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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형이상학의 역할을 무시하는 분들에게..    
  글쓴이 : 미선 날 짜 : 12-09-03 03:40 조회(5499)
   트랙백 주소 : http://freeview.org/bbs/tb.php/e001/112 




 
가끔 형이상학이란 용어에 대한 어감이나 평소의 불신 때문인지 그것이 왜 필요한지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을 접할 때가 종종 있다. 아마도 이들은 형이상학이란 것이 자칫 추상적인 사변놀음이 되는 것에 대해 나름대로 우려를 표명한 것으로 보인다. 나는 이들의 염려와 우려를 충분히 짐작함에도 불구하고 사물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그것이 불가피하게 요구될 수밖에 없는 없는 지점이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해두고자 한다.
 
예전에 뉴욕에서 문동환 박사님의 자택에서 얘기를 나누었을 때도 성서를 읽는 데 굳이 철학이 왜 필요하냐는 반문을 받은 바도 있긴 하다. 문동환 박사님의 자리가 아무래도 성서학자의 입장에 서 있기에 그러한 언급이 충분히 나올 수 있다고 보여진다. 그런데 우리가 성경의 창세기 1장 1절을 읽는다고 해보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 간단한 성서구절 하나를 해석할 때에도 형이상학은 부득이하게 개입되어질 수밖에 없다.
<태초>라는 개념이나 <하나님>이라는 용어 그리고 <천지>와 <창조> 등등
문장을 구성하는 단어에 대한 의미들 역시 제각각일 수 있다.
보수 기독교 신자가 이해하는 태초 개념과 하나님 개념은
이곳 몸학 기독교의 입장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언뜻 겉으로 보기에는 서로 같은 언어 표현으로서의 태초, 하나님, 천지, 창조 등등 용어 사용이 같지만
이러한 용어들을 저마다 개념화하고 해석해 낼 때는
성서를 읽는 그 사람의 세계와 존재 이해의 바탕 위에서 저러한 성서구절이 해석되어진다.
언어 자체가 이미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은 오늘날 학계에서도 거의 일반화된 상식에 속한다.
 
따라서 보수 근본주의자들이 알게 지니고 있는 궁극적인 세계와 존재 이해가 있을 것이며,
마찬가지로 그와 다른 입장을 지닌 세계와 존재 이해가 있을 것이다.
그러한 궁극적인 해석학적 원리로서의 지점이 형이상학에 해당된다.
보수 기독교인들과 다르게 유물론자들은 성서의 저 구절을 유물론적으로 해석할 것은 뻔하다.
 
각자가 세계와 존재를 어떻게 이해하고 바라보고 있느냐가 성서의 해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하물며 자신의 삶에는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겠는가. 가치관, 인생관 자체가 달라진다. 
 
형이상학이란 용어는 서양말로 Metaphysics이며, 이는 말뜻 그대로
Physics(자연과학)을 넘어서 있는 궁극적 지평에 대한 고찰을 뜻한다.
 
형이상학이 문제가 될 수밖에 없는 지점은 그러한 형이상학이
자연과학(이를 형이하학이라고 해도 좋을 듯)과 충돌하거나
현실의 경험을 제대로 설명해내지 못하고 어긋날 때 문제가 될 수 있으며,
그럴 경우에는 형이상학을 수정 또는 폐기처분해야 마땅할 것이다.
 
우리 삶의 모든 제반적 현실을 잘 설명해내는 유용한 형이상학이 있다면
그것은 해석학적 원리로 잘 기능할 수 있는 것이다.
 
혹자들은 형이상학을 강조하는 이들에 대해 토대주의자, 원리주의자 라며 비판할는지도 모르겠다.
철학사에서 논리실증주의자들이나 포스트모던 사상은 형이상학은 종말을 고했다고 보기에 혐오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들은 형이상학이 우리 몸의 현실에 있어 불가피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과
형이상학 자체가 실험 이성 위에 세워져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간과했던 것이다.
 
형이상학은 변하지 않는 원리나 토대를 터놓는 절대주의 담론의 영역이 아니라 오류를 만났을 때는
얼마든지 수정 또는 대체할 수 있는, 어디까지나 시험적 정식화의 영역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들은 형이상학의 바로 이러한 입장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질 않았었다.
근대 형이상학에 대한 반동이 형이상학 자체에 대한 불신과 혐오와 폐기로만 이어졌더 것이다.
 
인간은 사실을 관찰하고 기록하는 존재가 못된다.
이는 내 말이 아니라 자연을 관찰 탐구한다는 자연과학자들 스스로가 이를 언급할 정도다.
 
 
"나는 추측이 없이는 뛰어난 관찰도 독창적인 관찰도 없다는 것을 굳게 믿네"
 
- 찰스 다윈
 
 
"우리가 뭔가를 증명할 때는 논리를 가지고 한다.
그러나 뭔가를 발견할 때는 직관을 가지고 한다."
 
 - 앙리 푸앵카레
 
 
현대 과학자들은 우리의 사물 인식은 사물 그 자체를 반영하는 게 아니라
우리의 뇌의 투사 작용이라는 여과를 통해 사물을 인식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우리가 자연과학적 관찰을 한다고 하더라도 거기에는 추측, 직관이 개입되어질 수밖에 없다.
 
<과학적 발견의 패턴>이라는 유명한 저서를 썼던 노우드 러셀 핸슨 (Norwood Russell Hanson)은 말하길,
"'본다'는 것은 안구 운동 그 이상의 활동이다"라고 언급한 바 있다.
 
형이상학은 인간의 추리와 직관 및 상상력이 개입되어지는 활동을 인정하는 가운데
이를 통해 가장 정교한 체계로서 세계 안의 현실 사건들을 설명하려는 노력에 해당한다.
그렇기에 형이상학은 곧 <사변 철학>speculative philosophy이라고도 불리는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바로 이점에서 모든 학문에 있어 그리고 인간의 삶에 있어 문명에 있어
형이상학이 갖는 위치와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않을 경우
우리는 우리 자신의 현실을 온전히 해석낼 수 없다고 보았었다.
 
그는 사변철학에 대한 불신이야말로 그것을 맹신하는 것만큼이나
문명의 발전을 더디게 하거나 심각한 폐단과 해로움을 줄 수 있다고 보았었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의 제자인 버트란트 러셀과는 다른 철학적 모험을 감행한 것이다.
러셀의 논리적 원자론은 후에 논리 실증주의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지만
당시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적 입장은 당대에선 이해하기 힘든 소수의 길에 속했었다.
 
형이상학은 불신하는 자세도 맹신하는 자세도 둘 다 곤란하다.
그저 필연적인 도구적 한계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면서
자기 안에 알게모르게 스며들어 있는 <내 몸 안의 형이상학>을 분명하게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몸학에서는 이를 몸의 으로 명명하고 있다. 
그것은 인류와 문명이 지니고 있는 거대한 무의식적 심층에 속하는 지점이며,
이것이 인간 개개인의 심층 차원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참고로 몸학에서 M층은 심층에 속하며, B층은 표층에 속한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이 서양 문명 전체에 걸쳐 있으며,
데카르트의 형이상학이 서구 근대에 뿌리 깊은 영향을 끼쳤음은 말할나위 없는 사실이다.
유교의 형이상학이 조선 왕조 5백년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우리 삶에 뿌리 깊게 남아 있음은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그것은 알게 모르게 우리의 삶의 기초 토대로서 기능하며 많은 영향을 끼친다.
 
(아직 감이 잘 오질 않으신 분들은 이곳 동영상자료실 게시판에 있는 '동과서'라는 다큐를 꼭 보길 권한다.   )
 
불행하게도 대부분의 일반 사람들은 자기 안에 있는 몸의 M층을 온전히 자각하는 이는 매우 드물다.
평생 자각하지 못한 채로 생을 마감하기도 한다.
 
우리 몸안에서 작동되는 형이상학(M층)을 제대로 자각하지 못할 경우
우리는 당대의 조류들에 저도 모르게 휩쓸리게 되는 우를 범할 수 있다.
 
누군가의 말대로 "생각 없이 살면 사는대로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몸의 M층을 자각하는 것은 삶에 매우 중요한 일이다.
형이상학은 저 먼 곳의 사건이 아닌 내 몸 안에서 작동되고 있는 사건임을 충분히 인지하길 바라며
그것이 얼마나 우리의 몸삶 전반 곳곳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를 잘 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요즘 심리 상담에도 철학 상담이란 분야가 떠오르고 있기도 하다.
그것 역시 궁극적으로는 형이상학에 대한 교정 작업에 맞춰져 있다. 하지만 정작 철학 상담가들도
이 점을 매우 정확하게 인식하는 이들은 거의 드물다. 다만 생활에 철학적 응용을 수행하고자 하는 것이다.
 
몸학 상담의 경우는 몸의 M층(형이상학)을 명료하게 드러내서 보여주고자 하는 작업에 속한다.
형이상학의 역할을 무시한다면 이는 내 몸의 어느 한 층을 무시하거나 방관하는 일이 될 뿐이다.
 
인간은 물리적 존재이면서 동시에 정신적 존재에도 속한다. 그것들은 상호 영향을 끼친다.
마찬가지로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의 지평 역시 서로 상호 의존적이라는 점도 인지한다면
세계와 삶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형이상학의 역할을 결코 무시해선 안될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문제는 형이상학을 거부하느냐 안하느냐가 아니라
"어떤 형이상학이냐?"의 문제가 남아 있을 뿐이다.
 
유물론을 삶의 해석학적 원리로 삼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관념론을 살믜 해석학적 원리로 삼는 이들도 있다.
또 어떤 이는 불교의 형이상학을 삶의 해석학적 원리로 받아들이는 이가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이는 유교의 형이상학을 삶의 해석학적 원리로 받아들이는 이가 있다.
혹은 새로운 형이상학을 받아들여 이를 삶의 해석학적 원리로 삼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의 일반 사람들은 아예 자각하지 못한 채 방치되어 경우들이 훨씬 더 많다.
 
이는 소위 철학이나 인문학이 경제적 생존과 직접적 관련이 없다고 보는
인식과도 결부되어 있는 지점에 속한다. 그러나 알고 보면 그것들은
우리 삶의 많은 것들에 너무나 깊숙히 관여 되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을 뿐이다.
 
어쨌든 살아가면서 어떤 형이상학(철학)을 최종적으로 받아들이냐는
결국 본인의 자유에 속하겠지만 이왕이면
적어도 가장 우리 삶의 현실을 잘 설명하고 잘 적용시킬수 있는 형이상학을 받아들이길 권한다.
 
그리고 그것을 꼭 절대화할 필요는 없으며, 항상 수정 가능한 개방적 여지도 남겨둘 필요가 있겠다.
앞서 말했듯이 토대주의자나  원리주의자 역시 위험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끊임없이 자기가 현재 믿고 있는 바를 검증하며 오류를 통해 개선해나갈 필요 또한 있는 것이다.
 
물론 현재의 나의 경우에는 그것이 백두 철학이고,
이제는 이를 <몸학>이라는 사상으로 녹여내고 있는 중에 있다.
 
"그렇다면 당신의 몸은 현재 어떤 형이상학을 받아들이고 있는가?"
 
 
 
치노 (12-09-03 11:05)
 
형이상학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도 인문학 책은 아직도 서점에서 많이 팔리고 있죠. 어찌보면 대중들도 형이상학에 많이 목말라합니다. 그런데, 형이상학은 젊었을 때 한때 몰두하던 분야로 생각되는 게 약간 안타까울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대체적으로 형이상학에 몰두하는 사람이 현실을 무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아마 현실적인 사람들이 보기에 쓸데 없는 사상에 젓어 있다고 하나봅니다. 그러면서도 평생 형이상학에 몰두했던 부처님은 존경하고 있으니 아이러니합니다. 그런데 형이상학을 하는 사람도 현실을 충실히 살아가야 한다는 점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말에 '평범한 생활, 고상한 생각'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걸 무시하면 안 됩니다.

    
미선 (12-09-03 18:26)
 
결국은 어떤 형이상학이냐에 따라 다르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이에 기반된 보다 구체적인 정치 사회 문화 체제에 대한 신념들도 보다 뚜렷해질 필요 역시 있겠구요. 그럴 경우 평범한 생활이라는 것도 저마다 해석이 다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붓다나 예수가 평범한 생활을 했다고는 생각지 않으니까요.

        
치노 (12-09-06 13:59)
 
이 글이 형이상학에 사람들의 생각이니까, 말씀드립니다. 예수나 부처 같은 성인들만 형이상학을 하는 게 아닙니다. 평범한 저같은 범인도 형이상학을 추구하고 이런 사람이 몰라서 그렇지 주변에 적지 않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부처 같은 경우도, 처음에 고행을 많이 하다가 나중에는 고행이 쓸모 없음을 깨닫습니다. 부처가 몸을 회복하기 위해 여인의 우유를 받아 먹을 목격한 제자들은 부처를 배신자로 칭하고 떠납니다. 부처도 인간의 의식주는 인정했습니다. 결국 형이상학을 추구하는 인간도 물리적 환경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뜻이지요. 성직자가 되어 돈을 벌기 위해 일을 안하는 경우는 제외하겠습니다. 제 생각에는 성공, 부, 명예를 위해 자기의 인생을 올인하는 사람도 문제지만, 형이상학을 위해 가장 기본적인 생활도 무시하는 사람도 그 못지않게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스님도 자기 먹을 것은 농사지어서 먹고사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평범한 생활'이라는 말은 생존하기 위한 최소한의 여건을 약간 확장한 것입니다. 저는 평범한 사람의 형이상학과 일상의 공존을 애기한 것입니다.

            
미선 (12-09-06 17:43)
 
그렇습니다. 쓰신 글에 대해서는 저또한 충분히 동의할 수 있는 얘기들입니다.
다만 붓다와 예수의 형이상학과 일반인의 형이상학은 분명한 차이가 있다고 볼 뿐이죠. 말씀하신대로 생존의 여건을 약간 확장한 사람들의 형이상학을 통해 드러나는 생활은 평범한 생활일는지 모르나, 붓다와 예수의 형이상학을 통해 드러나는 생활은 그것과는 좀 다르지 않을까 싶습니다. 물론 저 역시 생존과 생활의 중요성을 굳이 부정할 필요 또한 없다고 봅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치노님의 의견에도 충분히 동의하는 바입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존의 빵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가치 있는 것도 있기에 이를 추구할 필요 역시 있다는 것일테죠. 어차피 이점 역시 치노님도 익히 잘 아실 것으로 봅니다. 어쨌든 바로 그렇기 때문에 결국은 앞서 말씀드렸듯이, 최종적으로는 어떤 형이상학이냐의 문제로 귀결될 수도 있다고 본 것이었습니다.
좋은 얘기 감사드립니다.

                
치노 (12-09-06 19:23)
 
사실, 우리 사회 대부분의 구성원은 알게모르게 성공 지향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그런 경향이 있습니다. 어짼튼 제 분야에서는 성공은 아니더라도 인정 받고 싶으니까요. 달과 육펜스의 주인공처럼 오직 '형이상학 또는 진리'를 위해서 자기 인생을 올인하는 사람은 거의 없지요. 목사, 스님, 대학의 교수 등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성공을 갈구합니다. 그래야 자본주의 사회에서 먹고 살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예수님이 옷 한벌로 평생을 사신 것처럼 아무리 자본주의 사회라도 성직자가 예수님처럼 살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습니다. 너무 무리한 요구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간단한 예를 들면, 고급외제승용차를 타는 목사는 비난할 수 있지만 소나타를 타는 목사를 비난한다면 공산주의가 아닌 이상 이것도 이상하지 않을까요? 요새는 기준을 어디에다 둘 지 모르겠습니다.

                    
미선 (12-09-07 07:57)
 
저는 그 기준이 우리가 믿는 예수라고 보는 것입니다. 다만 곧바로 예수처럼 살 수도 없는 노릇이기에 차근히 단계를 밟아가는 발달의 단계가 있다고 본 것이지요. 그리스도로 나아가는 영성수련 혹은 몸수행이 계속적으로 필요한 것일테죠.

새로운 영성론과 영성수련에 대해서는 http://freeview.org/bbs/tb.php/h001/37 참조.
발달론에 대해선 http://freeview.org/bbs/tb.php/h001/76 혹은 http://kosmomm.tistory.com/14 참조.
(*혹시 윗글을 안읽으신 다른 분들을 위해서라도 글을 남기는 것입니다.)

여튼 우리가 믿는 예수에게는 세계를 상향적으로 고양시키는 약자우선성의 치열한 습성이 있습니다. 그의 하나님나라 운동.. 그런 예수그리스도의 몸삶 혹은 예수의 하나님나라운동(예수운동)이야말로 그리스도인에게는 참다운 삶의 기준이 된다고 보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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