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구약의 법정신

 

- 본래 십계명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실제적으로 정치적인 측면이 강한 법규였었다. 오늘날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십계명을 종교적인 면으로만 보기 때문에 그 한계성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당시 이스라엘 사회가 정치와 종교가 일치된 제정일치 사회였음을 간과해서 안된다. 여기에 대해서 알아보자.-

 

 

1

 

구약성서의 역사는 유일신 사상을 정립하는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우상과의 대결의 역사였다. 십계명이 제정되는 광야의 유랑생활시대로부터 예언자들의 시대를 거쳐 희랍제국의 식민지 치하에 이르기까지 히브리들의 역사는 우상들과의 싸움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유대교와 이를 이어받은 기독교는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종교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이것은 다른 종교에 대해서 배타적인 태도와 입장을 취하는 것으로 오해되어 왔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모든 종교를 상대화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 이외에 어떠한 것도 절대화될 수 없으며, 유대교나 기독교를 포함해서 어떠한 것도 우상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우리는 기독교가 제일이라고 생각한 나머지 하나님이 아닌 기독교를 우상으로 섬기는 수가 많다.


기독교의 교리를 절대화시키는 것도 기독교를 우상으로 만드는 일이다. 가령 성서는 글자 하나하나가 그대로 영감에 의해서 씌어진 것이기 때문에 다른 방식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하는 이른바 '축자영감설'을 그대로 믿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하는 생각은 성서를 절대화시키는 일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적인 것이다. 그러나 성서의 글자들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뜻)을 인간의 언어로 담아낸 책인 것이다.

 

예를 들면 여기에 물이 담긴 물병이 있다라고 하자. 인간의 언어가 물병이라고 하면 하나님의 말씀(뜻)은 그 속에 담긴 물이라고 할 수 있다. 물병과 그 속에 담긴 물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사이지만 물병이 곧 물은 아니듯이 성서의 언어와 그 속에 담긴 하나님의 말씀(뜻)을 같은 걸로 봐서는 안된다. 여기에서 물병보다는 물이 더 중요하다. 물이 있어서 물병이 있는 것이지 물병이 있어서 물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뜻)이 먼저 있어서 성서가 있는 것이지 성서가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뜻)이 있는 것은 아닌 것이다. 우리는 성서를 볼 때 인간의 언어에 매달린 나머지 무조건 의심하지 말고 글자 그대로 믿어야 한다라는 생각이 팽배해 있다. 의심치 못할 부분은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지 그 말씀을 우리에게 전달하는 인간의 언어를 말한 것은 결코 아니다. 이상한 걸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말라면 결국은 하나님을 만날 생각을 하지 말라는 거나 마찬가지다. 성서를 백 번 읽고도 하나님의 말씀(뜻)을 깨닫지 못한다면 성서와 나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뜻)을 바르게 보지 못할 때 교회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고 교회가 만든 우상을 섬기게 되는 것이다. 십계명에서 말하는 '우상'이라고 하는 것은 금송아지 같은 조각물이나 마리아상이나 불상 혹은 십자가像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절대적인 힘으로 숭배하는 대상이다. 기독교인이 불상을 숭배하지 않는다고 해서 우상이 없다라고 말할 수 없다. 불상이나 마리아상보다 더 뚜렷한 우상이 마음속에 있을 수 있다. 돈과 권력이 우리 마음속에 절대적인 것이 될 때 그것들은 우상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른바 지배이데올로기도 우상이 된다. "나 이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우상에게 절하지도 만들지도 말라"는 계명은 고대 이스라엘의 정치적·역사적 상황과도 관련된 계명이었다. 그것은 하나님 이외에 어떠한 지배이데올로기에 대해서도 저항하라는 계명인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방神들을 왜 우상으로 보았는가 하면 그것들이 바로 인간위에 군림하여 인간을 억압하는 지배이데올로기의 역할을 한다고 봤었기 때문이었다. 이스라엘 주변의 강대국들은 자신들의 지배 체제를 더욱 굳건히 하기위해 커다란 우상이나 신상을 세워 백성들에게 권위적으로 군림해왔던 것이다. 십계명의 의미는 바로 이러한 억압적인 체제를 섬길 수도, 그리고 인간에게 있어서 결코 절대화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 땅의 역사 속에서 우리의 믿음의 조상들이 일제하의 3.1운동 사건이나 신사참배를 거부한 사건을 일으킨 이유 또한 십계명의 참뜻과 무관하지 않다. 그들은 인간 위에 군림하여 착취하는 일본 제국주의를 우상으로(혹은 사탄으로) 보았던 것이다. 즉, 일제에 저항했던 사람들이 종교적인 이유만으로 그런 것이 아니라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거부와 저항 때문도 있었다. 일본 제국주의를 인정하고 신사 앞에 절하는 것은 기독교인으로서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것이 된다. 그것은 죄다. 그러나 그 죄는 종교적인 죄일 뿐 아니라 정치적인 측면까지도 고려된 죄라는 것이다. 참 종교는 정치와 분리되지 않는다. 왜냐고? 인간이란 존재 자체가 종교적이면서도 여전히 정치적·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날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이 사회의 불의한 정치제도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것 같다. 사악한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항해서 저항하지 못하거나 안하는 것도 무서운 죄가 된다는 사실을 아는가? 그것은 그런 불의한 지배체제에 대한 말없는 찬성이기 때문이며, 결과적으로 기독교인들이 지배 이데올로기 편에 서서 이를 축복하고 민중을 억압하는 구실을 하기 때문이다.

 

"나 이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이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나타낸 민주주의 계명이기도 하다. 즉 사람위에 사람없고 사람밑에 사람없다. 사람 위에는 오직 하나님만 있을 뿐이다. 하나님 이외에 인간 위에 있는 어떠한 지배체제도 용납할 수 없다라는 사상도 포함된 것이 바로 출애굽한 히브리의 모노 야훼즘 신앙인 것이다.


어느 누구도 인간을 억압하거나 착취할 수 없다. 남성이 여성을 억압하고 업신여기는 것도, 백인이 흑인을 억압하고 업신여기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제1계명과 관련한다는 점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인간으로서의 자유와 평등은 하나님께서 태초에 인간을 창조하실 때부터 주신 것이기에 하나님외에는 아무도 빼앗을 수 없으며, 그러기에 하나님은 인간의 존엄성을 온전히 실현시키시는, 그러한 본성을 지니신 분인 것이다. 성서에 나타난 야훼하나님은 우선적으로는 언제나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빼앗긴 약자의 편에 항상 먼저 계시는 분이심을 깊이 명심하자.

 

 

2

 

- 오늘날의 대부분의 크리스찬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라는 계명을 알게 모르게 어기는 죄를 범하고 있다.-

 

세 번째 계명인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라는 계명을 살펴보자. "망령되게"라는 말은 "헛되게" 혹은 "함부로" 말하지 말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자주 찾는다고 해서 하나님을 잘 믿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올바로 알지도 못한 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하나님을 잘 믿는 것이 아니라 우상을 만들고 그 우상을 섬기는 죄가 되기 때문이다.

 

<기복신앙>이라는 것이 그렇다. 기복신앙은 하나님에게 복을 달라고 졸라대는 신앙을 말한다. 하나님에게 무엇을 자꾸 달라고 하는 신앙, 이것은 하나님을 무슨 요술장이로, 도깨비 방망이로 생각하는 것이기에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것이요. 우상을 섬기는 죄가 되는 것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한국교회도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컫는 부분들이 많이 있다. 우리나라 교회들은 무엇보다 "교회터"에 "교인수"에 더 중점을 둔다. 결국 그들은 교회터를, 교인수를 하나님보다 더 위에 두는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들의 말은 다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한다라고 말한다.

 

저명한 한학자로 알려진 김용옥 교수는 "나는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녔으며 장래 목사가 되기를 원했는데 오늘날의 한국교회가 이 세 가지 단어에 얽매여 있음을 보고 목사가 되기를 그만두었습니다. 그 세 가지 단어란 '믿어라, 돈내라, 집짓자'입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즉, 오늘날의 기독교는 하나님 제일주의가 아니라 교회 제일주의로 지향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김교수의 말이 끝나자마자 학생들과 청중들은 모두가 '와-'하고 박수를 쳤다고 한다.

 

그만큼 오늘날의 기독교 현실이 교회제일주의에 얽매여 있다는 사실에 대한 공감어린 반응일 것이다. 솔직히 그렇게 겉만 화려한 큰 교회들이 실질적으로 이 사회의 안정을 위해 얼마나 영향을 끼쳤으며, 불의한 정치 권력에 대해서 얼마만큼이나 항의했는가. 80년대 광주사건 때만 해도 기성교회가 억압받는 백성을 보고서도 계속 침묵을 지키자 일부 깨어있는 자들은 교회를 나와야만 했던 것이 오늘날의 기독교의 현실이 아닌가. 교회건물은 하나님의 성전이고 이것을 부수면 종교탄압이라고 부르짖지만 진짜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인 사람의 몸이 다치거나 죽어가는 이 사회 현실에 대해서는 그저 구경만 하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적당한 해결책도 없이 "오직 기도만"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교회에 와서는 기도한다고 하지만 정작 이 사회 한복판에 나가서는 민중의 빼앗긴 권리를 되찾아야 한다라고 한 목소리로 외치지 아니하며 잘못된 이원론에 빠져서 영혼 구제 운동에만 열을 올리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우리가 "오직 기도만"이라고 자꾸 말하는데 참기도란 고난받는 현실 안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가 참 기도이다. 고난받는 현실의 바깥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제3자적인 기도는 나사로를 문밖에 버려둔 채 나사로를 위한다는 방관자적인 극히 모순된 기도이며, 하나님이 보시기에 위선으로만 보일 것이다. 성서에서 말하는 "속히 나라이 임하옵소서!"라는 기도는 고난을 받고 있는 급박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 부르짖는 처절한 외침이었다. 자기들은 이 시대의 아픔을 함께 겪지도 않고 별로 급박한 상황의 자리에 있지도 않는 안일한 위치에 있으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컫는 죄가 될 수 있다.

 

야훼 하나님은 고난받는 현실의 바깥에 있지 않고 이 사회의 <히브리/하비루>들이 받는 고난의 현실 속에서 역사하시는 분이시다. 예수님 또한 고난으로 상징되는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셨지 푹신한 침대 위에서 돌아가신 것은 아니다. 참 진리는 우리를 절대로 안일한 곳으로 인도하지 않으며 반드시 십자가의 길, 고난이 있는 곳으로만 인도하는 것임을 기억하자.

 

하나님의 정의를 구현하지 않는 정권은 우상이며, 그러한 정권에 대하여 복종하거나 저항하지 않는 교인은 하나님 앞에서 우상숭배 죄를 범하는 자이다. 독일의 젊은 목사 디트리히 본회퍼는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에 대해서 침묵을 지키는 크리스챤들은 찬송가를 부를 자격이 없다고까지 했다. 즉, 그런 상황에서 방관자적인 자세로 찬송가를 부른다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컫는 죄요, 우상을 섬기는 죄가 되기 때문이다. 그들이 찬송가로 부르는 그 하나님은 유태인 학살에 대해서 그저 멍청이 구경만 하는 하나님이지 성서에서 말하는 히브리의 고난 속에 함께 하시는 그런 하나님은 아닌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모두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스도인이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 아닌가? 그보다도 예수님을 닮으려는 사람 아닌가? 그렇다면 하나님에게는 당연히 독재체제가 용납되고 자본독점이 용납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한 것은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어지럽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죽음의 판국을 "살림"의 장으로 바꾸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너도나도 그리고 우리 후대도 생명을 살지 못한 채 시들어 죽는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야훼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든 불의한 세력(또는 우상)에 대하여 저항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의 저항은 파괴를 위한 저항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사랑을 전제한 비폭력적인 저항이다. 왜냐하면 앞장서신 예수께서 이미 그렇게 하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미 얘기는 다 끝난 게 아닌가. 우리에겐 이러한 결단을 내리기 위한 신앙적 결의만이 있을 뿐이니까!

 

 

3

 

구약의 역사에 있어서 출애굽 사건은 가장 핵심적인 사건이다. 출애굽 사건이야말로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실질적인 야훼 하나님 신앙적 체험이었다. 그렇기에 이들은 유월절을 최고의 명절로 꼽으며, 억압받던 종살이에서 해방시켜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렸던 것이다. 그런데 유월절도 그렇지만 안식일이란 날도 출애굽 사건과 무관하지 않다.[사실 구약성서의 모든 사건이 출애굽이라는 사적 사건을 중심으로 해서 쓰여졌다. 우리는 출애굽기보다 창세기가 먼저 있었다라고 생각하지만 실은 출애굽기가 창세기보다 먼저 있었다. 그들은 출애굽이라는 역사적 사건으로 인해서 하나님을 섬기다가 그들의 조상 때부터 이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세우시기 위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했던 것이었다. 즉 성서에 나타난 사건들의 시간적 순서로 보면 창세기가 출애굽기 보다 앞에 오지만 성서를 기록하는 편집자적인 관점에서 볼 때는 출애굽기가 창세기보다 먼저 있었다는 뜻이다]

아무튼 히브리인들은 출애굽하기 이전, 수백 년 동안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하면서 혹독한 중노동에 시달려 왔다. 그런 그들에게 7일 가운데서 6일동안만 일하고 하루를 쉰다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엄청난 축복이었다. 출애굽 이후 그들의 그 바램이 바로 안식일 제도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들은 안식일을 지킴으로서 옛날 애굽의 노예생활을 떠올리며 거기에서 해방시켜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렸다. 즉, 안식일법의 본래 정신은 억눌리고 가난하고 소외된 계층인 히브리인들을 위한 것이었다.

 

비단 안식일 법뿐 아니라 출애굽 이후의 모든 율법 정신이 그러했다. 밑바닥 계층인 비천한 히브리인들은 자기들이 가진 것 하나 없는 약자라는 사실을 깨달았으며, 야훼 하나님은 약자인 자기들 편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약자를 위함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약자를 위함이라는 것을 포함한다고 봤던 게 바로 율법의 참정신이요 참의미다. 모세오경에 나타난 율법들을 보면 가난한 자나 과부나 떠돌이 나그네나 고아나 노예들을 위한 구절들을 종종 볼 수 있다. 그리고 "나는 너희가 애굽 땅에서 종살이할 때에 그 곳에서 이끌어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라는 구절 또한 종종 볼 수 있다.

신약시대에서도 볼 때도 예수는 안식일 문제로 인해 종종 바리새인들과 논쟁을 벌였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예수의 제자들이 밀이삭을 잘라먹거나 예수가 병을 고치는 행위에 대해서 민감하게 분노하고 비난했다. 예수의 행위는 명백한 안식을 위반이었다. 왜냐하면 예수가 안식일에 병을 고쳐준 환자는 안식일에 당장 손을 쓰지 않으며 안될 생명이 위태로운 환자가 아닌 18년 혹은 38년이라는 긴 세월을 앓아온 만성환자들이었기 때문이다. 특별히 안식일에 병을 고치지 않아도 되는데 예수는 바리새인들의 그릇된 생각을 깨우치기 위해서 일부러 안식일에 병을 고쳤던 것이었다.
여기서 바리새인들의 율법해석과 예수의 율법 해석의 차이가 드러난다. 예수는 바리새인들과 달리 모세오경을 새롭게 해석하였다. 즉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라는 구절을 문자 그대로 해석했던 것인데 반해, 예수는 모세오경의 문자적 해석이 아닌 안식일의 참된 정신, 즉 율법의 본래적인 의미를 주장했던 것이었다. "사람이 안식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다.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인 나도 안식일의 주인이다" 이것은 그 당시에 있어서는 폭탄선언이요 율법의 재해석이며 인권에 대한 대선언이다.

안식일의 히브리어 뜻은 '중지하다', '휴식하다'이다. '중지'와 '휴식'은 일을 하고 있음을 전제하고 쓰는 용어다. 그러기에 안식일은 엿새동안 땀흘려 일한 자에게 그 의미가 있는 것이다. 노동은 창조의 행위다. 그러므로 창조의 새로운 에너지를 얻기 위한 것이 바로 안식일인 것이다. 우리는 안식일이 바로 참된 인간화를 위해서 있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자.

 

오늘날 안식일을 주일과 연관시켜 볼 때 우리는 기독교인 중에도 주일을 그릇되게 지키고 있는 예를 쉽게 볼수 있다. 보수적인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일수록 주일 엄수를 강조하는 어떤 이는 주일에는 공부도 하면 안되고 돈을 쓰거나 장사를 해서도 안된다고 못박으며 이것을 어기면 하나님 앞에서 죄가 된다라고 주장한다. 이런 자들은 성서의 문자적 해석에만 매달린 바리새인들과 다를 바 없다. 우리는 일요일에는 일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일에 얽매일 것이 아니라 그 기준이 참된 인간화를 위한 것이면 된다. 즉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여 이웃의 사람들과 같이 더불어 평화 기쁨을 나누게 하는, 진정한 안식일의 정신을 잇는 주일이 되어야 할 것이다.

 

 

[참고 도서]

▷ 서남동, 이현주 외, 「일하는 자들을 위한 성서공부」, 돌베게

▷ 안병무, 「민중사건 속의 그리스도」, 한국신학연구소

 

 


 

  1. 기독교 신앙을 보는 개괄적 이해 - 이것만큼은 꼭 볼 것!

 2. 성서관 - 성서를 성서답게! 성서를 우상화하지 말자..

 

○ 구약이야기

 3. 히브리의 하나님

 4. 구약의 법정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