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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영혼구원의 강조에서 <총체적인 생명구원의 강조>로    
  글쓴이 : 미선이 날 짜 : 11-02-05 08:58 조회(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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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구원의 강조에서 <총체적인 생명구원의 강조>로

- 몸삶이 진정한 하나님나라가 되도록 힘쓰는 구원   
 
 

‘영혼구원’과 ‘인간구원’은 다른 의미
 
보수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구원이란 종종 ‘영혼구원’을 의미한다. 이때 ‘영혼구원’과 ‘인간구원’의 경우 양자는 그 의미가 다른 점이 있다. ‘영혼구원’은 인간을 육체와 영혼으로 나누어 봄으로써 죽은 뒤의 저 세상에서 내 영혼이 영생복락을 누리는 것을 말하지만, ‘인간구원’은 인간을 육체와 영혼으로 나누지 않고 통전적으로 보기에 모든 ‘총체적인 해방’을 지향한다.
 
따라서 그것은 이 땅에서의 정치적·사회적·역사적 의미에서의 해방까지 모두 포함하는 ‘전인적인 구원’을 의미한다. 하지만 궁극적인 하나님의 구원사역은 인간에 대한 구원사역 뿐만 아니라 환경오염으로도 죽어가는 생명체까지 모두 포함해서 모든 자연세계의 존재들을 의미하는 <존재구원>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그럴 경우 인간구원도 궁극적으로는 존재구원에 내포될 것이다. 내가 볼 때 기독교가 말하고자 하는 구원은 영혼불멸설에 기반한 영혼구원이라기보다 분명 총체적인 존재구원이라고 생각한다. 그럴 경우 인간의 경우는 전인적인 지평으로서의 구원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 같은 구원에는 ‘존재론적 측면’과 ‘사회학적 측면’이 있다. 존재론적 측면으로서 나타나는 구원은 곧 ‘우주적 해방’에 속한다. 그것은 곧 ‘존재 고독(solitariness)’에 대한 치유이기도 하다. 인류사의 비범한 종교가 보여주는 ‘영속적인 탁월함’은 바로 이 문제 해결을 기반으로 하며, 이로 인해 샘솟듯 무한한 기반으로서의 에너지를 뿜어낸다. 내적 고독의 치유가 이미 해결된 자의 삶은 무엇이 두렵고 무서우랴. 이는 다할 수 없는 신비와도 맞닿아 있는 것이다.
 
구원의 존재론적 측면은 바로 그 자신의 본성이 ‘신성(神性)’으로 인도됨으로써 그 인간성은 영성으로 돌입하게 된다. 구원의 신비인 것이다. 따라서 <성화>라는 것 역시 넓은 의미에서 볼 때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나라화 되어가는 구원 과정이라고 볼 수 있겠다.
 
하나님의 구원 사역은 현실적 삶의 조건들과도 관련
 
그런데 이러한 존재론적 구원이 사회학적 측면으로 드러날 경우에는 그것은 필연적으로 인류의 삶의 증진으로서 드러난다고 본다. 이 때 말하는 <삶의 증진>이란 바로 세계 안의 ‘진보(progress)’의 발현을 의미한다. 그것은 우리가 속해 있는 지구촌 사회의 정치, 경제, 문화 등등 지구행성 문명 전반을 업그레이드 시키는 창조적 전진에 다름 아니다.
 
진정한 믿음은 행함으로도 이어지듯이, 영성이 깊은 자일수록 우리 사회의 정치적 경제적 구원에도 깊은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이다. “선한 나무가 선한 열매를 맺고 악한 나무가 선한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주님의 말씀은 지극히 타당한 언급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열매를 맺어가는 과정일 수도 있기에 꼭 열매를 맺었냐는 식의 결과주의 잣대만으로는 판단해서도 안될 것이다.
 
다만 그 진정성을 볼 뿐이다. 그런 점에서 참된 구원사건이라면 그것은 자기 자신이 하나님에게로 포섭되는 존재의 우주적 해방 사건이자 현실세계를 이롭게 하는 이 땅의 진보적 사건으로도 이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공중 권세를 잡고 있는 사탄의 체제와 싸울 때는 그것이 불 또는 검이 될 것이다.
 
나는 기본적으로 실질적 천국과 이 땅에서의 삶의 변혁이 동떨어진 별개의 것으로 작동된다고는 보지 않는다. 또한 동시에 그 천국이란 것이 이 땅에서의 질 좋은 삶으로 환원된다고 보는 것도 아니다. 아마도 이러한 차원은 내세와 현세의 구도도 초월과 내재의 맥락에서 본다면 더욱 훤히 보이지 않을까 싶다. 즉, 온전한 구원은 현세든 내세든 어디에 있든 지금 여기에서부터의 구원을 일궈나가면서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에 이르는 과정이라고 본다. 그렇기에 나 자신은 적어도 사후 세계에 대한 가능성만큼은 열어놓고 있다.
 
하지만 이는 관념적 이원론의 차원에서 보는 영혼불멸설이 결코 아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현실에서의 삶과 긴밀한 관련을 갖는 차원에서 얘기될 수 있는 가능성을 뜻한다. 왜냐하면 현재 우리 자신이 이미 현실적인 삶의 존재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종교 체험도 결국은 현실적인 삶의 조건과도 관련을 가지고서 계시 또는 역사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죽어서 ‘삶(Life)’을 남기고, 그 남겨진 삶은 후행하는 우주에 영속적으로 영향을 주게 되는 씨앗이 된다.
 
진정한 구원은 전체 삶의 상향적 증진으로 나타난다
 
혹자는 <개인구원>이 먼저고 <사회구원>이 나중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이는 우리의 의식이 불러일으키는 착각에 불과하다. 실제로는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실재(reality)의 세계로 깊이 들어가면 개인과 사회는 그 경계가 모호하며 어느 한 순간도 나누어지지 않기 때문인데, 예를 들어, 우리가 무심코 뉴스를 보는 그 순간조차도 뇌의 인지적 메카니즘을 이루는 신경들은 이미 사회 전체를 자기화하는 과정에 놓여 있기에 전체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개인과 사회는 언제나 동시적으로 접근된다.
 
오늘날 첨단의 인지과학을 언급하는 진영에서도 <관계적 존재>를 말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때 “인류의 사회사는 ‘진보를 위한 조건’과 ‘인간성을 저해하는 책략’이 교호적으로 작용하고 있는 가운데 거대한 조직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A. N. Whitehead, PR 339/582). 그것은 또한 자각된 열망과 맹목적 충동 사이의 대립과 긴장 국면이기도 하다. 진보란 전자를 압도할 때 일어난다. 하지만 소돔과 고모라 같은 이 세계의 현실을 놓고 볼 때 자각인(의인)은 열 명도 안 될 만큼 적은 수에 불과할 것이다.
 
세계 안의 진보가 더딜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철학자 화이트헤드에 따르면 인류에 내재한 3중의 충동은 다음과 같다. 그것은 곧 ①산다(to live), ②잘 산다(to live well), ③더 잘 산다(to live better)이다(FR 8/49). 인류의 역사란 바로 여기에서 비롯하고 있는 수많은 오류와 시행착오를 낳은 역사인 것이다. 전체 인류의 구원역사란 바로 그 오류를 줄여나가는 과정에 있다.
 
구원의 기초는 늘 얘기했듯이 참된 ‘깨달음’에 기반되어 있다. 물론 정치·경제·사회제도의 완성이나 민주화 정착 같은 그러한 차원들은 매우 중요한 것일 게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분명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러한 제도적 시스템에 대한 민주화 같은 것은 궁극적으로 권력의 주체의 몸삶 자체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권력 배분의 균등화를 지향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에게는 참된 종교가 필요한 것이며, 종교의 탁월한 효과가 두드러지게 발견되는 지점도 바로 그 이후에 있는 것이다. 종교가 구원의 가르침을 준다는 얘기는 결국 그것이 우리의 몸삶 자체를 새롭게 뒤바꿔놓기 때문이다. 이 세계의 정치 사회도 우리의 몸을 이루는 한 요소들이다. 리처드 윌킨슨(R. Wilkinson)의 언급처럼, “평등해야 건강하다”고 보듯이, 역으로 불평등한 사회일수록 자살률과 폭력 살인 그리고 스트레스와 우울증 환자들이 증가한다. 이는 세계사회의 여러 통계지표들이 말해주고 있다. 따라서 존재구원은 몸삶의 건강을 내포한다.
 
하지만 나는 모든 인간적 유토피아즘들은 결코 하나님나라로 환원될 수 없는 기본적 한계를 지닌 것으로 본다. 인류는 단지 그러한 가운데 최선을 추구할 따름이다. 완벽에서는 통찰의 느낌은 사라진다. 진화하는 세계의 완성은 정치 경제 사회적 삶의 조건들의 완성과 함께 궁극적으로는 <모든 인간의 그리스도화>에서 이룰 수 있는 차원이 아닐까 싶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과정이다.
 
주께서는 우리에게 완벽이나 절대를 원한다기보다 언제나 최선을 원하신다. 또한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듯이 그 자신을 닮아가는 과정으로서의 최선을 원하신다. 그렇기에 깨달음 이후에는 매순간순간들이 몸삶의 구원을 닦아나가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결국 신앙으로서 ‘믿는다는 것’은 곧 ‘따른다는 것’이기에!
 
 
  
 
 
durunensa (11-02-07 21:59)
 
인간적 이상셰계관이 하느님 나라로 환원 될 수 없는 한계가 무엇인지 ; 좀 상세히 알고 싶습니다 ;;

    
미선이 (11-02-08 03:49)
 
제가 보기엔 그건 간단합니다. 인간이 곧 신이 아니기 때문이죠. 물론 최종 진화의 극점으로까지
인간은 신으로 진화해 나갈 수도 있으나 적어도 그 지점까지는
언제나 인간의 인식 한계는 남아 있잖아요. 그러한 인간의 이상세계를 곧바로 하나님나라로 본다는 건
낙관주의적 위험성을 지닐 수 있다고 봐요. 다만 지금까지 발견된  역사의 오류와 실패와 비극들을 그나마
거울로 삼는 그러한 하나님나라로 조금씩 근접해나갈 수 있는 기회만 제공될 뿐이라고 봅니다.
따라서 성급한 확증 없이 온갖 비극적 가능성들을 염두에 두는 가운데 신중하게 나아갈 수 밖에 없을 뿐입니다.
근데 답이 좀 간단했나요? 굳이 설명이 될 경우엔 흔히들 오캄의 면도날 법칙을 적용하잖아요..^^;;

        
durunensa (11-02-11 21:25)
 
으음 ;; 무슨얘긴지는 이해가 돼는데요 .

주변에서 자주 뵙는 사람들중에 마르크스 주의자가 있는데 ..

설명해 주신 말씀과 그들의 태도에서 별다른 차이점을 찾지 못하겠네요 ;;

그들역시 역사에서 그들이(사회주의를 표방했던 사람?) 무엇을 잘못했고 무엇을 잘했으며 우리가 어떤 방향으로 나갈까 토론하는데,

나이가 많거나 경험이 많은 분들도 그렇지 않은 사람을 무시하지 않고 나역시 틀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염두해 두고 평가,비판을 열린 마음? 으로 받아 들이시구요..

그래서 이곳에서 얘기하는 신학과 맑스 주의가 어느정도 통하는게 있지않나 하는생각이 들어서 또 글남깁니다 ;

            
미선이 (11-02-11 23:17)
 
적어도 열린 마르크스주의자라면 당연히 공통점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휴머니티적인 측면에서도 그럴 것이구...
세기연에서 추구하는 신학과 맑스주의는 이론적 배경의 차이일 뿐이지
제생각엔 실제적인 실천 행보에 있어선 그다지 차이나지 않을 수도 있다고 봅니다.
종교신앙운동과 사회운동 혹은 교회와 NGO단체는 분명한 차이 역시 있지요.
사회적 실천 우선주의가 아닌 먼저는 존재론적 성찰과 물음에 기반한다는 것..
참고로 맑스주의에 대한 비평에 대해선 아주 오래전에 쓴 글이 있긴 한데
아마도 세기연에서 검색해보시면 나오지 않을까 싶네요.. 혹은 이미 읽어보셨는지도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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