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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내가 지금 믿고 있는 것은 과연 진리인가    
  글쓴이 : 정강길 날 짜 : 07-04-27 05:51 조회(4040)
   트랙백 주소 : http://freeview.org/bbs/tb.php/b001/108 




내가 지금 믿고 있는 것은 과연 진리인가
 
 
내가 믿어온 것이 뒤흔들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 그 사례들 
 
[사례 1]
아주 오래 전 내가 다니던 모교회에서 나는 매주 발행되는 청년지 기획부원으로 활동했다. 장로교 통합측인데 매우 보수적인 성향을 띤, 출석교인이 1천 명 정도 다니는 작지 않은 교회였다. 이에 비해 -지금 생각해도 놀라운 사건이지만- 당시 매주 발간되던 청년지는 새로운 사상들로 꽤나 진보적인 기독교 색채를 띠면서 발행되었다.
 
그때 당시 교회 안에서 신앙이 매우 좋다고 알려진 형제 한 분이 자신이 지금까지 믿어왔던 예수에 대한 이해와 다르다며 그 청년지의 내용에 대해 별로 못마땅해 하였다. 그래서 나는 그 형제에게 성서개론 책과 역사적 예수에 대한 서적 하나를 빌려주려 했다. 그런데 이 분은 읽기 싫다며 한사코 거절을 했다. 이유는 새로운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사례 2]
내가 아는 선배 한 분도 처음 신앙은 매우 보수적이었는데, 우연히 기독교 서점에서 안병무의 <역사와 해석>(대한기독교서회)이라는 책을 사 읽게 되었다. 그런데 앞의 몇 장 정도만 읽다가 더 이상 읽을 수가 없을 만큼 두려워서 책을 그만 덮어버리고 한동안 구석에 처박아 두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시간이 조금 흐른 뒤 다시 찬찬히 들여다보면서 자신의 신앙이 조금씩 바뀌고 좀더 넓어지게 되었다고 고백하였다.
 
[사례 3]
이후에도 나는 보수적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이전과 다른 새로운 사상을 접하거나 진보적 서적을 읽는 것에 대해 매우 두려워하는 모습을 종종 목격하고는 했다. 실은 나 자신도 그런 적이 있다. 원래 나 자신은 매우 단순한 신앙을 가졌던 사람이었다. 그냥 무조건 믿고, 무조건 기도와 찬양을 하고, 무조건 전도하면 그리고 이것을 죽을 때까지 하면 그뿐이라고 생각했던 '완전울트라캡숑짱' 꼴통보수 신앙인이었다.
 
그런 내게 성서란 그 자체로 모든 글자가 전부 신의 계시로 된 것이며, 진화론은 사탄의 이론일 뿐 노아홍수를 사실로 보는 창조론이 전적으로 옳고, 타종교와 전통 문화는 결국 우상숭배 문화일 뿐이기에 교회를 다니지 않는 비신자들을 보면, 저들은 죽어서 지옥으로 떨어질 불쌍한 영혼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쳤다. 나는 그때까지 나 자신이 믿고 있고 지켜왔던 신앙을 더욱 굳건히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날 소위 말하는 민중신학을 접하게 되었는데, 나한테는 참으로 매우 불경스럽고도 퍽이나 두려운 사상서로 보였다. 그래서 우습게도 나는 민중신학 책보다 <민중신학 비판서>부터 먼저 접하고 읽어보았다. 그런데 여기서 더 웃기는 사태가 발생했다. 당시 내가 읽었던 민중신학 비판 서적들이 오히려 나 자신이 봐도 제대로 된 비판서가 아니었던 것이다.
 
비판을 하려면 정당하게 논리적이어야 하는데, 그것은 내가 봐도 매우 부당하고 구멍 뚫린 얘기들을 해댄 것이었다. 결국 나는 한편으로는 매우 두려우면서도 정면으로 한번 부딪혀봐야겠다는 생각으로 민중신학에 대한 여러 신앙 서적을 직접 부딪혀가며 읽게 되었다. 나 자신은 14년 전의 민중신학이 참으로 고마웠던 궁극적 이유는, 민중신학의 내용 때문이 아니라 내게 부단히 진리를 추구하는 방법을 터득하게 해준 중요 계기를 마련해줬기 때문이다. 
 
진리를 추구하는 방법
 
이 글을 쓰면서 한 가지 오해할까봐 말하지만, 나는 지금 여기서 무슨무슨 신학이 무슨 신학보다 더 낫다고 말하기 위해서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말해두고자 한다. 내가 지금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자신이 그동안 진리라고 믿고 있는 바가 흔들려 버리는 것에 대한 그 <새로움에 대한 두려움>과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진리 추구의 방법론>을 거론하기 위해서다.
 
따라서 무슨 특정한 신학의 우월성 얘기는 이 글의 주 논제도 아니며 그런 건 독자들이 필자의 개인적 경험으로 치부해도 이 글에선 별 상관없다고 하겠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중요한 문제는, 자신이 철썩 같이 믿고 있는 바가 흔들리게 되는 그 혼란의 느낌이란 실로 매우 감당하기 힘들 만큼 어마어마하게 다가온다는 것과 관련한다.
 
만일 나의 실존적 뿌리까지 맞닿아 있는, 즉 지금까지 그것만을 위해 살아왔고 그것만이 내 삶을 지탱해주는 나의 전부라고 여겼던 그것이, 어느 날 어떤 새로운 정보를 접하게 되면서 이제는 흔들리게 되고, 공격받게 되는 상황을 한번 생각해 보라. 그것은 참으로 무섭고도 두려운 것이다.
 
나 자신이 진리라고 생각했던 게 알고 보니 제 각각이고, 성경적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실제론 이쪽에선 A를 성경적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이와 달리 저쪽에선 B를 성경적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참으로 제각각이기에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 아닐 수 없다고 하겠다.
 
인간의 언어와 모든 경험은 '해석'의 산물
 
우리는 유동하는 세계의 흐름에 놓여 있다. 그렇기에 사람의 앎이란 것은 실로 변하게 마련일 것이다. 만일 내가 믿고 있는 것이 매우 완벽한 진리라고 한다면 실로 여기에는 통찰의 느낌이 사라지는 것이며, 그러한 사람은 더 이상 성장할 수도 없는 노릇일 것이다. 인간은 결코 완벽한 존재가 못된다.
 
나는 이 점에서 일단은 아무리 확실한 진리를 깨쳤다고 말하는 사람조차도 기본적으로는 자신이 믿고 있는 바조차 상대주의 입장에서 출발해 주기를 바라는 바다. 즉, 자신이 가져왔던 그 입장도 여러 입장 중의 하나라는 사실을 제발 인정하면서 더 큰 논의로 나갔으면 한다는 얘기다. 굳이 담론을 말한 푸코나 포스트모던 사상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자신 또한 틀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을 때, 실제로 이것은 자기 자신을 하나님과 동격으로 보는 우를 범하는 것이 될 것이다.
 
모든 언명들은 기본적으로 하나 이상의 권력담론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정직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즉, 권력적이지 않은 정보란 기본적으로 결코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기독교 교리뿐만 아니라 자기가 진리라고 믿고 있는 것들 모두가 그러하다. 우리의 논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출발되어야 하는 것이다. 학문의 진리탐구란 바로 이러한 권력담론이 설득적 합리성을 성취하는 과정이다.
 
철학이나 과학에서도 진리를 찾는다. 하지만 철학이나 과학은 언제나 특정의 시대, 특정의 상황, 특정의 집단 혹은 정서, 특정의 경험, 증거의 협소성 같은 그러한 요인들로 인해 진리를 수립한다는 것이 매우 힘든 작업임을 엿볼 수 있다. 뉴턴의 고전물리학은 한때 근대인들의 사유에 불변의 진리라고 여기게 할 만큼 이들 뇌리에 엄청난 확신을 심어주었지만, 이것이 현대에 들어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과 양자물리학에 의해 새롭게 뒤바뀌게 되자 사람들은 처음에 잘 이해하질 못했고 쉽게 받아들이려 하질 않았다.
 
현대물리학에서 발견된 것 중 한 가지가 있다. 우리는 자신이 경험한 것만큼은 매우 확실하고 분명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물에 대한 우리의 경험은 놀랍게도 관찰자의 의식과 독립적으로 별개로 작동되는 것이 아니라 같이 맞물려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그 어떤 사건에 대한 경험 혹은 존재론적으로 들어가면 우리의 언어까지도 사실상 이것은 이미 그 자체로 일종의 해석이지 독립적 실재(reality)가 아니란 사실이다. 같은 컵을 하나 놓고 보더라도 제각각 보는 사람에 따라서 달리 보이고, 달리 느껴지며, 달리 경험된다.
 
자신이 믿는 바를 끊임없이 검증하고 모험하라
 
우리는 여기서 딜레마를 하나 발견하게 된다. 만일 그렇다면 결국 우리들은 진리를 발견할 수도 없는 상대주의 세계관에 빠질 수밖에 없잖은가, 라는 것이다. 모든 것이 각각의 해석의 산물일 뿐인데 우리가 어떻게 진리를 취할 수 있느냐, 라는 항변이 나올 수 있다. 나는 바로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자신이 지금 믿는 바를 끊임없이 검증하며, 실험해 보기를 권한다.
 
그럼으로써 깨어지지 않고 더욱 단단해지게 되는 것을 취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 철학자들이 쓰는 회의주의적 방법과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진리에 대한 신념을 가진다는 측면에서 완전한 회의주의는 못된다. 적어도 신앙인이라면 이러한 사유의 검증과 모험 훈련이 되어 있어야 할 것으로 본다. 요컨대 변화하고 유동하는 세계에서 진리는 결국 설명력의 확보 유무에서 판정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것이 진정한 옳고 타당한 합리적 명제라고 한다면, 그것은 분명하게 이 땅에 열매로도 이어지는 유익함을 가져다준다고 본다. 물론 단기간일 경우 분파를 초래할 수도 있겠지만 궁극적으로 길게 봐서 하는 얘기다. 우리가 흔히 ‘인류의 고전’이라고 부르는 명저들 가운데 바로 이러한 성질이 장구한 세월을 거치면서 예증되고 축척되어 있는 것이다.
 
믿는 바가 진리라고 확신한다면 무엇이 두려운가
 
만일 당신이 현재 믿는 것이 정말 진리라고 한다면, 사실상 그 어떤 새로움에도 겁낼 이유가 무엇이 있겠는가. 진리는 아무리 비판하고 깨트리고 부숴도 그것은 여전히 변함없는 진리잖은가. 그렇다면 우리는 새로움에 대해 두려워할 이유가 전혀 없다. 만약 우리가 유일한 불변의 진리를 굳이 하나 상정한다고 한다면, 바로 진리에 대한 이러한 신념이라고 하겠다.
 
행여 진리에 대한 이같은 신념마저도 없다고 할 경우에는 그야말로 우리에겐 그 어떤 희망조차 가질 수 없을 것이다. 모든 것이 죄다 해석의 산물일 뿐이고 진리에 대한 신념도 없다고 한다면, 우리는 그 어떤 것을 서로 논한다 해도 결국은 저마다 모놀로그의 합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따라서 내가 믿는 바를 곧바로 진리라고 생각하기보다 그 어떤 진리가 있다고 한다면 이를 아무리 비판하고 공격해도 그것은 여전히 깨어지지 않는 진리일 것임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으면 한다는 얘기다. 부디 진리에 대한 신념만큼은 잃지 않길 바란다.
 
합리성은 사실상 인간이 곧바로 취할 수 있는 그러한 것이 아니다. 어떤 면에서 사실상 궁극적 합리성은 신(神)의 속성에 해당하지, 인간은 오히려 그 반대로 반합리성을 취할 경우가 더 많다고 하겠다. 인류의 역사를 보면 잘 알잖은가. 단지 아주 간헐적으로 합리성을 취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인간이 이성적 존재라는 말은 틀린 표현이다. 인간은 솔직히 아주 간헐적으로만 이성적 일뿐이며, 단지 이성적으로 행해야 할 책임이 있을 따름이다.
 
오류와 비극에 민감하라! 이는 하나님의 가르침을 알 수 있는 성장의 기회
 
합리성은 인간의 속성이 아닌 하나님의 것에 속한다. 자, 그럴 경우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떻게 그 자신의 합리성을 계시해 주는가. 바로 오류(error)와 비극(tragedy)을 통해서다. 오류와 비극은 우리가 진보를 위해 치르는 대가이자 우리를 성장하게끔 가르쳐주는 스승이기도 하다. 인간은 오류와 비극을 통해서만 그 자신의 잘못을 성찰할 가능성이 열리는 것이지 그 스스로 성찰할 수 있다고 보는 건 인간을 매우 낙관적으로 보는 것밖에 안된다.
 
요즘 시중의 베스트셀러 가운데 탁석산씨가 쓴 <오류를 알면 논리가 보인다>(책세상)는 책이 있는데, 이 문장만 그대로 본다면 나 자신이 지금 이 글에서 얘기하는 바와도 같은 맥락에 놓여 있다. 오류를 통해서 우리는 부단히 이전 것을 극복할 수 있는 확고한 초석의 새로운 전망을 마련할 수 있다. 이 오류가 문명사적으로 발현된 것이 바로 비극인 것이다. 파시즘의 오류는 역사에 전쟁과 학살이라는 비극으로서 예증된다.
 
다시 말하지만, 자기 종교의 오류가능성을 열어놓고 인정한다는 것은 내가 믿는 하나님의 오류를 인정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그 하나님을 믿는 나 자신에 대한 오류가능성마저도 열어놓고 인정한다는 의미다. 여기에 예외인 사람이 있다고 보는 것이야말로 오히려 하나님께 대한 교만 아닌가?
 
산상수훈과 곱셈표는 무슨 상관이 있을까
 
만일 그것이 정말로 제대로 된 진리라고 한다면, 그것은 역사에서 되풀이되면서 탁월한 유용성을 가져다준다고 하겠다. 따라서 진정한 합리주의는 실용주의마저 포섭한다. 하지만 실용주의가 합리주의를 전제하는 것은 아니기에 이 둘은 엄밀히 다르다. 근대 합리주의는 오류를 인정하지 않는 독단으로 흐르면서 결국 진리가 폭력으로 군림했다.
 
반면에 근대 합리주의에 반발한 포스트모던을 추구하는 사상가들은 합리성 자체를 거세하려는 경향이 있다. 다원주의나 해체도 좋지만 그럴 경우 ‘합리주의적 신념’마저도 봉쇄해버린다면, 우리가 진리를 찾는 일은 매우 무의한 것이 될 뿐이다. 우리는 어디서 진리를 찾을 수 있겠는가. 우리는 이제 모던과 포스트모던을 넘어서야 한다. 오류야말로 합리성을 가늠할 수 있는 척도인 것이다.
 
합리성의 성취는 세계 안에 유익한 좌표로 남아 있다. 예수를 비롯한 인류, 현인들의 가르침이 인류사에서 왜 반복적으로도 위대성을 예증해주고 있는 것인가. 왜 우리는 그것에 사로잡힌 바 되는 것인가? 바로 그것이 이미 옳고 타당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산상수훈'과 '곱셈표'가 무슨 상관이 있을까를 생각해 본다면, 일견 매우 터무니없을 거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사실상 "수학이야말로 '선'(善, Goodness)의 본성에 대한 최초의 통찰"이라는 점을 인지할 때, 예수께서 복음서에 말씀하신 그 산상수훈에는 지극히 우주적 수학의 통찰마저 깔려 있었다. 머리와 가슴은 결코 따로 놀지 않는다.
 
오류를 두려워말고 모든 새로움을 열어놓을 때 진리에 근접
 
따라서 우리의 사유 훈련은 평생을 연마할 필요가 있다. 사람은 보통 30세가 넘어가면 자신들의 생각이 점점 잘 바뀌지 않는다고 한다. 흔히 그 나이 때쯤 세상을 보는 가치관이나 신앙관 등등 그러한 관(觀)의 정립이 대체로 완료되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결혼하면서부터 안정을 원하는 맥락도 있겠다. 그러나 분명하게 말하지만 A와 B가 대화를 할 경우에 다음과 같은 4 가지 창은 언제나 전제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분명하게 얘기한다.
 
1. A만 알고 B가 모르는 부분
2. B만 알고 A가 모르는 영역
3. A와 B 둘 다 아는 영역
4. A와 B 둘 다 모르는 영역
 
따라서 이런 점에서는 모든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스승이자 학생이다. 하다못해 나이 어린 유치원생이랑 대화를 하더라도 오히려 그 아이에게서 우리가 가르침을 받을 수도 있는 것이며, 세계적인 대석학이라고 알려진 유명 학자라도 분명한 구라를 칠 수도 있는 것이다. 관건은 언제나 그 자신의 주장이 매우 구체적이고도 설득적인 합리적 근거에 기반하느냐 여부일 것이다.
 
이때 오류를 겁내하면 곤란하다. 자기 자신도 오류가 나올 수 있다. 누가 나에게 어떤 사람을 가장 존경하느냐고 묻는다면 자신의 오류가 드러났을 경우, 이를 시인하고 오히려 감사해 하는 사람이라고 답변하고 싶다. 왜냐하면 그러한 자는 언제나 성장의 풍부한 잠재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자신의 오류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그 자체로 종말일 따름이다.
 
이러한 오류로 인해 자신이 믿는 진리는 점점 더 예리하고 날카롭게 다듬어져 나갈 수 있는 것이다. 만약 내가 믿는 진리가 모든 비판과 검증에도 끄떡 없이 지속적인 유용성을 가져다준다면 그것은 진리일 확률이 점점 더 높다고 하겠다. 그리고 그것은 더욱 많은 것을 설명해주는 더 큰 설명력을 확보한다는 점에서 만인을 매혹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진리로부터 오는 치명적 유혹인 것이다. 따라서 평생 영성수련이듯 평생 공부를 해야만 한다. 모든 통찰과 이해들은 언제나 불완전한 과정상의 이해일 따름이다.
 
오류와 비극 앞에서도 반성하지 않는 기독교
 
이 지점에서 나는 우리가 알고 있는 기존 기독교의 역사를 한번 분명하게 들여다보기를 권한다. 기존 기독교는 오류가 없었고 비극이 없었던가. 분명하게도 수많은 오류와 비극이 있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러한 오류와 비극 앞에 기독교는 얼마나 민감하게 반성하고 참회했는지를 생각한다면 매우 염려스럽다.
 
수많은 종교재판과 마녀사냥들 또한 교리적 단죄, 기독교 제국주의로 인해 종교전쟁들이 정당화된 사례들 등등. 일제 청산을 잘 하지도 않는 한국 기독교도 마찬가지다. 또한 지금은 장신․감신․한신의 성서신학에선 받아들이지 않는 성경문자주의에 따른 축자영감설은 한때 김재준이라는 사람을 이단시비 걸듯 사상검증으로 종교재판에 몰아세워서 축출하도록 내몰기도 했었다.
 
대부분의 교회 신자들은 여전히 모세오경의 저자를 모세로 알고 있는 실정이듯이, 현재까지도 성경문자주의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기독교인들이 참으로 많다. 한국 역사의 오류는  많은 사람들이 죽고 감옥에 갇히는 시대의 비극들로 점철되어 있듯이 한국교회 역시 진정한 참회와 변혁을 기다리고 있는 여지들은 여전히 많다고 하겠다.
 
목회자는 오류를 저질러도 곧잘 반성하지 않는다. 회개? 진정한 회개는 그 죄로 인해 고통 받았던 사람들까지도 함께 치유를 받게 해야 그나마 온전한 회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오히려 그 자신의 오류를 세 번이 넘도록 부인하거나 한 술 더 떠 그 자신의 오류를 폭로하는 사람들을 핍박하기까지 한다. 지극히 쓰레기 같은 인간들은 세습적으로 되물림하기도 하는, 아주 한심한 한국 교회의 초상을 연출한다.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지금도 많은 신앙인들은 자신이 믿는 바가 확실한 진리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물론 이 점에선 나 자신도 예외로 둘 순 없다고 하겠다. 하지만 이런 점은 누구나가 그 어떤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선 되레 충분히 짐작해줄 수도 있겠다. 정작 문제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여러 새로운 정보를 접하는 것에 왜 그토록 거부하거나 두려워하는 것인가 하는 점이다.
 
자신의 부실한 신앙관과 오류가 들킬까봐? 자신이 믿어 왔던 바가 뒤바뀔까봐 두려운 것인가? 기독교 서점에 한번 가보라. 같은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같은 성경을 보면서도 그 이해가 상반되는 해석이 매우 많다. 성경을 보는 관점, 과학을 보는 관점, 타종교를 보는 관점, 세상을 보는 관점 등등 참으로 다양하리만치 저마다 다르다. 나는 보수든 진보든 무엇이든간에 가능하면 이 모든 것을 종합적으로 비교하여 가장 설득력 있는 것을 붙잡기만 바랄 뿐이다.
 
내가 쓴 이 글의 주장들까지도 포함해서, 더욱 설명력 있는 접근과 설득력 있는 구체적 근거가 어디엔가 또 있다고 한다면, 나의 이같은 주장마저도 충분히 버리고서 사정없이 그쪽을 쫓아가길 바란다. 어차피 모든 정보의 타당성 여부는 세계 안의 관련 데이터에 대한 설명력 싸움에서 판가름될 뿐이다. 기본적으로는 모든 것을 열어놓으면서 끊임없이 그 자신이 고쳐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정면으로 마주서길 바란다.
 
어떤 면에서 진리는 언제나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의 것이기도 하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깨우침을 주시고자 하는 것들이 언제나 우리 자신의 생각 이상을 훨씬 초월하는 것이라면, 도대체 무엇이 두렵단 말인가. 진리는 자유한 것인데. 진리는 그 어떤 금지된 영역이 조금도 없다. 이미 그것은 극복된 채로 존재할 뿐이기에.
 
요컨대, 1) '진리는 여전히 변함없는 진리'일 것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자신이 현재 믿는 바(그것이 무엇이든)를 언제나 다양한 차원의 새로움과 견주어보며 시험할 것!
 
2) 그럼으로써 더욱 깨어지지 않는, 모든 비판에 점점 단련된 결정체를 부단히 추구하는 것을 멈추지 말 것!
 
3) 행여 그러한 과정에서 자신의 오류가 드러날 경우, 이를 오히려 감사히 여기고 성장의 계기로 삼으면서 더욱 정진할 것! 
 
4) 입장과 입장들과의 충돌은 재난이 아니라 오히려 <기회>일 수 있음을 항상 잊지 않기를 빌며..
 
'너희가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한 8:32)
 
 
- 『미래에서 온 기독교』中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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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 몸학 기독교에선 기독교 신학이 굳이 필요하지 않은 이유 미선 364 03-24
157 인간 무의식의 두 가지 상태와 보다 상향적인 의식 발달을 위하여 미선 288 03-03
156 (1998년 원글) "화이트헤드 철학에서 본 민중신학 비판과 대안적 모색" (2) 미선 247 02-18
155 종교(宗敎, Religion)에 대한 동서양의 어원적 의미와 전후 혼동 오류 미선 241 02-06
154 기존 기독교와 <몸 기독교>의 분명한 차이들 미선 274 01-21
153 GIO명상 방법 12단계 (몸기독교가 제안하는 수행 방법 중 하나..) (5) 미선 412 01-16
152 2013년 계획.. 몸 기독교 (4) 미선 368 01-02
151 민중신학 40년.. (20년전 안병무 기사를 보며..) 미선 213 12-25
150 진보정치 교육의 사각지대와 민중 역사 주체론에 대한 반성과 재고찰 미선 202 12-22
149 교회에 대한 권력비판? 교리비판? 어느 것이 더 유효할까? (4) 미선 340 12-06
148 왜 예수인가 (필독 원함!) (13) 미선 1291 11-04
147 새로운 기독교의 방향과 몸학의 종교관 (2) 미선 239 10-05
146 새로운 기독교의 방향과 몸학의 종교관 (1) 미선 269 08-17
145 기독교 교리의 문제는 기독교만의 문제가 아니다! (3) 미선 321 06-11
144 초대교회와 바울에 대해... 미선 372 04-28
143 '작은 교회'가 정말 대안인가? 핵심은 교리다! 미선 301 04-22
142 진선미의 기원과 예수사건 (1) 미선이 284 02-24
141 중간 복음주의 신학자 알리스터 맥그리스의 <과학신학> 비판 (13) 미선이 310 12-13
140 끔찍한 <몸의 신학>에 속지 마시길! (유사품 주의) (8) 미선이 342 11-15
139 종교운동과 사회운동을 구분 못하는 오류-기존 진보 기독교 비판 (1) (2) 미선이 433 10-14
138 여전히 예수얼굴에 똥칠하는 개신교 정치세력들 (5) 미선이 350 08-30
137 새로운 기독교 역사의 국내 선구자들 : 유영모, 함석헌, 김재준 미선이 324 06-26
136 조용기 목사의 할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미선이 342 05-14
135 몸학과 새로운 기독교 운동 그리고 30년 후의 기독교 미선이 424 04-11
134 <인간의 자유의지>라는 착각과 환상에 관한 문제 (14) 미선이 617 03-04
133 기존 진보 기독교인들의 <생명평화> 담론에 반대한다! (업그레이드판) (8) 미선이 491 02-17
132 기존 진보 기독교계의 ‘생명평화' 담론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미선이 235 02-10
131 영혼구원의 강조에서 <총체적인 생명구원의 강조>로 (4) 미선이 272 02-05
130 성서문자주의 또는 성서무오설 신앙보다 더 뿌리 깊은 고질병은? (9) 미선이 682 02-02
129 죄의식의 종교에서 <이웃과 함께 성찰하는 종교>로 미선이 266 02-01
128 수직적 구조의 교회에서 <수평적 구조의 교회>로 (2) 미선이 351 01-21
127 서구식 목회문화가 아닌 <우리식 목회문화>로 미선이 302 01-21
126 과정신학에 대한 비판과 민중신학의 신 이해 접맥 미선이 483 01-13
125 ★ 예언 (1) 미선이 602 12-24
124 ♣ 새로운 기독교 신학의 인간론 (4) 미선이 438 12-19
123 ♣ 새로운 기독교 신학의 인간론 (3) (4) 미선이 499 12-12
122 ♣ 새로운 기독교 신학의 인간론 (2) (10) 미선이 702 12-05
121 새로운 기독교의 시간관, 태초와 종말로서의 시간관을 거부한다! (4) 미선이 590 12-01
120 ♣ 새로운 기독교 신학의 인간론 (1) 미선이 689 11-30
119 [예수운동 예배 견본] 새로운 기독교의 <예수운동 예배>를 위하여 미선이 721 11-28
118 숭배하는 예배에서 <닮으려는 예배>로 (1) 미선이 704 11-19
117 거꾸로 흘렀던 감리교 역사, 바로 세우기엔 아직 멀었나 미선이 596 11-10
116 <새로운 기독교>를 소개하는 전체 안내 링크글 (계속 업데이트 예정) 관리자 1932 11-03
115 [논평] 봉은사 땅밟기 추태, 성경 '문자주의' 그 야만의 역사 넘어서야 (1) 관리자 761 10-29
114 기존의 진보 기독교와 새로운 기독교 운동 (1) 미선이 604 10-22
113 1세대 민중신학자 안병무의 미완의 작업과 기존 민중신학의 과제 미선이 579 10-19
112 [새기운 성명] 4대강 사업 관련, 문정현 신부의 정진석 추기경 비판을 지지한다 관리자 557 10-19
111 스퐁, "스티븐 호킹과 유신론/인격신의 죽음" (작은불꽃님 역) 관리자 821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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