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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새로운 기독교 입장에서 모색해보는 사후 세계와 영혼 개념 (3)    
  글쓴이 : 정강길 날 짜 : 09-08-23 08:12 조회(2576)
   트랙백 주소 : http://freeview.org/bbs/tb.php/b001/384 




 
(*약간 긴 글이지만 꼼꼼히 읽어보시면 알겠지만, 나름대로 도움되는 유익한 내용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가능하면 차분하게 그리고 물론 비판적으로 읽어주시면 더욱 감사하겠습니다..ㅡㅡ; )
 
 
 
- 새로운 기독교 입장에서 모색해보는 사후 세계와 영혼 개념 (1) 
 
- 새로운 기독교 입장에서 모색해보는 사후 세계와 영혼 개념 (2)
http://freeview.org/bbs/tb.php/b001/377 
 
 
 
새로운 기독교에서 모색해보는 사후 세계와 영혼 개념 (3)
 
 

각 종교들의 입장에 따른 영혼론

자, 이제 우리는 지금까지 각 종교들의 영혼 이해를 다시 한 번 정리해볼 필요가 있다.

1) 영혼단멸론 : 한 번 살고 죽으면 그 뿐이다 (유물론, 무신론, 소수의 진보 기독교 등등)
2) 영혼불멸론 : 한 번 죽어도 영혼은 불멸한다 (기독교[심판], 불교와 힌두교[윤회])
3) 영혼수명론 : 죽은 뒤에 어느 정도까지는 존재하다가 흩어진다 (유교의 사대봉사)

사실 기독교와 불교는 죽은 이후에도 여전히 영혼의 동일성(identity)을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둘은 공통된다. 하지만 윤회를 벗어나 해탈을 하게 될 경우엔 무아(無我)로 들게 되는 것이니 더 이상 영혼의 동일성을 말할 수 없으리라 본다. 앞서 말했듯, 불교의 경우에는 윤회설과 무아설 간의 오랜 논쟁으로 인해 그 입장이 양자에 걸쳐 있어 다소 애매한 점도 없잖아 있다. 그래서인지 간혹 1번의 입장을 취하는 불교인도 있다.

주지하다시피 새로운 기독교의 해석학적 틀은 <현실적 관계론>의 관점을 따르며, 그러한 관점에서 취할 수 있는 영혼에 대한 정의는 언뜻 1번 단멸론의 입장에 가깝다고 볼 수 있겠다. 왜냐하면 영혼이란 것이 있다고 해도 실제적 삶은 <지금 여기>Here and Now에서 이뤄지고 있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실제적인 생물학적 삶과 관련되지 않는 영혼의 존재 근거란 분명하게 불가능하다고 보는 것이다. 
 
이때 인간의 자아는 내가 나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으며 나의 생각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생각까지도 생각할 수 있는 호모 사피엔스만의 특징을 지닌다. 실험에 따르면 침팬지도 자아를 지니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낮은 차원이라고 보고 있으며, 인간처럼 생각을 생각할 줄 아는 특성은 아직 발견되진 못하고 있다고 얘기한다. 즉, 인간의 사고 기능은 사고 자체를 사고할 줄도 아는 것이다. 그럼으로서 '나'를 '나'로서 사고할 줄 아는 것이다. 그 같은 자기동일적 성격이 결국엔 '영혼'이란 개념으로 이어진다고 본다.
 
영혼이란 자기동일성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자기동일성 역시 그때까지의 생물학적 특성에 기반되어 있다. 아무리 고차원적인 현실 존재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이전까지의 자연적 생물학적 환경의 특성에 제약을 받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바위 같은 무기물까지 모두 포함하여 모든 현실 존재들의 특성은 기본적으로 변화의 과정에 놓여 있다는 것이며, 그것은 존재의 원자적 특성에 해당하는 생성ㆍ소멸의 법칙(불교식으로 말하면 찰나생ㆍ찰나멸의 법칙)을 겪는다는 것이다.

그러한 매순간의 찰나들은 결코 동일하지 않다. 이 같은 존재론적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동일성도 차이의 연속성에 기반해서 나올 따름이라는 얘기다. 즉, 존재의 본질은 동일성이 아닌 차이에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영혼이란 것이 존재한다고 할 경우에도 그리고 그것이 사후 세계의 영혼 존재라고 하더라도 기본적으로는 매순간 생성의 알갱이가 빚어내는 차이의 연속성에 기반해서 가능할 따름이라는 것이다.

새로운 차원의 모색 : <영혼>에서 <몸얼>로

하지만 나는 1번 단멸론이 아니라 이제부터는 오히려 좀더 다른 차원의 영혼 가능성을 얘기하고자 한다. 물론 실제적인 우리네 현실 삶의 중요성을 간과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나는 기존에 말하는 영혼이라는 것이 결국은 우리의 몸삶의 중추적인 정신 기능을 담당하고 있는 <몸얼>을 의미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그 같은 몸얼은 신체적인 죽음 이후에도 가능하다고 본다. 이제 이에 대해서 알아보자.

우리네 현실의 삶을 고찰해볼 경우, 바위 같은 무기물의 존재를 충분히 목격하지만, 앞서 말한 마음이나 의식의 차원 역시 제대로 볼 수 있거나 만질 수 있는 시각적 형태의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그 누구라도 마음 혹은 의식의 차원들을 인정하고 있는 실정이다. 즉, 그 이전까지의 활동에 기반하면서도 새롭게 활동가능한 정신적 차원에 가까운 존재 역시 가능하다는 얘기다.

떼이야르 샤르뎅이나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 혹은 좀더 최신의 현대 철학 사상에 따르면, 세계 안에 모든 현실 존재들은 100%의 물리적인 존재도 없으며 100%의 정신적인 존재도 없다. 모든 현실 존재들은 기본적으로 물리적 성격과 정신적 특성을 함께 지닌다(심지어 신(God) 조차도 그러한데 이에 대해서는 언젠가 따로 언급할 날이 올 것이라 본다). 어쨌든 무기물과 유기물의 차이나 식물, 동물, 인간으로 올라가는 진화의 과정은 물리적 특성에서 좀더 복잡한 정신적 특성들을 확보해나가는 과정이긴 하지만 그것은 금을 긋듯 분명하게 구분되는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정도의 차이>로서 확보되는 지배적 특성일 뿐이다.

그런데 그 차이는 무기물과 유기물의 차이를 보면 다소 애매한 점도 없잖아 있지만 무기물과 인간의 차이를 보면 매우 두드러진다. 진화의 순서를 따라 무기물-유기물-식물-동물-인간으로 올라갈수록 그 정신 작용은 더욱 강력해지고 그 동일성의 강도(intensity) 역시 더욱 커진다는 사실이다. 즉, 고등한 존재로 진화될수록 나를 나로서 인식하는 자각 능력이 더욱 강력하게 창발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자각 능력은 자기 몸에 명령을 내리기도 할 뿐만 아니라 그 어떤 것을 상상하기도 하는 몸의 중추 센터에서 비롯되고 있다. 나는 이를 <몸얼>이라고 부를 것이다. 그것은 순우리말 그대로 몸에 자리하고 있는 정신의 줏대인 것이다. 몸얼은 우리 몸에서 <결단>decision이 일어나는 영역이다. 이때 말하는 결단이란 <다양한 가능성들> 가운데서 <단 한 가지 가능성>을 선택하는 것을 의미한다.

상위 단계의 몸얼로 올라갈수록 정신성의 강도 역시 비례

이러한 몸얼의 기능에 따라 우리의 몸삶은 다양한 지평의 현실 삶으로 나타나는데, 세계 안에 펼쳐지는 다양한 몸삶의 행태에 따라 크게는 9 단계의 수준으로 인간의 몸얼을 나누어 볼 수 있다고 하겠다.
 
 
 
지금 여기서 이 같은 몸얼의 9단계에 대해 하나하나 자세하게 풀어놓진 않겠다(이미 이에 대해선 세기연의 <몸학> 강좌 시간에 풀어놓은 바 있긴 하다. http://freeview.org/bbs/tb.php/a001/490 참조). 나 자신이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중요한 점은 몸얼이 9단계로 나아갈수록 앞서 무기물-유기물-식물-동물-인간 등등 고등한 존재로 진화될수록 정신성이 더욱 복잡해지고 정신성의 강도(intensity) 역시 더욱 강력해진다고 말했듯이, 인간의 몸얼 역시 상위 단계로 나아갈수록 그 역시 마찬가지가 된다는 사실이다.

몸에 있어 정신의 줏대가 되는 몸얼이 상위 레벨로 올라갈수록 정신성의 강도가 더욱 강력해진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생물학적 죽음 이후에도 남아있을 수 있는 가능성마저 확보하기 때문이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의학적으로 말하는 죽음에 따르면, 그것은 심장과 맥박 및 뇌의 모든 기능의 정지를 말한다. 그럴 경우 관건은 그것이 정말로 생물학적 뇌를 넘어선 몸얼로서의 정신적 존재가 가능한 것인지에 대해서다.

나는 사후 세계의 삶이 다른 방식으로 가능할 수 있다고 본다. 적어도 의학적인 죽음은 존재의 끝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의학적인 죽음은 물리적 신체라는 개인 차원의 소멸일 뿐이며, 이때 몸얼의 소멸까지 가려면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본다. 오히려 몸얼은 궁극적으로 신에게로 포섭되기에 그럴 경우 서로 교통하는 차원이 되는지라, 이를 소멸이라고 딱히 말하기도 힘들 수 있다.

최신의 뇌과학 연구에 따르면 뇌 안의 신경세포속 미세소관이 원자보다 더 작은 양자레벨로 들어가면 결국 정보와 패턴으로 나타나는 데 이것은 인간의 복잡한 의식을 불러일으키는 의식의 전조를 형성한다고 말한다. 그럴 경우 뇌 기능이 멈추면 미세소관의 작용 대사 활동도 멈추는데 이때 정보는 새어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양자 레벨>quantum level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정보는 파괴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것은 우주로 그냥 흘러나가는데 없어지거나 퍼지지 않고 <양자 얽힘>(quantum entanglement)이라고 불리는 또 다른 현상에 따라 결합되며, 그에 따라 신체 외부에 잠깐이나마 의식이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도 언급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새로운 이론적 가능성은 세계 안에 무수하게 일어나고 있는 <임사체험>(죽음 체험을 말하며 '근사경험'이라고도 불림)이라는 사례들도 잘 뒷받침해주고 있다고 하겠다. 나는 몸얼의 레벨에 따라 그 강도가 훨씬 깊이 있게 나타난다고 보는 것이다.

무엇보다 위의 몸얼 단계에서 6-7단계로 넘어가는 초개인(trancepersonal) 단계로 이르면 우리의 몸얼은 개인을 넘어서 개인과 집단의 구분조차도 애매해지는 네트워크화된 몸얼이라는 <얼누리>로 돌입하게 된다(어떤 학자는 이를 <글로벌 브레인>이라는 집단 정신으로서도 설명하고 있다). 궁극적으로 상위 차원으로 나아갈수록 그러한 몸얼은 세계와 합일되면서도 결국에는 <신의 몸>을 구성하게 된다고 보고 있다. 말 그대로 하나님과 나와 하나가 되는 몸얼인 것이다(요한 10장30절, 이에 대해서는 http://freeview.org/bbs/tb.php/b001/251 참조).

새로운 기독교에서 말하는 <천국>이란?

내가 볼 때 사후 세계 이후의 천국이란 신의 몸에 참여하는 정도를 의미한다고 여겨진다. 그것은 “너가 내 안에 내가 너 안에 거하는” 차원인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차원의 몸얼이 가능하려면 그리스도인으로서는 이 땅에 하나님나라 운동을 일으켰던 예수의 몸얼이 우리 몸삶의 교본이 된다고 해야할 것이다. <그리스도>란 곧 예수의 몸얼이라고 하겠다. 예수의 몸삶이 갖는 몸얼이야말로 그리스도인들이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최고 단계의 몸얼인 것이다.

내가 말하는 천국은 휘황찬란한 황금성 같은 곳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늘날에도 그런 상상을 실재로 여긴다는 것은 정서적인 미숙자가 겪는 유아적인 환상에 불과하다. 만약에 물리적인 차원의 천국을 기대하고자 한다면 모든 사람들의 몸얼이 그리스도의 단계에 이르면 가능할 것이리라고 본다. 이를 테면 각 몸얼의 발달 단계에 따른 집단 사회의 정신 및 집단 사회 시스템의 레벨들은 다음과 같다.
 
 
 
따라서 내가 말하는 사후 세계의 천국도 어디까지나 현실 세계에 기반되어진 사후 세계의 천국일 따름이지 현실과 별개로 운영되는 죽은 뒤의 황금 세상이 아닌 것이다. 그러한 사후 세계의 천국이 있다고하더라도 그것은 현실 세계와의 관련성으로 인해 지금 여기 현실의 지평에도 이미 내재해 있는 것이기도 하다. 어쩌면 천국은 사나죽으나 항상 아름다운 현재적 순간 그 자체일 수도 있다. 우리의 천국은 오로지 신과 나와 이웃 모두가 상생할 수 있는 God-I-Others satisfaction으로 이끄는 사랑 안에 참여할 때만이 가능한 것이리라. 그렇다면 지옥은?
 
새로운 기독교에서 말하는 <지옥>이란?

나는 휘황찬란한 황금성 같은 천국 묘사가 미숙한 유아적 환상에 불과하다고 보듯이 영원형벌을 받는 불못 같은 지옥 역시 실재가 아닌 미숙한 유아적 환상에 불과하다고 본다. 만일 하나님이 전지전능하고 자비하다면 그 같은 지옥 개념과는 분명하게 모순된다고 본다. 어떻게 단 한 번의 삶(그것도 평균 70년 정도)으로서 적어도 다시는 기회를 주지 않을 수 있는 천년만년이 넘는 무한한 시간이 흐르는 영원 형벌에 처넣을 수 있단 말인가? 이 역시 종교의 진화에서 나타날 수 있는 미숙하고도 조잡한 환상에 불과한 것이다.

 오늘날 많은 이들은 보상과 처벌로서의 신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에 비하면 새로운 유신론은 좀더 진화한 무신론 이후에도 가능할 수 있는 자연주의적 유신론에 해당하며 본인은 그러한 신 이해를 따른다. 이에 대해선 http://freeview.org/bbs/tb.php/b001/21 참조). 혹자는 이를 변명하기 위해서인지 하나님께서 지옥문을 풀려고 해도 지옥문은 안으로 잠겨있다고 말하는데, 이는 여간해서 반성할 줄 모르는 인간의 완악함을 강조한 얘기일 뿐이지 이를 문자 그대로 믿는다는 것은 내가 보기엔 너무나 어처구니 없는 넌센스밖에 안된다.
 
 
▲ 전통적 이미지인 영원불못의 지옥이란 사실적 실재가 아닌 신화적 표현일 뿐이다. 단지 그 의미만큼은 중요하다고 본다.
 
 
<지옥>이란 결국 고통이 자리하고 있는 모든 영역을 신화적 정서로서 표현한 것뿐이다. 실재적인 지옥 자체는 현세와 내세를 가를 수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영원불변의 지옥 개념보다는 (대신에 한시적인 지옥 개념으로서 신 앞에 불려갔다가 얼마간 끔찍한 벌을 받고서 다시 돌아올 수 있다면 몰라도) 고통과 기회의 현세에 포커스를 맞추려는 새로운 차원의 윤회설이 좀더 타당성이 있다고 본다. 윤회설은 이미 초기 기독교에도 있었다고 하잖은가.
 
알고 보면 윤회는 <끊임없는 고통과 기회>라는 두 가지 측면을 함께 지니고 있다(참조글 http://freeview.org/bbs/tb.php/f001/741 참조). 만일 지옥이 있다면 고통 받는 작금의 현실이 매우 끔찍한 지옥일 수 있다. 그런데 이때 내가 말하고자 하는 윤회설은 기존의 윤회설과 다소 다른 측면이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윤회설이라고 부른 것인데, 그렇다면 이것은 도대체 기존의 윤회설과 무엇이 다르다는 것인가?
 
<업>을 강조하는 기존 윤회설의 폐단
 
나 자신이 제안하고 있는 윤회설은 기존의 <업보설>業報說을 담고 있는 윤회 개념이 아니다. 만약에 누군가 잔혹한 나쁜 짓을 했을 경우 그 지점에서조차도 궁극적으로는 타자원인성과 자기원인성을 같이 살펴야 한다. 왜냐하면 모든 존재는 기본적으로 타자원인성과 자기원인성을 함께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모든 현실 존재들의 기본적인 특성이다.

그런데도 기존의 대부분의 윤회설은 오로지 자기원인성만 탓하고 있는 실정인데, 그 같은 자기원인적 책임만 묻고 있는 장치가 바로 <업>(카르마Karma)이라는 개념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윤회 개념은 결코 자기원인적 책임만을 물을 수 없고 오히려 보다 총체적으로 물어야 한다. 궁극적인 존재론적 차원의 책임성에선, 같은 인간이 인간의 잘못에 대해 책임을 묻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본다. 아마도 그런 점에서도 우리들에게는 신이라는 존재가 필요한 것일 지도 모른다. 우리 인간은 인간 어느 누구의 잘못에 대해서도 결코 돌을 던질 수 있는 자격이 사실상 본질적으로는 없다.
 
즉, 인간이 인간을 심판한다는 것은 결코 존재론적 정당성을 가질 수 없다는 얘기다. 그렇기때문에 전쟁을 일으킬 때도 신의 이름을 빌리거나 하는 가당찮은 명분이라도 내세워서 다들 피의 전쟁을 정당화하려고 하잖은가. 물론 직접적으로 고통받는 피해자만큼은 심판할 권한이 있고 돌을 던질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럴 경우에라도 사실상의 정당성 역시 궁극적으로는 신에게 있다. 단지 피해자의 심판이 때때로 정당하다고 생각되어지는 이유는 신의 시선이 우선적으로는 고통받는 자들의 아픔과 시선 속에 함께 내재해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세상 만사 모든 일들을 직접적으로 신이 나서서 초자연적인 개입을 해주는 것 역시 아니다. 정당성을 지닐 수 있는 궁극적 근거는 신에게 있되 신은 이를 깨달은 자의 참여(주로 사랑으로서 치유하는 일)에 맡겨놓고 있는 것이다. 바로 그래서 우리들은 <오류>와 <비극> 앞에서만큼은 끊임없이 반성하고 좀더 나은 차원으로 개선해야만 한다. 그것이 바로 우리들이 그나마 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인 것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신은 결코 초자연적인 존재가 아니라 자연적인 존재다. 신은 항상 우리 모두와 더불어 함께 나아가는 동반자적인 존재다.

업보설의 폐단은 오늘날까지도 힌두교나 카스트 제도의 폐해에서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불가촉 천민들은 자신의 지금 고통들이 전생의 업보로 인해 그렇게 된 것이기에 그 같은 차별적 폐단도 묵묵히 체념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믿고 있다. 하지만 이들의 종교적 신념은 분명하게 무언가 잘못되어 있다. 실은 그 반대다. 윤회를 하게 된 것은 모든 고통의 극복이라는 해탈의 삶을 여전히 살지 않아서다.

그렇기에 그들이 그렇게 태어난 것은 오히려 모든 고통에 대한 극복이 여전히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태어난 것뿐이다. 그들 자신의 죄값 때문만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세에서 받는 지금의 고통 역시 철저히 극복하라는 과제로서 주어져 있는 것이지 고통에 대해 체념하라고 주어져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자신의 현재 고통이 카스트 같은 불의한 체제에서 비롯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때문에 받고 있는 고통에 대한 체념과 불의한 체제에 대한 순응이야말로 오히려 분명한 죄가 될 수 있다.

진실로 말한다면 그들의 현재적 고통은 전생의 업보의 결과라기보다 불의한 현재 체제에서 비롯되는 타자적 원인과 함께 그 자신의 체념과 순응이라는 현재적 업보의 결과인 것이다. 깨어 있는 자각인이라면 우리는 영원불변의 지옥설이 갖는 폐단과 마찬가지로 이 같은 윤회설이 갖는 폐단까지도 직시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과거에 발목 잡혀 있는 윤회설이 아니라 좀더 생산적인 미래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윤회설을 얘기하고 싶다.

몇 가지 덧붙일 내용들

하지만 만일 윤회를 할 경우 그 영혼은 결코 자기동일적 실체가 아니라는 점도 덧붙일 필요가 있다. 영혼의 자기동일성은 어디까지나 기억에 의한 ‘나’일 따름이다. 이를 테면 자아 개념이 발생되기 전에 해당하는 거울 단계 이전의 존재는 나인가? 아닌가? 그때의 영혼은 있다고 할 수 있는가?  없는가? 분명하게 말하지만, 생물학적 진화 시스템의 기반 없이 의식이나 영혼은 결코 산출될 수가 없음을 명백하게 말해두고자 한다.

결국 영혼이 '나'를 '나'라고 인식하는 그 같은 자기동일성은 어디까지나 기억에 의한 나인 것이다. 물론 그것은 정보가 보존될 경우 기억의 연속성을 가질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똑같은 존재라고는 보질 않는다. 신체가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때로는 신체가 다른 사람의 몸얼에 지배당할 수도 있다. 자신의 몸얼이 낮은 단계에 있는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의 몸얼이 자기 안에 침투하기란 더욱 용이하다. 세계 안의 <빙의 현상>도 그러한 점에서 설명될 수 있다고 하겠다.

개인의 빙의 현상은 주로 한 많은 가족사에서 비롯된 점이 없잖아 있어왔지만 보다 집단적인 빙의 현상은 대체로 집단적인 광기로 드러나서 매우 위험천만한 것이라고 하겠다. 역사적으로 보면 특히 종교가 그러한 배후 조종자로서 세계 안에 종종 피의 전쟁을 일으키는 악령의 실체가 되곤 했었다. 만일 그것이 악령에 의해 지배된 종교가 아니라 진실로 건강한 종교라면 그것은 상위 차원의 건강한 몸얼로서 세계 안에 침투하여 현실 세계를 보다 건강하고 이롭게 해주는 열매들을 맺었을 것이리라. 

이를 테면 예수사건이나 전태일의 몸얼이 남은 자들의 육체에 침투하여 새롭게 덧입고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혹자는 이를 <부활사건>이라고도 하잖은가. 그리고 기억은 백퍼센트 사실 그대로를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굴절되거나 왜곡 또는 조작될 수 있다는 사실 역시 현대 학문의 정설로서 통용되고 있다.

또한 혹자는 죽음을 겪는 <임사체험>을 하면서(앞서 말했듯이 임사체험 자체의 가능성은 긍정하지만) 유체이탈을 경험했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한편으로 의학이나 뇌과학에서도 종종 연구되고 있는 약물이나 환상사지(phantom limb) 경험일 수도 있다는 점도 덧붙이고자 한다. 약물의 경우 케타민(ketamine, 반감기가 짧은 환각제이며, 인격을 해리시키는 마취약)이라는 약물의 경험이 임사체험 경험과 동일하다는 연구보고 역시 있다(Karl L.R. Jansen).

<환상사지의 경험>은 예를 들어 팔다리가 없는데도 우리의 뇌가 팔다리가 마치 있는 것처럼 실제로 그렇게 느끼고 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없는 팔다리에서조차 팔다리의 통증도 느낀다는 사실이다. 그럴 경우 자신의 몸이 붕 뜬 채로 자신이 신체가 그냥 투명하게 사물을 통과해버리는 경험들은 실제적으로 환상사지의 경험에서도 마찬가지로 가능하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우리의 뇌가 사실과 환상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한다는 것이 현대의 최신 과학에서 분명하게 밝혀진 사실이라는 점이다. 그렇기에 누군가 신기한 유체이탈을 경험했다고 해서 이를 직접적으로 믿을 필요는 거의 없다고 본다. 그러한 유체이탈의 경험은 솔직히 나 자신에게도 있지만 이것이 결코 객관적으로 일반화될 수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객관적이라고 주장하는 일이야말로 더욱 위험천만스런 것이다.

주관적 차원의 경험만 따지면, 사람들은 자신이 슈퍼맨이 되기도 하며, 유에프오를 타고 외계 별나라에도 다녀왔다고도 말한다. 그것이 그 한 사람한테만 진실이라면 따져 본들 무엇하랴. 하지만 그것을 객관적 사실로서 여러 사람들에게 주장할 경우 모순과 충돌을 일으키는 것이다. 축지법을 쓴다는 허경영이나 외계인과 소통한다는 빵상 아줌마의 주장들은 단순한 호기심어린 재미가 아니라면 유아적 환상을 갈망하는 자들에게나 대환영받을 뿐이지,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몸얼을 미개한 수준으로 떨어뜨리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그리고 세계 안의 억울한 죽음들은 그 몸얼(혹은 영혼)이 일단은 신에게로 포섭된다고 본다. 궁극적으로 말하는 영혼의 소멸이란, 영혼이라는 현실 존재가 신 안으로 포섭되는 것을 의미한다. 신은 <우선성의 원리>에 의하여 세계 안의 모든 고통들 및 억울한 죽음들 가운데 더욱 강력하게 역사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우선성의 원리란 세계 안의 고통과 부조리가 강하면 강할수록 그곳에는 신의 역사 역시 더욱 강하게 도사리고 있다는 원리다. 신은 세계 안의 모든 삶의 고통과 밑바닥에 우선적으로 함께 하고 계신 분이시다. 예수가 아흔아홉 마리 양보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보다 우선적으로 사랑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던 것이다.

나오며 : 새로운 기독교가 모색해보는 사후세계와 영혼설은 현재적 최선의 입장일 뿐

내가 말하는 새로운 기독교의 입장이 취하는 영혼설은 사실상 기존의 단멸론, 불멸론, 수명론을 어느 정도 종합화한 느낌도 없잖아 있다. 적어도 1차적으로는 현실적인 몸삶에 기반한다는 측면에서는 영혼단멸론의 색조가 있고, 죽음 이후에도 어느 정도 가능한 몸얼을 얘기한다는 측면에서 영혼수명론의 색조가 있으며, 그러한 몸얼이 상위 단계에 이를 경우 신과의 영원한 교통에 참여한다는 측면에서 영혼불멸론의 색조가 있다.

이 같은 입장이 행여 절충적 종합으로 보일진 모르나 적어도 지금까지의 학문적 성과에서 모순과 충돌 없이 가능할 수 있는 최대한의 차원을 살펴본 것이라 나름대로 일관된 맥락에서의 통합적 입장임을 인지하길 바란다. 나는 1차적인 현실 세계의 삶에 기반하면서 동시에 좀더 가능할 수 있는 사후 세계와 건강한 영혼 개념에 대해서도 모색해보는 것이 좀더 낫다고 보고 있다.

건강한 합리적 지성인이라면 가능하면 <방법적 회의주의>에 기반하는 것이 좋다고 본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기존의 일반적인 회의주의자들과 똑같을 필요는 없다. 그러한 방법적 회의주의에 기반하는 가운데 가능한의 모색들을 따져보는 것이 나로선 좀더 유용할 수 있다고 본다. 그렇기에 나 자신의 입장은 방법적 회의주의를 쓰는 가운데 <불가지>로 남겨놓은 영역에서만큼은 가능하면 불가지로 남겨놓지 않고 지금 현세를 보다 더 나은 세상으로 변혁할 수 있도록 하는 가능한의 현실적 유용성을 가지고서 다시금 상상적 재구성을 해보고자 하는, 방법적 회의주의를 지닌 <현실 변혁주의자>일 따름이다.

즉, 방법적 회의주의에서 확연하게 충돌나는 반합리적인 요소들에 대해선 분명하게 이를 거부하되, 그러한 가운데 하나의 결론으로 모아지기 힘든, 어느 것인지 더 이상 알 수 없는 다중적 결론으로 내려지는 불가지의 영역들에서는 지금의 현재 세상을 이롭게 하는 가능한의 현실적 유용성을 반추해보는 것이 훨씬 더 낫다고 본다. 쉽게 말해서 어차피 이러나저러나 같은 값일 경우 이왕이면 다홍치마라는 말도 있듯이, 더 나은 현실 변혁을 위한 쪽을 택하겠다는 것이다.

물론 이 같은 나의 현재 입장도 먼 훗날에 불가지로 남겨놓은 영역들에서 새로운 학설과 발견이 이뤄질 경우 얼마든지 수정되거나 때에 따라선 폐기될 수도 있는 <열려 있는 입장>임을 분명하게 해두고자 한다. 열린 개방성조차 없는 신념이나 학설은 오히려 더욱 위험스러운 독단으로 흐를 수 있다. 단지 현재로서 가능할 수 있는 최선의 신념과 학설을 도모하고자 할 따름이다. 따라서 새로운 기독교가 취하고 있는 사후 세계와 새로운 영혼설에 대한 입장은 어디까지나 지금 현실 세계를 보다 더 나은 하나님나라 세상으로 변혁시키기 위함에 놓여 있다.

그렇기에 새로운 기독교가 취할 수 있는 사후 세계와 영혼설의 입장 역시 어디까지나 그러한 과정상에서 모색할 수 있는 진리임을 분명하게 인지하길 바란다. 비록 이것이 영원히 확고부동한 불변의 진리는 못된다고 할지라도 지금 현재에선 가능할 수 있는 최선의 진리일 수는 있다고 본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언제나 원하는 것은 항상 최선이지 결코 절대적 완결이 아닌 것이다. 
 
정강길 / 세기연 연구실장 
 
 
 
숫돌 (13-10-20 20:31)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예전에 읽고 이번에 우연히 다시 읽게 되었는데, 한가지 질문이 떠오르네요.
"신은 <우선성의 원리>에 의하여 세계 안의 모든 고통들 및 억울한 죽음들 가운데 더욱 강력하게 역사하고 계시기 때문이다."라고 하셨는데,
세계 안의 모든 고통과 부조리 속에서 신이 어떤 방식으로 강력하게 역사하고 계시는지 궁금합니다. 사실 실제 처참한 고통의 현실 속에서는 Gio의 G는 없고 I와 O만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G의 역할이 뭘까요..

    
미선 (13-10-22 02:18)
 
답변이 좀 늦어져 죄송합니다. 연일 정신 없었네요.
매우 중요하고 소중하며 고마운 질문을 해주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미 이에 대한 답변은 <기독교 대전환>책의 새로운 유신론 칩터에서 답변을 드린 바도 있긴 한데, 여기선 그냥 간단히 말씀드리면, 우선 몸학에서도 백두철학의 유신론 구도를 이어받아 G는 새로운 가능성들에 대한 제공자이기도 합니다. 이때 고통과 비극이 크면 클스록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가능성 역시 함께 잠재하게 된다는 점이 있습니다. <문명은 수난에 의해 진보한다>는 격언도 있다지만, 여튼 현실을 치유하고자 하는, 현실 극복을 위한 부정적 열망으로 우리 안에 드러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새로운 가능성들은 우리 앞에 놓여진 각각의 선택지에 해당합니다. 이때 나와 타자 모두를 살리는 최선의 새로운 그 선택이야말로 신의 뜻이자 신의 길에 해당한다는 것입니다. 

좀 더 상세한 답변을 보시려면 아래의 글을 참조하시면 되겠습니다.
http://freeview.org/bbs/tb.php/b001/22
(*이 글에서 '고난의 동반자로서의 하나님' 단락부터 아래로 쭉 읽어보시면 될 듯 합니다..)

이미 읽어보셨을 것 같기도 한데, 그럼에도 여전히 애매해지는 궁금증이 있다면 계속 더 질문을 해주시기를 바라겠습니다.

        
숫돌 (13-10-22 08:08)
 
그러게 말입니다. <기독교 대전환>도 이미 읽어봤고 링크해주신 글도 예전에 감탄, 동의하며 읽었었는데(링크해 주신 글은 다시 읽어봐도 명문이더군요), 위의 질문이 떠오른 이유는 아무래도 고통스러운 삶의 현재/현장에서 하나님을 느끼기가 어렵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을 느끼고 모두를 살리는 선택을 하도록 옆에서 격려하고 추동하는 하나님의 노력을 실감하는 일이 제게 아직도 어려운가봅니다. 역사를 보면 고통스러운 상황을 이겨내고 평화와 상생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었던 힘이 단지 I나 O에게서만 비롯된 것으로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말이지요.

멀리 있는 하나님을 보는 것은 쉬워도 가까이 있는 하나님을 느끼기는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성서에도 보면 멀리 창세기의 하나님은 힘 있고 강력한 하나님으로 묘사되지만, 연대기 순으로 거의 구약의 마지막 책인 에스더에서는 하나님이 아예 나타나지도 않으니까요.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을 느끼고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지요.  매순간 하나님과 일치되는 삶. 그리스도의 단계는 확실히 높은 단계인 것 같습니다.

사실 지금은 사회의 부조리 속에서 고통 받던 사람들과 함께했던 현장에서 떨어져 나와서 좀 편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때를 돌이켜보면 정말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할 수 없었던 일들이 많이 있었지요. 다시 그 현장으로, 하나님이 피흘리고 계신 그곳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용기가 없네요.. <우선성의 원리>, 동의합니다. 우리도, 저도 그렇게 살아야겠지요.

감사합니다. 평안을 빕니다.

            
미선 (13-10-22 11:01)
 
아.. 체감적 느낌을 얘기하신 것 같군요.
그 부분은 몸수행 곧 몸얼발달에 비례한다고 봅니다.
어차피 몸의 G층은 다른 4가지 몸의 관계층(M-W-L-B)이 모두 포함된 발달이기에..

그런데 쓰신 글에서 느껴지는 점 하나는, 예전에 참 많이 고생하신 시간이 있으신데 지금은 다시 준비를 위해 어느 정도 <재충천>의 시간도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현재로선 용기가 없다면 이를 채워넣는 시간이 당연히 필요할 수도 있으니까요. 문제가 되는 건 앞으로도 계속 편한(?) 상태 안에서만 머물고 있는 그런 경우일테죠..잠시 재충전하시는 동안 길게 인생의 플랜을 새롭게 세워보시는 것도 필요한 일입니다.

체감적 느낌의 습득은 GIO명상의 습관적 반복적 수행을 해보시길 권합니다.
물론 다른 좋은 방법들도 많이 있을 걸로 봅니다. 묵상이든 아니면...

저로선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참 좋겠습니다. 늘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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