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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대안교회를 말한다 (미래에서 온 교회 : 예수가족)    
  글쓴이 : 정강길 날 짜 : 09-01-13 06:40 조회(1770)
   트랙백 주소 : http://freeview.org/bbs/tb.php/b001/267 
  FILE #1 : 대안교회를 말한다-예수가족.pdf (185.6K), Down:46, 2009-01-13 06:40:36




예전에 교회를 잠시 시작했을 때 써 놓은 글인데 이제서야 웹상에 공개자료로 올려놓는 바이다.
읽어보시면 알겠지만 대안교회 형성에 있어 공동체 구성의 문제를 논한 글인데
다소 논란이 분분할 수 있는 글이기도 하다.
 
실제로 교회를 하자는 분들께 막상 이 글을 보여드리면 손사레를 치기도 했었다.
마치 (누가복음 18장에도 나와 있듯이) 예수님을 찾아갔던 부자가
"너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라"는 주님의 얘길 듣고 다시 근심에 빠진 사람처럼 말이다.
 
사실상 우리가 대안 기독교 신학을 추구하고 대안교회를 실천하고자 한다면
예수운동 공동체와 원시 초대교회 공동채 모델은 여전히 우리에겐 포기할 수 없는 그 무엇이잖은가.
적어도 새로운 대안 기독교를 실천하고자 하는 결단이 서 있다면 말이다.
 
나는 적어도 새로운 대안교회를 온전히 실천하고자 한다면
가장 큰 벽이 다름 아닌 <혈연가족>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 벽을 제대로 넘지 못하면 결코 대안교회라고 이름하기가 힘들다고 여겨진다.
 
가깝게는 예전에 민중신학자 문동환 목사님의 <새벽의 집> 공동체가
본인이 추구하는 대안교회 모델과 비슷한 모델이었다고 들었는데..
교회 구성을 위한 구조 형태는 비슷할 수 있겠지만
거기에는 신학적 노선의 자발적 합의가 전제되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본인의 방향과는 조금 다르지 않을까 싶다.
 
암튼 이 글은 기독교 사상에 대한 논의 글이라기보다
이미 새로운 대안 기독교에 대한 공감 및 신학적 노선 합의를 전제로 하고서
들어갈 수 있는 교회 공동체적 실천에 대해 모색해 본 글임을 분명하게 말씀드리는 바이다.
 
 
 
 
 
정관 (09-01-14 05:58)
 
돈?  예민하죠.전재산을 헌납하고 자신을 수도회에 맡기는 사람도 있고, 몸만 수도회에 입회하여 직업을 갖는 수도회가
많고요. 예수원도 그렇겠지만  하나님을 더 사랑하기 위해서 이러한 공동체적 삶을 형성하게 된게 아닌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소 엉뚱한 얘기 같지만 생명을 보존할 수 있는 곳이 어떤 곳일까 하고 탐사도 해 보고 지인으로 부터도 얘기를 듣기로는
도저히 사람이 살것 같지 않은 곳에 수도회들이 있어요..  이들이 뭐 비전연구 한것도 아니고 오로지 하나님 사랑일뿐인데
하나님께서는 참 희한한 방법으로도 준비를 시키는 구나 하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교회의 회복, 오염에 찌든 교회에 그나마 맑은 물을 공급할 수 있는 곳은 공동체적 삶으로부터 라는 생각은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과 선을 긋기가 참 어려울듯 합니다. 뜻과 비전을 공유한 사람들 그리고 구성원들간의 깊은 신뢰감 등...

가정을 이루고 있으면서도 공동체적 삶을 사는 곳이 외국에는 간혹 있는것 같은데, 우리나라 처럼 협소한 곳에서는
예수원이 거쳐온것과 같은 모형이 잘 어울리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해방 (09-01-16 00:59)
 
뉴스앤조이에서 "해방"이란 이름으로 댓글을 쓰는 김용호입니다. 님의 글을 읽고 반가운 마음으로 이 곳에 댓글을 씁니다.

성경의 약속, 즉 하나님의 나라는,

(1) 현실적인 차원에서는 사도 바울이 정의한 "한 몸"이지요.

(님께서 쓰신 "예수 가족"이 가장 우리 피부에 와 닿는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좀 관념적인 냄새가 나긴 하지만 "사랑하는 자들의 삶의 공동체"란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님의 "대안교회를 말한다 - 예수 가족"을 읽어보니 그 공동체의 현장에 대한 구체적인 개념이 제 생각과 여러 부분에서 너무도 흡사해 반갑기 그지 없네요.)

(2) 신비적인 차원에서는 사도 바울이 정의한 "새로운 피조물"이지요.

(님께서도 출발을 "새 사람"으로 설정하셨네요. 저는 이 부분을 신비 그 자체라고 믿고 있습니다. 혈연을 뛰어 넘는 존재..... 즉 본능이 사라진 존재라는 것이지요. 공포와 탐욕이라는 본능이 점차 사라져 가는 존재, 그리고 그 본능이 완전히 사라지기를 소망하게 된 존재.... 이는 인간의 고상한 인격의 차원을 넘어서는 신비의 영역이라고 봅니다. 개인의 결단으로, 또는 인격의 성숙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보는 것이지요.)

저는 성경의 약속이 이렇게 위의 두 축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봅니다. 성경의 계시의 논리가 그러하고, 또한 제 체험이 그러합니다.

대안기독교... 저는 진정한 종교개혁이 이제 시작될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이미 시작되었다는 느낌도 있습니다. 정강길님의 활약도 제가 갖는 그 느낌의 근거 중 하나입니다. 정강길님의 사명은 저와는 약간 다르다고 여기고 있긴 합니다만 (제 사명은 성경적 신비주의에서 출발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양한 일꾼들을 동원하시니 하나님께서 항상 님과 함께 하시며 힘과 지혜를 더 하실 것으로 믿고 기도합니다.

    
정강길 (09-01-16 09:08)
 
반갑습니다. 해방님^^
다름이 아니라 해방님이 말씀하시는 '신비'라는 게 어떤 것인지 궁금하군요.
말씀하신 '성경적 신비주의'라는 것에 대해서도 말이죠.
참고로 제가 보는 신비는 합리와 동전의 양면이라고 볼 따름입니다만..
암튼 해방님이 생각하시는 진정한 종교개혁에 대해서도 듣고 싶구해서 말씀드리는 바입니다.^^;

해방 (09-01-16 18:57)
 
답글 감사드립니다.

답변에 앞서 님께서 쓰신 "<하나님 중심/계시/신비> 중심의 사고에 감추어진 폭력"에 대한 제 의견부터 말씀드리는 것이 좋겠네요.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그런데 저는 님의 주장이 정당성을 갖게 된 데에는 전제가 있었다고 봅니다. 그것은 저들이 주장하는 신비가 실체가 없는 신비라는 것이지요. 즉, 저들이 단지 관념적인 이론에 불과한 것을 신비로 포장하기 때문에 님의 주장이 옳은 것입니다. (저는 그 대표적인 예로 "이신칭의" 교리를 꼽습니다. 그야말로 관념의 유희지요.)

구약에서 계시된 새 언약은 두 가지 축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다윗의 후손의 출현과 하나님의 신의 강림이지요. 그래서 예수님도 " 다 이루었다"라고 선포하시면서도 또한 "그 날이 오면...."이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새 언약의 실제적인 성취를 다가 올 성령의 역사로 미루고 계시지요. 기독교회가 워낙 예수님을 편애하다보니, 또는 성령의 역사가 사도 바울 이후로 잠잠하다보니 교회사에서 실체는 없고 단지 관념적이고 종교적인 이론에 불과한 교리가 신비로 포장되어 기독교가 거대하면서도 허망한 종교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게 되었다고 저는 봅니다.

그 와중에 조금 엉뚱한 신비주의가 교회사의 한 편을 장식하게 되지요. 소위 그리스도와의 신비한 합일, 또는 초자연적인 체험, 기적 등등이 묘한 매력을 발산하면서 수도원, 기도원 등에 뿌리를 두고 나름대로 교회사에서 지위를 차지해 왔습니다.

저는 전자는 현실을 중시하면서 신비를 외면한 흐름이고 후자는 신비를 중시하면서 현실을 경시하는 흐름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신비한 기적을 간구해서 현실에서 만사형통하자는 해괴한 흐름까지 여기서 언급할 필요는 없겠지요?)

성경은 지극히 현실적인 것을 약속하시지요. 예수님이 사랑하신 것처럼 서로 사랑하는 제자들의 작은 무리의 "현실에서의 삶"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삶"이 실제로는 불가능하다는 데에서 발생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모든 거룩하고 선한 생각과 행위가 모두 탐욕과 공포에서 기원하기 때문이지요. 금욕적인 삶, 이타적인 삶 심지어 천국에 대한 소망도 인간의 탐욕과 공포에서 기원합니다. 한 마디로 예수를 믿는 것까지도 탐욕과 공포 때문이지요. 그러니 아무리 사랑하며 살려고 해도 조금만 상황이 악화되면 금방 바닥을 드러내는 것이지요. 임계량이 조금씩 다를 뿐인 도토리 키재기에 불과한 사랑.....

성경의 지극히 현실적인 약속이 이루어지려면 공포와 탐욕, 즉 "인간의 본능"이 사라지는 신비한 일이 먼저 진행되어야만 합니다. 죄와 사망의 법에서의 실제적인 해방이지요. 만약 그렇지 못하면 사명의 감당도 결국은 바벨탑을 세우는 일로 끝나게 됩니다. 현실의 변화를 위한 전제조건으로서의 존재의 신비한 변화.... 이것이 성경의 새 언약이라고 저는 해석합니다. 그리고 제가 속한 작은 공동체에서 형제자매들이 함께 실제로 체험해 가고 있습니다. 제가 말씀드린 성경적 신비주의란 바로 이것입니다.

이러한 새 언약의 성취는 인류의 역사적인 생활 방식, 즉 생존과 번영을 희구하는 탐욕과 공포를 기반으로 한 다양했던 생활 방식과는 전혀 다른 생활 방식을 이루게 됩니다. 초대 교회에 잠시 불완전한 모습으로나마 나타났다가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해체되어 버렸던 그 생활 방식이지요. (저도 집단 거주는 그리 바람직하다고 보지 않습니다. 실제로 소아시아의 초대교회는 그런 것이 아니기도 했구요.)

이러한 인간 존재의 신비한 변화에 기초한 현실에서의 새로운 생활 방식이야말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세상의 빛"이라고 저는 봅니다. 그리고 그런 빛이 여기저기서 출현해 세상을 밝게 비추게 되는 진정한 종교개혁이 다가오고 있다고 저는 느낍니다. 신자유주의라는 벼랑끝까지 온 인류의 생활 방식을 보아도 그렇고, 포스트모더니즘의 해체주의 사조를 보아도 그렇고, 인류의 생활 방식에 대한 다양했던 아이디어가 이제는 한계에 다다랐다는 것도 진정한 종교개혁을 가능케 하는 역사적인 환경이기도 합니다. 물론 대부분의 인간들은 앞으로도 여전히 이 빛을 보고 펄펄 뛰겠지요. 미쳤다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이는 우리가 어쩔 수 있는 일은 아니겠지요.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진행되기 시작했다고 저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정강길 (09-01-17 15:42)
 
답변감사드립니다.
해방님께서 올려주신 '성경적 신비주의'라는 글을 읽어보니
제가 지향하는 바와도 크게 다른 것 같지는 않군요.
적어도 쓰신 글을 놓고본다면 그렇게 느껴집니다.

결국은 인간의 본능이 예수의 삶의 방식 생활 방식으로 새롭게 대체되어야 하는 거겠죠.
앞으로도 진정한 종교개혁을 위하여 서로 간의 지속적인 나눔과 협력이 있길 바라겠습니다.
좋은 말씀이고 좋은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고맙습니다.

해방 (09-01-18 09:28)
 
"앞으로도 진정한 종교개혁을 위하여 서로 간의 지속적인 나눔과 협력이 있길 바라겠습니다."

정강길님.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이 땅에서의 삶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이 바로 그것이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더우기 정강길님과 제가 하나님의 나라의 현실적인 모습에 대한 이해가 거의 동일하니 그 기쁨이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사실 이에 대한 성경의 논리는 지극히 단순 명료한데도 국가교회라는 환경이 사람들의 눈을 가려왔던 것으로 저는 보고 있습니다.)

정강길님과 제가 다른 점은 일종의 방법론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새 사람(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이지요.

저는 이것이 인간에게는 완벽하게 불가능한 일이라는 성경 해석과 제 개인의 체험과 인식에서 출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비한 약속이라고 보는 것이지요.
물론 실제로 본능이 사라져 가는, "그 결과가 객관적으로 증명되는" 신비를 말하는 것입니다.
(제가 "예수님의 십자가로 구원받았다고 치고" 넘어가는 황당한 관념의 유희를 말하는 것은 당연히 아닙니다.)

그러나 님께서는 새 사람이 되는 것이 인간에게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고 인식하시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그리고 새 사람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과 인간의 순종과 결단의 부분이라고 보시는 것이라 여겨집니다.

이에 대해 어느 쪽이 옳으냐로 다툰다면 참 안타깝고 어리석은 일이 되겠지요. 다만 자기가 받은 은혜와 자기의 깨달음에 기반을 두고 "하나님의 나라가 현실이 되는" 진정한 종교개혁을 위해 각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서로를 격려하면서 경험과 깨달음을 나누고 현장의 진행 상황을 지속적으로 자료로 공유한다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데에 충성을 다하는 다양한 일꾼들의 바람직한 모습이 되겠지요.

계속해서 이 귀한 싸이트에 찾아오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강길 (09-01-18 10:33)
 
말씀하신 글 가운데서 해방님이 보시는 '새 사람'에 대한 설명과
'인간에게는 완벽하게 불가능한 일'이라는 게 구체적으로는 어떤 의미인지 좀더 설명이 필요할 듯 합니다.
아직 어떤 점이 다른지에 대해선 제가 잘 몰라서 좀더 문의드리는 것뿐입니다.
일단 저 역시도 인간은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우리에겐 완벽이 있는 게 아니라 단지 주어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할 뿐인 거죠.

제가 보는 새사람은 나 자신이 본래 하나님나라의 구성원이었다는 사실을 '깨침'으로서 시작되는 것이며,
최종 목적지인 그리스도가 되기까지 끊임없는 수행과정에 놓여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인간으로서 완벽한 존재가 될 순 없기에 결국은 언제나 그 형성과정에 있는 존재일 뿐이지요.
그런 점에서 불교에서 말하는 '돈오점수'의 과정과 비슷하다고도 볼 수 있겠군요.

그렇다고 해도 우리들로서는 궁극적인 상생의 나라인 하나님나라에 대한 구현을
먼저는 예수의 라이프스타일을 통해서 찾고자 하는 게 기독교의 포지션인 것 역시 분명합니다.

참고로 제가 <신비>라는 표현을 쓰는 경우는 현실 세계에 없는 새로움(novelty)의 출현을 의미할 때입니다.
물론 이전 세계에 없던 그 새로움들은 하나님께서 머금고 계시다가
인간을 비롯한 모든 현실 존재들의 선택 결단들에 주어지고 있는 것이지요.
그렇게 볼 경우, 매순간마다 새로움들이 끊임없이 피고지는 자연세계를 비롯하여
우리네 모든 일상의 소소한 찰나적 순간들도 모두가 온통 신비로운 사건인 것입니다.

어쨌든 본능이 사라지고 예수의 라이프스타일로 대체하고자 하는 데에는 끊임없는 수행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것은 언제나 최선을 다한 뒤에 결과는 하늘에 맡기는 마음일 것인데
단지 그러한 결과가 체험자에겐 더욱 놀라운 신비로서 느껴지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아직 여전히 부족함도 많은 사이트인데 이렇게 찾아주시겠다니 저로서도 감사할 따름입니다.

해방 (09-01-18 17:25)
 
제가 생각하는 새로운 피조물에 대해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1. 저는 먼저 인간 존재에 대한 성경의 정의에 주목합니다. 그리고 아이러니칼하게도 그것을 근접하게나마 파악하고 있는 것은 주류 기독교신학이 아니라 불경이라고 보고 있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소위 "미망"이라는 것이지요. "절대 미망"입니다. 무슨 생각을 해도 미망 속에서 하는, 깨달아도 미망 속에서 깨닫는 것에서 한 치도 더 나아가지 못하는 처참한 존재지요. 이것이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타락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이는 모든 인간이 각자 자신의 "선악관" 속에 갇혀 있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지요. 세상의 온갖 지혜를 학습한다고 해도 또 다른 사람의 "선악관"을 차입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는 것으로 표현된 창세기의 타락 사건.... 완벽한 설명입니다. 하지만 서구 주류 신학은 소위 "오염 이론"이 말해 주듯이 불완전한 타락을 주장합니다. (칼빈의 전적 타락 주장도 그의 논리 전반을 살펴볼 때 예외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타락했지만 그래도 쓸 만한 존재라면서 미련을 못 버리지요. 자신들이 보기에 자기 자신이 그래도 아직은 쓸 만하게 보이기 때문이겠지요. 심지어 원죄론에서 보듯 타락을 일회적인 불순종 사건으로 보기도 합니다. 자기와는 상관 없다는 것이지요. 다만 그 원죄가 인류에게 전가되었다는 관념적인 차원의 문제만 있을 뿐, 자신은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그럴 듯한 존재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질 못합니다.
(너무 장황하게 길어지네요. 핵심만 말씀드리지요.)
인간은 선악을 판단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음으로써 선악판단의 주체가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벌거벗고 살게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벌거벗은 것이 악하다고 판단하여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는 모습에서 보듯이 하나님의 선악판단과 충돌을 일으킴으로써 에덴에서 추방되면서 이제는 생존과 번영이라는 당면과제에 부닥치지요. 그 결과 "나의 생존과 번영을 위한 탐욕과 공포"에 휩싸이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이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사랑과 증오라는 두 가지 스킬을 만들어 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지요. 이것이 미망에 빠져 있는 타락한 인간의 실존입니다. 즉 인간은 무슨 갸륵하고 거룩한 생각을 하고 실천을 한다 해도 "나의 생존과 번영을 위한 탐욕과 공포"의 몸부림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채워지지 않지요. 정확하게 일체개고의 상황입니다. 가난했던 자가 먹고 살 만하게 되었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닌 것이지요. 또한 인간의 증오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도 아니고 인간의 사랑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도 아닙니다.

2. 다음으로 성경의 새로운 피조물의 특징에 주목합니다. 당연히 타락에서의 회복이라는 면이 주제가 되지요. 그러므로 논리의 흐름상 이는 첫째로는 자신의 선악관 뿐 아니라 인간의 모든 다양한 선악관에서 벗어난 존재입니다. (놀랍게도 모든 인간은 각기 서로 다른 선악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둘째로는 생존과 번영에 대한 관심이 사라진 존재입니다. 물론 나의 생존과 번영 뿐만 아니라 타인의 생존과 번영에 대해서도 관심이 사라집니다. 성경의 표현을 빌리자면 터진 웅덩이(렘2:13)를 파는 일을 중단하는 것이지요. 나를 위한 것이든, 이웃을 위한 것이든 말입니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다른 선악관이 생겼고 다른 관심사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부분이 제가 말씀드리는 신비의 핵심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뒤에서 자세히 언급하겠습니다.

3. 세 번째로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 (개조 또는 재창조) 되기 위한 방법론에 주목합니다. 님께서도 돈오점수를 말씀하셨는데 저도 동의합니다. 사도 바울도 푯대를 향해 달려가는 것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돈오와 점수의 실제 과정이 어떠한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돈오에 대해서는 사도 바울은 사람으로부터 받는 것도, 배운 것도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았다고 증언합니다. (갈1:12)

(죄송합니다. 설교 후에는 거의 탈진이 되는데 그런 상태에서 쓰는 것이 여기까지가 한계인 듯 싶네요... 나중에 이어서 쓰겠습니다.)

해방 (09-01-19 06:01)
 
(이어서 쓰겠습니다.)
그런가 하면 사도 요한은 형제자매들이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고 말하지요. (요일2:20) 예수님이 약속하셨던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되는 "그 날" (요16:13)이 그들에게 온 것입니다. 하지만 서구 주류 기독교는 이러한 깨달음의 "출발점" (또는 "근원")을 배척해 왔습니다. 그 대신 성경 연구 또는 학습을 제시하고 있지요. 그 차이는 엄청납니다. 첫째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실제로 체험했느냐, 못 했느냐의 차이이고 (사도 바울은 고후5:17 이하에서 새로운 피조물의 특징으로 먼저 하나님과의 화목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둘째로는 미망 밖에서 자기를 보았느냐, 미망 안에서 자기를 보았느냐의 차이지요. 이 차이는 깨달음 이후의 점수의 과정에서 더욱 확대됩니다. 전자는 나날이 본능에서 해방되어 가게 되지만 후자는 하나님을 자기의 본능의 충족을 위한 간구의 대상, 또는 인도자로 설정하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은 왜 사느냐의 문제의 차이로 귀결되는 것이지요.

4. 네 번째로 새로운 피조물의 사명에 주목합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하고 본능 때문에 살아가는 인간의 처절한 실존에서 벗어나는 과정에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도 자기처럼 만들고자 하는 사명감에 불타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계속해서 형제자매들에게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 외치는 이유가 그것이지요. 반면에 미망 안에서 깨달은 자들은 하나님을 자기의 본능의 충족을 위한 간구의 대상, 또는 인도자로 설정했기 때문에 성향에 따라서 몇 가지 형태를 나타냅니다. 이기적인 성향의 사람들은 자기의 현실에서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 종교생활을 병행하고, 이타적인 성향의 사람들은 타인의 현실에서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것을 바람직한 종교생활로 설정합니다. 그리고 합리적인 상식에 충실한 사람들은 공동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 다양한 노력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새로운 피조물의 관심은 오직 하나, 다른 사람도 나처럼 만들어야 한다는 소원밖에는 없지요. 자기를 위해서든 타인을 위해서든 생존과 번영을 희구하는 것 자체가 미망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새로운 피조물은 다른 사람도 자기처럼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기 위해 자기 자신과 재물까지 허비하게 되는 것이지요. (고후 12:15) 이것이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는 성경의 아가페 사랑이라고 저는 이해합니다.

5. 마지막으로 왜 공동체이어야 하는가에 주목합니다. 부유하든 가난하든 세상 사람들은 누구도 예외 없이 오로지 생존과 번영을 위한 공포와 탐욕의 몸부림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이에 방해가 되는 모든 것에 대해 공격적입니다. 필사적이지요. 따라서 새로운 피조물은 모든 사람들로부터 공격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빛으로 오는 자들은 어떤 이유에서든 인간의 운명이나 실존에 대해 절망을 느낀 자들 중에 하나님을 바라보게 된, 즉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미 돈오점수 중인 새로운 피조물들은 이 새로운 멤버(지체)들을 목숨을 다해 섬기게 됩니다. 자기들처럼 돈오점수 시키기 위해서지요. 물론 이 소식을 세상에 알리는 일도 열심히 해야지요. 언젠가 절망하게 되면 우리에게 오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생존과 번영을 위해 공포와 탐욕으로 몸부림치던 미망의 삶에서 우리처럼 해방되라고 말입니다.

<사족>
1. 저는 서구 교회의 성경 해석, 즉 논리가 꼬이게 된 원인을 국가교회라는 인위적인 체제를 부정할 수 없었던 그들의 환경에서 찾습니다. 성경의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개념을 미망 속의 존재에 불과한 윤리도덕적인 인간상으로 읽어냄으로써 국가교회 체제를 합리화하려고 한 것이지요. 물론 그나마도 모순을 가지게 되자 보이지 않는 교회와 보이는 교회라는 궤변까지 등장하게 되고.... 무엇보다도 그 애처러운 몸부림은 이신칭의 교리에서 그 극에 달하고 있습니다. 가톨릭과 개신교 공히 말이지요.

2. 혹 제 글의 몇몇 부분들이 정강길 님에 대한 공격의 의미로 비쳐지지 않을까 걱정이 좀 되네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하나님께서 다양한 일꾼들을 불러 쓰신다고 믿고 있습니다. 각자 받은 은혜대로 열심을 다하는 것이 부름 받은 자들의 올바른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서로 격려하고 또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을 발견하면 구하기도 하고 돕기도 하고.... 이것이 기존의 사도들과 바울의 관계였다고 저는 봅니다. 제가 받은 은혜를 소개해 드렸으니 그동안 이 싸이트에서 제가 받았던 여러가지 도움에 빚을 갚았다는 마음도 드네요. ^.^  앞으로도 계속 이 귀한 싸이트에서 도움 받을 것을 찾겠습니다. 정강길님에게 놀라운 지혜와 능력과 열심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정강길 (09-01-19 13:25)
 
해방님은 목사님이신가요? 설교를 하신다고 하셔서리..^^;

제가 보는 인간도 미망 속에 놓여 있는 것인데 단지 그러한 가운데서
진리로의 접근선적 접근의 과정만 영원히 있을 따름이라고 봅니다.
님이 말씀하시는 생존과 번영에 대한 추구는 제가 다른 곳에서도 언급한 적 있는
뿌리 깊도록 치명적인 종교 우상인 <'힘의 과잉'에 대한 숭배>를 떠올리게 하기도 하네요.
깊은 무의식에서 발현되는 이같은 <'힘의 과잉'에 대한 숭배>라는 무의식적 종교로 인해
결국 많은 사람들도 생존과 번영에 대한 추구를 하는 거라고 보니까요.

반면에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힘의 과잉이 아닌 <힘의 균형적 성장>을 도모한다고 봅니다.
당연히 이것은 앞의 것과는 전혀 다른 패러다임에 기반할 때만이 가능할 테죠.
참고로 제가 말씀드리는 깨달은 자 혹은 자각인에 대해서는
<화이트헤드와 새로운 민중신학>제8장에 상세하게 쓰여 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말씀하신 글 중에서 몇 가지만 질문을 드려도 괜찮을는지요..^^;;
해방님이 말씀하시는 새로운 피조물은 그렇다면
미망 속의 새로운 피조물과 미망 밖의 새로운 피조물로도 나뉠 수 있는 것인가요?
그럴 경우 이에 대한 구체적인 사례로서 들 수 있는 것으로는 어떤 것이 있을가요?
그리고 언급하신 국가교회 체제라는 거에 대해서도
서구 교회 성경해석과 어떻게 연관되는지에 대해서도 좀더 설명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솔직히 아직까지는 저의 대한 공격은 고사하고 그다지 이질적이라거나 충돌나는 점을 느끼진 못했습니다.
해방님께서 말씀하신 설명들에 대해 큰 틀에선 저로서도 수용가능하다고 여겨지며
다소 추상적인 설명의 느낌도 없잖아 있긴 하지만 제가 잘 모르는 구체적인 부분들에 대해선
좀더 설명을 해주십사 하고 해서 이렇게 부탁드리는 것이랍니다. 고맙습니다^^

해방 (09-01-20 08:14)
 
답글 감사드립니다.
제가 제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시간이 주중에는 아무리 잠을 줄여도 하루에 3-4 시간에 불과한데
그만 정강길님의 글들을 읽느라 모두 써 버렸네요. ^.^
귀한 것을 많이 얻고 있습니다.
오늘 밤이나 내일 새벽에 답글을 올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저는 교회 개척 5년차인 50대 중반의 전도사입니다.
목사 안수를 놓고 형제자매들과 고민만 계속하고 있네요.
받아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정강길 (09-01-20 15:05)
 
많이 바쁘신가보군요. 저로 인해
행여 시간이 많이 낭비되시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답글은 언제든지 시간 나실 때 올리시면 되겠습니다.
또한 기회가 되면 담임하시는 교회에 대해서도 한 번 소개를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렇지만 급한 건 아니니까 언제지든 마음 편하실 때 혹은
훨씬 나중에라도 괜찮으니 그때 글을 올려주셔도 무방합니다.^^*
늘 건강하시길 바라구요.

주님의 평화~!!

해방 (09-01-21 20:22)
 
낭비라니요! 정강길님.
오히려 이 싸이트에서 요즘 행복한 시간을 보내게 되어 감사를 드립니다. 토막 시간들이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제가 생활비를 버느라 무척 바쁘거든요.

물론 제가 생존과 번영을 위해 돈을 버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돈을 벌지요. 새로운 피조물은 먹든지 마시든지, 돈을 벌든지 쓰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그것을 합니다. 미망에서 벗어난 상태이지요. 하지만 항상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미망에서 벗어났다가 다시 미망에 빠졌다가를 반복합니다. 말하자면 예수 안(en Christo)과 밖을 오락가락하는 것이지요. 이것이 새로운 피조물의 상태입니다. 성경적으로도 그렇고 제 체험으로도 그렇습니다. 물론 예수 안에 있는 시간이 점차 늘어가는 "믿음의 진보"가 평생에 걸쳐 계속 되지요.

반면에 옛 사람은 항상 미망 속에 있습니다. 먹는 것도 마시는 것도, 심지어 예수를 믿는 것도 자기의 생존과 번영을 갈구하는 탐욕과 공포 때문에 합니다.
얼마나 탐욕과 공포가 심하면 예수까지 믿겠습니까.
얼마나 탐욕과 공포가 심하면 금욕적인 삶까지 살겠습니까.
얼마나 탐욕과 공포가 심하면 이타적인 삶까지 살겠습니까.
단 한 번도 예수 안(en Christo)에 들어 와 본 적이 없는 존재지요.

(새로운 피조물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사는 것과 옛사람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사는 것의 차이에 대한 성경의 기준은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않으시고 심령을 감찰하신다고 말씀하신 것이 제시될 수 있습니다. NIV와 유대교 랍비들의 번역본은 Motives are weighed by God 이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저도 여기에 동의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사는 동기가 무엇이냐를 따지신다는 것이지요.)

서구 기독교의 비극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콘스탄티누스가 교회를 점령한 이후 서구 교회는 국가교회라는 괴물을 합리화하기 위해 전 국민에게 세례를 주고 세례 받은 전 국민을 "예수 안에 있는 자"로 규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성경에 대한 근본적인 왜곡이 시작되는 지점입니다.

예수님은 귀한 것을 개와 돼지에게 주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 본능이 사라지고 예수님처럼 서로 사랑할 수 있게 되었거나, 적어도 그렇게 되기를 소원하는 사람들로 작은 무리를 이루라고 하셨던 것이지요.

그런데 국가교회라는 괴물은 그 나라에 태어나기만 하면 개든 돼지든(개와 돼지라는 표현은 예수님이 쓰신 표현을 인용하는 것일 뿐입니다. 너무 거슬리게 듣지 마시길.... ^.^) 가리지 않고 크리스찬, 즉 예수 안에 있는 자라는 딱지를 붙여줍니다. 국가교회라는 괴물의 권위와 이름으로 말이지요. 성경에서 물과 기름같이 분리되는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의 집합과 개와 돼지들의 집합이 동일한 집합이 된 것이지요.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조화를 넘어 합체가 되는 대단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

이제 문제가 심각해졌습니다. 99.999%가 성경 말씀과 맞지 않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집단을 교회라고 부르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지요. 그리고 당연히 개와 돼지들이 교회의 리더들이 되고 교회는 이런 상황 하에서 성경을 연구하게 됩니다.

그 참담한 결과는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의 논쟁을 보면 명확히 알 수 있습니다. 구원의 조건에 대해 어거스틴은 뜬 구름 잡는 이야기와 같은 믿음을 주장하고 펠라기우스는 개와 돼지들의 윤리도덕에 불과한 것을 기준으로 한 삶을 주장하지요. 이 논쟁은 1700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는 것은 “실체가 없는 구원”을 전제로 성경을 보기 때문입니다. 개와 돼지들이 구원 받은 존재, 예수 안에 있는 존재로 규정되는 국가교회라는 환경 하에서는 자연히 구원은 실체가 없는 종교적 수사에 불과하게 될 뿐이지요.

성경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성령을 받아(갈3:2) 본능이 사라진 새로운 피조물이 된 자들이 적은 무리를 이루어 예수님처럼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을 말씀하는데
서구 교회는,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칭해진(갈2:16) 자들이 세상의(개와 돼지들의) 윤리도덕에 맞는 착한 삶을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서구교회는 지금도 국가교회의 성경해석의 전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을 위의 비교에서 알 수 있습니다. 즉, 아직도 어거스틴류의 예수님의 피를 바른 개와 돼지(참으로 관념의 유희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를 주장하거나 펠라기우스류의 착한 개와 돼지(개와 돼지들의 윤리 도덕은 인간의 실존의 궁극적 문제에 대해 접근조차 할 수 없는 천박한 수준의 것입니다)를 말하는 것이지요. 한국교회야 서구교회의 아류이니 굳이 따로 이야기할 것이 없습니다.

저는 구약과 신약을 관통하는 성경의 가장 핵심적인 진리는 인간의 “선악관”에서의 해방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정강길님의 “만무”에 대한 글들에서 같은 관점을 발견하게 되어 참으로 반가웠습니다만 육조 혜능의 “不思善 不思惡”이 중국 선종의 진리의 핵심이라고 보는 저는 서구교회가 국가교회라는 환경의 한계뿐만 아니라 헬라 철학적인 인식이라는 한계도 심각하게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이제 동양의 눈으로, 특히 불교의 눈으로 성경을 보는 시도가 점차 중요해지리라 여겨지기도 합니다. 물론 불교의 눈도 성경에 의하면 헬라 철학만큼이나 개와 돼지들의 눈이지만 말이지요. 하지만 어쨌든 개와 돼지들의 언어로 쓰여진 성경이니 다양한 개와 돼지들의 눈을 모두 동원해서 성경을 볼 의무가 우리들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저는 정강길님의 글들을 읽으며 제 인식의 지평을 넓혀가는 재미가 쏠쏠하답니다. 님께 감사드리고 또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사족> 다시 와서 읽어보니 아무래도 개와 돼지라는 표현이 제 자신의 눈에도 거슬리네요. 하지만 성경적인 논지를 명확히 하기 위해 예수님이 쓰신 표현과 그 의미를 제 나름대로는 그대로 옮긴다고 생각하며 사용한  것이니 이곳 회원 여러분들께서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정강길 (09-01-22 08:56)
 
성심어린 답변 감사드립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예수의 안과 밖을 왔다갔다 하지만 옛 피조물은 항상 미망에 있다는 거군요.
글구 국가교회의 폐해와 그 한계를 어거스틴 펠라기우스 논쟁에서 명확히 알 수 있다는 점은 이채롭군요.
혹시 괜찮으면 현재 전도사님으로 몸담고 계시는 교회에 대해서도 소개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추천할 수 있는 교회라고 할 경우 이곳 세기연 사이트에도 추천을 하고 싶군요.
앞으로도 좋은 얘기 많이 나눌 수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sydney (09-01-28 11:23)
 
주마간산으로 댓글을 대강 보고 인상을 올립니다.
다 좋은 말씀인데 해방 님이 말끝 마다 '성경적'이라고 하는데 좀 걸리네요.
왜냐하면  '성경적' 찾는 사람치고 균형 있는 사고를 가진 분을 별로 보지 못해서요.
나중에 궁하면 꼭 '성경에 이렇게 써 있다'로 돌아가더라고요.
소위 내재론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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