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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몸학과 새로운 기독교 운동 그리고 30년 후의 기독교    
  글쓴이 : 미선이 날 짜 : 11-04-11 04:56 조회(525)
   트랙백 주소 : http://freeview.org/bbs/tb.php/b001/583 




몸학과 새로운 기독교 운동에 관하여
 
 

신학에서 <몸학>으로의 여정

얼마 전 어느 분께서 세기연이 추구하는 새로운 기독교와 몸학과의 관련성을 언급하셔서 이에 대한 답글을 남기는 바이다.
그동안 이천 년 기존 기독교 역사에서 나온 모든 사유들은 몽땅 <신학>이라는 이름으로 묶여질 수 있었다. 기독교와 신학은 뗄 레야 뗄 수 없는 관계로서 기독교가 종교문화였다면 신학은 그러한 기독교 종교문화의 바탕에 깔려 있는 사유체계였던 것이다. 물론 신학과 기독교 이전에 원형의 예수사건이 있었다. 기독교와 신학은 그 이후 점차로 조직화ㆍ제도화가면서 이를 정당화하는 근거로서의 사유들도 함께 마련되어 갔던 것이다. 신학적 체계화에 있어서 결정적 분수령은 말할 것도 없이 니케아 신조가 채택된 공의회 결정이다. 이후의 기독교 신학사상들 대부분은 니케아 신조의 각주판이라고 봐도 좋을 만큼 이를 벗어나 있지 않다.

(* 하지만 이천 년 기독교사상사에 있어 니케아 신조의 교리들을 한편으론 위협할 수 있다고 보거나 혹은 이를 벗어날 수 있는 계기로서의 사상적 사건을 들라고 한다면, 1) 근대 성서비평 발달과 2) 제3세계 신학의 출현이다. 그리고 20세기에 있어서는 3) 다른 종교문화와의 만남을 들 수 있겠다. 이 세 가지는 기독교 신학사상사에 있어서 진보를 가져온 획기적인 사건이 될 것이다. 이에 대해선 언젠가 따로 언급해두고자 한다.)

<신학>(神學, theology)은 말그대로 신(神, theos)에 관한 학문이다. 기독교 신자들은 신본주의 어쩌구 하면서 신의 관점을 주창한다. 물론 어떤 이는 “신학은 인간학”이라고 고백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작 인간학으로 통용되어 부르거나 하진 않는다. <신학>이라는 용어의 채택은 근본적으로 지금여기의 현실을 외면할 수밖에 없는 사유의 구도가 그 이름에서부터 필연적으로 깔려있다고 본다.

물론 게 중에는 진보적이고 올바른 신학을 전개하는 분들도 계신다. 그러한 분들의 입장에서 볼 때는 신학이 지금여기의 현실을 외면하는 사유라고만 보진 않을 것이다. 본인 역시 그러한 분들이 주창하는 신학적 내용에는 일면 수긍하는 편이다. 하지만 <신학>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지게 되면서 갖게 되는 정치적 효과라는 것이 있다. 신학이라는 언명에는 여전히 우리의 몸삶이 겪고 있는 지금여기 현실을 가리게 하는 측면이 있다고 생각된다. 어떤 면에서 인간이 신학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교만일 수 있다고 본다. 그 어떤 신학이라도 해도 결국 모든 건 인간의 생각과 관점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

그러한 가운데 이미 본인은 기존의 낡은 기독교 신학이 완전히 환골탈퇴하는 새로운 기독교 신학을 주창한 바 있다. 기존의 낡은 기독교 사유들을 대체하는 새로운 기독교 신학운동을 전개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던 것이다. 하지만 그냥 새로운 기독교 신학이라고 불러왔었지만, 딱히 이를 뭐라고 이름을 붙여야 할지를 정하지를 확고하게 정하지는 못했었다. 하지만 최근에 이르러 내가 가야할 길을 정한 방향이 바로 <몸학>이라는 사실을 점점 더 확고하게 느끼고 있다. 소위 말하는 모태 신앙이라는 분위기에서 출발한 본인의 학문적 신앙적 여정은 다음과 같다.

모태 신앙 → 보수 기독교 교단의 신앙생활 → 보수 기독교 신학 → 민중신학 (각종 진보신학) → 본인의 새로운 민중신학(살림신학) → 새로운 기독교 신학 → 몸학

나는 보수 기독교 신앙에 있을 때 기존 기독교가 지니고 있는 교리적 신앙의 위력을 새삼 체험했던 이력을 갖고 있다.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치는 길거리의 노방전도를 하는 분들을 보면 나는 왜 저들이 저렇게 나와서 외치게 되는지를 너무나 절실히 느낀다. 실은 나 역시 그러한 과정을 거쳐왔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우연히 진보적인 민중신학을 접하면서 그때까지의 기독교 세계관이 여지없이 깨어지는 경험을 하게 되면서 진리와 신앙에 대한 독한 회의가 생기게 되고 만다.

한편으로 기존의 진보적인 민중신학을 접하면서 나는 보수 기독교 신학의 한계를 여실히 느끼기도 했지만, 기존 민중신학의 오류와 한계 역시 간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종교를 표방하고 있음에도 주로 사회운동에 많이 몰입되어 있을 뿐 여전히 존재론적 철학의 구도는 분명하지 못한 채 기존의 진보신학 진영 안에 자리해왔던 한계였었다. 사실 기존 진보 기독교 진영이 곧잘 보여주고 있는 한계는 기존 민중신학이 지닌 한계와도 결코 무관하지 않다. 따라서 기존의 보수신학과 기존의 민중신학을 제대로 극복하기 위해선 기존 신학에 대한 부분적인 비판과 극복만으로 되질 않는다는 점을 알게 된 것이다.

왜냐하면 패러다임 중의 패러다임이라는 가장 근원적인 형이상학적 체계의 붕괴를 경험하게 되었고, 새로운 기독교 신학을 위해선 새로운 형이상학의 수혈을 받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유의 궁극적 지평을 탐사하는 존재론과 우주론에 대해 새로운 존재론과 새로운 우주론의 바탕에서 신학이라는 건물을 다시 새롭게 짓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그러한 작업을 통해서 나는 새로운 기독교 신학의 건설을 구축하게 된다. 이러한 새로운 기독교 신학의 이름을 이제는 <몸학>이라고 쓰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왜 그것은 신학이 아니고 몸학인가?

몸학의 두 가지 함의

몸학의 추구에는 두 가지 함의가 있다. 첫 번째는 기존 기독교 신학을 대체하는 새로운 기독교 신학으로서의 몸학과 그리고 두 번째는 기독교를 포함해 전체 세계사회의 몸삶을 설명하는 통합적 기초 툴(tools)로서의 몸학이 바로 그것이다. 몸학은 신학 뿐만아니라 다른 여타의 모든 학문들을 통합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새로운 학문적 도구에 속한다.

나는 현재의 기존 기독교를 기독교 안팎에서 협공하여 해체와 새로운 변혁을 유도하기 위한 전략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몸학이 갖는 두 가지 함의는 바로 이 두 가지 역할을 맡고 있다. 내가 보는 기독교의 정체성은 성서와 예수에 있는데, 성서와 예수를 어떻게 볼 것이냐에 따라 그 신학적 성격이 나누어질 뿐이다. 이때 몸학의 첫 번째 역할은 성서와 예수를 몸학의 입장에서 재정립하여 기존의 기독교 신학을 대체하고자 하는 것이며, 몸학의 두 번째 역할은 성서와 예수를 넘어서 기독교 바깥의 비(非)기독교 진영에 대해서도 소통의 통로를 확보하고자 하는 것이다.

오늘날 일반사회에서도 기독교 비판에 대한 목소리들은 매우 드높은 실정이다. 남한사회의 경우에도 특히 개신교에 대한 일반인들의 감정은 매우 냉담할 정도로 비판적이다. 십여 년 전만 해도 ‘종교비판’이라는 언명조차 매우 드물었을 정도다. 종교에 대한 비판은 거의 성역에 가까웠는데 이제는 좀 더 자유로이 종교에 대해서도 TV방송을 비롯한 언론 매체에선 비판적으로 보도하는 경우들이 많다. 그 중에 개신교의 배타성은 이미 사회적으로 악명 높은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을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신교의 교리가 갖는 유일사상과 구원독점주의는 결코 버리질 못하고 있는 것이다.

몸학은 기존의 낡은 기독교 교리에 대한 해체와 몸학으로서의 성서와 예수를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본다. 문명의 새로운 전환은 단 번에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다. 새로운 형이상학의 체계가 일반사회에 스며들게 되는 시간도 필요하고, 또한 그럼으로써 새로운 사유의 체계가 마련되는 시간도 필요하다. 우리는 성서와 예수의 삶에 대해서도 GIO관계(God-I-Others)로서의 몸학으로 새로운 해석들이 마련되어질 때 어느 정도 건강한 종교로서의 몸삶을 확보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몸학>은 영문으로는 'Kosmommics' 혹은 ‘GIO에 대한 관계역학’이기에 GIO-logy라고 쓴다. 만일 신에 대한 표기를 ‘God’가 아닌 ‘Gio’라고 쓴다면, 그때는 ‘Giology’를 ‘신학’이라고 번역되어도 좋을 것으로 본다. 어찌되었든 적어도 몸학의 핵심은 이것이다. 몸학의 핵심은 신과 나와 이웃에 관한 학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출발을 ‘지금여기’라는 <몸의 현실>에서 출발하겠다는 것이다. 몸을 통해 신을 보겠다는 것이지 적어도 그 역은 아니라는 얘기다. 반면에 신학이라는 이름이 갖는 정치적 효과에는 바로 그 역의 가능성까지 마련될 여지가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심각한 폐단이 될 수 있다고 보기때문에 부득이 신학이 아닌 몸학을 주창하게 된 것이다.
 
나는 오늘날 일반적인 다른 여타의 분과학문과 비교해볼 때도 기독교 신학이라는 학문은 참으로 낡은 학문이라는 점을 너무나도 절실히 그리고 깊이 느끼고 있다. 바야흐로 신학은 위기인 동시에 새로운 전환의 문 앞에 서 있다고 볼 수 있겠다.

30년 이후의 새로운 기독교

그렇다면 대략 30년 이후에는 내가 알기에 적어도 지금보다는 훨씬 더 피부로 체험될만큼의 새로운 기독교가 생겨나 있을 것으로 본다. 그리고 그러한 새로운 기독교는 기존의 기독교와는 많이 달라져 있지 않을까 싶다.

몸학이 기존 기독교 신학을 대체할 경우 신앙생활의 많은 면면들이 바뀔 수 있다고 보는데, 오늘날 대부분의 기존 기독교 신앙은 교회를 다니며 기도와 찬송 그리고 설교를 들으며 또한 전도와 선교로 표출된다. 반면에 몸학에 따른 신앙생활의 경우는 기존의 일반적인 교회생활보다는 몸수행론의 발달과 예수의 몸삶을 닮는 신앙 문화로 안내할 수 있다고 본다. 몸수행론은 이천 년 기독교 역사에서 그 전통을 찾기가 힘들만큼 결정적으로 간과했던 부분이기도 하다.

오히려 몸수행은 불교 같은 수행종교에서 많이 발달되어 있다. 하지만 불교에는 예수의 다이나믹한 역동적 몸삶에서 볼 수 있는 삶의 변혁을 의도하는 정의와 희생으로서의 십자가 정신이 다소 희박한 점이 있다. 깨달음과 수행을 강조하지만 사회변혁적인 측면보다 개인수행적인 면에 좀 더 치우쳐져 있는 편이다. 물론 본래의 불교는 그렇지않다 해도 그 역시 현실 불교가 개혁되어야 할 지점인 것만은 분명하다고 여겨진다.

고통을 해결하는 방식에 있어 붓다는 설법을 통해 중생을 교화하며 이를 해결했다고 한다면, 예수는 그냥 몸으로 뛰어들어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며 산화한 것이었다. 이론적 명확함은 붓다에게 치우쳐져 있으며, 실천적 역동성은 예수에게 치우쳐져 있다. 하지만 내가 볼 땐 올바른 종교의 정립에 있어선 둘 다 필요한 요소라고 생각된다.

보수 기독교는 그렇다고 치고라도 기존의 진보 기독교 운동 진영에선 왜 예수가 그러한 몸삶의 스타일을 보였는지에 대한 근원적인 해명보다 그저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행동스타일만 직접적으로 체득하려는 점이 있어왔다. 하지만 지속적인 실천을 위해선 이론적인 해명도 함께 체득할 때 훨씬 더 큰 시너지 효과가 있는 것이다.

특히 기존 진보 기독교 진영에서는 <실천지상주의자>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는데 이들은 예수의 행동스타일을 모방하는 것을 최종 목표로 설정하고 있다. 물론 거기까지는 나또한 좋다고 보는데 문제는 그런 반면에 예수가 왜 그러한 실천을 감행했는지에 대한 예수의 내적 신념체계에 해당되는 예수의 신관, 신앙관, 예수의 내적 깨달음은 항상 불분명해왔었다. 사실상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어록들조차도 그런 점들에 대한 직접적인 해명들이 아니다. 예수의 어록들은 그의 지혜에서 나온 직관적 통찰에 기저된 것으로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해명이 아니라 대부분 비유와 경구들로 구성된 것이다.

따라서 예수가 그렇게 말하고 행동할 수 있었던 그의 내적 신념을 파헤치는 사유체계로서의 해명은 여전히 필요하다. 튼튼한 사유체계에 기반한 실천은 부단한 지속적인 실천을 낳을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즉각적 실천들은 그저 단편적일뿐더러 여전히 해소되지 못한 의문들 역시 잔뜩 남겨놓고 있을 따름이다. 실천지상주의자들의 그 같은 폐단은 이론지상주의자들의 폐단만큼이나 좋은 효과를 주질 못한다. 왜냐하면 건강한 사유와 학문의 발달을 가로막을뿐더러 자칫 기독교 신앙이 반주지주의로 귀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새롭고 건강한 종교 모델을 재확립시키기 위해선 이론과 실천의 두 수레바퀴를 함께 굴려야하며 긴밀하게 서로 협력되어야 할 필요가 있겠다.

또한 기독교를 포함해 종교는 과학과 함께 가야 한다. 종교와 과학의 관계는 서로를 견제할 수 있는 대화와 협력의 관계일 필요가 있다. 종교는 사실보다는 의미를 다룬다. 하지만 과학은 의미보다는 사실을 다룬다. 문제는 사실에 기초하지 않은 의미에서 서로 충돌이 발생된다고 본다. 과학은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충고한다. 이때 종교는 이를 의미의 측면에서 적극 해석할 필요가 있는 동시에 과학의 그 같은 충고도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할 필요가 있다. 동시에 과학이 갖는 연구 윤리에 대해서도 종교 역시 충고를 해줄 수 있다고 본다. 내가 볼 때 종교와 과학의 관계는 문명의 미래를 좌우하는 핵심 키워드라고 생각한다.

기독교는 성서의 기록들이 죄다 역사적 사실이라는 심각한 병폐를 극복할 필요가 있으며, 이 지점에선 초자연주의를 극복할 필요가 있다. 기독교는 초자연주의가 아닌 과학과 함께 갈 수 있는 신비주의를 추구해야 마땅하다. 초자연주의에 빠진 기독교는 미신일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주술과 신화의 시대에 쓰여진 성서를 새로운 해석의 툴로서 다시 재해석할 필요가 있겠다. 결국은 성서가 오늘 우리에게 갖는 의미가 훨씬 더 중요한 것이다. 이 부분을 위해서 나는 기독교 공의회가 다시 새롭게 열려서 성서 66권이 갖는 정경의 편협성까지 극복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본인이 예시로서 미리 구상하는 30년 후의 기독교 성경에 대해 잠시 말해보자. 일단 크게는 구약의 두 가지 하나님 상을 구분할 필요가 있겠다. 구약성서에는 원시적이고 야만적이며 정복적인 하나님상이 있는가 하면, 약자를 사랑하는 예언자 전통의 하나님상이 함께 뒤섞여 있다. 내가 볼 땐 가급적이면 야만적이고 정복적인 하나님 구절을 제외하고는 몽땅 ‘하나님/하느님’을 ‘한울님’으로 그 표기를 바꿨으면 싶다. 영어 표기는 God에서 Gio로 바꿨으면 한다. 본인은 이에 대해서 이미 이유를 밝혀놓은 바 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이든 그 어떤 존재이든 간에 결국은 신(God)과 나(I)와 이웃(Others)이라는 관계로서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신구약 중간에는 묵자 어록을 넣고 싶은 바램이 있고, 복음서에는 도마복음서가 들어갔으면 하는 바램이 있다. 묵자 어록은 거의 예수의 어록을 빼다박을만큼 비슷한 구절이 많다. 조금이라도 깨인 사람이라면 거의 거부반응을 느끼지 못할 정도다. 도마복음서는 깨달음을 설파하는 지혜 문헌의 복음서라고 생각된다. 도마복음서의 바탕에 깔린 형이상학적 세계관은 기존의 주류 기독교 성서관과는 상당히 다른 점이 있다. 오히려 불교나 동양철학적 사유와 유사성을 느낄 정도의 색다른 매력을 느낄 수 있는 복음서인 것이다. 이 정도는 본인이 추구하는 새로운 성서 모습의 바램이다.

30년 후 만나게 될 새로운 기독교는 성서뿐만 아니라 세례 문답이나 신앙고백서들도 많이 달라지게 될 것으로 본다. 물론 이 같은 작업들은 저 혼자서 이뤄지는 일은 결코 아니다. 뜻 있는 사람들과 함께 꾸려나가야 할 것이다.

나는 현재 낡은 기독교 해체와 새로운 대안 기독교에 대한 10년 로드맵을 구상하고 있다. 물론 현재의 한기총 해체에 대해선 얼마든지 지지한다. 하지만 그것은 징후적인 수순일 뿐이다. 새로운 기독교를 향한 변혁의 흐름은 지금도 유유히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눈을 뜨면 얼마든지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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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 새로운 기독교 신학의 인간론 (3) (4) 미선이 590 12-12
122 ♣ 새로운 기독교 신학의 인간론 (2) (10) 미선이 790 12-05
121 새로운 기독교의 시간관, 태초와 종말로서의 시간관을 거부한다! (4) 미선이 642 12-01
120 ♣ 새로운 기독교 신학의 인간론 (1) 미선이 781 11-30
119 [예수운동 예배 견본] 새로운 기독교의 <예수운동 예배>를 위하여 미선이 849 11-28
118 숭배하는 예배에서 <닮으려는 예배>로 (1) 미선이 781 11-19
117 거꾸로 흘렀던 감리교 역사, 바로 세우기엔 아직 멀었나 미선이 670 11-10
116 <새로운 기독교>를 소개하는 전체 안내 링크글 (계속 업데이트 예정) 관리자 2189 11-03
115 [논평] 봉은사 땅밟기 추태, 성경 '문자주의' 그 야만의 역사 넘어서야 (1) 관리자 830 10-29
114 기존의 진보 기독교와 새로운 기독교 운동 (1) 미선이 662 10-22
113 1세대 민중신학자 안병무의 미완의 작업과 기존 민중신학의 과제 미선이 642 10-19
112 [새기운 성명] 4대강 사업 관련, 문정현 신부의 정진석 추기경 비판을 지지한다 관리자 619 10-19
111 스퐁, "스티븐 호킹과 유신론/인격신의 죽음" (작은불꽃님 역) 관리자 895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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