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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허호익 교수의 '예수는 신화다'를 반박한 글에 대한 비판    
  글쓴이 : 정강길 날 짜 : 08-07-05 09:55 조회(3127)
   트랙백 주소 : http://freeview.org/bbs/tb.php/b001/166 




*이번 'SBS다큐 신의 길 인간의 길'에 대해 기존 기독교가 극렬하게 반발하고 있다.
  한기총이 SBS방송국 앞에서 금식농성까지도 했다는 얘기도 들린다.
 
방송 직후 보수 기독교 언론인 크리스찬투데이에서는 예전의 허호익 교수의 글을 실었다.
그 글은 예수는 신화다 라는 글에 대한 반론의 글이었다. 아래 사이트 글 참조
 
하지만 나 자신은 예수신화학파의 입장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 글이 너무 허술한 비판이라 생각될 뿐만 아니라
그저 기존 교단의 교리적 입장만 충실히 대변하는 것밖에 되지 않아서
이미 오래전에 허호익 교수에 대한 비판을 쓴 바 있다.
 
막상 공개를 하려고 했는데 파일을 잃어버린 줄만 알다가 우연히 오늘 찾게 되어 올려 놓는 바이다.
허호익 교수의 글에 대한 또다른 비판 글도 있었는데 그 파일은 아직 찾질 못했다.
참고로 허호익 교수는 장로교 예장 통합 교단의 보수적 입장을 대변하는 충실학 교단신학자이다.
 
 
허호익 교수의 '예수는 신화다'를 반박한 글에 대한 비판
 

들어가며..

얼마 전 본인은 우연히 프레크와 갠디의 『예수는 신화다』와 오강남 교수의 『예수는 없다』에 대한 반론으로서 허호익 교수의 글이 같이 언급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에 대한 자료를 읽어보게 되었는데, 지금 쓰고자 하는 이 글은 바로 그 허호익의 글에 대한 비판이다. 자료는 허호익 자신의 홈페이지에 가면 올려져 있다.

-같은 글이 이번 크리스찬투데이 언론에도 실렸다.
 
먼저 <예수는 신화다>에 대한 허호익의 반론에 대한 본인의 비판글이다.

솔직히 말해서, 별로 펜을 들고 싶진 않은 글이다. 왜냐하면 허호익이 보는 예수 언급들은 대부분이 억지논리에 기인한 것일뿐더러 전혀 생산적인 글들이 아니기 때문에 그러한 비생산적 글에 대해 굳이 이러저러한 얘길 하고 싶진 않아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수측 기독교인들은 아무래도 자신이 믿는 예수상이 깨어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지 그러한 허호익의 글에서 어느 정도 위로(?)를 받기도 하는가 보다. 하지만 이것은 전적으로 넌센스요, 해프닝일 뿐이다. 이 같은 어이없는 비극들이 있기에 결국은 이 글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하겠다. 허호익의 글이 왜 어이없는 헤프닝이 되는지를, 왜 그런지를 이제부터 하나하나 따져보기로 하자.

허호익은 『예수는 신화다』(동아일보사)에 대한 반론에서 예수의 역사적 생애와 오시리스 신화는 본질적으로 다르며, 이것은 형태적 유사성만 부각하여 본질적인 상이성을 완전히 무시하는 궤변이라고 말한다. ‘형태적 유사성’과 ‘본질적 상이성’이라는 이 두 단어는 일단 허호익 자신의 매우 교묘한 표현들인데, 도대체 무엇이 형태적 유사성이고 본질적 상이성인지에 대한 상세한 얘긴 없다.

우리가 실제로 오시리스-디오니소스 신화를 들여다보면, 예수의 생애와 흡사하게 동정녀 탄생, 물과 포도주, 나귀타고 입성, 나무에 달려 죽고 3일 만에 부활 등등 이러한 얘기들이 있음을 보고서 놀랄 수 있다. 분명히 이러한 설정들은 복음서가 그려내고 있는 예수 생애와도 너무나도 흡사한 것이다. 그렇기에 적어도 별개로서 보기보다 그 관련성에 대한 그 개연적 확률만큼은 훨씬 높은 것이리라. 나는 지금 여러분들에게 이에 대해 정직하게 보길 권한다.

허호익은 종교학자 R 내시를 언급하면서 둘의 차이점을 말하지만, 정작 예를 든 몇 가지들은 내가 볼 때 해석 여하에 따라 전혀 달리 볼 수 있는 것들이다. 일단 인용해보면 아래와 같다.
①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죽는다는 점 ② 자신에게 속한 사람들을 위해 죽는다는 점 ③ 단 한번의 죽음이지 반복된 죽음이 아니라는 점 ④ 역사적 실제사건으로 처형당해 죽는다는 점 ⑤ 자발적인 죽음이었다는 점 ⑥ 그의 죽음은 패배가 아니라 승리였다.

이를 보면, 먼저 R 내시란 자가 오시리스-디오니소스 신화를 제대로 이해한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있다. 왜냐하면 1은 공통점이고, 2, 3, 5, 6은 해석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달리 볼 수 있는 문제이며, 4번은 어찌보면 허호익의 글에선 궁극적으로 해명되어야 할 사실인데도 이미 이에 대한 근거로서 쓰고 있는 건 어이없는 논증으로 보인다.

게다가 초대 교부들인 유스티누스(AD100-165)), 테스툴리아누스(AD160~220), 이레나이우스들은 양자의 유사성에 대해 악마의 소행으로서 “예상에 의한 표절”을 했다고 비난한 적이 있다. 그냥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만일 허호익의 말대로 양자가 애초부터 본질적으로 상이했다면, 이미 초대교부들 사이에서 저러한 악마적 모방, 표절 운운하는 논란들조차 나올 필요가 뭐가 있었겠는가.

설령 이를 허호익의 표현대로 ‘형태적 유사성’이라고 하더라도 이것이 어떻게 유사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설명이 없다. 이에 대한 가장 명쾌한 설명은 오시리스-디오니소스 신화를 복음서 기자가 채용했다고 보면 그냥 끝나는 얘기다. 하지만 보수 근본주의 기독교인들은 아무래도 이 점만큼은 결코 받아들이고 싶진 않을 것이기에 온갖 억측으로서 이를 막아내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이미 터져서 콸콸 새고 있는 물을 자꾸 손으로만 틀어막으려고 하는 형국일 뿐이다.

또한 허호익은 예수가 신화가 아닌 실존인물이 되는 그 근거로서 바울의 로마서 구절을 언급했는데, 이것 역시 근거를 자기 안에서 찾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기에 상대에겐 전혀 설득적이지 못하다. 물론 나 자신도 예수 신화 학파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이지만, 허호익과 같은 그런 식의 반론이라면 오히려 도시락 싸들고서라도 말리고 싶을 정도다. 정작 프레크와 갠디가 읽어봤었다면 허호익의 주장을 얼마나 가소롭게 여길 것인가. 학자적 치밀함은 찾아볼 수 없기에 정당하게 펜을 겨누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러고서 허호익은 유세푸스나 타키투스의 글을 언급했지만, 그것은 예수에 대한 직접적 인용의 글이 전혀 못된다. 즉, 예수 추종자들로부터 들은 바를 간접적으로 전하고 있는 것뿐이다. 이들은 결코 직접적인 예수 목격자도 아니었다. 물론 꼭 직접 봐야 역사를 정당하게 기술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럴수록 우리는 매우 엄밀한 방법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잖은가. 그렇기에 무턱대고 그 진술을 신뢰하는 것으로도 전제해버린다면 다른 제3자가 보기에 누가 그 진술의 객관성을 신뢰하겠는가.

그래서인지 많은 학자들은 그 구절들을 후대의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예수 신화 학파뿐만 아니라 여러 신학자들에게서도 요세푸스의 글에 대한 진위 논란이 제기되고 있는 바고, 나로서도 그것은 후대의 첨가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 허호익의 글에서 이에 대한 직접적 반론을 보진 못했다. 어쨌든 예수가 메시아였다는 보도를 포함한 그 해당 단락들은 기독교적으로 각색된 것이어서 예수에 관한 비기독교 자료로 분류되기 어렵다는 것이다.

타키투스의 글도 그 증거로선 매우 미약하다. 대략 기록된 구절은 다음과 같다.

“... 그리스도인christian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다. 이 이름은 티베리우스 황제 때 본디오 빌라도 총독에 의해 처형당한 그리스도Christos에게서 유래했다. "네로"는 본인이 로마 대화재를 일으켰다는 소문을 종식시키고자 희생양을 물색했고 그 희생양으로 가증할 범죄를 저지르는 "크리스쳔"이라 불리는 무리들을 택했다. 그 무리의 이름은 "그리스도" 라는 자에게서 유래되었는데 그는 "티베리우스"황제 통치시 "빌라도"에게 처형되었다. 잠시 제압은 되었으나 이 황당한 미신 분파는 다시 성행되었다. 원래 이 분파가 발생했던 유대지방과 온세계의 황당하고 수치스러운 문화가 모여들어 성행하는 "로마"에서도...”

즉, 타키투스 역시 그가 전해들은 바에 대한 것을 썼을 뿐이며, 무엇보다 타키투스는 처형당해 죽은 사람 이름이 ‘그리스도’라는 고유명사로서 알고 있을 만큼 불명확하게 진술하고 있다. 이것을 두고서 곧바로 역사적 예수의 현존적 증거로 말한다면 이거야말로 억지일 뿐이다. 보다 냉정하고도 정확하게 말한다면, 타키투스의 이 기록을 통해서 그나마 그리스도교인들의 교세와 역사성만큼은 인지될 수 있겠으나 그렇다고 해서 예수의 역사성을 확고히 예증하는 자료로서는 아직 아닌 것이라는 얘기다.

또한 170년 경의 루시안의 글이 어떻게 역사적 예수의 현존 사실을 증명해주는 건지는 너무 의문스럽기만 하다. 즉, 굳이 170년 경까지 갈 게 뭐가 있는가 하는 거다. 그런 식으로 따지면 예수 시대에 살았던 빌라도야말로 확실한 역사적 예수의 예증이 되기도 하잖은가. 하지만 빌라도 현존이 역사적 사실이라고 해서 역사적 예수의 현존이 곧바로 정당화되는 것 역시 아닐 것이다. 우리는 매우 냉정하게 접근해서 파고들어가야 할 지점이 있는 것이다.

이외에도 허호익 교수의 구멍 뚫린 얘기들은 많다. 그는 도마복음서를 3세기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지만, 도마복음서의 저작 연대는 학계에선 여전히 아직 논란 중에 있을 뿐이다. 예컨대, 예수를 지혜자로 보는 최근의 역사적 예수 연구가들은 도마복음서를 훨씬 일찍 앞당겨 보고 있다.

또한 허호익의 영지주의 이해도 전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걸로 보인다. 그는 영지주의의 비공개성을 비판하지만 비공개성만 있는 게 아니라 공개적인 미스테리아도 역시 함께 있다. 단지 그 핵심적 전수자들은 비공개적이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부분도 우리는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흔히 밀교의 은밀함이란 것을 비공개성의 은밀로 착각하기 쉬운데 그것의 정확한 이해는 내적 변화의 중요성을 더 강조한 은밀이다. 다시 말해, <비밀스런 지식>은 깨달은 자만이 알 수 있는 성격의 것으로, 내적인 영혼의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기에 은밀하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정확하게 짚어낸다면 비공개성의 은밀이 아닌 것이다. 비유는 공개적이지만 비유에 담긴 뜻을 깨닫는 것은 비공개적인 것과 마찬가지의 이치다.

허호익은 여기서 밀교가 불교와 비슷하게 엘리트 소수를 위한 것이라고 봄으로써 불교마저 왜곡하고 있다. 또한 그 밀교가 사라진 것은 객관적 이성적 비판과 검증의 과정을 거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기독교가 국교화되면서 소멸해갔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는 로마 황제의 정치적 이해관계도 한 몫 작용했음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허호익은 『예수는 신화다』 책의 102-3쪽과 211-5쪽을 언급하면서 십자가에 달려 죽은 것은 도대체 누구냐고 따지지만, 이러한 얘긴 오히려 영지주의에 대한 그 자신의 무지와 몰이해를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영지주의에서 말하고자 했던 바는 십자가에 달려 죽은 것은 바로 <에이돌론>이라는 점이다. 이것이 구레뇨 시몬으로 상징되기도 하고, 디오니소스의 수준 낮은 동물적 본성을 상징하기도 하고, 예수의 쌍둥이 형제 도마를 상징하기도 하는 것이다. 즉, 알고 보면 허호익은 전혀 핀트가 어긋난 얘길 비판이랍시고 한 것이었다. 이런 얘긴 그가 제대로 책을 읽지도 않고 무턱대고 비난한 것으로 생각되어진다.

물론 전반적으로 예수 신화 학파의 얘기가 다 옳고, 허호익의 얘기가 다 틀렸다는 얘긴 결코 아니다. 분명한 것은 허호익의 글은 학문적 비판의 글로서는 미숙하기 그지없다는 사실이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바는 바로 이 점인 것이다.

나 자신도 영지주의와 그리스도교 신앙은 분명히 다른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영지주의의 도케티즘적인 신앙에 대해서도 나는 단호히 반대하는 입장에 서 있다. 그렇다고 해도 나는 복음서가 오시리스-디오니소스 신화를 채택하고 있다고 해서 예수 자체에 대한 권위가 훼손된다고는 조금도 생각지 않는다. 학문은 기본적으로 정직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허호익이 말한 그런 식의 반론들은 미안하지만 예수 신화 학파 학자들에겐 전혀 통하지 않는 얘기라고 충언해드리고 싶은 것이다.

전반적으로 허호익은 역사적 예수에 대한 연구로 상심에 빠진 보수측 기독교인들을 달래고자 하는 그런 성격의 글이지만 유감스럽게도 진중한 학문적 성과들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글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성서에 쓰인 예수는 사실이라는 전제를 깔고서 모든 상황과 논리들을 거기에 억지로 맞추려 했을 뿐이지 실제적으로 신뢰할만한 객관성 있는 진술은 전혀 못된다.
 
물론 어수룩한 사람들이라면 허호익의 글에 넘어갈 것이지만, 역사적 예수에 대해 조금만이라도 깊게 공부를 해 본 사람들이라면 지금 이렇게 나 자신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캐치할만한 것이다. 참으로 유감스럽지 않을 수 없다고 하겠다.
 
 
 
 
 
우도 (08-07-05 17:44)
 
사람은 참 좋은데

히스토리 (09-03-08 03:23)
 
다음에서 우연히 이 글을 보았는데 여기가 원문인걸 알고 왔습니다. 저는 전공자는 아니며 한국교회 교인중 한명입니다. 부족하나마 봐 주시기 바랍니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처형됬다는건 제정 로마 최고의 역사가로 평가되는 타키투스와 유대인이며 황실 역사가인 요세푸스의 기록 외에도 유대교 라비 전승인 산헤드린 문헌에도 나와 있습니다. 산헤드린 문헌에는 예수가 마술을 행하고 배교 했으므로 유월절 전날에 처형되었다고 기록되 있습니다. 요세푸스의 기록중 신앙고백적인 것은 신뢰할수 없으나 예수가 실존했고 처형되었다는 사실은 입증하는 사료로 대다수 역사학자들이 보고 있습니다. 기독교를 공격하려는 목적을 지닌 사람이 아닌한 일반적인 무신론자들도 그렇게 봅니다. 그리고 유대교 전승인 산헤드린 문헌의 경우에는 예수와 그리스도에 매우 적대적인 자들이므로 그들이 사실이 아닌데도 일부러 예수의 처형 사실을 지어낼 가능성은 없습니다.

사실 그저 어느 종교에도 속하지 않은 객관적 시각의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예수가 십자가에 처형됬다는 사실의 신빙성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여기의 글들은 다소 극단적인 듯 합니다. 그리고 상당수 성서 학자들이 복음서에 비록 신앙이 결합되 있다 해도 예수의 어록에서 기원한 전승의 원형을 종종 보존하고 있다고 봅니다.  오시리스 디오니 소스도 예수와 구체적으로 유사하게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는 이야기가 있다는 이유로 예수에 대한 말씀이 오시리스-디오니소스의 신화를 단순히 차용했다고 단정하기는 어려울 만큼 신빙성 있는 역사적 예수와 그의 처형에 대한 1세기의 사료들은 남아 있습니다. 최소한 그가 부활했다는것은 신앙적 선포라 하더라도 그가 유대땅에서 말씀을 전파하다가 십자가에 처형됬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또 오시리스-디오니소스신화가 구체적으로        기록된것이 2세기(플루타르코스의 저작) 이고 오시리스-디오니소스의 십자가 부적은 3세기의 것입니다. 기독교가 단지 예수 사후 20년 만에 로마에까지 급속히 전파됬고 황제조차 금방 알 정도로 큰파문을 일으켰다면 도리어 기록상으로 2~3세기에 기록된 이것들이 복음서로부터 부분적으로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을 배제하기는 어렵습니다.
최소한 그가 부활했다는것은 신앙적 선포라 하더라도 그가 유대땅에서 하나님나라의 도래와 말씀을 전파하다가 십자가에(당시 유대땅에서 로마군의 중죄인에대한 일반적인 처형 방식-당시 기독교와 적대적이거나 관련 없는 자들조차 예수의 처형사실을 기록했으며 본디오 빌라도에 의해서 처형됬다는 등 여러 가지 정황을 볼때- 예수는 유대인들의 강요로 총독에게 중죄인으로 몰려서 십자가 처형을 당했다고 보는것은 타당합니다. 이미 기원전 1세기 경에 수많은 유대인들과 지도자들이 총독에게 십자가 형을 당했습니다.)처형됬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다고 봅니다.

사실 죽음과 재생(부활)의 반복은 비단 오시리스-디오니소스 이야기 만의 것이 아니라 농경사회에 진입했던 전세계에서 공통되게 나타났던 것입니다.
여러 사료들을 볼때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건 어느정도 신빙성이 있다고 본다면 교부들이 2세기에 켈수스와 논박했던 것들을 어느정도 이해할수 있습니다. 켈수스는 기독교를 지독히도 싫어했던 자로 기독교를 2세기에 벌어졌던 논쟁에서 어느정도 면모를 파악할수 있습니다. 켈수스는 기독교의 부활 선포가 오시리스-디오니소스와 다를바 없다고 공격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전해지는 내용으로는 켈수스가 구체적으로 논박한 내용은 단지 큰 틀에서 '죽음과 부활'이라는 점이 비슷하다는 것 뿐입니다. 구체적으로 비슷하다는 내용은 없습니다. 거기에 교부들은 타종교에서도 그런내용은 있으나 그것은 실제가 아니고 악마적인 것이고 악마들이 이 사건이 일어날줄 알고 예상해서 쓴 것이라고 맞받았습니다.
종교에게 누군가가 딴지를 걸어들어 올때 극렬히 대항하는 한 예 입니다. 왜냐하면 교부들에게는 이건 진리이므로 구체적으로는 같지 않더라도 조금이라도 의심의 여지가 있어서는 안되므로 약간의 유사성이나 빈틈도 악마가 예상해서 모방한 것이라고 강하게 받아 쳐서 교회를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일부 보수교단이 약간의 빈틈만 있어도 무조건 악마라고 하는것과 같습니다.

1세기의 모든 자료를 종합해 봤을때 예수가 십자가에 처형됬다는것은 오히려 부인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리고 오시리스-디오니소스의 십자가 부적은 3세기의 것입니다.

히스토리 (09-03-08 03:24)
 
그리고 구체적으로 이집트 신화에서

오시리스는 갈갈이 찢어져 죽었지 무슨 십자가처형 따위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3일만에 부활했다는 이집트 기록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게 갑자기 2세기 플루타르코스의 기록에 오면 1세기 중엽에 로마제국내에 널리 전파되고 네로 황제와 로마시민들까지 알았던 기독교의 내용와 유사하게 '오시리스-디오니소스가 3일만에 부활했다'는 내용으로 나옵니다.

그리고 본래 '갈갈이 찢어져 죽었던' 오시리스- 디오니소스가 3세기에는 갑자기 '십자가에 못박힌 채'로 부적에 나오는걸로 뒤바뀝니다.

그러므로 연대상으로나 객관적으로 볼때 십자가 처형은 오시리스-디오니소스 신화가 구체적인 내용에서 예수에 대한 내용을 일부 반영 했다고 봐야 합니다. 그리고 플루타르코스가 오시리스-디오니스소의 다른 부분에서도 여러 이야기들을 자기 맘대로 첨가했다는 점에서 알수 있으며 다신교가 늘 그렇듯 이미 오시리스-디오니소스신화는 유대교전통과는 달리 별로 구별적거나 엄격하지 않고 뭐든지 유행하는 내용은 받아들이는 신화의 성격을 띄었다는 점을 알수 있습니다. 구체적인 면에서 역으로 생각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예수 십자가 처형은 여러 사료를 통해서도 알수 있고 기독교 내에서도 이미 1세기 중반에 기록까지 됬던 반면 오시리스-디오니소스의 십자가 부적은 3세기에서야 제작되었으며 <예수는 신화다>에서 오시리스신화가 기독교와 구체적으로 유사한 면이 있다는 오시리스-디오니소스신화 내용 역시 플루타르코스가 2세기에 기록한 것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논의와 별 관련이 없는 신화학자들과 신화연구서에 따르면 2세기에 플루타르코스는 주변의 이야기를 집어 넣어 오시리스-디오니소스이야기를 상당부분 변형시켰습니다. 지금 ,<예수는 신화다>가 구체적으로 들고 있는 오시리스-디오니소스 내용이 바로 그것입니다.  플루타르코스가  당시에는 인쇄술이 고도화되 있지도 않았고 필수문서가 아닌한 서책의 유통도 빠르지 않았습니다.


그에 비해 예수에 관한 것들은 1세기 초중엽에 이미 매우 공개적이고 빠르게 광장에서 전파됬고 1세기 중엽~말기에 기록되었습니다. 게다가 서기 63년 기독교인에 대한 네로의 대박해는 기독교가 더욱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됬습니다.
처참하게 죽인다는 위협과 실제 대대적인 박해에도 증인들은 온갖 공격에도 증언했습니다. 그리고 유대-기독교에서 성문서에 대한 강한 보존 전통때문에 성문서들은 설사 약간 다른 전승이라 해도 최대한 그대로 보존된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여하한 예수가 십자가에 죽었다는 사실은 1세기에 이미 확정되 있었으며 3일만에 부활했다는 복음도 1세기 중엽에 확정되 있었습니다.
또한 실제 2세기 초 켈수스의 논박과정에서 켈수스는 구체적으로 유사한 점는 전혀 들고 있지 않으며 당시에는 인쇄술이 고도로 발전하지 않았으며 필수문서가 아닌한 서책의 유통은 빠르지 않았고 유통구조도 지금처럼 체계적이지 않았습니다.

한마디로, 애초에 전 농경사회에 널리퍼져있는 것들과 '형태적 유사성'은 있으되 '본질적이고 구체적으로 상이'하며 구약성서에 그 시초를 여러곳에서 찾을수 있는 예수에 관한 말씀이 1세기 중엽에 이미 로마세계 내에 널리 전파되었는데 '3일만에 부활'했다는 구체적 내용에 관한것은
2세기 초에 기록된 오시리스-디오니소스 기록에 에 반영되고,                      '십자가 처형'에 관한 것은 3세기 오시리스 십자가 부적에 예수에 대한 구체적인 것이 반영됬다고 볼수 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처형과 부활이 1세기에 기록되었으나 오시리스-디오니소스가 3일만에 부활했다는 내용이 이집트에서는 없다가 2세기에야 성립했고 오시리스-디오니소스 십자가 부적은 3세기에 제작된것으로 볼때 이는 충분한 타당성이 있습니다.
참고로 무신론자들과 실증주의자들도 많이 있는 전세계 역사학계에서도 예수의 십자가 처형은 실제 사건이라는게 통설입니다.

    
정강길 (09-03-08 06:36)
 
산헤드린 문헌이라는 건 처음 들어보는군요. 혹시 44년 경 아나니아의 아들 예수가
산헤드린 법정에서 돌로 죽임을 당한 예수 사건을 말한 것인지?
그리고 플루타르코스 기록 이전에 이미 이집트 신전 그림의 유사성이나 디오니소스 신화의 경우는
고대 그리스에서 나온 것이며, 오시리스-디오니소스 외에 미트라스 신앙도 기원전 1-2세기를 앞서는데
보수 기독교인들이 괜한 억지를 부리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무엇보다 이미 2세기 때
초기 기독교 신학자였던 유스티누스도 이미 이교도들의 선차적인 모방을 염려했던 기록이 있어
위의 히스토리님이 언급한 글들은 기존의 보수적인 예수 신앙에다 데이터를 억지로 끼어 맞춘 느낌입니다.
최근 보수 기독교계 목사님 한 분이 예수신화에 대한 반박 책이라면서 펴낸 것이 있는데
혹시 위의 내용이 거기에 담긴 얘길 끄집어내서 하는 거 아닐는지요? 전공자가 아니시면 출처가 어딘지요?

글구 창조론자들이 진화론 반박할 때 자기들 편의대로 데이터 조작해서 말하여
물의를 빚는 경우가 있는데 윗글 역시 그런 경우는 아니길 바라겠습니다.

참고로 저로선 오시리스-디오니소스 신화를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제 신앙에 동요가 되거나 제가 믿는 예수 이해가 이교 신화보다도
조금도 퀼리티가 떨어진다고는 생각지 않는답니다. 오히려 예수사건은
다른 지점에서 이교도 신화와 변별적인 지점과 특성이 있지요.
이는 인류학자 르네 지라르의 연구에도 잘 나와 있으니 참조해보셨으면 합니다.

히스토리 (09-03-20 01:11)
 
제가 이제야 다시 들어와서 답을 너무 늦게 달게 됬습니다..^^ 저는 단지 수년간 이분야에 큰 관심을 가져온 한 성도입니다.

제가 말씀드린 내용은 동서문화사의 <파스칼세계대백과 사전>과 <브리태니커대백과사전> 및 신화 사전을 참고한 것입니다. 모두 꽤 학문성,공신력을 인정받는 자료들이고 신화사전(제가 이책은 소장하고 있지 않고 정확히 이름을 기억하지는 못합니다만 전혀 이 논쟁과는 관련 없는 학자들이 쓴 상당히 유력한 신화학전문서적이었습니다.) 제가 데이터를 조작한부분은 전혀 없고 이 논쟁과 별 관련없는 일반 자료들을 인용했습니다. 말씀하신어떤 보수 목사님이 쓰셨다는 책은 뭔지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인용한 책은 전혀 아닙니다.
그리고 미트라 신앙보다는 예수시대 이미 1000년이상 전부터 있어왔던 유대인들의 파스카 전통에서 대속사상의 유래를 찾는게

공간적,상황적으로나 연대적으로 훨씬 타당하다고 보여집니다.

    
정강길 (09-03-20 06:05)
 
백과사전에 오시리스-디오니소스 신화가 더 늦는 것이라고 나와 있던가요?
그럼 그 공식백과사전에도 있는 내용도 모르고서 오시리스-디오니소스 신화를 언급했다고 보시나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플루타르코스 기록 이전에 이미 이집트 신전 그림의 유사성이나 디오니소스 신화의 경우는
고대 그리스에서 나온 것이며, 오시리스-디오니소스 외에 미트라스 신앙도 기원전 1-2세기를 앞선답니다.
이미 2세기 때 초기 기독교 신학자였던 유스티누스도 이미 이교도들의 선차적인 모방을 염려했었구요.
제가 볼 때 님은 <The Jesus Mysteries>를 원래 영어 원서로서 보시진 않은 것 같습니다.
원래 원서에는 엄청난 분량의 자료 출처와 근거들이 각주로서 나와 있는데 국내판에는 그 부분이 잘려 있지요.
자료 인용으로 따지면 님과는 비할 바가 못될 정도로 말입니다. 한 번이라도 제대로 확인해보셨으면 좋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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