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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④ 초월신론에서 <포월신론>으로 (1)    
  글쓴이 : 정강길 날 짜 : 06-06-14 09:57 조회(4764)
   트랙백 주소 : http://freeview.org/bbs/tb.php/b001/20 




전환기의 한국 기독교, 바뀌어야 산다! (9)
④ 초월신론에서 <범재신론>으로 (1)
 

정강길 minjung21@paran.com



 
1. 21세기 기독교와 한국 기독교의 위기
2. 21세기 기독교 변혁을 위한 12가지 패러다임 대전환
   ※ 관념적 이원론에서 <현실적 관계론>으로
   ① '무조건 믿어라'의 기독교에서 <깨달음의 기독교>로
   ② 이웃종교에 배타적인 기독교에서 <열린 기독교>로
   ③ 가부장적 기독교에서 <모성애적 기독교>로
   ④ 초월신론에서 <범재신론>으로
   ⑤ 교리적 예수에서 <역사적 예수>로
   ⑥ 문자적 성서해석에서 <사건적 성서해석>으로
   ⑦ 숭배하는 예배에서 <닮으려는 예배>로
   ⑧ 서구식 목회문화가 아닌 <한국식 목회문화>로
   ⑨ 수직적 구조의 교회에서 <수평적 구조의 교회>로
   ⑩ 죄의식의 종교에서 <이웃과 함께 성찰하는 종교>로
   ⑪ 영혼구원의 강조에서 <총체적인 인간구원의 강조>로
   ⑫ 저 세상이 아닌 <이 땅에서의 하나님 나라 운동>으로
3. 오늘날의 선교 대상은 기독교 그 자신부터
4. 나오며


하나님에게 솔직히

"우리가 신(God)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면 이 세계의 무신성(無神性)에 대해서도 조금도 은폐하지 않고 남김없이 속속들이 조명하는 방식으로 신을 말해야 한다. 성숙한 세계는 성숙하지 못한 세계보다 훨씬 무신적(無神的)이며 그렇기에 하나님 앞에 더 가깝다."(디트리히 본회퍼)

로빈슨은 1936년에 『신에게 솔직히』(대한기독교출판사) 라는 책을 출간함으로써 기독교 진영에 큰 파문을 일으킨 바 있는데, 이 책에서 그는 삶과 세계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은 세계에 헌신적으로 참여해야 하며, 복음을 세속화해서 그 복음이 무신론자들마저도 설득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솔직히 누구나 한 번쯤은 신의 존재 유무나 신의 존재 방식에 대해서 생각해봤을 것이며, 지금까지의 모든 신학 사상뿐 아니라 철학사상도 결코 이와 무관하지는 않으리라고 생각된다.

우리는 지금까지 하나님을 얘기할 때 너무나 편안하게만 얘기해 온 것은 아닌가. 조금만 깊이 생각해보자. 예컨대 우리가 사는 세계를 솔직하게 들여다보면 세계 안에는 신의 부재 현장이 우리 곁에 많다. 이를테면 엄마의 눈물어린 기도에도 아랑곳없이 어린 딸은 백혈병으로 죽고 말잖은가. 가족들이 하나님 믿으려고 처음 교회에 나가려다 교통사고로 죽기도 하는 현실이잖은가.

   
▲ 우리가 사는 현실 세계를 솔직하게 들여다 볼 경우 세계 안에는 신 부재의 현장 또한 우리 곁에 너무도 많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에 직면해 있음에도 우리는 이를 정직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꺼려하거나 곧잘 두려워한다. 그리고는 결국 하나님의 깊으신 뜻은 사람이 알 수 없다고 어물쩍어물쩍 넘어가거나 덮어두는 게 고작인 것이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이런 경우가 세계사에서도 너무나 비일비재하다는 현실이다.

가장 대표적 사례는 유태인으로 태어난 게 죄가 되어야만 했던 저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학살 현장 같은 것을 들 수 있다. 거기에서 우리의 하나님은 그저 멀뚱멀뚱 구경만 하고 계신 하나님이셨다. 5월의 광주, 그 피비린내 나는 역사의 현장에서도 하나님은 편안한 예배당에서 찬송만 받을 줄 알았지, 대검에 찔린 임산부와 뱃속의 아이는 살리질 못했다.

끼니가 없어 굶어죽을 수밖에 없는 현실에 직면한 아이들의 생명들은 충분히 하나님을 욕할 자격이 있지 않은가. 적어도 이 땅에 태어나 죄 없이―솔직히 갓 태어난 어린애가 무슨 죄가 있겠는값 아무 이유 없이 죽어간 영혼들은 신에게 침을 뱉을 권리가 있지 않는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나님에게마저 버림받은 그 현장!

그러한 무신론적 현장에서는 전지전능하시고 초월자이시며, 절대자이신 우리의 위대하신 하나님은 일말의 꽁무니조차 보이질 않았던 것이다. 아니면 혹시 당신은 초자연적 기적을 바라는가? 이에 대해 무신론자는 다음과 같이 태클을 걸 수 있다고 본다.

유신론자와 무신론자의 가상대화

무신론자
: "역사 전체를 살펴볼 때, 전혀 망상에 빠지지 않았다고 안심해도 될 만큼 건전한 상식과 학식을 갖춘 사람들에 의해서 입증된 기적은 단 한 건도 발견된 예가 없다."(데이비드 흄)
유신론자 : 신은 결코 무신론자들을 설득하기 위하여 기적을 행사하지 않는다. 그것은 신의 평상시의 작업만으로도 충분한 설득력이 있기 때문이다.
무신론자 : 만일 신의 능력이 우주 전체를 통제하고 절대적이라면 무엇 때문에 기적이 필요하겠는가? 사실 기적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통제하기에 실패를 했기 때문에 그 손해를 메우려고 재치 없이 서두르고 있다는 증거로 간주하고 싶을 정도다.
유신론자 : 단지 기적을 통해서는 하나님은 자신의 신성한 힘을 증거할 뿐이다.
무신론자 : 그렇다면 어째서 그토록 불확실한가? 왜 하나님은 차라리 확실하게 하늘에다 분명한 선언문을 쓰거나 달을 삼각형으로 만들거나, 아니면 다른 어떤 전혀 논쟁의 여지가 있을 수 없는 것을 행사하지 않는가? 결국 유신론자의 주장은 언제나 신이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서 얘기할 뿐이잖은가. 단지 이성의 틀을 깨는 그 전제만 가지면 신이 존재하는 것으로 여겨질 뿐이잖은가?
유신론자 : 그렇기 때문에 결국은 믿음의 문제인 것 같다.
무신론자 : 그런데 그 말도 유신론자의 입장에서 봐도 모순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이성 역시 결국 신이 주신 거라고 말하잖은가.
유신론자 : 그렇다고 해도 신의 뜻은 인간의 이성을 넘어선다.
무신론자 : 그런 말은 당신 자신도 역시 모르겠다는 말과 매한가지일 뿐이다.
유신론자 : 그렇기에 결국 믿음의 문제라고 말했잖은가.
( ※ 폴 데이비스의 『현대 물리학이 발견한 창조주』중에서 자유롭게 발췌 인용)

그렇다고 세상만사 모든 것은 주님의 뜻이라고, 어찌 미천한 인간이 높으신 하나님의 뜻을 알겠냐며 마냥 문제를 덮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물론 속이야 편하겠지만 그것은 분명 신앙을 빙자한 신앙의 비겁자일 뿐이다. 우리는 믿는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그 자신에 대해 좀더 알기를 원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깊은 회의의 늪에 빠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정녕 신이 설 자리는 없단 말인가? 정말로 신이 없다면 그나마 유용한 학문은 사회과학이나 자연과학 같은 유물론적 성향의 학문들일 것이다. 만약에 우리가 일반인으로서 사회과학을 전공하고 있었다면 틀림없이 유물론이라는 사상에 오랫동안 경도되었을 확률이 높다고도 볼 수 있다. 적어도 기독인의 삶의 위치에서 신을 제거한다는 것은, ‘나’라는 존재의 뿌리에까지 닿아있는 자신의 실존적 신앙의 전부를 와해시키는 것이기에 결코 신을 포기할 수도 없는 상황일 것이다.

"도대체 하나님은 어디에 계신단 말인가?" 혹시 마음속에? 물론 틀린 얘긴 아니더라도 두루뭉술한 궁색한 답변들은 이제 그만!! 우리는 신에게 더 솔직할 필요가 있다.

신정론, <하나님의 전능성>과 <악의 발생>은 양립가능한가?

사실상 유신론이 위협받는 배경에는 앞서 말한 세계 안의 온갖 부조리한 현상들과도 관련된다. 현대의 기독교 신학에서는 이를 '신정론'(神正論, Theodicy)의 문제로서 첨예하게 다뤄지고 있으며, 오늘날까지 기독교 신학의 가장 어려운 난제들 중 하나로 여겨져 있다. 신정론은 '신'(theos)과 '정의'(dikee)를 의미하는 두 헬라어 낱말의 합성으로 이루어진 말로서, 현실 세계에 있는 수많은 악에 대해서 하나님의 전능성과 선한 사랑을 정당화하려는 시도를 의미한다.

이 첨예한 문제는 하나님에게 전능성과 완전한 선함을 동시에 귀속시키려 하는 모든 형태의 유신론에 존재하기 마련이다. 신정론의 문제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딜레마로 표현될 수 있다. "하나님은 악을 막을 수 있는 데도 막지 않거나, 아니면 막으려 하지만 막을 수 없거나"이다. 만일 후자가 옳다면 하나님은 전능하지 않고, 전자가 옳다면 그는 자비하지 않다.

따라서 하나님이 전능하시고 완전무결한 존재라고 한다면 신학적으로 심각한 난점을 초래할 수 있는데, 만일 하나님이 전지전능한 존재라고 한다면 세계 안의 많은 부조리한 사건들의 발생과 악의 현존의 그 궁극적 배후는 결국 하나님 탓으로 돌려질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아마도 이 시점에서 순진한 기독교 신앙인들은 이에 대해 말하길, 인간이 죄를 지어서 악이 발생한 것이지 하나님이 전능하지 못해서는 아니라고 항변할 것이다.

그리고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고통스런 악이 발생하는 이유는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더욱 알게 하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라고 흔히들 얘기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나는 더더욱 묻고 싶다. 그토록 자비하시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라면 아예 인간이 죄나 고통 같은 것에도 안 빠지게끔 어떻게 쌈빡하게 만들고서도 하나님을 알게 하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도록 할 수도 있잖은가, 라고 말이다. 즉, 사랑의 하나님은 전지전능한 존재이기에, 전지전능하다면 못할 게 무엇이란 말인가?

생각해보라. 에덴동산에 그토록 위험하다는 선악과는 왜 하필 갖다 놓았나? 도대체 아이가 먹으면 위험해질 물건을 방 안에 갖다놓는 부모가 세상 천지에 어디 있단 말인가? 결국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예수를 보낸 것도 한 편의 우주적 자작극인가? 아니면 그때까지도 전지전능하지 못해서인가?

이에 대한 답변들은 대체로 악의 존재에 대하여는 이론적인 대답이 있을 수 없고, 현존하는 악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의심 없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늘 순종하고 신뢰하여야 할 것으로 끝맺음할 때가 많았었다. 즉, 답변하기 힘든 것들은 "결국 하나님만이 아신다"는 식으로 돌려버리는 것이 일쑤인 것이다.

어거스틴은 악을 선의 결핍으로 보았다. 하지만 융(C. G. Jung)도 지적하고 있듯이, 선의 결핍 그 자체가 악이라면 그러한 선 역시 불완전한 것이며, 그것은 그 자체로 악일 수 있다고 본다. 그렇다고 우리는 선과 악을 이원화한 마니교적 답변을 취할 수도 없잖은가. 신플라톤주의에서 나온 유출설(流出說)도 나름대로 악의 발생을 해명하려고 했지만, 그것은 결국 신의 자비한 전능성에 반한다. 전지전능하고 자비하신 신이 엄연히 계시는데 왜 신에게서 그토록 멀리 떨어지도록 내어둔단 말인가?

초월적 유신론 → 이신론 → 범신론 → 무신론 → 반기독교의 흐름

그럼에도 기존의 전통 주류 기독교의 신학적 신관은 '초월적 유신론'(transcendent theism)을 나름대로 악착같이 붙잡고 있어 왔다. 이러한 신관이 사실상 본격적으로 도전받았던 것은 중세가 끝나고 근대가 봇물처럼 터져 나온 르네상스 이후부터다. 자연과학과 지리상의 발견 그리고 근대 세계관은 기존의 초월적 유신론으로서 하나님 이해에서 벗어나 매우 심각하고도 도전적인 문제와 과제들을 가져다주었다.

르네상스 이후에 근대 자연과학의 발달과 함께 이신론이 등장하였다. '이신론'(Deism)이란 신이 이 우주를 창조할 때 우주를 돌아가게 하는 이법(理法)마저 창조하여 신은 이 우주가 돌아가는 일에는 손을 떼버렸다는 신관이다. 그래서 당시 갈릴레오는 이 우주를 가리켜 "수학의 언어로 쓰여진 바이블"이라고 하기까지 했다. 어떤 면에서 이신론은 근대 자연과학자들이 유신론자들의 눈치를 보며 궁여지책으로 짜낸 무신론을 향한 유아기적 항변이요 음모라고 할 수 있겠다.

그 다음에 '범신론'(pantheism)이 등장하였는데,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것은 스피노자의 철학사상과도 연관을 가지는 신관이다. 범신론(汎神論)이란 신 즉 세계, 다시 말해서 모든 것은 신의 현상이며, 신은 만물 안에 있다고 보는 사상이다. 이 범신론적 사상은 이신론과는 다르면서도 종교의 비합리성을 배제하여 근대 자연과학과 조화시키려는 의도로 구축되었다는 점에서 맥을 같이 한다.

범신론적 사상가로 알려진 스피노자는 관념론자였던 헤겔에게서도 탁월한 평가를 받았지만 재밌게도 유물론자였던 포이에르 바흐에게서도 "유물론자들의 모세"라 불릴 만큼 좋은 평가를 받았던 사상가였다. 다시 말해서 유물론인 무신론(atheism)의 입장에서 본다면, 범신론은 유신론-이신론-범신론으로 척척 나아가는 과도기적 단계였다고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자연주의적 유물론을 주창한 포이에르 바흐는 신(God)이란 존재는 인간의 이상들을 집적시킨 투사된 존재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인간은 인간에게 예배를 드린다는 것이다. 그러한 가운데 인간은 완전한 이상들을 꿈꾸게 함으로써 ‘사랑’이니 ‘평화’니 하는 문명의 창조적 결속 원리들을 다져나간다는 것이다. 포이에르 바흐의 이같은 무신론 사상들은 당시 기독교 진영에 많은 충격과 혼란을 가져다줬었다. 알다시피 칼 마르크스는 이에 힘입어 유물론적 사상에 기반한 종교비판과 사회변혁으로 나아간다.

더 나아가 지금까지도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포스트구조주의 사상가들의 아버지격인 프리드리히 니체는 아예 신을 죽여 버린다. 신은 이제 필요도 없을뿐더러 해롭다는 것이다. 필요한 것은 ‘힘에의 의지’(the will to power)다. 따라서 우리는 초인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삶이란 투쟁이며, 힘이며, 지배이기에! 니체에게 있어 초인의 덕은 기독교의 덕을 반대하는 데 있다.

하지만 사실상 니체는 기존 기독교로 인해 황폐화된 인간의 무기력한 수동성과 노예적 정신에 반대한 것이었으며, 무신론을 주장했다기보다 반그리스도교를 주장했다고 보는 것이 더욱 정확하다고 하겠다. 실제로 그는 디오니소스신(神)에 대해선 열렬히 찬미하고 있다. 왜냐하면 디오니소스신은 노예의 도덕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기존의 주류 그리스도교에 대한 이 같은 그의 입장은 그 자신의 『반그리스도』(The Antichrist)에서 선명하게 수행되고 있다.

정직하게 신을 찾기

   
▲ 세계 안의 온갖 비극과 악의 발생 때에 하나님은 정작 어디에 계신 것일까?

신은 있는가? 있다면 어디에 있는가? 아니면 세계에는 손 떼고 단지 법칙적 질서에 맡겼을 뿐인가? 아니면 신은 세계 그 자체인가? 아니면 신은 인간이 투사시킨 존재인가? 아니면 신은 죽어 마땅한 해로운 존재인가? 도대체 신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나는 이 시점에서 여러분들에게 말한다. 이 모든 각각의 입장들과의 진지한 대화를 권하며, 가능하다면 논박을 하더라도 그들과 동일한 전제에서 출발하여 그들 각각의 논증에 대해 합리적으로 접근하여 극복하길 권한다.

여기서 유의할 점은, 우리가 신이 있다는 전제를 미리 깔고서 그들에게 무작정 접근하고 대화한다면 그 대화는 여전히 평행선적 대화가 되기 십상일 것이다. 소크라테스식 대화법은 상대방이 믿고 있는 그 신념에서 똑같이 출발하여 결국에는 상대방 자신이 자기의 허점들을 인지하게끔 귀결하도록 만들고 있다. 마찬가지로 그렇게 나아갈 때 우리의 기독교 신학은 그 어떤 사상에도 얼마든지 더욱 튼튼할 수 있을 것이다. 진정한 믿음은 인간의 이성을 희생시키지 않는다는 확신을 갖길 바란다.

따라서 "신이 있다고만 믿으면 그 뿐"이라는 얘기들은 참으로 나이브한 것밖에 안된다. 막스 베버(Max Weber)의 표현대로, 확실히 근대는 중세의 마법에서 깨어나게 했다. 인류의 지성사에 저러한 사상들이 단순히 나온 것이 아님을 인지한다면 여전히 진지하게 검토하고서 극복되어야 할 것이다. 내 이웃이 무신론자라고 해서 우리가 그들을 정당하게 설득할 수 있는 길을 아예 찾아보지도 않고 차단한다면 이는 매우 우매한 짓밖에 안된다. 그리고 이렇게 정직하게 신을 찾는다는 것은 곧 나(Self)를 찾는 것이라는 점도 곁들여 인지하길 바란다.

신은 스스로 있는 자가 아닌 우리와 더불어 있는 자

앞에서 보았듯이 적어도 초월적 유신론은 분명한 답변을 못해주고 있으며, 역사적으로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여러 가지 신론만 낳게 했을 뿐이었다. 이러한 사태를 두고서도 여전히 믿음의 문제라면서 초월적 유신론에만 목매달고 있다면 그 같은 기독교는 게토화 되고 퇴행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지금까지의 신 이해를 새롭게 다시 설정해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신정론의 문제와 새로운 하나님 이해를 본격적으로 고찰하기에 앞서 간단하게 성경 한 구절만 짚고 가보자.

출애굽기 3장 14절을 보면 야훼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흔히들 독해한다. 즉 이것은 야훼가 ‘자기원인적 존재’로서 영원한 자존자(自存者)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대부분의 교회에서도 그렇게 성서를 가르친다. 정말 그럴까? 그러나 굳이 김춘수 시인의 '꽃'이란 시(詩)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우리는 이것이 잘못된 독해임을 알 수 있어야 한다. 잘 생각해보라.

만약 기존 기독교인들의 말대로 신이 '홀로 있음'으로 존재한다고 쳐보자. 그럴 경우 우리는 그 존재에 대해 진정으로 '존재한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도대체 누가 그 이름을 불러준단 말인가? 홀로 있는 그 존재는 정녕 '존재한다'라고 볼 수 있는 것인가? '존재성'을 잃어버린 존재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홀로 있음'이란 불완전한 것이며, 존재가 온전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자신을 인정해줄 수 있는 '타자로서의 존재' 역시 필요한 것이다.

만약 야훼가 홀로 있는 존재라면 야훼는 결국 누구로부터 영광을 받을 것인가? 분명하게 말하지만, 하나님이 없다면 우리 인간도 없겠지만, 다른 존재들이 없다면 하나님 역시 무의미성에 빠질 따름이다. 따라서 야훼는 '스스로 있는 자'가 아니라 우리와 '더불어(with) 있는 자'로 보아야 더욱 정확한 맥락이라고 하겠다. 실로 관계성이란 존재론적 본질에 속하는 것이다.

참고로 구약학자인 김이곤 교수는 그 히브리 성경 구절을 "야훼는 존재하는 것을 존재케 하는 자"라고 사역형 동사로서 읽어야 본래의 히브리어 의미로도 타당하다고 주장한다(『출애굽기의 신학』pp.52~56을 보라). 나또한 개인적으로는 그러한 입장을 지지하고 있다. 야훼는 스스로 있는 자가 아니라 <우리와 더불어 있는 존재>이며, <존재하는 것을 존재케 하는 자>로서 우리와 함께 하고 있다.

앞으로 21세기 기독교 신학에서 설정될 신과 세계의 관계는 언제나 <동반자적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말았으면 한다. 왜냐하면 신은 그 자신의 목적에 대한 물리적 성취를 위해 언제나 세계를 필요로 하며, 세계는 그 본성상 불완전성을 극복하기 위해 신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혹시나 염려되어서 하는 얘기지만, 이 동반자적 관계란 신과 세계가 똑같이 모든 가치들이 동등하다는 그런 소박한 개념의 표현이 아니다. 형식상의 관계에서 동등하다는 것이지 내용적으로 그렇다는 얘기가 아닌 것이다. 지금 우리는 신과 세계의 관계 유형(type)을 탐색하고 있다. 이 같은 동반자적 관계의 허락함이 궁극적으로 신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라면 별 무리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얘기다.

어떻든 앞으로 신과 세계가 동반자적 관계에 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계속 살펴보겠지만 적어도 이러한 사실은 지금까지의 초월신론-이신론-범신론-무신론-포스트모던 사상까지도 넘어서는 매우 새로운 신 유형에 해당한다. 만약에 무신론이 매우 설득력 있는 설명들을 제공한다면 나는 정직하게 무신론을 따르겠지만, 개인적으로 나 자신이 이같은 유신론적 입장을 택하고 있는 이유는 무슨 의무적 믿음이 전제된 것이라기보다 그것이 지금까지의 신에 대한 여러 사상들보다도 현실 세계와 관련하여 가장 설득력 있는 설명을 제공해주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러한 신 이해의 패러다임 전환과 극복은 앞서의 다양한 신 이해들을 무작정 배제함으로써 넘어서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마저 포섭하면서 넘어서는 차원이다. 마치 양자물리학이 고전물리학을 대체하면서 넘어서듯이 말이다. 우리네 삶에 대해 가장 정직한 자세와 신 앞에 정직한 자세는 궁극적으로 다르지 않다. 현재 우리 모두에게는 더욱 깊은 신 이해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하겠다.

(잠시 아래의 詩를 곰곰히 씹어보자)
 
[詩]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엄마의 눈물어린 기도에도 아랑곳 않는
어린 소녀의 백혈병이여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예배당에서 쫓겨나 문 앞에서 울고 있는
한 흑인 어린아이의 울음이여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왕따'라고 따돌림 받으며 집단폭력으로 죽어가는
우리 푸른 꿈나무들의 비애여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온갖 수해로 한 해 동안 땀 흘린 보람마저 없어진
우리 농부들의 탄식소리여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명절이 와도 고향에 가지 못하는 기지촌
양공주의 서러운 술주정이여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꽃다운 나이에 전쟁군병들에게 무참히 끌려갔던
조선 여인네들의 한 맺힌 절규여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아우슈비치 수용소 벽을 피손톱으로 긁어대던
유대인들의 마지막 생존의 처절한 몸부림이여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잦은 조출잔업과 특근철야로 인해 프레스에 잘린 손은
노동의 쓰라린 통곡이라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민주화의 피로 얼룩진 5월, 무등산 고개에 널린
싸늘한 주검 앞의 오열이여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부르주아 불도저로 밀어버린 민둥산과 공장 폐수로 오염된
병든 나무야 병든 물고기들아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폭우와 재난으로 인해 작은방 한 칸마저 휩쓸려간
빈민촌 이웃들의 탄식소리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앙상한 뼈를 드러낸 채 굶주림으로 괴로워하는
북녘 땅 아이들의 야윈 뱃가죽이여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이 땅에 오셔서 진정, 십자가에
못박히고도 또 못박히시는
진열장 속의 슬픈 마네킨 예수여,
그 처절한 기도소리 들으소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저희를 버리셨나이까!
(계속 이어지는 내용은 아래의 글을 클릭하시면 됩니다.)
 
 
- 초월적 유신론에서 <포월적 유신론>으로 (2) http://freeview.org/bbs/tb.php/b001/21 참조.
 
- 초월적 유신론에서 <포월적 유신론>으로 (3) http://freeview.org/bbs/tb.php/b001/22 참조.

 
 
김영순 (07-09-06 17:39)
 
세상의 악과 환난이 하나님의 책임인가


1. 창조란 악을 소멸해가는 일이다.

천재지변이나 인재나 불의의 사고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떼죽음을 당하거나
재산피해를 당할 때 사람들은 흔히 하나님이 계신다면 어찌 이럴수가 있을까
경악하면서 마치 하나님의 책임인양 원망하게 되는데 과연 그러한가.
불의의 사고뿐 아니라 일반적인 사람의 죽음, 질병, 폭력, 전쟁, 기아, 방화
등의 모든 세상의 악이 어디서부터 왔는지 알아보기로 한다.
즉 그런 악한 것들은 모두 창조미완이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들인데 창조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알아보기로 한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창1:1,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다고 했으므로 아직 창조된 것이 아무것도 없는 무이다.
즉 창조주 하나님은 높으시므로 자연계의 사물을 들어 하늘이라고 하며
그 피조물은 낮으므로 땅이라고 하는데, 이 때의 땅은 아직 실제하는 땅이
아니고 창조대상으로서 관념적인 땅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깊음은 물을 의미하므로 흑암이 물위에 있다고 했다. 하나님의
신도 물위, 즉 수면에 운행하신다고 했다. 흑암은 비창조의 어두움으로서
마귀를 뜻하고 하나님의 신은 창조의 빛으로서 창조주체를 뜻한다.
이처럼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흑암(마귀)과 빛(하나님)은 동일한
물을 싸안고 있다. 하지만 흑암의 물은 비창조의 물이요, 하나님의 물은
창조의 물이다. 그리고 물은 말씀을 뜻한다. 때문에 이는 태초에
비진리(흑암)와 진리(빛)가 혼재된 혼원무극의 상태를 말한다.

이와 같이 비진리와 진리가 혼재된 혼원무극에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게
되기 때문에 하나님은 날마다 비진리와 결별하고 세상의 악과 환난을 떨쳐
버려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된다.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지으신 창조주임에는
틀림없으나 세상의 악과 한난을 지으신 분이 아니다. 물론 하나님은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느니라(사45:7)."
라고 하셨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어두움이나 환난은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세상의 악의 개념과는 정반대로 다르다.
즉 하나님이 빛을 창조하시자 그 정반대의 어두움이 드러나는 것이며
하나님이 평안을 창조하시자 그 정반대의 환난이 드러나게 된다는 뜻에서
어두움과 환난도 창조하시게 되었다고 한것이다.

창세기 6일 창조기사는 자연계 사물을 들어서 인간의 심령창조와 역사발전을
기록한 비유이다. 때문에 하나님의 창조란 발전적 창조요 진화론적 창조인데
그것이 6일동안 계속되었다. 즉 첫째날 보다 둘째날이, 둘째날 보다 셋째날이,
셋째날 보다 넷째날이, 넷째날 보다 다섯째날이, 더욱 더 밝은 빛의 창조요
평안의 창조가 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섯째날 보다 여섯째날 끝에서
창조는 완성되기 때문에, 일곱째날에서는 어두움과 환난이 모두 제거되어
창조는 마치고 영원한 안식의 날을 맞게 된다.

이러므로 첫째날에서 둘째날에 오면 첫째날보다 빛 밝은 창조요 평안의
창조이지만 이 때 첫째날의 빛은 어두움과 환난이 된다, 그리고 다시
둘째날에서 셋째날에 오면 둘째날보다 빛 밝은 창조요 평안의 창조이지만
이 때 둘째날의 빛은 어두움이요 환난이 된다는 뜻에서 하나님이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한 것이 된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본래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게 되자 빛과 어두움, 평안과
환난, 이렇게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이 동시에 드러나게 된다. 그리고
일곱째날은 모든 어두움과 환난은 사라지고 하나님의 완성된 세계가 된다.
이는 하나님이 세상의 악을 창조하신 것이 아니고 오히려 세상의 악을 날마다
조금씩 제거시켜 나가는 창조가 됨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악은 하나님의 책임이 아니다. 하나님이 세상의 악을
도말하여 완성시켜가시는 과정에 있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아니 계신다면
세상의 악은 영원히 계속되겠지만 하나님이 계셔서 창조하시기 때문에
세상의 악은 점진적으로 사라지고 있는 과정인 것이며 조만간 모든
악한 것은 도말될 것이다.

인류는 수렵시대, 농경시대, 산업화시대를 거쳐 오늘날 정보화사회를
이루었는데, 시대를 거슬러 올라갈수록 사람들은 야만하고 거칠고 세상의
악은 편만했다. 이는 창조가 더욱 미완성에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정보화시대인 오늘날에 와서 창조를 완성하시게 되는데 그 시발이
그리스도의 천년통치를 통해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천년통치를 예언해
놓은 것이 성경이다. 그 예언은 저 신석기시대인 아담과 하와 때에 이미
시작되어 이스라엘민족시대에 마쳐지는데 이것을 구약이라고 한다.

그리고 구약의 예언대로 예수님은 그 실상으로 이천년전에 중동땅에 오셨다.
하지만 예수님의 초림은 창조완성으로 오신 분이 아니다. 재림 때가 완성이다.
구약은 이러한 초,재림에 대한 예언이다. 그리고 신약은 예수 초림에 대한
행적과 그의 복음전파의 시작을 알리는 기록이지만 이것은 다시 재림에
대한 약속이 되기 때문에 신구약 성경은 오늘의 재림주에 대한 기록인 것이다.
즉 재림주가 마지막으로 세상의 모든 문제와 악을 청산하실 능력의 주로
오시게 되는데 그 때가 곧 오늘날인 것이다. 저 먼 과거가 아니다.
과거는 보다 악하고 오늘날은 보다 악이 제거된 때요, 조만간 완성으로
창조는 마감된다.



2. 구약의 하나님(여호와)

성경기록의 과거는 구약이고 다음은 신약이고 마지막 완성은 오늘날이다.
구약은 더욱 미완이며 더욱 악하여 전쟁도 빈발할 수 밖에 없었다.
하나님은 이러한 악한 세상의 빈발한 전쟁을 이용하여 역사기록물로
남기시므로써 그것이 오늘에 대한 예언이 되도록 하셨다. 즉 하나님은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 하라고 했으며 자기백성인 이스라엘민족을
진두지휘하여 이방민족들을 무찌르시고 그것을 기록케 한것이 오늘에 대한
예언이며 그것이 구약이다. 오늘에 대한 예언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이 진두지휘하신 이스라엘민족은 오늘날 하나님을 충심으로 섬기는
하나님의 백성을 뜻하고 이방인은 불신자들을 뜻한다. 때문에 전자는
하나님이 눈동자 같이 보호하시고 후자는 가차없이 멸망시키는
타도대상으로써, 하나님이 반드시 승리로 이끄신다는 교리전쟁을 뜻했다.
오늘의 교리전쟁을 과거의 물리적 전쟁으로써 예언토록 하셨기 때문에
성경은 비유가 되고 있다. 즉 하나님은 형이상학이므로 하나님의
전쟁도 마땅히 형이상학의 교리전쟁이어야 하지만 그것을 과거에는
악한 형이하학의 전쟁으로 예언토록 하셨기 때문에 비유가 되고 있다. 

그러므로 얼핏보아 구약의 여호와는 무서운 전쟁 왕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사실 하나님이 전쟁왕이 아니라 미완성의 세상이 악하였으며
하나님은 단지 그 악한 시대적 사물의 제도를 이용하여 오늘의 소프트한
교리전쟁을 예언으로 기록케 한것이다. 다시 말해 악은 사단이 주관하고
선은 하나님이 주관하시는데 하나님이 사단의 악을 이용하여 오늘의 예언이
되도록 하신 것이다.

구약의 하나님은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 라는 음양의 극단적 대결구도
속에서 오늘을 예언케 하셨다. 그 시대의 세상이 그렇게 악하기 때문이다.
여성차별도 심했다. 그 시대가 그렇게 남성의 물리적 힘에만 의존해
살아갈 수밖에 없는 거칠고 완악한 남성적 세상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허락하신 악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시대의 여성차별을 통해 창조미완
중에는 신보다 인간이 낮음을 비유했다. 즉 남자는 하늘의 신(천사)들을
뜻하고 여자는 인간을 뜻하여 신(남성)은 존귀하고 인간(여성)은 아직
비천할 수 밖에 없음을 비유했다.

신은 먼저 창조된 자요 인간은 후에 창조되는 미완성이기 때문이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남성의 독무대인 남성시대가 되기 때문에
남여의 차별은 극심할 수 밖에 없었는데
하나님이 이를 이용하여 신의 높음과 인간의 낮음을 비유하셨던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 때에는 천지개벽을 일으켜 신과 인간이 한몸으로 만나는
신인합일의 구원을 약속하셨으며, 남여의 동권도 약속하셨으며, 너와 나의
모든 음양의 통합도 약속하신 게 성경이다. 성경이란 궁극적으로 마지막
때에 대한 예언이며 마지막 때는 이처럼 천지개벽 사상이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나님은 악한 시대의 성향을 최대한 이용하여 오늘의 선한 일까지
예언되도록 하시는 시대의 연금술사인 것이다.



3. 신약의 하나님(예수)

구약시대를 지나 시대가 좀더 개화된 신약시대에 오신 예수님은 극단적인
대결구도를 접으시고 음양의 평등사상과 상생의 도를 가지고 오실 수
있었다. 하지만 원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설파하셨으나 그 때는 아직
그 현실화는 아니다. 다만 오늘에 대한 어떤 의미심장한 예언으로써
이웃 사랑이며 인간의 도리와 도덕을 고양시킨 산상수훈의 가르침들이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원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일차적으로는 물론 액면 그대로
인간의 윤리와 도덕이 되겠으나 그 속에 담긴 의미심장한 참뜻이 있는데
그것이 곧 비유가 된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이웃 사랑에 대한 비유란
오늘의 내 복음만이 최고선이라고 하지 말고 내 이웃의 타 종교의 가르침이나
사상이나 학문들을 통일적으로 끌어안아보라는 비유였다.
예수님이 인류의 죄를 위해 져주신 십자가의 죽음이
곧 이러한 이웃 사랑을 보이신 비유적인 중심교리가 됨을 알아야 한다. 
 
이렇게 예수님은 이웃 사랑을 외쳤지만 예수님 때에도 창조진행의 미완이므로
현실적으로는 아직 차별은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이
제자들을 전도 보내시면서

"이방인들이 사는 곳으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 사람들의 도시에도 들어가지
말라(마태10:5)" 라든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 버린 양 외에는 다른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마15:24-28)"

라는 점을 보면 그렇다. 하지만 차별하셨으나 결국은 고쳐주신 것이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 당시에 현실적으로 차별은 있으나
그 차별이 영원함이 아니고 오늘의 어떤 의미심장한 예언을 이루도록 하신
기록이다. 즉 상대적으로 말해서 잃어버린 어린양은 일차적으로 오늘의 택한자
144000이고, 이방인들(개들)은 그 나머지 신자들이며,
다시 이차적으로 잃어버린 양들은 신자들이고, 이방인들(개들)은
불신자들이 된다. 그런데 이 모든 자들이
결국은 차례를 따라 구원으로 인도됨을 뜻했기 때문이다.



4. 오늘의 하나님(새이름)

오늘의 하나님은 완전히 승리의 하나님이다. 과거 사단의 악한 세상을
이용하여 예언으로 기록케 하신 것을 이루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비유와 상징으로 기록된 성경문자가 해독되는 때인데
그 해독된 말씀이야말로 진정한 하나님이 되신다.

즉 말씀은 로고스(이성)이며 로고스가 진정한 참 하나님이 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하나님은 로고스로 대하지 아니하셨다.
구약 때에도 신약 때에도 모두 이적, 기사, 환상, 꿈 등의 감성의 하나님으로
등장하셨었다. 하지만 오늘날은 그 모든 것들이 무엇을 뜻했는지 그 참
의미가 낱낱이 풀어지는 때이다. 전쟁에서 이기는 이적기사의 물리력이나
환상, 꿈 등의 감성의 하나님이 아니고 로고스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큰날의 전쟁(아마겟돈)도 논리의 소프트한 교리전쟁이며 종교전쟁이다.

성경은 오늘의 교리전쟁을 과거 물리적 전쟁으로 기록케 했던 것이다.
즉 형이상학의 하나님을 형이하학의 하나님으로 기록케 했다.
오늘의 하나님은 이렇게 상대적으로 평화의 하나님이며 논리의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으며 로고스의 말씀으로만 이기시는 하나님이다.

그러나 교회 밖 세상에는 여전히 물리적 전쟁이 범람하고 사람들이 불의의
사고 등으로 인하여 떼죽음을 당하는 환난이 비일비재하는데,
그같은 세상의 모든 악이 어떻게 해결되는지 알아보기로 한다.



5. 하나님의 전능하심이란 무슨 뜻인가

제목 1에서 상술했듯이 하나님의 창조는 악을 소멸해가는 작업이다.
악은 사단의 영역이므로 하나님은 사단과 결투하시며 날마다 이기어
가시는 일이 창조다. 하나님이 선의 창조를 위해 하나를 투자한다면
반드시 사단도 그에 대응하여 대결하게 되는데 성경에서 그 첨예한
예를 들어보자. 

예수님은 하나님이 인류구원을 위해 보내주신 독보적 존재다.
사단은 예수님을 아기탄생부터 싹을 잘라 원천봉쇄해야 한다. 때문에
아기 예수가 탄생하셨다는 소식을 접하자 사단은 헤롯왕을 통해 2살 이하의
남자 유아들을 죽이도록 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아기 예수를 죽이려고
수많은 유아들을 죽인 기록을 보고 경악하며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면

그 끔찍한 재난을 막지 못하셨는가를 의문시하며 하나님의 책임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이는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관계가 없으며
하나님의 책임은 더더욱 아니다. 왜 그런가?

역시 제목 1에서 상술했듯이,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분임에는
틀림없으나 그 창조의 무대가 하나님의 독무대가 아니라 사단으로부터
진로방해를 받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태초 창조의 시원이 흑암과 빛이 혼재된 혼원무극에서부터였다.
때문에 하나님은 창조 6일을 날마다 흑암(마귀)과 싸워 이겨야 한다.
하나님이 장군하면 사단은 멍군으로 맞선다. 하나님이 개국시킨 세상이지만
세상은 하나님의 세상만이 아니고 사단의 세상이기도 한것이다.
아니 흑암에서부터 창조되는 과정이기 때문에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
미완의 세상일수록 사단의 독무대에 가깝다고 할것이다.

다니엘서에 나오는 느브갓네살의 금머리 신상이 모두 마귀의 독무대 세상임을
알려주고 있다. 그리고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할 때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가로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마4:8,9)"
라는 점만 보더라도 세상은 마귀의 지배하에 있었다.
천하만국과 그 영광이라고 하나 마귀지배하에 있는 세상이므로 사람들은
고통으로 죽어가고 있다. 사망은 마귀의 흑암 세력에 의한 결과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마귀가 지배하는 사망세상을 멸하고 영원한 생명의 천국을
약속하신 분이다. 때문에 천국을 이루는 마지막 결전에서 하나님은 택한자들의
육체의 구원을 위하여 환난날을 짧게 감하신다고 했던 것이다(마24:22).
그런데 일차적으로 택한자들은 144000이다. 구원대상이 되는 오늘날 수십억
인류중에 144000 만이 하나님의 보호대상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그 외는 아무리 잘 믿는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크신
경륜이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그 경륜은 144000을 구원시키는데 사용된
경륜이며 들러리 밖에 안된다. 때문에 오늘날 인간적 기준에서 아무리
잘 믿고 성실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가 144000에 들지 않는 불택자라면
그는 사단이 안겨주는 불시의 사망을 당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절대로 없다. 

미국에서 테러로 쌍둥이 빌딩이 무너질 때도, 삼풍백화점이 무너질 때도,
대구지하철 화재가 나서 수없는 사람이 죽었을 때도, 불시에 일어나는
여러가지 화재나 비행기 추락사고나 항해사고에서 많은 사람들이 떼죽음을
당할 때 우리는 흔히 전능하신 하나님이 계신다면 어찌 그런 끔찍한 사고를
방치할까 의문시 하면서 하나님을 원망하게도 된다. 특히 믿는 사람들의
죽음을 볼 때는 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이는 아직 창조가 미완이기 때문에
어찌할 수 없이 마귀가 지배하는 재난이다. 너무나 안타깝지만 그러하다.

마귀는 흑암이다. 흑암은 하나님의 빛의 창조를 가로막아서서 환난과 재난과
사망을 몰고오는 파괴와 비창조의 세력이다. 물론 미시적 세계에서 볼 때
하나님도 자기백성이 범죄할 때 그들을 책망하고 돌이키기 위한 작전의 하나로
가끔씩은 환난을 사용하시는 분이시나 그것은 사랑의 책찍이며 경고의 형벌에
불과하다. 세상의 악과 환난은 모두 모두 원천적으로 하나님의 창조의 발목을
붙잡는 흑암의 주인공으로부터 왔다.

때문에 창조미완 중에 있는 세상의 모든 악이 하나님의 책임이 절대로 아니다.
하나님은 그 비창조의 흑암세력을 날마다 끊임없이 쳐부수어 창조하시는 분이다.
창조란 과거 완료형이 아니다. 현재 완료형도 아니다. 미래완료 형이다.
완료형 미래를 향해 끊임없이 창조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다. 그리고 이렇게
끊임없이 쉬임없이 날마다 완성을 향해 창조하시는 과정 하나 하나가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된다. 전능하심이란 창조 그 자체를 말한다.
창조과정 하나 하나에서부터 시작해서 완성까지 모두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된다.

그런데 하나님이 전능하시다고 해서, 즉 하나님이 창조하시는 분이라고 해서
그 창조진행(창조미완) 중에 있는 사단의 재난과 사망이 하나님의 책임이
아니다. 창조진행 중에 반드시 있을 수 밖에 없는 마귀의 재난과 사망이
어찌하여 하나님의 책임이 되는가?  그럴 수는 없다. 오히려 마귀의 재난과
사망을 날마다 청산해가시는 분이므로 하나님은 이긴자요, 전능자가 되신다.
하나님은 흑암의 세력을 걷어내고 날마다 완성을 향해 이기고 나아가시는
분이므로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항상 창조의 전능자요 이긴자가 되신다.


http://cafe.daum.net/kkysn2

    
정강길 (07-09-06 18:31)
 
"창조의 무대가 하나님의 독무대가 아니라 사단으로부터 진로방해를 받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 진로방해를 받을 수밖에 없는 하나님? 이게 무슨 전지전능한 하나님인가요?
혹시 이런 얘기들이 윗글에 대한 답변이라 생각해서 올리신 건지요?
제가 보기엔 이미 있는 보수 신앙의 하나님 얘기를 그저 동의반복하신 것 같은데..
사탄의 타락은 전능하신 하나님도 원래 막을 수 없었던 건가요?

혹시 괜찮으면 이번 세기연 9월포럼에 오시면 상세한 답변을 들을 지도 모르겠군요.^^;

김영순 (07-09-06 20:53)
 
정강길님의 글을 읽어보면 시야도 우주적으로 열려있고 이해의 폭도 넓더니만
(그래서 제가 갈채를 내내 보내드리며 제홈피에 님의 사이트를 소개했죠)
제 글에 대한 이해는 아주 편협하시네요.
왜 제 글을 닷짜곳짜 보수신앙에 연결시키시나요?

하나님이 본디 창조의 소재로 삼으신 말씀(물)이 
흑암과 빛 이라고 하는 쌍태아로써 6일창조를 출발시켰습니다.
즉 하나님은 그 근본이 전지전능하지 않았습니다.
그 안에 빛과 어둠을 함께 지닌 혼재아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전지전능 하시다는 것은 그분 안에 갖고 있는
어둠을 몰아내고 그 자리에 빛으로 충만시키고자 하는 그 자체가
위대한 6일창조인 것이며 전능인 것입니다.
이 같은 위대한 피흘리는 창조가  "전지전능" 으로 높이 평가될 수
있는 것임을 저는 제글에서 무수히 밝혔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자신 안에 있는 흑암이 자기 지분을 주장하니까
하나님은 빛의 창조를 하실 적마다 흑암에게 진로방해를 받게 되는 것이고
이것이 예수님(하나님)의 피흘림으로 나타내신 겁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창조 6일이 되면 모든 창조는 마침이 되는데
그 때는 어둠은 없고 빛으로만 남게 되기 때문에 그게 전지전능인 것입니다.
계21장 22절 이하를 읽어보세요.
그 때는 밤(어둠)이 없고 낮(빛)만  있다고 했습니다.
흑암 50프로와 빛 50프로의 혼재에서 창조 6일동안
밤(흑암)을 빛으로 100%로 바꾸시는 창조를 하신 분이므로
그게 "전능"  인 것입니다. 

제 글을 자세히 읽어보시지도 않고
전지전능 이라는 말을 했다 해서 그것만 딱 뽑아서 보수신앙으로 매도하시다니...
이해가 잘 안됩니다. 어느 보수신앙에서 제가 올린 글과 같은 설교를
들어보셨나요?  절대로 없었을 겁니다.
9월 포럼이 있다고 하셨는데...가고 싶군요.
근데 제가 사실은 건강이 별로 좋지 않아서 다음으로 미뤄질지 모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관리자 (07-09-06 21:12)
 
'전능'이라는 말뜻은 불가능이 하나도 없고 모든 것이 이뤄질 수 있게끔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김영순 (07-09-06 22:34)
 
전능 이라는 말뜻을 알기 때문에 전능 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전능은 관리자님이 말씀하신대로 입니다.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아직 창조완성이 아니고 미완입니다.
지금은 창조 여섯째날 중반부와 와 있는 미완입니다.
미완이기 때문에 세상이 악하고 환난과 아비규환 속에 처해 있는 겁니다.
완성은 창조 여섯째날 끝에 있게 됩니다.
창조완성의 여섯째날 끝을 지나면 일곱째날인 안식일이 되는데
그 일곱째날은 창조를 더 할이 일이 없어서 안식일 이라고 하며
안식일엔 복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무슨 복인가요?  영생의 복입니다.
안식일에 받는 영생의 복은 우리인간이 원하는 모든 좋은 것들이 들어 있습니다.
즉 관리자님께서 제시하신대로
하나님의 전능의 뜻이 그대로 성취되고 있는 때입니다.
관리자님께서

'전능' 이라는 말뜻은 불가능이 하나도 없고 모든 것이 이뤄질 수 있게끔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라고 하셨는데,  네!  맞습니다.
바로 그와 같은 극한 최상의 상황이 지상천국이 됩니다.
그게 하나님의 전능에서 나타나는 결과입니다.

    
정강길 (07-09-07 07:59)
 
그렇다면 더더욱 이상한 얘기죠.
이런 얘긴 아직 전능이 성취되지 않았기에 여전히 "신은 전능하지 않다"는 얘기와도 상동일 뿐이죠.
전능하다면 쌈빡하게 언능 잘 해놓기나 할 것이지.. 불필요하게 기다리게 할 필요가 뭐 있는 건지..
만일 모든 것이 전능한 신의 의도 안에 있다면, 결국 세계 안의 악에 대한 책임성도
전능한 신의 지시에 따라 저질러지고 있는 것이 아닌지..
우쨌든 이런 얘긴 반복되는 레퍼토리고 결국 하나마나한 얘기일 뿐~!
 
제가 볼 때, <과정신정론>이든 뭐든 이 문제를 다루고 있는 <신정론>Theodicy에 대한 신학서적들을
아무래도 좀 읽어보시고서 다시 얘기나누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김영순 (07-09-07 10:37)
 
창조란 번갯불이 번쩍하듯이 단 한순간에 뚝딱 해치워지는 게 아닙니다.
그렇게 창조를 해치워야만 하나님을 일컬어 "전능"  하다고 하는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창조를 6일동안 피땀흘려 쉬임없이 하신 분입니다.
(물론 창조6일이 우리가 사용하는 시간과 단위의 6일은 아님)
많은 질곡과 피흘림 속에서 자신안에 있는 흑암을 몰아내고 그안에 모두  빛으로만
채워가시는 창조이기 때문에 창조란 반드시 피흘림이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창조란 우리들과 함께 가는, 오랜 시간을 요구하는 진행형입니다.
처음엔 아주 혼돈(카오스)에서 시작해서 완전한 질서와 조화의 코스모스 세계로
옮겨가게 하는 게 창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예수님)을 알파(시작.카오스)와 오메가(마침. 코스모스)라고 하는 겁니다.
카오스를 코스모스로 옮겨가시는 하나님이시니 그게 창조요, 전능 하심이죠.

한순간 한 찰라에 뻔쩍 해치우는게 창조가 아니고 그게 전능이라고 하는 게 아닙니다.
정강길님처럼
그런 하나님으로 생각하고 그런 하나님을 전능하다고 하신다면 도깨비 하나님 일테죠.
저는 도까비 하나님이 싫어요, 이성(로고스)의 하나님이 좋아요. ^^*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모두 자기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하나님을 찾고 있으니
그걸 따지며 왈가왈부할 필요는 없겠죠?
정강길님은 정강길님이 좋아하시는 하나님을 찾으시면 되는 것이고
저는 제가 좋아하는 하나님을 찾으면 되는것 아니겠어요?

평안을 빕니다.

    
정강길 (07-09-07 11:00)
 
적어도 윗글에서 볼 때..
김영순님이 말하는 <전능>의 뜻은
"적어도 한순간 찰나에는 해치우진 못하는 전능"이군요.^^;;

글구 저한테 다음과 같이 얘기하셨는데..
김영순님 왈, "정강길님은 정강길님이 좋아하시는 하나님을 찾으시면 되는 것이고
저는 제가 좋아하는 하나님을 찾으면 되는것 아니겠어요? "

-그런데 왜 김영순님은 이곳에서 댓글로 제게 딴지를 거시는 건지요.^^;

평안을 빕니다.

김영순 (07-09-07 14:29)
 
네 님의 말씀이 맞아요! 
하나님은 한순간 찰나에는 창조를 뚝딱! 해치우지는 못하는 "전능" 입니다.
어떤 전능인가 하면...
저 우주과학이 말하고 지구과학이 말하고 있는 그 장구한 시간들 속에서
모든 역경을 딛고 창조를 진행시켜가시는 피흘리는 인격자로써의 "전능"  입니다.

즉 하나님의 창조란... 학문론적 창조요, 진화론적 창조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동산각종나무열매를 임으로 먹으라고 하신 겁니다.
동산의 각종나무열매 란 기독교 기성교단으로 출발한 나를 중심으로 볼때, 
나의 이웃들이며 그 이웃들이란
우리주변에 널려 있는 여러가지 사상과 학문들이며 종교의 가르침들입죠.
그같은 동산각종나무 열매들을 임으로 먹어본다면
성경이 모두 일사천리로 풀리게 되기 있기 때문에 그런 율법을 주신겁니다.

저는 님의 글에 딴지를 건게 전혀~  아닙니다.
저는 님의 13번 글 ...초월신론에서 <포월신론>으로...에
조금이나만 답변이 된다고 생각해서 올린 글입니다.
동산의 각종나무열매를 임으로 먹어볼 때 하나님의 창조란
도깨비 방망이를 휘둘러대는 창조가 아니고, 자연법칙을 따르는
학문적 창조요, 진화론적 창조이거든요. 즉 포월론적 신이거든요.
그러니까 당연히 한순간 찰나에는 해치우지 못하는 "전능"  입죠.
그러므로 딴지를 건것은 제가 아니고,  저를 무턱대로 보수신앙이라고
성급하게 몰아붙이신 정강길님 이십니다.

저는 솔직히 성경을 함께 풀어가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글을 올렸습니다.
글을 올리자, 님과 이곳 관리자님의 댓글을 통해서 새롭게 알게 된게 있습니다.
그것은 님은 성경을 함께 풀어가고자 하는 열린 마음이 아니고
기존의 성경을 부정하고 새롭게 성경을 다시 쓰시겠다는 의도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 님의 의도를 알게 되자 제가 할 수 있는 말인즉,
"님은 님이 좋아하시는 하나님을 찾으시면 되고 저는 제가 좋아하는 하나님을
찾으면 된다" 고 할수 밖에 없었습니다. 시종일관 딴지를 건게 절대로 아닙니다. 
댓글을 통해서 님의 마음을 간파했다는 게 저한테는 중요합니다. 
성경은 얼마든지 풀어질 수 있는데, 님은 그 성경을 부정하고
새롭게 성경을 쓰시고자 하시더군요.  왜 그리 힘든 작업을 하시렵니까?

사람들이 오늘의 신구약 66권에다 또 새롭게 더해진 새성경이 덧붙여진다면
얼마나 혼란스럽고 힘들겠습니까? 지금도 넘 힘드는데요... ^^;

평안을 빕니다.

    
정강길 (07-09-07 18:19)
 
제가 그럼 오해를 했었나보군요.
저로선 김영순님이 신을 말할 때 <전능>이라는 표현을 쓰셨기에
그 전능한 신은 진화론적이고 포월적인 신 이해와 충돌난다고 생각되어서 드린 얘기였습니다.
김영순님이 말씀하신 것은,
흔히 우리가 통용할 때 쓰는 사전적이고 개념적 의미로서의 전능 개념이 아니라
신의 여백이 가지고 있는 역설적 의미로서의 전능 개념으로 그럼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런데 보통 우리가 '전능'이라는 개념을 쓸 때는 불가능이 하나도 없는 사태를 가정하잖아요.
암튼 그런 차원에서 말씀드린 거였으니 너그러이 마음을 푸시길 바라며,
위에 쓰신 댓글은 큰 틀에서 본다면 저역시도 무리없이 수용할 수 있는 견해라고 여겨집니다.
다시 한 번 오해를 하게되어서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평안을 빕니다.

김영순 (07-09-07 20:05)
 
제가 마음을 푸는 것은 식은죽 먹기 입니다.
저는 처음부터 정강길님에 대한 호의가 가슴과 머리속에서 비등했으니까요.
그리고 사실 댓글을 통한 대화중에도 엉뚱하게 저를 보수신앙이라고 오해하고 계셨지만
그래도 제가 님의 콘텐트 글을 읽었던 중에 님의 마음중심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저는 놀랐으며 님은 무진장 정직하신 분임을 보았기 때문에
그런 오해마저도  솔직히 그렇게 싫지 않았을 정도입니다.

지금 고백하지만
그냥 정강길님이 한없이 좋았습니다.  그러니 마음을 푸는거야 식은죽 먹기죠. ^^
문제는  님이 지적하셨듯이,  "전능"  에 대한 님과 저의 개념이 서로 달랐기 때문임이
틀림없다는 생각으로 귀결됩니다. 
이제 님께서 제가 말씀드린 "전능"  에 대해서 이해를 해주시니 감사할 뿐입니다.

님께서 하시는 일마다 하나님의 큰 축복과 은총으로 대성하시길 바랍니다.
반드시 그리 되실 겁니다.

평안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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