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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논쟁3] 다비아 정용섭 목사와의 논쟁 (헨리 나우웬과 전통 기독교에 대한 시각차이 논쟁)    
  글쓴이 : 미선이 날 짜 : 06-11-28 14:38 조회(477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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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다비아 사태가 궁금하신 분들은]
다비아 운영자측의 공개 해명 및 사과문 그리고 다비아 사태에 대해선
 
그리고 아래의 논쟁에 대한 최근 요약본을 보시려면
[다비아 정용섭 목사의 신학에 대한 짧은 단상]
 
.....................................................................
 
 
가장 최근에 일어난 논쟁이다. 정용섭 목사님은 대구성서아카데미(다비아) 원장으로 계시며
설교비평을 통해 좀더 많이 알려져 있으신 분이다.
 
애초 정용섭 목사님과의 논쟁은 헨리 나우웬 문제로 불거져 나온  것이었지만
좀더 깊은 차원으로 파고든 것은 기존의 <전통 기독교에 대한 이해> 문제였다.
따라서 이번 논쟁의 글은 저마다 전통 기독교를 이해하는 맥락들을 살펴볼 수 있는 글이다.
 
나 자신이 느끼기에 정용섭 목사님은 중도 진영에 해당하는 복음주의 진영에 많이 가까운 느낌인데
여기에는 흔히 복음주의 진영이 지니고 있는 헛점들도 같이 보여주고 계셨다.
이를테면 개념에 대한 불철저한 이해 같은 것 말이다.
정용섭 목사님은 주류 메인 스트림에 해당하는 전통 기독교는 이미 헬라적 이원론을 오래 전부터 극복했다고 보고 있으며
삼위일체론을 '신관'의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잘못 알고 계셨다. 그렇기에 그같은 오해가 나왔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삼위일체론은 신관이라기보다 이미 그것은 신학적 해석이 가미된 테제다..
삼위일체론은 '초월신관적 삼위일체론'으로 갈 수도 있고, '범재신관적인 삼위일체론'으로도 얼마든지 갈 수도 있는 것이다..
이때 기존 기독교의 삼위일체론은 너무나 뚜렷하게도 대부분이 전자의 입장을 밟아왔었다.
여기에는 자유주의 신학을 극복했다는 신정통주의자 바르트도 예외가 아니다.
대체로 정용섭 목사님의 신학적 기반은 바르트, 몰트만, 판넨베르크에 많이 의존되고 있는 측면이 매우 많다.
그런데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에크하르트, 매튜 폭스, 토마스 머튼, 떼이야르 샤르뎅, 노장 사상을 수용하고 긍정하신다..
하지만 엄밀하게 볼 경우, 이 양자들은 저 밑변에서는 서로 양립 불가능한 자리에 놓여 있음을 정용섭 목사님은 간과하고 계셨던 것이다..
(적어도 바르트의 경우는 확실히 양립 불가능한 측면이 있으며, 몰트만은 왔다리갔다리 하는 혼재된 모순도 함께 하고 있다.)
복음주의 진영이 대체로 보수 진보 양 진영에 어정쩡하게 두 발을 걸쳐 있거나
두리뭉실한 이해에 기반해 있음을 볼 때 정용섭 목사님도 이러한 치명성을 벗어나진 못한 것으로 보여진다..
물론 논쟁의 내용을 떠나서 대체로 정 목사님의 인격만큼은 솔직 담백하신 분이시라
내 생각에는 한국 기독교가 이 분 정도의 신학적 사고만큼이라도 열려있다면 그래도 건강한 편에 속하지 않을까 싶다.
 
* 헨리 나우웬 논쟁보다는 <전통 기독교를 보는 시각차이 논쟁>이 보다 핵심적인 사안임을 말씀드리며
  이 부분에 대한 논쟁은 아래 중간에 표시한 부분부터 읽어도 될 것으로 본다.
  왜냐하면 논쟁 글이 아주 길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바쁘신 분들은 그냥 그 부분만이라도 읽어보길 바란다.
 
 링크를 걸어놨으니 다비야의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직접 확인해봐도 좋다.
단지 여기에는 일단 분량상 정용섭 목사님과의 논쟁 부분만 같이 올렸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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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처음 논쟁을 촉발시킨 조현아 님의 글입니다)
 
헨리 나우엔
 조현아     | 2006·10·30 08:09 | HIT : 931 | VOTE : 25
 
   
(형님의 편지)

아우님 우리 주님의 은혜안에서 잘 계시는 줄 아네.
공부하는데 방해될 것 같지만 조금 도움이 필요하네.

내 주위에 '헨리 나웬'이라는 천주교 사제의 글에 감동(?)하여 매일 그의 글을 남에게 소개시키는 열성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있어. 그런데 난 '헨리 나웬'이라는 분의 글을 몇권 읽었는데 도덕적으로 마음의 수양이 될지 몰라도 요즘 한국교회에 (개신,천주 할 것없이 영성이라는 말이 전부인 것 같네) 부는 영성이라는 열풍이 잘못된 것 같고 따라서 영성의 대가로 인정되는 '헨리 나웬' 이라는 사제의 글을 무분별하게 출판하는 출판사( 두란노,홍성사,가톨릭 계열 출판사)의 책임자들의 신앙적인 식견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어. 난 신학적인 안목이 부족하지만 아우가 고견을 한번 말해주게. 내가 잘못생각하고 있는지? 이니고 내 생각이 맞다면 어떤 의견을 제시해 주어야 '헨리나웬'의 글을 감동적으로 읽는 이의 마음을 안 상하게 하면서 성경적인 길을 안내해줄 수 있을까?

요즘 '칼빈주의와 아르미니우수주의'(강남중앙침례교회 피영민 목사가 편저한 책)를 읽고 있네.그 책에서 소개한 벤자민 워필드의 '구원의 계획'과 윌리엄 커닝햄의'칼빈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를 원본으로 읽어 보고 싶은 욕심이 있네만 그럴 기회가 오겠지 하고 생각하고 있네.

항상 우리 주님의 은혜안에서 제수씨와 조카들이 평안하기를 기도하네.

(답변)
 
사랑하는 형님,

그 동안도 평안하신가요? 부족한 동생에게 질문하시는군요. 고견이라기 보다는, 아직도 천박한 저 자신을 보면서 답변을 드리기가 죄송한 마음일 뿐입니다.

하오나,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형님께서 안타까워하시는 그 안타까워하심이야말로 올바른 영성의 발로라고 하는 것입니다. '영성'이라는 말 자체가 너무나 오용되고 혹은 남용되고 있는 현실임을 잘 아실 것입니다. 저도 그런 현상을 너무나도 안타까워하고 있고, 그 현상이 너무나도 광범위한 것에 놀라고 있습니다. 오히려 연구가 늦어지는 중에 심화시키고자 하는 이유들이 그런 놀라움에서 시작된 것이기도 합니다.

늦어지는 연구에 대해서 오늘 아침 갈라디아서묵상을 시작하면서 위로를 받는 중에 간단한 글을 올리고 나서야 형님의 글을 보았습니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헨리 나우엔에 대한 비판이 필요하리라고 여겨왔었습니다. 아마도 이런 사람들이 영성의 대가로 알려지고 있는 것은, 그 동안 보수주의(혹은 개혁주의)신학에 기초한 신학자들이나 교회들이 마땅한 모습들을 보여주지 못하였기 때문에 오는 반동이라고 여겨집니다. 삶이 뒷받침되지 못하는 비판은 오히려 식상할 수 밖에 없고 비판력을 상실하기 때문에 오히려 비판하지 않고(혹은 못하고) 있다고도 보여집니다.

하지만, 잘못된 것은 잘못되었다고 해야 될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현대교회의 영성에 대한 열기는, 어쩌면 좀 더 거시적인 세계정신사의 흐름과 관계해서 설명해야만 좀 더 이해되기가 쉽지 않을까 생각합니다만, 이 짧은 리플로는 그런 설명은 불가능할 것이라고 여겨지고 또한 형님께서도 그런 것을 기대하시지는 않을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단지, 헨리 나우엔의 영성은 결코 기독교적이거나 복음적이거나 성경적이지 않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이것은 그가 죽기 직전에 써서 출판했던 책에서 분명하게 보여집니다. 그의 마지막 책인 Sabbatical Journey(1998년 Hard cover)의 51페이지에 다음과 같은 글이 나옵니다: "Today I personally believe that while Jesus came to open the door to God's house, all human beings can walk through that door, whether they know about Jesus or not. Today I see it as my call to help every person claim his or her own way to God." 예수를 알든 모르든 모두가 하나님에게 이를 수 있다는 사상을 가지고 있는 것이지요. 예수님의 유일성을 부인하고 단지 "영성을 위한 영성"을 강조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가 비록 예수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결코 성경 속에서 강조하고 있는 예수와는 다른 예수인 것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뿐만 아닙니다. 이러한 그의 견해를 타종교인들도 간파하고 있어서 그 중에 불교인들은 헨리 나우엔에게 대해서 굉장히 동정심을 갖고 있고 또한 나우엔 자신도 그렇습니다. Here and Now라는 책에서는 이런 자신의 견해를 더욱 분명히 드러냅니다: "The God who dwells in our inner sanctuary is the same as the one who dwells in the inner sanctuary of each human being"(p.22). 그의 하나님은 결코 성경의 하나님이라고 할 수 없고 그냥 모든 종교인들의 마음 속에, 아니, 비종교인들의 마음 속에라고 있는 그런 신적 본성을 기독교적 용어로 포장하였을 뿐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위험하기조차 합니다.

그가 강조했던 철학자들이나 신학자들의 면면을 보면 그 사상의 핵심을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헨리 나우엔은 노장철학, 특별히 장자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갖고 그 사상을 추구했었습니다. 그리고 사막의 교부들, 그러니까 신비주의명상가들을 사상을 추적했고, 카톨릭명상가들 중에서는 토마스 머튼같은 사람 그리고 데이야르 데 샤르댕같은 사람들의 삶의 태도들에 대해서 영향을 깊이 받았습니다. 심지어는 힌두교의 Eknath Eswaran같은 신비주의자들의 견해에 대해서도 공감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그는 기독교사상가 혹은 영성가라기보다는 기독교용어로 포장한 일반영성가일 뿐입니다. 문제는, 그가 기독교용어로 포장해 있기 때문에, 많은 기독교인들이 현혹되어 있고, 바로 그것을 노리고 있는 셈이기도 합니다. 이것을 분별하지 못하고 있는 한국교회를 볼 때 가슴이 무척 아픕니다. 아마도 복음에 대한 분명한 이해와 체험이 천박한 것에서 유래한 분별력의 상실이 아닌가 진단해 봅니다. 그런 면에서 바울사도가 갈라디아서의 서론 부분에서 그렇게도 신속하게 갈라디아교회교인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떠나서 다른 복음을 좇는 것에 대해서 이상하게 여긴 것에 주의해야 할 것인데, 바로 이 주의함이 없는 셈입니다. 이런 저의 진단이 교만하게 비춰지지 않게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사랑하는 형님, 형님께서는 이 헨리나우엔의 글에 빠져서 현혹되고 있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조언하면 좋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이것은 헨리 나우엔의 견해를 비판하는 것보다 더욱 어려움을 느낍니다. 하지만, 참된 복음에 대한 소개야말로 올바른 길일 것입니다. 문제는 바로 이 '참된' 복음의 소개야말로, 혼탁한 한국교계의 현실을 고려할 때에 참으로 어려운 일일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른 복음이 참된 복음인양 포장되어 있는 현실입니다. 이런 저의 의견 자체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몇번 고국방문을 하는 중에 수많은 동료목사들, 혹은 선배목사들이 저의 회심을 이해하지 못한 것을 보았습니다. 그저 어떤 체험 정도를 한 모양이라는 식으로 반응했었습니다. 그리스도인됨의 의미를 심각하고 진지하게 숙고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어떻게 조언할 것인가? 참으로 지난한 문제입니다.

형님께서 언급하신 벤자민 워필드의 글이나 윌리엄 커닝힘의 글들은 이런 신학적 왜곡현상들을 제대로 분별케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 글임에 분명합니다. 문제는, 그런 글들이 전문적인 신학적인 용어들로 기술되어 있기 때문에, 혹은 번역이 거칠게 되어 있어서(워필드의 '구원의 계획'을 번역한 분이 어떤 분인지 형님도 잘 아실 것입니다!) 더욱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실상인지라 주변 사람들에게 조언하는데 그런 책을 소개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고 생각해 봅니다. 물론 형님께서 그 책들을 원서로 읽으시는 것은 적극 추천합니다. 혹시 저로서도 구할 수 있는 대로 구해서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들에 대한 조언은, 저로서는, 그들이 헨리 나우엔의 사상이 과연 성경적인가 하는 것을 분별하도록 관심을 갖게 하는 것이 우선적이라고 여겨집니다. 베뢰아사람들처럼 '신사적'일 것을 부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이 얼마큼이나 예수 그리스도중심인가를 환기시키면서 그 예수 그리스도중심의 성경에서 헨리 나우엔이 얼마큼 벗어났는지를 살펴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혹은 병행되어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얼마나 "가장 고상"한 것인지를 알도록 권하고 또한 기도해 주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매이지 않는 것이 오히려 깊은 영성이고 넓은 영성인 양 오해되고 있는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방법만이 가장 정직하고 솔직한 태도가 아닐까 여겨집니다.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로만 말미암아 은혜를 입게 된 자들이라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영성이 가능하고,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영성이야말로 가장 깊고 또한 가장 높고, 가장 넓은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3:18-19)라고 하였습니다. 부족한 저이지만, 저도 그런 마음을 가져보고 또한 그 기도에 동참하기를 소원해 봅니다.

형님과 저 안에서 역사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영성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의 풍성함과 고상함을 더욱 흠모하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형수님과 조카들에게 사랑의 안부를 부탁드립니다.

ps. 우선 간단하게 적겠습니다. 기회있는 대로 헨리 나우엔의 영성에 대한 비판의 글을 인터넷상에 올려볼까 생각해 보고 있습니다. 기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 ImagoDei 원문보기  글쓴이 : Hor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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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섭 목사님의 코멘트
 
 
글의 구체성이 여전히 실종되어 보이는군요.
위에서 형, 동생 하는 분들의 글과
그것에 대한 대글과
또 그것에 대한 조현아 님의 짧은 코멘트들이 별로 명확하지 않네요.
그 밑으로 또 나우엔에 대한 촌평들이 등장하고 있긴 한데,
그것도 역시 그냥 느낌 정도로 끝나버렸군요.
나우엔에게 무엇이 문제인지 정확하게 언급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동생이라는 분의 글에 이런 대목이 오는군요.

그가 강조했던 철학자들이나 신학자들의 면면을 보면 그 사상의 핵심을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헨리 나우엔은 노장철학, 특별히 장자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갖고 그 사상을 추구했었습니다. 그리고 사막의 교부들, 그러니까 신비주의명상가들을 사상을 추적했고, 카톨릭명상가들 중에서는 토마스 머튼같은 사람 그리고 데이야르 데 샤르댕같은 사람들의 삶의 태도들에 대해서 영향을 깊이 받았습니다. 심지어는 힌두교의 Eknath Eswaran같은 신비주의자들의 견해에 대해서도 공감하고 있습니다.

이상하군요.
나도 노장을 아주 좋아하는데요.
노자의 도덕경은 대충 읽었지만
장자는 한자 공부도 할겸 중요한 대목은 베껴쓰는 방식으로 공부했습니다.
지금 내가 하는 모든 신학행위는 장자의 도움을 많이 받은 겁니다.
사막의 교부들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흥미는 많습니다.
토마스 머튼의 글을 좀 읽었는데,
마음에 드는군요.
드 샤르뎅도 마음에 들구요.
이러구 보니 나우엔은 나의 정신적 형님같이 여겨집니다.
그런데 그의 영성이 여기서 매도되다니....
그의 어떤 부분이 기독교 영성과 다른지에 대해서
정확하게 말하지 않고
그저 어떤 영향을 받았으니까 나쁘다, 하고 말하면 담론이 불가능한 것 같습니다.

각설하고,
신앙적으로, 인격적으로 좋으신 분들이
기독교를 크게 오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신이 기존에 알고 있던 것과 약간만 다른 이야기를 하면
기독교가 아니다, 하고 말하는 게 참 이상하군요.
어떻게 그런 확신을 하는지, 궁금하네요.
만약 그런 방식이라면 어거스틴도 제거해야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모든 교부들도 기독교 역사에서 제거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주변의 철학과 부단히 대화한 사람들이거든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스토아 철학이
기독교 교리형성에 절대적으로 영향을 끼쳤답니다.
삼위일체는 플라톤의 직접적인 영향입니다.
믿음이 돈독하다는분들이 왜 이런 전통을 무시하려는지,
그게 참으로 이상하군요.
이런 헬라철학의 영향은 사실 신약성서에까지 이릅니다.
요한복음이 왜 로고스 론을 서장에서 다루고 있을까요?
예수가 왜 이성, 언어라는 말인가요?
초기 그리도교는 기독교 변증을 헬라 철학과의 대화에서 찾았답니다.
만약 그들이 장자를 알았다면
당연히 장자와의 대화를 시도했을 겁니다.
오늘 현대과학과의 대화도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창조사건이 빅뱅으로 해명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오늘 물리학적, 생물학적 생명 이해와
성서의 생명이해가 조우할 수도 있고,
아니 조우해야만 합니다.
예수의 부활도 역시 이런 관점에서 훨씬 풍부해져야 합니다.
만약 주변의 인문학, 물리학과의 소통을 막아버린다면
그는 교부들의 전통을 부정하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아주 초보적인 문제가 왜 이렇게 불거지는지 이해할 수 없군요.
조현아 님도, 내가 설명하는 걸 충분히 알아들을 것 같은데,
그게 안 된다니 ...
말이 길었습니다.
두 가지로 정리합니다.
1. 나우엔의 문제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그걸 지적해보세요.
그가 기독론의 어떤 부분을 부정했는지요.
그가 사도신경을 부정했나요?
2. 기독교는 보편적 진리와의 소통을 끊지 말아야 합니다.
진리는 어떤 개인이나 실증적 종교가 독단적으로 소유하는 게 아니라
그 스스로 참된 세계를 열어갑니다.
성령은 바로 이런 진리의 영이십니다.

*진리는 아직 끝난 게 아니라 도중에 있습니다.

06·10·30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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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선이  글
 
 
헨리 나우웬에 대해 한 가지 얘기한다면
나우웬은 진보 기독교측 진영에 있어서도 별로 대접을 잘 받진 않는다는 점입니다..
왜 그럴까요?

제가 보는 헨리 나우웬 사상의 치명성은
그것이 갖고 있는 사유의 추상성 혹은 모호함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예컨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라는 명제는
매우 보수적인 근본주의자나 급진적인 진보주의자나
혹은 기독교 종파 바깥의 이슬람 영성가나 혹은 지적하신 뉴에이지 영성가들이나
모두가 공감하는 명제라는 점입니다..
헨리 나우웬에는 이러한 추상적 언급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것은 보수측 기독교가 보기에도 매우 은혜스럽고
그 진폭은 보수와 진보를 모두 아우르고 있는 것처럼 심오한 듯이 보입니다..
그렇기에 어쩌면 그것은 모두에게 환영받는 결과물로도 보일 지 모르겠습니다..

특히 소위 말하는 복음주의 진영에선 헨리 나우웬을 매우 좋아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보수측 출판사들도 헨리 나우웬의 책들을 곧잘 찍어내곤 하지요..
이는 헨리 나우웬 뿐만 아니라 소위 인기짱이라는 C. J.루이스도
그러한 요소들이 없잖아 있어 보여집니다만.. 어쨌든 지난한 얘기들이 되겠지만요..

주로 중도라는 복음주의 진영에서 인기있다는 인물들이 그렇습니다..
보수적 입장에서 보면 보수로 보이고
진보측 입장에서 보면 진보로 보인다지만(진보적 복음주의자들이 주로 주장)
실은 동상이몽이기도 한 거죠..

보수나 진보도 좋아할 수 있다는 것은
동시에 조현아님 같은 분이나 저 같은 사람에게서 드러나는 태도처럼
또한 보수와 진보 양자로부터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점을 의미하기도 한다는 사실입니다..

제 입장에서 본다면 나우웬은 그저 무난한 정도의 추상적 얘기들로 보이기에
솔직히 그다지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을 뿐입니다..

그렇기에 가능하면 표현되는 사유들은 추상적인 두루뭉술함은 피하면서
또한 가급적 분명하고도 구체성을 띨 수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끝으로 헨리 나우웬에 대해 한 가지 더 첨언한다면

저로서도 오래 전부터는 헨리 나우웬을 내심 비판하고 싶었지만
사실 지금 처음으로 나우웬 비판을 약간 웹상에 뱉어낸 것입니다..
그 이유는 헨리 나우웬이 살았던 그 분의 삶만큼은
정말 고개가 숙여질 정도로 존경스럽지 않을 수 없거든요..
그래서 굳이 먼저 나서서까지 나우웬 비판을 하고 싶진 않았던 것뿐이었죠..
적어도 사유의 표현의 추상성 문제 때문에
낮은 자들과 함께 했던 그 분의 실천적 삶마저 폄하되어선 안될테니까요..
 
06·10·31 0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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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섭 목사님의 글
 

위의 미선이 님의 글도 이해를 못하겠군요.
나우엔의 삶은 존경스럽지만
그의 사유의 표현은 추상적이라고 보시는군요.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고
열매를 보아 좋은 나무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존재와 인식에 관한 주님의 말씀에 의하면
나우엔의 신학은 존재론적으로도 정당하다고 보이는데요.
나우엔의 어디가 추상적이거나 모호하다는 것인지
위의 글로만은 전혀 감을 잡을 수가 없군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는 명제를 예로 들었습니다.
나우엔은 자나깨나 그런 말만 하고 다니는 건 아니죠?
그 사랑이 어떻게 구체화하는지에 대해서 말을 하지 않나요?
그는 실제로 반전 평화 운동을 하는 사람이 아니던가요?
동성애자들의 삶에 참여하지 않던가요?
미선이 님이 말한대로
그가 보수쪽에도 받아들여지고, 진보쪽에서도 받아들여지거나,
또는 그 반대되는 현상 때문에
그의 사상이 추상적이라고 말하는 건
그것 자체가 추상적인 발언이 아닌른지요.
예수님도 그 당시에 진보가 보수 양쪽으로부터 거부당하거나
또는 받아들여졌다고 보아야합니다.
가장 진보적인 젤롯당 같은 사람들이 따르다가 포기하기도 했구요,
예수님에게 호감을 갖고 왔다가 실망하고 떠난 니고데모 같은 사람은
보수적인 사람이 아닐른지요.
미선이 님은 신학의 '추상성'과 '모호성'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군요.
추상성과 모호성은 극복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나우엔의 사상이나 전통적인 신학은
추상적이거나 모호한 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 관념적일 뿐입니다.
저는 나우엔의 글에서 그 어떤 추상성과 모호성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의 글은 리얼하고 논리적입니다.
만약 미선이 님의 방식으로 말하기 시작하면
예수님이 전한 "하나님의 나라"도 역시 추상적이고 모호한 겁니다.
성서의 대부분도 역시 추상적이고 모호한 문서로 보일지 모르겠군요.
삼위일체도 역시 그렇구요.
베낀글에 보면 나우엔의 글이 새로 올려져 있습니다.
기독교사상의 글을 옮겨놓았습니다.
앞으로 기독교사상에서 그의 글을 당분한 연재한다고 합니다.
다른 분들도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런 글들을 추상성과 모호성으로 재단한다는 건
글읽는 이의 진정성이 조금 의심스러워보이네요.

사족으로,
다비아에 들어오시는 분 중에서
보수를 대표하는 조현아 님과
진보를 대표하는 미선이 님이
나우엔에 대해서만은 같은 배를 타고 있군요.
(재미 있으라고 하는 말입니다.)
나는 여전히 나우엔과 같은 배를 타고 가렵니다.
다르게 표현한다면,
나는 나우엔의 배를 빌려타고 가렵니다.
그 안에서 나는 많은 것을 즐기고 배우고 느낄 수 있으니까요.

06·10·31 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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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선이 글
 
 
익히 예를 들어보라고 하시니 어쩔수없군요..
예컨대, 아래의 언술을 생각해보죠..

"하나님의 눈과 함께 여행하기 (헨리 나우웬)
새 경치를 보고, 새 음악을 들으며, 그리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 여행은 흥분되고 매우 기분 좋은 경험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에게 "이번 여행은 어떠했지?" 하면서 물어 줄 사람이 기다리고 있는 돌아갈 집이 없다면, 아마도 우리는 그렇게 여행을 떠나고 싶어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들을 사랑하는 사람들, 우리가 찍은 슬라이드를 보며 여행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눈과 귀와 함께 떠나는 여행은 즐겁습니다.
이런 것이 인생입니다. 인생이란, 우리가 돌아오기를 집에서 기다리시며 우리가 찍은 슬라이드를 보고 또한 우리가 여행 중에 사귄 친구들에 관하여 듣기를 열망하시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보내 주신 여행입니다.
우리를 떠나 보내신 하나님의 눈과 귀와 함께 여행을 하게 되면, 우리는 멋진 경치를 보며, 아름다운 소리들을 들으며, 놀라운 사람들을 만날 것입니다. 그리고 기쁘게 집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저는 이런 언술에서 여전히 하나님의 눈과 함께 여행한다는게
도대체 구체적으로 무슨 뜻인지 여전히 모호할 따름입니다..
'하나님의 눈'이 도대체 뭐죠?? '여행'이란 도대체 구체적으로 뭘 얘기하는 건가요?

아, 아마도 그거 하나 가지고 맥락도 못보고 부분적인 걸로 트집잡는다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는데..
그런 거 너무 많아서 발췌하라면 얼마든지 해드릴 수 있습니다..
이런 언술들의 사용은 기독교인들이 아주 많이쓴다는 사실도 익히 느낍니다..

영성? 성령? 이런 것들도 그러한 개념들에 속한다고 생각되네여..
영성이 도대체 뭐냐고 질문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어떤 어떤 대답들을 합니다..
하나님을 통한 내면의 빛이라느니 하나님의 얼굴을 본다느니 소리를 듣는다느니

그러나 제게는 이런 언급들은 여전히 모호할 따름입니다..
도대체 내면의 빛은 뭐고 얼굴은 뭐고 소리는 뭐냐고?
사람들이 과학에 열광하는 이유는 보다 구체성을 띠기 때문은 아닐지요..
나우웬이 관념적이라고 하셨는데 사실 과학도 어찌보면 기본적으로는 관념이지요..

예컨대, 히딩크 이전의 감독들이 축구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덕목이 뭐냐고 했을 때
정신력이라고 답변을 했었지요.. 그런데 히딩크는 말하길,
추상적으로 정신력이라고 말하기보다 그것은 곧 집중력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정신력과 집중력을 비교했을 때 집중력이 보다 구체성을 띠고 있음은 말할 나위 없습니다..

사실 기본적으로 모든 언어들은 관념적일 뿐만 아니라 추상성을 띠고 있습니다..
이때 집중력이란 것은 정신력에서 그 어떤 추상성(모아짐 같은)이 하나더 +되는 경우가 되겠지요..
즉, 하나의 개념에선 추상성의 강도가 집약되면 집약될수록 보다 구체성을 띤다는 사실입니다..
수리논리학에선 이를 추상의 역리(패러독스)라고도 얘기하는데..
그러니 요는, 우리들의 언어에서 얼마만큼이나 추상성을 극복할 뿐이냐 이 문제겠지요..

X+Y=1 보다는 2X +3Y=1이
보다 더 구체성을 띰은 말할 나위 없지 않나요?

혹시 헨리 나우웬의 언술들에 이런 것들이 없다고 보시는지요?
또 발췌하라면 얼마든지 할께요.. 자료들은 많으니까요..

어쨌든 제 주변에도 그렇고 진보진영에서 헨리 나우웬 하는 분들은 많이 드뭅니다..
복음주의 진영에서 좀더 리버럴한 사람이 헨리 나우웬을 좋아하는 건 봤어도 말입니다..

삼위일체에 대한 언술들도 그렇습니다..
삼위일체가 뭐냐고 얘기하면 삼신론이니 어쩌니 이단소리 많이 나오는 것에 대하여
이런 우스개가 소리도 있지요..
삼위일체란 결국은 거대한 우주적 농담이라고..
그것은 아무도 모르고 오직 하나님만 알 뿐이라고..

06·10·31 10:03 

그리고 또 다음과 같은 언술들은 어떤가요?
 
침묵 가운데 축복의 음성 듣기(헨리 나우웬)
 
한 시간 내내 오직 내면의 음성을 듣는 외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지내려고 노력해 본 적이 있습니까?
라디오를 듣거나 TV를 볼 수도 없고 읽을 책도 없고 대화를 나눌 상대도 없는, 그리고 마쳐야 할 프로젝트도 없고 걸어야 할 전화도 없는, 이러한 경우에 처하면 어떻게 느끼게 됩니까?
대부분은 아직도 마치지 못한 일이 남아 있는 게 생각나서 그 두려운 침묵을 떠나 서둘러 일터로 복귀하곤 합니다.
침묵 속으로 들어가서 각양각색의 소란스러운 소리들과 세상이 이것저것 강압적으로 명령하는 음성들을 건너뛰어 작고 친밀한 음성이 “너는 나의 사랑받는 자녀요, 내 은총이 네게 있도다” 하고 속삭이고 있는 것을 발견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용기를 내어 우리의 고독을 끌어안고 우리의 침묵과 친해진다면, 우리는 그 음성을 알게 될 것입니다. 내 말을 오해하지 마세요, 당신이 실제로 육신의 귀로 그 말을 들을 것이라고 말하는 게 아니니까요. 내가 말하는 것은, 환청이나 환상과 같은 현상 속에서 들리는 음성이 아니라, 우리 내면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믿음의 귀”로 들을 수 있는 음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중에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냥 앉아 있었고, 잡념에 시달리기만 했어” 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당신의 시간을 매일 30분 동안 이 사랑의 음성을 듣는 데 사용하는 습관을 계발한다면, 점차로 당신이 미처 의식하지 못하는 어떠한 일이 일어나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아마도 당신은 그 일이 일어난 후에야 당신을 축복하는 그 음성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 음성을 향한 경청의 시간이 단지 수많은 혼란의 시간에 불과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그 침묵의 시간을 기다리게 되고 그 시간을 못 갖게 될 경우에는 그것을 안타까워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의 움직임은 매우 온화하고 부드럽습니다 ? 그리고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 움직임은 결코 주의를 끌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매우 끈기있고 강하고 깊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마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킵니다. 기도에 관해 충실한 규율과 습관을 갖게 되면, 당신이 축복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이 드러나고 당신이 다른 사람들을 축복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 Life of the Beloved PP.76-78 / 헨리 나우웬

우리 내면 속에서 믿음의 귀로 들을 수 있는 음성?
아마도 저같은 사람은 보수 기독교인들의 표현대로
믿음이 없으니 신앙이 없으니
그런 음성도 못듣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왕 저는 나우웬 비판 배를 탔으니 저도 한 번 가볼랍니다..

P.S - 아, 진보측의 나우웬 비판은 처음이 되나여?
그렇지만 그의 삶과 사유의 거대한 스케치에서만 본다면야
저역시 별로 그다지 비판하고 싶진 않은 것도
제 솔직한 심정이라는 점도 덧붙여 말씀드립니다..
그냥 나우웬이 회자되어도 무던하게 지내고 싶을 뿐이지..
 
06·10·31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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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섭 목사님의 글
 
 
오늘이 종교개혁 489주년 되는 날이 확실하네요.
모두들 또렷한 자기 소신을 갖고 말하고 있으니까요.
아주 바람직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조현아 님은 싸움만 붙여 놓고 어디로 사라지셨을까?
악취미시군요.

나우에의 이야기에서 테레사까지 왔군요.
미선이 님이 인용한 나우엔의 글이 왜 추상적이라는 건지 이해하지 못하겠군요.
미선이 님이 이렇게 쓰셨네요.

저는 이런 언술에서 여전히 하나님의 눈과 함께 여행한다는게
도대체 구체적으로 무슨 뜻인지 여전히 모호할 따름입니다..
'하나님의 눈'이 도대체 뭐죠?? '여행'이란 도대체 구체적으로 뭘 얘기하는 건가요?

정말 몰라서 이렇게 말하는 거는 아니겠지요?
하나님의 눈을 배우는 게 곧 기독교 영성이 아닌가요?
인간을 비인간화하는 이 체제와의 투쟁도 가능하겠고,
사회 마이너리티에 대한 연대감도 갖게 되겠지요.
하나님의 눈과 함께 살아간다면 말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을 향한 사랑, 또는 열정, 또는 에로스가 살아나고
고난과 가난에서도 여전히 생명의 신비를 맛볼 수 있는 삶의 능력이지요.
이런 게 추상적인 건가요?
본회퍼가 히틀러 반대 투쟁에 앞장 선 것도 역시
이런 하나님의 눈으로 부터 시작하는 겁니다.
이런 걸 미선이 님이 모르고 위에서처럼 언급했을 리는 없다고봅니다.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과 일종의 시적 언어인 여행이 서로 닿을 수 있는 부분이 없나요?
이 세상의 온갖 생명들이 유기적으로 얽혀들고 있는 이 여행을 모른다는 말인가요?
위에서 이길용 박사가 지적한 것처럼
시를 물리학적 개념으로 분석하려고 들면 넌센스일 겁니다.
3,4세기에 초기 기독교 신학자들이
매우 치열하게 삼위일체 논쟁을 이끌어갔습니다.
그게 우주적 농담이라는 결말로 끝난다고 보는 건
정확한 문제제기가 아니라고 봅니다.
삼위일체는 하나님의 존재론에 대한 일종의 해석학입니다.
그 당시에는 그런 개념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었고,
그것이 여전히 오늘에도 정당하기 때문에 기독교 교리로 남아있습니다.
초기기독교인들이 역사적 예수에게서 하나님의 통치를 경험했다는 사실에 근거해서
이런 기독론과 삼위일체론이 시작됩니다.
여기에는 그들 나름으로 매우 진지하고, 구체적이고, 철학적인 사유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의 새로운 하나님 경험이 지난 2천년 동안
기독교 역사 안에서 훨씬 풍요로워지고, 심화했습니다.
오늘 우리도 그런 과정 안에 들어 있겠지요.

다시 나우엔의 이야기.
미선이 님은 침묵 가운데서 축복의 음성 듣기가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다고 했지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요?
혼자서 산책할 때 우리는 침묵하지만 훨씬 근원적 평화를 맛볼 수 있지 않나요?
음악가들이 작곡할 때 사람들과 말하면서 하나요?
하나님을 향한 기도는 일종의 침묵이기도 합니다.
내가 지금 설교조로 말해서 미안합니다.
나우엔의 글이 나에게는 너무 절실하게 와 닿는데,
그걸 추상적이라고 말씀하시니,
더구나 신학적으로나 세계관에서 매우 진지하고,
진리를 향해 거의 용맹정진하고 있는 분이 그렇게 말하시니
당혹스러워서 이렇게 쓰게 되었습니다.
나우엔의 정신적 전통이라 할 중세기의 신비주의자들,
예컨대 마이스트 에크하르트 같은 사람에게서 저는
말할 수 없는 생명의 깊은 외침을 듣습니다.
그런 영성에서 저는 바깥 세계를 향해 나를 열고
정의와 평화 운동들과 연대할 수 있습니다.
그런 영성가들의 노래와 예언이 추상적이고 모호하다니...

오늘은 종교개혁 개념일입니다!!!!

06·10·31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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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선이 글
 
 

정용섭 목사님께..

목사님의 답변 감사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저는 '하나님의 눈'이 무언지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아직 신학적 소양이 덜 되어서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고 목사님이 그 같은 이해를 제가 거부한다거나 못받아들인다는 얘기가 아니라
그러한 식의 이해라면 그것은 누구에게나 또 구구절절 해석이 가능한 "하나님의 눈"이 될 것입니다..
체제와의 투쟁, 연대감, 고난과 생명의 신비를 맛볼 수 있는 삶의 능력 등등

이것은 소위 영성 담론에서 볼때도
흡사 영성이란 무엇이냐고 했을 때 나오는 답변들이랑 비슷한 듯 하네여..
물론 혹자는 이를 보고서
"영성이란 곧 하나님의 눈을 바라보는 것이다" 라고 얘기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제겐 이런 언술은 거의 <동의반복>에 지나지 않습니다..

추상적이고 모호한 언술의 특징은
그것이 매우 뚜렷하게 다의적으로 분화가능하다는 점입니다..
물론 모든 언어와 개념들은 기본적으로 다의적으로 분화가능하지만
특히나 보다 추상적이고 모호한 개념들의 언술일수록
그것은 여러 갈래로 분화되는 성격이 아주 강하게 높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기에 이러한 저의 비판에 대해 시를 물리학적인 개념분석으로 하고 있다거나
그걸로 환원된다는 보는 얘기들은 핀트가 어긋난 차원의 얘기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헨리 나우웬의 글을 시라고 보시기도 하시니
그것이 추상성이 높은 메타포들의 향연이라는 점은 인정하시나보군요..

메타포 혹은 온갖 레토릭들의 향연들은 구체적인 근거와 데이터에 기반해서 나오기보단
그저 직관적 느낌에 따라 위에서 아래로 주어지는 것이기에
그것은 설교조가 되기 십상입니다.. 근원적 평화? 솔직히 그런 것이 무엇인지요?
제게 있어선 그런 기술들은 여전히 불분명하고 모호할 따름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제가 개인의 성령체험이나 개인의 직관적 신비체험의 차원 자체를
제가 아예 부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단지 개인의 신비체험도 이를 밖으로 표현하는 그 순간부터 그것은
사적 영역이 공적 영역으로 노출되는 것이기에 서로 이해할 수 있는 터전이 마련될 수 있도록
그 개인의 직관적 신비체험에 대한 타당성 있는 설득적 기술이 요구된다는 사실입니다..
구체성은 이 부분에서 더욱 크게 요구되는 것이구요..
제가 보기엔 이런 점들은 조현아님 같은 분들의 특징이 갖는 문제점들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종교인들은 "체험해보면 안다"라고도 얘기하곤 하죠..
이것은 제게도 너무나 당연한 말이면서 동시에 별로 비생산적인 동의반복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체험 신앙을 어떻게 구체적 말로 표현할 수 있느냐? 할 것입니다..
당연히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때 제가 지적하고자 하는 부분은 이런 얘기가 곧바로
설득력 있는 구체화의 요구 자체를 아예 묵살하고 있는 바로 그 지점입니다..
하나님의 눈 이라는 메타포들도 소중하지만
가능하면 서로 소통할 수 있는 구체적 언술들로 같이 갈 수 있어야 하지 않나요?

새로운 기독교를 염원하는 돈 큐빗에 책에도 이런 말이 있더군요..
그리스도인들은 "저들끼리만 통용되는 비밀언어"가 있다고..
다시 한 번 누누이 얘기하지만 저는 이를 소통의 차원에서 지적하는 것이지
바깥언어로 환원되어야 한다는 얘긴 결코 아님도 덧붙여 말씀드립니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저로서도 목사님께 더욱 의문이 하나 듭니다..

전통 기독교의 삼위일체는 목사님 지적한 대로 플라톤의 직접적 영향이 큽니다..
기독교 안에는 분명히 헬라철학의 존재론이 깔려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보수 기독교인들도 어렴풋하게 인지하고 있듯이
헨리 나우웬이나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토마스 머튼 혹은 떼이야르 샤르뎅 등등
이런 자들의 밑바닥에 있는 해석학적 존재론과는 충돌하지요..

다시 말해서 저는 삼위일체를 헬라적으로 보진 않는 입장입니다만..
만일 목사님께서 삼위일체를 전통 기독교의 범주 해석에서 받아들이고 있다면
헨리 나우웬 혹은 에크하르트 등등과 어떻게 양립가능 할 수 있는지요?

사실상 조현아 님 같은 보수 기독교인들이 헨리 나우웬을 맹렬히 비판하는 그 밑바닥에는
바로 이 부분이 부지불식 간에 문제있는 충돌로서 깔려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 부분은 무언가 언뜻 자신들이 그동안 가지고 있었던 신념(신앙)체계들을
헨리 나우웬 같은 영성가들이 건드린 게 있었던 터라 저토록 맹렬히 비판하고 있는 것이라고 봅니다..

이원론에 아주 익숙한 보수 신앙인들에게는 헨리 나우웬이 언뜻 은혜스럽게도 보이겠지만
근원적으로 따져보면 자신이 지닌 것과는 근본적으로 체계가 다른 것으로서 읽히지요..
헨리 나우웬을 비롯하여 에크하르트도 그렇고 토마스 머튼도 그렇고
사실 이들은 전통 기독교의 존재론적 시스템에 맞지 않는 언술들이 종종 나오곤 하니까요..
저들은 이들을 기독교안에 스며든 뉴에이저 영성가들로 분류하곤 합니다..
어쨌든 이렇게 볼때 저들이 헨리 나우웬 같은 영성가들을 비판하는 그 맥락도 저로선 설명이 가능하지요..
그리고 그 이면에는 제가 지금 제기하는 바와도 연관되어 있는 문제이구요..

우리가 해석학적 존재론에 대한 첨예한 고찰을 철저히 파고 들어갈 경우
마르크스주의와 기독교가 근원적인 밑바닥에서는 서로 양립불가능처럼 충돌하고 있듯이
전통기독교와 헨리 나우웬 같은 영성가들과는 충돌하는 느낌을 가졌던 것입니다..
하나의 머리 속에 두 가지 충돌나는 존재론적 패러다임을 가지고 있다는 건 모순일 것입니다..

즉, 그렇다면 목사님께서는 이러한 충돌자체가 없다고 보시는 건지
혹은 알면서도 무시하고 계시는 건지 의문이 들어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답변을 주시면 제가 다시 재차 답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06·10·31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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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섭 목사님의 글
 
 
나우엔의 이야기는 여기서 마무리 짓는 게 좋겠군요.
저도 많은 걸 배웠습니다.
오늘(10월31일) 저녁에 대구에 나가서
김준우 교수의 강의를 듣고 왔습니다.
종교개혁 특강이었습니다.
정직한 신앙과 신학을 추구하는 분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런 목소리도 역시 기독교의 다양성 안에서 소화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신학의 중심에서는 크게 새로울 건 없지만
교회 현장에서는 경청해야 할 부분이 많더군요.
정세웅 목사님,
종교개혁 기념일이라는 말은 특별한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루터가 천착한 문제가 오늘 우리에게도 현실이라는 점을 넌즈시 말한 것뿐입니다.
현실 교회를 살리는 개혁의 길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겠지요.

06·11·01 0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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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선이  글
 

네에 알겠습니다.. 정목사님..
저 역시도 전부터 알고 있었던 헨리 나우웬이지만
그다지 비판을 하고 싶었던 사람은 아니었기에 이번에 처음 내뱉게 된 거 같은데
아무래도 나우웬 비판은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지 않을까 싶네요..

어쨌든 중도쯤 되는 복음주의 진영에선 나우웬이 좀더 인기가 있을진 몰라도
진보 진영에선 헨리 나우웬이 간간이 언급되긴 해도 복음주의 진영만큼
그다지 관심하는 분위기는 아닌 듯 싶어요..
거기에다 제가 보는 나우웬 관점에선 조현아님 같은 보수 기독교인들이
나우웬을 그렇게 보는 맥락도 짐작이 가는거죠.. (물론 거기에 동의한다는 얘긴 아니죠..)

아 그리고 제가 목사님께 드린 그 질문은 답변을 잠시 유보하신 건지 다른 무엇인지는 몰라도
혹시라도 언제든지 시간이 괜찮으실때 답변을 주셔도 괜찮겠습니다.. 얼마든지요..

말씀하셨듯이, 교회는 늘 끊임없이 개혁되어야 하겠지만 오늘날은 특히나
좀더 심각하게 현실교회를 제대로 살리는 길이 어떤 것인지
분명하게 모색해야될 시점인 것만은 확실한 거 같아요..
기회가 되면 또 뵙지요..

주님의 평화~!!
 
06·11·01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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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략 여기까지가 헨리 나우웬을 보는 시각과 그에 따른 논쟁이었고
이후에는 나 자신이 정용섭 목사님께 보다 근본적인 질문을 던짐으로써
기존의 전통 기독교에 대한 이해를 논하는 논쟁으로 다시금 촉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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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섭 목사님의 글
 
 
미선이 님,
또 이 꼭지에서 글을 쓰게 만드네요.
나중에 시간이 날 때는 또 잊을지 모르니까 간단히 한 마디만 하겠어요.
질문의 핵심은 전통적 삼위일체론과 나우엔 식의 사유 방식이 양립가능한가, 하는 거였죠?
가능하다 말다요.
여기서 전통적인 삼위일체가 무엇을 말하는지는 더 설명이 필요하겠지만,
그런 건 접어두고 단지 삼위일체 개념에 근거해서 본다면
미선이 님이 천착하고 있는 화이트헤드의 철학과도 얼만든지 소통이 가능합니다.
삼위일체는 하나님과 세계의 관계를 해석하려는 테미놀로지입니다.
하나님이 역사 초월적이면서도 동시에 역사 내재적인 분이며,
더 나아가서 영으로 존재하는 분이라는 인식론적 언어개념입니다.
과연 그런 분이 실체론적으로 가능한가, 하는 질문은 늘 열려 있어요.
삼위일체론은 비록 플라톤의 실체론적 형이상학의 영향을 받았지만
거기에 머물러 있지는 않습니다.
이렇게 말하기 시작하면 쓸데 없이 가지치기가 되니까 요약적으로 말해야겠군요.
(혹시 다른 독자들 중에서 삼위일체를 공부하고 싶은 분은
몰트만의 책도 있고, 또는 이 다비안의 온라인 강의에도 조금 있으니까 참고하세요.)
마이스트 에크하르트, 매튜 폭스, 토마스 머튼, 루이스, 그리고 나우엔의 영성은
당연히 성령의 하나님, 또는 창조자로서의 아버지(또는 어머니) 하나님 안에서
얼마든지 접촉점이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산고의 고통 속에 있는 어머니와 함께 하며,
아우슈비츠에서 살해당하는 그들에게 함께하고,
양자 역학을 실험하는 과학자들의 그 행위에도 함께 합니다.
내가 베낀 글에 올린 나우엔의 글에 있듯이
정신장애우들에게서도 하나님의 통치와 구원이 함께 하실 수 있습니다.
이런 걸 합리적으로 설명하지 않으면 모호하다고 생각하나요?
이 모호성 문제는 그만 두기로 했지요.
전통적 삼위일체론은 현대의 그 어떤 과학으로도 모든 해명이 불가능한,
여전히 종말론적으로 열려 있는,
그래서 그 세계를 창조한 그분에 의해서만 완성되고 해명될 수 있는 이 세계를
훨씬 역동적으로 해석하고 그 안에 참여하고,
그리고 궁극적으로 기다릴 수 있는 그리스도교 영성입니다.
아무래도 사족으로 한 마디 더 해야겠군요.
전통 기독교 도그마는 기본적으로 영성의 문제입니다.
교리가 먼저 있고,
또는 교리에 의해서 영성이 해명되는 게 아니라
영성에 대한 경험을 설명하는 논리로 교리가 나오게 된 것입니다.
비록 나우엔이 전통 삼위일체를 언급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의 영적 체험은 당연히 삼위일체 안에서 해석이 가능합니다.
과학도 역시 경험이라는 건 말지요?
화이트헤드도 역시 그런 방식으로 이 세상의 reality를 해명한 것이겠지요.
화이트헤드가 모든 실체를 실증적으로 증명했나요?
과정이 리얼리티라고 해석할 수는 있지만 증명될 수는 없어요.
아니 화이트헤드의 논리 안에서는 증명이 될지 모르지만
그것은 여전히 잠정적인 것이겠지요.
틀렸다는 말이 아니라 새것이 올때는 낡은 것은 자리를 비켜야하는 것처럼
그의 논리는 그런 잠정성을 벗어날 수 없다는 말이죠.
뉴톤이 결국 물러나야했듯이....
그러나 화이트헤드는 최선으로 문제를 해결해보려고 한 사람인 것만은 분명하지요.
여전히 설득력이 있는 사람이구요.
다만 그도 역시 20세기 사람입니다.
앞으로 몇 세기, 또는 몇 백 세기가 흐르면
리얼리티 이즈 어 프로세스, 라는 그의 명제가 전혀 달라질 수도 있을 겁니다.
그게 이 세계의 신비가 아닐까요?
화이트헤드는 미선이 님이 전공이니까 내가 괜히 끼어들었다가
챙피만 당할 테니까 그분 이야기는 없었던 것도 하지요.
다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삼위일체는 현대물리학의 세계와도 여전히 소통된다는 사실입니다.
장자의 도, 하이데거의 존재, 화이트헤드의 과정은
성령론적인 지평에서 설명이 가능합니다.
(이렇게 동양사상과 서양사상을 뒤범벅으로 말하다가는
이길용 박사에게 핀잔을 들을지 모르겠네요.)
결론:
나우엔의 영성과 그 해명은 삼위일체론과 양립할 수 있습니다.
(이 문제는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06·11·01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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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선이  글
 

정 목사님.. 친절하신 답변에 감사합니다..

제 질문은 이곳에 나우웬 얘기가 나와서,
전통적 삼위일체론과 나우엔 식의 사유 방식이 양립가능한가, 하는 거였겠지만
사실은 오히려 목사님께 전부터 드리고 싶었던 좀더 본질적인 물음은
목사님께선 적어도 기존의 전통 주류 기독교의 핵심 신조들은 긍정하고 계시면서 지금 열거하신 분들 즉, 마이스트 에크하르트, 매튜 폭스, 토마스 머튼, 나우엔 등등 (루이스는 분명치 않아 좀 뺐음)이 그것과 근원적으로는 양립가능한가 라는 물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보기에 양자는 근원적으로는 존재론의 도식에서 양립가능하지 않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목사님께선 가능하다고 보시는 거 같아요..

특히나 언급한 분들 중 마이스트 에크하르트, 매튜 폭스, 토마스 머튼 같은 사람들의 기독교 사상은 기독교 밖의 영성가들 불교에서까지도 우호적으로 볼만큼 기존 기독교의 시스템과는 다른 존재론적 시스템에서 하나님과 예수 그리고 세계를 보는 이해와 해석을 깔고 있다는 점입니다.. 물론 화이트헤드도 큰 사유의 스케치에서 보면 이들과 비슷한 흐름에 서 있다고 볼 수도 있겠구요..

기독교 형성과정에서 볼 때 삼위일체를 비롯하여 우리가 이미 그 개념을 부여받았을 때
플라톤의 형이상학에 기반할 경우, 신은 내재가 아닌 초월의 원리에 기반한 신이 될 뿐입니다..
플라톤을 신학에 적용시킨 어거스틴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부동의 동자(Unmoved mover) 개념으로 기독교 신 개념을 세운 토마스 아퀴나스나 여기에는 내재가 아닌 초월의 원리로서의 신 이해라고 봅니다.. 신은 전적으로 세계에 대해서 초월적이며 세계의 간섭과 영향을 받지 않는 존재인 거죠.. 그럴 경우 예컨대, 고난이나 고통 받는 신 개념이라는 것은 전통 기독교의 전능자 초월자로서의 신 이해에서는 매우 이해가 힘든 것입니다..

악의 책임성을 말할 때 근원적으로는 신의 전지전능성이 아닌 신의 (자기)제약적 성격을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지요.. 노장사상이 플라톤의 이원론과 양립가능할 수 없듯이 이들과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교리가 먼저 있고, 또는 교리에 의해서 영성이 해명되는 게 아니라
영성에 대한 경험을 설명하는 논리로 교리가 나오게 된 것이라고 하셨는데, 이점은 저역시도 동의하는 바입니다..

바로 그래서 저는 기존 기독교 교리에는 현실 경험에 대한 설명들을
온전히 구제하지 못하고 오류를 보이는 측면들이 (신론이든 기독론이든..) 있다고 보기에
다시 재수립해야 한다고 보는 거구요.. 제가 말하는 새로운 기독교란 것도 이런 측면이 되겠죠..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은 기존의 전통 기독교 밑변에 깔린 플라톤의 형이상학을 대체하기 위해서 저는 끌어들이고 있는 것이랍니다.. 그의 ontology와 cosmology는 경험주의나 현대 물리학에 기반하면서도 유신론을 표방하고 있기에 아주 유용하다고 보는 것이겠구요.. 물론 그렇다고 해도 기존의 전통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 개념과는 좀 차이가 있겠지요.. 무신론이 나온 이후에도 가능할 수 있는 유일한 신 이해라는 평가도 있죠..

그리고 말씀하신대로 그런 화이트헤드도 언젠가는 자리를 내주겠지요.. 그 자신도 '논리적 정합성'과 '실제적 적용'에서 언제든지 오류가 보일 경우 과감히 수정 또는 폐기 처분할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사유의 역사는 언제나 활기찬 개시와 무기력한 종말을 보여왔었지요.. 언급하신대로 단지 최선으로 지닐 뿐이며 언제든지 화이트헤드보다 더 유용한 사유들(해석학적 도구들)이 있다면 당연히 화이트헤드도 뒤안길로 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는 한에서 유용성을 갖는다고 보는 거구요.. 목사님 표현대로 잠정적이겠지만 동시에 최선이라고 생각해요.. 화이트헤드가 왜 유용한가 하는 점들은 이미 제 책에서도 좀더 자세히 고찰된 바 있습니다..

삼위일체라는 개념 자체가 이미 플라톤의 형이상학이 깔려 있는 개념으로서
우리에게 이미 주어졌다면 저는 결국 서로 충돌날 수 밖에 없다고 봅니다..
하지만 여전히 삼위일체를 비롯한 기독교의 기존 신학적 개념들을 플라톤의 형이상학마저도 비판하고
넘어서서 새로운 해석의 툴로서 다시 재해석한다면 여전히 가능성은 있는 것이지요..

제가 그동안 목사님의 글에서 느낀 문제의 본질은 바로 이 부분, 형이상학에 대한 문제의식이
목사님에게선 뚜렷하지 않고 모호하게 뒤섞여 있었다는 점이었습니다..
무릇 어떤 언어나 개념들도 그것이 놓여있는 배경에는 궁극적으로 형이상학의 지평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 문제는 일반 해석학에서 말하는 '전이해'나 현대 물리학에서 말하는 '관찰의 이론 의존성' 뭐이런 것들과도 연관되는 얘기들이죠..

아무튼 서구철학은 헤겔에 이르기까지 이를 플라톤의 각주라고 볼 만큼이나 플라톤의 그늘이 짙게 배여있습니다.. 플라톤과 데카르트는 양립가능 할 수 있겠지만, 그러나 플라톤과 데리다는 양립가능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헤겔과 들뢰즈가 서로 양립가능하기 힘들고, 유물론에 기반한 마르크스주의와 신존재를 말할 수 밖에 없는 기독교의 사상과는 그 궁극적 지평에서 충돌합니다..

바로 그런 점에서 언급하신 마이스트 에크하르트, 매튜 폭스, 토마스 머튼, 나우엔 그리고 떼이야르 샤르뎅까지 포함해서 이런 사상들은 화이트헤드를 포함해서 동양의 사상들과도 많은 흡사함을 둘 수 있겠지만, 적어도 플라톤의 형이상학과는 근원적으로 그 존재론적 시스템이 다르다고 보기 때문에 저는 충돌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궁극적 기원은 이천 년 전 이 땅에 오신 나사렛 예수의 역사적 행태에서 궁극적으로 비롯된다고 봤을때, 이 예수의 언행을 해석하는 해석의 툴을 일찍부터 초기 기독교의 변증가들과 교부들은 당시 지식인 사회에서도 고등한 사상으로 평가받고 있던 헬라철학의 영향과 빚을 져 왔다는 점입니다..

바로 그래서 저로선 기존 기독교에 그동안 깔려 왔었던 헬라철학의 지꺼기들을 씻겨내고 그 기초에서부터 다시 재수립해야 한다고 보는 거구요.. 이천년 전의 예수사건, 이분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다시 재해석 재수립 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무조건 기독교 전통을 죄다 버려야 한다는 주장은 결코 아니랍니다.. 어차피 모든 경험들조차 해석활동이니 꼭 그럴 필요가 없겠지요.. 예컨대, 성육신 같은 개념은 헬라적이라기보다 오히려 히브리즘의 젖줄에 더 가까울만큼 반이원론적인 신학적 개념입니다.. 이런 교리들은 전통 기독교 교리에도 있겠지만 제 입장에서 보더라도 오히려 더 살려야 할 신학적 장치들이죠..

어쨌든 궁극적 지평에 해당하는 <형이상학에 대한 첨예한 문제의식>을 갖지 못할 경우
우리가 쓰는 개념들은 현상적 표피층에선 서로 뒤섞이고 얽혀버리게 되어
혼재된 모순들을 알게 모르게 겪게 된다는 점입니다..

솔직히 목사님께서 그동안 설교비평을 비롯한 여러 얘기들을 통해
타성에 젖어있는 일반 기독교인들의 의식들을 잘 일깨워주시고 계신다는 점에 있어선
저로서도 고마움을 참 많이 느끼고 (목사님의 인격을 포함해서) 배울점도 참 많다고 여겨지지만
한편으로 정말로 정직하게 말해서 제가 정목사님에게서 그 사유가 철저하지 못한 부족함을 느꼈던 지점이 바로 이 부분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저도 글이 길어졌네요.. 할 얘기들은 더 많지만 이만 줄입니다..
물론 제가 보는 시각이 틀렸었을수도 있겠지요.. 그럴경우
저로선 목사님의 정합적이고 구체적 근거에 기반한 반론이라면 언제든지 환영하는 바입니다..

이번에 저희 세기연에선 정목사님을 초청하려 했었는데 서로 간에 일정이 안맞아서
저희로선 아쉬움을 달랠 수 밖에 없었답니다..이미 구미정 선생님을 통해 알고 계실 거라고 봅니다..
기회가 되면 다음 번에라도 정목사님을 모실 기회가 있길 바라겠습니다.. 평안하십시요..

주님의 평화 ~!!

06·11·01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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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섭 목사님의 글
 

 미선이 님,
이제야 문제의 핵심이 무엇인지 손에 잡히는군요.
미선이 님의 주장이 왜 내게 와 닿지 않는지가 말입니다.
미선이 님은 기독교의 중심 교리를 일부 수구적 보수주의자들과
거의 똑같이 이해하고 있으시네요.
플라톤의 영향을 받은 기독교 교리는 이원론적이고,
초월적이고, 실체론적이라는 생각을 확신하고 있군요.
왜 그런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할까요?
초기 기독교가 헬라 철학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에게 완전히 의존하고 있는 게 아니며
성서적인 전통과 예수 그리스도 경험에 의해서
새로운 하나님 이해로 지양되고 있다는 점을
내가 그렇게 누누이 말해도 별로 귀를 기울이지 않네요.
결국 수주적 보수주의자들의 생각하는 기독교 교리가
바로 미선이 님의 생각과 다를 게 하나도 없다는 거예요.
수구적 보수주의자들은 그걸 우격다짐으로 지켜내려고 애쓰고,
미선이 님은 그걸 무조건 허물어내려고 애를 쓰네요.
극과 극이 통한다는 말이 여기에 해당되는 것 같군요.
이렇게 내가 과격하게 표현하는 이유는
미선이 님이 내가 하는 말을 전혀 듣지 않고
자기주장만 일방적으로 내세우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 교리가 실체론적 형이상학이 아니라고 했는데도,
미선이 님은 그걸 단정한 채로 자기 논리를 전개하네요.
전통적 삼위일체 교리는 우주 공간 어디에 자리하고 있는 하나님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내가 여기서 삼위일체론을 강의할 생각은 없어요.
하나의 예만 들면,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는
변증법적으로 이 세상을 통치하는,
미선이 님이 그렇게 강조하는 기독교의 형이상학입니다.
삼위일체의 하나님은 초월적인 내재성을 갖고 있지만
동시에 이 세상을 경륜하는 역사성도 갖고 있습니다.
내재와 경륜이 변증법적인 관계를 맺고 있어요.
여기서 말하는 내재는 역사 내재의 내재가 아닙니다.
오히려 경륜이 역사 내재의 내재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경륜, 또는 구원하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따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통치로서, 계시로서, 나라로서, 사랑으로서 존재합니다.
기독교의 계시론만 정확하게 이해해도
하나님의 플라톤적인 실체론적 형이상학은 극복됩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자기계시입니다.
하나님이 따로 있고 계시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계시가 곧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통치이고, 운동이고, 과정이고, 변화입니다.
그러니까 기독교 신론에서는
유신론과 무신론은 의미가 없습니다.
미선이 님,
기독교의 전통 교리를 비판하려면 기독교 신학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조금 더 살핀 다음에 해야 합니다.
안티 기독교 사람들처럼
무조건 기독교를 싸잡아 가부장적이다, 제국주의적이다,
초월적이다, 해서 비판하면
아무도 듣지 않는답니다.
물론 위의 표현이 모두 미선이 님에게 해당된다는 게 아닙니다.
미선이 님에게는 주로 기독교의 초월적 형이상학이 문제겠지요.
그게 아닌데 자꾸 그렇다고 고집을 피우시니,
플라톤의 영향 때문에 그렇다고 고집하시니
나로서는 좀 난감하네요.
좀 심하게 말해서
그건 선동을 될 수 있지만,
혹은 교회 밖에서 논의는 될 수 있지만
교회 안에서,
신학 안에서의 대화는 불가능합니다.
그런 방식으로는 결코 기독교 형이상학을 재구성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말해서 미안하지만
판넨베르크의 <신학과 철학>,
몰트만의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나라>,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역사>을 읽어보세요.
만약 그 책을 읽고서도 똑같은 방식으로 말할 수 있다면
그때 다시 이야기 할까요?
기독교 신학은 이미 플라톤의 이원론적 초월주의를 극복했답니다.
사실 플라톤 사상을 그렇게 만만하게 볼 수도 없지만요.
미선이 님이 알고 있는 기독교 교리가 과연
신학적으로 정리된 것인지 잘 생각해보세요.
어제 김준우 교수의 강의를 듣고도
미선이 님에게 느끼는 그런 비슷한 걸 느꼈어요.
내가 보기에는 별로 새로운 게 없는데도 불구하고
“예수 세미나”의 역사적 예수 이해가
기독교를 새롭게 하는 데 굉장히 중요한 것처럼 말씀하시더군요.
그분이 말한 건 두 가지입니다.
1. 전통적 기독교는 신화적 교리에 묶여서 신자들을 잘못 이끌어왔다. 십일조 강조, 제국주의적 신앙, 율법적 신앙, 핵심적으로 그런 것은 모두 모세종교이다.
2. 그런 문제들은 기독교 교리가 신화적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사적 예수를 알아야 한다.
이런 이야기는 별반 새로운 게 없잖아요.
신대원 2학년만 되어도 불트만의 신화화 논쟁에 대해서 알잖아요.
수구적 집단만 제외하고 오늘 성서의 신화문제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지금 신학은 그걸 넘어서
정치신학, 역사신학, 자연신학으로 그 지평을 확대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김 교수는 예수의 동정녀 탄생을 말하면서
생물학적인 문제가 아니라 신앙고백이라고 하더군요.
그런 거 정직하게 신학을 공부한 사람이라고 한다면
아무런 문제도 안 되는 거 아닌가요.
지금 누가 동정녀 문제를 생물학적으로 진리라고 생각합니까?
내가 왜 우리의 논의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김준우 교수를 끌어들이냐 하면,
김 교수나 미선이 님이나 크게 오해하는 게 있기 때문입니다.
두 분 모두 수구보수주의자들이 알고 있는 기독교를
전제하고 자기의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는 겁니다.
두 분 모두 기독교는 초월주의자들이고, 이원론적이고,
율법적이고, 제국주의적이고, 실체론적 형이상학이라고...
이런 생각을 전제하고 있어요.
이게 정확한 이해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내가 아니라고 말을 했는데,
그렇다면 왜 아닌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야지
다시 그걸 전제한 채 자신의 이야기를 하시는군요.
안티 기독교에 속한 사람들은
기독교를 자본주의와 일치하는 것으로 단정합니다.
그렇지 않다고 아무리 말해도 소용이 없어요.
수구 보수주의자들의 기독교 이해와
미선이 님의 기독교 이해,
그리고 안티 기독교인들의 기독교 이해가
일단 비슷하게 보입니다.
물론 그 해결에서는 다른 입장을 보이지만요.
흡사 레드 콤플렉스를 가진 사람에게는
북한이 무조건 나쁜 놈들처럼 보이듯이
미선이 님에게는 전통적인 기독교 교리가
이원론적이고 초월적인 형이상학에
완전히 물들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지 모릅니다.
그 전제된 기독교 이해를 다시 검토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대화는
다람쥐 쳇바퀴 도는 격이 되고 맙니다.
내가 수구 보수주의자들에게서 느끼는 답답증을
미선이 님에게서도 느낀다면
도대체 어디에 문제가 있는 걸까요?
말이 길었습니다.
기독교 교리의 체계 자체를 재구성하겠다는 미선이 님의 열정을
저는 진심으로 높이 삽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세요.
그런 일들은 별로 새로운 게 아니라
이미 기독교 역사에서 해결된 것은 아닌지 말입니다.
오늘 제 이야기가 다시 설교 조가 되었지요?
제 버릇 개 못준다고 합니다.
언제나 이런 버릇을 고치려는지.
(그나 저나 다비안 님들은 이런
담론을 지겨워하지 않을래나....)
ps. 제가 위에서 조금 과격하게 표현한 걸 이해하세요.
속으로는 별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있어요.
미선이 님의 그 학문적 치열성과 변혁의 에너지를
부러워하고, 좋게 평가합니다.
다만 그렇게 열리신 분이
왜 수구보수주의자들과 비슷하게
기독교에 대한 편견을 갖고 있을까, 그게 궁금한 거에요. 
06·11·01 2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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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선이의 글
 
 
정용섭 목사님의 답변 감사합니다..
 
이제 좀더 목사님과 저와의 차이와 대비가 점점 더 뚜렷하게 드러나고 있는 거 같습니다.. 제가 읽기에는 결국 목사님께선 이미 초기 기독교 때부터 헬라철학의 영향을 극복하고 있다고 말씀하고 계신 걸로 여겨집니다. 다시 말해서 이미 삼위일체 개념을 비롯하여 전통 기독교는 플라톤의 찌꺼기들을 극복하고 있으며, 점점 더 지양되고 있다고 보는 거 같습니다. 그게 아니면, 설마 플라톤의 사상 자체가 이미 초월적이고 실체론적이 아니라고 주장하시는 건 아니실테죠?

저는 기독교의 그 궁극적 기원이 이천년 전 예수사건에서부터 비롯되고 있는 것이라고 볼 때, 초기 기독교가 예수의 말씀과 행적을 보존하고 계승하게 되면서 그에 따라 점점 해석이 가미되고 거기에 헬라철학이 상정하고 있었던 세계관이 점점 자리하게 되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즉, 어떤 면에서 본래의 이천 년 전 실재적 예수(real jesus)에서 점점 멀어지면서 <헬라화>되어갔고 결정적으로는 로마 제국 하에서 국교화되면서 니케아와 칼케돈을 비롯한 공의회들의 결정들이 지속적으로 지금까지조차 그 결정적 영향을 끼쳐왔다고 봅니다. 심지어 16세기 종교개혁이라고 불리는 그 운동조차도 그 점에선 이를 계승하고 있지요.. 이를 라가츠는 “종교개혁의 타락”이라고도 얘기하기도 하더군요..

자, 그러면 본격적으로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헬라철학의 찌꺼기들을 정말로 극복하고 있는지.. 적어도 그 핵심에 있어선 극복하고 있다고 보는 게 정목사님의 시각이기에.. 제가 이에 대한 반론들을 조목조목 드리면 되는 거 맞죠?

알다시피 초기 1세기만 해도 사실상 오늘날 우리가 정통 교리라고 부르는 신조들은 거의 없이 지냈던 때였습니다. 그럴 필요도 없이 그것은 함께 있었던 예수로부터의 생생한 종교적 통찰들이 아직 가시지 않은 때였고, 단지 종말이 지연되면서 그것은 예수의 언행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 속에 혼재되어 갔었을 뿐입니다. 그러다가 극심한 외부 이교도의 사상들의 침투와 다양한 해석들의 난립에서의 기준 확립의 필요성에 의해 점점 기독교의 교리적 체계들을 하나씩 정리해나가는 과정이 필요했었습니다.

사실 초기 기독교의 헬라철학에 기반한 기독교 신조 확립들의 흔적들은 너무나도 많아 일일이 지적하기조차 힘들 정도입니다.. 교회사가로 유명했던 아돌프 폰 하르낙은 말하길, “기독교는 헬라철학의 옷을 입은 종교라기보다 종교의 옷을 입은 헬라철학”이라고까지 말할 정도였지요.. 어쨌든 기독교 사상사에서 그 사례들은 너무나도 많습니다..

예를 들면, A D. 2세기 초의 경우에도 순교자 저스틴 같은 교회 변증가도 스토아 사상, 아리스토텔레스 사상, 피타고라스 사상, 플라톤 사상에 열렬한 철학도였지요.. 그는 그러한 기독교 밖의 헬라철학적 어휘들을 사용하면서 기독교를 변증합니다.. 어디 저스틴만 그런가요? 이레네우스, 아리스티데스, 타티안, 아데나고라스, 안디옥의 데오필루스, 터툴리안 같은 신학자들도 모두 기독교인으로 되기 이전부터 이미 희랍철학을 받아들이고 있었던 자들이였습니다.. 그 뿐인가요.. 클레멘스, 오리게네스, 유세비우스, 제롬, 보에티우스 등등 이들 모두 희랍철학의 수혜자들이었습니다..(혹시 노파심에 하는 얘기지만, 이거 제가 이름만 나열하고 넘어간다고 생각하시면 곤란합니다.. 필요하면 언제든지 제시할 수 있는 논증들이란 점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희랍철학이란 것은 세계 이해에 있어 관념적 이원론으로서의 개념 체계들이죠.. 이들은 이를 가지고 기독교 체계의 주류 토대들을 점점 놓는 쪽으로 형성해나갔었습니다.

이미 당시 로마교회는 희랍의 그리스-로마 사람들이 중심이었고, 세계를 설명하는 이해로서 당시 헬라문명권의 사유들을 끌여들였던 것입니다.. 그러한 과정이 자연스러웠던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것이 기독교 전파의 용이성 때문이었죠.. 헬라철학의 토대로 해석된 기독교는 당시 희랍철학에 경도되었던 로마 사람들을 비롯한 일반 지식인들에게도 매우 고급스럽게 들릴 만 했으니까요..

솔직히 조금 긍정적으로 볼 경우 1세기의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서를 비롯한 신약의 신학과 그리스 철학 사이에 강한 대조가 어느 정도 있었다면, 2, 3 세기의 주도적 그리스도인들은 헬라 문화와 세계관으로부터 큰 통찰력을 사용하여 그 기독교 사상을 좀더 체계화로 끌고 나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일찍부터 받아들인 섭리주의 사상이나 교의체계, 영혼불멸설과 목적론적 사관 등은 희랍철학과 사상에서 나온 것이었고 본래 기독교의 것은 아니었죠.. 기독교의 신 이해가 희랍의 <데미우르고스>라는 섭리 신이 그 밑변에 깔려있었다고 말한다면 아마도 처음 한국 기독교인이라면 놀랄 만합니다.. 그러나 꼼꼼하게 기독교 교리사들을 살펴보면 여지없는 얘기입니다. 초대 변증가들의 문헌에는 다음과 같은 얘기들도 있습니다.

“우주가 있다는 사실만 보아도 우주를 조직할 신적이 장인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된다. 군주적이고 주님이 되시는 그 분은 인간을 위하여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 썩지 않고 변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그 분의 명령으로 실재는 무로부터 창조되어 존재하게 되었다. 그 분 하나님은 피조되지 않았고 시작도 끝도 없으시다. 그러기에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을 만물의 창조주요 데미우르고스(Demiurgos)라고 인정하고 그 분외에 다른 신을 경배하지 않는다“

여기서 낯설게 보이는 <데미우르고스>라는 단어만 빼면 오늘날 믿고 있는 전통 주류 기독교의 신 이해와도 거의 다르지 않습니다.. 여기서 데미우르고스는 데미우르지(Demiurge)의 근원적 개념으로 이 말은 플라톤이 말한 창조자라는 의미인데, 후에 교부들이 이를 사용하여 기독교가 말하는 하나님이라는 개념으로 정착되었지요..

그렇지만 이런 흔적들은 아주 일찍부터 있었지요. 왜냐하면 당시 유대교가 이미 헬라화하고 있었던 과정이 먼저 있었고, 후발 주자였던 기독교 역시 이를 답습했었던 것입니다. 유대교의 헬라화에 결정적 역할을 했던 사상가는 알렉산드리아 유대인 학자였던 필론이었는데, 그는 유대교의 야훼와 플라톤의 신 이해를 동일시키고 있었고 섭리 신앙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유대교 보다 헬라화 과정의 후발주자였던 기독교는, 그 교부들이 바로 이 필론의 철학 저작들을 수없이 직간접으로 탐독하고 인용했었다는 사실입니다.. 필론의 그 신학적 포맷들은 서구 기독교 형성과정의 신 이해나 세계 이해에도 매우 깊은 영향을 끼쳤지요.. 그리고 그러한 헬라화 과정의 결정판은 결국 중세에까지 이르러 어거스틴(플라톤)과 토마스 아퀴나스(아리스토텔레스)에서 뚜렷한 모양새를 보이고 있음은 말할 나위 없지요..

만일 목사님께선 이들의 신 이해가 혹시 '실체론적'이 아니라고 주장하신다면,
그것은 신학 진영에서부터 비판받기 이전에 이미 일반 철학자들의 진영으로부터
중세 스콜라 철학에 대한 몰이해라고 비판받으실 듯 싶습니다..

분명하게도 서구철학사의 주요 흐름들은 끊임없이 실체론적이었습니다..
실체론에 대비될 수 있는 관계론적 패러다임에 따른 철학사상들이
그나마 메인으로 자리하기도 했던 건 대체로 근대 이후 현대에 이르러서죠..
이미 철학진영에서 <서구철학사는 플라톤의 각주>라는 표현은 괜히 나온 말이 아닌 것입니다..
 

솔직히 좀더 많이 그리고 더 자세하게 언급하고 싶지만,
잠시 여기서 생략하고 목사님의 쓰신 글을 그대로 옮겨봅니다..

“초기 기독교가 헬라 철학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에게 완전히 의존하고 있는 게 아니며
성서적인 전통과 예수 그리스도 경험에 의해서
새로운 하나님 이해로 지양되고 있다는 점을
내가 그렇게 누누이 말해도 별로 귀를 기울이지 않네요. “

여기서 기독교 역사의 과정에서 언제 이것이 뚜렷이 지양되고 있는지에 대해선 목사님의 답변에는 이 부분이 분명하게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또한 말씀하신 <성서적인 전통>이라는 개념과 <예수 그리스도 경험>이라는 표현은 여전히 모호할 개념일 따름입니다. 왜냐하면 누구나 자신의 신학을 <성서적>이라고 주장하고 또한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경험>에 기초되었다고 말할테니까요..

목사님께선 자신을 정통 기독교를 계승하고 있는 기독교인이라고 종종 얘기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목사님의 그 같은 이해는 정통 기독교 역사에서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비로소 극복되고 나타나고 있는지요?

혹시 제게 말씀하신 뜻의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가 일찍부터 전통 기독교의 핵심으로 자리해왔다는 것인가요? 도대체 기존 기독교 사상사에서 하나님의 플라톤적인 실체론적 형이상학을 언제 극복했었다는 말인가요?

그 지점에 대한 분명한 근거와 답변이 없다면 이미 목사님께서 얘기한 그러한 언변은 전통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봐야 옳은 거 아닌가요? 물론 어느 순간부터 딱 부러지게 갑자기 나타나진 않았다고 하더라고, 목사님이 전통 주류 기독교가 그렇다고 보는 순간, 그러한 흐름들은 이미 <메인스트림>으로서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 어거스틴이 극복했다는 얘긴가요? 토마스 아퀴나스가 극복했다는 얘긴가요? 루터가 그랬다는 건가요? 아니면 칼빈이 그랬다는 건가요? 우리는 이들을 주류 전통 기독교의 핵심 신학자들로 보고 있지 않나요?

아마도 목사님은 인용하신, 판넨베르크와 몰트만에 의거해서 그러했다고 보시는 거 같은데.. 그러한 이해는 오늘날의 해석의 활동 가운데 있는 것이지, 이들이 주류 전통 기독교의 핵심을 차지해왔던 것은 아니잖아요.. 사실 몰트만의 경우, 이미 그의 신 이해는 거칠게 보면 과정신학의 범재신론적인 신 이해와도 닮아 있을 만큼 전통 기독교를 넘어서는 지점이 있습니다.. ‘십자가의 달리신 하나님’이나 ‘창조 안에 계신 하나님’ 같은 것은 여지없이 <범재신론>panentheism에 가깝습니다..

참고로 만에 하나, 제게 새로운 하나님 이해에 있어 범재신론적인 신 이해를 주장하신다면 그것은 이미 현대의 것이지 기존 기독교의 메인 스트림에선 잘 보여왔던 흐름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 이해는 사실 앞전에 목사님께서 우호적으로 표명했던 사상가들, 곧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매튜 폭스, 토마스 머튼, 떼이랴르 샤르뎅 등등에서 곧잘 찾아볼 수 있는 것이었죠.. 설마 목사님께선 바로 이런 영성가들의 사상들을 전통 기독교의 핵심으로 삼고 있으시거나 혹은 양립가능한 것이라는 얘긴지요? 그런 식이라면 삼위일체도 저 역시 마찬가지로 얼마든지 실체론을 극복하면서 새롭게 해석 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한 번 깊이 생각해본다면, 우리가 전통이라고 했을 땐
그것은 이미 주류 메인 스트림을 얘기한 거 아닌가요?
 

그리고 목사님께서 몇 가지 저를 오해하게 쓰신 점이 있습니다.
제가 전통 기독교를 무조건 허물어내려고 애쓴다거나
제가 안티기독교처럼 전통 기독교를 무조건 무너뜨려야 한다거나
하는 표현들은 오히려 분명하게 틀린 얘기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제 글 어디에서도 아무런 근거도 없이 ‘무조건’이라는 식으로 그렇게 비난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적어도 제 기억에는 그렇습니다.. 앞서는 성육신을 언급하며 전통 기독교의 신조 가운데 유용한 구제도 분명히 얘기하였잖아요.. 암튼 제가 아무런 근거도 없이 그렇게 얘기한 부분이 있다면 얼마든지 구체적으로 저의 글 어디가 어떻게 그런지를 직접 제시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런 거 없이 위의 언급처럼 말하신다면, 그야말로 저에 대한 비난 밖에 되지 않을 거라고 봅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저는 안티 기독교인들처럼 기독교 박멸론자가 아닙니다. 제 저서에서도 <반신학>Anti-Theology이 아닌 <재신학>Re-Theology을 추구한다고 말할 정도로 저는 오히려 대안론자에 속할 따름입니다. 조금은 분명하게 구분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김준우 박사님의 역사적 예수를 얘기하면서 저와 비슷하다고 하셨는데
언뜻 그렇게 보이기도 하겠지만 좀 다른 측면이 있습니다..
정확하게 얘기하면, 저는 ‘예수세미나의 역사적 예수’ 자체가 어느 정도 유용하다고는 보지만, 그것이 아주 결정적인 핵심이라고는 보질 않습니다. 오히려 저의 핵심은 기독교의 밑변에 깔린 세계관이라는 패러다임의 전환의 여부가 더 핵심인 거죠.. 역사적 예수 문제는 그러한 패러다임의 전환들 가운데 하나의 문제적 차원일 뿐입니다.. 이는 김준우 박사님과도 어느 정도 다른 시각에 놓여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역사적 예수에 대한 이해도 더 깊이 들어가면, 역사적 예수 제3탐구에 속하는 크로산이나 마커스 보그, 혹은 타이센까지도 포함하여 그러한 예수 이해마저도 저는 비판하는 맥락에 있다는 점 덧붙여 말씀드립니다.. 다시 말한다면 주로 예수 세미나를 비롯한 제3탐구에 기대고 있는 김준우 박사님께서 그려내고 있는 역사적 예수 이해와 제가 그려내고 있는 역사적 예수 이해는 좀 차이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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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목사님께서 저와 다르게 가장 크게 오해하고 계신 지점은
목사님께서 “일부 수구적 보수주의자들”이라고 언급하신 지점입니다..
일부? 제가 보기엔 오늘날 기독교의 대부분이 여기에 빠져 있지 않나요?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신대원 2학년만 되어도 불트만의 신화화 논쟁에 대해서 알잖아요.
수구적 집단만 제외하고 오늘 성서의 신화문제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

아주 많습지요!! 일반 기독교 신자들은 물론이거니와 신학생 혹은 신학교수들까지두요..
총신대를 비롯한 보수적인 기독교 신학대는 아예 성서비평에 대해선 제대로 배우지도 않으니 아예 모르거나 알더라도 표피적으로 혹은 이단시하는 선입견을 가지고서 갖고 있는 실정입니다.. 불트만? 저들은 간단하게 코웃음치며 “그게 뭔데?” 하기 쉽상인 겁니다.. 즉 실제적으론 수구적 집단이라고 부르는 이들은 거의 대다수를 점하고 있는 게 한국교회 현실입니다..

그렇다면 진보적이라는 신학대도 문제가 없을까요? 웃기게도 그나마 소수에 속하는 진보 진영의 경우도 그 <신학현장과 목회현장의 이원화> 현상으로 인해 신학교에서 배운 거 목회현장에서 잘 가르치지도 않습니다. 성서비평의 성과들이 반영된 성경공부 하는 교회는 아주 드뭅니다. 거의 대부분이 두란노, 네비게이토, 옥한흠 제자훈련 같은 그런 교리공부 교재일 뿐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역사적 예수 공부하면 교회에서 쫓겨나기 쉽상입니다..
제가 아는 분들 가운데 그런 속앓이 하는 분들 아주 많습니다.

이런 전반적인 분위기가 목사님은 <일부>라고 보시나요?
제가 보기에는 이들은 이미 주류를 꿰차고 있고
전통 기독교라고 표방하고 있지 않나요?
오히려 목사님이 표방하는 기독교가 제가 보기엔 일부인 듯 싶습니다..

당장 기독교 서점으로 달려가서 <기독교 교리>를 소개하는 책들을
쭈욱 전반적으로 한 번 비교 검토해 보신다면 잘 아실 것이라고 봅니다..
이들에게 하나님은 전능자고 완전자며, 동정녀 탄생은 글자 그대로 역사적 사실이며
성서무오설 부르짖고 대속교리 부르짖고 정말 난리가 아니지요..
기독교 외의 다른 종교로선 결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이들에게 웨스터민스터 신앙교리는 니케아적 전통 기독교의 맥을 잇는
또 하나의 핵심신조들입니다.. 이들은 택도 아닌 창조론을 읊어대며,
과학의 진화론은 마귀사탄 이론으로 보고 있는 실정입니다.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이 세계를 이해하는 그 시각에는
근원적으로 신-인간, 교회-세상, 정신-물질, 영혼-육체, 남자-여자, 본질-현상 등등 이러한 이원론적 도식을 깔고 있습니다. 즉, 전자가 더 우월한 요소이고 후자는 파생적인 요소이죠.. 이를 일컬어 <위계적 이원론>hierarchial dualism이라고 부르지 않나요? 이런 현상들은 오늘날 기독교 대부분 곳곳에서 우리에겐 흔히 목격되고 있는 기독교의 현실입니다.. 처참하게도 말입니다.. 명백하게 이것은 플라톤적인 게 아니라고 주장하시는 건지요?

만일 목사님께서 그것은 그저 ‘수구 보수주의 기독교’일 뿐이며, 이는 전통 기독교가 아니라고 말하신다면, 제가 보기에 목사님은 이미 주류 전통 기독교에 속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러면서 목사님은 자신은 보수 전통 기독교에 속한다고 얘기하고 계시거든요.. 아마도 전통 자체에 대한 해석이 다른 거겠죠.. 즉, 바로 그렇기에 저로선 이러한 점에서 목사님의 그 같은 이해에는 엄밀하지 못하고 철저하지 못한 모순의 지점이 함께 내포되어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말씀드릴 점은,

제가 느끼기에 그러한 목사님의 성향은 오히려 <중도 복음주의> 진영의 성향에서 주로 엿보이는 비슷한 점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복음주의 진영의 주 성격을 보면, 이들은 교리는 전통 기독교에 있다고 하면서 매우 개혁적인 성향을 띱니다.. 물론 복음주의 진영도 몇 가지 좀더 세분화할 수 있는 포지션들이 있습니다만, 이들 가운데는 성서무오설 받아들이면서 교회 개혁 외치고 좌파와 비슷하게 정치 사회 변혁 얘기하는 사람들 있습니다. 물론 목사님의 경우 성서무오설까지 받아들이는 분은 아니라고 보지만 어느 정도 전통 기독교에 젖줄에 있으면서 또다르게 개혁적인 성향을 띠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이들 복음주의 진영의 사람들은 제 딴에는 그러한 자세야말로 보수와 진보를 아우르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것은 매우 심각한 착각이라고 저는 봅니다.. 그저 엄밀하지 못한 사유의 불철저성으로부터 비롯된 것뿐이죠.. 그것은 그저 물과 기름의 절충적인 조합일 뿐입니다.. 이 혼재된 모순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복음주의 진영에는 아주 많습니다.. 이에 대한 자세한 분류들은 제 글에서 언급된 적도 있습니다..
http://freeview.org/bbs/tb.php/d002/15
http://freeview.org/bbs/tb.php/d003/1

실제로 제가 아는 -기독교 언론에 이름도 좀 알려진 분인데- 현재 활동하는 복음주의 진영에 있다는 교회개혁가이신데, 이 분은 자신의 하나님 이해가 전통 기독교에 있다고 얘기하면서도 놀랍게도 그 내용은 범재신론(panentheism)을 언급하고 있었습니다.. 범재신론은 이미 플라톤적인 신 이해가 아니지요.. 그것은 이미 서로 다른 존재론적 시스템에 놓여 있습니다..

즉, 그 분은 제가 보기엔 목사님과 비슷한 패턴의 반응을 보였었는데, 이분에게 있어선 전통 기독교의 신 이해가 범재신론이라고 주장하는 꼴이 되고 있었던 거지요.. 사실 목사님이 언급하신 신 이해의 개념들은 제가 보기에는 범재신론적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언급하신 몰트만의 신 이해도 이와 가깝다고 이미 평가되고 있구요..

초월신론, 이신론, 범신론, 무신론, 범재신론 등등 이런 것들은 신관에 따른 것입니다. 이미 알고 계시듯이 <신관>이란 신에 대한 유형(type)에 대한 고찰이죠.. 그것은 우리가 고찰하고 있는 신 이해의 유형별 분류에 있어 어느 하나에 가깝다고 보는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전통 기독교의 주류 신관은 명백히 <초월적 유신론>transcendent theism이었지 <범재신론>이 아니었습니다..

참고로 오늘날의 기독교에선 ‘복음주의’라는 용어자체부터가 출처가 다양해서 불분명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엄밀하지 못하게 쓰이고 있는 현실도 덧붙여 말씀드립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쓰겠습니다..
좀 긴 글이었지만 그래도 꼼꼼이 읽어주셨으면 하는 바램은 있는데
어떨는지 모르겠네요..
 

P.S, - 아참, 제가 끝으로 말씀드릴 것은
저는 서로 간의 논쟁에 있어 과격한 표현을 듣는 거 자체는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입니다.. 가장 중요한 핵심은, 그것이 구체적이고 정합적인 근거에 기반하느냐 아니냐가 제겐 관건이지 표현 자체의 과격성은 아무래도 괜찮다는 점 덧붙여 말씀드립니다.. 그러니 표현의 과격성에 대해선 전혀 염려하지 마시고, 구체적이고도 정합적인 근거에만 기반한다면야 언제든지 절 꾸짖어주셔도 괜찮답니다.. 저는 제 자신의 오류가 노출되는 거 자체에 대해선 별로 두렵진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오히려 절 성장시키는 기회가 되니까요..

그렇기에 제 글에 대한 정합적인 반박이 있으시면, 저로선 언제든지 환영하는 바임을 말씀드리며..
끝으로 제가 가장 좋아하는 백두의 경구를 남겨놓겠습니다..

“오류를 놓고 두려워하는 것은 진보의 종말이다. 진리는 사랑하는 길은 곧 오류를 보호하는 것이다”(MT 16)

06·11·02 11:56
 
.......................................................
 
 
정용섭 목사님의 글
 
 
미선이 님,
본격적으로 장을 펼치셨군요.
나는 자신이 없는데...
누구 좀 나서서 말려 주세요.
그냥 서로 다르게 생각하는 것이 확인되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요?
물론 이런 논의를 통해서
서로가, 모두가 배울 수 있긴 하지만
실효성에서는 의문이 드는군요.
그래도 한 마디 해야겠지요?
저의 생각을 이번으로 정리할 테니까
미선이 님도 한 번 더 말씀하는 것으로 정리하시죠.
이미 나올 건 대충 나온 것 같으니까요.
다 나왔다는 말은 우리가 기독교 교리에 대해서
서로 다르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미선이 님은 전통 기독교의 주류 신관을 <초월적 유신론>이라고 보고,
나는 <삼위일체론>이라고 본다는 겁니다.
아마 미선이 님은 그 삼위일체론의 형이상학적 토대가
곧 초월적 유신론이라고 말하겠지요.
그럴까요?
그건 뒤에서 언급하기로 하고,
미선이 님은 왜 주류와 비주류를 그렇게 예민하게 구분하시나요?
누가 주류고 비주류인가요?
오늘 한국에서 한기총이 주류? 맞습니다. 맞고요.
저는 제가 형식적으로 마이너리티이기는 하지만
주류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건 자칫 말장난처럼 들리니까 줄이지요.
만약 미선이 님의 그런 방식으로 분류한다면
예언자들은 늘 비주류, 마이너리티였어요,
그렇다면 결국 성서는 정통이 아니겠군요.
이런 걸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금 교회 개혁, 문제점을 논하는 게 아니에요.
한기총이 어느 순간에 마이너리티가 될 수도 있으니까
그런 이야기는 접어두지요.

위에서 미선이 님이 열거한 초기 기독교의 헬레니즘화는
당연한 말입니다.
아마 맞을 겁니다.
그런 내용은 미선이 님이 인용한 하르낙의 책을 보면
아주 자세하게 나와 있습니다.
하르낙은 자유주의 신학자(?)로서
구약성서를 개신교 경전에서 제외시켜야 한다고 주장한 분입니다.
제가 그분의 모든 생각을 부정하는 건 아닙니다.
그의 학문적 성과를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가 제기하고 있는 기독교의 헬레니즘화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기독교가 헬라 철학에 영향을 받은 건 분명하지요.
그건 단지 영향을 받은 것뿐입니다.
그것으로 기독교 교리를 완전히 플라톤 사상의 아류처럼 본다는 것은
전형적인 침소봉대입니다.
저는 그런 주장을 들을 때마다
극단적인 페미니스트들이(구미정 박사는 제외하고....)
성서와 전통적인 기독교 신학을 가부장적이라고 매도하는 것과
비슷한 생각이 듭니다.
성서와 어거스틴의 사상에 물론 가부장적인 흔적들이 많습니다.
만약 그런 시각으로만 본다면 성서와 어거스틴의 사상은
오늘 성해방의 시대, 페미니즘의 시대에 아무짝에도 못쓸 쓰레기입니다.
그런 건 새롭게 해석할 수 없고 폐기처분해야 합니다.
그래서 데일리 메리는 기독교를 포기했더군요.
초기 기독교 사상에 헬라사상의 흔적이 있다는 건 아무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건 신학적으로 이미 최소한 100년 전에 끝난 문제에요.
끝났다기보다는 문제제기가 충분히 됐다는 말입니다.
오늘의 신학에서,
오늘의 주류 신학에서 이런 문제를 신학적으로 문제 삼는 이는 없어요.
이미 정리된 문제를 미선이 님은 왜 새로운 것처럼 진술하나요?
내가 오해했나요?
예수세미나의 역사적 예수 연구가,
그들의 신화 문제 제기가 이미 신학적으로 걸러진 상태인데도
미국에 있는 일단의 신학자들이 약간의 과학적 방법론을 첨부해서
그걸 새로운 신학적 패러다임인 것처럼 제기하는 게 조금 우스운 일이죠.
혹시 미선이 님이 제기하는 헬레니즘의 문제도 그런 건 아닐는지요.
역사적 예수 문제와 기독교의 헬레니즘화 문제는
물론 현장 교회에서는 여전히 중요한 이슈가 될 수 있고,
일종의 계몽의 차원에서 다루어질 수는 있겠지만
신학적으로는 흘러간 노래입니다.
흘러갔을 뿐만 아니라 아주 작은 주제에 불과합니다.
즉 하나의 관점을 열어주는 역할을 하지만
그것이 기존의 신학을 재구성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미선이 님은 그런 꿈을 꾸고 계시네요.
그걸 위해서 기존의 기독교는 철저하게 헬레니즘화 되었다는 사실을,
거기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을 증명하려고 애를 쓰는군요.
우리 함께 흘러간 노래가 아니라 새 노래를 부릅시다.
오늘 한국교회의 현장이 아무리 어두워도
그들이 주류가 아니라는 사실을,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사람들이 주류라는 사실을 노래합시다.
성서의 남은 자 사상에서 우리가 배우듯이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는 숨어있는 소수자가 바로 주류니까요.

미선이 님은 기독교 정통이 초월적 유신론에 떨어졌지만
최소한 몰트만은 범재신론에서 그것을 극복했다고 보시는군요.
범재신론이 무엇인지 개념 규정이 더 필요하지만
일단 옳습니다.
판넨베르크, 오트, 융엘, 벨커 등등도 그 범주에 넣을 수 있겠지요?
미선이 님의 논리를 따른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현재의 주류 신학은 초월적 유신론을 극복한 셈이군요.
그럼 됐습니다.
이미 오늘의 신학은 그걸 극복했어요.
극복된 문제를 왜 다시 제기하시나요?
그게 교회 현장에 어떻게 접목되는가는 둘째 문제입니다.
그런데 보세요.
몰트만이 초월적 유신론을 극복했다고 해서
정통 기독교의 교리를 뛰어넘었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몰트만은 2천년 기독교 신학 역사의 아들입니다.
조금 가깝게 그는 바르트의 <말씀 신학> 안에서 활동하는 사람입니다.
바르트를 극복했지요.
그러나 바르트를 부정하거 재구성하는 게 아닙니다.
바르트에 기대서 한발 앞으로 내밀 뿐이지요.
2천년 역사에서 그 어떤 신학자도 역사를 뛰어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그런 전승 안에서 활동합니다.
이런 점에서 몰트만과 니케아 신조와는 깊숙한 연관이 있습니다.
니케아 없이 몰트만, 없습니다.
사실 모든 새로운 것, 비록 그것이 혁명적인 것이라고 하더라도
이 세상에 역사 단절을 통한 혁명은 없어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도 역시
그것이 논증될 수 있는 앞의 역사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거죠.
뉴턴 없이 하이젠베르크가 나올 수 있나요?
이런 점에서 2천년전의 교부들보다
우리는 조금도 더 성숙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미선이 님은 니케아와 어거스틴을 극복할 뿐만 아니라
재구성하겠다고 하시는데,
나는 그들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기 힘들더군요.
다른 데로 이야기가 나갔습니다.
지금 과학신학, 해석학신학을 말하는 몰트만과 판넨베르크가
(만약)초월적 유신론을 극복하고 범재신론의 경향이 있다고 한다면
이미 니케아 신조에 그런 단초가 담겨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실제로도 그렇고 은폐의 방식으로도 그렇습니다.
여기서 삼위일체론의 발전 역사에 대해서 말할 필요는 없겠지요.
종속론, 양태론, 삼위일체론, 단일군주론 등등,
이런 교리사 문제를 일일이 열거해야만 정합적이고 정밀한 진술인가요?
이런 역사적 과정을 통해서
결국 지금 중심에 서 있는 신학자들에게
미선이 님이 비판하고 있는 초월적 유신론이 극복되었다면
그것은 결국 기독교 2천년 역사가 이룬 사유의 결과라고 보아야 합니다.

삼위일체론이 왜 초월적 유신론이 아닌지 설명해야겠군요.
기독교 신학은 플라톤의 영향을 받기는 했지만
이미 성서에 근거해서 하나님을 그런 방식으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이데아로 대표되는 플라톤의 초월적 형이상학이
성서가 말하는 초월적 하나님을 설명하는데 긴요했기 때문에 받아들였지만
기독교 신학은 그런 초월성에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미선이 님이 아시는 대로
기독교는 아리스토텔레스와 제논의 스토아 철학과도 대화했습니다.
오늘 오후에 영신 학생들과 이 대목,
스토아 철학과 기독교 사상에 대해서 공부했는데요,
교부들은 필요한 것은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는 것을 버려두고,
성서적 하나님 이해에 근거해서 적절하게 대처했습니다.
즉 자세한 내용을 여기서 다시 피력해야할까요?
(관심 있는 분들은 저의 온라인 강의 “신학과 철학”을 참조하세요.)
아리스토텔레스와 스토아 철학과의 대화를 통해서
기독교 신학은 이 땅의 문제, 물리학의 문제, 인식의 문제 등을
정리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역시 성서적인 전통에 뿌리를 두구요.
성서적인 전통이라는 말이 모호하다고 했지요?
왜 그걸 모호하다고 보는지 그게 이상하군요.
성서는 인간을 피조물도 봅니다.
인간의 영혼도 역시 피조물이죠.
플라톤에게 인간 영혼은 선재적인 영원성이 있습니다.
교부들의 생각과 플라톤의 생각이 얼마나 다른지
더 설명해야 하나요?
초기 기독교는 플라톤의 영혼불멸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멸절설 사이에서,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런 이들의 생각을
성서와 예수의 부활 사건 안에서 받아들이거나 교정했습니다.

이제 말을 마쳐야겠군요.
미선이 님은 내 말이 여전히 정합성이 없다고, 모호하다고 말하겠네요.
이런 증거를 대야겠군요.
니케아 신조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호모우시오스” 개념입니다.
예수의 본질과 하나님의 본질이 동질이라는 라틴어입니다.
그걸 기독교 신조가 담고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인간과 신의 일치입니다.
땅과 하늘의 동일화입니다.
본질적으로 일치하고, 인격적으로 구별된다는 게 삼위일체의 핵심입니다.
만약 4세기의 기독교가 플라톤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받아서
그의 지배권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면
이런 신조는 불가능합니다.
역사 내재적이었던 예수가 어떻게 역사 초월적인 신과
본질적으로 하나라는 말인가요?
이런 점에서 기독교의 신 인식은 혁명적입니다.
유대교와 플라톤의 초월적인 신 이해에 머물지 않고,
그렇다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역사 내재성에 머물지 않고,
초월과 내재의 변증법적 긴장에서 하나님을 인식했습니다.
그게 바로 삼위일체론이 말하려는 신론의 핵심입니다.
이런 설명도 역시 모호한가요?
접합성이 떨어질까요?

앞서의 글에도 지적했지만
미선이 님은 왜 기독교 교리를
하르낙이 말하는 그런 구도로만 보는지,
그게 이해가 안 됩니다.
그리고 그런 구도는 이미 해결된 것인데도,
왜 계속 그것만 문제 삼고 있는지,
그게 이해가 안 갑니다.
다시 말하지만 헬라화라는 시각으로만 바라보면
분명히 그렇게 보일 겁니다.
그런 증거도 많이 찾아낼 수 있을 겁니다.
이미 과거에 학자들이 그런 작업을 다 해 놓았습니다.
미선이 님도 그런 걸 참조하는 것이죠?

성서와 기독교 역사는 하나의 색깔만 갖고 있지 않습니다.
스펙트럼이 아주 넓습니다.
왜냐하면 인간 삶이, 하나님 경험이
다층적이기 때문입니다.
이길용 박사가 말한 것 같은데,
구약성서에도 범재신론의 흔적이 많다구요.
저도 그걸 인정합니다.
모세의 호렙산은 아마
이집트 종교, 미디안 종교, 히브리 종교가 조우한 장소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성서에는 초월적 하나님 표상도 있고,
범재신론적 표상도 있고,
삼위일체론적 표상도 있습니다.
이제 기독교 공동체는 4세기에 삼위일체론에 도달했습니다.
초월과 내재의 변증법 안에서요.
그것도 극복될 수 있는 날이 오겠지요.
그러나 아직 그 날은 오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삼위일체론은 내가 앞에서 “호모우시오스” 개념에서 말했듯이
초월적 유신론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반복해서 미안하지만,
본질적으로 인간과 하나님이 동일하다는 사상이
플라톤에게서는 나올 수 없습니다.
왜 이 사실에 눈을 감습니까?

물론 역사적 현실교회는 초월적인 유신론에 빠지기도 했지만,
그리고 그런 학자들도 많았지만
그런 건 내 버려둡시다.
로마교회가 제국주의적이었다는 사실도 인정하고,
냅둡시다.
한기총 분들이 하는 일도 그냥 냅둡시다.
어쩝니까?
그러나 기독교의 하나님 이해가
순전히 플라톤적의 이원론에 떨어졌다는 오해는 맙시다.
그래서 오늘의 모든 문제가 거기에 연유하고 있듯이,
미선이 님이 주장하는 대로 그런 형이상학적 전통 때문이라고,
그래서 그런 형이상학을 재구성해야겠다는 생각은 조금 이상합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초월과 내재의 삼위일체론적 전통이 있었기 때문에
미선이 님이 나름으로 인정하는
오늘의 몰트만 신학과 판넨베르크 신학도 가능한 겁니다.
더구나 이미 100년 전에 끝난 헬레니즘화 논쟁을
오늘 다시 불거지게 하는 이유를 나는 잘 모르겠어요.

미선이 님,
저는 끊임없이 기독교의 전통과 대화함으로써
가다머가 말하는 지평융해를 모색하려고 합니다.
미선이 님은 또 미선이 님 대로 재구성의 길을 가세요.
이것으로 제 생각은 접으려고 합니다.
미선이 님도 마지막으로 한 마디 주세요.
서로의 차이를 확인한 것만으로도 우리의 대화는 유익했습니다.

06·11·02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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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선이 글
 
 
답변에 감사드립니다.. 목사님..

저 역시 논쟁은 서로의 차이를 극명하게 확인이 된다면 선택은 각자의 몫으로 남겨둘 뿐입니다.. 단지 여전히 그 차이가 불투명하지 못할 경우엔 문제가 계속 남아있게 되겠지요.. 물론 그 논쟁이 유익했는지는 어차피 서로의 글을 꼼꼼하게 읽은 독자들이 잘 판단해줄 거라고 봅니다..

나름대로 목사님의 쓴 글을 그대로 옮겨와서 제가 조목조목 반박을 한 것이기에
글이 좀 길어졌을 따름입니다.. 그렇기에 꼼꼼하게 그리고 차분하게 읽어주신다면 더욱 고맙겠습니다..

먼저 목사님께선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미선이님은 전통 기독교의 주류 신관을 ‘초월적 유신론’이라고 보고,
나는 ‘삼위일체론’이라고 본다는 겁니다.>>

그런데 일단 목사님의 이 같은 언급에는 엄밀하지 못한 지점이 있습니다(*제가 이렇게 개념의 엄밀성부터 말씀드리는 것은 결국 궁극적으로는 서로 간의 최선의 합리적 소통을 위함이니 너그러이 이해를 해주시리라고 봅니다..)

즉, 언급하신 초월신론은 신관에 속하지만, <삼위일체론>은 신관이 아닙니다. 우리가 <신관>이라고 했을 때 그것은 신이라는 존재가 세계와 관계 맺는 그 유형(type)에 대한 것입니다. 그것이 어떤 내용의 신이냐 라는 그 내용의 얘기가 아니지요.. 우리가 신관이라고 말할 때는, 결국 초월신론, 이신론, 범신론, 무신론, 범재신론(=양극신론, 포월신론, 새로운 유신론) 등등을 가리키는 것이며, 우리가 믿는 신은 바로 이러한 여러 현존 양태로서의 신 이해 중 어느 하나에 속한다는 사실입니다.. 만일 이것 외에 다른 양태로서의 신이 있다면 언제든지 말씀해주시면 될 것입니다. 유일신론, 다신론 같은 것들은 또 다른 관점에서 보는 신 이해 맥락이죠. 신이 여러 있다고 해도 그것은 세계에 대해 초월신론이 될 수도 있습니다. 또한 마찬가지로 유일신론이라고 해도 그것은 초월신론으로 표방될 수도 있고, 범재신론적으로 표방될 수도 있지요.. 그렇기에 신관에 대한 논의는 어떤 면에서 기독교를 넘어서 유신론 사상을 갖는 모든 종교사상에 적용될 수 있는 얘기인 것입니다.. 실례로 우리나라의 동학의 시천주 사상은 <범재신론>에 속한다고 평가받는 것입니다..

따라서 삼위일체론이라는 용어는 초월신론, 범재신론 이런 용어들과 동일선상에서 취급될 수 없는 이미 다른 범주적 차원의 개념입니다.. 예컨대, 북한산, 관악산, 지리산 등등 산을 열거하고 있는데 갑자기 난데없이 이미 좀더 구체화된 계곡을 불쑥 말하는 격입니다.. (* 그렇기에 제가 보기에 목사님께서 신관을 삼위일체론 신관이라고 표현했을 때는 아마도 그 삼위일체가 품고 있다고 보는 해석인 <범재신론>panentheism 을 가리키는 표현으로서 제가 받아들이겠습니다..)

어쨌든 기독교가 그 사상의 역사에서 <삼위일체론>을 주장했을 때, 그것은 이미 신관의 논의를 넘어서 또 다른 차원의 해석이 가미된 상태라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그리스도도 들어가고 성령님도 들어가는 거겠죠.. 이때 그 신의 유형은 초월신론일 수도 있고, 범재신론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아마도 목사님은 기독교 전통은 본래 범재신론으로부터 왔다고 보고 싶으신 거겠죠(만약 아니라면 어떤 것인지 다시 얘기해주셔야 하겠죠).. 하지만 기독교 전통은 본래 범재신론을 표방하고 있다고 볼 경우에도, 기독교 사상의 역사에서 범재신론의 흔적을 찾아야 하겠지만 그것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같은 사람 같은 분들에서나 보일 정도로 아주 간간이 나왔을 뿐이었지, 더욱 두드러진 흐름들은 초월신론이었습니다.. 이것은 거의 재론의 여지가 없는 얘기입니다.. 희랍철학의 실체론적 사유는 기독교 문명을 타고서 서구 사상사에 뿌리 깊게 흘러왔으니까요..

토마스 아퀴나스가 부동의 동자로서의 신을 말했을 때 그 하나님은 마음만 먹으면 세계에 대해 언제든지 영향을 끼칠 수 있고 간섭할 수 있지만, 반대로 세계는 그 하나님에 대해 영향을 줄 수도 없고 끼칠 수도 없는 관계인 것입니다.. 신은 세계에 대한 제일의 원인자요, 초월적인 전적인 타자로서 구별되구요.. 스스로 존재하는 자존자입니다.. 존재함을 가능케 하는 그 원인에 세계는 들어갈 수 없고 오직 홀로 존재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범재신론은 이러한 신 이해를 거부하고 신도 세계의 영향을 받고 그 제약을 받는다고 얘기하죠.. 관계적 맥락에 있기 때문에 상호 영향적이고 상호 의존적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저의 신론에 대한 자세한 얘기는 http://freeview.org/bbs/tb.php/b001/20 참조

어쨌든 분명하게 기존 기독교의 신 이해 전통은 실체론적이었다는 사실.. 이때 실체론적 신 이해에 깔려 있는 형이상학이 바로 헬라철학이었다는 점입니다.. 형이상학은 철학입니다.. 그런데 삼위일체를 자꾸 주장하고 계시는데 삼위일체는 이미 철학이 아닙니다.. 이미 거기에는 철학(형이상학)이 기독교 신학에 적용되어서 형성된 개념에 속합니다.. 뒤에 가서 또 얘기하겠지만, 목사님께서 삼위일체를 신관이라고 표현하신 것도 그렇고, 형이상학이란 개념도 잘못 이해하고 계신 맥락이 있습니다.. 이는 맨 뒤에서 제가 다시 설명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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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님께선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미선이 님은 왜 주류와 비주류를 그렇게 예민하게 구분하시나요? 누가 주류고 비주류인가요? 오늘 한국에서 한기총이 주류? 맞습니다. 맞고요. 저는 제가 형식적으로 마이너리티이기는 하지만 주류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건 자칫 말장난처럼 들리니까 줄이지요. 만약 미선이 님의 그런 방식으로 분류한다면 예언자들은 늘 비주류, 마이너리티였어요, 그렇다면 결국 성서는 정통이 아니겠군요. 이런 걸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금 교회 개혁, 문제점을 논하는 게 아니에요. 한기총이 어느 순간에 마이너리티가 될 수도 있으니까 그런 이야기는 접어두지요.>>

여기서 정 목사님의 얘기는 자신의 논지를 슬며시 제시하셨다가 다시 거둬들이고 하는 식이니 조금 불명료하게 보입니다.. 주류와 비주류를 구분하는 것도 여전히 중요하지요(물론 금긋듯이 구분되진 않고 대체적인 구분이라고 하더라도 여전히 그 구분자체는 유효하다고 봄).. 누가 메인 스트림에 있느냐는 그 영향력에서 엄청난 차이를 파생시키잖아요..

예언자들은 늘 비주류, 마이너리티라고 하셨는데.. 옳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 곧바로 말씀하시길, 그러면서 성서는 정통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예언자와 성서는 각기 별개라는 얘긴지요?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예수의 역사적인 하나님 나라 운동을 봤을 때 정말 무엇이 진짜 기독교 정통이냐고 물었을 때 저는 바로 진짜배기 정통 기독교는 언제나 <마이너리티>였다고 보는 시각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이 얘기는 지금까지 생각해왔던 기존 기독교 역사 전체를 뒤집어봐야 한다는 얘기가 되지요.. 주류 메인 스트림으로 자리해왔던 기독교 사상은 정통의 껍질을 쓴 잘못된 이해였고, 실제로는 늘 마이너리티에서 예언자적 전통과 함께 했던 하나님 나라 운동의 기독교 혹은 실체론적 이해를 극복하려는 끊임없는 시도들 혹은 가부장성을 극복하려는 생태여성성의 노력들 등등 기독교사의 이러한 숨은 명맥들이야말로 진정한 기독교의 전통이라고 보고 싶은 것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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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르낙에 대해서 얘기하셨는데 굳이 하르낙만 따져물을 문제가 아니지요.. 게다가 저는 하르낙의 언술 모두가 백퍼센트 옳다는 얘길 한 것도 아니었구요.. 기독교가 헬라화되었다는 논증을 하는 가운데 단지 하르낙의 얘기도 빌린 것뿐이지 사실 기독교가 헬라화되었다는 점은 서구사상사에서 하르낙 말고도 여러 신학자들이 지적하고 있지 않나요? 신학자만 그러나요.. 철학자들도 줄창 지적하던데..

제가 어제 저녁엔 장신대에서 <현대 생태신학자의 신학과 윤리>가 있어서 밤늦게 왔었는데, 이들 책에도 기독교의 이원론적 병폐, 기독교에 스며든 희랍철학의 폐해들이 지적되고 있던데.. 굳이 하르낙을 따질 문제는 아니지요..

그러면서 목사님께선 다음과 같이 쓰셨습니다..

>>그러나 그가 제기하고 있는 기독교의 헬레니즘화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기독교가 헬라 철학에 영향을 받은 건 분명하지요. 그건 단지 영향을 받은 것뿐입니다. 그것으로 기독교 교리를 완전히 플라톤 사상의 아류처럼 본다는 것은 전형적인 침소봉대 입니다. 저는 그런 주장을 들을 때마다 극단적인 페미니스트들이(구미정 박사는 제외하고....) 성서와 전통적인 기독교 신학을 가부장적이라고 매도하는 것과 비슷한 생각이 듭니다. >>

그런데 여기서 정 목사님의 주장은 단정만 있지 그에 대한 구체적인 근거는 그 어디에도 쓰여있지 않습니다.. (구미정 선생님을 얘기하셨는데, 저도 자주 뵙는 분이지만, 그 분도 그 자신의 책에서 곳곳에 헬라철학의 영향 위계적 이원론을 언급하고 있는데요?) 제가 보기엔 목사님께서 침소봉대의 정도라고 생각하는 게 저로선 지금까지의 신학적 성과를 뒤집는 새로운 발상이라고 봅니다.. 그렇지만 말씀하신 그 근거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 뒤에는 목사님께서 다음과 같이 쓰셨습니다..

>>성서와 어거스틴의 사상에 물론 가부장적인 흔적들이 많습니다. 만약 그런 시각으로만 본다면 성서와 어거스틴의 사상은 오늘 성해방의 시대, 페미니즘의 시대에 아무짝에도 못쓸 쓰레기입니다. 그런 건 새롭게 해석할 수 없고 폐기처분해야 합니다. 그래서 데일리 메리는 기독교를 포기했더군요. 초기 기독교 사상에 헬라사상의 흔적이 있다는 건 아무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건 신학적으로 이미 최소한 100년 전에 끝난 문제에요. 끝났다기보다는 문제제기가 충분히 됐다는 말입니다. 오늘의 신학에서, 오늘의 주류 신학에서 이런 문제를 신학적으로 문제 삼는 이는 없어요. 이미 정리된 문제를 미선이 님은 왜 새로운 것처럼 진술하나요? >>

도대체 무엇이 100년 전에 끝나고 무엇이 정리되었다는 얘긴가요? 초기만 살짝 헬라화되고 그 이후는 극복된 채로 계속 흘러왔다는 얘긴가요? 그에 대한 구체적인 근거는 여전히 실종되어 있습니다.. 글을 꼼꼼하게 읽어보신 분이라면 누구나 캐치할 것이라고 봅니다..

목사님의 입장에선 이 문제가 이미 신학계에선 그 정리가 끝났다고 하셨으니 잘 됐네요.. 제발 설명을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저는 정말 몰라서 묻는 건대, 도대체 기존 기독교가 어느 시점에서부터 헬라화를 극복하고 새로운 흐름으로 나아가고 있나요? 그들이 희랍의 형이상학이 아닌 과정 형이상학이라도 끌어들여서 새로운 시스템의 조직신학을 재수립이라도 했던가요?

오히려 목사님의 그러한 얘기야말로 학계에 새로운 학설을 내어놓으신 건 아닌지요? 기독교의 헬레니즘화 문제가 정리되었다는 게 도대체 어떻게 정리되었다는 얘긴가요? 목사님의 얘기는 여전히 불분명할 따름입니다.. (역사적 예수 얘기 문제는 저도 드릴 얘기가 많지만, 논의의 집중을 위해 제외합니다..) 그리고서 목사님께선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함께 흘러간 노래가 아니라 새 노래를 부릅시다. 오늘 한국교회의 현장이 아무리 어두워도 그들이 주류가 아니라는 사실을,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사람들이 주류라는 사실을 노래합시다. 성서의 남은 자 사상에서 우리가 배우듯이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는 숨어있는 소수자가 바로 주류니까요.>>

목사님의 이 얘기는 제가 앞서 진짜배기 기독교 정통은 결국 마이너리티 소수자의 역사였다고 얘기한 것과 대동소이한 말씀입니다.. 저도 당연히 그렇게 보고 있구요.. 그렇지만 제가 목사님께 문제를 삼고 있는 지점은, 바로 이러한 언급을 하시고자 한다면, 모순되지 않게, 일관성 있게 말씀을 하셨어야 했는데 그렇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즉, 분명하게 평가되고 기독교의 주류 메인 스트림의 전통은 긍정하시면서, 동시에 방금 이 얘기는 오히려 숨어있는 소수자가 주류라고 하시고 계시니, 목사님 스스로 모순된 언급을 보이고 계신 게 아니냐는 얘길 드린 것이었습니다..

목사님과 저와의 극명한 대비는, 목사님은 전통 기독교는 (단지 초기에 잠시 헬라화되었을 뿐) 이미 헬라화를 극복했다고 보고 계신 점이며, 그 헬라화 극복에 대한 구체적인 근거들은 여전히 실종되어 있습니다.. 혹시 목사님의 입장에선 신학적 정리가 이미 끝난 거라고 보시니, 오히려 더 용이하게 잘 얘기할 수도 있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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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목사님께선 몰트만을 비롯하여 판넨베르크, 오트, 융엘, 벨커 등등 주로 독일학자들을 인용하시면서 (아무래도 목사님의 신학적 바탕은 독일쪽이겠죠) 적어도 현대의 신학은 초월적 유신론을 극복했으니 문제삼을 필요가 뭐 있냐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목사님의 얘기는 제가 지금 문제 삼고 있는 지점과 약간 핀트가 어긋난 얘기일 뿐입니다.. 저는 현대의 기독교 사상이 아니라 이천 년 전 예수사건 이래로 지금까지의 기독교 전통이라고 불리우는 그 메인 스트림의 사상사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한 것이니까요..

몰트만을 얘기하셨는데, 저는 솔직히 몰트만 신학(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그의 명성에 이끌리겠지만)에 대해 조금은 비판적인 측면도 있습니다.. 이는 재밌게도 제가 지금 정목사님을 비판하는 맥락과 좀 비슷한 측면이 있습니다..

앞글에서도 말했듯 몰트만의 신관이나 그 개념들은 과정신학적 시스템의 신관과도 닮아 있으면서도 동시에 그의 신학사상은 헨리 나우웬 만큼이나 모호한 면이 있습니다.. 이를 테면 어떨 때는 범재신론적인 언급을 하다가도 정목사님 말씀대로 어떨 때는 바르트의 신관을 자기 것으로서 얘기할 때도 있지요.. 또한 지적하신대로 몰트만은 전통 기독교의 교리적 신 이해도 끌어들이면서 말입니다...

저는 바르트의 신관을 범재신론이라고 보질 않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초월적 타자입니다.. 아무리 후기 바르트가 화해론을 읊었다고 해도, 그가 보는 하나님 이해는 전적으로 세계에 영향(은총/계시/구원 등등)만을 줄 뿐이지, 세계로부터 받는 영향에서는 여전히 초월적일 따름입니다.. 이것은 결국 초월신론에 해당하지 범재신론이 아니지요.. 범재신론의 신과 세계의 현존 양태는 철저히 상호 의존적 관계입니다.. 다르지요.. 이에 대해서는 http://freeview.org/bbs/tb.php/b001/21 참조

혹시 몰트만이 바르트를 극복했다는 지점이 바로 이 부분인가요? 그렇다고 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몰트만은 이 구분을 여전히 클리어하게 제대로 하고 있질 않습니다.. 즉, 다시 말해서 몰트만의 신학에도 정목사님과 흡사하게 여전히 <모순된 개념들의 혼재성>이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그가 지닌 문제인식에는 형이상학적 지평에서부터 세밀하게 구분하는 문제인식이 별로 없는 점에 기인합니다..

형이상학이란 존재를 다루는 데 있어 가장 궁극적인 지평의 패러다임론입니다.. 존재를 다루는 그 기초 패러다임에서부터 달라지면 이름이 같은 단어라고 해도 그 뜻은 전혀 다른 뜻이 되는 것입니다.. 희랍의 형이상학적 패러다임에서 보는 신과 과정 형이상학의 패러다임에서 보는 신은 그 이해가 다르듯이 말입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해야죠.. 이 첨예한 문제의식을 몰트만에게선 별로 찾아보기 힘들지요..

단지 몰트만은 전통 기독교 신학의 범주에 있다고 표방하면서도 (제가 볼 때 웬지 몰트만이 진보 신학자들에게도 가끔씩 어필되는 이유가) 사실 정치신학과 함께 제3세계 신학들 그리고 생태신학에 대해서도 여전히 관심을 표방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이때의 통찰들은 간간히 신선한 신학적 통찰을 줄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몰트만은 이 모두를 그가 일관성 있게 꿰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저는 “아니!”라고 답하는 쪽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흡사 뉴턴패러다임 시절의 사물 이해와 양자물리학 패러다임 때의 사물 이해가 하나의 머리속에서 서로 뒤섞여 있는 채로 내뱉고 있는 경우지요.. 저는 솔직히 바르트를 보수와 진보를 그저 섞어놓은 절충적 보수주의자로 보는 지점이 있는데 마찬가지로 몰트만에게서도 <엄밀한 일관성이 결여된 절충주의자>라는 점이 없잖아 엿보인다는 얘깁니다.. 언제 기회가 되면 바르트나 몰트만 연구는 신학책 하나 써야 될 법 하겠죠..
 
목사님께선 역사 단절을 통한 혁명은 없다고 하셨습니다.. 저도 충분히 동의할 수 있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제가 무조건 기독교 전통을 거부한다기보다는 정확히 말해서 지금까지의 기독교 전통을 플라톤이 아닌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이라는 패러다임으로 다시 객체화하겠는 작업일 뿐입니다.. 목사님의 표현인 ‘단절’이라면 아예 거부하고 손을 떼야 하는 거죠.. 하지만 저는 그런 식이 아니거든요..

그리고선 다음과 같이 쓰셨습니다..

>>결국 지금 중심에 서 있는 신학자들에게 미선이 님이 비판하고 있는 초월적 유신론이 극복되었다면 그것은 결국 기독교 2천년 역사가 이룬 사유의 결과라고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만 기독교 2천년 역사에 대해 목사님의 지금까지의 언급을 대략 정리해볼까요?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기독교 전통에 있어 초기(잠깐 헬라화) 그리고 곧바로 헬라화 극복(근거는 삼위일체)이 있었고 그리고선 중세 근대를 지나 현대 20세기에 다시 헬라화 극복.. 대략 이런 모양새입니다.. 즉, 초기 이후에서 현대 이전까지의 기독교 신학의 <해석학적 존재론>은 도대체 무엇이었는지 여전히 모호한 채로 실종되어 있습니다.. 그리고선 별안간 현대 신학자인 몰트만, 판넨베르크를 끌어들이시면서 초기 니케아 때부터 이미 범재신론적 흔적이 있다고 주장하고 계십니다.. 이런 얘긴 목사님께서 기독교 사상사를 오히려 현대를 통해 역투사하여 일반화하겠다는 것인지요? 그렇다고 해도 그것은 여전히 니케아 이후 중세와 근대를 거쳐 현대에까지 실종되어 있는 형이상학 지점도 명료하게 해명되어야 할 것인데, 목사님의 언급에선 그런 것이 일관되게 없잖아요..

기독교 신학은 헬라화를 극복하고 초월적 하나님을 극복했다고 얘기합니다.. 그리고서 말씀하시기를

>> “교부들은 필요한 것은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는 것을 버려두고, 성서적 하나님 이해에 근거해서 적절하게 대처했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정말 단도직입적으로 여쭙겠습니다.. 기독교 주류 전통에 있는 주요 신학자들 가운데 도대체 어느 누가 하나님은 이 세계에 대해서 영향도 받고 제약도 받는다고 그렇게 기술하고 있던가요?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초월신론이 극복되려면 중세 스콜라 사상이 메인 스트림으로 나올 수가 없습니다.. 목사님처럼 헬라화를 극복하고 초월신론 극복의 흐름이 있었다고 가정한다면, 어거스틴의 신학이나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은 거의 반역수준입니다..

제가 보기엔 정 목사님이야말로 신학적 정리가 끝난 얘기를 오히려 억지로 다시 주장하고 계시거나 이 문제 자체를 모호하게 만들어버리고 계신 게 아닌가 싶습니다.. 제가 보는 신학계와 아마 목사님께서 보시는 신학계가 다른가요? 그럼 신학 말고 철학계는 어떤가요? 철학자들이 중세 교부들이 헬라화를 극복하고 새로운 이론을 폈다고 볼까요? 이런 문제는 이미 철학 진영에선 게임 끝난 얘기가 아닐까 싶은데..
(*혹시 철학자들이 기독교인도 아닌데 지들이 어떻게 기독교를 알겠냐고 하실 진 모르겠지만, 이미 서구사상사는 기독교 사상과 한 배를 타왔기에 철학계도 불가피하게 기독교 신학을 안들여다 볼 수도 없다는 점도 분명하게 말씀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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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정 목사님께선 교부들의 극복 사례라며 다음과 같이 얘기하셨습니다..

“성서는 인간을 피조물도 봅니다. 인간의 영혼도 역시 피조물이죠. 플라톤에게 인간 영혼은 선재적인 영원성이 있습니다. 교부들의 생각과 플라톤의 생각이 얼마나 다른지 더 설명해야 하나요? 초기 기독교는 플라톤의 영혼불멸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멸절설 사이에서,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런 이들의 생각을 성서와 예수의 부활 사건 안에서 받아들이거나 교정했습니다.”

그렇지만 죄송하게도 목사님은 조금 핀트가 어긋난 답변을 하셨고, 여전히 제가 문제를 삼고 있는 지점은 못보시고 계십니다.. 저는 헬라화의 극복을 희랍철학이 가지고 있는 그 형이상학의 극복에 있지, 목사님께서 방금 얘기하신 영혼이 피조냐 영원이냐 멸절이냐 불멸이냐 그런 세부적인 것에 있지 않거든요.. 목사님의 인식대로 따르면, 예컨대, 플라톤주의에서 신플라톤주의로 가는 것도 헬라화의 극복이 되버립니다..

그러나 제가 얘기하는 헬라화 극복은 그러한 세부적인 문제들이 아닙니다.. 쉽게 말해서, 이데아-현실세계라는 이원론적인 구도처럼, 영혼-육체, 정신-물질, 신-세계, 본질-현상, 남자-여자 등등 제가 형이상학이라는 패러다임에 있어서 가장 문제 삼고 있는 이 고질적인 이원론적인 존재 패러다임을.. 교부들이 극복했다는 건가요? 저는 가장 기초적인 혹은 궁극적인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해결도 없이 영혼이 피조냐 영원이냐 멸절이냐 불멸이냐 라는 문제는 매우 지엽적인 것이죠.. 또한 그러한 문제에 대한 해결도 없이 성서적인 전통을 얘기하시니 그저 여전히 모호하다고 볼 수 밖에요.. 다들 자기야말로 성서적인 전통이라고 내세우니까요.. 여전히 안개 속의 풍경인 거죠..

....................

그리고 목사님께선 니케아 신조의 ‘호모우시오스’를 언급하시면서, 니케아 신조는 결국 “인간과 신의 일치, 땅과 하늘의 동일화”를 말한 것이니, 이것이야말로 플라톤의 지배와 영향에서 벗어나는 증거가 아니냐 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정말 놀라울 따름입니다..

솔직히 제게는 목사님의 그러한 해석들이 정말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만큼 놀랍고도 새로운 학설로밖에 여겨지지 않습니다.. 사실 homo-ousios는 본래 성서 어디에도 없는 용어이자, 애초 그리스 철학 용어라는 점은 알고 계시지요?
잠시 저도 이 부분에 대해서 썰을 좀 풀도록 하겠습니다..

애초 그리스어에서 ousia라는 단어만큼 다의적이고 복잡한 의미를 가진 단어는 거의 없지요.. 그리하여 homo-ousios는 동일 ‘본질’(essence)을 의미할 수도 있었으나, 또한 동일 본성(substance), 동일 실체(reality), 동일 존재(being), 동일 양태(type)을 의미할 수도 있었습니다. 플라토니안 철학자 포르피리우스는 인간과 동물의 영혼은 homo-ousios(동일한 보편적 양태)라고 기록한 바 있죠. 만약 ‘homo-ousios’가 니케아서 사용된 그 단어의 의미였다면 당시 아리우스파 중에서 이를 거부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리우스파는 하나님과 예수가 모두, 서로 다른 방식이긴 하지만, 신적인 존재라는 데에는 동의하고 있기 때문이죠.. 그러나 당시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호시우스의 전략들은 어떻든지 아리우스파를 누르고자 함이 있었고 그러한 압력에 있어 당시 아리우스파에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자였던 유세비우스는 고민 끝에 이 homo-ousios 개념을 받아들입니다.. 그리하여 니케아 신조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아버지로부터 출생한, 유일하게 출생한, 즉 아버지의 ousia(본성)으로부터 온, 빛으로부터의 빛, 참 하나님으로부터의 참 하나님, 만들어지지 않고 출생한, 아버지와의 homo-ousios, 그로부터 만물이 존재하게 된 분"

물론 homo-ousios가 아리우스파를 불쾌하게 만들었음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사실 이 개념은 심지어 아타나시우스조차도 그 회의가 끝나고 20년 동안은 그의 저서에서 이 용어를 사용하는 것을 현명하지 못한 것으로 생각했을 정도였죠. 예수와 하나님이 동일한 hypostasis(개체), 혹은 본성을 갖는다고 말하는 것은 사벨리아누스주의(Sabellianism)의 냄새가 났었기 때문입니다.. 혹시 목사님의 그 해석도 사벨리아누스주의를 표방하고 계신 건 아니실테죠?

자, 이때 목사님의 니케아 해석은 ‘신과 인간의 일치’ 혹은 ‘땅과 하늘의 동일화’라고 하셨는데, 사실 니케아 신조의 그 뜻은 애초 땅의 인간이었던 예수를 오히려 인간과 구별된 천상의 그리스도로 만드는데 그 핵심이 있었지, 그 예수를 계속 땅으로 내려오도록 한 것이 아니란 사실입니다.. 즉, 목사님께선 지금 그 옛날의 니케아 신조를 전혀 다른 방식의 프리즘으로서 당시의 본래 뜻과는 정반대로 해석해버리신 것입니다.. 그렇기에 제가 좀 놀랬던 것이지요..

솔직히 신학교에서 배운대로만 이해해도, 니케아 신조는 당시 아리우스파를 누르고 아타나시우스쪽에 손을 들어주면서, 결국 예수는 인간이라기보다 사실상은 신이라는 점을 얘기하려 했던 게 아니었나요? (이때의 인간이란 표현도 예수가 아예 그저 비역사적으로 떨어지지만 않는 정도의 안전판 정도의 의미일뿐이었죠.. 이는 오늘날 보수 기독교인들의 예수관과도 정말 딱 맞아떨어지죠..) 쉽게 액면가로 이해해도 그거였잖아요.. 예수를 감히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천상으로 끌어올리려 했던 당시 니케아 신조의 맥락을 지금 현대의 정용섭 목사님께서 오히려 그 반대로 니케아 신조의 뜻은 신과 인간의 일치이기 때문에 땅으로 내려오는 것에 있다고 주장하시는 꼴이 된다는 점입니다.. 즉, 니케아 신조의 본래 뜻과는 지금 반대로서 해석해버리신 거죠..

물론 당시의 니케아 신조를 지금 현대에 와서 다시 재해석해서 볼 수는 있겠죠.. 그러한 시도에서 본다면 방금 말씀하신 목사님의 그 같은 해석도 하나의 시도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여전히 오늘날 현대의 해석이지, 기독교가 헬라화 되던 그 시점에서의 해석은 전혀 아니잖아요.. 제가 느끼기엔 목사님께선 니케아 신조 뿐만 아니라 전통 기독교의 사상 전반에 대해서도 무언가 잘못 그 맥락을 이해하고 계신 지점이 없잖아 있는지 좀 의문마저 들기도 합니다.. 저는 지금 저의 솔직한 속내를 얘기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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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는 계시사건을 담고 있는 책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서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될 수 있겠지요.. 그것은 초월신론으로, 혹은 범재신론으로 등등 해석 여하에 따라 달리 보일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기독교뿐만 아니라 모든 존재들도 그 해석의 프리즘에 따라 그 스펙트럼이 다양하게 전개되어 나갑니다..

이때 만일 그러한 전개에 있어 초월신론을 극복하는 범재신론의 흐름이 있었다면, 분명히 찾아내고 제시해야 하지만, 목사님의 답변은 그저 삼위일체만 계속 불러대고 계셨고, 삼위일체야말로 기독교 헬라화 극복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하셨습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목사님께서 계속 착각하시는 지점은 삼위일체는 초월신론, 범재신론과 함께 동일 상에서 취급할 수 있는 일종의 신관으로서 이해하시는데 그것은 분명 엄밀하지 못한 이해입니다.. 그것은 동일선상에서 취급될 수 있는 차원이 아닌 다른 범주적 차원의 신 이해입니다.. 그러니 니케아 신조를 비롯하여 삼위일체가 헬라화를 극복한 사례라고 보시니 저로선 참 아이러니할 따름이죠..

다음과 같은 목사님의 글도 그렇습니다..
 
>>미선이 님이 주장하는 대로 그런 형이상학적 전통 때문이라고, 그래서 그런 형이상학을 재구성해야겠다는 생각은 조금 이상합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초월과 내재의 삼위일체론적 전통이 있었기 때문에 미선이 님이 나름으로 인정하는 오늘의 몰트만 신학과 판넨베르크 신학도 가능한 겁니다.>>

여기서 목사님께선 <형이상학>Metaphysics이란 개념을 저와 다르게 이해하고 계시는 듯 싶습니다.. Metaphysic란 말뜻 그대로 Physics라는 자연과학의 너머에 있는 지평인 존재론과 우주론에 관한 것입니다.. 좀더 엄밀하게 정의한다면 형이상학이란, 발생하고 있는 모든 사물(=존재)에 대해 불가피하게 관련되어 있는 일반적 관념들을 발견해내고자 하는 과학입니다.. 그것은 철학이라는 분과에서도 존재의 가장 궁극의 지평을 다루는 학문입니다.. 형이상학을 일컬어 ‘제일성의 철학’이라고까지 표현하잖아요..

목사님께서 언급하신 “초월과 내재의 삼위일체론적 전통”이란 것은 이미 형이상학이 어느 정도 문명사에 적용된 관념을 말한 것이지 그것이 곧바로 형이상학은 아니지요..

플라톤의 희랍철학은 존재의 생성과 우주가 돌아가는 원리를 그 자신의 도식으로 해명하고 있기에 그것은 형이상학에 속합니다.. 바로 그 희랍의 형이상학이라는 해석학적 툴은 세계 해석의 기초 패러다임이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 사상에서 초대 변증가들과 교부들은 바로 복음서의 예수사건 뿐만 아니라 신과 세계를 몽땅 해석할 때, 바로 희랍의 그러한 해석학적 툴을 가지고서 썼던 것입니다..

희랍의 형이상학 이후에 어떤 새로운 형이상학이 새롭게 수립되어서 기독교 안에 들어왔었나요? 불교철학의 형이상학이 기독교에 들어오기라도 했던가요? 기독교가 언제 헬라철학을 극복했다는 얘긴가요? 목사님의 그 같은 얘기에 저로선 여전히 의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목사님은 전통기독교와 지평융합 하시겠다고 하셨는데, 저는 바로 그 지평융합이란 게 여러 신학적 개념들의 혼재된 모순을 보이고 있다는 얘기를 드린 것이었습니다.. 그저 뒤섞여 있을 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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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님과 저와의 차이에 대해 크게 주요 최종정리를 해보겠습니다..

1. 용어 사용의 엄밀함에 있어, 목사님께서 <삼위일체론>를 신관 혹은 형이상학으로서 이해하고 계시는데, 그것은 다른 차원의 범주에 놓여 있다는 사실.. 혹시라도 만일 목사님께서 '신관' 혹은 '형이상학'이란 개념을 온전히 따로 이해하고 계신 맥락이 있다면 바로 그 지점부터 시작으로 제시하셔야 할 것입니다. 저는 앞에서 그 개념에 대한 정의와 나름대로 이해하는 맥락들을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2. 목사님께선 헬라화 극복의 사례로 삼위일체 혹은 니케아 신조의 homo-ousios 를 얘기하셨지만, 제가 보기에 삼위일체는 오히려 현대의 해석을 역투사해서 일반화하려고 계신 것으로 보입니다. 게다가 목사님께선 기독교 니케아 신조의 homo-ousios는 오히려 당시의 뜻과는 정반대로서 해석하고 계신다는 점입니다.. 저는 이 부분에 대해서도 위에서 아주 상세하게 조목조목 반론을 드렸습니다..

3. 만일 초기 기독교가 헬라화를 극복했다면 그 이후부터 중간에는 어째서 중세 철학이 본격적으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들고 나올 수 있겠습니까? 만일 극복했다면, 기독교가 동양철학의 형이상학이나 아니면 아예 직접 플라톤의 형이상학이 아닌 <새로운 형이상학>을 개발하여 이를 세계 해석의 툴로 쓰거나 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전통이라는 주류 메인 스트림에 그러한 흔적이 도대체 언제 있었단말인가요? 목사님의 글에선 바로 이 점에 대한 구체적 근거와 답변들이 쓰신 글에선 전혀 나타나 있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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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기존 기독교가 아니라 새로운 기독교를 언급하는 그 맥락은 결국 그동안 기존 기독교의 밑변에 깔려 있던 해석학적 베이스인 <희랍의 형이상학>을 빼내어 다시 <과정 형이상학>이라는 렌즈로 해서 신과 세계와 예수와 성서 등등 기독교 전반을 다시 세워보겠다는 얘깁니다.. 설마 이것은 저혼자만의 생각일까요? 이미 과정신학자들도 진행해나가고 있잖아요.. 물론 저는 한국의 민중신학을 통해 그 과정신학마저도 넘어서고자 하고 있구요..

분명히 말하지만, 그 형이상학 지평의 렌즈가 다르면 세상 모든 게 달리 이해되고 다르게 채색됩니다.. 형이상학은 존재론과 우주론을 내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목사님께선 삼위일체론이 그걸 하고 있다고 말씀하시는 건 좀 이상한 얘기지요.. 엄밀하지 못한 이해입니다.. 삼위일체론은 철학 영역에 있는 개념이라기보다 이미 철학적 바탕이 깔려 있는 신학적 논의들에 있는 개념입니다.. 거기에 깔려있는 철학적 바탕은 그 삼위일체론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프리즘으로 해석해낼 수 있겠지요.. 그렇기에 혹시라도 만일 철학 전공자들이 목사님의 그러한 얘길 들었다면 무슨 이상한 소리하냐며 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같은 개념 이해도 그렇고 철학과 신학의 관계를 보시는 지점도 혼재되어 있는 듯한 느낌입니다..

<헬라 형이상학>의 프리즘으로 채색한 삼위일체 개념과 <과정 형이상학>의 프리즘으로 해석해낸 삼위일체 개념은, 같은 이름의 삼위일체라도 둘은 천지차이만큼 큰 것입니다.. 삼위일체 뿐만 아니라 신, 예수, 인간, 교회, 성서, 자연 등등 모든 것들이 다른 식으로 이해되는 것입니다.. 말그대로 진정한 패러다임 쉬프트인 거죠..

그리고 작금의 이 패러다임 전환의 흐름은 지금까지 이천 년 기독교 역사상에서 단 한 번도 일어나 본 적이 없었던, 전혀 새로운 차원의 기독교 변혁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시길 바랍니다.. 헛소리일까요? 이미 이 흐름은 세계 곳곳에서 그 징후들을 보여주고 있는 것을.. 아마도 빠르면 10년 늦어도 2-30년 안에는 전에 없던 새로운 기독교 변혁 운동이 일어날 것임을 분명하게 말씀드립니다.. 뭐 이런 얘기는 한귀로 듣고 흘려도 상관은 없습니다.. 믿거나 말거나 겠지만요..^^*

아무쪼록 저로서도 좀더 목사님과 저와의 차이가 더욱 더 클리어하게 드러났으면 하는 바램인데 어떨는지 모르겠습니다..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지만, 암튼 제가 목사님을 괴롭히고자 하는 마음은 추호도 없음은 잘 아실 것이라고 봅니다.. 그저 정직한 의문에 대해 충실하고자 반문했을 따름입니다..

우리네 지성의 역사에는 그래도 아주 유효했던 논쟁의 사례들이 있었지요..
논쟁(대화)의 기술 http://freeview.org/bbs/tb.php/f001/2 참조

그렇지만 아무래도 목사님께선 논쟁을 접으시려고 하시는데
그래도 혹시라도 저의 반론에 대해 다시 얘길 주신다면 얼마든지 해주셔도 괜찮겠습니다..
아무쪼록 서로의 글을 꼼꼼하게 이해하고 읽어보신 분들이 잘 알아서 짐작하고 판단하시리라 믿습니다..
고맙습니다..

주님의 평화~!!

06·11·03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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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섭 목사님의 글
 
 
정정희 님과 똑소리 님.
논쟁 비슷하게 굴러간 게 재미있으셨어요?
다행입니다.
원래 신학계도 그렇고,
인문학계도 이런 노골적인 논쟁을 즐기지 않습니다.
그게 학문 발전을 가로막고 있겠지요.
논쟁은 여러모로 필요한 겁니다.
앞으로 신학은 더욱 치열하게 논쟁해야합니다.
그런데 교수들께서 점잖으시기 때문에 그런 게 잘 안 돼요.
불행한 일이죠 뭐.
그런데 논쟁은 간단하게 아닙니다.
만약에 내가 <여호와의 증인> 핵심 멤버와 논쟁한다고 가정해보세요.
조금 가다가 안 됩니다.
누가 옳은지는 차치하고 기본적으로 사유의 방식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또는 내가 주체사상 신봉자들이나 극단적인 반미주의자들과 논쟁한다고 해보세요.
그들은 이미 나를 보수 반동분자로 재단하고 있기 때문에 대화가 안 됩니다.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주체사상이라는 틀과 반미반제국주의라는 틀이
건정한 대화를 불가능하게 만듭니다.
대화의 벽을 만나는 거죠.
이런 대화의 벽을 여기 다비아에서도 가끔 만나게 되네요.
어떤 분은 도사연 하고면서 무슨 말만 나왔다하면
모든 게 당신 마음 먹기에 달렸어,
더 깊이 생각해봐, 하는 식으로 말하더군요.
어떤 분은 매번마다 성서구절을 들이대구요.
그런 성구가 아니면 그런 분과는 대화가 안 되는거죠.
어떤 분은 성령을 체험해야 한다고 자꾸 강조하네요.
도사, 성구주창자, 성령론자들과의 대화에는
늘 문제가 생기네요.
이런 벽을 내가 미선이 님에게서 느끼기 때문에 논쟁을 그만두는 겁니다.
물론 벽을 느끼더라도 이런 논쟁을 통해서
다비안들에게 재미를 드릴 수도 있겠지요.
그리고 내가 배우는 것도 있겠구요.
그런데 미선이 님은 정합성 운운하면서 많은 각주를 요구하시니
그걸 내가 어떤 수로 다 제공하겠어요.
한달에 두 주간을 꼬박 설교비평을 준비해야하구,
나머지 시간에 강의 준비와 설교준비,
그리고 다른 잡지에 글쓰기, 다비아 대글 달기 등등,
시간이 좀 그렇군요.
앞으로 미선이 님이 지난 2천년 기독교 역사를
전혀 새롭게 재구성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랄 뿐입니다.
사실 한국 신학도 그럴 때가 온지도 모르죠.
매일 미국와 독일만 바라보고 신학을 할 수는 없잖아요.
미선이 님이 단정하고 있는 그런 초월적 유신론이 극복되는
한국적, 새로운 민중신학적 신학이 나오기를 바랍니다.
참고로 다비안들에게 한 마디 드린다면,
사실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아니 우리가 들어가 있는 이 존재의 신비 앞에서
초월이다, 내재다,
실체다, 운동과 과정이다 하는 언술 자체가
어떻게 보면 어리석은 일입니다.
우리에게는 그런 언어와 개념밖에 없으니까 그렇게 말할 뿐이지
종말론적으로 계시하는 그 하나님을 우리가 어떻게
이런 개념 안에 가둘 수 있겠어요.
이미 성서는 이런 신비를 나름으로 해명해보려한 하나의 역사과정이지요.
그래서 제가 늘 신비를 말하고 있습니다.
2천년 기독교 신학도 늘 이걸 바탕에 깔고 있습니다.
이런 노력을 한 마디로 초월적 유신론이라고 하니,
그리고 이런 신비가 막연하다고 하니
내가 무슨 말을 하겠어요.
나우엔의 글이 모호하다고 하니 내가 무슨 말을 하겠어요.
누가 옳고 그름이라기보다는
패러다임의 차이이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는 거겠지요.
이 논쟁을 계속 이어가지 않는 걸 이해바랍니다.
미선이 님의 신학운동, 세기연도 소기의 성과가 있기를 바랍니다.
 
06·11·03 2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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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선이 글
 
 
졸지에 제가 여호와의 증인 핵심 멤버, 극단적인 반미주의자, 도사연 하는 사람, 성구주창자, 성령론자 이런 사람들에 비유되어버렸군여..
목사님의 이번 글은 좀 당황스럽네요..
세상에는 사유가 완전히 일치하는 사람도 없고 완전히 다른 사람도 없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대화란 거 자체가 무익할 뿐이죠..
서로 틀리더라도 조금씩 알아나가고 맞춰나갈 따름입니다..
논쟁의 무익함도 있겠지만 유익함도 있다고 봅니다..
그것은 지성의 역사를 봐도 분명한 것입니다..

저는 이 부분에 대해서 아래와 같은 논쟁(대화)의 방법을 생각하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논쟁(대화)의 기술 http://freeview.org/bbs/tb.php/f001/2 참조
(당연히 조금이라도 이 부분에서 제가 어긋난 게 있었다면 얼마든지 지적해주시길 바랍니다)

저는 제 글 어디에도 여호와의 증인이나 극단적인 반미주의자의 논쟁처럼 그러한 고정불변의 막가파식으로 대화를 건넨 적이 없습니다.. 만일 있다면 저의 글 어디가 그런지를 구체적으로 지적해주십시요.. 그럴 경우 정용섭 목사님께서 설득력 있게, 구체적이고 정합적인 근거를 가지고 얘기하셨다면 제가 거기에 수긍을 안하셨을 거라고 보시나요? 오히려 정 목사님이야말로 저에 대한 그런 고정불변의 인식을 전제하고 계신 건 아닌지요? 물론 제가 그렇게 얘기하는 근거는 목사님께서 저를 그러한 막가파 사람들에 비유하고 계시기에 드린 말씀이었습니다..

저는 제가 틀릴 수 있는 가능성도 얼마든지 열어놓고 있잖아요.. 어차피 모든 학문은 근본적으로 <설명력 확보 싸움>에 있습니다.. 초월이다 내재다 실체다 과정이다 하는 것들도 결국은 우리의 삶을 온전히 해명하고 설명함에 있는 것이죠.. 그렇다고 학문이 모든 걸 다 커버할 수 있다고는 생각지 않아요.. 그저 학문은 정직함이자, 최선일 따름입니다.. 당연히 그것은 하나님께 정직해야 되고 자기 자신에게도 정직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신비를 얘기하셨는데, 신비는 자기 홀로의 체험에 있어선 매우 뚜렷하고 구체적일 수 있겠지만, 그것이 공적 영역으로 표출될 때에는 <막연함>입니다.. 그걸 어떻게 명료하게 진술하고 형언할 수 있겠어요? 당연히 힘든 것일테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적 영역은 언제나 확연한 명료함과 구체성을 요구합니다.. 저로선 나우웬에게는 바로 이것이 많이 결여되어 있다고 본 것이며, 바로 그래서 그것은 모호하고 추상적인 언술로 진술됐을 뿐이라는 점이었습니다.. 그러한 <티미함>이 있기에 나우웬은 보수 진영에서도 칭찬 받고 진보에서도 아주 가끔이지만 칭찬도 받고, 또한 동시에 조현아님 같은 보수측 사람이나 저 같은 진보측 사람에게서 비판도 받는 법이지요.. 물론 서로 그 비판의 내용은 다르지만요..

노파심에 말씀드리지만, 혹시 제가 신비를 부정하고 있는 듯이 보였나요? 어차피 신학을 하든 과학을 하든 인간이란 존재 자체가 한계가 있기에 거기엔 언제나 신비가 전제되어질 수밖에 없지요.. 그것은 인간 이성의 한계를 이미 겪고 있는 바이기에, 재론의 여지가 없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론 “모든 것은 하나님만 아신다” “미천한 인간은 모른다”는 식으로 불가지론에 빠지는 것도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럴 경우 우리는 신학이든 뭐든 공부할 필요도 없을테니까요.. 그저 "계시를 내려주시옵소서" 라고 동굴안에서 기도만 하던가, 하늘만 쳐다봐야겠죠..

결국은 저의 반론에 대해 목사님께선 기본적으로 다른 여러 할 일이 많기 때문에 시간이 부족하다고 말씀하시네요.. 뭐 좋습니다.. 그러나 언제든지 기회가 되면 얼마든지 올려주시길 바라겠습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이 지금까지 지녀왔던 사유의 오류가 많은 대중들 앞에 노출되거나 그것을 건드리는 것에 대해서 불편해하거나 두려워하는 게 있지요.. 저는 정말 그러한 것이 두렵지 않습니다.. 오히려 감사하면 감사했지.. 오류란 그나마 진리로 나아갈 수 있는 관문임을 사람들은 흔히 망각하곤 하는데, 어차피 인간은 한계가 있어서 시행착오를 겪어봐야 뒤늦게나 겨우 깨닫는 유아적 존재일 따름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겐 수많은 실패와 오류들 그리고 문명사의 비극적 사건들 이런 것들이 지금까지조차 많은 교훈과 가르침을 주고 있는 것이지요..

이 다비아가 정 목사님을 통해서 배우고 얻는 부분도 많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정 목사님 역시 그러한 자신의 오류 가능성에 대해서조차도 열어놓고 계셔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논쟁은 결국 구체적이고 근거 확보에 있기도 합니다.. 우리가 어줍잖게 주장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정 목사님도 설교비평을 하십니다.. 사실 그것 역시 공개적으로 상대방에게 논쟁을 거는 것이거든요.. 만일 정 목사님의 비판을 받은 당사자가 지금 정 목사님께서 제게 말씀하신 식으로 정 목사님에게 도로 말을 건넨다면 어떻겠습니까.. 즉, 만일 그 사람이 정 목사님의 설교비평에 대해 결국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막힌 사람"이라고 보신다면 어떤 기분이 드시겠습니까?

솔직히 저는 이번에 정 목사님과의 논쟁에서 정 목사님이 그동안 가지고 계셨던 그 신학적 사유의 실체를 조금 적나라하게 엿보았다고나 할까요.. 뭐 그런 점도 느껴졌었습니다.. 즉, 평소에 기존 기독교를 내다보고 있으신 목사님의 생각말입니다..

목사님과 그 견해가 다르다고 해서 말을 꺼내지 않아야 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자신의 솔직한 견해와 속내를 감추고 상대방에게 마냥 잘되기만 비는 것도 어쩌면 정말 정직하지 못한 위선일 수도 있지 않은지요.. 그렇지 않다면 우리에겐 늘 대화가 요구될 수 밖에 없는 처지인 것이지요..

어차피 저와 정 목사님과의 논쟁은
서로의 글을 꼼꼼하게 읽은 사람이라면 분명하게 판단이 될 것입니다..
그냥 그들의 몫으로 남겨두기로 하겠습니다..
비록 홈그라운드가 아니었지만 저로선 나름대로 의미있는 시간이었다고 봅니다..

혹시 이후에라도 제게 얘기하실 게 있으시면 언제든지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물론 근거 없는 비난 말고, 정당한 근거에 기반한 비판적 대화를 말이지요..

감사합니다..

06·11·04 04:24
 
 
 
 
 
Suns (06-12-04 20:57)
 
크윽.... 거의 한 시간에 걸쳐 이 장문의 논쟁을 읽은 내 자신이 기특해서 칭찬의 리플을....

어쩌면 관점의 차이라는 것은 그리 큰게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생각을 입으로 꺼내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또 그러한 정보는 100퍼센트 귀로 들어오게 될 것인데,
남이 A를 말해도 그걸 꼭 B라고만 듣게 되는거죠.

서로 평행선을 달리다보면 뭔가 '내 말이 잘 전달되지 않고 있다.'는 의심과 함께
자신도 상대방의 말을 잘 듣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은 채
그걸 관점의 차이로 환원하는 촌극이 일어나는 것은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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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읽으면서 정목사님의 태도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봤습니다.
우선 목사님은 정선생님처럼 강하게 논쟁을 하려는 마음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시간적인 문제도 있겠지만 가장 큰 영향을 줬던 것은 아무래도
목사님이 갖고 계신 선생님에 대한 선입견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신학적으로 전혀 새로운 것이 없는 얘기'들에 '집착'하는 사람으로 보게 되는 것은 아닐지...
'끝난 얘기', '옛 노래'....
선생님과 가까운 입장에서 사실 본격적인 논쟁을 기대했지만,
참 무성의한 응대만을 받게 되는군요.

단지 이러한 입장은 전문적인 신학 논의에 국한되는 것은 아닐겁니다.
정세 분석에 있어 정목사님과 같은 분들은
'비주류성'을 즐거워하시는 것처럼 보이기에,
'세기연'의 문제의식에 대해서는 그저 무모함이나 옛 레파토리의 환생으로 보이는 것으로 생각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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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논쟁을 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남에게

'저 사람, 한 번 논쟁하고 싶군.'

같은 생각이 들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요?^^

Suns (06-12-04 21:08)
 
아...

그리고 저도 호모-우시우스에 대한 정목사님의 해석이 참 인상 깊었다는 것을 꼭 언급하고 싶네요.

저도 극단적인 신중심적 종교 다원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
이처럼 예수(인간)를 신으로 고백한 그리스도교를 재발견했기 때문이거든요.
아직 생각이 전혀 구체화되진 않았지만....

많은 영성 서적에서 나타나는 모호함이라는 것이
사실은 어떤 모호한 단어나 은유, 메타포를 사용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 말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해주지 않기 때문이잖아요.(그게 그 말이긴 하나...)

그래서, 정목사님의 해석은 뭐랄까,
그 구절이 작성된 맥락은 생각하지 않고 문자만 가지고 해석하는 것이기 때문에
참 불안하긴 하지만 그래도 뭔가 의미 있는 시도인 것 같네요.

미선이 (06-12-06 17:14)
 
전체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얘기인데, 정목사님이 '비주류성'을 즐거워하시는 분은 아닌 걸로 생각됨..
글구 먼저 논쟁을 분명하게 걸면서 자신은 논쟁을 하려는 마음이 없다는 것은
더욱 모순된 자기행위라고 봄..

무엇보다 나 자신도 정작 알고 싶은 바는,
"뭔가 의미 있는 시도"라고 결론을 지었는데, 그때의 그 뭔가란 것은 도대체 정말 무얼까?
정목사님 외에 다른 분과의 얘기 중 댓글 가운데 이런 얘기가 있었지..

"모호함은 누구에게나 안주거리로 좋다"

라베뉴 (08-04-22 07:40)
 
미선이님이 잘못하신거 같은데...

관점의 차이가 명백하게 드러나는데... 한쪽에선 아니다고 하고, 한쪽에서는 그렇다고 맞서서 나오니... 그게 무슨 대화이고 소통입니다.
미선님 안에 내재되어있는 전투정신이 여기서도 드러나는 것 아닌가 싶네요. 진리를 표명하면서도 진리와는 다른 길을 걷고 있으니...

무조건 까고, 일단, 까고보자라는 식은 옳지 않은 것 같습니다.

    
미선이 (08-04-22 09:22)
 
안녕하세요. 라베뉴님~
도대체 뭐가 잘못했다는 얘긴가요? 
어디가 어떻게 그런지를 아무런 근거도 없이 얘기하는 거라면
그런 말은 오히려 상대방에 대한 언어 폭력이라는 점은 잘 아실테죠?

글구 라베뉴님 눈 뒀다 뭐합니까? 적어도 정용섭 목사와의 논쟁 발단만큼은
제가 먼저 건든 것도 아니고(첫글은 다른분께 향한 글임) 오히려 정용섭 목사가 먼저
저의 나우웬 관점을 비판하면서 시작된 것을요. 제대로 꼼꼼하게 안읽어보셨나요?

그리고 정용섭 목사가 기존 목사들 설교 까는 것은 또다른 전투정신 아닌가요?
그런 전투정신은 괜찮고 정용섭 목사를 비판하는 전투정신은 안된다는 것인가요?
그렇다면 혹시 라베뉴님은 정용섭 목사를 존경해마지 않는다는 팬클럽 다비아 회원? ^^*

라베뉴 (08-04-23 00:19)
 
저는 그냥 눈팅만 하는 회원인데, 미선이님이 좀 많이 기분이 상하셨나봐요. 저를 비꼬면서 말씀을 하시니까요...ㅎㅎ

그니까, 관점이 다른데, 누가 옳고 그르고 한게 어딨습니까?
그리고, 많은 신학도들 사이에서 나우웬에 대해서 왈가왈부하는 건 알겠는데...
그게, 누가 옳고, 누가 틀리고 이렇게 말할 수 있는 문제인가요?

미선이님은 왠지,
새로운 기독교를 세워나가자는 의미가... 좀 다른 것 같아요.

지금의 지구상에 모든 교회들을 부수고, 완전 처음부터 세워나가자는 인상을 받는데요.

그게, 과연 옳바른 일인지... 잘 모르겠네요...
예수님이 그러셨는지, 루터가 과연 그랬는지... 곰곰히 생각해보시면 좋겠습니다.

지기 싫어하시는 건 여전하시네요.*^^*

논리적으로 증명하시라고 자꾸 그러시는데... 논리 따지면 종교는 필요 없죠...
종교는 논리가 아니고 신앙인데... 자꾸 논리 따지시면 곤란하지요.^^

논리적으로 증명이 안되면 믿을 수 없다고 오버하지 말아주세요. 종교의 자유가 있잖아요.^^

그냥, 불쌍히 여기세요~

그럼, 수고 많이 하세요~ 뒤에서 응원만~ 지송~

    
미선이 (08-04-23 01:45)
 
라베뉴님~
관점이 다르다는 건 너무나 당연한 것이고 그러한 다른 관점들이 서로 충돌하기에
정용섭 목사 같은 분도 저의 나우웬 생각에 못마땅해서 저한테도 따져 물은 것 아니겠어요?

그리고 라베뉴님은 인상으로 사람을 판단하나봐여?
그렇게 따지면 다음과 같은 말도 타당하겠군요.

"정용섭 목사는 지구상의 목사들 설교를 부수고 완전 처음부터 세워나가자는 인상을 받는데
그게 과연 올바른 일인지 잘 모르겟군요" 라고..

방금 저의 이말이 타당하지 않듯이 라베뉴님의 앞서 하신 그 말 역시
전혀 타당치 않은 얘기라는 것도 잘 아셔야져..

신앙은 당연히 논리적 차원과도 다르겠지만 적어도 논리를 포함하면서 넘어서지
라베뉴님처럼 논리를 무시하는 차원이라면 오히려 더욱 곤란하지요.
라베뉴님 같은 분들이 겉으론 신앙 신앙 외치하면서도
정작 살펴보면 비논리적인 몰상식한 신앙을 보여줄 때가 많지요.

그럼 라베뉴님도 수고 많이 하세요.^^*
가급적이면 뒤에서만 설치지 마시고 앞에서도 좀 설쳐주심이 좋을 것 같군요.. 지송~

P.S - 혹시 제가 말을 심하게 했다고 생각하시기 이전에
먼저는 자신이 이곳에 퍼질러 놓은 어줍잖은 댓글부터 분명하게 직시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라베뉴 (08-04-23 08:05)
 
갑자기 무슨 인상 운운하시나요?

완전, 성급한 논리의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시고 있군요. 이러고도, 사람들을 가르친다고 말할 수 있는지...
제가 미선이님 글을 읽고, 완전, 배운자의 글이 아니고, 씩씩거리면서 달려드는 투우와도 같은 인상을 받았거든요.
배운자나 못배운자나 종이한장차이겠지마는...

정용섭 목사는 적어도 교회와 전통을 무너뜨리려고는 하지 않잖아요.
근데, 미선이님은 다르죠? 하나하나 왈가왈부하긴 힘듭니다만...

미선이님은 목사라는 것 보다도, 성도한명한명, 교회의 축까지도 싸그리 바꿔버리려는 생각 아니신가요?
교회 개혁 운운하는 타 사이트와 다르게, 완전 새로운 기독교를 추구하시잖아요. 그건 나아쁜 생각이에요.

본인이 이미 기독교의 축을 벗어났으니까 함부로 막말할 수 있는거지.
그리고, 기독교 범주를 넘어선 사람이, 새로운 기독교 타령하면 먹혀들까요?

보수 기독교인들 전도하는거랑 다를께 뭐가 있나요?
예수천당 불신지옥하는거랑, 너네들 다 틀려먹었으니까, 새로운 기독교로 개종해라랑 다른말? 같은말 같은데...후후

저는 비논리적일 수는 있지만, 몰상식하진 않은데...

그건 미선이님이죠... 혼자 광야에서 외친다고... 누가 들어줍니까? 세례요한?
공동체 안으로 들어와야져... 예수님처럼...

진보고, 보수고, 자신은 둘다 비판한다. 쟤네들이랑 가는 길이 전혀 다르다...
무슨, 장난하십니까?

미선이님처럼, 논리 운운하시고, 논리적 신앙 운운하시기 전에...
어린 아이가 사탕 사먹을꺼 아껴서 헌금내고, 기도하는 모습이 훨씬 아름답고 멋진 모습이 아닐런지요.

무슨 신앙얘기를 하는데, 갑자기 몰상식하데... 나보고...
자기도 몰상식하면서... 장난하나...

자신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티만 보시니...
참, 새로운 기독교 운동이 어딜 향해 나아가고 있는지... 참 암울하고 안타깝군요...

정강길, 화이팅~

    
미선이 (08-04-23 11:13)
 
님글은 > 표시, 제글은 - 표시



>갑자기 무슨 인상 운운하시나요?
완전, 성급한 논리의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시고 있군요. 이러고도, 사람들을 가르친다고 말할 수 있는지...

-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까먹으시군요. 인상을 받았다고 님이 먼저 그렇게 말했으니 하는 얘기죠.



>제가 미선이님 글을 읽고, 완전, 배운자의 글이 아니고, 씩씩거리면서 달려드는 투우와도 같은 인상을 받았거든요.
배운자나 못배운자나 종이한장차이겠지마는...

- 또 인상 비평 ㅋ
저도 님글을 통해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그런 인상을 받군요.^^;



>정용섭 목사는 적어도 교회와 전통을 무너뜨리려고는 하지 않잖아요.
근데, 미선이님은 다르죠? 하나하나 왈가왈부하긴 힘듭니다만...

- 당연히 왈가왈부하기 힘들겠죠. 님의 착각이니까.
교회와 전통도 오류와 비극에 선행할 순 없지요.
그렇지 않는 한에서 교회 전통을 지켜야 한다고 보구요.



>미선이님은 목사라는 것 보다도, 성도한명한명, 교회의 축까지도 싸그리 바꿔버리려는 생각 아니신가요?
교회 개혁 운운하는 타 사이트와 다르게, 완전 새로운 기독교를 추구하시잖아요. 그건 나아쁜 생각이에요.

- 이것 역시 앞의 얘기의 반복되는 얘기.



>본인이 이미 기독교의 축을 벗어났으니까 함부로 막말할 수 있는거지.
그리고, 기독교 범주를 넘어선 사람이, 새로운 기독교 타령하면 먹혀들까요?

- 뭐 새삼스레 님께서 그런 것까지 걱정을..^^
님말대로 안먹혀든다면 여러 사람들이 지지할 이유도 없겠지요.



>보수 기독교인들 전도하는거랑 다를께 뭐가 있나요?
예수천당 불신지옥하는거랑, 너네들 다 틀려먹었으니까, 새로운 기독교로 개종해라랑 다른말? 같은말 같은데...후후

- 그래서 낡은 기독교를 믿어라는 얘긴가요? 후후..



>저는 비논리적일 수는 있지만, 몰상식하진 않은데...
그건 미선이님이죠... 혼자 광야에서 외친다고... 누가 들어줍니까? 세례요한?
공동체 안으로 들어와야져... 예수님처럼...
진보고, 보수고, 자신은 둘다 비판한다. 쟤네들이랑 가는 길이 전혀 다르다...
무슨, 장난하십니까?

- 라베뉴님의 눈에는 이게 장난으로 보이세요?



>미선이님처럼, 논리 운운하시고, 논리적 신앙 운운하시기 전에...
어린 아이가 사탕 사먹을꺼 아껴서 헌금내고, 기도하는 모습이 훨씬 아름답고 멋진 모습이 아닐런지요.
무슨 신앙얘기를 하는데, 갑자기 몰상식하데... 나보고...
자기도 몰상식하면서... 장난하나...

- 그런 어린 아이 나중에 커서 제대로 큰다면야 좋겠죠.
논리와 상식도 무시하는 라베뉴님 같은 사람만 되지 않는다면야 훨씬 아름답고 멋진 모습^^


>자신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티만 보시니...
참, 새로운 기독교 운동이 어딜 향해 나아가고 있는지... 참 암울하고 안타깝군요...
정강길, 파이팅~

- 별 걱정을 다해주시네요.^^
하지만 걱정안하셔도 돼여. 어차피 다들 잘 모이시니까요.

그리고 앞으론 글을 쓰시거나 주장하실 때 도대체 어디가 어떤 점이 그러한 지를
구체적이고 정합적인 근거에 기반해서 글을 쓰셨으면 하는 군요.
별 근거도 대지도 못하시면서 상대를 비난하시는 건 오히려 상대방에 대한 폭력이랍니다.OK?
다음 번엔 그렇게 쓰시는지는에 대해 다시 한 번 지켜봐드리죠.

그럼 감사~

손오공 (08-09-23 17:47)
 
재밌네요..근데, 왠지 언어의집에 갇혀 자기세계속에 놀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그 학문이, 그 똑똑함이 또 하나의 밝은 세계가 아닌 어둔 세계로 끌고 가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저는 정용섭목사님이 상당히 래디컬하다고 생각했는데, 여기와서 보니 완전 수구보수신앙인(?) 같네요^^ 빨리 제대로 예수님 믿고 구원받으시길 축복합니다^^ 역사적인 예수를, 실증적인 예수를, 플라톤철학을 극복한 기독교를 믿으면 정말 잘 믿는 것일까요? 그게 궁금하네요..그렇게 믿으면 세상이 달라질까요? 진정 하나님나라가 임하는 건가요? 무지해서 이렇게 여쭙고 싶네요...첫날 긴시간을 머무르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미선이 (08-09-24 05:28)
 
안녕하세요. 손오공님~
손오공님께서도 궁금하시다니까 그렇게 한 번 해보시면 될 듯 싶군요.
그런데 스스로도 무지하다고 얘기하면서도 쓰신 댓글을 보면
이미 온갖 판정할 건 다하고서 머무르다 가시는 것 같습니다.^^;;
근데 자기 소개를 보니 이곳에 전도하러 오셨다고 했는데 물론 저희로서도 얼마든지 환영입니다요~^^*

관리자 (08-12-17 07:25)
 
최근의 관련 글로는
[다비아 정용섭 목사의 신학에 대한 짧은 단상] 참조
http://freeview.org/bbs/tb.php/f001/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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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7 문창극 “일본의 식민지 지배는 하나님의 뜻” 망언 (2) 미선 3432 06-12
1116 대중의 눈높이에서 출발하는 새로운 진보 통합과 재편이 있어야.. 미선 3000 06-05
1115 찬란한 무지개는 비가 개인 후 모습을 드러낸다 (1) 대한인 3187 06-04
1114 4분면에서 보는 이번 세월호 참사 사건에 대한 복합적 원인들 미선 4484 05-19
1113 [펌] 몸·마음·눈으로 세월호를 겪은 8인이 말하는 ‘안전’ 미선 3691 05-15
1112 제1회 청소년 지방선거 투표 미선 3146 05-15
1111 의료민영화.영리화의 진실! (초간단 정리) 미선 14385 05-11
1110 박근혜 정부의 약속? 미선 3347 04-28
1109 불안 증폭 사회의 위험 국가.. (이번 세월호 사태를 보면서..) 미선 3238 04-22
1108 세모녀 복지촛불 집회 (동영상) 미선 3147 04-07
1107 무상의료 운동의 김종명님과 복지국가론자인 오건호님과의 대화 미선 3774 04-03
1106 깜놀~ 우리나라 무상급식 정책의 최초 제안자가 기본소득론자였다니.. 미선 3541 03-22
1105 '기본소득론' 특집 기사 [한겨레21] 2014.03.05 제1000호 미선 4424 03-05
1104 [펌] 세모녀 미선 3211 03-05
1103 [올해의 음반상] 윤영배 - 위험한 세계 미선 4524 03-01
1102 [서명] 주민등록번호를 넘어서 목적별 번호제로 바꾸자 / 신흥민 미선 3687 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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