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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성서, 윤리적이지 않다 (민경식)    
  글쓴이 : 관리자 날 짜 : 07-01-07 02:58 조회(10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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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기독교사상에 연재되고 있는 글입니다. 2006년 12월호)
 
 
성서, 윤리적이지 않다!
 
 
 들어가는 글
 
성서를 읽다보면, 간혹 난감할 때가 있다. 앞뒤의 문맥이 맞지 않을 때 그럴 수 있고, 내용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을 때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난감할 때는 양심에 비추어 성서의 “말씀”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을 때이다. “말씀”이 비윤리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성서에 대한 몇 가지 오해 가운데, 기독교인들은 성서가 과학적 지식이나 실증적 역사를 완벽하게 알려주는 절대적인 책이라고 오해하는 경향을 보이는 반면에, 비기독교인들은 성서를 훌륭한 윤리교과서로 보려는 경향이 있다. 20세기 중엽의 저명한 수학자이자 철학자이며, 또한 노벨상 수상자이기도 한 러셀은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라는 책에서 예수의 행위가 비윤리적이라는 이유로, 자신은 기독교인이 될 수 없다고 선언하였다. 아래에 소개될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예수가 저주한 사건을 두고 하는 말이다.

다말이 시아버지(유다)에게서 “씨”를 받아 자손을 잇게 된 이야기(창 38:1-30)라든지, 엘리사가 자신을 “대머리야, 꺼져라. 대머리야, 꺼져라!”하며 놀리는 아이들을 저주하자 숲속에서 곰 두 마리가 나타나서 마흔두 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찢어 죽인 이야기(왕하 2:23-25) 등을 읽다보면, 어떻게 성경에 이렇게도 비윤리적인 내용이 있는지 의아해할 수 있다. 아가서의 애정표현 역시 점잖지 못하고 지나치게 자극적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구약의 보도들은 일단 뒤로 하고 신약에 나타나는 비윤리적으로 “보이는” 단락들을 몇 군데 살펴보도록 하겠다.

무화과나무에 대한 예수의 저주

12 이튿날 그들이 베다니를 떠나갈 때에, 예수께서는 시장하셨다. 13 멀리서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시 그 나무에 열매가 있을까 하여 가까이 가서 보셨는데, 잎사귀 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무화과의 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14 예수께서 그 나무에게 말씀하셨다. “이제부터 영원히, 네게서 열매를 따먹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제자들이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다. … 20 이른 아침에 그들이 지나가다가, 그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말라 버린 것을 보았다. 21 그래서 베드로가 전날 일이 생각나서 예수께 말하였다. “랍비님, 저것 좀 보십시오, 선생님이 저주하신 저 무화과나무가 말라 버렸습니다.”
(《새번역》 마가복음 11:12-14, 20-21)

이 이야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13절의 마지막 부분이다. “무화과의 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혹시나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따먹을 수 있을까하여 가보았는데, 아무 것도 없었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그렇지, 아직 열매를 맺을 철도 아닌데, 열매가 없다고 해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는 예수의 처사가 너무 심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기 쉽다. 자기의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고 무책임하게 화를 내는 비윤리적인 행위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본문을 “윤리적인 시각”으로 해석하려다 빚어지는 오류이다. 그렇다면 이 본문이 말하려는 것은 무엇인가? 먼저 마가복음서 전체적인 맥락뿐만 아니라, 이 이야기와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인접문맥 가운데에서 이 단락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무화과나무를 저주한 사건은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시고 이튿날 벌어진 사건이다. 예루살렘 입성! 마가가 전하는 예수 이야기가 절정으로 들어서는 순간에 보도되는 사건이 바로 예루살렘 입성이 아닌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치며, 갖가지 이적을 “주변”에서 행하신 예수께서 이제 구속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일을 행하실 “중심”으로 이동하셨다.(막 11:1-11) 이때 행하신 사건이 바로 무화과나무에 대한 저주이다.

무화과나무를 저주한 이야기는 두 부분, 마가복음 11장 12-14절과 20-21절로 나뉘어 있는데, 소위 “성전 청결 사건”이라고 하는 이야기가 이 사이에 끼어있다.(막 11:15-19) 그러므로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 벌어진 이 사건은 무화과나무 저주 사건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예수께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의미를 이해하기에 앞서 이 사건을 먼저 살펴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성전 안에서 일어난 이 사건은 예수께서 성전을 깨끗하게 하신 것이 아니다. 무엇을 깨끗하게 한다면, 그것을 다시 잘 활용하기 위해서이다. 예수께서 성전을 깨끗하게 정화하셨다면, 깨끗해진 성전이 성전으로서의 기능을 더욱 잘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예수는 성전의 기능을 회복시키는 일에 관심이 없다. 아니, 오히려 성전의 기능을 마비시키셨다. “성전 뜰을 가로질러 물건을 나르는 것을 금하셨다.”(막 11:16) 여기서 “물건”으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종종 제사용 집기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는 단어이다. 히브리서 9장 21절에서 “제사 의식에 쓰이는 모든 기구”를 표현할 때, 같은 단어가 쓰였다. 그러므로 여기서 예수는 성전을 정화하여 그 기능을 회복시킨 것이 아니라, 성전 제사용 기구를 이동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성전의 제의적 기능을 마비시킨 것이다. 따라서 이 이야기의 제목을 “성전 청결 사건”이라고 하는 것보다는 “성전의 제의적 기능에 종식을 선포하는 사건”이라고 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더군다나 무화과나무가 말라버렸다는 보도(막 11:20-21) 뒤에는 예수께서 다시 성전에 들어가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여기에 보면, 성전 뜰에서 거니는 예수께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과 장로들이 다가와서는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합니까? 누가 당신에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습니까?”(막 11:27-28) 하고 묻는다. 도대체 성전 뜰을 거니는 데 무슨 권한을 얻어야 한다는 말인가? 성전에서 장사를 하는 것도 아니고, 공식행사를 치르는 것도 아닌데, 무슨 권한이 필요한가? 그러므로 예수의 적대자들이 위에서 말하는 “이런 일”이란 성전 뜰을 거니는 일로 이해하기는 힘들다. 이 장면의 마지막 부분에서 예수께서는 “나도 내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를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막 11:33)고 하셨다. 여기서 말하는 “이런 일” 역시 성전 뜰을 거니는 일일 수 없다. 그것은 전 날 성전에서 행하셨던 사건(막 11:16)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즉, 성전에서 기물 나르는 것을 금지함으로써 성전의 제의적 기능에 종식을 선포한 행위를 가리키는 것이다.
 
예수의 적대자들은 예수가 성전 뜰을 거니는 것을 예삿일로 보지 않았다. 전 날에 이어 성전 뜰을 거닐며 제사용 기물을 나르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 이해한 듯하다. 그러니 이것은 “성전 저주 사건”이다. 예수께서 의회 앞에 끌려가 신문을 당할 때도 예수에 대한 고발은 “성전 모독” 아니었던가!(막 14:58) 이 일련의 사건들은 예수께서 고난을 당하기 위해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는 결정적인 순간에 일어난 사건들로, 이 “때”는 구속사적으로 중대한 전환점이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무화과나무에 대한 저주를 읽어야 할 것이다.

유월절을 눈앞에 두고 있으니, 시기적으로는 3-4월이다. 무화과나무는 7-8월 한여름이 되어야 잎사귀가 무성해지고 열매를 맺기 때문에, 당시로서는 도저히 열매를 기대할 수 없는 때이다. 하지만 또한 잎사귀도 무성해서는 안 된다. 잎이 무성하다면 당연히 열매도 있어야 하는 게 바로 무화과나무이다. 하지만 예수가 저주한 무화과나무는 잎만 무성하고 열매가 없는 나무였다. 그런데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과 유대교를 상징하기에, 우리는 이 이야기를 통해서 잎만 무성하고 열매를 맺지 못하는 유대교를 저주하시는 예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예수는 겉만 번지르르하고 내실이 없는 유대교를 비판하시는 것이다. 아니, 더 나아가 예루살렘 입성과 함께 성전 종교의 종식을 선언하는 것이다. 이제 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유대교의 시대가 막을 내린다는 메시지를 행동으로 선포하신 것이다.

그런데 종말론적이고 구속적인 이 사건의 의미를 윤리적인 시각으로 해석하려니, 잘못 이해할 수밖에 없다. 마가복음의 “무화과나무 저주 사건”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찍어버리려는 주인의 모습이 그려지는 누가복음서의 보도(눅 13:6-9)와는 분명히 다른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복음을 위하여 가족을 버려라!(막 10:23-30)

십계명에 나오는 “부모를 공경하라.”(출 20:12, 신 5:16)는 말씀은 기독교인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친숙한 윤리 조항이다. 신약에서도 이 말씀이 강조된다. “자녀된 여러분, 모든 일에 부모에게 복종하십시오.”(골 3:20, 또한 엡 6:1, 딤전 5:4 등 참조) 그런데 이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자아내는 단락들도 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위하여, 또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녀나 논밭을 버린 사람은, 지금 이 세상에서는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논밭을 백 배나 받을 것이고, 오는 세상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새번역》 마가복음 10:29-30)

예수께서는 자신을 따르기 위해서는, 또 오는 세상에서 백배나 되는 복과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가족을 버리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과연, 우리의 유익을 위해 우리 가족을 버릴 수 있는가? 아브라함은 자신이 하나님의 명령에 잘 따름을 드러내 보이기 위해 뒤늦게 얻은 귀한 아들인 이삭마저도 죽이려고 하였다.(창 22:1-19) 입다는 하나님께 서약했다는 이유로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자신을 가장 먼저 맞으러 나온 외동딸을 죽이고야 말았다.(삿 11:29-40) 우리에게 그러한 용기가 있는가? 아니, 이것은 혹시 광란과 만용의 잔치가 아닌가? 오히려 가족의 안녕과 복지를 위해 자기 한 몸 희생하는 것이 우리네 미덕이 아니던가! 아들 야곱과 함께 남편 이삭을 속이는 모험을 계획하던 리브가가, 축복은커녕 저주를 받게 되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야곱에게 했던 말이 우리의 마음을 울린다. “아들아, 저주는 이 어미가 받으마. 내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창 27:13) 이런 대목에 오면, 모든 재산을 버리라는 예수의 가르침은 오히려 쉬워 보인다.(마 19:16-30, 막 10:17-31; 눅 18:18-30)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이냐는 어떤 부자의 질문이 부모형제마저 버리라는 이 이야기(막 10:29-30)의 배경이 된다. 어려서부터 율법의 계명들을 잘 지키던 부유한 사람이 있었다.(막 10:20) 그는 예수께 와서는 무릎을 꿇고는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하고 묻는다.(막 10:17)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하시면서, “가서,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고 말씀하신다.(막 10:21) 하지만 영생은 이러한 윤리적인 행동에 대한 보상이 아니다. 예수의 궁극적인 관심은 그 다음에 이어지는 말에 나타난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극단적인 상황에서도 모든 것을 기꺼이 다 버리고 예수를 따르는 것이 영생의 조건이다. 여기서 “버리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버리지 않고서는 예수를 따를 수 없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예수를 위하여, 또 복음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을 예수는 요구하는 것이지, 결코 윤리적인 선행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가 가진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윤리적인 행동”은 영원한 생명의 조건이 아니라, 재산을 버리는 한 가지 방법에 불과하다. “나를 따르라.”는 예수의 궁극적인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우선 재산에 대한 소유욕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누가복음서에서 예수께서는 눈을 들어 자신을 따라 나선 제자들을 보시고 “너희 가난한 자들은 복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눅 6:20)고 말씀하셨다.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르는 추종자들, 아니 어쩌면 버릴 것 하나 없었던 그들, 그래서 홀가분하게 예수를 따라 나설 수 있었던 그들이 복이 있다는 것은 아닐까? 버려야 할 것을 버리지 못하고 미련에 갇혀 사는 부유한 사람들에 비하면, 버릴 것조차 하나 없는 가난한 자들에게는 기꺼이 예수를 따라 나설 수 있는 복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바로 그들에게 있기 때문이다.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를 따르고자 했는데, 그는 먼저 가서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난 뒤에 따르도록 해달라고 청하였다.(마 8:19이하; 눅 9:57이하) 그때 예수께서는 “너는 나를 따라오너라. 죽은 사람의 장례는 죽은 사람들이 치르게 두어라.”(마 8:22) 하고 말씀하셨다. 이것도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예수를 따르려는 사람들에게 가장 귀한 것마저 포기할 수 있는 자세를 요구하는 것이지, 결코 윤리적인 규범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이제 바울의 가르침을 살펴보자.

여자는 잠잠하라!
 
바울이야말로 기독교 역사에 가장 막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으로 바울을 싫어하는 기독교 안의 그룹들이 몇 있는데, 이 가운데 하나가 바로 여권운동을 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바울이 여성을 비하하였다고 주장하면서 그의 가르침을 배격하기도 한다. 대표적인 본문이 고린도전서 11장과 14장에 나타난다.

그런데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신 것을, 여러분이 알기를 바랍니다. 남자가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하거나 예언하는 것은 자기 머리를 부끄럽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자가 머리에 무엇을 쓰지 않은 채로 기도하거나 예언하는 것은, 자기 머리를 부끄럽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머리를 밀어 버린 것과 꼭 마찬가지입니다. 여자가 머리에 아무것도 쓰지 않으려면, 머리를 깎아야 합니다. 그러나 머리를 깎거나 미는 것이 여자에게 부끄러운 일이면, 머리를 가려야 합니다. 그러나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하나님의 영광이니, 머리를 가려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여자는 남자의 영광입니다.
《새번역》 고린도후서 11:3-7

여자들은 교회에서는 잠자코 있어야 합니다. 여자에게는 말하는 것이 허락되어 있지 않습니다. 율법에서도 말한 대로 여자들은 복종해야 합니다. 배우고 싶은 것이 있으면,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으십시오.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자기에게 부끄러운 일입니다.
《새번역》 고린도후서 14:34-35

고린도전서 11장을 보면,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머리이고, 그리스도는 남자의 머리이며, 남자는 여자의 머리라고 하니, 남성과 여성은 상하관계에 놓여있는 셈이다.(고전 11:3)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이고 하나님의 영광이기 때문에 머리를 가려서는 안 되지만, 여자는 남자의 영광(고전 11:7)이기 때문에 수건으로 자기 머리를 가린 채로 기도하거나 예언해야 한다.(고전 11:6) 오늘날에도 로마 가톨릭에서는 이 구절에 근거하여 여성들이 머리에 수건을 쓰고 예배를 드리고 있다. 반면, 개신교에 속한 교회들 가운데는, 아무리 성서의 문자적 해석을 강조하는 교회라고 하더라도 사도 바울의 이 말씀을 지키지는 않는다. 고린도전서 14장에서는 성차별이 더욱 심각하게 드러난다. 여성들은 교회에서 절대 침묵해야 하는 것으로 규정된다. 물어볼 것이 있어도 입을 열어서는 안 된다. 궁금한 게 풀리지 않으면, 꾹 참았다가 집에 가서 남편에게 물으라고 한다.

그런데 두 본문에는 결정적인 차이점도 있다. 14장에서는 여성들이 예배 중에 발언을 하는 것이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있지만, 11장에서는 허락되어 있다는 것이다. 단지 머리를 가리기만 하면, 얼마든지 회중 앞에서 공개적으로 기도나 예언을 할 수 있다. 이러한 차이는 14장이 후대에 삽입된 이차적인 본문이라는 가설을 설득력 있게 한다. 사실, 고린도전서 14장 35-36절은 비(非)바울적인 삽입인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몇몇 사본들에는 이 단락이 14장 40절 이후에 붙어있으며, 또한 바울 역시 다른 곳에서는 남성과 여성이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다고 주장(갈 3:28)하기 때문이다. 고린도전서 14장과 비슷한 내용이 담긴 본문이 디모데전서에 있다.

여자는 조용히, 언제나 순종하는 가운데 배워야 합니다. 여자가 가르치거나 남자를 지배하는 것을 나는 허락하지 않습니다. 여자는 조용해야 합니다. 사실, 아담이 먼저 지으심을 받고, 그 다음에 하와가 지으심을 받았습니다. 아담이 속임을 당한 것이 아니라, 여자가 속임을 당하고 죄에 빠진 것입니다. 그러나 여자가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을 지니고, 정숙하게 살면, 아이를 낳는 일로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새번역》 디모데전서 2:11-15

디모데전서는 대략 기원후 100년경에 쓰인 문서이다. 초대교회가 남성중심으로 그 모습을 점점 더 확고히 갖추게 되면서, 디모데전서 2장 9-15절과 같은 본문이 생기게 된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이러한 후대의 가치관이 다시 바울서신 전승과정에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어쨌건 고린도전서의 두 본문과 디모데전서의 본문은 분명히 성차별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고, 이 본문으로 인해 많은 여성 기독교인들이 상처를 입었으리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본문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여성은 여전히 남성에게 순종해야 하는 존재라고 가르칠 것인가? 여성들이 주일학교 교사가 되거나, 공중예배에서 대표기도를 하거나, 목사 안수를 받는 것이 비성서적이라고 하여 금지할 것인가? 여성들은 아이나 낳으면서 침묵 가운데 살아야 하는 존재들인가? 아니, 아이를 낳지 못하는 불임 여성들은 구원을 얻지 못하는가? 그럴 수는 없다!

여성이 남성에 비해 열등한 존재로 묘사되는 위의 구절들에는 성차별적인 요소가 다분히 있다. 그렇다면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필자는 오늘날의 몇몇 주석가들처럼 바울이 결코 남성우월주의자가 아니었으며, 위의 본문도 바울의 것이 아니라, 바울 이후 영지주의?투쟁하던 초대교회의 사상이 반영된 것이라고 주장하려는 생각은 없다. 또한 다른 어떤 주석가들처럼 바울이 여기서 주장하는 것은 성서적 창조질서의 보존과 종말론적 구원질서의 확립이지, 결코 남성과 여성의 차이점을 부각하여 구분하려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바울을 옹호할 생각도 없다. 그들은 바울이 비록 성차별적인 내용을 쓰기는 하였지만, 그것은 교회 안에 덕을 세우기 위한 것일 뿐, 여자를 비하하려는 목적으로 그런 것이 아니었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문제는, 성차별적인 구절이 바울의 것이 아니라 해도, 또는 바울에게는 여성을 비하하려는 목적이 없었다고 해도, 그래서 바울이 설령 남성우월주의자가 아니었다 해도, 성서에 포함된 성차별적 분위기가 제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이유에서건 오늘날 정경에 포함되어 있는 위의 본문들은 성차별적인 표현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성서 안에 성차별적인 요소가 있다는 것을 오히려 겸허히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는가? 물론 그렇다고 하여, 성차별을 정당화하거나 성차별적인 내용을 우리 삶에 실천하자는 것은 아니다.

성서에 성차별적인 보도가 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성차별적인 요소를 갖고 계시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성서는 무시간적인 진공상태에서 태어난 문서가 아니기 때문에, 성서에는 그것이 처음 기록되었던 시대와 그것이 전승되던 시대의 정치와 사회와 경제와 역사와 문화가 깃들어 있다. 한편으로 그 문화는 아름다운 전통일 수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반성하고 청산해야 할 악습일 수도 있다. 물론 가치중립적인 것들도 있을 것이다. 위에서 살펴본 고린도전서와 디모데전서의 경우에도 성서의 메시지는 당시 문화의 옷을 입고 있다. 그 옷은 “본질”이 아니라, 당시 남성들을 중심으로 하는 가부장적인 사회의 가치체계가 반영된 “옷”이다. 따라서 성서는 성차별적인 보도를 통해서도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가치관을 다시 한 번 반성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따라서 위의 본문들이 단지 오늘날의 양성평등사상이나 인간존엄사상에 적합하지 않다고 해서, 그 본문을 담고 있는 성서 자체의 가치마저 절하시켜서는 안 될 것이다. 성서는 윤리교과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우리가 차마 “문자적으로” 지키지 못할 것 같은 계명들이 성서에는 많이 있다. 세상 권력에 복종하라는 말씀(롬 13:1-7)이라든지, 다른 사람(주인)의 재물로 불의하게 친구를 사귀라는 청기지의 비유(눅 16:1-13)를 들 수 있을 텐데, 청기지의 비유만 간단히 살펴보자. 여기서 예수는 청지기의 “불의한” 행동을 모방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이 비유는 사실 청지기의 행동이 윤리적인지 비윤리적인지에는 관심이 없다. 오히려 “(너희) 빛의 자녀들”이 청지기로 대표되는 “이 세상의 자녀들”에게 배워야 할 점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위기에 처할 때, 신속하게 대처하는 청지기의 결단력을 본받으라는 것으로, 이것은 윤리적 행위와는 관련이 없다. 오히려 구속사적으로 결정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는 예수 사건 앞에서 신속한 결단을 촉구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나가는 글
 
성서를 올바르게 해석하는 일은 참으로 멀고도 험한 길이다. 인간의 지적 능력으로 어찌 성서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성서를 읽을 때, 조심해야 할 몇 가지 사항들을 조심스럽게 짚어볼 수는 있을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범하기 쉬운 성서에 대한 오해가 성서를 과학책이나 역사책으로 받아들이려는 것이라고 한다면,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은 성서를 윤리책으로 보려는 유혹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물론 성서에는 윤리적인 요소들이 많이 들어있지만, 결코 윤리적인 시각에서 모든 이야기들을 이해할 수 있는 그런 책은 아니다. 마치 성서에 역사적인 요소, 과학적인 요소들이 있기는 하지만, 모든 이야기를 역사적, 과학적 시각으로 보아서는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성서가 실증적 역사나 과학적 지식을 전하려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적이 아니듯이, 윤리적인 가르침을 주려는 것 역시 성서의 첫 번째 목적이 아니다.

윤리적인 시각에서 볼 때, 성서에는 받아들이기 힘든 보도들이 있다. 아니, 많다. 하지만 그러한 “비윤리적인” 보도들 때문에 성서의 가치를 평가절하 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우리가 문화인류학에서 배웠듯이, 우리의 잣대로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다른 문화권의 규범을 판단하는 것은 옳지 않기 때문이다. 윤리적이지 않은, 또는 윤리적으로 열등한 것처럼 보이는 단락들은 결코 가치가 없는 부분이 아니다. 그것들이 성서의 권위를 떨어뜨리는 것도 아니다. “윤리적”인 잣대만으로 종교의 경전을 평가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성서는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을 증언하는 책이며, 그러한 시각에서 우리가 성서의 말씀을 받아들일 때, 성서가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생명의 책이 될 것이라 믿는다. 다음 호에서는 신비주의적 성서해석에 대해 다루도록 하겠다.

민경식 l 박사는 연세대학교 신학과(B. A)와 같은 대학원(Th. M)을 졸업하고 독일 뮌스터 대학교(Dr.theol.)에서 신약성서 본문비평 및 신약성서 사본학을 공부하였다. 현재 연세대학교와 감리신학대학교에 출강하고 있으며, 저서로는 Die fruheste Uberlieferung des Matthausevangeliums (Berlin/New York:Walter de Gruyter, 2005)가 있다. 
 
글쓴이 / 민경식
 
http://www.clsk.org/gisang/
 
dhleepaul (07-01-18 16:59)
 
민경식교수님의 글을 재미있게 잘 읽고 있습니다.

다만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신 성경이 결코 하나의 윤리적이거나 도덕적인 교과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계시의 진정성을 외면하고서 오직 인간의 눈으로 성서를 바라보면 참으로 하나님은 인정이 없으신 점도 있고, 도덕적이기도 또한 윤리적이기도 아니한 부분들이 많이 나타납니다.

문제는 왜 하나님께서 이런 시련을 주시고, 거기에서 하나님의 뜻을 표출하시는가 하는 문제에 접근해야 합니다. 성서학자적 안목으로 성서를 바라보시면 문제꺼리가 한두곳이 아니겠지요. 그 계시의 말씀에 숨어있는 하나님의 영원한 비밀을 하나님의 눈으로 읽어야 할 것입니다. 인간의 눈으로 성서를 보면 이미 성서의 가치를 상실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제가 교수님의 참 뜻을 간과하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이 글의 말미에 교수님께서는;

"윤리적인 잣대만으로 종교의 경전을 평가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성서는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을 증언하는 책이며, 그러한 시각에서 우리가 성서의 말씀을 받아들일 때, 성서가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생명의 책이 될 것이라 믿는다"

라고 끝 말을 이어주시는 데에서 교수님의 참뜻을  헤아리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문자의 구성과 순서가 또는 일점의 획하나가 하나님의 말씀의 거룩하신 뜻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을 연구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에게 들어가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귀한 글 다시 한번 더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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