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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일상적 권력과 저항: 탈근대적 문제설정 (이구표)    
  글쓴이 : 정강길 날 짜 : 07-06-13 05:06 조회(68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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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적 에세이/ 일상적 권력과 저항: 탈근대적 문제설정 
 

진보평론  제4호 

이구표(인천대 교수/ 정치학) 
 
 
I
“300년 전에 어떤 바보들은 스피노자가 인간의 자유는커녕 인간이 특별한 존재라는 것조차 믿지 않았으면서도 어떻게 인간의 해방을 보기를 원했는지 의아해했다. 오늘날 새로운 바보들은…푸코가 인간의 죽음에 대해 얘기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정치 투쟁에 참여할 수 있었는지 의아해한다.”

들뢰즈가 그의 책 ꡔ푸코ꡕ에서 던진 이 말은 이른바 ‘탈근대적’(곧 근대의 지배적 사고 양식을 벗어난) 사상들이 우리 ‘근대인들’에게 불러일으키는 충격, 당혹 또는 혼란-물론, 어떤 사람에게는 노여움-의 일단을 그 특유의 해학과 풍자에 실어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 들뢰즈의 이 말은 근대성을 넘어 사고하려는 모든 시도들이 자칫 빠지기 쉬운 딜레마 또는 위험에 대한 경고로도 읽힐 수 있다. 우리의 의식과 삶을 여전히 지배하고 있는 근대성을 벗어나려는 시도는 그 자체로 항상 불확실하고 모호하며, 언제라도 근대성의 덫 안에 재포획되기 쉬운 위태로운 작업이기 때문이다. 특히 이러한 생각은 요즈음 “미시 권력” 또는 “일상적 파시즘”이라는 탈근대적 개념을 중심으로 마치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논의들을 놓고 볼 때 더욱 현실적인 설득력을 얻는 듯 하다. 권력뿐만 아니라 저항도 동시에 볼 수 있고 사고할 수 있다는 것, 여기에 들뢰즈가 지적하는 탈근대적 문제설정의 근본적 차별성, 더 나아가서는, 급진성이 놓여있다고 한다면, 우리의 ‘붕어빵’에는 바로 이 ‘붕어’가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사회 비판 및 변혁 이론으로서의 탈근대적 담론들의 성격과 위상은 여전히 첨예한 논쟁거리로 남아있다. 하지만, 1990년대 초 이후 후기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던 담론들-특히, 푸코의 “권력의 미시물리학”과 들뢰즈․가타리의 “욕망의 미시정치학”-의 영향 아래 “미시 권력”이나 “미시 파시즘”에 관한 관심과 논의가 일부 학계(정확하게는, 대학 제도권의 바깥 또는 주변부)와 문화계를 중심으로 점차 확산되어 왔던 것이 사실이며, 최근에 들어 그것은 한국 사회의 근대성에 대한 비판이나 분석으로 구체화되면서 서서히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는 듯하다. 물론 이러한 추세는 그 성격이 아직 모호하고 논자에 따라서는 매우 복잡한 양상을 띠기도 하지만, 그것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논지로 진전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곧, 국가뿐만 아니라 그 밖의 여러 형태의 권력들(자본주의, 가부장제, 이성애주의 등)이 개인들의 의식뿐만 아니라 육체, 감정, 욕망 및 무의식까지 통제하면서 우리의 일상적 삶을 속속들이 억압해왔으며, 이 과정 속에서 우리의 근대적 정체성이 형성되어 왔다는 것이다.

군사 독재 정권만 물러나고 정치만 민주화가 된다면 우리 사회의 모든 문제가 해결될 거라고 많은 사람들이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 고작 십여 년 전의 일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일상적 삶 속에서 작동하고있는 미세한 권력들의 정체를 밝혀내려는 이러한 노력들은 주목할만한 변화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외양상 탈근대적 시각과 입장을 취하고 있는 듯이 보이는 이러한 연구와 분석들을 면밀히 살펴보면, 푸코나 들뢰즈 같은 사상가들이 근대성에 대해 제기했던 중요한 질문들-곧, 급진적 이론과 실천, 거대 담론, 합리적 주체, 자기동일적 역사 등에 대한 질문들-이 해소되기보다는 오히려 더 큰 의문으로 남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은 왜 아직도 국가와 이데올로기와 같은 거대한 권력 형태들(법, 국가주의, 민족주의, 군사주의, 반공주의 등)에 대한 분석이 압도적 다수를 이루고 있는지, 왜 그러한 글들은 대부분 지적 냉소주의와 엄숙주의, 그리고 비관주의에 빠져있는지, 왜 일상적 파시즘과의 투쟁을 선포하는 어떤 논자들은 놀랍게도 파시스트를 닮았는지(그들을 포함해 우리 모두는 파시스트이기 때문인가?)를 이해하면 알 수 있다. 한 마디로, 그것은 탈근대적 문제설정을 표방하고 있는 최근의 시도들의 대부분이 실상은 여전히 근대적 사고의 틀 안에 깊숙이 매몰되어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특히, 권력은 보면서도 저항과 변화의 가능성을 함께 보지 못하는 것--이것이 바로 그 이유이다.
 
 
II

푸코에 의하면, 권력과 저항의 문제는 근대적 인식 및 경험 틀 안에서는 볼 수도 사고될 수도 없는 것(the modern unthought)이다. 이것은 의식을 중심으로 통합된 주체의 관점에서 사회와 역사를 항상 자기동일적인 것으로 총체화함으로써 하나의 조화롭고 통일된 세계를 세우려는 근대 계몽 기획의 필연적 귀결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자기동일적 의식 또는 이성에 벗어나 있는 모든 차이와 모순과 갈등은 궁극적으로 합리적 타협과 화해를 통해 동일성 속으로 해소될, 단지 일시적이며 비본질적인 문제로 간주될 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한 사회에 억압, 착취 또는 불평등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개인들간의 경쟁으로부터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보편적 “인간 조건,” 곧 인간 본성의 문제로 항상 축소환원되어 이해되며, 그 결과 그것을 권력 관계(권력과 저항)의 문제-곧, 특정한 역사적 조건 아래 존재하는 상이한 사회 세력들간의 힘의 관계에서 생겨난 근본적인 문제-로 보는 관점은 처음부터 자연스럽게 배제된다. 여기서 권력의 문제는 오로지 동일자들(지배자들) 내부에서의 갈등에서 생겨나는 것으로 보는 한에서만 그 존재가 인정되며, 반면에 타자들(피지배자들)의 저항이나 투쟁은 권력에의 의지나 욕망과는 전혀 무관한 단순한 육체적 본능과 물질적 욕구 충족(예를 들면, 군중 심리, 기근, 세금, 실업 등)을 위한 것으로 간주된다. 이런 점에서, 역사는 궁극적으로 동일자들(왕이나 군주, 귀족, 영웅, 지도자)의 권력의 연속성에 관한 거대한 이야기일 뿐이다.

이러한 근대 계몽 기획은 폭력과 강제보다는 인간의 의지와 의식을 정치의 궁극적 기초로 보는 근대 정치 이론으로 구체화되며, 따라서 권력과 저항의 문제는 일관되게 회피되거나 은폐된다. 푸코에 의하면, 근대 자유주의 정치 이론들은 우발적인 사건들이 가져올지 모를 급격한 단절과 위험을 배제하기 위해 역사의 연속성에 관한 광범위한 개념 장치들(예를 들면, 진리, 인간, 인과관계, 논리, 전통, 문화, 발전, 진화, 목적론 등)을 동원하는 가운데, 특히 갈등과 투쟁으로 특징지어지는 권력 관계의 실재성을 부정하는 데 온갖 노력을 기울여왔다. 이러한 노력의 가장 대표적인 성과는 국가-시민 사회 또는 정치-경제의 이분법적 개념 틀로서, 정치와 정치적인 것에 대한 근대적 경험과 인식은 사실상 이 개념 틀을 통해 형성되어왔다. 이 틀에 따르면, 권력 관계는 오로지 그 이분법의 한쪽 영역-곧, 국가라는 협소한 ‘정치’ 영역-에만 존재하며, 반면 시민 사회는 사적 이해 관계를 추구하는 자발적 개인들간의 계약 관계로 이루어진 기회와 선택과 자유의 영역이다. 그런데, 이렇게 국가 영역으로 축소된 권력 개념마저도 법적 주체로서의 시민들의 권리와 의무의 문제로 환치되어 합법성 또는 정당성의 기준에 맞추어 재단됨으로써, 결국 권력 관계의 개념 자체는 아예 유명무실한 것으로 전락해 버린다.

마르크스주의는 마르크스를 따라 근대 자본주의 사회 관계를 갈등과 투쟁의 관점에서 보려 하는 한에서는 권력의 문제설정에 어느 정도 근접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전통적 마르크스주의 이론들은 정치-경제 또는 토대-상부구조라는 근대의 이분법적 사고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못하다. 이 이론들은 권력의 존재 이유를 경제 기능성(곧, 생산 관계와 계급 지배의 유지)에서 찾는 근대 정치경제학의 기본적 인식 틀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권력을 단지 특정 계급-그것이 부르주아든 또는 프롤레타리아든-이 소유할 수 있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본다. 따라서, 이들은 자유주의 정치 이론과 마찬가지로 권력을 오로지 기존의 또는 새로 수립될 국가와 이데올로기의 법적-정치적(juridico-political) 틀 안에서 사고할 수 있을 뿐이며, 자본주의의 물질적 생산 과정 그 자체 또는 시민 사회의 ‘시장 관계’를 이미 적대와 갈등으로 점철되어있는 “사실상의 내전” 상태(마르크스의 말)로 보지도, 권력을 저항과의 불가분의 관계 속에서 사고하지도 못한다.
 
 
III

그러면, 근대성을 넘어 사고한다는 것은 무엇이며, 왜 우리는 탈근대적 문제설정 안에서야 비로소 권력과 저항의 문제를 볼 수 있고 사고할 수 있는가?

탈근대적 담론들은 마르크스주의와 자유주의 거대 담론들에 의해 공유된 근대적 개념 범주들의 적실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오늘날 우리의 이해와 삶을 여전히 지배하고 있는 이론적 및 정치적 합리성의 한계에 도전함으로써 근대성에 대한 발본적이며 전면적인 반성과 비판을 이끌어 내려는 지적 및 정치-윤리적 시도라고 할 수 있다. 탈근대적 문제설정은 근대를 단 하나의 본질(곧, 보편적 합리성)을 가진, 그리고 그것을 스스로 실현시킨 자기동일적 총체로 보는 근대의 자기 이해(self-understanding)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러한 근대의 자기 기술을 허위나 거짓으로 배제하거나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하나의 (부적절한) 해석으로 간주고 이론적 특권을 부여하지 않는다는 점이며, 더 나아가 근대를 연속적인 역사의 일부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사건으로 문제화한다는 점이다. 곧, 근대의 거대 담론들이 주장하듯이 단 하나의 심오한 근대성의 본질이 있는 것이 아니라 복수의 이질적인 근대성들이 존재하며, 따라서 근대성은 보편적 이성에 기반한 하나의 자기완결적 실체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특정한 형태의 합리성들에 붙여진 이름일 뿐이다. 이런 점에서, 대부분의 탈근대적 담론들은 근대성 바깥에서 대안적 사고와 삶의 방식을 찾기보다는, 오히려 근대성 안에서(더 정확하게는, 그 경계에서) 근대성이 자기동일적인 것으로 고정되고 봉합되지 못하도록 그 안에 내재해있는 차이, 다양성, 모순, 균열, 탈구, 틈새를 부각시키고 확대시키면서 변화와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전략을 택한다.

이러한 근대성 비판의 핵심적 전략은 주체나 인간 본성을 이미 주어진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구성 또는 생산된 것으로 보는, 이른바 근대 합리적 주체의 ‘탈중심화’ 작업이다. 이 작업의 핵심은 특정한 사회적 실천들을 통해 개인은 특정한 의식, 이해관계, 욕구, 무의식, 욕망, 감정을 가진 주체로 구성된다는 주장에 있다. 그런데, 이 문제를 언어(텍스트)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해체론자들과는 달리, 푸코와 들뢰즈는 사회적 실천들을 권력 관계-주체화하는 권력메커니즘들-로 본다는 점에서, 그들의 입장은 단순히 인식론적인 것을 넘어서 급진적인 정치-윤리적 함의를 갖는다. 선험적 의식을 중심으로 통합된 자기동일적 주체를 해체 또는 파기하려는 이러한 시도는 크게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방향으로 진행된다.

첫째로, 주체구성의 메커니즘으로서 하나의 특정한 사회적 실천만을 특권화시키는 근대의 거대 이론들과는 달리, 주체가 생산되는 다수의 실천 관계들, 특히 일상적 삶의 미시적 실천들에서 발견되는 복수의 상이한 사회적 통제 형태들을 부각시킨다. 이렇게 함으로써, 근대적 주체성 또는 정체성은 단일하고 고정된 것이 아니라 복수적이고 가변적인 것으로 구성된다는 것을 밝힌다. 둘째로, 개인들의 의식에만 초점을 맞추어온 근대의 합리적 담론들에 대항하여, 의식뿐만 아니라 육체, 무의식, 감정, 욕망도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주도면밀한 사회적 통제 아래 놓여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의식을 중심으로 통합된 주체의 경계를 와해시켜 근대적 주체의 분열되고 분산된 성격을 드러낸다.

이러한 합리적 주체의 해체는 동일성의 세계를 넘어 차이와 다양성의 세계에로의 새로운 사고와 경험의 가능성을 열어주며, 특히 권력과 더불어 저항을 함께 볼 수 있고 사고할 수 있게 해주는 토대가 된다. 왜냐하면 이러한 탈중심화 작업의 목적은 단지 근대적 권력에 의한 주체화 메커니즘들을 밝히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의 모호하며 상호 모순적인 성격-곧, 그 권력 효과들이 반드시 획일적이지도, 서로 일치하지도 않는다는 점-을 밝힘으로써, 역설적이게도, 다름 아닌 그 권력 메커니즘들 자체가 저항과 변화의 가능성을 동시에 생산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 있기 때문이다. 탈근대적 관점에서 볼 때, 근대적 주체는 근대성의 모호한 성과이다. 근대 사회의 개인들이 개인적 또는 집단적 의식(동의)을 항상 매개로 하는 법과 이데올로기를 통해서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합리적’ 주체(‘시민’)들로 만들어지는 한, 그것은 하나의 성과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모호한 성과인데, 그 이유는 그러한 자기동일적 주체성의 구성은 오직 타자성의 생산과 배제를 통해서만 가능한, 항상 복합적이며 갈등적이며 불안정한 과정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자면, 개인은 다수의 실천 관계들 속에서 다수의 특정한 의식 형태들뿐만 아니라 동시에 다수의 특정한 무의식, 욕망, 욕구 형태들을 가진 주체로 만들어진다. 따라서, 개인은 의식을 중심으로 단일하게 통합된 주체성을 가진 주체가 아니라, 때로 서로 결합하기도 하고 상충하기도 하고, 또 끊임없이 형성되고 재형성되는 복수의 주체성의 형태들을 가진 주체로 구성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주체는 단순히 권력의 획일적, 일방적 산물이 아니라 다수의 이질적인 힘들 또는 주체성의 형태들이 서로 싸우는 저항과 갈등과 투쟁의 발생 지점이며, 더 나아가서는 실제적 또는 잠재적 변화의 장소인 것이다.

근대의 합리적 주체의 탈중심화를 통해 등장하는 이러한 분열되고 유동적이며 가변적인 주체 개념은 탈근대적 문제설정의 가장 급진적 측면이며, 그것이 권력과 저항에 관한 우리의 사고에 대해 갖는 함의는 가히 혁명적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탈근대적 담론들의 급진성은 단순히 근대적 지배 체제의 뿌리를 파헤쳤다거나 새로운 대안적 해방 이론을 제시한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 변혁에 관한 우리(전통적 ‘좌파’까지 포함한)의 사고를 계속 지배하고있는 근대적 자기 이해 방식들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질문과 문제들을 제기한다는 데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탈중심화된 주체 개념은 서구에서 오랫동안 아무런 의심 없이 사용되어온 개인, 권력 및 자유 등의 기본적 개념 범주들을 그 뿌리에서부터 뒤흔들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먼저, 사고와 행동의 기본 단위로서 또는 ‘자아(the self)’로서의 ‘개인’의 개념은 그 동안 누려왔던 특권적 인식론적 및 정치적 지위를 박탈당하고 그것보다 더 파편화된 이른바 ‘하위 개인적(sub-individual)’ 또는 ‘하부 개인적(infra-individual)’인 무엇으로 대체된다. 개인은 사실상 주체(a subject)가 아니라, 권력들이 부과하는 복수의 특정한 주체성의 형식들을 담고 나르는 대행자(an agent) 또는 담지자(a bearer)일 뿐이다.
 
따라서, 권력을 어떤 개인(들)이 다른 개인(들)에 대해 행사하는 것으로 보는 근대적 관점과는 달리, 탈근대적 담론들에 있어서 권력의 대상이자 표적은 개인이 아니라 개인 내부에서 특정한 권력 형태에 저항하는 것들, 특정한 주체성의 ‘형상’을 거부하는 ‘질료’들-일상적 행태, 태도, 말투와 제스처, 욕망, 기질, 성향, 기억들 등-이다(물론, 이것들도 다른 권력 메커니즘들의 산물이다). 거꾸로 말하자면, 권력에 저항하는 것은 개인이 아니라 개인 내부의 전(前)개인적이며 몰인격적인 타자성들, 즉 특정한 주체성에 대해 타자인 것들, 정상성의 기준에서 벗어나 있거나 그것에 따라 살지 못하는 것들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자유는 외적 제약으로서의 권력이 없는 주체의 상태, 곧 이해관계를 추구하거나 잠재 능력을 실현시킬 수 있도록 허락된 그러한 상태로 환원되지 않는다. 오히려, 정상화된 주체에 의해 타자성으로 규정되고 배제된 것들이 아직 제거되지 않고 끊임없이 흐르고 있을 때, 규범화 또는 정상화의 틀에 복속되지 않는 것들이 아직 남아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걷잡을 수 없이 분출할 때,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개인적 또는 집단적 수준에서 배치되고 투여될 때, 자유는 존재한다.
 

IV

이러한 급진적 시각에서, 탈근대적 담론들은 그 동안 근대의 합리적 이론들과 공식적 제도 정치(국가)의 틀을 통해서는 볼 수 없었던-비정치적인 것 또는 사적인 것으로 배제되거나 은폐되고 비합리적인 것 또는 비정상적인 것으로 무시되어왔던-문제들을 ‘정치적’인 것(‘주체성의 정치’)으로, 권력-저항의 문제로 볼 수 있게 해준다. 탈근대적 담론들은, 합리적 동일자들의 연속성을 항상 전제하는 근대적 담론들과는 달리, 주어진 사회 속에 산재해 있는 여러 이질적인 세력들 또는 힘들간의 역동적 관계를 그 구체적인 출발점으로 삼기 때문이며, 따라서 역사적 과정을 여러 다른 “타자들”의 경험에서 이해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서, 탈근대적 담론들은 우리를 주체화하고 정상화하는 권력에 대항하여 저항과 투쟁이 가장 효과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지점들을 국가와 계급 관계 밖에서 찾아볼 수 있는 전략적 사고의 토대를 제공해 준다. 이것은 특정한 시기의 특정한 사회에 존재하는 차이, 갈등, 모순, 대립들을 인식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하여, 그것들을 더 가시적인 것으로 만들고, 그것들을 타협 가능한 단순한 이해 대립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만들며, 그러한 갈등과 대립들로부터 새로운 힘의 관계가 도출될 수 있게 하려는 정치-전략적 시도로 나타난다.

이러한 탈근대적 관점에서 볼 때, 권력 관계는 항상 이미 어디에나 존재하며 권력과 저항은 서로 동시적이며 동연적이다. 따라서, 권력은 보면서도 저항을 함께 보지 못하고 “저항은 어떻게 가능한가?” 라고 묻는 것은 한 마디로 잘못된 질문(a false question)이며, 아직도 근대적 문제설정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한, 들뢰즈의 말을 빌리자면, 형이상학적 우문(愚問)일 따름이다. 오히려 우리는 넓게는 우리의 근대 사회와 역사뿐만 아니라 좁게는 최근의 사회적 및 정치적 상황에 관해 ‘동일자들의 권력의 연속성에 관한 거대한 이야기’(“우리는 끊임없이 지배되어왔다!”)와는 전혀 다른 그림을 그려볼 수 있다. 우리는, 특히 지난 일 이십 년여에 걸쳐, 전례 없이 새롭고도 근본적인 질문들이 우리 사회 내부로부터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으며, 그것은 “때로는 숨겨진 채, 때로는 공공연하게” 새로운 형태의 갈등과 투쟁들로 표출되어 왔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개인들은 점점 더 자신들이 지금까지 이끌려온 삶의 방식을 의문시하고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자신들에게 오랫동안 부과되어온 주체성(들)을 거부하기 시작하고 있다. 이것은 가정, 지역 공동체, 학교와 대학교, 회사, 공장, 병원, 사회 복지 시설, 감옥 등 일상적 삶의 현장에서 점차 구체화되면서 때로는 분산되고 국지화된 저항의 형태로, 때로는 일상성으로부터의 이탈 또는 탈주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점점 더 많은 아이들이 더 이상 부모와 어른과 교사들의 말을 안 듣고 가정과 학교 안팎에서 제멋대로 ‘깽판’을 치고, 직장을 다니는 성인들은 “회사가면 죽는다”거나 “공장 가면 더 죽는다”고 아우성치면서 ‘힘들고 위험하고 더러운 일’에서 ‘빠져나갈 구멍’을 이리저리 찾고, 여성들은 남성, 남편, 자식들과의 ‘전통적’(곧, 가부장적이자 자본주의적) 관계를 거부하면서 ‘제 갈 길’을 헤쳐가고, 학부모와 학생들은 기존의 학교 및 교육제도를 더 이상 신뢰하지 않고 자퇴하거나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고, 대학생들은 자신들이 학교 내에서 무엇을 배우고 어떻게 생활하고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면서 등록금, 교과과정, 학교 편제, 교육 여건과 환경, 교수와 학생간의 관계 등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하고, 도시 지역 아파트 주민들은 마침내 ‘닭장’에서 뛰쳐나와 이웃들을 되찾기 위한 공동체 활동에 나서고, 농어촌 지역의 주민들은 자신들 고유의 생활 양식과 환경을 파괴하는 갖가지 지역 개발 사업들을 저지하기 위해 집단 행동에 나서고, 감옥이나 병원 또는 사회복지시설의 피수용자들은 간헐적이지만 끈질기게 그 내부의 관료주의적 억압과 폭력과 비리를 고소하거나 폭로하고, 동성애자들은 전통적 성적 정체성의 굴레를 벗어 던지고 떳떳이 자신을 드러낸다.

물론 여기서 제기되는 질문은, 고작 지난 몇십 년 사이에 우리 사회 곳곳에 널리 분산되어 나타나고 있는 이 새로운 현상들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지배적인 시각은, 이것들을 혼란, 무질서, 방종, 타락, 비행, 위법 행위, 탈선, 일탈 또는 집단 이기주의 등으로 규정하고 오직 비난과 개탄과 ‘의식 개혁’의 대상으로서만 고려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시각 밑에 깔려있는 보다 근본적인 인식 틀은 합법적-불법적, 합리적-비합리적, 정상적-비정상적, 본질적-비본질적, 공적-사적, 정치적-비정치적 등 일련의 근대의 이분법적 사고 범주들이다. 이 근대적 범주들은 공식적 정치 제도 바깥에 존재하는 일상적 수준의 권력 관계들과, 그 관계들 안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변화-곧, 새로운 형태의 갈등과 투쟁들-를 볼 수 없게 만들고, 그것을 저항이나 투쟁으로 또는 정치적인 것으로 인식할 수 없도록 우리의 사고를 근본적으로 제약한다. 이 근대적 인식 및 경험의 틀에서는, 여성들, 청소년들, 동성애자들, 범죄자들, 부랑자들, 약물중독자들, 장애자들, 매춘부들, 이민 노동자들의 문제는 정치나 권력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오직 감금, 교화, 선도, 치료, 교정 또는 재활을 필요로 하는 개인적 및 심리적 문제일 뿐인 것이다. 의식 없이 또는 생각 없이 사는 사람들, 대책 없는 인간들, 막가는 인생들!

그러나, 권력과 저항의 탈근대적 문제설정에서 우리는 다른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청소년 일탈과 비행, 범죄, 불복종, 동성애, 성도착, 약물 중독, 매춘, 부랑, 사회부적응, 이혼, 탈선, 가출, 자살, 학교 거부 등, 지난 일 이십 년여 동안 우리 사회에도 확산되고 일반화된 이 새로운 현상들은 단순히 개인들의 정신적 또는 심리적 문제들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이 사회가 기능하는 방식에 대해 가장 근본적인 방법으로 이의를 제기하는 것”(푸코의 말)이 아닐까? 예를 들면, 지난 몇 해 동안 우리 사회를 휩쓸었던 탈옥수 신창원 신드롬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나? 아마도 이 점을 거꾸로 입증해주고 있는 것은 ‘가족 해체,’ ‘교실 붕괴’ 등의 말을 통해 사회 저변에 팽배해있는 불안과 위기 의식일 것이다. 이것은 오랫동안 사회 통치의 가장 기초적 기능을 담당해왔던 전통적 통제 장치들, 이를테면 가정과 학교와 같은 제도들이 아이들과 여성들, 그리고 성인 남자들에게도 더 이상 과거와 같은 지배적인 구속력을 갖지 못하고 위기에 봉착해 있다는 것, 그러한 주체화 권력의 메커니즘들에 대한 저항과 투쟁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결과 기존의 권력 관계에 실제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최근의 일련의 신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와 정책들을 비롯한 여러 조치들(세계화, 구조 조정, 교육 개혁, 청소년보호법 등)은 이러한 특정한 권력-저항 관계의 맥락, 즉 새로운 형태의 저항들에 대한 대응 전략, 그것들에 맞서 새로운 사회적 헤게모니 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대응 공세, 여기저기 새고 있는 구멍들을 틀어막기 위한 땜질 작업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사실은 일탈, 비행, 범죄, 탈선 등의 갈등적 현상들에 대한 일반 대중들의 태도가 점차 변하고 있다는 점이다. 왜 우리는 신창원의 탈옥기, 서갑숙의 성 고백서, 삐삐롱 스타킹이 생방송 카메라에 침을 뱉은 까닭, “나쁜 아이들이 설쳐대는 좋은 영화들” 등에 그렇게 흥분하고 관심을 갖는가? 이것은 단순한 호사가적 호기심이나 상업주의적 센세이셔널리즘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다. 사람들은 점점 그것들을 더 이상 낯설거나 비정상적인 것 또는 ‘남의 일’이 아니라 그 자체로 이해할 수 있는 일상적 삶의 일부로, 자신들의 또 다른 모습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가운데, 우리는 새로운 삶의 태도와 스타일 및 감수성, 새로운 형태의 정체성들, 그리고 권력과 저항의 새로운 배치 관계들이 서서히 형성되고 있음을 목격한다.

다른 한편, 이러한 새로운 변화와 움직임은 다양한 형태와 규모의 집단적 운동들로 구체화되고 있다. 여성, 동성애자, 환경, 시민, 대안 학교/탈학교, 공동 육아, 학생 자치, 인권, 장애자, 공동체, 아파트 주민, 대안 네트웍, 그 밖의 소수자 운동들이 그것이다. 이 운동들의 대부분은 기존의 이념적 또는 전투적 행동주의나 물질적 이해관계에 기반한 이익 집단 정치와는 달리 새로운 삶의 방식과 새로운 집단적 주체성의 형태들을 풀뿌리 수준에서 모색하는 대규모의 사회적 실험의 성격을 띠고 있다. 달리 말하자면, 이 운동들의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주어 받은 주체성의 형태들에 대한 저항과 투쟁이라는 탈근대적 관점에서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나는 그리고 우리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을 통해 우리 자아의 타자성을 인정하는 것, 우리 자신의 삶의 방식, 다른 사람과의 관계, 사물들과의 관계, 자연과의 관계를 완전히 바꾸어야 한다는 것, 우리의 삶과 주체성에 이러한 발본적인 변화가 일어날 수 있을 때 진정한 혁명이 가능하다는 것. 물론 이러한 새로운 운동들은 그 동안 기존의 제도 정치에 거의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지만, 오히려 국가 권력의 틀과 ‘혁명 또는 개혁’의 양자택일에서 벗어날 수 있을 때만 가능한 특정한 사회적 개입들이 그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으며, 그 결과 기존의 일상적 권력 관계들에 미묘하지만 중요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주는 여러 가지 징조들을 사회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V

70년대에 어느 미국 비판 이론가는 당시의 행태주의 사회과학자들의 보수주의적 태도를 빗대어 “즐거운 과학, 우울한 현실”이라고 꼬집었다. 아마도, 미시 권력 또는 미시 파시즘에 관한 우리의 최근의 논의들은 이와는 정반대로 “우울한 이론, 흥미로운 현실”로 묘사되어야할 것 같다. 권력은 보면서도 저항을 전혀 보지 못한다는 것, 따라서 변화의 가능성조차 볼 수도 내다볼 수도 없다는 것, 바로 이 점이 그러한 글들 대부분의 밑바닥을 흐르는 지적 냉소주의, 엄숙주의, 금욕주의, 비관주의, 멜랑콜리를 설명해주며, 더 나아가서 왜 그 글들이 결국에는 자신들이 비판하는 근대성의 극단적인 형태로서의 파시즘을 거꾸로 닮아 가는지를 설명해준다. 미시 파시즘 개념을 처음 소개한 들뢰즈와 가타리의 ꡔ안티오이디푸스ꡕ를 위한 ‘서문’에서 푸코가 파시스트로 규정한 사람들은 누구인가? “정치적 금욕주의자들, 슬픈 투사들, 이론의 테러리스트…혁명의 관료들, 진리의 공복들”이 바로 그들 아닌가?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문제는 푸코나 들뢰즈를 제대로 이해했는지, 무엇이 탈근대적인 것인지를 아는지에 있지 않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지식과 이론과 글쓰기가 역사적 경험과 기억을 놓고 벌이는 담론들간의 헤게모니 싸움이라고 한다면, 이러한 글들이, 그 주장의 진위를 떠나서, 궁극적으로 생산해내는 정치-전략적 효과는 무엇인가에 있다. 이 글들은 대부분 결국 권력의 일방적이며 완벽하고도 끊임없는 승리에 관한 이야기들이라는 점에서 기존의 근대적 이론 및 권력과의 은밀한 공모 관계를 맺고 있으며, 기껏해야 푸코가 그렇게 공들여 비판했던 억압 가설에 기반한 근대적 해방 담론에 지나지 않는다. 미시 파시즘 이론에 의하면, 우리는 모두 파시스트가 아니라, “우리는 모두 주변인이며 우리는 모두 잠재적 부랑자이다”(가타리의 말). 이렇게 우리 자신들의 정체성 자체가 저항과 투쟁과 변화의 장소라고 주장하는 것은 단순한 이론적 명제라기보다는 특정한 진리의 효과를 노리는 정치적 진술이다.

탈근대적 입장은 아이러니와 해학으로 특징지어진다. 이것은 한편으로 근대성을 현재로서는 벗어날 수 없는 우리 인식과 경험의 지평으로 인정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근대성의 모순과 모호성을 철저히 인식하면서 그 안에서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모색하려는 실험적 태도에서 나온다. 이러한 시각에서 볼 때, 요즈음 떠도는 말처럼 지금이 정말로 변화와 위기와 혼돈의 시대라고 한다면, 우리는 오히려 흥미로운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왜냐하면 이 시대는 그 어떤 시대와도 같지 않고, 미래 또한 이 시대와도 또 다를 수 있기 때문이므로. 그리하여, 파시즘이라는 근대적 권력의 유령에 대해 절망적인 강박증을 갖기보다는, 삶의 위생학을 위해 움베르토 에코의 충고를 따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이 흥미로운 시대를 잘 살아 봐.”
 
 
2003-02-18 10: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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