각지불이’라고 보았다. ‘내유신령’은 곧 인간의  영성을 창출하고, ‘외유기화’는 몸으로서 육체를 창발시키고, ‘각지불이’는 위에 언급한 두가지    가 통전되고 불가분리적으로 접촉 관계하는 가운데서 이념적 ‘정신’현상이 창발된다고 본 것이다. 야뇌는 다음과 같이  수운의 ‘시자해설’(侍者解說)의 세어휘 관계를 이해 하였다.
 
    선생(수운)은 ‘侍’字를 상징적 話題로 걸고, ‘侍’라는 것은 自我化生의 근본이라하고 ‘侍’字의 話題的 意義를 발표하되 ‘侍字 內有神靈 外有氣化 一世之人 各知不移者也‘라 하였다. 內有神靈은 自我의 본질이고, 外有氣化는 본질이 人間化한 理念으로 生理的 質料를 取하여 生命의 작용을 부여한 육체이고, 念은 본질이 靈波와 생리의 生命이 合一하여 化生된 정신이       다.8)

   위에서 인용한 夜雷의 해석은 분명히 ‘각지불이’를 ‘내유신령’현상과 ‘외유기화’ 그 두가지 창발적 생명체 구성요소간의 상호 불가분리성, 통전성, 불가환원성을 의미하고 있다. 세상사람이 모두 아는 사실은 결국 인간은 영성을 지닌 영적존재이면서도 생리적 육체적 존재인데 인간의 마음의 기능, 정신현상과 그 기능, 정신의 이념활동등은 ‘영’과 ‘육체’의 불가분리적인 통전, 신묘한 통합에서 창발하는 현상이라고 해석한다. 야뇌는 인간의 이념적 정신현상이 저 유뮬론 철학자들이 말하는바같은 단순한 ‘물질의 질화법칙’에 의한 결과 물도 아니고, 관년론자들이 말하는것과 같이 단순한 ‘세계정신의 자기외화’만이 아니라고 본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各知不移者’ 어구해석에 있어서 야뇌처럼  해석하는 가능성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의 해석이 지나치게 변증법적 사유에 의존하고 있으며, ‘내유신령’, ‘외유기화’, ‘각지불이자’의 세가지 어구를 인간개체의 구성론적 원리를 해명하는 것으로 치우친 해석이 아니었나라고 비판하고자 한다. 다시말해서 ‘侍’字 해설을 지나치게 인간학적 시각에서 파악함으로서, ‘侍天主’해설이라는 본래 수운의 의도를 좀빗나갔지 않았나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분명히 현대 해석학이 말하듯이 무릇 모든 문헌자료는 ‘해석학적 순환원리’에서 바르게 이해되어야 한다. ‘해석학적 순환원리’가 지닌 여러가지 의미중 그 첫번째는 “부분은 전체의 빛과 구조 안에서, 전체는 부분들의 조명과 관계적 구조 안에서 이해는 성립한다“는 법칙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侍’字는 마땅히 ‘侍天主’라는보다 큰 개념안에서 파악 되어야 하고, ‘시천주’는 더큰 ‘강령주문’이라는 지평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필자는 ‘各知不移者’ 해석에 관련하여, 그 의미를 야뇌와는 다르게 다음과 같이 이해해 보려고 한다. 至氣 곧 신령한 궁극실재 하눌님은 인간 생명체로 하여금 살고 기동하게하며,  영물로서 창발시키는 과정에서 ‘내유기화’와 ‘외유기화’를 통해 사람 몸을 통해 현존하시지만, 그 하눌님은 언제나 모든 생명체와 존재자들의 창발적 과정과 조화적 생기현상과정 속에서도 결코 주(主)하눌님으로서 부재하거나 제외되거나 분리시킬수 없는 ‘존재론적 지반’이라는 의미이다.

   만물자체가 곧바로 하눌님은 아니다. 그러나 만물의 현존자체가 하눌님을 떠나서, 하나님으로부터 분리하여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몸으로서의 인간존재가 곧바로 하눌님은 아니다. 수운은 인간을 신격화하는 의도가 아니며, 인간과 하눌님을 존재론적으로 동일시하려는 의도가 아니며, 다만 하눌님을 몸으로서  모심에 관하여 말하려고 하는것이다. 동학은  인간의 본성과 하늘님의 신성을 즉자적으로 동일시하는 브라마니즘이나 불교와도 다르다. 물론 양자를 철저하게 이분화시키는 정통 기독교의 실재관과도 다르다.  동학의 존재론과 신관은 불이론(不二論, advaita)을 말하려는 것이지 이원론, 범신론, 관념론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3. 동학의 신관

  이상에서 고찰한 ‘侍’字 해석에 기초하여 이제 필자는 동학의 신관을 총체적으로 파악해보려고 한다. 동학의 신관은 다음과 같은 몇가지 특성을 나타낸다. 그 특징들을 열거하면서 필자는 기독교의 성경적 신관의 본래적 모습과 비교하여 몇가지 서로 통하는 점과 다른점을 언급하려고 한다.

  첫째, 무엇보다도 동학의 신관은 오랫동안 인류의 종교들이 빠져들고, 철학적 세계관이 빠져들었던 다원론(Pluralism), 이원론(Dualism), 일원론(Monism)을 극복하고 신묘한 통전적 신관을 가진다는 점이다. 구체적으로는 초월신론이나, 내재신론이 아니고 ‘내재적 초월신론’의 형태를 지니며, 궁극적 실재의 초월성을 강조하는 유신론(Theism)과 그 내재성만을 강조하는 범신론(Pantheism)의 양극화를 극복하여 범재신론(汎在神論,일명 萬有在神論, Pan-en-theism)의 입장을 취한다.

   범재신론 또는 만유재신론의 특징은 우주의 궁극자이신 하눌님의 신령성, 초인격성, 감응성, 창조성을 수용하면서도, 궁극적 실재가 만유를 떠나 별천지에 존재하는 ‘초월적 타자’가 아니라 만유 속에 내재하고, 만유를 창발시키는 창조적 힘으로 작용하면서, 동시에 주(主) 하눌님으로서의 신격(神格)을 잃지 않는다는 점이다. 현대철학계에서 이러한 범재신관을 가장 분명하게 진술한 사람은 알프레드 화잇트헤드이다.9)

   기독교의 신관은 전통적으로 ‘절대적 초월신관’ 또는 ‘초월적 유신론’이라고 이해되어 왔고 전통적 기독교 신관이 그렇게 치우쳐 왔던것도 부인할 수 없다. ‘절대적 초월신과’ 또는 ‘절대적 유일신관’의 특징은 창조주 하나님과 세계현실성 상호간의  질적 구별을 철저히 하는 것이고, 동시에 창조주 하나님의 초월성과 절대적 권위를 강조하는 입장이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의 근본자료인 성경을 보면 서구기독교의 ‘절대적 초월신관’은 일방적 강조이며, 진정한 성경적 신관의  곡해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동학의 신관과 상응되는 성구로서 필자는 다음과 같은 세가지 성경구절을 예로서 인용하려고 한다.

     주님, 주께서 나를 샅샅이 살펴보셨으니, 나를 환히 알고 계십니다. 내가 앉아 있거나 서 있거나 주께서는 다 아십니다. 멀리서도 내 생각을 다 알고 계시니다. ...주께서 앞뒤를 둘러싸 막아주시고, 내게 주의 손을 얹어 주셨습니다.이 깨달음이 내게는 너무 놀랍고 너무 높아서, 내가 감히 측량할 수조차 없습니다.(구약, 시편 139:1-6)

     우주와 그 안에 모든 것을 만드신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주님이시므로, 사람의 손으로 지은 신전에 거하지 않으십니다. 또 하나님은, 무슨 부족한 것이라도 있어서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님니다. 그분은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호흡과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고 있습니다.(신약성경 사도행전,17:24-28)

     하나님도 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만유의 아버지이시며,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하여 일하시고, 만유 안에 계십니다.(신약성경 에베소서,4:6)

  이상의 몇가지 성경구절에 나타난 신관은 최수운이 당시 전래된 서학으로서의 천주교 신자들이 기도하는 모습에 대하여 비판했던 바같은 하늘세계 옥경대에 좌정하여 있는 군주적 이미지가 아니다. 성경자체가 수천년에 걸쳐 형성되어온 종교적 경전이므로 성경 안에는 다양한 신체험이 있고, 신관의 강조점도 역사발전에 따라 당양한 것도 사실이다. 필자는 동학의 신관과 기독교의 그것이 동일하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동학의 신관이 강조하는 범재신론적 신관이 성경안에도 있으므로 천도교와 기독교의 관계는 이질성 보다는 친화성이 더 많다는 것이다. 서로 통하는 신관의 어떤 면이 있기 때문에, 현실사회의 불의와 인간생명의 비참을 적극적으로 개혁하고 갱신하려는 사회윤리적 행동이 나타나게 되는데, 그 점에 있어서 개화기에 있어서 동학의 후천개벽사상과 기독교의 하나님나라 운동이 맥을 같이 하고 있는 것도 이제는 동학 연구가들이 주목할만한 일이다.

   둘째, 동학의 신관은 ‘시천주’ 신앙에서 보는 바처럼, 천주 하눌님에 대한 인격적 신앙과 신의 신령성과 인간의 誠願에 감응하는 존재로서 믿으며, 특히 몸으로 모신다는 점을 강조한다. 동학이나 천도교가 종교로서 서고 넘어짐은 바로 이점에 있다 할 것이다. 또 조선조 시대를 풍미한 이기론적 형이상학과 유뷸선 삼교의 심원한 형이상학적 요소들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면서도 동학이 동학 될수 있었던 것은 수운의 생생한 인격적 신령한 하눌님체험에 기초하며, 시천주신앙정립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단순한 天理, 天命, 道, 法性(Dharma)이  아니라 인격적 당신으로서의 하눌님 신앙이 동학이 동학되는 갈림길이다.

   특히 동학의 신체험이나 신관에서 높이 평가해야 할 점은 ‘몸으로서 하눌님을 섬김’이라는 사상이다. 이러한 몸의 강조성은 후일 海月의 지도력이 주도하던  시대에 이르러 양천주(養天主), 이천식천(以天食天), 향아설위(向我設位) 사상에로 까지 발전해가지만,  그 기본은 몸의 중요성에 대한 깨달음에 있다. 인간의 몸은 단순한 육체덩어리가 아니며, 더우기 19세기 서구문명사회의 식자들이 지녔던 물리생화학적 차원의 단순생물이 아니다. 몸은 정신/믈질의 이원론을 통전하는 현실태요, 형이상학적인 것과 형이하학적인 차원이 통전된 존재로서 그 양자의 불가분리적인  영물이다. 어느것 하나가 다른것 하나에로 환원될 수 없다. 인간은 진실로 ‘우주신인론적 실재’(Cosmotheandric reality)의 범례적 존재인 것이다.

   신관이나 신체험에 있어서  ‘몸으로 모신다’는 몸의 중요성 강조는 오랜세월 동안 종교일반이 지녔던 인간의 육체성에 대한 억압적 태도를 근본적으로 시정한다. 육체성에 대한 억압은 물질성과 자연에 대한 억압이나 착취로서 전개되어 왔다. 그러나, 동학의 ‘몸의 철학’이 결코 단순한 육체성강조나 물질성 강조가 아니라는 점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거듭 말하거니와 몸(Body, SOMA)은 단순한 육(Flesh, SARK)이 아니고, 육체적 물질차원과, 정신적 차원과, 더 나아가 신령한 영적차원이 불가분리적으로 통일된 실재이다.

   그러므로, 하눌님을 체험하고 하눌님을 모심에 있어서  몸의 기능중 하나인 지적 인식행위, 감성적 체험행위, 도덕적 실천행위중 그 어느 한 기능만으로서는  바른 신앙적 응답이 불완전할 뿐아니라 불가능하다. 오로지 몸전체로 응답만으로서만 신앙 행위는 바른 태도를 얻게 된다. 동학의 신체험과 신관에 있어서 ‘몸’의 중요성 강조는 종교행위가 주지주의, 열광적 감정주의, 바리세적 도덕주의에로 전락하지 않고 그 균형과 통전성을 지탱하게 하는 귀중한 가르침이 된다. 몸의 중요성을 신앙문제와 연결시켜 파악한 이해는 기독교의 경전 특히 바울의 서신 속에서도 중요한 테마가 된다. 두 곳 만을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여러분의 몸은 성령의 전(殿) 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으로부터 성령을 받아서 그것을 여러분 안에 모시고 있습니다.(신약성경, 고린도전서,6:19)

    그 뿐만 아니라, 첫 열매로서 성령을 받은 우리도 자녀로 삼아주실것을, 곧 우리 몸을 속량하여 주실 것을 고대하면서, 속으로 신음하고 잇습니다.(신약성경, 로마서 8:23)

  기도교의 신앙및 사상자체가 히브리적 사유와 헬라적 사유의 종합으로 이뤄져 왔지만, 그 본래적인 그루터기는 히브리적 사유인데, 히브리적 세계관에 있어서 몸, 육체성, 물질, 자연을 정신적 실재에 비하여 가치론적으로 저급한 것이라는 사고는 찾아 볼 수가 없고, 육체/정신의   이원론적 인간이해도 찾아 볼 수 없다. 그것은 본래적인 히브리적 사유라기 보다는 헬라적사유의 오염이었다.

   셋째, 동학의 신관에서 특징은 하눌님이 ‘氣化之神’으로 이해되면서, 매우 역동적으로 파악되어 신과 세계현실과의 상호관계가 매우 역설적인 ‘반대일치’논리구조 속에서 ‘不然其然’의 논리로 파악된다는 점이다.

   동학의 하눌님이해가 至氣論的 氣化之神으로 파악되었다는 것은, 동학적 실재관을 매우 역동적으로 만들고, 해월과 의암시대에 와서는 서구 생물학적 자연과학 이론과 조화를 추구하면서 천도교 신관및 인간관이 매우 진화론적 입장을 지니게 된다. 그리하여 동학적 실재관, 생명관은 원형 반복적인 ‘순환론’의 구조와 전통 서구의 ‘직선적 발전론’ 구조를 동시에 깨고, 순환하면서도 전진승화한다는 ‘나선형 발전’론으로 전개된다.

   ‘불연기연론’은 동경대전에서 포덕문이나 논학문 못지 않게 특히 동학의 신론에서 중요한 요소이다.10) ‘其然’이란 ‘그렇다’고 긍정되는 긍정되는 것, 이해되는 것, 논리적인 것, 납득되는것, 이성적인 것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긍정의 논리’이다. 다른한편 ‘不然’은 ‘그렇지 않다’는 의미로서 납득되지 않은 것, 불가사의한 것, 초논리적이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한마디로 ‘부정의논리’ 이다.

    수운은 태초의 만물의 출현, 인간의 탄생, 동식물 안에 잠재해 있는 잠재적 정의적(情意的) 능력의 기원, 진화발전의 가능성, 역사와 시간이 시원과 종국등 종교적 문제의 궁극적 주제들을 검토하고, 그 난해성과 역설적 성격을 논의하고 있다.

    동학의  불연기연론을 서구신학적 언어로서 표현하면 ‘기연론’은 ‘우주론적 신존재 談論 ’(Cosmological argument)이며, ‘불연론’은 ‘존재론적 신존재 談論’(Ontological argument)에 해당하는데, 전자는 우주안에 존재하는 질서, 인과율,목적성을 궁극점까지 추적하여 ‘제일원인’(The first Cuase)로서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스콜라신학체계에서 말하는 자연신학적 방법이다. 그러나 이러한 ‘우주론적 신존재증명’은 어디까지나 개연성에 그치는 것이지   확실한 증명방법이 되지 못한다. 그리하여 중세기 스콜라신학자 안셀무스(St. Anselmus)는 ‘우주론적 신존재증명’과 더불어 ‘존재론적 신존재증명’을 주장하고 더 중요시 하였다.

    존재론적 신존재증명이란 증거를 가지고 신의 존재성을 증명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존재론적으로 신을 ‘존재자체’, ‘존재의지반’, ‘순수존재’로 이해하는 것으로서 신은 모든 신에 관한 물음과 심지어 무신론자들의 신존재 부정이론의 ‘존재론적 토대’가 된다는 입장이다. 말하자면 신은 논리적으로 증명되는 인가율의 한 고리가 아니라, 모든 인식행위와 ‘긍정부정’행위의 존재론적 가능성이다. 인간과 모든 존재자들은 그가 인지하던지  아니하던지 간에, 마치 모든 인간이 지구중력과 대기압력 속에서 살고 있듯이, 인간과 만유는  신의 존재론적 능력과 지반 안에서, 그 능력을 통하여  존재하고 있다는 깨달음이 ‘존재론적 신존재담론’의 본질이다.

    수운의 ‘불연기연론’은 ‘불연’이 곧 ‘기연’이라는 동일성을 강조한다기 보다는 알셀무스처럼 ‘기연론’과 ‘불연론’ 곧 ‘우주론적 신존재 담론’과 ‘존재론적 신존재 담론’은 동시에 둘다 필요하다는것을 강조하는 것이 근본 의도이다. ‘불연기연론’의 본래 의도를 앞서말한데로 분명하게 하고서 , 그 ‘불연기연론’의 종교적 신앙적 의미를 좀 더 심화시켜보면 ‘반대일치의 논리’에 까지 나아갈 수 있다. 반대일치의 논리란 유한/무한, 긍정/부정, 창조/무위이화,창조론/진화론, 주체/객체, 초월/내재, 성/속, 신성/ 인간성, 말씀/ 밥, 노동/ 예배, 정치/종교 등등 서로 대립되거나 모순된다고 보여지는 것들이 사실 진정한 신앙적 체험안에서는 ‘역설적 일치’로서 파악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동학의 신관에서 ‘불연기연론’은 동학의 특징을 이루고 있다.
 
   4. ‘시천주 체험’과 동학 신관의 현대적 의미

   현대를 문명전화기라고 한다. 문명의 진정한 전화은 문명이기(文明利器)의 진보발전으로서만 이뤄지지 않고, 세계관과 실재관의 변혁을 동반해야 하고, 그러한  실재관의 패러다임전환은 본질적으로 종교관의 변화를 동반해야 하는 것이다. 종교란 다름아니라 모든 것은‘근본 뿌리’에 대한 총괄적이고도 근원적인 이해이며 참여이기 때문이다. 신학자 폴틸리히의 명언대로 ‘문화의 본질은 종교이며, 종교의 형태는 문화“이기 때문이다.11)

   이미 본론에서 언급하였지만 문명전환기에서 동학의 시천주체험의 의미와 동학신관의 가치를 집약적으로 두가지만  언급하기로 하자.

   첫째, 동학의 신관은 至氣一元論的 유기체 철학에 기초한 범재신관이므로, 존재세계를 요소론적, 인과율적, 환원론적으로 파악하는 기계론적 세계관이  아니라, 유기체적, 통전적, 비환원론적으로 파악하는 전일적 세계관이 된다. 그러므로, 삼경사상(三敬思想) 이 가능하며, 오늘날 지구 생태계가 파괴되어가는 시기에 새로운 자연이해의 이론을 제공할 수 있다. 단순히 인간생명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보호론 으로서가 아니라, ‘외유기화’의 이론터전 위에서 자연과 인간생명은 유기체적 관계구조로서 새롭게 파악된다.

   동학적 신체험의 백미는 수운이 말하는바 ‘시천주’ 속에서 드러나며, 자연히 ‘몸의 중요성’ 강조로서 나타난다. 몸의 중요성에 대한 자각은 다름아닌 구체적 생명체 하나 하나의 고난과 아픔에 민감한 반응을 요청하며, 구체적 ‘몸의 구원’을 실천하지 않는 모든 종교들과 철학들이  빠질수있는  관념성과 허구성과 지배적 이념적 노예화를 고발한다.

   둘째, 동학의 신관은 지구촌 시대에서 크게 셈족계종교가 지닌 신의 초월성강조와 중국계와 인도계 종교가 강조하는 궁극적 실재의 내재성을 통전하여, ‘내재적 초월’ 또는 ‘초월적 내재’를  강조하였다. 인간의 존엄성,사회윤리의 정의로움에 대한 열망과 그 중요성 강조, 그리고 우주적 존재신비를 동시에 강조할 수 있는 ‘범재신관적 종교적 영성’을 제시한다.

   ‘범재신관적 종교적 영성’에서 새롭게 이해한 실재는 결코 신중심주의, 인간중심주의, 자연중심주의 그 어느 것 하나도 배타적으로 주장될 수 없다. 신, 인간, 우주자연은 공역하고 동시에 참여하며, 서로 구별되면서도 분리되지는 않는 자기 각각의 공능을 지니게 된다. ‘범재신관적 종교적 영성’에서는 ‘역사’와 ‘자연’이라는 두가지 범주가 배타적으로 이해되거나, 양자중 어느것 한가지를 선택해야 하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날 수 있다.

   자연의 실재성이 배재되는 역사중심주의 세계관에서는 인간의 의도, 뜻을 지닌 가치구현등이 지나치게 강조되어 자연은 역사의미를 실현해가는 고정된 생명없는  무대 정도로서만 파악된다. 다른 한편, 역사의식이 약화되거나 배재된 자연주의 세계관에서는 태고의 원형반복, 전진없는 원형적 회귀, 미분화된 집단주의만이 활개를 친다. 동학의 신관과 신체험은 그 양자를 통전 화해시키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

   동학의 시천주체험과 천도교의 신관은 이처럼 세계적 보편성과 우주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동학, 천도교 인사들이 스스로 닫혀진  사고를 자초하면서, 동학의 하눌님은 ‘한민족의 하눌님’이며, 동학을  민족종교로서 한정시킬려는 시도는 스스로의 지닌 보화의 가치를 바르게 인지하지 못하는 결과이다. 참된 진리체험은 물론 구체성과 고유성을 지닌다.

   동학이 동쪽 한민족의 수난기에 터득한 진리체험인  때문에,자연스럽게  한국적 민족주의 향기를 다른 외래종교보다 더 많이 내포 할수 있다. 그러나 종교적 진리는 구체성, 특수성, 고유성만이 아니라 보편성, 우주성, 세계성도 반드시 지녀야한다.무릇 모든 참 종교는 민족, 국가, 인종, 집단안에 갇혀있는 것이 아니다. 비록 작게  좁은 지역에서 발생하고 형성되었지라도 그 종교적 진리가 지닌 높이와, 넓이와, 깊이 때문에 세계적 종교로서 보편성과 우주성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려면, 천도교는 본래 지닌 깊은 수운, 해월의 신앙과 실재관에 기초하여 더욱 발전되어가는 실천적, 이론적 탐구 모색과 이론전개가 요청된다.  로마제국의 식민통치 아래 있었던 유대국 작은 시골마을 갈릴리에서 일어난 창조적 소수자의  종교 기독교가 오늘날 세계적 보편종교가 된 것이 그 좋은 예이다. 동학사상의 세계화를 위하여 좁은 민족주의나 국가주의를 넘어 열린마음을 지녀야 할 때이다.
    
 
출처 : http://cafe.naver.com/gaury/11834    
미선 (13-05-03 16:44)
 
몸학을 공부하다보면 아이러니하게도 조선의 동학사상 특히 최수운의 시천주 사상과 알게 모르게 유사점을 느낄 것으로 본다. 하지만 내 입장에서 이것은 우연의 일치에 가까운 것일 뿐이다. 김경재 교수는 그러한 동학의 신학은 몸의 신학이요 동학의 영성은 몸의 영성이라고 말한다. 생각건대, 적어도 동학의 신관이 보다 진화된 유형의 고등 신관인 것만은 분명하다고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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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존 캅의 그리스도 중심적 다원주의 (유정원) 정강길 7016 05-20
49 진정한 유일신론은 다원론 (김경재, 오강남) 정강길 8445 04-28
48 떼이야르 드 샤르댕의 『인간현상』을 읽고서... 정강길 9429 04-27
47 이안 바버가 보는 과학과 종교 간의 관계 유형 (김흡영) 정강길 9240 07-16
46 세계화 시대, 남미해방신학의 유산 (장윤재) 정강길 7141 01-07
45 신학을 어떻게 할 것인가? (김경재) 관리자 6432 11-12
44 竹齋의 현재적 그리스도론 (김경재) 정강길 6406 05-06
43 경험은 믿을만하며, 완전한 지식을 제공하는가 (황희숙) (1) 미선이 6217 01-07
42 새로운 형태의 기독교, '갈릴리 복음'으로 돌아가야 산다! (김경재 교수) 미선이 5828 01-06
41 혼란의 시대: 종교, 무엇을 할 것인가? (정진홍 교수) (1) 관리자 6393 12-15
40 진리란 무엇이며, 내가 믿는 것이 반드시 진리인가 (한전숙) (1) 미선이 6390 12-01
39 “복음주의, 알고 보면 기득권주의” (1) 미선이 5329 11-28
38 기존 기독교인이 동성애혐오증을 가장 크게 지녔음을 말해주는 조사자료들 미선이 5214 11-28
37 영성에 대한 원불교 교리적 고찰 (백준흠) 미선이 5562 11-21
36 '죄'와 '구원'에 대한 전통신학의 한계와 과정신학적 해석 (김희헌) 관리자 5944 11-02
35 영성과 영성수련에 대한 새로운 이해 (정강길) (3) 관리자 5959 11-02
34 21세기의 종교-새로운 영성을 위하여 (길희성) (1) 미선이 6462 10-15
33 현대 무신론에 대한 신학적 이해 (오영석) 미선이 5507 10-14
32 한국교회사에 나타난 기독교 배타주의 (이숙진) (1) 치노 6817 10-01
31 [기조강연 전문] 한국 기독교의 배타성은 어디서 오나? (길희성) (1) 관리자 6094 10-01
30 [참조] 세기연의 월례포럼 자료들은 '세기연 월례포럼' 게시판에 따로 있습니다. 관리자 5278 07-29
29 SBS'신의 길 인간의 길' <제4부 길위의 인간> 전문가 인터뷰 정리 미선이 8330 07-29
28 프레크 & 갠디, 『예수는 신화다』(국역판 전문) (4) 미선이 8474 07-20
27 다양한 역사적 예수 연구 학자들의 SBS취재 인터뷰 내용 미선이 6383 07-06
26 제국의 폭력에 맞서는 해방을 위한 신학 - 김민웅 마루치 6272 05-21
25 [펌] 탈신조적 그리스도교에 대한 꿈 (1) 고돈 린치 6398 02-27
24 역사적 예수 제3탐구의 딜레마와 그 해결책 (김덕기) 정강길 6472 02-21
23 희랍 동성애의 특성과 사회적 역할 마루치 6109 02-15
22 몰입 (나에 대한 최고의 순간이자 그것 자체가 행복인 순간) 관리자 6879 09-12
21 예수 교회 예배 주보 표지를 장식할 '예수 이후의 예수들' 관리자 6894 08-03
20 하나님 나라 운동의 전초기지, 공동체 운동에 대한 좋은 자료들 관리자 8361 07-02
19 잃어버린 예수 : 예수와 다석(多夕)이 만난 요한복음 (박영호) 관리자 10185 06-27
18 김경재 - 한국교회와 신학의 회고와 책임 정강길 6081 06-06
17 이성정 - 함석헌의 새 종교론에 대한 연구 (강추!) 관리자 7965 01-27
16 행복 보고서 정강길 7008 01-18
15 한국인의 종교와 종교의식 (3) 성직자 및 종교단체에 대한 평가 관리자 5892 01-06
14 한국인의 종교와 종교의식 (2) 한국인의 종교관과 의식구조 관리자 8284 01-06
13 한국인의 종교와 종교의식 (1) 한국인의 종교실태 관리자 7658 01-06
12 우리나라의 3대 종교-불교/개신교/천주교- 분포 지도 (*통계청) 관리자 13740 12-15
11 종교 인구 20년간 어떻게 변했나? (*통계청) 관리자 11877 12-15
10 한국 종교계는 치외법권지역인가? 관리자 8018 11-24
9 보수 기독교인들 특히 C.C.C가 널리 전파하는 <4영리> 자료 관리자 10625 10-27
8 최근 예수 연구의 코페르니쿠스적 변화 김준우 9611 10-21
7 기독교 어떻게 개혁할 것인가?(강추) 돈큐빗 8205 10-07
6 정치적 시각에서 본 붓다의 생애 (잠농 통프라스트) 관리자 7846 10-04
5 숫자로 보는 한국 장로교의 정체 (3) 이드 14211 06-21
4 기독교 사상사를 결정지은 니케아 회의, 그것이 알고 싶다! (강추) 미선이 11970 05-31
3 [펌] 니케아 회의 시대 (313-590) 관리자 15386 05-30
2 [펌] "미국은 神이 지배하는 나라가 됐는가?" (1) 미선이 7143 05-17
1 [유다복음서 전문] 유다는 왜 예수를 배반했을까? 미선이 12703 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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