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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지구화 시대의 대안적 노동 세계에 관한 구상(강원돈)    
  글쓴이 : 정강길 날 짜 : 06-09-21 02:01 조회(67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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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ILE #1 : 대안노동.hwp (56.6K), Down:4, 2006-09-21 02:01:16


지구화 시대의 대안적 노동 세계에 관한 구상



강원돈

I. 머리말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 아래서 지구화가 진행되면서 지역사회, 국민국가, 지구사회 차원에서 노동세계는 큰 변화를 겪었다. 자본의 공격에 대항하여 노동을 보호하는 국가의 제도적 장치들은 노동시장의 유연화로 집약되는 탈규제화 조치로 인해 무력해졌다. 기술의 빠른 진보와 방대한 투자로 인해 노동생산성이 빠르게 향상됨에 따라 전통적인 산업부문들로부터 노동력이 대거 퇴출되고 있다. 서비스산업 부문과 공공 부문은 이 퇴출노동력을 대규모로 흡수할 능력이 없다. 여기서 발생하는 실업은 구조적이고 만성적인 성격을 띠고 있으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시된 여러 처방들은 아직 약발이 먹히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오늘의 세계에서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의 양이 절대적으로 줄어들었는데도, 시장경제가 여전히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 개념을 고집할 뿐, 그 어떤 대안적 노동 개념도 모색하지 않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 글에서 필자는 한국 상황을 중심으로 우선 지구화가 노동세계에 미친 영향을 분석하고, 이에 대응하여 이루어진 조치들의 실과 허를 밝혀 보겠다. 그 다음, 필자는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 개념이 노동세계와 노동시장에서 나타나는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음을 입증하고, 그 대안으로서 "삶을 위한 활동" 개념을 제시하고자 한다. 끝으로 필자는 이 대안적 노동 개념을 생활세계 차원에서 구현하기 위해 어떤 장치들이 마련되어야 하는가를 말해 보겠다.

II. 한국의 노동세계에 미친 지구화의 영향

신자유주의적 지구화가 우리나라 노동세계에 미친 영향은 매우 다양한 시각에서 분석할 수 있겠지만, 대안적 노동 개념을 모색하고자 하는 이 글의 목표에 비추어 여기서는 실업, 비정규직 노동의 확산, 노동소득 감소에 국한해서 살피기로 한다.

1. 실업의 증가

신자유주의적 지구화가 추진되면서 가장 심각하게 드러나는 문제는 구조적이고 만성적인 실업의 증가이다. 오늘의 시장경제에서 실업은 기업의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합리화 과정을 시행하는 데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선진경제에서 기술개발이나 생산설비에 투하되는 자본이 늘어나 생산비용 전체에서 차지하는 고정비용은 평균 85퍼센트 이상에 달한다. 이러한 현실에서 기업의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인건비를 줄이는 방향으로 구조조정을 하다보니 노동합리화 정책을 추구하게 되고, 그 결과 실업은 불가피하게 증가한다.
개방경제 체제에 바탕을 두고 있는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각 기업은 세계 시장에서 가격경쟁력과 수익성을 높이기 위해 싫던 좋던 구조조정과 고용조정에 나서고 있고, 국가도 수익성을 기준으로 사양산업을 규정하여 시장에서 퇴출하는 산업구조조정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과거처럼 노동력의 대량 투입으로는 승산이 없으므로 자본을 집중하여 고부가가치 품목을 생산하는 방향으로 기업의 경제정책이 수립된다. 이에 따라 고정비용이 높아지면, 기업 입장으로서는 노동력을 절약하는 합리화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비자발적 실업이 급속도로 증가할 수밖에 없음을 의미하고, 이 추세는 경제의 지구화가 진행되는 한 수그러들지 않을 것이다. 지난 몇 년 동안 한국 사회에서 고용 문제는 매우 심각한 양상을 띠었다. 지난 외환위기 때에는 고금리와 시중자금 고갈로 인해 기업들이 연쇄적으로 도산하고 기업구조조정이 과격한 고용조정과 더불어 진행되었기 때문에 실업률이 10% 가까이 육박했지만, 실업 문제는 앞으로 우리 사회를 크게 압박할 것이 분명하다. 정부 공식통계에 따르면, 2001년 말 현재 실업률이 약 4% 수준으로 낮아졌고, 2002년 3월 현재 3.4%로 내려앉았다고는 하지만, 정부의 공식 실업률은 경제활동인구조사에서 조사기간 중 수입을 목적으로 한 시간 이상 일한 자까지도 취업자로 분류해서 얻은 결과이기에 우리 사회에서 실질적 실업의 크기를 평가하는 데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2. 노동시장 유연화와 비정규직 노동의 확산

신자유주의적 지구화가 가져온 노동세계의 큰 변화는 노동시장의 유연화이다. 노동시장의 유연화는 고용 유연성과 임금 유연성을 증가시킨다.
우리나라에서 해고제한을 완화하려는 입법은 1997년 노동법 개정을 통해 시도되었으나 노동자들의 저항으로 즉각 시행되지 못하다가, IMF 경제관리에 들어가면서 정리해고제를 시행하게 되었다. 1997년 12월 IMF는 "인수·합병 및 기업 구조조정시의 (정리)해고 제한을 완화해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제고할 것"을 요구한 바 있다. 경영상의 이유로 인한 정리해고가 법제화되면서 정리해고와 권고사직이 급증하였고, 고용불안이 심화되고, 부당해고 역시 덩달아 늘어났다.
노동시장의 유연화로 인해 비정규직 노동은 급속히 확대되고 있다. 1999년 3월 현재 임시직과 일용직 근로자의 비율은 각각 33.1%와 17.4%를 차지하여 취업인구의 50.5%에 이르렀으나, 이 수치는 1999년 9월 현재 53%에 달해 급속히 증가하고 있다. 비정규직 노동이 정규직 노동을 대체하는 경향은 파견근로제의 법제화로 인해 가속화되고 있다.
노동시장의 유연화로 인해 임금삭감과 능력제 지급이 보편화되고 있다. 임금수준의 유연화에 해당하는 임금삭감은 실질실업률이 높고 노동시장 진입이 극도로 어려운 상황에서 노동자들에게 전반적으로 강요되고 있고, 연봉제는 임금체계의 유연화라는 틀에서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다. 이러한 사태발전으로 인해 정규직 노동자들마저도 큰 고통을 당하게 된다는 것은 뻔한 이치이지만, 정작 더 심각한 것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삶의 처지이다. 이들은 고용불안정에 시달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임금 수준도 정규직 노동자들이 받는 본봉의 80-40% 수준을 받고 있다. 노동자들의 소득에서 본봉이 차지하는 비율이 70%에도 미치지 못하는 현행 임금체계를 감안할 때,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실질소득은 매우 적을 것이다.

3. 노동소득 감소와 가난의 확산

실업의 증가와 노동시장의 유연화가 진행되면서 국민소득에서 노동임금이 차지하는 비율(노동소득분배율)은 빠른 속도로 줄어들고 있다. 1997년 현재 노동소득분배율은 62%에 달했지만, 1998년에는 59%로 급속히 줄어들었으며, 이 추세는 계속되고 있다. 이를 거꾸로 뒤집으면, 우리나라에서 영업이익과 이자소득이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소득분배의 공평성이 크게 훼손되고 있음을 나타낸다.
소득분배의 불평등성을 나타내는 지표로 널리 쓰이는 지니계수는 지난 몇 년 동안 우리 사회에서 소득분배가 극도로 악화되었음을 말해준다. 통계청이 2002년 4월 25일에 발표한 "2000년 가구소비실태 조사 결과"에 따르면, 근로자가구와 사업자가구를 망라하여 산출한 지니계수는 0.351로 지난 1996년 0.290보다 0.061포인트나 높아졌다. 지난 1991년 지니계수가 0.274였음을 감안하면, 소득분배 구조는 1996∼2000년 사이에 급속도로 악화된 셈이다. 했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지난 몇 년 동안 소득분배와 소비성향의 계층간 격차는 크게 늘어났다. 1999년 3분기 중 도시 근로자 가구 상위 20%의 월 평균 소득은 4백37만9천9백원으로 최하위 20%의 82만8천4백원의 5.3배나 되었다. 환란 이전인 97년 3분기에는 이 비율이 4.5배였다. 또한 소득 상위 20%의 자가용 구입-유지비, 잡비, 교양오락비 등 세 가지 소비지출액은 81만4천1백원으로 하위 20%의 소비지출 총액인 83만원에 육박하였다. 소득의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소비에서도 그대로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유엔개발계획"(UNDP)이 국내 학자들에게 의뢰한 "외환위기 후 한국의 빈곤실태와 빈곤감시시스템" 프로젝트 보고서에 따르면, 빈곤계층은 외환위기 이후 첫 2년간 8.6%에서 19.2%로 두 배 이상 늘어났다고 한다. 우리나라 인구 다섯 명 가운데 한 명은 빈곤계층에 속한다는 뜻이다. 정부가 정한 1인당 법정 최저생계비 23만3천 원에 미달하는 빈곤계층의 수효가 최고 1천30만 명에 달한다는 프로젝트 보고서의 내용은 매우 충격적이다. 우리 사회에서 빈곤이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유엔개발계획" 보고서를 뒷받침하는 방증 자료는 2000년 4월 13일 현대경제연구소가 실시한 조사보고서이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날 스스로 중산층으로 인식했던 사람들 가운데 3분지 1은 IMF 경제관리 이후 하류층으로 전락하였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조사보고서는 객관적인 기준 없이 단지 중산층 귀속감을 잣대로 삼은 것이기 때문에 한계가 있기는 하지만, 응답자의 54%가 하류층에 속한다고 대답한 것은 충격적이다. 여전히 중산층 귀속감을 밝힌 사람들이 41.4%에 달하지만, 이것은 IMF 경제관리 이전보다 19.7%가 줄어든 수치이다.
중산층에서 하류층으로 전락한 이유로서는 응답자의 50.6%가 소득감소를 들었고, 12.3%가 실직, 9%가 미래에 대한 불안, 8.7%가 부채증가, 8.7%가 자산가치의 하락을 들었다. 이 수치들은 경제위기의 소용돌이가 우리나라의 중산층을 얼마나 참혹하게 할퀴고 지나가고 있는가를 잘 말해주고 있다. 이 사람들은 중산층의 지위를 다시 회복하는 데 적지 않은 시일이 필요하거나(3∼4년 후 37.8%; 5년 후 21.3%) 아예 불가능할 것이라고 대답하였다(20.2%).

III. 노동세계의 변화에 대한 정부의 대응과 이에 대한 비판

신자유주의적 지구화가 노동세계에 미친 심대한 영향에 대해 정부는 어떻게 대응하고 있을까? 여기서는 정부의 대응을 모두 다룰 수는 없고, 본 연구의 취지에 맞추어 노동시간 정책, 노사관게 규율, 사회복지 정책에 초점을 맞추어 정부의 대응을 살피기로 한다.

1. 노동시간 정책

지난 몇 년 동안 정부는 노사정위원회 차원에서 법정 노동시간 단축에 관한 합의를 이끌어내기 위해 애쓴 것이 사실이다. 실제로 2000년 10월 23일에 노사정위원회는 주 5일 근무제를 도입하고, 법정 노동시간을 40시간으로 줄이고, 연간 노동시간을 가능한 한 빠른 시일 내에 2,000 시간 이하로 축소하기로 노사정이 원칙적으로 합의했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합의안에는 노동시간 단축과 관련하여 임금조정을 어떻게 할 것인가, 휴일·휴가제도를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 하는 세부사항에 관한 노사정 합의가 담겨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이 쟁점들에 대한 노동과 자본의 갈등은 그 후로도 매우 심각했다. 결국 2002년 5월 3일 노사정위원회는 이 사회적 의제에 관한 노사간 합의에 도달하지 못한 채, 협상결렬을 선언하였다.
노동시간 단축에 관한 노사정 차원의 논의가 계속되는 동안, 사용자측은 노동시간 단축으로 인해 노동비용이 증가되어서는 안 된다고 못박고, 이를 위해서는 각종 수당 및 휴가·휴일을 조정하고, 연장근로에 적용되는 임금할증률을 대폭 하향 조정하여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특히 중소기업은 노동시간 단축이 노동비용 증가 등 경영여건을 크게 악화시킨다고 보고, 이 제도의 도입에 반대 의사를 분명히 했다. 이에 반해 노동자측의 입장은 노동시간이 단축되더라도 노동자들의 실질소득이 줄어드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고 주장했고, 민주노총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제까지 제도적으로 보장되어 왔던 생리·월차 휴가 및 수당지급을 폐지하는 것을 묵과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노동시간정책을 둘러싼 노사간 협상 결렬은 노사 쌍방의 불신이 그대로 남아 있고 노동시장의 유연화로 인해 노동과 자본 사이의 권력관계가 급격히 기울어진 상황에서 어느 정도 예상된 일이기는 했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는 노사간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에는 정부 입법을 통해 법정 노동시간 단축 정책을 관철하겠다고 공언하고, 정부부처에서 법정 노동시간을 줄이지 않은 채 토요일 휴무를 시험적으로 운영하고 있기는 하지만, 노사간 합의가 깨진 이후 아직 입법 조치에 나서지 않고 있다.
이러한 사태 발전은 우리 사회가 기술 발전과 경제의 지구화로 인하여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이 급격하게 줄어들고 이로 인해 노동세계가 크게 변화되고 있음을 심각하게 인식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정부는 정보사회가 도래함으로써 노동자들이 이에 적응하기 위한 학습 시간을 갖기 위해서라도 노동시간 단축과 주5일 근무 형태 도입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였으나, 이러한 인식이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의 축소에서 비롯되는 노동세계의 변화를 충분히 반영하였다고 말할 수 없다.
물론 시장경제의 틀이 유지되는 조건 아래서는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 개념을 쉽게 폐기할 수는 없다. 그러나 오늘의 경제상황에서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을 일거에 확대시키는 일이 불가능하다면, 현존하는 노동시간을 가급적 더 많은 사람들에게 분배하여 일할 능력이 있고 일할 의욕이 있는 사람들을 노동세계에 끌어들이는 정책을 수립하고 실행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 일은 노동시간을 급진적으로 단축하고, 쪼갤 수 있는 업무를 분할하여 일자리의 수를 늘림으로써 부분적으로 해결될 수 있다.

2. 노동시장의 유연화와 노사교섭 제도

노동시장의 유연화는 노동과 자본의 사회적 관계들에 큰 변화를 가져 왔다. 우선 노동시장의 유연화는 노동세계를 정규직 노동자들과 비정규직 노동자들로 분단시켰다. 두 노동집단 사이에는 임금, 노동조건, 사회정치적 지위 등에서 큰 차이가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정규직 노동자들로 전환하거나,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에 입각하여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임금차별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그러나 이와 관련된 정부의 조치나 입법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 다음, 노동시장 유연화로 인해 현행 사업장 노동조합주의는 유명 무실해졌다. 연봉제가 확산되면서 노동계약은 개별적 계약 형태를 띠게 되었고, 사업장 차원의 단체교섭은 점차 그 중요성을 잃게 되었다. 그러나 사업장 차원의 단체교섭은 노동자의 이해관계를 집단적으로 실현하는 방법이기 때문에 노동자들의 단결권에 근거한 이 제도를 연봉제 도입으로 무력화시키는 것은 역사의 시계를 되돌리려는 시도와 다를 바 없다. 따라서 사업장 차원의 단체교섭을 원칙으로 삼고, 노동조합이 참여하는 가운데 공정한 업무 평가에 바탕을 둔 개별적 보너스 제도를 실시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그러나 정부는 이를 위한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고 있다.
단체교섭과 관련해서 꼭 짚고 넘어갈 것이 한 가지 있다. 사업장 차원의 노사교섭은 그 자체만으로는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제도이다. 사업장 차원의 단체교섭에서 노동자측 교섭대표들이 많은 부담을 느낀다는 것은 이미 사회심리학적으로 밝혀져 있다. 사업장 차원의 노사교섭은 또한 노동과 자본의 사회적 관계를 국민경제적 틀에서 조절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노사간 갈등을 극단화하는 폐단을 갖는다. 이 때문에 노사 갈등과 협력을 조절해 온 경험이 풍부한 나라들에서는 사업장 노사교섭 제도에 대한 산별 노사교섭 제도의 우위성을 인정하고, 이를 법제화하고 있다.
산별 노사교섭 제도를 도입하면, 노동자들의 교섭력이 강화되어 사용자측과 대등한 지위를 가질 수 있고, 노동과 자본은 개별기업과 국민경제를 책임 있게 형성하는 사회적 파트너 의식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민주노총은 1999년 2월 산업별 노동조합을 결성하여 현행 산별 노동연맹을 대치하고, 산별 노사교섭 제도를 구축하겠다고 선언한 바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노동자측의 움직임에 대해 사용자측은 냉담한 반응을 보였고, 정부도 산별 단체교섭을 뒷받침하는 입법 조치에 나서지 않고 있다. 이러한 정부의 소극적 태도는 강한 노조가 국민경제를 강력하게 발전시키고, 강한 노조는 오직 산별 노조의 형태로만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다. 노동시장의 유연화로 인해 노동자들의 권력이 약화되면, 노사갈등은 적절하게 해소되지 않고 물밑으로 잠복하는 위험한 양상을 보이게 될 것이다. 노동소득이 급격히 감소하고 노동조건이 빠르게 악화되는 상황에서 노동조합의 교섭력이 약화되면, 사회적 평화는 장기적으로 크게 위협받는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입법조치를 통해 산별 수준의 노사교섭이 가능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3. 생산적 복지 정책

노동세계의 급격한 변동에서 비롯된 실업과 가난의 문제에 대응해서 정부는 나름대로 여러 방도를 강구하고 있다. 그 동안 정부는 공공근로를 일시적으로 확대하고, 실업보험제를 도입하고, 신자유주의적 마이너스 소득세 제도를 변용한 국민기초생활보호제도를 도입하였고, 장기적인 사회정책과 복지정책의 틀로서 생산적 복지 개념을 제시했다.
그러나 공식적인 실업률이 4% 수준으로 낮아지면서 공공근로제는 축소되고 있고, 실업보험제와 국민기초생활보호제는 우리 사회에 아직 정착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새로운 제도들이 정착하고 제대로 운영되기 위해서는 물론 많은 시행착오를 거칠 수밖에 없을 것이고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정작 중요한 것은 신자유주의적 지구화 시대에 정부가 내세운 "생산적 복지" 개념에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도사려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3.1 "생산적 복지" 개념은 1999년 8월 15일 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와 1999년 10월 25일 아시아·태평양 민주지도자 회의에서 한 대통령의 연설에서 향후 사회정책과 복지정책의 기본노선으로 선언되었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는 자유, 인권, 경제발전을 위해 필수 불가결하지만 그것만으로 완전하다고 할 수 없다"는 전제 아래서 "경제가 발전할수록 빈부격차 등으로 사회적 안정이 흔들려 민주주의가 위협받을 수 있기 때문에 생산적 복지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생산적 복지"가 지향하는 목표는 무엇인가?

3.2 "생산적 복지"는 본래 선진경제들에서 국가복지가 난관에 부딪치면서 그 대안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부각된 개념이다. "무덤에서 요람까지"라는 말로 상징되는 서유럽 복지국가의 이상은 1970년대 초 이래로 국가재정의 파탄과 복지행정의 관료화로 인해 막다른 골목에 빠져들었다. 1980년대 초 이후 신자유주의를 도입한 여러 나라들에서는 법인세와 이자소득세가 감면되고 국가재정에 근거한 복지지출의 절대적 규모가 급격히 줄어들면서 개인의 복지주도권이 강조되기 시작했다. 시민들이 각자 제 삶의 처지를 향상시키기 위해 주도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업이나 불완전고용, 질병이나 장애 등 개인의 힘으로 이겨내기 어려운 상황을 아랑곳하지 않고 개인의 책임을 강조하는 데에는 분명 한계가 있었다. 사회적 가난이 확산되고 사회적 단절과 배제가 날로 심각해져 갔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온 개념이 이른바 "생산적 복지"이다.
"생산적 복지" 개념을 한 마디로 정의한다면, 국가가 각 사람이 먹을 음식을 마련하여 제공하는 일을 언제까지고 계속할 수 없으니, 각 사람이 음식을 장만하여 먹을 수 있는 능력을 기르도록 지원하는 데 그쳐야 한다는 것이다. 국가가 각 사람을 "요람에서 무덤까지" 보살필 것이 아니라, 각 사람이 "요람에서 무덤까지" 제 나름대로 삶을 형성하고 삶의 처지를 주도적으로 개선할 수 있도록 측면에서 지원하자는 것이다. 그래서 나온 것이 "개인의 주도권을 활성화하는 국가"라는 개념이다.
영국의 경우, "생산적 복지" 정책은 크게 보면 세 가지로 되어 있다. 하나는 기본생활 보장이고, 또 다른 하나는 직업(재)교육, 나머지 하나는 공동체적 유대의 강화이다. 기본생활 보장은 노동능력을 상실하였거나 노동능력을 아예 갖지 못한 사람들을 위한 사회부조의 일환으로 시행되어 왔다. 직업교육의 강화는 실업정책이 소극적 정책에서 적극적 정책으로 바뀌어졌음을 의미한다. 실업급여를 최소한의 생존 수준으로 줄이면, 각 사람은 일자리를 자발적으로 찾아 나설텐데, 국가는 이 사람들이 직업능력을 갖추도록 지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직업재교육을 활성화하면 사양산업에 종사하던 사람들이 장래성 있는 부문에서 직업능력을 갖게 될 것이고, 저숙련 노동분야에 종사하던 사람들이 고숙련 직업능력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공동체적 유대 강화와 관련해서 가정과 지역사회의 중요성이 새삼스럽게 부각되고 있기는 하지만, 그 성공 여부는 아직 속단할 수 없다.

3.3 2000년 경제정책 방향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정부는 "생산적 복지"의 실현을 경제 목표들 가운데 하나로 제시했다. "생산적 복지"는 효율성과 경쟁을 중시하는 신자유주의적 접근보다는 중산층과 서민층의 생활의 질을 높이는 "따뜻한 시장경제"를 추구하는 방법이며, 그것은 시혜적 복지(Welfare)로부터 "일할 수 있도록 하는 복지"(Workfare 혹은 Welfare to Work)로 복지정책을 전환하는 것을 의미한다.
생산적 복지의 핵심은 국민기초생활보호법(1999년 9월 7일/법률 제6024호)이다. 국민기초생활보호법 제1조가 규정하고 있는 바와 같이, 이 법은 크게 보면 두 가지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나는 최저생계비 이하의 소득을 갖는 국민의 기초생활을 보호하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일할 수 있는 사람을 돕는 것이다. 앞의 것은 1) 최저생계비 이하의 모든 가구가 연령, 근로능력 유무에 관계없이 의·식·주·의료·교육 등의 기초생활을 보장하고, 2) 수급자에게 지급되는 생계급여는 최조생계비에서 가구의 소득과 타 법령에 의한 지원액을 공제하여 제공하고, 3) 주거급여를 신설하여 주거안정을 꾀하고, 긴급급여를 신설하여 긴급 생계 지원을 위한 행정절차의 탄력적 적용을 가능하게 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뒤의 것은 1) 수급자의 근로능력, 가구여건, 자활욕구 등을 고려해서 가구별 자활지원 계획을 수립하여 구직안내, 직업훈련, 자활공동체 사업 참여, 생업자금 융자 등 자활 서비스를 제공하고, 2) 직장생활과 가정생활이 양립할 수 있도록 기구여건을 조성하기 위하여 양육, 주간보호, 재가복지 등 사회복지 서비스를 체계적으로 연계하여 제공하는 것을 그 핵심 내용으로 한다.
생산적 복지 개념을 도입하여 체계화한 대통령 비서실의 "삶의 질 향상 기획단"은 생산적 복지 정책을 위한 네 가지 과제들을 설정하고 있다: 1) 국가의 소득재분배를 중심으로 한 복지정책 영역에서 국민기초생활의 보장, 사회보험 제도의 강화, 사회복지 서비스의 확대를 도모한다. 2) 시장분배를 통한 복지정책 영역에서는 모든 국민이 시장경제에서 생산과 분배에 참여할 수 있도록 균등한 기회를 제공하고, 이와 관련하여 인간개발을 통한 고용안정, 근로자복지, 노동참여복지, 노사협의와 근로자 참여 확대 등을 도모한다. 3) 자활, 자립 정책을 수립하여 저학력, 저기술, 중고령 장기실직자 등 경쟁력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사회적 보호 대책을 마련한다. 4) 생산적 복지의 기반을 조성하기 위하여 사회투자와 교육기회를 확대하고, 평생건강관리 체계를 구축하고, 문화복지공간을 확충하고, 쾌적한 환경을 조성하고, 조세정의를 실현한다.

3.4 이와 같은 "생산적 복지" 개념은 우리 사회의 역사를 돌이켜 볼 때 획기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압축성장기에 풍미했던 先成長 後分配의 도그마를 벗어 던지고 성장과 복지의 병행을 정책 과제로 삼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산적 복지" 개념의 한계는 아주 쉽게 엿볼 수 있다. 그 한계는 신자유주의적 성장정책이라는 하드웨어에 손을 대지 않고 복지의 사회적 조직이라는 소프트웨어에만 손을 대는 데 있다.
우선, 신자유주의적 성장정책이 자본소득과 노동소득의 절대적 불균형을 가져오는데, 이 소득분배의 불균형을 그대로 놓아둔 채 고용안정과 복지를 실현하는 길은 없다. 자본측이 엄청나게 축적한 이윤을 가지고 세계시장에서 경쟁력을 높이겠다는 명분을 내걸고 투자에 나서면, 일자리를 줄이는 노동합리화 과정이 진행된다는 것은 이미 앞에서 지적한 바 있다. 이렇게 되면 실업이 증가하고 실업자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재정지출이 증가할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사태발전을 막기 위해서는 일할 능력이 있고 일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일할 기회를 사회적으로 보장할 뿐만 아니라 자본소득과 노동소득의 균형을 회복하기 위한 강력한 노력이 국가와 시민사회에 의해 조직되어야 할 것이다.
지구화로 인해 국민경제의 균형성장이 갖는 의미가 크게 줄어든 판국에 소득분배 정책을 강조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하고 반문할 사람들이 많이 있겠지만, 그런 사람들의 시각은 너무나도 근시안적이다. 국민경제가 건전하게 발전하기 위해서는 생산과 소비의 거시균형을 이루는 가운데 대외개방으로 나아가야 한다. 오늘날 우리나라 경제가 안정성을 잃고 외생 변수들에 의해 흔들리는 까닭은 우리 경제의 대외의존도가 너무 높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수출입국이라는 구호가 절실한 의미를 담은 적이 있었지만, 오늘의 세계에서 이 구호는 그 실효성을 의심받고 있다. 지구상의 거의 모든 국민경제들이 수출지향 구조로 탈바꿈되어 있는 오늘의 세계경제 상황에서 구매력 있는 몇 개의 시장들에서 벌어지는 상품 경쟁은 수출상품의 수익률을 떨어뜨리고 있고, 이 경향은 수출 경쟁이 치열해지면 치열해질수록 더 심해질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수출과 내수의 균형을 유지하고, 국민경제의 균형성장을 도모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국민경제의 거시균형은 오직 국민소득이 노동과 자본 사이에서 적정하게 분배되는 소득분배 정책 아래서만 달성될 수 있다.
그 다음, 소득분배 정책이 바르게 수립될 때 소득재분배 정책이 실효를 거둘 수 있다. 일반적으로 소득재분배 정책은 조세정책과 재정정책을 통해 재원을 확보하여 사회정책이나 복지정책을 통해 이를 사회적 약자들에게 배분하는 형태를 취한다. 노동능력을 갖추지 못했거나 상실한 사람들에게 이와 같은 이전소득이 갖는 의미는 소득분배의 정의가 실현되었다고 하더라도 결코 줄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소득재분배 정책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요즈음 농업이나 제조업 분야에서는 기술혁신을 통해 생산성이 급격하게 향상되고 있다. 이것은 돌이킬 수 없는 추세이고, 이 두 부문들에서 퇴출되는 노동력의 규모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크다. 이 퇴출노동력이 고용시장에서 다시 기회를 얻기 위해서는 서비스산업 분야가 발전되어야 한다. 사정이 이렇기 때문에 제조업 분야에서 축적되는 이윤을 적절하게 퍼내어 서비스산업 분야의 육성에 투입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 서비스 산업은 공적인 손에 의해 조직되어야 하고, 주로 인적 자원의 개발과 보호, 생태계 안정을 위한 활동 등 생산과 소비의 유발 효과가 적고 인간과 자연의 생명을 돌보는 분야에 집중되어야 한다.

3.5 사정이 이러한 데도, 정부가 소득분배정책과 소득재분배정책을 적극적으로 결합하고, 조세정책, 재정정책, 사회정책, 복지정책, 환경정책, 산업정책, 구조정책, 인적자원보호 정책 등을 망라하는 적극적인 시장개입에서 발을 빼낸 채, "생산적 복지" 개념만을 강조하는 것은 지구화로 인해 노동세계에 밀어닥친 엄청난 변화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IV. "삶에 필요한 노동" 개념에 바탕을 둔 개혁

1. "삶을 위한 활동"과"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

노동세계의 급격한 변화에 대응해서 소득분배정책과 소득재분배정책을 통해 새로운 노동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노동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제시되어야 한다.
본래 노동은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대상물을 향해 의식을 갖고 창조적으로 벌이는 활동을 가리킨다. 인간이 생존하는 한, 이러한 "삶을 위한 활동"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창세기 1장 28절은 하느님이 사람들을 그 분의 형상에 따라 지은 후 그들을 불러 축복을 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여라.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려라." 성서의 이 말씀은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을 요약한 마그나 카르타라고 할 수 있다. 이 마그나 카르타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 있는 것일까?
사람들이 자식을 낳으면 인구는 늘게 마련이다. 이 늘어나는 인구를 먹여 살리고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땅을 정복하여야 한다. 창세기에서 땅을 정복한다는 말은 땅을 경작한다는 뜻이고, 욕망 충족을 위해 노동을 한다는 넓은 의미로 새길 수 있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생명체들을 다스리라는 명령은 창세기 전체의 문맥에서는 인간과 여러 생명체들이 공생할 수 있는 질서를 수립하고 유지하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그렇다면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노동은 인간과 여러 생명체들이 공생의 질서를 유지하는 가운데 삶의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활동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본시 "삶을 위한 활동"이었던 노동은 인류역사에서 매우 다양하게 조직되어 왔다. 강제노역, 노예노동, 농노노동, 임노동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노동들은 역사의 특정 시기에 사회적으로 조직된 노동의 특수한 형태들이다. 특히 시장경제가 역사적으로 조직된 이후에 임금소득을 얻기 위해 노동력을 파는 일이 제도화되면서, 노동시장을 거치지 않는 노동은 단순한 활동으로 간주될 뿐, 업적보상이나 사회적, 정치적 권리 실현으로부터 배제되기에 이르렀다. 이른바 시장경제의 확립과 더불어 노동사회가 도래한 것이다.
시장경제에서는 상품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노동, 곧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만이 의미를 갖는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활동들 가운데 많은 것은 시장사회에서 그 업적을 전혀 보상받을 길이 없다. 예를 들면, 가계의 틀에서 이루어지는 육아나 교육, 생활의 재생산을 위한 활동, 혹은 이웃을 위한 봉사 등이 그것이다. 이런 활동들은 엄밀히 말하면 "삶을 위한 활동"이다. 그러나 시장사회에서는 삶에 필요한 다양한 노동들 가운데 오직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을 제외한 나머지 노동들은 군더더기에 지나지 않는다.
문제는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이 급속도로 줄어들고 있다는 데 있다. 경제정책과 사회정책이 오직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만을 근거로 삼는다면, 그 결과는 자명하다. 노동세계에 참여하는 소수의 사람들과 노동세계에서 배제된 다수의 사람들의 삶의 처지는 극단적으로 달라지고, 노동세계에서 참여할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사람들은 결국 국가복지로부터도 탈락되어 "언더클래스"(Under-Class)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삶을 위한 활동"이 중심이 되고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이 부차적인 역할을 맡도록 하는 발상의 일대전환이 필요하다.

2.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의 보호

위에서 말한 발상의 일대전환을 이루었다고 해도, 시장경제가 존속하는 한,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은 결코 폐기되지 않는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을 수행하는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이제까지 마련되었던 진보적인 제도들이나 제안들은 앞으로도 유효할 것이다. 필자는 시장경제에서 노동과 자본의 사회적 관계들을 규율해 온 경험이 풍부한 선진경제들에서 몇 가지 제도들을 배우고 그 도입을 서둘 필요가 있다고 본다. 예를 들면, 기업 차원에서 실현된 독일식 노사 공동결정 제도와 사회적인 직장조직법, 산별 단체교섭 제도, 연금, 의료보험, 산재보험, 실업보험, 노인부양보조보험 등 각종 사회보험 제도가 그것이다.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은, 그 일을 할 수 있고 또 그 일을 통해 돈벌이를 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 능력과 자격조건에 따라 골고루 나누어질 수 있어야 한다. 시장경제에서 일자리를 갖지 못한다는 것은 사회생활을 하는 데 꼭 필요한 위신과 소득을 상실하고, 사회로부터 배제되고 단절된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그 누구에게도 강요할 수 없는 운명이다. 따라서 노동시간을 급진적으로 단축하고 연대적인 소득분배정책을 통해 일자리의 분배를 이룩할 수 있는가의 여부가 문명사회를 재는 척도로 자리잡아야 한다. 자본을 통한 부가가치 생산이 급격히 증가하는 오늘의 조건에서는 노동시간 단축에 따른 단순비례적인 임금축소를 허용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생산과잉에 따른 공황을 피하기 위해서도 이 점을 중시해야 할 것이다.

3. "삶을 위한 활동"의 조직과 보상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이 급진적으로 감소하면 "삶을 위한 활동시간"은 상대적으로 늘어난다. 따라서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과 "삶을 위한 활동시간"을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삶의 질과 건강성을 드높이는 것은 우리 사회의 중요한 미래 과제가 될 것이다. 아래서는 이 과제를 실현하기 위해서 유의할 점을 몇 가지 말하기로 한다.

3.1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은 노동능력이 있고 노동의욕이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분배되어야 하고, 그것으로부터 인간적이고 문화적인 삶을 보장하는 적정 임금과 연금이 부여되어야 한다.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을 갖지 못하는 사람들, 곧 질병, 장애 혹은 노령으로 인해 노동사회에 참여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사회적 이전소득을 통해 생활비와 연금이 부여되어야 한다. 이것은 일자리를 향한 권리뿐만 아니라 소득에 대한 권리도 인간적인 삶을 위해 인정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바로 이 조건이 충족되어야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의 분배를 둘러싼 사회적 갈등을 완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3.2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의 단축을 통해 "삶을 위한 활동시간"이 증가하면, 이 "삶을 위한 활동시간"은 다양한 형태의 공공봉사 활동으로 조직될 수 있다. 공공봉사 활동은 시장 활동도 아니고, 국가 활동도 아닌 제3의 활동 형태이다. 이 제3의 활동 형태는 타자를 위해 자신의 활동력을 "이전하는 노동"(transduktive Arbeit)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약한 사람들과 동행한다든지, 문화적 관계들을 돌본다든지, 자연적인 생활환경을 보존한다든지 하는 활동이 그것이다. 이와 같은 활동은 그 대가를 지불받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이와 같은 생각은 미국과 독일의 여러 학자들에 의해서도 제시되고 있다. 미국의 제레미 리프킨은 시장 부문과 국가 부문 바깥에 제3의 부문을 설치하여 앞의 두 부문들에 참여하지 못하고 있거나 활동시간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공동체에 유익이 되는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하고, 이들의 활동에 대해 "세금경감" 조치를 취하거나 "사회적 소득"을 부여하여 소득 효과를 볼 수 있도록 하자고 제안한다. 리프킨은 이를 위해서는 새로운 사회적 협약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와 비슷한 견해는 독일의 울리히 벡에게서도 나타난다. 벡에 따르면, 오늘의 사회는 노동사회로부터 벗어나 시민노동의 사회로 나아가고 있다. 노동사회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만이 인정되는 시장사회의 논리를 상대화시키고 "삶을 위한 활동"에 공공적 의미를 부여한다는 뜻이다. 벡은 시민들이 "삶을 위한 활동시간"을 할애하여 공공적 목적을 위해 활동하는 것을 가리켜 "시민노동"이라고 명명하고, 시민노동에는 반드시 "시민수당"이 부여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벡의 말을 직접 들어 보자.

"시민노동은 수없이 주문처럼 불려지는 시민 계급적 참여 활동 이상의 것이다. 시민노동에서 중심을 이루는 것은 시간, 공간, 돈, 협업과 같이 거기에 소요되는 자원들을 망라한 활동 또는 활동화의 양태이기 때문이다. 무대가성을 근거로 지위를 인정받는 시민 참여와는 달리, 시민노동은 시민수당을 통해 비록 정식 급료는 아니지만 일정 보상은 받음으로써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그 가치를 높이 인정받는다. 화폐 사회에서 돈이라는 것은 현재 무엇이 가치 있는가를 재는 척도인 것이다. 협상을 통해 정해져야 할 시민수당의 액수는 적어도 실업보조금과 사회부조의 온당한 수준은 넘어서야 할 것이다".

벡은 시민노동을 국가나 시장 바깥에 조직되는 제3의 노동 부문으로 간주하고, 이 노동 부문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실업자"로 간주하지 말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시민노동에 대한 보상은 국가가 하는 것이 아니라, "공공복지 기업"이 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공공복지 기업"은 시민사회의 공적인 유용성을 증진하는 방향으로 인적 자원을 활용하여 양질의 공적 서비스를 제공하고 그것에 대한 수수료를 받음으로써 시민노동에 대한 보상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3.3 "삶을 위한 활동"은 금전적 보상을 뛰어 넘는 방식으로도 조직될 수 있다. 우리의 전통 사회에서 면면히 이어져 온 "두레"를 현대화하여 삶의 다양한 조건들에 적응시키는 것이 그것이다. 집수리, 보육, 학습지도, 노인 돌보기, 사용가치 중심의 물물교환 등 "기회비용"으로 따져볼 때 의미 있는 모든 경제활동을 "두레" 형태로 조직하는 것이 그 예이다. 만일 상품 생산방식과 다른 형태의 재화를 생산하고 교환하는 데 목돈이 필요한 경우에는 신용대출을 받을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전통사회에서 상부상조의 정신으로 조직되었던 "계"를 현대화하여 운용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것은 거대 은행들과 화폐자본가들로부터 "두레" 활동의 자율성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으로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3.4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과 "삶을 위한 활동"이 서로 맞물려 개인의 발달과 공동체의 발전이 동시에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서는 시민들이 자신의 시간에 대한 주권을 회복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시간에 대한 주권"이 인정된다면,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은 유연성을 띠게 될 것이고, 시민들은 시민사회를 뒷받침하는 물질적 업적을 창출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을 형성하고 공동체를 위해 유익한 일을 하는 데 보다 큰 활동 여지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V. 맺는말

필자는 경제의 지구화가 노동세계에 미치는 엄청난 영향을 관찰하면서, 노동의 미래와 미래의 노동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노동은 삶을 전개시키는 인간 특유의 방식이다. 오늘날 노동은 한갓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지구적 경쟁 아래서 노동합리화 조치가 취해지면서 일자리는 귀해지고 있고, 그나마 그 일자리마저도 비정규직 노동이라는 형태로 파편화되고 있다. 시장경제와 함께 도래한 노동사회는 대량실업과 비정규직 노동으로 인해 종언을 고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이제까지 노동사회를 절대적으로 지배해 왔던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이라는 패러다임을 상대화하고, "삶을 위한 활동"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중심으로 생활세계를 재건해야 한다.
생활세계의 재건 과정에서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을 진보적인 제도들에 의해 보호하는 것은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과제이다. 이 과제를 제대로 수행할 때, 우리 사회는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과 "삶을 위한 노동"을 다양한 방식으로 결합할 수 있을 것이다. 노동시간 정책과 소득 정책을 통해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을 노동능력이 있고 노동의욕이 있는 만인에게 공평하게 분배하고 그에 대한 보상이 정의롭게 이루어지는 가운데, "삶을 위한 활동"이 공공적 성격을 갖고 보상받을 수 있도록 법제화가 이루어진다면, 우리 사회는 매우 인간적이고 사회적인 성격을 가질 것이다.
이러한 제도 개선에서 놓치지 않아야 할 것은 질병, 장애 혹은 연령으로 인해 노동능력이 없는 사람들을 사회적으로 보호하고, 시민들의 시간주권을 존중하는 일이다.
2002-09-29 17:0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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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1. 왜 진보운동의 새로운 기획인가 (박래군) (진보운동가들에겐 필독 권함~!!) 정강길 6085 02-25
27 [펌] 한국과 일본의 미래세대, 동북아시아 평화연대를 위해 하나 되는 길 (김민웅) 정강길 6014 01-07
26 [펌] "<자기해방>으로서의 사회주의야말로 가장 큰 희망" 알렉스 캘리니코스와… 정강길 6088 12-15
25 [펌] 밀턴 프리드먼이 남긴 '惡의 유산' 정강길 7438 12-01
24 [펌] 제국과 다중론은 미국식 자유주의에의 투항 (사미르 아민) 정강길 5785 09-21
23 맑스꼬뮤날레 참관기-고전적 맑스주의냐 자율주의적 맑스주의냐 정강길 5994 09-21
22 [펌] '제국'이 아니라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노동자계급의 반… 정강길 5809 09-21
21 [펌] 대안세계화와 한국 사회운동 정강길 6502 09-21
20 마르크스를 죽여야 마르크스가 제대로 산다..!! 정강길 6843 09-21
19 [펌]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의 차이점에 대해 정강길 16223 09-21
18 [자료] 노동의 문제와 활력이 넘치는 민주주의(더글라스 스텀) 정강길 5356 09-21
17 [펌]경제학자 스티글리츠의 '세계화가 가져온 불만-' 정강길 6854 09-21
16 화이트헤드 철학의 사회학적 용용 개념 : <단위 행태>unit attitude 고찰 정강길 6870 09-21
15 [기사] 자살률, 경제성장률.실업률과 밀접한 관련 정강길 7744 09-21
14 현대사회주의론 (김세균) 정강길 7210 09-21
13 [펌] 일상적 파시즘론의 공허함 (이구표) 정강길 6501 09-21
12 [펌] 세계적 석학 경제학자 스티글리츠-버그스텐 논쟁 정강길 6815 09-21
11 [펌] 미국의 제3세계 정책과 군사적 개입 (김세균) 정강길 7568 09-21
10 [펌]월러스틴의 세계체제 분석 - 拔本과 再構築의 변증법 (이수훈) 정강길 8035 09-21
9 [펌] 월드컵의 이면 : 축구공 만드는 아이들 (김선형) 정강길 8973 09-21
8 지구화 시대의 대안적 노동 세계에 관한 구상(강원돈) 정강길 6798 09-21
7 [기사] 세계 경제- 위기의 자본주의 두가지 '동력' (월든) 정강길 6573 09-21
6 [기사]세계 환경 유엔보고서, 지구위기상황 엄중 경고 정강길 6295 09-21
5 [펌] 제국논쟁 : 지구화와 민주주의 (마이클 하트) (1) 정강길 7608 09-21
4 [펌] 경제학 인터뷰 정강길 6388 09-21
3 [펌] 한미FTA, 노무현 정부의 자살인가 이일영 7114 05-08
2 [펌] 새로운 문명과 한국의 사회운동 이시재 6212 05-08
1 문명의 ‘충돌’과 ‘공존’ 이현휘 8180 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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