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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필독] <사회민주주의> 선언 (조원희, 정승일 / 홍진북스)    
  글쓴이 : 미선 날 짜 : 13-06-20 07:05 조회(8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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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우리를 사회민주주의로 부르고 있다.
지금까지 이 나라에서 사회민주주의는 때로는 무상급식과 보편적 복지로, 때로는 복지국가와 경제민주화라는 이름으로 필요에 따라 잠깐씩 모습을 드러내었다가 다시 안개 속으로 모습을 감추는 무명의 조연이었다. 그러나 이제부터 사회민주주의는 온전한 정신(가치관)과 육체(전략과 정책), 손발(조직)을 가진 주인공으로 당당하게 미래를 향한 역사 무대에 올라야 한다.
지금까지 이 나라의 진보주의자들은 사회민주주의의 존재를 인정하기를 주저하고 거부해왔다. 그들은 지금도 여전히 진보적 자유주의니 평등적 자유주의니 하는 각종 자유주의나 또는 반자본주의 좌파의 품 안에 머무르려 하면서 역사의 부름을 애써 외면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제 때가 왔다.
모든 나라, 모든 시대가 사회민주주의의 부름을 받는 것은 아니다. 식민지 지배에 이은 가난한 개발도상국으로 출발한 이 나라는 여전히 많은 문제가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난 50년간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그리고 짧은 기간 내에 달성하는 세계사적으로 드문 업적을 이루었다. 오늘날 이 나라는 조선과 자동차 같은 중화학공업만이 아니라 전자와 통신 등 최신 산업에서도 세계적 수준의 생산력과 기술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오늘날 이 땅의 사회민주주의는 이 나라 남녀 노동자와 직장인들이 청춘을 다 바친 땀과 장시간 중노동으로 이룩해낸 거대한 생산력 발전과 기술력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또한 이 나라는 기본 인권과 형식적 민주주의 면에서도 미흡하지만 야만적인 독재를 벗어난 나라로 발전하였다. 사회민주주의의 부름은 무수한 투사와 열사들이 독재와 탄압에 맞서 민족해방과 노동해방,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목숨 걸고 싸워 온 전통과 성과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리하여 역사는 지난 1백년간 우리 민족이 겪어온 고난과 성공, 실패를 모두 감싸 안으면서 이 나라를 사회민주주의라는 새로운 시대정신으로 인도하고 있다.

한국에서 사민주의자의 선구자로 해석되는 여운형의 연설 모습(자료사진)
우리 역사에서 사회민주주의는 낯설지 않다. 해방 정국에서 사회민주주의를 위해 분투한 여운형 같은 인물과 정치 세력이 있었으며, 이들은 민주적이고 자유로우며 모든 민중이 평등하게 잘 사는 나라를 세우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노력은 미소 냉전과 6.25 전쟁, 미성숙한 주체 역량, 근대적 산업 기반의 부재 등 악조건에 부딪혀 시지프스와 같은 운명에 처하고 말았다. 그렇지만 반세기에 걸친 산업화와 민주화의 노고를 거친 이후, 역사는 우리에게 사회민주주의를 향해 나아가라고 손짓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와 파국
‘온 몸에 피와 고름을 뚝뚝 흘리며’ 태동한 19세기 서방의 자본주의는 역사상 유래 없는 문명적 업적과 기술적 진보를 낳았다. 그렇지만 그것은 20세기 초중반에 절망과 대립, 두 차례에 걸친 참혹한 세계대전, 그리고 1960~70년대의 황금기를 거쳐 1980년경에 그 1막을 내렸다.
그리고 20세기 말엽 자본주의의 제2막 1장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라는 급진 우파가 주도하는 체제로 얼굴을 드러냈다. 이 체제는 고전적 자유주의보다 더 거대하고 더 역동적인 기술문명적 발전과 함께 더 통합된 ‘글로벌적 성격’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동시에 신자유주의적인 글로벌 자본주의는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불확실성과 불안정성을 잉태하고 있었다. 이는 필연적으로 고삐 풀린 자본주의의 예외 없는 결과인 양극화를 낳았고 마침내 2008년 이래 스스로의 모순에 의해 붕괴하고 있다.
선진국에서는 1980년대부터, 그리고 이 땅에서는 1990년대 초반부터 신자유주의와 금융자본화의 거센 흐름이 지배하였다. 금융자본주의 반혁명은 금융자본의 국제적 이동성을 극대화하여 노동자계급의 저항을 무력화시켰다. 또한 그것은 20세기 중후반 선진국에서 달성된 복지국가를 상당 정도 해체하는데 성공하였으며, 그리하여 ‘자본주의의 황금기’를 가능하게 했던 사회적 연대는 물론 노동-자본간 합의 시스템을 해체하였다.
‘자본가와 투자자가 수익을 낼 수 있느냐 아니냐’가 기업과 국민경제 의사결정의 최고 가치로 부각되면서 각국 정부는 급진적인 규제완화와 시장개방을 통해 자국의 사회경제적 환경을 국내외 자본가와 투자자들에게 유리하게 만드는 데 몰두하여 왔다. 이는 노동자와 직장인들, 그 가족들에게 적절한 생활임금과 사회보장을 확약하던 복지국가의 틀을 허물었고, 그 결과 전세계적으로 88만원 세대(한국)와 빈털터리 세대(미국), 비참세대(일본), 1천유로 세대(유럽) 등 다양한 이름으로 존재하는 근로빈곤층을 양산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부자와 가난한 자, 부국과 빈국 간 경제적 불평등을 고착화시키고 전세계적인 차원에서 금융시장 불안정성을 심화시켰으며, 마침내 오늘날 자본주의 세계 체제는 80년 전인 1930년대의 대공황(Great Depression)에 버금가는 대불황(Great Recession)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그런데 자본주의의 불확실성과 불안정성, 위기는 본질적으로 역사적 진보의 계기로 작용하는 것이지 퇴보의 징조가 아니다. 맹목적이고 무정부적인 사적 이익에 의해 추동되는 자본주의의 발전은 언제나 불확실하고 불안정하지만, 역사에서 진보의 씨앗은 반드시 이런 상태 속에서만 태동된다는 점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 진보를 향한 역사의 에너지는 자본주의의 발전 속에서만 생성·축적되는 법이며, 자본주의의 발전을 우회하거나 생략한 채 역사가 ‘진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회민주주의의 역사관과 무관하다.
신자유주의가 압도적으로 지배하던 시대는 2008년 말에 발생한 글로벌 금융위기와 함께 끝났다. 이제 자본주의의 대위기를 맞이하여 인류는 다시금 민주주의냐 자유 시장이냐, 진보냐 퇴보냐, 문명이냐 야만이냐 라는 양자택일 선택의 기로에 섰다. 현재 진행 중인 유럽의 경제위기에서 볼 수 있듯이, 인류가 지난 1백년간 피와 땀으로 쟁취하여 쌓아올린 민주주의와 노동권, 복지와 문명의 진지를 유지하고 더 발전시키고자 한다면, 더 이상 신자유주의와 금융자본에 기댈 수 없으며, 단호히 그 헤게모니를 거부하여야 한다는 점이 날이 갈수록 분명해지고 있다.
한국 자본주의의 모순과 파국
그렇다면 세계 자본주의의 제2막에서 이 나라는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 19세기말 세계 자본주의의 제1막에서는 매우 후진적이고 희망의 구석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들었고 마침내 식민지로 전락했던 이 나라가 20세기 말 제2막의 자본주의 세계 체제에서는 하나의 주역으로 등장하였다.
19세기에 세계의 진보 세력이 갈망하였던 보통선거권과 초중등의무교육, 8시간 노동제 등이 대한민국에서 이미 형식적이나마 대체로 실현되었다. 게다가 젊은이의 80% 이상이 전문대 이상의 고등교육을 받는다는 것은 19세기 유럽 진보의 상상력을 뛰어넘는 위대한 역사적 성과이다. 또한 이 나라는 기술문명의 측면에서도 세계의 선두에 서 있다.
우리나라는 비록 구매력 기준이지만 일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를 넘어섰으며, 수년 내로 경제력에서는 선진국 수준에 도달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그리하여 싱가포르나 홍콩 같은 소규모 도시국가를 제외할 때, 개발도상국에서 출발한 나라들 중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선진국 문턱에 도달하였다. 물질적으로 세계 경제의 중심부로 진입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동시에 이 나라는 20년 전부터 신자유주의적 금융화와 세계화의 조류 속에 깊숙이 휘말려 있다. 오늘날 우리 민중의 삶은 너무나 고단하다. 빈부격차는 오히려 과거 군사정부 시절보다 더 심해졌다. 그리하여 이 나라는 청년들의 대량실업, 급격한 빈곤 증대, 비정규직과 정리해고의 만연, 투기의 만연과 가계부채 급증, 출산율저하와 높은 자살률, 황금만능풍조에 따른 사회적 황폐화 등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파국적 양상마저도 주변적 배역이 아닌 주역으로서 앞장서서 보여주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이러한 삶의 위기 문제들은 언제든지 화산처럼 터져 나올 듯한 엄청난 불안의 에너지를 축적하고 있다. 더구나 2008년 이후 세계 경제 전체가 1930년대 대공황에 버금가는 대불황의 위기 속에서 아슬아슬하게 항해하고 있는 현재 상황은 머지않아 이 나라 역시 앞으로 문명이냐 야만이냐, 민주주의냐 보수반동이냐의 선택의 기로에 서게 할 것이다.
민족주의적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야
식민지 예속에 이은 6.25 전쟁의 참화, 그리고 가난과 독재로 점철된 지난 1백년의 역사로 상처받은 우리 민족에게 지금까지 경제 발전과 사회 발전의 원동력으로 기여해온 것은 민족주의였다. 그리고 민족주의에는 보수적 민족주의와 진보적 민족주의의 두 유형이 있었다.
먼저 박정희로 대표되는 보수적 민족주의는 우리 국민이 가난을 벗어나고 나라의 부국강병을 실현하려면 경제개발과 공업화에 매진하여 자립경제를 실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반공과 자립경제를 국시로 채택한 박정희의 ‘반공주의적 민족주의’ 하에서 정부가 주도하는 민족주의적 경제개발이 진행되었다. 적어도 경제정책에 국한해 볼 때, 1990년대 초반까지 유지된 박정희식 경제체제는 산업정책과 은행국유화, 외환금융시장 통제 등 각종 제도적 장치를 통해 선진국 자본이 한국 경제를 장악하는 것을 저지하면서 국내 자본 특히 대자본을 육성하는데는 성공하였다. 그 반민주적, 반노동적 측면에도 불구하고, 보수적 민족주의는 한국경제의 자본주의적 공업화에 성공하였으며 그리하여 이 나라를 선진국 문턱까지 다다르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렇지만 진보적 민족주의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러한 반공적 민족주의와 개발 독재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진보적 민족주의는 박정희의 친일 전력과 성급한 한일국교 정상화, 베트남 전쟁 파병 등에서 나타났던 친일·친미적 태도를 시종일관 비판했으며, 또한 경제성장이라는 지상 목표를 위해 민주주의와 인권마저 무자비하게 탄압하는 것을 감시하고 비판하였다. 따라서 진보적 민족주의는 이 나라에 있어 친일 매판세력의 척결과 민주주의 및 인권의 신장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런데 이들 진보적 민족주의자들의 한계는 분명했다. 이들은 경제개발 전략으로 외국자본과 외국 기술, 외국시장에 의존하는 의존적, 종속적 공업화를 비판하는 ‘민족경제론’의 입장을 견지했지만 오늘날 명백하게 판명된 바와 같이, 박정희 체제의 반공 보수주의적인 정부주도형 공업화는 한국경제를 자립적 자본주의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오히려 ‘민족경제론’의 입장과 궤를 같이한 북한의 경제개발은 실패로 끝났다.
보수적 민족주의건 진보적 민족주의건, 후진국 민족주의는 방어적이며 부정적인 사상이다. 따라서 이 나라가 지금처럼 경제적으로 선진국 대열에 합류하는 이 시점에서 앞으로 문명적 선진국으로 도약하고 정치적으로도 더욱 굳건한 민주주의를 구축하고자 한다면, 개발도상국 단계에나 유효했던 민족주의적 사고틀에서 벗어나야 한다.
민주적-민족적 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집권한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집권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민주화 세력 및 진보적 민족주의 세력이었다. 그리고 그 민주 정권에 참여한 민주화 세력과 진보적 민족주의 세력은 남북화해와 정치적 민주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렇지만 그들 모두는 박정희 체제의 유산을 부정하는 것은 모두 선(善)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한국경제의 시장화, 자유화에 스스로 앞장섰다. 그들은 IMF와 미국정부가 요구한 것을 뛰어넘는 수준으로 한국 자본주의를 신자유주의 즉 ‘자유 시장화’의 물결 속에 빠뜨렸다.
그 정부들을 지지했던 학자·지식인들은 이러한 자유주의화, 즉 시장화를 ‘진보’의 이름으로 미화시켰던 바, 그것이 바로 ‘진보적 자유주의’이다. 진보적 자유주의의 정신과 이념은 민중의 삶을 개선하는데 무능하거나 오히려 악화시켰다는 것이 지난 민주 정부의 실천에서 명백하게 드러났다. 이는 그 정부들의 정통적 후계자인 오늘날 민주통합당의 모습에서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 미국의 정치경제 사조의 영향을 직접 받아온 우리나라에서 민주통합당의 정신과 이념은 미국 클린턴·오바마 민주당의 그것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김영삼 정부, 그리고 김영삼 정부를 계승한 이명박 정부 등 보수정권은 어떠한가? 이명박·김영삼 정부를 이끌어온 정신적 지주는 ‘보수적 자유주의’였으며, 그것은 구체적으로 레이건과 부시로 대표되는 미국 공화당의 정신과 이념이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레이건과 부시, 마가렛 대처로 대표되는 정치경제 사조를 신자유주의라 지칭한다.
1990년대 초반 문민정부를 표방한 김영삼 정부가 ‘군부 독재 유산의 해체’와 ‘박정희 경제체제 유산의 해체’를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제시한 이래, 정부 주도 자본주의는 악(惡)이고 시장 주도 자본주의는 선(善)이라는 잘못된 구도와 사고방식이 한국의 개혁 세력과 진보 세력에게 깊이 침투하였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역시, 그들 스스로 정부를 장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정부 주도가 아닌 시장 주도 자본주의를 만들기 위하여 고군분투하였다. 그리고 그 결과 민주주의 정부가 들어섰음에도 불구하고 권력은 민주정부가 아닌 시장에 넘어갔다.
이 모든 일이 ‘개혁적 진보’와 ‘개혁적 자유주의’, 또는 ‘진보적 자유주의’와 ‘진보적 민족주의’의 이름하에 일어났다. 그리고 그 민주 정부의 집권기에 진보 혹은 범민주화운동 세력 중 상당수가 그 ‘자유주의 개혁 정권’에 몸소 참여하여 신자유주의적 경제사회 개혁을 이끌었으며 그리하여 진보를 희화화하는 일에 일조했다.
진보적 자유주의와 민족민주 자유주의의 한계
그런데 ‘시장 주도 자본주의’에 대한 믿음과 신뢰는 여전히 오늘날에도 한국 진보 세력의 자본주의 비판 정신을 마비시키고 있다. 즉 ‘공정한 시장질서’, ‘공정하고 착한 자본가’, ‘공정 시장 자본주의’에 대한 믿음은 진보적 자유주의 또는 평등적 자유주의 같은 각종 자유주의적 담론의 진보적 유효성에 대한 믿음으로 나타난다. 또한 그것은 빌 게이츠 또는 스티브 잡스 같은 착한 자본가들이 미국 리버럴의 미래 비전인 것처럼 우리의 경우 문국현 또는 안철수 같은 착한 자본가들을 한국 리버럴의 미래 비전으로 포장하게 만드는 신념의 뿌리로 작동한다.
더구나 민족·민주 진보 세력의 상당수는 여전히 구시대적인 반제·반봉건 민족해방·민중민주 혁명론(NLPDR)의 미몽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이다. 이들은 마치 한국 자본주의가 1960~70년대에 머무르고 있는 양 착각하면서 민족자본가, 양심적 자본가로 미화된 중소벤처 자본가들이 주도하는 중소기업 위주의 경제 즉 민족민주 자본주의, 민족민주 자유주의 체제를 만드는 것이 한국 진보의 과제인양 착각한다. 민주주의적 자유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이들 ‘민족민주 자유주의자들’은 공정한 시장질서와 공정한 자본가들이 주도하는 ‘공정 시장 자본주의’의 잠재적 가능성을 신뢰한다.
이에 반해 사회민주주의는 공정 시장 자본주의의 잠재력을 그다지 믿지 않는다. 아무리 착하고 공정하다 할지라도 자본주의는 본질적으로 그 자체가 빈익빈 부익부의 체제이며 정의롭지 못한 체제이다. 빌 게이츠와 스티브 잡스 같은 착한 자본가들의 모국인 미국 자본주의가 선진국 중 가장 빈부격차가 심하며 복지국가가 취약하다는 점에서도 이는 잘 드러난다. 자본주의 그 자체에 대한 비판의 정신없이, 사회민주주의를 논할 수 없다. 그리고 바로 이 점에서 사회민주주의는 ‘공정한 시장질서’의 잠재적 가능성에 대해 여전한 신뢰를 보내는 ‘진보적 자유주의’와 ‘민족민주 자유주의’와 본질적으로 다르다.
그렇지만 사회민주주의는 사안에 따라 다양한 진보적 자유주의 또는 사회적 자유주의와 협력할 수 있다. 즉 사회민주주의는 다양한 진보적 자유주의가 보수주의 및 신자유주의에 맞서 민주주의와 인권, 참여민주주의와 시민적 노동권 및 복지권 등을 지지하는 한에 있어 그것과 긴밀하게 협조할 수 있다. 그렇지만 사회민주주의는 다양한 진보적 자유주의가 가진 근원적 한계를 늘 잊지 않으며, 그것이 언제든지 사회민주주의와의 협력을 저버리고 신자유주의의 협력자로 돌아설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경계하고 비판한다. <계속>

한국적 특수성 가진 사회민주주의
반자본주의 진보파의 한계
물론 모든 종류의 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면서 여전히 전통적 진보의 이름으로 활동하는 제세력이 있다. 그렇다면 사회민주주의는 이처럼 자본주의 그 자체에 대한 비판 정신으로 충만한 반자본주의 진보파와는 어떻게 구별되는가?
먼저 다양한 모습의 반자본주의 진보파는 오늘날 민중의 일상생활을 좌우하는 국가정책과 경제사회 정책의 무대에서 전혀 주연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다양한 진보적 자유주의 및 신자유주의자들에게 그 역할을 맡겨 놓은 채 여전히 주변적 위치에 머물러 있다.
왜 그럴까? 그 가장 큰 원인은 스스로 겪고 있는 사상적 혼란과 이에 따른 정책적 무능력이다. 이들의 대다수가 여전히 과거의 사상과 이념에 사로잡힌 나머지 자본주의에 내재한 위기와 모순을 해결하는 주도 세력으로서 자신을 환골탈태시키지 못하고 있다.
이들의 일부는 교조적인 전통 좌파 사상에 여전히 머무르면서 자본주의 그 자체를 개혁하는 일체의 개혁적 시도를 거부하거나 또는 소극적 동참에 머무른다.
이들의 혁명주의적 정신구조는 일거에 모든 것을 뒤집으려는 한판주의이다. 이는 초기 기독교인의 종말론적 태도와 닮아 있는데 따라서 이들의 정치는 일종의 종교적 정치운동이 된다. 또 이들은 강경한 급진적 실천이 있어야 그나마 작은 것이라도 얻는다고 주장하면서, 마치 급진적 실천만 있으면 당장 내일이라도 혁명이 성공할 것처럼 생각한다. 이들은 현재의 삶을 중시하는 입장을 경멸하면서 수정주의라고 매도한다. 이것은 전형적인 종말론적 종교인의 태도이다.
그런데 사랑을 기본 정신으로 하는 종교와는 달리 혁명주의는 언제나 상처 받은 자존심에서 비롯된 증오를 정치운동의 에너지로 삼는다. 그렇지만 증오라는 감정은 인간을 과거에 얽매어 현재를 파괴하려 할 뿐, 한걸음도 미래로 나아가지 못하게 한다. 참된 진보 정치는 인간에 대한 종교적, 철학적 질문에 해답을 주는 것이 아니다. 현실을 파괴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일상적 삶을 개선하는 것, 미래를 한걸음씩 여는 것이어야 한다.
현재를 살아가는 인간의 일상적 삶을 무시한 채 막연한 혁명적 미래만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어떻게 국민의 마음을 얻고 집권하여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인가?
다른 한편 어떤 이들은 포스트모던 같은 선진국 신좌파의 철학 사상에 물든 나머지 숨 가쁘게 변화하는 국내외 자본주의와 민중의 생활현실을 적극적으로 포착하여 정치경제적 대안을 제시하는데 무능하기 그지없다. 이들은 서구 68혁명에서 시작된 신좌파의 자유절대주의 지향의 무정부주의(아나키즘), 즉 ‘모든 권력과 권위에 대한 부정’과 ‘대안 없는 즐거운 저항’에 몰두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처럼 이 땅의 반자본주의 진보파는 공산주의 또는 포스트모던의 이념을 가지고 있되 그것을 실천할 완성도 높은 경제 전략과 사회 전략, 그리고 그와 결합된 정치 전략을 제시하지 못했다. 따라서 이들은 현실에서는 불임의 정치 세력이며 그리하여 민중의 삶을 실질적으로 개선하는 정치적 능력을 양성하지 못하고 있다.
유럽 사회민주주의의 성과를 배우자
진보의 대안 부재와 그 한계를 목도하면서 우리가 주목하는 것이 바로 유럽 사회민주주의의 이론과 역사적 경험이다.
유럽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오늘날 한국 사회가 겪고 있는 현안인 대량 실업과 빈부격차 심화, 산업공동화와 출산율 저하 등의 문제를 1백 년 전부터 경험하였다. 그들은 이러한 생활정치의 문제들에 직면하여 대안 없는 혁명주의나 철학적 개인주의로 도피하지 않았다.
그들은 현실의 여러 문제들을 실질적으로 해결하고자 싸우는 과정에서 지식인들의 머릿속에나 존재하는 추상적인 ‘혁명적 민중’이 아니라 변덕스럽고 이기적인 욕망으로 가득 찬 현실의 민중을 발견하였다.

19세기 말 스웨덴 노동자들이 '8시간 노동제'를 주장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사진=위키피디아)
그들은 미래의 언젠가에 이루어질 막연한 혁명에 대한 기대와 준비보다는 ‘지금, 여기’를 개선할 수 있는 정치경제적, 사회적 대안들을 고안해내고 실현하는데 몰두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본주의가 부추기는 저차원적인 욕망을 넘어, 보다 높은 수준의 가치와 삶의 지평으로 민중을 인도함으로써 민중 스스로 새 역사를 창조하는 주역이 되도록 자극하였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 내재한 진보적 역동성과 처참한 파괴성의 양면을 동시에 인식했으며, 그 진보적 역동성을 보존하면서도 그 처참한 파괴성을 극복할 수 있는 다양한 제도와 정책들을 창조해냈다. 그들은 막연한 이상향(理想鄕)에 대한 유토피아적 열정과 종교적 논의에 집중하기보다는 생활정치에 헌신함으로써 국민의 지지를 얻고 장기간 집권하는 가운데 한 걸음 한 걸음 미래로 나아갔다.
그렇기에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자본주의와 세계 경제라는 제약조건을 철저히 고려한 가운데 ‘자유와 만민평등’이라는 인류의 꿈에 조금씩 다가가는 방법을 고민했으며, 그리하여 현실 속에서 그 이상(理想)에 가장 근접한 국가를 건설해냈다.
또한 사회민주주의자들은 기존 좌우파의 철학적 도그마를 극복하여 ‘자유’와 ‘인권(기본권)’의 개념을 창조적으로 재해석하였다. 즉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좌파와 우파의 역사적, 긍정적 유산을 폭넓게 받아들여 그것을 소화하였다.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양자의 합리적 핵심을 수용하면서도 동시에 양자의 한계와 부정성을 극복하고자 하였으며, 그리하여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양자의 상상력을 훌쩍 뛰어넘는 혁신적인 정치·정책적 역량을 발휘하였다. 그리하여 민주공화국이 자본과 시장을 이성적으로 통제하고 관리하여 사회공동체의 발전과 개인·개성의 해방에 기여하도록 경제를 재편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마르크스는 철학의 근본문제는 “세계를 해석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변화시키는데 있다”고 선언했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세계를 변화시키되 ‘긍정적’(!) 방향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며 또한 그 변화를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연속적인 과정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 결과 그들은 공상적 구호를 내거는 정치의 아방가르드보다는 현실적인 정책의 아방가르드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정립하였다.
우리나라 특수성 속에서의 사회민주주의
유럽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성취한 역사적 전통과 성과를 이어받고자 할 때, 한국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다음과 같은 특수한 국내외적 환경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첫째, 우리나라에서는 남북분단 상황에서 자본주의적 경제 성장이 오랜 기간 보수주의자들에 의해 추동된 결과, 그리고 지난 민주 정부들이 보수적 및 진보적 자유주의들의 협조 하에 시장 주도 자본주의를 탄생시킨 결과, ‘시장 원칙’과 ‘자본제일 원칙’이 일상생활의 지배적 규칙(rule)으로 확립되었다.
이에 따라 우리 사회는 자본주의 시장 경제 그 자체에서 발생하는 삶의 폐단을 교정할 역사적 기회를 지금까지 갖지 못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나라에서는 자본주의 그 자체의 폐단을 교정할 진정한 진보적 생활정치에 대한 민중의 욕구가 극도로 높아지고 있다.
김대중·노무현 민주 정부가 추진한 형식적 민주화와 경제적 자유화가 낳은 삶의 피폐화에 실망한 국민들은 이명박 한나라당 정부를 탄생시켰다. 그렇지만 보수적 자유주의 이명박 정권이 전방위적으로 신자유주의 정책을 시행한 결과 민중의 삶은 더욱 피폐화되었고, 그리하여 정권 교체에 대한 열망이 그 어느 때보다 높다.
그렇다면 박근혜 식의 보수주의, 즉 자본주의를 적절히 관리하고, 노동자와 국민을 어떻게 적당히 통제할 것인가에만 관심을 가질 뿐 그들의 입장에서 삶의 환경을 개선하려는 데는 관심이 없는 보수주의 복지국가론에 맞설 수 있는 진보적 대안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그것이 민주통합당 또는 통합진보당 식의 진보적 자유주의일 수는 없다. 그렇다고 대안 없는 반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자유주의를 넘어서는 대안일 수도 없다. 그렇다면 남는 유일한 대안은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양자의 긍정적 성과를 수용하면서도 그 양자의 부정적 한계를 뛰어 넘는 사상, 사회민주주의일 수밖에 없다.
둘째, 이미 수년간 진행 중인 글로벌 금융위기는 앞으로 더욱 심각한 파국적 국면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높으며 이 국면에서 세계 자본주의는 수많은 위기와 혼란, 격변과 대립을 거쳐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위기와 격변 속에서 국제적 신자유주의에 맞서 단지 부정을 위한 부정이 아니라 긍정적인 대안을 가지고 싸울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은 국제적 사회민주주의이다.
셋째, 개발도상국 단계를 지나 선진국 문턱까지 이른 한국 경제의 발전 수준을 볼 때 우리는 이 나라가 이미 자유주의적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선두 그룹의 일원으로 떠올라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따라서 한국의 진보 세력은 한국 자본주의가 미국과 유럽 등 서방 자본주의와 중국과 일본의 동아시아 자본주의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협력하고 있다는 점을 잊지 않으면서 자신의 정치 전략과 경제사회 전략을 구사하여야 한다. 우리 경제의 발전 수준과 대내적 복지국가의 발전 수준에 조응하여, 그에 맞는 적절한 수준의 대외 개방과 대외 협력을 신중하게 추진하여야 한다.
이 점을 고려할 때, 한국의 진보적 대안은 신자유주의 세계 체제로의 무조건적 통합을 의미하는 FTA도 아니며, 그렇다고 무조건적 단절을 의미하는 반세계화도 아니어야 한다. 지금은 어느 때보다 보호주의가 득세할 위험이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대내적 복지국가의 발전에 조응하는 적절한 수준의 대외개방과 대외협력이 필요하다는 점에서도 우리 사회에 가장 필요한 정치경제적 사고방식은 사회민주주의이다.
넷째, 중국의 성장과 함께 한반도를 둘러싼 미중간의 긴장이 날로 고조되고 있다. 미·중·일·소 등 초강대국으로 둘러싸인 한반도는 끝까지 평화와 중립을 선택해야 자립과 번영을 달성할 수 있다. 그런데 대외적인 평화와 중립을 고수하기 위해서도 대내적인 사회민주주의 복지국가 전략이 필수적이다.
과거 스웨덴이 제2차 세계대전에 휩쓸리지 않고 대외적 중립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복지국가 전략을 통해 대내적인 경제적,사회적 긴장을 해소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역사의 부름에 응답하여 사회민주주의로 나아가려 하는 우리는 이 나라의 지난 1백년 역사가 낳은 성과와 한계를 모두 껴안으며 드디어 보편적 세계사의 중심 무대로 나아가고자 한다.
즉 이 나라에서 사회민주주의의 탄생은 19세기말 유럽에서 출범한 사회민주주의가 한 세기를 건너 뛴 끝에 이 땅에 그리고 아시아에 상륙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앞으로 대한민국과 아시아가 세계 역사를 이끌어갈 역할을 수행할 것임을 당당하게 선언한다.
사회민주주의는 미래 역사의 주역
이런 모든 면을 고려할 때,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무엇보다 북유럽 사회민주주의이다. 스웨덴과 핀란드, 덴마크는 역사적으로 사회민주주의 사상의 종주국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나라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영국과 독일, 프랑스의 ‘제3의 길’ 사회민주주의들과 달리 1980년대 이후 자본주의의 자유주의적 재편이라는 도전에 맞서 창조적이고 긍정적인 방식으로 대응하는데 상당 부분 성공하였다. 즉 그들은 보편적 복지와 노동민주주의를 두 축으로 하는 복지국가 체제가 시장유연성과 어느 정도 상호보완적일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물론 북유럽 사회민주주의는 (신)자유주의에게 상당히 양보하였으며 진보의 역사적 성과에서 후퇴한 면이 일부 있다. 그렇지만 오늘날 북유럽 사회민주주의는 진보의 주요한 역사적 성과와 내용을 방어하는데 성공하였으며 그리하여 인류가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을 유지하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또한 북유럽 사회민주주의자들은 1930년대의 대공황 속에서도 노-농 동맹과 같은 창의적인 정치노선과 그리고 가장 앞선 선구적인 적극적 재정지출 확대 정책 등을 통해 경제위기를 극복한 경험이 있으며, 이를 통해 국민들의 신뢰를 얻은 바 있다. 그리고 지금도 북유럽을 비롯한 유럽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국제금융자본이 요구하는 긴축 기조를 거부하고 복지국가의 유지 및 강화를 그 대안으로 제시하면서 국민들의 신뢰를 얻어 나가고 있다.
지금 이 나라가 직면한 상황도 1930년대에 북유럽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직면했던 상황과 매우 유사하다. 만약 오늘날 이 땅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세계 자본주의의 대위기 국면 속에서 북유럽 사회민주주의자들처럼 적극적이면서도 현실적인 정치적, 정책적 능력을 보여줄 수 있다면, 그리하여 이 나라 민중과 시민의 신뢰를 점진적으로 획득하는데 성공한다면, 이들은 다가오는 미래에 이 땅의 주도적인 정치 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앞에 놓인 역사적 과제는 이 나라를 복지국가와 문명국가로 만드는 본격적인 진보 정치이다. 마치 소국이면서도 오늘날 세계적인 복지국가이자 문명국가로 우뚝 선 스웨덴과 핀란드처럼, 우리는 대한민국을 동아시아를 대표하는 복지국가, 문명국가로 만들고자 한다.
이 나라 진보는 영광스럽게 사회민주주의로의 부름을 받았으며, 아시아 최초로 고차적인 복지·문명국가를 건설하는 영광스런 기회를 부여받았다. 그 기회를 온전히 우리의 것으로 만들 수 있을지의 여부는 오로지 우리의 의지와 열정에 달려있다.
미래는 우리의 것이다. 사회민주주의여, 일어서라!<계속>
 
사민주의의 가치 ①
자유 평등 연대 그리고 평화 생태
그렇다면, 사회민주주의란 무엇인가? 사회민주주의는 개인과 사회, 인간과 자연이 서로 조화롭게 공존하는 공동체를 추구하고 완성하고자 하는 하나의 정치사상이자 정치적 기획이다. 사회민주주의는 자유주의와 공산주의, 아나키즘, 민족주의 등과 구별되는 독자적인 세계관으로서, 독자적인 가치관과 원리, 그리고 전략적 지향성을 가진다.
사회민주주의는 자본주의적 경제사회 질서에 대한 근본적 비판 정신에서 출발한다. 즉 사회민주주의는 자본주의가 물질적 생산력과 기술력을 발전시켜 경제적 풍요의 가능성을 열어주지만, 동시에 그 경제적 풍요를 소수가 독점하여 대다수는 삶의 불안정성과 극심한 생존 경쟁에 직면하게 되고, 개인과 사회, 인간과 자연이 자본과 시장에 종속되며, 그 결과 인간의 삶과 생태환경이 황폐화된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사회민주주의는 예컨대 자유주의처럼 자본주의적 경제사회 질서를 기본적으로는 승인하면서 그 결함을 부분적으로만 보완하고자 하는 기획이 아니며 자본주의를 넘어서고자 한다.
사회민주주의는 자본과 시장이 인간과 사회를 통제하고 종속시키는 그런 경제사회 질서가 아니라, 거꾸로 인간과 사회가 자본과 시장을 최대한 통제하고 관리하여 그것들이 수익성과 상업성만이 아니라 더 높은 인간적 가치와 공동체적 가치, 생태적 가치에 봉사하도록 하는 경제사회 질서를 만들고자 한다.
새로운 경제사회 질서를 창출해나고자 하는 정치적, 사상적 기획으로서의 사회민주주의는 여러 가지의 <가치>와 <원리>, 그리고 그 가치 및 원리를 기반으로 하는 <전략>으로 구성된다.
먼저 사회민주주의의 기본적인 <가치>에는 자유와 평등, 연대, 생태, 평화의 5가지가 있다. 그리고 사회민주주의의 기본 <원리>에는 자본에 대한 사회적 통제의 원리, 노동에 비례한 소득 분배와 누진적 과세의 원리, 기본 필요 충족 및 인간 존엄성의 원리, 사회적 연대의 원리 등이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가치 및 원리와 긴밀하게 결합된 사회민주주의의 핵심적 <전략>에는 보편적 복지 전략, 노동민주화 전략, 여가 및 문화 전략, 복지와 성장의 선순환 전략, 대자본과 금융자본에 대한 사회적 통제 전략, 중소자본 및 영세자본의 산업고도화 전략 등이 있다. 물론 지금 우리가 여기서 밝히는 <원리>와 <전략> 이외에도, 새로운 원리와 전략이 앞으로 계속 추가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생태 및 평화의 가치와 관련되어 앞으로 사회민주주의 특유의 원리와 전략들이 새로이 제시되고 논의될 필요가 있다.

스웨덴 사민당과 노총의 행사 모습
그리고 이와 같은 가치와 원리, 전략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사회민주주의는 정치적으로는 민주공화국과 대의민주주의, 직접민주주의, 그리고 참여민주주의를 중시한다.
* 사회민주주의의 가치
가치란 가장 소중하고 귀중하게 여기는 것이고 동시에 우리가 지향하는 궁극적 목표를 말한다. 사회민주주의는 지금까지 인류가 이룩한 모든 긍정적 성과를 인정하면서 동시에 또한 앞으로 그것들을 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하여, 자유와 평등, 연대의 3대 가치와 그리고 그것의 확장으로서의 생태, 평화를 포함한 5대 가치를 가장 소중한 가치 또는 궁극적 달성 목표이자 행동 원칙으로 삼는다.
먼저 자유와 평등, 연대는 각각 그 자체만으로도 양보할 수 없는 가장 소중한 것들이다. 동시에 이들 3대 가치는 각각 서로 다른 가치가 없으면 쓰러진다는 의미에서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보완적 가치들이다. 우리는 이들 3대 가치가 현 사회뿐 아니라 더 높은 단계의 미래 사회에서도 유효하다고 본다.
또한 사회민주주의는 수단과 목적을 분리하지 않는다. 목적을 위해 수단을 합리화하지 않고, 목적에 이르는 절차와 과정을 무시하지도 않는다. 특히 5대 가치에 있어 이 원칙을 고수한다. 이점에서 사회민주주의는 자신들의 최종 목표 달성을 위해 수단과 목적, 과정과 최종목표를 분리하면서 목적을 위해 자의적으로 수단을 구사하거나 과정을 무시하는 혁명주의적 구좌파와 구분된다.
- 실질적 자유와 실질적 평등이 인간의 존엄성
무엇보다 먼저 사회민주주의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일차적 가치는 자유와 평등이다. 물론 자유와 평등은 사회민주주의의 주된 경쟁 상대인 자유주의 사상의 핵심적 가치이기도 하다. 그리고 자유주의가 약속하는 자유와 평등은 자본주의 성립기에 봉건적 신분제의 족쇄로부터 개인성을 해방시킨 위대한 가치이다. 특히 자유라는 가치는 모든 형태의 정치적, 경제적 독재에 맞서는 거부와 투쟁의 근거이며 이것은 지금도 유효하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식민지 지배와 군사독재 체제에 맞서 민족의 해방과 민주주의를 위해 싸워온 위대한 전통을 가지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정치적 자유는 가장 소중한 가치였다. 자유주의와 마찬가지로 사회민주주의는 정치적 자유를 소중히 여긴다.
또한 사회민주주의는 자유주의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존엄성을 <절대적으로> 소중한 가치로 여기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개개인은 자유롭고 평등하다고 믿는다. 따라서 사회민주주의는 신분과 인종, 성별, 종교, 신념 등에 따른 어떠한 정치적 차별도 거부하며, 또한 어떤 이유에서건 개인의 기본권에 대한 제한을 거부한다.
그런데 자유주의가 말하는 자유와 평등은 정치적·법률적, 형식적·절차적인 것에 머무른다. 경제사회 생활의 관점에서 볼 때 자유주의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자유란 사유재산권 및 시장 영업 활동의 자유를 의미하며, 그 평등이란 사유재산권 행사 및 경쟁적 시장 참여기회의 평등을 의미할 뿐이다.
따라서 자본주의적 경제사회 생활의 현실에서 자유와 평등은 서로 대립되어 나타난다. 왜냐하면 자본주의가 낳는 부와 소득의 불평등은 자유롭고 부유한 소수와 그렇지 못한 다수를 나누며, 그 결과 <평등 없는 자유>를 낳기 때문이다.
사회민주주의는 자본주의적 경제사회 생활의 현실에서 나타나는 이와 같은 평등 없는 자유와 대다수 개인에 있어 실질적 부자유와 실질적 불평등에 주목하며, 따라서 정치적·형식적 자유와 평등을 넘어 ‘실질적 자유’와 ‘실질적 평등’을 구현하고자 한다.
실질적 자유란 개개인들이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면서 자신의 인간적 잠재력을 경제사회적 이유로 제한받지 않고 구현할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 또한 실질적 평등이란 형식적인 기회 균등을 넘어 삶을 향유함에 있어 실질적인 경제사회적 평등을 뜻한다.
예컨대 모든 개개인이 적절한 주택과 함께 좋은 교육 기회를 가지며, 병에 걸렸을 때 좋은 의료 서비스를 받고, 또한 노후에도 최소한의 인간적 존엄성을 유지하는 생활 유지가 불가능하다면, 그리고 안전한 노동 환경에서 적절한 시간 동안 노동할 수 있는 일자리가 보장되지 않는다면, 그 때의 자유란 공허한 껍데기에 불과하다.
따라서 사회민주주의는 실질적 자유, 실질적 평등을 구현하기 위하여 자본과 시장을 사회적, 민주공화적으로 통제하고 관리하는 복지국가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본다.
그렇지만 사회민주주의는 기존의 공산주의에서 나타났던 <자유 없는 평등>에도 반대한다. 과거 소련을 비롯한 공산주의 체제에서 개개인들은 평등한 경제사회적 삶을 살았으되 자유로운 삶은 아니었다. 그들은 정치적으로 자유롭지 못했으며 경제사회적 삶에 있어서도 풍요롭고 자유로운 삶을 영위하지 못했다. 사회민주주의는 이와 같은 <자유 없는 평등>은 개인과 개성을 부정하는 것, 인간의 존엄성을 부정하는 것이므로 거부한다. 이처럼 사회민주주의는 자유주의와 마찬가지로 <자유 없는 평등>을 거부하는데, 그렇지만 자유주의와 달리 <평등 없는 자유>를 낳는 자본주의적 경제사회 질서에도 반대한다.
- 연대는 우애와 소통의 공동체
자유, 평등과 함께 사회민주주의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세 번째의 고귀한 가치는 사회적 연대이다. 여기서 연대는 자본주의 시장에서 각자의 이익 증진을 위해 이기적 개인들이 서로 결합하는 ‘이익의 공동체’ 즉 게젤샤프트(Gesellschaft)와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개념이다.
예컨대 자본주의 기업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주식회사는 이기적인 주식소유자들이 각자의 투자수익 향상을 위한 영리적 관점에서 상호 결합함으로써 만들어지는데, 이런 것을 사회적 연대라고 말할 수는 없다.
사회민주주의가 말하는 사회적 연대란 각 개개인들이 타인들과 동일한 사회적 경제적 삶의 기반 위에 서 있음을 인식하고 그러한 사회경제적 삶을 개선 또는 타파하기 위해 비영리적 관점에서 서로 소통하고 손을 잡는 ‘우애의 공동체’ 즉 게마인샤프트(Gemeinschaft)를 말한다.
자본주의적 시장과 기업이 우리의 경제사회 생활 속에서 추방하고 억압해온 ‘공동체와 협동의 정신’, 돈으로 평가할 수 없고 살 수도 없는 ‘소통과 우정’ 등이 바로 연대의 다른 표현이다. ‘돈으로 살 수 없으며’, 그러면서도 무한한 부와 문명을 창조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우정과 소통, 공동체의 가치이며, 따라서 사회적 연대는 미래 사회를 열어 나가는 핵심적 원동력이다.
사회적 연대만이 자유와 평등을 더 높은 차원으로, 즉 실질적 자유와 실질적 평등으로 이끌어 올릴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연대의 정신만이 자유와 평등의 실질적인 내용에 결정적 도약을 가능케 한다. 이들 3자 간의 관계를 보자.
- 자유 없는 연대를 넘어서
먼저 <자유 없는 연대>가 있을 수 있는데, 이것은 자유로운 개인을 부정한 연대, 가짜 연대이다. 물론 자유 없는 연대가 종종 정당화될 수 있다. 예를 들어 과거 민족의 자유가 유린된 식민지 시대의 경우 우리 민족 전체의 자유가 유린된 결과 개개인의 자유의 공간 역시 존재할 수 없었다. 따라서 이때는 민족의 해방을 위한 투쟁의 연대 속에서 자유 없는 연대, 집단주의적 연대가 ‘잠정적으로’ 정당화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를 제외한다면 자유로운 개인들 간의 연대만이 진정으로 진보적이다.
우리나라에는 지금도 전통적인 연대가 있다. 먼저 학연과 지연 등으로 뭉친 연고주의적 연대가 있는데, 이것은 폐쇄적이고 권위주의적인 패거리 문화를 구현하고 있을 뿐,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들의 공동체와는 거리가 멀다. 또한 가족주의 즉 가족적 연대가 있는데, 그렇지만 가족주의는 오늘날 사회적 연대의 발전을 가로막는 최대의 걸림돌이다. 이는 악순환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는데 사회적 연대와 그리고 이에 기초한 보편적 복지가 없으니 개개인은 가족에 기대게 되고 그러니 다시금 사회적 연대에 소극적이거나 무지하게 된다.
이런 악순환을 깨는 방법은 개개인, 특히 가정 내의 여성의 역할, 즉 아동양육과 노인, 환자 돌봄 기능을 복지국가의 틀 속에서 해결함으로써 사회적 연대의 틀을 확보하고 이로써 여성을 개인으로서 자유롭게 하여 경제활동에 자유롭게 참여하게 하는 것이다. 사회적 연대를 통해서만 진정한 자유가 확보된다는 것을 이 예에서 알 수 있다.
사회민주주의는 ‘가족’을 중시하되 ‘가족주의’에 반대한다. 예컨대, 자본주의 경제의 본원적 불확실성 속에서 각 개인의 노후 보장을 그의 자식이 보장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내 자식만이 아니라 이 땅의 모든 미래 세대가 잘 양육되고 교육되었을 때, 그리하여 훌륭하게 성장한 그들이 생산적인 직업 활동을 하면서 동시에 나와 노인 세대 전체를 위해 소득의 일정 부분을 기꺼이 세금과 사회보장비로 내 놓을 때 나의 노후는 보장된다.
이처럼 사회민주주의는 가족을 넘어서는 ‘세대간 연대’의 가치를 중시한다. 결론적으로 오직 연대를 통해서만 노동자와 여성, 아동과 노인 등 다양한 사회적 존재로서의 개인은 실질적 자유를 확보할 수 있다.
이렇듯 사회민주주의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사회적 연대는 모든 형태의 연고주의와 가족주의, 집단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우리는 일체의 연고주의와 집단주의, 가족주의에 반대하며, 진정으로 자유로운 개인들 간의 공생의 연대를 구축하려 한다.
- 연대 없는 자유는 껍데기 자유
다른 한편, 반대로 <연대 없는 자유>가 있을 수 있다. 자유주의자들의 대다수는 사회적 연대가 ‘자유에 대한 침해’라고 말하면서 ‘연대 없는 자유’를 소중하게 여긴다. 그들은 노동조합과 협동조합으로의 단결과 단체행동, 진보세력의 정치적 결집, 연대적 복지국가의 시장 경제 개입 등이 ‘자유로운’ 시장의 효율성을 침해한다고 생각하고, 그것이 적을수록 더 좋다고 말한다.
그러나 개별적으로 분산된 개인 또는 노동자는 오로지 자본과 시장의 막강한 힘과 구속력 앞에 굴복할 자유밖에 없다. 따라서 자유주의가 말하는 자유는 인간의 자유, 개인의 자유가 아니라 실제로는 자본의 자유, 시장의 자유를 의미할 따름이다.
사회민주주의는 인간과 개인의 ‘실질적’ 자유와 평등을 위해서는 반드시 자본과 시장을 ‘실질적으로’ 통제해야 하며, 그 통제를 위한 기구가 바로 노동조합과 협동조합, 시민운동, 복지국가 같은 사회적 연대체라고 본다.
우리는 내 일자리만 지키고 내 월급만 지키겠다고 발버둥치는 이기적인 개인과 조직들의 필사적 노력이 결국은 모두의 일자리와 소득을 불안하게 만드는 역설적인 모습을 목도하고 있다. 이처럼 시장에서 경쟁하는 파편화된 개인으로서는 ? 아무리 그것이 ‘공정한 경쟁’이라 할지라도 ? 임금과 노동조건의 개선은 불가능하며, 시장의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도 불가능하다. 따라서 실질적으로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을 위해서는 노동조합과 협동조합, 복지국가라는 연대적 결집체가 필요하다.
- 실질적인 기회의 평등은 결과의 평등을 일정하게 포함
그렇다면 연대와 평등의 관계는 어떠한가? 연대는 평등을 구현해주며 반대로 평등은 연대를 공고하게 한다. 서로를 강화하는 관계인 것이다. 이 사실은 다음을 통해 알 수 있다.
먼저 <연대 없는 평등>은 껍데기에 불과한 평등이다. 자유주의자들은 ‘공정한 시장질서’가 달성되면 ‘절차적 공정성’과 함께 ‘기회의 평등’이 달성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을 ‘정의롭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정의’와 ‘공정’은 ‘사회적’ 정의(사회정의)가 아니라 시장의 정의 즉 ‘시장적’ 정의(시장정의)에 불과할 따름이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그것이 제아무리 공정하다 할지라도 지속적으로 개인간, 기업간 차이를 낳으며 승리자와 패배자를 가른다. 즉 아무리 공정한 시장질서와 함께 제 아무리 공정한 기회의 평등이 잘 보장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불가피하게 결과의 불평등, 즉 소득과 부의 불평등을 낳는다. 그런데 자유주의자들은 공정한 경쟁질서, 공정한 거래 질서에 따른 시장 결과의 불평등에 대해서는 모두가 승복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그것을 ‘정의’롭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결과의 불평등 즉 심각한 소득격차의 연속적 누적은 역으로 기회의 평등과 경쟁의 공정성(절차적 공정성)마저 껍데기로 만들어 버린다. 예컨대 가난한 집의 아이들이 어떻게 부유한 집 아이들과 동등하고 공정한 교육 기회 하에서 경쟁할 수 있다는 건가? 어떻게 그런 경제사회 질서를 ‘사회 정의’의 이름으로 정당화 할 수 있단 말인가?
사회민주주의는, 사회적 연대라는 가치관에 따라, 소득의 불평등, 결과의 불평등을 일정 한도 내에서 사회적으로 통제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보편적 복지라는 사회적 연대, 이를 통한 소득의 재분배를 통해서만이 <실질적인 기회의 평등>이 실현될 수 있으며 따라서 <실질적인 평등>이 이룩될 수 있다. 이렇듯 사회민주주의는 공정 시장, 공정 경쟁이라는 가치 즉 ‘정의로운 시장’이라는 가치보다 사회적 연대라는 가치 즉 ‘정의로운 사회’라는 가치를 훨씬 더 소중하게 여긴다.
물론 자유주의의 진보적 일파 즉 진보적 자유주의는 공정한 시장질서와 보편적 복지를 동시에 추진하면 되지 않느냐고, 즉 ‘정의로운 시장’과 ‘정의로운 사회’를 동시에 구현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말한다. 얼핏 들으면 맞는 말이다. 그렇지만 진보적 자유주의가 그 ‘행동에 있어’ 여전히 소중히 여기면서 정치적으로 우선시하는 것은 보편적 복지가 아닌 공정한 시장 거래 질서의 구축이다. 게다가 진보적 자유주의가 궁극적 이상으로 꿈꾸는 복지 역시 사회민주주의자들이 꿈꾸는 높은 수준의 보편적 복지가 아니며, 그보다 훨씬 낮은 수준에 불과하다. 그들의 입장에서 복지가 일정 수준을 넘어서게 되면 시장의 합리적 작동을 방해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계속>

사민주의의 가치②
연대의 원칙은 모든 사회영역으로
시장경쟁이 아닌 조직화된 연대성
다른 한편, <평등 없는 연대>도 어렵다. 우리의 경제 현실에서는 자본의 분할 지배 전략에 말려들어 노동자들 내에서도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에 임금 및 사내복지의 불평등이 극심하며 동일노동-동일임금이라는 기본적인 평등 원칙이 부정되고 있다. 그리고 그 결과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반복과 갈등이 심하며 양자 간의 사회적 연대가 힘을 얻지 못하고 있다.
여기서 제기되는 의문은 이렇듯 정규직과 비정규직간의 평등성이 부정된 결과 양자간 연대가 부정되고 그것이 다시 양자간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악순환을 어떻게 돌파할 것인가이다.
자유주의자들은 마치 노동시장에 공정한 시장질서, 경쟁적 시장질서가 구축되면 동일노동-동일임금이라는 결과의 평등 원칙이 구현될 것처럼 말하면서, 대기업 정규직의 특권적 이익을 보호해온 노동조합의 독점력을 약화시키면 노동 시장에서 공정한 완전 경쟁 원칙이 구현되며, 그 결과 비정규직과 정규직 간에 동일노동-동일임금이라는 평등의 원칙이 구현된다고 말한다.
즉 노동자간 연대의 약화가 노동자간 평등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물론 그럴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정규직의 노동조건마저 비정규직의 그것으로 하향 평준화시키는 나쁜 평등화이다.
사회민주주의는 동일노동-동일임금 원칙을 구현하면서도 하향 평등화가 아니라 상향 평등화를 이루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공정한 시장 경쟁 원리가 아니라 비정규직과 정규직, 대기업과 중소기업을 모두 하나로 포괄하는 보편적인 중앙집중적 산별노조와 그 단체교섭이며, 그것에 대한 복지국가의 입법적, 행정적 지원이라고 본다.

홍대 청소노동자들의 투쟁에서 나온 목소리(사진=수유너머N)
노동시장에 있어 사회적 연대의 조직화 즉 중앙집중적 산별 단체교섭의 조직화와 그것을 지원하는 보편적 복지국가의 정치적 구축 없이, 상향 평등화 방향의 동일노동-동일임금을 달성할 수 없다.
결론적으로 사회적 연대의 부재가 불평등을 낳고 그것이 다시 사회적 연대를 더욱 부재하게 만드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길은 바로 사회적 연대를 질적으로 비약적으로 강화시키는 것이며, 이것이 연대와 평등의 상호 선순환을 실현시키는 올바른 길이다.
또한 장애인, 성적 소수자와 같은 사회의 약자들이 사회적 발언권을 얻어 사회적 권리를 확보하는 유일한 방법 또한 사회적 연대의 조직화이다. 이렇듯 사회공동체적 연대와 그 연대의 다양한 조직화는 실질적인 평등을 달성하는 가장 핵심적인 수단이다.
사회적 연대라는 공동체 윤리는 미래를 향한 희망
사회민주주의는 연대의 원칙을 경제를 넘어 모든 사회 영역으로 확장하고자 한다. 가령 우리는 내 자식만 잘되라고 밀어주는 이기적인 학력 경쟁 속에서 자라나는 청소년 세대의 영혼이 승자건 패자건 모두 다 같이 황폐화되어 신음하는 모습을 목도하고 있다.
자유주의자들은 연대보다 중요한 것이 경쟁의 공정성이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오로지 경쟁 원칙만이 지배하게 된다면, 그것이 아무리 공정한 경쟁이라 할지라도, 개인과 사회는 황폐해지며 자유와 평등은 껍데기만 남게 된다는 점을 중시한다.
경쟁이 아닌 연대의 공간이 확장될수록 이웃에 대한 연민과 친구와의 우정, 인간적 여유와 정서적 고양과 같은 소중한 개인적 인격성의 가치들이 만개할 수 있다. 시장 원리와 경쟁 원리에 밀려 추방되어 버린 사회적 연대의 가치, 공공성의 가치를 다시 부활시키지 않는다면, 자유주의자들이 주창하는 ‘자유와 평등으로 충만한 개인들’은 허깨비에 지나지 않다.
사회적 연대가 사회민주주의의 영혼이라는 사실은 자본주의의 인간성 파괴 경향을 인식하면 더욱 분명해 진다. 자본주의 자체는 돈과 이윤의 가치 이외에는 그 어떤 다른 가치도 내포하고 있지 않다. 자본의 본질은 맹목적으로 더 많은 돈을 벌어 더 큰 이윤을 얻는 것을 향한 무한 질주 그 자체이며, 이러한 무한 질주 경쟁을 모든 개개인들에게 요구하는 것이 자본의 법칙이다.
자유주의자들은 이러한 경쟁적 질주를 공정·공평한 참여 기회(즉 기회 균등)을 가지고 진행한다면 문제될 것이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공정한 경쟁의 결과로 승자와 패자, 결과의 불평등이 발생하더라도 그것은 개인과 기업의 자기수익 및 자기책임 원칙으로 처리해야 한다고 말한다. 특히 신자유주의 시대에 자유주의자들은 유난히 자기 수익과 자기 책임 원칙을 강조한다.
그렇지만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생하여 대규모의 투자 실패와 손실이 발생하자 자본은 자유주의자들이 금과옥조처럼 떠받들어온 자기 책임 원칙을 순식간에 내던지고 국가공동체가 책임지고 나서서 자본을 구제해주어야 한다는 ‘사회주의의 원리’에 호소하였다.
이처럼 자본주의는 본질적으로 도덕의 아노미적 자기분열 그 자체이다. 아무리 자유주의가 그것을 공정한 시장질서, 공정 경쟁, 자기 책임 원칙 같은 것으로 위장하더라도 이러한 도덕적 자기분열은 숨길 수 없다.
보수적이건 진보적이건, 자유주의의 가치와 정치적 실천은 자본주의 시장 경제의 현실 속에서 자본이 인간을 자본의 무한 팽창 욕구에 봉사하도록 만드는데 기여할 뿐이다. 현재의 글로벌 경제위기에서 보듯이 자유주의는 경제를 파탄시킬 뿐 아니라 사회와 도덕 윤리를 파탄 나게 하는 자기분열적 사상이며 정치 운동이다.
사회 연대를 통한 사회공동체 의식의 발전, 사회 연대라는 새로운 윤리 의식의 발전이 없다면, 사람들은 자기분열적인 자유주의 윤리에 환멸을 느끼면서 그것을 내던지고 민족과 국가, 인종, 가족을 신성시하는 복고적 공동체주의 윤리로 후퇴한다. 이것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세계 각국에서 다시 강화되고 있는 보수적 민족주의와 쇼비니즘, 네오-나치즘, 인종주의, 가족주의의 물결이다.
따라서 자유주의의 자기분열적 도덕윤리로부터 사회와 개인을 보호하고, 민족주의와 인종주의, 가족주의로의 회귀가 아닌 진정 자유롭고 평등한 공동체성을 함양하기 위해서도 연대의 정신이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미래 세계를 향한 희망 또한 사회공동체적 연대의 정신에서만 찾을 수 있다.
생태환경적 권리는 실질적 자유와 평등의 필수 요소
사회민주주의는 환경과 생태를 중시한다. 이는 새로운 것이 아니라 모든 위대한 철학과 종교의 기본 가르침이기도 하며 또한 사회민주주의의 뿌리인 고전적 사회주의의 가르침이기도 하다. 인간과 자연의 화해와 공존은 인간과 인간의 화해만큼이나 소중한 것이며, 경제적 재화만이 아니라 자연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행복은 풍요로운 삶, 자유로운 삶의 필수적 요소이다.
그런 만큼 부유한 자들만이 아니라 모든 개개인들이 지구적 자연이 제공하는 생태 환경의 행복을 누릴 자유와 권리를 가져야 한다. 따라서 사회민주주의는 만민평등의 생태환경적 권리가 실질적 자유와 실질적 평등의 필수적 요소임을 인식한다.
그리고 사회민주주의는 자본주의 시장 경제의 무지막지한 이윤 추구로 인하여, 그리고 여타의 이해관계로 인하여, 이렇듯 모든 개개인의 자유와 평등에 필수적인 생태적 자연이 파괴되는 것을 비판하며, 그것을 저지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선다.
그러나 사회민주주의는 생태적 위기를 강조하면서, 자유와 평등, 연대 같은 다른 인간적 가치들을 소홀히 하면서 오로지 생태만을 중시하는 생태 지상주의 또는 생태적 역사 종말론을 주창하는 모든 종류의 생태 근본주의에 반대한다.
사회민주주의는 자본주의에 내포된 생산력 및 기술력 지상주의와 소비 지상주의, 환경균형 파괴경향을 심히 우려하고 비판하지만, 그것을 극복할 인류의 잠재력을 확신한다. 생태적 위기의 극복을 위해 필요한 것은 적극적 관심과 대응이지 종말론적 공포의 극대화와 주어진 자본주의 현실로부터의 파괴적인 과거지향적 단절이 아니다.
평화공존과 연속적 과정으로서의 남북통일
사회민주주의는 역사 발전의 현 단계에서 사회적 연대는 전 세계를 단위로 실현되기 힘들며 아직은 민족과 국민국가 단위로 사회공동체가 존재함을 인식한다. 그러나 우리는 민족주의와 쇼비니즘 즉 일국 이기주의를 반대하며, 타국과 타민족이 우리와 동등한 권리를 가졌을 인정하고, 또한 일국이 강압적 수단으로 타국을 착취·지배하는 것을 결단코 반대한다.
타국과의 평화공존 및 호혜선린의 원칙은 자유와 평등, 연대라는 사회민주주의의 3대 가치를 국제적 차원으로 확장할 때 필연적으로 도출된다.
또한 평화공존과 호혜선린의 원칙은 우리나라가 주변의 모든 초강대국들과 중립적이며 동일한 우호친선 관계를 갖는 것이 점증하는 국제적 긴장과 갈등의 조건에서 우리가 생존하고 번영하기 위한 필수 조건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단코 평화주의자임을 선언한다.
우리는 남북한의 특수관계를 인정하되, 북한의 국가적 실체를 인정하고, 그 체제가 어떠하건 그것을 정당한 대화 상대로서 인정한다. 성급한 통일 논의보다는 남북한 간의 대화와 신뢰회복, 교류 협력을 중시하며, 그 무엇보다 평화체제를 정착시키는 것을 우선적인 목표로 한다.
이처럼 사회민주주의는 통일이 그 모든 다른 가치에 우선한다는 입장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통일 없는 남한만의 문명·복지 공동체의 건설은 불완전함을 인식하면서 남북한간의 평화적이고 자발적인 통일을 지향한다.
그 이유는 첫째, 분단과 정치군사적 대립은 그 자체 평화의 부정이며 게다가 그러한 대립 상황이 지속되는 한 한반도가 주변 강대국에 중립적인 입장을 견지하면서 모든 국가와 우호친선을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둘째, 남북한 간의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호혜협력과 상호교류는 남북한 모두에서 선진적인 복지국가, 문명국가를 만들어 나가는데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남북한이 서로 평화공존과 함께 경제적, 사회적으로 서로 왕래하고 교류·교역하는 과정 그 자체가 남북한 각자에 있어 경제성장과 사회발전을 촉진할 것이며, 또한 남북간의 문화·예술, 과학·기술 등의 정신적 교류는 남북 국민들간의 상호이해와 통합을 진전시킨다.
따라서 우리는 남북한 간의 통일이란 어느 날 급작스럽게 일어나는 하나의 사건이라기보다는 끊임없이 이루어지는 연속적 과정으로 이해한다. 이는 우리가 사회민주주의 복지국가를 미래의 목표이면서 동시에 그 자체 연속적 과정으로 인식하는 것과 동일한 태도이다.

사민주의의 원리 ①
자본에 대한 사회적 통제과 규율
사회민주주의의 원리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발전하는 체제이며 때와 장소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그 모순을 발현시킨다. 현실의 모순을 회피하지 않으면서 그 모순과 문제들을 해결하는 실천 속에서만 새로운 미래를 열어 나가고자 하는 사회민주주의의 입장에서 그 정책과 처방이 시대와 장소의 차이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취하는 것은 당연하다.
역사상 최초의 사회민주주의 강령이었던 독일 사회민주노동당의 1875년 고타 강령에서 제시되었던 정책과 처방들은 오늘날 우리나라를 비롯한 대부분의 발전된 나라들에서 이미 거의 다 실현되었다. 또한 전후 브레튼우즈 국제경제 체제의 조건에서 번성한 ‘자본주의의 황금기’에 구사되었던 구미 선진국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정책적 처방들이 오늘날 우리나라에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고 우리는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 우리 사회가 그리고 전세계가 직면한 최대의 공통적 과제는 한마디로 과격한 급진 우파 사상인 신자유주의 30년이 낳은 경제와 사회의 파괴를 수습하는 일이다. 여기에는 범세계적 경제위기에서 벗어나는 단기적 과제와 함께 중장기적으로 신자유주의와 금융자본주의를 대체하는 대안적 경제사회 체제를 모색하고 동시에 생태환경적 위기에 대해 적절하게 대응하는 과제가 포함된다.
물론 경제위기와 생태위기는 나라마다 다른 형태로 나타나기 때문에 그 정책의 내용과 형태는 서로 다른 경우가 많을 것이다. 그러나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변치 않는 사회민주주의의 정책 원리도 있다.
사회민주주의는 언제 어디서든 자본주의적 경제사회 질서 하에서, 그것에 대항하여 진행되는 진보적 정치 운동이며, 대의제 민주주의와 참여민주주의, 시민운동과 노동운동의 활성화와 교섭력 및 정치력 증대를 기반으로 한다.
사회민주주의는 자본주의 시장에서 발생하는 본질적 폐해를 교정하기 위하여 사회적, 국가적 개입을 확대하며, 개인과 사회를 자본 원리와 시장 원리의 침투로부터 최대한 방어하여, 앞서 말한 5대 가치를 구현하려 한다.
이렇듯 그 기본 가치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사회민주주의가 지켜야 하는 변치 않는 기본적 원리가 있으며, 또한 그것과 밀접하게 결부된 핵심적 전략들이 있다. 물론 우리가 여기서 제시하는 원리와 전략들만으로 사회민주주의가 완성되는 것은 아니며, 앞으로 더 많은 원리와 전략들이 추가될 수 있을 것이다.
첫번째 원리 : 자본에 대한 사회적 통제의 원리
- 자본에 대한 사회적 통제와 경제민주화
1인 1표의 원리에 기반하고 있는 정치적 민주주의와 1원 1표의 원리에 기초하고 있는 경제적 자본주의의 관계는 늘 팽팽한 긴장과 대립으로 점철되어 왔다.
우리는 진정한 민주주의는 반드시 통제된 시장, 통제된 자본주의를 필요로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자본과 시장을 민주공화국이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다면 민주주의는 껍데기로 전락하여 형식과 절차만 남게 되고 국민들의 삶은 실질적으로 시장과 자본주의에 의해 지배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소득과 부의 집중 현상과 빈부 격차의 확대를 막을 수 없으며, 금융 위기와 경제위기를 막을 수 없다.
이는 스스로 진보적 자유주의였음을 자부한 김대중·노무현 정부 치하에서 우리 국민들이 절실하게 체험했던 바이다.
정치적 국가의 형태에는 민주공화주의와 전체주의, 권위주의, 왕정주의, 그리고 의회주의와 대통령중심제 등 여러 가지 유형이 있다. 그리고 자본주의 경제에도 자유 시장 자본주의와 통제된 자본주의, 조합주의 자본주의 등 여러 형태가 있다. 이 중 박정희 체제는 국가 형태는 전체주의이면서 경제 형태는 통제된 자본주의였다. 그에 반해 사회민주주의가 원하는 복지국가는 국가 형태는 민주공화국이면서 경제 형태는 사회적, 민주공화적으로 통제되는 자본주의, 복지 자본주의이다.
자유주의자들은 정치적 민주주의가 만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경제적 자유 시장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말하는 정치경제 사상을 일반적으로 자유주의적 민주주의, 즉 자유 민주주의라고 부른다.
우리나라의 경우, 보수적 자유주의자들 즉 신자유주의자들만이 아니라 민주적 자유주의자 또는 진보적인 민족·민주적 자유주의자들 역시 박정희식 경제체제, 국가주도형 시장경제에 대한 대안으로서 자유 시장 자본주의를 주장해왔다.
특히 신자유주의는 사회 영역에 시장 원리를 적용함으로써 사회라는 독자적 영역을 부정하고 시장에 흡수·종속시키려 한다. 이에 반해 사회민주주의는 사회 영역의 독자성을 확보하면서 시장과 자본에 대한 적극적인 사회적, 민주공화적 통제를 시행하고자 한다.
자본에 대한 통제, 특히 대자본에 대한 통제의 필요성이 우리나라에서는 ‘경제민주화’라는 용어로 표현되고 있다.
그런데 자본과 기업, 특히 오늘날 자본주의의 핵심조직인 대자본과 대기업에 대한 통제(즉 경제민주화)의 필요성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여기에는 크게 두 입장이 대립되고 있다. 하나는 시장이 주체 또는 주역이 되는 통제 즉 시장 규율(market discipline)에 의한 통제이다. 이것은 경제민주화를 경제자유화로 이해하는 입장이다. 다른 하나는 사회에 의한 통제 즉 사회적 통제이다. 이 두 번째 입장이 진정으로 사회민주주의에 부합되는 접근법이다.
먼저 경제자유화론에서 해결책은 국가의 경제개입과 대기업(대기업집단)의 역할을 가능하면 작게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전형적인 자유주의의 철학의 귀결인데, 여기서는 ‘합리적 (자유) 시장’의 원리가 가장 중요하다.
경쟁적 시장을 효율성과 생산성의 원천으로 보는 자유주의자들은 국가와 정부는 되도록 적게 시장에 개입하는 것이 좋고, 또한 대기업과 대기업집단(기업그룹)의 역할과 비중 역시 되도록이면 줄여서 적게 만들어 작은 기업들이 치열하게 경쟁하는 완전 경쟁 상태를 만들면 ‘시장에 의한 규율’ 즉 아담 스미스가 말한 ‘보이지 않는 손의 규율’이 작동하는 ‘공정하고 합리적인 자유 시장’ 원리가 구현된다고 본다.
이에 반해 아무리 공정한 시장질서라 할지라도 자본주의 시장 경제의 본원적 파괴성과 폐해에 주목하는 사회민주주의는 대자본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경제적으로 큰 역할을 하는 개입주의 국가가 필요하다고 본다.

이명박 대통령과 재벌총수들의 회동 장면(사진출처는 청와대)
그리고 대자본 즉 대기업 및 대기업집단에로의 경제력 집중이 산업과 업종에 따라서는 필요하고 효율적이라고 보며, 따라서 필요한 것은 대자본을 작게 쪼개는 것보다는 어떻게 그것을 사회적으로 통제할 것이냐 라고 본다. 따라서 사회민주주의는 한국경제에서 적어도 30대 재벌그룹은 반드시 사회적, 국가적으로 통제되어야 한다고 본다.
또한 사회민주주의가 강조하는 것은 대자본 및 재벌그룹에 대한 사회적 통제만이 아니다. 그 구조와 인맥상 은행과 자본시장 등 금융자본의 이익을 우선하게 마련인 중앙은행(한국은행)에 대한 민주공화주의적, 사회적 통제를 강화하여 중앙은행이 일자리 창출이나 경제성장 등 일반 국민들이 더 중시하는 과제들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하는 것도 자본에 대한 사회적, 민주적 통제의 일환이다. 또한 자본 및 자산 소유자들의 개인적 고소득과 법인소득에 대해 과세하는 것 역시 자본에 대한 ? 즉 자본의 소득 처분권에 대한 ? 사회적, 민주공화적 통제이다.
자본에 대한 사회적, 민주공화적 견제와 통제는 여기에 국한되지 않는다. 모든 기업들에 있어 최저임금 및 비정규직 채용에 대한 규제, 그리고 산별 단체 교섭을 기피하는 기업에 대한 법률적 규제 등등 노동시장에서의 다양한 규제 역시 자본에 대한 사회적, 민주공화적 통제이다.
또한 외환금융시장 및 자본시장의 투기성에 대한 규제와 은행의 영업 및 자산에 대한 규제 등등 자본·금융시장에서의 다양한 법률적 규제 역시 자본에 대한 사회적, 민주공화적 통제이다.

영국의 무상의료시스템(NHS)을 옹호하는 시위(사진출처는 레프트21)
전기와 철도·지하철, 버스, 우편, 수도처럼 모든 국민의 일상생활에 중요한 재화와 서비스를 제공하는 공기업 또는 그런 공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민간 기업을 공공의 이익에 맞게 유지하도록 민주공화국과 시민사회, 노동조합이 강력하게 요구하고 규제하는 것 역시 자본에 대한 사회적 통제이다.
- 사회적 통제와 사회적 소유
사회민주주의는 자본에 대한 사회적 통제의 중요한 방법이 사회적 소유 또는 국유화임을 인정하지만 그것을 모든 자본에 적용하려 하는 전통적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에 반대한다.
20세기 말 소련 등 현실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는 사회적 소유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이 경제적으로 얼마나 비효율적이고 비생산적인지, 그리고 실질적인 사회적 통제, 민주공화적 통제와 무관한 것인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사회적 소유는 다양한 사회적 통제의 한 유형일 따름이다.
그렇지만 자본에 대한 사회적 통제에는 국가적 통제만 있는 것이 아니다. 노동권과 노동조합의 권리를 대폭 향상시키고 또한 독일과 북유럽의 공동결정제처럼 종업원 전체를 대변하는 종업원 대표자들이 ? 지역사회나 다른 이해당사자들과 함께 ? 개별 회사의 이사회에 이사로 참여하는 것 역시 자본에 대한 일종의 사회적 견제·통제이다.
소비자 협동조합을 설립하여 기업에 맞서는 소비자 권익을 향상시키는 것도 일종의 사회적 견제·통제이며, 또한 소상공인과 소농들이 자율적으로 결성한 협동조합의 역할을 확대하는 것 또한 사회적으로 통제된 시장 경제를 만들어 나가는 중요한 형태이다.
그런데 노동조합과 공동결정제, 소비자 및 생산자 협동조합 등의 발전을 통한 비국가적 방식의 사회적 통제의 실현을 위해서도 국가의 역할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노동조합과 협동조합, 시민사회의 역할이 발전하려면 단지 그들 운동 스스로의 발전만이 아니라 그것들을 입법을 통해 행정적,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실질적 민주공화국 또는 복지국가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는 예컨대 산별 노조 건설 운동은 노동운동 스스로의 힘에 의해 독자적으로 달성되어야 하며 정치권과 민주국가는 별로 도와줄 일이 없다는 시각이 지배적이었다. 협동조합운동에서도 역시 국가의 행정적, 재정적 지원과는 무관하게 협동조합 운동이 발전하여야 한다는 시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렇지만 산별노조와 산별 단체교섭이 제대로 발전하려면 그것을 의무화하는 국가적 입법이 반드시 필요하며, 따라서 사회민주주의 정당 정치와 민주공화국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협동조합 운동 역시 마찬가지이다.
- 사회적 통제와 국가적 통제, 아나키즘
이와 관련하여, 일체의 국가적 통제를 거부하면서, 자본에 대한 사회적 통제는 용인하지만 국가적 통제는 거부하는 아나키즘(무정부주의)에 대해 사회민주주의는 반대한다.
무정부주의자들, 특히 생태주의적 무정부의자들은 자본주의 시장 경제와 일체의 국가권력(민주공화국과 복지국가도 포함한)을 해체하고 그것을 자율적 협동조합 및 공동체의 연대적 결사체로 대체함으로써 실질적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사회민주주의는 자율적 협동조합과 ‘사회적 경제’의 발전을 위해서도 민주공화국과 복지국가의 발전이 중요하며, 양자가 힘을 합쳐야만 비로소 자본과 시장에 제대로 맞서는 사회적 견제·통제가 가능하다고 본다.
두 번째 원리 : 노동 비례 소득분배와 누진적 과세의 원리
사회민주주의는 사유재산권과 이윤 추구, 자유로운 기업 활동을 인정하며 시장 원리에 따른 시장소득 분배를 인정한다. 그러나 사회민주주의는 궁극적으로 노동에 근거한, 그리고 노동에 비례하는 소득분배 원리로 역사는 발전한다고 보며, 경제 발전에 따라 이 원리가 자본주의 내에서도 가능한 한 더 많이 구현되어야 한다고 본다.
이 원리의 관점에서 보면, 법인 기업의 이윤은 그것이 현금 배당 및 이자 등의 형태로 분배되어 개인소득으로 되는 경우 높은 누진적 개인소득 과세를 통해 재분배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주식 및 채권 등 금융자산 소유로 인해 발생하는 고소득은 노동에 근거하지 않는 불로 소득이며, 노동에 비례하지 않는 소득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법인 기업의 이윤이 기업에 유보되어 궁극적으로 생산적 투자에 사용되어 일자리 창출에 사용될 경우, 그것은 사회적으로 유용한 기여를 하는 것이기 때문에 과세 면제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또한 근로 소득의 경우에도 누진적으로 과세한다. 왜냐하면 그의 특별한 노력을 제하고도, 물려받은 천부적 재능 덕분이거나 단지 운이 좋아서 또는 시장의 변덕스런 변화에 의해 높은 고소득을 얻었을 경우, 그 고소득은 그의 노동에 비례한 것이 아니므로 그것에 대해 상대적으로 높은 세율의 개인 소득 과세를 메기는 것은 정의와 공정의 가치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노동과 무관한 여타 불로소득들 특히 부동산이나 증권투자에서 발생하는 매매차익 즉 자본이득(capital gain)은 노동 의욕과 생산적 투자 의욕을 떨어뜨린다는 점에서 효율성의 관점에서도 경제적 합리성이 없다고 보아 고율 과세가 원칙이다. 우리는 이러한 원칙을 사회민주주의의 ‘분배 정의의 원리’라고 규정한다.
이처럼 사회민주주의의 분배의 정의는 사유재산권을 인정하되 그 신성불가침을 인정하지는 않는다. 그리하여 국가의 조세와 지출을 통하여 분배의 정의를 구현하고자 한다.
그런데 국가를 매개로 한 분배의 정의의 구현 이전에, 시장 영역에서의 분배의 정의도 중요하다. 우리나라에서는 외환위기 이후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에, 그리고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에 심각한 분배의 부정의(unjustice)가 나타나 고착화되고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 역시 사회민주주의에 대단히 중요하다.
- 동일노동-동일임금 원칙과 사회적 연대의 조직화
비정규직 및 중소기업 노동자들에 대한 차별적 대우와 이에 따른 동일노동-동일임금 원칙의 붕괴는 분명 노동에 비례한 소득분배 원리에 어긋난다. 앞서 보았듯이 자유주의는 이 문제를 노동조합이 노동시장을 독점한 결과 노동시장에서의 공정 경쟁, 완전 경쟁 원칙이 붕괴되어 ‘시장 원칙’이 붕괴되고 가격(임금) 체계가 왜곡된 까닭이라고 본다.
동일 상품(노동)에 대한 차별적 가격(임금)은 시장원리에도 위배되는 까닭에 이것이 자유주의의 입장에서 중대한 문제로 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언제나 그렇듯이 그 본성상 자유주의는 연대의 해체 즉 노동조합의 약화와 ‘자유로운 (노동)시장’의 복원에서 그 해법을 찾는다.
그에 반해 사회민주주의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노동조합의 산업별 조직화와 중앙단체 교섭이 필요하며 따라서 대·중소기업 전체에서 비정규직 및 정규직의 노동조합 조직율을 높이는 연대의 강화에 해답이 있다고 본다.
동시에 최저임금 수준을 높이는 민주공화국의 국가개입주의(규제 강화)가 필요하다고 보며, 또한 저임금 착취에 의존하는 중소기업 및 영세자영업의 경우 그들 기업의 생산성 향상과 산업고도화를 요구하고 그에 실패하는 경우 단계적으로 퇴출시키는 국가개입주의 정책(산업·기업 규제 및 지원 정책) 역시 필요하다고 본다.
그래야만 비정규직 및 중소기업 노동자들에게서 나타나는 차별적 임금의 문제 즉 1차 분배(즉 시장에서의 원천적 시장소득 분배)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요약하자면 자유 시장을 중시하는 자유주의적 해법이 아니라, 사회적 연대와 민주공화적 국가개입을 중시하는 다양한 사회민주주의적 해법이 동원되어야 한다.
- 생산적 투자와 양질의 일자리 확대를 통한 1차 소득 분배의 개선
또한 진보적 자유주의자들은 자본 및 금융시장, 기업지배시장에서 ‘시장 규율’(시장적 통제) 원칙을 강화하는 내용의 재벌개혁을 수행하게 되면 그간 재벌가문 및 대기업들이 독식해온 시장소득 분배가 개선되어 마치 하청 중소기업 및 노동자에게 유리한 방향의 시장소득 분배가 나타날 것처럼 말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완전한 허상이다. 그러한 내용의 재벌개혁은 오히려 자본 및 금융시장 투자자들 즉 국내외 재테크 자산계급에 ? 따라서 총자본에 ? 더욱 유리한 방향으로 시장소득 분배가 일어나도록 할 뿐이다.
오히려 주주자본과 금융자본, 외환금융시장을 민주공화국이 강력하게 통제하는 것과 결합된 재벌개혁, 그리고 재벌 대기업들이 미래성장 산업에 대한 생산적 투자를 더욱 늘려 양질의 일자리 창출에 더욱 나서게 하는 재벌개혁이 되어야 총노동에 더 유리한 방향의 시장소득 분배(즉 1차 분배)가 일어날 수 있다.
동시에 그것만으로도 부족하므로, 재벌 가문과 금융자산 및 부동산 자산 재테크 세력 모두를 포함하는 부유한 자산소득 계급에 대한 고율의 소득 과세를 통해 소득의 재분배, 즉 2차 분배를 하여야 한다.
이처럼 주주자본주의, 금융자본주의를 벗어나기 위한 정책, 생산적 투자와 일자리 창출을 유도하기 대기업 통제 장치, 조세를 이용한 재분배 정책 등의 종합적인 정책이 구사되어야 1차 분배와 2차 분배가 동시에 개선되어 분배의 정의가 구현될 수 있다.
- 저임금 착취 기업의 존재를 원천적으로 금지
자유주의자들은 또한 마치 대-중소기업간 원하청 거래가 공정하게 이루어지도록 민주공화국이 규제하면 중소기업 및 영세기업에게 유리한 방향의 시장소득 분배가 이루어지고 그 결과 이들 기업에서의 저임금 착취가 원천적으로 사라질 것처럼 말한다.
그렇지만 이것 역시 매우 과장되어 있다. 아무리 대기업-중소기업간 원하청 거래가 공정 경쟁, 공정 거래 원칙에 따라 이루어지도록 하는 경우에도,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 등을 민주공화국이 강력하게 규제하여 금지하지 않는 한, 저임금 착취에 의존하는 하청기업은 계속 나타날 것이며 그런 기업이 하청 거래 공개입찰 경쟁에서 더 유리한 위치에 서게 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따라서 원하청 거래에서 공정시장 질서를 구축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소중한 것은 중소기업 및 영세기업에서 만연한 저임금 노동 착취를 원천적으로 금지시키는 것이며, 이를 위해 최저임금을 단계적으로 높이고 이들 기업의 노동자들을 포함하는 전국적 산별 노조를 구축하고 산별 단체교섭이 법률적으로 유효하도록 민주공화국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개입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야만 총자본과 총노동간의 원천적 시장소득(즉 1차 소득)의 분배에서 총노동에 유리한 방향의 변화가 비로소 달성될 수 있다.

사민주의의 원리②
수평적 수직적 연대와 복지국가
세 번째 원리 : 기본 필요 충족과 인간 존엄성의 원리
인간의 삶이 자본주의의 치열한 시장 경쟁에 의존한다는 것은 반인간적이며, 개개인의 실질적 자유와 평등을 위협한다. 따라서 사회민주주의는 개개인의 생존에 필요한 기본적인 재화와 서비스를 시장이 아닌 국가가 보장하여 탈상품화, 탈상업화 하는 것을 국가의 의무, 시민의 권리로 확립하고자 한다.
우리는 이것을 실질적 자유를 구현하는 원리 즉 ‘인간 존엄성의 원리’라고 부른다. 사회민주주의는 적절한 품질의 주택과 의료, 교육, 노후보장이 빈부격차를 막론하고 모든 국민 개개인에게 평등하게 제공되어야 한다고 요구한다.
그런데 인간 존엄성의 확보는 경제적인 기본필요 충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청소년의 집단 괴롭힘과 각종 성인 범죄 같은 사회적 병리 현상의 대부분은 자본주의 사회의 살벌한 경쟁과 개인주의의 만연, 우애적 공동체의 파괴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사회민주주의는 경제 환경만이 아니라 사회 환경을 보다 인간적인 모습으로 변혁하는 과제 역시 인간의 존엄성을 실현하는 데서 매우 중요하다는 점을 인식한다.
네 번째 원리 : 사회적 연대의 원리
사회적 연대는 앞에서 말했듯이 사회민주주의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이며 동시에 가장 중심이 되는 사회변혁 원리이다. 여기에는 수평적 연대와 수직적 연대가 구분된다.
- 수평적인 사회적 연대와 복지국가, 산별 노조
먼저 수평적 연대를 보면, 비정규직과 중소·영세기업 노동자를 포함한 모든 노동자들을 연대의 원칙에 따라 조직하는 통일적인 산업별 전국 조직과 그 단체교섭이 바로 수평적 연대이다. 따라서 사회민주주의는 산업별 노동조합의 전국적 구축과 산별 단체 교섭 효력의 범위 확대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빈부격차를 막론하고 노동자건 자본가건, 자영업자이건 모든 국민은 동등한 복지의 권리를 가진다는 것, 즉 모든 국민은 동등한 복지 수급권을 가진다는 보편적 복지의 권리 역시 또 하나의 수평적 연대이다. 질병과 실업, 노후의 위기에 처한 국민은 누구나 타인과 사회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소득 활동을 하는 모든 사람은 누구나 적절한 세금을 지불해야 하며, 더구나 남보다 더 많은 소득을 획득하는 이는 더 많은 세금을 부담하는 누진적 조세 부담의 원칙을 지켜야 한다는 것 역시 수평적인 사회적 연대의 원리이다. 또한 따라서 노동 능력을 가진 이는 누구나 일할 의무와 세금을 낼 의무를 갖는다.
- 수직적, 세대간 연대와 복지국가
수직적 연대는 자라나는 어린 세대와 일하는 청장년 세대, 은퇴한 노년 세대 간의 세대간 연대를 말한다. 일하는 청장년 세대는 각자 자기 자식을 포함하여 자라나는 어린 세대 전체를 각종 복지 제도를 통해 공동으로 부양하고 교육시킬 의무가 있다.
그리고 이렇듯 청장년 세대 전체로부터 부양과 교육 혜택을 받은 어린 세대가 성장하여 자신 스스로 일하는 청장년 세대가 되고 그 부모 세대가 은퇴하여 노인 세대가 되었을 때 그 노인세대 전체를 노인연금 제도를 통해 공동으로 부양할 의무가 있다.
이렇듯 일하는 청장년 세대는 결국 자신의 노후를 위해 어린 세대를 공동으로 부양하고 새로운 청장년 세대는 과거의 은공을 갚기 위해 노인 세대 전체를 봉양한다. 이것은 ‘효’의 사회화이며, 아름다운 사회 연대 정신의 발로이다. 또한 이것은 자본주의가 초래하는 대가족 제도의 해체, 즉 대가족 내에서의 세대간 연대의 해체에 진보적으로 대응하는 길이다.
이렇듯 연대를 통해 시장으로부터 안전을 확보하면 시장이 초래하는 과도한 경쟁이 사라지고 사회 전체에 공동체의 가치가 만개하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 재테크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보편적 복지
한편 지난 수십 년간의 신자유주의적 금융화와 증권화는 각 개인들이 금융시장과 부동산 시장을 통한 재테크를 통해 각자의 자녀교육비와 주택마련, 노후준비를 하도록 요구함으로써 개인 생활의 금융화, 재테크화가 진전되었다.
퇴직연금과 국민연금의 팽창, 개인들의 사보험 가입과 증권·부동산 투기의 팽창이 엄청나게 진행되었으며 그것은 결국 개인 부채의 팽창과 함께 금융시장의 불안정화와 금융 및 부동산 거품의 증가를 낳았다. 그리고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래 금융 및 부동산 시장 거품이 붕괴하면서 이제는 그간 재테크에 매달려온 개개인들의 생존 기반 역시 무너지고 있다.
사회민주주의는 증권·금융 시장과 그 자본에 의존하고 종속되는 불안정한 삶 대신에 사회적 연대에 의존하면서 안정적으로 보편적 복지를 누리는 삶을 원한다. 즉 수평적 또는 수직적인 사회적 연대를 통해 소득을 재분배하는 것이 인간의 삶을 안정시키는 올바른 길임을 확신한다. 이렇듯 사회민주주의는 금융자본주의와 주주자본주의 대신 보편적 복지를 대안으로 해야 하는 바, 이는 사회연대 정신의 부활과 강화를 통해 가능하다.
* 사회민주주의의 전략
가. 보편적 복지 전략
이상의 여러 정책 원리를 종합적으로 구사하여 사회민주주의가 내세우는 여러 핵심 전략에서 가장 우선되는 것이 보편적 복지 전략이다. 사회민주주의가 보편적 복지 전략을 추구함에 있어 구사하는 기본 정책 원리가 앞에서 말한 자본에 대한 사회적 통제의 원리, 노동 분배의 원리, 연대의 원리, 기본 필요 충족 및 인간존엄성의 원리 등이다. 특히 연대의 원리와 기본 필요 충족의 원리는 보편적 복지 전략의 핵심적인 논리적 기반이 되는 근거이다.
사회민주주의는 오로지 이윤을 위해 작동하는 자본주의 시장이 개개인에게 결코 평생에 걸친 안정된 삶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점을 인식한다.
누구나 태어나면 양육받고 교육받아야 하며 때로는 병에 걸려 치료받아야 한다. 그리고 누구나 직장을 잃을 수 있으며, 살 집이 있어야 하고 언젠가는 은퇴하여 노인이 된다.
그런데 이러한 삶의 전 과정을 자본과 시장의 변덕과 수익창출에 맡길 수는 없다. 모든 시민은 요람에서 무덤까지 출산과 보육, 교육, 질병, 주거, 그리고 은퇴 후 생활까지 각자의 시장성과, 시장소득과는 무관하게 자유롭고 풍요한 삶을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
앞서 말했듯이 보편적 복지 전략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수평적 및 수직적 차원의 사회적 연대 원리가 관철되어야 한다.
 
사회민주주의는 소득이 많은 이는 누진적으로 더 많은 세금을 내고, 소득이 적은 이는 더 적게 내지만, 평균적으로는 모든 이들이 보편적 복지가 심화되는 것에 상응하여 각자의 시장소득의 절반까지를 자신을 포함한 모든 시민을 위해 세금 또는 사회보험금으로 낼 것을 요구한다. 그 대신 빈부격차를 막론하고 노동자건 자본가건, 자영업자이건, 아니면 비취업 여성 및 노인이건, 모든 국민은 동등한 복지 수혜권을 가져야 한다. 또한 일하는 청장년 세대는 일하지 않는 어린 세대 및 노인 세대를 수직적 연대를 통해 부양하고 봉양하여야 한다.
이렇듯 누진적 세금과 사회보험금을 재원으로 수준 높은 보편적 복지 전략을 관철할 경우 각 개인은 자본과 시장으로부터 최대한 독립하여 생애 전체에 걸쳐 기본 필요를 충족하는 인간존엄성에 걸 맞는 삶이 가능해진다.
보편적 복지 전략의 추진에서 중요한 수직적 연대는 노인연금 문제에서 잘 드러난다. 지금처럼 각 개인이 퇴직연금을 상업적 금융회사에 적립하여 그것을 통해 노후 안전을 도모하는 경우, 또는 ‘적립식’으로 설계된 국민연금이 그 적립금을 채권 및 증권시장에서 운용하는 경우, 그 적립금들은 결국 금융시장의 불안정성에 노출되어 있는 까닭에, 결국은 그 가입자들의 노후가 불확실해진다.
이에 반해 부과식으로 설계된 국민연금 제도에서는 일하는 청장년 세대가 그 해 일하여 생산한 부가가치에서 일정 몫을 떼어내 일하지 않는 노인 세대를 위한 연금으로 바로 바로 지급한다. 따라서 이 경우 노인들의 생존이 금융시장으로부터 자유롭다.
오늘날 각 나라의 복지 전략은 크게 ‘선별적 복지’ 전략과 ‘보편적 복지’ 전략으로 나눌 수 있다.
영미형의 선별적 복지 전략은 신자유주의적 경제사회 질서의 틈바구니에서 사회 밑바닥에 내쳐지는 최하위 계층만을 선별하여 국가복지 혜택의 대상으로 삼는 시혜형, 빈민구제형 복지제도이다. 이는 진정한 복지국가라기보다 신자유주의 경제사회 체제의 사회 안보를 위한 최소한의 조치에 불과하다.
선별적 복지란 인간의 삶을 최대한 시장과 자본으로부터 독립시키는 것이 아니며, 사회양극화와 경기변동에 따른 삶의 불안정성과 피폐화라는 자본주의 시장 경제의 본원적 결함을 선별적 복지를 통해 일부 보완함으로써, 인간을 더욱 더 자본과 시장에 얽어매고자 하는 보수주의 및 자유주의의 ‘책략’이다.
이에 반해 북유럽형의 보편적 복지 전략에서는 가난한 자와 부유한 자 등 모든 개별적 사회구성원이 하나의 당당한 권리로서 또 당연한 의무로서 보편적 복지 체제에 참여한다.
여기서는 각 개인이 자신의 시장소득을 자신만이 독점하지 않고 누진적 조세 및 사회보험금을 통해 복지국가에 납부하는 대신 전생애에 걸친 안전하고 예측 가능한 삶의 질을 보장받는다.
지금은 부유한 자본가와 사업가들도 미래의 언젠가 병에 걸려 일할 능력을 잃거나 사망할 수 있으며 파산할 가능성도 많다. 그 경우 그들은 가족과 자녀를 돌볼 수 없으며 자신의 노후 대비도 마련하지 못하고 노숙자로 떠돌아다닐 수 있다.
그러므로 부유하건 가난하건 관계없이, 또 개인적인 경제적 성공 또는 실패와 무관하게, 그리고 국민경제가 전체적으로 일정 수준을 유지하고 또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한, 모든 이에게 기본 생활의 유지가 무조건 보장되고 그리하여 각자가 인간적 존엄성을 지킬 수 있는 포괄적인 보편적 복지의 틀이 필요하다. 실질적 자유와 평등은 보편적 복지의 확대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렇듯 모든 시민이 복지국가 혜택을 누릴 수 있기에 북유럽의 보편주의 복지 모델에서는 여타 모델에서보다 비교적 높은 세율에도 불구하고 부유층과 중산층의 조세 저항이 상대적으로 약하고 납세 의무가 잘 지켜지는 모습을 보인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북유럽 사회민주주의가 성취한 보편주의 복지는 복지국가가 유지될 수 있는 든든한 경제사회적 기반이기도 하다.
결론적으로 사회민주주의는 인간의 삶을 탈시장화, 탈상품화시켜야 한다고 요구하며, 이것만이 진정으로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보장하면서 또한 동시에 경제의 역동성을 보장하는 전략이라고 본다.
우리나라 사회민주주의의 최우선적인 정치적 목표는 보편주의적 복지국가의 실현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나라 현실의 여러 가지 제약으로 인해 그러한 복지국가를 당장 실현하기 힘들다는 점도 잘 알고 있다.
무엇보다도 ‘복지 급여는 시혜가 아니닌 시민적 권리’라는 사회적 인식의 계몽과 함께 복지국가 예산의 확대에 필요한 조세개혁 및 사회보험제도의 개혁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에 대한 광범위한 국민적 동의와 지지를 점진적, 단계적으로 획득해 나가는 일이 중요하다. 이처럼 복지국가는 사회민주주의의 핵심 정책목표이며 이는 미래의 보다 고도한 사회민주주의에서도 여전히 그러하다.
혹자는 복지국가가 사회민주주의라는 정치적 실천과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추구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역사적으로 다양한 복지 체계가 선진 각국에서 발전해 왔다는 점을 생각할 때, 복지 후진국인 우리나라가 북유럽만이 아닌 다른 선진국의 복지 모델을 모방하면서 사회복지를 확대해 나가는 것은 바람직하다. 그러나 선별적 복지가 아닌 보편적 복지는 사회민주주의라는 정치 세력이 성장하지 않고는 결코 실현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회민주주의라는 정치적 실천으로부터 분리하여 보편적 복지 체제를 구현하고자 하는 이들을 참된 진보라고 보지 않는다. <계속>

사민주의의 전략
노동민주주의, 대자본과 금융 통제 등
[사회민주주의선언7] 문화와 여가, 성장과 복지 선순환 등

* 작년(2012년) 11월 홍진북스에서 <사회민주주의 선언>를 출판했다. 이 책의 저자는 조원희 국민대 교수와 정승일 사회민주주의센터 준비위원이다. 최근 진보의 정체성으로 ‘사회민주주의’를 주장하는 흐름들이 제기되고 있고, 이미 한국에서는 사회민주주의에 대해 비판적이거나 옹호하는 많은 자료와 서적들이 있다. 그럼에도 진보정치의 전망과 관련하여 제기되고 있는 사회민주주의에 대해 압축되고 정리된 소개를 할 필요가 있다는 판단을 <레디앙>은 했다.
또 다행히 <사회민주주의 선언>을 출판한 홍진북스의 홍순종 대표의 협조를 얻을 수 있었다. 이에 <사회민주주의 선언>의 전체 내용을 연재한다. 책 자체가 많은 분량이 아니기에 5회~10회 가량으로 나누어 게재한다.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비판과 수용 모두 온전히 한국 사회의 진보를 고민하고 실천하는 이들의 몫이다. 그래서 때로는 양자택일이 아니라 조건부 수용이나 선택적 비판일 수도 있다. 그런 생산적 논의와 실천적 고민이 있기를 바라면서 게재한다. 홍순종 대표에게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
이 책의 내용을 게재하는 과정에서 비판적 의견 등이 있으면 <레디앙>은 적극적으로 지면을 제공할 생각이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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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민주주의 전략
사회민주주의는 노동 즉 대가를 받고 일정한 규율에 따라 수행하는 일이 인간 삶에서 차지하는 압도적 비중을 인정하며 시민의 노동자적인 측면에 주목한다. 사회민주주의는 모든 노동자는 시민으로서 자유와 행복을 누릴 헌법적 기본권을 가지고 있으며 이를 위해 ‘일자리의 지속성’을 보장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사회민주주의는 최저임금 및 실질임금의 인상과 노동시간 단축, 비정규직 차별 금지와 정리해고 규제, 그리고 비정규직을 포함한 연대적 노동조합 조직률의 신장과 산별 및 중앙 단체교섭 범위의 확대에 적극적으로 나선다.
사회민주주의는 극심한 탄압과 온갖 방해를 무릅쓰고 이 나라에서 이러한 중차대한 임무를 노동해방의 이름으로 수행해온 기존 노동운동의 투쟁과 성과를 계승하며, 이를 앞으로 더욱 발전시켜 질적으로 심화시키는 일에 함께 나선다. 따라서 사회민주주의는 단호하게 자본가 또는 사용자에 맞서 싸우는 노동자 또는 피고용자의 편에 선다.
그렇지만 사회민주주의는 노동자 중심주의(labourism)가 아니며 노동자성을 배타적으로 중시하거나 신성시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노동자 계급 속에는 주부와 어린이, 청소년, 대학생과 청년구직자, 장년 실직자와 노인 등 다양하고 폭넓은 미취업 내지 비취업 계층이 포함되며, 사회민주주의의 임무는 취업 노동자만이 아니라 이들 다양한 비노동 계층을 포함한 노동 계급 전체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사회민주주의는 오직 노동을 통해서만 자신의 생존을 지탱할 수 있는 자영업자와 농민을 포함하는 모든 근로 계층의 이익을 차별 없이 중시한다.
또한 사회민주주의는 노동 영역을 뛰어넘는 총체적인 삶의 충실화와 내실화를 목표로 삼으며 노동의 소외만이 아니라 총체적인 삶의 영역에서 소외를 극복하고자 한다. 즉 사회민주주의는 온전한 인격체로 태어난 모든 개개인들이 요람에서 무덤까지 충실한 삶을 사는 것에 관심을 갖는다. 이런 점에서 사회민주주의 정당은 노동자만의 정당, 노동계급만의 정당에 머무를 수 없으며, 국민정당을 지향한다.
여가 및 문화 전략
우리가 지향하는 미래의 복지국가는 비시장적인 다양한 여가 활동이 노동과 자본만큼이나 중시되는 사회이다. 더구나 다가오는 지식기반 경제에서 충실한 여가 및 문화 활동은 경제가 원활하게 작동하기 위한 핵심적인 지식 요소이다.
문화·예술 및 과학?인문에 관한 풍부한 관람과 독서·토론, 그리고 스포츠와 레저를 통해 정신적, 육체적으로 건강하게 양성된 수백만, 수천만의 새로운 창의적 세대를 새로이 만들어내지 않는다면 새로운 창조적 경제를 구축할 수 없다.
사회민주주의는 문화와 예술, 과학과 인문, 스포츠와 레저 등 다양한 여가 활동을 상업성과 수익성이라는 자본주의적 시장 가치에 종속시키려는 경향을 비판하며, 국가와 지역의 사회공동체 영역 전체에서 비상업적인 문화와 예술, 과학과 인문, 스포츠와 레저 등 다양한 여가 활동이 융성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나선다.
또한 문화와 예술, 과학과 인문, 독서와 스포츠와 레저 등의 영역에서 다양한 공익적 프로그램과 시설을 구축하는 것은 그 자체 매우 중요한 공교육 인프라 구축이다. 사회민주주의는 청소년과 성인을 위한 공교육 및 평생교육 체계가 학교와 대학의 울타리를 넘어 전사회적, 전국가적 네트워크로서 구축되어야 한다고 요구한다.
따라서 사회민주주의는 이렇듯 중요한 여가 및 문화 생활의 탈상품화 및 공공 인프라 구축을 위해 민주공화국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보며, 그러한 민주공화국이 바로 고차적인 복지국가 즉 문명국가라고 생각한다.
다른 한편, 다양한 여가 및 문화 활동을 시민들이 스스로 조직화 하는 것은 그 자체 참여민주주의의 발전에서 중요한 축이 된다. 따라서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자신이 거주하는 곳, 근무하는 곳에서 다양한 여가·문화 활동의 조직화에 적극적으로 나선다.
또한 사회민주주의자들은 그러한 여가 활동의 양적 확대와 질적 제고를 위해서도 노동시간 단축이 필수적임을 인식하며, 또한 국가 및 지자체의 재정적, 행정적 지원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인식한다. 따라서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다양한 여가·문화 활동의 획기적 발전을 위해서도 노동시간 단축 등 노동민주주의와 함께 보편적 복지 국가의 발전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이를 위해 나선다.
성장과 복지의 선순환 전략
올바로 실천된 사회민주주의는 복지와 경제성장의 선순환적인 나선형 발전을 실현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선순환은 형식적 자유, 형식적 평등만을 중시하는 자유주의를 넘어 실질적 자유, 실질적 평등을 실현시키는 주요한 고리가 될 수 있다.
우리는 ‘분배 없는 성장’ 또는 ‘고용 없는 성장’을 비판하는데,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경제성장 그 자체를 금기시하지는 않는다. 또한 경제성장은 적절한 방법으로 추진되는 한, 복지제도 확충의 필요조건이기도 하다.
오늘날은 각국과 세계적 차원에서 기업과 산업의 끊임없는 구조조정과 산업고도화가 진행되는 시기이다. 유망한 산업과 직종·직업이 순식간에 사양 산업으로, 사양 직종·직업으로 되는 일이 다반사로 벌어진다. 그리고 이러한 산업 변화 속에서 노동자들의 삶은 극도로 불안정해진다.
자유주의자들은 자유로운 기업 활동(시장)과 유연한 노동시장만 보장되면 사라지는 산업과 직종·직업을 대체할 새로운 산업과 일자리가 탄생·발전하므로 지속적인 성장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그들이 만든 비현실적인 경제 이론 속에서나 가능하며 현실에서는 입증되지 않는 허황된 주장이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자본 즉 기업 및 시장의 역동성을 존중하지만 그것이 ‘정치와 국가의 진공’ 상태에서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적 기업들의 역동적인 이윤추구 행위가 산업고도화로 이어져 일자리 창출과 국민경제의 발전에 기여하기도 한다.
그러나 높은 수익을 좇아 끊임없이 이동하는 본질적 속성상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과잉투자나 과소투자라는 시장실패를 촉발하기도 하고 더구나 비생산적인 부문에 투자가 집중되어 경제적, 금융적 재앙을 초래하는 경우도 많다. 심지어 생산적 투자가 잘 이루어져 산업이 고도화되는 경우에도, 자본-자본간 또는 자본-노동간 불균형으로 인해 경제적 혼란과 고용불안정 문제가 심각해지는 일도 많다. 또한 이러한 고용불안정을 두려워 한 노동자들이 자본이 보다 생산적인 부문으로 이동하는 것에 저항하여 국민경제의 발전이 저해되는 경우도 가끔 발생한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이런 다양한 문제점들을 스스로 해결할 능력과 수단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은 지난 200년간의 역사적 경험과 제이론에서 거듭 확인되고 있다. 자본과 시장에 대한 사회와 민주공화국의 개입과 통제, 규제가 필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즉 자본주의 시장 경제는 어디까지나 사회적, 국가적으로 통제되고 관리될 때만이 안정적인 성장과 역동성을 유지할 수 있다.
그리고 자본에 대한 사회적, 국가적 통제의 핵심적 장치들이 바로 금융시장 및 노동시장에 대한 통제와 함께 기업의 투자 행위에 대해 통제하고 지원하는 산업육성 정책 등이다. 따라서 사회민주주의는 자본에 대한 사회적, 민주공화적 통제보다는 시장적 통제, 시장규율을 더욱 중시하는 자유주의에 반대하며, 이는 진보적 자유주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무엇보다도, 역동적 경제는 역동적 노동을 필요로 한다. 즉 역동적 노동력의 풍부한 공급은 국민경제와 자본, 그리고 노동이 함께 발전할 수 있는 필수조건이다. 하지만 역동적 경제는 동시에 산업과 일자리의 끊임없는 구조조정과 함께 일자리와 소득의 불안정의 문제를 낳는데, 이 문제는 자본주의적 시장 스스로 해결할 수 없다.
사회민주주의는 복지국가적 개입을 통해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들이 그 휴지기 동안 기본적인 생계유지에 필요한 실직수당을 받을 수 있도록 하고(소극적 노동시장 정책), 나아가 그들이 보다 고도화된 산업 부문에서 보다 숙련된 노동자로 근무할 수 있도록 직무훈련 및 교육을 제공함으로써(적극적 노동시장 정책), 자본주의 경제의 역동적 성장을 보장한다.
대자본 및 금융자본에 대한 사회적 통제 전략
앞서 말했듯이 자본에 대한 통제, 특히 대자본에 대한 통제의 필요성이 우리나라에서는 ‘경제민주화’라는 말로 표현되고 있다. 그런데 대자본에 대한 통제 즉 경제민주화의 필요성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여기에는 자유주의의 입장과 사회민주주의의 입장이 크게 대립된다.
경쟁적 시장을 효율성과 생산성의 원천으로 보는 자유주의자들은 국가와 정부는 되도록 적게 시장에 개입하는 것이 좋고 또한 대기업과 대기업집단(기업그룹)의 역할 역시 적게 만들어 작은 기업들이 치열하게 경쟁하는 완전 경쟁 상태를 만들면 ‘시장 규율’ 즉 아담 스미스가 말한 ‘보이지 않는 손의 규율’이 작동하는 ‘공정하고 합리적인 시장’ 원리가 구현된다고 본다.
이에 반해 사회민주주의는 대자본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경제적으로 큰 역할을 하는 개입주의 국가가 필요하며, 더구나 대자본 즉 대기업 및 대기업집단에로의 경제력 집중이 후발공업국인 우리나라의 경우 산업과 업종에 따라 불가피하고 따라서 필요한 것은 대자본과 대기업집단을 잘게 쪼개는 것보다 어떻게 그것을 사회적으로, 민주공화적으로 통제할 것이냐 라고 본다. 사회민주주의는 한국경제에서 적어도 30대 재벌그룹은 반드시 사회적, 국가적으로 통제되어야 한다고 본다.

스웨덴 사민주의의 설계자 중의 한명인 비그포르스(사진 출처는 스웨덴 노동운동 아카이브)
물론 사회민주주의 역시 자유주의와 마찬가지로 30대 재벌그룹에서 발생하는 기업 이익이 소액주주들의 이익에 반하여 재벌 총수 일가에 의해 편법적으로 편취되거나 상속되는 것에 반대하며, 또한 대기업이 중소기업, 영세기업과의 불공정 거래를 통해 이윤을 부당하게 전유하는 것에 반대한다. 또한 30대 재벌그룹이 손쉬운 돈벌이를 위해 자영업이나 중소기업 업종이 영위하던 내수유통 서비스업에 진출하는 것에 반대한다.
그렇지만 자유주의와 달리 사회민주주의는 위와 같은 공정한 시장질서 창출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대재벌그룹들이 미래성장을 위한 생산적 투자와 양질의 일자리 창출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도록 하는 것이라고 보며, 이를 위해서는 민주공화국이 개입하여 대기업 및 대재벌그룹으로 하여금 적극적이고 과감하게 미래산업 육성과 일자리 창출에 나서도록 하면서, 동시에 생산적 투자를 억제하는 투기적인 주주자본주의, 금융자본주의를 강력하게 통제하여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사회민주주의는 지난 1960-90년대의 30여년간 국민들의 세금과 땀을 통해 키워낸 30대 대재벌그룹은 사실상 국민의 것, 사회의 것이며, 따라서 재벌그룹의 소유권 역시 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주주와 투자자들에 속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회민주주의는 따라서 대재벌그룹의 소유권 문제에 사회와 국가가 적극적으로 개입하여야 한다고 본다. 예컨대 상속세로 납부된 대재벌그룹 상속 지분을 국가가 계속 보유하거나 또는 공익재단이 보유하도록 하는 제도를 통하여 대재벌그룹의 소유권을 부분적으로 사회적 통제 하에 넣을 것을 사회민주주의는 요구한다.
또한 대자본 및 대기업집단에 대한 사회적 통제를 위해 사회민주주의는 국가적 통제만이 아니라 노동권과 노동조합의 권리를 대폭 향상시키고, 또한 종업원 전체를 대변하는 종업원 대표자들이 대기업 이사회 및 재벌그룹 그룹이사회에 참여할 것을 요구한다.
이러한 사회적 통제의 목적은 대재벌그룹과 그 계열사들이 재벌가족 및 주식투자자들의 이기적인 이익만을 위해 경영되는 것이 아니라 그 종업원들과 지역주민, 그리고 더 나아가 국민들 전체와 같은 중요한 사회적 이해관계자들을 위해 경영되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대기업과 재벌그룹들이 왕성한 생산적 투자를 통해 양질의 일자리를 대량으로 창출하고 산업을 고도화하며, 국민경제의 균형 발전에 기여하는 방향으로 경영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재벌그룹 대기업에서 발생하는 투자위험에 대해서는 ? 주식투자자가 아닌 ? 사회가 일정하게 분담하여야 한다.
또한 사회민주주의는 자유주의와 달리 금융시장과 자본시장을 사회적, 민주공화적으로 통제하는 것이 대자본에 대한 통제를 위해서도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따라서 사회민주주의는 중앙은행(한국은행)의 독립성을 주장하는 자유주의와 달리 중앙은행에 대한 사회적, 민주공화적 통제를 요구하며, 또한 증권시장과 은행권에서 나타나는 투기성과 금융거품 형성을 강력하게 규제하여야 하다고 본다.
그렇지 않다면 금융위기의 빈발과 함께 국민경제가 붕괴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태가 지난 1997년 우리나라가 겪은 외환금융위기이며 그리고 또한 2008년 가을 이래 전세계가 경험하고 있는 글로벌 금융위기이다.
중소자본 및 영세자본의 산업고도화 전략
대자본에 대한 사회적 통제를 요구하는 사회민주주의는 다른 한편 상대적 약자인 중소자본과 영세자본에 대해서는 사회적 통제와 함께 사회적, 국가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것이 바로 산업정책 또는 중소기업 지원 정책이라 불리는 국가개입주의이다.
이와 관련하여 오늘날 한국 경제의 핵심적 난제 가운데 하나가 과잉 팽창한 영세자영업이다. 먼저 이는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추진한 신자유주의적 시장개혁의 결과 대기업과 금융권, 공공부문에서 주주자본주의와 단기수익성 지상주의, 정리해고와 명예퇴직이 만연한 결과 수많은 퇴직자와 실직자들이 발생한 결과이다.
청장년 퇴직자와 실직자들이 새로운 양질의 일자리를 찾지 못하여 퇴직금을 쏟아 부으며 사업을 시작하지만 너무나 심한 과당 경쟁 속에서 창업자의 80%가 수년 내에 투자금을 날리고 파산한다. 더구나 대형마트와 같은 대자본이 손쉬운 돈벌이를 위해 가뜩이나 경쟁이 치열한 내수유통 서비스업으로 진출하니, 영세자영업자들의 처지는 더욱 극한적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다.
따라서 사회민주주의는 자유주의와 마찬가지로 대재벌그룹이 내수유통 서비스업에 진출하는 것에 반대하며, 그것을 국가가 강력히 규제하여야 한다고 본다. 그렇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며, 내수유통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영세자영업자들이 자발적 협동조합을 설립하여 규모의 경제를 통해 경영을 스스로 효율화하는 것이 필요하고, 그러한 협동조합화를 민주공화국이 행정적, 재정적으로 지원할 것이 필요하다.
사회민주주의는 소비자들 상공인들, 소농들이 자율적으로 결성한 협동조합의 역할을 확대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통제된 시장 경제를 만들어 나가기 위해 중요하다고 본다. 그리고 자율적 협동조합과 사회적 기업 등 다양한 ‘사회적 경제’가 발전하기 위해서도 민주공화국과 복지국가의 발전이 중요하며, 그래야만 비로소 자본과 시장에 대한 사회적 견제·통제가 가능하다고 본다.
한편, 자유주의 경제사상은 창업을 자본주의적 기업가 정신의 발로로 보면서 적극 장려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와 달리 사회민주주의는 영세자영업의 경우 창업을, 따라서 창업에 나서는 사람들의 숫자를 최대한 억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며, 그러기 위해서는 대기업과 금융권, 공공부문에서의 정리해고 및 명예퇴직 행태를 민주공화국이 강력하게 규제하여야 한다고 본다. 또한 이들 대기업 및 금융권, 공공부문에서 정규직 고용의 확대와 정년 연장을 요구하는 법제도들의 도입이 매우 시급하고, 또한 이를 위해서도 이들 부문에서의 주주자본주의와 단기수익성 추구를 강력하게 규제해야 한다고 본다.
또한 이미 창업한 영세자영업자들을 위한 사회복지가 매우 취약하다는 점을 고려하여 그들을 위한 복지제도를 새로이 확충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퇴직자와 실직자들이 굳이 무리하게 창업하지 않아도 최소한의 생존이 가능하도록 고용보험과 복지제도를 통한 일반적인 사회안전망을 더욱 충실하게 할 것이며,
또한 새로운 창업 또는 직업전환을 하더라도 제대로 준비하고 대비할 수 있도록 민주공화국이 양질의 직업교육을 무상으로 제공할 것을 요구하여야 한다. 또한 넓은 의미의 자영업자에 포함되는 농민의 경우, 그들까지 포함하는 보편적 복지의 확대와 함께, 제대로 된 자발적 협동조합을 활용한 규모의 경제 실현, 그리고 농업의 고부가가치화 및 유기농화 등등을 지원하는 각종 개입주의적 지원이 필요하다.
더구나 낮은 생산성의 중소기업과 영세자영업, 농업은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 인권유린과 인종차별의 온상이며 종업원들에게 종종 기본적인 사회보험도 적용하지 않는다. 따라서 자유주의와 달리 사회민주주의는 이들 부문에서의 열악한 노동환경에 주목하면서, 이들 사업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산업별, 지역별 조직화와 함께 최저임금의 인상, 근로감독의 강화, 사회보험의 보편적 적용을 요구한다.
즉 사회민주주의는 중소자본 및 영세자본에 대해서도 노동권과 복지권 보호를 위한 사회적, 민주공화적 통제가 필요하다고 보며, 또한 이것이 중소자본 및 영세자본의 생산성 향상과 산업고도화를 위해 필수적이라고 본다.
이렇듯 사회민주주의는 자유주의와 달리 영세자영업과 중소기업을 보호하고 그들이 서로 공정 경쟁하게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그들의 산업고도화 및 생산성 향상이 중요하고, 그것은 자유주의가 소중하게 여기는 합리적 시장이 아니라 강력한 개입주의 공화국, 보편적 복지 국가를 통해서만 이룩될 수 있다고 본다.
결론적으로 사회민주주의는 영세자영업자와 농민을 위해서도 필요한 것은 보편적 복지와 함께 대자본에 대한 사회적 통제, 그리고 투기적인 주주자본주의에 대한 통제라고 본다. 또한 영세자영업과 농업을 무조건 보호하고 지원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며, 무리한 창업과 진입을 억제하는 정책과 함께 그들의 자생력과 생산성, 효율성을 높이도록 요구하는 산업고도화 정책이 동시에 구사되어야 한다고 본다.
자본 즉 산업 및 기업에 대한 사회민주주의의 전략과 정책은 대기업과 중소·중견기업, 영세기업의 균형 있는 발전을 목표로 한다. 그리고 이러한 산업·기업 전략의 궁극적 목적은 자본이 자신만의 이기적 이익이 아니라 왕성한 생산적 투자를 통해 양질의 신규 일자리를 대량으로 만들어내고 미래 신기술을 개발하며 산업을 고도화하고 생산성을 높이는 것이다.
사회민주주의는 이것을 그 규모와 무관하게 모든 종류의 자본에게 요구하는 바, 이러한 요구는 자본에 대한 사회적 통제의 궁극적 목표이기도 하다. <계속>

민주공화국을 포함한 일체의 국가의 역할을 불신하는 아나키즘과 달리, 사회민주주의는 국가와 정치를 통해 사회와 인류가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는 믿음에서 출발한다.
민주공화국은 기업과 시장을 통제하고 조정하여 관리하고, 국민 개개인의 기본적인 생활을 보장하며, 때때로 조건이 조성되면 계급들 간의 타협을 주선하여 사회의 안정을 이룩해낼 수 있다. 따라서 민주공화국은 사회민주주의적 실천의 강력한 수단이다.
더욱이 우리가 사회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는 사회적 단위 또한 현재의 역사 발전 단계에서는 국민국가밖에 없다. 따라서 자본 즉 기업과 시장에 앞서 사회공동체를 더욱 중시하는 사회민주주의는 국가공동체를 중시한다.
그러므로 사회민주주의 정치의 성공 조건 중 하나는 국가에 대한 국민의 신뢰이다. 그러나 21세기 초 현재 우리나라의 국가는 여전히 불신의 대상이다. 지난 수십 년 간 이 나라의 국가는 국민들을 보수주의 및 자유주의 정권들을 위한 한갓 경제자원으로 동원하는 도구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자신이 수행해야 할 과제 중 하나를 ‘국가에 대한 신뢰의 회복’과 함께 ‘강력한 국가’, ‘큰 국가’의 구축으로 삼는다.
그러나 당연히 사회민주주의는 전제적이고 폭압적인 국가에 반대한다. 강력할수록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국가는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다. 우리가 원하는 강력한 국가, 강력한 민주공화국은 개개인들을 다양한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곤란, 사회적 핍박으로부터 해방시켜 그들을 더욱 강력한 인격체, 즉 실질적으로 자유롭고 평등한 인격체로 만드는 그러한 국가, 해방적 국가공동체이어야 한다.
사회민주주의는 포스트모더니즘 및 아나키즘의 생각과는 달리 그런 민주공화국을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사회민주주의에 있어 민주공화국은 자본주의를 통제하고 관리하여 사회공동체의 연대성과 개개인의 인격적 존엄성을 보존하고 더 높은 수준으로 고양시키는 핵심적 장치이다. 물론 이러한 민주공화국은 사회민주주의가 선언한다고 해서 당장 구현되는 것이 아니다.
민주공화국의 실현을 위해서는 여러 정치 세력들 간의 견제와 균형이라는 고전적 조건 이외에도, 대의제 민주주의의 충실화와 함께 직접민주주의, 참여민주주의의 확산과 내실화 등이 동시에 진행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대의제 민주주의와 직접민주주의, 참여민주주의의 확대 그 자체만으로는 형식적 민주주의 즉 자유주의적 민주공화국에 그칠 수 있다.
따라서 사회민주주의자들은 한편으로는 다양한 민주주의의 확대를 위해 나서야 하지만,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자유주의자들이 간과하는 자본에 대한 사회적 통제와 보편적 복지 및 노동민주주의, 그리고 여가 활동의 양적, 질적 확대 등 다양한 차원의 ‘실질적’ 민주주의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사회민주주의와 의회민주주의, 직접민주주의, 참여민주주의
사회민주주의는 민주공화국의 대의민주주의와 직접민주주의, 그리고 시민사회의 참여민주주의가 상호 보완적 역할을 하여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현 시기 우리나라에서 일차적으로 중요한 것은 대의민주주의적인 민주공화국의 구축이며, 이 나라의 정치 공간에서 대통령과 국회, 정당이 자신의 고유한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국민의 정치적 의사가 충실히 반영되도록 현재의 소선구제를 개혁하여 비례대표 의원의 숫자를 획기적으로 늘려야 한다.
그렇지만 만약 국회와 정당 정치가 대의민주주의의 올바른 역할을 방기한다면 대중이 직접 거리로 나서 주요한 정치적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하는 직접민주주의적 방식 또한 유효하다.
정당의 운영과 관련해서도 특정인이 독점적으로 대의원이나 당직자가 되는 것을 방지하고 모든 당원의 적극적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대의원 및 당직자 추첨제 같은 제도를 확산해야 할 것이다.
또한 인터넷의 발전에 의해 가능해진 참여민주주의 공간의 폭발적 성장은 민주주의 공화국의 대중적 기반을 더욱 든든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형식적 민주주의를 넘어 실질적 민주주의를 달성하려고 하는 사회민주주의의 경제적, 사회적 목표들은 국회와 대통령을 포함한 기존의 정치 제도와 정당 정치만으로는 실현될 수 없다.
제도권 정치와 정당 정치가 다루기 힘든 다양한 사회운동적, 시민운동적 과제들이 있으며 이 영역에서 시민사회의 역할이 증대하여 참여민주주의가 성장하고 있다는 점을 우리는 인식한다.
특히 사회민주주의가 추구하는 복지국가 전략의 실행을 위해서는 도시와 농촌, 아파트와 마을 등의 기초 단위에서 보육과 급식, 도서관과 청소년 교육, 주택과 의료, 노인요양, 그리고 여가·레저 활동의 조직화 등 다양한 생활복지 현안들을 이끌어가는 자발적인 시민적 결사체와 지방자치 참여자들이 성장하고 이들이 자발적으로 사회민주주의 정당과 결합하고 협력하는 것이 중요하다.
비정규직 차별 금지와 노동시간 단축, 고용안정을 위해 활동하는 다양한 노동조합 및 노동단체들의 역할 역시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이들 자발적 결사체의 가치관과 정책이 사회민주주의와 일정하게 불일치하는 경우도 종종 있을 것이나, 그 경우 서로의 자율성을 존중하면서 사안별로 협력해야 한다.

사회민주노동당 소속의 페르 알빈 한손 스웨덴 총리(왼쪽 시계방향으로 여섯 번째)가 1939년 스톡홀름 왕궁에서 구스타프 아돌프 왕자(일곱 번째)의 주재로 회의를 하고 있다. 출처는 위키피디아.
스웨덴과 덴마크 등 사회민주주의 정치의 모범 사례가 보여주는 바와 같이 참여민주주의의 확산은 사회민주주의의 비옥한 토양이다. 시민사회 각 영역의 다양한, 그리고 서로 차이나는 자율적 공론들을 존중하면서, 그것들을 연대적으로 집약하여 복지국가 전략으로 연결시킬 때만이 비로소 사회민주주의는 모든 저항을 물리치고 원하는 사회를 창조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사회민주주의는 전국가적 연대의 결과인 바, 그 정책 또한 시민적 연대 위에서만 성공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렇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정치적 민주주의가 완성되었다고는 볼 수 없으며 지방정치의 경우 더욱 그러하다. 그리고 점점 개선되고는 있으나 여전히 이것이 정치권력과 유착된 각종 특권과 반칙, 부정부패를 낳는 핵심 요인이 되고 있다.
자유주의자들은 특권과 반칙을 없애고 권력의 부정부패를 방지하여 공정국가, 공정사회를 실현하려면 ‘투명한 (자유) 시장’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에 반해 사회민주주의는 공정한 국가, 공정한 사회를 구현하려면 민주공화국의 더 많은 개입주의가 요구되며, 투명한 시장보다 더 소중하고 필수적인 것은 ‘투명한 국가’라고 말한다. 투명한 국가란 국가의 모든 행위와 활동에 관한 정보를 비밀 없이 공개하는 국가, 그리하여 시민들로 하여금 국정에의 자발적 참여를 유도하고 언제든지 국정을 감시·비판하고 견제·통제하도록 권장하는 국가이다.
그리고 투명한 국가는, 모든 선진국에서 그러하듯이, 자유주의자들이 강조하는 ‘시장원리’ 강화가 아니라, 오로지 민주주의의 강화를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 왜냐하면 국가개입이 강화될수록, 그 국가개입의 목표와 효과에 대한 시민들의 감시와 견제, 통제가 강화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회민주주의가 국가개입을 강조할 때 그냥 국가개입이라고 하지 않고 민주공화주의적 개입이라고 표현하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강한 국가개입에도 불구하고 북유럽 나라들에서 정치권력과 유착된 반칙과 특권, 부정부패가 거의 없는 것은 이렇듯 국가 투명성과 다차원적으로 전개되는 민주주의 덕택이며, 따라서 그 국가들이 형식적·절차적 민주주의를 넘어 실질적·내용적 민주주의를 담보하는 고차적 복지국가, 고차적 민주공화국이기 때문이다.
이념과 진리의 다양성에 대한 승인과 사회민주주의자의 삶
사회민주주의는 시장절대주의와 혁명적 공산주의, 종말론적 생태주의 등 다양한 근본주의(fundamentalism)를 모두 거부한다. 이는 무엇보다도 이러한 다양한 근본주의가 현실 세계라는 매개를 거치지 않은 채 순수 이념을 곧바로 대안으로 제시함으로써 그 자체 폭력적 성향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견해들의 정치적 시민권을 인정하며 특히 그 사상들이 보편적 가치를 지향하는 한 어떤 이유에서건 억압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사회민주주의는 모든 이념은 상대적으로만 진리라는 명제를 받아들이며 그러므로 지난날 공산주의와 달리 스스로를 절대선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또한 사회민주주의자들은 한 사회는 이념을 달리하는 다양한 이해집단과 정치세력들로 구성되며 이들은 각자 나름대로의 존재가치와 진리성을 가진다는 것을 인정한다.
따라서 사회민주주의 역시 다양한 이념 혹은 정치세력들 중 하나에 불과한 바,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절차적 민주주의를 존중하며 절차적 민주주의를 존중하는 한 다른 이념과 정치세력을 정당한 경쟁상대로 인정한다. 그러므로 사회민주주의가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는 유일한 방법은 사회적 합의의 결과인 민주주의적 절차를 따르는 것이다.
민주주의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확인하자. 민주공화국은 자본주의를 통제할 잠재력이 있으며, 따라서 민주주의는 자본주의 시장에 비해 사회적 의사결정의 보다 진보한 방식이다. 소련 등에서 국가사회주의의 역사적 실패 경험은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없애고 더구나 민주주의도 하지 않을 경우 역사의 퇴보가 나타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시장이 다양한 제품의 경연장이듯이 민주주의는 다양한 생각의 경연장인 바, 다양한 견해와 다양한 의제, 지향성, 가치관이 충돌하고 소통하는 공간이 바로 민주공화국이다.
사회민주주의가 지향하는 미래 사회란 다양성이 보편성의 기초 위에서 꽃피움으로써 보편적 소통의 조건을 갖추어 나가는 곳이며, 따라서 사회적 갈등이 적대적으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이해와 배려로 귀결되는 공동체 사회이다. 따라서 민주주의는 사회민주주의의 수단이자 그 자체 목표이기도 하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은 공적 활동에서 뿐 아니라 개인적 삶에서도 사회민주주의적 가치를 실천하는 모범을 보여야 한다. 권위주의와 패거리주의, 배타적 민족주의 의식을 가진 사람이 진보주의자일 수는 없다.
견해를 달리하는 사람과 공존하고 대화하며 소통할 능력을 갖지 못한 사람이 사회민주주의자가 될 수는 없다. 사회민주주의자가 완고해야 한다면 그것은 오직 민주주의의 원칙을 고수할 때 만이다.
사회민주주의의 기본 가치를 포함한 어떤 가치나 정치적 행위도 일방적으로 강요되는 ‘독재적 계몽’이 되어서는 안 된다. 자율적이고 자발적인 동의에 기초한 합리적 설득만이 국민의 정치적 능력을 높이 고양하여 민주주의 공화국으로서의 대한민국을 더욱 든든하게 만들 수 있다.<끝>
 
 
출처
http://www.redian.org/archive/category/news/%EC%82%AC%ED%9A%8C%EB%AF%BC%EC%A3%BC%EC%A3%BC%EC%9D%98-%EC%84%A0%EC%96%B8 
http://wemakestar.com/bbs/board.php?bo_table=busan_bbs&sca=&sfl=wr_subject&stx=%EC%82%AC%ED%9A%8C%EB%AF%BC%EC%A3%BC%EC%A3%BC%EC%9D%98+%EC%84%A0%EC%96%B8&sop=and&x=-1040&y=-658
 
 
 
미선 (13-06-20 07:57)
 
http://www.redian.org/archive/49551

<몸학사회주의>를 표방한다고 했을 때 아무래도 현재의 노선들 중에
가장 가까울 수 있다고 보는 건 <사회민주주의> 노선이라고 생각한다.
어차피 우리 모두는 문화와 이데올로기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행여라도 자신을 가치중립적 존재라거나 순수 자유 존재라고 여기는 건 오히려 무지와 착각과 기만에 불과한 것이다. 몸의 심층에 속하는 W층에 대한 자각을 갖는 이들은 거의 드물며, 대부분은 자신이 속한 그 사회와 문화의 지배 체제에 구속되어 있다. 이미 루이 알튀세르의 <호명> 개념을 아는 분들이라면 오히려 우리 자신들은 체제 이데올로기를 대리하는 대리자로 불려지기도 한다는 점을 잘 알 것으로 본다. 그것은 무의식적인 것이며, 의식에선 자유의지로 느낄 수 있지만, 실은 자유의지에 의한 것이 결코 아닌 것이다.

따라서 현시점에서 보는 가장 합리적인 체제와 이데올로기 노선을 선택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나는 그것이 현재로선 <사회민주주의>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에 대한 많은 논의들이 여전히 있어야 하지만
<사회민주주의>는 적어도 민주주의적인 절차와 방법으로 일궈나가는 사회주의 운동이라는 점에서
여전히 유효한 사회이념체제의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본다. 그런 점에서 위의 자료는
대한민국의 상황에 맞게끔 유효적절하게 기술된 좋은 자료라고 생각해서 올려놓는 바이다. 필독을 권한다.

P.S- 혹시 종교 영성을 추구하는 분들 중에 자신은 정치 경제 문제 같은
세속의 일에 결코 관여하지 않겠다는 식으로 나오는 분이 있다면
이는 그 자신의 몸의 W층을 망각하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
탈정치적 영성은 이미 영성도 아니며 그것은 그저 아편적 관념에 불과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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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민주주의(Social democracy) & 민주사회주의(Democratic socialism) (1) 미선이 10360 07-15
정치성향 자가 진단(*자신이 어디에 속하는지 직접 테스트 해보시길~^^*) (7) 미선이 17666 05-18
화이트헤드 철학의 사회학적 용용 개념 : <단위 행태>unit attitude 고찰 정강길 6600 09-21
81 <계급론>에서 <위계론>으로 미선 275 02-07
80 <차이 멸시>와 부정맥 유발 사회 미선 676 09-07
79 생물사회주의 혹은 지속가능한 <생물사회적 계약>이란? (2) 미선 688 09-01
78 기본소득 뉴스레터 미선 590 09-01
77 <병든사회>에서 <기본사회>로의 전환 미선 575 09-01
76 투표만으로는 부족하다! <국민권력> 시스템이 필요! 미선 929 04-13
75 기본소득 포럼 자료 미선 2173 06-02
74 갑을관계 민주화와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대안적 접근 (최병천) 미선 2307 03-08
73 사회민주주의를 소개하는 간단한 동영상과 읽어볼만한 책들 미선 2279 01-15
72 [한국경제 담론의 지형] 경제민주화론 VS 복지국가론, 과연 얼마나 같고 다를까? 미선 2441 11-28
71 나름대로 괜찮다고 할 수 있는 경제정책들 미선 2035 11-26
70 사민주의와 근본주의.. 미선 2341 11-11
69 "기본소득은 일용할 양식이다"-기본소득의 기독교적 검토(강원돈) 미선 2645 09-05
68 <복지자본주의>를 통해 <민주사회주의>로 나아가야 미선 3330 09-03
67 노벨경제학 수상자들도 경제학을 비판하고 있다 / 레디앙 미선 3322 08-27
66 독일의 정치 정당 소개와 정치 문화 (조성복) 미선 2730 08-24
65 <노동> 개념의 한계.. <노동중심성>에 대한 회의.. (1) 미선 4016 06-26
64 새로 나온 정치 성향 테스트입니다. 미선 4337 06-05
63 <사회민주주의 기본소득론>은 가능한가? (2) 미선 2756 04-16
62 <사회민주주의 기본소득론>은 가능한가? (1) 미선 3013 04-12
61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오해 미선 3723 04-11
60 "직접 민주주의는 더 좋은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 중 하나" (대담 브루노 카우프만 박… (1) 미선 4490 04-08
59 윤도현 교수의 “사회민주주의란 무엇인가” 강연 후기 미선 3645 02-18
58 왜 사회주의인가? (WHY SOCIALISM?) / 알버트 아인슈타인 미선 4130 01-19
57 기존의 주류 경제학의 한계와 세테리스 파리부스 미선 3926 12-26
56 경제학은 근원적으로 새롭게 변해야 한다! 미선 4763 12-24
55 [BIEN/해외동향] 2013년 비엔 뉴스레터-'브라질' 기본소득 관련 글들 미선 3216 12-21
54 "생존은 기본! 복지는 권리! 세금은 연대!" (1) 미선 3183 12-02
53 살림살이 경제학의 홍기빈 소장 강연 내용과 후기 미선 3594 11-05
52 낯선 진보의 길, 그러나 국민 속으로 들어가는 길 미선 3219 11-01
51 <사회적 가치>와 <경제적 가치>의 분리적 불행의 비극 미선 3266 10-18
50 기본소득론 연구 (3) 기본소득에 대해 더 많이 알 수 있는 자료들 (1) 미선 3386 10-01
49 기본소득론 연구 (2) 그 효과와 장점 그리고 단점 미선 3990 09-29
48 기본소득론 연구 (1) 미선 3885 09-29
47 민주주의를 다시 생각한다.. 미선 3358 09-24
46 <노동 중심성>에서 배제되는 <그림자 노동> 문제.. (2) 미선 4505 09-20
45 [펌] “기회균등에 더해 결과의 평등도 강조” “사회·경제민주화에 가장 적합한 이… 미선 3577 09-02
44 마르크스주의 해석에 대한 강신준 김성구 두 교수의 논쟁 (5) 미선 4539 08-14
43 [펌] ANT 이론가 브루노 라투르 인터뷰 기사 (1) 미선 4438 07-02
42 [필독] <사회민주주의> 선언 (조원희, 정승일 / 홍진북스) (1) 미선 8144 06-20
41 [펌] 마이클 샌델 교수 인터뷰 내용과 독자들과의 토론 내용 미선 3865 06-09
40 (자신의 정치성향 자가진단) 폴리티컬 컴퍼스 모델 설문 (2) 미선이 8025 08-31
39 [초강추!] 한국사회를 너무나 깊고 예리하게 잘 분석한 눈부신 통찰의 글!!! (3) 미선이 5350 11-21
38 사회민주주의(Social democracy) & 민주사회주의(Democratic socialism) (1) 미선이 10360 07-15
37 정치성향 자가 진단(*자신이 어디에 속하는지 직접 테스트 해보시길~^^*) (7) 미선이 17666 05-18
36 美 아르코산티ㆍ日 야마기시…세계 8대 유토피아 도시 (1) 미선이 7091 04-19
35 “부동산 거품 붕괴, 이제 시간문제일 뿐” - 한겨레 (2) 마루치 6448 07-30
34 노동 문제와 활력 넘치는 민주주의: 확장된 자아의 지평을 향하여 (더글라스 스텀) 정강길 5459 04-07
33 나눔 강조하는 새로운 실험, 공동체자본주의 관리자 6251 01-15
32 일상적 권력과 저항: 탈근대적 문제설정 (이구표) 정강길 6933 06-13
31 공동체 화페 (베르나르 리에테르) 정강길 7914 05-17
30 3. 한국사회 진보 100대 과제 만들자 (박래군) (필독~!!) 정강길 5778 02-25
29 2. 권력재편기에 진보세력은 무엇을 할까 (박래군) (필독~!!) 정강길 5702 02-25
28 1. 왜 진보운동의 새로운 기획인가 (박래군) (진보운동가들에겐 필독 권함~!!) 정강길 5809 02-25
27 [펌] 한국과 일본의 미래세대, 동북아시아 평화연대를 위해 하나 되는 길 (김민웅) 정강길 5752 01-07
26 [펌] "<자기해방>으로서의 사회주의야말로 가장 큰 희망" 알렉스 캘리니코스와… 정강길 5843 12-15
25 [펌] 밀턴 프리드먼이 남긴 '惡의 유산' 정강길 7171 12-01
24 [펌] 제국과 다중론은 미국식 자유주의에의 투항 (사미르 아민) 정강길 5511 09-21
23 맑스꼬뮤날레 참관기-고전적 맑스주의냐 자율주의적 맑스주의냐 정강길 5710 09-21
22 [펌] '제국'이 아니라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노동자계급의 반… 정강길 5557 09-21
21 [펌] 대안세계화와 한국 사회운동 정강길 6247 09-21
20 마르크스를 죽여야 마르크스가 제대로 산다..!! 정강길 6616 09-21
19 [펌]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의 차이점에 대해 정강길 15689 09-21
18 [자료] 노동의 문제와 활력이 넘치는 민주주의(더글라스 스텀) 정강길 5130 09-21
17 [펌]경제학자 스티글리츠의 '세계화가 가져온 불만-' 정강길 6447 09-21
16 화이트헤드 철학의 사회학적 용용 개념 : <단위 행태>unit attitude 고찰 정강길 6600 09-21
15 [기사] 자살률, 경제성장률.실업률과 밀접한 관련 정강길 7461 09-21
14 현대사회주의론 (김세균) 정강길 6923 09-21
13 [펌] 일상적 파시즘론의 공허함 (이구표) 정강길 6228 09-21
12 [펌] 세계적 석학 경제학자 스티글리츠-버그스텐 논쟁 정강길 6537 09-21
11 [펌] 미국의 제3세계 정책과 군사적 개입 (김세균) 정강길 7197 09-21
10 [펌]월러스틴의 세계체제 분석 - 拔本과 再構築의 변증법 (이수훈) 정강길 7677 09-21
9 [펌] 월드컵의 이면 : 축구공 만드는 아이들 (김선형) 정강길 8668 09-21
8 지구화 시대의 대안적 노동 세계에 관한 구상(강원돈) 정강길 6514 09-21
7 [기사] 세계 경제- 위기의 자본주의 두가지 '동력' (월든) 정강길 6291 09-21
6 [기사]세계 환경 유엔보고서, 지구위기상황 엄중 경고 정강길 6010 09-21
5 [펌] 제국논쟁 : 지구화와 민주주의 (마이클 하트) (1) 정강길 7229 09-21
4 [펌] 경제학 인터뷰 정강길 6099 09-21
3 [펌] 한미FTA, 노무현 정부의 자살인가 이일영 6863 05-08
2 [펌] 새로운 문명과 한국의 사회운동 이시재 5858 05-08
1 문명의 ‘충돌’과 ‘공존’ 이현휘 7819 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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