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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펌] 양신규 교수의 홍성욱 교수 글(아래 8번글) 반론과 계속 이어지는 눈부신 논쟁    
  글쓴이 : 정강길 날 짜 : 06-12-01 00:53 조회(17160)
   트랙백 주소 : http://freeview.org/bbs/tb.php/e003/12 




 
와우~ 내가 보지 못하고 지나갔던 아주 끝내주는 글이 있었네요..
<지적사기> 사건과 관련하여 아래의 홍성욱 글(게시물8번글)이 나로선 나이브한 측면이 있다고 봤었는데
아니나다를까 그 홍성욱 글에 대한 아주 분명한 비판글이 있었네요..
글을 쓴 사람은 양신규님이라는 분으로 논지가 명확하고 글줄이 아주 분명하여
나로선 이런 사람의 글을 대하게 되면 '양신규'라는 인물이 누군지 궁금해지기까지 합니다...
 
보니까 양신규 교수는 홍성욱 교수랑 아주 친한 친구사이고, 역시 같은 서울대 물리학과 졸업하고 뉴욕대 경영학과 교수, MIT 초빙교수 역임했는데, 안타깝게도 이미 작년에 돌아가신 분이라고 하네요..
 
그런데 더 놀라운 건, 알고 보니까 이 분이 얼마전 철학게시판의 어느 분께서 알려주신 '고 양신규'님과 동일인물이셨더군요.. 아, 난 왜 이토록 바보천치일까..ㅡ.ㅜ 아무리 오래전에 우리모두 소칼방에서 놀았다지만 이런 경우는 제 자신이 참 한심스럽기도 하네요.. 암튼 정말 괜찮은 필력가를 우연히 발견한 느낌인데, 전에는 몰랐다가 이제서야 발견하다니 한편으론 제 자신이 정말 부끄러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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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름 skyang
제 목 홍성욱의 소칼서평과 '상대주의변호' 비판
 
홍성욱의 논점은 소칼의 두 차례에 걸친 공격 (Social Text 의 실험; 지적사기 출판) 에도 불구하고 상대주의가 설 땅은 있다는 이야기다. 왜 소칼이 사회구성주의와 포스트모던을 동일시해서 공격했는가에 대한 미국의 컨텍스트 분석, 그리고 인식론적 가치론적 상대주의에 대한 얼핏 세련된 옹호는 읽을만한 얘기들이다. 물론 이 분석은 미국에서 소칼의 반대편에 섰던 인물들 - 소칼에게 당했던 인물들이 내 놓은 나름대로의 항변의 재탕이다. 또 사례들은 홍성욱의 것이지만, 그 상대주의 옹호결론도 미국서 나온 얘기들의 재탕이다. (홍성욱은 자기가 먼저 한 얘기가 아니면 출전을 밝혔으면 한다.)

아무튼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것도 의미는 있다. 왜냐하면 그 동안 한글로 써진 소칼사건에 대한 평은, "미제국주의자"의 프랑스에 학문에 대한 "열등감"이 빚은 "삼류학자"의 "프랑스 철학" 깍아 내리기 "상업주의"에 불과하고 "무시하는 게 장땡이다" 라는 식; 이정우 "선생님"이나, 그 친구 자칭 소르본, 복면의 중상모략가 등등의 단발마적 찍소리 정도였으니, 본바닥토론 수준으로 끌어 올려놓아야 그 담에 뭐가 되지 않겠는가?

그렇다고해도 홍성욱교수의 글의 두 가지 커다란 문제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는 소칼의 의도, 동기에 대한 공상과학소설적 주장을 또 늘어놓았다는 점이고, 두 번째는, 홍성욱의 과학에 대한 상대주의적 인식론의 변호가 하나는 번짓수를 잘못 찾았고, 다른 하나는 전혀 근거부족이라는 점이다. 홍성욱이 제시한 과학사와 과학철학상의 사례들은 조금만 논리를 정리하면, 홍성욱의 희망과는 정확히 반대로 상대주의적 인식에 대한 공격으로 바로 둔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좀 살펴보자.
 
소칼의 동기와 홍성욱의 소칼사건 Contextualization

소칼이 스스로 이야기한 동기는 다음과 같다. 소칼 본인은 전통적 좌파로서 사실과 논리에 근거하는 이성이 현대의 억압과 불평등을 해소시킬 수 있는 가장 큰 무기라고 생각해 왔다. 미국의 문예이론가들이 인간이성과 그것에 근거한 과학을 상대화하는 것을 보고 참을 수가 없어서 조그만 실험을 한 번 해봤다. 고 실험은 물론 Social Text 라는 미국의 상대주의자+포스트모더니스트 들의 leading trendy 학술지에 Hoax 논문을 하나 보내 본 것이다. 홍성욱이 이 잡지가 trendy 하기는 하지만 leading 하지는 않다고 주장했는데 글쎄 캐나다 토론토에선 그런지 몰라도 보스턴이나 뉴욕에서는 leading 이다. 꽤 잘 알려진 고 분야 인물들이 직접 심사하는 잡지이기 때문이다. (이런 얘기 또 안하게 하기 바란다. 복면의 중상모략가 소르본 수준으로 떨어지기 싫으면 말이다.)

소칼의 이 스턴트로 미국 내에서의 게임은 끝났다. 아마추어 인문학자의 장난과 심각한 학술논문을 구분 못하는 사람들이 모여 떠드는 분야가 제대로 된 현대학문이 될 수 없는 것은 (복면 중상모략가인 소르본이 보기에는 혹시 몰라도) 미국의 학문세계에서는 학부학생들에게 까지도 명확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 Hoax 논문을 쓰면서, 또 이후 논쟁과정에서, 소칼이 발견한 것은 미국 포스트모던 상대주의자들이 논리부족을 메우기위해 주로 기대는 권위가 주로 프랑스 반이성주의 철학자들이라는 사실이었다. 사실, 소칼의 Hoax 논문이 정확히 이 맹점을 이용해서 출판이 되었다. 적당히 포스트모더니스트들 상대주의자들이 좋아할 말 몇 마디 한 다음, 그것과 비스무리하게 프랑스철학자가 한 말을 갖다 붙이면 그것이 가장 명확한 논거가 된다.

(이런 식의 글쓰기는 생각해 보면 남한 지식인들이 전형적인, 남의 권위를 -외국학자, 막연한국민정서 운운 - 빌어서 말하는 얼버무리기식 글쓰기하고도 매우 닮아있다. 그러다가도 논리나 지식이 딸리면 그 담에는 사람이 먼저 되어야 한다는 둥, 글쓰기 자세가 먼저 되어야 한다는 둥 전혀 논점하고 상관없는 얘기로 빠져나가려는 비열한 책동과 대중 선동을 한다. 복면의 중상모략가 소르본이 전형적인 사례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이 본바닥 프랑스보다 남한에서 대유행을 하는 것은 어쩌면 이런 면에서는 아주 당연한 얘기다.)

소칼은 그래서 이번엔, 아예 브릭몽의 도움을 받아 프랑스 철학자들의 글을 직접 한번 분석해 보기로 했다. 그랬더니, 미국 포스트모던 상대주의자들의 스타일의 원전이 바로 거기가 아닌가. 재밌는 것은 미국포스트모던상대주의자들이 프랑스주인들에게 막연하게 권위를 빌 듯이, 이 프랑스의 마스터들은 현대과학과 수학의 권위를 막연하게 빌어 주장의 근거를 제시하는 것이다. 현대 과학과 수학에 대해 좀 아는게 있는 소칼은 그 잘못된 이해, 남용과 오용을 지적하는 책을 낸 것이다.

물론 나는 잘 모르는 얘기지만, 홍성욱의 주장처럼 미국 보수적 과학계 뭐 이런 사람들이 소칼사건을 이용해 먹으려고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소칼사건을 홍성욱처럼 Contextualization 하는 것은 X-file 식 음모론 수준이다. 또, 뭘 이용해 먹는 것이야 이용해 먹는 사람들 맘이지만, 설혹 이용당했다 하더라도 소칼의 스턴트나 분석이 의미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E=mc^2 가 원폭제조에 이용당했다 하더라도, 아인쉬타인의 업적이 의미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홍성욱의 '상대주의변호'에 대한 비판

소칼이 문제로 삼고 공격을 하기로 결심한 것은 미국 과학철학이나 연구자들 사이의 미묘한 상대주의적 요소들이 아니다. 홍성욱은 의식-무의식적으로 소칼이 이들 모두를 다 공격했다고 몰고가고 싶은지 몰라도, 소칼이 털어놓은 동기와 그의 글들을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은 홍성욱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소칼이 직업적 과학철학자가 아니라, 포퍼를 상대주의자로 오인하는 등 철학에 대해 잘 모르고 앞 뒤 안가린 잘못은 분명 있다. 그건 내 글도 마찬가지고, 사실은 홍성욱 글도 마찬가지다.)
소칼의 공격 대상은 Serious Scholarship 에 관한 한 사회구성주의 과학기술사의 Strong Program 에 국한된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이 Strong Program 만이 바로 또, 미국 포스트모던 문예이론가들에게 반과학 반이성주의의 인식론적 타당성을 제공해주었다. 다시 정리하지만, 영미분석철학 관점으로는 프랑스 철학자들은 심각하게 철학적 인식론을 얘기하는 사람들로 보기 힘들다. 영미식으로 가장 비슷하게 그래도 인식론의 형태를 띠고 있는게 영국에서 나온 사회구성주의 Strong Program 의 인식론이다. 미국의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Strong Program 의 논리를 얼타 좋다하고 받아들인 이유는 영미에서 얘기하려면 프랑스식 인식론 부재로는 좀 말이 좀 안되기 때문에 그 공백을 사회구성주의 Strong Program 의 주장을 빌어 메꿀수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Strong Program 의 상대주의적 존재론 인식론과 프랑스 철학자들의 현란한 수사를 결합하여 포스트모던 상대주의를 주장했다고 보이고, 소칼의 장난끼를 동하게 한 주장은 바로 이 미국식 포스트모더니즘이다.

그런데 홍성욱은 훨씬 넓은 의미의 상대주의, 예를 들어 토마스 쿤의 상대주의까지 포함해서 상대주의를 변호하고 있다. 그런데 쿤의 상대주의와 Strong Program 의 상대주의는, 쿤이 Strong Program 을 강력하게 비판한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전혀 다른 이야기다.

쿤은 내 기준으로는 어느 모로 봐도 존재론적, 인식론적 realist 이다. 더구나 그의 비정통 철학책인 "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 1962" 의 모호한 주장들과는 사뭇 달리, 그의 전문적 역사책인 "Copernican Revolution, 1957" 은 명징하게 어떻게 과학적 사고가 관측사실에 의해서 도전받고 수정되고 받아들여져 가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정치도, 관습도, 실용적 필요성도, 사고의 편협성도 다 과학활동에 영향을 미치지만, 결국 과학적 이론의 우열을 결정하는 것은 "논리와"와 "사실" 이외는 없다는 Implication 아주 선명하게 쿤의 첫 노작인 Copernican Revolution 에는 찍혀있다.

왜 Kuhn 의 나중 책인 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 이 과학자 집단에게는 마이동풍이고 영미 분석철학에도 별 영향이 없었는 데에 반해; 사회구성주의 과학사가들, 인류학자들, 몇몇 사회학자들, 포스트모던 문예이론가들이 떠받드는 책이 되었는가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하더라도 Scientific Revolution에서 보이는 모습의 토마스 쿤까지도 자기를 오독해서 추종하는 사회구성주의자들 보다는 소칼과 백배는 인식론적으로 가까울 것이다. 쿤은 Strong Program 에 대해 강력히 비판한 적은 있어도, 과학자집단의 직업적 활동을 규정하는 인식론을 비판한 적은 없다. After all he is a historian. He wrote about history of science that scientists make.

리얼리즘에는 여러 쉐이드가 있다. 가장 철저하게 객관적 사실과 그 사실의 인식에 관한 이성적 논리에 대한 믿음을 과시하는 이성옹호 리얼리스트로 알려져있는 John Searle 의 철학도 예를 들어 Marvin Minsky 의 두뇌와 인지에 대한 사고와 비교하면 "상대적"인 리얼리즘이다. 현대 Standard 론이나 슈퍼스트링 이론 연구를 하는 이론, 실험 물리학자들 내에서도 와인버그나 호킹보다는 "상대적인" 리얼리즘 인식론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는 사람이 더 많다. 스티븐 와인버그나 스티븐 호킹은 "완전한 궁극적 이론"이 우리 세대에 달성 가능하다는 희망이 있는 반면, 젊은 더 많은 물리학자들은 "인간의 두뇌가 과연 궁극적 이론을 찾아내고 이해할 만큼 되나?" 라는 상대적인 질문을 한다. 강아지에게 아무리 미적분학을 가르쳐봐야 별볼일없듯 (사실은 인류의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 강아지하고 별반 다를 것 없는 인간의 뇌로 수학 좀 안다고 우주를 이해할 수 있을까?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젊은학자들의 생각이 훨씬 설득력 있다고 생각한다. 와인버그나 호킹의 꿈이 겨냥하고 있는 것도 사실 따져보면 우주와 인생에 대한 "궁극적 이론"이 아니라 겨우(?)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의 상호모순을 해결하는 것이다. 소칼마저도 예를 들어 "신은 우주를 만들었고, 뉴튼 덕분에 우리는 우주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라고 생각한 19세기의 라플라스에 비하면 과학적 진리에 대해 훨씬 상대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

이런 조금씩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거의 모든 과학자들은 철저하게 존재론 인식론적으로 realist 들이다. 그들의 언변하고는 아무 상관없이 그들의 직업적 활동은 실제와 더 부합하고 더 간단한 과학이론을 만들고, 실제와 맞는지 따져보고, 더 맞는 이론을 개발하고 하는 일이다. 내가 "패배주의철학2: 개똥철학"에서 정리한 Searle 식의 "실용주의적 리얼리즘"이 약한 형태의 실재론으로 이런 활동에 종사하는 광범한 과학자들, 리얼리스트 사회과학자들의 직업의 인식론을 포괄할 것이다.

리얼리스트들이 말하는 과학의 객관성이라는 것은, 과학이론이 사실과 부합할 때 살아남는 다는 얘기; 두 이론이 대립할 때 심미적 기준 등 다른 어떤 기준이 있더라도 궁극적으로는 어느 이론이 더 사실과 부합하느냐에 따라 이론이 채택된다는 얘기다. 쉬운 말로 우겨서 되는 일이 아니라, 사실에 맞아야 된다는 말이다. 이 "사실의 독재"가 바로 사실과 상관없이 이뻐서, 그냥, 남들이 하니까, 혹은 우겨서 되는 비과학적 모든 영역과 과학이 갈라지는 명확한 경계이다. 듀엠-콰인 명제로 과학적 객관성이 부정된 것이 아니라, 과학적 인식론의 통계적 지평으로의 확대 과정으로 봐야되고, 이렇게 더구나 통계적 지평으로 연장된 과학적 인식론에 의하면, 홍성욱의 얼버무림과는 전혀 달리 검증과 반증은 결국 통일 되게 된다. 전통적으로 지나치게 강하게 주장되던 과학 이론의 "검증"은 "미반증", 혹은 "반증불능"을 말할 뿐인 것이다. 소위 "검증의 논리적 패러독스"는 이렇게 해서 반이성 반과학주의자들이 만들어낸 허깨비에 불과해지고, 과학지식은 검증을 통해 증명된 진리가 아니고, 우리가 가진 관측능력에 가장 부합하는 이론으로 논리적 상호모순이 없는, 사실에 대한 해석이다.

홍성욱이 든 사례들은 그래서 그의 주장대로 상대주의 옹호가 아니라, 반대로 정확히 과학적 객관성, realism 적 인식론을 강화하는 데에 사용되는 것이 오히려 적당하다. 뉴튼의 중력 법칙은 실재하는 무엇에 대한 과학적 객관적 지식이다. 아인쉬타인의 일반상대론은 그 뉴튼의 중력의 원인에 대한 더 포괄적인 해석임과 동시에 더 사실과 부합하는 이론이고, 양자론은 그 이론적 철학적 혼란에도 불구하고 관측 사실과 부합하기 때문에 도미넌트한 이론이 되었다. 수퍼스트링 이론은 바로 또 그 동안 논리적 충돌을 보여온 양자역학과 일반상대론을 포괄해서 양쪽을 더 일관된 포괄적 이론의 한 특수분야로 위치 지우려는 노력의 중요한 일각이다.

이 실제론적 인식론은 16 세기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오에서 시작한 물리학에서 가장 선명히 확인이 되어왔고, 화학, 생물학 과 기술공학의 모든 영역을 별 어려움없이 점령했다. 더구나 나아가 18,9 세기 아담스미스와 맑스를 이어서 경제학, 일부 정치학에까지 확대된 실증주의적 사회과학역시 조금 더 이론적으로 정합적이고 사실과 부합하는 이론이 살아 남고, 또 발전해 왔다는 역사적 사실을 부인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홍성욱의 상대주의 옹호라는 주장은 그래서 그의 사례로 보강되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로 과학적 리얼리즘을 더 옹호할 뿐이다.

더구나 홍성욱은 마지막엔 도덕적 호소에 의존하여 상대주의를 보존하려고 하고 있다. "과학지상주의" "과학절대주의" 와 싸우는 상대주의라는 도덕적 보호 요청으로 글을 마무리하고 잇다. 갑자기 적을 설정하고 (칼 슈미트의 Concept Political 의 의미에서) 정치적으로 돌변하는 건데. . . 괴벨스식 선동의 혐의를 쓰기 싫다면 우선 우선 과학지상주의와 과학절대주의를 정의하고 시작해야 될 것이다.

소칼도 그렇지만 나의 입장도 정확히 그런 애매모호한 태도를 비판하는 것이다. 과학지상주의, 과학절대주의가 뭔지, 왜 나쁜지는, 홍성욱도 누구도 정의 및 설명을 하지 않아서 아직 잘 모르겠지만; 설혹 그것에 무슨 폐해가 있다고 해도 그것이 얼버무리기식 포스트모던 상대주의로 극복되는 것이 아니라, 더 과학적인 사고, 더 사실과 부합하는 과학적 이론으로 극복이 되는 것이다.

글의 마무리로, 홍성욱과 똑같은 도덕적 호소에 의존하여 포스트모던 상대주의를 배격해 봐야겠다.

남한의 지식담론은 한번도 미국처럼 물리학자를 비롯한 자연과학자들, 공학자 및 기술자들, 경제학자, 경영학자 등의 실용주의적 실제론자들이 헤게모니를 잡아본 적이 없는 전근대적인 수준이다. 이문열이나 이인화등의 소설가들, 사실과는 아무 상관없이 상상속에서 지어낸 얘기를 지껄일 뿐인 사람들이 지식인 행세를 하고, 기본논리공부도 안된 김대중, 유근일, 조갑제 등이 얼치기 저널리스트들이 담론을 장악하고 있는 판이다.

이런 지식사회에서, 상대주의 옹호는 그 무지하고 지겨운 양비론의 양산, 근거없는 혹세무민식 글쓰기 외는 나을 것이 없다. 홍성욱이 두려워하는 과학지상주의, 과학절대주의는 뭔진 모르지만, 적어도 남한에서는 포스트모던 기버리쉬보다는 훨씬 장려되어야 하는 것처럼 들린다. 홍성욱의 상대주의 옹호는 마치 지금의 전근대적인 우물안 개구리식 남한 지식담론의 수준을 유지 강화 퇴행시키자는 주장으로까지 우려될 수 있다. 과학지상주의를 두려워 할 것인가, 전근대로의 퇴행을 두려워할 것인가?
 
- 양신규 교수
 
 출처 : 과학갤러리 사이트
 http://kr.dcinside14.imagesearch.yahoo.com/zb40/zboard.php?id=science&sn1=&divpage=32&banner=&sn=off&ss=on&sc=off&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138365
 
양신규 교수 글모음 추모게시판 http://www.hadream.com/zb40pl3/zboard.php?id=skyang
 
 
 
아래의 글은 계속 이어지는 논쟁입니다.
두 논객의 치열한 지적싸움은 정말 눈이 부실 정도군요..
 
.............................................................................................................
 
 
 
 

 

By 홍성욱

2000/05/07 (08:08:53)  

양신규의 비판에 대한 반론

 

양신규교수의 반론에 대한 재반론입니다(필요한 부분만 따와서 리플을 달았습니다).

 

"물론 이 분석은 미국에서 소칼의 반대편에 섰던 인물들 - 소칼에게 당했던 인물들이 내놓은 나름대로의 항변의 재탕이다. 또 사례들은 홍성욱의 것이지만, 그 상대주의 옹호결론도 미국서나온 얘기들의 재탕이다. (홍성욱은 자기가 먼저 한 얘기가 아니면 출전을 밝혔으면 한다.)"

 

상대주의 과학철학, 과학사회학과 "소위 프랑스 포스트모더니스트 철학자"들을 함께 비판하는 것의 문제점은 누구보다도 소칼과 브리크몽 자신들이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글을 쓰는 과정에서 본 글 중에는 Michel Callon Alan Howarth의 논문이 이런 접근을 사용하고 있는데 (내 글 각주 5에 있음), 읽어보면 알겠지만 그들의 초점이나 주장은 나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리고 "상대주의 옹호결론도 미국서 나온 얘기들의 재탕"이라고 했는데, 출전을 좀 알려주면 고맙겠다. 내 글은 내가 각주에서 언급한 다른 사람들의 논의에 바탕하고 있지만, 그것을 엮어서 제시한 주장 그 자체는 내것이라고 생각하니까. (이런 글을 가리켜 review article이라고 한다. research paper와는 대조되는 범주로서. 이 정도야 알겠지.)

 

"소칼이 스스로 이야기한 동기는 다음과 같다. 소칼 본인은 전통적 좌파로서 사실과논리에 근거하는 이성이 현대의 억압과 불평등을 해소시킬 수 있는 가장 큰 무기라고 생각해왔다. 미국의 문예이론가들이 인간이성과 그것에 근거한 과학을 상대화하는 것을 보고 참을 수가 없어서 조그만 실험을 한번 해봤다. 고 실험은 물론 Social Text 라는 미국의 상대주의자+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leading trendy 학술지에 Hoax 논문을 하나 보내 본 것이다."

 

나는 소칼이 구좌파의 이념과 철학을 가지고 (, 세상에는 진리가 존재하고, 우리는 (주로 과학을 통해) 노력하면 이것을 알 수 있다는) Hoax article을 썼음을 이미 1997년 여름에 씌어진 글("누가 과학을 두려워하는가")에서 분명히 밝혔다. 이런 상식적인 얘기를 부정한 것이 아니다. "과학" "진리"에 제일 매혹되었던 집단이 누구인가? 바로 레닌과 볼셰비키 아니었던가? 그리고 "진리"를 사수하기 위해서는 구좌파와 보수주의자들이 너무나 쉽게 손을 잡는다는 얘기도 했다. 생각해보라. 좌파를 자처하는 양신규의 진리관이 조갑제나 이문열의 철학(?)과 얼마나 비슷할지를.

 

"소칼은 그래서 이번엔, 아예 브릭몽의 도움을받아 프랑스 철학자들의 글을 직접 한번 분석해 보기로 했다. 그랬더니 미국 포스트모던 상대주의자들의 스타일의 원전이 바로 거기가 아닌가."

 

이것은 반론이라기보다는 궁금해서 물어보는 것인데, 여기서 "미국 포스트모던 상대주의자"는 구체적으로 누구를 말하는 것이고 "스타일의 원전"(왜 이론이나 개념의 소스라고 하지 않고, 스타일이라고 했는지?)은 뭘 의미하는가?

 

"물론 나는 잘 모르는 얘기지만, 홍성욱의 주장처럼 미국 보수적 과학계 뭐 이런 사람들이 소칼사건을 이용해 먹으려고 할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소칼사건을 홍성욱처럼 Contextualization 하는 것은 X-file 식 음모론 수준이다."

 

내가 어디서 "미국 보수적 과학계 뭐 이런 사람들이 소칼 사건을 이용해 먹으려고" 했다고 했는지 좀 지적해 주면 고맙겠다. 내 얘기는, 소칼을 비롯한 과학전쟁이 80년대 후반부터 문화전쟁으로부터 resource를 끌어와서 사용한 것이 있었고, Sokal's Hoax로 화제의 대상이 된 과학전쟁이 다시 다양한 그룹의 철학자들, 과학자들, 모더니스트들, 포모스트들에 의해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프랑스에서 소칼을 극찬한 극소수의 사람들 중 한명인 J. Bouveresse가 비트겐슈타인 전공 철학자이고, 임경순과 진중권이 소칼을 옹호하면서 한국의 '큰 얘기꾼'과 포스트모더니스트로 비판의 화살을 돌리는 것이 다 이런 "이용"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또 뭘 이용해먹는 것이야 이용해 먹는 사람들 맘이지만, 설혹 이용당했다 하더라도 소칼의 스턴트나 분석이 의미가 없어지는 것은아니다. E=mc^2 가 원폭제조에 이용당했다 하더라도, 아인쉬타인의 업적이 의미가 없어지는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이런 "이용"을 들어 <지적 사기>를 폄하하려했나? 아무리 "무식한" (인문학자들이 보기에) 사회과학자라고 해도, 다른 사람의 텍스트를 읽을 때는 좀 편견없이 읽고 그 의미를 곱씹어보도록 제발 "노력"이라도 좀 해보기 바란다. 내가 얘기하려 했던 것은, 이런 "이용"의 와중에서 텍스트 그 자체를 진지하게 분석하고 논의한 글이 별로 눈에 띄지 않고, 내가 서평을 통해 그것을 한번 시도해 보겠다는 것이었다. 의심이 되면, 여기가서 나의 텍스트를 다시 한번 들여다 보기 바란다.

 

, 이제 상대주의에 대한 양신규의 비판을 좀 들여다 보자.

 

"소칼의 공격 대상은 Serious Scholarship 에 관한 한 사회구성주의 과학기술사의 Strong Program 에 국한된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Strong Program 만이 바로 또, 미국 포스트모던 문예이론가들에게 반과학 반이성주의의 인식론적 타당성을 제공해주었다."

 

이건 궁금해서 묻는 것인데, 이 얘기의 증거를 좀 대주면 고맙겠다. Strong Program이 포모 문예이론가(아마 literary critics의 번역?)까지 영향을 미쳤나? 현재 과학사회학에서는 주류이지만, 그 바로 인접분야인 과학사나 과학철학에서도 맨날 비판받는 프로그램인데...

 

"그런데 홍성욱은 훨씬 넓은 의미의 상대주의, 예를 들어 토마스 쿤의 상대주의까지 포함해서 상대주의를 변호하고 있다. 그런데 쿤의 상대주의와 Strong Program 의 상대주의는, 쿤이 Strong Program 을 강력하게 비판한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전혀 다른 이야기다."

 

나한테 뭐라고 하지 말고, 소칼과 브리크몽에게 뭐라고 해라. 소칼과 브리크몽이 쿤을 같이 싸잡아 비판하니까, 그것에 대응한 것 뿐이니까.

 

"쿤은 내 기준으로는 어느 모로 봐도 존재론적, 인식론적 realist 이다."

 

재미있는 해석이다. 존재론적 realist가 무엇이고, 인식론적 realist가 무엇인지 정의부터 좀 해주고 얘길하면 더 좋겠는데... 일단 내가 양신규가 생각한 정의를 한번 내려보겠다. 존재론적 realist는 외부세계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고, 인식론적 realist는 이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특히 과학적 이해가) 그 세계의 실재(reality)를 기술해준다고 믿는다는 것 정도로 정의하면 되나?

 

두가지 문제를 물어보고 싶다. 1) 이렇게 정의했을 때 존재론적 realist가 아닌 사람이 있는가. 스트롱 프로그램은 외부세계의 존재를 안 믿나? 라투어는? 포스트모더니스트는? 대체 양신규(양신규만이 아니라 과학전쟁에 관여하는 "전사"들은) 왜 상대주의자들이 외부세계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는 "망상"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궁금하다 (라투어가 박테리아에 대해 한 얘기를 끌어오고 싶으면, 그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가를 먼저 좀 따져보기 바란다). 2) 여기서 말하는 인식론적 realism은 소위 과학철학에서 scientific realism theoretical realism에 가까운 것인데, 여기에도 많은 철학적인 문제가 있다. 내 글에서 다 한 얘기이고 과학철학 중급 개론서를 보면 다 나오는 얘기이기 때문에 여기서 반복하지는 않으려 한다.

 

더 재미있는 것은, 사실 쿤은 존재론적인 anti-realist에 무척 가까운 사람이다. 쿤의 SSR의 마지막 챕터는 패러다임이 바뀌면 사람들은 "서로 다른 세상에서" 살게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와인버그가 인용했던 쿤의 다음과 같은 언급을 보자. Kuhn said: "I'm not suggesting, let me emphasize, that there is a reality which science fails to get at. My point is rather that no sense can be made of the notion of reality as it has ordinarily functioned in philosophy of science."

 

"더구나 그의 비정통 철학책인 <과학혁명의 구조(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 1962) 의 모호한 주장들과는 사뭇 달리, 그의 전문적 역사책인 <코페르니쿠스 혁명(Copernican Revolution)>(1957) 은 명징하게 어떻게 과학적 사고가 관측사실에 의해서 도전받고 수정되고 받아들여져 가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정치도, 관습도, 실용적 필요성도, 사고의 편협성도 다 과학활동에 영향을 미치지만, 결국 과학적 이론의 우열을 결정하는 것은 "논리와" "사실" 이외는 없다는 Implication 아주 선명하게 쿤의 첫 노작인 Copernican Revolution 에는 찍혀있다.

 

해석이 인문학자들 사이의 게임의 룰이라지만, 이정도 되면 사실의 왜곡이다. Copernican Revolution의 핵심 주장은 코페르니쿠스의 천문학이 톨레미의 천문학보다 더 정확하지도, 더 상식과 부합하지도 않았지만 렉티쿠스, 케플러, 갈릴레오, 브루노와 같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졌고, 그 이유는 바로 이들이 코페르니쿠스의 천체구조에서 미적인(aesthetic) 그 무엇을 보았으며, 미적인 요소가 중요했던 이유는 당시 널리 퍼져있었던 르네상스 네오플라톤주의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었다 ("Copernicus's system is neither simpler nor more accurate than Ptolemy's (p. 171). .. the real appeal of sun-centered astronomy was aesthetic rather than pragmatic. To astronomers their initial choice between Copernicus's system and Ptolemy's could only be a matter of taste, and matters of taste are the most difficult of all to define or debate (p. 172)... New harmonies did not increase accuracy or simplicity. Therefore, they could and did appeal primarily to that limited and perhaps irrational subgroup of mathematical astronomers whose Neoplatonic ear for mathematical harmonies could not be obstructed..." (p. 181) CP). 그리고 쿤은 세상 누구보다도 "논리" "사실"로만 과학이론의 choice가 설명될 수 없다고 주장했던 사람이었다. 이 점에 대해서 더 궁금한 것이 있으면 쿤의 SSR이나 Essential Tension에 나와있는 논문들, 특히 "Objectivity, Value Judgement, and Theory Choice"를 훑어보기 바란다.

 

"쿤은 Strong Program 에 대해 강력히 비판한 적은 있어도, 과학자집단의 직업적 활동을 규정하는 인식론을 비판한 적은 없다."

 

Kuhn once said: "we simply no longer have any useful notions of what scientific progress is." Don't you think that this kind of remark is a serious challenge to what scientists commonly believe?

 

"After all he is a historian. He wrote about history of science that scientists make."

 

So what? Shin Kyu Yang is an economist. He writes about economic activities that people make. Does he know more about economy or economic activity than people?

 

이 뒤에 남은 얘기도 다 내가 보기에는 한심한 얘기들뿐인데, 그렇지만 양신규가 친구에 대한 "충정"을 가지고 "데이트를 연기해 가면서" 쓴 소중한 비판이라고 하니, 언제 또 시간을 내서 답을 하긴 해야겠다. 어제 <박하사탕> 비디오를 빌렸는데, 오늘 저녁에는 그 영화를 보면서 오랫만에 80년대로 좀 돌아가 볼꺼나...

 

 

 

 

 

By 양신규(skyang)

2000/05/08 (09:30:03)

물리학의 규범과 현대지식사회의 기반

 

 

홍성욱의 훈고학적 꼬뚜리 잡기는 별 그리 중요한 얘기 아닌 거 같으니까, 나중에 시간 나면 천천히 따져보기로 하자. 내 주요 논점인 "홍성욱이 든 과학사와 과학철학의 사례로는 상대주의가 보호되는게 아니라 배격되고 반대로 과학적 객관성이 옹호된다." 라는 반론에답은 하나도 없고, 맨 출전이 어떠니 쿤이 뭐라했느니 이런 소리만 있어서 조금 실망이 크다.

 

더구나 좀 시급한 설명이 필요한 부분은 다른 분이 이미 잘 대답을 한 것 같으니까, 홍성욱과 훈고학적 시시비비가리기는 논의 전개에 따라 조금 뒤에서 다루는 것이 좋을 것같다.

 

그렇지만 특히 토마스 쿤에 대한 얘기들은 나중에라도 세밀하게 토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프랑스철학자들의 수사학과, 영국 Strong Program 의 인식론 (쿤에 의존했으나 쿤에게 욕먹은) 에 기반해서 미국의 포스트모던 상대주의자들의 스타일이 탄생번식했듯이, 남한에서도 훨씬 저질스럽게지만 폐해는 훨씬 크게 그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홍성욱이나 Strong Program 추종자들 등의 상대주의자들은 쿤을 Anti-Realist 라고 자리 매김하면서, 그의 권위에 의존하여 Anti-realist Relativism 를 옹호하고 있는데 남한 논의도 이를 따라갈 가능성이 많이 있다고 본다. 또 이들은 과학에 대해 완벽하게 무지하진 않기 때문에, 그들과의 토론을 통해 Realism과 과학적 객관성을 옹호하는 것은 아주 무의미한 일은 아니다.

 

뭐라뭐라해도 쿤은 인류역사상 가장 중요한 학문적 사건이라 볼 수 있는 Copernican Revolution - 고대 물리학이 왜 어떻게 무너지고, 현대 물리학이 왜 어떻게 탄생하는 가를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사건 - 에 대한 전문역사가이고, 프랑스철학자들의 인식론하고는 달리 이 인식론에 대해서는 조금 깊게 살펴보는 것도 큰 손해나는 일은 아니다. 하지만 의미가 있다고 해도 그건 남한의 상황에서만이다. 가장 약한형태로 큰 공통분모를 띠고 있다 볼 수 있는 Searle 의 실재론까지를 포함한다면, 이미 지식사회의 지식생산-교육의 99.9% 이상의 학문 영역이 근현대 물리학을 교범으로 채택한 이성적 실재적 객관적 논리로 평정된 지는 오래 된 일이다. 미국에서라면 이런 토론은 나당 연합군과 백제부흥운동 게릴라 10 명 정도의 싸움에서 누가 이길거냐를 두고 토론하는 것처럼 재미있을지는 몰라도 결론이 뻔한 시간낭비가 될 것이다.

 

하지만, 이성을 기반으로 한 근대과학적 세계관이 한번도 제대로 자리잡아 본적이 없는 남한과 같은 상황에서 일반인들이 가지고 있는 막연한 동양노예사회로의 복고반동적 정서나, 반서구-반미정서를 이용해 우물벽을 높이려는 우물안 개구리식 남한지식계급이 동원하기에 아주 쉬운 생각이 상대주의이다. (이놈 저놈 별반 다를게 없다는 게 상대주의의 핵심이라면, 당연한 논리적 귀결로서 내것도 미국 것과 별반 다를 게 없고, 미국거 들오는 거 막아내는 것도, 미국놈들이 수출하려고 애쓰는 것하고 동일한 도덕적 명분을 획득하게 된다.) 그런데 남한에서마저 소칼사건 이후 이미 허명을 잃을대로 잃은 포스트모던 프랑스철학자들을 계속 써먹자니 민망하다. 그러니 조금은 세련된 토마스 쿤을 계승한다는 스트롱 프로그램이나 홍성욱식의 상대주의는 아직 완전히 죽은 건 아니기 때문에 상대주의 부흥운동의 도구가 될 가능성이 제법있다. 더구나 이들은 과학을 실제로 아는 사람들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프랑스철학자들처럼 과학에 대해 전혀 무지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잘 하면 유익한 토론을 전개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서구에서는 계몽사조이후 전면 등장해서 정치적 혁명과 기술적 경제적 혁명과정을 거쳐서 철저하게 헤게모니를 잡고 있는 사고가 바로 이성-과학-객관세계에 대한 믿음이다. 반면에, 남한을 살펴보면 계몽철학자도, 과학지상주의자도, 심지어는 공상과학소설가 조차 하나 없고, 객관적 실재론을 옹호하는 제대로 된 철학자들과 저널리스틱한 저술가들도 수가 매우 적다. 이런 환경은 포스트모던 상대주의나 홍성욱류의 절충주의가 번성할 토양이기 때문에, 상대주의의 사탕발림 유혹으로부터 과학적 실재론을 방어하는 것은 토론의 가치가 충분히 있다. 앞으로의 토론에 대해서는 일단 동기부여만 하고 오늘은 "물리학규범 옹호론"을 쓰겠다. 이 글은 물리학도들의 응원차원에서 쓰여진 것이지만, 그리고 조금 이야기가 올라온 결정론논쟁이나, 경제학논쟁하고도 조금 관련이 있겠다.

 

또 이 글이 소칼논쟁과 관련이 있는 이유는 홍성욱 등등이 자꾸 무슨 물리학의 위기와 소칼의 의도를 연결시키려는 혹세무민적 기도에 대한 방어 논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 * *

 

물리학규범과 현대지식사회의 기반

 

 

물리학의 인식론 방법론이 어떻게 수백년간의 장구한 "진지전"을 통해 코페르니쿠스의 동유럽 한귀퉁이에서부터, 현대에는 (과학학과 문예이론등의 Marginal 한 학문 분야를 제외한) 모든 중요학문의 인식론과 방법론을 점령하고, 월스트리트와 실리콘 밸리까지, 뉴욕과 워싱턴까지 경제와 정치의 담론을 장악했는가 하는 질문은 그 자체로도 흥미있는 문제이다. 그 작업은 전문적 학자에게 맡기기로 하고, 여기서는 현대에 얼마나 그 영향이 광범한가를 정리해 보자.

 

내가 다른 글에서 말했지만, 물리학을 중심으로한 현대자연과학 실증적 사회과학의 기본규범은 외부세계가 실재한다는 실재론적 존재론, 사실에 대한 이성적 탐구에 의해 그 사실과 들어맞고 또 유용한 지식을 객관적으로 건설하고 상호소통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인식론, 더 나아가서 객관적 세계에 대한 개념적 수학적 모델을 건설하고 그것을 실험, 관측 데이터와 비교 분석함에 의해서 모델을 테스트하고 더 좋은 모델을 만들어 감으로써 실제와 접근한 객관적지식을 건설해간다는 학문적 방법론이다. 이 물리학의 규범은 모든 근현대적 중요 학문적 업적과 그 업적에 기반한 정치경제사회적 진보의 기반이 되는 철학이요 학문방법론이다.

 

그런데 그 철학과 학문방법론의 성과는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니라, 오래 걸려서 매우 힘들게 얻어진 생각이다. 그리고 민주주의와 마찬가지로, 올바른 철학도 세대마다 반복해서 힘들게 지켜내지 않으면 무너지게 된다. 물론 서구에서 특히 미국에서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없어 보이지만, 남한의 경우는 아예 현대과학적 사고가 제대로 자리해본 적이 없고, 이제 막 배우기 시작하는 단계이기 때문에, 이런 과학적세계관을 확산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또 현대적사고에 훈련이 안된, 남한의 일반 대중과 학생들이 복고반동적인 반이성, 반과학, 반실제론적 상대주의자들의 선동에 넘어갈 수 있는 가능성도 미국에 비해 훨씬 많다. 포스트모더니즘 상대주의가 미국과 프랑스에선 길모퉁이 카페의 조잘거림 정도였는데, 남한의 인문학분야에선 마치 광장의 나팔소리처럼 들렸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두 가지 측면에서 물리학옹호론을 응원해 보자. 하나는 물리학의 존재론 인식론, 그리고 학문적 방법론의 규범이 지구촌화 되어가는 세계에서 얼마나 광범하게 지도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가를 미국을 중심으로 살펴보는 것이고, 두 번째는 실제로 현대학문이 어떤 측면에서 물리학의 존재론 인식론 및 학문적 방법론을 수입하고 확대 발전시켰는가를 경제학 경영학의 사례를 중심으로 살펴보자.

 

 

1. 물리학적 규범 (존재론-인식론-방법론) 의 현대지식사회에서의 위상

 

우선 물리학적 규범이 얼마나 사회에 광범위하게 지도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자.

 

최근 금융산업이나 정보기술 산업에서의 물리학자들이 우대받은 현상은 최근의 일과성의 그냥 사건이 아니고, 사실은 매우 깊은 뿌리가 있는 일이다.

 

물리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미국사회에서 우대 받는 것은 학부, 석사, 박사 각 단계마다 다 나타난다. 예를들어 미국일류대학의 학부학생들은 물리학(수학) 전공자들을 Physics(Math) Jock 이라 질투섞인 용어로 부른다. 이건 농구선수들을 주로 Jock 이라 부르는 거에서 따온 말이다. Math Jock 들에게 질려서 하바드를 때려치운 사람이 빌 게이츠이고, 아인쉬타인처럼 되고 싶어서 프린스턴에 갔는데 이 Physics Jock 들에게 질려서 좀 더 쉬운(?) 컴퓨터 공학으로 전공을 바꾼 사람이 Amzon.com 을 세운 제프 베이조스이다.

 

미국 일류대학학부의 경우는 상당히 명시적으로 학생들 사이에서도 머리 좋으면 수학과 자연과학을하고 그렇지 못하면 순서대로 사회과학 인문학을 하는 것으로 합의(?)가 되어있다. 물론 자연과학자나 공학자가 될 정도의 두뇌가 안되더라도 (예를들면 필자처럼), 자연과학, 사회과학, 인문학을 전공한 사람들 중에도 그 중 좀 나은 사람들은 (사람이 낫다는 게 아니라, 순전히 academic potential 의 의미에서) 대학원에선 법학, 경영학, 의학, 행정학 등의 물리학적 규범에 입각한 학문들을 배우며 지식노동훈련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다행스럽게도 포스트모던 기버리쉬가지고 고민할 필요가 없다. 물론 법학, 경영학, 의학, 법학, 행정학 대학원 입학 사정에서, 물리학과 출신들은 최고의 대접을 받는다.

 

(경영학, 경제학, 법학 졸업생들이 컴퓨터 공학과 함께 학부, 대학원, 박사를 막론하고 가장 높은 임금과 사회적 지위를 누린다는 것, 그리고 일류대학원 출신인 경우는 쉽게 초봉이 일억오천만원쯤이 된다는 것을 이쯤에서 말해야 할까?)

 

하바드 물리학과에서 맨 C 만 받아도, 하바드 법과대학원에 들어가는 친구를 본 적이 있다. 나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학부물리학과를 꼴찌졸업했는데, 물리학을 전공했다고 Wharton School MBA 입학사정담당교수가 인터뷰때 내 학부학위명에 동그라미를 치며, 경영학에 꼭 필요한 기초훈련을 했으니 입학하라던 기억이 있다. MIT 는 면접을 안해봐서 모르겠지만, 내 성적으로 합격이 된 것은 물리학전공이었기 때문임에 분명하다. 경제학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학부나 석사를 물리학-기계-전자공학등을 한 사람들이 많이 있고 큰 업적을 내는 사람들이 많다. 예를들어 전후 경제학의 중시조인 MIT 의 폴 새뮤엘슨과, 신경제성장론의 주창자인 스탠포드의 폴 로머 등이 그런 사람들이고, MIT Jian Wang 등 젊은 금융경제교수는 아예 물리학 박사를 마치고 Finance 박사학위를 한 번 더 했다. 물리학과 꼴지 졸업생인 나는 물리학과 졸업을 했다는 이유로 동료경영경제학자들 사이에서 뭔가 기초튼튼한 놈으로 여겨지고 있다. 주위 동료경영학자들도 80 % 이상이 학부에서는 자연과학이나 공학을 공부한 사람들이다. 이런 현상은 물론 기업의 인사담당자들 중역들 사이에서도 잘 알려진 사실이기 때문에, 수학자나 물리학자를 대거 채용하는 현상은 마이크로 소프트나 골드만 삭스, 살로먼-스미스-바니 등에만 국한되는 현상은 아니다. 미국의 경우 사회각계의 리더들이 물리학적인 규범에 기초한 교육과 사고훈련이, 얼핏보기에는 별관계 없는듯한 경영, 법률, 경제, 사회의 제반문제를 생각하고 풀어내는 데에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잘알고 있기때문이다.

 

그럼 물리학적 규범(존재-인식-방법론에)에 바탕을둔 학문과 그 학문을 공부한 사회의 엘리뜨들이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교육되고 어디서 뭘 하는지 한번 살펴보자. 세계의 최고급 지식노동자를 육성하는 산실인 미국대학원교육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세계지식의 수도 캐임브리지에 자리하고 있는 하바드와 MIT 의 예가 좋은 지침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바드, 엠아이티 경영대학원 (1100), 법과대학원 (800), 의과대학원 (800), 행정대학원(150), 자연과학 공학분야 (2000), 경제학과 (80) 에서 이런 실재론 객관적 인식론에 바탕을 둔 교육을 받은 MBA, JD, MD, MS, PhD 들이 일 년에 최저 4-5 천명이 쏟아져 나와서 미국과 세계의 학계, 산업계, 정관계로 진출한다. 인문학분야를 전부 통통 털어야봐 이런 지도적 인물을 키워내는 숫자는 오십명이 될까말까 할것이다. 그 중에서도 대부분은 언어학, 언어철학, 분석철학, 실재론적 객관주의적 역사학 사회학 심리학, 인류학 등 물리학의 규범을 채택하는 학문영역의 사람들이고, 상대주의적 전통속에서 교육받고 대학원을 졸업하는 사람 열 명을 거명할 수 있다면 내가 매우 놀랄 것이다. 그리고 있다해도 그 사람들의 얘기들은, 대부분의 미국의 의사결정자들에게는 뭔소린지 이해가 안가는 말들이기 한마디로 대세와 지장없는 얘기다. 미국에서는 게임은 오래 전에 끝났고, 더 이상 별 논의할 이유가 없다. 물리학의 규범은 학문세계에서만이 아니라, 정치 경제 저널리즘의 현장에서도 확고하고 유일한 규범이다. (내가 잘 모르고, 또 이런 물리학적 규범이 침투하지 않은 곳이 예술 분야다.)

 

2. 경제학과 경영학의 물리학 규범의 채택과 성장

 

이제 학문분야에서 물리학 규범(존재론-인식론-방법론)의 헤게모니를 한번 살펴보자. 화학, 생물학 등의 분야에서야 말할 것도 없을 테니까, 조금 떨어져 있다고 생각되는 경제학, 경영학 분야부터 물리학의 영향, 특히 그 인식론과 방법론의 침투과정을 간단히 살펴보고, 또 과정의 성공으로 성공으로 인해 학문적 정치적 영향력이 얼마나 어떻게 성장했는지를 생각해 보자. 끝에 물리학의 규범을 받아들이면 어떤 장점이 있어서 그렇게 쉽게 강력해질 수 있나 정리해보자.

 

경제학에서의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오, 뉴튼이라 부를 수 있는 아담스미스, 리카아도, 맑스의 경제저작의 위대성을 논점과 관련지어 생각해보면; 경제학이 단순히 계급투쟁의 이데올로기적 무기일뿐만 아니라 "과학"이란 것을 믿고, 실천적으로 학문적 업적으로 증거를 보였다는 것일 것이다.. 좀 시간을 뛰어넘어 현대 경제학의 경우는 신고전주의 경제학에서부터 (19세기 말에 시작된 흐름) 물리학의 존재론 인식론만이 아니라, 방법론 까지를 거의그대로 수입한다. 그 방법론이란 경제현상을 접근할 때 기본가정에서 출발한 수학모델을 만들고, 그 모델이 실제 경제 데이터와 맞나보고, 틀리면 고치고, 덜 맞으면 더 맞게 수정하고 이런 중간단계의 방법론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물리학이 What is the First Principle?을 찾아 끊임없이 그 기반을 깊게 하듯이 경제학도 어디서부터 이론의 토대를 세워야를 가지고 지속적으로 탐구해 나간다.

 

예를 들어 물리학이 우리 인간을 포함해서 모든 물질을 구성하는 소립자들을 찾고 그 소립자들의 운동법칙을 찾아내려 하듯이, 경제학은 경제주체의 동기를 제공하는 가장 근본적 원리가 무엇인가에 관심이 있다. 지금까지 경제학자들은 사람들은 경제주체로서의 개인은 쾌락 (utility)을 최대화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단순한 가정에서 출발, 예를 들면 경기변동과 경제위기의 발생원인부터 (거시경제) 산업 조직내부의 인간행동과 (Economics of Organization) 조직들 사이의 경쟁 (Industrial Organization) 행위 등에 대한 설명력이 뛰어나고 유용한 이론을 만들고 경험적으로 테스트하고 있다. 사회현상도 자연현상과 마찬가지로 연구자의 외부에 실재하고, 또 그 사회 현상에 대한 객관적 지식이 이성적 노력으로 수립가능하다는 철학적 믿음에 바탕을 둔 경제학의 성과는 특히 20 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16세기 이후 물리학이 공헌한 이상으로 인류에 공헌을 해오고, 경제학자들은 물리학자들 이상으로 사회적 존경과 대우를 받고 주요 정책결정에 참여하고 있다.

 

경제학자들이 자연과학자들과 같은, 간혹 더 높은 사회적 지위를 누리게 된 것은, 그 학문적 그리고 실천적 성과 때문이다. 많은 경제학 질시자들의 오해와는 전혀 반대로, 현대 경제학은 16 세기 이후 현대물리학의 성과에 버금 갈만큼의 중요한 역할을 20 세기 후반에 해 냈다. 가장 큰 이론적 공헌은 버치님의 관찰대로 미시경제학이지만, 가장 큰 실제적 공헌은 앞의 버치님의 거시경제학에 대한 비난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거시경제학이다. 1929 년까지의 초보단계의 경제학적 지식에 기반한 자유방임적 시장경제는 공황, 실업, 노동계급의 엄청난 빈곤으로 얼룩졌다. 생각해 보자. 뉴딜정책의 채택 이후 세계는 지금까지 70 년 동안 큰 공황을 한번도 겪지 않았고, 서구선진국의 경우는 비참한 노동계급의 개념이 완벽히 사라졌고, 세계역사상 가장 빠른 경제성장을 누리고 있다. 서구경제학의 논리를 받아들이거나 그 헤게모니가 강제로 관철된 지역 (일본, 아시아 네 나라 등) 은 비서구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전후 40 여년동안 경제사회개발의 결과 서구의 생활수준에 도달했다.

 

이런 성과의 근거는 시장과 국가기구의 경제적역할에 대한 과학적이해에 바탕을 두고 각 나라의 경제정책이 꾸려졌기 때문이고, 세계경제기구들도 그렇게 구성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지금 IMF, World Bank, OECD 를 필두로한 세계적 경제기구들, 세계적 영향력이 있는 미연방은행과 미재무성 등의 헤게모니를 Academic Economists 들이 잡고 있는 현상은 그래서 우연이 아니라 학문적 성과를 바탕으로 한 정당한 것이다. 물리학자들이 20 세기 중엽의 국가 주도의 과학기술진흥책을 주도해서, 지금의 컴퓨터와 인터넷 위성통신 등의 기술발전의 기초를 놓은 것과 마찬가지로, 현대의 경제학자들은 세계정부구성의 전망하에 기초를 놓고 있다고 보면 된다. 이렇게 경제학자들이 물리학자들을 존경하고 물리학의 규범을 따라 배우려고 하는 것은 물리학의 학문자체와 그 학문적 성과를 바탕으로 한 사회참여가 인류 복지 증진에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모범적으로 수행해왔기 때문인 것이다.

 

물리학은 현대 지식사회의 근간이 되는 철학적 규범 (존재론 인식론) 학문적 방법론 (수학적 모델과 사실 검증) 만이 아니라, 특히 20 세기 중반이후에는 구체적인 정책에 참가해서 강한 영향력을 발휘함으로서, 현대 정보기술혁명과 지식기반사회의 철학적, 기술적, 정책적 기초를 놓았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을 스승으로 모신 경제학자들이 그 뒤를 이어서 21 세기 중반에는 분명하게 모습이 들어 날 세계 경제공동체 혹은 세계국가의 기초를 놓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보면 될 것이다.

 

경영학은 잠깐 짧게 정리하자. 15 세기 복식부기의 발명에서부터 원시적으로 탄생된 경영학 분야도, 바로 물리학의 존재 인식론과 방법론에 바탕을 둔 19세기 말 20세기 초 Taylor 의 작업이후에 급속하게 과학기술화의 과정을 겪는다. 테일러의 초기노력은 주로 사상운동으로서의 성과와 실천적 성과였다면, 이십세기 중반이후 이론적 성과가 나타난다. Operation Research 분야, 금융분야가 각각 물리-공학-경제학의 원리들을 바탕으로 20 세기 중반에 학문내용의 과학화 과정을 이루었다. 재미있는 발전은 경영대학내에서 과학적 지식과 논리로 무장하고 강력해진 금융분야와 OR 분야의 학자들의 강력한 학문적 정치적 영향을 받아 1970 년 이후에는 회계학, 마케팅, 전략, 조직, 생산관리, 최근에는 정보기술경영분야 등의 대부분의 경영학 분야들이 차례차례 확고한 물리학 규범의 학문적 위계에 포섭하는 일을 이미 완성했거나 계속하고 있다. 이렇게 경제학과 경영학 분야는 특히 20 세기 후반에 물리학적 규범으로 학문적 엄밀성을 세우고, 그를 바탕으로 사회적 지위를 확대해왔다. 물리학자들이 300 년 걸린 일을, 그 과정을 아주 목적의식적으로 따라한 경제학자들은 100 년 짧게 보면 50 년 만에 해 낸 것이다. 어떻게 왜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3. 물리학적 규범의 장점

 

물리학 규범에 따라 학문이 과학화의 과정을 겪으면 현실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매우 강력한 장점이 있다.

 

첫째는 누적적인 지식발전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매번 사람이 바뀔 때마다 존재론 인식론부터 시작해서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한다는 말까지 처음부터 다시 해야하는 상대주의적 잡설들하고는 달리, 이미 수많은 질문을 올바르게 대답한 튼튼한 학문체계에 바탕을 두고 그 체계가 제시하는 문제, 그 체계가 아직 풀지 못하는 문제, 그 체계내에 상호모순적인 요소등의 문제 등에 여러 사람들이 분업적으로 참여할 수가 있게 된다. 그 결과적 현상은 지루한 것 같지만 십 년만 지나면 정신이 번쩍 들도록 발전하는 학문을 보게 된다.

 

둘째는 체계적이고 통일적인 높은 수준의 훈련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서울대가 세계 700 위에도 못 드는 학교임에도 불구하고, 원래 머리가 똘똘한 학생들이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웬만한 대학에서 물리학, 화학, 경제학 교육을 제대로 받은 학부나 석사과정 대학원 학생들은 세계 Top 10 의 미국 대학원에 와서 공부하는 데에 전혀 문제가 없다. 물론 인도나 브라질 중국 등 한국보다 더 못한 나라의 대학에서 이런 분야를 공부한 학생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미국 대학의 대학원 교육은 미국 학부출신들의 경쟁장이 아니라, 전세계에서 뽑힌 머리 좋은 놈들의 경쟁장이 될 수가 있고, 가속적 발전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셋째는, 학자사회의 저열한 정치적 전략적 행위동기와 그로 인한 부패, 그리고 다시 그로인한 비효율이 확 줄어들게 된다.

 

논리적 정합성이 있고, 사실에 부합하는 이론이 살아남는 체계에서는 경쟁의 공정성이 보장된다. 게임이론을 동원할 것도 없이, 예를 들어 결과 측정이 분명한 100 M 달리기에 심판의 부정이 개입할 가능성이, 연예인 주연 선발과정에서 매춘이나 뇌물이 개입할 가능성이 훨씬 적은 것과 마찬가지다. 학문 세계에 이렇게 (상대적으로) 명확한 기준이 세워지면, 사람들의 재능이 사실과 부합하고 논리적 정합성이 있는 이론을 만들어내고 그 이론을 테스트하려고 객관적 사실을 모으고 실험하는 과정에 주된 노력을 경주하게 된다. 남한의 욕많이 먹는 교수 채용, 승진과정에서도 물리학과와 화학과가 그리고 사회과학에서는 경제학과가 가장 객관적이라는 평을 듣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러한 깨끗한 경쟁의 누적효과는 엄청난 것이다.

 

넷째는, 학제간 연결이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내가 MIT NYU 에서 경험한 것으로 내가 좀 놀란 것은, 예를 들어 생산성문제를 연구한다고 했을 때, 기계공학자, 물리학자, 경제학자, 경영학자가 같은 팀에서 존재론-인식론-방법론 따질 필요 없이 주어진 문제를 같이 토론하고 해결하는 것이었다. 만약에 존재론-인식론이 다르다면 이런 학제간 협력은 불가능한 것이다. 자연과학과 공학간에만 아니라 경영학 경제학과 같은 사회과학사이의 협력은 매우 중요한 발전적 의미가 있다.

 

한 가지 사례로 내가 가장 많이 드는 것이, 조직이나 국가공동체 세계공동체를 지원하는 정보시스템의 설계 개발 문제이다. 이 얘기는 너무나 길어지기 때문에 조금 작은 문제 예를 들어 기업현장에서 쓰이는 Expert System 이나, AI System 등을 만드는 문제를 예로 들어 보자. 예를들어 의학분야에서 이런 시스템을 개발하려면 컴퓨터전문가, 경영학자, 임상의, 생물학자 등이 고도의 협력을 수행해야한다. 그런데 이들이 모여서 존재론-인식론부터 따지고 있다면, 플라톤부터만 계산하더라도 2300 년동안 고 문제만 따져도 해결안날것이기 때문에, 실제 일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반면에 전원이 물리학적 규범으로 통일되어 있으면, 문제를 정의하고, 커뮤니케이션하고, 분업으로 나눴다가 다시 합치고 하는 일이 훨씬 쉬어진다. 또 다른 예로 요즘 대유행하는 소위 E-Commerce 의 정보시스템들, 특히 경매시스템 등을 제대로 구성하려면 등에는 컴퓨터공학, 시스템공학, 경영경제학자들의 공동협력이 필수적이다.

 

다섯째는 Hoax 걱정을 안하는 학문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소칼의 Hoax 사건의 정말 코미디는 Social Text 의 심사위원들이 소칼 논문이 원래는 진짜로 낸 건데 나중에 혹시 생각이 바뀐게 아니냐라고 안타까워하고 의심스러워한 일이다. 그리고 더 웃긴 것은 소칼 사건 이후로 상대주의자들의 저널들에서는 Hoax 걱정이 되어서 제대로 심사를 할 수 없다고 불평하면서 소칼 Hoax 행동의 도덕적 문제를 지적한 일이다. 소칼사건을 통해 미국의 학부학생들에게 까지도, 소위 포스트모던 상대주의자들이 조롱거리가 된 것은 단순히 Hoax 에 걸렸다는 것 만 아니라, 그것을 변명하는 과정에서 이렇게 학문적 기본소양부족을 여지없이 과시했기 때문이다. 학술지 심사위원들에게 들어오는 논문이 Hoax 인지 아닌지를 구별못해 전전긍긍하게 하는 학문이 어떻게 심각한 학문이 되나.

 

학술지의 심사과정이란 (Peer Review) 것이 원래, 잘된 논문과 덜 잘된 논문을 골라서 주로 잘된 논문을 출판하자는 것인데, 아예 장난으로 한번 써본 글과 심각한 논문을 구별 못해 전전긍긍한다는 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장난으로 쓴 글과 심각한 논문을 구별하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사람들이 모여 떠드는 분야가 어떻게 현대적 학문인가 말이다. 수준 이하의 심사만이 아니라, 이런 수준이하의 변명들이 사실 미국 학계에서 포스트모던 상대주의자들의 현주소를 만방에 과시하는 최고의 블랙 코미디였다.

 

물리학이나 경제학은 전혀 외부자의 Hoax 고민을 할 필요가 없다. 첫째는 소칼은 아마추어적 장난으로 상대주의자들의 leading trendy 학술지에 글을 실을 수 있는 반면, 때려 죽여도 데리다나 라깡이 Journal of Economic Theory Hoax 논문을 실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것은, 백 만분의 하나 확률로 혹시 그런 논문이 실었다고 해도 전혀 문제가 될 수 없다는 점이다. 그 이론이 정합성이 있고, 사실과 부합하고, 독창적이라면 라깡과 데리다가 야 그거 Hoax 야 라고 주장해도 아무런 효과가 없이, 경제학 물리학에의 공헌이 된다. 왜냐하면 경제학이나 물리학에서는 누가 썼느냐 그 사람이 전에 나중에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주관적 잡소리들은 논문의 공헌을 결정하는 기준이 아니기 때문이다. 객관적 사실과 이론의 정합성만이 문제가 된다.

 

* * *

 

대부분의 사람들한테 포스트모던 기버리쉬들은 전혀 읽어 볼 필요가 없다. 미국의 지식생산자 지식노동자 중에 프랑스 철학, 포스트모던 Gibberish 에 신경 쓰는 사람은 0.1% 도 안된다고 보면 된다. 나는 아주 자신 있게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말할 수 있다. 프랑스 철학 신경 안써도 학문적으로건, 직업적으로건, 살아가는 데건 아무 문제가 없다고. . .

 

단서를 붙인다면, 예술을 하고 싶은 사람, 포스트모던 기버리쉬를 지껄이며 놀 사람. 이런 사람들은 혹시 모르겠다. 시와 예술은 특히 남자가 여자 꼬드길 때 (가끔은 반대로) 잘 먹히는 것이기도 하니까, 좀 읽어둬서 꼭 손해난다고만 볼 일은 없을 것이다.  

 

 

 

 

 

 

 

 

 

By 홍성욱

2000/05/08 (23:20:16)

양신규교수의 물리학규범론을 읽고

 

물리학의 방법론이 중요하고, 다른 학문분야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지금도 하고 있고), 인문학자들도 이러한 과학의 방법론에서 배울 점이 있다는 것에 동의한다. 학부에서 물리를 공부했지만 바로 대학원부터 역사를 전공한 나는, 자연과학의 methodology를 인문학에 접목하고, 또 인문학의 효용을 과학기술자에게 설득하는 데에 관심이 많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문학이, 특히 한국의 인문학 교육과 연구가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아래 이런 관심을 가지고 내가 쓴 글 두편을 올려본다.

 

그리고 이 얘기는 정말 오랜 친구로서의 "충정"에서 양신규교수에게 하는 얘기인데, 제발 글을 쓸 때, 다른 사람을 "긁는" 표현을 절제하기 바란다. "물리학규범과 현대지식사회의 기반"은 꽤 괜찮은 내용과 정보를 담고 있는 논쟁적인 글인데, 양신규식의 gibberish가 너무 많다. "홍성욱의 훈고학적 꼬뚜리 잡기" "홍성욱류의 절충주의" "혹세무민적 기도" "복고 반동적인 반이성, 반과학, 반실제론적 상대주의자들의 선동" "우물안개구리" "시와 예술은 특히 남자가 여자 꼬드길 때 잘 먹히는 것" 등등 ... 사람들과 대화하고, 토론하고, 때로는 정말로 무지몽매한 사람들을 가르치고, 계몽하고, 또 어떤 경우 사람들을 선동할 목적을 위해 글을 쓴다고 해도, 이런 양신규식의 vocabulary는 소통을 힘들게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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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겨레> 2000/01/17

21세기를여는열쇠 : 인문학과 과학기술의 생산적 만남

 

인문학과 과학기술의 만남은 21세기 인문학을 위해서나 과학기술을 위해서 바람직한 일이다.

 

인문학은 비트로 상징되는 정보기술의 문화적 내용을 채워줄 수 있으며, 과학기술은 인문학의 대상이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인문학 지식 생산을 획기적으로 바꿀 수도 있다. 이는 인문학의 위기를 극복하는 한가지 방법이며, 동시에 과학기술의 인간화를 꾀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인문학자와 과학기술자와의 대화는 쉽지 않다. 인문학자들 대부분은 과학기술에 대해 고등지식은 커녕 기초지식도 없는 실정이다. 과학기술자들이 어떻게 문제를 해결하며, 어떤 이론이나 설명을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가에 대해서도 잘 모른다.

 

반면 과학기술자들은 인문학을 말장난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과학은 진보했는데, 철학은 고대 철학에서 한발자국도 더 나가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식이다. 인문학자나 과학기술자 모두 다른 전공을 하는 사람들과 심각하게 토론하고 협동해본 경험이 없어서, 한두번 의견 충돌이 있으면 그냥 갈라서기 십상이다.

 

미국 카네기 멜론대학에서 98년에 박사학위를 받은 젊은 학자 피비 센거즈는 인문학적 지식과 정보기술을 잘 결합시킨 장본인이다. 그녀는 인공지능을 가진 기계나 프로그램을 사회적·문화적 배경 속에 위치시켜서 그 행동을 설명하는 학위논문으로 미국의 영향력있는 학술 잡지 <링구아 프랑카>가 뽑은 첨단기술 시대의 부상하는 학자 20명에 꼽혔다. 이 연구를 위해 그녀는 인공지능, 60년대 반정신병리학 운동, 들뢰즈와 가타리의 정신분열론과 같은 문화이론을 접목했다.

 

스스로 잡종인 그녀가, 성공적인 인문학과 과학기술의 협동연구를 위해 제시한 8가지 요령을 소개한다. 1.상대를 모욕하지 말것. 2.자신의 비판이 상대의 연구에도 도움이 된다는 것을 설득시키는 식으로 상대를 위해 자신의 목표를 설정할 것. 3.모호한 용어를 사용하지 말 것. 4.자신의 분야와 지식에 대해 너무 소극적이거나 방어적이 되지 말 것. 5.형이상학적인 세계관이 아닌 구체적인 것을 놓고 몰두할 것. 6.지식의 정치적 결과보다 지식의 엄밀성에 대해 논할 것. 7.자신의 분야에서만 통용되는 식으로 얘기하지 말 것. 8.안 좋은 얘기를 들었을 때 웃으면서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두꺼운 얼굴을 가질 것.

 

홍성욱(캐나다 토론토대학 과학기술사 교수) sungook@chass.utoronto.ca

 

 

 

 

2) <신동아> 2000 4월호

실용성 콤플렉스 벗어나야 인문학이 산다

 

나는 대학에서 인문학 교육의 핵심이 학생들에게 인문학적 사유를 교육·훈련하는 것임을 주장하려 한다. 창조적인 인문학적 사유가 실용적인 학문이나 사회활동에 필요한 창조성에도 적용될 수 있음을 보이려 한다. 즉 비판적이고 창조적인 인문학 연구와 교육의 실용적 가능성을 제시하려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홍성욱 토론토 대학 교수·과학사

 

 

    1996 9월 전국 인문대학 학장들은 이성의 회복과 학문의 기반이 되는 인문학이 존폐의 갈림길에 서 있으며… 정부는 인문학 연구와 교육에 대해 정책적 배려와 지원을 다해야 한다는 요지의 제주선언을 발표했다.

 

다음해인 97, 14개 대학 인문학 연구소는 공동 학술 심포지엄을 통해 인문학의 위기와 그 해결책을 다각도로 모색했고, 98년에는 대표적인 학술단체라고 할 수 있는 학술단체협의회에서 인문사회과학의 위기에 대한 심포지엄을 개최했다. 이어 작년 4월부터 6월까지 신문지면에서 염무웅, 김성도, 복거일, 장정남, 김학수, 신명아, 박정신과 같은 인문·사회과학자들이 인문학의 위기에 대해 논쟁적인 의견을 개진했다.

 

이러한 토론과 논쟁에서 인문학자들은 인문학에 위기를 불러일으킨 원인을 여러 가지로 진단했고, 그에 대응하는 처방을 제시했다. 전통과 단절이라는 질곡된 근대화의 문제, 세상의 모든 것을 돈과 효용으로 환원하는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 논리로부터, 대학에 도입된 세계화 이데올로기와 경쟁력 지상주의, 교육부의 잘못된 대학 개혁 정책, 학부제의 급속한 도입, IMF, 대학의 팽창과 대학생의 질 저하에 이르기까지 포괄적이고 다양한 현상과 요인들이 위기의 원인으로 제시됐다.

 

소수의 인문학자들은 이에 덧붙여 한국 인문학이 외국의 이론과 해석을 소개하는 데 급급했고, 이런 인문학의 식민성이 인문학 연구를 현실과 우리의 삶이라는 토양으로부터 분리시킴으로써 인문학에 위기를 가져왔다고 강조했다.

 

 

왜 인문학의 위기를 재론하는가

 

위기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원인만큼이나 다양한 처방이 제시됐다. 전통을 창조적으로 계승·복원하고, 신자유주의와 시장논리로부터 대학과 공공영역을 보호하고, 정부의 지원을 유도해서 인문학연구소를 만들어 적체된 인력을 활용하고, 학부제 도입을 늦추거나 대안을 모색하고, 세분된 전공의 벽을 넘어 문화연구·여성연구·지역연구와 같은 다양한 통합학문을 지향하고, 인문학이 정보화의 내용을 채워줄 수 있도록 인문학과 자연과학, 공학의 절합을 모색하고, 순수학문 중심의 학부와 응용학문 중심의 대학원을 효과적으로 연계하고, 연구교수제를 도입하고, 우리 학문을 하고, 현실과 밀접한 학문을 모색하고, 논문과 원전 중심의 글쓰기를 지양하는 것 등이 위기 극복을 위한 처방이었다.

 

이러한 논의 대부분이 인문학이 무엇을 하는 학문이며, 무엇을 위한 학문이어야 하는가에 초점을 맞추었음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인문학의 위기에 대한 대응으로 인문학이 무엇인가를 다시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나는 여기서 인문학의 위기와 그 처방을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 분석하려 한다. 인문학의 현재 위기와 미래에 대한 논의를 풀어가기 위해서는 인문학이 학생들에게 무엇을 가르칠 수 있는가라는 문제에 대한 반성적인 고찰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대학교수들의 연구와 교육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고, 따라서 인문학의 본령이 무엇인가라는 문제는 바람직한 인문학 교육을 생각할 때 무시할 수 없는 주제다. 그렇지만, 대학에서의 인문학 교육의 목표가 교수가 될 인문학자를 키워내기 위함이 아니라는 것 역시 자명하다. 학생들 중에는 대학원에 진학하거나 유학을 가서 10년 가까이 더 공부하는 학생도 있지만, 대학교육의 초점을 이들에게, 즉 교수를 재생산하는 데 맞출 수는 없는 것이다.

 

인문학의 위기에 대한 지금까지의 논의는 인문학이 무엇을 하는 학문인가에 초점을 맞추었거나, 교육에 대해 얘기할 경우에도 교양교육과 인성교육만을 인문학이 제공하는 교육으로 국한했다는 문제가 있었다.

 

내 글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먼저 나는 대학에서 제공하는 인문학 교육의 핵심이 학생들에게 인문학적 사유를 교육·훈련하는 것임을 주장하려 한다. 그리고 이러한 인문학적 사유가 인문학적 질문을 던지고 텍스트에 바탕해서 이를 해결하는 과정으로 구성되어 있고, 이는 훈련을 통해 개발할 수 있는 것임을 강조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창조적인 인문학적 사유가 실용적인 학문이나 사회활동에 필요한 창조성에도 적용될 수 있음을 보이려 한다. 즉 비판적이고 창조적인 인문학 연구와 교육이 실용적일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려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독립적이고 비판적인 시민을 길러내는 학문

 

내가 있는 캐나다에서도 인문학이 위기에 처했다고 염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1997년 온타리오주의 칼턴(Carleton) 대학에서 졸업생이 직장을 잡지 못한다는 이유로 고전(classics), 독문학, 국제언어와 같은 몇 개의 인문학과를 갑자기 폐쇄해서 수십 명의 교수가 직장을 잃고 강사로 전직하는 등 엄청난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이런 일은 오히려 한국 같으면 더 일어나기 어려웠을 일이다.

 

내가 몸담고 있는 토론토대학도 공과대학이 기업과 정부의 지원을 받아 급속하게 팽창하는 반면, 인문학은 제자리걸음이거나 예산이 축소되고 있다. 정부가 인문, 사회과학 연구를 지원했던 사회과학과 인문학 연구 위원회(Social Sciences and Humanities Research Council)의 연구비도 지난 몇 년간 대폭 삭감됐다. 게다가 최근 이 위원회는 인문학자들에게 자신의 연구가 세상 사람들의 삶에 어떤 바람직한 영향을 주는가를 구체적으로 명시하라고 요구하기 시작했다. 분석철학자들이 전세계에서 10명 정도의 전문가들만 이해할 수 있는 논문을 쓰기 위해 연구비를 타던 순수 연구의 시대는 이제 끝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문학의 위기는 대학 기능의 변화와 관련이 있다. 19세기까지 서구사회에서 대학은 국가와 제국을 이끌어나갈 소수 엘리트를 키우는 곳이었고,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교육은 민족국가를 상징하는 문화에 대한 교육이었다. 문학, 역사, 철학과 같은 인문학이 이러한 문화 대학에 가장 적합한 교육이었음은 물론이다. 그렇지만 19세기를 통해 대학이 떠맡게 된 또 다른 임무가 있었는데, 그것은 산업 인력과 전문 인력의 양성이었다. 이런 필요에 의해 과학·기술 교육이 대학에 도입되었고, 이렇게 도입된 과학·기술 교육과 연구는 인문학을 밀어내고 대학의 중심으로 자리잡았다.

 

이 과정은 대학의 양적 팽창과 그 궤적을 같이한다. 대학의 양적 팽창은 특히 20세기 후반부에 두드러졌다. 1950년에서 1980년 사이에 서구 산업국가에서 인구대비 대학생의 비율은 4~30%로 급속하게 성장했고, 한국의 경우 이는 더욱 뚜렷해서 95년 기준으로 18~21세 젊은이 56%가 대학에 진학했다. 대학이 팽창하면서 대학 졸업생의 위상도 변했다. 대학 졸업생 대부분이 제국을 이끌고 갈 엘리트가 아닌, 지식산업과 서비스산업에 종사하는 사무·지식노동자나 관료체계의 하위직 관료로 흡수됐다.

 

한국의 경우에도 대학 졸업장을 받으면 엘리트 또는 지식인 얘기를 듣던 시절은 70년대 말에 끝났다고 볼 수 있다. 박사가 넘쳐나는 사회에서 대학 졸업생에게 돌아갈 지식인이란 훈장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대학에 다니는 학생 대부분이 졸업 후에 비판적이고 독립적인 시민으로 살아갈 사람들이다.

 

나는 대학교육과 인문학의 위기를 이러한 현실 위에서 생각해야 한다고 본다. 대학생이 졸업을 하고 독립적이고 비판적인 시민으로 살아가는 아주 중요한 요소는 직장을 잡고, 자신의 생계를 책임지는 것이다. 하고 싶은 일을 하고, 그 일에서 작지만 새로운 것을 만들고, 여가를 즐길 줄 알고,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 맞게 자신을 계속 충전할 줄 아는 것은 현대사회를 사는 시민의 기본이다. 학생들이 취직에 눈이 멀어 학과공부를 게을리한다는 한탄이나, 더 이상 사회와 민족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선배와 교수들의 불만이 자주 들리지만, 이들 선배나 교수들이 우리사회가 대학 졸업생들에게 직장을 골라 갈 수 있는 사치를 허용하는 사회가 아님을 모를 리 없다.

 

학생들이 취직에만 몰두하는 사태를 안타까워하는 대학교수들은, 힘을 합쳐서 대졸자가 치르는 공무원 시험과 고시, 방송사·대기업·언론사와 같은 인기 직장의 입사시험을 대학에서의 공부와 더 밀접하게 바꾸는 데 힘을 쏟아야 한다. 학생들이 취직을 위해 대학의 전공과는 무관한 공부를 한다고 나무랄 것이 아니라, 학생들이 취직할 때 치러야 하는 준비와 대학의 교육을 더 비슷하게 만들어서 학생들을 이중의 부담에서 덜어주어야 대학교육을 정상화할 수 있다.

 

 

지식기반 사회는 철학을 필요로 한다

 

인문학의 위기와 관련이 있는 또 다른 변화는 지식기반산업의 부상을 중심으로 한 산업구조의 변화와 이에 따른 지식생산양식의 변화다. 기번스(M. Gibbons) 같은 서구의 몇몇 학자들은 지식기반사회가 대두하면서 지식생산양식이 변했음을 지적한다. 이들은 지식생산을 제1양식과 제2양식으로 나누고, 점차 지배적이 되어가는 제2양식의 특징으로 ①지식의 응용 ②학제간의 넘나듦 ③지식 생성 공간의 이종성(異種性)과 수평적 인간관계 ④사회적 책임 ⑤대중과 의뢰인에 의한 지식평가를 들고 있다.

 

한국 역시 지식기반산업을 중심으로 한 산업구조로 빠르게 이행중이며, 이런 이행은 현 정권의 재벌개혁 후 지식기반 구축이라는 경제 정책과 지식공동체를 필두로 한 노사정책을 볼 때 더 빨라질 전망이다. 경제학자들은 2010년경 지식기반산업이 한국 GDP 50%를 차지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유연적 생산 시기의 지식노동은, 한 분야에 대한 전문성보다는 분야와 분야를 넘나들 수 있는 능력을, 세분된 전문지식보다는 두 가지 이상의 다른 지식을 섞을 수 있는 유연한 사고를 필요로 한다. 세분된 학과에 근거한 전공제도는 70년대 생산업을 주로 한 산업구조에는 적합했을지 몰라도, 21세기 지식기반사회를 위한 것은 아니었다는 얘기다. 이런 외부의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더 정확하게는 외부 변화의 압력에 못 이겨) 대학은 90년대 중반 이후 학부제를 도입했는데, 학부제는 학생에게 학과와 전공을 선택할 자유만 부여해서 가뜩이나 인기가 없던 철학, 역사, 문학과 같은 인문학 분야를 고사 상태로 몰아넣었다.

 

대학생들은 철학과 같은 인문학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현재 대학에서 강의하는 인문학에는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 대학생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한 통계를 보면 한국 사회에서 철학의 몫을 키워야 한다는 데 동의하는 학생이 79.4%였음에 반해, 현재 철학 연구에 만족한다는 학생은 3.5%에 불과했다. 이런 현실은 인문학이 빠르게 변하는 상품생산과 지식생산의 구조 속에서 별로 유용하지 않은 지식이라는 인식으로 인해 악화되고 있다. 반면 대학 밖에서의 인문학 강좌는 인기를 끌고 있다. 이는 지금 대학에서 강의되고 연구되는 인문학의 위상이 몹시 불안정한 것임을 드러낸다.

 

많은 인문학자들이 인문학이 삶의 문제를 다루고, 의미있고 가치있는 삶과 올바른 가치체계를 탐구하며, 사람다움의 당위와 실현을 추구하는 인성교육임을 강조한다. 인문학이 삶의 바른 자세와 ()를 가르치는 학문이라는 주장은 학()과 실천의 합일을 강조했던 유학의 전통과도 닿아 있고, 따라서 우리의 정서와도 잘 들어맞는다. 그렇지만 이러한 담론이 인문학을 육성해야 하는 정당성만 제공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담론은 동양이나 서양의 전통사회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지배 엘리트들에게 불어넣었던 이데올로기와 일맥 상통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의 인문학 교육에 대해 얘기할 경우에도, (예를 들어) 윤리학을 배우는 것이 실제로 사람을 윤리적으로 만드는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없지 않다. 나는 인문학 교육이 학생들에게 다양한 가치(value)를 접하게 하고, 이중 하나를 선택해보는 경험을 하게 함으로써, 이들이 실제 세상에서도 판단의 유연성과 문화적 다양성에 대한 안목을 가질 수 있다는 주장에는 동의할 수 있어도, 철학 문학 역사와 같은 인문학 교육이 바로 인성교육으로 이어진다는 주장에는 쉽게 동의할 수 없다. 이웃과 다른 사람을 위하는 마음과 실천은 윤리학을 배워서가 아니라, 혼자서 할 수 없는 일을 협동해서 이루어 봄으로써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연과학자들은 과학이 기술에 끼치는 영향을 들어 순수과학의 효용을 강조하듯이, 일부 인문학자들은 인문학과 실용적인 사회과학의 상호작용을 들어 인문학의 효용을 말한다. 인문학은 사회과학의 이론을 위한 구체적인 데이터를 제공하고, 동시에 사회과학에서 이루어지는 거대한 일반화에 도전한다는 것이다. 인문학과 사회과학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과 협력이 양자의 발전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문제는 사회과학도 어렵기는 매한가지라는 사실에 있다. 인문학보다 조금 나을지는 몰라도 사회과학은 그 실용성에서 공학이나 의학의 특권적 위치와는 거리가 멀다.

 

최근 인문학과 과학기술의 관계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점점 커지고 있다. 인문학이 문명에 대한 균형감각을 제공하는 학문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과학기술 시대의 인문학이 적극적으로 과학기술과 결합하고 과학기술을 그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에 반대가 있을 수 없다. 또 문학, 문화, 예술과 같은 인문학의 주제들이 정보기술의 내용을 채워줌으로써 문화산업을 육성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할 수 있음도 분명하다.

 

조금 더 구체적인 결합방식으로 과학사·과학철학·과학사회학과 같은 과학학 분야의 육성, 문화연구와 공학의 절합을 통한 문화공학과 같은 간학문(interdisciplinary programs)의 제도화, 인문학·공학·자연과학의 상호수렴 경향을 바탕으로 한 인문적 통일과학의 설립 등이 제시됐다.

 

이와 같은 문제제기가 무척 중요하고, 이러한 노력이 과학기술과 정보화시대 인문학의 효용을 고양한다는 것을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인문학과 과학기술이 생산적인 대화와 공동연구를 통해 얼마나 협력할 수 있을지는 의문으로 남는다. 무엇보다 과학기술자들이 이런 일에 발 벗고 나설 리 만무하다.

 

그렇다면 인문학자들이 이런 잡종교배를 담당해야 하는데, 인문학과 과학기술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새로운 문제와 인식틀을 만들어내기에는 대다수 인문학자들이 지금까지 각각의 전공분야에만 너무 안주해왔던 것이 사실이다. 게다가 이 둘을 매개해줄 수 있는 과학사·과학철학·과학사회학 같은 과학학 분야의 학문은 한국 대학의 엄격한 학제 때문에 설자리를 찾지 못한 채 헤매고 있는 실정이다.

 

 

학자들의 반성, 번지수가 잘못됐다

 

일군의 인문학자들은 이런 위기가 한국 인문학이 우리 것을 제대로 연구하거나 가르치지 못하고 서양의 학문에 각주를 다는 식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라고 강조한다. 나는 이들의 주장이, 외국 학자들의 책이나 논문에서 이것저것 따와서 자기 연구를 대신하거나 자기 글의 권위를 높이려는 일부 상식 이하의 관행에 대한 비판이라면, 이에 동의한다.

 

그렇지만, 일부가 제기하는 우리 글쓰기새로운 진리와 같은 개념이 인문학의 위기에 대한 대안이 될 수는 없다고 본다. 수준 낮은 연구와 교육에 대한 비판은 수준 높은 연구와 교육을 통해 이루어져야지, 그 실체가 모호한 우리 것에 대한 회귀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특히 전통과 우리 것에 대해 얘기하면서 종종 정서에 호소하거나 선문답 같은 담론으로는 인문학의 위기를 심화할 뿐이다. 인문학의 사유는 복잡한 수학 문제를 푸는 것과 같은 엄밀하고 분석적이며, 동시에 콘텍스트적이고 반성적인 사유를 할 줄 아는 능력을 개발하는 것이지, 날개를 달고 날아가는 식의 꿈 같은 상상력을 키우는 것이 아니다.

 

인문학적 사유의 효용은 지식생산양식의 변화와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 전지구적인 네트워크 혁명이 경제·지식·인간관계·일상생활을 빠르게 변화시키는 지금, 인문학자들은 인문학이 가르칠 수 있는 인문학적 사유법(way of thinking)이 무엇이고, 이것이 어떻게 학생들에게 독립적이고 비판적인 시민이 갖춰야 할 유연하고, 강인하며, 동시에 적응력 있게 생각할 수 있는 힘을 부여할 수 있는가를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학의 커리큘럼을 실용적인 것으로 바꾸는 시도는 이를 위한 한 가지 방법이다. 철학과에서 윤리학만이 아니라 최근 사회문제로 대두하고 있는 생명윤리학(bioethics)을 개설한다든지, 역사학과에서 성(sex)의 역사를 개설하는 것과 같은 시도는 일단 상황을 개선하려는 일차적인 시도로 의미가 있다. 교육의 내용을 현실의 문제와 더 밀접히 관련시키는 것은, 학습 의욕을 증진시킬 뿐만 아니라 교육의 유용성을 어느 정도 증진시키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커리큘럼을 조금 바꾸는 것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다. 정보기술과 그에 근거한 지식의 급속한 팽창, 그리고 이를 공유하는 전지구적인 정보 네트워크의 등장이 새로운 지식의 생산·소비 속도와 패턴을 빠르게 변화시키고 있는 실정에, 실용적인 과목을 한두 개 새로 개설하는 것으로는 이런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한다고 볼 수 없다.

 

더 근본적인 것은, 정보를 취사선택하고 조합해서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 내고, 이 지식을 다시 정보로 바꾸어 세상에 내놓을 수 있는 안목과 능력을 키워주는 것이다. 지식기반 사회에서 대학 교육이 할 일은 지식을 전수하는 것이 아니라, 정보와 지식을 매개하는 나선형의 상호작용을 이해하고 이를 조작할 수 있는 학습 능력(learning capacity)을 극대화하는 것이다.

 

 

세상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은 어떻게 길러지나

 

나는 내 수업을 듣는 학생들에게 기말 보고서를 내주면서 항상 다음과 같은 얘기를 한다.

 

중요한 것은 텍스트를 독창적이고 창조적으로 읽는 것이고, 같은 텍스트를 읽은 다른 사람들이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그 무엇을 발견하는 것이다. 새로운 문제의식을 가지고, 항상 질문을 던져가면서, 콘텍스트를 고려하고, 자신이 읽은 텍스트를 다른 텍스트와 비교하고 결합시키면서 읽고 생각하다 보면,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인문학의 연구는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이 읽었던 데카르트의 방법서설과 같이 고전적인 텍스트에서도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있다는 가정에 근거하고 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인간, 다른 유기체, 환경, 기계와 같은 무생물, 언어와 상징, 그리고 이것들의 활동과 순환, 그 네트워크를 맺어주는 복잡다단한 관계로 이루어져 있다. 이중 인문학의 대상은 주로 언어와 상징의 세상, 즉 씌어진 세상(inscribed world)이며, 인문학적 사유라는 것은 씌어진 세상을 구성하는 텍스트(text)를 읽고 이해하는 방법이다.

 

텍스트에는 방법서설과 같은 고전에서부터, 우리가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책과 논문, 에세이, 신문과 잡지, 인터넷 자료들은 물론, 노래와 영화, 표정과 의상과 같은 문화까지 포함된다. 텍스트에 대한 이해가 중층적이고 창조적일수록 더 바람직하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텍스트를 대상으로 한 인문학적 사유는 고차원적인 정신 노동이다. 만지고 보는 차원을 뛰어넘는 인간의 이해는, 항상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한 답을 찾음으로써 이루어지는데, 이는 인문학적 사유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인문학적 사유는 주로 상징과 언어의 세상에서 발견되는 문제를 풀면서 훈련할 수 있다. 훈련된 사유가 지향하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새로운 문제를 찾아내고 이미지의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배양하는 것이다.

 

따라서 텍스트의 내용을 그저 주입하거나 고전을 성현의 말씀과 같은 식으로 절대화하는 교육은, 학생들을 정보혁명 시기의 비판적인 시민으로 교육하는 데 적합하지 않다. 사실보다는 해석을, 암기보다는 비판적인 질문을 던질 수 있는 능력을, 지식 그 자체보다는 필요한 지식을 찾고 이용할 줄 아는 역량을, 텍스트의 요약보다는 그 속에서 남들이 보지 못하는 무엇을 찾아내는 안목을 키워주어야 한다.

 

이런 안목은 훈련을 통해서 키울 수 있다. 인문학 교육은 학생들에게 질문을 주고, 텍스트를 바탕으로 해서 이를 해결하게 하는 단계부터 시작해야 한다. 예를 들어, 과학과 사회를 강의하는 교수가 학생들에게 인터넷 혁명이 과학자들의 실험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라는 주제에 대해 보고서를 제출하라고 요구한 경우를 생각해 보자. 이를 위해 학생은 무엇보다 교수가 수업 시간에 얘기했을 인터넷 혁명의 성격과 과학자들의 실험 특성을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이 각각의 주제와 이의 관련을 보여주는 참고문헌을 어떻게 찾는지 알아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도서관이나 인터넷의 자료를 능숙하게 이용할 줄 알아야 한다.

 

참고문헌을 찾았으면 이를 자신의 역량에 맞게 추릴 수 있어야 한다. 짧은 보고서를 위해 논문 수백 편과 책 수십 권을 읽을 수 없는 것은 자명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논문이나 책을 훑어보고(어떤 때는 제목과 개요만 살펴보고), 어떤 것이 중요하고 자신의 과제와 직접 관련이 있고 어떤 것이 그렇지 않은가를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참고문헌이 많지 않을 때는 과학자들을 인터뷰하는 것 같은 비상계획을 빨리 세우는 것도 중요하다.

 

이 질문에 답하는 데 필요한 능력은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가장 핵심적인 능력은, 찾은 책이나 논문을 읽고 정확하게 요점을 파악할 수 있어야 하고, 무엇보다 서로 다른 주장들을 비교하고 각각의 타당성을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주장을 평가한 기반 위에서, 자신의 새로운 의견이나 결론을 만들어낼 줄 알아야 한다. 자기 주장을 설득력 있게 만들어줄 콘텍스트를 잘 구성해야 하며, 이렇게 만들어낸 자신의 의견에 대한 타당성과 그 의미를 반성적으로 생각할 줄도 알아야 한다.

 

이를 바탕으로 보고서의 구조를 생각해야 한다. 서론에서 문제를 던지고, 본론의 논지를 매끄럽게 펼 수 있어야 하며, 결론으로 자신의 공부가 지니는 의미에 대해서 정리할 줄도 알아야 한다. 언제 어떻게 왜 인용해야 하는가를 알아야 하며, 참고문헌을 사용해서 각주나 미주를 적절한 위치에 달 줄도 알아야 한다. 이 모든 것을 위해 무엇이 표절이고 무엇이 표절이 아닌가도 알아야 한다. 모국어와 외국어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추는 것도 이 단계를 위해 필요한 일이다.

 

이러한 훈련을 바탕으로 학생들은 인터넷 혁명이 자연 과학자들의 실험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문제 자체를 스스로 찾아내고 이에 대해 좋은 연구를 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를 수 있다. 교수가 인터넷 혁명에 대해 한 가지 주제를 잡아 논문을 써 오라고 했을 때, 20세기 인터넷 혁명의 제반 특성에 대한 일반적 고찰과 같이 뜬구름 잡는 주제가 아니라, 인터넷이 휴먼게놈 계획에 끼친 영향과 같은 구체적이고, 다룰 만하고(manageable), 의미 있는 주제를 잡아내고, 이에 대해 좋은 연구를 수행해서 독창적인 결과를 내놓을 수 있다는 얘기다.

 

자연과학에서도 주어진 문제를 잘 푸는 것과 스스로 중요한 문제를 찾아내는 것 사이에 질적인 차이가 있듯이, 인문학의 경우도 비슷하다. 스스로 중요한 질문을 던지기 위해서는 무엇이 중요하고 가치 있는 연구주제인가를 골라낼 수 있는 안목이 있어야 하며, 이를 위해 자신이 다루는 분야의 현 연구상태에 대한 개략적인 이해는 물론, 이들 중 중요하지만 아직 충분히 연구되어 있지 않은 분야나 주제가 무엇인가를 포착할 수 있는 비판적인 시각이 있어야 한다.

 

이런 비판적인 시각에서 출발해, 큰 주제를 새로운 각도에서 조망해줄 수 있는 작은 연구주제를 찾아 이에 대해 독창적으로 생각할 수 있어야 하고, 그 생각을 바탕으로 다시 큰 주제의 의미를 새로운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독창적인 해석에 대한 열정이 이런 공부와 연구를 관통해야 함은 물론이다.

 

이러한 인문학적 사유는 인문학 강의를 통해 더욱 날카롭게 계발하고 연마할 수 있다. 무엇보다 교수의 강의는 질문을 던지고 이를 해결하는 모범을 보여주어야 한다. 한 학기 강의를 통해 생각해볼 큰 질문 몇 개를 수업 초기에 던져주고, 강의가 진행되면서 그 문제들이 어떻게 해결되는가를 보여주어야 한다. 개별 강의에서도 이번 강의에서 다룰 중요한 문제 한두 개를 제시하고, 교수의 강의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수업이 끝날 무렵이면 학생들이 스스로 유도할 수 있도록 학생들의 사고를 도와주고 인도해 주는 식이 돼야 한다. 교수가 학생에게 던지는 질문만이 아니라 강의를 통해 학생의 질문을 적극적으로 유도해야 함은 물론이다.

 

강의는 토론과 연구지도로 보충할 수 있다. 학생들은 매 강좌 요약 차원을 뛰어넘는 보고서를 작성하고 그에 대한 전문가(교수)의 제대로 된 비판과 평가를 받아야 하며, 독서와 토론을 통해 텍스트를 읽고, 질문을 던지고, 이에 답을 제시해 보고, 자신의 견해에 대한 다른 사람의 견해를 청취할 기회를 가져야 한다. 텍스트에 대한 토론이 진행될 때 교수가 할 일은 학생들이 텍스트에서 미처 발견하지 못한 새로운 문제와 질문을 찾아내는 모범을 보이는 것이고, 이런 질문들이 어떻게 텍스트를 한 단계 높은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게 하는가 보여주어야 한다.

 

 

인문학은 복잡한 세상의 길잡이

 

이런 훈련을 거치면서 학생들은, 지금까지 무심코 보았던 텍스트에서 새롭고 의미있는 문제를 찾아내고 이를 바탕으로 텍스트를 다시 해석해 내듯이, 지금까지 무심코 보았던 세상을 어떻게 새롭게 보고 이해할 수 있는가를 깨달을 수 있다. 새롭고 독창적인 것에 가치를 두고, 주변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차이에 주목하고, 그럴 듯한 헛소리와 의미있는 주장을 구별하는 것과 같은 인문학적 감수성은 이런 훈련을 통해서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이런 훈련을 받은 학생들은 사회의 어떤 분야로 진출해도 그 분야의 실무를 익히면 인문학적 사유를 적용해서 창조적인 결과를 낼 수 있다. 현대적 경영자가 갖추어야 할 덕목에 대해 오펜하이머사의 회장이었던 아더 오펜하이머(Arthur Oppenheimer)가 한 다음과 같은 얘기를 들어보자.

 

오늘날의 경영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독립적이고 창조적으로 생각할 줄 알고, 불완전하고 변화하고 모호한 환경에서 기능할 줄 알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데이터가 충분하지 않을 때 결정을 내릴 줄 알고, 협상하고 타협하며, 위험을 무릅쓸 줄도 알아야 하고, 정량적인 데이터에만 의존하지 않으며, 단기 목표와 장기 계획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하고, 누구에게나 명백한 것과 그저 주관적인 것을 거부할 수 있어야 하고, 동료와 효과적인 작업 관계를 맺을 줄 알아야 하며, 사람을 고무하고 갈등을 해결할 줄 알아야 하고, 정보 네트워크를 잘 만들 줄 아는 능력이다. 이것은 모두 인문교육에서 육성되는 능력들이다.

 

1985년 당시 제너럴 모터스의 회장이었던 로저 스미스(Roger Smith)도 인문학 교육의 예찬론자였다. 그는 인문학 교육이,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다양한 시각을 제공하고, 혁신의 기본 요소인 창조성을 높이 평가하는 안목을 키워주며, 인간을 폭넓게 이해하게 함으로써 대인관계에 도움이 되고, 질적으로 우수한 것에 대한 존경심을 키워준다고 지적했다. 특히 그는 전혀 다른 것들 사이의 관계를 볼 줄 알고, 이렇게 서로 연관성 없어 보이는 것들을 결합해 새로운 배열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이 예술과 문학, 역사와 같은 인문학에서 배양하는 능력이며, 바로 이것이 성공에의 공식이 존재하지 않는 요즘과 같은 기업 경영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능력이라고 역설했다.

 

나는 인문학자들이 이런 주장을 포함해서 인문학의 실용성에 대해 적극적으로 생각하고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인문학의 위기를 맞아서 선언적인 시도는 자주 볼 수 있었지만, 선언만 가지고는 부족하다. 퀀텀 펀드(Quantum Fund)의 조지 소로스(George Soros)가 칼 포퍼(Karl Popper)의 제자였기 때문에 철학이 실용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심정적인 위안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위기를 극복하는 실제적인 힘이 되기는 힘들다. 정말로 필요한 것은 그가 포퍼의 철학에서 무엇을 배웠고, (실제로 그런 것이 있다면) 이 지식이 어떻게 사용됐는가에 대한 적극적인 구명이다.

 

이는 인문학이 자본의 논리 앞에 굴복하는 것도, 신자유주의에 항복하는 것도 아니다. 인문학의 실용성을 밝히고 이를 교육에 적극 도입하는 것은 사실 우리의 복잡한 세상을 조금 더 깊게 이해하는 과정이고, 이는 바로 인문학의 본령과 붙어있다.

 

 

인문학은 실용성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야

 

인문학자들은 기술이 시장지향적이며, 몰가치적이고, 피상적임에 반해, 인문학은 인간적이고, 가치지향적이며, 근본적이라는 식으로 양분하는데, 나는 인문학과 기술을 각각 순수응용으로 나누고, 인문학은 응용학문에서 추구하는 실용과 무관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인문학의 위기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모든 지식이 직·간접적으로 연관돼 있고, 지식과 문화가 산업의 핵심으로 자리잡은 지금 순수와 응용의 경직된 구분은 불필요할 뿐만 아니라 잘못된 것이고, 학문의 건강을 해치기 때문이다.

 

앞에서 언급했지만 대학의 커리큘럼을 실용적인 것으로 바꾸는 것은 이를 위한 한 가지 방법이다. 그렇지만 더 근원적인 것은 인문학이 실용적인 연구를 조금 끌어안고, 인문학 교육이 한두 과목 실용적인 과목을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인문학적 사유 자체가 그 근본에서 실용적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모색하여, 이를 교육하고 이런 효용을 세상에 설득하는 것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 사회에는 상징과 언어가 있고, 인문학은 상징과 언어로 이루어진 세상에서 우리가 맞닥뜨리는 수많은 수수께끼를 푸는 매우 강력한 방법을 제공한다. 따라서 대학에서 4년 동안 인문학을 전공하거나 부전공한 학생들은 이 언어와 상징의 세상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다른 학생들보다 더 잘 다룰 수 있는 훈련을 받아야 하며, 이를 위해 기존 주장이나 해석을 비판적으로 검토할 수 있는 기본 소양을 갖춰야 한다. 또 다른 사람의 주장을 비판적으로 보듯이, 자신의 주장도 비판적으로 볼 수도 있어야 한다.

 

이들은 세상을 새롭게 볼 수 있어야 하고, 새로운 것을 높이 평가하고, 새로운 것이 필요할 때는 이를 만들 수도 있어야 한다. 세상을 설명하는 성급한 이론이나 단순한 공식에 만족하기보다, 서로 다른 견해가 나타나는 원인에 대해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차이에서 동질성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하며, 하나라고 믿어온 것을 차이로 특징지을 수 있는 상이한 개체나 그룹으로 쪼갤 줄도 알아야 한다. 중심의 목소리를 의심할 줄 알아야 하며, 주변의 낮은 목소리에 힘을 실어줄 수도 있어야 한다. 보편적인 이론을 해체할 줄도 알아야 하고, 개개인의 경험 속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지닌 보편성을 발견할 수도 있어야 한다.

 

인문학을 공부한 학생들은 세상을 흑과 백, 정답과 오답, 진보와 퇴보의 극과 극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이런 양분법의 중간영역에 존재하는 회색지대와 잡종적 존재의 창조적인 가능성을 감지할 수 있어야 한다. 세상을 이렇게 보고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은 새로운 사고·조직·인간관계·상품을 만들어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가장 실용적인 힘이다. 이러한 인문학적 사유는 지식과 정보가 나선형으로 변환하면서 생산의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잡는 지식생산양식의 핵심적 변화 과정과 유사할 뿐만 아니라, 맞물려 있기까지 하다.

 

나는 인문학적 사유가 질문을 던지고, 텍스트를 읽고, 질문에 대한 설명과 답을 끈질기게 찾아보는 수많은 훈련과정을 통해서 키워지는 것임을 주장했다. 그렇지만 인문학자들의 연구에 대해서는 별로 얘기하지 않았다. 처음에 언급했듯이, 이 글의 주제는 인문학의 위기를 대학교육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한 가지 예측할 수 있는 것은, 창조적으로 생각할 수 있게 훈련받은 학생 중에 더욱 창조적인 학생들이 인문학 연구에 평생을 바치겠다는 생각으로 학문을 택할 때, 한국 인문학의 식민성이나 열등감 운운하는 얘기는 자연히 사라질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By 양신규(skyang)

2000/05/09 (08:41:29)

홍성욱교수 인문학 위기론의 문제점

 

홍성욱의 인문학 위기론과 그에 대한 대응책은 역시 남한 인문학자 일반의 조금 애매한 주장들 보다는 훨씬 구체적이고 읽을 만한 요소들이 들어있다. 홍성욱 인문학의 위기를 진단하고 그 극복방안을 제시하는 글에서 내가 가장 동의하는 얘기는 인문학도 과학처럼 연구의 기준이 분명하고 "엄밀"해야 한다는 얘기와, 인문학의 "실용성"에 대한 옹호다.

 

내 기억으로 보스턴에서 홍성욱을 만났을 때, 같이 한 얘기가 인문학 제대로 하면 매우 실용적이다라는 얘기가 있었었다. 그 사례로 경영학과 법학의 강의에 동원되는 케이스토론 (Case Discussion) 을 들었고, Zuboff 하바드 경영대 교수나 Cusumano MIT 경영대 교수가 둘 다 하바드에서 역사학 박사학위를 했는데 매우 실용적이고 rigorous 하고, 중요한 연구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한 적이 있다. 또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의 학부전공이 수학-물리-기계 공학이나 경제학인데 반해, Paul Krugman 은 학부에서 역사학전공했고, 그 덕분인지는 몰라도 크고 중요한 문제를 간명한 수학모델로 해결하고 설명하는 능력과, 또 수학모델을 쓰지 않고 설명하는 능력, 그리고 경제학 논문만이 아니라 광범한 독서를 통해서 여러분야의 생각을 넘나든다는 얘기를 한 것 같다.

 

인문학도 충분히 엄밀하고 실용적일 수 있다는 주장은 나도 100% 동의하는 점이다.

 

그런데 홍성욱 글을 보면서 언제나 안타까운, 핵심문제는 꼭 피해가고 지엽적인 문제를 얘기한다는 느낌이 이 글에서도 또 들었다. 예를 들자면 한강 다리를 놓아야 할 때, 어떻게 하면 일단 안 무너지는 다리를 놓아야 할까가 젤 중요한 얘기라면, 담에 주위 환경과 더 어울리는 멋진 다리를 놓아야 할 것인가가 담으로 중요한 얘기다. 그런데 홍성욱 글을 보면 성수대교처럼 내일이면 뚝 끊어져 무너져내릴 다리를 보고, 야 저 다리는 조금 이쁘게 색칠하면 좋겠다 이런 식이다. 이런 얘기가 성수대교 부실공사한 사람들을 긁지 않고 많은 사람들에게 이쁨 받을 소리인지 몰라도, 무너질 다리 이쁘게 색칠해봐야 뭐 하느냐 하는 생각이 홍성욱 글을 읽을 때마다 적지 않게 든다. 비유는 그만하고 내가 왜 이 비유를 말하나를 밝혀야 겠다.

 

미국이나 서구 인문학자들이 느끼는 위기의 본질은 인문학이 본래 비실용적이어서가 아니다.

 

홍성욱 말대로 텍스트를 제대로 이해하고 컨텍스트에 놓아보고 비판적 사고를 기르고, . . . 이런 것 보다 중요한 실용적 지식이 어디에 있을까?

 

또 인문학자들이 자기의 학문을 실용적으로 포장해서 학생들을 가리치고 싶지 않아서도 아니다. 문화 연구다, 지역 연구다 뭐다 인문학자들이 중심이 된 이상한 이름의 연구 교육기관이 마구 생겨나는 것을 인문학자들도 퍽이나 실용적인 데 관심이 많다는 것도 보인다. 자기 졸업생들이 경영학이나 법학 졸업생들처럼 연봉 일억오천만원을 주는 직장에 5-6 개씩 Job Offer 를 놓고 고민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 그런 것도 아니다. 누가 자기 학생들이 좋은 직장에 취직 잘한다는 데에 싫어할 사람이 있을까? 물론 그런 거가 물질적인 거라서 싫다고 우기는 사람들도 없지 않겠지만, 그건 전혀 문제의 포인트가 아니다. 경영학자나 경제학자 공학자 자연과학자도 그런거 물질적이라 싫다고 우기는 체하는 사람도 많다. 그러고도 지가 돈 많이 벌면 물론 좋아한다.

 

서구에서의 인문학 위기의 원인은 대부분의 인문학자들이 "실용성" 교육 이전에, 실용적 지식을 만드는 일, 그보다도 더 이전에 보편적으로 엄밀한 지식을 생산하는 과정에서 낙오했고, 아주 소수의 인문학자들 만이 그 과정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직도 계몽사조시절의 글쓰기 정도 수준으로 실용적이고 주도적인 사상을 만들어가던 이삼백년 전의 영화나 부러워하고, 학문적 헤게모니를 자연과학과 공학 경영학 경제학에 빼앗긴지 오래여서 도저히 가져올 길이 없는 현실을 인정조차 하지 않으려는 타조의 모래에 머리박기 습성을 가진 사람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에 대해 눈을 감으면, 사실에 관한 "실용적" 지식은 커녕, 엄밀한 지식이라도 만들 수 있을 것인가?

 

지식사회의 실용적 지식은 엄밀성에 바탕을 두고 만들어지는 것이지, 구호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대학의 교육이란 자기가 학문적으로 탐구하는 분야에 대해 가르치는 것이다. 왜 미국의 일류 연구중심대학들이 교수들에게 일년에 2-3 과목만 가르치게 하냐면 (그러니까 많은 교수들은 한학기만 강의하고 나머지 8 달 동안 연구만 한다.) 연구를 제대로 해야 제대로 가르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좀 미안하지만, 친구니까 홍성욱의 케이스를 한 번 들어 보자. 홍성욱이 어디엔가 한글로 쓴 "마이크로소프트 케이스"를 언젠가 읽은 적이 있다. 내가 홍성욱한테 너 한글로 글 쓴다고 그렇게 써도 돼? 라고 말한 최초의 글이었던 것 같다. 내가 실망했던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이것은 본질상 Anti-trust Law Case 이다. 1890 년에 셔먼 액트가 통과된 이래, Industrial Organization 분야라는 정교한 경제학분야와 같은문제를 다루는 법학분야가 아예 이 문제만 가지고 따지고 있다. JP Morgan을 잡아넣고,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을 강제로 분리하고, 록펠러의 스탠더드 오일을 쪼개 버리고, 카네기의 유에스 스틸에 족쇄를 채우고, 반더빌트 가문의 철도운송회사에 수갑을 채운, 미국 재벌구조를 박살내버린 법률의 문제다. 사실은 미국만이 아니라, 일본과 독일의 재벌구조마저 이차대전에 미국에게 점령당한 다음 바로 이 법의 정신에 따라 작살이 난거고, 지금 남한 재벌 개혁의 미국에서의 후원도 이 법의 정신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다. AT&T를 쪼개서 컴퓨터통신의 경쟁력을 키우고, IBM 에 족쇄를 채워 미니 컴퓨터와 퍼스널 컴퓨터 마켓에서의 IBM의 독주를 방어해 냈던 법률이다. 그 법률로 마이크로소프트를 쪼개버리겠다고 나서고 있는 일에 관한 일이다. 물론 이 주제는 그렇기 때문에, 남한 경제담론에서 그렇게 낙후되고 진부하게 진행되는 국가-시장 논의와도 아주 밀접한 연관이 문제다. 아무튼 백년 동안의 경제학 지식 법률적 토론이 녹아있는 문제이고, 그 케이스에 대한 제대로된 토론은 모두 그런 경제-법학의 바탕 위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또 특별히 마이크로소프트 경우는 최근의 기술동향과 그와 관계된 상세한 기술적 경제적 이슈들을 이해해야한다. 또 미국 저널리즘이 제대로 되어있기 때문에 지면을 검토해 보면 이 문제에 대해 학문세계에서 인정받는 경제학자들을 정확히 찾아내어 주장을 비교검토하고 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그런데, ... "과학기술의 역사"를 연구한다는 홍성욱이 이 문제를 전혀 낭만적으로 접근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 어떤 변호사가 하나 있는데, 그가 어떻게 어떻게 해서, 뭘 어떻게 어떻게 했더라. . . . 학생들이 그걸 마이크로소프트케이스라고 읽고 토론한다면 . . 한마디로 한심한 것이다.

 

적어도 제대로 된 인문학자가 이 문제를 접근한다면, 어떤 기술적 법률적 경제적 이슈가 이 문제의 핵심과 주변에 있는지에 대한 소개, 개괄은 있어야 한다. 그래야 학생들이 이 문제에 대한 "광대한 텍스트" "비판적"으로 읽어 내고 "Sense Making" 할 수 있을 것 아닌가.

 

내가 구미를 포함해서 현존 인문학의 연구활동의 문제점으로 지적하는 것은 이 지겨운 Dabbling 이다. 예를 들어 Microsoft 얘기를 할 때, Middleware 의 기술적 경제적 효과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면서 이 문제를 토론할 수는 없다. Linux 등의 공짜 소프트웨어를 이야기 할 때, Private Provision of Public Goods 의 조건과 논리에 대한 이해가 없이 의미 있는 토론을 할 수가 있을 것 같지도 않다. 그냥 상상력을 동원 떠들고 싶은 대로 떠드는 것은, 사실과 텍스트에 기반해서 엄밀한 학문을 하는 인문학자의 몫이 아니고 "아 컴퓨터하고 씹할 수 있다면. . ." 이런 아름다움 시를 쓰는 시인의 몫으로 남겨두어야 할거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이런 엄밀한 학문적 체계를 세우고 그걸 실용적으로 제시하고 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손쉽게 상상의 세계, 자기 머리속의 자유로운 상상의 세계를 자기 분석해보는 식으로 책을 써내고, 그 책에 대해 훈고학적 주석을 달고 이런 일이 벌어지는 지도 모르겠다.

 

물론 다른 분야 사람들이 보기에도 아주 좋은 인문학적 연구를 해내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예를 들어 앞에서 얘기한 기본적으로 역사학자인 Cusumano Zuboff 연구들은 일본의 자동차 공업, 소프트웨어 산업, 미국의 마이크로 소프트, 넷스케이프, 컴퓨터사용노동자들의 일의 성격과 인식의 변화 등의 문제를 역사학 방법론을 쓰되, 경영학이나 경제학에서 이미 연구된 내용들을 포함 발전시켰기 때문에 성공적이고, 좁은 자기 써클 사람들에서 만이 아니라 다른 분야의 사람들에게까지 통찰을 던져주는 연구결과가 된 것이다. Kuhn, Chomsky, Searle, Rawles 같은 거장들이 아니더라도 역사학, 언어학, 철학 등의 전통적 인문학 분야에서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고, 특히 최근의 cognitive science 나 인공지능 같은 분야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언어학자 철학자들도 주목되는 사람들이다. MIT에서 언어학과의 적지않은 학생들은 컴퓨터공학과의 Speech Lab 과 공동연구를 한다. 이런 사람들은 실용이고 엄밀이고 구호를 외치지 않아도, 스스로 엄밀하고 실용적이고 근본적인 연구를 하는 사람이고, 이런 사람들이 학생을 가르치면 아주 자연스럽게 엄밀하고 실용적인 지식을 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서구의 인문학이 이런 형편인데, 서구이론 베낄거냐 우리이론 개발할 거냐 이런 수준의 토론을 하고 있는 국내 인문학의 상황은 깊이 따져보지 않아도 뻔할 것이다.

 

문제의 핵심은 인문학이 실용적이라는 것을 "주장"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다. 실용 이전에 학문적수준이 높은 엄밀한 좋은연구를 많이 해내는 것이고, 그 엄밀성에 바탕을 둔 연구는 지식사회에서는 자연스럽게 당연히 almost by definition "실용적"인 학문이고, 그것을 잘 배운 학생들은 훌륭한 시민도 되고 훌륭한 직업인도 되는 것이다.

 

"실용적"이라는 것은 주장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실용적이 되고 싶어하지만, 아무거나 실용적 지식은 아무거나 되는 게 아니다. 지식사회에서는 일단은 엄밀해야 실용성의 경쟁에 낄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다. 지식경제사회에서 엄밀하지도 않은 학문 내용을 가지고는 도저히 실용성의 경쟁장에 나갈 수도 없다는 것을 알았으면 한다.

 

 

 

 

 

 

By 홍성욱

2000/05/10 (01:23:14)

양신규교수의 `인문학 위기론 문제점`에 대한 반론

 

오랫만에 양신규교수가 텍스트를 좀 괜찮게 읽고 반론을 하는 것 같아서 반갑다.

 

양신규 100% 동의한다는 "인문학도 충분히 엄밀하고 실용적일 수 있다는 주장"은 내가 내 글에서 한 주장이 맞다. 그런데 조금 아쉬움이 남는다. 내 주장을 한 문장으로 만들라하면, "엄밀한 인문학적 사유는 좋은 인문학 교육을 통해 훈련될 수 있고, 이러한 사유를 할 수 있게 훈련된 학생들은 무척 실용적인 일도 잘 할수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문학적 사유의 교육과 훈련이 내 글의 초점이었는데, 양신규의 반론에서는 이 부분이 별로 중요하게 취급되지 않아서 유감이다. 그래서 센큐님이 얘기했듯이, 양신규의 글은 엄밀=실용?이라는 식(틀린 equation)으로 읽힐 수도 있다.

 

양신규가 나의 "인문학의 위기"에 대한 본격적인 반론을 하길 바랬는데, 성수대교부터 샛길로 빠지더니 다시 돌아오지 않은 것 같아 섭섭하다. 아마 본인이 얘기한대로 내 얘기에 동의하는 부분이 많다는 것이 한가지 이유가 될 것 같다. 그렇지만 양신규가 하고 싶은 얘기는 충분히 접수가 된다. 인문학의 위기의 근원은 "엄밀하지 못한 헛소리나 해대는 포스트모던 gibberish에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나는 "모던"보다는 "포스트모던"에서 건질 것이 더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지만, 양신규의 이런 얘기에도 어느 정도 공감하고 있다. 모던이건 포스트모던이건 제대로 교육하고 연구하는 풍토가 아직 잘 정착되어 있지 못한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교육에 대해 얘기를 꺼낸 데에는 이유가 있다. 양신규는 내가 마이크로소프트의 독점에 대해 쓴 논문("첨단 기술 시대의 독점과 경쟁 - 마이크로소프트 소송과 새로운 경제학의 패러다임" 과학사상, 1998 여름, 나중에 나의 <생산력과 문화로서의 과학기술>에 재수록)을 들어, 불충분한 인문학적 연구가 학생들의 교육에 도움이 되지 못함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제대로된 인문학자가 이 문제를 접근한다면, 어떤 기술적 법률적 경제적 이슈가 이문제의 핵심과 주변에 있는지에대한 소개, 개괄은 있어야한다. 그래야 학생들이 이문제에 대한 "광대한 텍스트" "비판적"으로 읽어내고 "Sense Making" 할 수 있을 것 아닌가."

 

일단 MS소송에 대한 내 글에 대해 잠간 얘기를 해야겠다. 이 글은 (내 기억이 맞다면) 내가 MIT에 방문교수로 있던 98 1월에 씌어졌다 (당시 양신규와도 이 얘기를 주고 받았던 것 같은데...). 당시는 미 법무부의 본격적인 반독점 소송이 시작(98년 5월 18)되기도 전이었다. 나는 이 글을 프론티어에 연재했는데, 당시 이것을 읽은 회원들이 재미있다고 해서 독립된 글로 만들어 본 것이었다. 읽고 쓰고 하는데, 2-3주 걸린 글 같다. 짧은 시간이지만, 내 전공연구만도 항상 산더미처럼 밀려있는 나로서는 엄청난 시간을 써서 쓴 글이었다.

 

이 얘기를 왜 하냐하면 바로 다음과 같은 양신규의 비판이 그 과녁이 잘못잡혀 있기 때문이다. skyang wrote: "'과학기술의 역사"를 연구한다는 홍성욱이 이 문제를 전혀 낭만적으로 접근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 어떤 변호사가 하나 있는데, 그가 어떻게 어떻게 해서... 학생들이 그걸 마이크로소프트케이스라고 읽고 토론한다면... 한마디로 한심한 것이다."

 

MS에 대한 내 글의 핵심주장이 무엇인가. 그것은 "Brian Arthur Paul David의 새로운 경제학 이론(increasing-return, path-dependency) MS를 독점이라고 고소한 사람들의 사고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Brian Arthur Paul David의 새로운 경제학은 기술 발전과 표준에 대한 새로운 역사학적 이해에 도움을 받았다는 것"이다. , 내 논문의 초점은 MS가 독점인가 아닌가를 규명하는 것이 아니라, MS를 독점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가를 밝히는 것이었다 ("이 글은 이런 복잡한 생각들의 관련과 이에 관여한 사람들의 이야기이다"(p. 382)).

 

첫번째 문제(MS가 독점인가 아닌가)양신규의 얘기대로 방대한 법률적, 경제학적 지식이 필요한 주제이다. 아마 이 문제를 다루는 경제학자라면 Brian Arthur의 주장과 이에 반대하는 Liebowita & Margolis의 주장의 타당성을 꼼꼼하게 살펴보고, 그 중 어떤 것이 더 타당한가에 대한 견해를 제시하는 것이 논문의 초점이 될 것이다. 그렇지만 내 글은 이런 문제에 대한 글이 아니다. "과학기술의 역사"를 연구하는 나의 초점은 "기술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새로운 경제학 이론의 형성에 어떻게 기여를 했고, 이런 경제학 이론이 MS와 같은 기업과 그들의 기술을 어떻게 새롭게(즉 독점으로) 보게 했는가"의 인과고리를 규명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규명을 위해서는 양신규가 얘기한 "어떤 변호사 하나"는 무척 중요한 사람이다. 그는 개리 레벡(Gary Reback)이라는 반-MS 소송 전담 변호사인데, 사실 그가 작성한 "백서"때문에 MS사가 Intuit을 합병하려한 시도가 법정에 의해 무산되었고, "백서"에 레벡은 Brian Arthur의 경제학 이론을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핵심적인 이론으로 인용, 이용하기 때문이다. "거대한" 경제이론이나 법제학사의 측면에서 보면, 이런 사건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하나의 에피소드에 지날 지 모르지만, MS 소송에 대한 내 글에서는 내 주장을 support하는 매우 중요한 evidence중 하나이다.

 

인문학 교육의 얘기로 다시 돌아가 보자. 신동아에 실린 인문학 위기에 대한 내 글을 좋은 선생에 의한 학생들의 훈련을 강조하고 있는데, 만약에 양신규 식으로 내 MS 소송에 대한 글을 학생에게 읽히면, "한마디로 한심한" 수업 밖에는 안된다는 얘기를 하고 싶다. 내가 text에서 하려했던 핵심은 파악 못하고, (자신의 생각으로 볼 때 더 중요한) 이러이러한 얘기를 안 했냐는 토론 밖에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인문학 위기" 글에서 주장한 얘기는 바로 이런 식으로 교육을 하면, 인문학 위기를 영원히 벗어나기 힘들다는 얘기였다. 이런 사고는 "인문학적으로 엄밀한" 사고도, 인문학적으로 바람직한 텍스트 읽기도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다음과 같은 비판은 의미가 있다. "당신의 주장은 이해한다, 그렇지만 당신은 왜 MS 소송과 관련해서 더 중요한 문제가 많은데도 불구하고 그런 문제를 놔둔채로 당신에게 관심이 있는 문제에만 매달렸는가?" 그렇지만 이런 비판에 대해서도 나는 할 말이 있다. 무엇보다 먼저, 나는 내 글이 결코 MS를 포함한 정보산업과 관련한 경제학이나 반독점 역사의 정치학에 대한 완벽한 설명을 제공해주는 글이라고 뻥튀긴 적이 없다. 나는 이 글이 아주 제한된 주제에 대한, 제한적인 효용성만을 지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하려했던 핵심 주장은 잘 support된 글이라고 생각했고, 지금도 그렇다 (뭐 이걸 대단한 논문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한번도 없다. 나는 MS소송에 대한 글을 포함해서 한글로 쓴 어떤 글이나 책도 영문 이력서에 포함시키지 않는다.)

 

그리고 한마디 더 하자면, 2-3주 황금같은 시간을 소비하면서 이런 글을 쓴 이유는, 너무도 중요한 MS 소송과 같은 주제에 대해 훨씬 더 잘 알만한 양신규 같은 경제학자들이 아무런 얘기도 안하고, 아무런 글도 안 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물안 개구리 남한지식인"만 나무라지 말고, 이런 문제들에 대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영역에서 좋은 글을 써주는 것이 실천이고 세상에 대한 기여가 아니겠는가.

 

 

 

 

 

 

 

 

 

By 양신규(skyang)

2000/05/10 (06:29:49) 

홍성욱 Mircorsoft: 컨텍스트오류와 지적나태

 

홍성욱 Microsoft Case 가 왜 잘못된 Contextualization 인가는 이미 본인도 인정한 셈이니까, 거기에 대해서는 오래 얘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자기 글의 약점이 있을 때 쉽게 인정하는 것은 소통을 위한 아주 훌륭한 덕목이다.

 

가볍게 정리하면 홍성욱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1) Microsoft Case 의 기술적-경제적-법률적 Contextualization 을 할 생각이 없었고

2) 조금 작은 문제 "기술에 대한 이해가 어떻게 경제학적 사고에 영향을 미치나, 그리고 그게 어떻게 법률적 사건과 관계가 되나"를 보고 싶었다는 것이다.

 

1) 에 대한 내 반론은 인문학 (이경우는 역사학이라 해두자) 이라는 것이 광대한 Text를 분석해서 제대로 Contextualization 하는 것이 그 엄밀성과 실용성의 출발이라면, 올바른 Contextualization 에서부터 문제를 시작해야 하는 것 아니냐? 하는 얘기다.

 

비유하면 무너질 것 같은 성수대교는 일단 안 무너지게 하고 봐야지, 예쁘게 색깔 칠한다고 될까? 이런 얘기였고, 홍성욱 reluctantly 인정한 셈이니까, 그냥 넘어가자. 담에 이런 문제를 쓰고 싶으면 제발 서치엔진 뒤지기 전에 전문 경제학자-법학자-기술자 등에게 물어보고 Contextualization 을 해내기 바란다. Contextualization 을 하는 것이 인문학자의 몫이라고 생각한다면 말이다.

 

* * *

 

2) 에 대해서는 내 앞 글에서 얘기하지 않았으니까 다시 얘기해야 겠다. 내가 홍성욱 Microsoft Case 를 보고 실망을 한 것은, 단순히 1) Contexualization 에서 실패했다는 것이 아니고, 그나마 작게 잡은 문제인 2) 기술과 경제학의 관계 문제에서는 더 크게 실패했다는 점이다.

 

이것을 지적하는 이유는 홍성욱의 소칼사건에 대한 잘못된 Contextualization, 그리고 프랑스 철학자들의 수학물리개념의 오남용 (쉽게말하면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체 하는 것) 에서 우리가 목격한 Intellectual Sloppiness 를 또 한 번 Demonstrate 하는 아주 좋은 사례이기 때문이다. (자꾸 친구 것만 사례로 잡아서 미안하지만, 난 솔직히 홍성욱 글에는 관심이 아주 많아도 들뢰즈 글에는 아무 관심이 없다.)

 

홍성욱은 이렇게 쓰고 있다.

 

홍성욱:

MS에 대한 내 글의 핵심주장이 무엇인가. 그것은 "Brian Arthur Paul David의 새로운 경제학 이론(increasing-return, path-dependency) MS를 독점이라고 고소한 사람들의 사고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Brian Arthur Paul David의 새로운 경제학은 기술 발전과 표준에 대한 새로운 역사학적 이해에 도움을 받았다는 것"이다. , 내 논문의 초점은 MS가 독점인가 아닌가를 규명하는 것이 아니라, MS를 독점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가를 밝히는 것이었다 ("이 글은 이런 복잡한 생각들의 관련과 이에 관여한 사람들의 이야기이다"(p. 382)).

 

첫번째 문제는 (항목2) 양신규의 얘기대로 방대한 법률적, 경제학적 지식이 필요한 주제이다. 아마 이 문제를 다루는 경제학자라면 Brian Arthur의 주장과 이에 반대하는 Liebowita & Margolis의 주장의 타당성을 꼼꼼하게 살펴보고, 그 중 어떤 것이 더 타당한가에 대한 견해를 제시하는 것이 논문의 초점이 될 것이다. 그렇지만 내 글은 이런 문제에 대한 글이 아니다. "과학기술의 역사"를 연구하는 나의 초점은 (항목 2) "기술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새로운 경제학 이론의 형성에 어떻게 기여를 했고, 이런 경제학 이론이 MS와 같은 기업과 그들의 기술을 어떻게 새롭게(즉 독점으로) 보게 했는가"의 인과고리를 규명하는 것이었다.

 

 

내 반론:

 

홍성욱의 글의 목적이자 내 반론의 항목 2) "기술과 경제학의 연관" 에 대한 나의 반론의 핵심은 홍성욱의 주장인 <<"기술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새로운 경제학 이론의 형성에 어떻게 기여를 했고, 이런 경제학 이론이 MS와 같은 기업과 그들의 기술을 어떻게 새롭게(즉 독점으로) 보게 했는가"의 인과고리>> 가 지성사적으로나 실제상황에서 근거가 매우 박약하고 심지어는 ridiculous 하다는 얘기다. 글쎄 관계가 있다면 물론 그리스의 원자가설하고 근대 과학의 원자 가설하고 등의 "상상력 수준"의 관계가 있을 지는 모르겠다.

 

Brian Arthur Paul David 는 물론 Respectale 한 학자다. 그러나 현대경제학의 Increasing Returns to Scale 로 인한 독점 경쟁의 문제나, Path Dependency 의 사고가 이 두 사람을 주축해서 만들어진 것도 사실이 아니고, 또 이 두 사람들을 중심으로하는 사람들의 생각 때문에 마이크로소프트의 기술이 독점으로 보인 것이 아니다.

 

1) 기술에 대한 새로운 이해에 기반한 새로운 경제학 이론이 형성되고

2) 이런 경제학 이론이 MS 와 같은 기업과 그들의 기술을 어떻게 새롭게 (독점으로) 보게 했는가의 인과고리

 

이 두 주장은 매우 근거가 매우 박약하고, 심지어는 터무니없는 얘기다. 비유하자면 1) 갑이 을을 미워한다고 한 말을 병이 들었다. 2) 을이 죽었다. 이 두 사실을 결합해서, 갑이 을을 죽였다 라고 판단하는 것과 같다.

 

이 문제에 대한 제대로된 Contextualization 은 다음과 같다.

 

우선 마이크로 소프트가 독점인가 아닌가, 어떤 반독점행위를 했는가 아닌가는 Path Dependency Increasing Return to Scale 의 문제와 터럭만큼도 관계가 없다. 뿐만아니라, Path Dependency Increasing Return to Scale 의 문제도 브라이언 아더와 폴 데이비드의 주도로 만들어진 생각도 아니다.

 

스탠다드 오일이나 J. P. Morgan 의 은행처럼 "특정마켓"에서 지배적 지위를 장악하고 그 지배적 지위를 이용해서 경쟁을 억압하거나 소비자를 해쳤는가만 보면 되는 일이다. 자연독점이 형성되는 첫 번째 원인이 increasing return to scale 혹은 economy of scale 인 것은 미시경제101 한 다섯 번째 시간쯤이면 나오는 얘기고, 아마 기원을 거슬러 올라간다면 아담스미스나 그 이전까지도 거슬러 올라갈 수 있었을 것이다.

 

여기에 홍성욱의 스타일과 데리다의 스타일 등 엄밀하지 못한 인문학적 글쓰기 습성의 평행을 본다. 논의전개와 아무 관계없는 Brian Arthur 경제 모델과 Paul David 의 경제사 연구를 아는체 늘어놓고, 오래된 얘기를 새 얘기인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것이다. 더 웃기는 것은 그렇게 아는 체 늘어놓은 경제학지식도 잘못된 것, 전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 연구에도 관련이 있지만, (기업의 무형자산에 이 독점적 지위가 들어가니까) 학생들에게 수업시간에 가르치려고 (기술-경제-법률의 종합적 사례로 아주 유용한 teaching material 이다), 좀 자료를 수집한 나도 전혀 기억도 못하는 그 누군지 변호사가 무슨 동기로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는가는 전혀 Relevant 한 얘기가 아니다. 그 변호사가 밀린다와 데이트하다가 빌게이츠에게 뺏겨서 성질나서 반독점 고소를 결심했다는 정도의 Relevance 는 있을지 모른다.

 

Brian Arthur 의 경제학에서의 공헌은 (물론 폴 크루그만에 의하면 아무런 공헌이 아니라고 하지만) Increasing Return to Scale 의 발생하는 "하나의" 수학적 조건에 대해 상당히 엄밀하게 (확률통계론을 하는 러시아 수학자와 공동으로) 증명해 낸 일이다. 나보고 Increasing Return to Scale 의 근원을 하루동안 찾아내라면 백 개, 일년 동안 찾아내라면 한 만 개는 주워 섬길 수 있을 것이다. Brian Arthur 는 이런 수학적 업적을 바탕으로 갑자기 Increasing Return to Scale 이 마치 자기의 발명인 것처럼 말하고 다니기 시작하고, 초기에 몇몇 풋내기 경제저널리스트들이 속았는데 (이 행위 때문에 브라이언 아더는 폴 크루그만한테 사기꾼이란 소릴 듣는다.) 홍성욱 1998 년 에 쓴 글에서 아직도 그런 잘못된 저널리스틱한 View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

 

폴 데이비드는 역사학자로 타자기에서 이런 현상을 재밌게 기술했다. 하지만 재밌는 것은 타자기가 브라이언 아더의 이론이 적용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전혀 독점이 형성되지 못한 사례의 하나다.

 

브라이언 아더나 폴 데이비스의 생각은 이 반독점케이스와 전혀 정말 터럭만큼도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다시 정리하면, 독점은 브라이언 아더의 모델과 관련없이도 얼마든지 생겨나는 일이며, 또 브라이언 아더의 모델대로라도 폴 데이비드의 타자기사례에서 보이듯이 전혀 독점으로 발전하지 않을 수도 있다. 다시말하면 브라이언 아더의 공헌과 독점문제는 이론적으로도 경험적으로도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다. 필자가 참여한 Microsfot 사례에 관련한 주요 Conference 를 포함 수많은 논문, 주장에서 필자는 Brian Arthur Paul David 의 주장을 한 번도 본 적도 없다.

 

Increasing Return to Scale 에 관한 얘기는 고전 경제학, 신고전경제학에 이미 있는 내용이고, 이 문제에 주목해서 현대경제학의 중요한 분야를 연 사람들은 폴 크루그만 (1978) 으로 이 기본 모델에 바탕을 두고 신무역이론이란 경제학 분야가 생겼으며 , 폴 로머 (1983, 박사학위논문) 의 기본 모델에 바탕을 두고 신경제성장이론 분야가 생겼다. 이 사람들이 무슨 "기술에 대한 새로운 이해"에 영향을 받아 새로운 경제이론을 만들었다는 생각도 별로 들지 않는다. 자세히 살펴보면, 이들 이론의 발전은 철저히 경제학 내적인 동인이었다는게 훨씬 더 설득력이 있다. 무슨 말이냐면, 리카아도의 노동가치설에 기반한 비교우위론의 예측하고는 다른 무역현상들을 설명하는 여러 경쟁이론 중에 폴 크루그만의 Increasing Return to Scale 에 기반한 불완전경쟁 모델이 받아들여진 것이고, Constant Return to Scale 의 예측과는 전혀 다른 현상을 설명하는 이론 중에 폴 로머의 지식의 특성에 기반한 Increasing Return to Scale 의 모델이 받아들여진 것이다. 물론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Increasing Return to Scale을 낳는 현상은 폴 크루그만이나 폴 로머의 정식화만이 아니라 수많은 다른 이유도 있다.

 

폴 로머의 증언은 최근 마이크로소프트 케이스의 정부측 주장을 서포트하는 서류로 첨부된다. 더구나 브라이언 아더의 생각과 비슷한 주장인데 조금 다른 훨씬 간단한 모델로 광범하고 치밀한 연구를 벌써 20 여년째 해오고 있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예를들어 버클리의 Carl Shapiro NYU Economides 같은 사람들이다. 역시 Carl Shapiro 의 증언은 연방정부 주장을 서포트하는 증언록에 포함 되어있다. 또 한사람의 이 문제에 대한 경제학자로 주목할 만한 사람으로는 MIT Rebecca Henderson 이다. Romer, Hesderson, Shapiro 이 세 사람이 이번 연방정부의 마이크로소프트 분할 증언에 포함된 단 세사람의 경제학자이고, 누가 봐도 타당한 인선이었던 것이다. Economides 는 필자와 같은 학교 동료지만, 분할에 반대하는 입장이다. 필자는 물론 찬성하는 입장이다.

 

* * *

 

홍성욱의 최근의 사건을 Contextualization 해보고 현재적 문제를 연구하고 그것을 교육하고 하고, 또 그것을 엄밀한 연구에 바탕을 해서 하자는 주장과 스스로 경주하는 노력에 존경과 격려를 보낸다.

 

나도 인문학자들이 정말 이런 일을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내 강의 시간에도 글 잘못쓰는 공학자나 경제학자들 논문만이 아니라, 글 잘 쓰는 인문학자들의 글도 많이 넣을 수 있었으면 나한테도 학생들한테도 도움이 많이 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인문학의 저술들이 그런 실용성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실용성이 없는 이유는 인문학이 무슨 고고한 문제를 연구해서가 아니라, Intellectually Sloppy 한 연구 결과를 내고, 그것을 어거지로 변호하고, 그 어거지 변호에 대해 주석이나 달고 그래왔기 때문이다.

 

내가 알고 있기로는 홍성욱이 한국인 인문학자로는 세계수준의 작업을 하고있는 몇 안되는 인문학자인데, Microsoft Case 같은 Sloppy 한 글들이나 남발해서야 그리 희망적이지 않을 것이니, 반성하고 좀 제대로 해보라는 것이다.

 

 

 

 

 

 

 

 

 

 

 

 

By 홍성욱(코멘)

2000/05/11 (00:24:27)

양신규 Microsoft: 비판에 대한 재 반박

 

양신규의 반론을 읽다보면 이 친구가 사람인지 사오정인지 잘 구별이 안 된다. 양신규가 달고 다니는 재미있는 수식어가 여럿 있는데 ("치졸천박 오독" "오만과 편견"...) 아마 소칼 방 사람들은 이제 왜 양신규가 이런 수식어를 달고 다니는 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으리라. 간단히 논점에 대해서만 반론을 하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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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욱 Microsoft Case가 잘못된 Contextualization인가는 본인도 인정한 셈이니까, 거기에 대해서는 오래 얘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자기 글의 약점이 있을 때 쉽게 인정하는 것은 소통을 위한 아주 훌륭한 덕목이다.

 

가볍게 정리하면 홍성욱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1)Microsoft Case의 기술적-경제적-법률적 Contextualization을 할생각이 없었고

2)조금 작은 문제 "기술에대한 이해가 어떻게 경제학적 사고에 영향을 미치나, 그리고 그게 어떻게 법률적 사건과 관계가 되나"를 보고 싶었다는 것이다.

 

1) 에 대한 내 반론은 인문학(이경우는 역사학이라 해두자)이라는 것이 광대한 Text를 분석해서 제대로 Contextualization하는 것이 그 엄밀성과 실용성의 출발이라면, 올바른Contextualization에서 문제를 시작해야 하는 것 아니냐? 하는 얘기다.

 

비유하면 무너질 것 같은 성수대교는 일단 안 무너지게 하고 봐야지, 예쁘게 색깔 칠한다고 될까? 이런 얘기였고, 홍성욱 reluctantly 인정한 셈이니까, 그냥 넘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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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반하장도 유분수다. 이제 내 원래 의도를 알았으면, 자신의 오독에 대한 사과라도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기야 얼마 전에 한국의 경제학자 L의 글을 읽다보니, 그도 양신규와 똑같은 얘기를 하더라. 사회과학자들 무식한 것이야 진작에 알고 있었는데 (문법적으로 맞는 문장을 쓰는 경우가 흔치 않다), 이 정도일 줄은 정말 몰랐다. 아무튼 나는 중요한 것을 배웠다. 내 글의 독자들 중에 양신규같은 사람도 있을 수 있고, 이들이 자신의 오독을 발판으로 금방 인문학이 비실용적이니 어쩌니 하는 식으로 나갈 수 있다는 것을.

 

, 서론은 그만 두고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자. 양신규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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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욱의 글의 목적이자 내 반론의 항목 2)"기술과 경제학의 연관"에 대한 나의 반론의 핵심은 홍성욱의 주장인 <<"기술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새로운 경제학 이론의 형성에 어떻게 기여를 했고, 이런 경제학 이론이 MS와 같은 기업과 그들의 기술을 어떻게 새롭게(즉 독점으로) 보게 했는가"의 인과고리>>가 지성사적으로나 실제상황에서 근거가 매우 박약하고 심지어는 ridiculous 하다는 얘기다. 글쎄 관계가 있다면 물론 그리스의 원자가설하고 근대 과학의

원자 가설하고 등의 "상상력 수준"의 관계가 있을 지는 모르겠다.

 

Brian Arthur Paul David는 물론 Respectale 한 학자다. 그러나 현대경제학의 Increasing Returns to Scale로 인한 독점의 문제나, Path Dependency의 사고가 이 두 사람을 주축해서 만들어진 것도 사실이 아니고, 또 이 두 사람들을 중심으로하는 사람들의 생각 때문에 마이크로소프트의 기술이 독점으로 보인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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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 첫번째 문단은 내 반론을 읽어가다 보면, 터무니없는 얘기임이 금방 드러날 것이다.

 

두번째 문단에서 양신규는 몇가지 경제학적 개념의 원천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생각의 근원을 따지는 일은 나같은 과학사학자에게는 일상적인 일이다. 한가지 주목할 사실은, 일단 어떤 idea가 유명해 지고 나면 그 idea를 낸 사람은 자신의 독창성을 강조하고, 그와 경쟁관계에 있는 사람들은 그 idea가 이미 오래 전부터 있었다는 식으로 그 독창성을 깍아 내린다는 사실이다. 학자들이란 사람이 기본적으로 credit of discovery를 먹고사는 사람이어서 그렇다.

 

Brian Arthur의 얘기는 조금 뒤에 하고, 일단 Paul David 얘기부터 하자. 분명한 역사적 사실(fact) "path-dependency라는 경제학 개념" Paul David 1983년에 회람시키고, 1985년에 American Economic Review에 출판한 "Clio and the Economics of QWERTY"에서 유래한다는 것이다. (이점에 대해 반론이 있으면 환영한다. path-dependency라는 단어가 오래 전부터 있었다는 식의 한심한 반론은 생각도 하지 말기 바란다.) 일단 양신규, 경제학의 인접분야인 경영학을 전공함에도 불구하고 (또 자신이 경제학에서도 약간은 전문가라고 생각함에도 불구하고), "사실"에서의 한심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 역사적 사실은, 과학적 사실과 마찬가지로, 눈 가리고 까꿍한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계속 나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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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탠다드 오일이나 J.P.Morgan의 은행처럼 "특정마켓"에서 지배적 지위를 장악하고 그 지배적 지위를 이용해서 경쟁을 억압하거나 소비자를 해쳤는가만 보면 되는 일이다. 자연독점이 형성되는 첫 번째 원인이 increasing return to scale 혹은 economy of scale인것은 미시경제101 다섯 번째 시간쯤이면 나오는 얘기고, 아마 기원을 거슬러 올라간다면 아담스미스나 그 이전까지도 거슬러 올라갈 수 있었을 것이다.

 

여기에 홍성욱의 스타일과 데리다의 스타일 등 엄밀하지 못한 인문학적 글쓰기 습성의 평행을 본다. 논의전개와 아무 관계없는 Brian Arthur 경제모델과 Paul David 의 경제사 연구를 아는체 늘어놓고, 오래된 얘기를 새 얘기인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것이다. 더 웃기는 것은 그렇게 아는 체 늘어놓은 경제학지식도 잘못된 것, 전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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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도 되면 양신규의 전공 지식의 수준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 Brian Arthur자신이 increasing return이 오래된 개념임을 강조하고 있지 않은가. Brian Arthur에게 새로운 것은 increasing return to scale positive feedback로 인한 inferior technology lock-in knowledge economy의 일반적인 현상이 되고 있다는 얘기 아닌가? 예전 사람들은 increasing-return to scale이 있지만, 그것은 temporal한 것이고, 이것이 주가 된 경제이론은 "wreckage of the greater part of economic theory"(Hicks, 1939)를 가져올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점이 차이 아닌가.

 

양신규가 떠 받드는 폴 크루그만의 얘기를 직접 들어보자. "나는 QWERTY식을 새로운 경제학의 조류라고 설명하였거니와, 실제로 이는 1980년대에 들어와서야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 뻔한 사실을 알게 되는데 왜 그리 오래 걸렸는가? 답하자면, 기본적으로는 20세기의 경제학자들이 세계의 QWERTY성을 무시하는 것이 편하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경제 이론이란 본질적으로 모형, 즉 현실의 단순화 된 표상의 집합이다. 한 측면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다른 측면을 배제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세계를 모형화하는 데는 체증적 보수가 중요하지 않고, 외부 경제가 존재하지 않으며, 시장 경제의 형태가 역사의 변덕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원에 의해 결정되는 그런 세계가 더 수월한 것이다." (Paul Krugman, Peddling Prosperity, p. 273)"

 

새로운 이론 가운데 어떤 것이 "진정으로" 새로운 것인가를 비판적으로 생각하는 태도는 물론 바람직하다. 그렇지만, 양신규 식으로, 그것도 정말 쥐꼬리 만한 지식을 바탕으로, 다른 사람들의 연구나 업적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하는 것은 "오만과 편견"이외에는 다름이 아니다. Krugman을 떠든다고 본인이 무식한 것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데리다에 대한 코멘트는 칭찬으로 접수하겠다. 갑자기 양신규가 데리다의 뭘 읽었는지 궁금하다. 내기하건데, 아마 단 한편의 글도 읽지 않았을 것이다. 대중을 위해 쓴 내 글도 이렇게 오독을 하는데, 데리다를 읽었다해도 뭘 이해할 수 있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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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연구에도 관련이 있지만, (기업의 무형자산에 독점적 지위가 들어가니까) 학생들에게 수업시간에 가르치려고 (기술-경제-법률의 종합적 사례로 아주 유용한 teaching material이다), 좀 자료를 수집한 나도 전혀 기억도 못하는 그 누군지 변호사가 무슨 동기로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는가는 전혀 Relevant 한 얘기가 아니다. 그 변호사가 밀린다와 데이트하다가 빌게이츠에게 뺏겨서 성질나서 반독점 고소를 결심했다는 정도의 Relevance 는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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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이 얘기를 왜 하는 지 모르겠다. Gary Reback이 직접 작성한 "백서"에서 Brian Arthur의 도움이 결정적이었다고 밝히고 있고, 그 백서가 법정에 제출되어 Microsoft Intuit를 합병하는 것이 독점이고 따라서 허가할 수 없다는 판결을 내리는 데 결정적인 증거가 되었고, 이 일 이후에 Reback Wired지에 의해 "빌 게이츠가 두려워 할 유일한 사람"으로 묘사되었다는 얘기를 했다. 이 중 어느 부분을 비판하는 것인지 분명히하고, 비판할 것이 없으면 입을 다물기 바란다. (여자 꼬시는 얘기는 왜 나오나? 뉴욕에 살면서 미인을 많이 보더니, 요즘 양신규 관심이 그쪽으로 가 있나보다. 하하.)

 

그리고 Reback의 백서는 인터넷에서 찾을 수 있다 ( 5분이면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백서의 첫 페이지에 "with assistance from Garth Saloner and W. Brian Arthur"라고 명시된 것도 볼 수 있을 것이고... Reback에 대해서는 Business Week에서의 interview (1997. 8. 22), Wired에서의 조금 긴 interview ("The Robin Hood of the Rich" Aug. 1997)을 참조하기 바란다. 그리고 전문가의 권위에만 너무 의존하지 말고, 서치 엔진도 좀 잘 사용하기 바란다. 인터넷은 기본적으로 수 많은 사람들의 brain을 엮어 놓은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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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an Arthur의 경제학에서의 공헌은 (물론 크루그만에 의하면 아무런 공헌이 아니라고 하지만) Increasing Return to Scale의 발생하는 하나의 수학적 조건에 대해 상당히 엄밀하게 (확률통계론을 하는 러시아 수학자와 공동으로) 증명해 낸 일이다. 나보고 Increasing Return to Scale 의 근원을 하루동안 찾아내라면 백 개, 일년 동안 찾아내라면 한 만 개는 주워 섬길 수 있을 것이다. Brian Arthur는 이런 수학적 업적을 바탕으로 Increasing Return to Scale

마치 자기의 발명인 것처럼 말하고 다니기 시작하고, 초기에 몇몇 풋내기 경제저널리스트들이 속았는데 (이 행위 때문에 브라이언 아더는 폴크루그만한테 사기꾼이란 소릴 듣는다.) 홍성욱 1998년에 쓴 글에서 아직도 그런 잘못된 저널리스틱한 View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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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단은 매우 중요한 문단이다. 양신규 생각의 source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크루그만은 1998년 1월 14 Slate Magazine(Microsoft에서 나오는 잡지다) Brian Arthur를 강하게 비판하는 (특히 New Yorker magazine에 의해 소개된) 글을 썼다. 그의 비판의 요지는 Arthur increasing-return 개념의 창시자(1979)라는 것("the story of how Stanford Professor Brian Arthur came up with the idea of increasing returns") "pure fiction" "great story"라는 것이다. 그가 내 놓은 한가지 증거는 국제 무역 이론에서 increasing return에 대한 오랜 전통이 존재하며, 특히 Victor Norman의 공저 Theory of International Trade (1980)의 한 챕터가 바로 이 increasing return에 할당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또 다른 증거는 Arthur의 수학 모델이 1970년대 게임 이론가인 Thomas Schelling의 모델과 비슷하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노벨상 수상자인 Kenneth Arrow의 반론이 있었다. 간단히 Arrow의 반론을 소개해 본다. "Further, Arthur has never made any such preposterous claim ... On the contrary, his papers have fully cited the history of the field and made references to the previous papers, including those of Paul Krugman ...The point that Arthur has emphasized and which is influential in the current debates about antitrust policy is the dynamic implication of increasing returns. It is the concept of path-dependence... Techniques of production may be locked in at an early stage."

 

크루그만은 자신이 "pissed off"(엿먹은 기분이)돼서 이 글을 썼다고 한다. 왜 그럴까? 이 이유를 알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 Krugman international trade에 대한 경제학적 이해로부터 increasing return개념이 출발했고, international trade에 대한 새로운 이해는 1978년 경 "전세계에 흩어져 있던 경제학자들 몇몇이 '국제 무역이 왜 있지'라는 순진한 질문을 하기 시작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하고 있다. , 흥미있는 사실은, 크루그만 자신이 바로 이 질문을 던진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내가 위에서 얘기했지만, increasing return을 둘러싼 Arthur Krugman의 논쟁은 credit of discovery를 놓고 벌어진 전형적인 논쟁이다.

 

그런데 양신규? 이런 것을 알고나 하는 얘기일까 (물론 어느 정도는 알고 있을 것이다)? 크루그만 '선생님'이 얘기하면, 다 옳은 얘기로 받아들이는 '식민지적 근성'의 발호는 아닐까? 나의 기우이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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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데이비드는 역사학자로 타자기에서 이런 현상을 재밌게 기술했다. 하지만 재밌는 것은 타자기가 브라이언 아더의 이론이 적용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전혀 독점이 형성되지 못한 사례의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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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분에서는 "지식"이 아니라, "지능"이 의심스러워진다. "타자기" 독점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qwerty라는 "키보드 자판" 독점을 얘기하는게 아닌가? 그냥 양신규가 실수했다고 쳐 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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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이언 아더나 폴 데이비스의 생각은 반독점케이스와 전혀 정말 터럭만큼도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다시 정리하면, 독점은 브라이언 아더의 모델과 관련없이도 얼마든지 생겨나는 일이며, 또 브라이언 아더의 모델대로라도 폴 데이비드의 타자기사례에서 보이듯이 전혀 독점으로

발전하지 않을 수도 있다. 다시말하면 브라이언 아더의 공헌과 독점문제는 이론적으로도 경험적으로도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다. 필자가 참여한 Microsfot 사례에 관련한 주요 Conference 를 포함 수많은 논문, 주장에서 필자는 Brian Arthur Paul David 의 주장을 한 번도 본 적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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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raising Microsoft and Its Global Strategy (Conference)

Washington, DC (November 13, 14, 1997)

Thursday, November 13, 1997

1) Introduction/Welcome (Ralph Nader)

2) "An Overview of the Microsoft Strategic Plan and How They Accomplish Their Goals" (Gary Reback)

3) "Microsoft and Increasing Returns" (Prof. W. Brian Arthur)

...

 

양신규가 컨퍼런스에 몇개나 참석했나? 사실 확인부터 좀 하고 얘기하면 고맙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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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로머의 증언은 최근 마이크로소프트 케이스의 정부측 주장을 서포트하는 서류로 첨부된다. 더구나 브라이언 아더의 생각과 비슷한 주장인데 조금 다른 훨씬 간단한 모델로 광범하고 치밀한 연구를 벌써 20 여년째 해오고 있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예를들어 버클리의 Carl Shapiro NYU Economides 같은 사람들이다. 역시 Carl Shapiro의 증언은 연방정부 주장을 서포트하는 증언록에 포함 되어있다. 또 한사람의 이 문제에 대한 경제학자로 주목할 만한

사람으로는 MIT Rebecca Henderson이다. Romer, Hesderson, Shapiro 세 사람이

이번 연방정부의 마이크로소프트 분할 증언에 포함된 단 세사람의 경제학자이고, 누가 봐도 타당한 인선이었던 것이다. Economides 는 필자와 같은 학교 동료지만, 분할에 반대하는 입장이다. 필자는 물론 찬성하는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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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재미있는 얘기가 나왔는데, 반독점국이 Arthur-David의 이론적 배경에서 Romer-Henderson-Shapiro로 넘어간데는 이유가 있다. 물론 이 얘기는 내가 글을 쓴 98년 초엽에 있었던 얘기가 아니라, 한참 뒤에 생긴 얘기이다. 내 기억에 의하면, 나는 98년 초엽 양신규에게 이런 shift가 생길 것이라고 예측까지 하고 그 얘기를 했던 것 같은데... 아무튼 이 얘기는 나중에라도 좀 더 해볼 필요가 있다. 그렇지만, 내 글에 대한 양신규의 반론과는 별 관계가 없다. 나는 점장이가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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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욱의 최근 사건을 Contextualization해보고 현재 문제를 연구하고 그것을 교육하고 하고, 또 그것을 엄밀한 연구에 바탕을 해서 하자는 주장과 스스로 경주하는 노력에 존경과 격려를 보낸다.

 

나도 인문학자들이 정말 이런 일을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내 강의 시간에도 글 잘못쓰는 공학자나 경제학자들 논문만이 아니라, 글 잘 쓰는 인문학자들의 글도 많이 넣을 수 있었으면 나한테도 학생들한테도 도움이 많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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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든 칭찬을 들으니 기분은 좋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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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문제는, 인문학의 저술들이 그런 실용성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실용성이 없는 이유는 인문학이 무슨 고고한 문제를 연구해서가 아니라, Intellectually Sloppy한 연구 결과를 내고, 그것을 어거지로 변호하고, 그 어거지 변호에 대해 주석이나 달고 그래왔기 때문이다.

 

내가 알고 있기로는 홍성욱이 한국인 인문학자로는 세계수준의 작업을 하고있는 몇 안되는 인문학자인데, Microsoft Case 같은 Sloppy 한 글들이나 남발해서야 그리 희망적이지 않을 것이니, 반성하고 좀 제대로 해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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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여기서 또 삼천포로 빠졌다. 양신규. sloppiness는 어쩌면 자네한테 있을지도 모르니까, 이런 얘기 하고 싶으면 거울이나 한번 들여다보고 하게나.

 

 

 

 

 

 

 

 

 

 

 

By 양신규(skyang)

2000/05/11 (04:06:03)

홍성욱교수의 지적나태, 변명, 변명의 주석; 중상모략

 

필자의 이전 글의 결론

 

"그런데 문제는, 인문학의 저술들이 그런 실용성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실용성이 없는 이유는 인문학이 무슨 고고한 문제를 연구해서가 아니라, Intellectually Sloppy 한 연구 결과를 내고, 그것을 어거지로 변호하고, 그 어거지 변호에 대해 주석이나 달고 그래왔기 때문이다."

 

홍성욱의교수의 반론은 내 글 결론 부분의 이 주장을 몸소 실천해 보이고 계시다. 독자들을 위해서 왜 그런가를 다시 한번 정리해 보자.

 

필자가 홍성욱 교수 글의 문제점을 지적한 것은 다음의 두 가지

 

1) 잘못된 Contextualization

2) 작게 잡은 기술과 경제학 연관에 대한 문제의 Intellectual Sloppiness

 

다시 말하지만, 1) 홍성욱이 원래 그걸 할 생각은 없었다니까, 그냥 넘어가기로 하자. 한가지 지적해 두고 싶은 것은 여전히, 인문학의 실용성이 홍성욱의 주장대로 Contextualization 에 있다면, Microsoft Case 와 같은 경우, 사람들의 생활과 향후 기술발달의 방향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문제를 다룰 때, 이 문제가 어떤 컨텍스트의 문제인지부터에서 어긋나는 것은 홍성욱이 몸소 주장한 인문학의 실용성의 첫 스텝에서의 일탈이다.

 

2) 에 대한 얘기를 다시 해보자. Krugman Brian Arthur 사이에 있었던 무슨 누가 먼저 뭘 발견했는지에 대한 얘기는 내 앞글에서 이 Microsoft 의 케이스와 아무 상관이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한 것 같은데, 못 알아들은 것 같으니까 다시 정리하기로 하자.

 

내 주장의 핵심은 Arthur Respectable 한 학문적 성취하고 반독점 케이스하고는 아무런 논리적 경험적 연관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비유하자면 밀린다 게이츠하고의 연애사건 이나, 혹은 바람이 불면 통장수가 돈을 번다는 식의 연관 처럼 인문학자의 상상속에서나 존재할 만한 연관은 있을 수도 있지만 말이다.

 

홍성욱은 전형적 논점흐리기 방식을 써서 마치 내가 Arthur David 의 업적을 폄하하기라도 한 것처럼 말했는데, 나는 전혀 그렇지 않았고, 폴 크루그만이 평가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Arthur의 업적을 평가한다. 스탠포드 경제학과에서 Paul David Ken Arrow 가 아카데미 밖에서 빌빌거리던 Arthur 를 채용한 것은 그 업적을 정당하게 평가한 일이라고도 생각한다. 물론 MIT 의 폴 크루그만이나 Stanford 경영대학의 Paul Romer 의 경우는 조금 생각을 달리할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내 주장은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Arthur 의 학문적 업적의 평가하고는 아무런 상관없이 반독점 케이스하고는 별 관련 없는 얘기라는 것이다.

 

필자의 이전 글에서 이미 다 이야기한 것 같지만, 전혀 이해를 못하는 것 같으니까 다시 얘기하는 것도 독자를 위해서 나쁜 일이 아닐 것이다. 우선 Brian Arthur Paul David 의 이론들이 왜 Microsfot 라는 독점문제의 컨텍스트에서 왜 아무 상관이 없는 얘기인가에 대해서 필자가 한 얘기를 다시 정리하자.

 

1) Paul David 의 타자기 사례는 분명 Positive Feedback 에 근거한 Arthur의 이론과 부합하는 Increasing Return to Scale (IRS) 의 사례이다.

2) 그런데 이 현상은 Anti Trust Case 의 근처에도 가 본적이 없다.

3) Microsoft Case Anti Trust Case 에서 가장 중요한 케이스이다.

 

그렇기 때문에 David Arthur 의 생각과 반독점 케이스는 별 상관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이 필자의 전 글의 주장이었다. 조금 더 다른 예로 보충을 해보자.

 

우선 Feeback 에 의한 IRS 사례지만 독점문제하고 아무런 관련이 없는 예들:

 

VHS/Beta 비디오 케이스, IBM computer/Apple Computer Case, 폴 크루그만이 항상 떠들고 다니는 Economics of Geography (왜 실리콘 밸리, 월스트리트 등에는 세계적 컴퓨터, 금융회사가 몰려있나) 이런 문제들은 전부 Feedback 에 의한 IRS 사례지만 독점문제하고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반대로, 똑같이 Feedback 에 의한 IRS 에 의해 생긴 독점사례지만, Arthur가 태어나기도 전에 발생 처리된 사례들:

 

또 반대로 Feedback 에 의한 IRS 에 의해서 생긴 독점 사례지만, Arthur 가 태어나기도 전에 혹은 경제학 공부하기도 전에 생긴 케이스들, 전기수도 등의 유틸리티회사, 철도회사, 금융회사, 그리고 전화회사 (AT&T), 컴퓨터 회사 (IBM) 등의 케이스는 독점문제였고, 반독점 당국에 의해 조사되거나, 가격통제가 되거나, 행동감시를 받거나, 심지어는 분할되거나 한 케이스들이다.

 

Arthur 의 이론이 태어나기도 전에 다루어졌던 수많은 Feedback 에 의해 생긴 독점재판 사례 중의 하나인 IBM 이나 AT&T 기술적 측면에서 보면 정확히 Microsoft 하고 같은 케이스의 경우인데, 그 때는 그 케이스를 "새롭게 이해 (즉 독점으로 본)" 사람들이 도대체 어떻게 독점으로 봤는지가 참으로 궁금한 일이다.

 

이런 예를 드는 것은, 논리적으로 간단하게 설명해도 못 알아들으니까 사례를 더 들어 보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Brian Arthur 의 이론과 독점 사례와는 필요조건도 충분조건도 아닌 다른 말로 아무런 관계가 없는 얘기라는 것이다. 뭐 논리-집합 다이어그램이라도 그려줘야 이해하는 지 모르겠지만 이 정도 해두면, 독자들은 Brian Arthur의 이론과 독점 케이스와는 아무런 논리적-경험적 연결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을 테니까 그만하자.

 

이런 경험적 증거에 대한 논리적사고 없이 무슨 변호사인가가 한 말 한마디를 가지고

<<"기술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새로운 경제학 이론의 형성에 어떻게 기여를 했고, 이런 경제학 이론이 MS와 같은 기업과 그들의 기술을 어떻게 새롭게(즉 독점으로) 보게 했는가"의 인과고리>> 를 보였다는 것은 인문학자들이 흔히 저지르는 한두사람의 말에 의존한 호들갑과 그 말의 논리적 타당성에는 관심이 없고, 남의 말을 갖다 옮기는고 붙이는 식으로 논증을 해나가는 스타일 상의 지적나태를 그대로 폭로하는 것이다. 더구나 그걸 논리적으로 지적한 나의 글에 또 변명을 달고, 또 그 변명에 주석을 달고 이런 전형적인 변명위주의 활동이야말로 인문학의 엄밀성과 실용성을 떨어뜨리는 일이다.

 

***

 

홍성욱은 다시 논점 흐리기로 돌아가서 마치 내가 Krugman 의 권위를 빌어 Brian Arthur 의 학문적 성취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한 걸로 몰아가고 싶은 모양인데, 이 문제는 아무런 논점하고 상관없는 얘기일 뿐 아니라, 나는 그렇게 말한 적이 없다. 홍성욱의 주장인 "기술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새로운 경제학 이론의 형성에 어떻게 기여를 했고, 이런 Brian Arthur 의 경제학 이론이 MS와 같은 기업과 그들의 기술을 어떻게 새롭게(즉 독점으로) 보게 했는가" 이 호들갑이라는 걸 보이기 위해서, Arthur 의 작업은 오랜 경제학 전통 속의 중요하지만 작은 하나의 성과였다는 것을 쓴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Microsoft 의 케이스 이전에도 비슷한 사례들이 독점으로 "보였고" 독점행위에 대한 제제를 당하고, 심지어는 분할까지 되어 온 것이다.

 

홍성욱의 호들갑을 보이기 위해, Arthur 의 학문적 성취는 비슷하지만 조금씩 다른 IRS 에 근거한 크루그만의 신무역이론 분야의 창설, 로머의 신경제성장론의 창설, 이런 현대경제학의 핵심적 성과에 비교해서 훨씬 작은 성취라는 이야기를 한 것이지 성과가 아니라는 얘기를 내가 한 것은 아니다. 가 아니란 말이다. 또 여기서 덧붙일 것은 Brian Arthur 보다는 훨씬 중요하고 현대경제학의 핵심적인 업적을 낸 크루그만이나 로머의 IRS 이론 역시, 다양한 IRS 원인의 한 두가지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을 밝혔다.

 

Krugman Arthur 사이의 Discovery Credit 경쟁에 대한 얘기도 또 외부관찰자의 호들갑이다.

 

경제학을 아는 사람들은 누구나, Krugman 이 무슨 일을 했고, Arthur 가 무슨 일을 했는지, 그게 어떻게 조금씩 다르고 같은지 다 안다. 물론 크루그만과 Arthur의 경제학에서의 Credential 의 차이는 아마 Arthur 양신규의 차이 정도 날 거라는 것도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

 

또 이미 내 이전 글에서 말한 바지만, Krugman Arthur 비판은 그의 업적이나 "논문"에 대한 비판이 아니고, 경제"저널리스트"들한테 Arthur 가 마치 전통 경제학에서는 토론되지 않은 내용을 자기가 새로 발견한 것처럼 (홍성욱의 취향에 맞게, 또 아직까지 홍성욱이 속고 있다는 것이 보이는 것처럼) 말한 사실에 국한되어 있다. Arrow Arthur 변호는 또 아카데미아 바깥에서 빌빌거리던 Arthur 를 채용한 담당학과의 가장 존경받는 경제학자로서 크루그만의 얘기를 마치 Arthur 논문이 쓰레기란 것처럼 오해하는 (홍성욱 같은 호들갑 관찰자들) 경우에 대한 방지로, 그의 "논문"에서는 성실하게 그 이전 사람들이 출전을 다 밝혔다고 말한 것이다.

 

홍성욱 교수는 이런 Context 에 전혀 무지하고 또 그 무지를 인정할 생각도 없으니까, 그 무지에 대해 지적을 당하면 계속 궁색한 변명이나 하고, 그 변명에 대해 서치엔진 뒤져서 주석이나 달고 하는 행위를 계속하는 셈인데, 선동적 글쓰기의 유혹에 빠지지 말고 좀 논리적으로 경험사실을 차분히 짜맞추어 엄밀하고 실용적 인문학자가 되어 가기를 바란다.

 

* *

 

홍성욱 교수가 또 마지막으로 쓴, 흔히 복면중상모략가들이 즐겨쓰듯이, 흔히 인문학자들의 쓰는 전형적인 크리덴셜 깍아내리기 작업은 다음과 같은 문장에서 또 볼 수 있다.

 

"폴 크루그만을 떠 받드는, . . . 크루그만이 한 얘기면, ... 식민지근성, ... 인접분야인 경영학을 전공하고 불구하고 (경제학에대해서도 약간은 전문가라고 생각함에도 불구하고)"

 

이런 중상모략에 대해서는 나도 대응을 해야겠다.

 

우선 폴 크루그만에 대해서는 내가 아주 보기 드문 훌륭한 학자이자 경제학에 엄청난 공헌을 했고 또한 아주 뛰어난 대중적 커뮤니케이터라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그가 한 말이면 ...무조건 받아들이는 ... 식민지 근성" 이란 홍성욱의 중상모략은 내 연구 업적이 당장 Refute 한다.

 

폴 크루그만은 최근 뉴욕타임즈 칼럼에서 Microchip 이 미 최근 생산성증가의 원인이라는 말을 하며 약간 개종의 태도를 보여주기 전에는 철저한 반 신경제론 쪽에 있었던 사람이다. 나는 폴 크루그만이 개종하기 전에 6년 전부터 아니 사실은 1983 년부터 정보기술혁명의 결과가 얼마나 생산성에 큰 영향을 미치는가를 확신한 사람이고, 내 박사학위 논문은 그것을 경제학적 엄밀성을 갖추어서 보이는 일을 한 것이다. 미연방은행장 Greespan 은 대략 1998 년부터 정보기술혁명의 생산성효과에 대한 얘기를 시작한다.

 

다음 나의 경영학/경제학 에 관한 운운에 대해 . . . 물론 나는 초기에 경영학계 내에서 내 페이퍼들을 발표했다. International Conference on Informatio Systems 97, 98 이 년에 걸쳐 각각 다른 논문을 발표했다. 그 다음에 당장, National Bureau of Economic Research 등에 발표하면서 경제학적 엄밀성을 높이는 작업을 한 결과, 박사학위논문을 이루는 페이퍼 세 개 중 두 개가 각각 American Economic Association (미경제학회) Econometric Society (계량경제학회) 2000 1월에 동시 발표되었다. 그 중 Econometric Society 에 발표한 논문은 미연방은행장 Greenspan 이 이미 99 8월에 인용하고, 9월에 월스트리트저널이 인용한 페이퍼이다.

 

내 연구 과정을 보면 내가 폴 크루그만의 한 얘기면 무조건 따르는 식민지 근성을 보인 것이 아니라, 전혀 반대로 폴 크루그만을 개종시키는 연구활동을 한 것이고, 물론 내 연구에 의해서만 그렇게 된 것은 당연히 아니겠지만, 6년 만에 개종시키는 데 성공했다.

 

식민지 근성이란 말이 폴 크루그만의 주장과 정면 반대되는 연구를 기획하고 그걸 성공시켜 그를 나하고 똑같은 말을 하는 쪽으로 개종시키는 불굴의 자세를 의미하는 거라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면 다른 논점에 대해서는 몰라도 이런 중상모략에 대해서는 적어도 공개사과를 해 줄 것으로 기대한다.

 

 

 

 

 

 

 

 

 

 

 

 

By 홍성욱(코멘)

2000/05/11 (06:49:32)

답변

 

"인문학의 위기"에서 다시 "마이크로소프트"로 빠져서 몇차례 논쟁을 거친 결과, 양신규 교수와 나와의 차이도 대략 규명이 된 것 같다.

 

내 주장은 다음과 같다. 1980년대부터 학계에서 회자되고, 1990년대에는 정치가를 비롯한 일반 사람들에게도 점차 알려지기 시작한 "increasing return" "path-dependency"라는 경제학의 개념들이 1990년대를 통해 반-MS 진영에 이론적인 영향을 미쳤고, 이것이 1997-98년 법무부의 반독점국이 MS를 합의각서 위반으로 법원에 고발하는 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양신규의 주장은 path-dependency increasing-return MS 독점 이슈와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반 독점국이 Arthur가 아니라 Romer를 증인으로 삼은 데서도 드러나고, 90년대 이전의 수 많은 반독점 소송도 이런 이론의 도움 없이 진행된 데서도 알 수 있다.

 

이렇게 정리하고 보면, 이 두 주장이 상반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왜 그럴까? 다음의 예를 들어보자: "1970년대를 통해 입자물리학이 군사무기와 산업에 큰 도움을 줄 것이라고 생각한 미국 정치가들은 대규모 입자 가속기를 세우는데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내가 이런 얘기를 하고 있다면, 양신규 "입자 물리학이 군사무기와는 무관하기 때문에, 이 주장은 잘못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

따라서 양신규가 예로 든 타자기의 사례는 정말 재미있는 evidence이다. 양신규는 다음과 같이 얘기하고 있다.

 

필자의 이전 글에서 이미 다 이야기한 것 같지만, 전혀 이해를 못하는 것 같으니까 다시 얘기하는 것도 독자를 위해서 나쁜 일이 아닐 것이다. 우선 Brian Arthur Paul David 의 이론들이 왜 Microsfot 라는 독점문제의 컨텍스트에서 왜 아무 상관이 없는 얘기인가에 대해서 필자가 한 얘기를 다시 정리하자.

 

1) Paul David 의 타자기 사례는 분명 Positive Feedback 에 근거한 Arthur의 이론과 부합하는 Increasing Return to Scale (IRS) 의 사례이다.

2) 그런데 이 현상은 Anti Trust Case 의 근처에도 가 본적이 없다.

3) Microsoft Case Anti Trust Case 에서 가장 중요한 케이스이다.

 

그렇기 때문에 David Arthur 의 생각과 반독점 케이스는 별 상관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그런데, 1997-8년 당시 마이크로소프트를 독점이라고 비판한 수 많은 글들을 살펴보면 (반독점국 국장인 조엘 클라인과의 인터뷰를 포함해서), QWERTY 타자기의 얘기는 항상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한다. 당시 MS에 대한 New York Times의 한 기사는 아예 타자기의 사진을 큼지막하게 싣고 있었다. (물론 양신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이것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알고 있다. 아마 이제는 양신규교수도 내가 뭘 말하려는 지 알수 있을 것이다).

 

양신규는 이러한 얘기가 경제학과 경제현상의 본질과는 무관한 것이라고 한다. 나는 이것이 실제로 당시에 일어난 것이었다고 했고, 이를 지지하는 증거를 내 글에서 여럿 제시했다.

 

1998년 초엽에 양신규와 얘기하면서, 다음과 같은 얘기를 한 생각이 난다. Brian Arthur Paul David increasing return economy path-dependency라는 이론은 양날의 칼이다. 이것은 마이크로소프트를 독점이라고 규정할 수도 있지만, MS의 독점이 지식경제하에서 natural monopoly에 불과하다고 (즉 독점이 아니라, 그냥 자연그러운 현상일 뿐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 얘기는 1999년에 그대로 맞아 떨어졌다. 반독점국은 Arthur의 이론과 결별하고, 그들의 생각에 의하면 "less radical" Shapiro Romer를 껴안았던 것이다. 이들은 MS "전통적인" 독점 행위를 자행했다고 (끼워팔기, 협박, leverage...) 입장을 바꾸었고, 흥미롭게도 이와 동시에 MS사가 Arthur식의 lock-in을 강조하면서 자신들이 독점이 아님을 주장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 과정은 1999-2000년에 이루어진 법정 증언들을 살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그리고 "식민지 근성" 운운한 부분에 대해 양신규 교수가 기분이 나빴으면 사과하겠다. , 다 알겠지만, 논쟁을 하다 보면 이렇게 맘에도 별로 없는 얘기가 양념처럼 튀어 나오는 경우가 있는데, 양신규 교수가 이런 중상모략에 대응을 안해도 나는 양신규 교수가 내가 그의 학문적인 성과를 무척 높이 사고,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사람들이 크루그만이나 브라이언 아더 얘기를 하듯이, 조만간 양신규의 이론과 개념에 대해서 얘기하는 날이 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벌써 시작되고 있지만). 그때가 되면 아마 양신규 교수는 자기의 이론이 다른 사람들에 의해 (특히 정책 결정가나 관료에 의해), 자기가 원하지 않은 방식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종종 있으며, academics politics 사이에는 상당한 갭이 있음을 발견할 지도 모른다.

 

 

 

 

 

 

 

 

By 양신규(skyang)

2000/05/11 (00:24:27)

아직 끝난 얘긴 아니지만. 일단.

 

1) 우선 독자들께:

 

소칼서평-상대주의-인문학의위기-마이크로소프트 케이스로 전개된 논쟁은 내 자신에게도 매우 유익한 논쟁이었다. 가장 유익한 점은 괜찮은 역사학자 하나가 어떻게 사고하는가를 내가 직접 볼 수 있는 기회도 되었고, 또 사회과학자와 역사학자가 어떻게 대화를 할 수 있을까에 대한 뭔가 중요한 통찰도 주었다.

 

홍성욱과 필자가 이 논쟁을 지겹게 계속했는가, 그게 소칼논쟁과 어떤 관련이 있나 이런 정리는 곧 올려서 좀 더 분명하게 이 논쟁에서 무엇을 건질 수 있나를 생각해 보겠다.

 

 

2) 다음 홍성욱 Contextualization 에 대해 내가 동의하는 점:

 

홍성욱이 윗 글에서 쓴 다음과 같은 얘기는 사실은 내가 많이 동의하는 얘기다. 그리고 이 년 전 쯤에 MIT Sloan School 의 로비에 둘이 앉아 한 다음과 같은 비슷한 얘기는 내 기억에도 분명히 있다.

 

"IRS Path-Dependency 는 양날의 칼이다. 독점형성을 설명하지만 반대로 자연독점을 주장할 수 있는 논거다"

 

내 기억으로는 내가 한 얘기지만, 둘이 같이 앉아서한 얘긴데 뭐 같이 크레딧이 있겠다. 하지만 홍성욱의 부정확한 기억에 의한 위의 정리는 아직도 반독점 케이스의 핵심에도 조금 또 벗어나 있다.

 

내가 한말은 내 기억으로는 "자연독점"을 주장할 수 있다는 게 아니고, 이 논리로 "독점이 소비자 이익을 가져온다" 라는 주장의 근거를 제시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자연 독점이건 뭐건 독점이고 그 독점적 지위를 이용해 반독점 행위를 하면 처벌할 수 있는 것이니까, "자연독점"이냐 "인위적 독점"이냐는 그 자체로는 반독점 케이스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얘기다.

 

그런데 이 Feedback 문제가 중요한, 조금 더 일반적이고 경제학 표준 용어를 쓴다면, 소비의 외부경제효과 (혹은 Network Effect) 가 있는 경우의 독점은 독점상태가 완전경쟁 상태보다 소비자에게 이익을 줄 수가 있다. 정확히 이 논리가 사실은 마이크로소프트사의 방어 논리가 되었다.

 

정말 재밌는 얘기. 필자 학교의 동료교수로 이 Network Economy 에 대한 세계적 권위인 Nicholas Economides 는 정확히 이 논리로 마이크로소프트의 독점을 그대로 유지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참고로 Economides 는 마이크로소프트와 아무 관계가 없다. MIT 경영대학원의 학장인 역시 산업조직론의 거장인 슈말렌지가 마이크로소프트 방어팀의 팀장이다. ) 더더 재밌는 얘기. 폴 크루그만은 Economides 가 이 분야를 오랫동안 제대로 연구해 온 학자이기 때문 그 주장을 믿고 자기는 anti-anti Microsoft 다시말해 미법무부의 반독점국을 반대한다고 주장한다. 두 번이나 이 주장을 뉴욕타임즈 칼럼에 실었다.

 

하하, 더더더 재밌는 얘기, 폴 크루그만은 역시 MIT 경영대학의 Rebecca Henderson 의 기술적 문제에 정통한 논리적 설득에 넘어가서, 이제는 "쪼개려면 확실히 쪼개던지 (두개가 아니라 네개로), 아니면 그대로 두라" 라는 양비론으로 후퇴했다. 다시 한번 작은 얘기지만, 여기서도 필자는 폴 크루만과 일관되게 반대입장에 있었고 폴크루그만은 드디어 우리 진영의 논리에는 완전 승복했고, 정치적으로도 반이상 개종했다는 것을 지적해 둔다. 딴 문제는 몰라도 나는 내 연구와 관련된 입장에서는 중요한 두가지 문제에서 폴 크루그만과 반대입장에 있었고, 두 번다 이겼다. :-). 경제학도 물리학과 마찬가지로 권위가 아니라 사실과 논리에 의해서 발전한다는 직접 경험을 한 것이다.

 

(정직하게: 이 문제에서 내 공헌은 생산성 문제하곤 비교가 안되게 작다. 컨퍼런스참가해서 별 관계없는 논문발표하나 했고, Economides 가 소비자이익을 주장할 때, 그말도 맞지만 독점을 깨면 더 소비자이익이 커진다는 얘기를 기술적내용을 들어서 반론 한마디 한 것 밖에 없다.)

 

다시 홍성욱에게 말하고 싶은 교훈은, 이 토론의 과정은 정확히 "경제학 내적인" "논리와 사실" 의 대결에 의해 논의가 전개되고 결론이 나고 있다.

 

물론 홍성욱의 얘기대로, 이 논리와 사실로는 완벽하게 끝난 얘기인 "마이크로소프트는 쪼개야 한다"는 결론은 아직 연방 어필 코트와 최고법원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다. 논리적 결론과 법률적 결론 그리고 정치적 결론은 다를 수가 있다.

 

3) 논쟁때의 격론과 잘못의 사과

 

내가 첨 홍성욱 글을 "반쯤 표절(?)" 이란 공격을 했다가 잘못했다고 깨닫고 곧 사과를 했다. 표절의 정의하고는 전혀 다른 얘기기 때문에 내가 반쯤이란 수식어를 달긴 했지만 잘못된 것이어서 사과를 했고 홍성욱이 흔쾌히 넘어갔다.

 

이번에 식민지 근성 어쩌구 한 말을 사과한 것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홍성욱말대로 그가 항상 "양신규는 식민지 근성 지식인이다" 이렇게 생각하는게 아니고, 논쟁하다 신경질 나면 잠깐 그런 생각이 들고 그 잠깐 그런 생각이 표출된거라고 생각되는 거고, 나도 비슷한 경우가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교훈: 실명 톤쟁을 하면 논쟁이 격해지고 깊숙한 공격이나 암수를 쓰더라도 이렇게 나중에 교정할 수가 있고, 악감정이 훨씬 덜해지고, 재수좋으면 더 친해질 수도 있다. 홍성욱과는 대학 2 년 때부터 맨날 티격태격이지만 아직도 친구다.

 

복면의 중상모략가들이여 건설적 논쟁에 끼고 싶으면 하루 빨리 복면을 벗어라.

 

4) 마지막: 논쟁 끝난 거 절대 아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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