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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왜 이현주 목사는 같은 감리교인 김홍도보다 법륜스님과 더 친할까?    
  글쓴이 : 미선이 날 짜 : 10-03-30 13:59 조회(1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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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현주 목사는 김홍도보다 법륜 스님과 더 친한 것일까?
 
사유의 궁극적 기초 틀에 해당되는 철학의 중요성과 그 소통성 

물음 하나,
 
“김홍도 목사와 이현주 목사는 같은 기독교인데다가 같은 감리교 출신의 기독교인이다. 그런데도 둘의 신앙은 왜 그토록 서로 이질적으로 느껴질 만큼 완전히 다르게 느껴지는 것인가? 반면에 이현주 목사와 법륜 스님은 서로 종교가 아예 다른데도 둘의 신앙은 왜 다르게 느껴지지 않고 왜 그토록 서로 친화적으로 느껴지는 것일까? 왜 이러한 현상들이 발생되며 그것의 근원적인 이유는 또한 무엇인가?”
 
 
철학이란 세계(존재)를 이해하는 가장 기초 전제들에 대한 탐구 영역
 
철학과 신학은 그 선 자리의 물음의 지평이 이미 다른 자리다. 철학은 모든 학문의 기초 베이스에 자리하는 학문이다. 그것은 ‘나는 이 세계를 어떻게 보고(해석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며, 결국은 우주론과 존재론에 대한 형이상학적 물음의 차원으로 가게 된다. 다시 말해서, 내가 세계를 어떻게 보느냐 혹은 이해하느냐에 따라 이 세계는 전혀 다른 식으로 해석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세계에 대해서 나름대로 썰을 풀고 이바구를 하고 있는 한, 그 누구도 철학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다. 
 
누구나 자기가 보는 나름대로의 세계 이해가 있다. 그것이 바로 그 사람에게 있어서의 철학이다. 우리는 흔히 <관점의 차이>라는 표현을 잘 쓴다. 바로 그때의 관점의 기준이 그 사람에게서의 철학이다. 따라서 그 관점이 서로 어긋나 버리면, 표상된 단어가 같다고 해도 정작 그 단어가 지시하는 개념(뜻)은 전부 어긋나 버림은 말할 나위 없다. 예를 들어, 같은 단어인 하나님, 예수님, 교회, 인간, 구원, 복음 등등 이러한 기독교 용어를 똑같이 나눠쓰더라도 서로 해석하는 생각의 틀(프레임) 자체가 달라버리면 실상은 서로 전혀 다른 하나님, 서로 전혀 다른 예수님, 교회, 인간, 구원, 복음 등등으로 갈라지게 되는 것이다.
 
“존재는 관점이다” - 아인슈타인
 
일상적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생각의 관점 혹은 기준점이 타당한 지에 대해선 제대로 잘 살펴보지도 않고서 그저 곧잘 일상적 대화로 넘어간다. 이 점을 자각하지 않고 평소 대화하는 사람들은 부지기수다. 자기 자신이 부지불식간에 지니고 있는 궁극적 관점 혹은 생각의 틀 자체에 대한 이해는 거의 무의식화 되어 있어서 여간해서 우리 자신들은 이를 자각하질 못할 때가 많다. 하지만 세계와 사물을 이해하는 기초 해석의 틀 자체가 달라버리면 사실상 모든 개념들이 달라진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많은 충돌과 곤란을 겪는 것이다.
 
사실상 서로 간의 견해들이 충돌할 때에는 그 밑바닥에 있는 가장 기초 전제들부터 검토되고 거기에서부터 서로가 맞춰져야 비로소 소통될 수가 있는 것이다. 대체로 우리는 가장 기초 관점들에서부터 곧잘 어긋나고 충돌하는 편이다. 심층에서부터 근원적으로 충돌하고 있기 때문에 표층의 영역에서 같은 언어와 단어를 쓴다고 하더라도 서로 어긋나고 서로 충돌하기 십상인 것이다. 생각과 신념이 다르다보니 드러나는 삶의 행태 역시 달라질 수밖에. 
 
오늘날 과학과 철학에서도 순수한 관찰, 순수한 객관적 사실 자체란 불가능하다고 본다
 
“저 꽃은 빨간 꽃이다”라는 일상적인 명제를 분석해보자. 그런데 정작 이 명제가 정확하게 쓰여지고 있는지 어떤지는 궁극적으로는 꽃 자체에 대한 관찰과 묘사에 한정되지 않음을 알 것이다. 그 꽃은 언제나 우주 전체와 상호 맞물려 있는 가운데 놓여 있다. 즉, 무슨 얘기냐면, 결국은 저 꽃이 정말로 빨간 꽃인지 아닌지는 우주 전체 밑그림을 가늠하면서 저 꽃이라는 어느 한 부분을 분석해야지 꽃이라는 그 부분 자체에 한정된 묘사와 기술만 가지고는 저 꽃에 대해 제대로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결국은 우리가 그 어떤 단순한 사물을 이해함에 있어서도 가급적이면 숲(전체)을 보면서 나무(부분)를 봐야지 그 역은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부분들은 관계적으로 엮여있기에 전체 안에 속한 관찰자가 어떤 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서로 달리 보인다는 점을 우리는 또한 간파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꽃은 단지 나의 눈에만 그럴 뿐이고 다른 사람에겐 달리 보일 수도 있는 것이며, 태양이나 혹은 다른 자연의 작용으로 인해 다른 색깔로 나타날 수도 있는 것이다. 혹시 개나 물고기의 눈에는 저 꽃이 빨간 꽃으로만 나타날까? 결국은 세계 안에 있는 존재가 세계를 객관적으로 진술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이미 나 자신은 매순간마다 전체 세계의 영향을 쉼 없이 주고받고 있는 과정에 놓여 있잖은가.
 
오늘날 현대 자연과학은 <관찰의 이론 의존성>이라는 것을 밝혀냄으로서 순수한 객관적 관찰이란 가능하지 않다고 보고 있다. 다만 확률적으로 서로 공통의 감각들을 이끌어낼 뿐이다. 공통 감각이란 말 그대로 Common Sense라는 상식을 의미하는 것이며, 이때의 상식이란 흔히 말하고 있는 <진리>Truth라는 것에 다름 아니다. 과학뿐만 아니라 현대 철학이나 해석학에서도 <전이해>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우리 안에 알게 모르게 교육받거나 무의식적으로 체화되었던 사유의 편견에 사로잡혀 있음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오늘날 뇌과학에서도 말하길, 우리의 “뇌는 사실과 환상을 구분하지 못한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자기 눈에 보이는 것만 보일 뿐이며, 자기 생각의 그릇대로 세계가 이해될 뿐이다. 또한 오늘날의 인지심리학 역시 인간 안에 일상적 삶을 해석하는 비합리적 신념의 체계가 자리하고 있어서 온갖 충돌을 낳는다고 보기도 한다. 철학은 인간 몸 안의 가장 깊은 무의식적 뿌리에 놓여 있는 인지 영역에 해당되기에 일반적으로는 이를 거의 자각하지 못한 채로 살아갈 때가 많다.
 
심층(철학)에서와 소통이 이뤄져야 표층(종교, 문화 등등)에서의 소통이 비로소 온전히 가능할 수 있어
 
우리는 일상 생활 속에서 누군가와 대화를 할 때, 서로 동일한 하나의 사건에 대해 얘기하거나 같은 용어를 쓰며 얘기하는데도 이상하리만치 서로 간에 대화가 어긋나거나 서로 충돌하는 경우들을 종종 경험하기도 할 것이다. 결국은 자신이 얘기하는 것들에 대한 궁극적인 맥락을 살펴보지 않으면 모든 대화(다이얼로그)는 결국 독백(모놀로그)의 합만 있게 될 뿐이다. 여기서 그 '궁극적인 맥락'이라는 게 바로 사유의 기초 틀이라는 철학의 지점이다.
 
그렇기에 기독교의 하나님, 예수님, 성서, 인간 등등 이러한 것들도 결국은 자기 관점의 틀에서 해석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들이 제아무리 ‘성경적’이니 ‘올바른 복음’이니 ‘성령의 인도’라느니 부르짖어도 결국은 자기 이해의 그릇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기에 결국은 그 자신이 궁극적인 기초 전제로 삼고 있는 개념의 틀부터 분명하게 자각하고서 제시되어야 함이 필요한 것이다. 이때 그러한 자기 이해의 그릇이라는 개념의 틀, 혹은 생각의 틀, 혹은 사유의 가장 기초 틀을 논의하는 지점이 바로 존재론, 우주론에 해당되는 철학(형이상학)의 지점이다. 일반적으로 형이상학을 <해석학적 존재론>으로 보기도 한다.
 
이러한 철학(형이상학)이라는 전체 사물을 이해하는 궁극적 해석의 툴(tool)이 달라지면 같은 단어를 함께 사용하더라도 그 지시하는 내용들은 서로 완전히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같은 기독교인이라고 하더라도 그토록 서로 다를 수 있는 것이며, 서로 다른 종교인이라고 하더라도 그토록 흡사할 수도 있는 것이다. 종교나 예술이라는 분야들은 문화에 해당한다. 그 옛날 동양의 철학적 사유는 동양의 문화를 형성해왔으며, 서양의 철학적 사유는 서양의 문화를 형성해왔다. 문화의 충돌은 사실상 가장 심층적인 해석학적 틀이라는 궁극적 관점의 충돌에서 비롯되고 있는 것이다.
 
이제 김홍도 목사와 이현주 목사가 왜 그토록 다르게 느껴지는지를 말해보자. 두 분은 얼핏 보기엔 같은 기독교 성서를 읽고 같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설파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지시하는 내용은 전혀 다른 내용의 성서와 하나님과 예수님이라는 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즉, 이를 이해하는 궁극적 해석의 틀이 다르기 때문에 그 내용에 있어선 서로 전혀 다른 맥락으로 결과되어지는 것이다.
 
반면에 이현주 목사와 법륜 스님의 경우는 서로 다른 종교에 속해있음에도 불구하고 세계와 존재를 이해하는 그 밑바닥에 있어선 어느 정도 유사한 소통을 맛보고 있기 때문에 서로 간에 친화적으로 느끼고 있는 것이다. 존재와 사물을 이해하는 해석의 툴(tool)에서 서로 흡사한 것이다. 단지 표상되는 언어나 단어는 서로 다를지언정 말이다. 그 사람의 철학적 신념 체계가 바뀌면 모든 게 뒤바뀌어질 수 있다.
 
따라서 사유의 궁극적인 기초 패러다임이라는 철학의 문제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내가 어떤 철학을 취하느냐에 따라 기독교 신학의 색깔도 180도 달라짐은 말할 나위 없다. 어떤 철학적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기독교의 예수는 다른 맥락의 존재로 인지될 수 있다. 어떤 철학적 세계관에서 보느냐에 따라 인간 혹은 그 어떤 사회적 사건에 대한 이해까지도 판이하게 달라질 수 있다.
 
철학이 모든 학문의 베이스로 작용되는 것도 바로 이런 연유에서다. 기독교 신학자인 데이빗 그리핀(David R. Griffin)과 존 캅(John B. Cobb)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철학은 지금까지 신학에 철학 자체의 오류로 인하여 기독교에 해를 끼쳐왔지만 근본적으로 이것이 곧 철학의 불필요성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며, 철학을 신학에 적용하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올바른 철학으로서 어떤 철학(형이상학)을 사용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더 중요하다”고.
 

정강길 / 세계와기독교변혁연구소 연구실장

 

 

 
 
smallway (10-03-30 20:00)
 
동감하는 내용 잘 읽었읍니다.
위 내용을 간단히 말하면, 

둘다 자신의 입지를 세워간다는 것은 공통적이나,
사고의 폭(범위)와 사고의 관점의 차이에 따라
1. 어떤이는 어떤(他者) 존재론에 자신의 생각이 종속되어가고,
2. 또 어떤이는 새로운 철학적 사고로 진보해 나간다는
차이를 말하는 것이라 사료됩니다.

미선이 (10-03-30 23:23)
 
네.. 그렇게 보셔도 괜찮겠습니다.
자신의 사유 체계에 종속 되지 않으려면
자신의 사유와 맞지 않거나 충돌하는 사례를 경험할 때가 아무래도 가장 기회일 것입니다.
그때의 경우는 필시 자기가 틀렸거나 아니면 상대방이 틀렸거나
혹은 아직 대상을 온전히 파악하질 못한 과정에 있거나 일 것입니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세기연에서도 누누이 강조하는 바이기도 했던
발견된 자기 오류에 대한 겸허함이 보다 더 자신을 새로운 발전으로 이끌지 않을까 싶네요.
지금까지의 역사도 결국은 시행착오의 역사이듯이
철학 역시 오류에 의해 좀더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봅니다.

늘오늘 (10-03-31 07:03)
 
이현주 목사님의 온화한 미소는 익히 알고 있었는데,
법륜 스님의 환한 웃음에 제 머리가 다 맑아집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和顔施라는 말이 실감나네요.
그저 뵙는 것만으로도 은혜가 되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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